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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아동문학평론 | 2024년 겨울호(제193호)

제한된 형식의 틀 안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전병호 문학평론, 동시조, 동시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1990년 ≪심상≫ 시 당선으로 문단 활동을 전개했다. 동시집 『녹두꽃의 노래』 등 10권, 동시조집 『수평선 먼 섬으로 나비가 팔랑팔랑』 등 2권, 시집 『금왕을 찾아가며』, 시 그림책 『우리집 하늘』 등 3권, 평론집 『문학작품으로서의 동시』 등을 펴냈다. 등단 이후 문학작품으로서의 동시를 지향하고자 동시와 동시조 관련된 평론 350여 편을 썼다. 방정환문학상, 열린아동문학상, 천상병동심문학상, 이재철아동문학평론상, 풀꽃동시상 등을 받았다.

- 박경용 사진 찍기」, 진복희, 「생일날」, 김용희 꽃잎을 줍는 누나」, 신현배 할아버지의 칭찬」, 박정식, 「이사 온 날」, 이재순 개미 이사」, 최화수 비 온 뒤」, 유이지 달방


 

1

 평소에는 지면에서 동시조 한두 편을 대하기도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계간 동시발전소》 (2024년 가을호)에서 동시조 특집을 마련했다. 21명 시인이 2편씩 발표한 작품 42편을 한꺼번에 읽으니 우선 반갑다.

 동시조 특집에 참가한 분들을 나름대로 분석해 보니까 시조 시인, 동시인, 동시조 시인 등 다양하다. 시를 쓰고 시조를 쓰고 동시를 쓰지만 동시조를 위해서 한자리에 모인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 시조가 아무리 조상들이 남겨준 훌륭한 정신문화 유산이라고 해도 자꾸 불러내지 않으면 멀어진다. 더구나 요즘 등단하는 신인들에게는 동시조가 생소한 장르로 인식되는 듯해서 안타깝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동시조 작품에 자꾸 노출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간단하게나마 먼저 동시조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처음으로 동시조 장르의 필요성을 제기한 사람은 동화작가 이구조이다. 그는 아동 시조의 제창」(동아일보 1940. 5. 29)이라는 글을 통해 그때 당시 동요 장르의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민족 고유의 정형적 리듬을 가진 동시조를 창작 보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대를 너무 앞서간 주장이었기 때문일까? 문단에서는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후에 이석현 시인이 아동문학》 10(196412월호)아동문학의 미개지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동시조 장르의 필요성을 다시 제기했다. 이석현 시인은 이 글에서 아동문학의 미개지로 동시조’, ‘동시극’, ‘그림 동화‘, ’동화시등을 들고 앞으로 이 분야를 적극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동문학에서 역시 동시조에 생기를 불어넣어 우리 고유의 문학 양식을 어린이들에게 널리, 깊이 침투 보급시켜야 할 것이다. 아동시(동요동시)의 기본율은 정형률이라고 하겠다. 서정성을 다분히 띤 정형시인 시조가 어린이들에게 어울릴 것이며 환영되리라고 믿는다. 1)

 

 「아동문학의 미개지중에서 동시조에 관한 부분만 인용한 것이다. 이석현 시인은 서정성을 다분히 띤 정형시인 시조를 보급하면 어린이들에게 어울릴 것이며 환영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시조는 우리 고유의 문학 양식이기 때문에 전통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도 동시조 장르의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석현 시인의 주장은 실제 작품 창작과 이론적 측면에서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에 선언적 의미에 그친 감이 없지 않았다.

 이석현 시인은 당시 문단의 전위 기수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박경용 시인을 만나자 그에게 동시조 창작에 앞장설 것을 적극 권하게 된다. 박경용 시인은 이석현 시인의 말을 듣자 문득 깨달은 것이 있어 동시조 창작과 보급에 앞장서기로 마음먹게 된다.

 그후, 박경용 시인은 준비 기간을 거쳐 가톨릭 소년》(19683, 4, 5월호)동시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동시조 이론과 실제로 창작한 동시조 작품을 연속적으로 발표한다. 3월호에는 바다 생각에 젖게 하는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단시조 세 수를 묶어 발표했고, 4월호에는 연시조의 특징을 소개하면서 버들 강아지를 발표했으며 5월호에는 장행 시조의 필요성을 거론하면서 을 발표했다. 「동시조 이야기는 박경용 시인이 동시조 장르에 뜻을 두고 새롭게 개척하고자 쓴 최초의 본격 문학작품으로서의 동시조라고 하겠다. 새롭게 창작한 동시조와 함께 창작 이론을 곁들이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라고 하겠다.

 동시조의 역사를 살펴보면 선자에 따라 최초의 동시조라고 거론하는 작품이 몇 편 있다. 근대문학 초창기에는 급격한 사회 변혁과 함께 문학작품 역시 많은 변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시조 역시 고시조에서 현대시조로 탈바꿈하는 과도기이기도 했다. 7백 년 빛나는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시조가 대대적인 변화와 발전을 도모해야 하는 근대문학의 여명기에 소위 말하는 최초의 동시조라고 할 수 있는 과도기적인 작품 한두 편이 왜 없겠는가. 시조 창작 과정에서 이런 작품 한두 편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최초라는 말을 붙이려면 적어도 몇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본격적이고 의도적이며 지속적으로 변화와 발전의 계기가 되는 작품에게만 부여할 수 있는 영예같은 것이다. 과도기에 무자각적으로 쓴 작품 한두 편에 과분한 문학사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작품이 가진 수월성 또한 이 부분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필자는 가톨릭 소년》 19683, 4, 5월호에 동시조 작품과 이론을 함께 발표한 박경용 시인의 동시조 이야기()」를 한국 동시조 장르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보아야 한다고 본다. 시인은 동시조를 아동문학의 한 갈래임을 자각하고 의도적으로 창작한 작품과 이론을 함께 발표하고 있다. 그것도 1회가 아니라 3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시조 시인들과 동시인들에게 참여 의지를 고취시켜 자발적으로 동시조 창작 운동에 뛰어들게 했다. 이 점도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조 이야기의 기획과 연재에 대하여 문학사적인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충분하다.

 

 1968년 박경용 시인이 동시조 이야기를 발표하자 시조 시인과 동시인들이 비로소 반응을 보였다. 이에 힘을 얻은 이석현 시인은 자신이 주간으로 있는 가톨릭 소년3년 연속해서 동시조 특집을 마련했다. 196811월호, 196911월호, 197011월호의 동시조 특집이 그것이다. 이 동시조 특집에는 하한주, 정완영, 박경용, 김월준, 정하경, 이태극, 이근배, 김상옥, 서벌, 김승규 등 당시 시조 시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던 시인들이 대거 작품을 발표했다. 그때 발표된 작품 중에서 정완영의 고추잠자리」, 이근배의 잠자리」, 김상옥의 으능잎」, 서벌의 풀 한 잎, 생각 한 잎등은 독자의 호응을 얻어 지금까지도 암송되고 있다.

 이석현 시인은 아동문학》 18(1969. 3. 1)에 한 해의 작품 활동을 총정리하는 자리에서 “1968년은 동시조 운동이 본격화된 해임을 선언하고 동시조가 하나의 어엿한 장르로 형성되어가고 있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외에 박평주가 현대교육에 동시조 창작 이론을 발표해서 동시조 운동이 활성화되는 듯도 보였다. 또 조규영, 김종상, 유성규, 전의홍, 진복희, 허일, 조주환, 이상용, 장순하 시인도 이 시기에 적극적으로 동시조를 발표했다. 이를 동시조 돌탑 쌓기 운동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는데, 시조 시인들에게 호응을 얻어 나름대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동시조 돌탑 쌓기 운동은 1960년대 후반부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동시조 돌탑 쌓기 운동을 1990년대 초까지 주도적으로 이끌어 온 사람이 있으니 그는 백수 정완영 시인과 송라 박경용 시인이다. 정완영 시인은 가톨릭 소년》(196811월호)에 동시조 고추잠자리를 발표하면서 동시조 특집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이후 꾸준히 동시조를 발표해 오다가 1979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최초의 동시조집이라고 할 수 있는 꽃가지를 흔들 듯이를 펴냈다. 박경용 시인 역시 이에 늦을세라 이듬해인 1980년에 연작 동시조집 별 총총 초가집 총총을 펴냈다. 이처럼 정완영 시인과 박경용 시인이 주축이 되어 2인 동시조 문단 시대를 열고 동시조 장르를 의욕적으로 전개해 나가자 문단 안팎에서 동시조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동시조 창작 인구도 급격히 늘어나서 마침내 동시조 인구의 저변 확대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박경용 시인은 동시조의 현주소」(《현대시조》 1987. 봄호)을 통해 동시조 문단의 현황을 살펴보는 자리에서 동시조 창작 인구가 왁자히늘어나서 얼핏 보면 호황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외화내빈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그 질적 수준이란 것이 대체로 아동 시조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작품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동시조 돌탑 쌓기 운동이 시조 시인들이 주축이 되고 일부 동시인이 참여해서 의욕적으로 출발했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확산,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기에 들어감으로써 그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고 말았다.

 

 1990년대 들어 동시조 현황을 살펴보고자 할 때 ‘<쪽배>’ 동인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어느 한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격조 높은 문학작품으로서의 동시조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쪽배>아동문학평론》(1992년 가을호)의 동시조 특집에 참여한 시인들을 중심으로 박경용 시인이 결성한 모임이다. 모임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하면 동시조 작품 합평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모임이다. 그래서 그 동인들은 순수한 열정과 치열한 자세로 문학을 하자는 좌우명을 내걸고 발상의 전환과 표현 미학의 추구를 지향한다. <쪽배> 동인들이 1990년대부터 2024년 현재까지 외롭게 동시조 장르의 견인차 역할을 해오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현재 <쪽배> 동인은 박경용 시인을 도사공으로 모시고 진복희, 김용희, 신현배 시인이 창작에 매진하고 있다.

 <쪽배> 동인들은 1997년 첫 동인지 어린 달과 어울리려를 펴낸 이후 2021년까지 모두 11권의 동인지를 펴냈다. <쪽배> 동인들은 합평회를 거친 정선된 동시조 작품만 모아 2년을 주기로 동인지를 펴낸다.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조 시인과 동시인을 대상으로 동시조 특집을 마련하여 동시조 창작과 보급에도 힘쓰고 있다. 근래에 들어 2권의 엔솔러지를 펴냈는데 2017년 세월호의 아픔을 노래한 동그란 리본으로 노랗게 핀 영혼들2021년 코로나19의 역경과 극복 의지를 노래한 하늘빛 날갯짓으로 헤쳐나온 나날이여가 그것이다.

 <쪽배> 동인들의 이와 같은 활동의 기반에는 문학작품으로서의 동시조를 지향한다는, 고집스러우리만큼 철두철미한 창작 원칙이 존재한다. 어떤 장르의 작품이던지 문학적 수준을 획득하지 못하면 독자의 외면을 받다가 끝내는 소멸의 길을 걷게 된다. 앞에서도 거론했듯 등단 시인이라면 적어도 아동 시조와 구분되는 동시조를 창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더 거론할 필요도 없는 말이지만 동시조를 쓰는 시인은 36구의 제한된 형식 안에서 짓는 이가 얼마나 자유로우냐를 끊임없이 되물으면서 순수한 열정과 치열한 자세로 창작에 임해야 한다. 그래야 동시조의 앞길이 열린다. 겉으로 보기에는 옛날과 다름없이 동시조 창작 인구가 왁자히늘어나서 얼핏 보면 호황인 것처럼 보이지만 외화내빈에 지나지 않는현재의 상황에서 <쪽배>의 행보가 차별화되고 돋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3

 동시조는 시조의 하위 갈래다. 작품을 읽으면 먼저 시조와 마찬가지로 36구의 제한된 형식 안에서 짓는 이가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끝없이 묻게 된다. 이는 시조 고유의 형식을 얼마나 깊이 있게 체득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제한된 형식의 틀 안에서 마음껏 자유로움을 느껴보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동시조를 읽는 사람은 누구나 갖게 되는 공통된 희망일 것이다.

 《동시발전소의 동시조 특집을 살펴보니까 두 수로 된 연시조가 의외로 많다. 연시조는 첫째 수와 둘째 수가 의미상으로 확장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내용적으로는 대비, 문답 구조를 갖게 된다. 역시 <쪽배> 동인의 작품이 압권이다.

 

빨간 줄장미를 찍고/ 하얀 찔레꽃도 찍고//

제법 사진작가인 양/ 폰카로 날렵하게//

짝꿍이/ 제일 좋아하는/ 산딸꽃도 찍었다.

 

지나가던 아이가/ 씨익 웃으며 물었다.//

사진 찍기를/ 무척 좋아하나 봐?”//

아니야./ 찍은 걸 짝꿍한테/ 보내는 걸 좋아해!”

- 박경용, 「사진 찍기전문

 

 

 「사진 찍기는 첫째 수에서 둘째 수로 넘어가면서 시상이 확장되어 전개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첫째 수에서 화자는 빨간 줄장미를 찍고 하얀 찔레꽃도 찍고 짝꿍이 제일 좋아하는 산딸꽃도 찍었다고 한다. 둘째 수에서 지나가던 아이가 사진 찍기를/ 무척 좋아하나 봐?” 하고 물으니까 아니야./ 찍은 걸 짝꿍한테/ 보내는 걸 좋아해!” 하고 대답함으로써 의미상으로 반전의 묘미를 보여준다. 초장과 중장에서 점층적으로 시상이 전개되다가 종장에서 전복적 상상력을 펼치면서 결구를 맺는다. 시조는 종장에서 완성된다는 말을 실증하고 있지 않는가. 표시 나지 않게 드러내는 능수의 솜씨를 본다. 내용도 젊다. 어떻게 이런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 계신 지 놀랍다. 노익장이란 말은 쓰지 않겠다. 시인은 여전히 젊으시다.

 

엄마한테서 떨어져/ 세상으로 나온 내게//

잊지 말라고 찍어둔/ 도장 같은 딱지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엄마 생각합니다.

 

앞으론 엄마한테/ 배꼽 인사를 드리고//

가끔씩 엄마 앞에서/ 배꼽춤도 추면서//

이 딱지, 잊지 않았음을/ 알려드리고 싶어요.

 - 진복희, 「생일날」 -배꼽2 전문

 

 이 작품 역시 첫째 수에서 둘째 수로 시상이 점진적으로 확장 전개되는 구조다. 첫째 수에서는 화자인 에게 생명을 주어 세상에 오게 해준 엄마에 대한 고마움을 노래한다. 혈육의 정은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본능적인 것이다. 둘째 수에서는 엄마와 나를 이어주는 인연의 끈인 배꼽을 상기시키면서 항상 엄마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보여준다. 이 작품 역시 알맞은 크기의 틀에 엄마에 대한 정이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담겼다. 배꼽이라는 시적 사물에 대한 의미 탐색을 통해 엄마의 존재를 새롭고 깊이 있게 재인식하게 된다. 배꼽 인사를 하고 배꼽춤을 추면서 엄마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시적화자의 마음이 잔잔한 감동을 안겨준다.

 

여기도 한창인데/ 거기라고 다르겠니?”//

주말 벚꽃 가족 여행/ 노래하듯 조르다가//

마침내/ 엄마 핀잔 듣고/ 토라져 있던 누나.

 

간밤에 내린 비로/ 꽃잎 다 떨어지자//

분홍빛 물든 길가에/ 소꿉놀이하듯 앉아//

애틋한/ 엄마 마음으로/ 젖은 꽃잎 줍고 있다.

- 김용희, 「꽃잎을 줍는 누나전문

 

 벚꽃잎이 떨어져 분홍빛으로 물든 길가에 소꿉놀이하듯 앉아 젖은 꽃잎 줍는 여자 아이의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한 마디로 아름답다. 이 작품은 이 서정적인 이미지로 오래 기억될 듯하다. 벚꽃 피는 주말에 가족 여행 가자고 조르는 누나에게 여기도 한창인데/ 거기라고 다르겠니?”라고 말하는 엄마 마음인들 편할까? 이런 엄마 마음도 모르고 누나는 몇 번 더 조르다가 화가 난 엄마에게 꾸중을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은 어떤 해결책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누나가 꾸중 듣고 분홍빛으로 물든 길가에 앉아 젖은 꽃잎 줍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작품의 화자는 남자 아이다. 작품을 읽다 보면 독자는 자기도 모르게 시적화자인 동생이 된 듯 누나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어쩌면 이 모습은 어른들의 아득한 추억 속에 남아있는 누나의 이미지일 수도 있고, 할아버지의 눈으로 바라본 손녀의 모습일 수도 있다. 아니면 현실 남매의 모습일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남자 아이를 시적화자로 내세움으로써 어린이들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툭하면 입바른 소리,/ 톡 쏘듯 매운 말씀,//

어딜 가나. 누구를 만나나/ 깐깐한 할아버지가//

세상에!/ ‘엄지 척하셨다./ 내가 백점 맞았다고.

 

아낌없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

고래의 조련사 같은/ 할아버지 칭찬에//

나도야/ 춤추는 고래.// 하늘까지 점프하는.

- 신현배, 「할아버지의 칭찬전문

 

 두 편이 다 할아버지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한 편은 할아버지의 호통이고, 다른 한 편은 할아버지의 칭찬이다. 상반된 상황을 담고 있는 두 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할아버지는 동일 인물로 읽힌다. 할아버지는 그야말로 한 성격하시는 분인 것 같다. 시대가 바뀌어도 전통 가치를 고수하며,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되면 즉시 불호령을 내리는 모습에서 대쪽 이미지가 연상된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이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분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기 때문에 시적화자가 할아버지에게 칭찬 들었을 때 하늘까지 점프하는고래가 되었다고 표현한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다만, 이미 널리 알려져서 인용되는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보다는 신현배 시인 특유의 개별 비유를 사용했더라면 시가 훨씬 더 생동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다음은 단시조를 살펴본다.

 

세상에나! 첨 봤다야!/ 시끌벅적한/ 놀이터//

뛰노는/ 저 아이들/ 새소리보다 더 좋다야!//

아파트/ 높이 열린 창/ 할머니 귀다. 쫑긋 귀.

- 박정식, 「이사 온 날전문

 

 시적화자가 너무 좋아서 감탄사를 연발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세상에나! 첨 봤다야!” 하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할머니는 오늘 시끌벅적한 놀이터가 있는 아파트로 이사 왔다. “뛰노는/ 저 아이들/ 새소리보다 더 좋다야!” 하는 말을 들으니까 할머니가 아이들을 좋아하는 분임을 알 수 있다. 할머니의 말을 들으니 기분이 달아오르면서 동조된다.

 시인이 각 장의 구 단위로 단문을 사용해서 시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창작 기법이 세련되었음을 느끼게 한다. 왜냐하면 짧은 문장 속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함축미 이외에 간결미도 느끼게 된다. 이것이 단시조가 갖는 묘미가 아닐까 한다. 시어 한 개를 더 넣고 뺄 것 없이 모두 적재적소에 놓임으로써 한 편의 작품이 생명체처럼 유기적인 연결성을 갖는다. 독자의 마음을 잡아끄는 에너지를 내뿜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 근본적인 힘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진심으로 기쁘게 느끼고 느낀 그대로 표출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시적 소재가 새롭지는 않지만 시적 화자의 감동이 진솔하게 그대로 전해지는 것은 이 작품이 갖는 큰 장점이다.

 시적화자는 아들딸 다 결혼시켜 내보내고 홋홋한 마음으로 큰 아파트 팔고 작은 아파트로 이사 온 노부부일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 그리움은 어쩔 수 없다. 나이들수록 젊은이들과 어울려 살고 싶은 것이 노인들의 솔직한 마음이다. 이미 사회문제가 된 고독한 노인 문제, 신생아 급감으로 인한 인구감소 문제 등이 배경 무늬처럼 드리워져 있는 것도 이 작품을 주목해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길바닥에/ 검은 털실/ 풀풀풀 풀어 놓았다//

어디서 출발하며/ 어디까지 가는지//

끝조차/ 보이지 않네/ 꿈틀꿈틀 검은 띠.

- 이재순, 「개미 이사전문

 

 장마가 지기 전에는 개미가 긴 줄을 만들며 이동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시인은 그 장면을 포착해서 그림을 보여주듯 그리고 있다. 긴 개미 줄을 검은 털실을 풀풀풀 풀어놓은 것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이것이 작품을 빚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되고 있다. 꼭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 않아도 좋다. 어린이들이 생활 속에서 인상적으로 본 장면을 그리기만 하는 것으로도 흥미와 관심을 갖게 할 수 있다. 단시조라는 정형적 틀에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시상을 담고 있는 것이 안정된 창작 솜씨를 느끼게 한다. 단아한 미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아이쿠 이기 머꼬/ 어데서 날아 왔노?//

할머니 애써 가꾼/ 고추모종 텃밭에//

그 단 새/ 친구하자며/ 잔뜩 모인 잡풀들.

- 최화수, 「비 온 뒤전문

 

 “아이쿠 이기 머꼬/ 어데서 날아 왔노?” 하고 놀라는 할머니 말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억양이 독특한 사투리만 듣고도 할머니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느 지방에 사는 분인지 알 수 있다.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서 찾아보니까 그 단 새는 그간의 짧은 시간을 뜻하는 경남 지방의 방언이란다. 뽑고 나서 돌아보면 그 사이에 또 돋아났다고 하는 것이 한 여름날의 잡풀이다. 잡풀과 싸우며 고추 모종을 낸 텃밭을 애써 가꾸고 있는 할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농경문화 속에서 살아온 오랜 삶의 경험이 녹아있는 말맛의 묘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달마다/ 빌려 쓰고/ 정해진 날/ 값 내는 방//

가장 가까이에서/ 달을 볼 수 있는 방//

보름달/ 둥글게 뜰 때/ 달 구경 값/ 내는 방

- 유이지, 「달방전문

 

 달방은 달마다 월세를 내고 사는 방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으로 인식하도록 중의적으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시인이 시적 재미를 위해서 의미의 오류를 일으키도록 일부러 썼다고 할 수 있다. 달방은 말 그대로 한 달에 한 번씩 월세를 내고 사는 방인데 이 시에서는 달을 보는 방으로 새기라고 한다. 철이 없는 서정과 삭막한 현실이 공존한다. 중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달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방이라고 하니까 무척이나 서정적인 듯한데 현실적으로는 돈이 없어 산언덕까지 떠밀려온 도시 난민의 방이다.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시인은 끝내 가난을 감춘다. “보름달/ 둥글게 뜰 때/ 달 구경 값/ 내는 방이라고 한다. 가난을 너무 아름답게 그려내서 가난이 가난처럼 느껴지지 않는 현실이 슬프다. 달방에 사는 화자는 오늘도 처연한 마음으로 달을 본다.

 지면 관계상 더 많은 작품을 거론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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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서 동시조 돌탑 쌓기 운동을 잠시 거론했지만 많은 분들이 관심과 애정을 갖고 노력했음에도 훗날 동시조가 생각만큼 확산되지 못한 것은 생각할수록 아쉽다. 이 문제에 대하여 박경용 시인은 이미 동시조의 현주소」(《현대시조》 1987. 봄호)라는 글을 통해 동시조가 그 숙명적인 효용의 굴레로 말미암아 아동문학의 좁은 테두리에 갇힘으로써 시조 시단을 비롯한 일반 문단으로부터 전혀 눈길을 끌지 못한 상태에 머물었다고 간파한 적이 있다. 박경용 시인의 이 발언이 주는 시사점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시조 시인들은 동시조를 아동문학의 한 갈래로 보고 떠밀었고, 동시인들은 동시조를 시조 시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영역으로 생각하고 서로 떠민 것이 아니었을까? 또 있다. 시조 시인들의 입장에서는 마음 편히 시조를 쓰지 왜 어렵게 동심의 제약을 받는 동시조를 쓰느냐 하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을 듯 싶다. 그러니까 동시조는 시조를 쓰는 틈틈이 여기로 쓰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동시인들 입장도 비슷하다. 동시조를 쓰려면 먼저 36구 정형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 시조가 글자수만 맞춘다고 써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구와 구 사이에, 장과 장 사이에 접합이 되듯 불꽃이 튀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생명력을 획득해야 한다. 그렇다면 동시조 창작에도 전력투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데 그런 자세를 가진 동시인이 많지 않다.

 이석현 시인이 아동문학》 10(196412월호)아동문학의 미개지를 발표한 지 60년이 된 요즘 동시조의 현황은 어떤가. 동시조가 아동문학의 한 장르로써 자리 잡은 것은 틀림없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동시조 창작까지 활성화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동시조 창작과 보급은 전적으로 <쪽배>에 의지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외에는 이렇다고 할 구심체가 없다. 간혹 문예지에서 동시조 특집을 하면 잠시 붐이 일었다가 그때가 지나면 서서히 열기가 식어가기를 되풀이한 것이 그동안의 상황이 아니었나 싶다.

 동시조만이 가진 매력이 무엇인가? 그 점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탐색을 통해 동시조 장르의 창작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우리 모두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

  • 1) 이석현, 「아동문학의 미개지」, <아동문학> 10집, 196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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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견고한 삶의 조건 ― 박참새, 배시은, 신이인의 시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계간 청색종이 정원 고독불안자기이해실존키르케고르 2024
정원 그럼에도, 다시 한번, 야생으로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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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형식을 개척하는 형식 : 이지아, 『아기 늑대와 걸어가기』

1. 『아기 늑대와 걸어가기』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운명과 자두와 힘」)이 있다. 형식을 가져오되 그 형식의 기존 관념을 깨려고 한다는 시인의 한 인터뷰 기사를 미루어 보았을 때, 그는 기존의 (서정)시 형식과는 많이 다른, 아주 오래된, 잠들어 있는 어떤 시의 형식, 그러니까 과거라는 시간에 잠재되어 있는 서사시와 극시의 형식을 깨우려고 한다. 아니, 그것은 이미 깨어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처럼. 잠들어 있는 것은 우리다. 시인은 잠들어 있는 우리를 깨우기 위해, 그것으로서 '시'를 가호하기 위해 시의 본질에 천착한다. "레고 놀이를 만들 때보다, 만들고 나서, 해체할 때가 제일 좋았다"는(「투영하는 물질들」) 시인은 단단하게, 혹은 답답하게 굳어져 온 시의 형식을 해체하고 분해하며 그 본질 찾기에 매진한다. 본질을 잊은 건축은 언젠가 반드시 내려앉는다. '시'라는 장르의 소멸을 잠자코 지켜볼 수 없는 시인은 그러므로 시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쓴다. 「운명과 자두와 힘」은 서사시의 형식으로 그 본질 찾기 여정에 우리를 초대한다. '나'는 "어떤 집안을 케어하고 그들이 원하는 심부름이나 애완동물을 돌보는 일"을 하는 하녀로서 크로스베너 집안의 제일 막내인 '폴'을 돌본다. 폴은 "언제 기분이 나빠져서 폭발할지, 언제 울지, 언제 소리를 지를지 정말 예상하기 힘"든 네 살배기 떼쟁이 아이다. 하지만 '나'는 폴이 울면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 화자를 '시인'이라고 해보자. 시인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선사하는 것은 세상에 '시'밖에 없다.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 결합으로 여자의 몸에 아이가 배고, 출산하는 것처럼 시인이 세계를 만날 때 세계의 것이 그 몸에 육화되고, 시가 탄생한다. 곧 시인과 시의 관계는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 다름없다. 그러므로 시가 아프면 시인도 아프다. 시가, 시가 되기 위해서 기표는 기의를 필요로 하고, 기의는 기표를 필요로 한다. 시가 아프다는 것, 그러니까 '아픈 시'는 그 둘이 동등하지 못한, 한쪽으로의 편위를 가진 시다. 인간의 정서나 세계의 이미지는 가늠할 수 없이 쏟아질 "윤곽의 폭포들"이지만 그것을 감당할 오늘날의 시의 형식은 가늠할 수 있는 것이라서, 어떤 것들은 "쏟아지지 못"할 때가 많다(「생강이 된다는 것」). 그것들은 "자주 어딘가로 떠나자고 울어 재"끼는 폴처럼 대개 원초적이고, 예측 불허한 정서 혹은 이미지일 것이다. 오늘날 단단하게 굳어진 (서정)시의 형식이 담아내지 못할 그 '나머지' 정서들, 어쩌면 소외되었을 이 정서들은 "아직 기저귀도 떼지 않아, 뭘 쌌는지" 모를 "뭉툭한 엉덩이" 같은 미지의 감각이다. 시인은 이 방대한 감각을 어떻게 돌봐야 할까. 무리하게 그 형식에 욱여넣을 수는 없을까. 아니, 그러면 "폴이 잠을 못 잔다. 폴이 울면 모두가 깨어나고 모두가 피곤하고 모두가 분노하고 모두가 나의 책임으로 돌린다. 모두가 나를 공격한다". 그렇다면 '나'는 폴이 원하는 열매를 가져다주면 된다. 곧 시인은 쏟아지고 싶지만 쏟아지지 못하는, '윤곽의 폭포들'이 원하는 시의 형식을 가져오면 된다. 화자는 결국 폴을 위한 "마법의 열매"를 획득하고, 이 시는 다 쓰여진 것만으로 그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열매를 찾는, 곧 내용에 걸맞는 운명적인 형식을 찾는 이 여정은 바로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인과 함께 서사시의 형식을 찾아가는 한편, 역설적이게도 이미 서사시의 형식과 당면하였다. 서사시의 형식으로 서사시를 발견한 것이다. 2. 중요한 점은 잠재된 형식의 기침이 다만 부활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생경한 형식을 깨우지만 그것의 기존 관념을 답습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서사시는 신이나 영웅을 중심으로 하여 쓰이지만, 그의 시는 비주류의 세계를 넘나든다. 앞서 살펴본 시의 화자는 물론 영웅이 아니라 '하녀'였다.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인 또 다른 시편 「조약돌 소극장」의 화자도 물론 주류에서 버려진, 한 소극장의 무대 바닥을 닦는 서른 살의 청소부이다. 그러나 "우리 극장은 딱히 어떤 소재나 주제를 따지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소재가 아니다. 비주류의 세계가 서사시라는 거대한 형식과 부딪고 갈등하면서 탄생한, 고유한 혹은 고귀한 서사가 귀중한 것이다. 서사시의 형식으로만 추출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그러니까 형식의 지평이 넓어지면 '시'라는 장르가 감당할 수 있는 세계의 지평이 넓어진다. 시인의 다른 세계를 견인하는 힘은 다른 형식을 차용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극시의 형식으로 쓰인 이 시집의 마지막 시편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과 극시」는 서사시의 형식과는 또 다른, 낯설고 기이한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면서 시의 지평을 넓혀간다. 1. 목화 인간 1 (독백형식) 텍스트,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생각 내 식탁 위의 바게트, 바게트 연구, 왜 오늘의 아침 식사는 나무보다 바게트에 더 관심이 가는지 행여, 텍스트의 구조와 뼈대, 얼마든지 비극이 될 수 있다는 생각 (…) 나는 감정이 변할 때마다, 몸에서 목화꽃이 피어나 내가 목화꽃을 얼마 안 가지고 있는 건 감정이 몇 개 안 된다는 것뿐. 감정의 피부병이라고 하지. 의학에선 여기저기에서 나는 추방되었어. 계속 쫓겨 다녔지. 전염병처럼. 하지만 여기선 나를 목화인간이라고 불러…… 이곳은 내가 사는 육지의 남쪽 끝. 버려진 항구 도시야. 정부에서는 우리 도시를 관리하지 않아. 유령의 도시라나. 들어오면 모두 죽는다는 곳. 하지만 말이지. 여기 사는 사람들은 참 정상이고 누구보다 평화주의자이며 배려심이 깊어. -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과 극시」 부분 이 시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독백형식으로 등장하는 '목화인간'은 "감정의 피부병"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여기", 말하자면 '극시'라는 형식 안에서 그는 "목화인간"으로서 세계에 머무르고, 자기의 이야기를 발화한다. 마찬가지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시인은 '동생은소금구이, 동생은생선구이, 블루문, 얼룩소, 컵, 북극곰 스너글러'와 같이 현실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을 전혀 다른 세계의 존재들을 등장시킨다. 시인의 고유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그들은 각자 나름의 고유한 이야기를 가지고 발화한다. 극시의 형식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일한 무대이다. 응당 그러하겠지만, 그들의 존재는 물론 시인으로부터 파생되었다. 따라서 그것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은 기실 인간의 내면을 성심껏 살피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극시는 어렴풋한 시인의 내면의 목소리를 보다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들어주는 형식이다. 그런 점에서 그 형식은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인간의 내면을 일부 반영할 수 있다. 우리 내면에 피어나는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의 목소리는 극시로 말미암아 미미하게나마 번역된다. 시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이 다르지 않다면,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살피는 극시의 형식은 무엇보다 시의 본질에 가닿는다. 내가 이 시의 내용보다 형식에 집중한 이유는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들의 이야기를 명백히 번역할 수 없거니와, 그들의 성질은 아무렴 하나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곧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을 그리워하고, 인간을 염려하고, 인간을 기다린다. 그것은 물론 시인의 가장 원초적인 마음일 것이다. 따라서 이 극시는 상당히 희극이다.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어쩐지 마음이 든든하다. 그래도 내가 죽는 날까지는 시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서사시와 극시의 형식은 여전히 낯설지만, 그것은 '시'의 존속을 위해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시를 결박하고 있는 형식에 대한 편견을 허물어뜨리자. 당신이 정녕 시를 사랑한다면 그 본질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기꺼이 고독한 길을 걷고 있는 시인의 비극이 희극이 되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계간 자음과모음 정원 이지아서사시극시독백형식본질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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