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격월간 릿터 2024년 4-5월호(제47호)
이 거친 세상, 부서지기 전에 부숴버려 ― 『파쇄』 『파과』
‘파쇄(破碎)’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자동사인 ‘깨어져 부스러지다’와 타동사인 ‘깨뜨려 부수다’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깨지면서 깨뜨릴 수 있을까? 혹은 부서지면서 부숴버릴 수 있을까?
구병모의 소설 『파쇄』(위즈덤하우스, 2023)는 흥미롭게도 깨져야만 깨뜨릴 수 있는, 부서져야만 부숴버릴 수 있는 세상 이치와 그 역설의 논리를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건조하고 냉정하게 그려낸다. 소설에는 킬러가 되기 위해 극한 훈련을 하고 있는 ‘그’와 ‘그녀’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녀’가 어떤 경로로 킬러가 되기 위한 산장 훈련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조차 과감하게 생략한 채, 오직 죽음을 담보로 한 ‘그’와 ‘그녀’의 벼랑 끝 훈련 장면만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소설은 그렇게 훈련인지 실전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극한의 상황과 매번 온몸으로 그 상황을 돌파하면서 위기를 극복하는 ‘그녀’의 미션 임파서블로 채워진다. 그렇게 『파쇄』는 공격과 방어, 다시 공격으로 이어지는 숨막히는 육탄전 장면들이 만들어내는 극한의 대결 구도와 팽팽한 긴장감을 소설 초반부터 끝까지 이어간다. 한국문학에서는 보기 드문 과호흡의 소설이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밑도 끝도 없는 하드보일드 트레이닝 소설이다. 그런 이 소설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소설이 『파과』(2013)의 ‘외전’이라는 작가의 말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파과』는 65세 ‘할머니 킬러’인 ‘조각’이 살인기계로서의 효용가치가 다하는 순간 맞닥뜨린 생애 마지막 혈투에 대해 다룬 소설이다. ‘외전’(外傳, supplementary story)은 일종의 파생 작품으로, 본편에서 빠진 부분을 채워주는, 원작에 대한 보충 설명 같은 성격을 갖는다. 과연 이 소설은 작가의 전작 『파과』의 주인공인 늙은 여성 킬러 ‘조각’이 본격적인 살인기계가 되기 이전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등장인물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나 사건의 배경은 삭제하고 있어 전작에 대한 보충 설명이라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거꾸로 독자는 『파쇄』에서는 알 수 없는 ‘그’(‘류’)와 ‘그녀’(‘조각’)의 유사 가족 관계, 그리고 이들이 속한 조직이 ‘방역업’으로 불리는 살인 용역 업체라는 사실 등을 전작인 『파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파과』의 프리퀄(prequel)인가? 흔히 프리퀄은 원작 캐릭터의 과거 모습이나 오리지널 스토리의 전사(前史), 즉 이전 이야기를 통해 본래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다. 분명 『파쇄』는 시간 흐름상 『파과』의 이전 이야기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서사적 진공 상태에 가까운 장면 연출로 인해 이 소설이 전작에서 더 나아간 이야기와 캐릭터를 보여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파쇄』가 『파과』와 이어지는 지점은 무엇인가? 외전이나 프리퀄이라는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 두 작품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깨뜨릴 파(破)’로 상징되는, 거칠고 험한 세계를 향한 어떤 태도, 즉 아무런 인간적 연민이나 우호적 감정도 없이 세계와 부딪혀 세계를 부숴버리겠다는 각오다. 아니면 그렇게 세계와 부딪히다가 내가 부서지거나. 『파쇄』가 『파과』의 핵심 모티프인 ‘파과(破果)’를 클로즈업해서 드라마틱하게 장면화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분명 이 ‘파’ 하기는 두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임은 분명하다. ‘파’의 방식과 방향은 다르지만 말이다. 일단 두 소설에 등장하는 ‘파과’의 현장을 좀더 디테일하게 살펴보자. 『파쇄』 먼저.
그녀는 두 개의 손 안에 한 세상을 움켜쥐고 부숴버린다. 세상은 불과 한 번의 총성으로 인해 짓무른 과일처럼 간단히 부서진다. 그 파열음이 벼락처럼 귓전을 갈기지만 그녀는 소리에 무너지지 않는다. (......) 손안에 쥔-애당초 쥔 게 있었던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과일과 같은 세상은 씨앗조차 남지 않고, 과육은 진작 분해가 끝난 시신과 같이 흔적도 없다.(『파쇄』, 84~85쪽)
극한의 훈련을 끝낸 직후 갑자기 등장한 멧돼지로 인해 그가 심각한 부상을 당하자 그녀는 달려오는 멧돼지를 향해 총을 쏜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죽인 멧돼지가 갑자기 ‘부서진 세상’으로 의미화되다가 급기야 “짓무른 과일”에 비유된다는 점이다. 아무런 유사성의 논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멧돼지→세상→짓무른 과일’이라는 기표의 미끄러짐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일단 『파쇄』의 내용에 따르면, 이 연속된 기표는 그녀를 둘러싼 적대적 세계 그 자체이자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가차 없이, 그리고 흔적도 없이 부숴버려야만 하는 목표물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임을 당한 멧돼지란 ‘짓무른 과일’처럼 그 자체로 이미 깨지고 부서진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멧돼지에게 연민이나 후회의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칫 방심할 경우 그와 그녀가 오히려 짓무른 과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격이야말로 최선의 방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남는다. 그런데 왜 그녀가 대결해야 할 멧돼지같은 세상 혹은 세상의 멧돼지들은 ‘짓무른 과일’에 비유되는가? 도대체 이 비유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 이상한 비유의 기원은 바로 『파과』다. 아래 인용문은 『파쇄』의 ‘짓무른 과일’이 『파과』에서 비롯되었음을, 따라서 이 두 작품이 동일한 세계관 위에 구축된 시리즈임을 확인시켜준다. 『파과』의 한 대목을 보자.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 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붙은 살점들을 떼어 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파과』, 222쪽)
썩어 문드러져 본래의 형태를 잃고 냉장고 야채 칸 벽에 들러붙어 “시큼한 시취”를 뿜어내는, 한때는 복숭아였지만 이제는 물컹한 덩어리에 불과한 그것은 이제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버린다. “부서진 ‘조각’들을 건져 올린다”는 문장으로 짐작할 수 있듯, 이 ‘짓무른 과일’은 주인공 ‘조각’의 노쇠한 육체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그런데 40년 넘게 업계의 전설로 불렸던 완벽하고 냉혹한 킬러는 어쩌다 짓무른 과일, 즉 파과가 되었을까? 그것은 다만 전성기가 지난 킬러의 노화에 대한 비유에 불과한 걸까? 아니면, 거친 세상을 부수면서 자기 자신도 그만큼 내적, 외적으로 붕괴되고 깨졌다는 것을 의미하나? 중요한 점은 『파과』에서 살인기계로서의 효용가치가 다하고 나서야 비로소 조각은 자기 존재에 대해 사유하고 인간으로서 감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파과』에서 ‘파과’가 인간 되기의 시발점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나아가 부서진 정신과 육체는 15살 이후로 멈춘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새로운 성찰의 계기로 작용한다.
반면 『파쇄』 속 ‘짓무른 과일’로 대변되는 파과 현상은 일차적으로는 그녀가 부숴버린 세상을 가리킨다. 그리고 멧돼지 같은 세상을 부숴버린 순간 그녀는 자신이 죄책감이나 슬픔, 그리움과 같은 인간적 감정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살인기계가 될 것임을 직감한다. 그것은 바로 “약탈과 섬멸의 언어로밖에 표현할 길 없는 삶을 시작했음을 알게 되고 지나온 보통의 시간과 평생을 걸쳐 이별하게 되리라는 예감”(90쪽)에 다름 아니다. 소설의 마지막에 그녀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야 마는 장면은 그런 점에서 인간적 삶에 작별을 고하는 애도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냉혹한 살인기계는 그렇게 탄생한다. 그럴 때 『파쇄』는 혹독한 수련을 통해 완벽한 킬러가 되는 전형적인 장르소설의 외양을 가지는 듯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킬러가 되기 위해 세상과 육탄전을 벌이는 어린 소녀라는 강렬한 모멘트 속에 ‘부수다가 부서지기’ 혹은 ‘무너뜨리다가 무너지기’(그 역도 사실이다.)로 요약되는 비관적 염세주의를 갈아넣어 파국의 무드를 뿜어낸다. 그러니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치다가 급기야 ‘짓무른 과일’이 되어버린 ‘조각’의 몰락에 어찌 매혹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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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을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골라 제외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형언할 수 없어서 침묵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미 모두가 알고 있어 굳이 말해질 필요가 없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강화길 소설의 여성 인물들이 구태여 토로하지 않는 억울감과 소외감 같은 것. 이 사회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으면서 부러 말할 필요도 없는, 각기 다른 여자들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거푸집으로 찍어낸 듯한 유사한 정서들. 그러므로 강화길의 소설 속 말해지지 않는 빈틈은 경험적 현실을 나눌 수 있도록 의도된 여백이 된다. 이는 매끈한 반사면으로 남아 독자의 체험을 되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우리는 그 여백에 성차별적인 세계에서 타의로 경험한 불쾌감을 채워 소설을 완성한다. 강화길이 꾸준히 '안진'이라는 지방의 소도시를 여성이 경험하는 특수한 현실의 집합체로 구현하려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외형적으로 매우 닮아 자매로 오해를 받곤 했던 '나'(진이)와 막내 이모는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토대로 유대감을 나누던 사이다. '나'는 이모가 친언니였으면 하고 바랄 만큼 그녀를 각별히 생각해 수시로 책과 엘피판 등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모가 암으로 죽자 그의 언니인 큰이모는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막내 이모가 아끼던 티셔츠를 남자 조카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한다. 이모의 여자 조카가 '나' 하나뿐이라는 점에서 이는 큰이모가 여자라는 이유로 '나'만 배제했다는 의미가 된다. '나'의 남동생은 이모의 발인 시간도 제대로 못 맞췄지만 큰이모는 그의 수고를 치하한다. 이렇듯 가장의 역할을 대신하는 여성이 가부장제를 대물림하는 광경을 우리는 강화길의 소설에서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다. 경제적 부담을 짊어지고서 그러지 않은 여자들을 "멍청한 년"이라고 구박하는 여자(큰이모)와, 그런 여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엄격한 미의 기준을 악용하여 "못생긴 게"라고 되받아치는 여자('나')가 소설에 남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쉬이 불행해지고 마는 이들의 처지가 애석하게도 친숙하게 느껴진다. 강화길은 이전 작품에서 다루어온 문제의식을 이어가되 유품의 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을 구성하여 '혈연과 가부장제'라는 범주로는 다 길어낼 수 없는 남은 마음들에 대해 숙고한다. 남자 조카들에 비해 이모와 훨씬 가까웠던 '나'는 이모가 남긴 유품을 처리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음을 거리낌 없이 주장하지만, 이모를 언니라고 부르면서 '나'와 이모가 소원해졌다는 사실과 '나'가 알지 못하는 이모의 마음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낯선 여자 앞에서는 혼란스러워진다. '나'는 자신이 이모와 법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혈연관계임을 들먹이면서 여자를 내모는데, 이때 경제적으로 지원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모의 대소사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던 큰이모의 기분을 경험하게 된다. 부재하는 대상과 맺었던 관계의 깊이를 증명하고 그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은 사람 사이의 감정적 교류를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를 사유하게 한다. '나'는 "내가 사귄 남자들"을 이모가 다 알았던 것이 그만큼 서로 가까운 사이여서가 아니라 '나'가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연애사를 들려주었기 때문임을 아프게 확인한다. 자기 편의를 위해 이모가 어렵게 모은 돈을 빼앗아버렸다는 사실도. 그리하여 이모를 빼닮았다는 점이 이모의 횡격막 아래 자리한 "그것의 거푸집마냥 똑같은 형태의 길쭉한 암 덩어리"가 그랬듯, 부정적인 의미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돈과 피로 얽힌 관계라거나, 서로 돌봄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상히 대해주어야 하는 사이였다는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소한 추억 역시 분명히 실재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실한 마음과 말로도 가려지지 않는 거짓의 마음, '안진'이 모두 안진에 있다.
『에너미 마인』과의 만남은 뭐랄까…… 운명적이었다. 때는 전 국민을 잠 못 들게 한 12월 3일로부터 열흘가량이 지난 어느 평일 저녁. 나는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누구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니 늘 눈이 피로했고, 집중력도 떨어져 독서는커녕 글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매일매일 현실의 뉴스에 압도되어 실핏줄이 바짝 선 눈으로 휴대폰만 들여다봤더랬다. 가장 나를 괴롭혔던 건 ‘지금 소설 같은 걸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프리랜서인 나에게는 정해진 마감 날짜가 있었다. 도저히 가상 세계에 몰입할 만한 여건이 아니었음에도 시시각각 디데이는 다가왔다. 나는 점차 초조함과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글을 써야 한다! 더 이상 이러면 안 돼!’ 일단 잃어버린 텍스트의 감각부터 되찾을 목적으로 독서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우리 집 소파 옆에는 사거나 선물 받고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다. 한참을 살펴봤는데도 딱히 끌리는 게 없었다. 내 신경은 계속 휴대폰과 그날 이후 ASMR처럼 틀어 놓는 뉴스 채널으로만 쏠렸다. 이러다가는 또 한 줄도 못 읽겠다 싶어서, 일단 눈을 감고 책탑을 더듬다가 아무 책이나 붙잡았다. 그게 바로 이 샛노란 표지의 『에너미 마인』. 무려 1979년에 쓰인 SF이다. 처음엔 내 손으로 골랐지만 우려스러웠다. 하필 지금, 급한 작업에조차 집중을 못 하는데 가상의 시대, 미지의 행성을 배경으로 한 외계인 소설에 몰입할 수 있을까? 나중에 좀 더 심적 여유가 있을 때 읽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보드라운 표지의 감촉에 이끌려 책을 펼쳤고, 단숨에 몰입해 그날 새벽에 마지막 장을 넘겼다. 지금은 세상의 어떤 신묘한 흐름이 나에게 이 책을 만나게 한 것 아닐까 생각한다. 엄마가 동생 시험 날에 예수님이 상장을 하사하는 꿈을 꿨던 것처럼……. 난 아직 종교가 없지만. 소설이 공개된 1979년은 이념 갈등이 극심했던 냉전 시기다. 그런 국제 정세를 비유하듯 소설 안의 두 종족, 드랙과 인간 사이에도 긴 전쟁이 진행 중이다. 드랙은 손가락이 세 개에 노란 피부를 가진 외계 종족이다. 우리의 주인공 군인 윌리스 데이비지는 전투 중 적군인 제리바 쉬간과 함께 무인 행성 ‘파이린 4호’에 조난 당한다. 시대적 배경을 직접적으로 대입해 보자면, 데스 매치 중이던 미군과 소련군이 함께 무인도에 불시착한 셈이다. 행성에서 눈을 뜬 두 존재는 서로를 인식하자마자 다시 몸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곧 괜한 짓이라는 걸 깨닫는다. 중요한 건 적을 죽이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구조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이제 두 종족 간의 원한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인간과 드랙은 생존을 위해 협력한다. 함께 식량을 구하고,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동굴을 아늑하게 꾸민다. 낮의 노동 후에는 긴 밤이 기다리고 있다. 그곳에는 즐길 거리가 아무것도 없다. 무료함을 달래 줄 만한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무인도와 달라 파도에 떠밀려 오는 새로운 아이템조차 없다. 날씨 변화 이외의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의 이야기에, 목소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공허한 공간에서 오로지 두 존재의 회상만이 지루함을 달래 준다. 우리의 인간 주인공 데이비지는 외로움에 취약하다. 적군이었던 쉬간마저 없었으면 분명 미치거나 자살했을 거라고 그는 말한다. 쉬간 역시 마찬가지다. 두 종족은 완전히 다른 문화와 배경을 가지고 있고, 살아온 세월도 다르지만 절대적인 고립은 양극단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제리바는 데이비지의 언어(영어)와 그의 농담을 이해하게 되고, 데이비지는 제리바의 족보와 드랙의 역사를 매일 밤 경청한다. 핏줄의 기록을 달달 외는 게 이 드랙이라는 종족의 특성이므로, 다행히 이야기는 많이 남아 있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극 초반부 전개이다. 아직 분량이 많이 남아 있다. 고난은 계속된다. 드랙의 또 다른 특성은 스스로 번식이 가능한 양성체라는 점이다. 제리바는 삭막한 행성에서 임신을 하고, 결국 출산 중 사망한다. 데이비지는 쉬간의 부탁으로 적이자 친구인 그의 배를 찢는다. 그렇게 샛노란 드랙 아기 자미스가 태어난다. 데이비지는 친구에게 섣불리 약속한 대가로 이 외계인 아기를 키워야 한다. 생존기에 육아가 더해진 것도 고달픈데, 자미스는 어마어마하게 발육이 빠르고 호기심도 왕성하다. 자미스는 데이비지를 삼촌이라고 부른다. 이제 예정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난 인간이고 손가락이 다섯 개지.” 나는 그때 어린애의 눈에서 눈물이 솟는 것을 보았다. “삼촌, 어른이 되면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이 생기나요?” 나는 앉아서 자미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이는 자신의 다른 두 손가락이 어디로 가 버린 건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데이비지는 너와 내가 어떻게, 왜 다른지 설명해야 한다. 왜 이 행성에는 우리 둘만 있게 되었는지도 알려 주어야 한다. 쉬간과의 전투와 전쟁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그 모든 갈등과 유리된 행성에서 태어난 자미스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다만 이 행성 밖에서도 ‘삼촌’인 데이비지와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전쟁을 멈출 수 있겠어요?” 자미스는 언젠가 행성을 떠나면 통역사가 되어 전쟁을 끝내게 돕고 싶다고 말한다. 두 존재의 애절한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성인 인간과 드랙 아이, 대척점의 존재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하다. 소설은 중요한 건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남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안에서 개인과 개인이 공유한 시간은 상황이 급변한다 해도 동영상 파일처럼 간단히 삭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각자의 일부가 되었다. 이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은 결말이 도달하도록 두 종족의 평화를 확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 종족 안에서도 깊어 가는 혐오와 차별의 현상을 짚어 낸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며 노력하는 인물을 보여준다. 홍보 문구에 적혀 있듯이, 『에너미 마인』은 무려 ‘전 세계 최초로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을 동시에 석권한 소프트sf의 걸작’이다. 이렇게 요란하게 상을 휩쓸면 기대감보다는 ‘어디 한번 보자.’ 싶은 마음으로 책을 펼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집중력 부족에 더불어 조금 삐뚤어진 마음으로 첫장을 넘겼는데, 결국 단번에 납득하고 말았다. SF라는 장르와 외계 종족과의 전쟁이라는 오락적인 배경으로 작가는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의 가치, 공존에 대해 말한다. 호불호 없이 흥미로운 전개는 다른 종족의 캐릭터에도 쉽게 이입하게 하고, 매력적인 대화와 문체는 독서에 속도감을 더한다. 나에게 SF는 정말 호불호도 많이 갈리고 어려운 장르다. 스스로도 정확히 취향을 가늠할 수 없다. 어렸을 땐 스페이스 오페라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마블 시리즈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가장 좋은 걸 보니 아닌 것 같다. 절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은 작품에 심장이 직격타를 맞을 때도 있고, 분명 내 취향일 거라 생각하고 접했는데 그저 한편의 과학 강의를 듣는 것 같은 작품도 있었다. 복불복이 크다보니 주변의 추천을 받은 게 아니면 선뜻 시작하기 꺼려진다. 그런 와중에 만난 『에너미 마인』은 쓰는 욕망을 되찾아 주는 것은 물론 어지러운 세계에서 소설이 가지는 힘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sf 장르에 장벽을 느끼는 독자들에게도 추천한다. 그렇게 한밤의 독서가 끝나고……. 나는 다음 날 이제 다시 힘내서 쓰자, 하고 의지를 다지며 노트북 앞에 앉았다. 과연 마감을 지킬 수 있을까? tmi. 이 리뷰 원고도 지각함…….
왜 하필 그림자였을까, 그가 상자에 차곡차곡 가두어 둔 것은. 당신에게 함이 하나 생겼다고 하자. 육면체여도 좋고 팔면체여도 상관없지만 어쨌든 내부와 외부가 구분되는 상자. 종이로 만든 것이어도 좋고 철재나 목재여도 무관한데, 뚜껑째로 열 수 있거나 경첩으로 상하부가 연결된 그 상자는, 비어있다. 당신은 무엇을 담겠는가? 그의 함에 든 그것은 말하자면 그림자였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에서 히라야마는 심상한 일상을 자신만의 취향으로 세공한다. 도쿄 공중화장실 미화원인 그는 청소도 허투루 하는 법 없이 자신만의 방법과 도구, 약품으로 꼼꼼하게도 닦는다. 변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누가 일부러 허리를 구부리고 찾아볼 리도 없는 구석진 면까지 오염을 닦아내는 그의 손길에 저어함은 없다. 점심은 신사의 야외 벤치에서 편의점 샌드위치와 우유. 더없이 간결하고 간소하다. 옆 사람과 눈인사를 나누기도 하지만 그의 눈길은 주로 위를 향한다. 높다란 나무에서 뻗은 가지에 매달린 잎사귀가 해를 받아 검은 무늬를 드리운다. 잎사귀 사이로 설핏 들어오는 햇살은 그 순간 더없이 명료하다. 영화는 내내 그의 ‘지금’을 보여준다. 청소일이 끝나면 동네 목욕탕에서 개운하게 몸을 씻은 후 지하상가에서 도수가 약한 술을 저녁 삼아 마신다. 다다미방에 요를 깔고 누워 탁상용 스탠드 불빛에 기대 헌책방에서 구입한 문고판 책을 몇 장이나마 읽다가 잠들고. 다음날 같은 시각에 일어나 단풍나무 묘목에 물을 뿌리고 간단히 씻고 수염을 정돈한 후 자판기 캔 커피를 뽑아 출근길에 오르면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가 반복된다. 그러니까 그토록 단정하고 과묵하며 그다지 남과 얽히지도 않고 독서와 필름 카메라, 카세트테이프로 듣는 올드팝이라는 그의 태도와 취향이 어디서부터 연유한 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영화는 그의 전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 영화의 백미는 거기 있다고 본다. ‘이런 일 할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유의 질척한 궁금증으로부터 가뿐히 등 돌리는 것. 그의 전사는 영화 안에 없다. 홍성욱의 「함」(『현대문학』, 2025년 2월호) 속에 든 것은 꿀이다. 꿀단지는 일하는 회사에서 사장님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나’에게는 어쩐지 이것이 “납골함”(55쪽)이라 여겨진다. 그래서일까. 함을 안고 천변을 걸어 집으로 가는 40여 분의 타임라인 동안 두 개의 죽음은 자연스레 환기된다. 기억조차 없는 아버지의 죽음이란 요컨대 이러하다. “엄마는 아버지의 시신을 어떻게 했을까?”와 그것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59쪽). 집에 다다르기까지 전화를 걸어 어디냐, 언제쯤 오냐, 아직이냐 묻는 엄마는 집요하다. 열 한 시간을 일한 몸으로 함을 지고 걸어가는 ‘나’는 그걸 또 다 받아낸다, 온몸으로. 잇단 벨소리가 또 엄마의 전화인가 싶은 때, 고교 동창에게서 승화의 2주기를 알리는 전화가 온다. 그리하여 또 하나의 죽음이 찾아든다. 승화와는 딱히 가까웠다고 할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우연히 같이 과제를 하게 되어 집에 온 날 승화가 의자 뒤에서 내 목을 끌어안고 볼을 쓰다듬은 일, 그리고 그걸 엄마가 본 일. 승화가 돌아가고 난 뒤 엄마는 그와 멀어질 것을 종용했고 ‘나’는 뭘 잘 모르는 채로 그저 엄마의 뜻에 따랐다. 그리고 엄마는 그날 이후 “더 내 안쪽으로 들어왔다”(67쪽). 승화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도 엄마는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단정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승화의 2주기에 딱히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게 전부다. 엄마와 불화하지도 그렇다고 엄마를 극복하지도 않는 이 소설은 다만 두 가지를 돌올하게 밀어 올린다. 애도와 성장. 그런데 이 애도와 성장에 좀 희한한 면이 있다. 애도가 불가능 쪽으로 점쳐질 때 우울증적 자아가 탄생한다는 익숙한 이론으로부터 이 소설은 각도를 튼다. 당장 함의 무게도 무게지만 가계를 건사하기 위해 긴 노동을 감내하는 인물에게 제법 기우뚱 기대어 있는 것은 엄마라는 존재다. 자신 쪽으로 지나치게 밀고 들어온 엄마를 허용한 대가는 아무래도 반反성장에 가까운 결정권의 이양이어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함구하고 승화라는 관계의 싹을 애초에 절단한 것은 모두 엄마의 결정이었다. 아감벤은 애도의 실패가 불러오는 우울증의 모호함에 대해 일별하면서 소유할 수 없는 것을 향한 ‘점유’의 시도로 정리한다. 그러니까 가질 수 없는 대상을 잃어버린 대상으로 치환하는 상상력이란 실제 잃어버린 것이라기보다 잃어버린 것처럼 연기하는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내게 진정으로 깃들어본 적이 없는 대상과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잠시 뭉개버리고라도 함을 들고 걷는 인물에게 찾아온 두 죽음을 이 말에 포개보자. 무언가를 제대로 소유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을 잃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승화와도 제대로 우정이라 부를만한 시간을 공유했다고 보기 어렵지만 아버지의 존재는 특히 기억조차 전무해 아버지란 오직 나의 존재로서만 짐작되는 불확실성에 기대어 있디. 그런 사람의 죽음은 더더욱 내가 알 수도 없는 식으로 처리되어 부재만을 그 증거로 내밀 따름이다. 소설은 지연된 애도의 수행, 그 정식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저 복기하기, 다만 그것만을 할 수 있을 뿐인데 주체적인 판단이라는 것을 해 볼 기회가 없었던 이에게는 어쩌면 그편이 가장 실천 가능하달 수 있겠다. 그리고 40여 분간(이날은 조금 더 지연된다) 스스로 “납골함”(55쪽)을 지고 무대를 걷는 것이다. 그러다 무대의 끝에 다다라 발이 걸려 철푸덕 넘어지며 함은 그만 깨져버린다. 꿀은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흘러나와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진정으로 실패한 애도야말로 애도라는 데리다식의 전유가 가능하려면 대상을 곁으로 당겨 유연관계로 만드는 일이 먼저 필요하겠다. 그럴 때 비로소 나에게 이만치 들어와 있는 엄마와, 열 한 시간 노동의 세계와, 아버지와 친구의 죽음을 인수한 ‘나’는 접맥 가능할 것이다. 그때 ‘나’는 자그마한 딱지에 쓰인 유통기한이 2년 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본다. 이제 꿀도 함도 손쓸 수 없지만 길 위에서 ‘나’는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유골함보다 왠지 사후적으로 들리는 납골함이라는 단어는 회수할 수 없는 죽음을 가리키는 것처럼도 여겨진다. 그리고 저 꿀은 기어이 쏟아짐으로써 치유의 성분으로 남은 이의 상처를 덮어주기도 할 것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어떤 함의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다(명학수,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창작과 비평』, 2024년 겨울호). 하루 열네 시간의 노동을 견디는 ‘나’에겐 소설 쓰는 친구들 진호와 미미가 있다. 소설은 전에 그런 일 없던 미미가 예의 저 기계를 갖고 싶어 한다면서 진호가 보여주는 동영상 속 함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18초짜리 동영상에서는 스위치를 누르면 함이 열리고 그 안에서 막대가 나와 스위치를 눌러 원 상태로 돌린다. 막대가 제자리에 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굳게 닫힌 함이 거기 놓여 있을 뿐이다. 다소 뻔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기계의 ‘쓸모’와 인물들의 ‘쓸모’를 얽고 쓸모없음의 역설을 말한다는 건. 미미는 자신을 방구석에서 홀로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와 동일시해 “누군가 작동시켜놓고 까맣게 잊어버린 존재, 잊힌 줄도 모르고 이 어두운 방에서 혼자 존나게 영혼을 갈아대고 있는 똥멍청이”(209쪽)라 하니까. 스스로를 그리 여기는 건 미미뿐만은 아니어서 선풍기를 거울삼기는 ‘나’도 매한가지다. 자기 비하에 깊숙이 빠진 여자친구에게 기필코 저 기계를 구해주고자 애쓰는 진호의 마음은 다소 지당해 보인다. 그런데 정작 ‘나’는 왜 이리 열심이란 말인가? 카페와 편의점을 오가며 낯선 사람을 상대하는 연중무휴의 삶, 그런 일상에 함 하나가 슬며시 끼어든 것이다. ‘나’는 기계를 구하는 일에 완전 진심이다. 온갖 사이트며 동영상을 뒤지고 전자회로 관련 서적을 소지한 카페 손님에게 자문을 구하는 일은 사뭇 열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다 보니 종일 기계를 생각하게 되고 정작 업무에 오류가 끼어든다. 이를테면 이런 식인데, 카푸치노를 손님에게 내밀자 손님은 자신이 카페라테를 주문했다고 말한다. ‘나’는 영수증을 확인하고 카푸치노가 맞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손님은 “나는 집에서 나와 여기까지 오면서 오늘은 따뜻한 라떼를 마셔야겠다고 계속 생각하고 다짐까지 했다고요. 그런 제가 주문을 잘못했겠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카푸치노가 찍혔다는 건 그쪽이 실수를 했다는 뜻 아닌가요?”(211쪽)라며 응수한다. 얼핏 너무도 주관적이고 증명되지도 않을 손님의 논리는 억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손님의 저 지적에는 뜻밖에 꽤 명징한 논리가 있다. 바로 입력의 오류 가능성. 입력이 오류이면 출력값도 오류일 수밖에 없다는 이 논리는 사실, 이 실재하는 기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소설을 읽는 중이고 이 기계를 만난 곳 또한 소설이니 효용적 측면이나 개발 동기와 무관하게 이 기계를 해석해도 될 터. 이 기계는 말하자면 끄라는 명령어를 켜고, 켜짐으로써 끔을 실행하는 역설의 명령을 실천한다. 여느 기계들이 인간의 명령으로 켜지고 꺼지는 것과 달리 이 기계는 인간의 행위로 시작해 기계의 실천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 아닌가. 달리 말해 이 기계는 인간과 모종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도 전유되어 ‘나’는 기계로 인해 사람들을 만나고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질문을 하기 위해 용기를 내고, 급기야 전자회로 여학생을 기다린다! 생각만큼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의 장치를 구했다며 진호 미미가 가져온 기계의 실물은 정작 제대로 구현되지도 않는 텅 빈 것이었다. 그 속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채우겠다는 미미의 결심은 다소 뻔한 결말이지만 그 부분을 괄호 치더라도 분명한 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가 내내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원본도 실체도 없는 가속력에 의해 현재를 다만 가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겹쳐진다. 이 기계의 다른 이름은 ‘궁극의 기계’다. 그러니 정작 “그 녀석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229쪽)는 것은 때때로 텅 빈 기표가 되고마는 아니 어쩌면 내내 텅 빈 것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 삶의 모호성이라는 실재나 다름없다. 다시 <퍼펙트 데이즈>에서, 예정에 없이 여동생의 딸이 가출하여 히라야마와 머물게 되자 여동생은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 세단을 타고 딸을 데리러 온다. 잠시 나누는 남매의 대화에서 히라야마와 아버지의 오랜 불화가 엿보인다. 드문드문 드러나는 힌트에 의지해 그의 사연을 추적하는 일은 얼마쯤은 가능하다. 그러나 관객이 그런 시도를 할 때 영화는 클리셰로 범벅되고 만다. 인간의 삶이란 그토록 뻔한 면도 있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영화가 보이지 않으려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것도 있지만, 이상스레 그의 과거를 캐지 않으려는 마음 쪽에 힘을 더 싣게 되는 것은 그것이 예의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쩐지 그가 그편을 원하는 것 같아서. 다만 여동생이 다녀간 뒤 순간의 오열은 그의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취향으로 쌓은 일상이 어쩌면 무언가로부터 기필코 달아나고자 하는 행위로 빚어 올린 벽일지도 모른다는 짐작만은 보태진다. 그런 안간힘에도 간혹 일상을 기습하는 외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충직하게. 돌아가야 하는 것, 그럴 수 있을 때 돌아가는 것, 부드럽고 고집스러운 회복. 무너져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회복에 대한 탄력성. 그러나 회복이 이전으로 돌아감과 등가가 아님을 아는 사람의 자가면역 행위. 목표는 더 나빠지지 않는 것. 다만 나를 온전히 지켜내는 것. 그럴 때 중요한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이다. 일상은 노력으로 일구어내는 순간의 더께로 켜켜이 쌓이지만 당연하게도 ‘지금’이 누구에게나 만족스러운 것일 수는 없다. 지키기 위해 감행하지만 도대체 온전히 거머쥘 수 없다면, 그렇게 끈질기게 돌아오는 자리가 만족스럽기는커녕 어쩐지 열등감만 부추길 뿐이라면, 그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 소설이란 함에 한 장의 사진이 들어있다(서장원, 「피루엣」, 『웹진 림』, 2025년 2월호). 사진에는 초등학교 3학년 규오가 동화 속 왕자님 차림으로 발레 동작을 취하고 있다. 지금의 규오는 트랜스젠더 남성이다. 여성으로의 이차성징을 맞이했을 규오는 지금 자신의 몸을 아름답지 않다고 여긴다. 규오와 함께 노아의 환송 파티에 간 ‘나’는 노아를 바라보는 규오의 눈빛에서 선망을 본다. 내가 보기에 노아는 “키가 크고 잘생긴 데다 친구가 많고, 어디를 가든 중심이 되는 남자. 자신의 몸이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어떤 관계에서든 어렵지 않게, 스스로도 잘 모르는 사이에 우위를 점거해버리는 남자들” 중 하나다. ‘나’는 노아와 같은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고, 어떤 면에서 규오를 “안전한 선택”이라고 여긴다. 이른바 ‘설레는 키 차이’ 같은 것에는 힘의 구도가 주는 불평등함이 있다고 여기는 내가 규오를 안전한 상대로 여기는 것은 “규오의 몸이 가진 내력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규오가 정말”“좋은 남자이기 때문일까”. 반면 규오는 노아에 대한 ‘나’의 저런 평가에 대해 “그냥 그게 좋은 거 아닐까?”라고 답한다. 그런 남자가 좋은 남자의 표본이란 뜻일까, 그런 남자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란 뜻일까. 어떤 식으로 저 모호한 문장을 번역하든 분명한 건 규오가 자신을 ‘그런 남자’들과 따로이 놓는다는 점이다. 규오는 자신의 ‘왕자님’ 사진을 노아에게 타투 도안으로 맡긴 터였다. 어영부영 타투는 새기지 못했고 그 사진은 노아의 타투 숍에 그대로 남아 노아의 전 여자친구로부터 인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규오가 그걸 몸에 새기고 싶어 했다면 그건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건 아마도 지금의 몸과 대척점에 놓이는 게 아닐까. 정작 ‘나’는 규오가 겪었을 “골반이 넓어지고 가슴이 발달하는 원치 않는 변화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서른 살 규오의 몸속에 파묻힌, 아직 그 일을 겪지 않은 소년을 생각하면서”“사진 속의 잘생긴 소년을 바라보곤”하는데, 이는 ‘나’의 ‘안전한 선택’에 도사린 욕망과 충돌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규오의 몸이 좀 더 안전하다고, 무해하다고 여기면서도 규오가 넓어진 골반을 아쉬워할 때 내심 동감했다는 점은 더 ‘남자다운’ 몸을 원하기에 이차성징의 전을 새로운 영점으로, 거머쥐기 힘든 높다란 곳에 저 사진을 놓아두고자 하는 규오의 욕망과 정 반대축으로 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안전한’에 방점을 찍은 선택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해가 지면 집 앞 편의점을 가는 일에도 느끼는 불안이 여성의 몸에 비롯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차라리 우리는 사랑의 정의와 함께 몸의 정의를 새로이 써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자, 버젓이 냉장고 문에 붙은 저 사진에 들러붙는 것은 누구의 욕망인가? 피루엣, 자신의 한 발을 축으로 팽이처럼 도는 이 동작은 결국 원점에 서게 된다. 트랜스젠더를 택했지만 불만족으로 노아를 선망하는 규오의 모습은 그 자체 피루엣처럼 원점으로 돌아오면서도 ‘나’의 욕망과 어긋나면서 서로를 욕망의 시발점으로 돌려놓는 또 하나의 피루엣을 그린다. 그럴 때 우리는 일상을 둘러싼 많은 정체성에 대해 다시 묻게 된다. 무엇이 정상이고 안전이고 평온이고 행복인지를. 누가 규오의 저 욕망이 넘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함(혹은 그 속의 물건)이 제유적으로 쓰인다면 그것은 곧 주물(呪物)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이 기도 하다. 아감벤에 따르면 무언가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부정을 상징하고, 무(無)의 실체인 동시에 그 부재의 기호가 되는 주물은 본질적으로 분열적이다. 사물에 의미를 매다는 일, 그 문학적 작업에서 제유적인 면이 있다면 애착과 바람, 부재하는 대상을 향한 기호화와 같은 일은 사물로부터 이미 분열한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다. 한 거푸집에서 나왔으나 조금씩은 다른, 어떤 것은 금이 가기도 한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들”(『다정한 유전』, 11쪽)의 모양이 그의 전작 『다양한 유전』(아르떼, 2020)을 겹쳐 읽게 하는, 강화길의 소설 「거푸집의 형태」(『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에서도 그러하다. 이모의 죽음 뒤에 남겨진 록 밴드의 기념 티셔츠는 관계의 의미를 완전히 새로 쓰게 한다. 단지 외모가 닮아서여서만은 아니었을 게다, 이모와 취향을 공유하고 다정한 자매처럼 지내온 것은. 장녀로서 가계를 책임져왔던 큰이모와 그의 물질적인 그늘에 있는 엄마를 비롯한 형제들의 권력 구도는 다분히 경멸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고, 음악을 만들고 가수로 살고 싶어했지만 번번이 대학가요제 예선까지만 닿았던 막내를 비정상 처리하는 큰이모의 언사는 천박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모를 건사하고 우리 집과 막내 이모를 갈라놓았던 결정적 사건을 처리한 것도 큰이모였다. 돈 “팔백사십만원”(「거푸집의 형태」, 211쪽)은 외삼촌네와 우리 집에 얹혀살며 우울증과 대인기피를 앓던 이모가 근근이 카페나 편의점에서 일해서 모은, 말하자면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리고 이모가 암을 진단받자 국가 지원을 신청하기 위해 엄마 계좌로 돌려놓은 그 돈은 이모는 모르게 ‘나’의 전세 자금으로 쓰인다. 그 일로 엄마와 이모는 서로를 등지고 ‘나’ 역시 이모와 소원해진다. 그럼에도 이모와 나의 세월은 제법 끈질긴 것이어서 이모의 취향에 맞는 밴드의 기념 티셔츠, 사인 시디며 출판사에 취직한 내가 선물한 책 같은 것들은 이모의 서가 한 칸을 당당하게 메운다. 특히 이모가 모으던 티셔츠들은 의미가 크다. ‘나’는 이모가 왜 그걸 모았는지 오직 나만이 안다고 여기니까, 이모의 죽음 이후 그것들은 응당 내가 인수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큰이모는 ‘나’를 제외한 ‘남자조카들’을 인수자로 지목했다. 큰이모는 모른다. 오직 나만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이모의 집으로 향하지만 거기서 만난 건 뜻밖에 이모의 마지막 친구였던 20대 여자다. 길고양이 밥을 주다 친구가 되었다는데, 이것저것 이모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게다가 이모는 여자에게 ‘나’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정보값이 좀 이상하다. 이모는 어떤 사람이었나? 지금에 와 이모는 나와 취향을 나누던 그가 아니다. 의존적인 막내, 자신의 취향을 위해 큰이모와 불화했지만 투병 이후 큰이모에게 복속된 다소 유약하고 무능한 사람일 뿐이다. 생각해볼 것은 질병 이후의 삶에 대해 누구도 감히 짐작으로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질병은 그 자체 자신의 몸을 비정상으로 선언(당)하는 일이기도 해서 앓는 사람의 시간은 재구성되기 마련이다. 이전의 시간 틀로는 일상을 살아낼 수가 없는 거다. 큰이모의 기준에서 막내의 삶은 언제나 미친 것이었겠지만 역설적으로 이모의 질병 이후 이모의 삶은 큰이모가 규정한 정상성에 복속하게 하는 것이기도 해서, 질병이라는 비정상성으로 인해 정상의 삶이 불가한 자의 막다른 선택이 큰이모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굳이 미화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삶의 궤적을 옮겨 앉고 그간 구축된 아비투스를 폐기하는 일. 모든 취향과 선호를 버리는 일. “병에 걸린다는 건, 타인에게 내 행복을 맡겨둔 것과 같다.”(『다양한 유전』, 146쪽) 이모의 마지막에 남은 것은 몇 장의 티셔츠와 시디 따위가 전부이지만 그런데 그건 또 누구의 것이었나. 이모는 왜 ‘나’와 이모가 절반씩 섞인 혼종의 ‘그녀’, 자신의 꿈까지 들씌운 그녀를 완성했나? 아마도 이모는 그때 모든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이별한 것이리라. 이런 행위를 일종의 ‘창작’으로 본다면, 이모가 만들어낸 혼종의 그녀는 다름 아닌 욕망의 잔여물이었을 테다. 그리고 그건 종국에 “환상을 포기하는 이야기”(『다양한 유전』, 129쪽)이다. ‘거푸집의 형태’는 소설 속에서 이모의 몸속에 끝내 남은 횡경막 아래의 암세포를 일컬으면서, 어떤 기질이 기묘하게 유전되는 한 가계의 이력을 모조리 끌어안는 형상물이기도 하다. 큰이모의 입장에서라면 금 간 항아리 쯤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를 막내를 품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함은 그 자체 사물이면서 사물에 의미론적 가치를 매기는 수납의 기능이 덧붙는 사물, 사물의 겹이면서 의미의 미끄러짐이다. 그것은 열려 있거나 닫혀 있고 비어있거나 채워질 가능성으로 항상 중첩된다. 열지 않으면 알 수 없기도 하지만 어떤 함은 열면 모두 파국에 이를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가족들에게 진실은 모두를 할퀴는 남루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남루함이란 이들을 연결하는 것이 외모나 재능의 유사성이기는커녕 고통이라는 사실에 있다. 매일 오염되고 매일 그 오염을 닦아내야만 유지되는 화장실의 청결처럼 일상 또한 반복을 통해 쌓인다. 때때로 어떤 차이가 발생하지만 그걸 다시 반복하는 것. 그럼으로써 유지되는 삶. 그것은 어쩌면 매우 고결한 것이다. 내가 가진 함에 이름을 붙여주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지난겨울을 건너오며 우리가 잃은 것은 바로 일상이 아니었나. 그림자는 원 사물 없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본은 아니라서 원 사물과 완전히 같지도 않고 존재론적, 가치론적으로 열등하지도 않다. 그런 면에서 어떤 이야기는 필요치 않을 때도 있다. <퍼펙트 데이즈>의 마지막에는 ‘코모레비’라는 단어가 나뭇잎 사이로 가만히 떠오른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뜻하는 이 말은, 그 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의 간절함을 다만 묵묵히 담기에 참 좋은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그가 함에 담은 것은 빛이었다.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빛. 어떤 이야기는 쓰이기보다 쓰이지 않음으로써 더욱 단단한 이력을 확보하기도 한다. 쓰이지 않은 이야기는 모든 함의 안이자 때로는 밖의 벡터인 셈이다. 어떤 이야기는 우리가 읽고 있는 이야기 안에 없다. 그건 기록되지 않은 채로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일렁인다. 그러니까 그가 함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싶어 한 것은 결국 ‘지금’이라는 순간이었던 셈이다. 어떤 이야기는 결코 쓰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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