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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자음과모음 | 2025년 여름호(제65호)

픽션의 용기와 멀리 가는 퀴어 ― 김병운론

노태훈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1990년대 한국소설과 소수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계간 《자음과모음》 편집위원을 맡고 있으며 인하대학교 국어교육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문학장의 구조와 유통, 소설의 서사적 역동성, 장르론 등에 관심을 두고 있다. 평론집 『현장비평』(2023)이 있다.

픽션의 용기와 멀리가는 퀴어김병운론

 

 

여기 한 소설가가 있다. 2014년에 데뷔해 드물게 활동하는 동안 모(/)지는 사라져 버렸고 의도치 않게 퀴어 연애담을 다룬 에세이를 첫 책으로 출간한 뒤 후련하게매듭지은 장편소설로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해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을 탐문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한 소설가가. 곧 출간될 두 번째 소설집을 포함해 이 작가가 걸어온 여정은 짧지만 드라마틱해서 작가론의 대상으로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당사자성과 허구의 글쓰기 사이에서 발생하는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은 비평적 분석의 욕망을 자극하는데, 작가가 스스로 이렇게 써버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날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눴던 까닭은 그즈음 우리가 삶과 작품을 연결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쨌든 쓰고는 있으나 아직 작품집을 내지 못한 소설가들이었고,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분투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진짜 해야 할 말이 있음에도 계속 돌려 말하고 있다는 자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이런 식의 커버링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얘기를 토로하듯 자주 나눴다. 그건 분명히 최근의 한국 문학장 안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1인칭 시점의 자전적 글쓰기를 의식한 대화이기도 했다. 제발 네 인생 이야기를 쓰라고, 너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 달라고 독려하는 듯한 어떤 분위기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1)

 

소설가가 자신을 연료로 삼아 텍스트의 동력을 확보하는 사례는 낯선 것도 아니고 최근 한국 문학장에서 그것이 얼마나 열띤 논의를 생산해왔는지 재차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때로는 과감하고 독창적으로 퀴어 당사자성의 텍스트를 읽어내려는 그간의 시도를 참조해 이 작가의 작품들을 일별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론의 형태라면? 한 사람의 작가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면서 작품의 변화를 읽어내고 그가 지향하는 문학적 주제 의식을 탐구하면서 비평적 의미를 덧붙이는 작업이 작가론이라면, 그것이 김병운에게 가능할까? 2020년 이후 그가 쓴 작품 속에는 소설가 김병운의 작가 의식이 직접적으로 잔뜩 담겨 있고 이는 곧 김병운의 텍스트가 이미 김병운을 픽션이라는 구조 속에서 하나의 도구로 삼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김병운은 작가가 아니라 이제 차라리 인물이 아닐까. 하지만 이것이 억측일 수밖에 없는 것은 소설 속에서 이미 허구의 장치를 작가가 충분히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정체성 서사에 천착하는 몇몇 퀴어 작가가 소설 자신과 소설 의 자신을 끊임없이 연결시켜 픽션적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김병운은 소설과 현실을 곧바로 잇기보다 그 이음새를 수차례 매만지면서 왜 나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가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창작의 윤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사적 전략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의 텍스트에 흩뿌려져 있는 온갖 김병운을 작가 자신과 관련짓는 순간 그는 손사래를 치며 작품을 밀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렇게 말할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억측만은 아니라고.

 

 

김병운의 공식적인 데뷔작은 2014작가세계신인상 당선작 메르쿠이다. 연금술의 망상에 빠져 집에서 키우던 개를 고양이로 바꾸려던 화자의 시도가 사실은 10년간 치매를 앓던 할머니를 살해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는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작가가 가진 서사성의 일단을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 작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른 시기에 장편의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 사이에서 흥미진진한 서사의 줄기를 뽑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점에 기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병운의 초기 단편들은 첫 소설집에 실리지 못한 채로 남아 있지만 그의 서사적 동력이 어떤 방식으로 확보되는지, 이후 본격적인 퀴어 서사의 문제의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8년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나리오 부문에서 상흔록이라는 작품으로 당선된 작가의 이력은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첫 번째 풍경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이 작품이 어린 세자와 노년의 영의정 사이에 금지된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또 시나리오라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김병운의 지향을 엿볼 수 있는데, 이후 구체적으로 서술하겠지만 퀴어, 아이, 죽음 등 그의 문학적 키워드라 할 수 있을 소재가 이미 출현하고 있을뿐더러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애정도 포착된다. 김병운의 첫 장편이 배우라는 직업과 영화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음은 물론이고 이후 여러 작품에서 영화적 모티프, 나아가 연기하는 삶에 대해 쓰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의미 있는 과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여러 차례 언급한 바 김병운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관심에서 소설이라는 문학의 형식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왜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을까.2)

 

나는 네가 나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얘기를 한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날 따라하려고 하지 말라고, 나처럼 보이지도 않으면서 보이는 척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다행히 제정신 멀쩡히 박혀서 태어났으니 그 정신 얻다 내다버린 것처럼 사는 짓은 하지 말라고.”

내가 할 말을 잃고 멍해진 사이, 엄마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나는 네가 날 원망하면서 사는 걸 원치 않았을 뿐이야. 그런데 너는 지금 내 탓을 하고 있구나. 그렇지? 왜 늘 너한테 하지 말라고만 하느냐고? 그렇다면 나는 너한테 묻고 싶구나. 왜 너는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는 거지?”3)

 

죽음을 앞둔 엄마와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앞둔 아들이 보낸 마지막 시간을 다룬 이 소설은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소설이 주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던 엄마는 삶을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아들에게는 소설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고등학교 때 쓴 소설이 엄마로부터 평가절하 당한 일은 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고 는 즉흥적으로 아들에게 살해당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일종의 복수를 감행한다. 그리고 하필 그런 이야기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자전소설이기 때문이지 않겠냐며 엄마를 곤혹스럽게 만드는데, 여기에 작가의 소설적 딜레마가 담겨 있다.

서사를 만들어내고자 할 때 가장 자유로운 형식으로서의 소설을 선택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설은 어떤 허구를 동원하더라도 작가 자신과 손쉽게 연결되는 일을 피하기 어렵다. 김병운이 자신이 가진 서사성을 영화라는 장르에서 소설 쪽으로 옮겨온 뒤 작가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고 가정할 때 픽션이 가진 서사적 자유가 역설적으로 작가적 제약이나 한계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곧바로 그에게 자각되었던 것 같다. ‘하는 장르로서의 소설이라는 인식은 결국 작가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해서 이후 그의 변화를 짐작하게 하는 면이 있다.

역시 소설집에 실리지 않은 초기작 리처드 스콧 씨에게를 참조하면 김병운에게 시간이라는 문제 역시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데뷔작과 동일하게 이 작품 역시 과거를 계속 복기하면서 현재의 타임라인을 적시하고 있는데, 2014년에 여자친구와의 혼인을 앞두고 있는 는 유년 시절 동네에 거주했던 흑인 리처드 스콧씨를 우연히 마주쳤다는 생각에 빠진다. 오로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동네 전체를 긴장시켰던 그는 엄마와 모종의 관계를 맺는다. 누나와 는 의심과 의혹 속에 엄마를 지켜보고 결국 엄마와 함께 손을 잡던 스콧 씨에게 가 옥상에서 벽돌을 던짐으로써 파국은 시작된다. 그리고 세 식구가 도망치듯 동네를 떠나면서, 그 일은 지금 이 순간부터 기억에서 지워버리라는 엄마의 당부로 이 파국은 곧바로 마무리된다.4)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자신을 지배한다는 것,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절대적) 존재, 누나의 이해라는 구도는 이후 김병운 소설에서 반복되면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채로운 감각과 정서적 변화를 추동한다. 그리고 산문집 아무튼, 방콕』(제철소, 2018)을 계기로 이러한 구도는 퀴어함과 본격적으로 결합한다.

아무튼, 방콕은 이례적으로 작가의 소설 단행본보다 먼저 발간된 에세이지만 김병운이라는 작가의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이정표이다.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 글은 방콕이라는 매력적인 공간을 소개하는, 여행기를 빙자(?)한 퀴어 연애담이라 칭할 수 있을 텐데 삶과 드라마, 생활과 여행의 경계에서 끝없이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마사지숍에서 만난 어떤 아주머니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자신의 나라가 싫다면서 라이프 노노, 드라마 오케이, 라이프 노노, 트래블 오케이라고 말한다.5)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벗어나 특별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소설을 써 보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고, 김병운 역시 드라마트래블에 매료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은 무엇이든 소설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또 아닌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는데,6) 이에 연인 H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네가 쓸 수 있는 소설은 뭔데?

나는 한 번 더 말문이 막힌다. 그건 말이지 하고 자신만만하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쓰느니 마느니 하며 징징대지도 않았겠지.

그때 H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는가 싶더니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다.

그건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거 아닌가.

?

아직 쓴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7)

 

일단 써야 한다는 것, 써 보지 않고서는 그것이 소설이 될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 작가가 도달한 결론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픽션의 자유로움이란 그것을 쓰면서 망설이고 주저했던 흔적마저 픽션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를 감추고 새롭게 만들어 내면서가 아니라 를 적극적으로 쓰면서 가능해질 수 있다는 의미임을 이 시기 김병운은 재인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민음사, 2020)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내가 쓰지 못하는 건 하고 싶은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8) 이 소설을 승승장구하던 배우 공상표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커밍아웃을 감행하는 이야기라고 우선 요약해 두자. 동생의 갑작스러운 게이선언에 이를 만류하고 수습하려드는 누나와 엄마의 이야기가 1부를 구성한다. 친구나 동료였다면 기꺼이 지지하고 응원했을 일이 내 가족의 일이 될 때, 얼마나 많은 혼란과 곤혹스러움을 가져다주는지 소설은 누나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동시에 결코 아들을 떠나거나 잃을 수 없는 엄마의 집착 역시 적실하게 묘사된다. 문제는 이것이 지극한 사랑이라는 점이다. “주고 또 줘도 바닥나지를 않는 그 많은사랑이 이들에게 있다.9) 대체로 이해와 사랑은 한 몸이지만 때때로 이해와 사랑은 별개일 수 있음을, 사랑하기에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에 사랑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가 소설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강은성(공상표)과 김영우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서로를 완벽한 비밀로 만들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게 이 관계의 성립 조건이자 유지 방법이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는 내밀한 과거와 경험을 모조리 공유하면서 관계를 키워나간다.10) 온전히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강은성은 “‘진짜 나는 숨기고 억누른 채 꾸며진 나로만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노력이 자신의 연기마저 망쳐버리고 있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11) 그리고 김영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강은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로 작정한다.

 

시작은 언제나 희뿌옇고 자욱한 연기예요. 담배 연기라기엔 너무 축축하고 수증기라기엔 너무 건조한 정체불명의 연기가 시야를 가득 메우죠. 덕분에 저는 열심히 허공을 휘저으면서 조심조심 움직여요. 발길이 닿는 곳마다 빛이 감지되기는 하지만 조명의 위치가 발목께여서 앞은 잘 보이지 않거든요. 그저 간신히 발밑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의 밝기죠. 그래서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해요. 제가 그곳의 어둠에 완전히 스며들어야 하니까요.12)

 

이태원 클럽에서 방화 사고로 사망한 김영우의 죽음 이후 강은성은 악몽에 시달린다. 가본 적도 없는 참사의 현장에 당도해서 사건에 휘말리다 순식간에 침묵 속으로 이동했다가 깨어나는 이 꿈은 그에게 여전히 자신은 살아 있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죽은 자가 산 자와 다른 것은 시간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한참의 시간이 제공되어서 어둠 속에서도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은 산 자의 특권이다. 이렇게 살아남은 자가 영원히 시간을 박제해 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시간을 쓰는’(use/write) 것이다. 강은성은 김영우가 완성했지만 자신에 의해 폐기되었던 영화, 즉 시간을 되살린다. 그가 쓴 시나리오의 신(scene) 안에서 김영우는 영원히 산다.

이 소설의 2부는 김영우에 대한 강은성의 인터뷰, 그리고 김영우를 연기한 공상표의 영화 <여름과 비밀과 가을>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부록은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소개로 채워져 있으며 마지막 작품이 바로 동명의 영화이다. 즉 소설의 후반부는 인터뷰,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등 비소설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소설의 외피를 입고 있는 것이 1부임을 전제했을 때, 이 구성은 기묘한 ()균형을 드러낸다. 가장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을 커밍아웃 서사가 허구의 형태로, ‘판타지에 가까운 로맨스가 비허구적인 형식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은 후자인 퀴어 서사에 요구되는 디테일과 개연성이 훨씬 강하다는 무의식적 발현이 아닐까. 다시 말해 여전히 김병운에게 이 서사의 은 불필요한 가면처럼 느껴졌을 듯하고, 그것이 첫 장편의 출간 직후 또 하나의 전기로 작동했을지 모른다.

 

 

김병운의 첫 소설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민음사, 2022)에는 첫 장편 이후 2년간 그가 쏟아낸 단편들이 뜨겁게 실려 있다. 여기 수록된 7편의 단편소설은 모두 다른 소설이지만 마치 한 시절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대체로 소설가 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든 소설이 망설이고 의심하면서도 끝내 한 발짝 더 내딛는 신중한 용기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퀴어 영화를 만드는 이성애자 감독에 대해 다소 불쾌하고 못마땅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게이 배우가 있다. 정체성에 관한 예민한 촉수를 세우고 앨라이의 허점과 무감각을 어떻게든 발견하려 드는 그에게 안부현씨의 사연은 다소 특별하다. 오래전 틀어진 흔한 친구 사이의 만남이라 여겼던 약속이 레즈비언 커플의 재회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는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자신을 캐스팅한 이성애자 감독에게 더 늦지 않게, 더 나은 쪽으로 갈 수 있도록 솔직한 생각을 전하리라 다짐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변화가 단지 안부현 씨가 성소수자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내일은 오늘이 되었다는13) 시간에 대한 감각이다. 요컨대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이나 그러한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정체성은 누군가의 인정으로 승인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받아들임은 마치 우리가 누군가의 연기를 보며 그 캐릭터에 공감하고 이입하는 것처럼 그것이 전달되어 이해되는 최소한의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에 가깝다. 또한 타인의 용인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수용, 나아가 긍지를 가지게 되는 일은 시간의 힘으로 가능해진다. 김병운의 서사가 보여주는 시간에 대한 믿음은 단지 미래는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 시간에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긍정이라기보다 지나간 시간을 딛고 당도한 지금에 대한 확신이 김병운의 인물들을 살아 있게만든다. 함께 보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보낼 시간도 분명한 의미를 가지리라는 이 믿음은 그러나, 죽음 앞에서 자주 흔들린다.

 

물은 문란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불안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무력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슬퍼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화가 나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외로워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게이여서 죽은 게 아니다.14)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을 찾는 일은 의외로 어렵다. 초기작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작품에 죽음이 등장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으로 인해 소설이 시작된다.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또 갑작스럽게 죽은 에 대해 는 성소수자의 자살이라는 인과관계를 끊어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죽음을 무결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자신의 의식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15) 죽음의 이유를 만들지 않으면 곧바로 편견과 혐오에 직면하는 퀴어 커뮤니티의 속성, 그리고 실제로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성소수자의 죽음 사이에서 는 살아간다는 것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H씨와 9월의 일기를 공유하는 행위를 통해 삶을 차분하게 회복하고 있는데, 어떤 규칙도 제약도 없이 그저 자신의 하루를 기록하고 그것을 공유할 뿐인 행위로 인해 살아감은 지속된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화분의 메모―“살리고 있는 중. 가져가지 마세요.”―는 하나의 죽음이 기꺼이 삶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적시하고 있다.16)

 

저기요, 광호 씨. 모든 사람이 광호 씨처럼 용감할 수는 없어요.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요.

그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에요.

광호 씨가 내 말을 자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시간의 문제죠. 중요한 건 시간이에요.17)

 

열정적인 퀴어 운동가 윤광호와의 만남,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단편 윤광호에서 는 왜 이쪽의 이야기를 쓰지 않냐는 광호 씨의 질문에 자신의 예술과 정체성은 상관이 없으며 동성애 작가로 낙인찍히기보다 더 넓은 예술을 하겠다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광호 씨는 결국 내가 쓰게 될 거라고,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예상대로 결국 는 퀴어 서사가 아니라면 굳이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작가가 되었고, ‘광호 씨의 투병과 죽음은 뒤늦게 확인된다. 그러므로 광호 씨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대해 어떤 변화와 기대, 희망을 전망한 셈이다. ‘윤광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1918년에 소설가 이광수는 어떻게 윤광호를 쓸 수 있었을까. 시간의 문제라고, 중요한 건 시간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김병운이 첫 번째 소설집을 통과하며 도달한 지점은 확신 없이 쓰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집의 표제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고정되지 않는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것에 대해 쓰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차별과 배제, 편견과 혐오가 걷힌, 그 누구도 불편해하거나 상처받는 일 없이,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것은 작가의 당사자성이나 서사의 진정성과는 관계없이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베란다와 발코니, 테라스를 일반적으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체성의 스펙트럼은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고 다양하며, 또 변화해서 수시로 편견과 차별에 노출된다. ‘는 무성애자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에 기반한 서술을 전작에 남겨 두었고, 이를 몹시 부끄러워하며 당사자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이 성찰 끝에 작가가 도달하는 곳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면 좋겠어요. 우리에 대해 쓰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전해 듣는 순간이다.18)

 

하지만 그날에 대해 쓸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내 한계를 확인하고는 지운다.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투박한 나머지 우리를 흐릿하게 뭉개 놨다는 판단에 지우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성급한 나머지 우리를 매끄럽게 정리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지우며, 또 어느 날은 내가 쓴 것들이 모두 궁색한 자기변명 같다는 느낌에 지운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또 지우다 보면 어김없이 어떤 대사를 마주한다. 끝내 지우지 못하는, 아니 모조리 지워도 속절없이 다시 쓰게 되는 그 대사를.19)

 

확신 없이 쓴다는 것은 곧 무수히 지운다는 것과 같다. 지웠던 흔적은 말끔하게 사라질 수 있겠지만 의 말마따나 끝내 지우지 못하는무언가가 남게 된다. 이것은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는 행위와도 연결된다. 김병운이 돌고 돌아 다시 엄마의 이야기를 쓰는 것,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대상으로서의 엄마를 탐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는 것을 넘어 그 이후의 관계와 시간들로 서사를 확장해가는 것은 그가 이것이 끝이라고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내게는 다음이 있다는 사실을 낙관하는 것을 다짐하는 장면과 겹쳐진다.20)

아마도 김병운은 로 재현되는 퀴어 세대를 넘어 유년과 노년으로 이야기의 폭을 넓히려는 듯하다. 「11시부터 1시까지의 대구가 전형적인 한국 가족, 친지 내에서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는 조카뻘 세대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라면 두 번째 소설집에 실리게 될 몇몇 단편은 본격적으로 미래세대에 초점이 가 있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은 연인과의 동거 생활을 정리하면서 집에 남겨진 피아노를 용이의 조카 찬오에게 넘겨주기로 한 일로 시작된다. 용이는 조카가 이쪽일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로서는 그렇게 찬오를 미래의 퀴어로 상상하는 편이 불온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아이를 남성성을 가진 이성애자로 전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면서 여성적이어서 퀴어일지 모른다고 짐작하는 일은 왜 이토록 불편하게 받아들여지는지 와 용이는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 급기야 찬오는 의 집에 방문해 삼촌이 없을 때 이렇게 묻기까지 한다. “삼촌이 게이예요?”

 

제가 싫은 건요. 할머니가 걱정하는 거예요. 할머니가 그러는데요. 제가 삼촌 어렸을 때랑 비슷하대요.

그래?

, 너무 비슷해서 깜짝깜짝 놀란대요.

할머니는 그게 싫으시대?

아니요, 그런 말은 안 했는데. 그냥 제가 알아요, 속상해한다는 걸. 그래서 말인데요. 아저씨가 저 대신 우리 삼촌이랑 많이 놀아줄 수 있을까요? 저도 안 놀 건 아닌데, 앞으로도 계속 놀 거긴 한데, 그래도 지금보다는 덜 놀아야 할 것 같아서요.

……21)

 

피아노를 치는 찬오의 영상을 엄마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자신은 어떤 아이였냐고. 어른들의 이야기를 얌전히 앉아서 몇 시간이 들었다는 의 과거는 꽤나 긴 시간을 건너 오늘에 이르렀고 아마도 멀지 않은 미래에 그들은 찬오에게 너는 그런 아이였다고 말해주게 될 것이다. 그러한 조우는 놀랍게도 이미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에 실현되어 있다. 성소수자였던 장희의 삼촌은 엄마에 의해 감염인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여전히 오래된 파트너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었고 그 소식을 알게 된 장희는 삼촌과 삼촌의 곁을 지키는 사람을 찾아 부산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삼촌과 화상으로 만나면서 어린 장희를 바라보던 삼촌의 마음을 천천히 확인하는 장면은 정확히 찬오을 보는 시선과 겹친다. 삼촌의 세대에서는 그 시선과 관심을 애써 밀쳐두고 끝내 어딘가에서 죽어버렸다고 치부해야 남은 가족이 삶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아마도 의 세대는 그것과 다를 것이다. ‘장희의 엄마도, 삼촌도 끝내 세상을 떠났지만 그 오랜 시간을 건너 작동되기 시작한 필름카메라처럼, 그리고 그 삼촌에게 꾸준히 장희의 소식을 알렸던 엄마의 마음처럼 과거는 시간을 돌려 미래로 향한다.

모교의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교분도 다음 세대의 퀴어를 다룬다. 성소수자 선생님의 지지로 학창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는 소설가가 된 뒤 학교의 초청 특강이 급작스럽게 취소된 일을 기억하고 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유로 그 일은 일어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제출된 독서감상문이 있었다.

 

꼭 자기 얘기 같았대. 네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너무도 중요한 자신이 밉고,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향한 기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어려워서 속상하고.

아이고……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하는데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구나 싶더라고. 너도 알잖아. 뭔가 다른 친구들은……

어디에나 있죠.

그래, 어디에나 있지.22)

 

이 소설이 최초 수록분에서 상당 부분 전향적으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선생님은 분명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소설의 마지막에서 결국 인사를 나누게 되는 ‘1학년 39번 김인경역시 조금 더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마련되었다. 즉 퀴어인 선생님과 제자가 학교 현장에서 조우하게 되는 일이, 또 다음 세대의 퀴어와 마주하게 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를 묻지 않고, 일단은 써본다는 것, 결국 시간이 답을 주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김병운의 현재에 반영되어 있다.

 

 

다음 세대의 퀴어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더불어 봄에는 더 잘해줘」, 「오프닝 나이트에 나타나는 특유의 다정함과 섬세함이 여전하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김병운에게 가장 특별한 것은 아버지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몇몇 작품들에서 아버지는 생략되거나 다소 모호하게 그려졌던 것이 사실이고 김병운의 서사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아버지의 자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을 통해 재현되는 유년기의 기억과 아버지라는 존재는 작가의 새로운 서사적 동력으로 기능하는 듯하다.

아빠의 기일을 맞이한 는 유년 시절 아빠의 장애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광포한 밤들을 자주 보내야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선천적 청각장애를 안고 있었지만 청인 사회에서 생활한 아빠는 농인과 청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괴롭고 외로운 나날을 보냈던 사람이었다. 집안의 권유로 일찌감치 엄마와 결혼했으며 행여나 장애를 물려주게 될까 한참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던 아빠의 삶은 소수자의 위치에 서 있는 로 하여금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아빠를 향한 내 마음이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애써 외면했던 장면들이 있다. 미움의 순도를 높이고 피해자의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불순물을 걸러내듯이 한쪽에 따로 덮어두었던 기억들이 있다.

내가 하는 말을 파악하기 위해 눈이 아닌 입으로 모이던 눈길과 조금 천천히 말해달라며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던 손길. 비디오 가게에서 대여해온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나보다 더 즐겁게 감상하던 옆모습과 한 주간 쌓아둔 스포츠 신문을 주말 내내 꼼꼼히 정독하던 뒷모습. 마루에 앉아서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표정과 저기 저 새들은 어떻게 대화하는지 아느냐고 묻던 눈빛. 갱생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말갛고 환해졌던 안색과 이번에는 진짜라며 손가락을 걸고 금주를 다짐했던 미소. 애원하듯 꾹꾹 눌러썼던 내 모든 편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두었던 상자와 필담노트에 아주 가끔씩 등장했던 글씨체. ‘못 들어서 미안해.’23)

 

아마도 김병운의 서사는 조금 더 먼 곳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자기고백적 퀴어 서사와 로맨스, 정체성 서사를 가로질러 퀴어 민족지를 적극적으로 구축하려는 작가의 지향은 삶의 시간들로 죽음을 건너가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시도의 출발은 사과하는 마음에 있다.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나 시간만큼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이다. 고맙다고 말해야 할 여러 순간에도 김병운의 인물들은 미안함을 전한다. 그 미안함은 꽤 오랜 시간을 지나 당도한,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은 말이다. 이 사과는 존재에 대한 부정이나 행위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에 관한 것이다. 김병운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했던 시간에 대해 쓰지는 않는다. 그저 그 시간들이 흘렀으므로 이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어쩌면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고. 그리하여 우리는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김병운은 쓴다.
  • 1)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256-7.
  • 2) 소설 부문 당선 소감〉, 《작가세계》, 2014년 겨울호, 80.
  • 3) 남기는 말씀」, 《문장웹진》, 20172월호.
  • 4) 리처드 스콧 씨에게」, 《대산문화》, 2015년 봄호, 160.
  • 5) 아무튼, 방콕』, 제철소, 2018, 36.
  • 6) 위의 책, 85.
  • 7) 같은 쪽.
  • 8) <작가의 말>,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민음사, 2020, 286.
  • 9) 위의 책, 128-129.
  • 10) 위의 책, 155.
  • 11) 위의 책, 181.
  • 12) 위의 책, 240-241.
  • 13) 한밤에 두고 온 것」,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43.
  • 14)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 위의 책, 205.
  • 15) 같은 쪽.
  • 16) 위의 책, 209.
  • 17) 윤광호」, 106.
  • 18)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위의 책, 84.
  • 19) 같은 쪽.
  • 20)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297.
  • 21) 크리스마스에 진심」, 《웹진 비유》, 202211월호.
  • 22) 교분」, 근작.
  • 23)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 《창작과비평》, 2024년 가을호, 13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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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희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창비, 2024)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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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준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고봉준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월간 현대시 고봉준 연민공생생명비인간자연관계 2025
류수연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 양안다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와 양안다의 사이, 그 틈 류수연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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