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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격월간 릿터 | 2024년 12월-2025년 1월호(제51호)

때론 거짓말이 참말보다 어렵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

심진경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1999년 <실천문학> 여름호로 등단. 평론집 <여성, 문학을 가로지르다>, <떠도는 목소리들>, <여성과 문학의 탄생>, <더러운 페미니즘>이 있다. 연구서로는 <한국문학과 섹슈얼리티>, 공저로는 <명작은 시대다>, 번역서로는 <근대성의 젠더>가 있다. 제55회 현대문학상 비평부문 수상. 현재 서강대학교 대우교수.

  프로이트는 「두려운 낯설음」(Unheimlich)이라는 글에서 ‘두려운 낯섦’이라는 변종 공포감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오래전부터 친숙했던 것에서 출발하는 감정”1)으로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대한 어떤 통념, 즉 ‘낯선 것은 두렵고 친숙한 것은 편안하다’는 생각과 달리, 실제로 우리에게 이상하게 불안감과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오히려 익숙하고 낯익은 어떤 것이 돌연 낯설게 느껴질 때다. 그럴 때 친숙한 것은 낯설게 되고 명확한 것은 모호해진다. 어떻게 이런 상반된 의미의 공존이 가능한 걸까?

  프로이트는 1860년의 『독일어 사전』과 1877년의 『독일어 사전』에 각각 등재된 ‘heimlich’(집과 같은, 편안한)라는 단어의 의미 변화에 주목한다. 그 과정에서 프로이트는 친숙한, 길들여진, 다정한, 집과 같은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던 ‘heimlich’가 점차 은폐된, 위험한, 알 수 없는, 비밀의 등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는 정황을 포착한다. 따라서 “Heimlich는 진화를 하면서 점차 이중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인데, 이 진화는 heimlich가 반대어인 unheimlich의 뜻을 지닐 정도로까지 진행된 것이다. Unheimlich는 말하자면 heimlich의 일종인 셈이다.”2) 우리의 짐작과 달리 집(heim)은 언제나 안락하고 친밀하지 않다. 오히려 집이야말로 ‘아주 친밀한 폭력’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폐소공포증적 공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어떤 말들은 인간 삶의 모순과 변화를 담아내는 오랜 여정을 겪으면서 그 말의 사전적, 관습적 의미와 상반되는 의미를 포함하기도 한다. 거짓말도 그렇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거짓과 진실은 나누기 어려울 때가 많다. ‘거짓말 같은 진실’, ‘진짜 같은 거짓말’ 등의 관용어구는 물론, ‘나는 오직 진실만을 말한다’는 정치인의 거짓말, 거짓된 현실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는 언론인과 지식인의 침묵의 거짓말 등 진실은 언제나 약간의 혹은 많은 거짓을 함축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이런 얘기는 오늘날 가짜 뉴스가 사실로 위장되고 거짓이 진실과 뒤섞여 진실을 감추거나 부정하는 소위 ‘포스트 트루스’ 시대에 거짓을 옹호하고 진실을 부정하는 것처럼 곡해될지도 모르는 꽤 위험한 발언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도 잘 알다시피 사실이 언제나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거짓말이 진실에 다가가는 한 방식이 될 수도 있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때론 거짓말이라는 미끼로 진실을 낚을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작가들은 진실의 중요성을 잘 알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의 효용성과 진정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특히 어떤 작가, 예컨대 마크 트웨인 같은 작가에게 거짓말은 다소 과장되고 결코 지킬 수 없는 진실이라는 규율과 도덕적 신념이 가진 맹목성과 냉혹함을 비판하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이렇게 외친다. “깨달으시오. 그리고 거짓말하는 법을 배우시오!”3) 마크 트웨인은 「거짓말의 쇠퇴」라는 글에서 뛰어난 거짓말 기술이야말로 인간에게 좋은 피난처와 위안이 되며 심지어 미덕과 삶의 원리로까지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럴 때 거짓말은 진실의 반대어라기보다는 진실의 보조어에 가까울 것이다. 어쩌면 좋은 거짓말은 진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김애란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은 듯하다.

  김애란의 두 번째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문학동네, 2024)은 거짓말과 허구에 관한 소설이자, 가족의 해체가 때론 구원이 되기도 하는 일종의 ‘뒤집어진 가족소설’이며, 너무 사소해서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어떤 ‘성장들’에 관한 소설이다. 소설의 제목인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지우와 소리, 그리고 전학생 채운, 이 세 아이들의 고2 담임이 고안한 일종의 자기소개법이다. 이는 다섯 개의 문장으로 자기를 소개하되, 그중 한 문장에는 반드시 거짓말이 들어가야만 하는 방식으로, 이때 거짓말은 첫 만남으로 어색한 아이들이 서로 편하게 자기 얘기를 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매개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이 방법으로 거짓말을 더 편하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진실을 더 편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때 거짓말과 진실은 어떻게 구분되나? 말 못할 진실이라 간신히 거짓말을 통해서만 비로소 전달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 거짓말은 진실일까, 거짓말일까? 게다가 그 거짓말이 “구원도 없고 기적도 없고 선의도 없”(12쪽)는 밤과 같은 이 세계에 소소한 구원의 빛이 새어나오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바로 이런 진실과 거짓의 딜레마 속에서 허구적 이야기를 통해서만 간신히 전달되는 잔혹하고 쓰라린 진실을 다룬 소설이다. 그리고 소설에서 지우가 그리는 웹툰은 청소년기 아이들이 자신의 남루와 절망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거짓과 허구의 전략을 활용한 사례로 등장한다.

  언뜻 이런 거짓과 허구의 전략은 김애란의 첫 단편집 『달려라, 아비』(창비, 2005)의 정신승리법과 명랑한 아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세계의 비참과 우울을 그대로 떠안고 있으면서도 결코 아프다고 엄살 부리지 않으며, 오히려 ‘거대한 관대’와 자기 긍정의 허구적 상상력을 통해 이 세계의 냉소와 결핍을 명랑하게 돌파해나가는 그 어린 주인공들 말이다. 예컨대 「사랑의 인사」의 ‘나’는 어린 자기에게 “세계의 불가사의”라는 책을 쥐어준 채 유원지에 버리고 도망간 아버지를 미워하는 대신 “아버지가 실종되었다”고 상상하고, 그렇게 ‘나’의 상상 속에서 실종된 아버지를 “미스터리”, 즉 불가사의로 만들어버린다. 표제작 「달려라, 아비」의 ‘아비’는 또 어떤가? 어머니와의 섹스를 위해 단 한 번 성실하게 뛰었지만, 이후 뒷감당이 무서워 뛰듯이 도망갔던 아버지는 ‘나’에게 결코 분노나 원망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는 ‘나’의 상상 속에서 “분홍색 야광 반바지 차림”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러너(runner)로 재탄생한다. 이 소설들에서 김애란은 그렇게 자신의 아픔과 상처조차 가볍게 허구화하는 방식을 통해 비참한 현실을 따뜻하게 껴안았다.

  그러나 『이중 하나는 거짓말』에 등장하는 지우의 웹툰 「내가 본 것」의 내용은 우리의 기대만큼 그리 따뜻하지 않다. 「내가 본 것」은 지우가 같은 빌라에 살았던 채운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을 목격하고 이를 이야기로 재구성한 웹툰이다. 그 사건은 바로 가정폭력 피해자였던 채운의 엄마가 가해자인 채운 아빠를 칼로 찌른 뒤 자수한 일이다. 지우는 자신의 무능을 가족에 대한 폭력과 조롱으로 해소하던 이 ‘나쁜 아빠’의 죽음을 허구화함으로써 오랫동안 간직하던 자신의 살부(殺父) 욕망을 대리 충족한다. 사실 지우의 아빠도 가족을 학대하다가 결국에는 가족을 버린 ‘나쁜 아빠’였던 것이다. 『달려라, 아비』에서 ‘나’의 거짓말과 상상, 그리고 허구화 전략을 통해 미스터리하고 귀여운 존재로 남게 되는 나쁜 아빠는 『이중 하나는 거짓말』에 이르러 실제적으로나 허구적으로 완전히 까발려진 채 삭제된다.

  이제 김애란의 소설에서 거짓말과 상상은 더 이상 남루와 비참의 현실, 혹은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는 가족극을 농담과 웃음으로 명랑하게 채색하지 못한다. 어쩌면 이는 아이들이 직면해야 하는 상황이 더 끔찍하고 적나라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김애란에게 거짓말과 허구는 언제까지나 우리와 공존할 것이 분명한 잔혹한 현실을 그래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는 완충장치이자, 그러한 현실을 회피하지 않게 하는 일종의 거리화 전략으로 작동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채운 아버지의 죽음을 각색한 웹툰이 지우와 채운 모두에게 위로가 되었듯이.

  이렇게 소설은 거짓말과 이야기를 통해 각자 자기만의 “무서운 이야기 속에 갇혀 있는”(134쪽) 아이들을 무서운 이야기 밖으로 걸어나오게 한 뒤, 스스로가 납득할 만한 자기만의 이야기를 시작할 용기를 준다. 특히 존속살인 사건의 당사자이지만 평생 이 사실을 감추면서 살아야 하는 채운에게 지우의 이야기와 소리의 위로는 그가 받는 압박감을 부분적으로 해소해주고 완충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의 비밀이 다른 비밀을 돕는”(135쪽) 비밀과 거짓말의 교환을 통해 자기 삶의 상처를 좀더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잔혹한 진실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때로 거짓말은 그런 잔혹한 진실을 그래도 견딜 수 있도록, 그래서 삶에 대한 의지를 갖게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볼 때, 성장은 거짓말의 가치를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제 아이들은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죄의식, 분노, 집착 등에서 벗어나 자기 삶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결말에 등장하는, “나를 떠나지 말고, 나를 버려라”(228쪽)라는 선호 아저씨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탈향과 귀향의 원환(圓環) 서사’야말로 가장 오래된 성장의 기본 문법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작가는 앞으로 닥쳐올 이 아이들의 심리적·실제적 출가(出家)가 결코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것과 같은 “극적인 탈출”(202쪽)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오히려 이들에게 성장이란 “어떤 거짓은 용서해주고 어떤 진실은 조용히 승인해주는 작은 기적”(228쪽)이거나 “상대가 나를 살린 줄도 모른 채 (기적적으로) 살아낸 날들”(203쪽)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서사 그래프’에 나오는 그 약동하는 선을 가진 이들”(216쪽)이 아니더라도 실망하지 말기를. 왜냐하면 이 아이들은 그저 “하늘 아래 쭉 뻗은 수평선처럼 사람을 안심시키는”(83쪽) “좋은 직선”은 그릴 수 있지만, 그 직선이 상승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들에겐 힘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좋은 직선’을 그릴 줄 아는 것만으로도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작가는 그런 것도 성장이라고, 어쩌면 그런 것이야말로 ‘진짜’ 성장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듯하다. 김애란은 이렇게 적었다.


떠나기, 변하기, 돌아오기. 그리고 그사이 벌어지는 여러 성장들. 하지만 실제의 우리는 그냥 돌아갈 뿐이라고, 그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자기 안의 무언가가 미세히 변했음을 깨닫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삶의 나침반 속 바늘이 미지의 자성을 향해 약하게 떨릴 때가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그런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데다 거의 표도 안 나는 그 정도의 변화도 혹은 변화 없음도? 지우는 ‘그렇다’고 생각했다.(233쪽)


  • 1) 지그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예술, 문학, 정신분석』,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405~406쪽.
  • 2) 같은 책, 411쪽.
  • 3) 마크 트웨인, 「거짓말에 관하여」, 『거짓말에 관하여』, 마크 트웨인 외 지음, 김연은·하재연 옮김, 증명, 2000,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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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가경 ‘너머’에 없으리라는 기대 ― 『기대 없는 토요일』

기대는 철저히 교환 체계 안에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기대 없음'은 어떤 등가성의 원리로는 설명될 수 없는, 아니, 차라리 등가 관계를 중지시키는 오묘한 상태인 것은 아닐까? 여기서, 다시. 그렇다면 윤지양의 『기대 없는 토요일』 속 '토요일'이 애당초 우리에게 줄 것으로 기대되던 것은 무엇이며, 토요일은 왜 더 이상 기대되지 못하는 것일까? 그건 마치 베일 너머의 무언가를 상상하며 베일을 걷어 낸 사람이 막상 그곳에 베일 말곤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해야 했던 낙담의 기억에 가까울까? 그러니까, 최소한 로또 5등 당첨 정도의 이벤트는 기대했던 사람이 막상 토요일의 가면을 벗겨 놓고 보니 정말 '토요일' 빼곤 아무것도 없더라는 모종의 비관을 함축하고 있는 걸까? 일단 분명한 것은 이번 윤지양의 시집에는 베일 뒤에 아무것도 없음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기어이 그 베일을 열어젖히려는 움직임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당장 윤지양의 첫 시집만 하더라도 화자들에게 시는 의미론적 운반체였기에, 그들은 "무엇을 담으면 넘치지 않을까", "무엇을 담으면 부족하지 않을까"를 끊임없이 견주어 보는 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 미해결 과제 앞에서 그들은 적어도 "무책임하게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1)이라는 잠정적 결론만을 쥔 상태였고, 머잖아 무너져 내릴 역사(驛舍) 안에서 '시간'을 기다리며 정지해 있었다. "시간을 묻기 위해 / 사랑이 온다"2)라는 예고 앞에서, 지금이 몇 시인지 물으며 지나가는 행인이나 열차에 올라타 막 떠나가려는 승객과 달리, 윤지양의 화자들은 그저 단단히 정체되어 있었을 뿐이다.3) 그렇게 나름의 중용을 지키고 있던 윤지양의 화자들은, 그러나 이제, 현상의 "뒤편으로 가야 한다"(「외면」)라고 말한다. 심지어 그 뒤편에 무엇이 있건 없건 크게 구애받지 않겠다는 달관의 제스처를 취한다. 여기에서 우린 어렴풋이나마 시집 전면에 왜 '기대 없음'이 내걸렸는지를 짐작하게 된다. 또 그것이 허무의 감투를 쓴 비관적 인식의 발로라기보다, 허무를 뒤집어쓸지언정 세계를 끌어안아 보겠다는 긍정에의 의지에 가깝다는 것도. 너무 복잡할 필요도 없다. 그저 "두드림 뒤에 따라올 가여운 존재를 / 실은 너무 사랑하고 있"(「조지에게」)다 하지 않는가. 미지 너머에 누추함만 있을지라도 기어이 두드려 보겠다는, 그러지 않고는 못 버티겠다는 항복의 고백이 어떤 의미에서의 '기대 없음'이자, 또 다른 의미에서의 '사랑'이기도 할 터. 결국 윤지양의 이번 시집은 앞선 시집 속 화자들이 경계하던 '무책임'마저 껴안는 방식으로 자기 책임을 수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그러나 '이미' 겨운 존재들을, 벌써부터 사랑하고 있노라 말하고 있는 화자들은, "시간을 묻기 위해" 올 것이라던 사랑의 계획이 진작부터 실행되고 있었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In and beyond 그렇다면 대관절 이 '시간'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본 윤지양의 '시간'이란 단지 대상의 정면으로부터 오지 않는 것이다. 그녀의 '시간'은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와중에 발견되는 법이 거의 없고, 어떤 배경이나 이면에 알게 모르게 있다가, 사후적인 양식으로만 구성된다는 점에서 '기억'과 닮았다. 이것이 왜 숱한 화자들의 기억이 어떤 구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뒤죽박죽 수수께끼처럼 엉켜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화자들이 명확한 시간 단위 안에서 경험한 객관적 사건과 별개로, 그들의 기억은 과거 또는 현재에 대한 그들의 주관적 인식이나 무의식 위에서 끊임없이 추체험되며 서로를 삼투하고 교란한다. 이러한 기억의 양상을 보고 있으면 윤지양이 그리는 시간의 물성이란 곧 '순환'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관념의 양극단을 오가기도 하는 윤지양의 세계는 사실상 "길은 두 갈래로 나눠진다"(「경계 수칙」)는 사실을 전제하기도 해서, 자칫 그 관계를 대립 구조로 손쉽게 환원해 버릴 위험을 내포하기도 한다. 당장 「은미」만 보더라도 그렇다. 작중 '은미'의 삶은 고향인 제주에 남을지, 낯선 육지로 떠날지와 같은 두 갈래의 행선지 아래 끊임없이 놓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시는 '은미'가 육지로의 초월이나 제주에의 잔류 양자 중 단 하나를 택하는 과정을 소묘하기보다, 단지 '은미'라는 존재가 "떠나도 금세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을 뿐임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은미'의 관념 안에 제주와 육지는 대립하고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은미'의 육지 안에는 이미 제주가 들어와 있고, 제주 안에는 이미 육지가 들어와 있으며, 이러한 윤지양의 환원 및 귀환 이미지는 대립 아닌 순환 관계에 의존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 순환은 결국 공간(제주)화된 기억을 '초월'해야만 다음 시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보편적 믿음보다, 그 기억 안에서 구르기를 택하며 시간을 초과해 낼 수도 있다는 또 다른 믿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순환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하려면 「토요일」에 주목하라. 시 안에서 우리는 자칫 '열기로 가득한 여름'의 '축구장' 속 '열광하며 뛰어가는' '선수들'과, 점점 더 단단해지는 '냉기로 가득한 겨울철'의 '사무실' 속 '하품하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대립 관계로 읽어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을 느낀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인물들의 앉고 걷고 뛰는 행위가 생성 중인 에너지, 운동량, 벡터가 계절을 오가며 서로를 융해 또는 응고시키는 순환 관계임을 확인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겨울철 사무실의 히터"가 바깥 세계의 얼음을 단단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 중인지, 혹은 강력한 추위가 그것을 켜는 '결과'를 초래한 건지 파악하기 어려워질 때, 인과/선후 역시 새로운 순환의 겹으로 등장한다. 종합해 보면 이 시에 켜켜이 놓인 각종 순환 레이어는 저마다의 주기와 주관적 원리를 따르고 있으며, 이 전체를 아우르는 "침묵의 기억" 역시 결국엔 주관화된 기억임을 가늠케 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침묵의 기억"이 무언가를 녹일 때까지 '침묵'에 휩싸인 채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군중의 원리와, 어느 정도 "열기가 식을 때 즈음 / 경기장으로 뛰어드"는 그들의 원리가 어느 순간 상통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요컨대 이들은 한 세계 안에서(in) 그 세계를 동시에(and) 넘어서려는(beyond) 움직임을 함께 지니게 된다. 이 움직임은 '초월'이 아니라, 완전히 전유될 수 없는 나머지 부분을 그 내부에서 어떻게든 '초과'해 내려는 움직임이다. 순환하고 있는 그들은 서로를 굳히고 녹이고, 움직이게 하고 정지시키는 관계로 이어지며 끊임없이 도래하는 토요일을 생성 중이다. 물론 이 순환과 연결의 감각이 반드시 조화와 화해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며, 그 안에선 폭력 역시 그에 못지않게 자주 발생한다. 이 양상은 윤지양이 그리는 '식이'(食餌) 이미지와 긴밀히 연결되는데, 가령 「살기」(28쪽) 속 "아직 오지 않은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화자가 응시하는 음식이 "싱싱한 상태"로 묘사되고 있음에 주목해 보라. 우리는 여기에서 "싱싱한 상태"의 음식이 기실 "포크에 찔린 채" 죽은 지 오래임을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다. 이에 더해 화자의 기억을 타고 과거로 역행해 보면, 언젠가 "초인종이 지는 저녁"에 화자가 멀리 떠나보냈던 상상 속의 개이자 헐떡일 뿐 짖지 않는 상태로 존재하는 '행복'이 문득 화자의 과거 속 "꿈결에 먹어 치운 / 차가운 요리"라는 기억 이미지, 그리고 '현재'의 만찬 이미지와 포개어짐을 볼 수 있다. 그때 초인종 소리와 함께 '현재'는 강제 소환되고, “문 가까이서 들리는 숨소리"로만 식별되는 손님은 식탁보의 "기름진 얼룩" 같은 기억과 함께 화자의 고백 "나는 / 예전에 당신을 먹었던 사람"을 이끌어 낸다. 즉 제목의 '살기'는 과거 떠나보낸 개가 훗날 미지의 손님으로 귀환하는 이미지처럼, 결국 먹고 먹히는 관계, 즉 포크처럼 뾰족한 포식자의 '살기(殺氣)'에 의해 '살기' 어려워진 피식자들이 역설적으로 자신의 포식자들을 '살게' 만드는 섭식의 순환 메커니즘을 드러낸다. 이외에도 「속죄」 역시 쏘고 쏘이고 물어뜯고 뜯기는 관계를, 「유진」 역시 사형수 M에게 화자가 잉태되고, 동시에 화자의 탄생이 M의 사형 집행으로 이어지는 생사의 연쇄와 순환을 보여 준다. 이러한 세계의 선 또는 악순환 안에서 윤지양의 어떤 화자는 단지 '악순환'을 특정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쁜 / 생의 / 반복을 끊을 수 없으면 바꿔야" 하고, 그땐 "기억의 변환법이 요구된다"(「기억의 변환법」)라고,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하다가, 나는 혹시 화자가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닌지 짐작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노력해 봐도 어차피 "나쁜 생"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이 오늘날 우리의 '기대 없음'으로 이어진 거라면, 그래서 매주 도래할 '토요일'이 단지 생의 극복 불가능성을 기술하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해진 거라면, 기억을 살짝만 비틀어 지난한 삶의 경로도 살짝만 틀어보자고. 많이도 말고 딱 1도 정도만, 그러니까, 딱 '기대 없음'에 대한 인식틀 정도만 달리 정립해 보자고. 시와 시와 시와 그리고 시 이를 위해 윤지양은 어떤 사유의 단서를 남겨 놓았을까?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시인이 군데군데 묻어 둔 몇 개의 힌트를 확인해 보자. 세상에는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찢어지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의 몸과 마음을 총칼로 쑤신 뒤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훗날 영화가 좋아서 두 번씩이나 본 사람이 있고 좋다는 편에 속하는 사람이 있고 별로라는 사람이 있고 전혀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이 정확하지 못한 기억으로 얼핏, 시에 등장하기도 하는 법이다 - 「왜 어떤 사람은 서울의 봄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나」 부분 위 화자의 요지를 있는 그대로 풀어쓰자면, 세상엔 몹시 많은 사람이 있고, 또 그들은 너무 다양한데, 하물며 그 마음은 얼마나 제각각이겠으며, 또 그 제각각은 얼마나 제각각의 속도로 변하겠냐는 것이다. 좋다. 여기까지는 화자가 인간 만사의 원리를 자기 관점으로 천명해 보려는 시도 정도로 읽힌다. 근데 문득 시가 의미심장해지는 대목은 줄곧 영화 「서울의 봄」과 관객 반응에 대해 이야기하던 화자가 맨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 뜬금없이 '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내용은 어떤 시에서만큼은 서로 연관되지 않은 사람들이 조금 비틀렸거나 성글은 형해의 기억으로도 등장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 대목은 앞선 '기억의 변환법'이 자유롭게 구사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시'와, 동시에 시적 대상의 근원적인 불가해성까지 넉넉히 품을 수 있는 장르로서의 '시'에 대한 화자의 믿음을 엿보게 한다. 이는 윤지양의 시 세계 안에선 왜 하늘, 땅, 바다와 같은 무한히 유한한 공간이 '개', '-그루', '포기'와 같은 단위명사와 접착되어 있는가에 대한 답변으로까지 확장된다. 대상의 분량을 정밀하게 측량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단위명사)와 절대 측정될 수 없는 개념을 의도적으로 접착시켜 문장의 오류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시적 설계는 결과적으로 존재들의 측량 불가능성을 드러내기 위함인 까닭이다. 마치 자신이 접촉면을 "자르는 게 아니라 안고 있"다고 생각하는 날카로운 칼의 착각처럼, 이해의 제스처란 얼마나 순식간에 "꼭 움켜쥐고 있는 쪽에 가까"(「(4)」)워 질 수 있는지, 즉 얼마나 손쉽게 '장악'의 제스처로 변질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장악에의 욕망은 「소설」(102쪽) 속 "새우가 들어간 음식을 먹을 때마다 하나씩 늘려서 먹어 보"는 실험을 감행 중인 '동생'이 일곱 개째 새우를 먹고 쓰러진 순간에야 비로소 자신이 "새우를 여섯 개까지 먹을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닫는 풍경만큼이나 위태하고 애처롭다. 그러니 한 존재를 온전히 알 수 있을 거란 '기대'를 배제한 가닿기는 역설적으로 윤지양의 시 세계 안에서만은 '있는 그대로'의 긍정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편으로 나아가'는 정면 돌파의 유인으로 작용한다. 불가해성에 가닿으려는 시의 작업은 '공동 내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에서 두드러진다. 윤지양은 공동을 구성하는 '단수적 존재'들을 일일이 호명하듯 솎아 내어 드러내는 수고로운 작업을 감행한다. 이를테면 "게와 게와 빛과 그리고 빛"(「소설」, 17쪽)처럼, 같은 단어를 반복적으로 나열하는 작업 같은 것인데, 여기에는 '게'와 '빛'으로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이 단지 같은 종과 형질과 이름을 분유하고 있다 해서 하나의 존재로 엉겨 붙을 수 없다는 고집, 즉 대상 저마다 어떤 고유성을 띠고 있다는 믿음 같은 게 들어 있다. 이 단수성의 세계에선 하물며 기침이 기침을 전염시키며 서로에게 번져 갈지언정, "기침 그리고 기침 기침 그리고 기침과 기침의 기침"(「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과 같은 묘사만이 그 단수적 진실에 그나마 근접해 보는 문장이 된다. 이 세심한 기초공사를 마치고 시인이 향한 곳이라고 해서 마냥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름다우려는 것들은 아름다우려 한 만큼 누추해지기도 하는 법이니까. 시인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다는 것은 「빛과 소리 소문」에서 잘 드러난다. 작중에는 "엉망으로 깨진 유리가 반짝이는 아스팔트 위"를 "맨발만 간신히 면한 채 너덜너덜한 신을 끌며 걷던" 화자는 우연히 헐벗은 발의 유령을 마주한다. 그런 화자는 뜬금없이 유령에게 “투명한 모자를 씌워 줄 수 있을지" 궁리를 하고, 또 자기 신발 끈만을 단단히 조일 뿐이다. 근데 여기에서 “유령이 나지막이 내뱉은 말"이 자신에게 도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어조에 실린 감정"이 가늠조차 되지 않고 있음을 깨달은 화자는 그제서야 나직이 읊조린다. 아아, "이해란 얼마만큼 말이 되어야 하나". 이 읊조림은 어쩌면 이 모든 기초공사를 통한 기억의 변환마저 우리 이해 지평 안에서는 실패로 귀결될 확률이 높고, 여전히 "말이 되어야" 그 의미에 가닿을 수 있다는 인식적 한계에 노출될 수 있음을 시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윤지양의 화자가 「오 혹은 없음」에 도달해 "서로 부수면서 허물어져" 가고 "서로 깎여서 부서져 있"는 "다이아몬드 사랑"의 날카로운 파편을 "주우러 / 가"자고 말하고 있음에 주목해 보자. 여기에서의 핵심은 '날카로운 파편' 아닌 여전히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사랑"의 발견에 있다고 한다면, 앞선 시집에서 "시간을 묻기 위해" 온다고 예고되던 '사랑'은 이렇게 누추하게 흩뿌려진 파편의 형태로, "한쪽 다리가 짝짝이"인 채로, 혹은 유령과 같은 "가여운 존재"(「조지에게」)들을 대동하고서 오는 것이겠다. 나는 여기에서 '사랑'이 "이해란 얼만큼 말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집요한 물음을 경유해 윤지양이 스스로 제출한 답변이라고, 또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기대 없음'의 동의어일 것이라고 감히 짐작해 본다. 이제 사랑의 베일 뒤엔 어떤 숭고함도 없고, 토요일 뒤엔 로또 당첨 같은 변칙이나 행운도 없단 걸 알면서도, 기어이 써 내려가려는 시인의 자세는 이제 그녀의 시가 의미론적 작업을 넘어 존재론적 작업에 한발 다가섰음을 의미한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최대한 가닿으면서도, 가끔씩 기억의 변환술을 구사하며 슬픔의 순환에 갇히지 않는 화자들은 윤지양이 오늘날 '기대 없이' 내어 보인, 그러나 '중요한' 시적 성취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녀의 시를 읽으면서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새삼 기억해 냈다. 더 이상 상대에게 아무 기대조차 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무언가가 종결되었던 것과, 상대에게 바라는 아무런 기대도 없음을 깨달았을 때 무언가 시작되었던 것 사이에는 거의 전부 정도의 차이가 있었음을. 생각해 보니 십자가 속 언어밭에 매립된 의미의 흙들을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건져 올리고 있는 굴착기가 겨냥 중인 것은 단단한 의미의 진지를 구축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지양은 이제 단지 "견고하게 쌓은 벽돌담을 / 누군가 깎아 놓은 흔적" 안에서 그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느껴 보려는 듯하다. 기대 없이 무상으로 주어진 것, 그저 거기 있는(there is) 것들을 감각 중인 시는 이제 의미를 중지시키고, 다만 발생되고 있을 뿐이다. 작은 구멍과 미세한 틈 안에서 "이전에 불었던 바람"이 지금도 교통하고 있음을, 다만 감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 순환 아래 끊임없이 양산되는 '시와 시와 시와 그리고 시......'가 있음을, 단지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1) 윤지양, 「생각이 나서」, 『스키드』(문학과지성사, 2021). 2) 윤지양, 「환상열차분야지도」, 위의 책. 3) 윤지양, 「석수」, 위의 책.

격월간 릿터 민가경 윤지양김수영 문학상기대 없는 토요일스키드여름연루릿터리뷰 2025
정원 견고한 삶의 조건 ― 박참새, 배시은, 신이인의 시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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