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월간 현대시 2025년 12월호(제432호)
기묘하고도 고유한 언어들의 도래에 관하여
기묘하고도 고유한 언어들의 도래에 관하여
김정현(문학평론가)
1. ‘자명한 것이 없는’ 목소리들은
지금 우리 시문학장에 새로이 등장한 신인들에 대해 어떠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까. 물론 2025년 올해에 등단한 시인들의 시세계는 이제 막 출발점에 위치한 셈이다. 그러니 각각의 시인들이 최소한 한 권의 시집으로 대변될 자신만의 시적 세계를 어느 정도 드러내기 이전까지 그것을 규정하는 일은 그닥 의미를 갖기 어렵다. 한 명의 시인이 지니는 시세계를 겨우 2편의 시로 설명한다는 것 또한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주어진 원고를 읽어가면서 느껴지는 어떠한 근원적인 공통점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지닌 기묘한 고유함에 대한 증명이자 그 욕망이다.
미래파 시기의 2000년대와 포스트-미래파의 2010년대 이후 젊은 시인들이란 카테고리에 종종 부여되는 키워드인 난해성과 추상성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이에 대해 아도르노의 문장을 조금 바꿔 말해본다면 ‘시에 관한 한 이제는 아무것도 자명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미학이론』)는 맥락을 분명히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개인적이고 독자적인 사유행위에 속한다는 점 역시도. 그렇기에 이번 글에서 다루어야 하는 시인들의 시를 하나의 통일된 경향으로 정리하는 것은 더더욱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정말로 중요한 부분은 지금의 젊은 시인들이 어떠한 감각과 인식 혹은 언어를 통해서 자신들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가란 층위를 구체적으로 따져보는 일에 있다.
왜 이들은 낯설고도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시선으로서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가. 그 고유하고도 기묘한 감정과 마음은 그들의 언어가 지닌 깊은 심연이기도 하다. 이 심연은 (앞으로도 별반 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 현재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는 부를 향한 AI의 열풍 그리고 주가 5000선 달성과 강남 아파트값 폭등이란 먹고사니즘의 거센 파도와는 무관할 것이다. 즉 실제하지만 실제하지 않는 거대하고도 치밀한 압력들 속에서도 문학을 하는 우리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낯선 무언가들을 들리지 않더라도 발산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우리에게 도착한 시인들의 기묘하고도 고유한 언어는 이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기어이 쓰고자 하는 언어이자 증명이며 욕망인 것. 언제나 알 수 없고도 이상한 우리의 세계 속에서 시를 쓰는 인간들은 여전히 있다. 과거와 지금에도 그리고 예측하기 불가능한 미래에서도. 하면 그들은 도대체 왜 쓰고 왜 말하며 왜 존재하는 것일까. 명확한 답이란 없겠지만 중요한 맥락은 언어의 표면이 아닌 이면이자 심연이며 각기의 시인들이 지닌 기묘한 나로서의 고유함이란 무엇인가를 섬세하게 살펴보는 것에 있다. 다만 한 가지만은 명심해두자. 이 글은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생각에 그칠 뿐이라는 점을. 시라는 굳어진 규정이 아닌 시적인 것은 모든 시인들에게 깊숙이 그리고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명명 불가능한 무엇일 따름이니까.
2. 세계에 대한 깊은 절망의 알레고리란
언제나 중요한 지점은 시인들은 세계에 대해 절망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굳이 보들레르나 이상을 끌어들여 말하지 않아도 말이다. 이 측면에서 방성인 시인의 「복숭아로 가는 길」은 분명 주목되는 흥미로운 부분을 가지고 있다. 시인이 이 시속에서 줄기차고 집요할 정도로 반복하는 “아주 많은 복숭아”란 도대체 어떠한 의미를 실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예컨대 다음의 구절을 보자.
유일하고 거대하다.
복숭아와 숲 사이 숲속에서
복숭아로 가는 길을 삽으로 찌르는 사람들 복숭아로 가는
사람들 구덩이에 쪼그려 앉아 말한다. 그의 위로 복숭아나무
가 자랄 것이라고 만들 것이라고
아주 많은 복숭아를
(…)
불어나는 숲으로 가려지는 길 불어나는 숲으로 가로막힌
다 막힌 길의 끝에서 복숭아 하나 상해간다 복숭아 하나 상
해가며
무너진다 무너지며 쏟아지는 복숭아
아주 많은 복숭아
길의 끝이 비어 있다
그리고 다시
숲을 가로지르는
이번에는
- 방성인, 「복숭아로 가는 길」, 부분
방성인 시인의 「복숭아로 가는 길」에서 복숭아란 단어가 주는 느낌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복숭아란 무의미한 세계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처럼 ‘유일하고 거대한’ 복숭아들로 가득한 우리의 세계. 달고도 맛있는 복숭아는 일견 먹고사니즘과 더 많은 돈에 대한 당연하고도 평범한 욕구의 존재를 우리에게 기묘하게 비틀며 가리킨다. ‘숲을 빠져나오고 다음 숲으로 향하더라도’ 우리는 복숭아가 주는 달콤함과 쾌락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에. 그렇다면 “복숭아 없는 복숭아나무들이 모여 복숭아 없는 숲”이란 것은 사실상 우리의 세계 전체가 이미 ‘유일하고도 거대한’ 하나의 복숭아가 되어버렸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면 되물어보자. 과연 우리는 ‘유일하고도 거대한’ 또는 당연하고도 평범한 복숭아들인지 혹은 아닌지를.
균일하고도 단일한 욕구들이자 이데올로기이며 상징계적 질서가 마치 공기처럼 우리의 세계에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복숭아 그려진 팻말이 흐려지’더라도 끊없이 “불어나는 숲”과 같은 이 세계 속에서 어떤 이질성에 대한 욕망이 숨어 있다는 진실. 시인은 이를 이렇게 말한다. “막힌 길의 끝에 복숭아 하나 상해간다”. 당연한 욕구로 교환될 수 없는 ‘상한 복숭아’. 내 자신이 사실은 복숭아였다는 점을 손쉽게 부정하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한’ 이질적이고도 기묘하며 다른 ‘상한’ 복숭아가 되려는 마음. 이 같은 미묘한 차이를 생산하려는 욕망이 내재된 ‘상한 하나의 복숭아’는 복숭아들의 세계를 ‘무너트리고 쏟아’버릴 것이다. 시인은 안다. 이 정상적인 복숭아들의 욕구가 끊임없이 도달하고자 하는 길은 결국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다시/ 숲을 가로지르는/ 이번에는” 무언가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자 욕망하는 ‘하나의 상한 복숭아’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꽃의 대기」에서 이야기되는 “피어오르는/ 꽃의 대기에서/ 흐트러지는 꽃 충돌하는 꽃/ 충돌하며 만들어지는 꽃의 다발 사라지는 꽃의 다발 사라지는 꽃의 환희/ 꽃의 멜랑콜리 꽃의 비애 꽃의 회환/ 피고 지는 꽃 옆으로 피고지는 꽃”이란 것은 자연에 대한 단순한 표현일 리는 없다. 세계에 대한 절망이자 고통인 멜랑콜리를 품은 존재. 그리하여 ‘흐트러지고 충돌하여 만들어지며 사라지는 비애’란 것은 사실상 시인의 근본적인 무엇이자 ‘상한 것’으로 존재하려는 욕망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그것은 복숭아들만이 지배하는 이 세계 속에서 어떤 손쉽게 확언될 수 없는 기묘하고도 고유한 이질성을 기어이 형성하겠다는 존재론적 의미를 향해 있다. 요컨대 시인은 절망이란 방식을 통해서 자신의 언어가 지닌 가능성을 열어젖힐 수 있을 뿐이다.
어릴 적 배웠는데 분명
열심히 꼭꼭 씹어서 삼키면
소화된 것들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거름이 되어 밭을 가꾸고 나무를 키우고
집을 짓는다는데 왜 우리 집은
무너지기만 하고 밑 빠진 독처럼
다 흘려보내고 마는 걸까?
비가 내린다
흙벽이 씻겨 사라질지 아니면
비온 뒤에 오히려 단단해질지
알 수 없다 비가 얼마나 올지 모르니까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야 한다
멀리 하늘을 내다보다가
다시 걷는데
목이나 축이려 들여다본 못에
비친 나, 자세히 보니
민달팽이다.
- 안수현, 「굳은 살」, 부분
시인이 근본적으로 절망하는 자라면. 그렇다면 문제는 이 절망에 대한 인식을 통해 과연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를 따져봐야 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안수현 시인의 「굳은 살」은 이 측면에서 우리의 절망적인 세계 속에서 위치한 시인의 태도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손쉬운 절망도 손쉬운 희망도 아닌 무언가를 행하는 자로서 존속하기. 시 전체를 아우르는 “집을 이고 살아가는 족속”인 민달팽이의 이미지는 이와 직결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핵심은 이 집의 구체적인 형상 속에 담겨져 있는 시인의 욕망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겠다.
시인은 이를 다음처럼 말한다. “내 등 뒤에 있는 것은 흙벽이다/ 집 안에는 심장도 있고/ 그 박동 가까이 붙여둔 꿈도 있고/ 내가 먹은 삶들 사랑한 사람들 아껴둔 말들이 있고/ 구멍 나 비워둔 자리도 있고 일부러 남겨둔 자리도 있”다고. 규정될 수 없으며 언어의 표면으로는 정확하게 전달될 수 없는 희미한 마음이라고 칭해야 하는 영역들. 비록 “지붕은 올리지 못해서 비가 오면 그대로 다 맞는” 것처럼 초라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렇기에 버릴 수 없는 어떤 마음들이 여기에 있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처럼 나 역시도 그러한 마음들의 계보에 속한 존재라는 점 역시도.
하여 시인이 가진 집이자 나의 영역은 돈과 풍요로움만을 강제하는 우리의 정상적인 세계와 무관하게 존속하려 한다. 시인은 그러한 마음들의 계보에 ‘끌려갈’ 테고 그 세계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려 한다. 비록 “우리집은/ 무너지기만 하고 밑 빠진 독처럼/ 다 흘려보내고 마는” 것처럼 보일 뿐일지라도. 세계가 강제하고 동시에 보장하는 행복의 의미와 무관한 층위에서 머무르기. 당연하게도 우리의 세계는 이 마음의 이끌림 따위에게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화폐의 단위로 명확하게 환산될 수 없는 보이지 않고 확실하지 않은 무엇이니까. 이처럼 비가 내리는 세계 속에서 “흙벽이 씻겨 사라질지 아니면/ 비온 뒤에도 오히려 단단해질지/ 알 수 없”겠지만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야 한다”는 간절한 중얼거림. 이 처절한 마음을 지속해내겠다는 하나의 다짐으로서.
이것은 시인이 발견해낸 자신의 고유한 마음이자 욕망이기도 하다. 절망적이고 무가치한 세계 속에서 나에게로 이어지는 마음의 계보들을 이어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야 한다’는 의지일 것. 바로 그러한 마음과 나이며 “너와 내가 함께하는 미래가/ 오래도록 높이 길게 멀리 뻗어가기를.// 비로소/ 나는 홀씨가 되어 날아갈 궁리를” 꿈꾸는 자. 그러니 도처에 퍼져있는 “도저히 씹어삼켜지지 않을 만큼 큰 고민”(「룸메이트」)을 행하는 자는 결국 나의 친구이자 또 다른 내가 아닌가. 자신만의 세계이자 존재로서의 사유를 향한 시인의 마음이 이렇게 명확하다면 이 민달팽이의 걸음은 느리지만 진중하며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 기묘한 걸음이 절망적인 세계를 언젠가는 횡단하리라는 점 역시도 의심할 이유는 없다.
여기 또 하나의 절망을 대하는 고집스러운 태도가 있다. 이솔 시인의 「검은 돌, 악보, 가계」이다. 이 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들의 납득 가능한 연속성이나 인과관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무의미한 세계 속에서 내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가에 있다. “저는 매혹되었습니다”라는 돌출된 것처럼 보이는 문장은 그 때문에 의미심장하다. 우리의 무의미하며 동질적으로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기어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 시인의 언어는 그것을 잡아내려 한다. 그 순간의 ‘장면’들은 “언제든지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동네의 담벼락들은 꼭 저의 눈높이만큼 이어져있습니다 건너편에서 머리가 둥실둥실 떠가면 그걸 바라보기에도 좋고 무릎을 조금만 굽히면 숨기에도 적합하니 나쁘지 않습니다 담을 오른편에 둔채 계속 가다보면 큰 건물이 하나 있다고 하는데 바다에서 표류하던 그물을 걷어 올려 벽에다 걸어놓았다고 하네요 무슨 맛이 나는 해조류들이 매달려 있을까 싶기도 하고 아주 큰 거미가 허공에 떠서 여러 개의 눈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을 것 같아 되돌아가기로 합니다 담벼락에는 다양한 침 냄새가 진동하지만 멀리서 맡을 때는 향긋하거든요 일련번호도 없이 규칙도 없이 벽에 범벅되어 있는 저는 갑자기 벽에서 하나의 뚜렷한 얼굴이 솟아오를까 봐 무섭거든요
제 악보를 용서해주세요
이제 저는 정말로 배가 고파진 상태입니다 나를 부르는 그녀의 우중충한 목소리가 들리고 똑같이 생긴 문들은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축 처진 저것의 아랫부분을 밀고 나가볼가요 그녀가 주름진 입가를 힙겹게 끌어올리듯이 부드럽고 촘촘한 거미줄이 이마부터 뒷덜미 그리고 등을 스쳐지나갑니다 그녀가 쓰다듬어줄까요 그녀의 치마 안으로 들어가듯이 따듯한 바람 속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위의 시에서 어떤 명확한 서사를 확인해보는 것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중요한 부분은 시인이 느끼고 있는 일종의 세계감에 대한 알레고리일 것이다. “제 악보를 용서해주세요”란 갑자기 튀어나온 문장이 의미하는 것. 이는 시인이 우리의 세계와 어떤 방식으로든 어긋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핵심적이다. 시의 제목이 의미하듯 검은 돌과 악보와 나의 가계도는 모두 ‘거미’로 표상되는 그 따뜻해 보이는 세계와 무관할 따름이니까. 그러니 시인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가까이 있는 “담벼락에는 다양한 침 냄새가 진동하지만” 그것을 볼 수 없는 곳이자 “멀리서 맡을 때는 향긋”할 뿐이라고.
요컨대 “동네의 담벼락들은 꼭 저의 눈높이만큼 이어져있”듯 그리고 “무릎을 조금만 굽히면 숨기에도 적합”한 세계인 것. “건너편에서 머리가 둥실둥실 떠가면 그걸 바라보기에도 좋”은 나만의 영역과는 다른 “우중충한 목소리”이자 “똑같이 생긴 문들”의 구별하기 어려운 무한하고도 반복적인 세계. 이 무가치한 세계와 직결되어 있는 존재는 아마도 ‘여러 개의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아주 큰 거미’라 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거미에게 속박되어 있으면서도 대립하려는 자. 때로는 그 세계에 뒤섞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질성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자. 그것이 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나라는 존재가 아닐까.
하여 거미의 ‘부드럽고 촘촘한 거미줄은 나의 온 육체를 꼼꼼히 묶어두듯이’ 나를 통제하며 제어할 것이다. 그 따뜻해 보이는 속삭임의 말들은 말하자며 시인을 유혹하고 이 평면적 세계에 손쉽게 잠겨 들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 시에서 말해지지 않는 무엇들. 요컨대 “일련번호도 규칙도 없이 벽에 범벅되어 있는” 내가 진정으로 원해야 하는 것. 그것은 말하자면 “갑자기 벽에서 하나의 뚜렷한 얼굴이 솟아오”르는 어떤 고유한 순간이 아닐까. 짐짓 시인의 엄살처럼 ‘무섭다’라는 말은 그렇기에 큰 의미가 없다. 이 낯설고 이질적인 얼굴을 지닌 또 다른 나이자 진정한 나의 영역은 “매혹”적이자 낯설고 두려운 무언가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테니까. 이 존재들은 여러 개의 눈을 가진 거미의 ‘쓰다듬’이자 ‘따듯한 바람’과는 무관해야만 한다. 그러한 마음만이 ‘용서받을 필요가 없는 나만의 악보’이자 어떤 기묘함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려 한다. “빛을 찢으며/ 마지막으로 온 사람을/ 조급할 이유 없이/ 천천히 안아”보는 마음을 가지고 “이 순간 이라고 발음”하게 될 어떤 순간을 기다리면서. 여전히 “식물은 숨을 들이마시고/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차창으로 지나가는 배경이 되고/ 주먹이 책상을 내리”(「훔치고 싶은 것들이 있다」)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보려 하지 않는 “가난한 집의 문”의 이면 속에 있는 무언가들. 일종의 깊은 어둠이라고 해야 할 언어의 심연 속에 위치한 시인의 언어가 지닌 본질적 욕망. 그 끈질긴 태도이자 형상들은 ‘거미들’이 제공하는 따뜻하고 편안한 ‘치마폭’의 안락함으로부터 이탈할 한 가지 방법이기에.
3. 언어의 심연을 고통스럽게 사랑함으로
그러니 절망 앞에서 선 인간들의 무기는 어떤 점에서 언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우리의 세계이자 의미들로 가득 찬 언어의 표면이 아닌 오직 내가 구축하고 형성하며 존재시켜야 할 고유하고도 기묘한 언어의 심연. 시인의 무기이자 고통이며 동시에 깊숙하고도 알 수 없으며 명확하게 규정될 수 없는 존재여야만 하는 것. 그것만이 시인들에게 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시를 한 번 살펴보자.
안으로 자라나는 칼이었다. 안으로 자라나는 칼을 안고서. 맞서고 있었다. 어느 날 누군가의 눈빛이 누군가의 손짓이 팔을 들어 올리는 몸짓이 금속으로서. 움트기 시작했다. 경연하듯이. 자라나는 동작이 이어지고. 끝내 칼의 형상을 하게 되었을 때. 들어보고자 했으나 들 수 없었다. 어떤 장면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 한 사람을 이룬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베어야 가장 날카로운 상처를 가지는지. 무딘 날에 베인다면 낫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는지. 알게 되자 안으로 희디흰 날들이 쏟아진다. 길을 걸을때면 앞서가는 사람의 발소리에 맞추어 칼날이 흔들린다. 발돋움하며 머리카락 휘날리며. 몸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듣는다. 이 춤을 멈출 수가 없다. 죽지 않도록 파고들었다가 흐를 듯 녹아 고인 흰 날이. 뜨겁게 끓고 있을 때. 변해볼 마음이 있어? 그러자 흰 날은 냄비 안의 죽이 되어 끓어오르다 우묵한 그릇에 담겨 식탁 위에 올라와 있다. 먹어야 나아, 말하는 목소리가 되어 다시 하얗게 끓어오르는 것을 본다. 목소리가 강이 되어 흐르기 시작한다. 나를 베지 않는 쪽으로 날을 만들어볼 수 있을까요. 칼등 위로 걸어볼 수 있을까요. 칼이 나를 뚫고 나가, 무뎌진 채 멈춰 있다면.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아주 커다란 압정인가 봐요. 말하며 튀어나온 날에 시래기 같은 것을 걸어 말리고 있다.
- 박연, 「최선의 칼집」, 전문
박연 시인의 이 시는 또 어떠한가. “나는 어떤 방식으로 베여야 가장 날카로운 상처를 가지는지”라는 중얼거림에서 느껴지는 중요한 맥락은 시인이 두려워하지 않는 자라는 점에 있다. 물론 이는 상처가 고통스럽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은 시인은 절망 속으로 더욱 뛰어들고 그 고통을 섬세하게 느끼며 인식해야 한다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시인은 고통스러움과 두려움을 통해 형성되는 “안으로 자라나는 칼”이란 언어에 어떻게든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칼은 곧 나일 따름이니까.
흔히 생각해보듯 시인을 언어를 편하고 자유롭게만 사용하는 그러한 존재라고 여길 수는 없다. 손에 쉽게 잡히지 않는 시적인 것들의 희미한 형상. 그러니 “경연하듯이 자라나는 동작이 이어지고. 끝내 칼의 형상을 하게 되었을 때. 들어보고자 했으나 들 수 없었다.”는 것처럼 통제불가능한 언어들은 내 속에 위치한 내면의 칼로서 나를 상처 입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통과 상처 그리고 환희와 열광을 결코 구분하지 않는 나의 근본적 욕망일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알고 있다. 언어가 나에게 부여한 칼은 “몸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소리”이자 ‘멈출 수 없는 춤’과 같다는 것을. 하면 이 시인은 그러한 언어의 존재에 자신을 헌신하고자 하는 자가 아닐까. “안으로 자라는 칼을 안고서. 맞서고 있었다”는 철저한 고백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시인은 아프며 아파야만 하는 존재일 것이다. 이 측면에서 ‘최선의 칼집’이란 시의 제목은 언어라는 칼을 담고 있는 자기 자신이자 되어야만 하는 최대한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냄비 안의 죽’이자 ‘하얗게 끓어 오르는 목소리의 강’으로 무한히 분열되고 파편화되는 그러나 오직 나라는 존재의 고통이자 숙명을 담아낼 언어를 어떻게든 붙잡아내고 형성하기. 손쉽고도 무게를 느낄 수 없는 언어가 아닌 언어의 심연이자 고통을 그리고 칼날 위에 선 샤먼처럼 자신의 존재를 걸고 투쟁한다는 것. 사람들은 그것을 “아주 커다란 압정”으로 오독하면서 시래기를 말리겠지만 그와 무관하게 나는 나의 언어를 존재케 하겠다는 것.
이는 한 시인으로서 세계에 대한 절망과 동시에 나의 존재를 형성하고자 하는 하나의 고유한 욕망인 셈이다. 그것은 「도움받기」에서도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동물에겐 끝없는 온기가 필요한” 이 세계 속에서 “배의 어둠에 관해 상상”하면서 그 어떤 언어도 손쉽고 자유롭게 다루지 않겠다는 의지. 시인은 나의 절망 속에서 생성된 언어라는 날카로운 칼이 사실은 나 이상의 무언가라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배의 안쪽에 작은 배들이 살고 있다면. 단 하나의 배를 환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언어의 무한한 분열과 나누어짐을 오롯이 지켜보려는 자. 하여 ‘온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열기를 식히며’ 우리의 세계 속에서 ‘초파리가 몰려드는 무른 배’이자 썩어가는 자로서 기어이 존재하겠다는 욕망. 이 역시도 세계를 철저하게 부정하면서 동시에 나의 기묘한 고유성만을 긍정하고 탐구하려는 시인의 존재방식일 것이다.
유키는 미움받아도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만 있다면 여기가 지옥이래도 두렵지 않았다
원래 지옥 같은 거 두려워한 적도 없긴 하지만
유키는
파랗다
선생님, 이게 병이 하는 생각이라면서요 그럼 병이 없어진 나는 뭐가 될 수 있어요?
유키는 유키를 긍정할 수 없고
건강에 있어선 모든 방면으로 분주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게으르고
증상이란 건 너무 무섭고
무서움이 커지면 유키는 축소되고
파란 가슴만이 자기를 키운다고 믿고
헛것 같은 사랑에 빠져 즐겁다가도
반투명한 창을 통해 흐물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는
한 걸음, 두 걸음 물러나다 보니
걷잡을 수 없이 멀리 와버린
유키는
정말이지 파랗다
의지도 없이 여기 머무르고 있다
가깝게 사랑하며
- 백아온, 「사랑을 담아, 유키가」, 부분
백아온 시인의 시에서 느껴지는 바를 말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정말이지 파랗다’라는 것에 대한 간절한 욕망이다. 그러나 이것을 일반적인 이성애적 ‘사랑’으로 이해할 필요는 당연히 없겠다. 왜냐하면 시인이 “우리는 자기 파괴적인 사람들이라서 자기 파괴적인 유키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기파괴’적인 기묘하고도 이해되기 어려운 유키의 사랑은 어떤 측면에서 시인 자신의 존재를 의미한다고 해야 한다. 즉 “유키는 자기가 사람으로 태어나 딱 하나 재능이 있다면/ 그건 아무나 사랑해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모두들 사랑해요”라는 문장은 가리키는 바는 유의미하다. ‘사람으로서 지니는 딱 하나의 재능이 아무나 사랑해버리는 일’이라는 유키는 말하자면 일종의 시인됨이란 존재가 아닐까. 나 이외의 다른 모든 타자들이자 언어의 심연에 가닿고자 하는 사랑의 욕망을 지닌 고유한 형상으로서.
시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욕망은 정상적인 세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저 무의미하고 ‘병든’ 존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계는 말하자면 이해될 수 없는 유키를 규정하려고만 한다. ‘평생 가볍고 간단해지길 바라는’ 유키의 존재는 그저 “발직한 여자애”로서만 판단될 뿐. 그 세계의 존재방식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자가 유키에 대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심리치료사일 것이다. 달팽이에 대해 ‘눈이 붉어지고 마음이 아프며 지금 몹시 슬프군요 그랬다고 달팽이를 밟으면 됩니까?’라고 질문하는 자. 그리하여 이 ‘병든’ 유키를 “유키씨 정말 끔찍한 사람이군요”라면서 규정하고 치료하여 정상화시키려는 자. 따라서 유키의 시선이 이러한 정상적이고도 당연한 세계 바깥을 향해 있다는 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만일 이 정상성으로부터 단 하나의 예외조차 없는 ‘여기’가 “지옥”이라면. 우리의 ‘여기’가 타자이자 언어의 심연이 무엇인지조차 인식할 필요조차 없고 인식하려는 생각조차 없는 플랫한 세계라면. 유키는 ‘정말이지 파랗다’는 자신만의 고유한 사랑이자 욕망을 통해 우리들의 무의미한 세계를 거부할 것이다. “원래 지옥 같은 거 두려워한 적도 없”으며 “그럼 병이 없어진 나는 뭐가 될 수 있어요?”라고 천진난만하게 묻는 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모두가 이 플랫한 지옥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 기억해두자. 그 지배하에서 “유키는 유키를 긍정할 수 없고/ (…)/ 무서움이 커지면 유키는 축소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적으로 “파란 가슴만이 자기를 키운다고 믿고/ 헛것 같은 사랑에 빠져 즐”거울 존재일 따름이다.
오직 ‘파란 가슴’만을 믿으며 ‘헛것 같은 사랑’에 빠져 즐거울 수 있는 자. 우리의 정상적이고도 당연한 “반투명한 창을 통해 흐물거리는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이탈해 있는 자. 그리하여 ‘걷잡을 수 없이 멀리 가버리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자. 이것이 시인이 유키라는 자신의 분신적 존재에게 근본적으로 부여하고 있는 진정한 욕망일 것이다. 먹고사니즘으로 통칭되는 정상적이고 당연한 ‘의지 없이’ 타자들과 언어들의 심연이란 욕망 속에서만 ‘머무르기’. 그렇다면 유키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인 것이 아닐까. 모든 보이지 않고 명명되지 않는 영역들을 “가깝게 사랑하”는 존재로서 말이다.
그러니 이 욕망하는 자는 ‘엉뚱한 슬픔이 차오르는’ 마음을 끝까지 지니려 할 것이다. ‘길고 게으른 문제’이자 어떻게든 ‘오래 살자’는 대화를 간직한 채. “언젠가 온 세상의 슬픔을 다 껴안으며 죽”기를 진정으로 원하고 욕망한다는 것. 들리지 않는 “거대한 지구의 울음”을 듣고 “엉뚱한 슬픔”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며 그 “울음의 밑바닥에서는 하나의 지층”을 기어이 만들어내려는 존재. 그런 시적인 인간의 형상이란 “상자를 열면 단숨에 사라질 것 같”은 존재들을 소중히 품으면서 이 타자이자 언어의 심연에게 “한 움쿰 포도 씨 뿌리고/죽지마 /목소리를 보태어 주”(「자처하는 사람」)는 간절한 욕망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는 시인이 지닌 기묘하고도 고유한 사랑의 본질적 형상이기도 하다.
김사라 시인의 시에서 느껴지는 난폭한 언어의 양상과 그 이면에 느껴지는 멜랑콜리의 감각은 강렬하다. 이 위력적인 언어의 형상은 언어의 표면이자 지시이며 의미와 별다른 상관이 없다는 점 역시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 고유한 언어의 형상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시의 언어에 접근할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언어의 파괴적이고 분열적으로 보이는 양태 그 자체가 아니다. 즉 “나는 제대로 말하고 싶고, 도저히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ainsi soit – ELLE」)라는 찢어진 육체이자 모순적 형상들이 구축하는 미로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를 따져보는 것이 핵심적이다. 왜 시인은 시적인 것을 위해 “가슴이 다시 뛰게 된다면 이번엔 정말 찔러 죽이는 수밖에 없는 거겠지”라는 기묘한 알레고리적 언어를 구축하려 하는 것일까.
(…) 당신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고상하군. 다리 사이로 끊어진 기타줄 소리가 울려. 우울한 미나. 가난한 미나. 싸우지 않았던 미나. 믿을 수 없다. 그는 연필로 칼 깎는 법을 알려주었다. 보랏빛 나사와 재단된 나무들이 가득했던 곳. 손으로 쥐는 것부터 배웠다. 부동산에 연락해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오후에는 봤던 것 중 가장 더러운 집을 보았고 거기 살던 여자는 반갑게 문을 열어주었네. 그녀는 방 가운데에 달콤한 간식이 든 멋진 상자를 가지고 있었고 내 손이 그쪽을 향할 때마다 자기 머리칼을 두 손으로 쥐어뜯었다. 줄 때까지 기다려. 여자의 뱃속에서 미끼가 쿵쾅대며 숨을 쉬었다. 자두만 한 동공을 벌렁대면서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었지. 이유 없이 슬픈 밤을 보낸 난쟁이를 위한 철제문. 신고하지 않은 여름이 있었다. 일을 마치면 매일 같은 곳으로 국수를 먹으러 갔지. 그런 옷을 입고. 그런 머리를 하고. 혼자 맨드라니 줄을 서다 안으로 들어가 등을 등지고 앉았다. 맛이 변해도 몇 번이나 더 믿어주었다. 그러는 동안 알던 맛의 국물이 간절해진 겨울이 왔어도. 징계가 결정되고 술을 몇 병 사고 검은색 깃털 목도리를 탁자 위에 풀어둔 날 그걸 고양이로 여겨 입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지르던 여자를 만났지. 난 눈을 꼭 감고. 정말이지. 그거면 됐어. 포근했던 교차로의 눈밭. 믿을 수 없다. 그 모든 일을 했던 게 나라는 사실을.
약속! 미나. 눈앞에서 사라져 줄게. 아아. 약속합니다. 다시는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배웅하러 나가는 내 다리를. 당신 머리보다 더러운 망치로 내려쳐 다 자란 가지처럼 늘어뜨려 놓았다. 믿을 수 없다. 대화가 끝났으면 살던 곳을 떠나야 하겠지. 난 살살 녹여 먹어도 악다구니를 써. 못쓰게 됐어. 지난밤이 낯부끄러워 울지도 못하고 멀거니 서 있는 저 애를 위해 얼굴을 뜯어버리고 있어. 이러다가 가슴이 다시 뛰게 된다면 이번엔 정말 찔러 죽이는 수밖에 없는 거겠지.
- 김사라, 「기분파 미나 제이코」, 부분
이 시에서 우리가 이해해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시 속에 등장하는 표현처럼 “모든 일을 했던 게 나라는 사실”은 어떤 점에서 확연하다는 것. 즉 이 시속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들이 또한 시인이며 시인의 욕망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그렇게 본다면 폭력적으로 보이는 시인의 언어가 공격하는 것은 자기 자신 속에 내재된 모순성 그 자체이며 동시에 시인의 ‘나쁜 행실’을 비난하는 남성들이 구축한 우리의 세계이기도 하다. 요컨대 시인의 존재는 ‘나쁜 행실’을 행하며 “나도 모르게 새 생각에 잠”길 수 있어야 하는 기묘하게 슬프며 그렇기에 고독한 자이다. 이 세계가 보려 하지 않고 알고자 하는 생각조차 없는 “버러지 같은 고통”의 존재를 묻고 기억하며 떠올리며 자신의 육체로 받아들이려는 자. 그 고통 속에서 모순되고도 찢겨져 있으며 웅얼거리는 발화들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우선 확인해보자. “미나. 어째서 입 맞출 때 날 보지 않지?”라고 말하는 세계의 시선이 얼마나 당연하고도 폭력적인가를. ‘살아 있는게 너무 징그러운’ 것과 같은 폭력의 정상성과 당연함. 그러한 세계의 영역 속에 놓여있는 나의 존재는 말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고’ 널부러져 있다. “따가워. 따가워. 숨이 차서 괴로워하며.” “깨물지 마!”라는 표현처럼 이 시속에서 등장하는 남성이자 세계의 언어는 단지 명령하려고만 한다. 그러한 억압적인 규정과 판단의 결과란 “당신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고상하군.”이라는 비웃음과 더불어 자신이 듣지 못하는 “다리 사이로 끊어진 기타줄 소리가 울려”라는 이해할 수 없음이란 반응일 뿐. 그러니 ‘기분파’인 미나는 “우울한 미나. 가난한 미나. 싸우지 않았던 미나.”처럼 보일 것이다. 그들은 우울함과 가난함과 싸우지 않음의 이면 속에 무엇이 존재하는 것인가를 알려 하지 않는다.
동시에 더욱 문제인 부분은 이 남성이자 세계의 폭력성이 모순적이게도 내 안에 이미 새겨져 있으며 아주 철저하고 당연하게 작동하려는 하나의 질서이자 체계로 자리잡혀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시의 중간에 등장하는 “가장 더러운 집”의 여자를 고려해보자. 모순되고 찢겨져 있는 “나를 쳐다보려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이 여자는 또 다른 나이지만 동시에 남성과 세계에 침윤되어버린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명령한다. “자두만 한 동공을 벌렁대면서” 그리고 “줄 때까지 기다려”라고 말하는 또 다른 나. 이 분열된 나들의 모습은 유의미하다. 왜냐하면 이 또 다른 나의 존재의 형상은 남성이자 세계의 규칙이자 법칙이 마치 공기처럼 당연하게 우리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타자이지만 남성에 의해 지배받으며 동시에 여성일 수밖에 없는 모순성의 기묘하고도 복합적인 중첩. 그러니 시인이 드러내려고 하는 “우울한 미나. 가난한 미나. 싸우지 않았던 미나.”의 입은 ‘찢어져’ 있을 수밖에. “그런 옷을 입고 그런 머리를 하고. 혼자 맨드라니 줄을 서다 안으로 들어가 등을 등지고 앉”아 있는 것처럼. 이러한 미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지점. 그것은 남성이자 세계에 침윤되어버린 또 다른 내가 아닌 진정한 나를 인식하는 것이다. 시인은 말한다. “검은색 깃털 목도리를 탁자 위에 풀어둔 날 그걸 고양이로 여겨 입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지르던 여자를 만났”다고 말이다. 당연하고도 정상적이며 억압됨을 모르는 그러한 현실 속의 내가 아니라 ‘입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지르는 여자’가 되려는 ‘나쁜 행실’이자 기이한 변신술적 욕망. 또 다른 나이자 진정한 내가 ‘교차’하는 길 위에서 “믿을 수 없다. 그 모든 일을 했던 게 나라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는 진실만이 오직 나를 고유하게 형성해내는 방법일 따름이다.
그 강력한 의지이자 나를 존재케 하는 결정적 욕망인 것. 이것만이 남성이자 세계의 존재를 파괴시킬 수 있다. “아아. 약속합니다. 다시는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라는 남성들이자 세계를 가볍게 무시해버리면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대화가 끝났으면 살던 곳을 떠나야” 한다고. “지난밤이 낯부끄러워 울지도 못하고 멀거니 서 있는” 또 다른 나를 위해 무언가를 발화하기. 오직 그것만이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한다는 것. 보이지 않는 타자이자 억업된 모든 것을 위해 나의 언어가 존재해야 한다는 마음. 그 굳건한 언어의 욕망으로 인해 “가슴이 다시 뛰게 된다면 이번엔 정말” 남성들이자 세계인 그 당연한 모든 것들을 “이번엔 정말 찔러 죽이는 수밖에 없”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시인이 바라보는 우리들이자 남성들의 세계는 그저 ‘돼지 같은 바보들’이자 “술맛 떨어지는 계절”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세계 속에서 “도저히 말하고 싶지 않”기에 모든 것을 “제대로 말하고 싶”다는 일종의 모순적인 분노. “잘린 성기가 든 포르말린 유리병”처럼 박제되어버린 또 다른 나의 목소리를 진정으로 듣고 발화하려는 시적인 것에 대한 고유한 욕망. 그 의지를 알아챌 수 없는 남성이자 세계는 언제나 ‘소문이라는 소문’을 흩뿌리겠지만 그럼에도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으나 다가가니 수 천개로 갈라지고 있”는 무수한 나들의 발화들을 품어 안으며 ‘이토록 분명한 예감’을 감각하려는 자. 이것이 자신의 육체를 “당신 머리보다 더러운 망치로 내려쳐 다 자란 가지처럼 늘어뜨”리는 시인이 품고 있는 분열증적 언어의 파괴적 원천일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인식 바깥에서 ‘내가 보고 싶은 공동묘지 쓰레기통에 처박혀 딸기처럼 부푸는 죽은 꽃다발’(「ainsi soit – ELLE」)이란 언어의 심연이자 시적인 것은 알아듣지 못할 기묘한 목소리로 발화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들의 세계와 고유하게 무관하도록.
4. 단지 자유를 향한 욕망과 의지로서
앞서 지적해두었듯 지금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는 시인들에 대한 말들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 글은 그저 한 개인의 아주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독해일 뿐이니까. 그러나 한 가지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은 왜 쓰고자 하는가에 대한 젊은 시인들의 마음이었다. 고유하고도 기묘하여 그러하여 수수께끼와 같은 언어의 미궁을 만들어내려는 욕망의 원천. 언어의 표면이자 규정하고 판단하려는 모든 것들에 대한 투쟁. 우리의 당연하고도 정상적인 세계로부터 이탈하고 도래할 언어의 심연을 어떻게든 형성해나가야 한다는 의지. 그러니 우리는 시라는 규칙과 시인이란 이름과 정의와는 무관해야 한다. 그것들은 모두 시적인 것이자 시의 본질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에. 시적인 것이란 오직 언어의 표면을 정지시키고 파괴할 때 그 심연 속의 거대한 꿈틀거림과 함께 도래하게 된다는 점만은 ‘자명’해 보인다.
필요한 것은 규정과 판단이란 명령이 아닌 모든 방식으로 허용되어야 하는 자유로움이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엇일 따름이다. 단순한 허명이 아닌 시인됨이란 실존적 영역 속에서 이는 나이의 문제도 등단 여부와 시기의 문제도 어떤 위치에 내가 있는가의 문제도 아니다. 하여 쓸데없는 첨언을 굳이 덧붙여 보고 싶다. 언젠가 오래도록 눈길이 머물렀던 푸코의 문장을 말이다. “나는 당신들이 노리고 있는 그곳에 있지 않다. (…)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라. 나에게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으라고 요구하지도 말라. 이것이 나의 도덕이다. 이것이 내 신분증명서의 원칙이다. 쓴다는 것이 필요할 때,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지식의 고고학』) 그렇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오직 쓴다는 욕망이자 의지이며 그로부터 가능할 자유일 뿐이다. 시라고 부르는 이 기묘하고도 고유한 실존의 형식은 바로 그것을 위해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추천 콘텐츠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고봉준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와 양안다의 사이, 그 틈 류수연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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