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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월간 현대시 | 2024년 8월호(제416호)

모티프, 인유, 몽타주, 알레고리 — 신동옥 시의 미학적 방법론 (하)

오형엽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 비평전문 계간지 [현대비평] 주간. 시전문 월간지 [현대시] 주간. 1994년 『현대시』신인추천작품상 당선,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했음. 평론집으로 『신체와 문체』(문학과지성사, 2001), 『주름과 기억』(작가, 2004), 『환상과 실재』(문학과지성사, 2012), 『알레고리와 숭고』(문학과지성사, 2021) 등이 있고, 연구서로 『한국 근대시와 시론의 구조적 연구』(태학사, 1999), 『현대시의 지형과 맥락』(작가, 2004), 『현대문학의 구조와 계보』(작가, 2010), 『문학과 수사학』(소명출판, 2011), 『한국 모더니즘 시의 반복과 변주』(소명출판, 2015)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이성의 수사학』(고려대출판부, 2001)이 있다. 제3회 젊은 평론가상(2002), 제6회 애지문학상 평론부문(2008), 제21회 편운문학상 평론부문(2011), 제24회 김달진문학상 평론부문(2013), 제32회 팔봉비평문학상(2021) 등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3. ‘저항군의 모티프, 대결과 패배의 충돌, 인유-몽타주-알레고리

 

신동옥 시의 중요 모티프들 중에서 둘째 유형별 사례로서 저항군(Résistance)모티프는 기본적으로 전투적 은유가 생활적 은유와 연계하지만, 더 나아가 정치적 은유, 연애적 은유, 종교적 은유, 존재적 은유, 가족적 은유 등 복수의 은유들과 연계하면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 맥락을 형상화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신동옥 시에서 /회개의 모티프가 복수의 은유적 연계의 내적 메커니즘으로 작용하는 인유-몽타주-알레고리의 기법적 방법론이 출발하는 유형이라면, ‘저항군모티프는 이 기법적 방법론이 가장 중층적으로 형상화되는 유형이라고 생각한다. 신동옥의 시에서 이 모티프 유형에 속하는 시적 주체는 척후병, 파수병, 저격수, 낙오병 등의 모습으로 곳곳에 등장하는데, 이들을 묶어주는 공통분모 혹은 대표 격에 해당하는 것은 어떤 힘이나 조건에 굽히지 않고 끝까지 거역하거나 버티는 군인을 의미하는 저항군이라고 볼 수 있다.

신동옥의 시에서 저항군모티프를 집중적으로 형상화하는 부분은 세 번째 시집 고래가 되는 꿈2부를 구성하는 23편의 비트연작시이다. 우선 출발점인 비트 1」을 살펴보자.

 

여자아이들의 숨바꼭질 놀이/ 털이 무성한 목덜미를 가진 사냥감을 쫓는  강아지/ 엄마가 손 갈퀴로 파낸 들판을 말없이 질주하던 물소떼/ 야전 침상 아래서 아빠의 작전 수첩을 물고 달아나는 고양이/ 언덕 너머 바다에서 나온 말 없는 물고기/ 어딘가로 끝없이 뻗은 오솔길이 숨긴 깊고 아득한 참호들/ 숲에서 깃을 치며 나오는 발 없는 새떼……

 

한때 우리는 같은 상처의 다른 흉터를 응시했다.

출구가 없는 터널 속으로 들어가 그대로 주저앉고는

빠져나올 길을 영영 잃어버려서

거기다 집을 짓고 산다, 파국이라는 비밀 아지트 속에서

접선할 방법을 영영 잊어버려서

 

흉터는 신비한 담장이 되어 비트를 구획했다.

우리는 꼭꼭 숨어서 침묵으로 저항했다.

지속 가능한 혁명은 없다.

사랑과 암시의 역사가 쓰이는 방식,

모든 것들은 가능할 때까지만 지속된다.

지속하는 매 순간 불가능으로 한 발짝씩 다가선다는 것을.

 

밤낮없이 비트 속에 갇혀서 비로소 하나가 되었지만

어딘가에서 불을 지피고 어딘가에선 얼음이 언다.

사주경계하던 눈길을 흩어 그을음을 닦아내고

유리창 너머를 볼 때의 아릿한 표정들

 

언젠가 우리는 같은 상처의 다른 흉터를 응시했다. 이제 더 이상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 생긴 피딱지에 십자가 표식을 남기고는

다른 상처에 같은 처방을 쓴다,

언젠가 네 상처가 내 것보다 깊어 아렸다는 걸 가르쳐주려고.

― 「으로 지을 수 있는 모든 것- 비트 1」 전문(3 : 86~87)

 

이 시는 비트연작시의 발생론적 연유 및 경과를 유추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신동옥 시에서 복수의 은유적 연계의 내적 메커니즘이 중층적으로 형상화되는 경위를 암시하는 점에서도 중요한 작품이다. 작품의 전체적 구조는 크게 초반부(1), 중반부(2~3), 후반부(4~5)로 구성되는데, 초반부는 단편적 이미지들이 나열되는 반면 중반부 이후에는 시적 화자의 내적 발화가 중심을 이루며 진행된다. 시상 전개를 살펴보면 초반부는 비트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양상을 제시하고, 중반부는 그것이 만들어져서 우리같은 상처의 다른 흉터를 응시하는 상황을 제시하며, 후반부는 그 속에서 우리하나가 되었지만 얼음이 공존하고 다른 상처에 같은 처방을쓰는 상황을 제시한다. 요약하면 비트의 전단계(초반부), ‘비트의 형성 단계(중반부), ‘비트의 전환 단계(후반부)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초반부(1)는 표면적으로 가정의 일상사와 자연의 풍경을 단편적 이미지의 나열을 통해 제시하는 듯하다. 그런데 파편적 이미지들을 병치하는 가운데 언캐니uncanny하거나 그로테스크grotesque한 이미지가 돌출하면서 가정의 일상사와 자연의 풍경 사이에 발생하는 균열을 노출시킨다. “여자아이들의 숨바꼭질 놀이는 일상적 모습이지만 털이 무성한 목덜미를 가진 사냥감을 쫓는 강아지는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동물성이 은밀히 노출한다. “엄마가 손 갈퀴로 파낸 들판을 말없이 질주하던 물소떼는 일상 속에 파고든 동물성이 광범위한 들판으로 확대되면서 야수성을 드러내고, “야전 침상 아래서 아빠의 작전 수첩을 물고 달아나는 고양이는 일상의 사건이 야전 침상작전 수첩으로 표상되는 전투적 상황으로 이어진다. “언덕 너머 바다에서 나온 말 없는 물고기는 근경에서 원경으로의 공간적 전위를 통해 바다말 없는 물고기를 등장시키고, “끝없이 뻗은 오솔길이 숨긴 깊고 아득한 참호들은 자연의 풍경을 따라가다가 은폐된 깊고 아득한 참호들을 발견하며, “숲에서 깃을 치며 나오는 발 없는 새떼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노출시켜 어떤 결핍이나 결락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초반부에 제시되는 파편적 이미지들의 병치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을 주제 및 기법의 측면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제의 측면에서 가정의 일상사와 자연의 풍경 속에 은폐된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와 승패를 걸고 투쟁하는 전쟁 세계를 탈은폐시킨다. 기법의 측면에서 언캐니하거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노출시키고 파편적 이미지들간의 충돌과 연결을 통해 충격 효과를 발생시키는 몽타주를 구사한다. 중요한 부분은 이러한 특성을 가지는 초반부가 중반부(2~3) 이후에 비약적으로 도약하는 토대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중반부 이후에 등장하는 비밀 아지트의 약자인 비트는 군사 용어로서 간첩·게릴라 등의 은밀한 활동을 하는 사람이 숨어지내는 곳을 의미한다. 중반부와 후반부는 크게 볼 때 상처”, “흉터”, “침묵등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비트내부의 상황 및 우리의 관계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연속선에 있다. 중반부 2연의 시작 부분인 한때 우리는 같은 상처의 다른 흉터를 응시했다.”라는 문장은 초반부(1)를 토대로 도약하면서 중반부 이후 전개되는 비트내부의 상황을 견인한다. 이 문장이 가지는 표면 장력은 후반부까지 유지되면서 비트의 양상을 강하게 암시한다. ‘로 구성되는 우리같은 상처의 다른 흉터를 응시하는 것은 동일한 아픔과 고통을 가지지만 상호 교류하지 못하고 고립된 채 주시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비밀 아지트출구가 없는 터널 속”, “빠져나올 길을 영영 잃어버, “파국”, “접선할 방법을 영영 잊어버림 등으로 설명되는 이유는 이러한 폐쇄적 단절의 속성에서 기인한다.

화자는 3연에서 폐쇄적 단절성을 기초로 비트를 만드는 과정과 그 속성을 진술한다. “흉터신비한 담장이 되어 비트를 구획하는 것은 아픔과 고통을 원천 재료로 삼아 비트를 만든다는 의미이고, “꼭꼭 숨어서 침묵으로 저항하는 것은 폐쇄적 단절성을 무기로 삼아 끝까지 굽히지 않고 버틴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비트가 전투적 은유뿐만 아니라 다른 복수의 은유와 연계하면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 맥락을 형상화한다는 점이다. “비트는 기본적으로 전투적 은유를 함축할 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한 혁명은 없다.”에서 정치적 은유와 연계하고, “사랑과 암시의 역사가 쓰이는 방식에서 연애적 은유와도 연계하면서 중층적인 의미 맥락을 형성한다. 이 세 가지 층위의 은유가 중첩하면서 의미 맥락을 수렴하고 결집하는 내밀한 과정을 밟아서 모든 것들은 가능할 때까지만 지속된다./ 지속하는 매 순간 불가능으로 한 발짝씩 다가선다라는 문장에 도달한다. 따라서 필자는 3연의 시상 전개에 숨어 있는 미학적 방법론을 복수의 은유적 층위를 상호 충돌시키고 연결시켜 충격 효과를 얻어내는 몽타주라고 간주하고자 한다. 결국 이 시는 초반부(1)에서 언캐니하거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중심으로 파편적 이미지들간의 충돌과 연결을 통해 몽타주를 구사하고, 중반부(2~3)에서는 복수의 은유적 층위를 상호 충돌시키고 연결시키는 다른 결의 몽타주를 구사하는 방식으로 이중의 몽타주 기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후반부 4연에서는 밤낮없이 비트 속에 갇혀서 비로소 하나가 되우리를 통해 폐쇄적 단절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어딘가에 불을 지피고 어딘가에선 얼음이 언다에서 얼음의 대립적 이미지가 전투적 상황 및 연애적 관계라는 양 측면에서 모순의 공존이라는 의미 맥락을 형성한다. 이어지는 문장도 유리창을 중심으로 사주경계상처나 살갗 등이 찌르는 듯이 아프다라는 뜻을 가지는 아릿한” “표정들을 연결시켜 전투적 은유와 연애적 은유를 중첩하면서 상처와 고통이 유지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5연의 언젠가 우리는 같은 상처의 다른 흉터를 응시했다라는 문장은 2연의 문장을 반복하면서 상황의 지속을 드러내지만, “이제 더 이상이후의 표현은 변화된 현재적 존재 방식을 제시한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 생긴 피딱지에 십자가 표식을 남기고는/ 다른 상처에 같은 처방을 쓴다에서는 폐쇄적 고립을 유지하면서 상흔에 십자가 표식으로 암시되는 종교적 은유를 개입시키고 상이한 아픔과 고통을 가지지만 동일한 치료법을 시도한다. ‘전투적 은유에서 출발한 이 시의 비트3연에서 정치적 은유연애적 은유와 연계되고 5연에 이르러 종교적 은유와도 연계되면서 보다 중층적인 의미 맥락을 형성하는 것이다.

 

나는 작전에서 소외되어 버림받고 우중충한 북벽에 숨었다. 나는 폭격으로 무너진 담장 위에 놓인 꽃병을 보며 벽을 긁는다. 벽에 앉은 그을음을 손톱으로 긁어가며 마지막 편지를 쓴다. 코털에 휘감기는 매케한 화약 냄새 속에서 묘비명이 적힌다. 나는 지금 당신이었고 당신은 지금의 내가 될 것입니다. 성모여, 고상함과 수치와 극기와 짐승은 모조리 악마에게 돌리시고 제게는 아내를 주소서. 지평선까지 무한한 폐허가 펼치는 지도가 사방을 에워싼다. 검은 옷을 입은 노파는 딱딱한 빵 바구니를 안고 잠들었다. 잠든 귓구멍에서 빵 조각을 빼물고 까마귀떼가 날아오른다. 소개된 거리 끝에서 고양이 떼가 잘린 손가락을 물고 흩어진다. 두 동강이 난 아치형 목조 다리 아래에서 뗏목은 매듭을 풀고 토막토막 분해된다. 강물 위로 누렇게 바랜 백기가 죽은 태아를 안고 떠내려간다.

 

이것은 데자뷔다. 오늘은 이렇게 끝날지도 모른다. 거대한 웅덩이가 푹푹 파인 전선의 북쪽 목축지에서 낙오와 항복은 나의 작은 비밀이 될 테지. 나는 버림받고 너절한 작전지도 속에 숨는다. 다리 너머로 얕은 습지가 펼쳐진다. 억새가 비로드처럼 반짝인다. 그 끝에 얕은 산악 지대가 가로막는다. 조각난 무릎뼈를 맞추는 소리가 아득하게 울린다. 나는 낙오했고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폐허가 된 목축지 뿌연 잿빛 속에, 건초 더미가 날아올라 목책에 널린다. 고막이 터져서 침묵 속에 날뛰는 말과 염소들이 무사히 가을의 정적 속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고요한 채벌장 위로 별이 차오른다. 나는 낙오했고 나는 내 슬픔을 구속한다. 성모여 대지를 눈으로 덮어주시고 제게는 아내를 주소서.

 

나는 아버지의 이불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배를 가득 채운 하얀 쌀벌레들, 쏟아져 나오는 벌레들의 틈바구니에서 그해 첫눈은 다른 해에 비해 일렀다. 그해 첫눈 속에 붉은 새가 날아오르더니 아버지의 북벽에 앉았다. 새는 날아올라 아버지의 정원을 붉게 물들이겠지. 나는 북벽에 남아 그을음을 긁어내 눈물로 강을 만들고, 강물에 백기를 눈처럼 흘려보내며 증오를 보태겠지. 정원수 아래로 아이들의 다리뼈를 조각조각 흘려보내며 끝까지 이곳에 남아서 나는 볼 테다. 초롱불과 화덕이 거적에 싸인 무릎을 덥힐 때, 비문(飛蚊)처럼 춤추는 열기의 선들, 나는 어머니를 아버지의 이불 위에 누이고 그 곁에 씨를 뿌릴 것이다. 눈뜨는 새싹에 대고 성호를 그을 것이다.

 

목초지의 끝으로 서리와 눈으로 뒤덮인 나무들이 행군한다. 목책을 따라 한 차례 폭격이 지나간다. 강가에 버짐처럼 불꽃이 번진다. 무한의 정적 속에서 캐터필러가 전진하는 것 같다. 작전지도에 낙오와 항복은 그릇된 일이라고 적혔다. 그릇된 일이 아니라 너무나 강렬하기에 금지한 것이다. 내게는 다른 방법이 없다. 내가 낙오한 것은 애초에 잘못된 일이 아니다. 나는 이곳에 수천 번은 왔다. 이것은 데자뷔다. 모든 것은 반복된다.

― 「종생기- 비트 3」전문(3 : 90~92)

 

이 시는 비트연작시 중에서 저항군모티프가 전투적 은유를 기반으로 존재적 은유, 연애적 은유, 종교적 은유, 가족적 은유 등 복수의 은유들과 연계하면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 맥락을 형상화하는 작품이다. 먼저 1연을 세밀하게 분석해 보자.

시적 주체는 작전에서 소외되어 버림받고 우중충한 북벽에 숨낙오병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폭격으로 무너진 담장벽에 앉은 그을음을 손톱으로 긁어가며 마지막 편지를쓰는 화자의 모습은 매캐한 화약 냄새 속에서 묘비명이 적히는 상황으로 급진전된다. “마지막 편지묘비명으로 이동하는 순간적 과정은 주체의 폐쇄적 고립이 극한 상황에서 죽음에 도달하는 비약적 전개를 보여준다. 이 도약의 내부에는 저항군모티프가 전투적 은유에서 출발하여 존재적 은유, 연애적 은유, 종교적 은유, 가족적 은유 등으로 전이되는 과정이 응축되어 있다. 화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나는 지금 당신이었고 당신은 지금의 내가 될 것입니다.”라는 존재적 각성 및 연애적 감응에 이르고, 곧바로 성모여, 고상함과 수치와 극기와 짐승은 모조리 악마에게 돌리시고 제게는 아내를 주소서.”라는 종교적 소망 및 가족적 애착을 기도로써 표출한다. 이러한 시상 전개에는 복수의 은유적 층위를 상호 충돌시키고 연결시켜 충격 효과를 얻어내는 몽타주의 기법이 개입한다. 따라서 이 시의 1연은 저항군모티프가 복수의 은유 계열들과 연계하여 중층적인 의미 맥락을 형상화하면서 그 내적 메커니즘으로 작용하는 기법적 방법론인 인유-몽타주-알레고리를 농축하고 있다.

이어지는 1연의 후반부에서 지평선지도가 표상하는 전투적 은유의 맥락이 무한한 폐허가 암시하는 존재적 은유의 맥락과 결부되면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검은 옷을 입은 노파”, “날아오르는 까마귀떼”, “잘린 손가락을 물고 흩어지는 고양이 떼”, “토막토막 분해되는 뗏목등은 전투적 은유가 존재적 은유와 결부되면서 파생시키는 상처와 고통 및 죽음의 흔적들이다. 이 흔적들을 수렴하고 결집하면서 제시되는 것이 강물 위로 누렇게 바랜 백기가 죽은 태아를 안고 떠내려가는 장면이다.

2연의 첫머리에 제시되는 이것은 데자뷔다.”4연의 마지막 문장인 이것은 데자뷔다. 모든 것은 반복된다.”에서 되풀이되는데, 필자는 이 표현이 작품을 지배하는 구조화 원리이자 신동옥의 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구조화 원리를 은연중에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이 표현은 주제적 측면에서 낙오했고” “슬픔을 구속하는 화자가 성모에게 아내를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모습과, 기법적 측면에서 저항군모티프가 전투적 은유에서 출발하여 복수의 은유 계열들과 연계하는 과정이 꿈속의 환상처럼 반복적 강박으로 되풀이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회개’, ‘악공樂公’, ‘누이’, ‘저항군’, ‘길음/송천동/남양/정릉’, ‘상두꾼’, ‘고래/팽이/불꽃’, ‘앙코르등 최소 여덟 가지로 세분할 수 있는 신동옥 시의 중요 모티프들, 각각의 모티프와 연계하는 복수의 상징체계들, 연계의 기법적 방법론인 인유-몽타주-알레고리등은 공통적으로 꿈속의 환상을 반복적으로 재연하는 데자뷰의 속성 및 원리를 구현하면서 형상화된다. 따라서 신동옥 시의 복잡다기한 모티프 및 상징체계들은 모두 현실과 꿈,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양자가 혼재하거나 혼융되어 데자뷔적인 아우라를 가지고 형상화된다.

데자뷔의 속성 및 원리를 고려하면서 작품 해석을 시도하면 표면적 의미뿐만 아니라 심층적 의미에 근접할 수 있다. 2연에 등장하는 낙오부상’, “항복”, “슬픔기도등 화자의 표면적 상황을 근저에서 지배하는 심층적 심리는 오늘은 이렇게 끝날지도 모른다.”라는 문장에 농축되어 있다. 필자는 이것을 거역할 수 없는 운명과 맞서 싸우는 자의 패배 의식반복 강박적 트라우마라고 해석하고자 한다. 2연의 상황은 3연을 건너뛰고 4연에서 연속되므로 4연과 함께 비교하면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4연에서 현실의 상황은 목책을 따라 한 차례 폭격이 지나가는 모습, “강가에 버짐처럼 불꽃이 번지는 모습, “무한의 정적 속에서 캐터필러가 전진하는 것 같은 양상 등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데자뷔의 속성 및 원리를 고려하면 폭격불꽃캐터필러등 표면적 상황의 근저에서 화자의 내면적 무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내게는 다른 방법이 없내가 낙오한 것은 애초에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심리이다. 이 발화는 생환 방법을 찾을 수 없는 낙오병의 절망감과 책임 회피의 수동적 태도를 드러내지만, 두 문장에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라는 1인칭 주체가 역으로 비-주체성을 반증하는 데서 숨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상황은 화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진 것이고 해결책을 모색하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속성을 가진다. 이러한 속성이 바로 2연과 4연을 묶어주고 연결하는 고리인 데자뷔의 숨은 의미가 된다.

그런데 데자뷔의 속성으로 도출한 패배 의식반복 강박적 트라우마만으로 신동옥 시의 구조화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패배 의식반복 강박적 트라우마는 신동옥 시의 무의식적 메커니즘에서 한 측면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고, 그 전체상을 파악하려면 운명과 맞서 싸우는 자의 대결 의지반역적 정신을 포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양 측면을 종합하여 신동옥 시의 저항군모티프가 대결과 패배의 충돌이라는 구조화 원리를 동반한다고 해석하고자 한다. 또한 필자는 2장에서 /회개모티프가 신성과 욕망의 충돌이라는 구조화 원리를 동반하면서 종교적 은유에서 출발하여 세속적 은유음악적 은유까지 아우르며 희망을 노래하는 전체적 알레고리로 승격시킨다고 해석한 것과 마찬가지로, ‘저항군모티프가 대결과 패배의 충돌이라는 구조화 원리를 동반하면서 전투적 은유에서 출발하여 생활적 은유’, 정치적 은유‘, ’연애적 은유, ‘종교적 은유’, ‘존재적 은유’, 가족적 은유등을 아우르며 전체적 알레고리로 승격시킨다고 해석하고자 한다.

이러한 해석은 인용한 시의 3연에서 논지를 뒷받침할 수 있다. 3연은 전투적 은유에서 출발하는 저항군모티프가 주로 가족적 은유와 연계하여 데자뷔적으로 형상화된다. “아버지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나는 것은 현실적 인과관계에서 벗어난 그로테스크한 표현이다. “어머니의 배를 가득 채운 하얀 쌀벌레들에서 아버지쌀벌레들과 등가를 이루며 동일시되는 듯하다. “쌀벌레는 가족들의 주식主食을 이루는 이 오래되어 부패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므로 아버지는 일차적으로 퇴락과 부패의 의미 맥락을 가진다. 그런데 벌레들”-“첫눈”-“붉은 새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연쇄가 북벽에 앉아버지로 귀결하면서 아버지는 퇴락과 부패에서 순결과 재생의 의미 맥락으로 전환된다. 이어지는 나는 북벽에 남아 그을음을 긁어내 눈물로 강을 만들고, 강물에 백기를 눈처럼 흘려보내며 증오를 보태겠지.”라는 문장은 의 위상을 아버지의 연장선에 두면서 눈물의 인고, “백기의 패배, “증오등의 의미 맥락으로 연결시킨다. “아이들의 다리뼈를 조각조각 흘려보내는 언캐니한 이미지는 전투적 은유를 가족적 은유와 연계하면서 죽음의 아우라를 드리우지만, “끝까지 이곳에 남아서 나는 볼 테다.”라는 결의를 통해 저항과 대결 의지를 불태운다. “나는 어머니를 아버지의 이불 위에 누이고 그 곁에 씨를 뿌릴 것이다.”에서 근친상간적 비유를 구사하는 동시에 눈뜨는 새싹에 대고 성호를 그을 것이다.”에서 신성에 대한 위악적인 비유를 구사함으로써 세상에 저항 및 대결 의지를 역설적으로 표출한다. 결국 3연도 전투적 은유를 아버지”, “어머니”, “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가족적 은유와 연계하여 데자뷔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저항군모티프가 동반하는 대결과 패배의 충돌이라는 구조화 원리를 구현한다고 볼 수 있다.

 

접안으로 가닿은 낱낱에 집중해왔다. 작전은 다음 그리고 다음에 완결될 것이었다. 나는 잠시 지도에 도래하고 작전은 닥친다. 다음 그리고 다음으로 달아나 당신을 본다. 나는 조금 비켜서고 당신은 스스로 펼친다.

 

우리는 결이 성긴 작전을 좇는가 먹는가 비비는가. 당신은 조금 비켜서고 나는 스스로 펼친다. 대물렌즈 아래서 푸른 꼬리지느러미를 뻗어나가다가는 검게 죽어 굳은 정맥류를 점점이 이어 하얗게 붉게 디디고 서는

 

당신이라는 근친이 있어 필연의 나라는 여전히 남아 있다. 내 사랑은 아무것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러한 잠시 누가 있어 1초의 삶을 위해 24시간 죽는가. 온통 흘레하며 뒹구는 잠시 누가 있어 죄와 무위를 걸머진 비렁뱅이로 남는가.

 

지도는 자체, 삶이라는 바탕소리다. 주저앉지 않고 놓여나지 않으며 헛되이 신념을 누설하지 않기 위한 쟁투의 꽃차례다. 사이, 언제고 곰살궃은 당신이 사무치는 내가 되었다. 언제고 사무치는 당신이 곰살궃은 내가 되었다.

 

당신이 꽃판이다 당신이 꽃술이고 대궁이다. 당신이라는 근친이 있어 오로지 저를 쓰는 지도는 온몸을 공글리어 우뚝 서기도 하는 것 세우기도 하는 것. 필연의 나라는 여전히 남아 있다. 허기여 마침내 나를 이끌고 가라.

 

막다른 탄도에 가로놓인 채, 모든 행간은 지도가 쓰는 시인의 작전. 나는 작전이 없다. 작전은 당신이 없다. 당신의 작전은 당신이 없다. 당신은 끝내 작전이 없다. 나는 당신의 작전이 없다. 나는 내 작전이 없다. 작전은 내가 없다.  

―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비트 9」전문(3 : 104~105)

 

이 시는 비트연작시 중에서 저항군모티프가 전투적 은유를 기반으로 연애적 은유, 존재적 은유, 가족적 은유, 시작詩作적 은유 등 복수의 은유들과 연계하면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 맥락을 형상화하는 작품이다. 작품의 전체적 구조는 시적 화자의 내적 발화를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크게 초반부(1~2), 중반부(3~4), 후반부(5~6)로 구성된다. 초반부는 화자가 지도작전으로 대변되는 전투적 은유에서 출발하여 자신과 당신의 관계를 중심으로 연애적 은유와 접속하고, 중반부는 당신이라는 근친과 맺는 필연의 나라죄와 무위를 낳는 연애적 은유가 신념을 가진 쟁투의 차원으로 전이하며, 후반부는 으로 비유되는 당신과의 관계를 다시 전투적 은유와 중첩시키면서 작전이 없는” “당신의 궁극적 사랑의 차원으로 귀결시킨다.

초반부의 1연은 시적 화자가 접안으로 가닿은 낱낱에 집중하고 작전다음에 완결될 것을 예상하며 지도에 도래하고 작전은 닥치는 모습을 통해 전투적 은유를 구사하면서 출발한다. 전투적 은유에서 연애적 은유로 전이되는 문장인 다음으로 달아나 당신을 본다에서 달아나라는 단어는 두 은유 계열 간에 단절이나 간격이 존재한다는 점을 은연중에 노출시킨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은 신동옥 시의 중요 모티프들과 그 각각의 모티프와 연계되는 복수의 은유 계열들은 상호 단절이나 간격을 안은 채 접속이나 연결이 시도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신동옥의 시는 한 편의 작품, 한 권의 시집, 시 세계 전체라는 각각의 차원에서 다양한 모티프들이 상호 공백과 균열을 내포한 채 연결되어 있고 이와 연계되는 복수의 은유 계열들도 상호 공백과 균열을 내포한 채 연결되어 있다.

나는 조금 비켜서고 당신은 스스로 펼친다.”라는 문장은 연애적 은유인 당신의 길항 관계가 작품 전체에서 시종일관 유지되는 양상을 견인한다. 2연에서 우리는 결이 성긴 작전을 좇는가라는 표현을 거쳐 당신은 조금 비켜서고 나는 스스로 펼친다.”라는 문장은 앞의 문장과 대칭을 이루면서 당신의 길항 관계가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대물렌즈1연의 접안과 조응하면서 지도작전으로 대변되는 전투적 은유와 재접속하는데, 그것을 통해 관찰하는 당신푸른 꼬리지느러미를 뻗어나가다가는 검게 죽어 굳은 정맥류를 점점이 이어 하얗게 붉게 디디고 서는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은 대비적인 색채 및 대립적인 형상들을 연쇄적으로 충돌시키면서 모순이 중첩되는 연애적 은유의 이율배반성을 표현한다.

중반부의 3연에서 화자는 당신이라는 근친으로 인해 필연의 나라는 여전히 남아 있“1초의 삶을 위해 24시간 죽는다고 표현함으로써 연애적 은유를 필연과 우연이 충돌하고 삶과 죽음이 충돌하는 극한의 갈등과 긴장 상태로 몰아넣는다. 양극이 대결하고 충돌하는 벼랑 끝에서 화자는 죄와 무위를 걸머진 비렁뱅이로 남는다는 표현을 통해 사랑의 모순적 이율배반성을 강렬한 파토스적 형상으로 드러낸다. 4연은 화자가 지도는 자체, 삶이라는 바탕소리다.”, “헛되이 신념을 누설하지 않기 위한 쟁투의 꽃차례다.”라고 말하면서 지도로 대변되는 전투적 은유를 존재적 은유와 생활적 은유 및 자연적 은유와 연계하고, “곰살궃은 당신이 사무치는 내가 되었다. 언제고 사무치는 당신이 곰살궃은 내가 되었다.”라는 문장을 통해 당신의 길항 관계가 상호 교류의 관계로 전이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어서 화자는 후반부의 5연에서 당신의 상호 교류를 통해 당신이 꽃판이다 당신이 꽃술이고 대궁이다.”라고 선언하는 지점에 도달한다. 그러나 화자는 당신이라는 근친이 있어 오로지 저를 쓰는 지도는 온몸을 공글리어 우뚝 서기도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연애적 은유를 다시 전투적 은유로 복귀시키고, “필연의 나라는 여전히 남아 있다. 허기여 마침내 나를 이끌고 가라.”고 요청함으로써 필연의 편에 서는 자기 확인 및 전진을 위한 결의를 보여준다. 6연에서는 저항군모티프가 시작詩作적 은유와 접속하면서 전개된다. “모든 행간은 지도가 쓰는 시인의 작전.”이라는 표현에는 전투적 은유와 시작적 은유가 중첩하는데, 이어지는 나는 작전이 없다. 작전은 당신이 없다. 당신의 작전은 당신이 없다. 당신은 끝내 작전이 없다. 나는 당신의 작전이 없다. 나는 내 작전이 없다. 작전은 내가 없다.”에서는 작전이 없당신이 없작전을 교차적 대구의 언술로 표현함으로써 전투적 은유뿐만 아니라 시작적 은유에서도 탈피하여 순수한 사랑의 차원에 도달한다.

이러한 사랑의 차원은 제목인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4연의 신념을 누설하지 않기 위한 쟁투의 꽃차례다를 중심으로 의미를 수렴하고 결집하면서 을 중핵으로 형상화되는 꽃의 모티프를 새로운 모티프로 파생시킨다. ‘저항군모티프로부터 분기된 꽃의 모티프는 이후의 신동옥 시에서 나무는 꽃 피는 비트다”, “나무는 작전을 쓰지 않고 지도를 읽지 않는다(「나무-비트 21」, 3 : 132), “숲에서 아름다운 꽃이 태어났다/ 사람들이 숲으로 몰려갔다(「벚꽃 축제」, 4 : 47), “나의 노래는 줄기였고 꽃이었고 검불이었다(「숲과 재」, 4 : 108), “누가 나를 숲에 버려두고 떠났다(「숲 이야기」, 5 : 26) 등에서 보이둣, “나무”, “등의 이미지와 연동하면서 식물적 은유계열을 파생시킨다. 이처럼 신동옥 시의 다양한 모티프들과 그 각각의 모티프와 복수적으로 연계되는 종교적 은유, 세속적 은유, 외전적 은유, 음악적 은유, 전투적 은유, 생활적 은유, 존재적 은유, 연애적 은유, 가족적 은유, 식물적 은유 등의 상징체계들은 상호 단절이나 간격을 안은 채 인유-몽타주-알레고리의 미학적 방법론을 통해 접속 및 혼융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모티프 및 은유 계열을 파생시켜 원주圓周를 확대하면서 시적 행로를 지속적으로 개척해 나간다. 향후 신동옥의 시가 또 어떤 새로운 모티프 및 상징체계들을 개척해 나가는지 예의 주시하기로 하자.
  • 오형엽 | 문학평론가. 본지 주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4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당선,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으로 등단. 비평집으로 『신체와 문체』 『주름과 기억』 『환상과 실재』 『알레고리와 숭고』 등이 있음. 젊은평론가상, 애지문학상, 편운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등을 수상.
  • 8) 이러한 차원에도 필자가 신동옥 시의 미학적 방법론으로 간주하는 ‘인유-몽타주-알레고리’가 작용하고 있다. 여기서 ‘알레고리’는 전통적 수사학의 알레고리가 아니라 발터 벤야민적 알레고리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전통적 수사학의 알레고리는 우화에서 잘 나타나듯 하나의 독립된 작품 구조가 전체적 의미 연관을 통해 현실 공간에 교훈적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단순하고 도식적인 구성 원리를 가지는 반면 발터 벤야민적 알레고리는 형상과 의미, 기표와 기의 사이의 불일치나 간극으로 인해 파편성․이질성․부조화를 노출하면서 역사의 현실적 차원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독일 비애극의 원천』, 조만영 역, 새물결, 2008, 207-318쪽; 졸고,「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문학과 수사학』, 소명출판, 217-230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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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란 백색 알레고리의 건축술 ― 『흰』

1. 흰색의 엑스터시  색채의 물질성은 다양한 감각적 요소와 함께 체험된다. 한강의 소설 『흰』(문학동네, 2016)에서 '안개', '진눈깨비', '서리', '눈송이', '눈보라', '만년설'은 물이라는 동일한 기원을 갖지만 각기 다른 감각적 실재로 다가온다. 위태롭게 부서지는 첫서리의 유약함, 육신을 압도하는 눈보라의 적대감, 원경의 만년설이 환기하는 신비로움은 눈(雪)이라는 추상적인 범주로 동일화할 수 없는 백색의 스펙트럼을 이룬다. 천천히 유동하며 새벽을 불투명하게 감싸는 안개의 움직임은 맹렬히 질주하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혹은 부유하듯이 낙하하는 눈송이의 속도와 선명하게 구별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금, 설탕, 모래, 쌀알, 흰 조약돌은 선연히 다른 맛과 감촉으로 피부에 닿아온다. 사물의 윤곽선을 빠져나온 흰색은 질감, 부피, 무게, 온도, 속도, 냄새, 소리와 같은 무수한 감각성질들과 결합한다. 감각의 총체로서 흰색은 '나'의 지각을 거치며 쉽게 언어화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atmosphere)'를 주조한다.  사물의 성질이 내재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현존을 만들어나가는 일, 독일의 미학자 게르노트 뵈메(Gernot Böhme)는 이를 '사물의 엑스터시(ecstasy)'라고 명명한 바 있다. 황홀경을 뜻하는 영단어 'ecstasy'는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외부로 향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έκστασις'를 어원으로 갖는다. 한강의 작품에서 흰색은 사물을 구성하는 일부를 넘어 '나'의 지각과 기억을 일깨우는 역할을 수행한다. 어둠 속 고요히 점멸하는 흰 불빛은 '나'로 하여금 유년의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어린 '나'는 작은 배에 올라 수천 마리의 은빛 멸치 떼가 튀어 오르는 장관을 목격한다. 이 눈부신 놀라움은 곧 "이태 뒤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1) 작은아버지의 웃음과 연결되며 서글픈 연민으로 전환된다. 그런데 한강에게서 흰색이 죽음과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날숨이 겨울 공기와 만나 하얀 입김으로 변할 때, 그것은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71)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외부의 찬 공기가 몸 안에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데워지고, '나'는 따뜻해진 공기를 대기에 불어넣는다. 하얗게 퍼져나가는 입김은 '살아있음'이라는 상태가 단독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몸의 내부와 외부가 부단히 뒤섞이는 과정임을 증명한다.  흰색의 물질성을 집요히 탐구하고 기록하는 작업은 '언니'에 대한 기억과 연관된다. 산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나'의 언니. 사진 한 장, 울음 한 점조차 세상에 남기지 못한 그녀는 오직 어머니의 이야기 안에서만 존재한다. 얇게 얼어붙은 초겨울의 서리, 하얀 달떡을 닮은 얼굴, 흰 배내옷과 강보는 언니의 기억을 구성하는 사물들이다. 다시 말해 흰색은 '나'가 죽은 언니를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감각적 실체인 것이다. 이 흰색은 그녀의 현존을 지극히 구체적인 방식으로 '나'에게 각인시킨다. 일곱 살의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 속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20)의 얼굴을 아직 찌지 않은 쌀 반죽의 형상으로 상상해본다. 희고 고운 가루가 묻어나는, 찰기 없이 보드라운 반죽의 표면, 손가락을 대면 지문이 고스란히 남을 것만 같은 섬세하고 연약한 피부, 달떡의 흰 빛깔이 덩어리진 감각의 생생함으로 몸에 육박해올수록 '나'는 "쇠에 눌린 것같이 명치가 답답해"(21)지는 고통을 겪는다. 흰색의 엑스터시는 실재와 허구 사이의 텅 빈 공간에 선명한 무늬를 남기며 부재하는 언니와 현실의 '나'를 연결한다. 2. 폐허를 증언하는 흰 무늬  작품의 제1장에서 '이 도시'로의 이동은 '나'가 언니를 회상하는 계기로 언급된다. 물론 소설에 도시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지만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곳", 그 처절한 투쟁의 대가로 "1944년 10월부터 육 개월여 동안"(27) 나치의 무자비한 보복 공습에 의해 초토화되었던 '이 도시'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임을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폐허화된 바르샤바는 현재 말끔히 복구되었으나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29)된 잔적(殘跡)은 과거의 참극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 폐허의 지층을 거니는 동안 '나'는 자신이 죽은 언니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중세에 지어진 성은 근대에 이르러 병원으로 바뀌었고, 전쟁으로 인해 붕괴된 병원은 미술관이 되었다. 파괴와 재건, 폭력과 저항의 역사가 누적된 '이 도시'처럼 '나'는 누군가의 죽음 위에 올린 작은 벽돌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언니는 '나'와 단절된 존재가 아닌,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29)일지도 모른다. 한강은 『흰』을 통해 "생명을 가지고 나아간다는 게 뭔지, 내가 누구 대신으로 이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질문도 더듬어보고 싶었"2)다고 밝힌 적이 있다. '나'가 언니의 죽음으로부터 탄생했으며, 그녀의 삶을 대신 이어가고 있다는 자각은 그녀가 시간을 거슬러 '나'의 삶에 틈입하는 이유가 된다. 어머니는 '나'를 낳기 전 두 번의 조산을 겪었다. 만약 "그 생명들이 무사히 고비를 넘어 삶 속으로 들어왔다면, 그후 삼 년이 흘러 내가, 다시 사 년이 흘러 남동생이 태어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117)이라는 사실은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37)인 '지금 여기'에 그녀를 불러내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제1장은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39)라는 '나'의 전언으로 끝을 맺는다. 이때 '나'가 언니에게 건네려는 '흰 것'은 나치에게 희생된 바르샤바 시민들을 애도하는 양초의 흰색과 중첩된다. 시민들을 총살했던 붉은 벽의 잔해, 그 잔혹한 학살의 현장 앞에서 고요히 타오르는 흰 심지와 뜨겁게 녹아내리는 촛농은 점차 소멸의 이미지로 번져나가면서 애도의 의미를 가시화한다. 불꽃 속에서 서서히 몸을 낮추고, 마침내 사라지는 흰 양초와 같이, 진정한 애도란 '나'의 소멸을 감내하며 타자에게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건네는 일일 것이다.  제2장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소설의 주어인 '나'와 언니의 자리를 맞바꾸며 시작된다. 그러나 '나'의 삶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과거를 애도하는 일이 가능한가. 어머니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언니의 삶을 어떻게 '지금 여기'의 구체적 현실로 이끌어올 수 있을 것인가. 「빛이 있는 쪽」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바르샤바 유태인 게토에서 친형을 잃은 한 남성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여섯 살 때 죽은 형의 목소리는 남성이 벨기에에 입양된 뒤에도 계속해서 찾아왔는데, 폴란드어를 배운 뒤에야 남성은 그것이 체포되기 직전에 형이 외쳤던 말임을 알게 되었다. 반면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맞은 '나'의 언니는 인간의 언어로 해독할 수 있는 말을 남길 수 없었다. 남성의 어린 형처럼 그녀도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나'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이 불확실성 속에서 '나'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어떤 감각과 막연한 감정 가운데, 모르는 사이 그이로부터 건너온 것들이 있었"(32)을지도 모른다는 점뿐이다. 이렇듯 한강의 소설은 애도의 (불)가능성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출발한다.  언니를 향한 (불)가능한 애도의 서사는 흰 사물들의 파편적 기록, 그리고 오래전 지구 반대편에서 폐허화되었던 '이 도시'의 슬픔을 헤아리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그런데 살아낸 적 없는 과거를 애도하려는 노력은 '나'가 그녀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흰 것'을 오히려 불투명하게 만들기도 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나'는 "당신에게 깨끗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잔혹함, 슬픔, 절망, 더러움, 고통보다 먼저, 당신에게만은 깨끗한 것을 먼저. 그러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118)라는 말로써 그러한 시도가 녹록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처음 '나'가 의도했던 '흰 것'은 무수한 사물들의 흰빛이 발현하는 엑스터시에 휘말리는 순간 순수와 애도라는 상징의 단일성에 자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안개」의 '나'는 도시를 하얗게 잠식한 안개를 보며 섬에 짙게 낀 안개를 보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안개는 '먼지 낀 마른 웅덩이'를 신비롭게 채색하고, 철조망 뒤에 도열한 소나무들을 "이승의 것 같지 않게 홀연"(24)한 형상으로 만든다. 왜곡과 망각을 함축한 흰빛은 「흰 도시」에 보다 심화되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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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군가가 '살아있음'을 비명처럼 새겨놓은 숫자, 그 악착 같은 표식을 페인트로 지워보지만 흐려진 칠은 이내 붓 자국을 드러내고 만다. 페인트를 덧칠할수록 뚜렷하게 돌출되는 자국은 “모든 기호는 심지어 부재를 지시할 때조차 존재를 드러낸다”3)는 유디트 샬란스키(Judith Schalansky)의 언술과 조응한다. 파괴된 흔적을 걷어낸 도시에 폐허를 증언하는 무늬가 남아 있는 것처럼, 붓이 남긴 하얀 흔적은 이 밑에 무언가가 잔존해 있음을, 그리고 누군가가 이를 덮으려 했음을 은밀하게 알려주는 기호로 작용한다. 은폐와 흔적의 아이러니한 공존을 조우하는 동안 '나'는 "수백 개의 깃털을 펼친 것처럼 천천히 낙하하는 눈송이"(15)를 멍하니 응시한다. 해설(解雪)이 예정되어 있는 백색 허공을 바라본 '나'는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10) 깨닫는다.  흰색의 알레고리가 환기하는 애도의 (불)가능성은 무의미함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과거의 유실은 아무도 그것을 찾거나 기억하지 않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총살된 자들을 애도하는 바르샤바의 붉은 벽 앞에서 '나'는 불현듯 우리가 과거를 잃어버렸음을 자각한다. 이곳의 시민들은 새하얀 외벽을 두른 기념관에 과거를 유폐시키는 대신, 거리 한복판에 흰 양초를 밝혀 죽은 이의 넋을 기꺼이 자신들의 삶 옆에 둔다. "그녀는 자신이 두고 온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했고,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 넋들이 이곳에서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기려질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고국이 단 한 번도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08~109)라는 대목에 언급되듯이, 우리의 '고국'이 (불)가능한 애도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제주 4·3,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비극의 애도에 깊이 천착해왔던 작가의 문제의식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너무나 참혹하기에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치스럽고 나약한 역사라는 이유로 우리는 침묵해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한강에게 애도란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108) 강인한 의지로부터 온다. 애도는 어두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삶 밑에 파묻힌 폐허를 발굴하여 그들이 겨누었던 칼끝과 총구를 부끄러움으로 되돌려주는 일이다. 3. 흰빛의 아카이브  『흰』이 출간된 직후인 2016년 6월, 한강은 차미혜 영상작가와 함께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스페이스오뉴월에서 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었다. "의식하지는 않아도 우리 안에 있는 것, 이름 지어 부를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보편적 감정, 감각에 대한 이야기"4)라는 주제로 기획된 전시회의 준비는 한강이 『흰』을 집필하던 시기에 진행되었다. 이 전시회에는 최진혁 작가가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 , , , 을 편집한 약 15분 남짓5)의 영상도 전시되었다. 『흰』 초판본에는 차미혜 작가의 사진이, 2018년 간행된 제2판에는 최진혁 작가의 영상에서 발췌한 여섯 장의 흑백사진이 실려 있다. 데보라 스미스(Deborah Smith)가 번역한 영문판 『The White book』(GRANTA, 2024)에는 일곱 장의 흑백사진이 삽입되었는데, 한국판에 담긴 것보다 크게 작업된 사진들 역시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를 기록한 것이다. 이렇듯 작가의 글쓰기를 퍼포먼스로 옮기고 이를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매체의 변화 과정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점은 애도와 기억, 그리고 기록의 문제를 다시금 들여다보게 한다.  퍼포먼스 아트는 소도구와 무대, 수행자의 컨디션, 관객의 반응, 심지어는 장소의 냄새, 조명, 날씨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를 영상으로 기록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재현하기란 불가능하다. 더욱이 책이라는 매체의 물질성은 퍼포먼스와 영상이 촉발하는 재현의 문제를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흰』의 제2판에 수록된 여섯 장의 흑백사진은 책의 매체적 한계를 뛰어넘어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를 재현한다. 이들은 텍스트보다는 분명 '사실적으로' 다가오지만 퍼포먼스를 영상보다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치밀한 사유와 퇴고를 거친 텍스트에 비하면 퍼포먼스와 영상은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한 우연의 산물에 가깝다. 영상 속 무수한 이미지 중 단 하나만을 낚아챈 사진은 그러한 우연성이 극대화된 예술의 한 형식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사진은 퍼포먼스의 일회성을 순간에 고정함으로써 더 오래, 더 널리 유포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사진에 퍼포먼스와 관련된 어떠한 캡션이나 단서도 덧붙이지 않았다. 우리는 모호하고 파편적인 이미지 속 배내옷, 깃털, 종이와 같은 흰 오브제를 통해 사진이 언니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따라서 작품 속 사진은 일시적인 것을 영원성 속에 붙들어 매려는 욕망과, 그 욕망의 덧없음을 동시에 함축한 알레고리적 이미지다.  흥미로운 것은 영문판 『The White book』에 수록된 일곱 장의 사진이 한강의 퍼포먼스를 보다 직접적으로 지시한다는 점이다. 한강의 검은 실루엣이나 손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들 사진은 퍼포먼스의 수행을 비교적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면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제2판의 사진들은 한층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호함 속에서 모종의 이야기를 건넨다. 제2판에 실린 첫 사진은 배경과 오브제가 모두 하얗게 인쇄된 탓에 무엇을 찍은 것인지 식별하기가 어렵다. 독자는 이어지는 사진들에 제시된 손의 명암과 검은 옷을 입은 작가의 모습을 통해 오브제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된다. '흰 깃털과 종이 → 종이 위에 깃털을 수놓는 손 →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작가의 몸'으로 점차 확대되는 세 개의 장면은 시가 쓰인 종이 위에 흰 깃털을 덮는 퍼포먼스인 을 기록한 것이다.6) 지면 전체를 메운 네 번째 사진에는 활짝 펼친 배내옷이, 마지막 두 장의 사진에는 각각 흰 천을 꿰매는 손과 의자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작가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는 죽은 언니의 배내옷을 짓는 퍼포먼스인 을 담고 있다. 부재한 언니의 삶을 상상하고 기록하는 일이 (불)가능한 애도임을 고려한다면, 텍스트를 깃털로 덮는 퍼포먼스는 기록의 불가능성에 대한 재현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배내옷은 결여와 불확실성으로 이뤄진 애도의 결과물이자, 그러한 공허함의 과정을 뚫고 탄생한 하나의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의 알레고리는 과거의 파편이면서 동시에 과거를 초과한다. 모호함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말을 거는 이미지들의 절합(articulation)은 재현의 진실성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연동되어 있다. 피와 재로 가득 찬 끔찍한 이미지가 과연 실제에 더 가까운가? 이미지의 참혹성은 언제든 왜곡될 수 있고, 공포나 혐오를 유발해 접근을 막기도 한다. 더군다나 그것이 '부재하는 것'을 현시해야 한다면? 한강이 포착하는 재현의 (불)가능성은 진실과 망각, 아름다움과 처참함을 너무도 쉽게 오가는 이미지의 기만성에 기인한다. 1945년 미군 항공기가 바르샤바를 촬영한 영상에서 순백의 환영이 폐허로 전환되는 섬뜩한 순간은 그동안 '사실적 재현'을 담당해온 카메라와 눈(眼)의 역량을 의심하게 한다. 때때로 예술은 그 섬뜩함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소금」이라는 글에는 '나'가 다친 손가락으로 소금을 집었을 때의 고통과 전시실에서 바라본 소금 언덕의 정경이 병치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썩지 못하게 하는 힘, 소독하고 낫게 하는"(66) 소금의 치유력은 열린 살갗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따갑게 스며들 때 비로소 발현된다. 반면 전시실의 관람객들은 의자에 유유히 앉아 소금 언덕에 원하는 만큼 맨발을 올려놓는다. 어둠 속 눈부시게 빛나는 소금 언덕의 아름다움은 '곱게 아문' 두 발로만 누릴 수 있기에 기만적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감각할 수 있는 특권은 고통에서 비껴난 자에게만 주어진다.  『흰』의 파편적 이미지들은 사건의 '총체적 진실'을 구성하는 내러티브의 명징함에 저항한다. 소설을 여는 첫 장에서 문득 '나'를 찾아오는 몸의 고통은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와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11)에 비유된다. 백색 이미지들이 연대기적인 시간의 흐름을 베어내고 단숨에 과거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강에게서 시간은 부단히 갱신되고 돌출하며 융기하는 아나크로니즘적인 것이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의 표현을 빌리면 이 아나크로니즘은 불가지적이고 비가역적인 시간을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치인 것이다. '그녀'의 기록, '이 도시'의 역사, '흰 것'의 엑스터시는 유년의 기억과 기억 이전의 과거를 거슬러 현재를 끊임없이 재구축한다. 그러므로 시간의 흐름은 과거의 망실을 변명하지 못한다. 나는 이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 『흰』이 쓰인 것이라 여긴다. 한강은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81)라는 언술로써 이를 재확인시킨다. 4.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은 존재하는가  하얀 '배내옷'을 펼친 손과 검은 옷에 묻은 흰 실밥들.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 을 담은 세 장의 사진은 『흰』이 죽은 언니뿐만 아니라 아기를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를 애도하는 작품임을 암시한다. 어머니의 입말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언니의 이야기에는 스물세 살의 어머니가 느꼈을 두려움이 짙게 깔려있다. 아기가 죽어가는 동안 산후의 통증을 온몸으로 견디며 홀로 배내옷을 지었을 '나'의 어린 어머니, 그가 언니의 이야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전히 그 어두운 기억의 하중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백지 위에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는 어머니의 절박한 속삭임을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133)라는 말로 바꾸어 적는다. 한강은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텍스트로 옮길 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아트를 통해 직접 몸으로 수행하며 죽은 언니와 어머니, '나'를 연결한다. 작가는 경험 이전의 과거를 체현함으로써 과거로부터 격리된 타자에서 그들의 고통 안에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이행한다. 마찬가지로 『흰』에 등장하는 '나'는 부재한 언니의 삶을 재현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어 그녀를 그 안에 직접 살아가게 한다. 텍스트는 허구와 부재를 의미하는 기호를 넘어 그 자체로 현실을 뒤바꾸고 재구성하는 수행성을 갖는다.  언니의 조각이 '나'에게 흘러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물음처럼, 언뜻 무관한 것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일들도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사이에 무언가를 남기지 않았을까. 비연관적인 것들의 연관성, 그것이 과거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작품에 기록된 '모든 흰' 것의 아카이브, 같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언니와 '나',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은 자를 향한 애도의 책임을 부여받게 된 지상의 모든 산 자들은 서로 유사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의 단수성은 복수를 지시하는 모든 기표를 초과하는 동시에 존재의 밑바탕에 잠재한 연대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연대의 가능성을, 한강은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어른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70)라는 문장으로 되묻는 것이 아닐까.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우리를 '우리'라는 말로 묶어내어 함께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믿음 속에서 흰색은 텅 빈 침묵과 공허의 색에서 벗어나 산 자들이 고통과 슬픔과 죽음을, 모든 과거를 불러내는 장소가 된다. 흰색은 시간의 흐름이 결코 소멸시킬 수 없는 부재의 흔적으로 가득 찬, 그리하여 부재 속에서 존재를 지속시키는 색이 된다. 1) 한강, 『흰』, 문학동네, 2021, 85쪽. 이하 본문에서는 작품의 쪽수를 명기함. 2) 한강·강수미·신형철, 「[대담]한강 소설의 미학적 층위-채식주의자에서 『흰』까지」, 『문학동네』 제23권3호, 2016. 3) 유디트 샬란스키,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소멸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들』, 박경희 역, 뮤진트리, 2022, 17쪽. 4) 노형석 기자, 「한강의 혼이 어린 8년 전 배내옷 퍼포먼스를 보라」, 『한겨레』, 2024.11.21.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1168572.html 5) 문소영 기자, 「글과 공명하는 한강 '퍼포먼스 아트'...그래서 더 큰 울림[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중앙선데이』, 2024.10.26,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7205 6) Sophie Bowman, "Walking Towards the Vanishing Point Cradling a Love of Life," Korean Literature Now Vol. 32(2016): 9.

계간 푸른사상 이은란 한강알레고리엑스터시수행성『흰』 2025
오형엽 미분적 시선과 시차(視差/時差)적 공백

 안태운은 첫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민음사, 2016)에서 시적 주체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환영적 프레임을 설정하고 대상을 바라보는 다각적 시선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균열과 어긋남과 소멸의 미학을 형상화했다. 그는 두 번째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문학과지성사, 2020)를 통해 전체적인 시적 구도를 환영적 프레임에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으로 전이하고 편지 형식이나 서사적 진술을 시도하는 동시에 산책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적 실천을 보여주고, 세 번째 시집 『기억 몸짓』(문학동네, 2024)에서는 보고 생각나는 것을 따라 산책하고 생각하는 화자를 통해 시적 리듬감을 동반하면서 계절적 일상을 담담한 회상의 어조로 표현한다.  우리는 안태운 시의 전체적 구조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분석소를 시적 화자인 '나'와 대상인 '그(너)'의 관계, 시적 공간 및 심리의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물(비)', '소리'와 '침묵', '공터', 시적 서사의 사건으로 '바라봄', '걸어감', '산책', '사라짐' 등을 설정하고 상호 연관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미학적 특이성(singularity)을 추출해 볼 수 있다. 안태운의 시는 기본적으로 시적 주체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환영을 통해 대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제시한다. 첫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의 대표적 작품인 「얼굴의 물」은 이 기본 프레임 속에서 화자가 대상인 "그"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공간적·심리적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비"가 설정되고 서사적 사건으로 '안에 있음'-'밖으로 나감'-'비가 내림'-'되뇌고 걸어감'-'얼굴의 물 안팎으로 드나듦'-'물이 차오르고 얼굴이 씻겨나감'이 진행된다.  안태운 시의 중요한 미학적 특이성은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이 시시각각 다각도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포착하여 시간 및 공간의 연결을 차단하고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 및 관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데 있다. 이 시에서 화자가 관찰하는 대상인 "그"의 모습은 시 전체에 반복적으로 나열되는 "~고"라는 연결어미에 의해 통일된 전체적 시점이 분기됨으로써 다각적이고 다층적인 장면으로 파편화된다. 안태운의 시는 언술 구조의 층위에서 "~고"라는 연결어미의 나열과 접속부사의 파행적 구사를 통해 상식적이고 통상적인 사고의 질서에서 이탈하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을 구조화시킨다. "안"과 "밖"은 '방'의 공간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물리적 개념인 동시에 '심리'의 영역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정신적 개념이기도 하다. "안"-"안개"/"밖"-"빛"-"비"라는 대비적 구도가 설정되는데, 중요한 부분은 일견 대립적 이미지로 간주될 수 있는 "빛"과 "비"가 모두 "밖"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이다. 안태운 첫 시집의 중심 이미지를 이루는 '물'은 주체의 공간적·심리적 밖의 영역에서 안의 영역으로 침입함으로써 동요와 균열과 상처를 주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안태운의 시는 화자의 시선이 거리를 두고 자신의 꿈을 관찰하면서 묘사하는 시점을 채택하므로 무의식적 꿈을 조망하는 언술 구조를 형성한다. 이로부터 주관적 감정이나 과잉된 감응을 배제하고 객관적이고 무미건조하며 심리적 거리를 가지는 문체적·구문적 특이성이 생겨난다. 기본적으로 무의식적 꿈을 조망하는 안태운의 시는 대상인 '그(너)'의 공간적 위상과 심리적 양상 및 행동적 상황이 '안'과 '밖'의 위상학을 중심으로 구조화된다. 「얼굴의 물」이 화자가 대상인 "그"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로 일관하고, 「원경」이 화자가 대상인 “너”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계속 전개하다가 자신인 '나'를 개입시킨다면, 「감은 눈으로」는 시종일관 화자가 자신인 "나"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러한 차이를 '꿈'과 '현실'의 관계라는 관점으로 재서술하면, 「얼굴의 물」이 화자가 대상인 "그"를 바라보고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무의식적 꿈'의 구도를 유지하고, 「원경」이 화자가 대상인 “너”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무의식적 꿈'을 전개하다가 자신인 '나'를 개입시켜 '현실'을 삽입한다면, 이 시는 화자 자신이 '무의식적 꿈'에서 내쳐지는 과정을 묘사하여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감은 눈"은 '잠'과 연결되고 '무의식적 꿈'의 영역과 결속하므로 "꿈으로부터 내쳐진다". "감은 눈으로"라는 구절은 화자가 '잠'이나 '무의식적 꿈'의 영역에 머물고 싶어 하지만 비자발적으로 현실로 쫓겨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부러 눈 뜨지 않고 걸으면"이라는 구절은 화자가 쫓겨난 현실에서 의지적으로 눈을 감는 모습을 제시하는데, 이를 통해 "나와 함께 내쳐진 논이 있고 논 위로 걷는 내가 만져지는" 상황이 가능해진다. 화자는 현실로 쫓겨남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음으로써 현실에 꿈의 동력을 개입시키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태운 시의 꿈/현실, 안/밖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특이점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는 꿈에서 현실로 이동할 때 꿈의 실재가 현실의 리얼리티로 전이되어 나타난다는 점이고, 둘째는 현실의 화자가 꿈속의 자신을 관찰하는 객관적 거리뿐만 아니라 꿈에서 현실로 추방된 자신을 관찰하거나 감각하는 객관적 거리를 가짐으로써 이중의 거리 감각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중의 거리 감각은 안태운 시 특유의 미분적 시선이 생성시키는 다각적이고 다층적인 몽타주 기법과 결부되면서 미학적 특이성을 강화시킨다.  안태운은 "걷고 난 후의 일들"이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을 두 번째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에서 모색한다. 안태운이 모색하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은 표면적으로 '편지 쓰기'와 '산책하기', '동물로 대표되는 비인간과 인간의 관계 재구성' 등을 통해서 수행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뿐만 아니라 그것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발생시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도 안태운 시의 중요한 요소라고 간주하고 새로운 시적 가능성의 양상을 '소리의 침묵'과 '공터의 공백'에서 찾을 수 있다. 안태운의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된 「빈방의 빛」에서 시적 화자는 초반부에서 "빈방의 빛에 대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다가 "강박"이 드는 상황에 이르러 그것에 대해 진술하기 시작한다. "빈방의 빛"에 대한 진술은 중반부에서 "비질하는 소리"가 제시된 이후 일련의 "소리"에 대한 진술로 이동한다. “소리"가 "배경음"으로 작용하여 무위의 삶에서 벗어나 '행위(몸의 이동)'를 유발하는 동인(動因)이 되고, "지도"는 "소리"라는 "배경음"에 의해 촉발되는 '행위(몸의 이동)'가 현실화되기 위해 경유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그리고 "소리"와 "지도"의 상호 침투적 왕복이 "멀리 빈방의 빛"에 이르러 미지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또 다른 "빈방의 빛"을 연상하는 장면에 도달한다. 이러한 시상 전개는 "빈방의 빛"-"비질하는 소리"-"여행자들의 목소리"-"모의하는 소리"-"지도"-"다시 소리"-"멀리 빈방의 빛"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시상 전개를 거쳐서 등장하는 대상들이 바로 "개와 고양이"라는 동물이다.  무의식의 연상 기법으로 진행되는 이 시의 시상 전개는 "빈방의 빛"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소리들'과 "지도" 간의 상호 침투적 왕복을 거치고 "멀리 빈방의 빛"을 경유하여 다시 "빈방의 빛"에 도달하는 재귀적 순환의 구조를 보여준다. 이 재귀적 순환 속에서 시적 주체가 추구하는 큰 틀의 지향성은 "빈방의 빛"에서 벗어나서 "개와 고양이를 따라서 가"며 "전철을 타고" "터널을 지나"가는 '행위(몸의 이동)'라고 할 수 있다. 이 행위의 연장선에서 안태운이 두 번째 시집에서 모색하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이 표면적으로 '편지 쓰기'와 '산책하기', '동물로 대표되는 비인간과의 관계 재구성' 등을 통해 수행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두 번째 시집의 표면적 흐름에 대한 비평적 조명뿐만 아니라 이것을 가능케 한 동인으로서 "빈방"이라는 공백, "소리"라는 "배경음”, “소리"와 "지도"의 상호 침투적 왕복, "멀리 빈방의 빛"이라는 미지의 시공간 등에 대한 비평적 해명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안태운의 두 번째 시집에서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발생시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은 주로 '소리의 침묵' 및 '공터의 공백'에서 발견된다. 「인간의 소리」에서 화자는 "사람들"이 "동물에 흡사하다고 느끼는 소리를 내"지만 "인간의 소리"에 주안점을 두고 그 근원적 의미를 천착하는 과정에서 "침묵"과 "웃음"이 내포하는 의미를 "밤"-"끝없는 들판"-음악-"춤"-'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에서 찾는다. 이와 유사하게 「목소리」에서 화자는 "너"가 우연성에 근거하는 "풍경 소리"를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사람을 찾"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이 상황에 맞서 "너는 네 목소리를 내보지만 "풍경 소리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네 목소리 뒤로 돌아 나"가고 “다른 소리들마저 다 뒤로 돌아 나가"는 "풍경 소리"의 근원적 차원인 '침묵'과 '공백'에 대해 제시한다. 그리고 「공터를 통해」와 「흰 개를 통해」는 화자인 "나"와 "공터"와 "흰 개"를 중심으로 "산책"이라는 행위가 제시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여준다. 「공터를 통해」에서 "공터"는 "나"와 "흰 개"의 시선이 어긋나는 공간적 개념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가 어긋나는 시간적 개념을 융합시킨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고, 「흰 개를 통해」의 "공터"도 "나"와 "흰 개"의 시선이 어긋나는 공간적 개념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가 어긋나는 시간적 개념을 융합시킨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다. 따라서 이 두 시의 중심 주제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산책'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화자 "나"와 "흰 개" 간의 긍정적인 결속이나 '여전히 지금-이곳에서 비인간동물이 배제되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견고한 분할선이 존재한다' 등의 주제를 도출하는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뿐만 아니라 "공터"가 시선의 어긋남과 시간의 어긋남이라는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을 내장하면서 표면적 수행성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좀 더 복잡미묘하고 깊은 의미를 발생시키는 이중의 시적 장치로 작용한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까지 규명해야 한다.  이러한 안태운 시의 미학적 특이성을 염두에 두면서 최근작 중에서 한 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손끝의 장소 물갈퀴로 흘러드는 횡목 하오 당신은 몸이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모르는데 당신은 부딪치오 시간의 끝에서 울다 공간과 사물로 있다 발가락을 움직여봐 모빌과 함께 산책해 있다 당신은 양의 집 근처에 가서 부른다 하지만 양은 어딘가로 나가 있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뒤돌아 뛰어갔다 하오 놀았다오 자러 가기 전에 안부를 물었다오 음소 단위로 노래를 불렀다오 아름다웠다오 두 얼굴 뒤에 숨었다오 커튼 뒤로 내 뒤로 어느새 내 앞으로 도요새가 날아간다 당신은 몇 걸음 걷다가 체육을 했다 기억의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쐐기의 관계 하오 건물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구름은 광장처럼 떨었다오 그사이 당신은 뒤돌아 망설였다오 우표를 붙였다오 당신을 사랑하오 수레와 함께 움직인다 민달팽이가 퍼져나간다 잔등과 환초 하오 당신이 어른이 되다니 당신이 어른이 된다니 - 「하오」 전문  이 시는 첫 시집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까지 진행해 온 안태운 시의 미학적 특이성뿐만 아니라 세 번째 시집 이후의 변모까지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화자인 '나'와 대상인 "당신"의 관계, 중요 모티프로 "빛"과 '소리'("노래"), 시적 서사의 사건으로 '바라봄', "산책", 비인간으로서 "양", "도요새", "민달팽이" 등이 첫 시집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까지 진행해 온 특이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이 시시각각 다각도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포착하여 시간 및 공간의 연결을 차단하고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 및 관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첫 시집의 시적 방법론이 견지된다는 점이다.  이 방법론이 은연중에 노출된 부분은 "당신은 부딪치오 / 시간의 끝에서 울다 / 공간과 사물로 있다"라는 문장이다. 안태운은 두 번째 시집 이후에 전체적인 시적 구도를 환영적 프레임에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으로 전이하고 산책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적 실천을 보여주었고, 이와 연동하여 시의 공간적·심리적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비"가 설정되면서 "안"-"안개"/"밖"-"빛"-"비"로 구조화되었던 첫 시집의 대비적 구도가 평면적 구도로 병합되었다. 그러나 편지 형식이나 서사적 진술을 시도하는 동시에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이러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에서도 미분적 시선을 통해 공간과 시간의 안팎을 분할하는 동시에 연결하면서 이동하는 안태운 특유의 시적 방법론을 견지하고 있다.  "건물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 구름은 광장처럼 떨었다오 / 그사이 당신은 뒤돌아 망설였다오 / 우표를 붙였다오 /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구절은 화자가 "그사이"라는 찰나적 시간을 경계로 "건물에" "들어오고 있"던 "빛"과 "광장처럼 떨었"던 "구름"이라는 자연적 풍경을 묘사하고 "뒤돌아 망설"이면서 "우표를 붙였"던 과거의 "당신"을 기억하면서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현재의 감정을 표출하는 자신의 모습을 미분적 시선으로 포착하면서 제시한다. 이 시선에는 현재의 화자가 과거의 장면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현재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적·공간적 격차가 충돌 몽타주의 방법으로 농축되어 있다. 그리고 "수레와 함께 움직인다 / 민달팽이가 퍼져나간다 / 잔등과 환초 / 하오 / 당신이 어른이 되다니 당신이 어른이 된다니"라는 구절은 화자가 "하오"라는 찰나적 시간을 경계로 "수레와 함께 움직인"고 "민달팽이가 퍼져나"가는 "잔등과 환초"라는 현재의 자연적 풍경을 묘사하면서 "당신"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지속을 통해 "어른이 되"는 과정을 미분적 시선으로 포착하면서 제시한다. 이 시선에는 현재의 화자가 현재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당신"이 "어른이 되"는 과정을 현재완료적으로 회상하는 시간적·공간적 격차가 충돌 몽타주의 방법으로 농축되어 있다. 안태운의 독자적인 시적 방법론에 해당하는 미분적 시선과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 향후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 나가는지 주목하기로 하자.

월간 현대시 오형엽 미분적 시선시차(視差/時差)적 공백모티프미학적 특이성구조화 원리안태운 2025
임지훈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므로 ― 송은숙 시집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박지일 시집 『물보라』

인간은 3차원적 존재이다.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세계는, 그 속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세 개의 방향 축 속에 존재한다. 당신이 앉은 의자와 책상, 눈앞에 놓인 책과 연필, 당신이 먹고 있는 사과 같은 것들. 당신의 바깥에 놓인 사물들만이 아니라 당신의 입 속 어두운 구멍 끝에 있는 기관과 장기들도 모두 세 개의 방향 축을 통해 폭과 높이를 가진다. 당신이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것도 따져 말하자면 세 개의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당신이 죽어 소멸하게 되는 순간도 모두 세 개의 방향 축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하다. 모든 사물과 현상은 세 개의 방향으로 이루어진 공간 속에서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건 딱히 슬픈 이야기도 기쁜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단지 현상적이고, 물리적인 이야기일 뿐이기에, 실재가 아닌 실제에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바람직한 사실적인 공간 속에서 늘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다. 예컨대, 우리는 모든 사물과 현상이 세 개의 방향으로 구성된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세 개의 방향만으로는 그것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앎이 현상에 항상 미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또 하나의 방향을 탐색하도록 부추긴다. 예컨대, 세 개의 방향 축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가상의 방향 축을 하나 더 도입하는 것이다. 한때 물리학은 이 방향을 Q축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X, Y, Z에 속하지 않는 가상의 방향을 가리킨다. 물론 인간은 이 방향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3차원의 공간성에 완전히 포획되어 있기에 그러한 방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더라도 그것을 실체적인 것으로 감각하거나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Q축은 일종의 가능성이면서 잠재성으로서 함의를 갖는다.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그러나 가정할 수 있기에 늘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미지의 가능성 말이다. 어쩌면 이 Q를 우리는 질문(question)이라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만약에 그것을 물리학적인 축의 문제가 아닌 질문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기실 시인들이야말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운동을 설명하고자 네 번째 방향을 헤매는 존재들이지 않을까. 물론 이 Q의 문제는 시인들이 가지는 공통의 문제이겠으나, 실질적인 방향성은 당연히도 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것을 세계의 관찰자이자 참여자인 인간의 내면의 문제로 이해하며 나아가기도 하고, 혹 어떤 이는 그것을 세계에 대한 관찰과 참여의 부족으로 생각에 외부를 향해 나아가기도 한다. 그것뿐일까. 어떤 이는 언어와 언어의 충돌과 연쇄를 통해 이루어지는 거듭된 사고 실험을 통해 또 다른 행방을 추적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언어 그 자체의 속성에 골몰해 자기 앞의 단어들과 긴 밤을 지새우기도 할 것이다. 송은숙이라는 시인이 『열 두 개의 심장이 있다』는 말로 되풀이하고 있는 문제 또한 그러하다. 그의 시집에서는 끊임없이 외부의 사물을 관찰하는 한 사람의 화자가 등장한다. 높은 산과 굽은 강, 날개를 활짝 펼친 새와 어두운 숲, 그 숲 너머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와 이름 모를 들꽃 같은 것들까지도, 그는 세계의 모든 사물들을 향해 자신의 감각을 활짝 펼치고 그것들의 기척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저녁의 발자국을 본 적이 있다 산책길 양옆을 따라 망초꽃이 줄지어 피어 내가 발을 옮길 때마다 꽃은 밝음에서 어둠으로 팽나무 그늘처럼 옮겨 가는 것이다 그날 나는 저녁과 함께 산책한 것인데 저녁은 서걱서걱 옷 스치는 소리와 쌀랑쌀랑 바람이 이는 소리로 한 발짝쯤 앞서 걸었다 그때 우리는 무슨 얘기를 했던가 징검다리 한가운데서 눈을 감고 섰을 때 물살이 나를 떠메고 가던 일 바람이 등을 밀어 줄 때 슬쩍슬쩍 허공을 밟던 일 분홍낮달맞이꽃에 고개를 박고 있던 나비의 그림자에 대해 저녁은 손짓 하나로 저 멀리 검은 창에 노란 달맞이 꽃을 피우고 하늘에 쌀알 같은 별 뿌려 놓고 그 마술에 현혹되어 저녁의 발자국을 따라가는데 망초 길이 끝나고 검은 아스팔트 길이 강처럼 가로지르고 그 너머 어둠 숲이 펼쳐지고 길을 건너다 징검다리에서 듣던 물소리를 아득히 다시 들으며 저녁이 저 녘으로 나를 이끄는 것을 힘겹게 깨닫고 몸을 돌리는 것인데 바짓단에 흠뻑 이슬을 적시는 까만 밤의 반딧불처럼 저녁의 주술은 매혹이어서 - 송은숙, 「저녁의 발자국」,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걷는 사람, 2024. 위의 시에서와 같이, 송은숙의 화자는 세계를 산보하며 두 눈으로 세계의 한 부분을 저마다 차지하고 있는 사물들의 현존을 목격한다. 그의 오감은 자신이 목격한 사물의 현존을 감각하는 동시에 사물들의 배치가 만들어내는 관계성 속에서 피어나는 제각각의 의미들의 사슬이 존재함을 느끼고 있다. 그의 시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제각기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의 연관 속에 위치 지어져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러한 관계성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배치는 객관적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사물이 객체로서 그 자체 존재함의 결과가 아닌, 화자의 시선의 이동이 만들어낸 배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결코 시 속에서 펼쳐지는 관계성의 이야기가 허구이거나 그릇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객관적인 하나의 세계가 한 사람의 시선 속에서 주관적인 서사적 세계로 다시 빚어지는 방식을 설명해준다. 예컨대 “망초꽃”과 “팽나무”와 “징분홍낮달맞이꽃”과 “노란 달맞이 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세계에 속하면서 동시에 시적 화자인 나의 감각 속에서 주관적인 서사적 세계로 다시 셈해지며 분화된다. 그러한 방식으로 송은숙의 시적 화자는 하나의 객관적 세계를 다분한 주관적 서사들의 세계로 분화시키며, 그 분화 속에서 사물들은 또 다른 배치를 경험하며 잠재되어 있던 의미를 꽃피운다. 예컨대 “저녁은 손짓 하나로 저 멀리 검은 창에 노란 달맞이 꽃을 피우고/하늘에 쌀알 같은 별 뿌려 놓고/그 마술에 현혹되어 저녁의 발자국을 따라가는데”와 같은 진술은 단지 감상어린 화자의 사물에 대한 찬사가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의 객관적 배치 속에서 새로운 가능 세계를 찾아내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시적 화자의 권능이다. 그가 그렇게 말할 때, 세계는 진정으로 그러한 모습으로 피어난다. 적어도 언어로 이루어진 시적 세계 그 속에서만은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송은숙의 시에서 거듭 돌출되는 또 하나의 영역, ‘너머’의 문제와 관계된다. 창 너머, 담 너머 너머는 너무 멀다 고개 너머, 산 너머 가려고 했는데, 가자고 했는데, 갈 수 있었는데 너머는 넘어가 아니라서 더 아득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보아야 보일 듯 말 듯한 아지랑이 같아서 고양이가 담 위에서 너머의 안쪽과 바깥쪽 어느 쪽으로 뛰어내릴까 갸우뚱 궁리하고 있다 너머의 바깥쪽으로 바람이 분다 너머의 너머쪽으로 불었던 바람이 다시 너머의 안쪽에 막혀 되돌아온다 무지개라든지 구름이라든지 계절이라든지 지금, 이 순간이라든지 너머의 결계는 거미줄같이 가벼워서 너머의 너머는 너무 투명해서 돌아오지 못한다 - 송은숙, 「너머의 너머」,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걷는 사람, 2024. 분명 송은숙의 시적 화자는 세계에 존재하는, 오감을 통해 인식되는 사물들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 그는 시에서 표현되는 “무지개”와 “구름”에 둘러싸인, 그리하여 계절의 변화가 오감을 통해 전해져오는 물리적 세계 속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그의 오감, 특히 시선 또한 이 물리적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인식은 거듭 시각적 형상 ‘너머’에 대한 질문으로 향한다. 우리는 이러한 오감과 인식의 서로 다른 방향성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치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세계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외관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으로 말이다. 이것에 상응하듯, 그의 시적 화자는 거듭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려고 했는데, 가자고 했는데, 갈 수 있었는데”, 마치 눈에 보이는 세계와 자신이 산보할 수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듯이. 하지만 그의 시적 화자가 보여주는 어투가 의미하듯, 그는 여전히 우리와 같은 세계 속에 머무르고 있다. 「너머의 너머」에는 그렇게 머무르는 시적 화자의 세계에 대한 주관적 감상이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그 세계는 분명 무수한 색채와 기척이 가득한 생기 넘치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창”과 “담”으로 둘러싸인, 비유적 의미에서의 “고개”와 “산”에 둘러싸여 화자가 더는 나아갈 수 없는 한계의 영역이기도 하다. 이 한계의 영역 속에서 화자는 물리적인 이동이 오직 그가 존재하는 물리적 영역의 안으로 제한되어 있기에, 역설적이게도 다음과 같은 사태가 벌어진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바라보며, 자신의 오감이 감각하는 세계의 모습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더욱 강하게 감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새를 사랑하는 것은 한 마을을 사랑한다는 것 부리처럼 솟은 산이 하나 있고 산 옆으로 굽은 강이 흐르는 어느 마을을 사랑한다는 것 강에는 다리가 하나 있어 두 다리가, 네 다리가, 여섯 다리가 지껄지껄 건너다니는 은성한 풍경을 사랑한다는 것 저 거룩한 글자는 날개를 활짝 펼친 새의 눈이 바라보는 지구의 한 모퉁이를 상형한 것 다리 이쪽 끝에는 한 사내가 있어 소맷부리에서 새를 꺼내 자꾸자구 날리고 있다 새들은 새, 새, 새, 새, 새, 휘파람 소리를 내며 둥근 산의 정수리에 부리를 닦고 날아간다 그러니까 우리는 새와 함께 등성이로 비스듬히 해가 솟는 어느 마을의 맑은 사기그릇 같은 아침을 사랑한다는 것 - 송은숙, 「조감도」,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걷는 사람, 2024. 한계가 부추기는 초월에 대한 명상, 그것은 송은숙의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에서 거듭 반복되는 문제이다. 그의 시적 화자가 가진 ‘너머’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한계를 더욱 강하게 인지하도록 만들며, 동시에 그토록 강하게 인지되는 한계의 문제가 물리적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가능성의 영역을 자꾸만 상상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이것을 그의 시적 구조로 치환하여 말하자면, 한계에 대한 강렬한 감각이 세계 내에 또 다른 가능한 세계에 대한 서사를 불러일으키는 구조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그 한계가 감지되는 자리이자 가능한 세계가 피어나는 지점인 셈이다.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새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새 한 마리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것이 포함될 수 있는 모든 영역으로서의 “은성한 풍경을 사랑한다는 것”이라고. 예컨대, 세계는 결코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우리의 사랑 또한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이다. 이것을 시인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러니까 우리는 새와 함께”, “맑은 사기그릇 같은 아침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송은숙의 시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로부터 그 너머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면, 박지일의 시가 던지는 질문은 조금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물론 박지일의 시 또한 이 세계가 결코 그것이 전부 다가 아님을 전제하고는 있으나, 그 나머지 부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가령, 송은숙의 시적 화자가 명확한 시각과 대상에 대한 선명한 진술을 통해 진술될 수 없는 나머지에 대해 대략적인 실루엣을 그려내고 있다면, 박지일의 시는 명확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반복적이며 때로는 환각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두서없는 정보들의 배치 속에서 일별되는 미지의 대상의 실루엣을 그리고자 시도한다. 문이 등장한 까닭은 대개 가리고 선 그 너머를 네게 보여 주기 위함이고 (아무것도 없음까지 포함하여) 열기 위해 씨름하는 과정에서 네가 느낀 탈력과 굴복의 강도에 비례하여 문은 희열을 얻는다고 하던데. 근데, 네가 너를 작동할 수 있던가? 열거나, 열지 않거나, 선택을 어지하긴 해야 하는데… 너는 선택하지 못할 것 같고(선택하지 않는 선택까지 포함하여) 네게 너는 주도권이 없는 것 같아. - 박지일, 「물보라」, 『물보라』, 민음사, 2024, 13쪽, 부분. 위의 시에서 나타나듯 박지일이 집중하는 문제는 “문”으로 상징되는 경계성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시의 가장 핵심적인 자리에 위치한 대상인 ‘문’은 공간을 ‘안’과 ‘밖’으로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또 다른 문제에 동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문’이라는 사물이 그 외관으로 인해 갖게 되는 일종의 기만과 관계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문’은 공간을 나누고, 그 사이를 시각적으로 차폐시킨다. 그리고 이때의 시각적 차폐는 기묘한 착시를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문’ 너머에 실제로 어떤 공간이 존재하리라는 환영이다. 비록 주체가 그 ‘문’을 실제로 열어보지 않더라도, ‘문’이라는 외관은 주체로 하여금 그 너머에 어떤 실체적인 공간이 있으리라는 환영에 사로잡히도록 만든다. 실질적으로 그 너머에 실체적 공간이 존재하기에 ‘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그 너머에 어떤 실체적 공간이 있으리라는 환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물론 「물보라」 속 화자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화자는 다음과 같이 자조적으로 이야기한다. “문이 등장한 까닭은 대개 가리고 선 그 너머를 네게 보여 주기 위함이고 (아무것도 없음까지 포함하여”. 예컨대, 이 시적 세계에서 인간 주체는 그것이 기만이고 환영임을 알고 있음에도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위태롭고 나약한 존재로 느껴진다. ‘문’은 그러한 기만을 통해 주체에게 감각적 착취를 행하며 희열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한 진술들을 종합하자면 ‘문’이란 실제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비유적인 것, 예컨대 기만을 통해 인간 주체의 경향성을 추동하는 모든 대상을 가리킨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에서 ‘문’은 열리지 않는다. 사물의 기만은 시적 공간의 끝까지 이어지며, 화자는 ‘문’ 앞에서 끝나지 않는 질문을 반복하고 때로는 자신의 답변을 번복하며 존재한다. 이를 토대로 생각해보자면, 시적 화자의 모습을 통해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문 너머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 인간은 그곳에 다다를 수 있는지와 같은 가능성에 달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인이 시적 정황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실재적이냐 실제적이냐의 여부가 아닌, 그 앞에서 번민하길 반복하는 인간 존재의 모습에 가까워 보인다. 1. 누구는 없는 너. 누구만 없는 너. 네가 너를 계속하여 믿기 위해선, 너로부터 끝없이 도망쳐1. 야만 한단다. 멧닭은 듣는다; 네가 반복하여 내쉬는 한숨을. 평화를 내쉬는 것도, 불안을 내쉬1. 는 것도 아닌. 그것은 마치… 가장 작은 소리로 도망하기 위하여 1천년 동안 자기 뼈를 조금1. 씩 조금씩 긁어내는 바람의 들숨. - 박지일, 「물보라」, 『물보라』, 민음사, 2024, 32쪽, 부분. 비참하군, 설명하자니 비참해. 물보라. 너는 네가 비참하다. 이렇게 한들 저렇게 한들, 비참하다고 씀으로써 너는 너의 작업을 아주 망쳐 놓았어. 어쩔 수 없이 비참하다고 중얼거리며 너는 너를 시작하다; 네가 비참한 마트에 들르다, 네 목적이 아니었던 생물 코너 앞을 비참한 네가 어슬렁대면서, 생물 오징어 한 팩을 비참하게 찍고 마트를 나와서 비참한 건널목 건너서 비참한 랩을 뜯은 다음에, 횟집 수족관에 오징어를 풀어 놓고 악을 쓰다; 내가 비참하다고, 비참해서 비참 이의 말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때, 비참, 그게 뭘까? 어리둥절. 어리둥절이 너를 훔친다. - 박지일, 「「물보라」 우수리 편」, 『물보라』, 민음사, 2024, 189쪽, 부분. 그런 까닭에 박지일의 시집 『물보라』에서는 주체를 호명하는 대명사인 ‘나’와 ‘너’라는 시어가 가장 많이 반복된다. 그 모든 ‘나’와 ‘너’는 하나의 공통점을 소유하는데, 그것은 번민과 방황에 사로잡힌 존재들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좀 더 명징하게 말하자면, 두 가능성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기에(혹은 할 수 없기에) 발생하는 번민과 방황이라 할 수 있다. 선택의 가능성은 주체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번민과 방황에 밀어넣는 기제인 것이다. 마치 앞서 인용했던 「물보라」의 한 장면에서 시적 화자가 문을 열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과 같이 시적 화자는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이 강제되는 상황 속에서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기에 번민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러한 번민은 시적 화자를 “비참”하게, “어리둥절”하게 만들며 조금씩 지쳐가게 만든다. 예컨대, 문제는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 강요되고 있는 상황 그 자체가 문제라는 것처럼. 그러나 이 반복의 양상 속에서 ‘나’와 ‘너’는 결코 같은 모습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시적 정황이 만들어내는 다소간의 차이의 연속 속에서, ‘나’와 ‘너’는 언어상 같은 모습으로 출현할지라도 그 양태 또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물론 그러한 차이 속에서도 여전히 화자는 번민하고 방황하며 비참한 상태로 놓여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번민과 방황, 비참의 모습들은 하나의 시그널로 기능한다. 그것은 시적 화자로 대표되는 인간 존재가 상황에 굴복하지 않았다는(예컨대 상황의 강요에 떠밀려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여전히 끈질긴 사유의 줄다리기를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자체가 하나의 답변이 될 수는 없다. 여전히 시적 화자는 번민과 방황의 무대인 ‘여기’에 존재하며, 그의 사유의 줄다리기가 지속되는가의 여부와 관계없이 상황은 여전히 상황으로 굳건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불가항력적인 상황 여부와 관계없이, 진정으로 불가사의한 것은 ‘주체’가 계속해서 사유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그러한 번민이 반복될 때에만, ‘나’와 ‘너’는 ‘나’와 ‘너’로서, 이 시적 무대의 정중앙에 위치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하나의 질문이 덧붙여진다. 그것은 ‘문’ 너머에 정말로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가의 여부나 이러한 가무한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와는 조금 다른 층위에 존재한다. 즉,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시’라는 한정된 공간에 질문을 적용하자면 무엇이 저 대상으로서의 존재를 시적 화자로서, ‘나’와 ‘너’라는 주체성의 상징으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가. 물론 박지일의 시적 화자가 제시하는 답변은 ‘사유’의 지속성이다. 『물보라』의 시적 세계에서 인간 존재가 오직 한정적이며 순간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을 따름이며, 인간이라는 존재의 토대란 이처럼 위태롭고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살아지듯이 죽으라. 지긋지긋한 거울 속으로 기상캐스터가 입장한다. 중부 지방은 맑거나 아침에 차차 맑아지겠다. 남부 지방은 흐리겠다. 경남 해안과 제주도 지방은 곳에 따라 한때 비가 조금 온 후 차차 개겠다. 바람은 약하겠다. 기상청은 “아침과 낮의 일교차가 10도 이상 벌어지는 날씨가 계속되겠다.”라고 밝혔다. 아침 최저기온 섭씨 –1에서 14도, 낮 최고 기온 16에서 20도. - 박지일, 「11月 6日」, 『물보라』, 민음사, 2024, 127쪽, 전문. 죽어지듯이 살라. 지긋지긋한 거울 속으로 기상캐스터가 온다. 사투리를 쓰면서 온다. 헤이수이(黑水县) 현은 좀 덥거나 아침은 아니 온다. 나나이 칼란(Nanai Kalan)은 습하거나 땅감이 익겠고 저녁은 아주 아니 온다. 마조르다(Majorda)와 파나두라(Panadura) 해안은 한때 더워 개골창으로 변한다. 바람은 없다. 눈도 없고 비도 없고 햇볕은 아주 없고 내일은 없다. 끝. - 박지일, 「11月 6.4日」, 『물보라』, 민음사, 2024, 128쪽, 전문. 어디가 죽음 이전이고 어디가 죽음 이후인지 모르겠다. 네 앞에 선 거울이 너를 슬쩍 납치한다. 너는 그네를 돌려달라고 엄마에게 조르는 중이었다. 엄마는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거울아, 거울아, 너는 거울에게 배운 대로 빌어 본다. 거울은 미동이 없고 너는 홀로 미동을 키운다. 엄마가 거울 속에서 등장한다. 너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 너만 없다. 너는 거울을 납치하여 등에 업고 날아오른다. 너는 물구나무 한다. 네 긴 머리카락이 손잡이처럼 흔들린다. 세상이 뒤집히고 열차는 순환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 박지일, 「11月 9.7日」, 『물보라』, 민음사, 2024, 134쪽, 전문. 정리하자면, 박지일의 시적 세계에서 그토록 호명되는 ‘나’와 ‘너’라는 인간 주체는 실로 한 순간의 물보라와 같이 순간적이며 부서지기 쉬운, 영속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위태로운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시집의 후반부에 위치한 일기의 형태를 띤 작품들에서는 유독 의지 혹은 지시를 전달하는 단정적인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분명한 대응관계라 말하기는 어렵겠으나, 어쩌면 이러한 의지와 지시를 담은 단정적인 표현들은 유약한 인간 존재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단서들이 아닐까 싶다. 이 시적 세계에서 ‘인간’ 존재란 그처럼 무수한 순간을 거쳐야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시적 세계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란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가와는 전혀 다른 층위의 문제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 이 『물보라』와 같은 부서지기 쉬운 존재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가 계속되는 한에서일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적 공간은 단지 언어를 통한 재치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위태로운 실존이 걸린 무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적 무대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 존재가 오직 거듭되는 방황과 번민 속에서 사유를 이어가는 한에서 인간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그것을 일종의 철저한 데카르트적 주체라고도 이야기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주체는 보편적 의미에서의 데카르트적 주체보다도 훨씬 더 회의론적이며 위태로운 것이라는 한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지녔기에 인간인 것이 아니라, 생각을 멈추는 순간 인간일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조건이라는 것으로.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박지일의 시집 『물보라』가 지닌 여럿 가운데 하나의 단상에 불과하다. 어쩌면 언어로 짜집어진 사물과 사물의 연쇄 속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의미론적 발견이야말로 그의 시가 지닌 최고의 미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시집 또한 이 세계가 X.Y.Z라는 세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되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온전히 설명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감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반복될 것이며, 반복되는 질문 속에서 박지일의 시적 주체는 여전히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3차원의 공간임을 상식을 통해 알고 있다. 입체성을 지닌, 그림자를 지닌 세계의 부피들이란 그 자체로 이 세계가 3개의 방향 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시인의 작품을 통해 살펴보았듯, 세계와 그 안의 사물과 일어나는 현상들은 세 개의 축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될 수 없다. 설명될 수 없는 이 실재의 영역을 향해 시인은 거듭 질문을 던지며 자기만의 답변을 질문의 형태로 거듭 제시한다. 우리가 언젠가 온전한 답변에, 정답에, 진리에 이를 수 있을까? 다소 회의적으로 말하자면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빛이 이 세계에서 30만km의 속도를 지닌다는 것이 하나의 규칙인 것처럼,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모든 것의 정답에 다다르는 일 역시 불가능한 것이 세계의 규칙인지도 모르므로.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질문을 이어가며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혹은 잠재되어 있던 위기를 거듭 질문의 형태로 발견해나갈 것이다. 아마 그때까지 시는 거듭 쓰여질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기를 지속하는 한에서, 그리하여 우리가 언어를 통해 이 불완전한 세계를 더듬거리며 계속 나아가는 한에서.

월간 현대시 임지훈 송은숙박지일방향성「너머의 너머」「물보라」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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