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들 2025년 여름호(제80호)
슬픔에 대한 주석 ― 류근, 『상처적 체질』(2010)과 김근, 『에게서 에게로』(2024) 그 사이 어디쯤
슬픔에 대한 주석,
- 류근, 『상처적 체질』(2010)과 김근, 『에게서 에게로』(2024) 그 사이 어디쯤
정원
1. 주석으로 남은 말
끝내 말하지 않아서, 끝내 그 말을 듣지 않아서 영원히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시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그것은 완결되지 않는다. 미완성의 일은 좀처럼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자이가르니크 효과—물론 심리학적 개념으로서의 정확한 정의는 다르지만 미완이라는 상태가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연민과 응시의 감각. 시는 언제나 그 완성되지 않은 어떤 것에 머무르며 우리를 흔든다.
비평이 그 흔들림을 정리하고 서열화하고 요약하는 방식으로 시에 접근할 때 무언가는 반드시 누락된다. 나는 그 누락된 자리, 문장이 도달하지 못한 문장 곁에 남겨진 것들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시를 설명하지 않는다. 해설하지 않는다. 다만 응시할 뿐이다. 그리고 그 응시의 자리에 주석처럼 붙는다.
최근 우리 비평은 점점 더 '자기 이야기'를 말하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에세이적 비평, 1인칭 비평, 자기 서사의 회복. 그것은 오랫동안 구조적 불투명성 속에 머물렀던 비평가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려는 시도이며, 충분히 유효하다. 그러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반드시 '나'를 들이미는 행위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어떤 문장은 오히려 '나'의 감정을 철수시키고 대신 더 오래 응시하고 더 천천히 다가가기를 요구한다. 이것은 바로 그 요구에 응답하려는 하나의 방식이다.
물론 거의 모든 비평이 한 편의 시 앞에서, 시가 말한 것과 침묵한 것을 민감하게 감지하려고 문장 옆에 오래 머무르고 부단히 응시한다. 비평은 이미 '시 앞에 오래 머물렀다'는 사실이 전제되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우리 비평의 부단한 출발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비평이 도달하기 위해 설정해둔 목적지를 '전달'이 아닌 '증명'으로 다시 지정하려는 시도다. 의미를 통과해 독자에게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의미에 도달하지 않겠다는 하나의 결정이다.
그 결정은 말을 침묵으로, 해석을 응시로, 감정의 진술을 주의의 태도로 바꾸는 형식적 전환이며, 동시에 비평이 수행할 수 있는 작은 목소리의 윤리적 선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주석적 평론은 단지 명명적 발명도, 마케팅 수사도 아니다. 그것은 평론이라는 장르 안에서 오랫동안 묵인되어 왔던 어떤 잠재적 가능성, 기존의 비평이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었던 윤리적 감수성의 방향성을 명시화하고자 하는 전략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것이 요청하는 한 명의 윤리적 독자로서 실험해본 기록이다. 한 발 늦은 문장으로, 아니 애초에 너무 일러서 말을 멈춘 문장으로.
1인칭 비평이 감정의 진폭을 밀어 올리는 고백이라면 주석적 평론은 거리를 유지한 채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을 문장의 그림자처럼 걸어두는 일이다. 그래서 주석적인 평론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사라지지 않는 글쓰기다. 나는 말하지 않지만,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한 문장의 여백에 오래 머물며 침묵의 밀도를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 주석적인 문장은 호소하지 않는다. 다만 가슴 깊은 곳을 통과한 언어이며 끝내 도달하지 못한 말의 끝자락이다. 내가 머문 시간만큼 이 문장은 스스로의 침묵을 완성할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시처럼 쓰인다. 끝내 말해지지 않아서.
그렇다면 이 글은 어떤 시 앞에 주석처럼 붙을 것인가. 나는 류근의 『상처적 체질』(2010)과 김근의 『에게서 에게로』(2024)를 선택했다. 한 시집은 등단 후 18년의 침묵 끝에 도달한 첫 문장이며, 다른 한 시집은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언어의 경계를 탐색하는 시도다. 두 시집은 서로 다른 시차와 온도를 지녔지만 공통적으로 '말할 수 없음'과 '도달하지 않음'을 전제한 채 끝내 문장을 선택한다.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고 도착하지 않을 말을 계속 써 내려간다.
단지 감정의 양태나 표현 방식이 다른 게 아니다. 류근은 고백한다. "이제 내 슬픔은 삼류다."(『상처적 체질』, 「어떤 흐린 가을비」) 이 고백은 단순한 자기비하가 아니다. 그것은 상처가 언어화되는 순간—누군가에게 들리는 순간—속되게 소비될 운명을 자각한 시인의 언어적 체념이자 그 감각의 응축이다. 『상처적 체질』의 슬픔은 그래서 '진짜'이기를 포기한 슬픔이다. 표현되기를 거부하면서도 끝내 표현되는, 그래서 감각으로만 읽힐 수 있는, 어떤 내부로 굴절된 상처의 언어다.
그러나 이 언어는 김근의 시 앞에서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김근은 말한다. "에게서 에게로."(『에게서 에게로』, 「에게서 에게로」) 상처는 폐쇄되지 않고 이동한다. 김근의 시 속 상처는 정적인 고통이 아니라 방향과 운동을 가진 감정이다. 그것은 하나의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하나의 문장 속에서 다른 구절로 옮겨가는 관계적 감염이다. 여기서 상처는 타인의 것으로 흘러들고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온다. 이 흐름은 류근이 거부한 바로 그 순간, "함부로 눈이 마주친" 순간(「어떤 흐린 가을비」)에서 출발한다.
김근의 시는 류근의 시를 주석한다. "왜 당신은 상처를 자기 안에만 가두는가?" "그 상처는 타인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할 수 있는가?" 김근의 언어는 묻지 않으면서도 되묻는다. 류근이 선언한 '삼류화된 감정'은 김근의 감각을 통과하면서, 더는 감정이 중심이 아니라 감각의 궤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언어로 변화한다. 고백은 더 이상 정서의 진실이 아니라, 감각이 거쳐간 자리의 구조가 된다. 이 전환은 해석이 아닌 잔여이며, 문장이 말한 것보다 문장이 말하지 못한 것에 머무는 응시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단선적이지 않다. 김근의 시 또한 류근의 시로부터 되묻는다. 타자에게 흘러간 감정은 끝내 다시 돌아오는가? 관계는 언제까지 반복될 수 있는가? 『상처적 체질』의 음울한 자족성은 『에게서 에게로』의 관계적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들고, 『에게서 에게로』의 파열된 리듬은 『상처적 체질』의 감정 구조를 되틀어보게 만든다. 김근의 '관계적 감각'은 류근의 '내면적 구조'를 질문하고, 류근의 '리듬화된 감정'은 김근의 '언어 바깥의 감정'을 불러낸다.
서로는 서로를 주석한다. 그러나 그 주석은 해설이 아니다. 불완전한 해석, 조각난 반응, 때로는 비틀린 되비침이다. 그렇게 두 시집은 하나의 장(場)에서 서로를 반사하며, 상처의 정의를 확장하고, 감정의 구조를 해체한다. 『상처적 체질』은 침묵의 주석이 되고, 『에게서 에게로』는 운동의 주석이 된다. 이 두 주석은 평행선을 그리듯 가까스로 닿지 않는다. 독자는 그 사이의 긴장에서야말로 오늘의 시가 상처를 견디는 방법을 다시 배운다.
2. 응시의 독법—감각의 작동 방식
감정은 언어 이전의 감각에서 시작되지만 대부분 재현되지 않는다. 감정은 말해지기보다는 누락되고 언어는 그것을 직접 서술하기보다 지연된 리듬으로 감각을 구성한다. 시는 종종 말해지지 않은 감정에 가닿기 위해 언어를 미루고, 여백을 건너며, 때로는 되묻는다. 말보다 오래 남을지도 모를 감각. 언어로는 끝내 증명되지 않을 감정의 궤적. 예컨대 김근의 「정류장」은 그러한 감각의 실패와 구성의 시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다.
그가 말했다. 나도 한때 들판이었던 적이 있소. 하지만 지금은 그저 빈 들판이요. 고독하지도 않은데 이것참 남세스럽군, 정류장엔 다른 사람이 없었다. 너무 늦었거나 너무 일렀다. 내가 들판이었던 때를 생각해보시오. 곡식들은 저마다 열매를 매달고 눈부신 햇빛 속에서 익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삽 같은 농기구를 어깨에 걸치고 농부 하나가 들판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을지도. 들판을 가로지르는 시냇물 소리도 선명하게 들렸을 거요. (……) 그런데, 그런데 말이오. 빈들판이 되자마자 나는 내가 들판이었던 때를 떠올릴 수 없게 되어버렸소. 들판이었던 때 내 몸에 새겨진 감각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소. 빈 하나만 내 몸에 달라붙었을 뿐인데 이토록 심각한 망각이 내게 끼얹어질 줄은 차마 몰랐지 뭐요. 그때 등뒤 가로등 빛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눈동자 두 개가 빛을 내고 있는 게 보였다. 길고양이일 것이 분명했지만 왠지 그 눈빛의 주인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으로만 자꾸 생각되었다. 한 쌍의 눈빛은 이따금 동시에 깜박거렸다. 눈을 감을 때 짐승은 거기 없는 것 같았다.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히는 것처럼. (……) 처음부터 내가 기다렸던 게 버스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어딘가로 가야 한다. 여긴 정류장이니까. 정류장을 버리고 정류장 혼자서 기다리라고 내버려두고. 나는 짐승의 눈빛 쪽으로 향한다. 그곳은 어쩌면 이 시답잖은 알레고리의 바깥일지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내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자 이내 눈빛은 사라졌다. 다시 눈뜨지 않았다. 다시 아무것도. 당신은 너무 일렀거나 너무 늦었소만, 그곳에 눈빛은 정말 있었던 것일까. 다시 그곳은. 없어졌다. 다시 바깥은. 빈 들판이 되기에도 빈이 되기에도. 그의 목소리만이 어둠처럼 끈질기게 내 귀를 잡아당겼다.
—김근, 「정류장」 부분
빈 들판이 “한때 들판이었던 적”을 회상할 때, 그것은 단지 지나간 풍경을 불러오는 일이 아니다. 그 회상은 수동적으로 과거의 감각을 재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때 현재와 미래의 감각의 재생 버튼은 자동적으로 눌린다. 회상이라는 말에는 현재의 ‘비어 있음’과 과거의 ‘비어 있지 않음’, 들판과 들판이 아닌 무엇, 그리고 그것 아닌 어떤 무엇으로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들뜸 없는 기대, 또 그외의 어떤 개연성 없는 감각들이 점철되어 있다. 이 모든 감각을 하나로 이르면 ‘그리움’이 될 것이다. 이 그리움은 실제로 있지 않았지만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일’에 대한 미련과 연민의 정서를 일으킨다. 그는 “내 몸에 새겨진 감각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이토록 심각한 망각이 끼얹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그 감각은 실상 여기에서, 있지 않았던 감각을 일으킨다. 있지 않았던 감각에 대한 감각은 마치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내 몸에 각인된다. 경험하지 못한 꿈을 경험하게 해주기 때문에 존재론적 분열을 치유하는 어떤 시에서의 상징처럼 말이다. 그곳에 있었다고 믿는 감각은 어느새 “정말 있었던 것”으로 몸에 각인된다.
그러니까 감각은 복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된다. 그 구성은 언제나 ‘빈’에서 시작된다. 상실의 자리에서, 결여의 틈에서, 감각은 다시 만들어진다. 과거를 되살리는 방식이 아니다. 과거를 새로 쓰는 방식이다. 실재하지 않았던 감각이 실재처럼 작동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감각이 과거에 근거한 증거가 아니라 미래를 지시하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감각은 기억의 소환이 아니라 발명의 발견이며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여겼던 무언가를—사실은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던 무언가를—끝내 구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진실이 될 수도 있다. 결국 그것이 없던 자리를 통해서만 진실에 닿을 수도 있다.
김근이 감각을 작동 시킬 때, 어떤 시들은 조용히 풀어진다. 감각이 말을 밀어내고, 말이 감정을 넘긴다. 그떄 시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도 진실에 닿는다. 어떤 누명을 벗어낸다. 벗겨진 시는 우리를 더 예민하게 만들고, 예민한 감각은 더 오래 응시하고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이 글은 감각이 언어보다 앞서 있고, 시는 그 감각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하나의 비평적 실천이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 지르고 운다
—류근, 「독작(獨酌)」 전문
재회를 믿었고, 새끼 손가락 꼭 걸었다. 그러나 사랑은 또다시 나를 떠나간다. 그때의 같은 자리에 거듭 새겨진 상처는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헤어짐의 반복은 고통의 반복이고 고통의 반복은 그 감각을 무디게 만들지만 상처는 항상 새롭게 많아지거나, 깊어지거나, 비대해 질 것이다. 그건 너도 매한가지다. 그러니까 우리 지독하게 사랑한 만큼 지독하게 마음 먹고 단숨에 헤어지자. 라고, 예전의 나였으면 이 시를 이렇게 읽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완벽히 지워내겠다는 감정의 독단처럼 들리도록 해석해버리기. 혼자 술을 퍼마시며(독작) 이별을 조금 멋스러운 쓸쓸함으로 포장하고, 새벽녘 sns에 올렸다가 다음 날 조용히 삭제하는 글처럼, 대학교에 하나쯤 있을 법한 센치한 선배처럼 만들기. 이런 해석은 정말 우리가 겪었던, 겪고 있는, 겪을 모든 이별에 대한 실례일 것이다. 그것은 감정의 진폭을 서술하는 일에 불과하다.
이제는 좀 더 감각적으로 읽어보자. 자신의 감각을 믿고 문장 옆에 더 오래 머무르면서 응시하는 몸의 언어로 말해보자. 재회를 믿었을 때, 재회를 기약했을 때, 당신의 감각은 어땠는가. 만남의 끝이 결국 헤어짐이라는 사실은 일찍이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나는 예외일 거라는 자기 최면을 걸었을 것이다. 모종의 다짐으로 희망적인 미래를 설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또다시 헤어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그럼에도 우리가 다시 사랑하게 되는 건, 감각을 잊어서도, 무뎌져서도, 그것이 멸해서도 아니다. 그 감각이 나를 살게 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감각 버튼을 누르고 그에 따라 자동 재생되는 진실된 감각을 말해보라.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었던 사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던 사람이 떠오른다. 그 이름이 아니라, 그 얼굴조차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걷던 공간 속 특정한 날씨와 냄새, 그리고 그 배경에 깔렸던 음악 같은 것.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런 것들이 몸 안에서 어딘가 동시에 켜지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직접 떠올린다기보다, 그 사람과 얽힌 감각들의 궤적을 따라간다. 이 궤적은 항상 비선형적이다. 마트에서 흘러나오던 오래된 팝송의 한 소절, 커피잔을 내려놓을 때 손가락 끝에 전해지던 찻잔의 온기, 아니면 그 사람의 코트에서 나는 먼지 섞인 향수의 마지막 노트. 그때 그 사람을 떠올렸던 것이 아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었던 ‘감각’이 나를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는 선언은 자동 재생된 감각 앞에서 질문으로 변모한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었어?’라고. 이 되묻기의 순간에 감각은 문장을 바꾼다. 반문이 아니라, 반향이다. 믿었던 그 미래, 품었던 그 목소리, 붙들었던 그 감각—그것들은 단지 실패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감각의 총체였다. 그리고 그 총체는 말로는 남지 않았지만, 끝내 당신의 몸 어딘가에는 남아 있었다. 감정의 절단처럼 들렸던 류근의 언어는 김근의 감각의 구조를 통과하면서 절단이 아니라 잔류였음을 드러낸다.
시가 말한 것보다, 시가 말하지 않은 여백, 그 여백에서 다시 떠오른 감각, 그 감각으로 인해 드러난 문장. 응시하면, 시는 벗는다.
3. 에게서, 체질로—감각의 회로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은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거듭된 상처의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류근, 「상처적 체질」 전문
“상처적 체질”이라는 말에서 먼저 떠오른 건, 어쩐지 비관적인 단상들이었다. 체질이라,—그 말은 어딘가 책임을 유예하는 언어처럼 들린다. ‘나는 원래 그래’라는 식의 변명, 몸에 그 책임을 전가하면서 정서적 면책을 꾀하는 일.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운명론. 언뜻 상처를 내면화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몸의 감각에게 모종의 중압감을 짊어지게 하며 고통의 근원을 흐리고 상처의 본질을 훼손하는 방식일 수 있는 것이다. 이때의 “상처의 열망”이니, “거듭된 상처의 폐허”니 하는 미학적 언어는 상처 입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미화된 언어, 즉 자기방어의 수사에 지나지 않게 된다.
무한한 가능성의 이 시가, 상처는 체질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감각은 그 체질 속에 갇힌 반복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다만 상처에 대한 일종의 면책 기록일 것이다. 그때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말 거대한 병원이고, 시란 그 병증일 수밖에는.
응시하면, 시는 벗는다. 체질은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감각이 쌓여 만들어진 하나의 구조다. 이 시에서 말하는 상처는 어떤 사건의 결과라기보다는 반복되는 감각의 축적이고, 그 축적의 양상이다.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는 말은 그래서 사건의 인과를 제거한다. 상처는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닿았다는 사실’ 그 자체로 충분하다. 시인은 감각의 구조를 발화한다. 그것은 하나의 감각이 끝나지 않고 반복될 때, 다시 말해 상처가 현재진행형의 감정이 될 수 없을 때 그 감각은 고체화된다. 말하자면 감정은 굳어지고, 감각은 구조가 된다. 그 구조는 “체질”이다.
하지만 체질은 감각이 멈춘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감각이 사라지지 않고 되풀이되어, 말해지지 않으면서도 끝내 몸에 남아있는 상태다.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는 상처는 모두 감각으로서 켜켜이 쌓여 체질이 된다. 체질 때문에 고통은 받아도, 체질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그것은 끝내 생존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그 유명한 말, 너무 유명해서 통속적인 명언이 되어버린 그 말이 체질의 비유가 될 수 있으려나. 그러니까 상처적 체질이라는 그것은 상처를 잘 받는다는 것도, 상처를 잘 준다는 것도 아니라, 단지 감각이 만든 문장으로서 상처를 잘 살아내고 있다는 감각 구조의 이름이다.
정리하자면 류근의 언어는 감각을 하나의 구조로 고정한다. 반복되는 상처의 리듬은 체질이 되고, 체질은 상처가 감각으로 응고된 하나의 방식이다. 그러나 그 감각은 여전히 폐쇄적이다. 류근의 체질은 세계로부터 오는 감각을 내부에서 되씹고 되풀이하는 구조이지, 타자와의 접촉에서 열린 흐름은 아니다. 그는 감각의 ‘패턴’을 만든다. 하지만 그 패턴은 고립된 채 순환하고 있다.
반면 2부에서 김근이 보여준 감각 구조는 그와 다른 흐름을 구성한다. 김근은 감정을 선형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감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서 출발해, 지금 여기의 감각을 구성한다. 그는 실재하지 않은 과거로부터 감정을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 감각은 말해지지 않은 말, 망각된 장면, 잊힌 풍경 속에서 돌연 작동한다.
그리하여 류근의 감각은 되풀이되는 내부의 리듬이고, 김근의 감각은 되살아나는 외부의 흔적이다. 체질이 되기까지 감각은 응축되고, 되살아나기 위해 감각은 분산된다. 두 감각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의 회로를 완성한다. 말해지지 않은 말, 기억되지 않은 감정, 그리고 응시된 감각이 하나의 회로로 엮이는 과정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감각은 더 이상 한 사람의 내부에 머물지 않고, 다른 시로, 다른 몸으로, 다른 말로 옮겨간다. 그리고 그 회로 속에서 감정은 해석되지 않고 다만 응시된다.
이제 우리는 그 응시의 방식, 감각의 회로 속에서 김근의 시 「서러우니, 아프니,」(『에게서 에게로』)를 다시 읽어본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끝내 문장이 되지 못하고 중얼거림으로 남아 있는 시, 그 바깥에서만 감정이 반응하는 시. 감정의 진술이 실패한 자리에 감각이 어떻게 잔류하는지, 그 회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자.
서러우니, 아프니, 따위가 교접하는 꼴을 지켜볼 참이었는데
서러우니, 는 어느 문장의 교접에서 빠져나와 여기 있나 아프니, 는
(……)
매달리는 것은 정작 나였더라는, 서러우니, 따위에 아프니, 따위에
매달려 바지춤이라도 잡아볼 양으로 꽉 쥔 손 더 꽉 꽉 쥐어는 쥐었으나
떨려나더라는 그만 떨려나 바닥에 나동그라져 서러우니, 중얼중얼
아프니, 중얼중얼 어느 문장의 교접에도 들지 못하고 숫제 까무러나 치더라는
문장은 완성되지 않고 나는 그 문장의 바깥으로만 서러우니, 아프니, 로다만
바깥은 아리고 아리더라는 서러우니, 아프니, 따위이게만
서러우니, 아프니, 바깥도 나도 당신도 완성되지는 결코 않고,
—김근, 「서러우니, 아프니,」 부분
이 시는 문장이 완성되기 직전, 혹은 완성되지 못한 채 파열되는 리듬 속에서 감정의 부재를 감각의 형태로 전환한다. “서러우니,” “아프니,”라는 말들은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감정이 언어에 들어서지 못한 채 멈춰 선 쉼표의 흔적이다. 감정은 말이 되지 못하고, 문장은 감정을 담지 못한다. 그때 남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감각의 파편이다. 이 파편은 비문법적인 어형, 중얼거림, 반복과 흔들림 속에 잔존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감각들이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문장 바깥에서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문장은 완성되지 않고 / 나는 그 문장의 바깥으로만 / 서러우니, 아프니, 로다만”—감정의 발화 실패가 곧 감각의 작동 개시임을 보여준다. 감정은 고백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워지지 않는다. 감각은 문장 밖에서 흐르고, 그 흐름이 반복될수록 그것은 패턴이 된다. 이 패턴은 류근의 시가 말한 ‘체질’처럼 하나의 리듬 구조로 굳어지기 직전의 상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어떻게 감각의 회로를 만들고 있는가. 류근이 고정된 감각의 구조(체질)를 말한다면, 김근은 말해지지 않은 감정이 흘러다니다가 다시 몸 안에서, 말 바깥에서 감각으로 발화되는 장면을 기록한다. 하나는 응고된 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부유하는 감각이다. 그리고 그 둘이 만나는 지점—말하자면, 감정이 말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더 깊이 감각되고, 감각이 언어 바깥에서 반복되며 하나의 회로를 만든다는 이 감각의 순환 구조—가 이 글이 추적하려는 “감각의 회로”다.
김근의 시 「에게서 에게로」(『에게서 에게로』)는 감각이 단일 주체 안에 고립되지 않고 ‘너에게서 또 다른 너에게로’ 흐르는 관계적 회로임을 보여준다. 감정은 어떤 ‘나’의 내면에서 발화된 것이 아니라, 이미 ‘너’를 통과해 온 감각이며, 또다시 ‘다른 너’를 향해 옮아가는 언어적 궤적이다. 이 감각은 멈춰 있지 않고 전이되며, 감정의 기원이 아니라 감각의 운동성으로 시를 구성한다.
너는 언제 눈이 멀까
네 입술의 거스러미들이 일어난다
네 말은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고
나는 끝끝내 말해지지 않는다
자리를 잡지 못한 네 말들로 이곳은 범람한다
감정은 여기서도 ‘말해지지 않음’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서러우니, 아프니,」에서의 말해지지 않음이 문장 바깥의 정지라면, 「에게서 에게로」의 말해지지 않음은 감각의 흐름이다. 그것은 “자리를 잡지 못한 네 말들”이 범람하는 풍경이고, 이 범람은 감정이 구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감각의 홍수다. 고백이 실패했기 때문에 감정은 여전히 감각으로 유예되고, 그 감각은 관계 속에서 옮아간다.
감정은 감정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감각의 패턴이자 언어적 관계의 흐름으로 존재한다. 류근의 감각이 몸에 각인되어 고체화된 것이었다면, 김근의 감각은 타인의 말에 의해 범람하고 이동하며, ‘자리를 잡지 못한 말’로서 끊임없이 재배치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감각의 회로는 감정의 전유가 아니라 감정의 유실을 전제로 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이 많기 때문에 이 감각은 계속 이어진다.
감각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나’를 통과한 감각은 언제나 ‘너’를 향해 열려 있고, 그 감각이 언어를 통해 완결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여전히 그 감각을 감지하고 있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끝내 관계 속에서 돌아오고, 흘러가고, 감염된다. 그것이 감각의 회로이고, 시가 끝내 감정을 살아내는 방식이다.
결국 이 글은 감정을 진술하지 않기 위해 감각을 오래 붙잡았고, 감각을 붙잡기 위해 시에 더 오래 머물렀다. 우리가 읽어온 시들은 감정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감정이 감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조용히 보여주었다. 상처를 말한 것이 아니라, 상처가 남긴 리듬을 반복했고, 말하지 않은 감정이 어떻게 감각으로 번역되는지를 실천적으로 증명했다. 그 반복과 전이의 흐름 속에서 감각은 체질이 되었고, 체질은 끝내 관계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감각의 회로는 단일한 자아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늘 ‘너’의 존재를 전제하고, ‘또 다른 너’에게로 건너가는 경로다. 시는 그 경로를 하나의 언어로 완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한 말들, 말해지지 않은 문장들, 도달하지 못한 언어의 잔해들 속에서 더 정확하게 살아 있다. 비평이 그 잔해 앞에 머문다면, 그것은 해설이 아니라 응시이고, 설명이 아니라 기다림이며,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감각의 지속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문장이 도달하지 못한 감각을 추적하려 했다. 감정이 아니라 감각을, 설명이 아니라 구성된 흔적을, 하나의 완결이 아니라 끝내 돌아오지 않는 반복을. 그리고 그 반복의 한 가운데에서 시는 말해지지 않았던 사랑을 다시 감각하게 한다. 감각은 다시 살아 있는 문장이 된다.
4. 감각 이후의,
시대는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마저 예의주시한다. 상처는 쉽게 고백되지만, 그 고백은 종종 감각되기 전에 소비된다. 이미지로, 이모지로, 몇 초 만에 반응하는 감정의 압축된 형식 속에서 슬픔은 감정 이전에 태그가 되고, 상처는 경험 이전에 서사화된다. 그럴수록 우리는 자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리는 시간 속에서, 말함은 곧 존재의 증명이다. 그러나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슬픔은 말한 뒤에도 남고, 상처는 고백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자주 말하는 일만이 아니라, 더 오래 감각하는 일이다. 말함은 윤리의 출발이지만, 감각은 그 윤리가 지켜지는 방식이다. 말함이 고통의 첫 번째 증명이라면, 감각함은 그 증명이 계속 유지되도록 하는 두 번째 언어다. 이 글은 그 두 번째 언어로서의 가능성을 묻는다.
하여, 묻게 된다. 감각한 다음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말해지지 않은 것의 윤리를 오래 응시했다면 이제 그 감각의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새로이 감당해야 하는가. 이 글은 끝내 말해지지 않은 어떤 문장 옆에 머물렀고, 그 여백의 떨림을 오래 지켜보았다. 그러나 세계는 끊임없이 말하라고 한다. SNS에서, 인터뷰에서, 기록에서, 고백의 형식에서—슬픔은 표현되기를 요구받고, 상처는 빠르게 이해되기를 강요받는다.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리는 시대,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자주 망각된다.
우리는 안다. 상처는 말해져야 한다. 말해지지 않은 상처는 더 깊은 침묵으로만 남았고, 그 침묵은 누군가가 말하기 전까지 결코 메워지지 않았다. 또한 안다. 말은 때로 너무 빨리 잊힌다. 말이 많을수록 오히려 감각은 증발하고, 감정은 마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말이 아니라 더 무거운 감각이다. 그 감각이 말을 떠받치고, 그 말이 끝내 다시 감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윤리의 회로. 이 글은 그 회로를 만들기 위한 다만 아주 작고 느린 실험이었다.
*부록
시가 감정의 언어라면, 그 감정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동일한 슬픔도 같은 말로는 다시 불릴 수 없고, 같은 고통도 똑같은 문법으로 말해질 수 없다. 시는 종종 세계보다 한 박자 느리게 도착하지만 때때로 세계보다 먼저 아프다. 세계가 아직 체감하지 못한 감정을 시는 미리 감각하고 그 감각의 구조를 가장 먼저 언어화한다. 그래서 시는 지나간 감정을 말하면서도, 다가올 슬픔을 증언하는 언어다. 이 평론이 주석한 류근과 김근은 그 감정의 시간성에서 서로 다른 리듬으로 같은 고통을 구성해낸 시인들이다. 류근은 감정을 반복과 리듬의 구조로 정제했고, 김근은 실패와 결여의 구조 속에서 감각을 잔류하게 만들었다. 이 부록은, 그 두 언어의 병렬을 통해 우리가 어떤 감정을 어떻게 말해왔고, 어떻게 끝내 말하지 못했는지를 복기하려는 시도다.
2010년대 전반의 한국 시는 고백의 서정성을 유지하면서도 감정을 직접적으로 발화하기보다는 정제된 이미지와 절제된 문장을 통해 감정을 간접적으로 구성하려는 경향이 뚜렷했다. 박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2)는 일상의 슬픔을 산문시와 서정의 경계에서 절제된 말투로 조직했고, 하재연의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2012)은 침묵의 감정을 조용히 응시하며, 감정의 과잉 대신 감각의 압축을 선택했다. 허연의 『불온한 검은 피』는 원래 1995년 출간되었지만, 2014년 복간되며 재조명된 이후, 감정의 리듬을 신화적 상상력과 병치해 해체한 언어로 다시 독해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시는 감정을 고백하거나 날것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일정한 형식 안에서 응축하고 조율하려는 윤리를 견지했다. 감정은 직접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의 구조 속에 미루어지고, 독자는 감정의 진폭이 아니라 감정의 궤적을 따라가게 된다. 이것은 감정의 미학이자, 서정의 윤리였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을 지나며 시의 문법은 균열을 맞는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사회적 감정은 언어에 대한 회의와 감정의 발화에 대한 윤리적 고민을 더욱 첨예하게 만들었고, 시는 감정의 고백보다 감정의 불능 자체를 감각하는 쪽으로 이동한다. 안미옥의 『온』(2017)은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가장 조용한 언어를 실험하며, 감정을 직접 호명하지 않고 그 감정이 일어나는 자리 자체를 오래 응시한다. 이소호의 『캣콜링』(2018)은 페미니즘적 시선을 통해 감정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감각하게 하는 시학을 구축하며, 사회 구조 속 침묵의 감정을 가장 급진적인 형식으로 표출한다. 언어는 더 이상 감정을 담는 그릇이 아니며, 감정은 더 이상 말로 재현되지 않는다. 시는 감정의 실패를 감각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시가 모두 파열로만 향한 것은 아니다. 김행숙, 이문재, 김복희 같은 시인들은 여전히 정제된 말 속에서 감정을 환기하며, 느린 서정의 리듬으로 시대를 반사했다. 심보선, 장이지, 함기석 등은 형식을 실험하면서도 감정을 비틀거나 구조화하는 방식으로 서정의 가능성을 확장했다. 결국 이 시기의 시는 파열과 구조화, 고백과 침묵, 직접화와 간접화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다층적 국면이었다.
2020년대 초반에 들어서며 시는 감정의 언어를 더욱 신중히 의심하게 된다. 감정은 더 이상 말해지지 않기보다, 애초에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존재한다. 감정은 문장 바깥에서 흔들리고, 잔류하며, 실패한다. 김근의 『에게서 에게로』(2024)는 그 전환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감정은 이제 고백되지 않고, 시는 감정의 실패 자체를 감각하는 쪽으로 밀고 들어간다. 쉼표, 중단된 구절, 어긋난 문법은 감정이 표현되는 방식이 아니라, 감정이 표현되지 않는 방식을 감각하게 한다. 감정은 주체 내부에서 고립되지 않고, 하나의 몸에서 다른 몸으로,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동한다. 감정은 감염되고, 옮겨지고, 끝내 다시 말해지지 않는 자리에서만 증명된다. 이 시집은 감정이 말해지지 않음으로써만 말해질 수 있다는 모순을 가장 극적으로 감각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이 2010년의 류근과 2024년의 김근을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들이 어떤 대표성이 있어서가 아니다. 둘은 각자의 시기를 압도한 시인은 아니지만 각자의 시기가 요청한 감정의 구조에 가장 날카롭게 반응한 언어들이었다. 류근은 감정을 리듬과 반복의 구조 속에서 조율하며 상처를 체질화했고, 김근은 감정의 결여와 실패를 끝내 감각으로 환원하며 언어의 파편 속에서 응시했다. 하나는 감정의 정제이고, 하나는 감정의 잔류다. 이 둘이 나란히 놓인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병렬 속에서 지금-여기의 감정 구조가 어떤 언어를 필요로 하는지를 묻는 일이 중요하다.
이 글은 바로 그 물음의 옆에 붙는 문장이다. 시를 해설하지 않고, 감정을 분석하지 않으며, 끝내 말해지지 않은 감각의 흔들림에 오래 머문다. 이것은 설명이 아니라 응시다. 주석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의 언어가 어떻게 시대의 문장을 바꿔왔는지를 가만히 지켜보는 하나의 문장. 말할 수 없었던 시대에도, 끝내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에도, 여전히 문장 바깥에 남아 있는 감각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감각이 결국 언어를 다시 부른다는 것. 시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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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고봉준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와 양안다의 사이, 그 틈 류수연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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