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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 2024년 가을호

우정이라는 이름의 천사 ― 함윤이론

하혁진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제20회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고, 계간 창작과비평 2022년 봄호를 통해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주요 평론으로 「감각의 질서와 그녀들의 환상통」, 「멸망 이후의 에피파니」 등이 있다.

우정이라는 이름의 천사

—함윤이론1)


함윤이의 소설은 죄책감이라는 입구로 들어가 우정이라는 출구로 나오는 신비한 미로다.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입구와 출구를 유려하게 연결하는, 모호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알게 된다. ‘타자와의 연결’이 그 조건이라는 점에서 죄책감과 우정은 꽤 닮아 있다는 것을. 요컨대 함윤이의 소설에서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우정이라는 관계 없이 발생하지 않고, 우정이라는 관계는 죄책감이라는 감정 없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다지 도덕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은 소설 속 인물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떠올리며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끊임없이 되뇌는 것은, 그들이 누군가의 ‘친구’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상 아무런 약속으로도 엮이지 않은 ‘우정’의 관계는”2) 약속하지 않은, 약속할 수 없는 마음들로 ‘너’와 ‘나’를 결속한다.


*

긴말할 것 없이 「강가/Ganga」로 가면 된다. 이 소설은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인가. 우선은 그렇다. 마지막 문장이 증거다. “오래 기다린 죄책감이 쏟아지기 시작한다”(p. 139). 심지어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화자가 죄책감을 초래한 사건에 대해 “그만하자. 이런 얘기는 중요한 게 아니다”(p. 111)라고 말하며 시치미를 떼고 있으므로, 독자는 그것이 그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건의 내막은 무엇인가.


너 우리를 여기 두고 달아나는 거야. 쿠쿠는 자신의 오른팔을 불쑥 들이밀었다. 매일 나와 비슷한 온도로 얼어붙던 팔이었다. 내 팔이 부서졌다고 생각해봐. 이게, 눈 깜빡할 사이에 박살 났다고. 그래도 지금처럼 굴 테야? 내가 고개를 돌리자, 쿠쿠는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너 아주 비겁해. 주변의 누가 죽든 다치든 아무 상관도 하지 않아. (p. 126)


한때 ‘나’는 ‘쿠쿠’ ‘자자’와 함께 “매일 마주 보고 서서 얼어붙은 음식들을 포장했다”(p. 110). 그러던 어느 날 여공 중 한 명이 산업재해 사고를 당한다. 쿠쿠는 자신이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보라며, 피해자와 연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공장에 취직한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차라리 생존이라고 해야 할 생계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채 무작정 연대를 요구하는 것은 과하다는 의미일까. 선뜻 동의하긴 어렵지만 이해할 순 있다. 우정과 연대 대신 ‘내 삶’을 택한 것을 ‘죄’라고 단정할 순 없다. 또한 “비슷한 온도로 얼어붙던 팔”은 열악한 노동 환경에 처한 여공들의 공통 조건이라는 점에서 연대의 가능성이기도 하지만, 조금만 다르게 말하면 열악한 노동환경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여공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하나같이 ‘불확실한 존재’, 즉 ‘프레카리아트 Precariat’라는 점에서 그것은 연대의 불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자의 선명한 말들은 정확히 날아와 ‘나’를 찌른다.


잊으면 안 돼. 너는 내몰린 게 아니야. 너는 선택한 거야. 우리 대신에, 너 홀로 여기에서 살아가는 일을 택했어. 아냐. 부정하지 마. 화내지도 마. 비난하는 게 아니야. 네 선택을 이해해. 나중에 모른 체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야. 우리가 모두 각각의 선택을 내렸다는 것. 자신의 의지로 말이야. (p. 127)


쿠쿠와 달리 자자는 ‘나’의 선택을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자발적인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강조한다. 너는 “홀로 여기에서 살아가는 일을 택했”다는 것, 불확실한 삶을 사는 존재라고 해서 모두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 그러니까 너의 말이 무죄의 변명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었다는 것. 이제 ‘나’는 반박할 수 없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과 책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억울함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던 ‘나’는 돌연 엉뚱한 결론에 도달한다. “바로 그 순간, 남자를 가져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그것이 자발적인 선택이었다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면 된다. “내 모든 선택을 칭찬하며, 절대로 힐난하지 않는 남자”(p. 127)를 구하면 된다. 자본의 전장에서 살아남길 택했으니, 전장의 규칙대로 값을 지불하고 사면 된다. 그렇게 소설은 동료의 고통에 연대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자를 사기 위해 ‘큰 강이 흐르는 도시’에 도착한 여자의 이야기가 된다.


이쯤에서 함윤이의 소설이 갖고 있는 형식상의 특징들이 드러난다. 먼저 함윤이의 인물들은 ‘법’을 어기는 게 아니라 ‘규칙’을 깬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는 그리스의 여러 공동체 가운데 가장 혁신적인 도시국가로 성장했는데, 그 배경에는 ‘민회’와 ‘극장’이 있었다. 도시의 서쪽에 위치한 벌판에서는 정기적으로 민회가 열렸는데, 그곳에 모인 시민들은 공동체의 대소사를 결정하고, 시민들이 지켜야 할 법과 갖춰야 할 덕에 관해 토론했으며, 때때로 누구를 죽이거나 내쫓을지 판결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대다수의 시민은 ‘그만큼’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남쪽 절벽에 위치한 극장에서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상연됐다. 도자기 파편에 이름을 적어서 벌해야 하는 것인지 헷갈리는 인물들, 주어진 운명과 선택의 연속 속에서 저마다의 흠과 죄를 지니게 된 인물들의 이야기가 그곳에서 다뤄졌다. 다시 말해 함윤이의 소설 속 인물들은 서쪽 벌판에서는 기소되지 않더라도 남쪽 절벽에서는 심문해볼 만한, 바로 그런 인간들이다.


 또한 함윤이의 이야기는 ‘과거-사건’과 ‘현재-서사’의 거리 두기를 통해, 메시지와 스토리 사이의 긴장과 균형을 유지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요컨대 앞서 말한 인물들을 현실의 법이나 도덕에 기대어 성급히 심판해버리거나 용서해버리면 이야기 고유의 진실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작가가 그러한 유혹으로부터 중심을 지킬 때, 소설은 ‘대문자 진리’에 대응하는 ‘소문자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함윤이는 현재의 서사를 극적으로 전개함으로써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심리적·물리적 거리를 확보한 뒤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다시 겪는 구조를 채택한다. 소설 속 인물이 현재를 통해 과거를 다시 살 때, 함윤이의 이야기는 인식을 낳는다. 요컨대 함윤이의 소설은 이야기가 다룰 만한 인간들을 통해 이야기만 닿을 수 있는 진실을 만들어낸다.


다시 「강가/Ganga」로 돌아오자. 그래서 소설은 “강가. / 이 도시에서는 그렇게 불려야지, 다짐했다”(p. 107)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쿠쿠와 자자의 고향인 ‘바라나시’에 도착한 ‘나’가 낯선 도시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신의 이름을 새로 짓는 것인데, “Ganga”(p. 109)라는 동음 다의어에 담긴 의미는 총 세 가지다. (1) 강가, 강줄기와 육지가 맞닿는 부분 (2) 降嫁, 지체 높은 집안의 딸이 자신보다 낮은 집안에 시집을 가는 행위 (3) गङ्गा, 강의 신이자 속죄와 정화를 담당하는 신의 이름.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세 가지 의미는 ‘나’가 처한 상황 (그리고 이야기의 구조)과 정확하게 호응하는데, 물론 그것은 남자를 구하기 위해서 애쓰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시나브로 드러난다.


 그런데 남자를 사는 일이 애당초 가능한가. 법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가능하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도 “남자를 사러 왔다고 해야 할지, 구하러 왔다고 해야 할지, 이런 경우에는 무슨 표현이 더 적절한가”(p. 111)라고 되뇌고 있듯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싶다는) ‘욕망’과 (남자를 사고 싶다는) ‘행위’ 사이의 번역이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당연히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나’는 물가가 싼 나라로 여행을 갔기에 비교적 적은 돈으로도 계급적 우위를 누릴 수 있지만, 다른 한편 외국인 여성이라는 점에서 꽤 자주 위협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 ‘나’가 타국에서 처음 듣는 한국어 역시 “이리 와. 언니. 예뻐요”(p. 122) 등이다. 강가에 사는 노숙인들은 “해피. 투나잇. 프리티 걸. 코리안. 러블리”(p. 122~23) 같은 말로 ‘나’의 몸 곳곳을 침범한다. 따라서 광장 근처 식당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남자를 사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나’에게 여신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해내려 하는군요”라고 말하며, “그런 남자는 절대 살 수가 없어요. 여기가 아니라도, 어디에서도요”(p. 120)라고 덧붙일 때, ‘나’의 목표는 좌절된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다음 장면에서 화자가 ‘나’와 ‘강가’를 분리한다는 점이다.


나는 호텔로 돌아간다.


아니다, 다르게 말해보자.

강가는 호텔로 돌아간다.

이렇게 말하니 모든 게 한층 편안하게 느껴진다. 내가 아니라, 강가가 호텔로 간다. 공장에서 꾸역꾸역 모은 돈으로 항공권을 사서 낯선 도시에 도달한 사람은 강가, 어깨가 다 드러나는 티셔츠를 입은 채 도시를 거니는 이도 강가, 주머니의 두툼한 다발로 남자를 사고자 하는 여자가 강가. 그 여자가 나를 이끈다. 여기에 내 책임은 없다. (pp. 121~22)


우정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을 책임지는 대신 남자를 사겠다는 엉뚱한 결론으로 도망쳤던 ‘나’는, 타지에서 맞닥뜨린 현실적인 한계 역시 자신과 ‘강가’를 분리하는 방식으로 손쉽게 해결하려 한다. 그러한 전략은 일견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강가는, 우리는”(p. 124) 호텔 직원의 소개로 남자를 구하는 데 성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걸 ‘나’가 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강가라는 이름을 빌려, 칼을 든 남자를 사고, 자신을 희롱한 남자들에게 복수하면, 그건 정말 ‘나’가 한 일이 되는 걸까. 아니, 애초에 도시에 온 목적은 그런 게 아니지 않았나. 그날의 선택과 책임을 어긋난 방식으로 회피하고 있는 ‘나’는 아무래도 그날의 기억을 ‘제대로’ 다시 겪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칼은 총이 등장함과 동시에 무용지물이 된다. 느닷없이 울려 퍼진 세 발의 총성과 함께 ‘나’는 시커먼 강으로 뛰어들고, 시시한 복수극도 막을 내린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더럽고 너저분한 강이라고 말했지만 쿠쿠는 “신처럼 이쁜 강”(p. 126)이라고 말했던 강에 몸을 던진 그 순간, 예기치 못한 깨달음이 찾아든다. 절체절명의 상황에 ‘나’는 더 이상 “강가를 나로부터 구분할 수 없”게 되는데, 우스꽝스럽게 허우적거리는 남자를 향해 ‘한국어’로 소리치는 장면이 그렇다. 자신이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소리치고 있음을 깨달은 ‘나’는 “비릿한 물이 온 얼굴을 습격하”(p. 134)는 순간은 ‘번역’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핵심은 그 순간에도 ‘나’가 쿠쿠와 자자를 떠올린다는 것이다. “자자, 쿠쿠. 이것 봐, 이것 좀 보라고. 물에 빠진 사람을 섣불리 구하다가는, 전부 다 물에 빠져 버리는 거야. 우리 전부가 목숨을 버리는 꼴밖에 안 돼”(p. 135).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순간 ‘나’는 남자를 ‘구하고’ 있다. 요컨대 ‘나’는 ‘구하는 buy’ 것이 아니라 ‘구해야 save’ 했다. 이도 저도 아닌 경계(강가)에 서서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할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강물 아래[降嫁]로 몸을 던져 손을 뻗어야 했다. 그러니까 “매일 나와 비슷한 온도로 얼어붙던 팔”(p. 126), 그때 그 팔을 잡았어야 했다. “유 쎄이브 마이 라이프”, ‘나’가 남자의 말을 “당신이 내 목숨을 구한 거예요”(p. 139)라고 번역할 때, 오래 기다린 죄책감과 함께 진정한 의미의 속죄와 정화 (गङ्गा)가 찾아드는 것은, 그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이처럼 불완전한 인물이 같은 삶(사건)을 두 번 사는(겪는) 이야기. 그래서 처음에는 닿을 수 없었던 진실에 가닿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는 소설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닐지 몰라도, 소설도 할 수 있고 심지어 아주 잘할 수 있는 일이다. “흔히 ‘낡았다’고도 말해지는 소설들, 시작과 끝이 있고 인물과 사건이 드러나는 전통적인 소설이”3) 할 수 있는 일이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 있다는 의미다. 그런 소설을 한 편 더 살펴보자. 「나쁜 물」은 제목 그대로 “그날 이후” 씻어낼 수 없는 “나쁜 물”(p. 135)이 들어버린 ‘너’의 이야기이다. 함윤이의 작품이 대부분 그렇듯, 이 소설도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느 날 찾아온 집주인은 ‘너’의 집에서 들리는 커다란 노랫소리 때문에 “이웃들 원성이 자자하”다며, 그 시간이면 집이 비어 있다고 말하는 ‘너’에게 혹시 “앙심 품은 사람이 무슨 짓을 하는 걸 수도 있”으니 “점심때 집에 한번 들러”(p. 136)보라고 말한다. 그런데 집주인이 한 말 중에 특정한 단어가, 예컨대 ‘원성’ ‘앙심’ 같은 단어가 ‘너’의 ‘나쁜 물’을 파고든다. 이쯤에서 ‘트라우마’라는 개념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빈집에서 들리는 노랫소리는 해결되지 못한 (해결될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이 만드는 노이즈이기 때문이다. ‘너’에게는 억압된 것,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회귀할 것이 있다. ‘너’는 나쁜 물을 씻어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요컨대 이번에도 ‘사건(원인)’과 ‘행위(결과)’ 사이의 오역이 문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쁜 물’의 역사는 ‘너’가 흉악범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어린 시절 깊게 파인 구덩이에 묻혀 울고 있던 ‘그 남자’를 본 순간 ‘너’는 마음 속에서 “선하고 좋은 것”(p. 151)이 찰랑거린다고 느꼈고, 그래서 남자를 구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성폭행과 살인 등을 저지른 흉악범이었다. 아마도 피해자의 부모였을 누군가가 그를 납치해 구덩이에 묻어둔 것이었다. 그렇게 ‘너’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불시에 끼어들어 모든 사람의 원한을 산, 얼뜨기 조연이”(p. 165) 되어버린다. 더 큰 문제는 ‘너’가 어긋난 방식으로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엄마가 주지 스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방식, 즉 한겨울 얼음장 같은 물로 목욕하고, 그 남자와 같은 이름을 가진 누군가가 ‘너’에게서 나쁜 물을 빼 가기를 기다리는 방식으로는 그날의 기억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다. 앞서 말했던 노랫소리가 방증이다. “씨발, 엄마 아무것도 안 끝났잖아”(p. 143)라고 말하는 ‘너’의 내면에는 여전히 ‘나쁜 물’이 출렁인다. 따라서 ‘다시’ 겪어야 한다. 수십 년을 돌아온 ‘너’는 그날의 ‘너’를 다시 만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사건과 다시금 대면한다는 것은 현재의 관점으로 기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거울 없이 제 모습을 볼 수 없으므로, ‘너’에게는 거울이 되어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나쁜 물」에서는 ‘소년’이 그 역할을 한다. 용기를 내 다시 찾은 고향에서 우연히 만난 소년은 ‘너’와 닮은 타자다. ‘너’는 집에서 들리는 노랫소리와 똑같은 노랫소리를 흥얼거리는 소년이 ‘그 남자’의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소년을 쫓는다. 하지만 소년은 “네 아버지가 감옥에 갔니?”라는 질문에 “아버지의 사기는 본인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대답할 뿐이다. 아버지 때문에 집을 잃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찾아오지만, 자신 역시 아버지의 소식을 모른다는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소년의 답변에 ‘너’는 “그게 다니?”(p. 162)라고 되묻고, 소년은 “그럼 뭐가 더 있어야 하는데요?”(p. 163)라고 답한다.


 그렇다. 그게 다다. ‘그게 다’라는 말에 담긴 의미는 소년의 아버지는 그 남자가 아니라는 것과 동시에, 소년은 단지 그런 아버지를 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소년의 죄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하지 못한 것(소년)이 죄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것을 알지 못한 것(‘너’)도 죄가 아니다 (‘너’는 손과 발과 입이 묶인 채로 구덩이에 묻혀 울고 있던 그 남자가 흉악범이라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질문은 소년은 어떻게 ‘너’의 집에서 들리는 노랫소리를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답할 수 있다. ‘너’와 소년이 느끼는 죄책감은 ‘죄 없는 죄책감’이라는 점에서 명확한 실체를 알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은 “여성과 남성, 고음과 저음, 속삭임과 고함”, 심지어 “웃음과 울음조차”(p. 142) 뒤섞인 기이한 노랫소리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너’와 소년은 그런 점에서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고. 소년은 ‘너’에게 노랫소리를 제대로 마주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질문해보세요. 그럼 대답하더라고요”(p. 164). 그날 이후 계속해서 솟구쳤던 질문들을 억압해왔던 ‘너’는, “아무리 잠가도 물은 계속 솟구칠 것이”므로 “잠기기 전에 그 안으로 직접 들어가야 한다”(p. 165)는 사실을, 그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

그런데 주지한 ‘죄 없는 죄책감’에는 좀더 따져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이름부터 모순인 이 이상한 감정의 이면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너’가 그 남자를 구한 것, 그것이 죄인가. ‘너’가 그날의 진실을 털어놓았을 때, 엄마의 눈에 비친 ‘너’의 얼굴은 왜 “죄인의 얼굴”(p. 160)일 수밖에 없었나. ‘너’의 말대로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p. 161)을 뿐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네가 알든 모르든 저지르게 되는 잘못이 있”(p. 162)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알 수 없는 것을 알지 못한 것도 죄고, 그것이 ‘너’의 죄목인 셈이다. 논리적으로 억지에 불과하지만,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큼은 엄연한 사실임으로, ‘너’의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날의 사건과 관련해 ‘너’의 이름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피해자[“너와 거의 또래였던 여자애들” “낯선 남자를 도울 만큼의 호의와 상냥함을 품은 여자애들”(p. 165)]와 유가족[“여자애들을 낳은 얼굴들” “새빨개진 눈으로”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p. 159)라고 말했던 얼굴들]의 잔상들은 시도 때도 없이 엄습함으로, ‘너’의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요컨대 ‘너’는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한평생 씻을 수 없는 나쁜 물, 즉 죄책감에 시달린다.


 다시 말해 함윤이의 소설에서 죄책감은 인물이 한 일이나 하지 않은 일의 차원에서 다뤄지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차원, 즉 ‘타자와의 연결’이라는 차원에서 다뤄진다. 감정의 원인이 되는 사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이 느끼는 죄책감이 죄보다 크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 4)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함윤이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죄책감의 이면에는 ‘지나친 감상주의’나 ‘도덕적 우월주의’가 있는 게 아니라 우정이라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강가/Ganga」의 ‘나’가 느끼는 죄책감이 좁은 의미의 우정(‘나’는 ‘자자’ ‘쿠쿠’와 친구였다)에서 연유한다면, 「나쁜 물」의 ‘너’가 느끼는 죄책감은 넓은 의미의 우정(‘너’는 피해자, 유가족과 연결되어 있다)에서 연유한다. 이렇듯 함윤이의 소설에서 죄책감은 우정이라는 관계 속에서만 통용되는 일종의 ‘로컬 룰 local rule’처럼 다뤄지기에, 그것의 작동 원리는 객관적 논리와 법이 아닌 주관적 감정과 규칙을 따른다.


「구유로舊遊路」가 대표적인 예다. 이 소설은 “오래된 친구의 길이”라고 의역할 수 있는 ‘구유로’에서 함께 살며 연습생 생활을 했던 ‘위리’ ‘공희’ ‘사라’ ‘보배’ 네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은 처음 만난 이후 몇 년 동안 전국 8도를 돌아다니며 각종 행사를 전전했는데, 기약 없이 미뤄지는 데뷔와 앨범 그리고 무엇보다 미안해할 것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미안해할 수밖에 없는 “미지근하고 애매하여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온도”에 보배가 먼저 지쳐버린다. 아니, 모두가 똑같이 지쳐 있었지만 보배만 포기할 수 있었다. “해약금에다가 이사비까지 내줄 가족”이 있다는 건 확실히 네 사람 중 보배만 가진 특권이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멤버들을 배신하고 보배 혼자 계약을 해지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이 ‘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죄책감’을 느끼는지가 더 중요하다. 앞서 말했듯 죄책감의 이유는 네 여자의 관계가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 이상의 것이라는 데에 있다.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기억들은, 예컨대 술에 취해 마트에서 훔쳤던 의자, 상아색 벽에 까맣게 그을린 담배 자국, 가장 좋아하는 무대의상이었던 짧은 치마와 반짝이는 스타킹 같은 것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 세상에서 오직 네 여자만이 공유하는 기억들이, 이 세상에서 오직 네 여자에게만 적용되는 ‘우정의 규칙’이 되는 것이다. 특히 보배가 구유로를 떠나기 전날 밤, 사라가 입고 있던 옷을 차례차례 벗은 뒤에 보여줬던 몸, “단 몇 초간 세상에 드러났던 파랗고 기이한 몸이” 그렇다. 사라는 부당한 계약이나 그것의 해약과는 관계없이 그저 “지금 모습 그대로” 자신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는 진심을 담아 자신의 비밀을 보배에게 보여줬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라의 진심이 닿았기에 보배는 죄책감을 느낀다고. 사라가 그러지 않아도 되는 마음 (우정)을 줬기에, 보배 역시 그러지 않아도 되는 마음 (죄책감)을 느낀다.


 따라서 사라가 선물한 소설책의 주인공처럼 보배가 ‘걸어서’ 세 여자를 만나러 간다는 설정은, 아무런 개연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필연적인 선택처럼 느껴진다. 소설책 속의 남자는 친구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죽어선 안 된다”고, “나는 그걸 허락할 수 없”으니 “그녀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누구도 근거를 알지 못하는 믿음에 굳은 확신을 품고서” 걸어서 그녀를 만나러 간다. 마치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그녀를 살리는 방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렇듯 이상한 믿음을 가진 남자의 이야기는 보배의 마음에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믿을 만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어서, 믿지 않을 수 없어서, 그냥 믿어버리는 사람의 이야기. 그래서 보배도 걷는다. 거미줄과 구정물과 쓰레기를 지나면서, 그 모든 냄새와 질감을 온몸에 묻혀가면서 걷는다. “이토록 형편없는 길을 지나가고 있으니 이제는 좀 더 당당한 마음으로 여자들을 만나도 될 것” 같다는 ‘근거를 알 수 없는 믿음에 굳은 확신을 품고서’ 걷는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 발이 푹푹 빠지는 습지에서 네 여자가 함께 개기일식을 바라보는 장면은 그러므로 틀림없는 우정의 이미지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핫스폿”은 아니지만, 그들만이 공유하는 기억들이 그들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진흙탕’이야말로 온전한 네 여자만의 영토, 네 여자만의 우정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함윤이의 소설 속 인물들은 왜 죄책감을 견디면서까지 우정을 지키려고 하느냐는 점이다. 여러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냉소적인 동시에 가장 희망적인 대답을 해보자면, 우정은 선택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든 타자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가진 필연적인 조건이라면, 그 조건을 계속해서 돌아보게 하는 마음, ‘나’의 안녕만큼이나 ‘너’의 안녕을 염원하게 되는 우정은 자연 발생적 관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우정은 그러한 구획을 홀쩍 뛰어넘어버린다. 이에 대해서는 「자개장의 용도」도 할 말이 있어 보인다. 소설은 자개장의 숨겨진 비밀을 4대에 걸쳐서 계승한 엄마와 딸들의 이야기이면서, 세대를 초월한 우정을 나누는 네 여자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 내력을 좇다 보면 알게 된다. 어떤 우정은 ‘나’의 안녕보다 ‘너’의 안녕을 ‘더’ 염원하기도 한다는 것을. 우선 특별해 보이지만 네 여자의 마음에 비하면 차라리 시시한 수준인 자개장의 비밀부터 밝혀보자. 마음만 먹으면 그곳이 어디든 데려다주는 자개장의 사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자개장 앞에 서서 “가고 싶은 곳의 이름을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그럼 마치 “공놀이”를 하듯 자개장이 “받아쳐”(p. 245)준다. 설명서에는 주의 사항도 함께 적혀 있다. 자개장은 갈 때밖에 못 쓴다는 것. 돌아올 때는 자신의 힘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 그래서 자개장을 사용할 땐 “자기 힘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 “돌아올 거리부터 계산”(p. 247)해야 한다는 것. 여기까지가 자개장의 용도에 관해서 바꿀 수 없는, 미리 정해진 ‘법’이다.


 하지만 증조할머니가 오일장에서 자개장을 발견한 이후 시작된 이야기는 차라리 네 여자가 저마다의 ‘규칙’을 발명하고 전송하는 역사에 가깝다. 자개장의 비밀을 알게 된 증조할머니가 자개장을 버리자고 말했다가 이내 태도를 바꾸어 집안의 가보로 선언한 이후, 자개장은 정해진 용도에 새로운 규칙을 더해가며 ‘나’에게까지 내려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증조할머니는 자개장을 막내딸에게 물려줌으로써 모계 계승이라는 규칙을 만들었고, 할머니는 남편과의 권력 다툼에 사용함으로써 여성의 주체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자개장을 전유했다. 그런가 하면 엄마는 “나는 좀 다르게 그걸 쓰고 싶었”(p. 249)다며, 자개장의 비밀과 용도를 가족들과 공유한다. 이렇듯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개장을 사용해온 세 여자에게 ‘법’보다 중요한 것은 ‘규칙’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자개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된 ‘나’는 교통비를 아낀다는 명목으로 자개장을 갖게 된다. 하지만 책임감 있게 사용하겠다는 약속이 무색할 만큼 자개장은 금방 다른 목적으로 사용된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소중한 관계를 스스로 망친 이후 방황하고 있는 딸에게 엄마가 그동안 숨겨왔던 규칙을 말해준다는 점이다. 엄마는 가족마저 뒷전인 채 오직 ‘정우’를 찾기 위해 자개장을 사용하는 딸에게 “은혜도 모르는 년”이라고 말하며, “넌 그걸로 어디든 갈 수 있으니 내 마음은 전혀 모르겠지”(pp. 269~70)라고 덧붙인다. 요컨대 딸이 언제든 자신의 곁을 떠날 수 있다는 불안, 영영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공포가 엄마가 딸에게 화를 내는 진짜 이유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자신이 스스로 터득한 진실을 딸에게 전수한다. 그건 바로 “돌아올 길을 생각하면 자개장을 제대로 쓸 수 없”다는 것, “오히려 그걸 전혀 개의치 않아야만 자개장을 잘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엄마는 길을 잃지 않으려면 너무 먼 곳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거듭 당부했던 자신의 규칙을 스스로 기각한 셈인데, “그게 나를 떠날 방법으로 쓰일까봐 무서웠기 때문”(p. 271)에 진실을 숨겼던 엄마는 왜 자신의 결정을 번복한 것일까. 그건 아마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딸 역시 ‘갈림길’ 앞에서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는 “타클라마칸 사막”, 위구르어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뜻을 가진 그곳에 다녀오고 나서야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됐다. 소설마저 비밀에 부치고 있는 엄마의 “아주 긴 이야기”(pp. 270~71)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애초 돌아간다는 생각조차 없”이 떠나고 나니 “앞에 놓인 것은 갈림길 하나뿐이”(p. 272)었다는 것. 떠날 것인가 돌아올 것인가, 두 개밖에 없는 선택지 앞에서 엄마는 돌아오기를 선택했다는 것. 그렇게 ‘나’의 엄마가 되었다는 것. 엄마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자개장에 얽힌 또 다른 비밀을 알게 된다. 첫째, “엄마도, 엄마의 엄마도, 엄마의 엄마의 엄마도”(p. 271) 갈림길 앞에서 돌아오기를 선택했기에 지금의 ‘나’에게까지 자개장이 계승되어왔다는 것. 둘째,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개장은 정확히 앞서 말한 방식으로 “무언가 떠나지 않도록 보존하는”(p. 275) 물건이기도 하다는 것. 다시 말해 ‘나’의 안녕보다 ‘너’의 안녕을 ‘더’ 염원했던 여자들의 우정, 그 ‘자연스럽지 않은’ 마음이 자개장의 용도보다 신비한 그것의 ‘진짜 비밀’인 것이다.


*

지금까지 살펴봤듯 함윤이의 소설에서 ‘우정’은 보이지 않지만 언제 어디에서나 ‘너’와 ‘나’를 연결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사들’을 떠올리게 한다. 「천사들(가제)」에서 ‘항아’의 시나리오 속에 등장하는 “천사”는 “관계에서 태어나”는 존재인데, 정작 천사를 만든 연인들은 “천사를 보지도 듣지도 못해서 그가 옆에 있다는 것도” 모르고, “애초에 그런 존재가 있다는 사실조차 상상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는 관계에 “미묘한 영향을” 끼치며 결코 적지 않은 힘을 행사한다. “연인을 졸졸 쫓아다니며 각종 이벤트를 벌”임으로써 “옅은 심경의 변화”(pp. 106~107)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시나리오의 등장인물은 ‘둘 (여자, 남자)’이 아니라 ‘셋(그리고 천사)’이다. 요컨대 함윤이의 소설에서는 ‘둘 (인물들)’만큼이나 ‘셋(죄책감과 우정 같은 마음들)’도 중요하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함윤이의 소설에서는 늘 보이지 않는 등장인물이 하나 더 있다. 쉽게 터지고 부서져버리는 사이다의 기포처럼 미약한 마음인 ‘그’는 내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너’와 ‘나’에게 속삭인다. “포기하면 안”(p. 117) 된다고. “다시 한번 생각”(p. 115)하라고. “너흰 나아질 거”(p. 116)라고.


 어느새 갈등과 혐오마저 귀찮아져서 차라리 ‘손절’이 효율적인 방식으로 여겨지는 작금의 세태 속에서, 관계를 붙들기 위해 애쓰는 ‘그’의 말들은 우스우리만치 순진무구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함윤이의 소설을 읽고 나면 알게 된다. 약속하지 않은, 약속할 수 없는 마음들로 ‘너’와 ‘나’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그 누구도 그러한 연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하는 말, 즉 ‘우정이라는 이름의 천사’가 하는 말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포기하면 안 돼” “왜냐하면 너희가 날 만들었잖아”(p. 117)와 같은 말들은 우정이라는 이름의 끈질긴 마음으로 우리 모두를 끌어당긴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천사들은 제 할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유리잔에 담긴 사이다의 기포처럼 솟아나고, 부글거리고, 끓어오르고, 부풀어 오르고, 반짝이고, 터지고, 엉겨 붙고, 나뉘어 떨어지고, 올라가고, 사라지고, 튀고, 스미며 ‘너’와 ‘나’의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p. 138)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너’와 ‘나’의 차례다. 함윤이의 소설이 그랬듯 보이지 않지만 ‘너’와 ‘나’를 연결하고 있는 천사들을 발견할 차례다.



  • 1)이 글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강가/Ganga」(『소설 보다: 여름 2022』, 문학과지성사, 2022), 「나쁜 물」(『문학과사회』 2024년 여름호), 「구유로(舊遊路)」(<문장웹진> 2022년 8월호), 「자개장의 용도」(『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3), 「천사들(가제)」(『소설 보다: 여름 2024』, 문학과지성사, 2024).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작품명과 쪽수만 밝힘.
  • 2)「인터뷰: 함윤이×이소」, 『소설 보다: 여름 2022』, 문학과지성사, 2022, pp. 145~46.
  • 3) 「인터뷰: 함윤이×이소」, 같은 책, p. 142.
  • 4)도덕적으로 말해서, 어떤 사람이 특정한 어떤 일을 행하지 않았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실제로 어떤 죄가 있는 사람이 모든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일이다”(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p.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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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아 살아 있음으로 앙갚음하는 사람들의 걷기 연합

이 글은 조경란의 단편소설 「검은 개 흰 말」(『2024년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24), 「그들」(『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4) 및 소설집 『일요일의 철학』(창비, 2013),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문학과지성사, 2018), 『가정 사정』(문학동네, 2022), 장편소설 『복어』(문학동네, 2010),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문학동네, 2024) 등을 다룬다. 이하 소설을 인용할 시 본문에 쪽수만 밝힌다. 1. 나의 등을 향해 걸어가기  조경란 작가는 "좋은 제목은 독자에게 문학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1)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를 궁금하게 만드는 그의 소설 제목 하나를 들여다보는 일로 글을 시작해봐도 좋을 것이다. 그의 소설집 『가정 사정』에 수록된 단편의 제목 「한방향 걷기」를 보자. 이 제목은 낯설지 않다. 터미널 표지판 또는 길가의 현수막에서 익히 보아왔던 문구이기 때문이다. 보행자들의 발길이 서로 겹치지 않도록 돕는 안내문은 조경란의 소설 속에서도 "문화재청에서 나무에 달아놓은"(255쪽) 푯말에 쓰인 말로 등장한다. "한방향 걷기"는 해당 소설의 본문에서 유일하게 다른 글씨체로 표시되어 있어 형식 측면에서도 표지판 역할을 한다. 걸어온 방향 그대로 걸어가라고 조언하는 것 같기도, 다른 방향은 기웃대지 말라고 권고하는 것 같기도 한 이 구절을 읽으면 궁금해진다. 그래서 '한방향'은 어디를 가리키는지, '걷기'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단 이래 이십구 년 동안 꾸준히 소설을 써온 조경란의 작품세계는 다채롭고 방대하여 이를 한 가지 특징으로 일괄하는 것은 오히려 그 세계를 축소하는 일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하나의 공통점을 꼽아본다면,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이 웅크리고 쪼그라들어 아주 납작해진 공처럼 보일 때도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걷는다. 그리고 걷기는 조경란이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공들여 묘사하는 행위다.  조경란의 소설 속에서 인물이 걷는 장면은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빈번하게 등장한다. 인물이 걷는 장면으로 끝이 나는 소설들만 몇 가지 꼽아보아도 다음과 같이 많다. 조경란의 첫 장편소설 『식빵 굽는 시간』의 결미에서 여진은 사람들은 모두 "지도라곤 없는 자신만의 삶으로" "걸어가야 한다"(160쪽)는 것을 깨닫고는 창가에서 등을 돌려 식빵을 만들기 위해 주방으로 걸어간다. 두 번째 장편 『가족의 기원』 또한 정원이 "지도도, 아무도 없는 길 저쪽으로" "트렁크"를 쥐고 "서툴게 걸음을 옮"(333쪽)기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는 정원을 가두어왔던 "세계로부터의 탈주"2)로 비친다. 「양파 던지기」(『가정 사정』)의 초점 화자인 원진은 생각이 많아질 때면 산에 올라 양파를 던지던 세입자 기중구가 떠난 후 그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집을 나선다. "그는 양파를 쥔 손에 힘을 주고 걸었다. 꽃도 아닌 것을, 어쩌면 마음만큼 세밀하게 표현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115쪽) 이 소설 역시 인물의 걷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네 번째 장편소설 『복어』 또한 "그녀는 머리를 앞으로 내민 채 그를 향해 걸었다"(346쪽)라는 문장으로 끝이 난다. 아버지의 삶을 추모하며 자기를 찾아가는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 단편 「성냥의 시대」(『일요일의 철학』)의 마지막 장면을 옮겨보면 이러하다. 햇살이 번져들고 있었다. 공장 안은 아직 어두컴컴했고 귀마개가 필요할 만큼 많이 만들어내야 할 성냥도 없었지만 그는 그쪽으로 걸어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갑자기 햇빛을 받으면 눈이 아플지도 몰랐다. 어둠이 아니라 그늘 속으로 그는 똑바로 걸어갔다. 그가 그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53쪽)  이 단편이 소설집의 가장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경란이 소설집 전체를 인물이 걷는 장면으로 끝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조경란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가지각색의 걷기는 물리적인 행위이자 실질적인 운동이면서 동시에 주저앉은 곳에서 다시 일어나 나아간다는 상징적 의미를 띤다. "매일 10분씩이라도 글을 쓴다면 삶이 적어도 1킬로미터쯤은 나아간 거라고"3)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조경란의 에세이를 참조하면, 걷기는 쓰기의 다른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더욱 궁금해진다. 단일한 방향으로 걸으면 무엇을 만나게 될까.  소설가 이승우는 과학이 발달하기 전, 옛사람들은 세계가 평평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똑바로 계속 걸으면 세상의 끝에 닿고 낭떠러지로 떨어질 거라고"4) 생각했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한방향으로 계속 걷는다면 출발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음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출발점이 곧 도착점이 되는 이 세계에서는 역설적이게도 등 뒤에 있는 사람이 가장 멀리 있는 자가 된다고 한다. 이승우는 한 번 더 생각이 도약하게끔 이끈다. 등 뒤에 있는 사람보다 그 등을 가진 사람이 출발점에서 더욱 먼 사람이 아닐까, 하고 묻는다. 그러니까 한방향으로 쉬지 않고 지구를 다 걸어서야 만날 수 있는 가장 먼 사람이 자기 자신인 것이다. 어쩐지 마주보기 두려워서 사는 내내 눈을 내리깔고 걷다가 이 둥근 지구상에서 종내에는 퉁, 부딪히게 될 굽은 등.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낯설기만 한 캄캄한 뒷면, 그것은 어쩌면 가장 가까이 있지만 가장 멀게 느껴지는 '나'에게로 걸어가는 '나'의 뒷모습일 테다.  조경란의 소설에는 "세상과 잘 사귀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유기되어 있는"5)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지나치게 내향적"(「양파 던지기」, 85쪽)이고 소심하여 타인에게 환영받기는커녕 번번이 소외되는 이들은 가족에게마저 거부당하거나 사회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통에도 실패한 채 고독하게 남겨져 있을 때가 많다. 이들은 외로운 자신을 돌보는 방법조차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자기와도 불화한다. 하지만 조경란은 그런 인물들이 마음의 장벽을 걸어 잠그고 자기 안으로 침잠해 질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는 작가 자신과도 닮아 있는 인물들이 자기 안을 헤집고 허물어 내면을 넓히고서 '나'의 실존을 찾기 위해 걸음을 떼는 이야기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자기를 알아가는 일에 실패할 때도 유의미한 성공을 거둘 때도 계속해서 이들이 '나'를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어떻게든 그들 안의 자력을 발견해주려 노력해왔다.  조경란의 최근 소설들은 주관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여러 주관이 병존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일과 맞닿아 있음을 밝히려 한다. 한 사람의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일이 보편의 세계에서 등 돌리는 일이 아님을 헤아리고, 안으로 파고드는 응시가 평균으로 동일시될 것을 강요하는 외압에서 벗어나 특수한 삶들이 공존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임을 이해할 때, 조경란의 소설은 더욱 와닿게 된다. '나'라는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해보기 위해서 지구 한 바퀴를 다 걸어 '나'에게 다다르는 일은 언뜻 미련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저마다의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걸음마다 여러 '나'를 마주치면서 처음에 품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들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옮겨가게 된다. 아둔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행로는 복수의 '나'가 병존하는 세계의 이치를 일찍이 이해한 자가 설정한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2. 원한의 역학  단순한 움직임으로 보이는 걷기는 의외로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는 산책하러 나가기 위해 신발을 신는 일부터가 고역이다. 그러므로 걷기 시작했다는 것, 어딘가를 향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회복의 단초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아지기 위한 첫걸음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비치는 '원한'에서 시작되었다면 어떤가? 독특한 발단을 꾀하고 있는 2024년 김승옥문학상 대상 수상작 「그들」을 살펴보자.  「그들」의 중심인물인 종소와 영주가 만나게 된 계기는 전혀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음침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종소가 품은 복수심으로 인해 서로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겸임교수였던 종소는 자기 제자를 뽑으려는 최교수에 의해 임용 과정에서 부당하게 제외되어 팔 년간 담당해온 과목을 더는 가르치지 못하게 된다. 종소는 "자신은 수업을 더 할 권리가 있다"(41쪽)고 자기 몫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한 번 항의해보지도 못하고 자신이 알아온 "유일한 삶"(24쪽)을 송두리째 빼앗긴다. 이후 그는 후배의 출판사 일을 돕지만 출판사 사정이 어려워지자 해고당한다. 군산, 부산, 광주와 같이 먼 지역을 전전하며 자기 전공과 무관한 강의도 가리지 않고 떠맡아 생계를 이어나가지만, 당장 다음 학기를 보장할 수 없는 불안정한 강사 생활에 불안해한다. 고용의 불안정성 외에도 그를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노인 우울증을 진단받은 어머니가 죽음을 선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들이 늘 공기처럼"(12쪽)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종소는 양파를 물에 담그다가도 불안해져 어머니가 닫은 방문을 열어두고서 그 문이 다시 닫힐까 마음 졸인다. 일상생활에서도 막연한 두려움에 시달려야 하는 그는 불안 없이 사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부족한 무엇이 있"(13쪽)는 것일까 궁금해하기도 한다. 종소가 하는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면, 그가 자신에게 어떤 결함이 있기 때문에 불안을 느끼는 거라고 추측하며 자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소는 문득 "내가 이선생을 선택하지 않은 것뿐"(같은 쪽)이라고 통보함으로써 선택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은근히 드러내고 종소의 삶에 매우 중요한 사건을 단순히 선택의 문제로 축소해버렸던 최교수를 떠올린다. 매사 두려움을 느끼며 위축되고 경직되었던 종소는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사람"(같은 쪽)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이상의 가장 유명한 시 「오감도-시 제1호」에 등장하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가 분간되지 않았던 것처럼, 아니 어쩌면 동일 인물인 것처럼, 두려움에 떠는 이는 위협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공포감에 제압당하는 수동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행위하는 자가 되려는 기획, 그것으로 종소는 미래에 대한 모종의 기대감을 가지게 된다. 자신에게 다가올 최악의 일에만 골몰하던 종소가 부도덕한 일이나마 계획하고 실행하려 하는 것이다. 최교수를 두렵게 만들기 위해 "그를 찾아가야겠다고"(14쪽) 다짐할 때, 미래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가볼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따라서 이때 원한의 감정은 그것을 품은 이를 살려두는 동력이 된다. 무엇이라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해보자면, 「그들」은 자기를 살려두는 일에 기여하는 감정적 자원인 '원한'으로 우연한 만남을 발생시킨 후, 그 만남을 통해 인물들이 원망하는 마음에 응축되었던 에너지를 차츰 다른 방향으로 발산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때 원한으로 일어선 인물들은 생존의 차원을 넘어서서 살 만한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으로 바뀌어나간다. 어찌됐든 그 만남 자체는 종소의 복수심에서 시작한다. 그는 최교수의 부인인 영주가 운영하는 카페에 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악의를 품고 일부러 카페에 찾아왔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종소가 카페에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교수가 영주에게 위험해 보이는 그를 내보낼 것을 권유할 때, 종소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된다.  그러나 원한으로 시작된 관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의도하지 않은 굴절은 주어진 정보를 통해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과는 다른, 직관적인 알아차림에서 발생한다. 종소는 멀리서 보면 "우는 사람처럼"(20쪽) 보이는 영주의 슬픔을 알아챈다. 영주 역시 종소가 누군가를 나름의 방식으로 괴롭히겠다는 일념으로 카페에 오지만, 막상 자신의 두 손이 "무기라도 되는 듯 주머니 깊이 찔러넣"(30쪽)고서 위협이 될 만한 행동을 삼간다는 것을 포착한다. 영주는 그가 자신이 당한 부적절한 해고에 소극적이나마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에 작은 위안을 얻으면서 짧게나마 고요와 평온을 누리다가 가는 사람임을 알아차린다.  영주는 최교수의 작은 손이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의 "크고 두꺼운 손"(21쪽)에 비해 무섭지 않다는 이유로 결혼을 결심한 사람이다. 영주가 안전하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이라는 점은 그녀가 언제나 안전을 위협받는 위치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최교수의 손과 종소의 손은 영주의 불안을 낮추어준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것이 안정감을 선사하는 방식에서는 대조된다. 최교수의 작은 손은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공격력이 약하리라고 추측되기에 영주를 덜 두렵게 한다. 이는 그의 의지와 무관한 신체적 외양일 뿐이다. 이와 달리 자기를 비롯한 누군가를 해치게 될까 두려워 손을 주머니 속에 가둬두는 종소의 습관은 그가 선택한 행동이며, 그의 성향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종소라는 인물에 대한 신뢰감으로 이어진다. 종소의 습관은 영주를 편안하게 해주면서 동시에 종소가 영주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생각이 기울어 있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영주는 실제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구름과 전선줄이 겹친 듯 보이는 풍경을 "깃털 구름이 전선줄에 걸려 있"(23쪽)는 모양으로 읽어내는 사람이다. 전선줄을 "잘못 그어놓은"(같은 쪽) 금으로 인식하는 영주는 그것을 통해 남편과 아들의 편에 좀처럼 설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선 밖에 놓인 자기 처지를 환기하기도 하지만, "지켜온 생활이 모두 무너져버릴"(16쪽) 것만 같은 불안을 단번에 종식할 방법으로서의 죽음 또한 은연중에 떠올린다. 종소도 강의실 창문 커튼을 묶어둔 "케이블 줄"을 보면서 그것이 자기 죽음을 돕는 "다른 용도"(25쪽)로 쓰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최악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생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리라는 생각에 마음 졸이며 살아온 종소와 영주는 죽음에 갈증을 느낀다. 자기 상처는 외면한 채 삶을 견뎌온 두 사람이 서로의 아픔만큼은 기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나' 아닌 대상이 망쳐지는 일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종소는 잠귀가 밝은 어머니가 도어 록 소리에 깰까 싶어 열쇠를 지니고 다닌다. 영주는 카페 문을 닫을 때마다 야외 테이블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쇠줄로 동여매는 일, 즉 불특정 다수를 의심하며 자기 것을 지켜내는 일이 끔찍하게 느껴져 그 자리에 카페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상추와 고추 모종을 심는다.  이러한 사정을 살피면, 영주 또한 종소처럼 원한을 지닌 인물이다. 엄마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자기를 몰아세워 천천히 죽여가고 있었던 영주는 종소의 찢어진 재킷 주머니를 꿰매어주면서 응어리진 마음을 털어놓는다. 이때 영주는 미움의 칼날이 시종 자기를 겨누고 있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고, 오랫동안 벼려온 날이 자기를 찌르는 대신 바늘이 되어 다른 사람의 찢긴 상처를 꿰매어줄 수도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 안 꿰매면 더 중요한 걸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29쪽)라는 영주의 충고는 외투 주머니에 대한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다. 슬픔이 줄줄 새는 다친 마음에 대한 이야기로 들린다. 안에 든 내용물 전부를 들키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들고 다니던 에코백에서 영주가 '반짇고리'를 꺼내고 이를 종소가 지켜보는 것 또한 의미가 있다. 들키고 싶었지만 혼자 감당해야만 했던 불안을 알아채주는 상대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자기를 살려놓기 위해 동아줄처럼 붙들어야 했던 원한은 점차 희미해진다. 살려만 놓자는 생각이 살 만한 삶을 꾸려가고 싶다는 소망으로, 한 단계 발전된 형태의 욕구로 나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종소는 팔 년간 재직했던 학교를 떠나며 건물의 수도꼭지를 모두 틀어놓았던 것처럼, 자신의 슬픔보다 더 많은 양의 무엇을 대신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불행에 대처해왔던 인물이다. 자기감정을 마주하기 두려워 다른 큰 소리를 냄으로써 내면의 소리를 스스로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감추고, 시간이 흘러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소극적인 대응을 해왔던 것이다. 그런 종소는 어머니가 자주 소리 내서 운다는 사실을 털어놓음으로써 자신이 슬픈 상황에 처해 있음을, 그래서 자신도 울고 싶은 심정임을 영주에게 간접적인 방식으로나마 처음 고백한다. 종소는 더는 최교수를 기다리지 않게 된다. 대신 다른 것을 기다리게 된다. 누군가를 두렵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두려움에 떠는 사람과 깊이 연결되면서 사그라든 것이다. 결국 종소는 최교수와 마주치는 상황을 기다렸으면서도 그것이 더 미뤄졌으면 하고 바란다. 원망의 마음, 최교수를 두렵게 하려는 마음은 비슷한 불안을 지닌 영주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자리를 잡자 자연스레 내쫓겨버린다. 영주 역시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어 아들 상현을 괴롭게 할 것이라는 두려움, 부족한 엄마 밑에서 자란 아들 주변의 또래 아이들까지 위험에 처하게 하리라는 공포에서 걸어나와 자기와 닮은 불안을 지닌 사람의 상처를 꿰매어주면서, 자신이 작은 돌봄을 실천할 수 있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인물임을 배우게 된다. 3. 필연적인 불안  각자의 불안은 본디 특수성이 있지만, '여성적 불안'이라고 불러봄직한 영주의 불안은 종소의 것과는 구별된다. 영주는 눌러왔던 마음이 솟구칠 때, 어디에도 말할 수 없었던 자기 이야기를 적어 '선생님'에게 문자로 전송한다. 선생님의 번호로 "알았어"(16쪽)라는 세 글자의 답장이 왔을 때, 영주는 그것이 선생님의 말투가 아님을 알아차리고 번호가 바뀌었을 가능성을 생각한다. 이후 선생님인 체하며 답장을 보내온 상대가 자신의 카페를 찾아와 자기를 위협하리라고 예상하며 영주는 두려움에 떤다. 영주의 불길한 상상 속에서 그는 해치기 쉬운 "여자"(17쪽)로 대상화되어 있다. 이러한 비약적 사고가 과민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런 사소한 계기로 스토킹 당하거나 죽임당하는 여성이 실제로도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다친 이웃을 대신해 가게 일을 돕다가 손님에게 "씨발, 아줌마 뭘 그렇게까지 친절하세요"(22쪽)라는 욕설을 듣는 「일러두기」의 미용, 「양파 던지기」에서 "소심하고 사회성"이 "떨어지기"에 상대적으로 "안전한"(95쪽) 남자를 결혼 상대로 선택하는 원진의 아내, 이웃에게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집에 남자도 없으면서"(245쪽)와 같이 사건과 무관한 비하의 말을 듣는 「한방향 걷기」의 은제 이모, 「봉천동의 유령」(『일요일의 철학』)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시끄럽다며 가만히 안 두겠다고 협박하는 남자 세입자의 말을 듣고 두려움에 떠는 엄마로 대변되는 여성 인물6)은 모두 불안을 느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특히 은제 이모가 베란다에 흙물이 드는 사건을 언급하면서 "어딜 가도 완전히 안전한 데가 없"(「한방향 걷기」, 233쪽)다고 토로하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십일층 남자가 화분에 물을 주느라 은제 이모의 베란다를 더럽히는 일은 언뜻 안전과 무관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자 사는 여성의 입장에서 남자 이웃에게 항의하는 일은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일로 여겨진다. 그와 같은 불길한 예감은 매우 비논리적인 망상처럼 보이지만 현실의 삶을 참조하면 적절한 추론에 가깝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조차 범죄의 위협과 연결되어 있는 여성들의 처지는 불안 또한 젠더화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최교수를 두렵게 하기 위해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카페에 가는 종소, 그 소극적인 방식의 앙갚음조차 종소의 성별이 바뀌면 불가능하리라고 씁쓸히 예측하게 된다. 쉽게 일터에서 내쳐지는, 그러나 누군가를 짧은 시간이나마 두렵게 할 수는 있는 종소의 그 불안정한 위치조차 비교적 안정적으로 비친다는 점은 성차별의 심각성을 환기한다. 조경란이 지속해온 여성 폭력에 대한 섬세한 고찰은 젠더화된 불안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집이나 직장, 일터의 화장실과 같은 일상적인 공간조차 여성에게는 성적 대상화, 성폭력의 위험이 상존하는 공포스러운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음을 밝혀주었던 조경란은 범죄에 노출되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어 빈번히 경험해야만 하는 여성적 불안과, 그로 인해 여성들이 일상적인 상황에서 경험하게 되는 특수한 어려움까지 소설에 담아내고 있다. 강제로 날 선 감각을 지닌 채 살아가야 하는 여성의 불안이 유별난 기질에 기반한 왜곡된 감정이 아님을 소설은 확인하게 한다.  불안을 뜻하는 독일어 'Angst'가 원래 '궁지'라는 뜻이었다는 점은 불안이 "가능한 것과 새로운 것으로 향하는 통로를 차단한다"7)는 사실을 환기한다. 불안은 그것을 느끼는 주체를 고립시키고 미래를 기대하지 못하게 한다. 불안 요소들을 생각하느라 그 자리에 계속 머물게 만든다.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삶을 도모하기보다 모든 불행을 잘 모면하여 생존해가는 일에 연연하게 한다. 「그들」의 인물들은 불안이 추동하던 도망침을 멈추고 그렇게 도망치기만 했던 자기를 마주하고 돌보기 위해 걸음을 옮기게 된다. 서로에게 들키고 서로를 알아채주면서 종소와 영주는 도저히 삶을 지탱할 수 없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불행한 미래에의 예감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48쪽)다는 다행한 현재의 확인으로 바꾸어낸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들이 안정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과도하게 예민한 성정 때문이 아니라 언제든 해고되고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조경란의 소설은 불안함을 느끼는 개개인을 탓하지 않고 그 불안을 창출하고 체득하게 만드는 불의한 사회를 조명하게 한다. 조경란은 안전조치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누구도 해칠 의도가 없었던 무고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눌리어 죽어가야 했던 이태원 참사에 대한 흔적을 소설 곳곳에 녹여내면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기이한 사회구조를 지적한다.  권희철은 소설 「그들」이 구체적인 날짜를 언급한다는 점, 상현이 가한 학교폭력이 참사를 흉내내는 '압사 놀이'의 형태를 띤다는 점, 영주가 압박당하는 공포에 대해서 자주 거론한다는 점 등을 분석하여 '그들'이라는 지칭이 트라우마 이후를 치열하게 살아내는 이태원 참사 생존자들을 아우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8) 이러한 해석을 참조할 때, 소설 「그들」은 종소와 영주가 지닌 개별적인 아픔뿐 아니라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정부와 그로 인한 치안의 부재가 사람들을 강제로 불안에 취약해지도록 한다는 점까지 고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해에 인재가 더해져서 일어나는 참사는 그의 다른 소설 「검은 개 흰 말」에서도 묘사된다.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도림천이 범람하고 "인근 반지하 빌라가 침수돼 세 이웃이 사망"했다는 뉴스(106쪽)가 보도되는 장면은 2022년 집중호우로 사망한 신림동의 세 모녀를 떠올리게 한다. "졸업여행을 가던 길에 생을 마치게 될 수도 있다"(108쪽)고 '나'(서양지)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가정하는 대목은 세월호 참사를 상기시킨다. "수해 피해의 경험들"로 인해서 '나'에게 여름은 "일년 중 가장 긴장하는 시기"(96쪽)로 감각되며, '나'는 "평범한 순간에도"(108쪽) 자신 혹은 타자들의 죽음을 걱정하며 초조해한다. 구조적 재난이 빈번하게 일어남에도 안전관리에는 소홀한 한국사회가 개개인의 일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조경란의 소설은 끊임없이 드러낸다. 이러한 대목들은 조경란의 소설이 '나'에 천착하고 있음에도 결코 개인의 단위로 이야기를 축소하거나 '나'라는 한 사람의 서사로만 유폐되지 않는다는 점을 입증한다. 4. 그저 살아내는 삶에서 살리는 삶으로  조경란의 최근 소설에는 이처럼 복수심에서 걷기 시작했더라도 자기를 살리는 일로 반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어, 방치해왔던 자기의 굽은 등을 안아주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인물의 이야기가 자주 발견된다. 「일러두기」의 중심 인물인 미용은 마흔아홉 살로 공교롭게도 「그들」의 종소와 같은 나이이다. 복사집 '대학사'를 운영하는 재서는 인쇄를 하러 온 손님인 미용의 글을 읽게 되면서 그녀와 가까워진다. 자식을 바란 적 없었다는 이유로 자식을 정신적, 물리적으로 학대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미용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살길이라는 판단하에 자기감정과 자기 존재를 숨기는 데 "가진 에너지를 다"(19쪽) 소진하면서 살아온 인물이다. 지금은 반찬가게 주인인 미용은 특성화고등학교로 배달을 나갔다가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기절한다. 구강 기능 저하증을 진단받고, 팔을 다친 재서를 대신하여 인쇄소 일을 돕다가 욕설까지 듣게 된 미용은 "아무래도 그 사람을 찾아야겠어요. (……) 나한테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겠어요, 지금이라도"(22~23쪽)라며, 과거 자신에게 부당한 폭력을 행사했던 교련 선생님을 찾겠다는 결심을 한다. 1987년, 미용은 당시 열일곱 살이었고 교련 수업을 맡은 선생은 지금 미용의 나이였다. 그는 "교련의 원래 목적이 길들여진 신체를 만드는 거"(42쪽)라는 말을 서슴지 않으며 수업시간에 여학생의 뺨을 내리치기도 하는 사람이었고, 겁을 먹은 미용은 붕대 감기를 연습하는 실습 시간에 실수를 한다. 그러자 교련 선생은 여럿이 돌아가면서 맡았던 환자 역할을 미용이 홀로 감당하게 만든다. 수업시간 내내 미용은 업혔다가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또다시 일으켜 세워졌다가 내동댕이쳐진다. 경찰청장의 딸로 추정되는, 선생님들도 눈치를 보는 여학생이 "가여워서 못 보겠으니깐"(45쪽) 그만하라고 선생을 만류하고 나서야 이 가혹한 형벌은 끝이 난다. 미용은 아주 오랜 시간 막 대해도 되는 신체로 길들어왔던 것이다.  "외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죽이거나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18쪽)는 내용이 담긴 미용의 글을 보았던 재서는 그녀가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닐까 불안해한다. 독자 또한 재서의 시선으로 미용을 바라보고 미용에 대해 추측하면서, 그가 원한을 품고서 선생님을 찾아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본다. 「그들」의 종소가 그랬듯, 자신에게 왜 그랬는지 따지고 싶은 원망감은 불안에 떨며 자기방어에만 힘써왔던 웅크린 존재를 일으켜세워 어딘가로 걸어나가게 만든다. 부정적일지언정 강력한 원한의 감정은 멈춰 있던 내면의 시계를 움직인다.  하지만 조경란의 소설은 언제나 그 시작점에서 훨씬 더 먼 곳으로,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간다. 재서는 미용이 불행했던 자기 삶을 보상받기 위해 선생을 찾았고, 불만족스러운 삶을 선사한 부모는 이미 죽어버렸으니 어찌할 수 없어서 자기 자신을 죽이기로 마음먹었으리라고 상상한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재서는 미용을 찾아가지만, 미용은 짐작과 달리 밝은 모습으로 지내고 있다. 미용은 자신이 쓴 글을 재서에게 보여주면서 자기가 쓰고 싶었던 게 교련 시간에 당했던 폭력이 아니라 교련 시간 시작 전에 마주한, 창밖의 복사나무에서 "연연한 분홍 꽃잎 몇 장이 후르르 떨어지"(46쪽)던 아름답고도 평화로운 광경이라고 이야기한다. 선생님에 관해 쓰려고 했지만 결국 자기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는 미용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재서는 미용이 선생님을 찾아서 하려던 일이 그러한 잔혹한 시간을 겪고도 이렇게 또렷이 "계속 자신으로 살아가고"(47쪽) 있음을, 그 단단한 생명력이 미용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일임을 이해한다.  조경란은 "평생을 움츠리고 산 아이"가 "자라서 펼치는 미니멀한 복수 서사"를 쓰려고 했으나 미용이 그것을 거부했다고 전한 바 있다.9) 조경란의 소설 속 인물들이 처음엔 원한 때문에 걷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그 걸음의 끝에 세워두었던 원망의 대상을 지나쳐 더 멀리에 있는, 숱한 폭력과 불의를 견디면서 생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은 '나'에게로 꿋꿋하게 나아가리라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안다.  "처음 작가로 하여금 그 소설을 쓰도록 이끈 직감, 사고, 지식 등등"10)을 의미하는 소설의 중심부가 바뀐다는 것은 작가와 독자가 각각 쓰기와 읽기를 통해 그 감춰진 중심부이자 진짜 주제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지닌 흥미로운 유동성과 창조성을 생각하게 한다. 인물의 걸음이 그려내는 궤적은 작가가 설정해두었던 최단거리가 아니라 인물이 경로를 이탈하여 내달린, 그리하여 더디지만 멈추지 않는 발걸음으로 만들어낸, 생으로 가는 새로운 길이다.  「한방향 걷기」에서, 은제 이모가 어렵게 가꾸어온 세계에 흙물을 끼얹는 십일층 주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마흔아홉의 미석이 고안하는 방식 역시 동갑인 미용의 반격과 유사하다. 그는 민폐를 끼치는 당사자가 있는 십일층이 아니라 십이층으로 올라가서 몬스테라 화분을 문 앞에 두고 올 계획을 세운다. 그것을 베란다 난간에 올려놓고 물을 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하려는 것이다. 십일층 남자가 아랫집의 입장이 되어 은제 이모가 경험하는 불편함과 불쾌를 고스란히 느껴보길 바라는 마음이므로 그것은 "악의"(256쪽)에 가깝다. 하지만 이는 원망의 감정을 누군가를 해치거나 죽이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살려내는 일을 통해 해소하는 방법이다. 미석은 십이층에 선물한 몬스테라가 잘 자라나기를, 강력한 생기를 지니고서 아래층으로 뻗어가기를 바라는 것으로 앙갚음한다. 게다가 그것은 "자신을 안에서 마냥 걸어 잠그고 있"(247쪽)던 미석이 처음으로 위했던 타자, 은제 이모가 자기 삶을 오롯이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한 대리 복수다. 조경란의 소설에서 중심인물이 지닌 원한은 결국에는 살리고 살아내는 일로 나아간다. 이는 더 멀리 내다보면서 더욱 나은 곳으로 걸어가는 일이자 우리의 삶을 한 단계 나아지게 하는 아름다운 대안이 된다. 5. 취약한 사람들의 걷기 연합, 아니 살기 연합  서로를 살리고 살고 싶게끔 만드는 길을 내는 조경란의 인물들은 하잘것없다고 여겨져 사회에서 배제되었음에도 그러한 서로를 하찮다고 여기지 않는다. 자신의 취약함을 오래 들여다본 이들은 그것이 어떤 것을 갖추지 못했거나 어떤 능력을 연마하지 못해서 또는 어떤 덕목이 부족해서 얻게 된 나약함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상대의 약함을 나무라지 않고 그 아픔과 외로움을 오롯이 보듬는다. 단, 조경란 소설의 차별점은 그와 같은 돌봄의 공동체가 "개개인의 선함에 호소되는 관계의 합이라기보다 각자의 약함이나 부족함을 아는 이들의 자연스러운 연합"11)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의 소설은 인물과 독자에게 연민이나 이타적인 마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기 세계를 탐색하는 일이 곧 '나'와 같은 연약한 '나'들을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둔다.  "무엇을 하고 어디에 있든 자격 미달"(「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 72쪽)이라고 느끼던 인물들이 각자의 자기를 찾으러 떠날 때, 그것은 홀로 감내해야 하는 여정이지만 잠깐씩 서로의 동행이 되어준다면 고독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람이란 서로 들키고 마주치고 살피고 돌보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아가는 '나'들이 서로의 보폭이 다르다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다채로운 속도에 안도하면서, 모르는 걸음걸이를 따라 배우기도 하면서 걸어간다. 이제는 이상이 아니라 생활이 되었다는 소설12)을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작가처럼, 그의 소설을 함께 걸어내는 독자가 되어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굽은 등, 그 볼품없지만 고유한 이면을 껴안아주기 위해 나선 길에 마주치는 숱한 등을 토닥이며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1) 조경란, 「제목의 힘」, 『세계일보』, 2024. 12. 13. 2) 염승숙, 「가족의 '양막'을 찢어내고 홀로서기」,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해설, 357쪽. 3) 조경란, 「날마다 10분씩 볼펜」, 『소설가의 사물』, 마음산책, 2018, 80~81쪽. 4) 이승우, 『고요한 읽기』, 문학동네, 2024, 17쪽. 5) 이광호, 「죽음을 견디는 메타포」, 『불란서 안경원』 해설, 문학동네, 2006 (개정판), 342쪽. 6) 이에 대해서는 류진아의 글 「공간 인식과 여성에 대한 폭력-하성란 조경란의 소설을 중심으로」(『한국문학이론과 비평』 85집, 2019)를 참조할 수 있다. 7) 한병철, 『불안사회』, 최지수 옮김, 다산북스, 2024, 19쪽. 8) 권희철, 「타임아웃, 조경란, 그들 리뷰」, 『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60~61쪽. 9) 조경란 수상 소감, 「오늘은 여기까지만」, 『2024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52쪽. 10) 오르한 파묵, 『소설과 소설가』,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12, 149쪽. 11) 김미정, 「리무버블 스티커의 마음」, 『가정 사정』 해설, 304쪽. 12) "예전에는 소설이 어떤 이상(理想)이었다면 이제 소설은 생활(生活)이 되었다." (조경란, 작가의 말, 『가정 사정』, 310쪽)

계간 문학동네 성현아 작가론조경란원한연대소설 2025
김주원 불확실한 세계에 던지는 소설의 질문

김유진, 『평균율 연습』(문학동네 2024) 이미 단편 「음의 속성」(『보이지 않는 정원』, 문학동네, 2018)에서 등장한 바 있는 피아노 조율사는 김유진 소설이 다루는 가족간의 불화와 갈등에 잘 어울리는 직업이다. 미세하게 틀어진 음을 조절하고 감정의 진폭을 고르게 하는 일은 가족에게도 필요하다. 김유진 소설은 섬세한 조율사처럼 이들이 어떻게 틀어지고 불확실한 간극을 넓히게 되었는지를 탐사한다. 『평균율 연습』에서 이제 막 결혼 생활을 끝낸 수민과 수찬, 고리대금업을 하다가 실패한 수민의 엄마, 빠리에서 예술가로 활동하는 정우의 이야기는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는 피아노의 현처럼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주인공 수민이 피아노 조율 수업을 배우는 과정을 따라 삼인칭 시점으로 인물들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율은 산술과 이론이 아니라 경험과 실전만이 중요한 삶의 기술이다. “실제로 피아노를 만져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악기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걸 깨달”(57면)은 수민처럼 상대를 모르면서도 안다고 착각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수민과 수찬의 이혼에도 그런 오해가 있었다. 수민이 프랑스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 만난 수찬은 원예학을 전공한 유망한 청년이었으나 귀국해서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고 수민의 피로와 불만은 쌓여만 갔다. 수민에게 배우자의 무능력은 “아주 자주 유대와 이해를 가로막는 장벽”(20면)이었다. 먼저 이혼을 말한 사람은 수찬이었지만 이미 정서적 이혼 상태와 다름없던 수민은 살려고 이혼한다는 수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틀린 부분을 찾아 고치는 유능한 편집자인 수민은 판사처럼 “단죄하고 처단하”(41면)는 일이 어울리는 “너무 엄격하고 고지식”(122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수민의 불행은 엄마 임정희의 불행과 닮았다. 임정희가 어린 시절 딸이라는 이유로 부모와 형제들에게 무시를 당했듯 수민 역시 친척집을 전전하며 자신의 개인성을 존중받지 못하며 자랐다. 슬픔과 두려움을 위로해 줄 누군가가 없었던 이들에게 결혼은 인생의 도피처였다. 임정희는 남편이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주리라는 확신”(111면)을 가졌고 수민은 “자신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려다줄 것만 같은”(97면) 예감으로 수찬과 결혼했다. 그러나 이들은 남편의 무능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선택하고, 낭만적 사랑이나 구원의 허위성을 벗어나 자기 삶을 재조율하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해야 한다. 인생 초기의 결핍은 임정희와 수민을 무뚝뚝하고 애정에 인색한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가족 공동체에서 독립할 수 있게 했다. 이 점에서 『평균율 연습』은 가족보다 개인으로서의 과업에 몰두하는 여자들의 삶의 궤적을 그린다. 이혼 후 임정희는 생활고를 이겨내며 왕성한 경제활동을 펼친다. 서울의 아파트를 사고 시세차익을 노리는 “불확실한 숫자놀음”(73면)을 즐기며 전남편을 사업 파트너로 이용할 만큼 대범하고, 투자 사기를 당했을 때는 딸에게 호소하고 가족에 의지하기보다 주도적으로 소송에 임한다. 『평균율 연습』에서 이 둘과 대비를 이루는 것은 정우의 사랑 이야기이다. 정우는 프랑스 어학연수 시절 수민의 룸메이트이자 예술가로 자립한 여성으로 도피나 구원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온전한 자신의 사랑을 창조한다. 그녀는 남자친구가 자신에게 실수할 때조차 상대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는다. 정우는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있다. 불운한 사고를 겪은 그의 열일곱 살 시절로 가 곁에 있어주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의 척추를 따라 길게 이어진 흉터를 매만질 때마다 그 결함이 마치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149면)이라고 상상하는 정우는 그와 결혼 대신 새로운 가족형태인 시민연대계약을 맺으며 살아간다. 수민은 정우를 자신과 비교하지만, 그런 사랑은 수민에게도 있었다. 수찬의 이야기를 보면 이들이 서로 얼마나 기적 같은 존재였는지, 수찬이 얼마나 수민의 외로웠던 과거를 보듬어주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사랑은 결혼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우의 경우처럼 상대의 경험과 감정까지 자신의 것처럼 상상하는 능력이다. 수민이 수찬을 무능하게만 보는 것은 그런 상상력이 권태와 오해 속에서 무뎌졌음을 의미한다. 피아노 조율 학원 원장의 말처럼 평균율은 순정율이 만든 결함을 모든 건반에 조금씩 떠안겨 어긋남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절충하는 대안이다. 조율은 완벽한 순정율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수용할 때에야 비로소 거리가 아름다워질 수 있”(194~195면)는 미묘한 작업이다. 수민은 이 조율 훈련의 심화 과정을 마쳤다. 그러나 “수민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너그러운 세계(202면)”는 왜 “고치고 또 고쳐 쓰는”(202면)” 과정이 필요하다. 엄마와 수찬의 결함에는 그들만의 이유가 있다. 엄마 임정희는 이혼 후 돈에 집착하며 살 수밖에 없었고 소심하고 마음이 여린 수찬은 회사의 인원 감축에 어쩔 도리 없이 권고사직을 당했다. 그렇다면 수민에게 필요한 조율은 무엇을 의미할까. 조율 수업에는 교훈적인 메시지들이 많지만 조율의 핵심은 그것의 기능이나 유용성에만 있지 않다. 수민에게 고치는 일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하나하나 매만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두 음의 진동수를 조화롭게 만드는 기술이 단번에 되지 않듯 수민의 삶도 무언가에 천천히 시간을 들이는 과정에 있다. 『평균율 연습』은 상대의 결함을 나눠가지려는 시도가 사랑과 이해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기당한 엄마에게 같이 살자고 말하는 것은 수민이 선택한 조율의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소설의 결말에서 수찬이 이혼 후에도 수민과 수민의 어머니와 이어나가는 우정이다. 그것은 가족에 관한 하나의 대안이자 수찬이 만드는 평균율이다. 지금 가족 서사에 필요한 조율이 있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서로 지지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상상력일 것이다. 전지영, 『타운하우스』(창비 2024) 전지영의 『타운하우스』는 어둡고 불편하다. 이 이야기들은 대체로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과 위계가 삶을 어떻게 지옥으로 만드는지를 보여주고 결말을 유보한다. 긴장의 해소가 아니라 곤경의 실상을 지켜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말의 눈」은 폭력의 전염성을 파헤친 수작이다. 주인공 수연은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던 딸 서아를 섬에 있는 국제 학교로 전학시킨다. 새출발을 결심한 그곳의 타운하우스는 CCTV와 보안이 완비되었지만 그럴싸한 외관과 달리 미세하게 갈라진 이층 천장 틈으로 물이 새는 곳이다. 이곳에서 수연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10면)을 경험한다. 이번에는 서아가 지희의 딸이 저지른 학교 폭력을 옆에서 방관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수연은 서아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입하지 않은 채 서아가 가해자가 아니라는 것에 ‘비겁한 안도감’을 느낀다. 같은 타운하우스 이웃인 지희는 수연의 이러한 모순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인물이다. 지희는 자신의 딸이 가해자지만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걸 서아가 증언해 주기를 바라며 그동안 쌓은 친분과 의리를 내세워 수연을 압박한다. 지희는 폭풍우를 무릅쓰고 비가 세는 수연의 집 지붕에 올라가 방수포를 덮으려다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어떻게든 자기 아이를 구하겠다는 지희의 얼굴에서 수연이 자신의 얼굴을 보는 장면은 예리한 통찰력이 엿보인다. “아이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35면)는 모성은 그들이 그토록 피하고 싶어하는 폭력을 은폐함으로써 폭력에 공모하기 쉽다. 지희처럼 궁지에 몰린 부모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그것은 수연에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35면)이다. 여기서 피해자와 가해자, 방관자의 경계는 매우 모호하며 폭력은 언제 어디서든 서로를 위협하고 전염시킬 수 있다. 눈여겨 볼 점은 피해자의 내면에 숨겨진 가해 심리다. 친구의 폭력을 관망했던 서아는 맞는 아이의 고통을 외면하고 “차라리 때리는 쪽”(26면)이 낫다고 말한다. 수연의 가해 심리는 한층 교묘하고 잔인하다. 수연은 지희에게서 과거 자신의 선처를 바라던 가해자 부모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희를 떠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지붕에서 떨어진 지희가 깨어나지 않기를 은밀히 바란다. “같은 폭력을 반복”(23)할 것이라며 가해자들을 엄정하게 심판했던 수연의 도덕적 신념은 서아가 잠재적인 가해자가 됨으로써 무너진다. 소설 초반에 타운하우스를 어슬렁거렸던 말은 검은 실루엣으로 수연 앞에 다시 나타난다. 여기서 수연이 낯설게 마주한 것은 바깥의 위협 때문에 보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이다. 수연은 말의 눈에 비친 얼굴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보지 못한다. 무고한 피해자였던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검은 웅덩이 같은 말의 눈은 수연으로 하여금 자기 안에 숨겨진 가해자의 마음을 보게 만든다. 수연은 자신을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폭력의 악순환은 지금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현실이다. 이 소설집에 엮인 작품들에서 삶의 안전지대는 찾아보기 어렵다. 걷잡을 수 없이 물이 새는 타운하우스는 “갑작스런 기온 변화, 결로, 바람과 비에 약”(8면)하고 인물들의 갈등은 악천후 속에서 고조된다. 이런 식의 묘사가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전지영의 소설에서 변화무쌍한 기후(climate)는 불가해한 삶에 관한 징표로 때로 인물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쥐」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와 솟아오른 불기둥은 군 내부의 불미스런 의혹을 감춘 해군 관사를 태울 기세로 커진다. 그러나 관사를 돌아다니는 쥐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부조리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에서 기습적인 스콜은 아들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공무원인 주인공은 불합리한 공공 사업에 몰두하느라 아들의 죽음에 무방비 상태였고 성공적으로 끝난 사업은 자신의 일상에 예기치 않은 해를 입히는 중이다. 스콜은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침수시키며 평온한 일상 속에 숨어 있던 문제들을 수면 위로 올려놓는다. 「소리 소문 없이」의 ‘나’는 음대 입시생으로 피아노와 악보가 삽시간에 물에 잠기는 수해를 겪는다. 이 “이해되지 않는 일”(211면)은 입시 경쟁으로 누군가를 무너뜨리고 싶어하는 ‘나’의 뒤틀린 욕망을 누그러뜨리는 계기가 된다. 한편 자연재해와 관련된 소설적 배경은 삶의 불평등과 부조리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언캐니 밸리」 속 도시 고지대에 있는 부촌 청한동에서 흐르는 물은, 장마철마다 ‘나’가 세 들어 사는 저지대 상가 건물을 물바다로 만든다. 그러나 청한동 노부부의 저택에서 일어나는 수상한 약물과 주사가 오가는 일들에 ‘나’는 접근할 수 없다. 기후는 한국 사회의 계급 지형도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침식시키는 중요한 사사적 요소이다. 『타운하우스』에서 악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친구나 동료에 대해 악의적인 루머를 퍼뜨리고(「뼈와 살」, 「소리 소문 없이」) 부당한 업무와 명령에 복종하는(「쥐」,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 인물들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할 뿐이다. 「맹점」에서 안과 의사 은애도 그런 유형의 인물이다. 은애는 어시장 노인들에게 고액의 백내장 수술을 해주고 보험제도의 틈새에서 이익을 착복한다. 병원에 노인 환자들을 공급하며 “주는 걸 확실히 주고 받을 걸 확실히 받는”(121면) 보험회사 영업사원 재복과 과잉 진료로 수술 건수를 늘리는 은애는 「말의 눈」의 수연과 지희처럼 비슷한 욕망으로 조응한다. 은애가 검게 젖은 어시장을 빠져나올 때 고양이 한마리가 생선 피와 비늘, 내장으로 범벅이 된 입으로 은애의 발을 맹렬하게 핥는 장면의 기이함은 그녀의 맹목적인 탐욕을 암시한다. 사회적 약자이자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던 은애의 성공은 그러기에 더 착잡하다. “한 사람이 웃으면 다른 사람은 웃지 못하는”(「뼈와 살」) 경쟁 사회의 심리는 거의 생존 본능처럼 전지영 소설의 인물들에게 내면화되어 있다. 상처받은 피해자의 이야기는 익숙하다. 그러나 『타운하우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피해자의 상처를 돌보지 않는 사회가 만드는 파괴적인 갈등이 주목한다. 모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는 사회는 끔찍하다. 「맹점」의 은애처럼 소설의 다른 인물들도 자신의 성공 뒤에 누군가의 불운과 불행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불길한 날씨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휩싸인 『타운하우스』는 각자도생의 시대를 반영한 한국형 고딕 소설로 손색이 없다. 비슷한 갈등 구조와 패턴이 반복되는 면도 있지만 이들 이야기가 일으킨 균열은 오래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그것은 낯설고 두려운 일이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의 폭력에 가담하는 사람들, 더 나쁘게는 알면서도 그 불길한 운명에 적신 발을 빼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얼굴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계간 창작과비평 김주원 가족 서사우정폭력가해자피해자기후(climate)불평등 2025
김재복 시 만드는 지구의 동기 동창생

시 만드는 지구의 동기동창생 -故 최춘해 시인을 추모하며 제때에 맞추려고 하기보다 먼저 가 있다가 맞으면 얼마나 반가워하겠어? 「여유 3」 부분(『엄마가 감기 걸렸어』에 수록 “시를 만들려고 지구는 돈다”는 「시의 세계」 마지막 연이다. 최춘해 시인(1932~2025)의 첫 동시집 『시계가 셈을 세면』에 수록되었다.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란 사실 시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지구는 그걸 가능하게 하는 맨 바깥의 주체일 것이다. 이 동시집은 1967년 한글문학사에서 나온 초판본 그대로 2017년 브로콜리숲에서 다시 나왔다. 글씨체며 묵은 종이 등 반세기 전 질감을 그대로 살렸다. 이원수 시인의 인사말과 김종상 시인의 해설이 다정하다. 거기에 최춘해 시인의 말을 보면 『시계가 셈을 세면』이 대단한 응원과 환대를 받으며 세상에 나온 게 고스란히 느껴진다. 얼른 시집을 내라고 다그치는 소리와 아직 때가 아닌 거 같다는 주저의 목소리, 드디어 나왔으나 이미 나왔어야 한다는 축하의 말이 웅성거려서 각별하다. 최춘해 시인의 등장은 그렇게 환대 속에서 이뤄졌다. 대구광역시가 2022년부터 원로예술인 구술기록화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최춘해 시인이 첫 예술인이다. 12분 40초 분량의 영상은 현재 대구광역시 문화예술아카이브 공식 유튜브 채널 (@dgartsarchive)에 올라와 있다. 충분히 길지는 않은데 시인의 생애가 잘 들어있다. 영상 속 노년의 시인은 동심에 대해서도 밝힌다. 반세기 넘게 동시를 쓰고 가르쳐 온 시인에게 동심이란 사랑에 바탕을 둔 “물활론”이었다. 시인의 확신이 그의 작품처럼 담백해서 인상적이다. 암닭이 알을 품 듯 봄님이 온 세상을 품고 있다. 안개 낀 아침. 닭의 체온으로 보송 보송 예쁜 병아리가 깨이고, 봄님의 품안에서 병아리처럼 고렇게 예쁜 연두빛 새싹이 깨일테지. 조올 졸 내리는 비는 새싹의 젖줄. 새싹이 눈을 감고 강아지처럼 젖줄을 빤다. 「이른봄」 전문(『시계가 샘을 세면』에 수록) 물활론적인 생기로 가득한 「이른 봄」은 그의 등단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196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부문에 뽑혀 등단했다. 첫 시집 『시계가 샘을 세면』(한글문학사, 1967 브로콜리숲 재판, 2017 이후 시계)에서 그랬듯 생애 마지막 즈음에 발간한 두 동시집 『엄마가 감기 걸렸어』(브로콜리숲, 2021 이후 엄마가)와 『말 잘 듣는 아이』(브로콜리숲, 2022 이후 아이)에 와서도 물활론의 태도가 유지되었음은 당연하다. 혜암이라는 호 외에 그의 이름 앞에 어김없이 붙는 흙은 온 세상을 품는 봄님과 같은 존재다. 앞에서도 보았듯 첫 시집에 실린 「시의 세계」 속에서 지구는 시를 만드는 주체로 등장한다. “여름 시를 만들려고 아카시아 꽃송이가 벌을 부르듯”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은 시를 만드는 행위 주체였다. 그 가장 바깥의 존재가 지구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생기는 건 다 시를 만드는 행위였다. 시인이라고 예외일 리 없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의 시에서 자주 발견되는 겨울과 봄의 연결, 바람이 하는 일, 겨울 깊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11월(「겨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11월」『말 잘 듣는 아이』)의 이어짐, 씨앗을 품은 땅속 등의 이미지는 한시도 단절을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가 감기 걸렸어』와 『말 잘 듣는 아이』는 1년 사이를 두고 연달아 나왔다. 두 권의 시집 이전에 2008년 『소나무야, 소나무야!』(그루)가 있었으니 13년 만이다. 『엄마가 감기 걸렸어』와 『말 잘 듣는 아이』는 시인의 생애 후기 창작 활동을 가늠할 자료가 되었다. 첫 시집 『시계가 샘을 세면』의 시간으로 되돌아갔다가 『엄마가 감기 걸렸어』 『말 잘 듣는 아이』로 돌아와 보니 물리적 시간뿐만 아니라 시의 대상도 변화했다. 50년 전 그에게는 학교와 학생이 있었다. 『시계가 샘을 세면』 시기의 작품들은 자라고 바라고 성장하고 무엇이 되고 쌓이고 물이 들고 살이 찌는 상승의 세계다. 긴 시간이 흐른 뒤 『엄마가 감기 걸렸어』 『말 잘 듣는 아이』의 시기는 산책과 사유의 시간이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생각들, 비인간 동식물은 그의 이웃이다. 경로당과 양로원, 공원, 미디어는 새로운 장소가 되었다. 삶의 방식과 이웃은 달라졌지만 물활론의 세계관을 비롯해 낮고 약한 것, 작은 것, 일상의 사물에 마음을 쓰는 건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백하고 꾸밈없는 그의 동시 언어에서 세월을 감당한 힘을 강하게 느꼈고 위로를 받았을 정도다. 몇몇 이유로 『엄마가 감기 걸렸어』와 『말 잘 듣는 아이』를 최춘해 시인의 육성이라 생각하게 된다. 일인칭의 화자가 수용과 인정, 여유와 자족, 감사와 타자를 향하는 걱정의 행위 주체가 되는 건 어른의 말과 사유에 가깝기도 하다. 거기에 “양로원, 경로당, 하느님, 말쑥하다, 길이 질다, 홰를 치다, 묵은 속잎, 객지로 떠나다, 축사를 하다, 식전, 천당, 맨손체조, 동기동창, 용하다, 내리막길, 눈에 밟혀, 빨가벗고 물장구치던, 더 바라고 싶지 않다”와 같은 시어와 문장들은 지금 이 시대보다는 그의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런 시어들이 소통과 감상을 방해하는 건 결코 아니다. 시의 목소리를 누군가에게 맞추려는 대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쪽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물활론의 체계 안에서 투명하고 간결하며 모호함이나 암시가 없는 말은 또 다른 소통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무엇보다 자유로워 보였다. 꽃이 작은 건 내 개성이다. 기죽지 않겠다. 장미처럼 드러내고 싶지도 칭찬 받고 싶지도 않다. 내 깜냥 껏 향기 내고 꽃 피고 열매 맺고 나처럼 작은 개미, 나비애벌레들과 함께할 수 있어 좋다. 이만하면 내가 누리는 큰 복이다. 「쇠별꽃」 전문(『엄마가 감기 걸렸어』에 수록) 이 단호한 자기 확신의 주체 쇠별꽃은 “이 넓은 우주 속에 키 150cm의 나.”(「기상대 공원에서」『엄마가 감기 걸렸어』)이며 “고 작은 몸으로 달리기도 하고 일기도 쓰”는(「지구본을 보면서」『엄마가 감기 걸렸어』) 나, 화분 밑 물구멍 돌이 되고 싶은 길바닥 돌멩이, 폐지 줍는 할아버지에게 값이 되어주고 싶은 버려진 깡통(「목적 없는 것 찾기」『엄마가 감기 걸렸어』) 들이다. 작지만 깜냥껏 단독자의 삶을 살아낼 줄 아는 삶을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하는 말이 심상치 않게 들리는 건 그가 현재의 최춘해 시인이어서 일 것이다. 이들 작은 주체들은 다양하게 변주하며 무리를 이룬다. 그들은 초등학교 동창생과 더불어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비둘기 참새, 가로수, 개나리, 강아지풀, 잔디, 서로에게 손잡이가 되어주는 양로원 할머니들, 공원의 운동기구들, 시멘트 블록 좁은 틈새에 한 자리 차지한 민들레, 제일 안과 병원 의료진, 한 몸 같은 반려견들은 “나와 함께 사는 이 시대 동창생”(「동기동창생」이다. 이 소박한 공동체는 노년기의 제한적인 신체적 행동과 사회 활동 범위를 생각하면 쓸쓸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크고 넓고 많은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후의 여유와 고요한 충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햇빛이 환하다. 더 바라고 싶지 않다. 저한테 오늘을 주신 하느님이 고맙다. 「오늘」 전문(『말 잘 듣는 아이』에 수록) 영화 <퍼펙트 데이즈 Perfect Days>(2024)는 도쿄 시부야에서 공공화장실을 청소하는 남자 이야기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비질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눈떠 일을 하고 몇 장의 책을 읽다 잠드는 일상이 영화 내내 반복된다. 그 남자는 출근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어김없이 날씨를 살피는데 그게 어떤 날이든 “더 바랄 게 없어”라는 눈빛이다. 「오늘」은 당연한 오늘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받은 감사의 오늘이란 감각을 고요히 재현했다. 이대로 완벽한 날이다. “산에서 내려가는 길은 왔던 길이라 쉽지만, 인생길은 내리막길도 처음이라 험한 고비가 자주 닥친다. 하지만 마음을 비우면 행복이 된다.”(「내리막길」『말 잘 듣는 아이』)라는 말처럼 두 권의 시집에서 자주 느끼는 건 감사와 수용, 여유를 담고 있는 어떤 고요함이다. 그렇다고 시인의 시에 은근히 스며들어 있는 건강함과 씩씩함을 모를 수는 없다. 시멘트 블록 좁은 틈새에 솟아난 민들레 어려운 일자리 하나 갖게 되었다고 노랗게 웃고 있다. 「한 자리 차지한 민들레」 전문(『말 잘 듣는 아이』에 수록) 이 시에서 재난적 감염병 시대를 지나며 우리가 겪고 보았던 실직과 고단한 현실이 스쳐 지나가는 건 시어 ‘일자리’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 존재의 장소가 있을 텐데 그걸 잃어버린 시간이 길었다. 미처 자리로 돌아 오지 못하거나 사라진 자리로 인해 부유하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달콤한 위로 일지 몰라도 민들레의 존재감은 슬픔과 우울을 이기게 한다. “한 자리 차지한 민들레”는 시멘트 블록 좁은 틈새라는 장소의 어려움, 꽃피는 일의 존재론적 어려움을 뚫어낸 존재다. 어려운 일을 해낸 뒤에 피는 민들레의 웃음에 박수를 보낸다. 「비스듬한 게 내 모습이다」「부럽지 않다」「지구본을 보면서」「기상대 공원에서」(『엄마가 감기에 걸렸어』), 「부지런한 바람개비」 「반려견과 함께」 「동기동창생」 「대단한 무화과 나무」 「구글에게」 「고마운 운동기구」 「오월이 없다면」 「말이 하고 싶은 플라타너스」 「생각이 없는 바람개비」(『말 잘 듣는 아이』) 등의 시는 솔직하고 정직한 말이 주는 건강하고 씩씩한 힘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들이다. 그는 두 권의 시집을 연이어 내며 고쳐 쓴 시를 다시 싣기도 했는데 그건 그의 평소 창작 습관인 듯하다. 침몰하는 세월호 안에서 학생을 먼저 구한 뒤 끝내 돌아오지 못한 최혜정 선생을 다룬 「최혜정 선생님(25)」(『엄마가 감기에 걸렸어』)의 경우 『말 잘 듣는 아이』에 「최혜정 선생 목소리」로도 실렸다. 기상대 공원을 소재로 다룬 시도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사회적 나이를 잊게 하는 시인의 열정적인 퇴고 과정을 실시간처럼 보는 건 의외의 감동을 주었다. 완벽한 작품을 향한 시인의 작가적 욕망일 수도 있지만 내겐 세상을 향해 마음을 쓰는 일로 다가왔다. 그는 텔레비전을 통해 알게 되는 슬프고 기막힌 일들을 자주 이야기하곤 한다. 함께 기뻐해야 할 일에 한껏 즐거워하는 일도 잦았다. 산에는 밑바닥 깊숙한 곳에서 맑은 기운이 솟고 있다. 바위 틈에서 맑은 물이 솟고 있다. 맑은 바람이 이쪽 저쪽 골짜기 건너다니며 머리를 맑게 씻고 있다. 나비와 벌들이 풀꽃 사이를 누비고 있다. 햇빛이 여기 와서는 분홍빛으로 내려앉고 있다. 나무들이 새들의 노래를 듣고 풀과 바위가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기 밤, 아기 감들이 말을 배우고 있다. 몸짓이 서툴러서 아기 도토리가 더 귀엽다. 새로 이사 온 오동나무도 낯설지 않게 감싸 준다. 아무라도 발붙이고 살도록 한 식구로 맞이하는 흙. 「이사 온 오동나무도 낯설지 않게」 전문, <블랙> 31호, 2023 생전의 시인을 만난 적이 없다. 그를 흙의 시인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첫 시집과 나중 시집을 나란히 읽으며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의 자연스러움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작고 연약한 것들을 향한 관심을 거둔 적이 없다. 그들을 연민이나 나약함이 아니라 당당한 존재로 자리 잡아 주었다. 시의 공간과 대상이 학교와 어린이에서 양로원과 공원, 할머니로 변하는 건 자연스럽다. 나이 듦의 변화를 받아들이되 목소리는 여전히 투명하다. 담백한 말법으로 보고 말하는 세상은 성장과 가능성의 상승 세계에서 감사와 여유로 내려오며 고요하고 충만했다. 이제 그는 이 세상과 헤어져 다른 세계로 갔고 그곳에서 그는 새로 온 오동나무일 것이다. 그곳이 어딘지 알 수 없다. 다만 비로소 흙의 품에 안긴 듯 깊고 평안하게 주무시길 기도한다.

계간 동시먹는달팽이 김재복 최춘해흙의시인연결물활론노년다시쓰기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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