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월간 현대문학 2025년 3월호(제843호)
시적인 미래에 대하여 ―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2
시적인 미래에 대하여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2 1)
박동억
1. 미래 상실
현대시에는 미래를 그려낼 가능성이 남아있을까. 이것이 송현지 평론가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격월평을 읽으며 떠올렸던 질문이었고, 이 글의 저자 또한 그러한 물음 속에서 동시대의 시를 살핀 뒤 조심스럽게 해답을 구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송현지는 어떤 찬사나 비판도 유보한 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이제 ‘미래’는 더 이상 내가 알던 멀고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바로 다음 시간. 현재와 ‘1인치 정도’ 다른 자리와 높이에 머무르는 시간.”2) 이는 우리 시대의 시에서 구체적 생활에 기대어 미래가 표현되고 있음을 해설하는 내용이지만 곱씹어볼수록 오히려 현대시가 내포한 문제를 암시하는 듯한 문장이기도 하다. 냉소적으로 읽는다면, 이것은 현대시에서 그려낸 ‘미래’가 자연재해나 사회의 변혁과는 거대한 사건과는 무관한 다락방에서 일어나는 사건, 아니면 고작 생활 반경의 ‘1인치 정도’ 둘레에서 일어나는 몽상에 지나지 않다는 진단처럼 들린다.
다시 묻자. 누군가는 사이보그와의 공존을 꿈꾸고 누군가는 화성 개척을 꿈꾸는 이 시대에 시인은 어떤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수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통찰했듯, 사람은 시간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없고 단지 물질의 움직임으로부터 유추할 뿐이다. 한편 시인은 물질의 운동이 아닌 마음의 운동을 통해 세상을 통찰하는 길을 택한 자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난 수백 년간 마음의 변혁을 꿈꾸며 때론 시대의 선구자를, 때론 사회의 혁명가를, 때론 세계의 카나리아를 자처해 왔다. 그러나 동시대의 시가 사람의 마음을 ‘1인치 정도’ 움직이는 데 그친다면, 우리는 차라리 이 시대의 시인은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즉 주어진 인간성의 파수자를 자처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미래에 대해 상상하기를 포기하는 자세가 아닐까. 어제처럼 직장에 출퇴근하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들여다보다가 잠이 들기를 반복하는 것이 미래라면, 이제 더 이상 시인과 생활인의 삶을 구분할 수 없다면, 결국 시인은 수많은 현대인처럼 다 계획되어 있어서 이미 진부해져 버린 미래로 향해가는 셈이다. 더 이상 지평선 너머로 향하지 않는 두 눈이 있다. 매번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길을 산책한다. 그렇게 현대시는 미래 상실을 앓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것만 같다.
나는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읽는다. 혁명 후에 쓰인 자연의 성난 풍경 또한 읽는다. 그것은 나의 일. 그렇게 읽던 책을 덮으니 하루가 끝났다. 하루가 끝나도 뉴스는 멈추지 않고,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있고, 일렁이고, 나는 늙고, 다시 책 앞에 앉는다. 창을 열자 빛나는 칼을 삼킨 마술사처럼, 겨울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안은 알 수 없는 백색 진동과 고요로 뒤섞인다. 창을 닫아도, 난폭하고 날카로운 겨울은 내게 바짝 붙어서 있다. 떤다. 이 책이 얼기 전에 나머지를 읽어야 한다. 손이 떤다. 다 읽어야지만, 이 긴 하루가 끝날 것이다. 떠올린다. 풀이 눕는다. 하지만 어떤 풀은 죽고, 어떤 풀은 흔들리고, 어떤 풀은 죽은지도 모르고 여전히 파랗게 일렁이겠지. 떤다. 수영. 나는 저 풀들을 넘어, 죽은 수영의 나이를 넘어, 자꾸만 죽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나이가 되었구나. 내 마음에 살아남은 이가 없는 나이가 되었구나 생각하고 떠올리는 사이, 겨울의 차고 희디흰 장막이 책을 덮는다. 그 위에 손을 올린다. 손이 굽는다. 생활이 나를 세차게 때리고, 모든 약속이 깨져버렸을 때도,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 검은 물속에 잠겼을 때도 버리지 않았던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 마음도 굽는다. 수영. 달처럼 차고 날카로운 이것을 나는 읽을 수 있을까. 떤다. 굽은 마음과 손안에는 겨울이 숲을 무너트리는 그 시절의 소리만 가득하다. 그 시절, 몇몇 죽은 자들은 여전히 공장 여기저기를 배회하곤 했다.
김안, 「김수영 전집」 부분,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차라리 김안 시인은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의 회고에는 불안과 가책에 깃들어 있다. ‘해방’과 ‘혁명’이라는 단어를 심장으로 삼았던 시대가 있다. 시인은 김수영 전집을 읽으며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떠올린다. 그러나 시인은 다음과 같은 사실 또한 확신하고 있다. 김수영의 뜨거운 정신은 이제 차가운 ‘책’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혁명의 시간은 이제 기록일 뿐이고, 자신 또한 저 광장이 아니라 이 방안에서 긴 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이 세상의 계절은 “날카로운 겨울”일 수밖에 없다. 이때 겨울은 이젠 무색해진 과거를 뜻하고, 그 겨울을 칼날처럼 느끼는 시인의 마음은 수영의 정신을 온몸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가책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김수영 전집에 ‘손’을 올리는 행위는 하나의 제의에 가깝다.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라는 시구는 곧 김수영을 향한 추모, 그 혁명 정신이 돌보아야 했던 공장 노동자를 향한 추모, 마지막으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던 시인의 능력을 향한 추모를 뜻한다.
추모는 현실의 맥락에서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이지만 마음의 맥락에서는 누군가 욕망했던 것을 뒤따라 욕망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진정으로 향수되는 것은 수영도, 공장 노동자도 아니라 그들의 각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뜻을 품을 수 있었던 인간은 어디로 갔는가. 시인에게 시집을 펼치는 일이 제의와 같다는 말은 곧 추모가 마음을 보듬고 치유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작품에서 마음은 ‘굽는다’. 죽은 자는 세상을 ‘배회한다’. 근본적으로 이 시에서 찾아헤매는 것은 마음을 빗겨놓는 우회로이다. 현재를 여실히 살아낼 수도 없고, 미래를 꿈꿀 수도 없는 시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과거라는 우회로이다. 그것은 앞으로 살아내야 할 시간에 응답하는 김안 시인의 방식이다. 마음의 운동 혹은 변화가 곧 문학적인 시간의 본질이라면, 시적인 미래는 반드시 물리적인 미래를 전제하지 않는다. 김안 시인에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 당신의 빛 바랜 욕망에 응답하려 할 때 사람은 아직 실현하지 못했던 삶의 방식을 재현한다.
2. 극복할 수 없는 것에 터 잡기
‘시간은 변화’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테제를 조금 더 문학적 어휘로 옮긴다면 문학적 시간의 본질은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 문학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방식이다. 성숙의 실마리는 반드시 미지의 탐구로만 획득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잊었던 과거로부터 발굴될 수도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현대시의 미래 상실은 곧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거나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잃은 자의 징후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섬세하게 분별할 것은 현재를 ‘벽’으로 느끼는 목소리와 현재에 자족한 자의 목소리는 근본적으로 상반된다는 사실이다. 김안 시인은 미래를 직설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음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미래를 소망하게끔 한다.
이제 동시대 문학과 문학적 시간에 대한 이해를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고자 한다.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장 단순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시간은 성숙(변화)이다. 그런데 생각해 볼 것은 이 세상에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두 손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듯 마음으로 이룰 수 있는 것 또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떠올려 보면, 근대의 위대한 철학자들 또한 그들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보다 그 무엇인가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절망을 깊이 사색했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것은 결코 바꿀 수 없다’라는 인식이 시대마다 달랐다는 점이다. 18세기 중엽 루소는 『에밀』을 집필하면서 자연은 절대 극복할 수 없으니 사람과 도구를 자연에 적응할 수 있게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20세기의 프로이트는 말년 동안 인류가 문명을 통해 자연을 극복했지만,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타인과 더불어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난제로 여겼다. 루소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었고, 프로이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이웃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우리에게 불변하는 사실은 무엇일까.
심심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해 여름
우리는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함께 보고 넷플릭스를 온종일 틀어 놓았다. 창밖에서 사람들은 노잡이의 얼굴을 하고 가히 영웅적으로 걸어다녔다. 심심해서
창밖의 사람들에게 뛰어들 수도 있을 것 같지. 사무라이의 칼을 횡으로 쥐게 한 다음 전속력을 달려들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렇지만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
그해 여름
우리는 배달 음식을 주문하고 우리는 나란히 누워 죽고사는 이야기를 지속하였다.
이왕 죽을 거라면 뚱뚱해져서죽고 싶어. 피자 한 판을 겹쳐서 먹다가 코로 치즈를 질질 흘리면서. 이왕 태어날 거라면
결코 끝나지 않을 성대한 파티를 시작합니다. 주최자가 강단에 서서 연설을 시작할 때, 샹들리에가 되어 모두를 다치게 하고 싶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혀에 틀어박혀서…….
검은 양념이 묻은 나무 젓가락을 씹으며 네가 말한다.
삽십 초에 한 번씩
유성이 떨어지고 있다.
어째서 우리가 가진 건 절망조차 가짜일까.
위대한 화가의 삶과 죽음을 다룬 애니메이션이 상영 중이고.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처럼.
그해 여름, 나는 망친 그림 속에 너를 두고 빠져나왔고
그림 속에서
너는
나를 그리는 중이다.
안 넘어진다. 가위바위보.
변혜지, 「럼펠스틸스킨」 전문, <현대시> 2025년 2월호
이 작품의 주조는 무엇인가. 작품 전반에서 분노와 장난기가 맴돈다는 것은 쉽게 감지할 수 있겠으나 더 깊게 자리하는 것이 세계에 대한 체념임을 읽어내야 한다. 분노에만 집중한다면 자칫 이 작품의 주제를 인간에 대한 혐오나 불신으로 오인할 수 있겠다. 분명 화자는 창밖의 사람에게 사무라이처럼 칼을 휘두르는 상상을 하고, 파티장의 샹들리에가 추락하듯 사람들을 다치게 만드는 상상도 한다. 여기에는 타인에 대한 냉소, 특히 인간을 장난감과 같은 대상으로 취급하는 냉소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 한편 제목은 유희성을 강화하는데, 독일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요정인 ‘럼펠스틸스킨’을 제목으로 택했지만, 내용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타당하지 않은 분노와 무의미한 유희성을 감지할 수 있는데, 그 두 정조의 뿌리에 놓인 것은 삶에 대한 체념으로 보인다.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라는 시구가 암시하는 바는 명백한데, 그것은 타인뿐만 아니라 ‘나의 삶’도 헛것이라는 인식이다. 내 생활은 가짜이고, 내 마음속 절망조차 가짜라는 진술 또한 뒤따른다.
결국 타자에 대한 공격성의 뿌리에는 바로 자기 부정이 놓인 셈이다. 근본적으로 부정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이 시의 내용을 물음으로 바꿀 수 있겠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란 의미 있는 것일까. 나와 저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든 이 세상은 무사하지 않을까. 내 존재가 행복하든 절망에 빠지든 창밖의 거리는 안녕하지 않을까. 자포자기하듯, 이 시의 화자는 우리가 ‘잡놈’에 지나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 이후 ‘나’와 타인을 아무렇게나 대한다. 이 작품의 주제는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부조리 문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처럼, 변혜지 시인은 충동적으로 살인을 꿈꾸는 화자를 등장시킨다. 하지만 이 작품에 묘사되는 폭력성의 크기는 그 반대급부로서 얼마나 이 현실에 자신이 얽매여 있다고 느끼는지를 투영한다.
세계가 이상해진 지 오래되었다. 선후관계는 도미노 같다. 쫓다 보면 결국 무너지는, 언젠가는 깔려 죽게 될
그런 일.
책을 팔아 복숭아를 사 왔는데 껍질 새 초파리가 살고 있었다. 똑똑, 나가주면 안 되겠니. 나는 어리니 자신에게 양보하라고 지적받는다. 아직 후숙이 필요한 과정이구나. 이번 여름 복숭아는 노약자석과 비슷한 것 같다고 이해한다. 오늘의 공원은 겨울을 동경한다. 머리카락을 비질하는 미화원과 컷불을 뚫고 들어오는 빛들. 공사 중이죠? 저수지를 만들겠다고 해 흔쾌히 자릴 양보해주었다.
한 그루의 몫. 한 그루의 치아.
피스타치오 밭은 없나? 원하면 있다. 풍경은 성조기가 펄럭이는 곳으로, 줌인. 시간은 달밤, 연인들이 나무 밑에 모여 있다. 딱따구리 없이도 부서지는 캘리포니아의 숲. 거기 뭐해요? 행운이 쪼개지는 소리를 들으려고요. 겸사겸사 입도 맞추고요.
아, 예. 그럼 열심히 하십쇼. 열매 하나 으적으적 씹으며 걷는다. 행운은 텁텁한 맛이구나. 물드는 풀빛의 혀. 나는 키스할 상대 없이 필터에 입을 댄다.
여름의 공원은 저수지를 걸고 소송 중이다. 개들은 사람의 사정 따위는 알바가 아니고 저수지를 사랑한다. 우리에게는 분쟁이 있고 시간이 필요했다. 빨리 만들수록 더 많은 사람이 죽을 뿐이라는 협회의 말에 가능한 천천히 물을 붓겠다고 합의한다. 깨끗하게 청소한다. 저수지가 생긴 어느 미래를 향해 물을 붓고 붓고 또 붓다 보면, 도달하는 가능성에
언젠가 초파리도 죽게 될까?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엄시연, 「가드닝」 전문, <포지션> 2024년 겨울호
엄시연 시인의 시에서도 세계는 부조리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그 어조는 지나치게 담담하고 그것은 어쩌면 마음을 쏟아낼 이유조차 상실한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한다. 첫 행이 암시하듯 세상은 언제든지 사람을 ‘깔려 죽게’ 만들 수 있지만 그 원인이나 결과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불온한 조짐만이 암시될 뿐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움직이고, 무관하게 연인들은 서로 입을 맞추며 사랑을 확인하고 있다. 이 대비보다 의아한 것은 화자의 태도이다. ‘나’는 죽음의 불안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연인들의 사랑에 전염되지 않는다. 그저 이 모든 것을 적당히 거리를 둔 배경 취급하며 복숭아를 먹고, 저수지를 산책하며, 행운을 찾아 헤매면서 그저 생각에 잠길 뿐이다.
죽음을 필연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탈출구란 존재하는 것일까. 시인은 “도달하는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상 작품 안에서는 어떠한 희망도 암시되지 않는다. 사람이든 초파리에게든 암시되는 것은 죽음 뿐이다. 저수지와 차오르는 물의 모티프는 언뜻 기후 온난화와 홍수를 떠올리게 하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변혜지의 시와 엄시연의 시는 똑같이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도, 사람들도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가드닝」의 마지막은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라는 시구로 끝맺는다. 이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현대인의 무력함에 대한 여실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입 맞춤의 상대가 있어도 좋고 없으면 ‘필터’에 한다. 저수지를 놓고 소송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나’와 무관하다.
한 시대의 사색은 그 시대의 불변하는 사실에 터 잡는다. 자연을 극복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부터 루소의 교육론이, 반드시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모색되었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시에서 극복할 수 없는 대상으로 감각되는 것은 세계 그 자체, 무엇보다 세계의 무의미성으로 판단된다. 「럼펠스틸스킨」에서 현실은 영상이나 그림 같은 것, “가정용 플라테타리움”이나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 등으로 비유된다. 이러한 비유는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 새로운 붓질을 할 의지도 지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드닝」에서 세상은 언제든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이상한’ 공간이지만, ‘나’는 그곳에서 야기되는 죽음의 조짐을 방관할 뿐이다.
이들의 시에 맴도는 부조리는 다음을 유추하게 한다. 이제 이 세상에서 인간은 무용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세상은 어제처럼 작동할 것이다. 우리는 ‘잡놈’으로 연명할 것이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며 죽어갈 것이다. 이 예정된 미래에서 미래의 쓸모란 무엇일까. 이제 현대는 루소주의자의 사색을 지나, 프로이트주의자의 숙고로부터도 멀어지며, 차츰 인간 존재에 대한 냉소와 부정으로 옮아간다. 극복할 수 없는 것은 과거에는 도구나 사물로 취급했던 것,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체계이다. 인간조차 사물의 지배자가 아니라 이 윤택한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일부인 양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물 없이 사람은 살 수 없다는 것, 현대시는 이 절망에 터 잡아야 할 것이다. 선택지는 많지 않아 보인다. 변혜지와 엄시연의 시는 다음의 ‘도달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새로운 인간은 사물이나 다름없이 행동하는 방식, 즉 자아를 사물화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이 외에 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는 것일까. 단숨에 답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은 찾아 헤매야 하는 새벽이다.- 1) 이 글은 <문학과지성사> 2024년 겨울호의 졸고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와 연속성을 지닌다.
- 2) 송현지, 「제자리 뛰며 나아가는 미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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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지나고 봄을 맞이할 때 반가움보다 피로가 앞서는 것은 지난 계절이 지나치게 소란했기 때문일까. 이별 뒤에는 긴 피곤함이 있다는 돌아간 철학자의 말1)을 곱씹는다. 시절의 시곗바늘에 정확히 때맞추어 걸음을 옮길 수 없을 때 환절기는 더욱 길어진다. 이것도 하나의 사태라면 사태다. 사건이 아니다. 한계는 아직 임박하지 않았다. 그런 탓에 피로는 늘상 현재형으로 찾아온다. 이불 위에 몸을 늘어뜨리고 눈을 깜빡이는 개는 피로를 모른다. 개를 바라보는 사람의 늘어진 의식만이 지난하다. 시가 스며드는 곳은 이런 장면들이다. 시란 본디 가장 느리게 도착하는 말들이고 우리의 감각과 인지가 이별 후의 인내를 감내하느라 버둥거릴 때 그것은 날카로운 하품처럼 정확하게 착지한다. 서사의 시간 속으로 전진하는 소설은 피로할 틈을 누리지 못하지만 시는 피로의 한가운데에서 한없이 늘어질 수 있다. 시는 제가 원하는 대로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무한에 가깝게 지연되는 시의 시간은 피로의 무시간적 현재와 꼭 닮아 있다. 어쩌면 시는 피로를 껴안을 수 있는 언어의 유일한 방식이다.2)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모든 부분을 피로로 적셔 버릴 때 우리는 세상과 대결하는 자가 아니라 다만 흘러가는 자로 사라진다. 세상의 예리하고 모난 각들은 녹아서 더 이상 우리를 찌르지 않는다. 일렁임에 구역질을 할지언정 우리는 더는 상처 입거나 피 흘리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내게 피로란 본디 우리의 바깥이 아닌 내부에서 흐르는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고 일러 주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실존적 증상인 피로에 소진되지 않는 한 가지 역설적인 방법은 그것을 극복하거나 해결하려 하지 않고 냅다 사랑해 버리는 일이라고, 피로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온몸에 힘을 빼고 나를 관철하지 않는 방식으로 피로를 체현해 버리는 일이라고 말한 누군가가 있다. 그러자 그에 찬동하며 자신을 상처 낸 자의 빛으로 몸을 더욱 가까이 밀착하는 또 다른 누군가도 다가온다. 1. 사랑하는 방관자의 기록들: 이동욱, 『우리의 파안』 (문학동네, 2025) 시는 무엇 때문에 우리가 지쳤다고 알려 주지 않는다. 시라는 것이 세계에 응전하는 '나'의 목소리일 때 자신이 이미 패자라는 것을 납득한 이에게 이유의 구체들은 불필요하다. 시는 대신 이미 닫힌 문 너머로도 여전히 농구공이 튀겨지는 소리를 들려주거나(「폐회」)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이곳에 이미 와 본 적 있다는 기시감으로 새로움을 무마하고(「답사」) 종국에는 복도만큼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기지개처럼(「월량대표아적심」) 헛헛하게 개켜 볼 따름이다. 시는 무엇 때문에 피로하다는 분석이나 무엇에 관해 피로하다고 부연하지 않는다. 시는 그저 지쳐 있는 얼굴의 주름을 천천히 짚어 간다. 여기에는 그 어떤 극복의 의지나 미래를 향한 열망이 들어서지 않는다. 피로를 들여다보는 일은 그와 정반대의 작업이다. 사랑의 황홀함도 성장의 희열도 찰나의 현재에 머물다가 이내 과거의 영원 속으로 사라진다. 살아 있음이라는 단어를 차지하는 유일한 현재 시제는 피로의 것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피로를 자주 언급하지 않는 것은 피로함을 욕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현재를 비집고 들어서는 이 무한의 감각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상황은 그때부터 조금 달라진다. 피로는 생의 관성을 폭력적으로 찢어 버릴 것이다. 미래에 저당 잡힌 역사가 된 과거도, 과거로의 수갑에 손이 묶인 미래도 모두 풀려날 것이다. 당신은 항구적인 현재로 지어진 피로의 담요 위에 비로소 몸을 누이고 그제야 은둔할 장소를 발견할 것이다("이제야 이별이다", 「배교의 에피파니」). 모더니스트들이 거리를 산책하며 금속성의 시간들이 녹아내리는 장면들3)을 시로 쓸 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가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감각이었으나 인간 종이 사라져도 이 세상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는 이십일 세기의 시인에게 끝이란 그저 관념의 수사일 뿐이다. 오히려 세계는 끝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제 몸을 영원히 유지한다. 끝마저도 완전히 끝장나 버린 시대의 개인은 자기 자신을 끝장내는 방법 외에는 진정 끝을 맞이할 방법이 없다. 다리 위에서 몸을 떨구고 싶은 욕망이 들어도(이것은 죽음 '충동'이 아니다. 신중한 화자가 긴 시간 동안 지체와 망설임을 번복하며 지켜 온 욕망일 것이다.) 그것은 택시 기사의 물음표에 의해 내쳐지고, 또 한 번 끝장내는 데에 실패한 '나'의 몫으로 남겨지는 건 치미는 구토감이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 걸까, 내일도 같은 날이겠지. 반복되는 것이 이렇게 편안한 마음을 주다니. 생활의 주기는 한 달에 맞춰진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많은 주기들이 있다. 자명종과 전철, 점심, 회의, 저녁, 퇴근. 혹은 야근. 다시 전철, 혹은 택시. 동호대교를 건널 때 내가 느꼈던 것. 내비게이션에 찍힌 택시의 위치. 파란 것은 한강. 직선은 다리. 그 위로 지나가는 것은 나. 혹은 택시. 기사는 음악을 크게 틀고, 음악은 트로트, 혹은 찬송가. 주여 제발 이 다리를 무사히 건너게 해 주시옵소서. (중략) 오늘이 지나면 내일은 무사할까. 가끔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를 만나면 자랑스럽게 웃으며 이 몸을 건네줄 수 있을까. 너는 참 쓰기 좋은 몸을 갖고 있구나. 누구에게도 피해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은 그의 거짓말이다. 동호대교에서 한남대교 쳐다보기. 하지만 너와 걸어서 건넜던 건 한남대교. 다리 위에 서면 항상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싶어진다. 뭐였어? 뭐겠어. 우리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기 위해 다리를 건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다리의 중간은 기억에 없었지. 택시 기사는 말이 많았고 나는 이곳이 처음이라고 대답했다. 사거리에서 어디로 갈까요? 그러자 나는 갑자기 구토가 일었다. - 「친구의 장례식과 애인의 결혼식」 부분 일상의 세속적인 반복과 사물들은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이질감이 엄습해 와도 요지부동이다. 그 몸을 다리 아래로 떨구고 싶어도 그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므로 생각만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생의 중력 앞에서 그는 또 어딘가로 방향을 정해서 기사에게 알려 주어야 하고 폐쇄 회로에 갇힌 그는 급기야 구토의 기미를 느끼고 입을 틀어막는다. 그의 하루를 짐작할 때 제목이 본문에 생략된 낮의 시간을 나지막이 일러 준다. 친구는 저곳으로 돌아가고 사랑하던 이도 다른 삶 속으로 들어간 하루. 장례식과 결혼식은 모두 떠남을 공표하는 의례들이다. 떠남의 연속을 마주하며 그는 삶의 과대한 대전제에 반문한다. 실상 우리에게 남는 것은 중간 지점이라는 기억이 아니라 출발점과 도착점뿐이지 않느냐고, 그래서 '나'는 다리의 중간에 '내' 몸을 떨굴 수가 없다고 항의해 보고 싶기도 하지만 무력하다. 그조차도 빌린 몸에서 비롯한 생각들이라면 그는 이 세계의 "자명종과 전철, 점심, 회의, 저녁, 퇴근. 혹은 야근"에 대하여 완전한 패배자다. 신에게 이 다리를 무사히 건너게 해 달라는 기도는 그러므로 진실한 읍소라기보다 이미 무사할 것을 알고 있는 자의 지쳐 버린 탄식이다. 근대의 산책자는 이 세계에서 바깥의 관찰자로 전락한다. 그의 발설은 작은 발버둥에 불과하다. 사이렌이 울어도 시간은 사전의 종이들이 빠르게 넘어가듯 휘몰아치거나 냄비 속 기포처럼 부글대지 않는다. 흠집 하나 없는 세계의 매끄러움은 완전하게 유지된다. 「신도시」의 빛나는 빌딩과 그 사이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도시의 관성을 알맞게 완성하는 부품들이다("빌딩과 빌딩/많은 전선이 이동했다"). 빌딩과 빌딩 전선으로 연결된 콘크리트의 감정은 서로를 일관적으로 바라보겠지 연인들은 뜨거웠다 차츰 모른 척하겠지 소방차가 교차로를 통과하는 동안 오늘도 우리는 다만 무사하고 그게 네 가족이라 생각해 봐 너를 키운 게 가족이라고 단정 짓지 마 그것은 사이렌 소리를 따라 날아가는 비둘기 같은 것 마지막 남은 희망대출 같은 것 전철역에서 절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정치인과 그 앞을 지나는 직장인에게 출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까 간과 쓸개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새로 생긴 진입로를 따라 차례로 들어서는 차들을 보고 있으면 어째서 당신의 가족은 오늘도 무사합니까 - 「신도시」 부분 시인의 감각은 격동하지 않고 그조차도 무사할 따름이다("그것은 사이렌 소리를 따라 날아가는 비둘기 같은 것"). 이곳의 유일한 변화 가능성이 인간 의식과 감각의 번뜩이는 칼날이라면 도시의 문명은 무엇이든 막아 내고 마는 거대한 방패다. 변혁의 단초는 그저 "마지막 남은 희망대출"일 뿐일 때, 신에게 탄식했던 그는 (신은 이미 우리를 완벽한 무사함 속으로 집어넣은 이후이므로) 또 한 번 작게 한탄할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무사한 것이냐고, 연인과 가족, 정치인과 직장인의 무사함은 그저 "차례로 들어서는 차들"일 뿐인데 이것이 정말 다일 뿐이냐고 말이다. 마지막 연의 비문은("보고 있으면" / "오늘도 무사합니까") 신의 도덕과 규범에 맞서 보려는 '나'의 사소한 어긋남이다. 이 시집은 세계와의 대결에서 이미 패한 자의 입지에서 쓰이고 있지만 저항이 전연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 쓰기란 결국 "타인의 필체 속에서 / 잠시 나를 죽은 혓바닥처럼 놓아 보는 것"이라 하더라도(「필적감정」) 그 빌린 손끝에서 흐르는 잉크로 '너'에 대한 사랑만큼은 한사코 주장하려고 한다. '나'라는 대상에 대한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해도 '나'는 '너'라는 사랑에 관해 유치권을 주장할 수는 있지 않느냐고 항변한다("왜 / 이제 나를 당신의 미망인으로 부르면 안 되나", 「저 금목서를 당신의 미망인으로 부르면 안 되나」). '네'가 '나'를 떠나 사라졌다는 이별의 사실마저도 앗아 가려는 세계의 난폭함에 맞서 '네' 그림자 뒤에 이어진 것이 바로 다름 아닌 '나'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차피 이 세계의 중력이 "모든 거리가 한 호흡 안에 있게 한"다면(「영원의 스코프」) '너'와 '나' 또한 하나의 원 안에서 거주할 테다. 사랑은 그의 손목을 잡거나 입술을 맞대는 촉각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같은 시야 안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감하게 성취된다. 그런 당신은 언제나 너무 오래 한곳에 머무는 습관이 있다 정해진 결말은 얼마나 안락한가 누군가 꽃다발을 건네며 인사한다면 그것은 배수구의 소용돌이치는 중심처럼 무언가 당신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는다 - 「영원의 스코프」 부분 세탁소에 옷을 맡기러 가는 길은 '네'가 지나간 길이다("애인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수선」). '나'의 체취로 젖은 셔츠를 누군가에게 맡기러 가는 길에 '네'가 지나간 자취를 떠올리며 둘을 겹쳐 두면, 봄밤의 하얀 목련은 두 눈을 덮어 버린다. 사랑은 부재 속에서 충만하게 향기롭다. 이처럼 시종일관 타자들의 그림자와 사물 사이를 거니는 그는 완전히 고립된 자는 아니지만 세계의 가장 나중의 자리에서 모든 것의 뒷모습을 담아내므로 과연 은둔하는 자4)다. 그러나 은둔자는 그를 잠식한 피로를 떨쳐 낼 재간이 없으므로 그가 시편들을 통해 보고하는 생의 단편들은 정치적 실천이라기보다 현재화된 영원을 배회하는 자의 소진되지 못한 에너지가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방관의 산물에 가깝다. 그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아니라 사나이가 피리에서 손을 뗀 후에야 찾아드는 파동의 나머지를 훔치는 관객이다("연주가 끝나자 단원들이 악기에서 손을 뗀다 // 그제야 나는 음악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식적(息笛)」). 은둔자는 어둠 속에서 이 도시를 재배치하거나 남몰래 구획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주인이 아니다. 그는 다만 숨어 있는 방관자다. 그가 방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은둔하는 지경이다. 그가 기록하는 현실의 답보 상태는 '나'에게 명백히 승리할지언정 '나'를 지루하게 하지는 않으므로 삶의 피로는 그의 사랑이 '너'의 뒤를 쫓는 일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피로를 체현하는 삶은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먼 거리에서 '너'와 '내'가 하나의 그물에 함께 걸려 있음을, 희미하게 떨리는 그물코를 뒤늦게 감각하는 방식을 사랑이라 여길 수 있다면 사랑은 바로 그 피로함 때문에 세계와 마찬가지로 끝나지 않는다. 사랑은 피로 속에서 영원하다. 2. 탐미주의 도망자의 편린들: 김연덕, 『폭포 열기』(문학과지성사, 2024) 방관자가 도시의 어둠 속에서 사물들의 궤적을 따라 느리게 걸어갈 때, 그 한켠에는 빛의 사나움이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이라는 걸 알아 가는 이가 있다. 원인 모를 수치가 자신을 장악했으나("종이 사이를 뚫고 이 안으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겠어", 「미지근한 폭포」) 그 사실을 보란 듯이 움켜쥐고 무거운 걸음을 떼는 이가 있다. 김연덕의 『폭포 열기』에는 빛과 대적하는 '나'들이 그것의 사나움과 폭력성을("돔에서 투과해 들어온 겨울의 각진 빛이 가만히 볼을 스쳤어 / 상처가 났어", 「구식 부끄러움」) 아름답게 증언하며 남몰래 폭포를 찾아가는 장면들이 산재한다. 그러나 이것이 도망의 궤적임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은데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화자가 사물 하나하나에 들이치는 빛을 세심히 관찰하며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며(시편들에서 발견되는 장소들은 거의 하나의 공간으로부터 파생되는 인상을 준다) 그가 코를 박고 마음 속에서 관찰하는 사물들의 빛깔은 부정할 길 없이 아름다워서 당신은 폭포수처럼 흐르는 화려함에 넋을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집을 끝까지 통과하고 나면 밀려드는 아늑하고 부드러운 피로감은 제 모습을 기어코 정직하게 드러낸다. 김연덕이 빛의 다채로운 조각들에 찔리면서도 당신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이끄는 건 염두에 둔 목적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동욱의 화자가 피로를 신체 내부에서 체현하는 방관자의 기록으로 시를 쓴다면 김연덕의 화자는 외부 세계의 사물들이 자신을 조각낼 폭력적인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들의 집요한 추적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대상을 좇는 행위 속에 자신의 도주선을 남몰래 숨겨 두며 피로한 빛의 사나움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져 간다. 밀착하는 방식으로 최대한 멀어진다. 김연덕의 시 쓰기는 사물에 비현실적일 만큼 가까이 다가섬으로 세계의 폭력으로부터 몰래 도주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우선, 한 개의 형광등에서 시작해 보자. 도시의 빛은 방 한 칸에 매달린 형광등으로 달라붙고 화자는 독자의 귀 가까이로 다가와 빛이 선사하는 "현대적인 아픔"에 대해 속삭인다("그래요 나 그것 덕분에"). 어둠 속에서 고요히 흐르던 자연의 정동은 스위치 하나를 누르면 일순간 빛 속으로 모두 흡수되고 그의 말대로 이는 아픔에 관한 참으로 편안한 정리법이다. 수치심이 '나'의 민낯이라면 그것은 형광등이 밝아지기 전의 어둠 속에서만 생생하다. 나는 어둠 속에서 내가 나를 부끄러워하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버튼만 누르면 이 방을 조금 전과 다른 감정으로 채우는 전기가 들어온다는 사 실은 얼마나 새삼스럽고 간편하고 현대적인 아픔인가요 그래요 나 그것 덕분에 내 몸에 걸려 넘어지거나 모서리 날카로운 악취에 부딪치지 않을 수 있지만 낮 동안의 수치가 얼마나 정교한 무늬와 기울기 절단면을 얻었는지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까이 들여다볼 수도 있겠지만 형광등을 켜는 것은 단지 한밤중에도 이 따뜻하고 복잡한 세공에 많은 시간이 필요해서입니다 (중략) 미세하게 다른 속도와 각도로 형광등 빛을 튕겨 내며 움직이던 수정의 소리 자신들을 견고하게 빛내는 소리가 났습니다 규칙적이었고 아주 조용했어요 - 「수정은 아름답고, 수정은 정확하고, 수정은 승리한다.」 부분 그는 "낮 동안의 수치"를 더듬어 볼 기회를 앗아 간 빛을 힐난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에 더욱 주의를 기울인다. 유리로 만든 진공관 안의 형광물질이 필라멘트 끝에서 튀겨지는 소리에 고막을 밀착한다. 이동욱의 '내'가 피로에 맞서지 않고 피로를 몸으로 살아 흘렀듯, 김연덕의 '나'는 빛의 손아귀에서 버둥대지 않고 도리어 빛을 향해 피부를 더욱 가까이 당겨 붙인다. 그곳에서 빛은 사물의 적대자다. 빛은 "삽으로 그것의 안을 파내고 / 쪼개"(「찬물처럼」) 관찰자의 지위를 점령하며 세계의 유일한 주체이자 절대자가 된다. 화자를 압도하는 그 시선의 힘에 대하여 화를 낼 만도 한데 그는 자신의 문장 안에 몸을 숨기고 빛의 사나운 뒤를 계속 좇을 따름이다. 간혹 빛에게 발각되려 할 때 그는 스스로 사물이 됨으로써 최선의 은닉을 감행하기도 한다. 나를 향해 있지는 않지만 이것을 만든 이의. 누군가의 세계를 향한 슬프고 기쁜 병들고 건강한 열망의 반복이 흘러드는 느낌이고 저 가벼운 선반에 잠시 올려 둔 채 때로는 먼지를 털어 주고 때로는 잊다가 다시 별 뜻 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 따뜻하고 추상적인 느낌이기도 하다. 그리운 채 깨어 있는 이 느낌을 위해 나는 매번 나 자신을 어색하게 부푼 내 표정을 값으로 지불해 왔다. 물건의 선과 마무리가 아름답고 고유할수록 많은 시간과 힘을 요했으므로 가끔은, 트럭에서 품에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 곤두박질쳤다. - 「생활 속 폭포」 부분 그는 눈앞의 사물 속에서 그것을 만든 이의 "세계를 향한 슬프고 기쁜 / 병들고 / 건강한 / 열망의 반복이 흘러드는 느낌"을 찾아낸다. 사물이 자신을 향해 있지 않다는 진실 앞에서 그는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실은 그 역시도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물화시키며 살아 왔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고백을 마치자마자 곧장, 사물로부터 떨어져 나와 폭포 속으로 추락한다. 이는 빛에게 패배하듯 폭포에게 제 실존을 투항하고 마는 일이 아니다. 빛의 파장으로부터 완벽하게 숨어드는 일이다. 가장 완벽한 도망이야말로 완전히 사라지는 위장술로 성취된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어두운 폭포를 보게 될 것이다. 원하는 자리에서 원하는 속도로 삭아 가게 될 것이다. 거실과 선반과 빛이 절묘하게 맞물려 그림자가 거대하게 드리울 경우에는 마치 폭포가 물건을 삼켜 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충격을 이기지 못해 절망하고 멍해져 영영 사라져 버린 것으로 착각되겠지만 - 「생활 속 폭포」 부분 시집에 수록된 동명의 연작시 「gleaming/tiny area」는 제목 그대로 빛과 그것이 파생시킨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다5)(빛이 없다면 존재도 없다). 그중 하나의 시편은 "평범한 나무 밑에 / 산 채로 매장된 빛"이 있으며 더불어 그 나무에는 우아하게 숨은 분노도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누설한다("어떤 분노는 우아한 광대뼈 아래 아주 조용하게 살아가기도 한다", 56쪽). "세상에 분노하는 온도"로 첫 행을 시작하는 이 시편은 빛과 연루된 정동이 분노이며, 그것은 이 탐미주의자의 시 쓰기 속에 매장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재봉되었던 빛 안쪽은", 71쪽). 그는 빛의 사나움 앞에서 함께 칼을 들고 결투를 벌이는 일 대신 나무 아래 묻거나 실로 기워 버리고, 이는 최선의 공격이란 무릇 최선의 방어라는 평화적인 신념을 지닌 자만이 할 수 있는 행위다. 낮 동안 너무 많은 빛에, 밤 동안 너무 많은 형광등의 소리에 시달렸던 그는 세계와 정면으로 대적하기에는 이미 지쳐 있다. 세계를 영속시키면서 무한한 소진을 생산하는 힘의 근원이 곧 빛이라는 사실을("아침까지 눈을 뚫고 전속력으로 달려도 / 피곤한 빛으로 계속되는", 「드라이브 마이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므로 그는 그것과 함부로 맞서지 않는다. 더불어, "통째로 긁히거나 뭉개지기"에 이 세계는 너무 고상하다는 그의 말은 빛이 대상을 쪼개지만 동시에 그러한 파편들의 부서짐이 자아내는 아름다움 역시 존엄하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연덕의 '나'는 빛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빛을 따라 움직이는 듯하다가 불현듯 폭포 속으로 몸을 던진다. 세찬 물줄기 아래의 어둠 안에는 숨어든 '내'가 있고 그런 '나'를 일갈하며 후려치는 다른 '나'들이 있다. 빛의 피로에 잠식된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빛이 매 순간 훔쳐 가던 수치심의 적나라한 회수라고 주장하는 피학의 목소리가 있다. 내 몸을 때리는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폭포 밖으로 바로 빠져나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를 비난하던 내가 스스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던 조금 전까지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하던 그것은 나의 수치심 미친 듯이 신나서 나를 때리는 - 「따뜻한 폭포」 부분 피로한 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막아서지 않는다. 그저 내버려둔다. 피로는 '나'의 몸을 그것에 오롯이 헌납하게 한다. 밝은 곳에서 쉬이 납득하기 어렵던 수치는 어둠의 안락함 속에서 껴안을 수 있는 것으로 변모하고 (그것이 '나'를 신나게 때린다 할지라도) 시종일관 사물의 휘광을 쫓던 화자는 그리하여 독자를 빛에서 어둠으로, 지상에서 폭포수 아래로 이끌고 간다. 낮이 생산자들의 시간이라면 밤은 피로 속에 곱게 누운 자들의 몫이다. 수치를 품을 수 있는 비밀스러운 시간이야말로 피로한 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다. 그 어떤 긍정이나 부인의 능동적 제스처도 불필요한, 그저 시작도 끝도 바닥도 위도 없는 물줄기의 연속처럼 그 안에 몸을 맡기고 드러눕는 장소. 그러나 이 탐미주의자는 산란하는 빛의 날카로운 끝이 조각내는 아름다움들을 모르지 않고, 다만 그 광채에 현혹되어 제 몸이 찢기는 줄도 모르고 낮의 시간을 살아 내던 이들의 손을 조용히 잡아끌고 폭포의 어둠 속으로 낙하할 따름이다. 외부에서도 내부에서도 시선의 대상이 되지 않음으로써 그는 주체이기를 자진해서 포기하고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존재의 해방을 만끽한다. 피로를 사실이자 하나의 비유로서 그리고 비유로서의 피로를 다시 한번 현실의 감각으로 받아들이면서, 사실과 비유 양측의 생성이 이끄는 물줄기 아래로 그저 침잠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김연덕의 폭포는 관념의 비유인 것만은 아니며 자연주의자들이 찬미하는 대자연의 그것만도 아니다. 폭포는 빛의 세계에서 낡고 지친 자들이 몸을 이끌고 눕는 피로의 세계다. 순도 높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세차게 이글거리는 안락의 세계다. 그렇다면 폭포가 아닌 곳들 또한 폭포가 된다. 가령, 우리가 가장 처음 만났던 형광등이 깜빡이는 방. 빛을 매장해 두었던 한 그루 나무는 방으로 들어와 '내' 수치심을 양분 삼아 눈부신 꽃 한 송이를 피워 낸다. 오래된 나무 한 그루의 기분만큼 보호받는 밤. 침대가 좁아진다. 작고 물컹한 열매가 떨어진다. 천장이 벽이 사각형이 살아 있는 어두운 땀이 백 년 전의 나와 함께 차게 식는다. 눈부신 꽃이 어둠 속에서 휘날리며 얼굴을 감쌀 때 당신은 끌어안을수록 슬퍼지는 사랑을 반드시 사랑하게 됩니다. - 「무르고 사적인 나의 방」 부분 이 꽃은 '내'가 언젠가 호텔방에서 본 거대한 흰 백합의 이미지와 겹쳐지는데(「나의 레리안」) 그가 꽃 앞에서 보았던 "적막하고 무서운 감정" 역시 누군가의 수치이자 분노이지만 그것은 '나'의 것처럼 폭포의 어둠 아래에서 아늑하게 향유한 것이 아닌 "제 몸을 마구잡이로 터뜨리는 그런 옛날의 빛" 앞에서 패배한 대가임을 알게 된다. 화자는 흰 백합을 보면서 꽃을 장식한 이의 삶을 앗아 간 빛의 난폭함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아연해진다("그의 삶을 대신 죽여 준 아름다움은 어디 있었을까"). 말하자면 「나의 레리안」은 호텔에 잠시 머무른 '내'가 빛 앞에서 파열한 타인의 흔적을 애도하는 시다. 그렇다면 김연덕의 화자 역시도 이동욱의 '나'와 마찬가지로 은둔을 자처하나 세계로부터 고립된 처지는 아닌 셈이며 시집에 수록된 마지막 시편인 「이구아수폭포」의 후반부가 말해 주듯, 이 시집의 '나'들은 실상 빛의 폭력에 노출된 사물과 타자들을 구해 내려는 열기로 들떠 있는 것이다("생생한 폭력과 죽음에 지친 수많은 나들이 자포자기한 나들이 / 무척 활기차고 다정하고 아름다운 면도 있던 그런 나들이 살아남은 나들마저 죽이려는 지금"). 피로는 차갑지 않다. 피로는 그 어느 것보다도 뜨겁다. 에너지의 흐름이 주체를 압도하고 제패하고도 남아서 세계 전체를 유동하는 상태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피로는 죽음의 가장 큰 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피로함 속에서 방관자가 되거나 도망자가 되어 삶을 지속할 수 있다. 환멸이나 분노가 자주 방문하겠지만 그러나 종말과 죽음만큼은 이곳을 침범할 수 없다. 그래서 김연덕의 '나'는 무수한 '너'인 '나'들에게 계속 폭포 아래를, 그러나 빛이 전혀 눈치챌 수 없게끔 빛의 조각들로 길어 올린 아름다운 조각들로 길을 위장하며 가리키는 것이다. "선명한 시야가 돌아올 때"까지만 그렇게 잠시 폭포의 어둠 속에 함께 머물러 있자고, 우리의 수치와 분노가 생생하게 쏟아져 내리는 이 아늑한 피로 속에 잠시만이라도, 고요히 숨어 있자고 말이다. 1) 김진영, 「사라짐」, 『이별의 푸가』, 한겨레출판, 2019, 77쪽. 2) 아래의 말들을 잠시 빌린다면 시는 또한 피로함 그 자체다.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시는 고독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가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가, 아니다. 시는 사람에 대해서도 증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시는 무엇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시는 무엇 자체다. 시는 고독 자체이고 결별 자체이며 또한 사랑 자체다." 김언, 「그 여름에서 여름까지 짧은 기록 몇 개 2」,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난다, 2019, 32쪽. 3)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이상, 「날개」, 1936. 4) 시집의 해설을 쓴 오연경도 이동욱의 화자를 은둔자라고 말한다. "이동욱 시의 주체는 도시의 거리 한복판에서 간격을 만들어 내고 경계선을 재배치하는 '거리의 은둔자'라 부를 만하다." 오연경, 「은둔하는 삶의 정치성(해설)」, 이동욱, 『우리의 파안』, 문학동네, 2025, 109-110쪽. 5) "사실은 비유를, 비유는 사실을 배제하면서 또 자극한다. 한편으로 서로가 서로를 반사하면서 자신을 갱신한다. 사실의 폭발은 해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유의 밑거름으로 다시 돌아오며, 비유의 극점에서 발견되는 추상화된 현실은 그 자체 현실을 보는 또 다른 눈을 제공하는 것이다." 김언, 「시는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307쪽.
1. 말할 수 없는 균열 예측 불가능한 일들의 연속.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을 이렇게 표명한다면 분명 많은 이가 의문을 표할 것이다. 지난하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들을 자주 다루는 작가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해보건대 두 사람의 소설에는 독특한 사건들이 꽤나 자주 등장한다.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어딘가 금이 가고 삐걱대는 삶 앞에 속수무책으로 던져진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김지연의 인물들이 해괴한 일을 직접 나서서 ‘벌이는’ 사람들이라면, 안윤에게는 그러한 일을 마주한 뒤 이전과는 다른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 사람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위들은 어쩐지 무모하고 무용해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효용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러한 움직임들은 아무거나 믿거나 믿어야 할 것을 믿는 일을 거부하고, 확신할 수 없지만 옳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이들의 동작은 곧 일상의 균열을 마주하는 자세와도 같다. 사람들이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결함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온해 보이는 세계를 지적하려면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세계의 균열은 쉽게 발설할 수 없는 무언가다. 그렇다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까.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그러니 이상하고 유별난 인물들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잘 봉합된 듯 보였으나 결코 다 가릴 수 없었던 세계의 미세한 틈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2.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언뜻 보기에 『조금 망한 사랑』은 체념과 포기를 반복하는 망한 인생의 집합소 같다. 전세 사기, 금전 관계에 있던 친구와 애인의 배신, 실직과 구직난처럼 신자유주의와 투기 자본주의의 광풍에 베여 너절해진 인물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그런데 『마음에 없는 소리』(문학동네, 2022)를 읽었던 이들이라면 세태를 첨예하게 부감하고 표현하는 적실함뿐만 아니라, 농담과 같은 특유의 가뿐함이 김지연 소설의 또 다른 활력이라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테다. 이번에도 다소 무겁고 무기력해 보이는 사정들 틈에 유별난 광경들이 돋보인다. 이른바 김지연식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68)다. 몇 가지 사연만 잠시 나열해보자. 양육권을 포기했던 아이를 말 그대로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 다시 키워볼 생각을 하면서 죽은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여자(「좋아하는 마음 없이」). 빚만 잔뜩 남기고 떠난 전 여자친구에게 자꾸만 마음이 기우는 아이러니를 겪는 레즈비언(「반려빚」). 달밤에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포기」) 출입이 금지된 저수지의 한가운데까지 기어코 노를 저어 도달했다는 일화(「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까지. 소설의 인물들은 왜 자꾸만 이상한 일을 벌일까. 김지연의 소설은 삶이 이미 망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망해 나가리라는 잔인한 현실 공식을 동력 삼는다. 그곳엔 “반려빚처럼, 있어서는 안 되는 것도 태연하게 있”(「반려빚」, p. 104)고 누군가는 “있는 놈들을 위해 아주 싼값의 육체노동에 부려지”(「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 p. 42)지만 이토록 불합리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제도도 없”(「반려빚」, p. 96)다. 자본의 바깥을 떠올리는 일조차 돈의 힘에 기대야만 가능한 오늘날, 소설 안팎의 현실을 살피며 저항의 포기를 물었던 우리에게 김지연은 두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하나, 설명 혹은 주장하기. “소리 지르고 때려 부수는 것만이 화내는 방식인 건 아니잖아요.”(「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51) 둘, 괴상망측한 행동들을 늘어놓기. 그런데 짐작과 달리 이때의 망측(罔測)은 망할 망(亡) 자를 쓰지 않는다. 그물[网]과 망함[亡]이라는 뜻이 더해진 한자[罔]는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그러진 상태를 가리키면서도, 완전한 끝을 잠시 유예하는 힘을 발휘한다. 망측한 일은 낯부끄러울지언정 완전히 망하지는 않은 무언가다.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 역시 조금 망그러졌을지라도 여전히 어딘가에, 누군가와 분명히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폐기된 존재를 망가진 상태로라도 끌어올리려는 작가의 수고로움이 와닿는다면,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행위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다. 그들은 차가운 현실이야말로 ‘진짜 해괴한 것’이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김지연이 말하는 포기는 더 이상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마음’에 가깝다. 그런데 인물들은 먹고살기에 급급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망한 삶이 평범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괴이한 공식을 꼼짝없이 따라야만 해서 포기한다. 그래서 「포기」에서 거듭되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p. 19)은 자본에만 기를 쓰고 달려드는 평범한 세계를 조금이나마 문제 삼는 계기가 된다. ‘미선’과 그녀의 사촌 ‘호두’는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사라진 미선의 전 남자친구 ‘민재’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런데 미선과 호두는 물론이고 민재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돈을 돌려받으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민재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의 행방을 살피고, 신고를 권하면 “그렇게까지?”(p. 16)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막상 민재에게 정말로 닿을 것만 같은 순간엔 발을 뺀다. 민재는 돈을 가지고 도망쳤기에 평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특별한 사람이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 대부분이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민재는 같으면서도 다른 것들의 차이를 세세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설명은 “왠지 말이 안 되는 이유들도 납득하게 되는 순간”(p. 23)들을 만드는 힘이 있었고, 각자도생과 효율성을 제일로 섬기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받았던 도움은 민재의 이런 성격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민재는 자금난이라는 평범한 사정 때문에 결국 평범해져버린, “완전히 나쁜 사람”(p. 16)일 수만은 없는 사람이다. 이렇듯 아무리 애써도 포기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래서 어떤 그만둠은 포기 자체를 미루고, 돈만을 좇게 만드는 기존의 “미친 짓”(p. 12)을 중단하고 새로운 “미친 짓”(p. 28)을 가능케 한다. 술에 취한 호두와 미선은 한 남자의 도움으로 의릉에 들어가 “이상한 괴성”(p. 30)을 내지른다. 한 번쯤 누군가 불가능한 시간에 난립하는 걸 보고 싶었다던 남자 덕분에 “예상 밖의 방향”(p. 28)을 향해 내달릴 가능성이 반짝이며 움튼 순간이다. 망해버린 인간관계와 삶 속에서 건져 올려진 이 희한한 야행은 두 사람이 잃어버린 진짜 호두가 의릉에서 나무로 자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연결되면서 다시 한번 끝을 지연시킨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려면 불운을 껴안아야만 하는 현실에 낭만이 끼어들 자리는 협소하다. 결국 각서를 주고받은 뒤에도 또 한번 배신당한 호두는 민재와의 관계에서 “정말 원하지 않던 포기”(p. 37)를 하고, “나중으로 미루는 버릇”(p. 25) 때문에 민재와 만날 가능성마저 미룬 미선 역시 연결될 방법을 끝내 포기한다. 기존의 삶이 반복되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더욱 희미하게 만드는 자본의 견고함을 김지연은 결코 만만히 생각하지 않는다. 「반려빚」에서 전세자금대출과 전 연인 ‘서일’이 남기고 간 빚을 갚는 ‘정현’의 삶은 숨 쉬듯이 “매 순간 돈에 대해 생각”(p. 76)해야만 하는 하루들로 빼곡하다.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관계 중 하나인 연인 사이를 지탱하기 위해서 돈이 “제법 중요한 요소”(p. 84)로 호출되고, 유일한 반려의 자리에는 빚이 올라앉은 정현의 세계를 보면, 「포기」에서 미세한 틈을 열어젖혔던 망측함이 결국 잇속 빠른 자본주의의 환상에 불과한 건 아닌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할 수 없는 것만 가득한 날들 속” 유일하게 “할 수 있어!”라고 외칠 수 있는 일이 전 연인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는 일일 때,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을 만큼 망한 듯한 인생의 내력을 모조리 아는 이가 자신을 망하게 한 장본인뿐일 때, 서일과 다시금 함께 있고 싶은 “정신 나간 마음”(p. 89)이 고립과 단절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된 불모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탓이다. 그래서 김지연은 평균치의 삶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나선다.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가 탄생한 「좋아하는 마음 없이」의 ‘안지’는 이혼한 전 남편의 부고를 내연녀였던 ‘그녀’로부터 전해 듣는다. 이외에도 그녀는 전남편의 보험금 수혜자가 안지로 되어 있고, 이혼할 때 두고 온 아들 ‘성준’이 안지와 함께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안지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묘한 구석이 있다.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는 안지의 말에 “누가 벌을 주는데요?”(p. 142)라고 되묻고, 미안해할 겨를이 없을 만큼 행복했다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술술 털어놓으며, 이제껏 키워온 성준은 누가 뭐래도 자기 아들이지만 양육비는 보태달라는 염치없음까지. 하지만 안지는 바로 이 뻔뻔함이야말로 전남편과 똑같은 “여자의 장점”(p. 154)이라고 생각한다. 안지가 보기에 전남편은 “집을 해올 형편”(p. 149)을 갖춘 “좋은 사람이”(p. 159)었지만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p. 161)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사람”(p. 137)으로 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어온 안지는 스스로가 “아주 평균적인 삶”(p. 139)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전남편과 이른 결혼을 했었다. 호불호를 쉽게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선택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안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남편과 여자는 정확히 안지의 정반대편에 선 사람들이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는 사람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솔직한 사람. 숨기느니 차라리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사람. 그래서 뻔뻔할 수 있는 사람”(p. 158)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지는 이들의 뻔뻔함을 겪고서 “조금 더 자기 자신에게 가까운 삶을 살게 되었”(p. 137)다고 믿는다. 무엇이 좋고 싫은지를 탐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지의 가족들은 “좋아하는 마음 없이 함께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고, 때문에 안지의 삶에는 “그 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내렸던 선택들”(p. 163)이 수두룩하다. 반면에 현재의 안지는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과 재혼하고,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이상한 대회들을 연다. 분명한 미래가 아니라, 잘 그려지지 않는 미래를 골똘히 떠올린다. 그래서 안지는 전남편과 그녀, 아이가 있는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p. 165)을 훔쳐 지갑에 넣고 다님으로써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여자를 다시금 우연히 만난다면 되돌려주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들에 관해 거듭 생각하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삶인지 단정하지 않기 위해 끝을 한없이 지연시키면서 말이다. 전남편과 관련한 모든 일로부터 그저 멀어지고 싶었던 안지는, 그렇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연루되지 않음으로써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두고 보기를 택한다. 계산하고 판단한 “확신”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그들의 방식처럼 “선명하고 분명한 감정”(p. 161)이 있는 삶의 방식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다. 해괴하고 이상한 것의 가능성은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에 이르러 더욱 커진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누구든지 마음껏 열매를 가져가라고 전달받은 ‘나’와 ‘삼촌’은 유자밭에서 유자를 따던 도중 땅에 묻힌 상자를 발견한다. 기대감을 안고 열어본 결과,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p. 271)만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상자를 내동댕이쳤던 ‘나’는 서사의 마지막에 이르러 “어쩌면 영영 썩지 않는 것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p. 289)에 도달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1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숙모’와 그의 아들 ‘민재 오빠’를 애도하는 ‘나’와 삼촌의 시간과 연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촌보다 열 살 많은 나이에 아이까지 있는 이혼녀였던 숙모의 세세한 사정과는 별개로, ‘나’는 매번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말을 내뱉고 짝사랑 상대의 엄마인 그녀를 싫어해왔다. 하지만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던 숙모가 췌장암으로 사망한 전남편을 떠올릴 때마다 사는 게 너무 달아서 미안함을 느끼는 모습을 목격한 뒤, ‘나’는 그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싫어하던 사람을 닮아버린 순간부터 그 사람을 싫어할 수 없게 되었다던 숙모의 말처럼, ‘나’ 역시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 마냥 괴롭게만 느껴지지는 않게 되면서 변하는 것, 썩는 것을 긍정하게 된다. 해괴해지지 않는 것은 없다. 오히려 왜곡과 변형을 거치면서 이전과 다른 상태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 더욱 유의미한 일일 수 있다. 밀봉하지 않아 썩어버린 자리에서 공벌레가 새롭게 자리를 틀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 않은 인생. 김지연의 소설은 우리에게 그런 인생들의 가치와 가능성을 펼쳐준다. 3. 잃어버려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 『남겨진 이름들』(문학동네, 2022)과 『방어가 제철』(자음과모음, 2022)에서부터 주목받았듯이, 안윤 소설의 중핵에는 ‘상실’이 자리한다. 이에 조금 더 안윤스러운 특징을 부여해보자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실’이라 고쳐 부를 수 있겠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잃은 인물들이 겪는 상실은 기이하다. 의심 없이 정상이라 믿어왔던 체계가 뒤틀린 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어짐이 꼭 불행해야만 할까. 균열을 되짚으면서 우리는 모자람에 몸서리칠 뿐만 아니라, 온전함을 “새로이 감각”(「틈」, p. 237)해볼 수도 있다. 사라진 이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일깨워준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안온한 세계는 허상이고, 그것은 위태로운 누군가의 현실을 말끔히 소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금이 간 세계의 틈새로 유실된 존재들이 있다는 것. 이를 마주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보편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과 괴리를 좁힐 수 없는 인물들의 선택이 어쩐지 생소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하지만 그들의 결단 덕분에 기이한 감각들은 응달에 고여 있지 않고 변주된다. 안윤의 소설에서 기괴하고 낯선 기운이 세계를 다시 쓰는 역량으로 옮아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밀을 알아차린 뒤 다른 삶을 향해 몸을 트는 인물은 우선 「핀홀Pinhole」에서 만나볼 수 있다. 직장 동료로 처음 만나 4년을 사귄 ‘보라’와 ‘승원’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평탄해 보이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비밀’이 드러나면서 전연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제목처럼 소설에서는 바늘구멍처럼 아주 미세할지라도 분명한 틈을 내는 질문들이 등장한다. 첫번째, “비밀 하나씩 얘기할까”(pp. 55, 75, 88). 소설에서 총 세 번 등장하는 이 질문은 모두 보라로부터 나온다. 비밀은 수치스럽거나 비정상적인 치부들을 의미한다. 보라에게 딸들을 버리고 갔던 엄마와 새아버지, 이복 남동생이 있다는 복잡한 가정사 같은 것들. 보라는 비밀을 들추거나 캐묻지 않는 승원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이렇듯 보라가 감추고 싶은 것, 감춰야만 하는 사실들을 응시하고 발화하는 인물이라면 승원은 비밀 앞에서 “짧은 침묵”(p. 56)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설이 전개될수록 승원의 침묵은 배려가 아니라 자신의 비밀을 덮기 위한 자구책으로 드러난다. 보라는 어느 날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의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진’의 메시지를 통해 외동으로 자처해왔던 승원에게 마흔넷의 중증장애인 형 ‘정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진은 부모가 강제로 입원시킨 시설에서 관계자들의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걸로 보이는 정원의 사인을 밝히고 그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원의 가족들로부터 무시당했다. 두번째 질문은 경진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승원씨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세요?”(p. 61). 모든 것이 그렇게 돌연 생경해진다. “경험해본 적 없는 단란한 가정의 화기”(p. 72)는 “너무나도 깔끔하고 정연하게 통제된 느낌”(p. 73)을 주고, “앎의 정도를”(p. 66) 고려할 필요 없이 가까웠던 승원은 “엄연한 타인”(p. 53)으로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승원이 동그란 공 모양으로 뭉쳐놓은 양말이 보라에게 “집쥐가 ‘된 것’”(p. 53)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추방하려 아무리 애써도 계속해서 출몰하는 집쥐처럼, 정원의 존재는 여타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승원이 습관처럼 만드는 양말 뭉치가 어린 시절 정원과 가지고 놀던 장난감 공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보라는 직감한다. 평범했던 양말 뭉치가 “집쥐로 보이기 시작한 그 늦은 오후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p. 54)다고. 보육원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 약을 먹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집쥐는 어디에서 누구와 살 수 있는 걸까”(p. 87)를 궁금해했던 보라의 의문은 정원의 생애를 접하면서 되살아난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온통 투쟁이었다. 더딜지라도 꾸준히 삶을 기록하고, 장애인 스포츠인 보치아 선수가 되어 진지하게 공을 던져왔다. 죽고 싶을 때마다 “타 자 칠 때 총 쏜 다 생각”(p. 83)하며 쓴 시들, 시설에서 나가기 위해 새벽마다 컴퓨터실까지 기어가 적어 내려간 정원의 이야기는 “스스로 훼손을 인정할 수 없었던”(p. 71) 보라를 변화시킨다. 과거의 결함을 지우고 무결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살고 싶었던 욕망을 외면하고, 승원 대신 정원의 기록물을 경진으로부터 건네받는다. 할머니에게 배운 바느질처럼 보라는 정원의 생애를 몇 번이나 곱씹은 후 그의 이야기들을 정성스럽게 잇대어 나간다. 그리하여 세 사람만이 담긴 가족 그림에서 “가는 연필 선으로 밑그림만 그려놓은 테두리뿐인 사람”(p. 61)이었던 정원을 “한 사람의 형상”(p. 88)으로 만들어낸다. 양말 공을 죽어가는 집쥐로 느끼던 낯선 감각은 그렇게 자신이 바라는 삶을 향해 공을 굴리는 정원의 의지를 헤아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첫번째. 보라는 승원에게 다시 한번 비밀 말하기를 제안한다. 경진을 만났다는 자신의 비밀을 먼저 밝히면서. 사실 안윤의 인물들이 내린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경진이 던진 이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p. 85). 어째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친숙함을 등지고 불가해한 누군가를 끌어안게 만드는 힘의 근원을 짐작하기 위해 표제작 「모린」을 살펴본다. 사고로 중도 실명한 시각장애인 ‘영은’은 잃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범하거나 무감하게 태어나서가 아니라 살면서 많은 것을 잃어봤기 때문이다. 실명 이후 영은은 다채로운 세상의 이미지들, 오래도록 자신의 곁을 지켜왔던 연인 ‘선주’를 비롯해 자신을 이루던 수많은 조각을 놓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은 여전히 처음부터 가져본 적 없는 삶보다는 여전히 나중에 잃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이는 “있음과 없음, 그 둘을 연결하는 잃음”을 통해 “주어지는 모든 세계를 빠짐없이 살아보”(p. 25)겠다는 다정한 결단이다. 어떤 것을 잃어본 사람은 그것의 소중함을 비롯해 어떻게 더 잘 잃을 수 있는지, 상실 이후에 무엇이 변화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특히 자기 자신을 잃어보는 경험은 세계가 뒤바뀌는 사건이다. 하나의 세계는 곧 한 명의 사람과도 같다. 그리고 세계는 곧잘 무너지고 다시 서길 반복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사람’은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가기에 유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p. 9). 영은이 잃음을 두려워하기보다, 각각의 자신과 타인을 마음껏 사랑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이유다. 유일한 것들의 흔적을 덧입고서 모진 시간을 견뎌온 영은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유구하다는 걸 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자리 잡고 있다. 안윤이 굳게 믿는, 상실을 지나온 자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은의 질서”(p. 30)는 기존의 질서에서 멀어지거나 누군가를 잃는 일을 유독 겁내던 ‘미란’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자신을 제쳐둔 채 사회의 규율만을 엄격히 따르느라 영은을 사랑하는 마음마저 밀어내길 반복해온 미란은 영은의 곁에서 “한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 는 어떤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p. 44)을 경험한다. “죄다 망해버려서 다행”스럽게 찾아온 “그동안의 내가 다 망해버린 기분”(p. 41)은 여성과 여성의 사랑, 장애인의 삶처럼 분명히 있는 것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세계의 문법을 무너뜨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무수한 면면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세계에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스며들어 있다. “누군가가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게 저 사람이 말할 수 없는 사정이구나 하는”(p. 12). 세계는 곧 한 사람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 바 있으니, 영은의 말처럼 기이한 낯섦은 이제 한층 더 애처롭게 감각된다. 기꺼이 열리고, 연결되고 싶을 만큼. 때로는 나 자신을 잃어버려야만 닿을 수 있는 누군가가, 무너져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상실과 결여를 메우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방법을 안윤의 소설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4. 실패 연습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현실이 감추려 해온 불합리성이라는 비밀을 고발하고, 이때 드러난 균열에 힘을 가해 기존의 제도와 체계에 일격을 가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두 사람의 소설이 자신의 균열을 뼈아프게 직시해야만 들여다볼 수 있는 세계의 결함과 마주한 뒤, 그러한 생채기를 어떻게 매만질 수 있을지까지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지연은 잿더미 속에서도 아직 전소하지 않은 기대와 희망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린다. 그의 인물들은 자본 외부의 의지와 노력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한없이 작아져 있다가도 뜬금없이 괴상한 사안들 편에 서거나 망측한 일을 감행한다. 이때 강렬히 분출되는 어긋난 감각은 살 만한 삶을 간단없이 소거하는 자본의 법칙이야말로 진정으로 이상한 무언가임을 강렬히 느끼게 해준다. 안윤은 이유 없는 상실을 강제하는 현실에 짓눌리는 와중에도 잊힌 이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잃어버려서는 안 될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부지하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세계의 결함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목도할 때 생기는 기이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단하기 위해 분연히 사건을 찾아 나서거나 세계가 무너지는 감각 아래에 자신을 놓아둔다. 그런데 이들 소설이 나아가고 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물들의 일격이 너무 쉽게 저지당하거나, 세계의 비밀을 목격한 이후에 결과적으로는 다시 자신의 결함으로 회귀하는 수축성을 보이는 측면이 두드러짐을 간과할 수 없다. 김지연의 소설에서처럼 잠깐 보인 희망이 오히려 지난한 현실을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하는 마취제로 작용하고, 안윤의 인물들이 억눌리고 배척당한 존재들의 고통을 자기 이해와 친밀한 사람과의 좁은 세계에 가둬두는 건 아닌지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의도와 달리 두 사람의 소설이 보여주는 건 균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현실 아닌가. 이런 우려는 결함마저도 소비적 욕망과 충동에 포섭시켜 자기 발전의 재료로 삼는 자본주의의 영악한 힘이 가진 위험을 알기에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런 의심을 향해 김지연과 안윤은 한층 더 이상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선택하는 인물들을 다시금 내보일 것이다. 한 번의 실패는 억압의 기제에 영영 봉합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망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믿는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더 자주 서로에게 보여져야 한다고” “잘 살든 못 살든 그냥 살아 있는 게 목격이 되어야”(「긴 끝」, p. 122) 한다는 김지연에게 소설은 끝을 길게 늘어뜨려 무한히 연장하는 목격의 수단이다. “만약이라는 말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또,」, p. 174)는 걸 아는 안윤이 보기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로 허물어지는 일이야말로 세계가 연결되는 가장 첫걸음이기에 둘의 세계는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이다. 두 사람에게 실패란 기존의 견고한 세계가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고정되어 있던 자신이 허물어지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들은 이제 막 실패했다. 어쩐지 걱정되는 마음이 앞선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숙련이 뒤따르듯이, 이들은 지금의 연습을 거쳐 실패에 능숙해질 것이다.그러니 자주, 계속해서 더 잘 실패해보려는 두 사람의 힘을 믿는 마음으로 애정을 담아 덧붙여본다. 앞으로의 소설에서는 무너지고 재건된 세계가 어떤 다른 모습으로 솟아오를지, 기이한 인물들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향해 걸어 나갈지 궁금하다고 말이다.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1) : ‘소유’와 ‘주권적 자기’를 질문하며 1. 다시 ‘자기’를 질문하며 일인칭 글쓰기, 에세이, 자문화기술지, 당사자 서사 등 ‘자기’를 중심에 놓는 글쓰기가 주목받아 온지 여러해를 지나고 있고, 최근 또다른 방식으로 논의가 이어질 듯하다.2) 이 글은 그러한 글쓰기의 핵심에 놓일 자기를 다시 질문하고 그것이 어떻게 ‘커먼즈’(commons)로서의 문학의 조건이 될 수 있을지 가늠해보려 한다. 이때 얼핏 자기와 커먼즈라는 말 사이의 아득한 이격(처럼 여겨지는 것)이 떠오를지 모르겠다. 자기라는 말은 ‘나’ ‘1인칭’ 같은 단수적 계열어나 차이를 통해 이해되곤 하고, 커먼즈란 ‘공통장’ ‘공유지’ 같은 번역어가 암시하듯 복수적이고 공통적인 것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루쏘의 『고백록』(1770)이 상기시키듯 자신을 신과 독대하는 개인으로 발견하고 고백하는 일에서 출발한 근대적 존재 인식의 표현양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에 대한 이야기 안에서도 젠더 및 공/사 역학에 따른 위계가 작동해왔음이 이제 대중적으로도 널리 환기되었고, 전통적으로 자서전을 쓸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거나 획득하지 못했던 여성의 글쓰기와 그 수행적 힘이 각별히 조명3)되기도 했다. 또한 최근 에세이물의 당사자 서사가 규범 바깥의 여성 정체성을 실험하며 여성주의적 급진성을 갖는다는 논의4)에서와 같이, 글쓰기의 수행적 힘은 다양한 여성 및 소수자의 가시화와 연동되었다. 한편, 에세이적 글쓰기 일반을 “자아를 일종의 자산으로 생산해내는 장치” 측면에서 조망하고, 이러한 글쓰기의 스펙트럼과 읽기-쓰기의 복잡한 역학 및 형식 문제를 분석하는 논의도 제기된다. 오늘날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자기진술”이 “주체에 대한 진실을 생산해내는 권력을 스스로(재)생산”하는 측면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한영인의 글은 특히 신자유주의 통치술과 개인의 관계를 비롯하여 개인과 자아 등을 둘러싼 복잡함의 근간을 짐작케 한다. 한영인의 논의에서 파생시켜 떠올려보는 장면이지만, 예컨대 당사자가 아님에도 타자를 대신 이야기할 때의 윤리문제는 최근 장르를 불문하고 상식으로 여겨진다. 그 와중에 픽션에서 대상화를 피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가능한가라는 회의가 종종 제기되는가 하면 타자를 모델로 삼는 소설의 종언이 비관적으로 선언되기도 했다.6) 그간 문화예술 창작계에서 당사자(성)의 강조는 ‘당사자만 말할 수 있다’는 방식으로 오인되기도 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서사의 주체를 ‘저자’ 개인으로 환원시키는 좁은 의미의 당사자주의를 우려하는 논의도 오갔다.7) 당사자주의를 넘는 ‘타자와의 관계성’ 혹은 ‘목격-증인’의 자리8)가 강조될 때조차, 그것은 나와 타자의 좁힐 수 없는 차이를 근거로 회의되거나, 진짜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가리는 시시비비로 연결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사자(성)를 둘러싼 논의는 연대가 필요한 자리에서 때로 그것을 더디게 하거나 좌절시켰고, 이런 곤경은 오늘날 ‘나’ ‘자기’에 대한 감각이 무엇에 구속되어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진정한 나를 찾는다’는 식의 익숙한 말은 어쩌면 차이로서 증명되는 나를 갈망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인식은 일상에서 종종 불안정한 것으로 경험된다. 오늘날 기술 상황에서 타자와의 차이를 통해 확인되는 고유한 나에 대한 바람은 점점 더 곤란을 겪는다. 사용자 데이터 기반 서비스를 표방하는 무수한 플랫폼에서도 주체적 행위, 고유성, 독창성 같은 변별자질을 통해 스스로를 해명하기란 요원해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더욱 ‘진정한 나’ ‘진짜 나’를 갈망할 수밖에 없이 세팅된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유와 권리에 대해 조밀해지는 법과 제도가 이러한 이중구속을 강화하는 것도 물론이다. 앞서 적었듯 오늘날 자기서사는 특히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소수자의 존재와 글쓰기를 가시화한 양식의 하나다. 그것은 이 세계 존재를 둘러싼 오랜 위계의 구조를 환기시켰고, 스스로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한 감각을 정치화했으며, 자기 삶의 주권을 표명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자기’는 여전히 개인, 차이, 구획, 정체성, 소유 같은 관념 사이를 공회전하는 측면이 있어왔다. 물론 이것이 현행 세계 속 ‘나’의 지배적 조건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단적으로 대개의 사람들은 어떤 정체성들의 소유자(개인)로 식별되며 인구로 셈해진다. 그러니 정체성을 둘러싼 시민권 투쟁의 즉각적 장소 역시 바로 여기일 수밖에 없다. 정체성에서 출발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 너머를 향해야 한다는 이야기가9)종종 지난하게 여겨지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요컨대 지금 ‘자기’를 둘러싼 이야기와 곤경이 동시에 부상하는 상황 앞에서 ‘나-1인칭-개인-소유’ 등의 계열어 속 자기표상은 불충분하거나 종종 모순적이다. 2. 나는 나를 소유할 수 있는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정체를 가늠하는 감각은 오늘날 존재 인식의 근간을 이룬다. 이때 ‘무엇’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 더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소유’ 개념이다. 오늘날 개인 및 개인주의의 근간에 소유의 원리가 놓여 있다는 사실은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말이 잘 드러내준다. 우선 짚어둘 것은, 여기에서의 소유란 유무형의 재화가 아니라 본래 인간 ‘신체’에 대한 소유를 의미했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신체, 재능의 고유한 소유주로서의 개인이라는 인식에 기초”하는 “자유로운” 존재로 간주되었고, 이때의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바로 이념형으로서의 능동적·자율적 개인에 다름 아니다. 자유는 곧 “소유권을 의미”했고, 그렇기에 소유권의 반대 개념은 탈소유·무소유가 아니라 “타인의 의미지에 대한 종속”으로 간주되었다.10) 의존을 죄악시하고 기피하며 자립한 개인의 능력을 상찬하는 오늘날 지배적 심상의 기원도 여기에서 잠시 짐작해볼 수 있다. 요컨대 소유적 개인주의에서 ‘소유적’이라는 말은 상품과의 관계 이전에 우선은 우리 신체, 그리고 나아가 우리 자신의 노동에 대한 소유를 의미했다. 우리의 신체란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재산”이었고 “완전한 자유의 기준은 자기 노동에 대한 소유권의 보유이며, 그 보유의 조건은 곧 물질적 재산의 소유”11)였다. 이는 강조건대 소유가 곧 내가 나 자신과 맺는 관계를 기초지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서 ‘자아’ 역시 신체에 준거한 획정이 필요해진다. 즉 소유적 개인주의는 자아를 둘러싼 모순이나 모호함을 봉합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체에 근거한 자아 역시 소유의 대상으로 간주되려면 먼저 일종의 객체가 되어야 한다. 신체를 누가 –다시 말해서 내가 – 소유하느냐의 문제 앞에서 자아는 하나의 구획된 것으로, 그리고 관리 가능한 일종의 통합된 것으로 간주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적절한 자아’를 가진 ‘주체’가 재산의 소유자로서 행동할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 즉, 통상 남성·이성애자·백인·비장애인 등으로 간주되어왔음은 강조할 것도 없다. 소유에 기반한 자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특히 2010년대 이후 세계의 여러 변화 앞에서 새삼 부각되고 있는 것 같다.12) 이 세계의 인종·성·장애 여부 등을 둘러싼 정상성 각본에 대해서는 이제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소유’ 개념을 매개로 한 각본이라는 점에 대해 지금 다시 각별히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가진 것’에 따라 온전한 인간인지 아닌지를 셈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곧 오늘날 지배적인 ‘주권적인 자아’(sovereign self)13) 개념을 구성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소수자의 정치적 수행성 논의에서야말로 강한 전제로 놓여 있었음을 기억해두고 싶다. 예컨대 퀴어 이론가이자 정치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2010년대 이후 논의에서 특히 소유적 개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자아 개념을 비판하고 그 너머를 상상하는 관점을 두드러지게 드러내온 점이 의미심장하다. 물론 “주권적, 유아독존적 자아 개념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자아란 이미 관계적인 개념”이라는 그녀의 전제는 오늘날 상호의존적 관계나 타자윤리가 요청되는 자리에서 자주 참조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지닌 정치성을 좀더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녀의 주장이 “소유적 개인주의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소유의 논리 바깥”14)을 고민하며 제출되어 왔음을 환기해야 한다. 그 맥락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논해지는 관계성이나 타자 윤리는, 자유주의 휴머니즘과 그리 충돌하지 않는다. 오늘날 여전히 좁힐 수 없는 차이를 전제하는 당사자 논의의 곤경에도 근본적으로는 다른방식의 소유 혹은 (개인적) 소유 바깥이 상상되지 못하는 감각이 놓여 있는지 모른다. 동일성(정체성)으로부터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차이의 연대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한 오늘날의 많은 논의가 있다. 그런데 그 현장마다 좀더 원리적으로 환기해야 할 대목은 “서로가 서로에게 현전하기 위해서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자기 박탈”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혹은 “자아를 상대에게 넘겨주는 행위”15) 쪽이어야 할지 모르겠다. 나를 내어주는 일 없이 타인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제어하도록 하는 도덕이나 의무가 아니며, 우리는 본래 소유 이전의 존재라는 것. 요컨대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오늘날 제2의 자연이 된 소유의 관념보다 더 오래된 관계적 존재 양태를 발견하고 긍정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소유를 근본적으로 질문하지 않는 관계성이나 커먼즈 논의는 다소 공허한 이상 혹은 도덕적 당위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하지만 소유보다 더 근본적이고 오래된 존재의 원리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때, 관계성의 사유는 설득 문제가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자 필연임이 밝혀진다. 이에 대해 한 편의 소설을 경유하여 좀더 생각해본다. 3.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 : 이주혜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속 ‘일기’에 대해 이주혜의 장편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창비 2023. 이하 이 책에서 인용시 면수만 표기) 속 주인공은 불안, 공황 등으로 치료받는 50대 여성이다. 그는 현재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받은 남편과 가족의 위기로 고통받고 있다. 의사는 치료의 한 방편으로 일기 쓰기를 권하고, 주인공은 어느 글쓰기 교습소의 수업에 참여해 일기를 써나가며 그것을 타인들과 공유한다. 소설의 중요한 장치인 일기는, 일차적으로 의사의 권유를 통해 자기치유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런 설정은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을 회복하며 스스로를 자기 삶의 주인(소유자)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최근 많은 자기 서사가 품고 있는 글쓰기의 수행성과 ‘자기’의 테크놀로지가 서사화된 듯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에 대한 절반의 독해다. 주인공의 일기 안으로 좀더 들어가보자. 소설 속 일기는 주인공의 유년을 회고하는 장치다. 회고되는 시간은 1979년 겨울부터 1980년 초여름이다. 이 시간이 암시하는 바를 한국의 독자는 쉽게 알 수 있지만 그 의미를 전하는 것이 소설의 핵심은 아니다. 일기 속 사건이나 존재는 명료하게 요약하기 어렵다. 어린 주인공의 시점을 통해, 이른바 시대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썩 구별되지 않게 그려진다. 예컨대 한국 현대사의 격변을 암시하는 것들은 아이들을 재우고 어른들끼리 주고받는 비밀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함과 불안으로 묘사된다. 비상계엄령, 데모 등과 같은 시대어는 주인공의 사사로운 일상에 비해 배경으로만 놓여 있다. 하지만 직접 의미화하는 것 이상으로 배경의 구속력은 강하게 전달된다. 이런 효과가 주인공의 일기 속 기록으로부터 발생하고 있음을 우선 확인해둔다. 일기 속 사건과 사건, 장면과 장면 사이는 환유적으로 연결되며 궁극적 의미는 자꾸 미끄러진다. 회고되는 기억도 불안정하다. 아빠의 실종, 낯선 남자의 등장 및 그의 느닷없는 추방 등은 파편적 이미지로만 제시될 뿐 어떤 구체적 의미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이런 서사적 파편과 공백은 얼핏 소설적 개연성의 결함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간 우리가 회고에 기반한 성장서사, 기억서사로부터 어떤 익숙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작품들이 현재 시점에서 과거로 임의로 재구성·편집되는 과정을 노련하게 감추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일기는 그러한 과정을 최대한 지양하고 기억의 파편을 그대로 노출한다. 주인공의 일기에서 부상하는 것은 오히려 기억이 종종 부정교합을 수반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러한 기억주체로서 자기의 불안정함이다. 통상 일기 속 성찰 대상이 될 ‘자기’는 늘 스스로가 소유하는 객체로 전제된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일기는 그 장르의 핵심인 자기를 문제의 장소로 삼는다. 자기는 애초에 불안정하고 픽션적일 수 있음이 우선 소설에 암시되어 있다. 불안정하다는 것은 윤곽이 불분명하다는 의미다. 어떤 소유의 형상으로 대상화될 수 없다는 말이다. 소설 속 일기는 처음에 분명 자기를 질료 삼는 자기치유의 의미를 부여받았지만, 실제 그 서술과정에서는 연루된 존재와 사건과 세계가 부조된다. 주인공과 친구, 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등은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 얽힘(entanglement)으로 이미지화된다. 불안과 같은 정서도 누군가의 것(소유물)이라기보다 그 모두를 관통하고 아우르는 것으로 혼연해 있다.16) 예컨대 “시옷에게 비는 살이 부러진 우산과 젖은 신발을 의미했다. 그 축축함과 막막함은 군모를 깊숙이 눌러쓴 어느 군인이 국방색 우비 위로 길쭉한 소총을 끌어안고 집요하게 비를 맞고 있던 장면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끌어들이기도 했다”(26면)는 대목을 보자. 지금 이 대목에서, 어린 시절 주인공이 싫어했던 비의 경험은 ‘젖은 신발’과 ‘소총을 든 어느 군인’을 매개로 겹쳐지며 그녀의 ‘비’에 대한 기억을 이미지화한다. 또한 이것은 지극히 내밀한 몸의 감각에 대한 기억인 동시에 한 시대의 폭력이 단번에 서사적으로 환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사사롭다고 여겨지는 어린아이의 경험이지만, 거기에는 개체적 몸을 관통하는 어떤 세계가 있다. 이런 서술의 와중에 홀연 인지되는 주인공의 몸의 변용 순간도 흥미롭다. 소설에서 유독 강렬한 정서를 자아내는 대목이다. 주인공은 글쓰기 교실에 서 1980년 “5월의 한복판”(212면)의 일을 낭독하는데, 이는 유년시절 주인공이 품고 있던 비밀이 폭력적으로 억압된 경험에 대한 회고이다. 성인이 된 주인공은 수강생들 앞에서 그 회고의 일기를 읽으며 격렬한 울음을 터뜨린다. 그때까지의 서사 속 긴장은 순간 파열한다. 독자는 이 장면을 심리적 문제가 해결되는 단계로 읽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이것은 심리적·정서적 문제극복의 과정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질적 시공간이 서로 긴장하다가 동시적으로 마주치며 폭발하는 순간에 가깝다. 가령 그녀의 현재 고통은 남편으로 인해 관계가 파괴된 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글쓰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어른들에 의해 좌우되는 아이의 일상과 그 배후에 놓인 가부장제 및 친밀한 폭력의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남자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염원 때문에 그녀가 자신의 성별을 숨긴 채 남성 성별을 수행해야 했던 일이다- 이 드러나자 느닷없이 그녀가 내쫓기는 순간은, 한없이 취약했던 존재가 무참히 상처 입는 순간이다. 그것은 정확히 학교에도 거리에도 총을 든 군인들이 있었던 ‘1980년 봄’ 한복판의 일로 기록된다. 지극히 내밀한 자기의 비밀이 시대의 폭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 장면은 정확히 환기시킨다. 그녀의 뒤늦은 울음에는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구조를 공유하는 여러 시공간의 폭력이 가로지른다. 이 울음 장면은, 어떤 존재(몸)가 독자적인 개체이기 이전에 이미 늘 연루되어 있던 세계와의 교섭 현장이자 그 효과임을 증거하는 것 같다. ‘나’ ‘자기’는 선행되어 있다기보다 사건적으로 출현하고 이내 사라지는 것이다. 이후 주인공의 이야기가 후경화하고 타인들의 이야기가 본격 부상하는 서사 진행도 이를 뒷받침한다. 4부에서는 어린 그녀가 이사한 곳에서 만난 이들, 특히 이웃집 윤수와 그 가족 이야기가 다소 의미심장하게 전개된다. 윤수와의 우정, 이웃집과의 친교는 1980년대 이른바 기층민의 삶을 엿보게 하는 바가 있지만 그것을 기록하는 시선은 바깥에 있지 않고 그 삶 안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소설은 점점 현재 그들의 안부를 묻는 이야기로 이행한다. 그녀, 즉 1인칭 주인공 ‘나’의 이야기이자 일기 속 ‘시옷’의 이야기는 그 고유함을 버리지 않으면서 점점 한 시대의 공기를 ‘감각’시키는 이야기가 되어간다. 현재 ‘나’의 상처가 추동했을 글쓰기는 타인과의 관계가 지지해 온 시간을 회고하는 서사로 이행한다. ‘나’의 윤곽은 주인공의 일기뿐 아니라 소설 전체에서도 점점 흐려진다. 이들의 삶은 각자의 것으로 소유,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 속에서 의미화된다. 즉 기존에 일기라는 1인칭 글쓰기가 담보하던 ‘나’ ‘자기’는 이 소설에서 어떤 기원이나 본질 혹은 증명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삶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메커니즘을 거쳐 의미화되는지 일기 쓰는 주인공이 체현한다. 주인공의 일기에 적히는 것은 할머니의 독경 소리, 늘 복잡한 감정을 품게 했던 옆집 친구 애니, 아버지의 빈자리 등 타인과 얽혀 있는 기억이며, 또한 이 소설에 그려지는 것은 그 일기를 함께 읽어주는 현재의 무심하면서 다정한 동료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소설은, 자기를 쓰는 일이 곧 타자를 쓰는 일임을 보여준다. 좀더 적극적으로 의미부여를 한다면 이것은 나/너와 같은 개체적 몸을 초과하는, 혹은 그런 몸으로 분화하기 이전의(metastable)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읽은 일기 안팎의 ‘나’들은 개체들간의 상호적인(inter) 관계라기보다, 식별되지 않는 내적으로(intra) 얽힌 존재의 이미지에 가깝다. 즉 오롯한 자기, 내면 같은 표상이 본래 품고 있었을 모호함과 균열뿐 아니라, 그러한 자기와 내면을 구성시키는 무수한 연루됨 자체가 곧 ‘나’임을 암시하는 것이 이 소설 속 일기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감각으로 미처 식별되지 않는 무수한 사물도 나를 관통하고 구성할 것이다. 앞서 인용한 비 내리는 장면의 회고에서처럼 단일하게 통합된 자기가 아니라, 오히려 이질적 존재와 사건들, 시공간의 비인격적 웅성거림 속에서 불현듯 확인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각별히 기억해야 할 ‘자기’의 한 의미일지 모른다. 주인공이 일기 속 자신을 내내 ‘시옷’이라는 기호로 표기하고 지칭하는 것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일기를 쓰는 주인공은 “‘나는’이라고 시작했더니 한줄도 쓸 수가 없었”(32면)다는 이유에서 시옷이라는 이름을 쓴다. 시옷은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처럼”(33면) 생겼다는 이유에서 선택되었는데, 이것이 서로를 지탱하는 ‘사람 인(人)’의 형상을 염두에 둔 작명임도 분명하다.17) 소설은 이렇게 주인공을 통해 처음부터 ‘나’라는 주어의 함의와 무게를 암시해두었으며, ‘나’의 시선이 독점해온 1인칭의 세계를 내어 주고 3인칭적 재현을 전경화한다. 이 소설을 두고 “‘나’의 쓰기가 스스로의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다면성을 서술하는 일로도 이어진다”18)는 평가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적확하다. 소설 속 ‘나’는 명료한 윤곽과 표상을 갖는 존재이기 이전에, 내내 유동하고 있는 어떤 관계 자체이다. 이런 메커니즘을 생각할 때 오늘날 항간에서 말하는 타자 윤리는,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존재의 원리이자 필연이다. 소유 너머 자기를 상상하는 일과, 연루됨 자체를 사유하는 것은 불가분이다. 4. 소유와 주권적 자기 너머, 혹은 소설적 커먼즈의 상상 지금까지 읽은 이주혜의 지금까지 읽은 이주혜의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속 ‘자기’는 ‘내 삶은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식의 당사자성이나 자기인식과는 거리가 있다. 주권의 문제는 늘 경계 획정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19) 주권은 항상 권력 관계와 지배를 표시한다. 국가뿐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내밀한 자아 역시 소유를 위해 구획되고 객체처럼 간주된다. 그런데 이주혜 소설은 ‘나’ ‘자기’가 그런 객체이기 이전에 이미 늘 타자와 연루되어 있는 준안정적인 지대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지금 주권적 자기 너머를 상상한다는 일은 어떤 구획과 소유와 권리 이전의 지대, 일종의 잠재성을 사유하는 일과 관련된다. 나아가 그러한 ‘자기’를 일종의 관계성의 장소로 전유하는 일이 요청된다. 어떤 존재가 배타적으로 점유한 예컨대 정체성을 본질처럼 인종화하는 통치술과 겨룰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독점될 수 없는 세계의 속성을 생각할 때, 미학과 윤리는 불가분이 아니라는 점도 다시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 물론 유의할 점은, 이것이 오늘날 세계의 역학과 실제를 없는 것처럼 여기며 소유로부터의 이탈을 낭만적으로 예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탈소유에 대한 논의는 자칫, 누군가의 땅을 무주지나 황무지로 간주하여 점유해온 정착민 식민주의의 역사를 정당화하기도 쉽다. 또한 무엇이든 가능한 자아를 낭만화하는 자유주의적 모토로 전유되기도 쉽다. 앞서 버틀러의 논의에서처럼 탈소유라는 말이 품고 있는 폭력적 ‘박탈’은 지금도 이 세계에서 늘 진행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핀 ‘나’ ‘자기’는 분명 소유 이전의 양태를 환기시킨다. 모든 사물에 소유의 권리가 부여되어온 역사에도 불구하고, 본래 경계를 획정할 수도 독점할 수도 없는 ‘나’가 있다. 근대적 주권 및 소유적 개인주의와 불가분이었던 자기를 이렇게 다르게 사유해볼 때, 커먼즈로서의 문학에 대해서도 약간의 첨언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언어, 감정, 사유, 땅, 하늘 등 나열할 수 없는 많은 것이 본래 누군가에게 배타적으로 귀속될 수 없는 커먼즈임은 부연할 것도 없다. 하지만 언어, 감정, 사유 등에 일종의 형식을 부여한 문학에 대해서 커먼즈의 사유를 진척시키는 데에는 모종의 어려움이 있다. 예컨대 ‘서명(署名)’으로 상징되는 오리지널리티와 소유의 감각이 성립시킨 (근대)문학 관념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오늘날 문학을 둘러싸고 조밀해지는 법과 제도는 소유의 감각을 더욱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소유와 주권적 자기의 구조로부터 도피하지 않으면서 부당함을 문제 삼고, 동시에 그 구조 너머를 상상하는 일은 지난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커먼즈로서의 문학 논의에서 계속 질문해야 할 고리가 바로 이 소유의 원리임도 분명하다. 물론 많은 이들이 지적해왔듯, 커먼즈는 단지 주어져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커먼즈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것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 함께 만들어가야 할(commoning) 것이고,20) 때로는 투쟁의 산물21)이다. 그렇기에 현행 세계의 역학과 다양한 폭력을 문제 삼는 것은 곧 커먼즈의 주제이기도 하다. 소유를 자명하게 여기는 감각은 커먼즈의 사유를 자꾸 멈춰 세운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러한 이중구속적 상황에서 쉽게 몸을 빼거나 멈춰서는 안 된다. 한 문학연구자는, 새로운 소유권의 형태로 도래한 근대 일본문학 초창기 풍경을 조망하면서 거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다양한 커먼즈의 계기가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는 소유를 질문하는 불안정한 지대를 포함하여 “작가, 허구의 인물, 독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과정”으로부터 커먼즈의 가능성을 타진한다.22) 그는 질문한다. 어느 소설 속 ‘이름 없는 고양이’가 발화하는 그 발언권은 (고양이는 인간도 아니고 이름도 없다는 의미에서) 법적으로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인물의 광기는, (통합되고 관리되는 자아를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소유의 주체적 위치에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지. 또는 한 여성의 소유를 둘러싼 한 지식인의 죄책감은 (가부장제 속 여성의 위치와 마찬가지로) 식민지를 폭력적으로 소유하는 당시 제국의 죄책감을 의미한 것 아닐지 등.23) 앞서 이주혜 소설에서 읽은 ‘나’ 역시 심지어 자기에게조차 독점될 수 없고, 늘 무언가와 연루되어 있는 일종의 준안정적인 지대임을 확인했다. 지금 커먼즈의 조건은 바로 이 불안정함, 혹은 경험되지 않은 잠재성 자체로부터 상상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바로 이 지대에서 바로 (방금 인용한 문장에서처럼) ‘독자, 인물, 작가’가 만나는 것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읽는 나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의 뒤표지에는 소설가 하성란의 이런 감상이 적혀 있다. “누구 한명의 것일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나’ 들의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서, 소설 속 그들의 이야기가 곧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나’들의 이야기가 된다”는 대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앞서 강조한 ‘자기박탈’ ‘자기를 내어주는 일’을 겹쳐 생각하고 싶다. 예를 들어, 우리는 허구로서의 이야기에서 나에 가까운 무언가를 만나고 공감한다. 하지만 때로는 그 이야기 속에서 자기를 잃고 헤매기도 한다. 이야기 속에서 나는 이미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 -예컨대 경험, 정체성- 에 대해 응답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나를 내어주는 장소가 곧 이야기이기도 하다. 앞서 이주혜 소설 속 주인공이 일기라는 형식 속에서 1인칭(나)을 내어 주면서 자기를 쓰는 일이 곧 타인을 쓰는 일이 되었음을 떠올려보자. 동시에 그때, 일기와 픽션을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을 떠올려보자(소설 속 한 인물은 그녀의 일기가 소설 같다고 말하고, 그녀는 자신의 글이 픽션이 아니라고 말한다). 일기가 타인들의 세계로 이행하는 서사 속에서 소유에 기반하는 주권적 자기의 형상은 교란된다. 그리고 픽션과 일기라는 형식과 관련해서도 장르적 구획 이전의 불명료한 지대가 부상된다. 자기를 내어주면서 도달한 곳이 타인의 세계와 더불어 소설적 장소라는 사실은 ‘소설적 커먼즈’ 의 또다른 의미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강조하건대 소유를 질문할 때,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잠재성의 지대가 열린다. 그것은 주권적 자기 너머의 연루됨 자체로 우리를 데려간다. 쓰는 이만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 아니다. 독자, 소비자, 유저 등 특정 정체성의 이름으로 환원되기 이전의 나의 몸들이 거기에서 스스로를 잃고/잊고/헤매도록(dispossession) 초대받는다. 익숙한 회로 속에서 쉽게 공감하는 것만 ‘함께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스스로(라고 여겨지는 것)를 내어주는 일에 초대받고, 그 낯섦에 기꺼이 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지금 커먼즈로서의 문학에 보태볼 또 하나의 의미일 수 있지 않을까. 1) 계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제207호)에 게재된 동명의 글을 수정 보완했지만, 이에 대한 좀더 최근의 상세한 내용은 「말하는 입에서 듣는 귀까지 : ‘자기서사’ 문제틀의 재구성」(김미지 외, 『젠더』, 문학과지성사, 2025)에서 전개했다. 2) 이른바 ‘자기서사’가 2016~17년 광장, 페미니즘 대중화의 시간을 통과하며 특히 부상했다는 점이 2025년 2월 시점에서 다시 의미심장하게 환기된다. 12·3 사태 이후 여의도, 광화문, 남태령, 한 강진 광장에서의 ‘자유발언’ 및 이후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다양한 그룹(시민활동가, 소수정당, 연구자 등)의 집담회, 토론회 등에서 자유발언이 이어지고 있고 그 발언 속 ‘개인’과 ‘연대’의 형식에 많은 이가 주목하고 있다. 광장의 경험은 늘 말을 바꾸어왔고, 말은 늘 광장을 바꾸어왔다. 지금의 분위기는 또 한번 자기를 발화하는 형식에 대한 논의가 재점화될 것을 예고하는 듯하다. 이 글에서 ‘자기’는 self의 번역어이다. 부분적으로 ‘자아’로 읽는 것이 자연스러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기’로 표기했다. 3) 장영은,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민음사, 2018 참조. 4) 김은하, 「젊고 아픈/미친 여자들과 자기 이론으로서의 글쓰기」, 『여성문학연구』61호, 2024 참조. 5) 한영인, 「자아 생산 장치로서의 에세이」,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215, 217면. 6) 日比嘉高, 『プライヴァシーの誕生』, 新曜社 2020, 254면 참조. 7) 오혜진, 「지금 한국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1)」, 『문학과사회-하이픈』, 2018년 겨울호. 8) 오카 마리,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옮김, 현암사 2016. ‘목격-증인 되기’에 대해서는 8장을 참조할 수 있다. 9) 가야트리 스피박, 『스피박의 대담』(새럼 하라쉼 엮음, 이경순 옮김, 갈무리, 2006, 254쪽),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어셈블리』(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참조. 10) C. B. 맥퍼슨,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 이유동 옮김, 인간사랑 1991, 25-26, 206면. 11) 같은 책, 212면. 12) 특히 2010년대 이후 영어권의 각 분과마다 신자유주의 지배구조 분석과 관련해 ‘소유적 개인주의 50년 후’라는 문제의식이 널리 공유되어왔음을 참조해본다. 13)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김응산 옮김, 자음과모음 2016 참조. 이 책에서 두 대담자는, 오늘날 세계가 어떻게 주체의 구성적 상호의존성을 차단하고 정착민 식민 체계에서 박탈·탈소유(dispossession)를 역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넘어설 원리가 무엇일지 논의한다. 14) 같은 책, 26-27, 338면. 15) 같은 책, 337면. 16) 여기에서 물리적으로 구획된 몸을 넘는 정동적인 경험과 연결신체(assemblage)의 주제를 소환할 수도 있고, 이런 이유에서 이 소설은 ‘5월 광주 소설’의 새로운 방법을 가늠케도 한다.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축자적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개인적인 것’의 의미를 재구축하는 과정, 그리고 ‘자기’라는 내적 표상이 시간의 축적 속에서 구축되는 과정을 확인하는 것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어떤 사건에 대한 당사자와 비당사자 문제, 이른바 경험 없는 세대의 ‘포스트 기억 장치’ 문제에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17) 물론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시옷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을 이야기하며 그에 대해 “사과하고” “말을 걸고 싶었”으며 “이름을 불러주고”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347면)고 적어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작가의 사후적 소회와 별개로 분명 ‘나’ 혹은 어떤 고유명을 피하는 설정 속에서 오히려 자기=나를 둘러싼 존재의 원리를 근원적으로 보여준다. 18) 김다솔, 「붉은 언어로부터 무한히 탄생하는 세계」, 『문학동네』 2024년 봄호 56면. 19) 우카이 사토시, 『주권의 너머에서』, 신지영 옮김, 그린비 2010, 379면 참조. 20) 데이비드 볼리어,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배수현 옮김, 갈무리 2015 참조. 21) Silvia Federici, Re-enchanting the World, PM Press 2018, 87면 참조. 22) Michael K. Bourdaghs, A Fictional Commons, Duke University Press 2021, 11, 23면. 23) Michael K. Bourdaghs, 같은 책 2~4부 참조.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 「마음」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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