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파란 2025년 봄호(제36호)
천의 얼굴로 일렁이는 “정든 유곽”의 빛다발 ― 이성복 『서시』
천의 얼굴로 일렁이는 “정든 유곽”의 빛다발
- 이성복의 「서시」 읽기
1
스물 언저리를 청춘의 열꽃으로 신음했던 사람이라면, 이성복 시집 『남해 금산』이 괴로움과 깨달음이 겹쳐 울리는 “물결무늬 자국”으로 번득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단번에 알아챌 수 있으리라.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오래 고통 받는 사람은」, 『남해 금산』)가 선명하게 일러주듯, 단 한 번이라도 남해의 바닷길을 에돌아 금산의 ‘해수관세음보살상’에 이르러 두 손 모아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보리암 앞으로 펼쳐진 다도해의 풍광과 ‘해조음(海潮音)’이 우리 모두에게 건넸을 저 깊고 깊은 삼매(三昧)의 소리를. 낙산사 홍련암, 강화 보문사와 더불어 남해 보리암이 ‘한국의 관음 3대 성지’로 자리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와 맥락을. 마치 숲을 이루듯 빽빽하게 늘어선 섬들의 행렬 사이로 어지러이 펄럭이는 무량한 풍파를 듣고 다시 또 듣는다는 ‘해수관음상’이 어떤 생의 모서리와 이야기의 곡절들로 여울져 있는지를.
나아가 세상의 거센 풍파와 오욕의 파고에서 벗어나려는 중생들의 현세 기복적 신앙이 종교화되는 과정에서 빚어진 ‘천수천안관세음보살’과 더불어,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등장하는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려는 ‘서원(誓願)’, 그들의 갖가지 공포와 근심을 씻어주려는 수행자의 날빛으로 번득이는 것임을 헤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안목(眼目)을 품을 수만 있다면, 시집 『남해 금산』에서 쉴새 없이 어른거리는 정화와 치유, 기원과 구도라는 두 줄기 빛살을 정면에서 마주할 수 있으리라.
‘관세음보살’과 ‘해수관음상’에 담긴 두 갈래 마음이란, 말하기와 말, 능(能)과 소(所), 구제(救濟)와 기도(祈禱), 영원과 순간, 관음수행과 관음신앙 등등으로 열거될 수 있을 ‘화해적 이원성’이라는 좀 더 큰 테두리로 수렴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한결같이, 되돌릴 수 없는 갈림길에서 둘로 쪼개지거나 나눠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떤 확고부동한 실체처럼 한곳에 붙박일 수조차 없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저 이원성의 다양한 분신들은 비록 둘이라는 모양새를 띠고 나타나지만, 이미 하나의 ‘원통(圓通)’ 세계를 동시에 이루고 있는 것이기에.
그리하여, 미칠 듯한 생의 회한을 타고 들이치는 말소리의 미세한 잔영과 그 눅진한 존재의 파열음으로 뼈마디까지 스며드는 김소월의 가공할 신운(神韻)과 더불어, 이에 필적하는 이성복의 절제된 리듬-이미지의 긴 여운(餘韻)을 가만히 느껴보라. 나아가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부터 깃들어 있던 ‘이원성의 세계’가 서로를 가로지르면서 일구는 낯선 교향악의 카니발, 그리고 그 뒷면에서 “소리 없이” 나투며 반짝거리는 ‘숨은 조화’의 윤슬을 묵묵히 들여다보라. 특히 “구부러진 것 얼어붙은 것 갈라터진 것 나가떨어진 것들/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비고 싶음”(「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 한참 동안 머물러 볼 필요가 있겠다. 이 구절은 『남해 금산』 첫머리에 수록된 「서시」와 더불어, 이후 펼쳐질 시집들의 운명선을 예고하고 있었던 핵심 단자(單子)이기 때문이다.
이성복의 첫 시집 맨 뒷자리를 이루는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는 “때 늦은 사랑”의 라멘트(lament), 그 절정의 곡조를 이룬다. 이 곡조의 먹먹한 운명선에서 말없이 일렁이는 여운의 리듬은 ‘서글픈 그물’처럼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다시 울린다. 이 시에 새겨진 ‘얼굴 없는 희망’은 애틋한 메아리로 휘돌아 나오면서 그 오랜 시간의 여울목을 현재진행형의 파문들로 되살려오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시인의 예술적 주도 동기와 사유의 정수가 겉면으로 드러난 매우 드문 사례를 이룬다. 또한 「서시」와 「남해 금산」을 필두로 시집 『남해 금산』의 무수한 협곡들을 넘실거리는 ‘화해적 이원성’의 역설적 미감과 ‘숨은 조화’를 오묘한 시간의 리듬으로 현시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라는 표제어에 얼룩진 고의적 시간 착오의 몸부림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라. 이 시는 “사랑”에 잠긴 무수한 대극(對極)의 상황을 단번에 가로질러,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원통’ 세계를 그 뒷면에 감춰두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관세음보살’에 주름진 두 갈래로 엇갈린 상반된 마음의 자취들을 되짚어보면, 양자는 결국 상대편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뫼비우스의 안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상대방의 안쪽에 이미 들어박힌 바깥으로 전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의 곳곳에 매복된 온갖 환란들을 회피하려는 우리 모두의 간절한 행복 충동으로 틔워 올려진 기복 신앙이나, 다른 생의 결핍과 고통을 함께 앓고 나누고 치유하려는 수행의 열망이란 결국 하나의 태반에서 자라난 쌍생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남해 금산』 뿐 아니라 이성복의 모든 시집을 관통하는 상반된 양면성을 강렬하게 응집하고 있는 “정든 유곽” 이미지를 다시 곰곰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것은 우리 생의 더할 나위 없는 비루함과 가혹한 운명의 모서리를 돌아 나온 자리에서만 빚어질 수 있을 화룡점정(畵龍點睛)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시인의 고단한 예술적 사유 매듭과 ‘용맹정진(勇猛精進)’의 형상화 방법이 태어나는 자리를 가장 명료하게 집약한다. 그리하여, 저토록 과감하고 진득하면서도 한없이 허허로운 ‘이성복 사유의 축도(縮圖)’로 들어박힌다. 달리 말해, “정든 유곽”의 한복판엔 보들레르가 ‘영혼의 성스러운 매음(sainte prostitution de l'âme)’이라고 불렀으며, 불가에서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고 일컬어왔던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사유와 ‘회통(會通)’의 세계관이 보이지 않는 에테르처럼 “소리 없이” 스며있다는 것이다. 마치 희부연 안갯속 신기루처럼 ‘화해적 이원성’의 신비한 뒷자락을 얼비치면서 이내 사라져버린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적확하겠다.
2
스무 살의 문학도에게 「서시」는 그야말로 특출한 ‘연시(戀詩)’이자, 미래의 불안으로 내던져진 청춘의 송가(頌歌)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지금-여기, 오십을 훌쩍 넘긴 중늙은이들에게도 그 젊음이 간직했던 아스라한 “사랑”의 열병과 선득한 “치욕”의 모멸감을 동시에 떠오르게 만드는 또 다른 ‘공-실존’의 무대일 것이 틀림없다. 나아가 그 처참한 젊음의 빛살 아래 다시 열리는 회고조(懷古調)의 ‘사랑 노래’이자 감정의 고고학적 무대일 수밖에 없으리라.
이러한 견지에서 이성복의 두 번째 시집 『남해 금산』의 수미쌍관 별자리를 이루는 「서시」와 「남해 금산」의 ‘해조음’을 다시 느릿느릿 들어보라. 이 수려한 두 편의 시는 “그대 벗은 어깨 위를 타고 흘러 떨어지는 빛다발의 歡呼”(「라라를 위하여」,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섬세한 여백의 필치로 그린다. 나아가 “빛나는 못, 빛나는 신음소리”(「나는 식당 주인이」, 『남해 금산』)로 압축되는 우리 생의 ‘본원적 역설’과 그것으로 빼곡하게 에둘러진 ‘예술작품의 근원’을 새로운 리듬-이미지로 현시한다.
따라서 「서시」와 「남해 금산」은 “그토록 피해 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오래 고통 받는 사람은」, 『남해 금산』)노라고 읊조릴 수밖에 없을, 최고 순도의 시적 긴장을 내뿜는다. “소리 없이, 간단 없이/그대의 시야를 유린하는/아지랭이 ! 아지랭이 ! 아지랭이 !”(「치욕에 대하여」, 『남해 금산』)가 넌지시 일러주듯, 양자는 시집 『남해 금산』이 품은 ‘신성한 잉여’를 그 마디마디에 감춰두었노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 이들의 사이 공간에선 본원적이라고 불러야만 마땅할, 역설적 존재 상황과 극단적 아이러니로 얼룩진 생이 그침 없는 승화(昇華) 운동이 말없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좀 더 섬세하게 말하면, 승화의 “아지랭이”가 보이지 않는 여운을 거느린 채 쉴새 없이 들이치기 때문이리라.
이성복의 시와 산문이 서로를 횡단하면서 빚어놓는 리듬-이미지 곳곳에서, ‘화해적 이원성’의 카니발 또는 ‘극단적 아이러니’의 ‘대대(對待)’ 운동으로 풀이될 수 있을, ‘본원적 역설’의 무대가 열릴 수밖에 없는 이유와 맥락 역시,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해 온 바와 같다. 그리하여, 오십에 다시 읽는 「남해 금산」이란 어떤 빛깔과 모양새를 띠고 우리 앞으로 나타날 것인가? 그저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연시’의 한 자락으로 읽어 온 「서시」는 어떤 영혼의 갈망과 존재론적 신비를 ‘숨비소리’처럼 쓸어안고 있었던 것일까?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 「서시」 전문, 『남해 금산』
「서시」 1연 마지막 행에 배치된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이미지 매듭을 다시 면밀하게 뜯어볼 필요가 있겠다.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라는 첫 행의 무늬와 대위법적 구도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간이식당”이 풍기는 비정상적 결핍과 예외적 허술함이란 뉘앙스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늦고 헐한 저녁”이라는 심상과 잇닿으면서 누추하고 비루한 생활의 감각을 전경화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비가시적 느낌의 잔영은 작품 전체의 해석 방향을 좌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뒤에서 이어지는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가 발산하는 중의적 맥락과 연결해보면 긴요한 맥락이 감춰져 있음을 “문득”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에 서린 “어두운” 불안의 정서와 ‘두려운 낯섦’의 분위기는 다소 모호하면서도 양면적인 느낌의 여운을 끝자락까지 계속 드리우기 때문이리라.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라는 1연 3행의 이미지는 우선 “늦고 헐한” 삶의 테두리에 도사리고 있을 ‘예기치 못한 사건’과 ‘보이지 않는 위험’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뒷자리의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와 결부된 좀 더 내밀한 맥락에서 다시 읽어야만 할 것이다. 이 구절은 어떤 신비와 황홀경에 이르려는 순결한 마음결이 감당할 수밖에 없을, 보이지 않는 난관과 돌발 사태의 위험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읽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구절의 뒷면에선 미래의 불확정 상태로 열린 기도와 불안의 “목소리”가 겹겹의 메아리로 울린다. 이 숨겨진 맥락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 “당신”에 깃든 상징의 복합적인 의미 운동과 다채로운 스펙트럼에서 기원한다.
그리하여, 「서시」의 “사랑하는 사람”과 “당신”은 만해 시에서 지극한 부드러움으로 형상화된 “누구”와 “당신”에 비견되는 ‘감응의 빛살’을 선사한다. 따라서 이들은 광대한 보편주의의 광휘, 곧 ‘강산무진(江山無盡)’, 그 모든 생의 우여곡절 속에서 하염없이 빛나게 될 우리 안에 들어앉은 부처이자,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지도 모른다. 간절한 “내 목소리”로 부르는 “당신”이란 결국, 우리 안의 ‘숨은 조화’이자 우리 모두의 “내 목소리” 안에 이미 깃들어 온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연시(戀詩)’가 말소리의 부드러운 훈기와 굳건한 미래 예감과 충실한 실천의 수행력을 드넓게 감쌀 수 있는 잠재력 역시 ‘본래면목’의 자리에서 온다. 더구나 “남해 금산” 보리암에서 ‘영원한 지금’으로 드리워질 ‘해조음’과 ‘이근원통(耳根圓通)’ 수행법을 떠올려보면, 「서시」가 이성복의 두 번째 시집 『남해 금산』의 맨 앞머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맥락을 즉각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맥락에는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불확정성의 무늬가 만해의 “알 수 없어요”와 겹쳐 떨리면서 예술적 메아리로 퍼져나가는 감응 운동의 궤적과 “물결무늬 자국”이 숨겨져 있다. 그러하기에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작은 무늬에 주름진 『남해 금산』 전체의 ‘사유 이미지’와 더불어 그 분광(分光)의 윤슬을 포착하는 것이 핵심 관건을 이룬다.
2연 첫머리에서 나타나는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반복의 리듬과 굴절된 이미지의 변형 역시,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이미 깃든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을 되찾으려는 절절한 마음결과 부단한 기다림의 운명을 현시한다. 그것은 ‘영원한 지금’으로 지속될 현재진행형의 시간 속에서만 자기 생의 온전한 리듬을 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을 타박타박 내딛어가는 시인-수행자의 ‘영원한 지금’이야말로,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서 “번쩍이며 흘러내리는” 빛살이요 “잎잎이 춤추”는 우리 모두의 생명력이라는 것이다. 이 탁월한 반복의 신운(神韻)과 굴절된 이미지의 숲길은 「서시」의 “사방”으로 “흘러내린”다. 마치 경건한 씻김굿 한 가락처럼, 그것은 시집 『남해 금산』 곳곳에서 현현하는 정화와 치유의 모신(母神)으로 “소리 없이” 깃들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어머니”가 시인의 육친을 나타내는 동시에 “聖母聖月”의 광활하면서도 경건한 수용력을 표현하는 상징적 이미지의 한 매듭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노자가 선명하게 아로새긴 ‘현빈(玄牝)’의 ‘사유 이미지’와 『남해 금산』의 “어머니”는 곳곳에서 닮은꼴의 지력선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 정화와 치유와 구원의 미감이 돋을새김의 필치와 ‘원형 상징’에 육박하는 명징한 이미지들로 형상화되는 이유와 배경 역시 이와 같다.
따라서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이란 아름다운 무늬들은 “당신”이라는 ‘본래면목’에 이르는 “길”, 그 노정기(路程記)에 기록될 수밖에 없을 ‘성과 속’ ‘광명과 암흑’ ‘영광과 비참’ ‘거룩함과 비루함’ 등을 폭넓게 암시한다. 나아가 저 무수한 이원성의 분광(分光)들을 끊임없이 되비치는 ‘해조음’과 더불어, 그 한복판에서 겹쳐 울리는 “내 목소리”의 환희와 절망을 동시에 표현한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라는 아슴아슴한 무늬는 불가에서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온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의 사유를 매혹적인 문채(文彩)로 빛나게 하는 깨달음의 징표일 것이다. 반면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이란 이 깨달음이 마주할 수밖에 없을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의 난맥상을 함축한다. 곧 ‘이근원통’을 비롯한 그 모든 수행 과정이 수반할 수밖에 없을 무수한 고뇌와 내적 갈등과 ‘주화입마(走火入魔)’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이미지로 읽힌다.
어쩌면 이 상반된 무늬들의 돌발적 엇갈림과 지극한 절제의 향연에는 이성복 특유의 “정든 유곽”의 ‘사유 이미지’가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이 이미지는 우리 생활세계의 훼손된 한 조각의 절단면, 그 처절한 “치욕”의 서사를 격렬하게 집약한다. 더불어 세상이 추구하는 상투적인 사랑의 척도를 넘어 훨씬 차원 높은 화합에 이르려는, 우리 모두의 꿈과 소망을 보이지 않는 뒷면에 담는다. 그것은 보들레르의 ‘영혼의 성스러운 매음’이 표상하는 것처럼, 타자와의 “완전한 화합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수행 과정의 극진한 충실성을 함유하기 때문이다. 가장 더러운 오물투성이의 현실에서 움트면서도 지극히 아름다운 신비의 빛을 뿜는 진주처럼, ‘진흙 속의 연꽃’에 비견될 수 있을 ‘극단적 아이러니’의 상호 침투와 그침 없는 횡단 운동을 강렬하게 응집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성복의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는 보들레르가 ‘파리 풍경’의 우울한 단면들로 소묘했던 ‘잠에 떨어진 매춘부들,/추위에 떠는 가난한 이들,/고통받는 임신부들,/아무런 위안 없이 죽어가는 병자들’이 함께 숨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들을 “송두리째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여”, “이성적이거나 윤리적인 한계를 초월하는 화합”을 이루어가는, 그런 ‘형언할 수 없는 잔치(ineffable orgie)’가 그 뒷자락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잔치’를 불교식으로 덧붙이자면, ‘본래면목’에 다다른 ‘원통(圓通)’ 세계가 빛을 뿜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본래면목’의 자리에서만, 부처가 선언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으로 우리 존재가 매 순간 다시 거듭나는, “당신”이라는 “집으로 가는 길”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이 자리는 세상의 모든 일과 사람이 “내”가 될 수 있는 ‘본래면목’의 자리이며, 그 깨달음이 “사방으로 흘러내리는” 자리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모두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그 ‘영원한 지금’의 시간이 매번 다시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자리일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내 목소리”에 이미 깃든 것이지만, “나”라는 ‘아상(我想)’의 테두리를 벗겨낸 ‘본래면목’으로서의 ‘아(我)’,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광휘가 “흘러내리”는 자리이자 ‘시방세계(十方世界)’의 삼라만상이 빠짐없이 존귀해지는 자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서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라는 이미지 역시, ‘대방광불(大方廣佛)’의 무량한 빛살, 그 “사랑”의 수행으로 겹겹이 아롱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서시」 마지막 행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키 큰 미루나무”와 “잎잎이”라는 탁 트인 초록의 무늬들을 “문득” 다시 떠올려볼 필요가 있겠다. 이들 역시 ‘큼과 작음’ ‘부처와 중생’ ‘신성과 세속’ ‘영원과 순간’ 같은 그 모든 이원성의 매듭을 가로지르는 ‘본래면목’의 보편주의를 표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본래면목’의 자리에서만 가능해지는 ‘무아(無我)’, 그리고 ‘시방세계(十方世界)’로 드넓게 열리는 ‘관음’의 위대한 수용력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라. 나아가 “남해 금산 바닷가에” ‘영원한 지금’으로 철썩거릴 그 ‘해조음’을 오랫동안 귀 기울여 다시 들어보라. 그것만이 우리 모두의 “벗은 어깨 위로 흘러 떨어지는 빛다발의 歡呼”를 가능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근원통’ 수행 과정에서 매 순간 다시 열리게 될 보편주의 광휘를 도래케 할 것이 틀림없기에.
3
우리가 「서시」를 한결같이 ‘연시’의 테두리에서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절정의 압도적인 시구에서 온다. 그것이 발산하는 강인하면서도 절절한 마음결의 지속성에서 비롯한다. 이 시구는 저 마음결이 내딛어갈 수밖에 없었을 순결하면서도 굳건한 ‘기다림의 자세’, 그리고 그 운명선의 궤적을 ‘영원한 지금’이라는 현재진행형의 사태로 부단히 바꿔놓는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이 기다림의 운명선 또한, ‘영원한 지금’이라는 부단한 생명력의 트임으로 되살아나는 ‘말과 시간의 깊이’에서 온다. 나아가 매번의 순간마다 ‘회광반조(廻光返照)’를 거듭할 수 있는 순결한 마음과 지속성의 예감을 쓸어안는다.
사람의 말이 순결하면서도 드넓은 감응력의 파장을 뿜을 수 있는 것은 그것에 담긴 소망과 기도가 한없는 시간의 너비로 확장될뿐더러, 그 실패와 좌절의 예감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다한 기다림을 오래도록 지속하는 장면에서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불확정 상태의 고뇌와 불안의 무늬는 그 뒤척임의 시간을 정면으로 수용하려는 순도 높은 “물결무늬 자국”을 감싼다. 나아가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을 깨우치도록 강제하는 내적 계기의 촉발점과 자기 수행의 탄력성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이 “무늬”는 우리 생의 어찌할 수 없는 역설적 존재 상황과 더불어 ‘본원적 아이러니’의 숙명으로 이끌어간다. 나아가 우리 모두를 부단한 자기 수행의 공간으로 내던지는 “집으로 가는 길”, 그 ‘혼자 가는 먼 집’을 쓸어안는다. ‘범속한 트임(profane Erleuchtung)’을 여는 한 비평가의 문장, ‘화엄을 찾는 나그네는 어떠한 상처에도 존재의 핵심을 개방하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가 상기시키는 ‘영원한 지금’의 수행이 그러하듯.
어쩌면 시간의 풍화작용을 거스르는 오랜 ‘기다림의 자세’란 나날의 밥벌이와 물신의 쾌락에 도취한 생활인의 감각을 넘어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 예찬’을 노래한 한 철학자가 말하듯,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진리-사건’의 발생 터전이자 수행 과정일 것이 자명하다. 적어도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드리우는 장애물들을 부단하게, 또는 단호하게 극복해가는 그런 사랑’의 일관된 지속성의 견지에서 본다면,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구절에 “소리 없이” 내려앉는 순결하면서도 굳건한 마음의 흔적이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순결한 마음의 자리에서 「서시」는 ‘연시’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신성한 잉여’의 파장을 그 뒷자락에 걸쳐두고 있었던 듯 보인다. 달리 말해, 부단한 자기 성찰과 구도 수행의 터전으로 나아가는 탐색의 ‘노정기(路程記)’, 그 이면적 주제로의 ‘변신 모티프’를 보이지 않는 배경에 드리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수려한 예술작품은 여전히 매력적인 ‘사랑 노래’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읽힌다 해도 큰 문제는 없다. 그것은 소월과 만해가 함께 이룬 한국시의 가장 유력한 ‘연시’ 풍의 서정 미학, 부드러운 문채(文彩)와 ‘숨은 조화’의 절제된 리듬으로 아름답게 여울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여성적 어조와 역설적 미감의 분위기를 세련된 말소리의 어감과 정갈한 리듬, 그리고 균제(均齊)의 이미지로 새롭게 채색하면서, 동아시아 문화에서 ‘오래된 미래’로 이어져 온 ‘백비(白賁)’의 미학적 전통을 다시 해체-재구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서시」는 그 ‘현묘한 여성성(玄牝之門)’의 경건한 수용력을 “소리 없이” 일렁이게 함으로써, 우리 생의 도처(到處)에 감춰진 역설적 존재 상황과 극단적 아이러니의 심연을 수행의 차원으로 말없이 도약시킨다. 이 맥락은 비단 「서시」와 「남해 금산」뿐 아니라, 그 사이를 구성하는 무수한 시편들에서도 일관되게 발견된다. 곧 이성복의 시집 『남해 금산』에는 소월의 처연한 어조와 역설적 리듬의 자장(磁場)이 도드라진 형세와 윤곽선으로 펼쳐져 있지만, 만해가 성취한 구도(求道)의 상징적 리듬과 이미지의 후광이 ‘연시’ 풍의 어조와 분위기 아래 설핏한 기색으로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집은 ‘백비(白賁)’의 ‘숨은 조화’를 우아(優雅)의 미감에 실린 잔잔한 윤슬처럼 빛나게 한다. 그리고 그 뒷자락엔 만해가 이룬 ‘연시’의 독보적인 성취, 경건하고 부드러운 구도 수행의 빛이 “소리 없이” 어른거린다.
그렇다. 만해가 자신의 구도 수행과 실천적 탐색의 과정을 ‘연시’ 풍의 부드러운 어조와 서정적 스타일로 노래했다면, 이성복의 『남해 금산』은 소월과 만해를 동시에 가로질러, “정든 유곽”으로 표상되는 생의 숙명적 폭력과 찢긴 실존의 “신음소리”, 그 통절한 절규와 시퍼렇게 날 선 ‘공-실존’의 아이러니를 정화하고 치유하고 구원하려는 기도의 이미지들을 아로새겼다. 달리 말해, “어머니” “성모성월” 등과 같은 ‘원형 상징’의 구체적 무늬들을 폭넓게 활용하여, ‘관음’으로 표상되는 위대한 수용력을 부드러운 어조와 균제미의 리듬-이미지로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집 『남해 금산』은 ‘한국의 관음 3대 성지’인 남해 보리암과 그 ‘해조음’이 생성하는 ‘이근원통(耳根圓通)’의 광휘를 뒷면에 “소리 없이” 드리움으로써, “정든 유곽”의 한 축을 이루는 폭력과 절망, 고통과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지는 강인한 수용력의 세계를 현시했노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달리 말해, 이 시집은, ‘관음 성지’의 광휘로 그침 없이 나아가는 수행의 노정기(路程記)를 ‘오래된 미래’의 순결한 ‘사랑 노래’에 실어 우리에게 다시 들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맥락은 수행의 빛과 어둠을 새로운 미감으로 조율할 수 있는 말소리의 굴곡과 반복의 여운, 그리고 그 무늬들의 형세와 윤곽선, 행간의 깊이와 예술적 짜임새를 치열하게 탐구하고 모색했던 오랜 시간의 깊이와 충실한 수행의 자리에서 비롯하는 것이리라.
『남해 금산』의 마디마디에서 빛을 뿜는 강인한 수용력의 미감과 원초적 생명력의 리듬 역시, 시인의 ‘1차 프랑스 유학’ 직후 시점인 1985년부터 시작된 동아시아 문화에 관한 집중 탐구에서 기원한다. 이 맥락은 “어머니”라는 ‘현묘한 모성성(玄牝之門)’의 세계를 소월과 만해가 공존하는 절제된 어조와 여백의 리듬에 얹어, 그 무수한 심상들을 “잎잎이 춤추”게 하는 자리에서 비롯한다. 나아가 시인이 다시 새긴 한국시의 새로운 별자리가 『남해 금산』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자리에선 소월과 만해가 아닌, 이 둘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절정의 ‘시운(詩韻)’으로 틔어 오르는 청신한 리듬-이미지가 흘러나올뿐더러, 동아시아 전통의 ‘백비(白賁)’ 미학이 새로운 의장(意匠)을 에두른 채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노자의 ‘현빈지문’과 불가의 ‘관세음보살’을 아우르면서 양자를 정화와 치유와 구원이라는 ‘현묘한 모성성’의 이미지로 동시에 여울지게 하는 자리에서, 『남해 금산』이 탄생했노라고 선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시집을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테두리에서 다시 면밀하게 뜯어 읽어야만 하는 이유와 맥락도 이 자리에서 온다. 이 자리에선 ‘현묘한 여성성’을 짜고 닦고 씻는 기막힌 어조와 극진한 절제의 리듬, 그리고 여백의 신비스러운 미감이 동시에 울려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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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 시편으로 돋아난 「남해 금산」 역시,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해 온 테두리에서 읽어야만 적확한 독법을 마련할 수 있을 듯하다. 어쩌면 「서시」와 「남해 금산」이 시집 『남해 금산』의 시작과 끝을 이루면서 서로 잇닿을 수밖에 없는 은폐된 맥락 역시, 이 테두리에 감춰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아가 이 비가시적 차원에 대한 ‘증상적 독해’란 그것을 흐릿한 암시의 문법으로 묘사하는 자리에서 좀 더 오롯한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자리에서 이 작품의 가려진 신비가 강렬한 섬광처럼 도래하는 놀라운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남해 금산」 전문, 『남해 금산』
이미 오래전 우리는 이 시에 관한 압도적인 글 한 편을 기억에 새겼다. 그리고 “한 여자”가 “그 여자”로 변신하는 그 모진 생의 곡절과 절절한 이야기의 매듭 속에서,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서 “문득” 귓전으로 스며들던 ‘삼매(三昧)’ 소리를 잠시 엿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우리 마음결 한복판에 주름져 있었을 “해와 달”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은 설화적 신비와 황홀경에 휩싸였으리라. 이 신비의 빛은 나날의 삶을 이루는 범속한 시간의 테두리에서 잠시 날아올라, 우리 안에 이미 깃들어 온 ‘영원한 지금’의 시간으로 고양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지금-여기’로 주어지는 당면한 순간을 벗어나 저 아득한 설화의 시간으로 되살아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삼매(三昧)의 순간적 광휘가 ‘영원한 지금’의 시간으로 매 순간 되살아나는 것에 비견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남해 금산」의 “한 여자”가 품은 설화는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잠기”는 “나 혼자”의 당면한 현재 상황으로 “돌 속에” 봉인된다. 그러나 이 설화는 봉인됨으로써, 오히려 ‘영원한 지금’으로 부단히 이어져갈 미래의 육체성을 얻는다. 이는 물론 역설이다. 그것도 본원적 차원의 역설일 수밖에 없으리라. 이 역설이 빚는 말과 시간의 운명이란 “삶이란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시인의 산문 한 조각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집”은 그 어디도 아닌 “돌 속에 묻혀 있었네”라는 시의 무늬에서 포착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이성복의 시와 산문을 일관되게 가로지르는 ‘본래면목(本來面目)’, 또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자리에서만 발견될 수 있으리라. ‘영원한 천국’이란 ‘잃어버린 천국’일 수밖에 없으며, ‘태초의 낙원’이란 ‘실낙원’의 리듬을 타고 우리 생의 마디마디로 매 순간 다시 들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돌 속에 묻힌” “한 여자”와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간” 바로 “그 여자”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둘도 아니며 하나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존재일 것이다. 곧 ‘불일불이’의 ‘원통(圓通)’ 세계로 빛나는 ‘본래면목’으로서의 “나”일 것이 자명하다. 적어도 ‘영원한 지금’이라는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의 황홀경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그 여자”는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남해 금산 보리암 곁에 우두커니 선 “돌”이자, 그 “돌 속에 들어간” “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마찬가지로 “그 여자”가 전한 “사랑” 노래는 “나도 돌 속에 들어가”도록 “끌어주었”던 “돌 속에 묻혀 있”었던 “한 여자”에게서 온 것이지만, “그 여자”의 “빛나는 신음소리”를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로 매 순간 바꿔놓는, 바로 “그” 자리에서만 설화적 시간의 영속성을 얻는다. 이 영속성은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이 매 순간 다시 발견되는 자리,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쉼 없는 ‘노정기(路程記)’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영원한 지금’이라는 모순 형용의 시간으로만 표현될 수 있을 ‘불가능’의 자리에서만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불가능’의 자리에서 보면,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간” “그 여자”는 그리 슬프거나 비극적인 존재일 리 없다. 오히려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 신비롭고 성스러운 존재일 것이다. 여기서 나타난 “떠나감”의 무늬는 ‘영원한 지금’이라는 현재진행형의 시제 속에서 “그 여자 사랑”을 끊임없이 다시 수행하게 만드는 근본 동력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남해 금산」의 “그 여자”를 시인의 산문 「집으로 가는 길」로 풀어보면, “여지껏 경험해보지 못한 경건한 느낌”을 주는 “당신”일 수밖에 없다. “한 여자”가 “그 여자”로 변신하는 순간, 그 뒷면으로 “소리 없이” 드리워지는 “당신”이란 “내가 찾아 헤매던 숨은 그림”이자,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당신”이란 존재는, 우리 안에서 같이 살아온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일 수밖에 없기에.
“나의 삶은 ‘당신’이라는 ‘집으로 가는 길’이다.”라는 산문 한 조각이 「남해 금산」의 “한 여자”와 “그 여자” 사이에서 그침 없이 넘실거리는 “사랑”의 변주곡으로 읽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이 변주곡에 깃들일 수밖에 없을 온갖 “사랑” 이야기 또한, ‘오래된 미래’로 표상되는 무한한 시간의 동심원을 그리면서 끊임없이 번져나갈 수밖에 없으리라. 지금-여기,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언젠가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가 이별의 슬픔과 단독성의 비애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오히려 「서시」의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과 겹쳐 떨리면서,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울려 퍼지는 원격 감응의 “빛다발”로 넘쳐흐르고 있음을.
그리하여, ‘영원한 지금’의 시간으로 매 순간 되살아나는 「남해 금산」의 “그 여자 사랑에”와 “돌 속에 들어간”, 그리고 “나”를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라. 이 무늬들이 ‘시방세계(十方世界)’의 오롯한 순간들로 매번 다시 열리는 영원한 “사랑”의 “길”을 표상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시인에게 “길”이란 결국 “집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집으로 가는 길”이란 “길”이 감내할 수밖에 없을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의 단독성, 시인 허수경에게 기대어 말하자면, ‘혼자 가는 먼 집’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내가 집을 발견하는 순간”, “삶의 길은 끊어진다.”라고 말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삶은 집이 아니라, ‘집으로 가는 길’이다.”라는 문장은 곧 “그대에게 가는 먼 길”, 그 ‘백척간두 진일보’의 단독성을 현시하려는 말일 수밖에 없기에.
만일 “나는 아직도 정면으로 ‘당신’의 얼굴을 마주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당신’은 어렴풋한 모습으로 내 앞에 있다.”라는 산문 한 조각에서 「서시」의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가 “소리 없이” 울리게 된다면, 우리는 이성복 시의 “물결무늬 자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고 “헐한” 사립문 하나를 열게 된 셈이리라.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라는 단독성의 무늬는 우리 모두를 폐쇄적 실존의 가두리에 고립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서 “사랑”이 다시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 그 깨달음의 단독성을 현시하려는 역설적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 혼자”의 반복은 우리 생의 존재론적 고독과 숙명적 비애감을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만인으로 뻗어나가는 “사랑”의 무한정한 힘조차 “나” 안에 있는 ‘본래면목’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그 ‘단독성’의 자리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음을 현시한다.
이처럼 시인 이성복과 그의 텍스트에 대한 ‘증상적 독해’는 그 사이 공간들에 가로놓인 무수한 여백을 가로질러, 표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본질적 절단면’을 새롭게 포착하는 ‘창조적 해석’의 장을 새롭게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에 따르면,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는 “더는 싸울 수 없는 순간에/별은 내린다 더는 내릴 수 없는/순간에 별들은 내 몸에 달라붙는다”(「그대 위의 푸른 나뭇가지들」, 『남해 금산』) 같은 무늬들이 내뿜는 “빛다발의 歡呼”, 그렇게 아름다운 “별”들이 총총히 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奇蹟처럼 떠오를 푸른 잎사귀”(「밤은 넓고 드높아」, 『남해 금산』)이자, “모든 게 神祕”(「口話」,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일 수밖에 없을 “뒹구는 돌”의 탄력과 그 “神祕”가 머물다 갈 “길”을 보이지 않는 행간에 계속 숨겨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로부터 신비로 나아가는 것은 또한 신비로부터 현실로 되돌아오는 것을 암암리에 예비한다.”라는 시인의 보들레르 연구 한 대목은, “현실”과 “신비” 사이에서 부단히 일어나는 ‘화해적 이원성’의 역동적 순환 운동을 집약한다. 나아가 이 순환 운동을 예술적 모티프의 중핵으로 삼는 이성복 시의 ‘본질적 절단면’을 단 한 문장으로 응축한다. 시인의 예술적 사유를 전적으로 지탱하는 것은, 양극단의 에너지를 투쟁과 정복이 아닌 화해와 연대의 차원으로 수렴하려는 동아시아 전통의 ‘대대(對待)’ 원리이기 때문이다. 결국 ‘대대’라는 말은 양극단의 힘이나 사태들이 상호 대립적인 상황과 조건에 놓여 있으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작용과 운동으로 수렴되어가는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역동적 삼투 운동과 그 현상 전체를 빠짐없이 함축할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모든 게 神祕였다 사랑의 힘 죽음의 힘 죽은 꽃의 힘/모든 게 神祕였다” 같은 무늬들을 보라. 이 무늬들이 적확하게 예시하듯, “神祕”란 우리 모두를 “죽지 않을 만큼 짓이기”며 다가오는 그 “龜甲같은 치욕”에서조차 “아지랭이”처럼 움터 오르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랑의 힘”을 낳는 “죽은 꽃의 힘”이라는 ‘본원적 역설’의 존재로서 우리 마음결로 끊임없이 들이쳐오는 것이기에.
모든 게 神秘였다 길에서 오줌 누는 여자아이와
곱추 남자와 電子時計 모든 게 神秘였다 채찍 맞은
말이 길게 울었다 모든게 神秘였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고, 그러나 죽지 않을 만큼 짓이겼다
모든 게 神秘였다 사랑의 힘 죽음의 힘 죽은 꽃의 힘
모든 게 神秘였다
삼백 육십 오일 駱駝는 타박거렸다
얼마나 멀리 가야 하나 얼마나 가까이 있어야 하는가
- 「口話」 부분,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결국 “神祕”란 “길에서 오줌 누는 여자아이와/곱추 남자와 電子時計”에서 나타나듯, 그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조차 분별심을 두지 않고 그 경계와 차별을 거두는 자리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게 神秘였다”라는 말이 참으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멀리 가야 하나 얼마나 가까이 있어야 하는가”라는 거리 감각의 분별심조차 “없는 것”으로 자리할 수 있어야만 한다. 시인은 “없는 것”의 자리를 우리가 감당하거나 “슬퍼할 수조차” “없지만” 매일같이 감당하기 위해 또한 수행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을 “불가능(不可能)”이라는 역설 어법으로 일컬었던 것인지 모른다. ‘영원한 지금’으로 주어지는 매 순간의 수행 과정인 ‘본래면목’이란 ‘알 수 없어요’로 표상되는 “불가능(不可能)”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에.
「슬퍼할 수 없는 것」의 마지막 무늬, “슬퍼할 수 없는 것,/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에서 “소리 없이” 일렁이는 ‘불가능’의 이미지가 그러하듯.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 「슬퍼할 수 없는 것」 전문, 『아, 입이 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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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고봉준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와 양안다의 사이, 그 틈 류수연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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