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딩아돌하 | 2024년 봄호제70호

사랑과 하나인 자의식 ― 이규리 시인의 아포리즘을 통해서 읽는 근작시

천수호 시, 문학평론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으로 등단했으며, 문학동네 출간 시집인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로 2021년 5회 매계문학상 수상했다. 현재 단국대 초빙교수와 명지대 객원교수로 있으며, 또한 횡성예버덩문학의집의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는 민음사에서 『아주 붉은 현기증』을, 문학동네에서 『우울은 허밍』과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를 출간했다.

길들이면서 살아가야 하는 게 관계의 삶이라면 영원히 길들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예술의 삶이다. - 이규리1)


  사람은 혼자 살지 않고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관계 속에서 고뇌하고 기대하고 각성하고 절망한다. 관계 속에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지만, 관계의 인식이 절망으로 내몰기도 한다. 나만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이런 비슷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뜻하지 않은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규리 언니와의 인연은 벌써 20년이다. 첫 시집 원고 뭉치를 고맙게도 후배인 내게 먼저 보여주었다. 그것은 자매가 식구들 몰래 공유한 은밀한 비밀처럼 수북한 구석 하나를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곧 내가 서울로 옮겨와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언니의 선전은 내게 늘 긴장을 주었고, 단아한 모습이 시인으로서는 고독해 보였지만 내겐 늘 단정한 백합꽃 언니였다. 언니의 시집을 꾸준히 읽었고 언니의 산문들도 빠짐없이 읽었다. 언니의 책들이 쌓이면서 점점 나와 멀어 보이던 언니에게서 놀랍게도 너무도 많은 나를 보게 되었다.

  “자의식은 평생 따라다니는 질병 같은 거다. 그 세포는 증식하거나 분열하지도 않은 채 곳곳에 눈뜨고 있다. 자의식은 자의식을 부정하며 받아 안는다. 측은한 점은 그 고단한 대가가 자신에게 누적된다는 것이다”2). 언니의 글에서 이런 것을 발견하면 안심이 된다. “러블리한 규리 씨가 속 깊고 담담한 사람이 사랑스럽고 상큼한 사람”3)에게도 “아픈 의식의 티눈”4)이 있었구나, 교환할 수 있는 마음이 있구나 생각하면 반갑기 그지없다.

  언니는 작년에 남동생을 떠나보냈고, 나는 재작년에 둘째 언니를 보냈다. 동생을 보낸 언니는 마음공부가 단단하여 우리가 원래 쓸쓸한 사람인 것을 지그시 누르듯 바라 보고 있었지만, 나는 좀 더 격하게 슬픔의 난간에 휘둘리고 있었다. 나보다 좀 늦게 찾아온 언니의 슬픔을 위로하려다가 오히려 언니가 짚어주는 마음의 맥을 지그시 잘 누를 수도 있었던 것 같다. 언니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픔의 집에서 우리가 결국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아니, 우리가 태어난 곳이 이미 아픔의 집이었다는 것을.


  내가 막 태어났을 때 엄마는 나를 강보에 싼 채 몇 시간 윗목에 밀쳐놓았다. 몇 시간 동안 내가 올려다본 세상, 두통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두통인 세상, 꽁지 흰 새가 내 방 앞에 머물렀다. 딸만 내리 여섯 낳은 엄마는 나보다 몇천 번 더 꽁지 흰 새를 그렸겠지만 윗목에 밀쳐둔 몇 시간의 비애가 내 생을 지배하리라고....나는 그를 두통이라 부르겠다.
- 「윗목」(『앤디 워홀의 생각』)부분


  첫 시집에 수록된 위 시를 읽으면 나는 기억도 할 수 없는 신생아의 내 모습을 그려낸다. 다섯째 딸로 태어난 나의 출생담과 너무도 닮아 있다. 규리 언니는 여섯째 딸로 태어나 윗목에 밀쳐져 세상에 나오자마자 소외의 시간을 보냈다. 나도 그랬다. 나는 가끔 그 짠한 이야기에 빠져서 스스로의 연민으로 울적해지곤 했다. 규리 언니나 내가 아들이 아니라는 실망감 때문에 어머니에게 외면당한 설움이 있었다는 게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언니의 시에 내가 공백 없이 포갤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아마 이런 비슷한 이력 때문 아닐까 싶다. 특히 언니의 최근 산문집인 『사랑의 다른 이름』에 수록된 ‘기억’ 편들은 열쇠를 공유한 가족 같은 느낌으로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린 부분이었다.

  「기억 4」의 ‘이별’ 편에서 언니들이 한 명 씩 시집 갈 때의 슬픔과 상처는 나를 거쳐 간 한때의 낡은 내 잠옷 같다. 결혼식장에서 속수무책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까지 어쩜 그리도 나는 규리 언니의 괴로운 구석들과 닮아 있는지, 그러면서도 시에의 복무는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언니는 “비애의 방식”으로 삶의 요소요소를 지나왔고 비애의 내용으로 그 앙금들을 정리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막내였던 규리 언니가 이제 큰언니가 되어 후배들을 다독이는 자리에 있다. 모두가 언니, 언니라 부르고 모두가 다가와 무언가를 호소한다. 마치 언니가 무슨 대단한 축제이기나 한 것처럼 언니 앞에 와서 천막을 치고 음식 판을 벌이고 술판을 벌인다.


언니, 언니 부르는데
언니는 어디서 나왔을까
참석하기도 전에 축제가 끝나고

바람이 불어, 천막이 흔들려 언니
어떻게 해?

가방을 풀기도 전에 다시 싸야 하는데
돌아갈 차가 없네

언니에게 축제가 있을까

언니는 정오야, 계속 요구하는 슬픔이야, 내일이야

언니는 홀로 자기 자신이 되고 싶었다

머리를 감으며 비누 거품을 내며

무성하게 힘을 내자

그놈의 천사는 내다 버리고

언니밖에 없다는 말 속으면 안 돼

역사는 어느 페이지도 언니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언니가 뭐가 어때서요?

그런 말은 좋지가 않아
언니가 있는 동안
너는 언니에 도착하지 않잖아

우린 모르는 언니들의 팔을 빼고 사지를 틀었는데
의자도 주지 않고

언니는 늘 언니로 있어,

미안할 수도 만날 수도 없는 언니와 언니들은 저 멀리서도
언니라는 말에

벌떡
헐레벌떡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가르치려 든다』, “그녀는 홀로 자기 자신이 되고 싶었다.” 

창비 - 「돌림 노래」 전문


  ‘언니’라는 호칭은 한층 더 깊은 심연처럼 자기 극복은 물론이거니와 아우들에 대한 헌신의 내공이 필요하다. 바람이 불면 천막이 흔들리는 당연한 상황에도 언니를 찾는 아우들, 돌아갈 차가 없다고 징징대는 아우들 때문에 언니에게 축제의 날은 오히려 괴롭다. 언니는 정오처럼 짧은 그림자로 기립해서 대기해야 하는 슬픈 존재다. 언니는 무슨 마술에 걸린 천사처럼 그 호칭에 침착하게 희롱당한다. “언니가 뭐가 어때서요?” 이런 “팔을 빼고 사지를 트”는 말은 결코 언니를 쉴 수 있는 의자에 앉히는 게 아니다. 언니를 늘 언니로 있게 하려는 돌림노래에 불과하다. 이런 걸 다 알면서도 언니는 참 놀랍다. 전화기 속에서 들려오는 언니라는 말만으로도 헐레벌떡 달려갈 자세를 취한다.

  관계에 있어서 다른 사람을 지각함으로써 자신과 관계했던 또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이 있다. 막내인 규리 언니가 숱한 후배들의 언니가 되면서 비로소 다섯 언니의 처연한 방식을 이해하게 된 것일까. 모든 것을 첫눈처럼 스쳐 보내는 마음, 그네들을 첫눈으로 인식하는 마음, 그리하여 마침내 그 부질없음을 종내 글썽이는 의미로 허락할 수 있게 한 것 아닐까.

언니들의 그때 그 이야기들이 부질없는 것들에 대한 학습이었음을 이제는 다 안다.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당신은 첫눈입니까」 부분)


푸른 사과가 없는 사과보다 낫지만
나쁜 눈이 없는 눈보다 나을 수 있을까

-언니 현실에 좀 사세요

그녀가 말했을 때
뜨끔했다
내가 사랑이라 정의한 것들 사실은 죄다 망했으니까

설득하지 않을게
조용히 구석에 있을게
지하를 어떻게 좀 해 주겠니
물속이라면 우리 트라우마가 있잖아

그렇더라도 이 슬픔을 평가절하하지 말아줘

언니, 현실을 살라니까요

너의 현실은 익사가 재미있니?

- 「에피소드」 부분


  2023년 7월 15일의 집중호우로 충북 오송 지하 차도가 침수되는 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는 사망자 14명 부상자 9명이 발생하는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 우리는 이미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하면서 승객 304명이 사망하는 실로 대형 참사를 겪었기에 물에 관한 사고에 예민해져 있었다. 그래서 이 시에서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물속에 넣은 적이 있다”고 특히 어린 학생들이 희생된 사고에 대해 어른으로서 크게 반성하고 있다. 지하 차도에서 빠져나오려면 수영이라도 배워야 하고 구명조끼라도 입었어야 한다고 관계 기관의 어설픈 대처 능력을 우회적으로 꼬집고 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인가. 그럼에도 공무원들은 잘못을 인지하거나 제대로 사과하지도 않고 결론을 재빨리 내린다.

  “언니, 현실을 살라니까요” 이 목소리가 너무 민망하다. 물속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한 언니의 고통을 이해하니까. 아마도 저 목소리는 이 사고에 대해 무감각한 세상의 시선이 아닐까 싶다. 언니는 세월호 사고로 희생한 단원고 학생인 선우진의 생일 시를 쓴 적이 있다. 선우진 학생의 자료를 받아서 2주 동안 온전히 선우진의 삶을 살아본 언니니까, 언니가 봉합되지 않은 저 고통의 세계를 먼저 실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노르웨이 시인 울라브 하우게가 춥고 비가 많아서 “푸르기만 한 사과”를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한 시 구절을 떠올리지만 그래도 언니는 “나쁜 눈”은 “없는 눈”보다 나을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든다. “내가 사랑이라 정의한 것들 사실은 죄다 망했으니까” 이 구절에서 나는 언니의 자의식이 사랑으로 가는 길이었고, 언니가 아프게 견디면서도 믿고 싶었고 지향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사랑이었음을 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 마음이 아우들에게는 첫눈이라고.


나이가 들면서 클래식이 좋아진다는 그녀는 식은 커피를
졸졸 부추 화분에 부어 주네

아침의 화답은 이파리 끝이 가늘게 흔들리는 일부터

약함을 신뢰하는 일까지

무얼 대적할 수 없는 이 초록이 왜 자랑스러워
사는 방법이 골똘해지고

세상에 어떻게 폭력이 가능할까를 생각하네

부추가 골목과 계단을 만나면서
이 사랑은 오래되었는데

나를 단정하게 잘라 줘
폭력은 자라지 않는 게 아니라 잘 잘라 주는 거야

그걸 부추가 일러주었다

- 「아침의 일」 부분


  “폭력의 반대말은 무얼까. 비폭력? 사랑? 아니 ‘슬픔’이다. 슬픔 앞에서 허세는 스르르 무너지고 만다. 보이지 않는 힘 중 가장 아름다운 깊이이다.”는 언니의 아포리즘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렇다면 폭력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슬픔이던가? 그래서 전쟁의 참혹한 모습이 전 세계에 보도되고 그 슬픔의 장면들이 번져서 폭력을 멈추게 할 힘을 모으게 되기도 하는 건가. 부추가 골목과 계단을 만나면 그 부추밭의 오래된 사랑은 단정하게 잘리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왔다고 느껴지는 곳에서 다시 발을 버려야 하는 것5)처럼 부추는 초록이 자랑스러우면서도 무얼 대적하려 들지 않는다. 부추는 자신의 저돌적 의지를 조용히 내려놓는다.

  여기서 ‘부추’는 “차츰 역동적인 이 세계로부터 제외되6)고 싶은 언니와 심정적으로 깊이 연루된 식물이다. “힘을 빼려고 해도 힘이 들어갈 때는/부추에게로 와//나이가 들면서 부추도 클래식이 좋아”(「아침의 일」 부분)에서 그것은 더 확연해지는 데, 클래식을 좋아하고 커피를 좋아하는 부추는 분명 보편적이지 않는 부추이며, 슬리퍼 끄는 소리가 아슬하게 다가와 다시 정적이 들 때 언니는 부추처럼 하늘거리며 부신 눈을 감고 있었으리라.


방울토마토가 쏟아졌다
아침이 계단으로 사정없이 굴러가는데
달아나는 토마토를
멈추어야 하는데

더욱 더 멀리 아득하게

내려가고만 있네
고 작고 말랑한 것이 손쓸 수 없도록

더 내려갈 수 없을 때에

올라갈 수 없는 위가 생겼는데

당신들이 대체로 뻔하고 진부해질 때
방울토마토가 하염없이 굴러가는 일을 한번 생각할래?

계단은 끝없이 쏟아지고
저렇게 경쾌한 노래는 원래 남의 것 같지 않은가

토마토가 계단을 만들던 일
절망이 명랑하게 굴러가는 일

내 생의 문장이 이토록 힘을 받아 굴러간 적 있을까

왜 나는 여기 있지?
주워도 끝나지 않는 일이 왜 나의 일이지?
고민하는 동안
방울토마토는 두려움을 모르고 구르고 있네
털썩 계단에 주저앉을 때
빨간 방울과 방울들이 목금 소리를 들려주네

방울토마토 따라
굴러 가는 월요일 말랑말랑해지는 월요일
토마토는 힘이 없는데 힘이 있지
속도가 근심을 다 지워버려서

도시락이 사라지면 어때 월요일을 모르면 또 어때
깨어난다면 그것이 꿈인 날들 속에서

여전히 계단은 굴러가고 있는데

- 「월요일의 도시락」 전문


  이 방울토마토는 첫 행이 막 출발하여 그 다음 행이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불가능한 시 쓰기의 특성을 가진다. 우리가 어떤 영혼의 불길과 처음 맞닥뜨릴 때 그 설렘에 붙들린 상태에서 뭔가를 써 내려갈 때 우리는 이런 멈출 수 없는 흥분에 사로잡힌다. 방울토마토가 계단에서 사정없이 굴러떨어지듯이 시인의 잠재된 의식을 끊임없이 흔들어 놓는다. “당신들이 대체로 뻔하고 진부해질 때/방울토마토가 하염없이 굴러가는 일을 한번 생각할래” 에서처럼 방울토마토가 아래로 계속 굴러떨어지는 것 같은 시 쓰기는, 규범적 질서에서 벗어나, 뻔한 진부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니 시는 속도가 밀어붙인 강력한 힘이 생기기 마련이다.

  “무의식은 그 범위나 깊이가 증명되지 않기 때문에 저렇게 경쾌한 노래는 원래 남의 것 같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열심히 굴러가는 글들은 말랑말랑해져서 자유로우면서도 단단한 힘을 가지게 된다. 시를 쓸 동안 그 속도 때문에 주춤하거나 멈추려는 우려는 사라지고 그다음 줄에 대한 부담도 없어진다. 여기에 온전한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시인은 대상을 위해 반복하는 노동자에요. 무수한 반복이 노동을 넘게 해요. 어느덧 저를 넘게 해요.” 7)

  물론 이 시를 의미 자체로 분석해 보면 그 의미가 분명한 시다. ‘월요일’이란 대체로 얼마나 막막한 시작인가. 엎질러진 방울토마토처럼 월요일의 도시락을 없애 버린다면 우리의 고단한 시작은 유보될 수도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미루기만 한다면 우리는 언제 좀더 위로 올라설 수 있을까. 이미 도시락을 사야하는 서민들은 다 알고 있다. 추락하는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보이지 않는 계단을 한 단계 올라서는 것이 얼마나 벅찬 일인지를.

  하지만 나는 이 시를 이런 의미로만 읽기 보다는 “쏟아지는 이 작은 방울토마토”에서 시의 모습을 만나려 한다. “시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실패이다. 머묾이 아니라 떠남이며 설렘이 아니라 무너짐이다. 정확히 그 지점이 시가 나오는 곳이다. 시는 그것들을 일으키려 애쓸 것이며 동시에 어떻게 아름답게 쓰러지는가를 보여줄 것이다.”8) 단언하건대 언니는 계단에서 도시락을 엎지를 만큼 ‘월요일의 도시락’을 허술하게 장만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 생의 문장이 이토록 힘을 받아 굴러간 적 있을까”라며 언니는 지금 절망을 명랑하게 굴리고 있다. 이제는 토마토가 아니라 아예 계단을 굴리면서 열심히 구르는 “언어의 선물”이 바로 “문학의 힘”9)이라는 것도 함께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닐까.


펄펄 끓고 있는 국솥에

나는 무얼 더 넣고 싶은가
정신 차리고 싶은가

토란대와 숙주 고사리가 한사코 현실을 붙들고
제 사연들을 들어달라 들어달라
부글거리다가

숨을 놓으면,

인부들은 땅속 깊은 곳에 어린 소들을
차례로 던졌다
그중에는
다리가 뽀얀 순한 눈도 있었다

가느다란 뽀얀 다리가 허공으로 솟았다 내릴 때도 우린 멈출 수 없었다

끓는 국솥으로 걸어들어가는
시퍼렇게 언 해

미안하지도 않고
여기까지
왔다

- 이규리, 「지독」(『당신은 첫눈입니까』) 전문


  ‘방울토마토’라는 시어에 시의 진행을 맡긴 시를 읽다 보니,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에 수록된 위의 시가 떠오른다. 이 시도 요리 과정을 창작 진행 과정에 빗댄 재미있는 시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것은 “펄펄 끓고 있는 국솥” 같은 작가의 심리적 고양 상태에서 출발한다. “정신을 차리고 싶은가”라는 부분은 이성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금기시하며 고양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의지로 보인다. “토란대와 숙주 고사리”는 시의 소재들이다. 그들이 현실을 붙들고 부글거리다가 숨을 놓는 부분에서, 시 쓰기는 ‘경직’ 보다는 ‘유연’한 상태가 훨씬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로테스크한 장면인 “인부들이 땅속 깊은 곳에 어린 소들”을 차례로 던지는 것인데 이것은 시의 재료에 화려한 수사를 가미하기보다 살아있는 언어로 생명성을 지키는 방식이다. 뿐만 아니라 다리가 뽀얗거나 순한 눈을 가졌다는 것은 소재들의 순수함을 잘 보존하는 상태가 아닐까. 더구나 “가느다란 뽀얀 다리가 허공으로 솟았다 내릴 때도 우린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역시 산채로 넣는 이미지의 생동감은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결국 그 고양된 상태에서의 시적인 진행이 “끓는 국솥”으로 계속 이미지화되고 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반전으로 “시퍼렇게 언 해”가 등장한다. 해가 “시퍼렇게 언”다는 모순어법으로 시의 흐름을 역전시키며 시적인 감흥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 시의 결미에서는 또 언니의 자의식이 감지된다. “미안하지도 않고”라니? 시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 감정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시의 진행에 희생된 뽀얀 다리와 순한 눈을 가진 어린 소에게 죄책감이 비치는 부분이다. 언니는 그런 자의식으로 자신에게 늘 미안하면서도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자신의 고단한 일면임을 안다.


열차가 달리는 동안 하늘은 개다 흐리다를 반복했다
터널을 몇 개 지나면서

창 쪽의 내가
가리개를 살며시 올렸다가
빛이 돌아오면
내리곤 했다

옆자리의 책 읽는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게 나의 일
몇 차례 가리개를 올리고 내리는 동안

나는 책 읽는 사람 옆에서
그늘을 만들어주는 사람으로 사는 게 퍽 어울린다 생각했다

어둠과 밝음을 발명해내는 시간 안에는
반지하의 터널이 있고
옥탑의 가파름이 있었다

그렇더라도 들고 나는 마음은 왜 이토록 세심한가 쓸쓸할 때

하찮음은 몸에 밴 나의 일,

그게 누구라도
부디 가리개를 올리고 내릴 때의 힘이
고요하기를, 적당하였기를

햇빛을 조절하던 집중은 꽤 쓸 만했지만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모르게 끝나야 하지 않은가

책의 제목이 궁금했던 한 사람을 모르고
옆자리가 움푹 팬 것도 모르고

그 독서는 다음 역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 「그늘을 만드는 시간」 전문


  언니는 그런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도 과히 좋아하지 않지만, 특히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먼지”10)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으로 인해 기침이 나면 그 “기침이 다른 사람을 방해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11) 하는 사람이 언니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언니의 자의식은 사랑을 향해 있어서, “어떻게든 맑게 눈뜨고 싶다는 믿음”12)이 크므로, 모르는 사람에게도 재빨리 손차양을 만들어주는 그런 사람이다. 이 시는 열차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책 읽는 것이 방해되지 않게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니 어쩌면 생각보다 먼저 손을 내어놓는 사람이어서 언니에게는 이미 몸에 밴 일이기도 하다. 더구나 앞의 여러 시편에서 본 것처럼 언니는 시 쓰기에 대한 강렬한 열정을 두고 있는 만큼, 독서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특별한 배려가 저절로 행해질 수밖에 없다. 책 읽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보며 손차양을 해주는 마음이 언니의 문학에 대한 애정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이 시에서도 언니는 중요한 시론 카드를 던져 놓는다. “모든 이야기는 모르게 끝나야” 한다는 것인데, 시의 의미를 확정 짓고 써나가는 게 아니라 무방비 상태의 상상력으로 예상하지 않은 세계를 펼쳐나간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야기의 심장이 저절로 파닥거려서 글쓴이도 그 끝을 알 수 없게 이어지는 것이 진정 피가 도는 시가 아니겠는가. 물론 이 구절에 책을 읽는 사람이 눈치챌 수 없게 끝까지 그늘을 지켜주려는 겸손한 배려가 담겨있음도 당연하다.

  언니의 이런 시 창작 작업은 모두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이며, 언니는 종종 그 심연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심연은 무엇일까? 심연은 심연을 보려고 노력하는 자에게만 감지되는 보이지 않는 지점일 것이다.”13)라고도 하고, “누구나 자신의 심연을 보는 일은 두려울 것이다. 보려 한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심연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는 것. 천신만고 끝에 왔다고 느껴지는 곳에서 다시 발을 버려야 하는 것.”14)이라고도 한다.

  박상수 평론가는 언니의 세 번째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해설에서 언니의 시를 읽는 것은 “자신 안의 심연 위로 훌쩍 뛰어오르는 것이며, 심연을 수긍하고 심연을 잠재우”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언니의 시에 “수긍과 지혜와 안부와 토닥임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그것에 덧붙여 언니의 시에 “사랑과 하나인 자의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언니의 신작 시와 근작 시를 읽으면서 언니의 사랑이 이제 언니의 섬세한 내면에서 밖으로 걸어 나와, 이 사회 제도를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더 큰 사랑의 미래를 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반갑다. 이렇듯 사랑을 향한 자의식은 언니가 말한 ‘질병’이 아니라 사회변화의 마법을 꿈꾸게 하는 축복이다.



천수호

프로필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아주 붉은 현기증’, ‘우울은 허밍’,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딩아돌하 소시집>

-신작시


아침의 일


나이가 들면서 클래식이 좋아진다는 그녀는 식은 커피를

졸졸 부추 화분에 부어 주네


아침의 화답은 이파리 끝이 가늘게 흔들리는 일부터


약함을 신뢰하는 일까지


무얼 대적할 수 없는 이 초록이 왜 자랑스러워

사는 방법이 골똘해지고


세상에 어떻게 폭력이 가능할까를 생각하네


부추가 골목과 계단을 만나면서

이 사랑은 오래되었는데


나를 단정하게 잘라 줘

폭력은 자라지 않는 게 아니라 잘 잘라 주는 거야


그걸 부추가 일러주었다


약한 사람은 건드리지 마,

그게 골목의 룰이잖아


그런데 왜 날이 새면

저 건너 여린 초록의 피 흘리는 소식부터 오는지

포탄 더미를 들춰야 하는지,

이거 초현대적이야


부추를 보고 생각이 많아지면

일월이 미안해지면 그때


부추의 방식이 되는 것


견디는 쪽을 강요할 순 없지만

그럴수록 부추를 믿을래


울면서 따라간 시간이 역사가 된

슬픈 이야기는

한국적이었는데 전 지구적이더군


지친 몸을 데워줄게, 암울하지만

우리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기를


힘을 빼려고 해도 힘이 들어갈 때는

부추에게로 와


나이가 들면서 부추도 클래식이 좋아


그녀가 슬리퍼를 끌며 다가올 때쯤

귀를 세우는 이 정적이


아슬하게, 참 좋아



돌림 노래


언니, 언니 부르는데,

언니는 어디서 나왔을까

참석하기도 전에 축제가 끝나고


바람이 불어, 천막이 흔들려 언니,

어떻게 해?


가방을 풀기도 전에 다시 싸야 하는데

돌아갈 차가 없네


언니에게 축제가 있을까


언니는 정오야, 계속 요구하는 슬픔이야, 내일이야


언니는 홀로 자기 자신이 되고 싶었다


머리를 감으며 비누 거품을 내며

무성하게 힘을 내자


그놈의 천사는 내다 버리고


언니밖에 없다는 말 속으면 안 돼


역사는 어느 페이지도 언니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언니가 뭐가 어때서요?


그런 말은 좋지가 않아

언니가 있는 동안

너는 언니에 도착하지 않잖아


우린 모르는 언니들의 팔을 빼고 사지를 틀었는데

의자도 주지 않고


언니는 늘 언니로 있어,


미안할 수도 만날 수도 없는 언니와 언니들은 저 멀리서도

언니라는 말에


벌떡

헐레벌떡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가르치려 든다』, “그녀는 홀로 자기 자신이 되고 싶었다.”-창비-



에피소드


왜 들어갔는데 나오지 않습니까

비가 왔을 뿐

지하차도는 잘못이 없는데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물속에 넣은 적이 있다


수영을 다시 배울까

구명조끼를 넣어야 하니 큰 가방을 살까


반성문을 쓴 적 없는 담당 1과

반성의 이유를 배우지 못한 담당 2가

서로 악수를 하고 결론을 내버리도록


옥루에선 아직 물이 떨어지고 있는데

은하는 벌써 한 바퀴를 돌았다15)


그들도 노을을 바라본 적 있겠지

노을을 보던 나쁜 눈은 없었는데

눈은 바뀐다


푸른 사과가 없는 사과보다 낫16)지만

나쁜 눈이 없는 눈보다 나을 수 있을까


-언니 현실에 좀 사세요17)


그녀가 말했을 때

뜨끔했다

내가 사랑이라 정의한 것들 사실은 죄다 망했으니까


설득하지 않을게

조용히 구석에 있을게

지하를 어떻게 좀 해 주겠니

물속이라면 우리 트라우마가 있잖아


그렇더라도 이 슬픔을 평가절하하지 말아줘


언니, 현실을 살라니까요


너의 현실은 익사가 재미있니?




-근작시


월요일의 도시락


방울토마토가 쏟아졌다

아침이 계단으로 사정없이 굴러가는데

달아나는 토마토를

멈추어야 하는데


더욱 더 멀리 아득하게


내려가고만 있네

고 작고 말랑한 것이 손쓸 수 없도록


더 내려갈 수 없을 때에


올라갈 수 없는 위가 생겼는데


당신들이 대체로 뻔하고 진부해질 때

방울토마토가 하염없이 굴러가는 일을 한번 생각할래?


계단은 끝없이 쏟아지고

저렇게 경쾌한 노래는 원래 남의 것 같지 않은가


토마토가 계단을 만들던 일

절망이 명랑하게 굴러가는 일


내 생의 문장이 이토록 힘을 받아 굴러간 적 있을까


왜 나는 여기 있지?

주워도 끝나지 않는 일이 왜 나의 일이지?

고민하는 동안

방울토마토는 두려움을 모르고 구르고 있네

털썩 계단에 주저앉을 때

빨간 방울과 방울들이 목금 소리를 들려주네


방울토마토 따라

굴러 가는 월요일 말랑말랑해지는 월요일

토마토는 힘이 없는데 힘이 있지

속도가 근심을 다 지워버려서


도시락이 사라지면 어때 월요일을 모르면 또 어때

깨어난다면 그것이 꿈인 날들 속에서


여전히 계단은 굴러가고 있는데


- 2022. 시산맥 봄



그늘을 만드는 시간


열차가 달리는 동안 하늘은 개다 흐리다를 반복했다

터널을 몇 개 지나면서


창 쪽의 내가

가리개를 살며시 올렸다가

빛이 돌아오면

내리곤 했다


옆자리의 책 읽는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게 나의 일

몇 차례 가리개를 올리고 내리는 동안


나는 책 읽는 사람 옆에서

그늘을 만들어주는 사람으로 사는 게 퍽 어울린다 생각했다


어둠과 밝음을 발명해내는 시간 안에는

반지하의 터널이 있고

옥탑의 가파름이 있었다


그렇더라도 들고 나는 마음은 왜 이토록 세심한가 쓸쓸할 때


하찮음은 몸에 밴 나의 일,


그게 누구라도

부디 가리개를 올리고 내릴 때의 힘이

고요하기를, 적당하였기를


햇빛을 조절하던 집중은 꽤 쓸 만했지만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모르게 끝나야 하지 않은가


책의 제목이 궁금했던 한 사람을 모르고

옆자리가 움푹 팬 것도 모르고


그 독서는 다음 역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2023. 문학인 가을


  • 1) 이규리, 『시의 인기척』, 난다, 2019, 50쪽.
  • 2) 같은 책, 16쪽.
  • 3) 박상수, ‘러블리 규리씨’ 이규리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해설 113쪽.
  • 4) 이규리, 같은 책, 16쪽.
  • 5) 이규리,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난다, 12쪽.
  • 6) 같은 책, 158쪽
  • 7) 이규리, 『시의 인기척』, 난다, 2019, 148쪽
  • 8) 같은 책, 86쪽
  • 9) 같은 책, 9쪽
  • 10) 같은 책, 26쪽.
  • 11) 같은 책, 26쪽.
  • 12) 같은 책, 작가의 말
  • 13) 이규리, 『사랑의 다른 이름』, 아침달, 228쪽
  • 14) 이규리,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난다, 23쪽
  • 15) 고운 최치원
    *玉漏猶摘 銀河巳回
    -물시계에선 아직 물이 떨어지고 있는데 은하수가 벌써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 16) 올라브 하우게 「푸른 사과」 부분
  • 17) 문학동네 2023. 가을, <작가초상, 조시현>, p41

추천 콘텐츠

김다솔 자주, 계속 실패해보겠습니다 : 김지연, 『조금 망한 사랑』 (문학동네, 2024) / 안윤, 『모린』 (문학동네, 2024)

1. 말할 수 없는 균열 예측 불가능한 일들의 연속.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을 이렇게 표명한다면 분명 많은 이가 의문을 표할 것이다. 지난하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들을 자주 다루는 작가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해보건대 두 사람의 소설에는 독특한 사건들이 꽤나 자주 등장한다.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어딘가 금이 가고 삐걱대는 삶 앞에 속수무책으로 던져진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김지연의 인물들이 해괴한 일을 직접 나서서 ‘벌이는’ 사람들이라면, 안윤에게는 그러한 일을 마주한 뒤 이전과는 다른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 사람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위들은 어쩐지 무모하고 무용해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효용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러한 움직임들은 아무거나 믿거나 믿어야 할 것을 믿는 일을 거부하고, 확신할 수 없지만 옳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이들의 동작은 곧 일상의 균열을 마주하는 자세와도 같다. 사람들이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결함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온해 보이는 세계를 지적하려면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세계의 균열은 쉽게 발설할 수 없는 무언가다. 그렇다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까.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그러니 이상하고 유별난 인물들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잘 봉합된 듯 보였으나 결코 다 가릴 수 없었던 세계의 미세한 틈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2.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언뜻 보기에 『조금 망한 사랑』은 체념과 포기를 반복하는 망한 인생의 집합소 같다. 전세 사기, 금전 관계에 있던 친구와 애인의 배신, 실직과 구직난처럼 신자유주의와 투기 자본주의의 광풍에 베여 너절해진 인물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그런데 『마음에 없는 소리』(문학동네, 2022)를 읽었던 이들이라면 세태를 첨예하게 부감하고 표현하는 적실함뿐만 아니라, 농담과 같은 특유의 가뿐함이 김지연 소설의 또 다른 활력이라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테다. 이번에도 다소 무겁고 무기력해 보이는 사정들 틈에 유별난 광경들이 돋보인다. 이른바 김지연식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68)다. 몇 가지 사연만 잠시 나열해보자. 양육권을 포기했던 아이를 말 그대로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 다시 키워볼 생각을 하면서 죽은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여자(「좋아하는 마음 없이」). 빚만 잔뜩 남기고 떠난 전 여자친구에게 자꾸만 마음이 기우는 아이러니를 겪는 레즈비언(「반려빚」). 달밤에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포기」) 출입이 금지된 저수지의 한가운데까지 기어코 노를 저어 도달했다는 일화(「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까지. 소설의 인물들은 왜 자꾸만 이상한 일을 벌일까. 김지연의 소설은 삶이 이미 망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망해 나가리라는 잔인한 현실 공식을 동력 삼는다. 그곳엔 “반려빚처럼, 있어서는 안 되는 것도 태연하게 있”(「반려빚」, p. 104)고 누군가는 “있는 놈들을 위해 아주 싼값의 육체노동에 부려지”(「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 p. 42)지만 이토록 불합리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제도도 없”(「반려빚」, p. 96)다. 자본의 바깥을 떠올리는 일조차 돈의 힘에 기대야만 가능한 오늘날, 소설 안팎의 현실을 살피며 저항의 포기를 물었던 우리에게 김지연은 두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하나, 설명 혹은 주장하기. “소리 지르고 때려 부수는 것만이 화내는 방식인 건 아니잖아요.”(「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51) 둘, 괴상망측한 행동들을 늘어놓기. 그런데 짐작과 달리 이때의 망측(罔測)은 망할 망(亡) 자를 쓰지 않는다. 그물[网]과 망함[亡]이라는 뜻이 더해진 한자[罔]는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그러진 상태를 가리키면서도, 완전한 끝을 잠시 유예하는 힘을 발휘한다. 망측한 일은 낯부끄러울지언정 완전히 망하지는 않은 무언가다.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 역시 조금 망그러졌을지라도 여전히 어딘가에, 누군가와 분명히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폐기된 존재를 망가진 상태로라도 끌어올리려는 작가의 수고로움이 와닿는다면,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행위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다. 그들은 차가운 현실이야말로 ‘진짜 해괴한 것’이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김지연이 말하는 포기는 더 이상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마음’에 가깝다. 그런데 인물들은 먹고살기에 급급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망한 삶이 평범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괴이한 공식을 꼼짝없이 따라야만 해서 포기한다. 그래서 「포기」에서 거듭되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p. 19)은 자본에만 기를 쓰고 달려드는 평범한 세계를 조금이나마 문제 삼는 계기가 된다. ‘미선’과 그녀의 사촌 ‘호두’는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사라진 미선의 전 남자친구 ‘민재’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런데 미선과 호두는 물론이고 민재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돈을 돌려받으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민재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의 행방을 살피고, 신고를 권하면 “그렇게까지?”(p. 16)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막상 민재에게 정말로 닿을 것만 같은 순간엔 발을 뺀다. 민재는 돈을 가지고 도망쳤기에 평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특별한 사람이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 대부분이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민재는 같으면서도 다른 것들의 차이를 세세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설명은 “왠지 말이 안 되는 이유들도 납득하게 되는 순간”(p. 23)들을 만드는 힘이 있었고, 각자도생과 효율성을 제일로 섬기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받았던 도움은 민재의 이런 성격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민재는 자금난이라는 평범한 사정 때문에 결국 평범해져버린, “완전히 나쁜 사람”(p. 16)일 수만은 없는 사람이다. 이렇듯 아무리 애써도 포기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래서 어떤 그만둠은 포기 자체를 미루고, 돈만을 좇게 만드는 기존의 “미친 짓”(p. 12)을 중단하고 새로운 “미친 짓”(p. 28)을 가능케 한다. 술에 취한 호두와 미선은 한 남자의 도움으로 의릉에 들어가 “이상한 괴성”(p. 30)을 내지른다. 한 번쯤 누군가 불가능한 시간에 난립하는 걸 보고 싶었다던 남자 덕분에 “예상 밖의 방향”(p. 28)을 향해 내달릴 가능성이 반짝이며 움튼 순간이다. 망해버린 인간관계와 삶 속에서 건져 올려진 이 희한한 야행은 두 사람이 잃어버린 진짜 호두가 의릉에서 나무로 자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연결되면서 다시 한번 끝을 지연시킨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려면 불운을 껴안아야만 하는 현실에 낭만이 끼어들 자리는 협소하다. 결국 각서를 주고받은 뒤에도 또 한번 배신당한 호두는 민재와의 관계에서 “정말 원하지 않던 포기”(p. 37)를 하고, “나중으로 미루는 버릇”(p. 25) 때문에 민재와 만날 가능성마저 미룬 미선 역시 연결될 방법을 끝내 포기한다. 기존의 삶이 반복되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더욱 희미하게 만드는 자본의 견고함을 김지연은 결코 만만히 생각하지 않는다. 「반려빚」에서 전세자금대출과 전 연인 ‘서일’이 남기고 간 빚을 갚는 ‘정현’의 삶은 숨 쉬듯이 “매 순간 돈에 대해 생각”(p. 76)해야만 하는 하루들로 빼곡하다.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관계 중 하나인 연인 사이를 지탱하기 위해서 돈이 “제법 중요한 요소”(p. 84)로 호출되고, 유일한 반려의 자리에는 빚이 올라앉은 정현의 세계를 보면, 「포기」에서 미세한 틈을 열어젖혔던 망측함이 결국 잇속 빠른 자본주의의 환상에 불과한 건 아닌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할 수 없는 것만 가득한 날들 속” 유일하게 “할 수 있어!”라고 외칠 수 있는 일이 전 연인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는 일일 때,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을 만큼 망한 듯한 인생의 내력을 모조리 아는 이가 자신을 망하게 한 장본인뿐일 때, 서일과 다시금 함께 있고 싶은 “정신 나간 마음”(p. 89)이 고립과 단절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된 불모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탓이다. 그래서 김지연은 평균치의 삶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나선다.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가 탄생한 「좋아하는 마음 없이」의 ‘안지’는 이혼한 전 남편의 부고를 내연녀였던 ‘그녀’로부터 전해 듣는다. 이외에도 그녀는 전남편의 보험금 수혜자가 안지로 되어 있고, 이혼할 때 두고 온 아들 ‘성준’이 안지와 함께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안지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묘한 구석이 있다.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는 안지의 말에 “누가 벌을 주는데요?”(p. 142)라고 되묻고, 미안해할 겨를이 없을 만큼 행복했다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술술 털어놓으며, 이제껏 키워온 성준은 누가 뭐래도 자기 아들이지만 양육비는 보태달라는 염치없음까지. 하지만 안지는 바로 이 뻔뻔함이야말로 전남편과 똑같은 “여자의 장점”(p. 154)이라고 생각한다. 안지가 보기에 전남편은 “집을 해올 형편”(p. 149)을 갖춘 “좋은 사람이”(p. 159)었지만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p. 161)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사람”(p. 137)으로 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어온 안지는 스스로가 “아주 평균적인 삶”(p. 139)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전남편과 이른 결혼을 했었다. 호불호를 쉽게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선택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안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남편과 여자는 정확히 안지의 정반대편에 선 사람들이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는 사람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솔직한 사람. 숨기느니 차라리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사람. 그래서 뻔뻔할 수 있는 사람”(p. 158)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지는 이들의 뻔뻔함을 겪고서 “조금 더 자기 자신에게 가까운 삶을 살게 되었”(p. 137)다고 믿는다. 무엇이 좋고 싫은지를 탐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지의 가족들은 “좋아하는 마음 없이 함께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고, 때문에 안지의 삶에는 “그 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내렸던 선택들”(p. 163)이 수두룩하다. 반면에 현재의 안지는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과 재혼하고,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이상한 대회들을 연다. 분명한 미래가 아니라, 잘 그려지지 않는 미래를 골똘히 떠올린다. 그래서 안지는 전남편과 그녀, 아이가 있는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p. 165)을 훔쳐 지갑에 넣고 다님으로써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여자를 다시금 우연히 만난다면 되돌려주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들에 관해 거듭 생각하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삶인지 단정하지 않기 위해 끝을 한없이 지연시키면서 말이다. 전남편과 관련한 모든 일로부터 그저 멀어지고 싶었던 안지는, 그렇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연루되지 않음으로써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두고 보기를 택한다. 계산하고 판단한 “확신”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그들의 방식처럼 “선명하고 분명한 감정”(p. 161)이 있는 삶의 방식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다. 해괴하고 이상한 것의 가능성은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에 이르러 더욱 커진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누구든지 마음껏 열매를 가져가라고 전달받은 ‘나’와 ‘삼촌’은 유자밭에서 유자를 따던 도중 땅에 묻힌 상자를 발견한다. 기대감을 안고 열어본 결과,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p. 271)만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상자를 내동댕이쳤던 ‘나’는 서사의 마지막에 이르러 “어쩌면 영영 썩지 않는 것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p. 289)에 도달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1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숙모’와 그의 아들 ‘민재 오빠’를 애도하는 ‘나’와 삼촌의 시간과 연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촌보다 열 살 많은 나이에 아이까지 있는 이혼녀였던 숙모의 세세한 사정과는 별개로, ‘나’는 매번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말을 내뱉고 짝사랑 상대의 엄마인 그녀를 싫어해왔다. 하지만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던 숙모가 췌장암으로 사망한 전남편을 떠올릴 때마다 사는 게 너무 달아서 미안함을 느끼는 모습을 목격한 뒤, ‘나’는 그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싫어하던 사람을 닮아버린 순간부터 그 사람을 싫어할 수 없게 되었다던 숙모의 말처럼, ‘나’ 역시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 마냥 괴롭게만 느껴지지는 않게 되면서 변하는 것, 썩는 것을 긍정하게 된다. 해괴해지지 않는 것은 없다. 오히려 왜곡과 변형을 거치면서 이전과 다른 상태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 더욱 유의미한 일일 수 있다. 밀봉하지 않아 썩어버린 자리에서 공벌레가 새롭게 자리를 틀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 않은 인생. 김지연의 소설은 우리에게 그런 인생들의 가치와 가능성을 펼쳐준다. 3. 잃어버려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 『남겨진 이름들』(문학동네, 2022)과 『방어가 제철』(자음과모음, 2022)에서부터 주목받았듯이, 안윤 소설의 중핵에는 ‘상실’이 자리한다. 이에 조금 더 안윤스러운 특징을 부여해보자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실’이라 고쳐 부를 수 있겠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잃은 인물들이 겪는 상실은 기이하다. 의심 없이 정상이라 믿어왔던 체계가 뒤틀린 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어짐이 꼭 불행해야만 할까. 균열을 되짚으면서 우리는 모자람에 몸서리칠 뿐만 아니라, 온전함을 “새로이 감각”(「틈」, p. 237)해볼 수도 있다. 사라진 이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일깨워준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안온한 세계는 허상이고, 그것은 위태로운 누군가의 현실을 말끔히 소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금이 간 세계의 틈새로 유실된 존재들이 있다는 것. 이를 마주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보편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과 괴리를 좁힐 수 없는 인물들의 선택이 어쩐지 생소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하지만 그들의 결단 덕분에 기이한 감각들은 응달에 고여 있지 않고 변주된다. 안윤의 소설에서 기괴하고 낯선 기운이 세계를 다시 쓰는 역량으로 옮아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밀을 알아차린 뒤 다른 삶을 향해 몸을 트는 인물은 우선 「핀홀Pinhole」에서 만나볼 수 있다. 직장 동료로 처음 만나 4년을 사귄 ‘보라’와 ‘승원’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평탄해 보이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비밀’이 드러나면서 전연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제목처럼 소설에서는 바늘구멍처럼 아주 미세할지라도 분명한 틈을 내는 질문들이 등장한다. 첫번째, “비밀 하나씩 얘기할까”(pp. 55, 75, 88). 소설에서 총 세 번 등장하는 이 질문은 모두 보라로부터 나온다. 비밀은 수치스럽거나 비정상적인 치부들을 의미한다. 보라에게 딸들을 버리고 갔던 엄마와 새아버지, 이복 남동생이 있다는 복잡한 가정사 같은 것들. 보라는 비밀을 들추거나 캐묻지 않는 승원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이렇듯 보라가 감추고 싶은 것, 감춰야만 하는 사실들을 응시하고 발화하는 인물이라면 승원은 비밀 앞에서 “짧은 침묵”(p. 56)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설이 전개될수록 승원의 침묵은 배려가 아니라 자신의 비밀을 덮기 위한 자구책으로 드러난다. 보라는 어느 날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의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진’의 메시지를 통해 외동으로 자처해왔던 승원에게 마흔넷의 중증장애인 형 ‘정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진은 부모가 강제로 입원시킨 시설에서 관계자들의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걸로 보이는 정원의 사인을 밝히고 그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원의 가족들로부터 무시당했다. 두번째 질문은 경진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승원씨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세요?”(p. 61). 모든 것이 그렇게 돌연 생경해진다. “경험해본 적 없는 단란한 가정의 화기”(p. 72)는 “너무나도 깔끔하고 정연하게 통제된 느낌”(p. 73)을 주고, “앎의 정도를”(p. 66) 고려할 필요 없이 가까웠던 승원은 “엄연한 타인”(p. 53)으로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승원이 동그란 공 모양으로 뭉쳐놓은 양말이 보라에게 “집쥐가 ‘된 것’”(p. 53)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추방하려 아무리 애써도 계속해서 출몰하는 집쥐처럼, 정원의 존재는 여타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승원이 습관처럼 만드는 양말 뭉치가 어린 시절 정원과 가지고 놀던 장난감 공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보라는 직감한다. 평범했던 양말 뭉치가 “집쥐로 보이기 시작한 그 늦은 오후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p. 54)다고. 보육원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 약을 먹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집쥐는 어디에서 누구와 살 수 있는 걸까”(p. 87)를 궁금해했던 보라의 의문은 정원의 생애를 접하면서 되살아난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온통 투쟁이었다. 더딜지라도 꾸준히 삶을 기록하고, 장애인 스포츠인 보치아 선수가 되어 진지하게 공을 던져왔다. 죽고 싶을 때마다 “타 자 칠 때 총 쏜 다 생각”(p. 83)하며 쓴 시들, 시설에서 나가기 위해 새벽마다 컴퓨터실까지 기어가 적어 내려간 정원의 이야기는 “스스로 훼손을 인정할 수 없었던”(p. 71) 보라를 변화시킨다. 과거의 결함을 지우고 무결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살고 싶었던 욕망을 외면하고, 승원 대신 정원의 기록물을 경진으로부터 건네받는다. 할머니에게 배운 바느질처럼 보라는 정원의 생애를 몇 번이나 곱씹은 후 그의 이야기들을 정성스럽게 잇대어 나간다. 그리하여 세 사람만이 담긴 가족 그림에서 “가는 연필 선으로 밑그림만 그려놓은 테두리뿐인 사람”(p. 61)이었던 정원을 “한 사람의 형상”(p. 88)으로 만들어낸다. 양말 공을 죽어가는 집쥐로 느끼던 낯선 감각은 그렇게 자신이 바라는 삶을 향해 공을 굴리는 정원의 의지를 헤아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첫번째. 보라는 승원에게 다시 한번 비밀 말하기를 제안한다. 경진을 만났다는 자신의 비밀을 먼저 밝히면서. 사실 안윤의 인물들이 내린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경진이 던진 이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p. 85). 어째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친숙함을 등지고 불가해한 누군가를 끌어안게 만드는 힘의 근원을 짐작하기 위해 표제작 「모린」을 살펴본다. 사고로 중도 실명한 시각장애인 ‘영은’은 잃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범하거나 무감하게 태어나서가 아니라 살면서 많은 것을 잃어봤기 때문이다. 실명 이후 영은은 다채로운 세상의 이미지들, 오래도록 자신의 곁을 지켜왔던 연인 ‘선주’를 비롯해 자신을 이루던 수많은 조각을 놓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은 여전히 처음부터 가져본 적 없는 삶보다는 여전히 나중에 잃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이는 “있음과 없음, 그 둘을 연결하는 잃음”을 통해 “주어지는 모든 세계를 빠짐없이 살아보”(p. 25)겠다는 다정한 결단이다. 어떤 것을 잃어본 사람은 그것의 소중함을 비롯해 어떻게 더 잘 잃을 수 있는지, 상실 이후에 무엇이 변화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특히 자기 자신을 잃어보는 경험은 세계가 뒤바뀌는 사건이다. 하나의 세계는 곧 한 명의 사람과도 같다. 그리고 세계는 곧잘 무너지고 다시 서길 반복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사람’은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가기에 유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p. 9). 영은이 잃음을 두려워하기보다, 각각의 자신과 타인을 마음껏 사랑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이유다. 유일한 것들의 흔적을 덧입고서 모진 시간을 견뎌온 영은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유구하다는 걸 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자리 잡고 있다. 안윤이 굳게 믿는, 상실을 지나온 자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은의 질서”(p. 30)는 기존의 질서에서 멀어지거나 누군가를 잃는 일을 유독 겁내던 ‘미란’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자신을 제쳐둔 채 사회의 규율만을 엄격히 따르느라 영은을 사랑하는 마음마저 밀어내길 반복해온 미란은 영은의 곁에서 “한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 는 어떤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p. 44)을 경험한다. “죄다 망해버려서 다행”스럽게 찾아온 “그동안의 내가 다 망해버린 기분”(p. 41)은 여성과 여성의 사랑, 장애인의 삶처럼 분명히 있는 것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세계의 문법을 무너뜨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무수한 면면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세계에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스며들어 있다. “누군가가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게 저 사람이 말할 수 없는 사정이구나 하는”(p. 12). 세계는 곧 한 사람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 바 있으니, 영은의 말처럼 기이한 낯섦은 이제 한층 더 애처롭게 감각된다. 기꺼이 열리고, 연결되고 싶을 만큼. 때로는 나 자신을 잃어버려야만 닿을 수 있는 누군가가, 무너져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상실과 결여를 메우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방법을 안윤의 소설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4. 실패 연습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현실이 감추려 해온 불합리성이라는 비밀을 고발하고, 이때 드러난 균열에 힘을 가해 기존의 제도와 체계에 일격을 가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두 사람의 소설이 자신의 균열을 뼈아프게 직시해야만 들여다볼 수 있는 세계의 결함과 마주한 뒤, 그러한 생채기를 어떻게 매만질 수 있을지까지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지연은 잿더미 속에서도 아직 전소하지 않은 기대와 희망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린다. 그의 인물들은 자본 외부의 의지와 노력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한없이 작아져 있다가도 뜬금없이 괴상한 사안들 편에 서거나 망측한 일을 감행한다. 이때 강렬히 분출되는 어긋난 감각은 살 만한 삶을 간단없이 소거하는 자본의 법칙이야말로 진정으로 이상한 무언가임을 강렬히 느끼게 해준다. 안윤은 이유 없는 상실을 강제하는 현실에 짓눌리는 와중에도 잊힌 이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잃어버려서는 안 될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부지하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세계의 결함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목도할 때 생기는 기이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단하기 위해 분연히 사건을 찾아 나서거나 세계가 무너지는 감각 아래에 자신을 놓아둔다. 그런데 이들 소설이 나아가고 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물들의 일격이 너무 쉽게 저지당하거나, 세계의 비밀을 목격한 이후에 결과적으로는 다시 자신의 결함으로 회귀하는 수축성을 보이는 측면이 두드러짐을 간과할 수 없다. 김지연의 소설에서처럼 잠깐 보인 희망이 오히려 지난한 현실을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하는 마취제로 작용하고, 안윤의 인물들이 억눌리고 배척당한 존재들의 고통을 자기 이해와 친밀한 사람과의 좁은 세계에 가둬두는 건 아닌지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의도와 달리 두 사람의 소설이 보여주는 건 균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현실 아닌가. 이런 우려는 결함마저도 소비적 욕망과 충동에 포섭시켜 자기 발전의 재료로 삼는 자본주의의 영악한 힘이 가진 위험을 알기에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런 의심을 향해 김지연과 안윤은 한층 더 이상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선택하는 인물들을 다시금 내보일 것이다. 한 번의 실패는 억압의 기제에 영영 봉합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망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믿는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더 자주 서로에게 보여져야 한다고” “잘 살든 못 살든 그냥 살아 있는 게 목격이 되어야”(「긴 끝」, p. 122) 한다는 김지연에게 소설은 끝을 길게 늘어뜨려 무한히 연장하는 목격의 수단이다. “만약이라는 말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또,」, p. 174)는 걸 아는 안윤이 보기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로 허물어지는 일이야말로 세계가 연결되는 가장 첫걸음이기에 둘의 세계는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이다. 두 사람에게 실패란 기존의 견고한 세계가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고정되어 있던 자신이 허물어지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들은 이제 막 실패했다. 어쩐지 걱정되는 마음이 앞선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숙련이 뒤따르듯이, 이들은 지금의 연습을 거쳐 실패에 능숙해질 것이다.그러니 자주, 계속해서 더 잘 실패해보려는 두 사람의 힘을 믿는 마음으로 애정을 담아 덧붙여본다. 앞으로의 소설에서는 무너지고 재건된 세계가 어떤 다른 모습으로 솟아오를지, 기이한 인물들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향해 걸어 나갈지 궁금하다고 말이다.

계간 문학과사회 김다솔 김지연안윤조금 망한 사랑모린반려빚담담 2025
이은란 열린 기호로서의 ‘얼굴’ ― 정은기 시집

정은기 시인의 첫 시집 『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걷는사람, 2024)에는 유독 ‘얼굴’이라는 시어가 자주 등장한다. 본래 얼굴은 ‘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개인성의 표지이자 소통의 매개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시인의 ‘얼굴’은 주체의 온전한 존립과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를 지시한다. “눈코입이 수시로 자리를 바꾸며 옮겨 다녔다/바람에 지워지는 모래 언덕처럼”(「숲은 간지러운 걸 어떻게 참지」), “구체적인 우리의 생활에서 정체불명의 것은 추상적인 내 얼굴뿐이다”(「구체적인 의자」), “있다가 없고, 없다가도 있는 얼굴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현기증」)와 같은 대목들로부터 포착되는 ‘얼굴’의 가변성과 추상성은 완결되지 못한 ‘나’의 취약한 존재성을 드러낸다. “철이 벗겨진 대문처럼 내 얼굴에는 푸른 녹이 슬었다 열렸다 닫히며 아무나 드나들었다”(「러시아 소설 같은 밤」)라는 구절로 암시되는 것처럼, 단단히 걸어 잠그지 못한 시인의 ‘얼굴’은 열림과 닫힘을 반복하며 외부의 침범을 수시로 허용한다. 통제할 수 없는 타자의 틈입과 함께 균열되는 시인의 ‘얼굴’은 “복수의 나”(「기분 탓」)가 탄생하는 장소가 된다. 건조한 우울을 머금은 정은기의 문장들은 ‘복수의 얼굴들’이 무질서하게 펼쳐진 세계를 배회하는 자의 궤적과도 같다. 그렇다면 정은기의 화자가 지닌 ‘얼굴’이 결핍되거나 분열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집 곳곳에서 발견되는 유년 시절의 고독은 ‘나’가 근원적으로 체험해야 했던 관계의 불가능성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가정과 학교, 어느 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나’의 내면은 불신과 상처로 가득 채워진다. “분장한 배우들의 얼굴은 쉽게 금이 간다 얼굴이 깨지면 진짜가 나올까”(「그런 사이」)라는 화자의 물음에는 위장된 얼굴들이 연출하는 관계의 공허함, 그리고 이로부터 촉발되는 고독과 허무가 배어있다. 이러한 시인의 물음은 더욱 내밀한 형태의 관계맺음인 사랑에도 지속된다. 예컨대 「낫」이라는 작품에는 떠나간 ‘너’와 남겨진 ‘나’가 등장한다. “나는 너의 뒷모습이고/너는 여전히 나의 얼굴”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부재하는 ‘너’는 ‘나’의 존재성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마침내 ‘나의 얼굴’이 된다. ‘나’의 존재성을 대별하는 기호인 ‘얼굴’은 이별이라는 사건과 더불어 ‘너’의 부재를 지시하는 기호로 변주되면서 ‘나=부재’라는 공식을 성립시킨다. 만일 타자와의 관계맺음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나’의 주체성이라고 한다면, 끊임없이 어긋나고 미끄러지는 관계의 불투명성 안에서 ‘나’는 온전한 주체로 존립할 수 있는가. 타자와의 조우와 섞임이 ‘나’를 무너뜨릴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라면, 왜 우리는 다가올 고통을 예견하면서도 관계를 부단히 지속하려고 하는가. 장시 「사유지」에서 통증을 수반한 타자와의 섞임은 ‘얼굴’의 균열을 넘어 온몸에 ‘두드러기’를 돋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거품처럼 부풀어 오르는 살갗을 피가 맺힐 때까지 긁”어대는 ‘나’는 “이제 시는 그만 쓰자”라고 다짐하듯이 말하면서도 “나의 어두운 그림자가 너를 향해 흘러”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에겐 점점 팽창하는 그림자와 갈피없이 흩어지는 고백들만이 남는다. 시인은 ‘얼굴’을 통해 관계를 쌓고, 그 허물어짐에 다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연약함을 차분하게 응시하는 듯하다. ‘얼굴’을 통해 구체화되는 ‘나’의 존립 불가능성은 시인의 발화를 통해 솔직하게 드러나는 생활의 어려움과도 연결되어 있다. 「얼룩, 얼굴」이라는 시에서, “십자드라이버를 들고 집 안을 구석구석 조”이는 ‘나’의 행위는 어떻게든 생활을 유지하고 지탱해보려는 노력을 암시한다. 그러나 번듯하게 꾸며진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바라보는 화자는 이내 “어디에도 숨을 곳이 보이지 않았”음을 덤덤하면서도 서글픈 어조로 고백한다. “전염병처럼 얼굴이 따끔거린다”라는 화자의 언술을 통해 전달되듯이, 가족이자 남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은 ‘얼굴’에 조금씩 전해져오는 통각으로 뚜렷이 각인된다. 이러한 자조는 “지금까지 내가 쓴 계약서는 모두 무효가 되었고”(「누구나 다 하는 생각」)라는 다른 시의 한 구절에 압축되어 있다. 집을 얻거나 직장에 다닐 때, 심지어는 단 한 편의 시를 잡지에 실을 때조차 우리는 계약서를 쓴다. 사회적으로 맺어진 모든 관계를 상징하는 계약서는 ‘문서화된 얼굴’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가 평생 써온 ‘계약서’가 모두 무효가 되었다는 사실은, 돈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시인’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드러낸다. “요즘은 출신이라는 말도 잘 안 쓰는데 저에게는 죄책감이 큰 말이거든요 시인이 뭐 대단하다고 그렇게 자랑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아빠 말입니다”(「오전의 아이는 한밤중에 문장이 되고」)라는 진솔한 고백을 읽으며, 이 시대에 ‘시인’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되물을 수밖에 없는 화자의 씁쓸한 심정을 헤아리게 된다. 시인이라는 직함은 돈이 최우선의 가치로 변질된 세상에서 문학의 순정을 지키려는 자만이 쓸 수 있는 숭고한 ‘관사(冠詞)’일까, 혹은 평범한 일상조차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이방인을 지칭하는 단어일까. 아들이 시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현실과 맞닥뜨린 ‘나’는 무력하기만 하다. 화자는 ‘이력서’를 품에 안고 하루 종일 집 밖에서 방황하며(「변명」), “아직도 시를 쓰는 사람이 있었군요”라는 ‘미국 유학파 출신’ 면접관의 차가운 물음에 위축되고 만다(「인터뷰」). “세수하는 얼굴은 오늘의 방향을 묻”(「기분 탓」)지만, ‘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 앞에서조차 쉽게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시집 전반에 감도는 소외의 윤곽은 “숨을 쉴 때마다 말라 가는 얼굴”과 “나를 뱉어내는 재채기”(「나의 폐」)의 건조함으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이렇듯 그의 시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얼굴’의 균열은 현실의 냉혹함 속에서 좌절을 겪어야 하는 시인의 자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시인의 좌절은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독립적인 개인(나)으로 인정받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노동자가 되어 세속적 원리에 충실히 복무하는 것이다. 이 세속적 원리를 거스르는 아이러니한 노동자가 바로 시인이 아닐까. 교환가치로 도저히 환원될 수 없는 노역, 즉 현실이 무용(無用)하기 짝이 없는 노동으로 규정한 ‘시 쓰기’를 통해 시인은 유용성만을 뒤쫓는 시대의 흐름에 저항한다. 예컨대 정은기의 시에서 목적지향적인 삶의 형식은 ‘나’의 존재성을 뒤흔드는 폭력으로 간주된다. “나는 목적지와 같은 말을 믿지 않는다/삶을 각자의 방향에 몰두하는 시간이라 설명하는 것은 운전수들의 말이다/누군가의 마음을 난도질하는 자의 변명이거나/이를 꽉 물고 그 누군가의 속을 휘저어 놓는 자들의 습관이다”(「비슷한 말」)라는 대목에서처럼, 정은기의 화자는 맹목적인 성취만을 강조하는 세계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이 세계를 장악한 ‘운전수들’은 목적지를 설정하고 “각자의 방향에 몰두하”는 이기적인 삶이 마치 자명한 원리이자 인간의 본성인 양 설파한다. ‘운전수들’이 삶의 방향으로 제시한 이기심은 서로의 마음을 난도질하고 휘젓는 일마저 합리화한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삶의 방식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한다. 따라서 정은기의 시에 나타나는 ‘얼굴’의 불확실성과 불투명성은 단순히 ‘나’의 왜소한 자아를 표상하는 데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균열된 ‘얼굴’은 인간의 본성을 악(惡)과 이기심으로 규정하는 세계와 불화하면서, 기꺼이 그 속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한 자의 초상이다. ‘얼굴’은 현실의 감관(感官)이기에, 정은기의 시는 훼손된 ‘나’를 고립시키지 않는다. 시인은 현실의 고통과 상처를 묵묵히 감내하며 어두운 상흔으로 응결되어 있던 문장들을 조심스레 꺼낸다. 오랫동안 묵혀왔던 문장들이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기를, 타자의 상처를 섬세하게 보듬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것이 비록 “유리보다 쉽게 부서지는 주먹과 머리로,”(「인터뷰」) 견고한 현실의 벽에 몸을 부딪는 ‘불가능한 투쟁’일지라도. “들켜버리기를 기대하며 꼭꼭 숨었다 발각되기만을 바라면서 가슴을 두드렸다”(「꼭꼭, 숨어라」)라는 표현에는 열림과 닫힘이 아이러니하게 교차하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깃들어있다. 그의 문장에 고인 따뜻함과 섬세함이, 건조하게 닫힌 우리의 ‘얼굴’을 열어내는 원동력일 것이다. 추천 작품: 「누구나 다 하는 생각」, 「사물의 방향」, 「건너편」

계간 포지션 이은란 정은기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얼굴기호주체 2025
최가은 사랑을 사랑하라 ― 『사랑의 각오』(소명출판, 2024)

사랑을 사랑하라 ―『사랑의 각오』(소명출판, 2024)1) 1  '사랑'이 무엇일까? 역사가 오랜 시간 직면하기 어려워했던 이 질문은 요즘과 같은 시기에 특히 낯선 것으로 다가온다. 적대와 혐오, 분열과 갈등. 우리 시대와 가장 어울리는 단어의 나열이란 오히려 이런 것에 가까울 테니 말이다. 특별히 비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가 아니라 할지라도, 소수자와 약자, 타인 및 '나'와 다른 모든 종류의 것들을 향한 오늘날의 적의와 냉소를 감지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유하는 일은 그에 비하면 훨씬 더 어렵거나 반대로 너무 쉬운 일처럼 여겨진다. 인류 보편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너무 많은 투쟁과 희생이 요구되는 동시에, 폭력은 오직 또 다른 폭력을 낳기만 하는 지옥과 같은 풍경. 이런 때 사랑은 어딘가 순진하고 순정한 무엇, 때로는 음험하고 지배적인 권력의 하수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사랑의 문제일까? 아니면 무언가가 누락된 사랑, 무언가가 함부로 전제된 사랑의 문제일까?  '사랑'을 '윤리'의 문제와 결부시키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우리 지성사의 논쟁 테이블에서 '사랑'이 꾸준히 배제된 현상이 그것에 내재한 모호함을 충실히 사유하지 않은 결과라고 말한다. 사랑의 본래적 위험성이 철저히 멸균된 '안전한' 사랑에의 열망. 세계의 복잡성을 하나의 당위로 봉합하는 무책임한 약속으로서의 사랑을 향한 집착. 이처럼 사랑에서 중요함-위험함을 박탈하는 온갖 종류의 사고는 '사랑' 자체는 물론, 그것의 토대를 이루는 타자와 윤리의 문제, 또한 우리의 유한성과 필멸성의 문제를 사물들의 즉각적인 법칙에 적용하는 일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그는 사랑을 제대로 예찬할 방법을 고안하는데, 그의 사랑론은 우리가 마주치는 숱한 이질적인 만남을 우리 모두의 '사건'으로 지속시킬 힘을 알려준다. 본질과 구별되는 사랑의 논리, 사랑의 특수한 원리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사랑에 내재한 그런 힘에 있다. "사랑에는 우연의 순전한 특이성에서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 한 요소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이 존재"2)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환원된, 거의 아무것도 아닌, 기껏해야 단순한 만남 그 이상이 아닌, 이 출발점과도 같다고 할 어떤 것과 더불어서 우리는 단지 동일성만은 아닌,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는 시련을 받아들일 수조차 있으며, 이를 위해 고통을 감내해낼 수도 있게 됩니다. [..] 사랑은 진정 우연으로 인해 발생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만들어내는 지점들, 예컨대 차이의 관점을 시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유 안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3)  "단지 동일성만은 아닌,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여전히 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을까? 그러니까 동일성의 무자비한 폭력과 차이의 무차별적인 관용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세계를 함께 경험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이 '사랑'을 사유하게 하는, "단지 하나의 경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그러한 "하나의 만남"(33쪽)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사랑은 통념과는 달리 정태적이고 순수한 개념이거나 행위자의 부차적 행위를 요청하지 않는 자연적 상태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사랑의 불확실하고 위태로운 지대. 이와 같은 속성이 부각되는 사랑은 잘 알려진 대로 문학의 오랜 친구이다. 대다수 서사의 원형에 비극적인 사랑의 구조가 놓여있기는 하지만, 문학과 사랑의 친밀한 관계는 단순히 내용에 국한된 무엇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태도이자 믿음으로서, 우리가 다룰 문제와 관련하여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하나의 '각오'로서 문학과 동행한다. 최근 출간된 한 권의 평론집은 우리에게 그 오랜 사실을 새삼 환기하려는 것 같다. 2  황도경의 일곱 번째 비평집 『사랑의 각오』(소명출판, 2024)는 우리 시대가 좀처럼 쉽게 발음하려 하지 않는 두 단어들, 그러니까 사랑과 비평을 나란히 내어놓는 데 망설임이 없다. 비평가는 서사와 서사 속 인물들의 행위, 말, 심지어 함께 먹고 함께 입는 모든 종류의 함께-있음을 '사랑의 선언'으로 읽고자 하는데, 그것은 그들 이야기와 장면의 세부가 바디우적 의미에서의 선언으로 비평가에게 당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의 선언은 우연이 고정되는 순간을 뜻합니다. 그 순간에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일어난 일, 이 만남, 이 만남에서 비롯된 에피소드들, 내가 상대에게 선언하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것들이라고 말입니다. 나를 결부시키는 무언가가 여기서 일어났다고 나는 그(그녀)에게 선언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너를 사랑해"입니다. (...중략..) 그것은 하나의 우연이었던 것에서 내가 다른 것을 끄집어내겠다는 걸 말하기 위함입니다. 우연으로부터 내가 지속성·끈덕짐·약속·충실성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충실성은 이 단어의 보편적인 맥락에서 떼어내, 저의 고유한 철학적 용어로 다시 사용해본 낱말입니다. 이 단어는 우연한 하나의 만남에서 그것이 필연적이었던 것만큼 견고한 구축으로 이행함을 의미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가 어떤 특별한 공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의 약속, 즉 만남이 제 우연성에서 탈피할 수 있도록 지속성을 구축하는 약속이라는 사실을 충실성이 정확히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4)  우연하고 우연적인 만남, 절대적으로 낯선 타자들과의 무분별한 마주침은 적의와 혐오로 나아가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 어떤 종류의 우연한 만남은 "여기서 일어난 일, 이 만남, 이 만남에서 비롯된 에피소드들"로부터 “다른 것을 끄집어내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나'와 '타자'의 분열과 분리의 감각을 하나의 통합된 도덕적 세계의 형상을 향해 떠미는 것은 아니다. 그 우연한 만남을 “견고한 구축”으로, 말하자면 마치 진리의 절차(procédure de vérité)처럼 우연을 지속적으로 추구해나가는 행위가 사랑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황도경에게 지금 우리 시대는 사랑을 "언감생심”으로 만드는 "절망과 분노"(3쪽)의 시대인 한편, 그럼에도 한켠에선 "사소하지 않은" 사랑의 선언들로 충만한 곳이기도 하다. 이를 증명하려는 듯 비평가는 총 세 가지 단계 혹은 과정으로서 사랑의 테마를 재구축한다. 총 3부로 이루어진 평론집의 구성과 배치는 각각 사랑에 관한 그의 믿음을 드러내는 듯하다. 1부 '사랑의 각오'에서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안보윤 『밤은 내가 가질게』, 정보라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김멜라 『제 꿈 꾸세요』, 김애란 『바깥은 여름』의 소설집과, 권여선 「사슴벌레식 문답」, 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의 단편 소설을 거쳐, 2부 '사랑의 방식'에서는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이승우 『목소리들』,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오수완 『도서관을 떠나는 책들을 위하여』의 한국 소설과 더불어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및 영화 『남아있는 나날』과 『나를 보내지마』, 영화 , 18세기 조선의 문인인 '이옥'에 대한 비평으로 이를 증명한다. 3부 '사랑의 질문'에 이르면 우리는 장진영 『취미는 사생활』, 김영하 『작별인사』, 이승우 『사랑이 한 일』,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와 같은 비교적 최근 문학 작품들은 물론이고 영화 ,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로부터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까지 그야말로 시간과 공간을 거침없이 이동하며 사랑을 마주하는 비평가의 모습을 보게 된다.  '각오', '방식', 그리고 '질문'을 '사랑'과 나란히 놓는 이 평론집의 배치 방식은 우리에게 가장 먼저 속격 조사 '의'의 두드러진 역할을 상기한다. '의'라는 조사의 존재는 사랑을 다양한 속성을 소유하는 사물처럼 인식하게 하는 동시에 '사랑' 뒤에 놓인 단어들을 능동적으로 행하는 주체의 자리로 이동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각오, 사랑의 방식, 사랑의 질문.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각오'라는 최종 형식 또는 태도로 종합하려는 비평가의 욕망에 닿을 때, 우리는 사랑이 제 본위를 언제나 초과하는 형식을 내재화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사랑이 사랑을 사랑하는 법, 달리 말해 우연성을 함께 있음으로 지속시키려는 예의 그 힘과 관련될 것이다. 그것은 비평집이 구체화한 순환의 논리처럼 각오-방식-질문 그리고 다시 각오로 돌아오는 사랑의 원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나는 소설 속 '나'처럼 아버지를 잘 알지 못한다고, 아버지의 삶보다 나 자신을, 내 삶을 끌어안고 사느라 전전긍긍이었다고, 아버지가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도 내뱉고 싶었던 말들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해야만 한다.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두고 돌아올 적이면 놓지 않던 아버지의 손에 담겼을 절절한 마음과 아버지의 눈에 피었던 만단정회와 아버지가 밤낮으로 기저귀에 그렸을 만다라를 나는 알지 못한다고, 고백해야만 한다. 아버지는 삶을 끝냈건만 아버지에 대한 내 기억과 마음은 여전히 복잡하게 출렁거려서, 나는 억울하다고, 상처받았다고, 그때 왜 그랬느냐고, 소설 속 '나'를 따라 구시렁거렸다. 아버지에게 따뜻한 손도, 말도, 한번 제대로 건넨 적 없는 나는 그리움인지 허망함인지 모를 마음을 소설 속 말로 대신한다. "그러니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숱한 순간의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졌다"라고. (217쪽)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스스로의 삶과 나란히 두며 읽는 글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가 평론집의 '중간'을 표시한다는 것이 특별히 흥미롭다. 아버지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고백하면서, 그럼에도 "전직 빨치산이었던 소설 속 아버지와 전직 경찰관이었던 나의 아버지"(214쪽) 사이를 소설의 문장과 비평의 문장으로 부단히 겹쳐 놓는 비평가의 자기 글쓰기는 말 그대로 아버지라는 타자를 향한 사랑의 '방식'이자, 타자 그 자체를 향한 '질문'이며, 또 그것을 지속하겠다는 삶의 '각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러니까 정지아의 소설 속에서 마주친, 나의 아버지와 겹치거나 겹치지 않는, 현실의 존재이거나 그렇지 않은 무언가/누군가와의 만남이 어떻게 방식과 질문 그리고 각오를 아우르며 차이로서 하나의 세계를 경험하는 단계로 우리를 나아가게 할 수 있다는 걸까. 무엇보다 그것은 이 모든 '선언'이 언어와 관계된다는 사실에 있다. 앞서 바디우는 “우연으로부터 내가 지속성·끈덕짐·약속·충실성을 이끌어"내는 것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선언이라고 말한다. 철저한 우연성을 시간 속으로 고정시키는 일. 그것은 언어의 형식으로 출현하는 '선언'에서 촉발되고, 이 출현은 그것을 반복적으로, 말하자면 충실하게 지속하도록 만드는 가장 기초적인 토대가 된다. 비평가가 자신의 아버지와 소설 속 아버지를 겹쳐놓으며 반복하는 '알지 못한다'는 문장은 이 모든 마주침의 철저한 우연성과 여전한 타자성은 물론이고, 그것의 지속성, 끈덕짐, 약속과 충실성을 수행적으로 실현한다. '알지 못한다'는 말로 끈덕지게 마주하는 우리의(타자의) 세계. 이 사랑의 방식은 곧 미래를 기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필멸의 삶을 살고 있으니 늙은 몸의 비관주의는 피할 길이 없지만, 우리는 정신의 삶이라는 또 하나의 다른 삶을 살고 있기도 하다.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지는 삶이라면, 그 시간들을 기억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세계를 인식하거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고, 그리고 신이란 모든 이를 받아들인 존재,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라고. 나는 이 사랑의 신을 믿고 싶다. (192쪽)  미래를 낙관하기. 다소 무책임하고 순진하게 보이는 이 '낙관'의 태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 나갈 수 있"다면, 이 필멸의 삶에 가능한, 그리고 가능해야만 하는 유일한 태도일 수도 있다. 이백사십 년에 걸쳐, 혹은 이천사백 년에 걸쳐 이어지는 삶이 우리의 유한한 생에서도 가능한 방식이 있다면 그것은 타인의 기억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이어지는 존재의 확장 덕분일 것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미래의 기억'인 이유는 타인의 기억이란 결코 온전한 내 것일 수 없는, 제대로 도착한 적 없고 경험을 말할 수 없는 '미래'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토록 평범한 미래』(김연수, 문학동네, 2022)의 할아버지는 그런 것이 '사랑'의 정의라고 말한다. 3  그러나 이와 같은 '미래의 기억'이 다름 아닌 나와 너의 무한한 다시 쓰기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여기에는 사랑의 선언이 남기는 찜찜하고 불가해한 질문들이 있어야 한다. 질문을 남기지 않는 사랑은 타인의 기억을, 그리하여 미래를 소유했다는 거대한 착각에 불과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신실한 믿음의 수호자로서가 아니라 비로소 온전히 아버지, 아내, 아들, 동생이 된 자리에서 그들은 신, 아버지, 남편, 형에게 질문을 던진다. 여호와 하느님은 왜 그랬을까? 아버지 아브라함은 왜 그랬을까? 어떻게 자식을 죽이라고 명령하며, 어떻게 그 명령에 순종하며 자식을 죽이고자 했을까? 남편 아브라함은 어떻게 당신의 자식을 버릴 수 있었을까? 이삭은 왜 에서를 편애했을까? 온통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부조리극과도 같아 보이는 창세기 이야기들은 이 '왜'라는 질문을 통해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변모한다. (337쪽)  “온통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부조리극과도 같아 보이는 창세기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우리 세계의 맨얼굴이기도 하다. 충만한 기쁨보다는 부당한 부조리만을 더 많이, 더 자주 남기는 세상을 향해 섣부른 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이 동시에, 우리가 앞서 살핀 사랑의 방식일 수 있는 이유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방법”이 “문장의 반복을 통한 단계적이고 점층적인 추론"(339쪽)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각오』가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우리 시대의 작품들은 모두 이 문장의 반복을 통해 단계적이고 점층적인 추론을, 무엇보다도 그것을 촉발할 '질문들'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면 각오-방식-질문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과정이 '사랑의 각오'라는 최종의 형식을 향해 운동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사랑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에 내재한 위험성과 그 위험성을 통과하는 데서 발생하는 고통을 인지해야 하고, 나아가 그것을 기꺼이 감내할 의지가 매순간 새롭게 선언되어야 한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무서운 고통'"(37쪽)이다. 그러나 사랑의 징표인 고통과 고통의 표식인 사랑은 인과의 논리를 거스르고 선후관계를 마구 뒤집으며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에, 고통의 원인을 추적하는 이들에게 사랑은 그 존재를 쉽사리 증명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확실성과 위험성은 그것을 감내하며 다른 생성을 추동하려는 투지, 말하자면 사랑의 방식을 이행하고 질문을 이어가려는 “시간 속으로의 참여"5)를 마주하는 이에게만 긍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 비평가가 작품이라는 우연성과의 마주침을 “시간 속으로의 참여"로 내던질 수 있는 계기는 단어와 문장, 그로 인한 삶들의 겹침에 있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비평가가 발견한 '눈'의 겹침은 사랑의 '각오'를 촉발한 한 사례로 보인다. 이때 눈은 악몽의 근원인 폭력적인 현실과 참혹한 역사를 주시하는 몸이다. (중략..) 그때 눈은 흉포한 폭력의 현장을 마주하는 몸이자 그날의 참혹한 현장을 기억하고 증언할 최후의 보루로서의 몸이기도 했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내'가 눈의 통증을 호소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끔찍한 고통의 현장과 폭력의 역사를 주시하기 위해서는 눈의 통증을 피할 길이 없다. 이 아픈 눈과 함께 '나'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24쪽) 눈은 하늘에서 내려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올라간 많은 먼지와 재가 결합한 것이고, 하얀 눈송이 안에는 수많은 결속을 통해 이루어진 텅 빈 공간들이 있고 그것 때문에 가볍다는 것은, 눈이 근본적으로 죽음과 어둠을 이겨내는 비상의 동력을 가진 새와 같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니 눈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통스러운 시련을 환기시키는 매개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둠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날아오르는 힘이기도 하다. 검은 나무들을 심어주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흰 천 같은 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그 나무들을 덮어주기를 기대했던 것도, 눈이 갖는 잠재적 비상의 힘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33쪽)  한강의 작품에서 '눈'은 "악몽의 근원인 폭력적인 현실과 참혹한 역사를 주시하는 몸"이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만든 '통증'은 같은 소설 속 세계에서 "죽음과 어둠을 이겨내는 비상의 동력을 가진 새"와 같은, “어둠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날아오르는 힘"이 되기도 한다. '눈'이라는 고정된 단어는 역사적 의미에 철저히 종속된 무엇인 동시에, 그 의미를 스스로 초과하고 다른 의미를 파생하는, 단지 유한하지만은 않은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를 그저 발견하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눈'과 '눈'의 겹침으로 발견을 다시 쓰는 비평가의 작업은 그 자체로 사랑의 선언을 "다시 선언"하는 일과 같다.  장르와 문법,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제시되는 이 사랑의 선언들은 반드시 "다시 선언"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사랑은 스스로를 지속하기 위해 "지점들, 시련들, 시도들, 새로운 사실들의 출현이 존재하며, 매 순간 '둘이 등장하는 무대'를 재연(再演)해야 하며, 새로운 선언에 필요한 용어들을 다시 찾아내야만 하"6)기 때문이다. 사랑에 각오가 필요한 이유, 그 방식을 끊임없이 새로이 고안해야 하는 이유, 무엇보다 질문을 생성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완벽하거나 신성할 만큼 총체적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재발명되는 것으로 지속되는 무엇이다. 랭보와 바디우의 연이은 이 선언에 더해 『사랑의 각오』의 비평가는 메리 올리버의 질문을 되새기며 사랑의 선언을 다시 선언한다. “질문은 오직 하나뿐,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할 것인가."(184쪽) 1) 이 글은 황도경의 비평집 『사랑의 각오』를 다룬다. 이하 문장을 인용할 경우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2)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사랑 예찬』, 도서출판 길, 2010년, 27쪽. 3)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위의 책, 같은 쪽. 4)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위의 책, 55~57쪽. 5)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위의 책, 59쪽. 6)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위의 책, 62쪽.

계간 문학인 최가은 사랑비평리뷰 202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