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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월간 현대문학 | 2024년 5월호(제833호)

그렇게 시가 기다리는 곳으로

최진석 문학평론

『건의 시학. 감응하는 시와 예술』(도서출판b, 2022) 『사건과 형식. 소설과 비평, 반시대적 글쓰기』(그린비, 2022) 『불가능성의 인문학. 휴머니즘 이후의 문화와 정치』(문학동네, 2020) 『감응의 정치학. 코뮨주의와 혁명』(그린비, 2019) 『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 미하일 바흐친과 생성의 사유』(그린비, 2017) 등을 썼고,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자음과모음, 2013) 『해체와 파괴. 현대철학자들과의 대담』(그린비, 2009) 등을 옮겼다.

1. 가려움과 그리움의 형식


  대개 ‘히스테리’라 불리는 신경증이 특별한 병인을 가진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 대부분이 겪는 보편적 문제임을 밝힌 것은 프로이트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욕망의 통제를 배운다는 뜻이다. 바꿔 말해, 성장은 자기에게 허락된 것과 허락되지 않은 것을 분별하고 표현하는 방식을 체득하는 과정이다. 먹고 싶은 것이나 갖고 싶은 것을 떼쓰며 요구하는 아이들이 절제력을 배우며 자라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겠다. 물론, 이는 아이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인간은 갖가지 욕망에 시달리며, 그에 정복당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공식적으로 용인된 규범에 맞춰 자기 품행을 가다듬을 때, 우리는 ‘정상성’과 ‘사회성’의 표식을 몸에 새기게 된다. 이런 품행의 강제와 욕망 사이의 줄다리기가 바로 신경증이다.

  인간이 신경증을 보편적으로 앓는 존재라면, 예술가는 그것을 작품의 형태로 승화시키는 이를 말한다. 인간으로서 예술가 역시 신경증에 시달리지만,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게 그는 강제와 욕망 사이에서 자기만의 법칙을 세우고 이를 작품으로 표현한다. 그런 까닭에 작품은 언제나 독자적이고 고유한 실존을 보유하며, 사람들의 이해와 몰이해 사이에 위치하게 마련이다. 우리가 어떤 작품으로부터 경이의 순간을 체험한다면, 이는 작품이 이해 가능성의 영역에 맞닿아 있으면서도 그것을 훌쩍 넘어서는 탓이다. 그 독특하고도 낯선 경계에서 예술이 성립하며, 예술가는 이 오묘한 줄타기에 자신을 맡긴 존재라 할 수 있다. 낭만주의 시인들이 창작을 ‘저주받은 운명’이라 불렀던 것은 괜한 너스레가 아니었다. 그들의 본을 따라 ‘신성한 영감의 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시대에도 번뜩이는 시작(詩作)의 순간을 묘사할 만한 표현은 있으리라. 아마도 그것은 신경증의 한 증상을 떠올릴 만한 것, ‘가려움’ 같은 것이 아닐까?


머리가 가려운 것은 머리카락 때문이 아니다
머리카락을 잘라도 남는 가려움
머리를 밀어도 남는 가려움에 대한 생각들

그건 당신이 없어야 당신이 그리운 것과 마찬가지일까
옆에 있는 사람을 끝없이 그리워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머리를 긁으며 그리움의 전문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

가려움의 마을에서
가려움의 집을 짓고
가려움의 난로를 피우고
가려움의 허기를 지핀다

말 못 할 곳이 가렵고
너의 오만과 허세가 가렵고
나의 두려움과 떨림이 온통 가렵다

- 이근화 「가려움」 부분 (『현대문학』 2024년 3월호)


  ‘가려움’은 신체의 표면에서 느끼는 얄궂은 감각이지만 시원하게 해소되지는 않는 증상이다. 긁고 또 긁어도 어쩐지 말끔히 사라지지는 않는 기분. 어쩌면 감지 않은 머리카락 탓인가 싶어 자르고 밀어도 남는 기이한 잔여의 감수성. 일종의 환상통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가려움은 부재하는 것에 대한 (무)의식일지 모른다. “당신이 없어야 당신이 그리운 것”처럼, 가려움은 지금-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동경이자 열망의 표현이다. 하여 ‘그리움’이라 불러도 좋은 것. 부재하는 그리운 대상을 향해 ‘마을’과 ‘집’을 짓고, ‘난로’를 피워 ‘허기’를 달래는 것은 가상에 그칠지언정 무의미하지는 않다. 상상의 형식으로서 이 과정은 또 다른 가려움과 그리움을 불러내 자신의 실존을 지금-여기 ‘너머’로 이끌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려움의 끝은 동시에 그리움의 끝이다. 이 원인 모를 증상은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고이 안고 가야 할 것이고, 끝내 떠안아야 할 숙명에 가깝다. 그리움 없이 향수를 말할 수 없듯, 가려움 없이 시인은 실존하지 않는다. 상상의 형식이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오직 그것으로 시인의 고유한 시선은 존립하게 된다. 구체성 너머의 비가시적 사건을 향한.


어느 순간 가렵지 않게 되었을 때
웃음이 날지 울음이 날지 그건 모르는 일
끝까지 가렵다 해도
가려움에 대해 묻지 않을 일

바꾸지 못한 물건
바꾸지 못할 마음
바꾸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사람의 전문가적 시선

- 「가려움」 부분



2. 회색, 비시물시의 벽


  예술은, 시는 경계선 위의 사건이다. 사회가 제시한 규약의 벽에 갇힐 때 우리는 서로를 구별할 수 없게 되고 자신을 상실하고 만다. 반대로 그 벽을 과감히 뛰어넘어 버릴 때, 우리는 함께 나눌 만한 그 무엇도 가질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벽은 경계의 색, 회색일 수밖에.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모호한 ‘사이’의 표지. 저 너머는, 저 바깥은 지인도 없고 동료도 없이 홀로 비바람을 견뎌야 하는 불투명한 광야처럼 보인다. 예술이 스스로의 법칙을 세움으로써 자기 정립적인 작품을 산출하는 과정이라 해도, 필경 저 고독의 체험은 후회의 색깔로 금세 뒤덮이고 말 것이다. 하여 시를 쓴다는 것은 웃기보다 우는 일에 가까운 터.


그런 날이 있지
세상이 너무 미끈하게 질주를 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종일 은유 속을 오고 갈 때

그때 벽은 우리의 편,
회색의 편,
누군가의 편이 된다는 건 순전히 개인적이지만
회색의 고독이라는 게 맘에 들어

손으로 쓸어보면 차고 거친 실존들이
사방을 싸고 있을 때

우리 시를 썼지

― 나 지금 울어도 돼?
― 울어도 돼

회색(灰色)은 오해되기도 했으나
모든 처음과 나중은
회색의 다리를 건너야 하는 걸
회색(悔色)은 참회하고
회색(懷色)으로 품어주면서

- 이규리 「함께 운 적 없지만 울고 있었지」 부분 (『창작과비평』 2024년 봄호)


  홀로 서는 것. 이는 “너무 미끈하게 질주”하는 이 세계의 규칙, 곧 상식과 터부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기만의 광야로 가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다. ‘회색의 고독’은 그에 상응하여 치러야 할 대가이지만, 시와 마주치는 사건은 오직 그 순간에 허락된다. 이도 저도 아닌 잿빛[灰色]의 벽은, 그렇게 후회[悔色]를 넘어 낯선 ‘품음[懷色]’으로 나아간다. 흥미롭게도, 회색(懷色)은 본래 세속의 정을 털어내기 위해 불가에서 택한 침묵과 수행의 빛깔을 가리킨다. 희지도 검지도 않은, 어쩌면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경계의 상태. 지시적 의미로는 잿빛과 통하는 단어지만, 그 함의는 ‘사유’와 동시에 ‘회임(懷妊)’ 즉 새로운 것의 탄생을 고지한다. 회색은 회색일 때, 불투명한 잿빛일 때 다른 색깔과 뒤섞이지 않으며 홀로 고독을 뽐내리라. 그 무수한 고독의 색이 저마다 자기의 명도를 지펴낼 때, 회색의 벽들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각기 차이 나는 시의 기념비로 온전히 세워지리라. 시가 되지 않는다면, 벽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非詩勿視

회색은 회색끼리 있을 때 두근거린다 증폭된다
왜 그러냐 묻는다면,

대답 대신 벽 앞에 너를 세우고 사진을 찍어주고 싶어

- 「함께 운 적 없지만 울고 있었지」 부분




3. 엉거주춤, 자기-너머를 향한


  시의 벽에는 무엇이 새겨질까? 신경증이 환자의 상흔을 반영하듯, 저 벽에도 시를 쓰기 위해 거쳐야 했던 시인의 몸부림이 기록되는 것일까? 그럼 너무나 사적인 게 아닐까? 언젠가 부끄러워지지는 않을는지? 시의 위의를 뽐낼 필요는 없더라도, 시가 남기는 것은 적어도 누군가의 개인적 삶 이상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시에게 말해도 될까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고
바꿔 말해도 될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얀 개를 데리고 산책할 뿐이라고
동윤카센터 앞을 지나갈 뿐이라고

말해도 될까
까치 한 마리가 우릴 따라오고 있었다고 조금 더 말하면
시에서 시를 꺼내 올 수 있을까

- 유계영 「동윤에서 동윤 뺏기」 부분 (『문학과사회』 2024년 봄호)


  사라지지 않는 가려움이 중병은 아닌 것처럼, 불투명한 회색의 벽 또한 특별한 사물은 아니다. “하얀 개를 데리고 산책”하듯, “동윤카센터 앞을 지나”가듯, 삶은 대개 범상한 일들을 범상하게 거쳐가는 과정일 따름이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상의 그 무엇도 시가 되기에는 과소하거나 과대할지 모른다. 판단 불가능한 이 사태 앞에 시인은 항상 침묵을 지키며, 어떻게 입을 떼야 할지 망설이는 ‘나’의 실존으로 던져져 있다.


나는 엉거주춤 보고만 있었다고 그렇게만 말해도
될까 너그러운 약속을 하고
매일 까치와 하얀 개가 나와 걸어주었다고

- 유계영 「동윤에서 동윤 뺏기」 부분


  저 ‘엉거주춤’은 ‘나’의 실존이 언제 어떻게 시가 될지 묻기 위한 자세이다. 강제이지도 욕망이지도 못한 나날의 삶이 어디서부터 시가 되고 또 시 아닌 것으로 끝날지 모르는 채, 그런 삶을 다만 지속하겠다는 ‘너그러운 약속’만이 주어진 시간. 이토록 평범하고도 범상한 일상의 순간들도 시로 빛날 수 있을까? 어쩌면 빛나는 시를 기다리는 마음이야말로 시 아닌 것의 역설적 표식은 아닐까? 오히려 시는 시라고 믿고 기대하는 것조차 넘어설 때, 마치 벽 위에 새겨놓은 문자를 지우고 벽만 남겨놓을 때, 그리하여 벽 ‘너머’를 상상하도록 자신을 이끌어갈 때만


  나는 무엇 아닐까? 이토록 무수한 의문의 풍경이 도리어 시가 되는.


시에서 시를 덜어낼 수 있을까
하얀 개와 적당히 걷다가 놀다가
새처럼 돌아갔노라고 그렇게만 말하면

[...]

하얀 개의 마음마저 알 수 없어 더 좋다고 말한다면
풍경에서 풍경만 남길 수 있을까
걷다가 놀다가 돌아가기만 해도 될까
시에게 말도 없이 돌아가도 될까

- 유계영 「동윤에서 동윤 뺏기」 부분


  시에서 시를 덜어내면 시가 사라질까? 풍경에서 풍경만 남겨놓으면 시가 안 되는 걸까? 답을 알 길 없는 질문은 순서를 바꿔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삶의 조건이 시의 생존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시라는 존재야말로 삶을 견인해 낸다. 인간은 누구나 신경증을 앓는다는 프로이트의 명제는, 예술이 신경증 너머를 바라보게 해준다는 명제로 보충되고 돌파되어야 한다. 시에서 시를 덜든, 풍경에서 풍경만 남기든, 혹은 “걷다가 놀다가 돌아가기만” 하든 시가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말도 없이 돌아가도” 된다는 것. 우리는 결국 누군가에 불과하지만, 그 누군가를 넘어 시로 나아갈 때 시는 예술로서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동윤에서 동윤 뺏기’란, 그처럼 자기-너머를 향한 여정의 암유가 아닐까?


*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은 아주 쉽단다 기다리기만 해도 저절로 되는 일이란다 1월에는 크리스마스가 11개월이 남은 것처럼

[...]

자기 자신은 가장 되지 말자 얘야, 자기가 부친 편지만 읽고 또 읽다가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 김소연 「우수수」 부분 (『문학동네』 2024년 봄호)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강제다. 강제인 줄도 모르고 강제를 강제당하는 것. 반면, 강제 너머를 바라고 끌어당기는 의지 속에 욕망이 있다. 만약 예술로서의 시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면, 후자에 가깝다고 답하기 쉽상이리라. 틀린 답은 아닐 게다. 하지만 그 욕망에 ‘나’가 은밀히 비끄러매어 있는 한, “자기가 부친 편지만 읽고 또 읽”는 운명에 결박되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에서 시를 덜고 풍경에서 풍경만 남겨도, 걷다가 놀다가 한량없이 시간을 허비하더라도, 시가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시는 그것 자체로 존립하는 상상의 형식이기에 ‘나’의 편지에 그 존재를 의지하지 않는다. 경계선에 선다는 것, 시를 쓴다는 것은 강제와 욕망의 어느 한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려는 자기를 지움으로써 ‘비선택’을 선택하는 일이다. 무수하게도 자신을 ‘우수수’ 떨쳐내는 것. 떨어도 떨어도 무한히 쏟아지는 ‘우수수’를 감당하는 것. 그러고도 남겨진 ‘나’의 잔여들을 다시금 ‘우수수’ 내려놓는 것. 버릴 수 없는 것을 마침내 버려보는 것.


오늘은 이만 집에 가자 너는 너의 집으로 나는 나의 집으로 가자
버릴 수 있는 것들만 버려왔으니까 오늘부터는 버릴 수 없는 것들을 버려야 한단다
- 김소연 「우수수」 부분


  가능할까? 결코 답변할 수 없는 이 질문은 시가 아니다. 거꾸로 시는, 저 불가능한 질문의 순서를 바꾸어 되물을 때, 또 다른 반문을 마주하고, 다시 다른 질문으로 순서가 바뀔 때 나타날 엉거주춤한 몸짓 속에 엿보일지 모른다. 그토록 많은 것을 버렸음에도, 아직 더 많은 것들이 여전히 버릴 수 없도록 곁에 남아 있음을 깨달을 테니까. 그러니 한 번 더, 우수수... 그렇게 시가 기다리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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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책에 깃들어 있다. ‘해방’과 ‘혁명’이라는 단어를 심장으로 삼았던 시대가 있다. 시인은 김수영 전집을 읽으며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떠올린다. 그러나 시인은 다음과 같은 사실 또한 확신하고 있다. 김수영의 뜨거운 정신은 이제 차가운 ‘책’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혁명의 시간은 이제 기록일 뿐이고, 자신 또한 저 광장이 아니라 이 방안에서 긴 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이 세상의 계절은 “날카로운 겨울”일 수밖에 없다. 이때 겨울은 이젠 무색해진 과거를 뜻하고, 그 겨울을 칼날처럼 느끼는 시인의 마음은 수영의 정신을 온몸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가책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김수영 전집에 ‘손’을 올리는 행위는 하나의 제의에 가깝다.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라는 시구는 곧 김수영을 향한 추모, 그 혁명 정신이 돌보아야 했던 공장 노동자를 향한 추모, 마지막으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던 시인의 능력을 향한 추모를 뜻한다. 추모는 현실의 맥락에서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이지만 마음의 맥락에서는 누군가 욕망했던 것을 뒤따라 욕망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진정으로 향수되는 것은 수영도, 공장 노동자도 아니라 그들의 각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뜻을 품을 수 있었던 인간은 어디로 갔는가. 시인에게 시집을 펼치는 일이 제의와 같다는 말은 곧 추모가 마음을 보듬고 치유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작품에서 마음은 ‘굽는다’. 죽은 자는 세상을 ‘배회한다’. 근본적으로 이 시에서 찾아헤매는 것은 마음을 빗겨놓는 우회로이다. 현재를 여실히 살아낼 수도 없고, 미래를 꿈꿀 수도 없는 시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과거라는 우회로이다. 그것은 앞으로 살아내야 할 시간에 응답하는 김안 시인의 방식이다. 마음의 운동 혹은 변화가 곧 문학적인 시간의 본질이라면, 시적인 미래는 반드시 물리적인 미래를 전제하지 않는다. 김안 시인에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 당신의 빛 바랜 욕망에 응답하려 할 때 사람은 아직 실현하지 못했던 삶의 방식을 재현한다. 2. 극복할 수 없는 것에 터 잡기 ‘시간은 변화’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테제를 조금 더 문학적 어휘로 옮긴다면 문학적 시간의 본질은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 문학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방식이다. 성숙의 실마리는 반드시 미지의 탐구로만 획득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잊었던 과거로부터 발굴될 수도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현대시의 미래 상실은 곧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거나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잃은 자의 징후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섬세하게 분별할 것은 현재를 ‘벽’으로 느끼는 목소리와 현재에 자족한 자의 목소리는 근본적으로 상반된다는 사실이다. 김안 시인은 미래를 직설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음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미래를 소망하게끔 한다. 이제 동시대 문학과 문학적 시간에 대한 이해를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고자 한다.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장 단순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시간은 성숙(변화)이다. 그런데 생각해 볼 것은 이 세상에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두 손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듯 마음으로 이룰 수 있는 것 또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떠올려 보면, 근대의 위대한 철학자들 또한 그들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보다 그 무엇인가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절망을 깊이 사색했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것은 결코 바꿀 수 없다’라는 인식이 시대마다 달랐다는 점이다. 18세기 중엽 루소는 『에밀』을 집필하면서 자연은 절대 극복할 수 없으니 사람과 도구를 자연에 적응할 수 있게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20세기의 프로이트는 말년 동안 인류가 문명을 통해 자연을 극복했지만,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타인과 더불어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난제로 여겼다. 루소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었고, 프로이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이웃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우리에게 불변하는 사실은 무엇일까. 심심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해 여름 우리는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함께 보고 넷플릭스를 온종일 틀어 놓았다. 창밖에서 사람들은 노잡이의 얼굴을 하고 가히 영웅적으로 걸어다녔다. 심심해서 창밖의 사람들에게 뛰어들 수도 있을 것 같지. 사무라이의 칼을 횡으로 쥐게 한 다음 전속력을 달려들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렇지만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 그해 여름 우리는 배달 음식을 주문하고 우리는 나란히 누워 죽고사는 이야기를 지속하였다. 이왕 죽을 거라면 뚱뚱해져서죽고 싶어. 피자 한 판을 겹쳐서 먹다가 코로 치즈를 질질 흘리면서. 이왕 태어날 거라면 결코 끝나지 않을 성대한 파티를 시작합니다. 주최자가 강단에 서서 연설을 시작할 때, 샹들리에가 되어 모두를 다치게 하고 싶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혀에 틀어박혀서……. 검은 양념이 묻은 나무 젓가락을 씹으며 네가 말한다. 삽십 초에 한 번씩 유성이 떨어지고 있다. 어째서 우리가 가진 건 절망조차 가짜일까. 위대한 화가의 삶과 죽음을 다룬 애니메이션이 상영 중이고.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처럼. 그해 여름, 나는 망친 그림 속에 너를 두고 빠져나왔고 그림 속에서 너는 나를 그리는 중이다. 안 넘어진다. 가위바위보. 변혜지, 「럼펠스틸스킨」 전문, <현대시> 2025년 2월호 이 작품의 주조는 무엇인가. 작품 전반에서 분노와 장난기가 맴돈다는 것은 쉽게 감지할 수 있겠으나 더 깊게 자리하는 것이 세계에 대한 체념임을 읽어내야 한다. 분노에만 집중한다면 자칫 이 작품의 주제를 인간에 대한 혐오나 불신으로 오인할 수 있겠다. 분명 화자는 창밖의 사람에게 사무라이처럼 칼을 휘두르는 상상을 하고, 파티장의 샹들리에가 추락하듯 사람들을 다치게 만드는 상상도 한다. 여기에는 타인에 대한 냉소, 특히 인간을 장난감과 같은 대상으로 취급하는 냉소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 한편 제목은 유희성을 강화하는데, 독일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요정인 ‘럼펠스틸스킨’을 제목으로 택했지만, 내용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타당하지 않은 분노와 무의미한 유희성을 감지할 수 있는데, 그 두 정조의 뿌리에 놓인 것은 삶에 대한 체념으로 보인다.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라는 시구가 암시하는 바는 명백한데, 그것은 타인뿐만 아니라 ‘나의 삶’도 헛것이라는 인식이다. 내 생활은 가짜이고, 내 마음속 절망조차 가짜라는 진술 또한 뒤따른다. 결국 타자에 대한 공격성의 뿌리에는 바로 자기 부정이 놓인 셈이다. 근본적으로 부정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이 시의 내용을 물음으로 바꿀 수 있겠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란 의미 있는 것일까. 나와 저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든 이 세상은 무사하지 않을까. 내 존재가 행복하든 절망에 빠지든 창밖의 거리는 안녕하지 않을까. 자포자기하듯, 이 시의 화자는 우리가 ‘잡놈’에 지나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 이후 ‘나’와 타인을 아무렇게나 대한다. 이 작품의 주제는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부조리 문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처럼, 변혜지 시인은 충동적으로 살인을 꿈꾸는 화자를 등장시킨다. 하지만 이 작품에 묘사되는 폭력성의 크기는 그 반대급부로서 얼마나 이 현실에 자신이 얽매여 있다고 느끼는지를 투영한다. 세계가 이상해진 지 오래되었다. 선후관계는 도미노 같다. 쫓다 보면 결국 무너지는, 언젠가는 깔려 죽게 될 그런 일. 책을 팔아 복숭아를 사 왔는데 껍질 새 초파리가 살고 있었다. 똑똑, 나가주면 안 되겠니. 나는 어리니 자신에게 양보하라고 지적받는다. 아직 후숙이 필요한 과정이구나. 이번 여름 복숭아는 노약자석과 비슷한 것 같다고 이해한다. 오늘의 공원은 겨울을 동경한다. 머리카락을 비질하는 미화원과 컷불을 뚫고 들어오는 빛들. 공사 중이죠? 저수지를 만들겠다고 해 흔쾌히 자릴 양보해주었다. 한 그루의 몫. 한 그루의 치아. 피스타치오 밭은 없나? 원하면 있다. 풍경은 성조기가 펄럭이는 곳으로, 줌인. 시간은 달밤, 연인들이 나무 밑에 모여 있다. 딱따구리 없이도 부서지는 캘리포니아의 숲. 거기 뭐해요? 행운이 쪼개지는 소리를 들으려고요. 겸사겸사 입도 맞추고요. 아, 예. 그럼 열심히 하십쇼. 열매 하나 으적으적 씹으며 걷는다. 행운은 텁텁한 맛이구나. 물드는 풀빛의 혀. 나는 키스할 상대 없이 필터에 입을 댄다. 여름의 공원은 저수지를 걸고 소송 중이다. 개들은 사람의 사정 따위는 알바가 아니고 저수지를 사랑한다. 우리에게는 분쟁이 있고 시간이 필요했다. 빨리 만들수록 더 많은 사람이 죽을 뿐이라는 협회의 말에 가능한 천천히 물을 붓겠다고 합의한다. 깨끗하게 청소한다. 저수지가 생긴 어느 미래를 향해 물을 붓고 붓고 또 붓다 보면, 도달하는 가능성에 언젠가 초파리도 죽게 될까?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엄시연, 「가드닝」 전문, <포지션> 2024년 겨울호 엄시연 시인의 시에서도 세계는 부조리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그 어조는 지나치게 담담하고 그것은 어쩌면 마음을 쏟아낼 이유조차 상실한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한다. 첫 행이 암시하듯 세상은 언제든지 사람을 ‘깔려 죽게’ 만들 수 있지만 그 원인이나 결과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불온한 조짐만이 암시될 뿐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움직이고, 무관하게 연인들은 서로 입을 맞추며 사랑을 확인하고 있다. 이 대비보다 의아한 것은 화자의 태도이다. ‘나’는 죽음의 불안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연인들의 사랑에 전염되지 않는다. 그저 이 모든 것을 적당히 거리를 둔 배경 취급하며 복숭아를 먹고, 저수지를 산책하며, 행운을 찾아 헤매면서 그저 생각에 잠길 뿐이다. 죽음을 필연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탈출구란 존재하는 것일까. 시인은 “도달하는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상 작품 안에서는 어떠한 희망도 암시되지 않는다. 사람이든 초파리에게든 암시되는 것은 죽음 뿐이다. 저수지와 차오르는 물의 모티프는 언뜻 기후 온난화와 홍수를 떠올리게 하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변혜지의 시와 엄시연의 시는 똑같이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도, 사람들도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가드닝」의 마지막은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라는 시구로 끝맺는다. 이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현대인의 무력함에 대한 여실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입 맞춤의 상대가 있어도 좋고 없으면 ‘필터’에 한다. 저수지를 놓고 소송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나’와 무관하다. 한 시대의 사색은 그 시대의 불변하는 사실에 터 잡는다. 자연을 극복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부터 루소의 교육론이, 반드시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모색되었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시에서 극복할 수 없는 대상으로 감각되는 것은 세계 그 자체, 무엇보다 세계의 무의미성으로 판단된다. 「럼펠스틸스킨」에서 현실은 영상이나 그림 같은 것, “가정용 플라테타리움”이나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 등으로 비유된다. 이러한 비유는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 새로운 붓질을 할 의지도 지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드닝」에서 세상은 언제든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이상한’ 공간이지만, ‘나’는 그곳에서 야기되는 죽음의 조짐을 방관할 뿐이다.이들의 시에 맴도는 부조리는 다음을 유추하게 한다. 이제 이 세상에서 인간은 무용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세상은 어제처럼 작동할 것이다. 우리는 ‘잡놈’으로 연명할 것이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며 죽어갈 것이다. 이 예정된 미래에서 미래의 쓸모란 무엇일까. 이제 현대는 루소주의자의 사색을 지나, 프로이트주의자의 숙고로부터도 멀어지며, 차츰 인간 존재에 대한 냉소와 부정으로 옮아간다. 극복할 수 없는 것은 과거에는 도구나 사물로 취급했던 것,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체계이다. 인간조차 사물의 지배자가 아니라 이 윤택한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일부인 양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물 없이 사람은 살 수 없다는 것, 현대시는 이 절망에 터 잡아야 할 것이다. 선택지는 많지 않아 보인다. 변혜지와 엄시연의 시는 다음의 ‘도달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새로운 인간은 사물이나 다름없이 행동하는 방식, 즉 자아를 사물화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이 외에 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는 것일까. 단숨에 답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은 찾아 헤매야 하는 새벽이다. 1) 이 글은 <문학과지성사> 2024년 겨울호의 졸고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와 연속성을 지닌다. 2) 송현지, 「제자리 뛰며 나아가는 미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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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지 어떤 이야기는 쓰여지지 않는다

왜 하필 그림자였을까, 그가 상자에 차곡차곡 가두어 둔 것은. 당신에게 함이 하나 생겼다고 하자. 육면체여도 좋고 팔면체여도 상관없지만 어쨌든 내부와 외부가 구분되는 상자. 종이로 만든 것이어도 좋고 철재나 목재여도 무관한데, 뚜껑째로 열 수 있거나 경첩으로 상하부가 연결된 그 상자는, 비어있다. 당신은 무엇을 담겠는가? 그의 함에 든 그것은 말하자면 그림자였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에서 히라야마는 심상한 일상을 자신만의 취향으로 세공한다. 도쿄 공중화장실 미화원인 그는 청소도 허투루 하는 법 없이 자신만의 방법과 도구, 약품으로 꼼꼼하게도 닦는다. 변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누가 일부러 허리를 구부리고 찾아볼 리도 없는 구석진 면까지 오염을 닦아내는 그의 손길에 저어함은 없다. 점심은 신사의 야외 벤치에서 편의점 샌드위치와 우유. 더없이 간결하고 간소하다. 옆 사람과 눈인사를 나누기도 하지만 그의 눈길은 주로 위를 향한다. 높다란 나무에서 뻗은 가지에 매달린 잎사귀가 해를 받아 검은 무늬를 드리운다. 잎사귀 사이로 설핏 들어오는 햇살은 그 순간 더없이 명료하다. 영화는 내내 그의 ‘지금’을 보여준다. 청소일이 끝나면 동네 목욕탕에서 개운하게 몸을 씻은 후 지하상가에서 도수가 약한 술을 저녁 삼아 마신다. 다다미방에 요를 깔고 누워 탁상용 스탠드 불빛에 기대 헌책방에서 구입한 문고판 책을 몇 장이나마 읽다가 잠들고. 다음날 같은 시각에 일어나 단풍나무 묘목에 물을 뿌리고 간단히 씻고 수염을 정돈한 후 자판기 캔 커피를 뽑아 출근길에 오르면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가 반복된다. 그러니까 그토록 단정하고 과묵하며 그다지 남과 얽히지도 않고 독서와 필름 카메라, 카세트테이프로 듣는 올드팝이라는 그의 태도와 취향이 어디서부터 연유한 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영화는 그의 전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 영화의 백미는 거기 있다고 본다. ‘이런 일 할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유의 질척한 궁금증으로부터 가뿐히 등 돌리는 것. 그의 전사는 영화 안에 없다. 홍성욱의 「함」(『현대문학』, 2025년 2월호) 속에 든 것은 꿀이다. 꿀단지는 일하는 회사에서 사장님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나’에게는 어쩐지 이것이 “납골함”(55쪽)이라 여겨진다. 그래서일까. 함을 안고 천변을 걸어 집으로 가는 40여 분의 타임라인 동안 두 개의 죽음은 자연스레 환기된다. 기억조차 없는 아버지의 죽음이란 요컨대 이러하다. “엄마는 아버지의 시신을 어떻게 했을까?”와 그것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59쪽). 집에 다다르기까지 전화를 걸어 어디냐, 언제쯤 오냐, 아직이냐 묻는 엄마는 집요하다. 열 한 시간을 일한 몸으로 함을 지고 걸어가는 ‘나’는 그걸 또 다 받아낸다, 온몸으로. 잇단 벨소리가 또 엄마의 전화인가 싶은 때, 고교 동창에게서 승화의 2주기를 알리는 전화가 온다. 그리하여 또 하나의 죽음이 찾아든다. 승화와는 딱히 가까웠다고 할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우연히 같이 과제를 하게 되어 집에 온 날 승화가 의자 뒤에서 내 목을 끌어안고 볼을 쓰다듬은 일, 그리고 그걸 엄마가 본 일. 승화가 돌아가고 난 뒤 엄마는 그와 멀어질 것을 종용했고 ‘나’는 뭘 잘 모르는 채로 그저 엄마의 뜻에 따랐다. 그리고 엄마는 그날 이후 “더 내 안쪽으로 들어왔다”(67쪽). 승화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도 엄마는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단정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승화의 2주기에 딱히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게 전부다. 엄마와 불화하지도 그렇다고 엄마를 극복하지도 않는 이 소설은 다만 두 가지를 돌올하게 밀어 올린다. 애도와 성장. 그런데 이 애도와 성장에 좀 희한한 면이 있다. 애도가 불가능 쪽으로 점쳐질 때 우울증적 자아가 탄생한다는 익숙한 이론으로부터 이 소설은 각도를 튼다. 당장 함의 무게도 무게지만 가계를 건사하기 위해 긴 노동을 감내하는 인물에게 제법 기우뚱 기대어 있는 것은 엄마라는 존재다. 자신 쪽으로 지나치게 밀고 들어온 엄마를 허용한 대가는 아무래도 반反성장에 가까운 결정권의 이양이어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함구하고 승화라는 관계의 싹을 애초에 절단한 것은 모두 엄마의 결정이었다. 아감벤은 애도의 실패가 불러오는 우울증의 모호함에 대해 일별하면서 소유할 수 없는 것을 향한 ‘점유’의 시도로 정리한다. 그러니까 가질 수 없는 대상을 잃어버린 대상으로 치환하는 상상력이란 실제 잃어버린 것이라기보다 잃어버린 것처럼 연기하는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내게 진정으로 깃들어본 적이 없는 대상과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잠시 뭉개버리고라도 함을 들고 걷는 인물에게 찾아온 두 죽음을 이 말에 포개보자. 무언가를 제대로 소유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을 잃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승화와도 제대로 우정이라 부를만한 시간을 공유했다고 보기 어렵지만 아버지의 존재는 특히 기억조차 전무해 아버지란 오직 나의 존재로서만 짐작되는 불확실성에 기대어 있디. 그런 사람의 죽음은 더더욱 내가 알 수도 없는 식으로 처리되어 부재만을 그 증거로 내밀 따름이다. 소설은 지연된 애도의 수행, 그 정식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저 복기하기, 다만 그것만을 할 수 있을 뿐인데 주체적인 판단이라는 것을 해 볼 기회가 없었던 이에게는 어쩌면 그편이 가장 실천 가능하달 수 있겠다. 그리고 40여 분간(이날은 조금 더 지연된다) 스스로 “납골함”(55쪽)을 지고 무대를 걷는 것이다. 그러다 무대의 끝에 다다라 발이 걸려 철푸덕 넘어지며 함은 그만 깨져버린다. 꿀은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흘러나와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진정으로 실패한 애도야말로 애도라는 데리다식의 전유가 가능하려면 대상을 곁으로 당겨 유연관계로 만드는 일이 먼저 필요하겠다. 그럴 때 비로소 나에게 이만치 들어와 있는 엄마와, 열 한 시간 노동의 세계와, 아버지와 친구의 죽음을 인수한 ‘나’는 접맥 가능할 것이다. 그때 ‘나’는 자그마한 딱지에 쓰인 유통기한이 2년 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본다. 이제 꿀도 함도 손쓸 수 없지만 길 위에서 ‘나’는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유골함보다 왠지 사후적으로 들리는 납골함이라는 단어는 회수할 수 없는 죽음을 가리키는 것처럼도 여겨진다. 그리고 저 꿀은 기어이 쏟아짐으로써 치유의 성분으로 남은 이의 상처를 덮어주기도 할 것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어떤 함의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다(명학수,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창작과 비평』, 2024년 겨울호). 하루 열네 시간의 노동을 견디는 ‘나’에겐 소설 쓰는 친구들 진호와 미미가 있다. 소설은 전에 그런 일 없던 미미가 예의 저 기계를 갖고 싶어 한다면서 진호가 보여주는 동영상 속 함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18초짜리 동영상에서는 스위치를 누르면 함이 열리고 그 안에서 막대가 나와 스위치를 눌러 원 상태로 돌린다. 막대가 제자리에 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굳게 닫힌 함이 거기 놓여 있을 뿐이다. 다소 뻔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기계의 ‘쓸모’와 인물들의 ‘쓸모’를 얽고 쓸모없음의 역설을 말한다는 건. 미미는 자신을 방구석에서 홀로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와 동일시해 “누군가 작동시켜놓고 까맣게 잊어버린 존재, 잊힌 줄도 모르고 이 어두운 방에서 혼자 존나게 영혼을 갈아대고 있는 똥멍청이”(209쪽)라 하니까. 스스로를 그리 여기는 건 미미뿐만은 아니어서 선풍기를 거울삼기는 ‘나’도 매한가지다. 자기 비하에 깊숙이 빠진 여자친구에게 기필코 저 기계를 구해주고자 애쓰는 진호의 마음은 다소 지당해 보인다. 그런데 정작 ‘나’는 왜 이리 열심이란 말인가? 카페와 편의점을 오가며 낯선 사람을 상대하는 연중무휴의 삶, 그런 일상에 함 하나가 슬며시 끼어든 것이다. ‘나’는 기계를 구하는 일에 완전 진심이다. 온갖 사이트며 동영상을 뒤지고 전자회로 관련 서적을 소지한 카페 손님에게 자문을 구하는 일은 사뭇 열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다 보니 종일 기계를 생각하게 되고 정작 업무에 오류가 끼어든다. 이를테면 이런 식인데, 카푸치노를 손님에게 내밀자 손님은 자신이 카페라테를 주문했다고 말한다. ‘나’는 영수증을 확인하고 카푸치노가 맞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손님은 “나는 집에서 나와 여기까지 오면서 오늘은 따뜻한 라떼를 마셔야겠다고 계속 생각하고 다짐까지 했다고요. 그런 제가 주문을 잘못했겠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카푸치노가 찍혔다는 건 그쪽이 실수를 했다는 뜻 아닌가요?”(211쪽)라며 응수한다. 얼핏 너무도 주관적이고 증명되지도 않을 손님의 논리는 억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손님의 저 지적에는 뜻밖에 꽤 명징한 논리가 있다. 바로 입력의 오류 가능성. 입력이 오류이면 출력값도 오류일 수밖에 없다는 이 논리는 사실, 이 실재하는 기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소설을 읽는 중이고 이 기계를 만난 곳 또한 소설이니 효용적 측면이나 개발 동기와 무관하게 이 기계를 해석해도 될 터. 이 기계는 말하자면 끄라는 명령어를 켜고, 켜짐으로써 끔을 실행하는 역설의 명령을 실천한다. 여느 기계들이 인간의 명령으로 켜지고 꺼지는 것과 달리 이 기계는 인간의 행위로 시작해 기계의 실천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 아닌가. 달리 말해 이 기계는 인간과 모종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도 전유되어 ‘나’는 기계로 인해 사람들을 만나고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질문을 하기 위해 용기를 내고, 급기야 전자회로 여학생을 기다린다! 생각만큼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의 장치를 구했다며 진호 미미가 가져온 기계의 실물은 정작 제대로 구현되지도 않는 텅 빈 것이었다. 그 속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채우겠다는 미미의 결심은 다소 뻔한 결말이지만 그 부분을 괄호 치더라도 분명한 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가 내내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원본도 실체도 없는 가속력에 의해 현재를 다만 가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겹쳐진다. 이 기계의 다른 이름은 ‘궁극의 기계’다. 그러니 정작 “그 녀석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229쪽)는 것은 때때로 텅 빈 기표가 되고마는 아니 어쩌면 내내 텅 빈 것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 삶의 모호성이라는 실재나 다름없다. 다시 <퍼펙트 데이즈>에서, 예정에 없이 여동생의 딸이 가출하여 히라야마와 머물게 되자 여동생은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 세단을 타고 딸을 데리러 온다. 잠시 나누는 남매의 대화에서 히라야마와 아버지의 오랜 불화가 엿보인다. 드문드문 드러나는 힌트에 의지해 그의 사연을 추적하는 일은 얼마쯤은 가능하다. 그러나 관객이 그런 시도를 할 때 영화는 클리셰로 범벅되고 만다. 인간의 삶이란 그토록 뻔한 면도 있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영화가 보이지 않으려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것도 있지만, 이상스레 그의 과거를 캐지 않으려는 마음 쪽에 힘을 더 싣게 되는 것은 그것이 예의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쩐지 그가 그편을 원하는 것 같아서. 다만 여동생이 다녀간 뒤 순간의 오열은 그의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취향으로 쌓은 일상이 어쩌면 무언가로부터 기필코 달아나고자 하는 행위로 빚어 올린 벽일지도 모른다는 짐작만은 보태진다. 그런 안간힘에도 간혹 일상을 기습하는 외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충직하게. 돌아가야 하는 것, 그럴 수 있을 때 돌아가는 것, 부드럽고 고집스러운 회복. 무너져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회복에 대한 탄력성. 그러나 회복이 이전으로 돌아감과 등가가 아님을 아는 사람의 자가면역 행위. 목표는 더 나빠지지 않는 것. 다만 나를 온전히 지켜내는 것. 그럴 때 중요한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이다. 일상은 노력으로 일구어내는 순간의 더께로 켜켜이 쌓이지만 당연하게도 ‘지금’이 누구에게나 만족스러운 것일 수는 없다. 지키기 위해 감행하지만 도대체 온전히 거머쥘 수 없다면, 그렇게 끈질기게 돌아오는 자리가 만족스럽기는커녕 어쩐지 열등감만 부추길 뿐이라면, 그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 소설이란 함에 한 장의 사진이 들어있다(서장원, 「피루엣」, 『웹진 림』, 2025년 2월호). 사진에는 초등학교 3학년 규오가 동화 속 왕자님 차림으로 발레 동작을 취하고 있다. 지금의 규오는 트랜스젠더 남성이다. 여성으로의 이차성징을 맞이했을 규오는 지금 자신의 몸을 아름답지 않다고 여긴다. 규오와 함께 노아의 환송 파티에 간 ‘나’는 노아를 바라보는 규오의 눈빛에서 선망을 본다. 내가 보기에 노아는 “키가 크고 잘생긴 데다 친구가 많고, 어디를 가든 중심이 되는 남자. 자신의 몸이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어떤 관계에서든 어렵지 않게, 스스로도 잘 모르는 사이에 우위를 점거해버리는 남자들” 중 하나다. ‘나’는 노아와 같은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고, 어떤 면에서 규오를 “안전한 선택”이라고 여긴다. 이른바 ‘설레는 키 차이’ 같은 것에는 힘의 구도가 주는 불평등함이 있다고 여기는 내가 규오를 안전한 상대로 여기는 것은 “규오의 몸이 가진 내력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규오가 정말”“좋은 남자이기 때문일까”. 반면 규오는 노아에 대한 ‘나’의 저런 평가에 대해 “그냥 그게 좋은 거 아닐까?”라고 답한다. 그런 남자가 좋은 남자의 표본이란 뜻일까, 그런 남자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란 뜻일까. 어떤 식으로 저 모호한 문장을 번역하든 분명한 건 규오가 자신을 ‘그런 남자’들과 따로이 놓는다는 점이다. 규오는 자신의 ‘왕자님’ 사진을 노아에게 타투 도안으로 맡긴 터였다. 어영부영 타투는 새기지 못했고 그 사진은 노아의 타투 숍에 그대로 남아 노아의 전 여자친구로부터 인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규오가 그걸 몸에 새기고 싶어 했다면 그건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건 아마도 지금의 몸과 대척점에 놓이는 게 아닐까. 정작 ‘나’는 규오가 겪었을 “골반이 넓어지고 가슴이 발달하는 원치 않는 변화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서른 살 규오의 몸속에 파묻힌, 아직 그 일을 겪지 않은 소년을 생각하면서”“사진 속의 잘생긴 소년을 바라보곤”하는데, 이는 ‘나’의 ‘안전한 선택’에 도사린 욕망과 충돌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규오의 몸이 좀 더 안전하다고, 무해하다고 여기면서도 규오가 넓어진 골반을 아쉬워할 때 내심 동감했다는 점은 더 ‘남자다운’ 몸을 원하기에 이차성징의 전을 새로운 영점으로, 거머쥐기 힘든 높다란 곳에 저 사진을 놓아두고자 하는 규오의 욕망과 정 반대축으로 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안전한’에 방점을 찍은 선택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해가 지면 집 앞 편의점을 가는 일에도 느끼는 불안이 여성의 몸에 비롯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차라리 우리는 사랑의 정의와 함께 몸의 정의를 새로이 써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자, 버젓이 냉장고 문에 붙은 저 사진에 들러붙는 것은 누구의 욕망인가? 피루엣, 자신의 한 발을 축으로 팽이처럼 도는 이 동작은 결국 원점에 서게 된다. 트랜스젠더를 택했지만 불만족으로 노아를 선망하는 규오의 모습은 그 자체 피루엣처럼 원점으로 돌아오면서도 ‘나’의 욕망과 어긋나면서 서로를 욕망의 시발점으로 돌려놓는 또 하나의 피루엣을 그린다. 그럴 때 우리는 일상을 둘러싼 많은 정체성에 대해 다시 묻게 된다. 무엇이 정상이고 안전이고 평온이고 행복인지를. 누가 규오의 저 욕망이 넘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함(혹은 그 속의 물건)이 제유적으로 쓰인다면 그것은 곧 주물(呪物)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이 기도 하다. 아감벤에 따르면 무언가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부정을 상징하고, 무(無)의 실체인 동시에 그 부재의 기호가 되는 주물은 본질적으로 분열적이다. 사물에 의미를 매다는 일, 그 문학적 작업에서 제유적인 면이 있다면 애착과 바람, 부재하는 대상을 향한 기호화와 같은 일은 사물로부터 이미 분열한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다. 한 거푸집에서 나왔으나 조금씩은 다른, 어떤 것은 금이 가기도 한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들”(『다정한 유전』, 11쪽)의 모양이 그의 전작 『다양한 유전』(아르떼, 2020)을 겹쳐 읽게 하는, 강화길의 소설 「거푸집의 형태」(『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에서도 그러하다. 이모의 죽음 뒤에 남겨진 록 밴드의 기념 티셔츠는 관계의 의미를 완전히 새로 쓰게 한다. 단지 외모가 닮아서여서만은 아니었을 게다, 이모와 취향을 공유하고 다정한 자매처럼 지내온 것은. 장녀로서 가계를 책임져왔던 큰이모와 그의 물질적인 그늘에 있는 엄마를 비롯한 형제들의 권력 구도는 다분히 경멸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고, 음악을 만들고 가수로 살고 싶어했지만 번번이 대학가요제 예선까지만 닿았던 막내를 비정상 처리하는 큰이모의 언사는 천박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모를 건사하고 우리 집과 막내 이모를 갈라놓았던 결정적 사건을 처리한 것도 큰이모였다. 돈 “팔백사십만원”(「거푸집의 형태」, 211쪽)은 외삼촌네와 우리 집에 얹혀살며 우울증과 대인기피를 앓던 이모가 근근이 카페나 편의점에서 일해서 모은, 말하자면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리고 이모가 암을 진단받자 국가 지원을 신청하기 위해 엄마 계좌로 돌려놓은 그 돈은 이모는 모르게 ‘나’의 전세 자금으로 쓰인다. 그 일로 엄마와 이모는 서로를 등지고 ‘나’ 역시 이모와 소원해진다. 그럼에도 이모와 나의 세월은 제법 끈질긴 것이어서 이모의 취향에 맞는 밴드의 기념 티셔츠, 사인 시디며 출판사에 취직한 내가 선물한 책 같은 것들은 이모의 서가 한 칸을 당당하게 메운다. 특히 이모가 모으던 티셔츠들은 의미가 크다. ‘나’는 이모가 왜 그걸 모았는지 오직 나만이 안다고 여기니까, 이모의 죽음 이후 그것들은 응당 내가 인수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큰이모는 ‘나’를 제외한 ‘남자조카들’을 인수자로 지목했다. 큰이모는 모른다. 오직 나만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이모의 집으로 향하지만 거기서 만난 건 뜻밖에 이모의 마지막 친구였던 20대 여자다. 길고양이 밥을 주다 친구가 되었다는데, 이것저것 이모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게다가 이모는 여자에게 ‘나’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정보값이 좀 이상하다. 이모는 어떤 사람이었나? 지금에 와 이모는 나와 취향을 나누던 그가 아니다. 의존적인 막내, 자신의 취향을 위해 큰이모와 불화했지만 투병 이후 큰이모에게 복속된 다소 유약하고 무능한 사람일 뿐이다. 생각해볼 것은 질병 이후의 삶에 대해 누구도 감히 짐작으로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질병은 그 자체 자신의 몸을 비정상으로 선언(당)하는 일이기도 해서 앓는 사람의 시간은 재구성되기 마련이다. 이전의 시간 틀로는 일상을 살아낼 수가 없는 거다. 큰이모의 기준에서 막내의 삶은 언제나 미친 것이었겠지만 역설적으로 이모의 질병 이후 이모의 삶은 큰이모가 규정한 정상성에 복속하게 하는 것이기도 해서, 질병이라는 비정상성으로 인해 정상의 삶이 불가한 자의 막다른 선택이 큰이모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굳이 미화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삶의 궤적을 옮겨 앉고 그간 구축된 아비투스를 폐기하는 일. 모든 취향과 선호를 버리는 일. “병에 걸린다는 건, 타인에게 내 행복을 맡겨둔 것과 같다.”(『다양한 유전』, 146쪽) 이모의 마지막에 남은 것은 몇 장의 티셔츠와 시디 따위가 전부이지만 그런데 그건 또 누구의 것이었나. 이모는 왜 ‘나’와 이모가 절반씩 섞인 혼종의 ‘그녀’, 자신의 꿈까지 들씌운 그녀를 완성했나? 아마도 이모는 그때 모든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이별한 것이리라. 이런 행위를 일종의 ‘창작’으로 본다면, 이모가 만들어낸 혼종의 그녀는 다름 아닌 욕망의 잔여물이었을 테다. 그리고 그건 종국에 “환상을 포기하는 이야기”(『다양한 유전』, 129쪽)이다. ‘거푸집의 형태’는 소설 속에서 이모의 몸속에 끝내 남은 횡경막 아래의 암세포를 일컬으면서, 어떤 기질이 기묘하게 유전되는 한 가계의 이력을 모조리 끌어안는 형상물이기도 하다. 큰이모의 입장에서라면 금 간 항아리 쯤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를 막내를 품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함은 그 자체 사물이면서 사물에 의미론적 가치를 매기는 수납의 기능이 덧붙는 사물, 사물의 겹이면서 의미의 미끄러짐이다. 그것은 열려 있거나 닫혀 있고 비어있거나 채워질 가능성으로 항상 중첩된다. 열지 않으면 알 수 없기도 하지만 어떤 함은 열면 모두 파국에 이를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가족들에게 진실은 모두를 할퀴는 남루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남루함이란 이들을 연결하는 것이 외모나 재능의 유사성이기는커녕 고통이라는 사실에 있다. 매일 오염되고 매일 그 오염을 닦아내야만 유지되는 화장실의 청결처럼 일상 또한 반복을 통해 쌓인다. 때때로 어떤 차이가 발생하지만 그걸 다시 반복하는 것. 그럼으로써 유지되는 삶. 그것은 어쩌면 매우 고결한 것이다. 내가 가진 함에 이름을 붙여주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지난겨울을 건너오며 우리가 잃은 것은 바로 일상이 아니었나. 그림자는 원 사물 없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본은 아니라서 원 사물과 완전히 같지도 않고 존재론적, 가치론적으로 열등하지도 않다. 그런 면에서 어떤 이야기는 필요치 않을 때도 있다. <퍼펙트 데이즈>의 마지막에는 ‘코모레비’라는 단어가 나뭇잎 사이로 가만히 떠오른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뜻하는 이 말은, 그 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의 간절함을 다만 묵묵히 담기에 참 좋은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그가 함에 담은 것은 빛이었다.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빛. 어떤 이야기는 쓰이기보다 쓰이지 않음으로써 더욱 단단한 이력을 확보하기도 한다. 쓰이지 않은 이야기는 모든 함의 안이자 때로는 밖의 벡터인 셈이다. 어떤 이야기는 우리가 읽고 있는 이야기 안에 없다. 그건 기록되지 않은 채로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일렁인다. 그러니까 그가 함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싶어 한 것은 결국 ‘지금’이라는 순간이었던 셈이다. 어떤 이야기는 결코 쓰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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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수연 여행, 시작과 끝 ― 문지혁, 『나이트 트레인』

1. 이 소설은 어떤 패배를 예정하고 있다 Day 9200 서울 1 이것은 여행에 관한 기록이다. 하지만 인생에 여행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있나? 2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2024년 9월 6일 금요일이다. 그다음 문장을 쓰고 있는 건 10월 26일 토요일이다. 나는 몇 달째 여기까지만 쓰고 멈춰 있다. 쓰다가 말다가, 썼다가 지웠다가. 나는 이제 어떤 여행에 관해 쓰려는 참이다. - 「나이트 트레인」, 372-373쪽. 문지혁의 소설 「나이트 트레인」(『현대문학』, 2025.1.)은 ‘소설 쓰기의 소설화’라는 익숙한 서사 문법 위에서 시작된다. 소설은 허구적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지만, 소설가 자신의 삶이라는 단단한 토양 없이는 온전히 생육할 수 없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전적 삶을 되짚어 그로부터 허구의 세계를 이끌어내는 일은, 소설을 쓰는 이라면 누구나 거칠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이다. 소설 「나이트 트레인」 역시 자전적 성격이 매우 뚜렷한 작품이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98학번, 남자, 소설가. 고작 이 세 개의 이력만으로도 우리는 이 소설의 화자인 ‘나’가 소설가 문지혁 자신일 것이라고 바로 예측하고, 그대로 긍정해버린다. 그 결과 이 글은 한 남자가 오랜 기억으로부터 끄집어낸 ‘사실’과 그로부터 촉발된 ‘진실’에 대한 기록이라고 인지된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이다. 독자가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나’에게 너무나 빠르게 감정이입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소설 쓰기의 소설화’는 대단히 전략적이다. 소설을 읽는 과정은 일종의 줄다리기 같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고자 하는 독자와 그러한 독자를 자기 세계 속에 끌어들이고자 하는 소설가. 그런데 ‘소설 쓰기’라는 과정이 노출되는 순간, 그 팽팽한 긴장은 이완된다.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이,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과정 그 자체임을 받아들이는 순간, 독자는 순식간에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고작 두 문장을 쓰는 데 무려 한 달 열흘의 시간을 허비했다고 말하는 이 소설 속의 화자는, 그것을 너무나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는 한 단락을 넘기기 전에 이미 승기를 잡았다. 이 글을 쓰는 필자 역시 소설을 읽다 말고, 작가 문지혁의 이력부터 다시 확인해 봤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독자의 예정된 패배, 그것은 이 소설을 이끄는 첫 번째 전제가 된다. 소설 속의 ‘나’가 소설가 문지혁일 거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소설이 아닌 ‘나’의 솔직한 여행기(억)를 읽는다는 것에 저절로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2. 세 겹의 시간, 그의 여행은 시작되지 않았다 「나이트 트레인」에 서술된 시간은 세 겹의 층위를 가진다. 첫째는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그것을 완성하기까지 소설가인 ‘나’의 시간, 바로 DAY 9200~9286의 시간이다. 두 번째는 여행기를 표방하는 이 소설의 실질적인 서술 시간인 1999년, 21일 간의 유럽 여행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 여행 기간 동안 ‘나’가 썼던 소설 속의 시간이다. 이 세 겹의 시간은 이 소설을 액자 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액자까지, 세 개의 서사적 층위를 이루며 이어진다. 이 세 개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은 ‘나’와 관련된 세 명의 ‘그녀’이다. 첫 번째 ‘그녀’는 전 여친 O. 그녀는 ‘나’가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그녀가 ‘나’에게 은반지를 선물하며 이별을 고한 것이 여행의 실질적 출발점이니 말이다. 그녀의 여행을 되짚어가는 과정은, 결국 그녀가 자신에게 이별을 고한 이유를 찾아내고자 함이다. 두 번째 ‘그녀’는 여행에서 만난 E. 같은 대학에 다니는 미대생 E는 ‘나’가 곤란에 처할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스스로 만든 고립에서 벗어나게 한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나’가 이 여행에서 방향을 잃지 않게 만들어주는 나침반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세 번째 ‘그녀’는 암스테르담에서 프라하로 넘어가는 나이트 트레인에서 만난 전수진. 그녀는 이 소설의 제목이 가진 의미를 환기하는 동시에, ‘나’가 이 소설을 쓰게 만든 결정적인 동력이다. 또한 이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이름으로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는 그녀에게 더 주목하게 되는 효과를 야기한다. 사실 전수진은 ‘나’의 불안을 환기하는 존재였다. 그녀와 마주친 순간들은, 언제나 ‘나’가 가장 절망하는 때였기 때문이다. 수진을 처음 마주쳤던 야간 열차 안에서 ‘나’는 술 취한 독일인 프란츠에게 소매치기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두 번째 만남 역시 유쾌하지 않았다. O에게 받은 은반지를 버리고자 탔던 빈의 대관람차에서, ‘나’는 관광객들의 사진을 찍어주다 기회를 놓치고 만다. 스스로를 위한 최종적 애도마저 실패하고 내렸을 때, 운명처럼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일종의 ‘흔들다리 효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혼자만의 이별 여행에서 가장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그래서 자신의 내면에 있던 불안에 분출되는 바로 그 순간. 수진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나’가 조금만 시선을 돌렸다면, 이 여행은 이별이 아닌 전수진과의 만남을 위한 것으로 전환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연은 운명이 되지 못했다. 그들의 여정은 잠시 교차되었지만, 일치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패키지 여행객인 '나'와 자유여행객인 전수진 사이의 우연은 거기서 끝났다. 떠난 기회를 되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O와의 이별도, 수진과의 새로운 만남도 완성하지 못한 채 남은 여행을 채운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소설쓰기’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전수진을 찾으며 자신의 습작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그것은 액자 안의 또 다른 액자로서, 세 겹의 시간적 층위를 이루며 서사를 완성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깨닫는다. 이별을 고하는 O에게 이유를 묻지 못했던 것도, 여정을 미뤄 자신과 하루를 더 여행하자는 수진의 권유를 거부했던 것도, 사실은 온전히 그의 선택이었음을. 그러므로 이별은 갑작스럽게 다가온 충격이 아니라, ‘나’ 자신도 이미 예감하고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던 필연적 결과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비행기 안에서 그는 ‘소설 쓰기’라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묵혀둔 이별 여행을 시작한다. 수와 진이 햄버거 가게에서 일어날 즈음, 한강 잠수교에서는 빗길에 미끄러진 승용차 한 대가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는 차를 들이받고 강으로 뛰어들었다. 모두 네 명이 숨졌고 여섯 대의 차가 부서졌으며 부근의 교통을 세 시간이나 마비시킨 대형 사고였다. 그러나 수와 진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것은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고 있는 그들의 옛 애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가 사랑했던 그는 학교 도서관에서 잘 읽히지 않는 책을 앞에 놓아둔 채 비 오는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었고, 진이 사랑했던 그녀는 별러왔던 사랑니를 뽑고는 병원 정류장에서 우산을 든 채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 「나이트 트레인」, 443쪽. 3. 고잉 홈, 여행의 시작과 끝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1'로 번호 매겨진 서술이 시작되기 전, 서사에 집중하는 독자가 순간적으로 놓치기 쉬운 그 날짜. 바로 ‘DAY 9200 서울’ 말이다. 거기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 여행 아닌 것이 없다는 그의 말은, 그의 서사 전체가 하나의 여행기임을 보여주는 한편, 그의 여행이 이 소설을 쓰기 전까지 종료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25년 전 3주간의 여행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그의 서사가 ‘DAY 9200’에서 시작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사실 이 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여행을 현재진행형으로 업로드 하는 과정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나’는 무려 9200일 동안 지속된 여행기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의 첫 문장을 뒤집어 보자. 그는 자신의 소설이 “여행에 관한 기록”이라고 쓰면서 “인생에 여행이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있나?”라는 질문을 덧붙였다. 그 답은 명확하다. 그의 소설은 여행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여행 아닌 인생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여행기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는, 이것이 여행인 동시에 그저 여행이라는 특별한 순간이나 장소에 국한할 수 없는 인생의 모든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지점이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소설의 끝, ‘DAY 9286 서울’이다. “그때 정말로 유럽 여행 왜 왔던 거야?” 아내는 씩 웃더니 내 팔에서 손을 뺀다. 그리고 아파트 입구를 향해 먼저 걷는다. 나는 동그란 가로등 불빛을 벗어나 그림자 속으로 멀어지는 E, 아니 은혜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뒤돌아 한 번 더 수거장으로 향한다. 반지를 버리고, 이 여행을 끝내기 위해. - 「나이트 트레인」, 451쪽. 25년 전에 시작되어 9286일 만에 마침표를 찍은 그의 여행, 그 종착점은 어디인가? 분리수거를 하며 아내와 함께 하는 일상, 바로 그곳이다. 거기에서 ‘나’는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스스로의 현재를 마주한다. 그것을 환기하는 것은 더 이상 E라는 이니셜로 호명되지 않는 그의 아내 은혜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깨닫는다. 오래전 시작된 그 여행의 진짜 목적, 그것은 바로 ‘고잉 홈’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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