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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현대비평 | 2024년 여름호(제19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김언 문학평론, 시

1998년 제3회 시와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시 등단. 시집 『숨쉬는 무덤』, 『거인』, 『소설을 쓰자』 『모두가 움직인다』 『한 문장』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백지에게』 등을 출간했으며, 시론집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평론집 『폭력과 매력의 글쓰기를 넘어』, 산문집 『누구나 가슴에 문장이 있다』 『오래된 책 읽기』 『사유노트』 등을 출간했다. 미당문학상, 박인환문학상, 김현문학패,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생성언어비평의 필요성과 성립 요건


하루가 멀다 하고 인공지능 관련 뉴스가 쏟아지고 있다. 특히 2022년 말 OpenAI에서 챗GPT라는 대화형 인공지능을 공개한 이후부터는 가히 신드롬이라고 할 만큼 여기서도 인공지능, 저기서도 인공지능 얘기가 한창이다. 너무 많은 기사와 담론이 단시간에 쏟아지다 보니, 평소 인공지능에 관심을 두어온 입장에서도 제대로 정리된 의견을 내놓기가 힘들다. 여기저기서 새롭게 쏟아지는 소식을 일일이 주워 담기에도 벅찬 형편인데, 와중에도 계속 떠오르는 질문은 있다. 계속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문학에 종사하는 입장에서, 나날이 쏟아지는 인공지능 이슈와 관련해서 관심이 가는 대목은 한 가지다. 챗GPT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이자 거대언어모델로서의 인공지능이 기존의 문학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어떤 영향을 미치면서 문학의 미래를 바꿔놓을 것인가? 혹시라도 새로운 언어예술로서의 문학이 나올 가능성을 점쳐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인공지능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오랜 시간 인간이 이룩해온 문학의 본질적인 조건을 건드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얘기하고 보니 여러 갈래로 가지를 뻗어가는 질문이 되고 말았는데, 그럼에도 한 가지로 집약되는 것은 인공지능과 문학의 만남이 모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모두를 껴안고 있는 문제라는 점이다.

가능성과 불가능성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차원을 달리하는 신기술로서의 인공지능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언어예술로서의 문학이 유의미하게 만날 수 있느냐 없느냐로 갈리는 가능성과 불가능성일 것이다. 어느 편에 서든 아직은 확실한 근거를 대기가 힘들다. 인공지능으로 인해 문학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만한 사건이 벌어진 것도 아니고 그것을 예견할 만한 경험치가 충분히 쌓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은 더듬는 시간이고 지켜봐야 하는 시간이겠지만, 기존의 시각과 언어로는 점점 더 쫓아가기 힘든 속도로 인공지능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글쓰기 분야에서 유용한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면서 텍스트를 산출하는 속도는 이미 인간의 능력을 한참이나 넘어섰다. 게다가 주어진 사안에 대해 참신한 아이디어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뽑아내기도 한다.

범위를 문학 분야로 좁히더라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된 텍스트가 기존의 문학을 그럴싸하게 흉내 내는 것이 일도 아닌 시절에 접어든 지금, 단순히 흉내 내는 수준을 넘어, 기존의 문학을 위협하는 사건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흉내를 낸다는 것은 기존의 수준을 뛰어넘지는 못할지라도 기존의 질서를 교란하거나 훼손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지닌다. 가령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그럴듯한 시 작품을 수천 편씩 작성한 다음, 인공지능을 이용했다는 사실만 쏙 감춘 채 문학장에서 활용하는 경우, 그래서 비록 시적으로 높은 수준은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대중 취향을 자극하는 작품으로 문학 시장에 진입하는 경우(다수의 평균치를 만족하는 결과물을 뽑아내는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이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쩌다 베스트셀러가 나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중 취향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기존 시의 현장에는 아무런 여파가 없을까? 아닐 것이다. 적어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볼 수만은 없는 지경에서 다시 시를 생각하고 문학을 고민하는 시간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단순히 흉내 내는 것을 넘어 기존의 문학을 위협할 만큼 새로운 언어예술로서의 문학 양식이 등장한다면 더 말할 것도 없겠다.

문학의 획일화를 초래하는 현상이든 새로운 문학 양식의 출현을 알리는 사건이든 상관없이 문학의 생태계에 영향을 끼치는 사태 앞에서 부득불 요청되어야 하는 언어가 있다. 비평의 언어가 그것이다. 비평은 개별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언어이면서 당대의 미적 조건을 탐색하고 진단하는 언어다. 당연히 개별 작품에 대해서도 작품을 둘러싼 예술적/문화적/사회적 환경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통찰하는 시선을 갖춰야 하는 언어다. 비평에서 요구되는 이러한 덕목이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는 작품에 대해서도 똑같이 유효하다면, 기존의 문학을 흉내 낸 작품이든 새로운 문학 양식을 개척한 작품이든 모두 비평적 접근이 필요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그와 같은 텍스트의 생성 조건을 기술적인 차원에서도 예술적인 차원에서도 면밀하게 따지고 논의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이 또한 비평의 언어가 담당해야 함은 물론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비평은 창작을 먹고 자라고, 창작은 비평이 먹고 자랄 수 있는 곳에서 더 크게 자랄 수 있다. 창작이 없는 곳에 비평이 있을 수 없듯이 비평이 생산되지 못하는 곳에서는 창작도 풍성한 결실을 거두기가 어렵다. 풍성함이 단지 양적인 것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면, 예술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인공지능을 이용한 창작이 우후죽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현시점에서 정치한 판단력을 갖춘 비평의 언어는 필수적이다. 특히나 문학 현장에서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는 텍스트가 문학적으로 유의미해질 수 있는 조건을 면밀하게 짚어보는 비평 작업은 기존의 문학을 위해서도 새롭게 등장할지도 모를 또 다른 언어예술로서의 문학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과정이자 절차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기계에 의해 생성된 온갖 텍스트가 문학으로서 혹은 예술로서 기능할 수 있는 조건을 따져 묻는 비평 작업을 강화하고 특화하는 차원에서 별도의 명칭을 붙이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기계에 의해 생성된 언어를 일차적인 대상으로 삼아 전개되는 비평, 가령 ‘생성언어비평’ 같은 용어가 제기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생성언어와 거기서 비롯되는 문학적 텍스트에 대한 전문적이고 생산적인 비평을 도모하는 개념으로서 생성언어비평이 성립하려면 다음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로 생성언어로 된 작품이 많이 나와 있어야 한다. 문학의 경우 국내외에 걸쳐 많은 창작 사례가 쌓여 있지는 않으나, (점차 더 많은 사례가 쌓이리라는 예상과 별개로) 지금까지 제출된 창작 텍스트만 하더라도 비평적인 언어로 접근할 수 있는 사례는 충분하다. 당장 비평적인 언어로 점검해야 하는 사례도 적지 않기에 첫 번째 요건은 어느 정도 충족된다고 하겠다. 생성언어비평이 성립하기 위한 두 번째 요건은 개별 텍스트에 대한 비평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서 더 근본적이다. 생성언어비평과 맞닿아 있는 개념인 생성문학 혹은 생성언어예술1)의 역사, 특성, 본질 등을 묻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그것이다. 생성언어로 된 문학의 정체성을 따지는 것과 맞물리는 그 작업을 충실히 통과해야 개별 작품에 대한 분석과 평가도 온당해질 수 있을 것이다.


생성문학의 실질적인 저자는 누구/무엇인가?


생성언어비평의 논의 대상인 생성문학의 특이점은 무엇보다 창작 주체인 저자의 개념이 바뀌는 데서 찾아진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문학의 성격이고 정의라고 하지만, 와중에도 결코 바뀌지 않았던 요소가 ‘저자=인간’이라는 등식이었다면,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는 텍스트로 넘어와서는 이 등식이 더 이상 유효할 수가 없다. 인공지능이 텍스트 생성의 도구를 넘어 주체의 영역까지 침범해 들어오면서 ‘저자≠인간’ 또는 ‘저자=인간+인공지능’을 상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저자의 자리에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끼어들면 저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권리와 책임도 간단치 않은 문제가 된다. 가령 어떤 작품에 대해 윤리적인 문제가 제기되었을 경우, 지금까지는 창작의 유일한 주체인 인간 저자에게 가장 큰 책임이 지워졌으며 그러한 책임은 저자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저자의 권리와 책임은 그러나 인공지능이 창작 주체의 일부로 들어서는 순간 복잡해지고 골치 아파진다. 인간이 인공지능을 협업의 파트너로 삼아 작업한 작품에서 윤리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인간 저자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할까? 공동 창작 주체로 참여한 인공지능은 적어도 이때만큼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권리는 물론이고 책임을 자각할 수 있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창작 과정에서 아무리 많은 역할을 담당했더라도 자의식이 없는 기계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작품 창작의 나머지 주체인 인간 저자에게 책임을 물으면 되는 것일까? 이 또한 문제가 되는 표현이나 문구를 인공지능의 탓으로 돌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기껏해야 인공지능이라는 기계를 제대로 관리하고 사용하지 못한 책임만 지겠다고 하면 또 어쩔 것인가? 사용자로서 일부 책임을 질지언정 작가적 윤리에 대한 책임은 얼마든지 비껴갈 수 있는 여지가 ‘인간+인공지능’의 저자에게는 애초부터 내재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공지능을 통한 창작 행위에서 필히 요청되는 사항이 창작 과정의 투명한 공개다. 인공지능과 함께 창작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개입은 얼마큼 이뤄졌는지, 어디서 어디까지 책임을 지고 인간이 작업했는지가 명시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한 것들이 보여야 이 작품을 왜 썼는지, 어떤 사유와 정서를 담아서 썼는지에 대한 비평이 가능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설령 비평의 언어로 접근하더라도 수사적인 장치만 건드리는 작업에 머물 것이다. 작품 저마다의 고유한 사상과 정서를 짚으면서 문학적/미학적/철학적 질문을 동반한 비평이 되려면, 다시 말하지만 누가 어떻게 썼는지, 인공지능과 함께 썼다면 어디서 어디까지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았는지가 명확히 보여야 한다. 그걸 바탕으로 창작의 동기와 작품의 주제를 음미하고 논의하는 비평이 가능해진다.

비평 작업에서 작품과 관련된 중요한 질문은 상당 부분 저자를 향한다. 저자의 답변을 직접 들을 수 있는가 없는가와 상관없이 저자를 향한 그 질문이 곧 비평의 핵심을 이룬다. 나아가 그러한 질문을 감당하는 작품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서 묻는 것 또한 생성언어로 된 예술을 논하는 비평이 반드시 짚어야 할 대목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질문을 보낼 수 있는 저자를 상정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저자를 특정할 수 있는가 없는가와는 다른 층위에 놓이는 문제다. 저자 특정의 문제가 아니라 저자 상정의 문제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선 아래의 사례들을 짚어보면서 논의하고자 한다. 먼저 인공지능을 저자(의 일부)로 내세운 사례다.


나는 오래된 집에 산다
생나무를 때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렇게 튼튼한 나무들 사이에서
이제는 주인을 잃어버린 집

나는 나무의 나이테를 세어보며
시간을 짐작한다
지붕은 비가 새지 않는지
도통 관심이 없다

아버지는 생전에
술을 좋아하셨다
할아버지는 평생
술을 담그셨고
아버지는 평생
술을 받으셨다

나는 아버지가 심어둔 나무의 가지를
하나씩 흔들어본다
시간을 알기 위해서는
가지를 아주 많이 펴야 한다

지붕의 이끼는 매년
풍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술을 마시며 아버지는 자주
바람 속에 나무의 나이테가 없다고
노래하셨다

내가 이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다
겨울엔 누구나
집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집에 살면서부터
나는 점점
집처럼 되어간다

이 집에 살면서부터
나는 점점
집이 되어간다
- 「오래된 집」2) 전문


2022년 출간된 시집 『시를 쓰는 이유』에 들어 있는 시이다. 이미 세간에 많이 알려진 대로 이 시집은 미디어아트 그룹 슬릿스코프와 AI전문회사 카카오브레인이 공동 개발한 인공지능 시인 ‘시아(SIA)’의 시를 담고 있다. 시아(SIA)는 카카오브레인의 거대언어모델 KoGPT를 기반으로 탄생했으며, 인터넷 백과사전과 뉴스 등을 읽으며 한국어를 공부한 다음 1만여 편의 한국 현대시를 학습하고서 시를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3) 그러니까 자체 개발한 인공지능 시인에 의해 시가 생성되고 시집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인데, 정작 시집의 표지와 판권에는 슬릿스코프와 카카오브레인을 공동 저자로 표기하고 있다. 아마도 비인간인 인공지능을 저자로 인정하지 않는 저작권 등의 문제로 인해, 자체 개발하여 이름까지 붙인 인공지능 시인 대신, 인간이 몸담고 있는 단체를 부득이 저자로 내세운 것일 게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고 다시 볼 때, 명목상의 저자가 인간이라고 한다면 실질적인 저자는 그럼 인공지능인가, 라는 질문이 남는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지점이 인공지능 시인에 의해 시집 한 권 분량의 시편들이 작성되었다면, 인간은 어디서 어디까지 그 작업에 관여한 것인가일 것이다. 시 쓰는 인공지능을 자체 개발한 것 외에 실제 시 창작 과정에서 인간이 얼마큼 관여하고 어떻게 관여했는지가 실질적인 저자를 따질 때 매우 중요해지는 대목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시집의 명목상 저자이자 법률상 저자 중 하나인 슬릿스코프는 시아에게 시를 생성할 수 있도록 주제어와 명령어를 입력하고 시아가 생성한 시편들 중 일부를 선별하여 시집에 수록하는 정도만 관여한 것으로 밝힌다.4) 그만큼 창작 과정에서 인간의 조력 없이도 완성도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시를 시아가 생성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완성도 높은 시편들이 인공지능에 의해 생성되고 시집까지 나온 것이 놀랍다면 놀라운 일인데, 한편으로 이런 의문들이 남는다. 가령, 개별 시편마다 주제어와 명령어를 어떻게 다르게 입력했는지, 입력에 따라 생성되는 시의 양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생성된 시편들에 대해 인간의 보정 작업이 전혀 없었는지, 있었다면 얼마나 있었고 어떻게 있었는지, 각각의 시 제목은 어떻게 뽑아냈는지,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과 그렇지 않은 시편들의 선별 기준은 어떠했는지 등등 작업 과정 전반에 걸쳐 궁금함이 계속 남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선 별도의 상세한 설명이 남아 있지 않아 일단은 논의를 보류해둔다. 그렇다면 뜯어볼 것은 작품이다.

위의 시 「오래된 집」은 제목 그대로 ‘오래된 집’을 모티프이자 키워드로 삼고서 생성된 시이다. 추측건대 저 문구가 주제어이자 명령어로 인공지능에 입력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시에 담긴 내용 역시 아버지를 여읜 화자가 아버지와의 추억이 녹아 있는 오래된 집을 중심으로 얘기를 풀어나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시간을 알기 위해서는/ 가지를 아주 많이 펴야 한다// 지붕의 이끼는 매년/ 풍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와 같은 인상적인 표현도 더러 보인다. 무엇보다 핵심어인 ‘오래된 집’을 중심으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시간에 대한 사유가 점층적으로 확장되다가 결말에 가서는 오래된 집에 대한 화자의 동일화된 감정이 도드라지면서 마무리되는 짜임새가 돋보인다. 시적으로 대단한 성취를 보여주는 작품은 아닐지라도 핵심어를 중심으로 차근차근 시상을 전개해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저 시에는 그러나 몇 번을 읽어도 해소되지 않는 지점이 있다.

저 오래된 집에서는 왜 어머니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일까?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그들의 손자이자 아들로 짐작되는 화자, 이렇게 삼 대에 걸친 기억에서 왜 어머니나 할머니 같은 여성 가족에 대한 기억은 빠져 있는 것일까? 인용 시의 특징적인 구도이기도 한 부계로만 이어지는 삼 대가 조금 더 설득력 있게 제시되기 위해서도, 조금 더 풍성하게 시상이 확장되기 위해서도 어머니와 할머니의 존재가 지워질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배경으로 깔릴 필요가 있는데, 이것이 당연한 듯이 생략된 점이 의아함을 남긴다.5)

그러나 이런 의아함은 인간이 쓴 작품일 경우에나 효과적인 질문이 될 수 있다. 저자가 인간일 경우엔 여성 가족이 애초에 없는 것처럼 제시된 구도에 대해 정당한 질문을 할 수도 있고 생산적인 논의를 끌어낼 수도 있지만, 실질적인 저자가 시아 같은 인공지능인 경우엔 저와 같은 질문을 던질 곳이 막연해진다. 아니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어진다. 아무런 자의식이 없는 기계가 그저 시 비슷한 텍스트를 뽑아낼 수 있는 최적의 확률에 기대어 단어와 문장을 생성해간 결과물이 저 작품이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인공지능이 사전 학습한 1만여 편의 한국 현대시에 편재되어 있을지도 모를 남성 중심의 가족 서사를 문제 삼는 질문이 겨우 가능하겠다. 실질적인 저자가 있더라도 개별 작품에 녹아 있는 저자의 고유한 사상이나 정서를 물을 수 없다면, 작품을 깊이 있게 파고드는 시선을 들이댈 수가 없다. 그러한 시선을 담은 비평의 언어가 접근하는 데도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만약 인공지능이 전적으로 실질적인 저자를 담당하지 않고 인간과 모종의 협업을 통해서 작품을 생성했다면, 이 역시도 ‘모종’에 해당하는 협업 과정이 명확하게 보일 때, 그러니까 인간과 인공지능 각각이 어디서 어디까지 작업을 나눠서 진행했는지가 확인될 때, 유의미한 질문을 동반한 비평이 가능해진다. 인간이 작업에 관여한 성격과 정도에 따라 해당 작품에 대한 질문의 수위와 범위가 달라지고 접근할 수 있는 비평의 가능성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위의 시는 어떤 질문을 던지면서 어떤 비평을 수행할 것인지를 정하기가 곤란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창작 과정의 세부적인 공개 없이 막연히 인공지능이 실질적인 저자인 것처럼만 안내되어서는 깊이 있는 감상과 생산적인 논의를 전개하는 데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실질적인 저자의 상정이 비평의 시작이다


작품의 감상 조건이자 비평을 위한 조건으로 저자의 실체가 새삼 중요해지는 이 대목에서 재차 언급할 것이 있다. 저자의 실체가 잡힌다는 것은 저자의 신상이 드러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저자의 신상을 특정하는 일과 실질적인 저자를 상정하는 일이 별개라는 말도 되겠다. 인공지능에 의한 창작 사례는 아니지만 아래의 시를 보면서 얘기를 이어가 보자.


광염(狂焰)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말라.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
- 「그 쇳물 쓰지 마라」6) 전문


일명 ‘댓글 시인’으로 불리는 제페토의 시이다. 이 시가 담긴 동명의 시집 『그 쇳물 쓰지 마라』는 2016년 출간 직후부터 화제를 모으며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최근에는 유명 가수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댓글 시인이라는 별칭답게 제페토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각종 사건/사고 기사에 댓글을 붙이는 형식으로 시를 쓰면서 지금까지 두 권의 시집과 한 권의 그림책을 냈다. 제페토라는 이름 뒤에 숨은 저자의 신상은 “오래전 그림을 그렸고 그 뒤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도 공부했다”7)라는 이력 말고는 딱히 밝혀진 정보가 없다. 그동안 제페토라는 이름으로 선보여온 시의 화법과 어조 등을 고려할 때, 2000년대 이후에 등장한 한국시보다는 1980년대나 90년대 한국시의 영향이 많이 보이고, 그래서 80년대나 90년대부터 시를 써왔거나 읽어온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정도만 추측될 뿐이다. 물론 이러한 추측은 저 시를 비롯하여 시집에 실린 시를 모두 인간이 썼다는 가정하에 나올 수 있는 추측이고 짐작이다.

실제로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인간이 썼다는 전제하에 인용 시를 살펴보자. 2010년 당진의 한 철강업체에서 일하던 20대 청년이 섭씨 1,600도가 넘는 용광로에 빠져 흔적도 없이 사망한 기사를 읽고 썼다는 사전 지식을 곁들이면 시를 이해하는 데 크게 어려운 대목은 없다. 그러므로 이 시에선 정치한 분석보다 창작의 기폭제가 되었던 어느 청년 노동자의 비참한 죽음 앞에서 격정에 찬 추모의 뜻을 내비치는 화자의 감정선에 동조하는 태도가 더 긴요해 보인다. 화자의 목청 좋은 발화를 따라서 함께 동요하고 분노하고 애도하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한 사람의 간절한 목소리가 울려 퍼져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공명하기를 염원하는 화자, 아니 저자의 뜻이 통해서일까. 출간되고 7년이 지난 지금도 『그 쇳물 쓰지 마라』는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시집으로 통한다.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받는 저 시집이, 저 시집에 담긴 화자의 절절한 목소리가 그러나 어떤 독자들에겐 적잖이 불편하게 읽힐 수도 있다. 불편함의 이유를 꼽자면 이런 것일 게다. 우선은 추모와 위로의 뜻을 담고 있는 「그 쇳물 쓰지 마라」와 같은 시가 가장 가슴 아픈 처지에 놓인 유족에게는 오히려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시신도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죽어간 청년 노동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그 청년이 빠져 죽은 용광로의 쇳물로 자동차 같은 제품 대신 동상을 만들어 공장 앞에 세우자는 말은 언뜻 숭고한 발상의 전환처럼 읽히지만, 정작 청년의 어머니는 그 말을 어떤 심정으로 받아들일까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그 말대로 자기 자식이 형체도 없이 녹아내린 용광로가 있는 공장에 가서 자식의 뼈와 살이 녹아서 굳어버린 동상을 그리워하며 만질 수 있을까? 아마도 공장 근처도 못 가서 진저리를 치거나 혼절해버릴 것이다. 어쩌면 평생 그 공장과 관련된 장소나 물건을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처럼 목청 높여 외친 추모와 위로의 발언이 정작 불행의 당사자에게는 한 번 더 상처를 안기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저 시는 놓치고 있다. 세심한 배려의 부족으로 원인을 돌릴 수도 있겠으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대상을 대하는 화자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사회면 기사에 등장하는 온갖 불행한 사건/사고의 대상에 연민의 감정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취지와 별개로 그것을 발화하는 과정에서 인용 시처럼 훈계조나 명령조가 따라붙는 방식은 여러모로 재고를 요한다. 마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가르치는 듯한 어조는 시적 자아가 대상에 대해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을 동반할 때 발생한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선 것을 전제로 한 입장에서는 지극한 연민의 감정도, 추모나 위로의 발화도 제대로 작동하기가 힘들다. 대상에 대한 자아 우위의 시선은 2000년대를 지나면서 우리 시단에서 집중적으로 비판되고 반성되었던 지점인데, 2010년대 들어 이와 같은 자아 우위의 시가 다시금 소환되어 대중적으로 소비되고 있는 현상이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제페토의 시에서 불편하게 느끼는 점은 하나가 더 있다. 바로 화자가 안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는 저자의 정체가 감춰져 있는 것과 관련이 깊다. 저자가 가명이나 익명 뒤에 숨어 있어야 하니 자연히 화자 또한 목소리만 보이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것도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목소리만 보이다 보니, 아무리 선한 의도를 담은 메시지일지라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불편한 감정이 생길 수 있다. 당연하지만 문학에서 설득력을 갖춘 목소리는 자기 자신을 걸고 나오는 목소리이다. 즉 메신저의 정체를 보이면서 나오는 메시지여야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거부감이나 위화감이 생기지 않는다. 메신저 없이 메시지만 있는 목소리는 누구라도 쉽게 낼 수 있다. 누구라도 쉽게 대의를 말하고 감정을 드러낼 수도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걸린 문제를 얘기할 때가 가장 조심스럽고 어렵다. 반대로 자신과 무관한 남 얘기를 하는 것이 가장 수월하고 부담 없는 입장에 놓인다. 메신저를 감춘 채 메시지만 남은 목소리, 그것도 천상에서 들리는 듯한 목소리로는 아무리 옳은 얘기를 하더라도 듣는 입장에서는 전적으로 공감하기가 힘들다. 그런 목소리는 실재하든 하지 않든 신의 목소리일 때나 전적으로 통할 수 있는 목소리이다.

이쯤에서 상기할 것이 있다. 제페토라는 익명이자 가명 뒤에 숨은 목소리가 불편하게 들리는 이유를 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전제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제페토라는 이름 뒤에 숨은 그 목소리가 신의 목소리도 아니고 기계의 목소리도 아니고 바로 인간의 목소리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목소리라는 것을 전제로 했기에 신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것을 불편하게 여겼고, 마찬가지로 기계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비판적인 의견을 내는 것이 가능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만약 인공지능이 내는 기계의 목소리였다면, 그러니까 인공지능에 의해 생성된 시의 목소리였다면, 저러한 비판이 제기될 수도 없고 제기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런 자의식도 없이 쏟아져 나온 말에 덧붙일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비록 가명 뒤에 숨은 저자일지라도 그 존재가 인간인 것을 아는 순간부터 우리는 비판도 할 수 있고 공감도 할 수 있고 상찬의 박수도 보낼 수 있다. 즉 비평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저자의 신상이 특정되는 것과 별개로 실질적인 저자가 상정되는 순간부터 비평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해도 좋겠다. 반면에 앞서 거론한 인공지능 시인 시아의 경우엔 실질적인 저자를 상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불투명했기에 비평의 언어 역시 막연하거나 지엽적으로 쓰일 수밖에 없었다. 비평의 가능성은 감상의 가능성과 맞물려 있고 감상의 가능성은 무엇보다 저자의 문제, 그러니까 실질적인 저자의 상정 가능성과 맞물려 있음을 인공지능 시인 시아와 익명의 시인 제페토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에 남는 문제: 문학의 총체성


이상으로 실질적인 저자의 상정 가능성이 생성문학에 대한 비평의 가능성과 맞물려 있음을 살폈다. 특히 인공지능과의 협업에서 실질적인 저자를 상정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각각 어떤 역할을 얼마큼 맡아서 했는지가 명확하게 보여야 한다고 했다. 즉 인간이 창작에 개입한 정도에 따라서 인간에게 할당된 실질적인 저자로서의 비중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편의상 비율만 놓고 봤을 때 인공지능과의 협업에서 인간이 담당한 역할이 절반가량을 차지한다면, 절반의 비중으로 해당 작품에서 실질적인 저자를 감당하면 될 것이다. 그럼 나머지 절반의 실질적인 저자는 어디서 찾아져야 하는가? 자의식이 없는 인공지능에 떠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면, 나머지 절반은 당분간이든 영원히든 계속 비워둔 채로 놓아둘 수밖에 없는 것일까? 당장은 현명한 답을 구하기 힘든 이 문제는 실질적인 저자의 문제를 넘어 생성언어로 된 문학이 숙명적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딜레마에 해당한다. 어쩌면 생성언어비평의 주된 논의 대상인 생성문학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생성언어로 문학을 하고 예술을 한다는 것은 인공지능에 의해 생성되는 언어를 기반으로 문학과 예술을 한다는 말이며, 이 과정에서 인간이 아무리 많은 개입을 하더라도 언어를 생성하는 작업 자체는 인공지능이 맡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학이 되고 예술이 되는 언어를 인공지능이 담당해서 생성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생성문학이 아니다. 생성언어는 개념상 기계에 의해 생성된 언어이고 기계에 의해 생성되어야 하는 언어다. 챗GPT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이 타자기나 워드프로세서 같은 글쓰기의 도구 수준을 넘어, 글쓰기의 주체로서, 그리하여 인간 저자를 위협하거나 인간 저자와 협업하는 저자로서 내세워질 수 있는 이유도 엄청난 속도로 문장을 생성하는 능력 자체에 있다. 이전 같으면 인간 저자가 도맡아서 했던 문장의 생산을 인공지능이라는 기계가 떠맡으면서 골치 아파지는 지점은 저자의 개념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기계를 통한 생성문학이 활발해질수록 인간의 문학적 체험 자체가 달라지는 사태를 직면해야 할지도 모른다. 단순히 생성언어를 통한 문학적 결과물이 달라지는 것만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통해 문학이 생성되는 과정 자체가 인간에게 전혀 다른 경험을 안겨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창작 과정에서 문학의 결과물만 놓고서 희열을 느끼지 않는다. 작품이라는 문학의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모든 과정을 포함하여 희열을 느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작가로서 감내해야 했던 지난한 시간이 있었기에 작품이 탄생하는 순간 희열을 느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쓰디쓴 과정이 없으면 달콤한 결실도 느낄 수 없다는 논리는 인공지능에 의해 문장이 생성되는 순간에도 똑같이 적용해볼 수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주문이 입력되면 거의 실시간으로 주문에 상응하는 문장을 뽑아낸다. 문학이 되는 문장도, 논문이 되는 문장도, 광고가 되는 문장도 마찬가지다. 어떤 문장이든 실시간으로 생성하는 인공지능이 거의 삭제하다시피 줄여놓은 시간은 달리 보면 인간이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 숙고하는 시간에 해당한다. 시적 문장, 문학적 문장, 예술적 문장을 얻기 위해 한정 없이 들여야 했던 시간도 인공지능의 작업으로 넘어오면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간이 된다. 지나간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스킵(skip)해버리는 그 시간이 이전의 인간 창작자에게는 반드시 거쳐야 하고 거칠 수밖에 없는 문학적 체험의 시간이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 문장이 익어가는 시간이면서 문학이 숙성되는 그 시간을 건너뛴 채 온전히 문학을 체험하고 향유할 수 있을까? 창작하는 과정에서 건너뛴 그 시간은 감상하는 입장에서도 문학적 체험을 하는 과정에서 공백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창작 과정에서 인공지능이 삭제한 것은 단순히 문장 생성에 소요되는 시간이 아니라 오래도록 인간이 누려왔던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것이다.

생성문학의 가능성 측면에서 다분히 비관적인 전망을 보이는 이러한 의견에 대해 누군가는 또 다르게 반응할 수도 있다. 문장 생성 과정에서 인공지능이 건너뛴 숙고와 숙성의 시간이 인간에게 더없이 소중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이라면, 그러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방향으로 생성문학의 미래를 고민하면 되지 않을까? 숙고와 숙성의 시간이 인공지능을 통한 언어예술에서도 똑같이 중요하다면 그러한 시간을 경험할 수 있는 방향으로 생성언어예술의 다음 스텝을 연구하고 실험하면 되지 않을까? 말처럼 쉽지 않은 연구와 실험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예술적 숙성의 시간이자 체험의 시간이 생성언어로 수행하는 예술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 자체가 또 다른 생성문학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예술적 숙성의 시간만큼이나 지난한 도전과 실패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 그 과정에서 한 가지 더 고려되어야 하는 사항이 있으니 바로 문학을 이루는 최소단위의 문제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의 최소단위가 과연 무엇일까? 음악의 최소단위가 하나의 음(표)이고 회화의 최소단위가 화면을 채우는 픽셀(pixel)이라고 한다면 문학의 최소단위는 그럼 단어일까, 형태소일까, 아니면 음절이나 음소일까? 무엇이 되든 예술 분야에서 최소단위의 설정은 인공지능으로 넘어와서 계산의 최소단위를 산정하는 일과 맞물린다. 계산의 최소단위가 잡히면 그때부터는 속도의 싸움으로 넘어간다. 무한한 경우의 수를 거느린 것 같은 바둑이 ‘한 수’라는 최소단위로 계산 가능한 영역이 되면서 결과적으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면, 문학이나 음악이나 미술도 그것의 최소단위가 제대로만 잡힌다면 인간을 넘어서는 창작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의 탄생도 시간 문제가 될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은 문학을 비롯한 예술 각각의 최소단위가 명확히 잡히지 않았고(기존의 예술을 흉내 내는 차원에서만 최소단위가 잡혔을 뿐이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쉽게 잡히지 않을 것 같다. 문학만 놓고 보더라도, 바둑의 한 수처럼 단일한 요소로 환원될 수 없는 여러 요소가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으며, 따라서 문학을 이루는 최소단위의 설정은 요원하기만 한 일로 보인다. 어쩌면 시든 소설이든 작품 한 편의 탄생에 동원되는 요소는 사실상 이 세계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 편의 작품이 나오기까지 읽어왔던 수많은 텍스트, 경험했던 온갖 물리적/감각적/정서적 체험들, 거기에 끼어드는 온갖 우연적인 요소들까지 고려하면, 단순히 문장 단위나 단어 단위로 환원될 수 없는 수많은 요소가 얽히고설킨 채 작동한 결과물이 곧 한 편의 문학 작품일 것이다.

지금까지 문학 창작을 수행하는 인공지능 연구가 번번이 실패하거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문학을 이루는 단일한 요소를 상정하고자 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당연하지만 문학은 언어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다. 언어는 문학을 이루는 주된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은 기억으로만 감정으로만 감각으로만 환원되는 무엇이 아니다. 기억도 감정도 감각도 문학을 이루는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요소가 녹아 있는 문학에서 그중 하나만 가져와서 문학을 재현하려는 모든 작업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지점에서 새삼 직면하게 되는 것이 문학의 총체성이다. 문학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총체성을 어찌해야 할까? 아니 어찌 바라봐야 할까? 인공지능으로 문학을 구현하려는 입장에서도 그것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도 이 총체성의 문제가 접경선이자 최전선을 이룬다면, 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언어에도 태생적으로 빚을 지고 있는 생성언어비평은 그럼 어느 쪽에 몸을 더 실어야 할까? 어느 쪽에 발을 걸치고서 더 많은 말을 해야 할까? 어느 쪽이 되든 당대의 문학적/예술적 조건을 첨예하게 따지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일단은 말을 마치자. 생성언어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말이 남아 있고 또 필요할 거라는 기대와 함께.


  • 1) 생성언어비평과 마찬가지로 ‘생성문학’이나 ‘생성언어예술’은 아직 문학장에서 통용되는 개념이 아니라서 별도의 용어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이 글에서는 인간의 개입 정도와 상관없이 인공지능에 의해 생성된 문학 또는 언어예술을 뜻하는 용어로 쓰고자 한다. 생성문학/생성언어예술 작품을 비롯하여 생성언어로 된 텍스트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생성언어비평이 간단히 말해 ‘생성언어에 대한 비평’이라면, 생성문학/생성언어예술은 ‘생성언어로 구성된 문학/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 2) 슬릿스코프·카카오브레인, 『시를 쓰는 이유』, 리멘워커, 2022, 16-17쪽.
  • 3) 위의 책, 표3 참조.
  • 4) ≪매일경제≫ 2022년 8월 14일자 기사 (https://www.mk.co.kr/news/culture/10422597), ≪인공지능신문≫ 2022년 8월 1일자 기사(https://www.ai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25686).
  • 5) 인용된 작품에 대한 감상과 분석은 김언, 「‘기술창작시대’의 문학과 인공지능」, ≪파란≫ 2022년 겨울호, 173-174쪽에서 논의한 내용을 되풀이해서 옮긴 것이다.
  • 6) 제페토, 『그 쇳물 쓰지 마라』, 수오서재, 2016, 24-25쪽.
  • 7) 『조선일보』 2023년 3월 26일자 기사 (https://www.chosun.com/culture-life/book/2023/03/25/ZU54FYLE7NFBVL7GUCY5VVHHQ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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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찬제 고통의 법열(法悅)과 깊은 주문(呪文)

1. 고통의 상상력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1) 이것은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의 문장이 아니다.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한강의 문장이다. 그 단호함이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나 처절하여 차라리 숭고하다. 또 “증언. 의미. 기억. 미래를 위해”(p. 166) 기록하거나 증언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가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증언할 수 있느냐고 통절하게 절규한다.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으로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pp. 166~167). 이렇게 증언할 수 없는 것을 증언하기, 그렇지만 끝내 증언할 수 없으므로 증언할 수 없는 고통까지 겹쳐서 역설적으로 극화하기, 한강의 고통스러운 숭고미는 필경 거기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물론 그것은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한강의 경우에만 특화된 수사학은 아니다. 많은 이가 아프니까, 고통스러우니까 쓴다고 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상상력으로 넘어서기 위해, 상상력으로 고안한 대안 세계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치유하기 위해 쓴다고 토로한다. 가령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감정을 창조했고, 인간의 깊숙한 내부에 숨겨져 있던 무의식을 표출시킨 작가 도스토옙스키도 그렇지 않았던가. 그는 인간의 고통과 욕망과 열정의 극한까지 추구하며 우주의 심연을 향해 다가갔다. 두루 알다시피 저물어가는 황혼의 잿빛 러시아의 하늘 아래서 가슴을 짓이기며 살았던 인물이었다. 영혼의 상처를 휘감고 도는 어둠의 정체를 그는 언제나 직시하고자 했다. 은총과 정의가 사라진 고통스러운 연옥, 그 불행과 절망의 황무지에서 전율해야 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분노에 찬 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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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겠지만, 가장 비극적인 장면은 아무래도 전쟁터나 홀로코스트 현장에서 두드러진다. 트로이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때부터 그렇지 않았던가. 그러기에 많은 작가, 예술가들이 반전사상이나 반폭력에의 연대를 열정적으로 펼쳤다. 파블로 피카소도 그런 경우 아닌가. 이른바 피카소의 3대 반전 작품, 그러니까 <게르니카>(1937), <시체구덩이>(1946), <한국에서의 학살>(1951) 등만을 떠올려도 그렇지 않은가. 큐비즘의 방식으로 고통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했던 피카소처럼, 한강 역시 고통의 서사가 선형적으로 재현되기보다 입체적으로 포개어지며 고통의 심연으로 한없이 내려간다. 그러면서 매우 인상적인 장면을 전경화한다. 피카소가 여러 방향에서 본 이미지를 한 화면에 구성했듯이, 한강도 상호 시점이거나 복합 시점으로 깊은 고통을 응시하면서, 곡진한 시적 문체로 장면화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서둘러 답하자면 한없이 그윽한 영매(靈媒) 작가이기에 가능하다. 사람과 사람, 산 자와 죽은 이, 인간과 동물, 인간과 식물 사이에서 하염없이 고통받으며, 끊어진 영혼의 길을 이어주려는 감수성과 상상력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2) 그녀는 있는 이야기, 있었던 과거를 단지 그대로 재현하는 작가가 아니다. 있었던 사건에서 고통받은 이들의 차가운 손을 어루만지고, 이미 식어버린 영혼 안으로 스며들어 시리면서도 뜨거운 감각의 실존을 수행한다. 스며든 순간에 몰입하여 시나브로 엑스타시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 법열(法悅)의 에너지와 감수성으로 말미암아, 한강이 스며든 어떤 인간이나 사물도 단지 홀로인 존재의 차원을 넘어선다.3)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게 되는, 더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죽은 이도 새롭게 시선과 목소리를 지니게 되며, 가장 고통스럽고 속절없는 서발턴(subaltern) 혹은 벌거벗은 호모 사케르들의 눈물 속에서도 청량한 생명의 메시지를 얻게 된다. 무엇보다 고통의 심연을 길어 올리는 한강의 시적 문체는 중층적 가역반응의 결과이자 원인이다. 자아와 세계가 충돌하면서도 그 충돌한 세계를 엄청난 에너지로 끌어안는 자아의 감수성으로 인해, 그토록 이상한 가역반응의 결과로 빚어질 수 있었던 게 한강의 시적 문체이다. 다시 말해 문학적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해야 마땅할 역사적 트라우마를 다루면서도 그 고통의 만화경을 모두 자기 안에서 끌어안고 ‘고통하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문체로 빛난다. 그런 시적 문체를 독자들이 읽으면, 독자 또한 새로운 가역반응을 일으킨다. 아름다운 문체에 이끌려 한강의 세계로 들어간 독자는 그 안에 들어있는 엄청난 고통의 항아리에서 슬픔의 숨결과 교감하면서 함께 고통을 나누려는 진실한 인문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가역반응의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것일 수 없다. 서로의 외로운 영혼을 이어주는 현묘한 영매 작가의 창작과 소통 과정에서 매우 복합적으로 빚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강은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붉은 닻」(필명: 한강현)으로 당선되기 한 해 전인 1993년 계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서울의 겨울」외 4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 전에 연세대 4학년 때인 1992년 시 「편지」로 연세대 신문인 <연세춘추>가 주관한 연세문화상-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때 심사위원은 정현종 시인과 김사인 시인/평론가였다. 애도의 정념과 밀도가 어지간한 이 시에 대한 심사평도 인상적이다. 한강 시의 능숙함을 칭찬하는 과정에서 “굿판의 무당의 춤과 같은 휘몰이의 내적 열기를 발산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독특하며, “그러한 불과 같은 열정의 덩어리”에 들어있는 풍부한 에너지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청 시절부터 이미 한강의 샤먼 시인, 영매 작가로서 에너지가 넉넉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면에서 1992년 심사위원들의 안목은 탁월했다. 샤먼 시인 한강의 곁에 있는 ‘나무’는 대개 “하늘과/ 나를 이어주”(「새벽에 들은 노래 2」)4)는 우주목(宇宙木, cosmic tree)이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 등 여러 작품에서 꿈 장면에 그런 우주 나무들이 모여 있는 신비로운 숲의 정경이 자못 긴장감을 형성한다. 그런 우주 숲에서 서사 속 캐릭터는 종종 엑스터시의 순간으로 입사한다. 가령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 숲에서 밀물에 떠밀려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죽음들의 풍경을 떠올리던 주인공은 갑자기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고 서술한다. “마치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과 같은 떨림”이었지만, 공포, 불안, 전율, 혹은 “돌연한 고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에 휩싸인다. 그런 전율과도 같은 떨림의 순간을 고통스럽게 침례한 다음 “이가 부딪히도록 차가운 각성”5)에 이른다. 이런 떨림과 고통, 전율과 공포, 불안과 각성의 과정에 몰입하는 영매 작가의 에너지는 엄청나다. 마치 작두를 타는 무당의 열기를 방불케 한다. 그 순간 끊어졌던 여러 관계가 이어지고, 안 보였던 상처의 얼룩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린다. 가령 「거울 저편의 겨울 6―중력의 선」이라는 시는 아르헨티아를 방문한 샤먼 시인이 중력의 선을 따라 지구 반대편 한국의 풍경을 보는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남미 대륙 남부에 원래 살던 인디오들을 거의 절멸시키고 아르헨티나를 건설한 군인 “로카의 동상을 올려다보다가” “반대편의 학살을 생각”6)하는 “나”의 초상을 전경화한다. 그렇게 “난자하는/ 죽음의 직선들을 생각하는 나는” 거기에 몰입하여 1980년 5월 광주에서 죽어간 어리고 여린 영혼 ‘동호’의 눈이 되고 입이 되어준다. ‘80년 5월 광주’를 애도한 『소년이 온다』는 그렇게 우리에게 전해지고 세계문학사를 수놓게 된다.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난 한강은, 불과 몇 달 전인 1980년 1월 서울로 이사했다고 한다. 만약 이사하지 않았더라면 작중 동호의 처지가 되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한강은 더욱 고통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동호를 비롯해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간 비통한 유령들을 애도하는 영매자가 되려 했던 것이 아닐까. 국가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 이전에 가족사의 비애도 고려해 볼 수 있다. 『흰』에서 드러나는 너무나도 일찍 죽은 언니 이야기, 어머니가 스물세 살에 낳은 첫 딸의 이야기, 엄마가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7)이라며 간절히 발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허망하게 먼저 간 언니 이야기 말이다. 이 가족사는 들을 수 없었던 아이를 대신해 들어야 하고, 말할 수 없었던 아기를 대신해서 말해야 하고, 눈도 뜰 수조차 없었던 아기를 대신해 보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영매 작가의 가족사적 배경을 성찰하게 하는 요인이다. 3. 여수(旅愁)의 심연에 갇힌 여수(女囚)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공표되던 2024년 10월 10일 저녁 나는 남도 여수에 있었다. 해묵은 어깨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그쪽 병원에 잠시 입원한 상태였다. 기대도 하고 기도도 했지만, 그럼에도 생각보다 너무 빨리 받게 된 선물을 받게 될 때 엉거주춤함 같은 느낌을 잠시 거쳐, 한강의 첫 소설집이 『여수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95)이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공교롭다는 생각을 이어갔다. 그리고 퇴원하여 돌아오던 12일 낮에는 우연히 여수엑스포역 앞 여수세계박람회장에서 열린 <잠들지 않는 남도의 세월―여순 10·19와 제주 4·3 미술 교류전> 을 관람하게 되었다. ‘탐미협과 여수민미협의 세 번째 만남’으로, 여수와 순천, 제주에서 무자(戊子)년(1948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증거하는 고통의 붓질이 참으로 어지간했다. 김영하의 <바다 위 희망의 빛>(2024, Arcylic on Canvas, 162.2×97cm)이나 박정근의 <바다, 엇갈림02>(2023, Pigment print, 100×70cm)은 강렬한 핏빛 바다의 파동과 심연을 응시한 그림이어서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고경화의 <존재의 시간, 어디에도 있는 어디에도 없는―종남마을>(2022, Arcylic on Canvas, 162.2×130.3cm)은 무너진 돌담과 뒤편의 대나무숲을 그린 작품인데, 그냥 보면 오래된 전원 풍경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실은 1948년 11월 계엄령으로 인해 초토화되어 복구되지 못하고 잃어버린 마을이 된 종남마을 풍경이라는 것이었다. 무너진 돌담만이 과거의 어떤 흔적처럼 남아있는데 그곳에 살던 이들은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그림들을 보며 나는 전시회 관계자들에게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도 제주 이야기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본문보다 제목이 더 긴 시 한 편을 떠올렸다. 「이천오년 오월 삽십일, 제주의 봄바다는 햇빛이 반. 물고기 비늘 같은 바람은 소금기를 힘차게 내 몸에 끼얹으며, 이제부터 네 삶은 덤이라고」라는 긴 제목의 시였는데, 직접 확인해볼 기회는 없었지만, 한강 작가 역시 화가 김영하의 핏빛 바다의 고통을 애도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게 아닐까, 그래서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8)라고 한 게 아니까, 여수와 순천, 광주와 제주의 트라우마를 함께 앓기 위해 늘 “텅빈 항아리가 되”는 자기 몸을 응시하고 그 안에서 울리는 “검은 물소리” “깊은 물소리”(「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p. 36)에 귀 기울인 게 아닐까, 그러면서 샤먼 시인이자 영매 작가로 고통스러운 글쓰기를 수행한 게 아닐까…… 그런 상념들을 이어갔다. 매우 개성적인 숨결로 이채로운 말결을 파동처럼 빚어, 그윽하고 깊은 감동을 독자들에게 선사는 영매 작가 한강이 초기부터 다룬 인물들은 대체로 세상의 온갖 허물을 모아 앓는 자, 상처 깊은 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상처의 심연으로 내려가서, 왜 현존재는 이토록 탈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왜 세상은 그토록 고통스럽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질문한다. 그 탐문은 대체로 여로에서 이루어지고, 여로의 현존은 깊은 여수(旅愁)의 심연에 갇힌 여수(女囚) 형상을 한 경우가 많다.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 시절부터 그러했다. 일찍이 대학 4학년 때 쓴 「편지」에서 “잃을 사랑조차 없었던 날들을 지나 여기까지, 눈물도 눈물겨움도 없는 날들 파도와 함께 쓸려가지 못한 목숨, 목숨들 뻘밭에 뒹굴고”라고 토로했던 한강은 『여수의 사랑』에서 희망이 소진된 상황을 견디는 고통의 흔적을 시리도록 아프게 점묘한다. 대부분 20대의 주인공들인데도 불구하고, 한강의 소설적 프리즘 안에서 그들은 이미 청춘이 아니다. 발랄하고 경쾌한 젊음의 풍속이나 세태와는 아랑곳없다. 그들은 고아처럼 버려졌거나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정처 없이 떠돌이 삶을 살며, 신체적 통증과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고, 또 때때로 살기도 전에 죽어간다. 또한 고독하고 우울하며 피로에 지쳐 있다. 그들에게 세계는 매우 혹독하기만 하다. 가령 「여수의 사랑」에서 바람은 “내 어깨를 혹독하게 후려”치고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은 눈부신 얼음 조각 같은 빗발들을 내 악문 입술을 향해 내리꽂았다.”9)라는 부분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그 같은 “잿빛 하늘” 아래 드리워진 길고 짙은 어둠의 그림자 속에서 그들은 “얼음 조각”에 피격당한 듯한 현존을 부정하고 신생을 낭만적으로 동경하고 열망한다. 영혼의 숨결을 잃어버린 세대의 고통스러운 초상이다. 잃어버린 세대의 현실을 성찰하는 한강이 탐색한 신화소의 하나는 ‘버려진 아이’라는 의미에서 기아(棄兒)의식이다. 모태로부터 분리되는 순간의 고통, 부모로부터 버려졌을 때의 아픔, 사회와 현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했다고 느낄 때의 우수 등이 피투성이 같이 던져진 피투성(被投性)의 존재로서의 인간 초상을 떠올리게 하지만, 신화적인 맥락에서는 역시 기아의식이라는 다발 안에 포괄되는 것들이다. 원초적 고향으로부터 분리를 경험할 때 모든 존재는 자기동일성을 상실한 채 고통스러운 방황을 거듭하게 마련이다. 이때 단원신화는 입사식이라는 통과제의를 거쳐 귀환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상실했던 자기동일성을 회복하는 이야기로 마무리되지만, 현대에 이르러 그것은 해체되었고, 신화는 좀처럼 완성될 줄 모른다. 신화의 해체 이후 인간의 삶은 고통의 흔적으로 점철된다. 그럴 때 인간의 여로는 곧 여수(旅愁)의 길이 된다. 귀환을 보장해주는 통과제의적인 성격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상실한 자기동일성의 회복은 그야말로 난망이다. 첫 소설집의 표제작 「여수의 사랑」은 이렇듯 희망이 봉인된 상황에서 펼쳐지는 현대의 소외된 신화 속에서의 기아의식을 웅숭깊게 형상화한 소설이다. 버림받은 아이는 육체적 심리적으로 늘 허기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기아(棄兒)와 기아(飢餓)는 가깝다. 여수가 고향인 주인공 정선은 다섯 살에 어머니를, 일곱 살에 아버지를 차례로 잃었다.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어머니의 죽음도 그렇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더 문제적이다. 아버지는 술에 젖은 역한 숨결로 여수 앞바다에서 동반 자살을 시도했다. 아버지와 동생이 죽은 그 사건에서 정선만 살아남았다. 아니 홀로 버려졌다. 이 고통은 트라우마의 극치에 값한다. 그로부터 참담한 여수(旅愁)의 나날은 계속된다. 위경련과 결벽증으로 시달리고 있는 그녀가 특히 후각 공포증 혹은 냄새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정선에게 자흔의 출현은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비슷한 운명의 그림자를 안고 떠돌며 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두 살 무렵 강보에 싸인 채 여수발 서울행 열차에 버려졌던 자흔은 이 버려짐의 트라우마 때문에 자기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한다. 아니 자기 길이 있을 수 있다는 희망마저 제대로 지녀 갖지 못한다. “어느 곳 하나 고향이 아니었어요. 모든 도시가 곧 떠나야 할 낯선 곳이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어요.”(『여수의 사랑』, p. 41). 이와 같은 여수(旅愁)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속절없이 살아가는 자흔이고 보니, 주인공의 존재의 거울일 수밖에. 거울을 통해 자신의 상실한 모습을 확인하는 심정은 처연하다. 주인공 정선의 고통이 가중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던 중 자흔이 또다시 여수(麗水)인지 여수(旅愁)인지 모를 길을 떠난다. 그래서 정선도 여수(旅愁)의 여수(麗水) 여로를 택한다. 하지만 그 여로는 고통의 흔적 찾기 이상의 어떤 은총도 허락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고통의 흔적들은 탈난 후각이나 위장 등 여러 육체적, 심리적 증상으로 소설 속에 아프게 새겨진다. 그것들은 해체되거나 유폐된 현대 신화의 파편들이다. 한강이 점묘하는 누추하고 비루한 현대의 신화들은 차라리 예전의 신화들을 추문화하면서 동시대적 고통의 심연을 비추고 생경하게 드러내는 탈신화적인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10) 그런 탈신화의 전략은 디아스포라 주제와 관련한 존재론적 성찰과 함께, 문학의 기본 역할 중의 하나가 버림받은 디아스포라의 운명과 고통에 대한 깊은 응시와 관련된다는 생각을 저작하게 한다. 이 또한 한강 문학 주제의 세계적 보편성과 관련된다. 4. “왜 그래”와 “괜찮아” 사이에서, 혹은 동물성에의 구토 고통의 심연을 향해 한없이 자맥질하는 한강의 ‘여수의 미학’은 되풀이 변형 생성된다. 두 번째 소설집인 『내 여자의 열매』(2000)는 물론 장편 『검은 사슴』(1998) 『그대의 차가운 손』(2002)을 거쳐, 연작소설 『채식주의자』(2007), 장편 『바람이 분다, 가라』(2010), 『희랍어 시간』(2011) 등 한강의 소설들은 대체로 비루한 현대의 탈/신화와 관련된다. 많은 인물이 여전히 누추하게 태어나고, 출생보다 더 비참하게 버려지거나 버림받았다고 느끼며 여수(旅愁)의 심연으로 젖어든다. 그와 같은 인간 실존의 고통은 국가 폭력의 문제와 연계되면서 더욱 극적으로 형상화되는데, 바로 『소년이 온다』(2014)와 『작별하지 않는다』(2021)의 세계가 그러하다. 존재의 근거를 박탈당한 채,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할 곳이나 속할 집이 없고, “찾아갈 곳도 없었고 행복할 곳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긴장어린 시선을 접고 안도할 곳도 없”11)는 한강의 인물들은 사느라고 안간힘을 쓰다가 자주 ‘구토’ 증세를 보인다.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에서 정선이나 자흔을 비롯한 여러 인물이 그랬거니와 『내 여자의 열매』에서 아내, 『그대의 차가운 손』의 L,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이정희나 서인주 등 많은 인물이 고통스러운 구토의 박물지를 형성한다. 가령 「내 여자의 열매」에서 아내는 어릴 적부터 자유롭게 살다가 자유롭게 죽기를 꿈꾸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소망과는 달리 “보이지 않는 사슬과 묵직한 철구(鐵球)가 발과 다리를 움쭉달싹하지 못하”12)게 하는 일상의 억압에 가위눌려 살다가 심한 구토 증세를 보인다. 매일 몇 번씩 토할 때마다 “머리가…… 오른쪽 눈이 후벼 파는 것같이” 아프고 “어깨가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지고 입에 단물이”(p. 222) 고인다고 그녀가 토로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의 심연으로 함께 내려가게 된다. 단지 바람이나 햇빛, 물 같은 자연적인 것만으로 살 수 있기를 꿈꾸었던 그녀는, 마침내 고통스러운 실존을 넘어 식물화의 경계로 나아간다. 출장을 갔다가 오랜만에 귀가한 남편은 식물로 변신하는 그녀를 목도한다. 베란다 쇠창살 쪽으로 무릎 꿇은 채 만세 부르듯 두 팔을 치켜올린 아내의 진초록빛 몸과 푸른 얼굴이 마치 상록활엽수의 잎처럼 반들반들했고, 머리카락 또한 싱그러운 들풀 줄기처럼 윤기가 흘렀다는 것이다. 동물적 육체를 넘어 식물화하려는 아내의 요구에 따라 남편은 물을 뿌려주는데, 그 순간, 아내의 몸은 “거대한 식물의 잎사귀처럼 파들거리며” 살아난다. 「내 여자의 열매」의 식물 변신담은 연작 『채식주의자』에서 좀 더 면밀한 실감을 얻게 된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맹수의 눈에 시달리는 악몽을 꾼 다음에 전격적으로 채식주의를 선언한다. 짐승의 눈은 피의 형상으로 범벅이 된 채 파헤쳐진 두개골을 비추기도 하면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동물적인 공격성과 폭력성, 죽음을 몰고 오는 세계 파국의 공포와 불안 같은 것들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다가 내린 결단이었다. 동물적 공격성으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녀가 원하는 것은 식물적 평화였다. 그녀가 유일하게 옹호하는 젖가슴의 상징이 그런 면에서 주목된다. 젖가슴으로는 아무것도 해치거나 죽일 수 없으니 괜찮다고 했다. 한강의 언어 중에 ‘괜찮아’라는 말은 은근한 마력의 매력을 느끼게 한다. 「괜찮아」라는 시를 참조해 보자. 난지 두 달 된 아이가 저녁마다 울자 시적 자아는 “왜 그래”라는 말을 안타깝게 반복하면서 애태웠다. 그러다 문득 “괜찮아”라는 말로 바꾸어 위무했더니 며칠 뒤부터 아이의 저녁 울음이 그쳤다는 이야기다. “왜 그래”는 따지듯 걱정하는 목소리다. 반면 “괜찮아”는 공감하며 끌어안는 마음의 소리다. 진심으로 위로하며 치유를 기도하는 말이다.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13)을 들여다보며 “괜찮아”라며 달래줄 수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둥근 젖가슴의 마음이다. 그러나 세상은 사실 괜찮지 않다. 괜찮지 않기에 “괜찮아”라는 말이 괜찮게 다가오는 게 아닐까. 「내 여자의 열매」에서도 그랬듯이, 『채식주의자』에서 영혜 역시 자신에게 “괜찮아”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런 눈과 목소리가 없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헤아려 줄 마음의 눈을 구하기 어렵다. 연작의 첫 작품인 「채식주의자」의 시작 부분부터 그렇다. 서술자 남편은 아내는 특별하지도 않거니와 끌리는 매력도 없는 사람이었다고 적는다. 평범하고 무난한 성격이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결혼했다고 말한다. 남성 중심주의적인 생각을 드러낸 경우가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가부장권을 행사하려는 인물이다. 육식하지 않겠다는 딸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탕수육을 집어넣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딸은 결국 칼로 손목을 긋는 자해를 하고 만다. 그런 아버지이니 딸의 꿈속에 개를 오토바이 뒤에 매달아 동네를 끌고 다니다가 잡는 악몽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머니도, 언니도, 다른 가족들도 대개 “괜찮아” 대신 “왜 그래” 쪽에 가까운 인물로 제시된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영혜의 악몽은 계속되고 섭생은 어려워지고 마음은 불안하고 몸은 야위어 간다. 몸도 마음도 상하고 다친 상태가 되자 둥근 젖가슴도 야위어 날카로워지는 형국이 된다. 무엇보다 숨쉬기조차 힘들 지경이 되고 만다. 물과 바람과 공기와 더불어 숨 쉬며 초록빛 나무가 되려 했던 그녀의 소망은, 그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계속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그녀의 둥근 가슴이 날카로워지는 것은 충분히 일리 있는 몸의 항의로 받아들여진다. 한강의 여성 인물들은 고통스러운 상처와 트라우마를 지닌 채 살지만, 타인이나 세상을 향한 동물적 공격성이나 이렇다 할 적의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 대신 식물로 변신하는 과정을 통해 평화의 바람을 일으키기를, 아니 평화의 바람을 일으키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평화로운 숨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최소한 편하게 숨쉬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럼에도 동물적 공격성으로 점철된 현실이나 사람살이의 상황은 그런 소망을 지닌 여성들로 하여금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게 혹은 질식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세상이 생태학적 진실에 따라 조금이라도 평화로운 식물성의 기미를 보여주었더라면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그토록 가혹한 악몽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그녀가 간절하게 안간힘을 다해 숨을 쉬면서 세상을 쏘아보는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다. 이 연작에서 영혜는 세상의 변두리로 밀리다 못해 그 존재를 위한 최소한의 공간조차 혹은 뿌리내릴 한 뼘의 자리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처지다. 그녀는 식물적 젖가슴으로 세상의 동물적 공격성에 대응했지만, 턱없이 유약할 따름이었다.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광기의 영역으로 금줄 쳐 놓은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는 운명 역시 그녀의 존재를 제한적이게 한다. 물론 그녀는 행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재하듯 존재하면서 성찰적 메시지를 제공하는 그늘의 존재이다. 그늘에서 제발 편하게 숨 쉬고 악몽 없이 잘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드러낸다. 여러모로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해석 가능성을 풍부하게 열고 있는 연작이다. 책방을 운영하기도 하는 한강은 아버지 한승원 작가에게 종종 책을 보내며 편지를 전했다고 한다. 그중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이나 로빈 윌 키머러의 『이끼와 함께』, 메리 올리버의 『긴 호흡』 같은 책들이 눈길을 끈다. 한강 소설에서 왜 여성들이 동물성에 저항하며 식물이 되고자 하는지, 식물과 더불어 숨 쉬며 불안한 실존을 넘어 편안한 평화의 바람을 맞이하려 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들이다. 아버지나 남편과는 달리, 이끼는 “괜찮아”라고 말해준다. 그런 이끼의 토닥거림이나 속삭임과 더불어 숨 쉴 수 있다면 시나브로 편안해지고 괜찮아지겠다. 5. 깊은 고통으로 지은 주문(呪文) 깊은 고통 속에서 한강의 인물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주 구토를 일으킨다. 편안하게 숨을 쉬지 못한 채 밤낮으로 악몽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과 반짝이는 숲의 고통 속에서 깊은 밤의 고통은 한없이 깊어지기만 한다. 어떻게 개인적이고 가족적이며 역사적인 트라우마를 넘어,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지극한 사랑과 평화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어떻게 나날의 장례식을 넘어 즐거운 축제 마당으로 건너갈 수 있을까? 『소년이 온다』의 인상적인 대목을 우리는 기억한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남은 자들의 한없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당신을 위한 진정한 장례식은 매우 요긴하다. 당신과 나의 공동 애도를 위한 장례식을 위한 제문(祭文)은 때로 주문(呪文)처럼 통절하다. 한강 소설에서 고통스러운 악몽은 대개 그런 주문의 상형문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주문을 통해 먼저 간 당신의 눈이 되고 입이 되어 준다.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 부분을 보자.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p. 213) 주문은 떠지지 않는 눈을 뜨게 하고, 깊은 고통의 순간을 대면하게 한다. 응어리진 것들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그 응어리의 상처들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소환하는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의 대조가 비애극의 심연을 깊게 한다. 주문은 이렇듯 깊은 슬픔의 호곡을 불러낸다. 그런 다음 당신을 위로하며 청원한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p. 213). 깊은 고통으로 지은 주문은 이런 애도 작업으로 깊어지며 승화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한강은 여리고 취약한 존재들, 정처 없이 방황하며 상처받은 사람들, 고통 속에서 속절없이 절명한 사람들을 위한 영혼의 비가(悲歌)를 시적인 문체로 가만가만 불러온 작가이다. 제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서발턴(subaltern)의 입이 되어주고 제 몫을 보장받지 못한 채 벌거벗은 호모 사케르들의 눈물을 씻어주려는 영혼의 매개자가 되려 했던 영매 작가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진실을 넘어 고통의 심연에서 지극한 인간적 진실을 고통스럽게 탐구한 작가이다. 한 마디로 숨 쉴 수 없는 존재들, 그 숨 막힌 존재들이 나름대로 숨 쉴 수 있도록 위로와 생명의 음표를 감각적 리듬에 실어 소통하고자 한 작가이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죽음과 유령들의 세계와도 같았던 참혹한 홀로코스트의 현장에서 “이 저주받을 망령들아, 비통할지어다!”라고 했던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의 목소리를 떠올린다.14) 『신곡』의 세계를 떠올리며 가까스로 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그는 자신의 기록 서사에서 “이것이 인간인가”라며 깊게 탄식했다. 한강의 여러 작품 또한 그런 탄식에서 비롯된다. 그 서사적 대상이 된 가부장적 질서로 인해 일그러진 여성 문제나 4.3이나 5.18 같은 역사적 트라우마의 이야기는 한강보다 한 세대 혹은 두 세대 선배 작가들의 문학적 축적으로 인해 심연으로 깊어져 새로운 감각적 실존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있는 이야기, 있었던 과거를 단지 그대로 재현하는 작가가 아니다. 있었던 사건에서 고통받은 이들의 차가운 손을 어루만지고, 이미 식어버린 영혼 안으로 스며들어 시리면서도 뜨거운 감각의 실존을 수행한다. 스며든 순간에 몰입하여 시나브로 엑스터시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 법열(法悅)의 에너지와 감수성으로 말미암아, 한강이 스며든 어떤 인간이나 사물도 단지 홀로인 존재의 차원을 넘어선다.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게 되는, 더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그 결과 한국문학이라는 특수성을 넘어서 문학이란 보편성의 측면에서 호소력 짙은 작품으로 승화된다. 한강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까지 쓰인 작품보다 앞으로 쓰일 작품이 더 많거나 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이제까지 한강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몰입하는 감각의 밀도를 통해 문학적 치유의 새로운 스타일을 감각적으로 발견한 작가, 서사의 전개를 초월하여 서정의 몰입으로 심리적 사건을 웅숭깊게 다룬 작가, 그리고 기존의 서정적 소설과도 또 다르게, 『흰』과 같은 작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서정과 서사가 잘 어우러지는 새로운 문학 장르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가로 문학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기대되는 것은 2024년 10월 이후의 한강 문학이다. 섣불리 예측하지는 말자.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기대의 주문처럼, 한강 문학의 새로운 장도를 응원하면 될 일이다. 거듭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 1)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p. 174. 2)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인 「빛과 실」에서 『소년이 온다』를 준비하던 무렵 골몰했던 두 질문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그 질문을 뒤집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고백한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영매 작가로서 한강의 핵심 특성을 가늠하게 하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3) 예컨대 『소년이 온다』에서 이런 대목을 보자. “어쩌면 한사람씩 오는 게 아닌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면서, 가볍디가벼운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몰라.”(p. 174). 이렇게 한 몸이 된 여럿의 영혼들을 맞아들이는 장면에서 영매 작가의 인상적인 특징의 단면을 확인하게 된다. 4)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p. 24. 5)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pp. 11~12. 6)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p. 106. 7) 한강, 『흰』, 문학동네, 2016/2018, p. 36. 8)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p. 38. 9) 한강, 『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5, p. 58. 10) 「여수의 사랑」 관련 논의는 졸고, 「진실의 숨결과 서사의 파동」(『애도의 심연』, 문학과지성사, 2018)의 일부를 수정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글의 2~4장은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웹진 《더라이브러리》에 부분적으로 발표한 원고를 전면 개정한 것임. 11) 한강, 『그대의 차가운 손』, 문학과지성사, 2002, p. 51. 12) 한강, 『내 여자의 열매』, 창작과비평사, 2000, p. 225. 13)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p. 76. 14)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이현경 옮김, 돌베개, 2007, p. 25.

계간 현대비평 우찬제 고통의 상상력소년이 온다도스토옙스키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영매(靈媒) 작가피카소<한국에서의 학살>(1951)서발턴(subaltern)호모 사케르채식주의자작별하지 않는다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여수의 사랑이것이 인간인가 2025
김언 생존의 감각과 길 위의 시

김이듬의 시는 길 위의 시다. 길에서 시작하고 길에서 끝나는 시다. 편편의 시가 시작하고 끝나는 길은 그러나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끝을 모르겠는 길이다. 그럼 시작은 아는 길인가? 시작도 모르겠기는 마찬가지다. 시작을 더듬어 시작을 찾아가면 끝을 모르겠는 길처럼 끝없이 나 있는 길이 다시 보일 뿐이다. 시작도 끝도 모른 채 내던져진 길에서 김이듬의 시는 간다.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디를 지나는지도, 어디서 왔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따지듯이 물어봤자 남는 것은 길이니까. 길 위의 시간이고 공간이니까. 아니다. 그의 시에선 길 위의 시간과 공간을 말하기 이전에 몸이 있다. 몸이 있어서 열어가는 길. 몸이 있어서 걸어서도 가고 기어서도 가고 누워서도 가는 길. 때로는 동경하듯이 날아서도 가는 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전에 먼저 몸이 있다는 사실. 그래서 몸의 길이라는 사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시를 본다. 고둥이 온몸을 밀며 길 반대편의 길을 만들고 있다 고둥이 지나갈 수 있게 맨발 들어 준다 온몸으로 쓰라는 죽은 시인의 말을 끝끝내 모르겠다 이토록 오래 고둥을 응시한 적 없었다는 건 알지만 어둠이 급격하게 해변을 덮고 있다 모든 발자취도 바닷물에 깨끗해지겠지 길치인 우리가 좋다 빈 비닐봉지가 후덥지근한 밤바람 싣고 온몸으로 날아오른다 -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부분 김이듬의 시가 길의 시이면서 몸의 시라는 걸 보여주는 여러 사례 중 하나다. 배경은 물이 빠져나간 갯벌이고 주요 대상은 고둥이다. 물 빠진 갯벌을 온몸으로 기어간 흔적을 남기는 고둥이다. 고둥이 기어간 흔적은 그 자체 길이기도 하고 자취이기도 하고 때로는 성과나 업적 등으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적어도 이 시에선 그런 식의 고상한 관념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여유가 없는 것이다. “뻘 위에 못으로 그린 추상화 같은” 그 흔적은 고둥의 처지에서 보면 언제라도 “순식간에 채취될 노선”이면서 “생존 발각될 단서”(「온몸으로 밀고 나가는」)가 되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무지렁이처럼 밀고 나간 그 길이 역으로 생존을 위협받을 수도 있는 길이 되는 지경에서, 고둥이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화자가 특별히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고둥이 지나갈 수 있게 맨발 들어”주는 것. 그리고 응시하는 것. 시간을 죽이며 오래 응시하는 것. 어쩌면 화자도 생존을 위한 길이면서 생존을 위협받는 그 길을 계속 나아가는 고둥과 별다르지 않은 처지일 것이다. 무지렁이처럼 생존과 직결된 그 길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처지. 생존의 감각만 남은 그 길에서 ‘온몸의 시학’ 같은 말은 차라리 사치다. 몰라도 상관없는 말이다. 말 이전에 생존이 있고 감각이 있다는 걸 체험적으로 보여주는 시에서 생존의 감각은 경우를 달리해서 계속 등장하고 강조된다. 가령, “차갑고 미끄러운 길이 펼쳐져 있다 / “눈이 그쳐서 더 추울 거야 / 장갑도 껴 / 눈길보다 살얼음판이 더 위험해”, “실제로 가긴 간다 미끄럽고 거무스레한 길로 / 태어나려면 거쳐야 하는 통로 같다”(「블랙 아이스」), “그가 따뜻한 죽을 가지고 올 것이다. 이제 죽을 사 와도 소용없지만 절대적 암흑은 없지 않은가. 달빛은 흐릿하고 내 몸은 투명하며 싸늘하다.”(「상강」), “무수한 별들은 서로 부딪치지 않으려고 빛을 발한다”, “몸을 녹이려고 태양 가까이 가서 몸이 다 녹은 사람처럼 나는 까마귀 색 의자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 그 여인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발광을 하며”(「마지막으로」) 같은 표현들이 그것이다. 모두 생존의 감각에서 비롯된 표현이면서, 절박한 환경에서 절박하게 끄집어올린 생각의 잔여물이다. 절박한 입장에서는 그럴듯한 계획 같은 것도, 건설적인 미래 같은 것도 어쩔 수 없이 사치다. 사치로 다가온다. 남는 것은 감각이며, 생존의 감각으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길이 전부다. 그 길은 다시 말하지만,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길이며, 알아봐야 소용도 없는 길이다. 남는 것은 다시 지금 오고 있는 길이면서 이 순간을 지나치는 길이다. 행여나 붙잡으려고 하면 미련 없이 또 떠나고 없는 길이다. 종내에는 “모든 발자취”가 “바닷물에 깨끗해지”듯이 지워지고 없는 길일 것이다. 그런 운명이 예고된 길에서 “길치인 우리가 좋다”라는 발언은 자연스럽게 들린다. 길치가 아니라고 해서 더 나은 종말을 찾아가는 것도 아닐 테니, 차라리 길치가 되어 헤매는 길을 보여주자. 그것이 김이듬 시의 화자가 종종 취하는 태도라면, 그러한 태도에 어울리는 동행 역시 생의 길치로서 만나고 길치로서 헤어진다. 몇 분 안 되는 만남이든 수십 년에 걸친 질긴 인연이든 모두 길치로서 등장했다가 길치로서 퇴장하는 길에 한때의 동행이 놓이는 것이다. 잠시 등장했던 이를 빼놓고는 생의 서사가 구성되지 않는다면 그 잠시가 영원이라면 혼자 갈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해지지 않아도 된다 - 「키스 앤 라이드」 부분 지금껏 화자가 함께했던 숱한 동행들을 어찌 바라봐야 할까? 어떻게 바라보든 만나고 헤어지는 서사는 변하지 않는다. 무수히 만나고 헤어지는 일로 점철된 화자의 서사를 구성하는 동행의 역할도 변하지 않는다. 숱한 동행과의 인연이 이어졌다가 끊어지는 그 길에서 우리는 결국 혼자 가는 신세다. ‘로드 무비’ 같은 누군가의 시에 등장하는 화자만 유독 그런 것이 아니다. 누구라도 혼자 갈 수 있어야 하고 혼자 갈 수밖에 없다. 익숙해지지 않아도 된다. 익숙해질 수도 없다. 혼자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을 때, 아니 부정할 수 없을 때, 다시 보이는 것이 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괴로워하는 누군가의 길을 나와 상관없는 길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서로 만나거나 부딪히지 않았을 뿐, 고통으로 범벅된 그 길을 비껴간 자를 나는 여태 보지 못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매번 그 길을 목격하면서 간다. 어찌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길이 계속해서 나 있다.

월간 현대시 김언 김이듬생존감각온몸현대시작품상 2025
정원 견고한 삶의 조건 ― 박참새, 배시은, 신이인의 시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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