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동네 2025년 여름호(제123호)
자기 자신이 드러난다는 문제
요새 내가 붙잡고 있는 질문은 '자기 자신을 시에 얼마나/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이다. 엄밀히 말하면 나 혼자 생각해낸 질문은 아니다. 시 창작 클래스에 온 수강생 중 한 분의 질문이 먼저 있었다. 그 질문은 "시에 자기를 얼마나 드러내는 게 좋은가요? 어느 정도까지 드러내야 할까요?"였다. 정량적으로 총 행의 십 퍼센트만 드러내세요라든지 어느 곳에도 절대 드러내지 마세요라는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하지만, 고정된 외형이나 내용이 정해진 것은 문학이 아니지. 시도 아닐 것이다. 질문하신 분도 그런 정형화된 답을 원하는 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 일단 시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묻는 수밖에. 나는 나의 시에 나를 얼마나 드러내고 싶어하나. 어느 정도까지 나를 보이려고 하나. 친한 친구에게 하듯 시시콜콜한 것들 다 나누려고 하나. 한집에 살지 않은 지 오래된 가족에게 그러듯 좋은 것만 보이려 하나. 매일 보는 직장 동료처럼 사회화된 나의 일면만 보이려고 하나 등등. 그러나 곰곰 생각해볼수록 시는 친구도 가족도 직장 동료도 아니다. 은유법을 활용하여 시를 친구처럼 연인처럼 대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엄밀한 차원에서 시는 실체 없는 대상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람에 따라 특정한 관계를 맺듯 시와 관계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가 말없는 친구 같다거나 전 애인 같다거나 등등의 비유들이 뜻하는 바는 결국, 비유의 성질이 그러하듯 둘의 유사성만큼이나 둘의 차이점이 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위의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시가 요구하는 만큼 나를 시에 주고 싶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완전히 드러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완전히 감췄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나는 늘 나를 내놓겠단 마음을 먹는데 시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다 못 쓰는 것에 가깝달까. 시인으로서 나는 시의 자체적 흐름에 그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어서, 거의 수동적으로 보일 만큼, 철저히 무의지적으로 보일 만큼, 나를 주고 싶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나를 도구이자 수단으로 쓰고 싶다. 버려져도 아까워하지 않게 일단 줘버리는 것이 포인트다.
그러나 나의 이 답은 다소 장황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시가 요구하는 만큼'은 좋게 말하면 시의 자율성을 은유하는 표현이고 나쁘게 말하면 시인의 무책임을 은유하는 표현이므로, 시 창작을 신비화하는 표현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주장하자면 시 창작에는 모종의 신비가 있다. 시인의 의지를 배반하면서 시인의 바닥까지 요구하는 시의 무시무시함에 반응하는 것에서 나는 이 신비를 본다. 이 무시무시함에 저항하는 길도 있고, 순응하는 길도 있는 듯하다. 어쩌면 나는 늘 전부를 내놓고 싶다고 생각하고 대개는 내놨다고 착각하며 매번 실패하는지도. 결론적으로 나는 나를 보이지도 나를 감추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시를 쓰고 있는 거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구구절절 수강생분께 답하는 것이 좀 면구스러웠다. 그래서 위의 생각들은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더듬더듬 대답했다. 개인적인 것은 모두 사회적인 것이라는 말도 있으니, 부끄러워하지 말고 일단 쓰세요. 그러나 퇴고하면서 내가 쓴 '나'의 말이 시의 흐름을 답답하게 한다면 빼세요. 혹은 내가 숨기고 싶은 말일수록 시에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수수께끼를 만들지 마시고 그냥 단순한 말로 써보세요. 숨길수록 시가 답답해져요. 숨기지 마세요 등등. 굉장히 모순되는 두 요구(빼세요/드러내세요)를 갈무리하지 못한 채 내밀어 수강생분을 더 혼란에 빠뜨렸다. 하지만...... 시는 원래 혼란 속에서 혼란 그 자체이기도 한 법이므로, 내 말이 아주 틀렸다 말하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문제는 김복희의 '나'로부터 시작하려는 데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일단 길은 하나다. 다른 시인들이 한 것을 보자! 남들은 어떻게 썼나 짚어보는 좋은 길을 안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동시대 시인들이시여, 자기 자신이라는 문제, 어떻게 쓰고 계시나요.
이새해, 『나도 기다리고 있어』
시인의 첫 시집인 『나도 기다리고 있어』(아침달, 2025)는 두둑한 시집이다. 어째서인지 그런 인상이 들었다. 3부 구성에 51편이라 낯설지 않은 구성임에도 그랬다. 시 편편의 길이가 긴가 하면 아주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두둑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이 느낌에 대해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시집에서 실제 시인으로 짐작 가는 '나'에 대한 혹은 '나'의 느낌에 대한 감각적 소회가 많은 경우 시집을 두둑하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시인의 진짜 일화가 튀어나온다 싶을 때, 그러니까 소위 이건 진짜 시인의 이야기인 것 같다고 느낄 때(시인을 붙잡고 이거 당신 이야기 맞냐 아니냐 이런 식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그것이 시집 전반을 아우르고 있을 때.
오랫동안 나는 시에 등장하는 '나'와 시인을 분리시키는 읽기 방식에 능숙한 편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나도 기다리고 있어』를 읽는 동안, 시집에 등장하는 '나'와 시인 이새해를 구별하지 않았고 억지로 분리시키려고 해봤자 무의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새해 시인과 일면식도 없으면서 그랬다. 시의 많은 부분에 돌이켜 생각해보는 느낌, 그때 봤었던 것을 지금 다시 보고 그때 그건 뭐였을까 궁리하는 느낌이 있어서? 이것이 '나'라는 자의 기억을 샅샅이 함께 보는 느낌이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 구축할 수도 있었을 특정한 캐릭터성을 부각시키려는 느낌이 아니어서? 시인과 '나'의 성별이 다르다는 느낌이 없어서? 시집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조부모에 대한 묘사, 죽은 친구에 대한 묘사, 자신의 아이에 대한 묘사 또한 시인의 실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나는 시를 읽으며 시인이 시에 쓴 일화들이 시인의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시집에 실린 시 모두 시인이 정말로 겪은 이야기는 아니고, 겪은 일에 대한 창조적 변용일 것이다(왕인박사라고 이름 붙인 누군가가 업히는 시 「업고 업혀라」든지). 하지만 시에 등장하는 사건이 모두 시인의 실화가 아니라면, 시의 가치가 훼손되는가?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시집 속 이야기를 모두 시인의 이야기라 겹쳐 읽는 게 가능해지자, 독자인 나로서는 시 읽기가 훨씬 수월했다. 내가 거부감 없이 화자의 자리에 가 함께 이동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화자가 마냥 자기 자신의 넋두리를 하는 방식으로 시를 끌고 가지 않아서였다. 이새해 시인은 어떤 일을 화자의 입장에서 '다시 보는' 시인이다. 그 자신의 입장에서 외치는 시인이 아니라. 그렇기에 그는 그 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슬펐는지 괴로웠는지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 일이 벌어지는 동안 보았던 얼굴을 다시 본다. 독자에게도 보여준다. "이새해의 시에는 얼굴이 있다. 몸이 없는 얼굴, 몸을 구하는 얼굴, 말해도 들어주는 이 없는 얼굴, 잊히는 얼굴"(홍성희 해설, 「지키는 약속」, 161쪽) 등등의 얼굴을, 이새해 시인의 화자가 보고 있는 것은 평론가 홍성희가 언급한 것처럼 누군가의 얼굴(들)이다.
얼굴은 실로 고정되어 있지 않은 실체다. 실생활에서 얼굴은 많은 말을 해주는 듯싶지만, 생각보다 많은 말을 해주지 않는다. 얼굴에는 표정이 있기 때문이고, 그 얼굴을 우리는 하염없이 한정 없이 고정시켜둔 채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얼굴은 표정과 함께 시시각각 달라지고, 그 얼굴처럼 나의 얼굴 역시 함께 시시각각 달라진다. 때문에 서로의 추측과 상황이 구성하는 맥락 속에서 순간순간만이 발생했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새해 시인이 시에서 보여준 얼굴을 따라 독자인 나 역시 화자 '나'가 하듯 타인의 얼굴을 되새겨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시시각각 변했던 얼굴 중 '나'가 인상 깊게 느꼈던 한 순간을 오래 그려보아야 했던 점 때문에, 그 순간이 너무나도 묵직해서, 내겐 이 시집이 그토록 두둑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우리는 다시 아이의 이름을 짓기로 한다. 좋은 이름이 나오면 칭찬을 하고 우스운 이름이 나오면 웃음이 터진다. 이름마다 다른 얼굴이 떠오른다. 볼이 통통한 애. 눈이 사나운 애. 날 닮아 이목구비가 납작한 애. 이상하지. 새로운 이름이 바닥나도 아이들의 얼굴은 계속된다. 광장을 채울 것 같다.
다리가 흔들리고.
힘없이 흔들리고.
나는 발끝을 보다가 침을 삼키다가 바닥을 본다.
바닥에 안긴 햇빛은 공평하다.
옥상에서 떨어졌던 찬규에게도 내리쬐고 있었다.
너와 내가 낳을 아이.
- 「미관광장」(70쪽) 중에서
인용한 작품은 세 편의 동명의 시 「미관광장」 중 첫 번째로 실린 것이다. 현재 일산문화공원으로 불리는 넓은 공원의 옛 명칭이다. 이 시의 '나'는 기뻐하기만 할 수도 슬퍼하기만 할 수도 없다. 태어날 아이에게 이름을 주는 일과 얼굴을 상상하는 일이 죽은 '찬규'라는 친구를 떠올리는 일과 병치되어 있기에 화자의 상황과 꼭 같은 상황을 내가 겪어본 적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하지만 독자인 나도 화자 '나'가 얼굴들을 떠올리며 겪는 감정의 부침으로 잠시 들어가볼 수 있었다. 뭐라 말하지 않고 다만 얼굴을 상상해본다. 미관광장 한 귀퉁이에서.
진수미, 『고양이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뒤』
시인과 시의 화자가 겹치는 것 같다고 느껴질 만한 시집으로 또 하나, 진수미 시인의 『고양이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뒤』(문학동네, 2024)를 고르고 싶다. 이새해 시인과는 또 상당히 다른 결이다. 이전 시집 『밤의 분명한 사실들』(민음사, 2012) 출간 후 햇수로 십삼 년 만에 출간된, 실로 오래 기다린 시집이다. 지금 나는 진수미 시인의 시를 읽으며 습작을 했던 시기를 떠올리고 있다. 습작 중 내가 읽었던 진수미 시인의 시는 자유로움! 온통 자유로움! 이었다(감탄 및 경이를 느꼈다는 심정을 표현하고픈 의지 때문에 문장 중간에 느낌표를 찍어야만 했다). 이렇게 써도 돼요?(이건 좀 별로 아니에요?)라는 어리숙한 내 자문에, 매번 진수미 시인의 시는 대답해주었다. 왜 안 돼?(이게 별로라는 네 선입견을 깨라. 도끼로 꽝. 부서진 다음에 다시 써라.) 진수미 시인의 시는 시를 쓸 때는 뭐든 써도 된다는,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든 자기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든 그것에 얽매이기 이전에 자유롭게 써도 된다는 즐거움을 내게 알려주었다. 천진해도 된다는 것, 능숙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관능적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 등등. 여자라는 종으로서 느끼는 피로감에 대해서든, 사회에서 마주하는 온갖 사건 사고에 대한 즉각적 반응에 대해서든, 그러니까 금기시되는 것이든 금기시조차 되지 못하는 것이든 뭐든, 머리로 이성으로 진단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감각대로 써도 된다는 허용이었다. 가감 없이, 맨 목소리로 쓰기, 그것이 표출하는 에너지를 감각하는 것이 즐거웠기에 이번 시집도 기대했으며,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판사님, 이 글은 제가 쓴 게 아닙니다. 저희 집 고양이가 쓴 것입니다' 밈이 떠오르는 시집 제목부터가 그랬다. 어쩌면 진수미 시인은 저 밈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정말로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들이 대개 주인의 컴퓨터 키보드 위에 올라가 있는 모습을 보고 제목을 지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들 어떠랴? 젊은 시인에게 눈더러 보라고 흰 눈에 기침을 하라며 일갈하던 김수영처럼, 우리들에게, 우리들 젊은 시인들에게 혁명적으로, 혁명이 뭔지 거창하게 말하려 고양이 털 때문에 기침을 하듯이, 일단 기침부터 터뜨려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여기, 털피지의 기적」) 또한 시의 자유 아니었던가? 김수영이 말했던 '자유의 과잉, 혼돈'(「詩여, 침을 뱉어라」) 중에는 진수미의 것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어떤 것을 문학에, 시에, 작품에 등장시켜야 할까. 정답은 없다. 하지만 내게 질문을 주었던 수강생 포함 많은 여자들은 생각한다. 이건 너무 사소하지 않은가 하고, 혹은 내가 직접 겪지 않은 일에 대한 감정을 써도 될까 하고. 하지만 자기 자신을 시에 쓴다고 할 때 당연하지만 꼭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사건이 주는 충격으로 비롯한 감각이나 생각 또한 자기 자신의 일부로서 시에 등장할 수 있다.
아침이 왔다 물 한 컵 마시고 고양이 밥을 주고 스트레칭하고 더없이 좋은 시작이었는데 뼈가 부러졌다 모든 게 망가졌다 광장에 들렀다 카페에서 책을 읽기로 한 약속 동강난 연필심처럼 어디론가 굴러갔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움직일 수가 없다 엉뚱하게 사지가 부푼다 .. 내 것이 아닌 거 같다 아프다...... 아프다...... 의사가 상처를 두드리며 물었다(..) 통증에 계단이 나 있다면 고통의 나선계단을 다 같이 오를 수 있다면 더 높이 서 있는 당신을 향해 고개 젖힐 것이다 당신 얼굴에 무언가 흐른다면 그것이 여름비처럼 살갗을 두드린다면 용암처럼 얼굴을 녹인다면 우리는 다 같이 아프다 아프다 외칠 것이다 고통으로 몸 비틀 것이다
- 「푸른 잎 우주_20140416」 중에서
인용한 시는 평화로운 어느 날 아무런 전조도 이상도 없이 뼈가 부러진 화자가 고통스러워하는 내용을 다룬다. 사건성이 없는 부상이랄까. 하지만 제목의 2014년 4월 16일은 세월호가 가라앉은 날, 잊을 수 없는 하루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날이다. 화자의 "부푼다" "아프다"라는 말은 온전히 뼈가 부러진 자기 자신에게 할당된 말이면서 실은 바다에서 희생된 이들이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는 바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거나, 알면서도 자신의 아픔 때문에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있다...... 정말로 아프다...... 사건 당시 무지했던 내가 떠올라 다시 아프다. 어떤가. 자기 자신을 보여준다는 것은 결국 '나'의 생활에 더해 내 둔감함 역시 보여줄 수 있다는 뜻이다. 앞으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 걸 그대로 써도 돼요?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진수미 시인의 시를 보여주리라. 왜 안 되겠어요? 우리에게 부족한 건 생각도 생각이겠지만, 생각한 걸 쓸 수 있는 용기다.
김연덕,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
용기 하면 또 빼놓기 어려운 시집으로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현대문학, 2025)을 꼽아야겠다. 나는 이 시집에 실린 시들 중 일부를 이미 월간 『현대문학』의 핀 시리즈 전재로 먼저 읽은 바 있다. 당시 읽었던 시들 중 내 기억에 선명히 남은 것은 두 편으로, 어린 시절 키웠던 강아지의 죽음을 다룬 시 「천국의 개들」과 온 식구들의 옷을 맡겼던 세탁소 이야기가 등장하는 시 「messy old laundry」였다. 시를 읽자 김연덕 시인을 만나며 들었던 가족에 관한 일화들, 꽤 오래 살았다고 들었던 집에 관한 일화들이 떠올랐다. 한 사람의 시인이 자신의 유년을 시집 한 권 분량으로 구성하는 것이 어디까지 가능할지 기대가 됐다.
김연덕 시인은 그가 대가족과 오래 살아온 집 부암동 338-43번지를 중심으로, 어린이였던 자신과 어른이 된 자신의 시선을 교차시키며 시집 전반을 구성했다. 어린 사람의 시선만으로 전개되거나 어른의 시선만으로 전개되지 않는 점이 그답다고 느껴졌다. 어린 사람에게 지금과 같이 유창한 언어가 있을 리 없으니 해소되지 않는 어둑한 부분이 시 부분 부분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고, 그 어두운 부분은 다시 어른의 시선에서 보면 마냥 어두운 부분만은 아닌 것처럼 여겨져 촘촘한 언어로 다시 써야 하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김연덕 시인은 훼손이라기보다 유지 보수한 향수를 우리에게 주었다. 그래서일까.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아름답다. 현재 통용되는 '아름답다'라는 의미 그대로, 누구도 이 시집의 아름다움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마 김연덕을 한 번 본 적 없이도, 그 개인에 대한 호감이 발생할 정도로 아름다운 시집일 것이다.
이 시집에 실린 편편의 아름다움은 물론 떠나온 집을 파본이라는 은유로 이해시키는, 있었던 공간 속으로 들어가고 나감이라는 시집의 전체 기획과 구성에도 감탄했고 참 좋다고 느꼈다. 조부모와 형제자매들에 관한 시가 특히 좋았다. 아마 몇 편은 더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덜 쓴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더 읽고 싶어요. 더 내놔요. 더 있잖아요. 떼를 쓰고 싶을 정도로, 지금 그 언니 오빠 자매는 무얼 하고 있나요. 조카들도 그 집에 들른 적 있나요. 어머니 아버지는 요새 어떻게 지내시나요. 엄청 친한 이웃이라도 된 듯이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시인은 이런 효과를 원하지 않았겠지만.
우리 집 마당에서 가장
예민하고 투명한 껍질로 이뤄진 사랑인
앵두를 따러 갈 때마다 어린 나는 가족들과 함께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곤 했다 바구니는 짜임이
너무 흔하고 성기고 가벼워
날아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얇은
영혼마저 담을 수 있을 것 같았고
바구니를 집으로 들고 가는 사이 잠에서 덜 깬
어린 영혼과 앵두 중 무엇이 먼저 떨어질지
즐거워하고 아슬아슬해하며
껍질이 부드럽게 터져 죽는
형태를 상상하면서
수많은 미래의 사람들과 사랑하고
본 적 없는 마당에서 헤어질 수 있을 것 같았고
- 「앵두 따기」 중에서
마당에 있는 앵두를 온 가족과 따던 일화가 담긴 시다. 시인이 자기 이야기를 이토록 아름답게 펼쳐놓으면, 유령 가족처럼 거기 끼고 싶어지는 것일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시집을 아주 좋아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상처받을 수도 있겠다 싶어졌다. 시인이 자신의 이야기 위에 비춰둔 빛과 그림자 아래 어떤 더께가 더 있는지 읽는 사람은 모른다. 시인이 시집의 내용이 전면적으로 자신의 이야기임을 내세웠기에 거기까지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시인이 보여준 빛과 어둠의 구상을 볼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 외로운 영혼들은 아름다워 보이는 가족을 바깥에서 지켜보는 고아가 된 것처럼, 이 시집 바깥에서 서성대고 있을 거라는 다소 과한 상상을 했다.
이 상처는 시인이 의도한 바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시집은 아주 조심스럽게 나쁜 것들은 거의 없이,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으려는 애씀으로 가득하다. 시에 등장하는 자기 자신의 가족들에게조차 얼마나 언어를 섬세하게 썼는지 감탄할 정도로. 아마 모종의 독자들이 받을 상처는, 사실 김연덕 시인의 시집 자체에서 기인했다기보다 김연덕 시인의 시집에서 촉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상상으로 빚어진 유년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문학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실제 자신의 유년을 떠올리면 밀려오는 복잡 미묘한 기분이 있다. 그리하여 대안으로 그리워하는 유년, 이런 유년이 내게도 있었다면 싶은 유년, 평행 유년 같은 것...... 등등의 감상 작용이 밀려오면서, 왜 이 시집을 읽고 슬퍼지는가 이해하지 못하여 괜히 김연덕 시인과 시집을 탈탈 털며 고통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서 이 시집이 좋은 것이다. 상처를 주는 책은 생각보다 드물다. 상처를 주는 시집은 더더욱. 상처 위에 새살이 돋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쓴다는 것에 대해 나름의 힌트를 얻으시기를 바란다. 김연덕 시인의 용기를 배워서.
시는 일인칭 장르라고 한다. 고백의 장르라고도 부르고, 내면의 독백에 유용한 장르라고도 한다. 특히 주어가 없어도 되는 한국어 문장의 특성상, 주어가 없는 문장은 거의 '나'라고 하는 숨은 화자의 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시에 등장하는 모든 말은 '나'라는 자의 말일 것인데, 시인이 곧 '나'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다소 연극적인, 퍼포먼스적인 것이라고 상정하면 조금 이해에 닿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배역을 맡은 배우가 곧 그 배역은 아니듯이, 시인 스스로의 일화를 시에 활용하고 있다면 시인이 그 자신을 배역으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최근에 출간된 시집 대부분을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읽었다. 확실히 독자로서 독해가 아니라 창작자로서 독해였다. 시가 독자에게 다가가는 방식이 '나'의 활용을 경유하는지 아닌지, 혹시 '나'를 활용하고 있다면 그 '나'가 시인을 활용하는지 아닌지 등의 창작 방식에 초점을 맞춰 읽은 까닭에 덜 읽은 느낌도 들고 더 읽은 느낌도 든다. 그중 일부를 내 창작에 응용할 수 있을까 가늠해보기도 하고, 시 창작 수강생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면서.
그리고 하나 더 다루지 못한 질문에 대해 말하며 시 읽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앞서 시에 드러나는 '나'에 대한 언급 모두 언어가 대상을 완전히 포착할 수 있다는, 언어와 대상의 일치성을 전제하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는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이고, 언어는 대상과 불일치하는 것을 속성으로 가지므로 시란 불일치를 표현하는 예술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속성상 시에서 '나'를 보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기획이 아닐까? 아니면 이런 대전제를 뚫어가며 '나'를 표현하는 시가 있을지도? 그것에 도전해야 할지도? 그것을 보여줘야만 할지도? 어렵다.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내게 좋은 수가 있다. 존 버거가 말한 적 있는데, 질문을 꼭 말로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이 질문하기가 될 수 있다고 했다.1) 나는 존 버거를 흉내내어 시 쓰는 것이 질문하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다른 시인들이 어떻게 썼나 물어보거나 읽어보고 나도 시를 써보는 것이다. 같이하실 분들을 늘 구하고 있다.
- 1) “나도 〈그랑블루〉라는 영화를 본 기억이 나는구나. 내 기억이 맞다면, 수면으로 돌아가지 말고 거기 깊은 곳에 머물라고 두 프리다이버를 유혹한 것 중에는 침묵도 있었지. 그러니 우리에겐 소음과 침묵이 있구나. 소음은 설명을 덮어버리고, 침묵은 계속해서 현재를 따져 묻는 질문들을 내놓지. 둘 다 온전히 살아 있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아. 무엇이 도움이 될까? 아마도 '질문하기'겠지. 그리고 질문은 말로만 하는 게 아니야. 그림을 그리는 것도 하나씩 계속해서 질문을 하는 거야. 질문하기의 역설은 질문하는 사람이 답을 찾거나 답과 마주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사실에 있어. 일종의 신념이지.”(존 버거, 이브 버거, 『어떤 그림 - 존 버거와 이브 버거의 편지』, 신해경 옮김, 열화당, 2021,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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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고봉준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와 양안다의 사이, 그 틈 류수연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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