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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자음과모음 | 2025년 봄호(제64호)

내가 애쓰면 나의 타인이 되어줘

황유지 문학평론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대산창작기금을 수혜했다. 공동 산문집 『관내 여행자-되기』를 썼다.

1. 상처받을 가능성 있음 Vulnerability

 

  한 자리에 묶인 채로 일생을 살아가는 개는 어떻게 견딜 수 있는 걸까, 이사 온 뒤로 한 번도 갈지 않은 전구의 필라멘트는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냉해를 입은 고목 나무는 좀 더 견뎌줄까, 추운 날의 전동휠체어 배터리는 그가 집에 다다를 때까지 견딜 수 있을까, 길고양이는 어디서 이 겨울을 견디는 중일까. 그리고 사람은 불행을 얼마나 견딜 수 있나.

 겨울을 통과하며 우리는 모두 상처 입었다. 일상이 이토록 간단히 바스라질 수 있다는 사실, 그 취약성을 확인하며 새삼 우리라는 동그마한 단어를 떠올린 것은 한밤의 포고령과 아침의 참사 사이로 불쑥 머리를 내민 것이 이상스럽게도 타자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좀 더 쪼그라들고 부서진 세계의 항변인 듯 의 이야기들이 쏟아지는 와중에 다시금 불거지는 타인의 얼굴이 어째서 또 이렇게 불의로 와야만 했을까. 애도란 지속된다는 면에서 성공적인 애도나 애도의 완성 같은 것은 없고 그래서 애도는 이루어지는 것, 그러는 중인 것, 그러기 위해 진입하는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종결의 어감을 조금이라도 지우는 편이 애도가 필요한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조심성이라 여겨지지만, 그런 것을 논하기도 이전에 애도를 방해하는 께름칙한 인재들이 누적되는 가운데 밭게 맞닥뜨린 또 한 번의 사태와 사고는 생명과 존엄이라는 실존의 요구에 대해 얼마든지 상처받을(vulner=wound) 수 있음(ability)이라는 상처 가능성을 증명한다. 그건 곧 취약성이라 번역된다. 취약한 존재의 불안은 보편적 감각이지만 지나치면 우울이나 강박 같은 증상으로 확장된다. 불안이나 공포는 위협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하는 본능 발현의 기제이기도 하지만 초과한 불안감은 그 해소를 위해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어 안정을 되찾으려는 확인 이른바 강박행동에 몰두하도록 생명체를 몰아세운다. 강박행동이 강화되면 그 루틴을 지키느라 일상은 부서진다. 강박행동이라는 증상은 불안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희석하고자 하는 나름의 호르몬과 심리의 싸움이지만 그 행위를 들여다보면 복기라는 내용적 측면이 있다. 불과 찰나 전에 했던 행동에 대한 불신, 그 미덥지 못함은 수차례의 반복을 통해 불확신을 믿음 쪽으로 인지시키고 불안을 소거하려는 내용인 것이다. 불안의 강도를 조절하는 일은 꽤 중요하다. 그럼 뭘 해, 아무리 스스로 주의를 기울인다 한들 막을 수 없는 참혹함 앞에서 불안은 불길처럼 일어난다. 거기에 타인에 대한 죄책감과 사태에 대한 무력감은 불안을 한몫 더 부추긴다.

 어떤 이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돌아간다더라도 전과는 다르다. 그런 면에서 돌아갈 곳이 없다. 우리에게 믿을만한 것은 무엇인가? 느닷없이 중단되어 버린 삶들에 대한 애도가 나의 삶을 전과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희열을 뜻하는 Ectasyec-static, 즉 바깥에 놓인 상태로 어떤 정념으로 인해 자아가 제 바깥으로 이동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를 추동하는 정념에는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성적인 정열의 순간 외에도 슬픔이나 분노 또한 자아를 벗어나 자신의 옆에있게 하는 beside oneself의 기제가 된다. 자아가 자아를 벗어나 곁에 놓인다는 말은 그래서 제정신이 아닌상태로 풀이되지만 더불어 이탈한 자아가 놓이는 곳이 혹시 상실한 타인 혹은 상실을 겪은 타인의 곁은 아닐까 싶어 손바닥으로 더듬거려보게 된다. 그가 없고 나는 남아 보내지 못할 때 자아는 나를 벗어나 그의 곁으로나마 가 있는 것은 아닐까? 죽음 이후, 상실 이후는 내가 그와 연결되어 있었음을 침통한 방식으로 부조한다. 그의 이름이야말로 나의 타자, 타인이다. 내가 있는 곳이 내가 아닐 때 타인은 더욱 요구된다. 내가 내 안에 있을 수 없을 때 타인은 부쩍 확인된다. 내가 거기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타자 앞에서, 타자로 인해서 허물어진다.

 

2. 어차피 망했어, 그렇지만 (민병훈, 『금속성』, 문학실험실, 2024, 12)

 

 생의 기반이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불확실성의 조우 와중에 금속성은 그나마 쥐고 있는 것들을 좀 더 무너진 쪽으로 밀어붙인다. 이 소설은 어쩌면 ()’에 시작되는 듯하다. 폐품을 해체, 조립, 교환한다는 작업장과 폐선을 개조한 집은 철조망을 배경으로 놓여있다. ‘조수야하고 불리는 조수, 그가 데려온 개 팔콘과 함께 생활하는 는 한때 박물관에서 일했다. 박물관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옛날 컴퓨터나 기상시스템을 전시해놓은 곳이다. 고물상을 연상케 하는 작업장에서는 녹슨 쇠냄새가 진동하고 바퀴마저 탈락한 의족을 달고 두 발로만 기는 개에게서는 학대와 유기의 흔적이 짙다. ‘조수야로만 부를 따름이니 는 성립하지 않을 거고, 20세기의 핵심 부품들이 전시된 박물관이란 무언가 한바탕 휩쓸고 간 뒤의 풍경, 그러니까 때는 이미 망한 뒤이지 싶다. 이 살풍경은 작위감은커녕 온통 기시감으로 넘실댄다.

  ‘는 어쩐지 자꾸 어딘가 아픈데, 곁에는 죽음이 허다하다. 어린 시절 기르던 개도,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친구들도, 기차광 마르코도 죽었다. 닭이나 개는 더 쉽게 더 많이 죽는다. 마을의 축사는 텅 비기 일쑤고, 방호복과 마스크를 착용한 무리는 피, 기름, 뼈의 이미지로 정체 모를 무언가의 흔적을 쫓는다. 개를 귀엽게 만들기 위해, 크고 맛 좋은 돼지나 닭의 고기를 얻기 위해 혹은 더 큰 수익을 위해 적당히 병들게 동물을 개량하는 일1)그 후로 어떤 품종의 개들은 선천적 질병을 안고 태어나고 닭과 돼지는 바이러스에 취약한 채로 살다 먹히거나 생매장 되는 게 현실이다. 점프슈트를 입은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거기 있어 왔다. 의뢰인을 만나기 위해 찾아갔던 마을의 허름한 식당에서 사람들이 입가에 기름을 번들번들 묻혀가며 뜯고 있던 뼈에 붙은 고기는 무엇이었을까? 그 고기는 어떻게 죽은 동물의 살이었을까? ‘는 그마저도 동이 나 먹지 못한다. 그래서 는 그 고기가 무엇이었는지 끝까지 알지 못한다.

 ‘는 의뢰인들이 뭔가를 의뢰하면 출장을 가 처리하는데, 그 일이 무엇인지 독자는 알 수 없다. 모르기는 의뢰인도, 의뢰받은 도 마찬가지다. 그저 짐작할 뿐. 모호함은 이 소설의 주요 상태이면서 라는 존재의 불확실성을 부추기는 정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일례로 잇몸 동상이라는 진단은 그런 의 모호성과 포개져 전날 방문했던 치과에서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하고, 곤란한 상황은 의사가 를 기억해내면서 근근이 모면 되는 식이다. 병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의사, 누런 가래를 소맷부리며 손님용 의자에 묻히고 약을 조제하는 약사를 비롯해 이 소설은 미심쩍은 낌새들로 가득 차 있다. 의뢰인은 와 번번이 엇갈리고, 팔콘의 의족을 만들어준 기술자는 자신이 의뢰인이라고 하며, 꿈은 자주 꿈의 바깥으로 나와 텍스트를 흩트려 놓는다. 수치(數値)를 기록하는 조수가 읽어내는 게 왠지 수치(羞恥)로 읽히는 것이 그런 모호함의 체화가 수치(數値)로만 표면화되는 공무 앞에 존재를 옹색하게 만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무엇을 하는지 모르면서 자신에게 부여된 일을 반복, 맹목적으로 하는 데서 오는 자괴감일 터이나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태가 주는어쩔 수 없음이라는 수치심 말이다.

 이 불투명한 서사에 제법 선명한 실체 하나는 송전탑이다. 송전탑의 위용은 마치 소설의 중앙부에 높다랗게 드리워진 거대한 금속성의 신처럼 읽힌다. 그 저류의 공통 기억 때문일성싶은데, 어떤 의뢰는 분명 송전탑 꼭대기에 아직 사람이 올라서 있는지 확인해달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번개가 스친 뒤 물에 잠긴 채로, 영원히 녹슬지 않는 송전탑”(24) 아래 뒤집힌 채 허연 배를 내밀고 둥둥 떠 오르는 개구리의 사체만이 의뢰에 대한 답처럼 보인다.

 길은 자주 텅 비어 있지만 병원과 약국은 붐비는 곳,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거쳐 가고 난 뒤에는 피와 약품의 냄새가 진동하는 곳, 그런 즈음 사람들은 기름진 고기를 얼마든지 먹는 곳, 그곳은 우리의 삶과 얼마나 먼가?

 어떤 의미에서는 망한 게 틀림없는, 이미 멀리 와버린 인류세가 제 흔적으로 닭뼈와 플라스틱 말고도 남길 것이 있다면 금속성일 수도 있겠다. 화석연료가 일종의 희생 구역을 필연적으로 요한다는 것을 대척점에 놓을 때 금속성은 조금 달리 이야기될 수 있으려나? ‘어떻게의 문제가 전적으로 인간의 손에 달렸음을 박물관의 의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는 그것을 신통치 않은 안마의자라고 생각하지만 한 세기 전에 만들어졌다는 그 의자가 내게는 왠지 고문용 전기의자로 읽힌다. ‘금속성이라는 이 소설의 제목이 남은 시간에 대하여 일말의 가능성을 내포한다면 그것은 의사도 목수도 아닌 기술자가 팔콘에게 연결하는 의족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것이다. 송전탑과 함께 명징한 또 하나의 피사체가 바로 팔콘인데, 모든 이가 이름도 없이 그 고유성을 탈각한 채 살아가지만 팔콘에게는 이름이 있다(마르코는 이방인의 대명사쯤일 따름이고). 종국에 팔콘은 주기적으로 윤활유만 칠해주면 너끈한 새로운 의족과 금빛의 꼬리를 달게 된다. 팔콘은 매처럼 날 수 없지만 그는 애초 매가 아니었으니 척추의 연장일 유연하고 기다란 금빛 꼬리는 그에게 새로운 코어를 갖게 할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분명 상실된 팔콘의 육제성 앞에서 조수와 에게 돌올하게 떠오르던 그에 대한 사랑과 책임 그리고 금속성-팔콘 사이의 횡단이었다.

 ‘도 이전에 감전 사고로 잠시 몸을 잃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몸에 대해 고심했던 적은 그때가 유일하다”(97)는 고백처럼 우리가 몸을 의식하는 순간은 몸이 손상되어 제 모습이나 기능을 상실한 때 아니면 타인을 마주할 때이다. 몸을 단장하는 것은 몸이 타인에게 노출됨을 전제하는 익숙한 매만짐이다. 그러니까 몸은 실추됨으로써 타자성을 일깨우는 자리이면서 타인과 연결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공적 차원에서의 몸은 우리의 취약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면서 연결의 감각을 일깨우는 셈이다.

 더이상의 증식과 확장을 멈춘 도시, 병든 사람과 동물 들, 목적이 불분명한 검문과 감시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 잃어가는 것, 잃을 것이 분명한 것의 후경이다. 어떤 면에서는 어차피 망한 게 분명한 이 마당에, 그럼에도 우리의 취약성은 연결에 대한 명분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팔콘과 같은 존재가 오래 감수했던 타자성은 공생이라는 그런 가로지름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다정한 타인으로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3. 불행을 지우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서 (김채원, 『서울 오아시스』, 문학과지성사, 2025, 1)

 

 주디스 버틀러는 애도에 대해, 특히 에 대한 애착이 의 일부를 구성하는 관계에서라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너 없이 나는 누구로 존재하는가?” 상실 이후 비로소 융기하는 그 대상과의 연결성을 통해 애도에 더해 나는 자신에 대해서마저 이해 불능의 존재가 됨을 말하는 이 질문에 김채원의 서울 오아시스를 놓아본다.2) 그건 질문의 답으로 이 소설집이 놓인다기보다 차라리 소설에 대한 답이 저 질문인 듯 보인다는 뜻이다.

 이 소설집은 죽음 뒤에 남겨진 사람들, 어머니, 친구, 딸이 죽거나 자신의 (실패한) 죽음 뒤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소묘한다. 등단작인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는 그 자체 애도와 애도 불가능 사이를 맴맴 도는 서사이지만 작품들은 대체로 그 불가능성 쪽에 무게중심을 놓는다. 이들의 애도는 어째서 불가능한가? 애도가 일정부분 공적 차원의 형식을 전제한다고 할 때, 가능한 애도는 공적 삶의 내부에 존재함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무연고자의 애도는 절차에서부터 가로막힌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꾸어 물을 수 있다. 애도가 가능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 여기서 끌고 갈 것은 그러한 삶의 경계와 그 경계의 밖에 놓이는 결락의 삶들이다. 이 소설집에 그 결락들이 있다.  

 자살하려 한 적도 있지만 학점을 따고 졸업도 하려고 마음먹던 그러나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채로 공원의 햇살 속을 걸어가던 쓸 수 있는 대답의 인물 유림의 부고에 교정시설에서 만난 친구들이 그의 짐을 정리하러 가는 여정인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에는 이 소설집이 김채원스러운것이게끔 하는 요소들이 촘촘히 엎드려 있다. 소설은 내내 길 위에 있다. 아이들은 누군가 예약해 놓은 우버 택시를 가로채 타고 길에 놓인 공유 자전거도 타고 땀을 흘리며 걷기도 하면서 그렇게 빙빙 돈다.

 한편 저 현관 앞의 수국은 현관을 막아서고 있는데, 현관으로의 진입은 이들에게 요원하기만 해 보인다. 흰국화가 아닌 수국은 약속된 제의와는 조금은 동떨어져 놓여있는 듯하다. 수국이 불두화를 닮았음을 떠올린다면 이들의 이 어떤 생으로 거듭날 것인가 기대해봄직도 하지만 언제까지고 바깥에 놓인 이들의 궤도 진입은 가능한 걸까? 소설의 결말부에 다다라 피 터지게 맞는 사람의 모습을 멀거니 구경하는 것이나 시의 다음 구절을 태워버리는 아이의 모습은 각각 약화된 형태의 죽음과 제의라는 표상처럼 보인다. 유림의 동생에게서 걸려 온 언제 올 거냐는 전화는 애도의 시간마저도 지극히 빠듯하기만 하다는 듯한 재촉이니, 채 받아들이지도 못한 죽음이란 실재 앞에서 이들의 애도는 가능하기나 한 걸까?  

 김채원의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건 유기의 감각이다. 이들은 모두 남겨진존재로, 어쩐지 죔쇠가 필요해 보인다. 세계로부터 영 헐거워진 듯 상실 뒤에 남은 이들은, 퇴행하거나(「영원 없이」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 갑자기 늙어버리고(「외출」), 소멸해 버림으로써(「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 되레 유기감을 강화한다. 그런 면에서 이걸 적극적인 유기라고 말해도 된다면, 이들은 유기되기를 원치는 않았으나 이른바 정상적애도에 애초 실패함으로써 자신을 적극적으로 유기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특히 인물들의 이런 유기감은 작가의 서술 기법에 의해 더욱 핍진해진다. 약속된 문법의 파기라기보다는 마땅히 예견된 인식의 수순을 폐기하는 것에 가까운 서술은 울퉁불퉁한 의식과 순서를 뭉개고 빗겨나가는 대화(의 단절)를 수고스러우리만치 옮겨적는다. 그것은 의식의 내부와 외부 사이를 무람없이 넘나들고 때로는 의지적으로 중단하는 식인데, 상징계의 약속과 예단을 스스로 비켜가는 이런 방식은 모성의 부재, 혈육의 상실 즉 타인의 소멸이 자신의 육체 어디쯤을 소실한 것과 동일한 효과로써 증명되는 유기의 증상이랄 수 있겠다. 해서 대체로 말은 늦되고 정신은 종종 엉킨다. 번번이 코드화되지 않는 이들의 말, 얼키설키한 의식을 따라가다 보면 최소한의 일상조차 움켜쥐지 못하고 멀겋게 앓는 심로를 짐작게 된다.

 타인에게 말을 거는 일이 도덕적 구속력으로 연결된다고 할 때 이러한 정상적 언어(이자 인식)의 순서 폐기란 어쩌면 외부와의 연결을 끊고 가장 근본적인 ’, 지금은 상실한 타인이 알던 그때의 로 남겠다는 올올한 선택은 아닐는지. 언어가 욕망의 잔여물이라면 이들은 스스로 생존이라는 최소한의 욕망조차 방기해 버린 것은 아닐는지. 해야 할 말조차 묵음 처리함으로써 통상의 질서가 포섭할 수 없는 쪽에서 애도의 다른 가능성을 열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생각해보게 되는 건, 인물들이 애초에 바깥에 놓여있었다는 점과 함께 어떤 정상성으로는 이 인물들의 곁에 결코 다다를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서울 오아시스의 가족들, 그러니까 정신병을 오래 앓은 엄마와 내게 어떤 사람은 건강하지 않고도 오래 살 수 있다”(71)고 알려준 실종된 외삼촌, 그런 가계의 불행을 견뎌내며 나쁜 일이 생기면 이사를 가버리는 이웃들과 달리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 일도 안 생겼으니까”(78) 이사를 갈 필요는 없다며 독주를 들이켜는 할아버지의 사정 같은 것은 소위 정상성의 문법으로는 읽어내기 요원하다. 그렇다면 작가는 인물들에게 그렇게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어도 된다고, 정해진 애도의 기간이란 누구도 알 수 없으니 그렇게 생각을 흘려보내고 여기서 저기로 건너뛰고 괄호치고 흩어놓아도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상적인 삶에 대한 요구도(한 번도 그래본 적 없으므로), 애도의 기간을 설정해두는 것도(애도를 끝내고 정상적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므로) 이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로 성립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감히 예단하거나 넘겨짚기 불가한 그 흐름에 자리를 내어줌으로써 어쩌면 불행을 견디는 것이 삶의 전부인 이들을 그대로 놓아두기, 이들의 곁에 있어주기를 택한 것은 아닐지, 그들의 (기한을 가늠할 수 없는) 복기를 함께 반복하는 것, 그것이 김채원이 타인에게 말을 거는 법이 아닐지, 짐작해 본다.  

 

4. 최악과 차악 (안보윤,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 현대문학, 2024, 10)

 

 정상성이 통치의 수단이고 규범의 준거라고 할 때 삶의 많은 부분들이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적 차원에 회부된다는 사실은 문득 새삼스럽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모종의 감각으로 자신을 통제한다. 불안에 대한 서두의 언급도 그런 차원이지만 감각은 생의 균형을 위해 끊임없이 작동한다. 그런데 이 감각의 균형이란 애초에 어떤 조건 안에서 작동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건 반드시 선한 쪽으로 움직이는가?

 수미는 수영과 한 살 터울의 자매다. 언니라는 말 대신 수미년이 입에 붙을 만큼 수영에게 수미란 존재는 절대 악이다. 말간 얼굴로 어른을 제 손바닥 위에 놓고 조물락댈 수 있는 맹랑한 아이였던 수미는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여느 아이들처럼 떼를 쓰는 대신 폭력으로 표한다. 물건을 부수고 극단적으로 험한 말을 하는 어린 수미의 문제 행동 앞에 부모는 절절매며 더욱 그를 사랑으로만 품으려 한다. 그럴 때마다 자연스레 수영의 자리는 물려 진다. 순한 양처럼 굴지 않으면 안 된다. 집에 아픈 아이가 있거나 문제 행동을 하는 아이가 있으면 미연에 그런 말을 듣는다. 너까지 이러면 엄마 못산다고.

 수영의 삶은 늘 견디는 것이었다. 수미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터에서도 그랬다. “존중받고 싶어 하는 나를,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나를 기를 쓰고 찍어 눌러야 했”(115)던 것이다. 수미에게 제 삶을 도난당했다고 여기기에 죽음은 선수 치리라, 죽는 일만큼은 수미년을 앞지르리라는 수영의 결심으로 소설은 열리지만, 이번에도 수미가 한 발 날래다. 그 시각 전화 통화를 했고 일상적인 말들을 주고받았다는 알리바이를 위해 수영을 호출한 수미는 요양병원에 일하면서 노인들의 죽음에 협조하거나 죽음을 방치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수영이 일하게 된 노견 돌봄센터는 동물병원과 더불어 운영되며 24시간 의사가 상주하는 고급 호스피스 시설이다. ‘절박한 사람만 고용하는 우 원장은 인간 기저의 이중적인 심리를 기민하게 자본화하여 자신의 부로 환원할 줄 아는 인물이다. 병든 동물을 끝까지 돌보고 싶지만 사정이 부치면 빠른 이별을 바랄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심리 같은 것 말이다. 우 원장의 병원에서는 보호자의 발길이 뜸해지거나 보호자가 비용을 염려하는 때에 딱딱 맞춰 개들이 죽는다. 개의 가족, 보호자들은 내 품에서 아이를 보냈다는 사실에 위로 내지는 감동을 받지만 실은 적당한 때에 안락사를 감행함으로써 보호자의 부담을 덜고 자신의 수익 기반을 안정적으로 다지는 우 원장의 치밀한 계산이 만들어내는 마법의 순간이다.

 빠른 유속의 이 소설은 그러나 곳곳에 감속 구간을 배치한다. 수미의 숱한 악행 가운데는 수영을 구제한 일도 있는데, 캠핑장 숲길에서 낯선 남자에게 니쁜 일을 당할 뻔한 수영을 구하고 수영이 남자에게 위해를 가한 것을 비밀에 부치고 덮어준 일, 수영이 급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수영의 뺨을 연달아 갈겨서 어쭙잖게 수영을 해코지하던 아이들을 질려버리게 만들어버린 일 같은 것들이다. 그러니까 으로 보이는 수미의 기행들은 모두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거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소통이자 장치로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는 셈이고, 그 정당성은 전능감을 내면화한다. 그런 수미가 요양병원에서 노인들의 죽음에 동조한 것이다.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 답을 내릴 때쯤 자신을 피해자의 자리에만 위치시켰던 수영에게 질문은 날아든다. 종양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 곧 태풍의 죽음을 당기는 일임을 모르지 않기에 손끝에 느껴지는 악성 종양을 외면한 수영의 마음은 피를 쏟으며 죽은 태풍의 병을 알고도 방치했다는 업무상 과실 혐의에 대치된다.  

 살 권리와 죽을 권리는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가? 오로지 자신만이 제 삶과 죽음의 주체라면 비루하고 고통받는 삶에 대한 결정이나 행위가 불가한 이에게 삶은, 죽음은 어떤 것이어야 하나? 이럴 때 어느 어떤 것이 더 폭력에 가까이 있는가?  

 수영은 끝내 제 삶을 구제하는 쪽으로 선회하지만 갇히고 묶여 연명하는 노인, 병들고 지친 채 온몸에 분변을 바르고 피를 쏟으며 간신히 생을 유지하는 동물에게 보호자는 생명의 결정권자와 동의어인가? 그들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조력해야 옳은가. 이를테면 이런 경우. 수영의 할머니에게 비녀는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상징물이자 사회적 자아의 표상이기도 했고 정정한 날의 추억이 깃든 정서적이고 감각적 차원의 것이기도 했다. 그런 할머니의 쪽머리는 본인의 의사와 아무 관계도 없이 요양원 입소와 함께 싹둑 잘려 나간다. 관리의 편리와 비녀의 위험성 때문인데, 이럴 때 할머니의 권리가 공공의 안전 앞에 삭제되는 것이 마냥 옳기만 한 것이라면 인간은 병든 이후의 삶을 어떻게 견뎌내야 한단 말인가.

 세상 모든 곳에는 전수미가 있다. 전수미는 전수미로만 있는 게 아니라 전수영의 일부, 전수영과의 모의, 전수영이 품고는 있던 것들의 투사이기도 하다. 사람은 어떤 악의를 없애거나 다스리며 산다. 악은 특별하지도 않고 누구나 조금씩 갖고 있다가 때로 불툭거리며 크기를 키워나가거나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일기장에 쓰기도 하는 것이다, 수영이 그런 것처럼. 악은 선이 아니므로 악에 대한 입장은 단호하게 정리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뒤집어 물을 때 선에 대해서라면 그 답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떤 것이 선인가? 어떤 돌봄과 보호는 악의 얼굴 쪽으로 좀 더 기운 것도 같다. 어떤 선은 최악은 아니지만 차악을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5. 들킬지도 몰라 불온함 (전지영, 『타운하우스』, 창비, 2024, 12)

 

 안보윤의 폭력에 대한 감각이 물리적인 폭력에 겹쳐 배제와 그 권리에 대해 묻는 것이라면, 전지영의 소설은 관계와 구조 속에서 은폐되는 폭력 위에 설립한 삶 혹은 폭력 이후의 삶에 대해 말한다. 공간을 중요시 여긴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의 소설들은 독자가 위계의 구조라는 밑그림을 먼저 그려두도록 공간을 직조한다. 구조에 대한 이런 감각은 타자성을 더욱 벼리게 제시할만한 장소로 제공된다. 은폐한 진실이 언제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한 번도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지만 잇자국으로 드러나는 쥐(「」), 태풍을 몰고 오는 섬의 돌풍과 낙뢰(「말의 눈」), 저수지의 음험함과 사격장의 총소리(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 어시장의 비린내와 척척한 물기(「맹점」), 물질적 풍요 뒤에 숨겨진 히스테리(「소리 소문 없이」)와 같은 오감을 건드리는 장치와 함께 안온한 생활이 언제 깨어질지 모른다는 긴박감을 몰아온다.

 작가가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공간에 더해 불안을 부추기는 효과들이 쥐락펴락하는 것은 불온한 진실의 맨얼굴이다. 자녀가 학교폭력의 피해자일 때 학교 측의 미온적 태도와 가해 학생들의 뻔뻔함에 상처 입고 딸과 함께 제주의 타운하우스로 이사한 수연 앞에 학교폭력은 또 한 번 전혀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구도로 삽시간에 전환되며 수연은 자신의 딸을 위해 증언을 요청하는 지희를 외면한다. 섬의 생리와 무관하게 지은 타운하우스의 지붕으로는 빗물이 흘러들어 집안에 차오르고 돌풍과 낙뢰에 전문기사도 손을 쓸 수가 없는 마당에 지희는 치마를 동여매고 지붕을 오르고, 이내 추락하고 만다. 지붕에서 내려오면 지희는 수연에게 증언을 강요할 거였다. 순간 수연이 바란 것은 이대로 지희가 깨어나지 않는 것. 전지영은 바로 이 순간을 잡아챈다. 인간이라는 수면 아래 잔잔하게 깔린 숱한 얼굴들 중 우리가 차마 밖으로 내놓지 못하는 표정과 감정, 그 부박함을 작가는 낚아올린다.  

 그런가 하면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에는 사격장과 저수지라는 공간이 세워진다. 혜경과 윤석 부부는 데면데면하게 지낸 지 오랜데, 서로를 눈치껏 빗겨가려 애쓰는 중이다. 혜경은 남편의 무심함에 아들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죄책감을 투사해왔던 것이다.

 사격장은 윤석이 공무원 재직 당시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치한 것이었는데 실종된 아들이 저수지가 범람하고 주검으로 발견될 때도 그는 사격장 건립 문제로 회의 중이었다. 윤석은 그 나름대로 사격장 건립을 추진한 시장을 원망해 그의 불행을 기도해가며 간신히 견뎌내는 중이다.  

 사격장의 총소리와 탄약 냄새는 집의 안팎을 둘러싸며 여전히 거기 있는 컴컴한 정주못과 함께 이 부부의 잠잠한 일상을 언제든 깨트릴 수 있을 것처럼 에워싼다. 그러다 시장이 실종되고 그가 저수지에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수사의 가닥이 잡히자 윤석은 갑작스레 무엇이 툭 끊어지는 기분을 느낀다. 용서할 수 없었던 건 바로 자기 자신일 테니까. 대타자의 소멸로 부부는 비로소 졸은 청국장에 밥을 비벼 먹고 커피를 채워주고 마시는 일상으로 조금씩 되돌아올 기미를 보인다. 사람은 때로 불행을 그런 식으로 견디기도 하는 모양이다.

 부자 동네 청한동을 배경으로 높은 성벽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청한동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하는 사람들을 대비시키는 언캐니 밸리에서 왜소증을 가진 크로키작가이자 택시 기사는 당신이 염산 테러를 당하자 의심을 사 경찰의 조사를 받는다. 그녀는 왜소증의 사내가 기괴하다고 표현했지만, 사내가 생각할 적에 여자를 의자에 앉혀놓고 몇 시간 동안 관찰한다는 노부부가 더 수상쩍고 기괴하다. 넘치도록 가진 노인들의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은 끝내 어떤 얼굴로 드러났을까? 140cm의 키로 높은 담벼락을 기어오르는 왜소증 사내를 줌아웃하는 결말은 그가 작아서가 아니라 그와 대비되는 담벼락만큼 쌓였을 집 내부에 들어찬 비밀의 크기 때문에 잔뜩 기괴해진다. 누가 누구에게 언캐니한가?      

 전지영의 소설들은 인간의 치졸을, 비열을, 낯 뜨거운 찌질함을 솥에서 푹 삶은 고깃덩이를 꺼내 도마 위에 부려놓듯 불쑥 꺼내놓는다. 썰어주면 잘만 먹을 거면서 징그럽다며 찌푸리지 말란 듯이 태연하게. 예술을 한다면서 돈과 재능 그 둘을 다 가지고 있거나 둘 중 어느 쪽이든 가진 이는 어떻게든 성공한다. 그런데 어느 쪽도 가지지 않았다면? 음해라도 해서 누군가를 망가뜨리고 싶은 마음은 뼈와 살」, 「소리 소문 없이에서 한 존재를 삭제해버리거나 없는 진실을 만들어내 사실로 만들고 만다 기어이. 그런 날조의 사실들은 인간의 작은 열등감에서 기인하고, 그건 자기 보호라는 엉성하고 얄팍한 난막에 감싸여 있다. 전지영은 그 막을 대차게 찢어서 눈앞에 들이대며 마주 보게 한다. 말의 검은 눈에 비친 것이 누구의 얼굴인지, 누구를 향한 원망인지, 진실은 어쩌면 처음부터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불을 활활 질러서라도 거기에 쥐가 있는지 확인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쥐의 잇자국과 소리와 낌새는 우리를 쫓아올 테니까.

 

6. 바늘은 구멍을 가로지른다 (안윤, 『모린』, 문학동네, 2024, 11)

 

 관계나 사랑이 를 읽는 터이듯, 타자의 감정 역시 나 없이는 성립 불가하다는 점에서 타인은 나의 필요충분이다. 안윤의 소설집은 나란히 양립하는 관계, 사랑이 비로소 시작되는 느리고 꼼꼼한 이야기들로 바느질되어 있다.

 표제작 모린은 영은과 미란의 사랑을 그려낸다. 콜센터에서 일하는 미란은 감정적으로 늘 부대끼면서 낭독 봉사에서 만난 시각 장애인 영은과 찬찬한 사랑에 빠진다. 여기에 낭독용 텍스트인 요제프 코발스키의 산문 보이지 않는 것들가 나란히 놓인다. 후천적으로 시각을 잃고 피아노 조율사로 일하면서 평생을 독신으로 산 그는 피아노 줄과 밧줄을 엮은 끈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모린은 요제프가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의 생활은 하숙집 아들 조지가 도왔는데 산문집을 출간한 것도 조지였다. 이 텍스트는 세상 어딘가에 있는 실화를 초과하여 존재한다. 그래서 더욱 귀한 텍스트 보이지 않는 것들모린과 조밀히 넘나든다. 돌봄을 사랑으로 여겼다는 선주의 고백은 장애에 대한 배려가 어쩌면 영은의 정체성을 장애에 두는 선민이었음에 대한 후회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랑이 꼭 옳지 않기만 할까? 요제프와 조지의 우정 역시 지극히 순수한 사랑의 형태일 수 있을 것인데, 마지막 순간에 조지를 위해 콘플레이크 상자를 찢어 사랑하는 조지, 절대 들어오지 말고 경찰을 부르거라”(27)고 힘겹게 쓴 요제프의 마음은 배려와 우정의 모양새를 한 따듯한 사랑일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이전의 세계와 뚝 끊어짐을, 그리하여 넘어감을 통해 두 번째가 아닌 세 번째의 세계로 진입함을. 자신의 팔꿈치를 내어주고 미란을 믿겠다는, 영은의 팔꿈치를 가만히 쥐는 두 사람의 사랑은 비로소 시작되지만 어쩐지 오래 뜨듯할 것 같은 뭉근한 이 마음은 두 개의 선을 연결하여 제 삶을 끊어냄으로써 세 번째의 세계로 건너간 요제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 대한 유일했던 태도와 겹치며 묵직하게 내려 앉는다.  

 「담담은 내밀한 타인과의 단절을 겪은 이들이 한 번의 보챔도 없이 서서히 연결되며 다시 서로의 타인으로 구성되는 미덕을 보여준다. 소개팅 자리에서 자신의 양성애 성향을 고백하는 혜재에게 그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가요?”(100)라고 묻는 은석은 한동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유가족이었노라 고백한다. 그러고 보면 정체성을 지나치게 성적 취향을 기준으로 두기도 하는 듯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또 그렇지만도 않아서 은석의 경우와 같은 유가족, 장애를 가진 이들은 그 자체가 정체성이 되는데, 이런 정체화의 실체는 공통적으로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남 그 특이성을 지목한다는 점에서 퍽 사려 깊지 못하다. 정체성은 내가 나를 규정하기보다 외부가 나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 이름표를 붙여주는 몹시 성급하고 거친 방식인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은석과 혜재의 담담한 사랑의 맛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어려운 형태일지도.

 스스로 자신의 한때와 이별하는 하지나 고모의 딸과 친구의 남편이 불륜이 되어버리자 가족과 친구 양쪽애서 떨어져나와 버린 은 깨어짐과 봉합이 따로 있지 않음을, 어리고 가난한 사랑의 미장센 작은 눈덩이 하나와 전세 사기로 죽음을 택한 남자친구의 기억에 겹치는 후배의 전세 사기에 마음을 쓰는 ,」는 타인의 불행에 냉담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써 내려간 이야기다.

 안윤의 소설은 하나같이 맞은편을 바라본다. 편편이 까물까물 아득하게 마음을 쓰다듬지만 핀홀은 단연 타인의 이름을 내 곁으로 당겨 부르고 함께 앓게 한다. 보라는 안정감을 주는 승원의 성격과 그 부모의 다정함이 부럽다. 그들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여기는데 자신이 재혼가정에서 자랐음을 차마 고백하지 못해 괴롭다. 이들의 일상은 승원이 피하기만 하던 경진의 전화를 보라가 받으면서 조금씩 구멍을 보인다.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진은 중증장애인 시설에 거주하던 정원의 사망을 알려오는데, 정원은 승원의 형이고 삼십일 년간 시설을 전전하며 생활했다고 했다. 그는 시설에서 나가 독립하고 싶어 했지만 절차상 필수인 부모의 동의가 여의치 않자 장애인인권운동가와의 접촉을 통해 탈시설을 계획하던 중 낙상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승원과 부모의 안정감이 숨긴 비밀, 정원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거길 나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네가 살 곳은 거기라고”(81) 탈시설을 반대한 부모님. 그들의 안정감의 비밀은 그것이었다. 구멍을 막고 처음부터 없었던 듯 태연하게 살아내는 것. 정원의 죽음이 석연치 않음에도 부모는 일을 키우고 싶지 않다며 끝내 부검을 반대하고 승원은 거기에 순하게 동조한다. 결국 정원의 인터뷰 영상과 그가 쓴 시는 보라가 인수하게 된다. 정원의 을 인수한다는 것은, 가족에 의해 삭제되고 사회에서도 영영 지워질 뻔한 한 존재를 인수한 것이나 다름 없다.  

 보라의 할머니는 그런 말을 했다. “이쪽에 하나, 다른 쪽에 하나. 각각 구멍이 있어야 무엇이든 이을 수 있다고”(88) 찢어진 것들을 이어 붙이려면 바느질을 해야 하고 바늘이 통과하려면 구멍이 필요하다. 안윤은 그런 사랑을 천천히 기워낸다. 안윤의 소설에서 사랑을 배운다. 그 가로지름의 다양한 단서와 모양들이 느리고 단단한 물결의 질감을 하고 이쪽으로 건너온다.

 

7. 봉합할 가능성 있음

 

 마거릿 애트우드의 흰 말」3)에는 흰 말이 등장한다. 술에 절어 사는 농장주로부터 방치되었던 흰 말은 다정한 부부의 지극한 돌봄을 받고 건강을 회복한다. 부부와 함께 삶을 지속하던 흰 말 글레이디스는 하룻 저녁 소동에 자극을 받고 농장을 뛰쳐나간다. 글레이디스는 제 힘껏 달리다 차에 치이고 만다.

 글레이디스는 그렇게 죽었다. 그런데 그가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을까? 사람의 손길에 살을 찌우고 빗질을 받으며 때로 손님을 태우고 살던 때일까 아니면 힘껏 달리던 질주의 마지막 순간일까? 사랑은 무엇일까? 내가 견디기 위해서 하는 것인가, 그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인가? 또 보호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순치하여 발아래 묶어두는 것인가, 위험으로부터 차단하여 생명을 유지하게끔 하는 것인가?

 우리의 감각은 타자의 존재를 재빨리 알아챈다. 마당에서 기르는 개에게는 되도록 줄을 길게 묶어주고 자주 쓰다듬어 주어야 한다. 한겨울에는 수돗물을 미리 받아두었다 찬 기를 식혀 햇살이 대지를 데울만한 때에 고목 나무에 뿌려주는 게 좋다. 전동휠체어가 길 위에서 느닷없이 멈춰서지 않으려면 배터리를 미리 충전해두어야 한다. 산책로 곳곳에 집을 만들어 비닐을 씌우고 헌옷가지를 깐 잠자리와 보온 주머니를 둘러싸 얼지 않을 물그릇을 마련해 주는 손길이 길고양이를 살리듯, 슬픔을 통과하는 중에는 등을 쓸어주는 염려가 필요하다. 아침에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고 며칠 전 메시지를 나눈 친구가 영영 돌아올 수 없다고 할 때, 또다시 과거의 끔찍한 장면이 반복돼 트라우마를 건드릴 때도 견딜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함께 겪고 있다는 단 하나의 사실에 기대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슬픔은 타자에 대한 감각 수용 반응의 일종이기도 하다. 들떠서 여행길에 오른 사람들과 사고의 순간을 내용으로 하는 초등학교 2학년 조카가 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사람들은 아주 가만히 눈을 감았지였다. 그는 시를 쓰는 동안 사람들의 감정을 헤아리고 죽음의 순간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그 순간이 그가 타인에게 몰입한 때, 타인이란 존재를 체현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때로 상실했지만 끝내 끊어내지 못한 것들로 나를 채워가기도 한다. 그것이 이른바 우울증적 정체성이겠지만, 나의 일부가 거기에 건너가 있다는 면에서 우울은 필요하기도 하다. 내가 나를 위해, 타인을 위해 애쓰는 순간 나의 타인들도 서로의 곁으로 건너와 주리라는 범박하고 느슨한 믿음이 어쩌면 우리의 취약성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하고 변치 않는 명제가 아닐까. 이 글을 함께 읽는 봄이 크게 달라지기야 하겠냐만 그럼에도 우리가 서로 구멍 사이를 가로질러 서서히 당겨지는 중이라면 어떨까. 내가 더딘 바느질의 한 땀을 뜨려 애쓸 때 나의 타인이 되어주길, 그렇게 봉합할 가능성을 우리는 서로 알아보길. 그렇게 우리 서로에게 가장 다정한 방식으로 무심한 타인이 되길.
  • 1) 산업이 발견한 진짜 혁명은 병든 동물이 더 돈이 된다는 것이다. 천연의 동물들과 달리 인간이 개량한 동물은 항생제니 유기농이나 방목이니 해봤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산업 동물이다. 사람들은 그런 동물을 먹고 사는 셈이다. 조너선 사프란 모어,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송은주 옮김, 민음사, 2011, 146-150.
  • 2)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애도의 힘과 폭력』, 필로소피, 2018.
  • 3) 마거릿 애트우드, 『도덕적 혼란』, 차은정 옮김, 민음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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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희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창비, 2024)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계간 문학인 전철희 민족문학저항역사문학사세계문학 2025
고봉준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고봉준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월간 현대시 고봉준 연민공생생명비인간자연관계 2025
류수연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 양안다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와 양안다의 사이, 그 틈 류수연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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