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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인 | 2024년 가을호(제15호)

이렇게 넓은 세상인데 우리의 두 팔에는 너무나 좁다 ―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문학동네, 2024)

전철희 문학평론

2010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등단. 저서로 『배드 엔딩이 어때서?』가 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만약 당신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알려준다면, 나는 그 작품에 대해 몇 시간이든 수다를 떨 수 있다. 허나 내 주변에는 애니메이션 오타쿠가 드물다.(유감스럽게도 나는 <명탐정 코난>이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정도를 좋아하는 분들을 오타쿠로 분류하지 않는다.) 내 고독을 달래주는 곳은 인터넷 뿐이다. 위키피디아와 나무위키에서 다양한 애니메이션 제목을 검색하면서 집단지성을 마주하기도 한다. 버튜버가 애니메이션 관련 라이브 방송을 할 때에는 채팅창에 불특정 다수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물론 인터넷 속의 인간관계는 휘발적이다. 나는 특정한 화제에 대해 떠들고 싶을 때에만 관련 커뮤니티를 들어간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의 신상을 모른다. 서로를 깊이 알고 책임질 일을 만들 일도 없다. 인터넷 창을 닫는 순간 관계는 바로 단절된다. 만약 내가 애니메이션에 흥미를 잃는다면, 애니메이션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터넷의 타인은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다. 인터넷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때 사람들은 오프라인의 관계에 집중했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지방에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강남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같은 입주민끼리 관계를 맺고, 농민과 대기업 노동자들 또한 끼리끼리 살았을 것이다. 지금도 비슷한 지역, 계급, 직업의 사람들의 독점적 유대는 돈독하다. 다만 온라인의 존재는 이질적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communication)의 장을 제공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오프라인의 주변인보다 인터넷의 타인을 의식하고 신뢰한다. 과거의 학생들이 부모, 선생님, 친구 정도만을 보면서 가치관과 장래희망 따위를 정했다지만, 이제는 인터넷 사이트(유투버)에서 영향받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종종 인터넷은 우리의 삶을 주조하고 억누르는 권력 기제가 된다. SNS를 들어가 보면 10대 때부터 명품을 입고 20대에 외제차를 모는 영앤리치(Young and Rich)들의 사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직장인 커뮤니티에는 억대 연봉을 과시하는 인간들의 사연이 자주 올라온다. 이들이 한국인의 평균적인 모습을 보여주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런 게시물들을 보면 명품과 아파트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 박탈감은 우리에게 성공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어쨌거나 세계는 넓어졌다. 넓어진 세계는 새로운 지식을 전파해 준 한편 속물적 이데올로기에 빠지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지금-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많은 한국문학이 그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도 그렇다. 이 책에서 인터넷 커뮤니티를 소재로 삼은 단편 세상 모든 바다와 매스미디어의 속성을 다룬 단편 롤링 선더 러브이 있기 때문에만 하는 말은 아니다. 꼭 그런 소재의 작품이 아니라고 해도 넓어진 세계에 대한 사유를 다룬 작품들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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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 교양은 교사 고전읽기수업을 둘러싼 소극을 그린 작품이다. ‘의 커리큘럼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점 때문에 은 동료들에게 진정성 있는 교사로 인정받았으나 또한 학부모의 항의에 포의되기도 했다. 학교 수업에 매몰된 학생들은 대부분 수업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모범생 은재는 예외였다. ‘은 은재의 생기부에 성심성의껏 상찬을 나열했다. 그래서인지 은재는 서울대에 합격했다. 이후 학교는 의 수업이 서울대 입시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며 치켜세웠다.

소설의 말미에서 은 더 열심히 공부하면서 고전읽기수업을 이어가겠다는 결의를 가다듬는다. 이는 진정성 있는 모습이다. ‘참교육이라는 단어가 왜곡된 지금의 상황에서 그는 전인교육의 이상을 추구했고, 학부모의 비판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소명을 이루고자 했다. 과거에 유행한 리얼리즘 이론의 명명법을 빌리자면, ‘문제적 인물이며, 이 작품은 타락한 세계에서 타락한 방식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이야기라고 의미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독법의 부분적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나는 조금 다른 측면을 다뤄보려고 한다.

한국 고등학교의 최종 목표(어쩌면 유일한 목표)는 입시이다. ‘의 인문학 교육은 그런 상황에 대한 소극적 저항으로 시작됐다. 그래서 고전읽기수업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물감을 줬다. 그런데 이 수업의 효용성가치를 방증할 준거는 수강생의 입시결과 뿐이었다. 입시 위주의 교육에 저항하고자 생겨난 수업이 명문대 입시로 인해 인정을 받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아이러니는 한국 사회의 다난한 역사로부터 비롯된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좌익사상은 유통이 금지됐다. 마르크스를 자주 인용한 사르트르, 에리히 프롬, 레이먼드 윌리암스 등의 글은 1970년대에 이미 번역됐지만, 마르크스와 레닌의 책은 1980년대에야 지하 서점들을 통해 유포됐다. 좌익적 지식이 통제됐던 그 시절, ‘운동권들은 정부가 금지한 책들을 갈구했다. 대학가에서는 자본주의의 근원적 한계,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욕, 정권의 노동 탄압, 광주에서의 학살 등등에 대한 세미나가 열렸다. 흥미롭게도 당시의 대학생들은 이에 대한 교육을 교양이라고 불렀다. 정부가 금지하는 지식이 교양이라면, 마르크스의 책을 읽는 작업 또한 교양이었던 시대였다. 당시의 교양이 저항운동의 확산에 기여했으리라고 확언하기는 힘들다. 어쩌면 당시의 운동권들은 저런 책을 읽어서 투사가 된 것이 아니라, 투사가 되겠다는 결의를 했기 때문에 저런 책들에 흥미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1990년대 이후에는 마르크스와 레닌 등등의 책이 정식으로 유통됐지만, 이 책들이 자본주의에 맞선 혁명적 활동을 촉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마르크스와 레닌의 책은 사회에 강하게 맞선다고 인정받는 사람들(노조원, 정치인, NGO )에게 용기를 주는 서적이라기보다는, 인문대와 사회대의 연구실에서 세미나를 하기에 적합한 학술서로 취급받는다.

물론 그렇다고 마르크스의 불온성이 사라졌다는 말은 아니다. 한국은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남아 있는 분단국가이다. 수업에서 마르크스 운운했다가는 정치적 중립을 훼손한 좌빨교사로 단죄받을 여지가 있다. 마르크스를 교육하는 것은 혁명적인 선동은 아닐지라도 나름 용매한 행동이다. 하지만 상기했듯, 1980년대에 마르크스를 읽는다는 것은 사회를 변혁시키겠다는 의지를 확인하는 제의였을지언정, 지금 마르크스를 읽는 것은 세련된 교양을 다지기 위한 지적 노동에 불과하다. 마르크스는 운동권이 아니라 교양인들이 읽는 책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것 같은 행위가 이제 속물적 교양을 뽐내는 일로 전락했다. 곽이 고전읽기수업을 시작할 무렵에는 이런 시대적 변화를 의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편 교양의 독자는 그를 통해 이 점을 깨닫게 된다.

상황이 이러한데 전인교육의 이상이 가능할까? 아니, 과거에 전인교육으로 여겨졌던 것(가령 마르크스 책에 대한 교육)이 여전히 의미가 있을까? ‘은 학생들에게 마르크스를 읽혀서 풍부한 교양을 제공할 수 있고, 운이 좋으면 그 교양은 학생의 명문대 입학에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결과가 어떻든 참교육을 실현하려는 교사가 있다면 좋은 일이고, 독자는 그렇게 성실한 교사의 모습을 보며 안도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결기는 개인의 자기만족에 그친다.

한편 로나, 우리의 별의 주인공 로나는 진정성 있고 정의로운 음악인이다. 그녀는 온라인 플랫폼(아마도 쇼트 영상을 퍼트리는 틱톡)을 통해서 유명해졌다. 온라인은 피상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도파민이 넘쳐나는 이미지를 부각한다. 로나는 인터넷 시대에 걸맞은 스타였다. 그런데 그가 의식 있는 아티스트의 이미지에 머무르지 않고 진지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활동가(activist)로 변복한 순간, 세상은 관대함을 거둬들인다. “세상은 정치적인 음악가에게는 약간의 존경을 적선하지만, 정치하는 음악가에게는 무자비하다

보편 교양로나, 우리의 별은 진정성이 의미를 되묻는다. ‘로나는 진정성의 소유자였다. 진정성(Authenticity)이란 사회적 허위를 투시하고 자신만의 진실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실존적 결의를 뜻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를 읽으려는 교사의 진정성이나 사회비판을 하려는 락스타의 진정성은, 어쩌면 정치경제적 권력의 사회적 통제가 명확히 가시화될 때에만 의미를 가졌던 이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진정성의 추구는 결국 마르크스 독해가 서울대 진학에 도움이 되는지에 따라 계량되고, 락스타는 유투브 쇼츠에서 화제가 될 정도의 소신발언을 할 때에만 미덕이 된다. 권력의 가시적 억압이 투철했던 시대에는 그것을 넘어서는 것만으로도 저항이 될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조차도 이채로운 소극으로 취급받는 세계가 도래했다. 이 넓은 세계에서는 고독하게 진정성을 추구하는 사람이 두각을 나타낼 여지가 없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타이틀을 과시하고 사치품을 걸친 후 사진빨 잘 받는 외모를 만들어서 SNS에 자신을 노출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눈에 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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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면 진정성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할 것인가? 속물적 세계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은 무의미할까? 김기태의 소설집에서 표제작이기도 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설핏 암시한다. 이것은 권진주와 김니꼴라이의 사랑 이야기이다. 권진주는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여성이고 김니꼴라이는 구소련에서 태어난 부모님을 둔 남성이다. 둘은 같은 학교를 졸업했다. 학교에 상납금을 늦게 냈다는 이유로 담임에게 불려 갔을 때, 선생님은 둘에게 이렇게 말했다. “둘이 친하게 지내.” 선생님은 별다른 생각 없이 배려심 없는 말을 했던 것이고, 두 학생도 딱히 그 말을 중요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이후 진주와 니꼴라이는 그냥저냥 자신들의 삶을 살았다. 최선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불우한 환경 속에서 건실하게 경제적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둘은 다시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몇 번의 만남을 가진 후 (사실혼에 가까운) 동거 관계가 됐다.

굳이 따지자면 이 작품은 로맨스 장르에 속할 것이다. 로맨스라면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커플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관계를 맺기까지의 과정을 달콤하게 그려내야 한다. 모든 인간이 개별적인 존재이듯 모든 사랑 또한 독자성을 갖는데, 로맨스 소설 속에서 독자들은 새롭고 특별한 사랑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그 과정에 대한 설명이 미미하다. 둘의 성격이 어땠으며 어떤 대화를 나누다가 관계가 진척되었는지, 그리고 어쩌다 사귀었으며 연애 관계에 트러블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결했는지 등등에 대한 묘사는 아예 생략이 되어 있다.

물론 독자는 그들이 사랑하게 된 정황을 추측할 수 있다. 권진주와 김니꼴라이는 경제적 성공을 이루기는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고, 그래도 좌절하진 않은 채 성실하고 솔직히 살아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비슷한 경제적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기 마련인 오늘날의 결혼시장을 고려할 때, 그리고 이들만큼 때 묻지 않은 채 소박하게 살아가는 청년들이 귀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들이 천생연분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그럭저럭 연애를 하기에 적절한 파트너일 수 있겠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이 작품은 능청스럽게도 그런 사회적 조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은 채 이들을 둘러싼 세계를 거시적으로 조망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 작품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두 사람의 역사는 길다. 이백 년 전 프로이센에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태어난 두 사람이 있었다. 둘은 풍성한 수염을 길렀고 오래도록 남을 선언문을 런던에서 발표했다. 추종자들이 이십여 년 후 파리의 일부를 점거하고 혁명을 선포했다. 바리케이드 안쪽 술집에서 한 철도공이 기분에 취해 몇 줄의 가사를 썼다. 혁명정부는 백일이 되기 전 진압당했지만 가사는 남았고 한 가구공이 멜로디를 붙였다. 그때 상당수의 조선인들은 먹고 살 길을 찾아 연해주로 떠났다. (...) 두 명의 스탠퍼드 대학원생이 기숙사에서 구글이라는 검색엔진을 만들고 있을 때 서울의 한 부부는 외환 위기의 여파 속에서 서로의 무능을 탓하며 악타구니를 썼다.(...) 21세기. 평양에서 두 정상은 악수를 나누었다. (...) 그리고 서울 동북부의 한 중학교로부터 서로를 기억하는 두 사람이 있다.

 

거의 보르헤스의 소설만큼이나 과감한 압축을 통해 200년 동안의 세계사를 요약한 이 대목은, 물론 진주와 니꼴라이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거의 전해주지 못하고 있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들이 태어나서 공존하게 되었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범상한 독자의 감각으로는 저런 역사적 사건들이 둘의 인생과 사랑에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허나 어쨌든 이 작품은 둘의 관계를 기술하기에 앞서 이런 쓸데없는역사를 상술했다. 어쩌면 작가는 이런 세계사적인 조건이 사랑의 동력이 될 수 있다고 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돌이켜보면 진주와 니꼴라이에게 둘이 친하게 지내라고 말했던 중학교 선생님은 의도치 않게 미래를 예언했던 셈인데, 이 말도 둘이 동거까지 하라는 종용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이 계시를 통해 둘이 서로를 눈여겨보고 재회하게 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무관계해 보이는 사건 사이에도 섭리와 연관성이 있다는 부정신학적 명제는 오늘날 가치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 온갖 SNS에서는 아무래도 화려하고 멋진 사람들의 모습이 넘쳐난다. 본래 SNS는 자기과시를 위한 공간에 가깝다. 명품이나 외제차를 자랑하려는 사람들은 업로드를 할 동기가 있겠지만, 가난과 역경을 뽐내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거에는 사회하층부의 민중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지식인의 미덕으로 여겨졌을지언정 이제 사회는 갭투자나 코인으로 떼돈을 벌었다는 영앤리치에게 더 큰 관심을 갖는다. 멀리 갈 것 없이 인문학계라든가 문단만 봐도 최하층 계급의 처지를 다룬 텍스트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있다.

이는 얼마간 사회적 상황의 변화로부터 촉발된 변화일 것이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제목에서부터 국제주의(사회주의)를 상징하던 노래 인터내셔널가(The Internationale)를 암시한다.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로 시작하여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마지막 결전이다 승리를 위하여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이라는 후렴구로 끝나던 그 노래를 말이다.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시킬 핵심 주체는 노동자이다. 마르크스가 노동자들을 혁명의 주체로 상정한 까닭은, 그들이 가장 전투적이고 불쌍한 존재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노동자는 회사의 운영에서 배제된 채 상급자가 만들어놓은 영영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는 각각 창조적 개성을 발휘한 노동자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협업을 하게 된다. 농민과 자영업자들이 서로 경쟁을 하는 상대라면, 노동자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협력하는 일이 일상화된 만큼 단결하여 혁명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혁명론이 21세기의 세계에서 유효한지는 확실치 않다. 애당초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려는 정치적 운동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데 누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내 주변에는 노동자가 언젠가 급진화되고 변혁적 사회운동에 매진하겠다고 기대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한때 광장에서 깃발을 들고 사회운동을 꿈꿨던 사람들과 세미나실에서 마르크스를 읽었다는 사람들도 대체로 그렇다. 하지만 세상에 혁명이 필요한지, 만약 필요하다면 혁명을 이뤄낼 주체는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은 접어두고, 어쨌든 너무나 넓은세계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의 시야에서 배제된 사회하층부의 사람들이 존재함을 지적할 필요는 있다. 그들은 인스타그램과 매스미디어에서 배제된다. 정치인들도 빈민보다는 부동산과 주식을 소유한 중산층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편이 세련되게 보이는 시대이다. 하지만 사회의 시선에서 완벽하게 배제된 사람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에게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다. 어딘가는 이들이 손을 맞잡고 자신들만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을지 모른다. 한때 군부독재가 숨기던 민중을 묘사하던 문학은, 이제 인스타그램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미학적으로 보여줄 수 있게 됐다. 김기태의 소설은 이렇게나 큰 세상(SNS와 매스미디어에서 표상되는 세상)’에서 그토록 작은 세상(표상에서 배제된 이들이 사랑으로 만들어가는 세계)’가 존재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큰 세상이라고 믿어왔던 것은 기실 하찮은 환상에 불과하지 않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주는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 현대사회의 교양이 된다면 그럭저럭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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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었던 체포조를 가동하여 언론인, 법조인, 정치인 등을 구금하려 했던 정황을 살피면, 계엄령 선포 이전의 행위에도 해당 포고령을 소급하여 적용하려던 악의를 확인할 수 있다. 5·18 민주화 운동과 제주 4·3을 다룬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해에 한국의 대통령은 군대를 동원한 출판 검열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통탄스럽다. 한강 작가가 박근혜 정부 때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그의 책 『채식주의자』가 유해 도서로 지정되어 폐기 처리되었던 것과 아주 다르지 않다.1) 출판 검열은 일제 강점기나 독재 정권 아래에서만 행해지는 특수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우리 곁에 언제나 있어왔던 것이다. 『한국 현대 필화사 1』의 권두에서 임헌영 작가는 ‘필화(筆禍)’의 개념을 먼저 소개한다. 필화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사상이나 의사를 자유롭게 나타내는 일체의 행위에 대하여 개인이나 집단에 국가가 가하는 제재와 압력, 형벌 등에 대한 총칭”(4쪽)이다. 그는, 필화는 권력을 지닌 세력이 행사하는 명백한 폭력이므로 허위나 날조를 제재하는 벌칙과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말한다. 문학뿐 아니라 영화, 공연, 정치, 언론 등에서도 이와 같은 탄압은 일어나기 때문에 필화는 통념과는 다르게 문학에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다. 임헌영은 문학을 비롯하여 영화나 공연, 정치나 언론 전반에서 일어났던 필화사건을 두루 다루고 있다. 더불어 더욱 다양한 소통 매체들이 생겨난 현대에서의 필화는 “폭력이 아닌 평화적인 수단으로 인간이 행사하는 모든 의사소통에 대한 직간접적인 제재 일체”(5쪽)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필화의 핵심은 무력을 사용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탄압했느냐의 문제다. 서문에서 그는, 반나치적이라고 판정받은 인사들의 저작물을 태웠던 1933년의 분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유태인 미술가 미하 울만이 설치한 작품 ‘도서관’의 안내판 문구를 인용한다. “그것은 다만 서곡이었다. 책을 태운 자들은 결국에는 사람도 태울 것이다.”라는 하이네의 비극 『알만조르』에 나오는 구절이다. 실로 역사는 분서가 홀로코스트로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진행을 입증해 주었다. 임헌영은 저작물을 처형시키는 것이 작가를 간접 살인하는 일과 같다고 일갈한다. 필화란 글만 억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을 쓴 작가와 그 책을 읽거나 소지한 사람들 모두를 감시하고 처형함으로써 결국엔 그 안에 깃든 사상까지도 말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베카 크누스가 창안한 “도서 대학살Libricide이란 술어”(9쪽)는 과장이 아니다. 이와 같은 근거에 기반하여 필화 또한 국가폭력의 범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임헌영의 주장이다. 그는 국가로 인한 인명 사상 사건을 지칭하는 국가폭력에 필화를 포함할 수 있는가 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음을 이해하며, 그에 대해서도 충분하게 논증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헬렌 페인이 정의한 제노사이드의 범주 중 하나는 “국가에 의해 절대적 악의 화신으로 분류되거나 국가의 신화에 의해 적으로 분류된 집단을 집단 제거하는 이데올로기적 학살ideological genocide”(21쪽)이다. 국가폭력은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폭력뿐 아니라 “정신 활동에 가하는 일체의 금지, 제약, 학대, 억압 등”(21쪽)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필화도 여기에 해당한다. 더불어 필화사건에 휘말릴 때 작가들은 구금되거나 감시,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를 폭력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 임헌영을 따라 필화를 국가폭력의 일환으로 해석하게 되면 필화사건을 더욱 다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 현대 필화사』를 읽으며 우리 삶에 필화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폭력인지 체감하게 된다. 2. 탄압받는 사람과 삶, 말살되는 글과 영혼 임헌영은 1945년 8·15 이후부터 시대순으로 필화사건을 배치하고 탄압의 주체에 따라 부를 나누어 그 양상을 살핀다. 제1권의 경우 해방에서 이승만 집권기까지의 필화를 다루고 있으며, 아직 발간되지 않은 제2권은 사월혁명부터 박정희 정권의 몰락까지의 필화를, 제3권은 전두환 쿠데타 이후부터 윤석열 정권까지의 필화를 다룬다.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국 현대사에 나타난 방대한 양의 필화를 세밀히 다루어내는 엄청난 작업이다. 세계사에서도 손꼽힐 만큼 필화가 많았던 비극적인 한국의 역사를 상기하면, 한 사람이 한국의 필화사를 정리한다는 일 자체가 경이롭게 느껴진다. 특히 놀라운 점은 사료를 정리하여 현대사를 짚되,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정보 외에 모종의 조치 및 정책이 시행된 이면적 의미까지 예리하게 짚어낸다는 점과 필화를 당한 작가들의 생애 전반을 제시하여 필화사건에 연루된 작가가 국가권력의 희생양이자 검열의 대상일 뿐 아니라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 독창적인 예술관을 지니고서 살아온 한 명의 입체적인 사람임을 독자가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임헌영 작가의 성실성을 입증해 줌과 동시에 필화가 한 인간과 그가 속한 집단, 그리고 사회 전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면밀히 들여다보게 해준다. 임헌영 작가가 채택한 서술 방식의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깊이 살필 예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제3부 제1장에서 “여류 4인방”(405쪽)이라 불리는 여성 작가 모윤숙, 이선희, 노천명, 최정희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구태여 낱낱이 밝힐 필요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연애사는 “모윤숙과 이광수의 사랑은 너무나 유명하여 장편소설 소재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 “최정희와 시인 김동환의 러브 스토리 또한 이에 못지 않는 은메달급”(405쪽)과 같이 조롱 섞인 어조로 서술된다. 이는 여성 작가의 사생활이 여전히 가십거리로 소비된다는 인상을 남길뿐더러 필화사건에 엮여 고통받는 작가 역시 존중받아 마땅한 인간임을 피력하는 책의 취지와도 맞지 않아 보인다. 여성 작가의 삶의 일부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기술하여 동등한 작가로 대하지 않고 대상화하는 관습적인 묘사 방식을 답습하는 것으로 비칠 위험이 있어 우려된다. 해당 부분은 거의 700장에 육박하는 책에서 1장 정도의 적은 분량이기는 하다. 다시 책의 기술 방식이 지니는 장점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필화사건 안에서만 작가를 조명하면 그는 단순히 검열과 억압의 희생양으로 보이게 된다. 이렇게만 부각되었을 때 작가는 상징적인 존재로 고정되어 버릴 수 있다. 물론 국가권력의 피해자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다소 수동적인 객체로 여겨질 위험이 있다. 어떤 작가들은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글로써 국가권력에 저항하고 비유를 활용해 우회하여 발화하기도 하며 예술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검열의 위협을 무시하기도 한다는 점 역시 고찰되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그 염결성만이 강조되어 작가 또한 입체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이 비가시화되기도 한다. 임헌영은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작가의 생애 전반을 자세히 묘사하고 친일 행적이 있는 인물의 경우 그 사실까지 가감 없이 드러낸다. 단, 친일파라고 해도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필화로 다스리는 건 실패”에 가깝다며,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하는 방법이 더욱 바람직할 것이라는 논평을 덧붙인다.(142쪽) 악행을 저지른 작가라 하더라도 그 행위를 법적 절차를 거쳐 처벌하는 편이 옳으며, 악인을 단죄하는 의미로 주어지는 “바람직한 필화”(142쪽)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1949년, 문교부가 월북작가 작품을 교과서에서 전체 삭제하고 좌경 문학인의 실질적인 활동을 금지했던 일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승만 정부는 월북한 문학인을 1급, 남한에 생존했던 문학인 중 좌익으로 판단된 문학인을 2, 3급으로 분류하고 이들의 창작 활동을 제한했다. 더불어 자수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할 것을 강권했다. 가장 많은 작품이 교과서에서 삭제된 정지용 시인의 경우 사상 검열과 모략에 몹시 시달렸음을 역사적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지용은 좌익 인사로 분류되어 월북했다는 풍문에 휩싸이는 등 고초를 겪다 국민보도연맹에 자진 가맹하게 되는데, 당시 가입 심사를 밝히며 자신이 “이십삼(二十三) 년이란 세월을 교육에 바쳐 왔”던 “한 개의 시민인 동시에 양민”임에도 월북하였다는 소문에 휘말려 “동리 사람에게 빨갱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집을 옮기고 동시에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2)하기도 했다고 토로한다. 이와 같은 정지용의 슬픈 고백마저도 신문에 보도되어 국민보도연맹의 홍보 수단으로 쓰이고 만다는 점은 해방기의 사상 탄압이 극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1951년 10월 1일, 한창 전쟁 중이던 시기에 공보당국은 “월북 문학예술인 작품을 발매금지 처분”(307쪽)하고 월북작가 명단을 발표하는데, 이를 임헌영은 “반공의식을 고조시켜 아예 독재와 부정부패 등에 대한 문학적 관심을 전면 차단”(308쪽)하려는 의도로 해석한다. 이러한 판단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작가가 월북했다고 해서 그의 작품까지 향유할 수도 없게 만드는 국가의 조치는 그 사회가 얼마나 억압적인지를 보여준다. 임헌영은 문인이 북으로 갔다고 해도 “작품은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사회를 유지하는 게 정상”(308쪽)이라고 역설하며, 작가의 행보에 근거하여 작품 자체를 금지 및 폐기하는 방식의 부당성을 다시금 지적한다. 임헌영에 의해 쓰인 필화사를 살피면서, 우리는 필화가 단순히 글과 그에 대한 검열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된다. 필화사란 결국 권력 다툼과 정치 싸움 속에서 사람, 그리고 그에 깃든 영혼과 사상을 죽여 온 대학살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한국이라는 특수한 민족사를 보되, 보편적인 인간이 지닌 악(惡)과 진리를 향한 양극단의 갈망을 확인하게 된다. 3. 검열 기준의 모순 임헌영의 저서 속에서 우리는 검열의 기준이 모호하다 못해 서로 상충하기까지 하는 황당한 상황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미군정은 해방 이후 1948년까지 한국에서 책이 번역된 작가 중 공산주의 사상 전파 저자로 플라톤, 아인슈타인,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모파상, 조지 오웰 등을 꼽는데, 반소 소설로 소개하며 미공보원에서 나서서 번역하여 출판했던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을 반공 작가가 아닌 공산주의 작가로 규정하는 허술함을 보인다.(53쪽, 282쪽 참조) 1959년에 필화를 당한 임수생의 시 「지붕」의 “인간이여, 우린 / 우리의 생활을 찾아 / 빠알갛게 돋아오는 아침의 햇빛 / 고향으로 돌아가자”(567쪽에서 재인용)라는 구절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문장으로 오독된다. 임수생을 취조했던 형사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라는 시구는 평양으로 돌아가자는 선동이며 “빠알갛게 돋아오는 아침의 햇빛”은 공산주의를 예찬하는 표현이라고 일방적으로 정의한 후, 그의 시를 “빨갱이 시”라고 단정 짓는다. 이는 부모의 사상 전과를 근거로 한 비논리적이고 비약적인 추측이지만, 이후에도 임수생은 작품집이 출간될 때마다 국가 정보기관으로부터 번번이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임헌영은 부산 시인 임수생의 일화를 제시하여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필화사건이 있어왔다는 점을 유념하게 한다. 더불어 “서울 중심 문화형성 풍토 속에서 전국 각 지역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570쪽) 필화사가 훨씬 많을 것이라며, 이를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당부한다. 이때 짤막하게 소개되는, 빨치산을 비판하는 영화 『피아골』이 상영 허가 취소를 당한 이유도 자못 황당하다. 빨치산이 키스하는 장면이 이들을 인간적인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괴물됨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전해진다. 검열의 기준이 이처럼 모호할뿐더러 쉽게 뒤집히는 것은 검열의 필요성과 실효성이 집권 세력의 이익에 따라 헛되이 조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필화는 작품을 자의적으로 그릇되게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 자체를 난도질하여 바꾸어 놓기도 한다. 월간 『신천지』 1949년 4월호에 발표된 한하운의 시 「데모」는 그의 첫 시집 『한하운시초』(정음사, 1945)에 실리는데, 이때 추천사를 쓴 이병철과 표지를 그린 정현웅이 이듬해 월북한다. 이에 1953년에 재판이 간행될 때는 이병철의 해제가 빠지고 표지 디자인은 바뀌며, 수록 시 「데모」의 제목은 「행렬」로 변경되고 문제가 될 만한 구절인 “쌀을 달라! 자유를 달라!”라는 시구는 삭제된다.(420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하운은 빨치산으로 낙인찍혀 곤욕을 치르게 되자 『한하운 시전집』을 발간할 때 “아 문둥이는 죽고 싶어라”라는 시행을 추가하고 “함흥학생사건에 바치는 노래”라는 사족을 달아 미군정을 비판하는 시 「데모」를 반공 작품으로 변모시킨다.(423~424쪽) 검열과 모략이 어떻게 작품을 훼손하는지, 어떻게 문학을 왜곡하고 그에 담긴 정치성마저 뭉개버리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대상이 되는 작품뿐 아니라 작가의 아직 쓰이지 않은 작품들에까지 관여하게 되며 작가를 자기 검열의 굴레에 가둔다. 혼란스럽기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해석한 작품이 기이한 방향으로 변모해 가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문학과 예술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4. 필화(筆禍)의 역사이자 필화(筆花)의 역사 필화가 빈번하다는 것은 “질곡과 비극의 시대”임을 증명하는 것이지만, 임헌영이 적절히 지적해 주었듯 “필화가 있어야 할 시대에 직필은 없고 곡필과 망언과 허위와 날조만 난무하는 현상은 더 비참하다”.(4쪽) 필화사를 마주할 때, 우리는 터무니없이 악랄한 폭압에 경악하게 되지만, 무기력해질 필요는 없다. 역사 속에서 거듭되는 필화사건은 불의에 맞서서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보려던 국민들의 갈망과 노력이 절멸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게 본다면 희망이 없던 시대는 없었던 것이 된다. 책의 말미인 제11장에서 다루고 있는 『경향신문』 폐간 사건에 주목해 보자. 1959년 4월 30일, “신문 발행을 허가제”로 바꾸고 “언제든지 폐간조치할 수 있도록 규정”(656쪽)한 미군정법령 제88호(1946.5.29)에 의해 『경향신문』은 페간된다. 1946년 10월 창간 당시부터 친일파 청산을 강경하게 주장했으며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는 점과 칼럼 「여적(餘滴)」란의 논조 등이 문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경향신문』의 발행 허가를 취소한 것에 더해 사옥에 꽂힌 기를 내리게 하고 마크를 떼어내게 하여 상징물까지 모두 금지하는데, 임헌영은 이러한 조처는 여타의 필화사건에서도 보기 드문 비인간적인 처사라고 부연하며 “현대 한국언론사상 가장 가혹한 필화사건”(655쪽)이라고 진단한다. 주목할 점은 발행허가를 취소당한 이후의 대처다. 노기남 주교는 “경향신문의 정치비판 논조가 가톨릭 교지 위배”(669쪽)라는 지적에 맞서, 불의에 항거하는 것 역시 종교의 일임을 역설하였다.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이었던 염상섭을 비롯한 33인의 문학인들은 폐간 조치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고 한국신문 편집인협회 또한 『경향신문』 폐간 취소를 위한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신문사 측은 행정처분 취소 청구소송, 행정처분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하는데, 사복형사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재판부는 경향신문 발행허가를 취소한 행정처분의 집행을 정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에도 또다시 무기정간 명령이 내려져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지만, 사월혁명 직후 『경향신문』은 복간된다. 부당한 억압에 굴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정의를 지키고 양심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분투는 붓을 꺾지 않는 염결한 자세를 생각하게 한다. ‘필화’는 쓴 글이 문제가 되어 화를 입는다는 뜻이지만, 한자를 바꾸면 좋은 글을 지칭하는, ‘붓 끝에 피는 꽃’이라는 뜻의 ‘필화(筆花)’가 된다. 붓을 쥔 손을 짓부수는 발길질 아래에서도 어둠을 먹으로 삼지 않고서 옳다고 믿는 것을 기록하려는 아름다운 손이 있다. 그 손들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꽃을 틔우고 있다. 1) 이에 관해서는 책의 목차에서 살필 수 있듯 발간 예정인 『한국 현대 필화사 3 : 전두환 쿠데타 이후의 필화사』의 제11부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필화’에서 ‘블랙리스트 문제’로 다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2) 「詩人鄭芝溶氏도加盟」, 『東亞日報』, 1949.11.5, 2쪽.

계간 문학인 성현아 검열필화국가폭력역사저항적 글쓰기 2025
최가은 사랑을 사랑하라 ― 『사랑의 각오』(소명출판, 2024)

사랑을 사랑하라 ―『사랑의 각오』(소명출판, 2024)1) 1  '사랑'이 무엇일까? 역사가 오랜 시간 직면하기 어려워했던 이 질문은 요즘과 같은 시기에 특히 낯선 것으로 다가온다. 적대와 혐오, 분열과 갈등. 우리 시대와 가장 어울리는 단어의 나열이란 오히려 이런 것에 가까울 테니 말이다. 특별히 비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가 아니라 할지라도, 소수자와 약자, 타인 및 '나'와 다른 모든 종류의 것들을 향한 오늘날의 적의와 냉소를 감지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유하는 일은 그에 비하면 훨씬 더 어렵거나 반대로 너무 쉬운 일처럼 여겨진다. 인류 보편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너무 많은 투쟁과 희생이 요구되는 동시에, 폭력은 오직 또 다른 폭력을 낳기만 하는 지옥과 같은 풍경. 이런 때 사랑은 어딘가 순진하고 순정한 무엇, 때로는 음험하고 지배적인 권력의 하수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사랑의 문제일까? 아니면 무언가가 누락된 사랑, 무언가가 함부로 전제된 사랑의 문제일까?  '사랑'을 '윤리'의 문제와 결부시키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우리 지성사의 논쟁 테이블에서 '사랑'이 꾸준히 배제된 현상이 그것에 내재한 모호함을 충실히 사유하지 않은 결과라고 말한다. 사랑의 본래적 위험성이 철저히 멸균된 '안전한' 사랑에의 열망. 세계의 복잡성을 하나의 당위로 봉합하는 무책임한 약속으로서의 사랑을 향한 집착. 이처럼 사랑에서 중요함-위험함을 박탈하는 온갖 종류의 사고는 '사랑' 자체는 물론, 그것의 토대를 이루는 타자와 윤리의 문제, 또한 우리의 유한성과 필멸성의 문제를 사물들의 즉각적인 법칙에 적용하는 일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그는 사랑을 제대로 예찬할 방법을 고안하는데, 그의 사랑론은 우리가 마주치는 숱한 이질적인 만남을 우리 모두의 '사건'으로 지속시킬 힘을 알려준다. 본질과 구별되는 사랑의 논리, 사랑의 특수한 원리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사랑에 내재한 그런 힘에 있다. "사랑에는 우연의 순전한 특이성에서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 한 요소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이 존재"2)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환원된, 거의 아무것도 아닌, 기껏해야 단순한 만남 그 이상이 아닌, 이 출발점과도 같다고 할 어떤 것과 더불어서 우리는 단지 동일성만은 아닌,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는 시련을 받아들일 수조차 있으며, 이를 위해 고통을 감내해낼 수도 있게 됩니다. [..] 사랑은 진정 우연으로 인해 발생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만들어내는 지점들, 예컨대 차이의 관점을 시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유 안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3)  "단지 동일성만은 아닌,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여전히 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을까? 그러니까 동일성의 무자비한 폭력과 차이의 무차별적인 관용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세계를 함께 경험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이 '사랑'을 사유하게 하는, "단지 하나의 경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그러한 "하나의 만남"(33쪽)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사랑은 통념과는 달리 정태적이고 순수한 개념이거나 행위자의 부차적 행위를 요청하지 않는 자연적 상태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사랑의 불확실하고 위태로운 지대. 이와 같은 속성이 부각되는 사랑은 잘 알려진 대로 문학의 오랜 친구이다. 대다수 서사의 원형에 비극적인 사랑의 구조가 놓여있기는 하지만, 문학과 사랑의 친밀한 관계는 단순히 내용에 국한된 무엇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태도이자 믿음으로서, 우리가 다룰 문제와 관련하여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하나의 '각오'로서 문학과 동행한다. 최근 출간된 한 권의 평론집은 우리에게 그 오랜 사실을 새삼 환기하려는 것 같다. 2  황도경의 일곱 번째 비평집 『사랑의 각오』(소명출판, 2024)는 우리 시대가 좀처럼 쉽게 발음하려 하지 않는 두 단어들, 그러니까 사랑과 비평을 나란히 내어놓는 데 망설임이 없다. 비평가는 서사와 서사 속 인물들의 행위, 말, 심지어 함께 먹고 함께 입는 모든 종류의 함께-있음을 '사랑의 선언'으로 읽고자 하는데, 그것은 그들 이야기와 장면의 세부가 바디우적 의미에서의 선언으로 비평가에게 당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의 선언은 우연이 고정되는 순간을 뜻합니다. 그 순간에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일어난 일, 이 만남, 이 만남에서 비롯된 에피소드들, 내가 상대에게 선언하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것들이라고 말입니다. 나를 결부시키는 무언가가 여기서 일어났다고 나는 그(그녀)에게 선언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너를 사랑해"입니다. (...중략..) 그것은 하나의 우연이었던 것에서 내가 다른 것을 끄집어내겠다는 걸 말하기 위함입니다. 우연으로부터 내가 지속성·끈덕짐·약속·충실성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충실성은 이 단어의 보편적인 맥락에서 떼어내, 저의 고유한 철학적 용어로 다시 사용해본 낱말입니다. 이 단어는 우연한 하나의 만남에서 그것이 필연적이었던 것만큼 견고한 구축으로 이행함을 의미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가 어떤 특별한 공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의 약속, 즉 만남이 제 우연성에서 탈피할 수 있도록 지속성을 구축하는 약속이라는 사실을 충실성이 정확히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4)  우연하고 우연적인 만남, 절대적으로 낯선 타자들과의 무분별한 마주침은 적의와 혐오로 나아가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 어떤 종류의 우연한 만남은 "여기서 일어난 일, 이 만남, 이 만남에서 비롯된 에피소드들"로부터 “다른 것을 끄집어내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나'와 '타자'의 분열과 분리의 감각을 하나의 통합된 도덕적 세계의 형상을 향해 떠미는 것은 아니다. 그 우연한 만남을 “견고한 구축”으로, 말하자면 마치 진리의 절차(procédure de vérité)처럼 우연을 지속적으로 추구해나가는 행위가 사랑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황도경에게 지금 우리 시대는 사랑을 "언감생심”으로 만드는 "절망과 분노"(3쪽)의 시대인 한편, 그럼에도 한켠에선 "사소하지 않은" 사랑의 선언들로 충만한 곳이기도 하다. 이를 증명하려는 듯 비평가는 총 세 가지 단계 혹은 과정으로서 사랑의 테마를 재구축한다. 총 3부로 이루어진 평론집의 구성과 배치는 각각 사랑에 관한 그의 믿음을 드러내는 듯하다. 1부 '사랑의 각오'에서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안보윤 『밤은 내가 가질게』, 정보라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김멜라 『제 꿈 꾸세요』, 김애란 『바깥은 여름』의 소설집과, 권여선 「사슴벌레식 문답」, 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의 단편 소설을 거쳐, 2부 '사랑의 방식'에서는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이승우 『목소리들』,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오수완 『도서관을 떠나는 책들을 위하여』의 한국 소설과 더불어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및 영화 『남아있는 나날』과 『나를 보내지마』, 영화 , 18세기 조선의 문인인 '이옥'에 대한 비평으로 이를 증명한다. 3부 '사랑의 질문'에 이르면 우리는 장진영 『취미는 사생활』, 김영하 『작별인사』, 이승우 『사랑이 한 일』,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와 같은 비교적 최근 문학 작품들은 물론이고 영화 ,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로부터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까지 그야말로 시간과 공간을 거침없이 이동하며 사랑을 마주하는 비평가의 모습을 보게 된다.  '각오', '방식', 그리고 '질문'을 '사랑'과 나란히 놓는 이 평론집의 배치 방식은 우리에게 가장 먼저 속격 조사 '의'의 두드러진 역할을 상기한다. '의'라는 조사의 존재는 사랑을 다양한 속성을 소유하는 사물처럼 인식하게 하는 동시에 '사랑' 뒤에 놓인 단어들을 능동적으로 행하는 주체의 자리로 이동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각오, 사랑의 방식, 사랑의 질문.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각오'라는 최종 형식 또는 태도로 종합하려는 비평가의 욕망에 닿을 때, 우리는 사랑이 제 본위를 언제나 초과하는 형식을 내재화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사랑이 사랑을 사랑하는 법, 달리 말해 우연성을 함께 있음으로 지속시키려는 예의 그 힘과 관련될 것이다. 그것은 비평집이 구체화한 순환의 논리처럼 각오-방식-질문 그리고 다시 각오로 돌아오는 사랑의 원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나는 소설 속 '나'처럼 아버지를 잘 알지 못한다고, 아버지의 삶보다 나 자신을, 내 삶을 끌어안고 사느라 전전긍긍이었다고, 아버지가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도 내뱉고 싶었던 말들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해야만 한다.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두고 돌아올 적이면 놓지 않던 아버지의 손에 담겼을 절절한 마음과 아버지의 눈에 피었던 만단정회와 아버지가 밤낮으로 기저귀에 그렸을 만다라를 나는 알지 못한다고, 고백해야만 한다. 아버지는 삶을 끝냈건만 아버지에 대한 내 기억과 마음은 여전히 복잡하게 출렁거려서, 나는 억울하다고, 상처받았다고, 그때 왜 그랬느냐고, 소설 속 '나'를 따라 구시렁거렸다. 아버지에게 따뜻한 손도, 말도, 한번 제대로 건넨 적 없는 나는 그리움인지 허망함인지 모를 마음을 소설 속 말로 대신한다. "그러니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숱한 순간의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졌다"라고. (217쪽)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스스로의 삶과 나란히 두며 읽는 글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가 평론집의 '중간'을 표시한다는 것이 특별히 흥미롭다. 아버지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고백하면서, 그럼에도 "전직 빨치산이었던 소설 속 아버지와 전직 경찰관이었던 나의 아버지"(214쪽) 사이를 소설의 문장과 비평의 문장으로 부단히 겹쳐 놓는 비평가의 자기 글쓰기는 말 그대로 아버지라는 타자를 향한 사랑의 '방식'이자, 타자 그 자체를 향한 '질문'이며, 또 그것을 지속하겠다는 삶의 '각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러니까 정지아의 소설 속에서 마주친, 나의 아버지와 겹치거나 겹치지 않는, 현실의 존재이거나 그렇지 않은 무언가/누군가와의 만남이 어떻게 방식과 질문 그리고 각오를 아우르며 차이로서 하나의 세계를 경험하는 단계로 우리를 나아가게 할 수 있다는 걸까. 무엇보다 그것은 이 모든 '선언'이 언어와 관계된다는 사실에 있다. 앞서 바디우는 “우연으로부터 내가 지속성·끈덕짐·약속·충실성을 이끌어"내는 것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선언이라고 말한다. 철저한 우연성을 시간 속으로 고정시키는 일. 그것은 언어의 형식으로 출현하는 '선언'에서 촉발되고, 이 출현은 그것을 반복적으로, 말하자면 충실하게 지속하도록 만드는 가장 기초적인 토대가 된다. 비평가가 자신의 아버지와 소설 속 아버지를 겹쳐놓으며 반복하는 '알지 못한다'는 문장은 이 모든 마주침의 철저한 우연성과 여전한 타자성은 물론이고, 그것의 지속성, 끈덕짐, 약속과 충실성을 수행적으로 실현한다. '알지 못한다'는 말로 끈덕지게 마주하는 우리의(타자의) 세계. 이 사랑의 방식은 곧 미래를 기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필멸의 삶을 살고 있으니 늙은 몸의 비관주의는 피할 길이 없지만, 우리는 정신의 삶이라는 또 하나의 다른 삶을 살고 있기도 하다.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지는 삶이라면, 그 시간들을 기억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세계를 인식하거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고, 그리고 신이란 모든 이를 받아들인 존재,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라고. 나는 이 사랑의 신을 믿고 싶다. (192쪽)  미래를 낙관하기. 다소 무책임하고 순진하게 보이는 이 '낙관'의 태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 나갈 수 있"다면, 이 필멸의 삶에 가능한, 그리고 가능해야만 하는 유일한 태도일 수도 있다. 이백사십 년에 걸쳐, 혹은 이천사백 년에 걸쳐 이어지는 삶이 우리의 유한한 생에서도 가능한 방식이 있다면 그것은 타인의 기억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이어지는 존재의 확장 덕분일 것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미래의 기억'인 이유는 타인의 기억이란 결코 온전한 내 것일 수 없는, 제대로 도착한 적 없고 경험을 말할 수 없는 '미래'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토록 평범한 미래』(김연수, 문학동네, 2022)의 할아버지는 그런 것이 '사랑'의 정의라고 말한다. 3  그러나 이와 같은 '미래의 기억'이 다름 아닌 나와 너의 무한한 다시 쓰기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여기에는 사랑의 선언이 남기는 찜찜하고 불가해한 질문들이 있어야 한다. 질문을 남기지 않는 사랑은 타인의 기억을, 그리하여 미래를 소유했다는 거대한 착각에 불과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신실한 믿음의 수호자로서가 아니라 비로소 온전히 아버지, 아내, 아들, 동생이 된 자리에서 그들은 신, 아버지, 남편, 형에게 질문을 던진다. 여호와 하느님은 왜 그랬을까? 아버지 아브라함은 왜 그랬을까? 어떻게 자식을 죽이라고 명령하며, 어떻게 그 명령에 순종하며 자식을 죽이고자 했을까? 남편 아브라함은 어떻게 당신의 자식을 버릴 수 있었을까? 이삭은 왜 에서를 편애했을까? 온통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부조리극과도 같아 보이는 창세기 이야기들은 이 '왜'라는 질문을 통해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변모한다. (337쪽)  “온통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부조리극과도 같아 보이는 창세기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우리 세계의 맨얼굴이기도 하다. 충만한 기쁨보다는 부당한 부조리만을 더 많이, 더 자주 남기는 세상을 향해 섣부른 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이 동시에, 우리가 앞서 살핀 사랑의 방식일 수 있는 이유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방법”이 “문장의 반복을 통한 단계적이고 점층적인 추론"(339쪽)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각오』가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우리 시대의 작품들은 모두 이 문장의 반복을 통해 단계적이고 점층적인 추론을, 무엇보다도 그것을 촉발할 '질문들'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면 각오-방식-질문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과정이 '사랑의 각오'라는 최종의 형식을 향해 운동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사랑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에 내재한 위험성과 그 위험성을 통과하는 데서 발생하는 고통을 인지해야 하고, 나아가 그것을 기꺼이 감내할 의지가 매순간 새롭게 선언되어야 한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무서운 고통'"(37쪽)이다. 그러나 사랑의 징표인 고통과 고통의 표식인 사랑은 인과의 논리를 거스르고 선후관계를 마구 뒤집으며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에, 고통의 원인을 추적하는 이들에게 사랑은 그 존재를 쉽사리 증명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확실성과 위험성은 그것을 감내하며 다른 생성을 추동하려는 투지, 말하자면 사랑의 방식을 이행하고 질문을 이어가려는 “시간 속으로의 참여"5)를 마주하는 이에게만 긍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 비평가가 작품이라는 우연성과의 마주침을 “시간 속으로의 참여"로 내던질 수 있는 계기는 단어와 문장, 그로 인한 삶들의 겹침에 있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비평가가 발견한 '눈'의 겹침은 사랑의 '각오'를 촉발한 한 사례로 보인다. 이때 눈은 악몽의 근원인 폭력적인 현실과 참혹한 역사를 주시하는 몸이다. (중략..) 그때 눈은 흉포한 폭력의 현장을 마주하는 몸이자 그날의 참혹한 현장을 기억하고 증언할 최후의 보루로서의 몸이기도 했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내'가 눈의 통증을 호소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끔찍한 고통의 현장과 폭력의 역사를 주시하기 위해서는 눈의 통증을 피할 길이 없다. 이 아픈 눈과 함께 '나'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24쪽) 눈은 하늘에서 내려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올라간 많은 먼지와 재가 결합한 것이고, 하얀 눈송이 안에는 수많은 결속을 통해 이루어진 텅 빈 공간들이 있고 그것 때문에 가볍다는 것은, 눈이 근본적으로 죽음과 어둠을 이겨내는 비상의 동력을 가진 새와 같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니 눈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통스러운 시련을 환기시키는 매개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둠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날아오르는 힘이기도 하다. 검은 나무들을 심어주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흰 천 같은 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그 나무들을 덮어주기를 기대했던 것도, 눈이 갖는 잠재적 비상의 힘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33쪽)  한강의 작품에서 '눈'은 "악몽의 근원인 폭력적인 현실과 참혹한 역사를 주시하는 몸"이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만든 '통증'은 같은 소설 속 세계에서 "죽음과 어둠을 이겨내는 비상의 동력을 가진 새"와 같은, “어둠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날아오르는 힘"이 되기도 한다. '눈'이라는 고정된 단어는 역사적 의미에 철저히 종속된 무엇인 동시에, 그 의미를 스스로 초과하고 다른 의미를 파생하는, 단지 유한하지만은 않은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를 그저 발견하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눈'과 '눈'의 겹침으로 발견을 다시 쓰는 비평가의 작업은 그 자체로 사랑의 선언을 "다시 선언"하는 일과 같다.  장르와 문법,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제시되는 이 사랑의 선언들은 반드시 "다시 선언"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사랑은 스스로를 지속하기 위해 "지점들, 시련들, 시도들, 새로운 사실들의 출현이 존재하며, 매 순간 '둘이 등장하는 무대'를 재연(再演)해야 하며, 새로운 선언에 필요한 용어들을 다시 찾아내야만 하"6)기 때문이다. 사랑에 각오가 필요한 이유, 그 방식을 끊임없이 새로이 고안해야 하는 이유, 무엇보다 질문을 생성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완벽하거나 신성할 만큼 총체적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재발명되는 것으로 지속되는 무엇이다. 랭보와 바디우의 연이은 이 선언에 더해 『사랑의 각오』의 비평가는 메리 올리버의 질문을 되새기며 사랑의 선언을 다시 선언한다. “질문은 오직 하나뿐,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할 것인가."(184쪽) 1) 이 글은 황도경의 비평집 『사랑의 각오』를 다룬다. 이하 문장을 인용할 경우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2)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사랑 예찬』, 도서출판 길, 2010년, 27쪽. 3)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위의 책, 같은 쪽. 4)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위의 책, 55~57쪽. 5)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위의 책, 59쪽. 6)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위의 책, 62쪽.

계간 문학인 최가은 사랑비평리뷰 2025
전철희 아름다운 이별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가 자주 언급했던 사례 하나. 어느 날 야외에서 우연히 두 사람이 만났다. 한 사람은 반가워서 시간이 있으면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상대방도 동의했다. 그 순간 갑자기 집의 지붕이 떨어져서 상대방은 죽었다. 그는 자기가 곧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저녁약속에 응한 셈이었다. 그는 이렇게 답해야했다. “나는 자네와 저녁식사를 하고 싶네. 하지만 나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군. 만약 내가 저녁까지 살아있다면 자네와 함께 식사를 하겠네.” 물론 이런 식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망각해야만 평안한 삶을 유지 가능하다. 갑작스러운 죽음의 확률이 너무 낮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은 돌연사의 확률보다 높지 않다고 하는데, 인생역전을 꿈꾸며 복권을 구매하는 사람은 꽤 있지만 자신의 삶이 지금 당장이라도 끝날 수 있다는 인식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가 죽음을 망각하는 까닭은, 어쩌면 그런 망각을 통해서만 의미 있는 인생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는 직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각각 자신의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존재이다. 가령 회사원들이 힘든 노동시간을 견뎌내는 것은, 월급을 받으면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구매하고 미래를 위한 저축을 할 수도 있으리라는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월급을 받기도 전에 갑자기 교통사고라든가 무차별 칼부림 같은 사건이 생겨서 죽을 수 있다면 굳이 계획을 세워서 미래를 설계하고 사회생활을 이어나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허나 인간이 누구나 돌연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다면 내가 살아남을 경우 생활을 이어갈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이 죽음의 가능성을 망각하게 된 것은 어쩌면 사회생활을위한 자위이자 자연스러운 ‘진화’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이 대면하기 싫은 끔찍한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종종 불연 듯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살다보면 타인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죽음은 삶의 반대말이기도 하니 삶을 생각하다 보면 죽음에 대한 사유가 시작되기도 한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을 오래하면 인생이 허무해질 수 있으니 보통의 사람들은 다시금 죽음을 망각하려는 무의식을 갖는다. 문학은 우리가 마땅히 생각해봤고 생각해볼 만한 문제를 구체화시키는 창구이다. 죽음 또한 문학이 다루는 주제로 자주 차용된다. 이번에 김지녀 시인이 발표한 작품 「죽음의 방문」도 그런 경우로 볼 수 있다. 물 속에 잠긴 사람의 입에서 올라오는 공기방울처럼 퐁퐁, 퐁 만들어졌다 터지는 모양은 말이 아니었으므로 손짓 하나 하나에 힘이 들어갔다 동공이 커지고 모든 계절이 한 장면에 사로잡혔다 타이어의 공기가 서서히 빠져나가듯 결국 한쪽으로 기울어 멈추었을 때 고요는 막 살점이 떨어져 나간 직후 피조차 나오지 않는 푹 패인 자리 다 없어지고 치아만 남아 돌아 온 사람이 지킨 것을 아내와 딸의 제삿날이 같은 남편의 밤을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며 배회하는 개처럼 컹컹 컹, 한참을 짖다 돌아선다는 것을 혼자 걸어가다 발을 헛딛어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죽을 뻔했네 갑자기 튀어 나온 말에 내 손을 잡아주지 않고 조용히 옆에서 보폭을 맞추며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죽음에 대해 죽은 자들은 죽음을 말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고 참혹은 아무 때나 초인종을 누르고 나를 방문했다 그때마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들키지 않고 죽음처럼 나는 잘 웅크려 있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헷갈려 하며 일어난 날, 손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고 물에 젖은 것처럼 다시 잠들고 싶은 날에, 「죽음의 방문」 전문 작품의 전반부가 누군가의 죽음을 묘사한다면 후반부는 화자의 상념을 담아낸 작품이다. 전반부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아마도 물에 빠져서 익사하는 것 같은데, 말을 뱉어낼 순 없는 상태로 여러 몸짓을 해보다가 결국 조금씩 힘을 잃어가게 된다. 과연 죽음이란 살아있던 사람이 말을 잃고 신체를 건사할 수 없게 되면서 정적만을 남기는 사건이기도 할 것이다. 살아 있을 때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활달하게 몸을 움직이며 주변의 사람들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기도 했을 사람이 죽음을 맞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나는 사후세계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라든가 죽음 이후 영혼이 가는 곳이 있는지의 문제를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타인의 죽음은 하나의 존재가 무(無)로 형질 전환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앞서 인용한 작품은 그런 죽음의 광경을 그려내다가 중반부에 이면 화자는 갑자기 “나”의 경험을 고백하게 된다. 혼자 걷다가 넘어지고 “죽을 뻔했네”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누구나 살다보면 그와 같이 “죽을 뻔”한 경험을 한다. 정말 죽음의 위험성을 실감하는 상황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갑작스러운 신변의 위기는 생기기 마련이고, 그런 때면 한국인들은 “죽을 뻔했네”라는 말을 관용적으로 사용한다. 이런 표현이 사용된다는 것은 우리가 사망가능성을 불안하게 인식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보통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죽은 자들은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더 정확히 말하면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런데 이 시편의 화자는 그 순간부터 자신이 죽음과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도 죽음을 기꺼이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마 타인의) 죽음을 떠올리고 참혹해지려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움츠린다. 역설적인 것은 그렇게 웅크려 있는 모습이 약간은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 같다는 점이다. 죽음을 회피하거나 망각하려는 시도는 무용한 것이고 모든 인간은 죽음의 근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일까? 다만 이 작품이 마냥 죽음의 편재성을 확인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 같지는 않다. 앞서 언급했듯 죽음은 절대적인 무(無)를 뜻한다. 죽음은 인간이 세상에 부여했던 모든 의미를 파괴하는 블랙홀이다. 그래서 “나”와 죽음이 공존한다는 이 작품의 발상은 우울하고 섬뜩한 묵시록적 예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무의미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표상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김지녀 시인의 작품이 늘상 이런 죽음과 무(無)에 대한 형이상학적 “깨달음”을 풀어낸다는 말은 아니다. 이 시인의 작품을 읽어왔다거나 이번 <신작소시집>을 본 독자들이라면, 그녀의 시를 특징짓는 것은 고적한 이미지 속에서 따뜻한 감성을 풀어내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의 방문」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이 작품이 다른 작품들의 돌올한 감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의 바다는 주인 아닌 사람을 밀쳐냅니다 호흡을 알기 때문이죠 우리는 노을에서 온 사람입니다 바다로 걸어들어가는 동안 무뎌지는 발자국은 시든 상추의 내면과 같아요 씹을 때 소리를 잘 들어보세요 우리는 상추에서 온 사람입니다 상추의 영혼은 열 시간이 넘도록 꿈을 꾸고 있습니다 호흡이 불규칙해서 바닥이 자주 들썩입니다 바닥에 입을 맞춥니다 바다와 같은 냄새가 나서 밀쳐냈습니다 나는 바닥에서 온 사람입니다 모래를 한 줌 잡았다 놓아줍니다 주인처럼 집을 나섰는데 집을 잃은 사람들이 조용히 모여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떤 소리를 내며 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노을로 번지느라 우리는 소리를 잃은 사람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생각이 무거워서 당신의 의자에 좀 앉겠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 전문 인용작의 제목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은 화자가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런데 작품을 찬찬히 읽어보면 사랑을 희구하는 연가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의 상태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게 보인다. 작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우리(나)”가 어떤 존재라는 반복적 언명이다. 화자는 자신이 노을이라고 했다가, “상추에서 온 사람”이라고 했다가, “바닥에서 온 사람”을 자처한다. 노을이 낮과 밤 사이(조금 낭만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개와 늑대의 시간”)에 아름답게 생겨났다가 휘발되는 것이라면, 상추는 아삭거리는 내면을 가지고 계속해서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물상이고, “바닥에서 온 사람”이라는 말은 자신이 이내 흩어져버릴 모래 같은 존재임을 암시한다. 이런 표현들을 얽어놓음으로써 인용한 작품은 세상의 어딘가에서 고독한 꿈을 꾸는 개별적 존재를 형상화해낸다. 화자는 이런 이미지들을 병치한 후 자신이 노을로 번지는 존재이며 또한 “소리를 잃은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고백한다. 소리를 잃었다는 것은 타자와 관계를 맺을 방법이 없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서글픈 표현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화자는 고독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노을, 상추, 모래는 애당초 혼자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노을은 바다(지평선)와 하늘 사이의 이음새처럼 보이니까 하늘과 바다의 주변에 있는 것이며 공중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덮을 수 있다. 상추는 아마 언젠가 밭에서 자연의 일부로 자라났을 것이며, 바다의 모래 또한 혼자서 존재하진 않는다. 고독한 사람도 자기 자신이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고 언젠가 만개할 것이라고 믿는다거나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 언젠가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면 현재를 견뎌낼 힘이 생길 수 있을지 모른다. 요컨대 「죽음의 방문」이 “나”와 죽음(無)의 근접성을 다룬 시편이었다면,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은 “나”라는 존재가 허무하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삼아 “기다림”의 자세를 형상화하고 있다. 두 발상이 무관한 것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상기했듯 죽음은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앞서 언급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경우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인간은 모든 일이 무의미하게 느낄 수 있다고 평했다. 인간은 각자의 욕망과 계획을 가지고 사는데,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굳이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없어진다. 어차피 죽을 것인데 우리가 하고 싶었던 일이라든가 하려던 일들을 구태여 실행으로 옮길 필요가 있겠는가?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교착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단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인이었고 아마 그가 추구한 믿음은 신을 향한 것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꼭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무언가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분명 인간을 더욱 강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가족, 친구, 연인 등을 사랑할 때 우리의 삶에는 활기가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나”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할 지경에 이르렀다면, 그 사랑은 나의 내면을 충만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렇게 충만한 상태로 살아가려고 할 때에만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의미 있는 삶을 이룩할 수 있다고 했다. 삶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만 허무함을 벗어나기 위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인식은 「아직 오지 않은 사람」에서도 변용되어 드러난다. 이 작품의 화자는 본래 고립감과 외로움을 호소하는 것 같았다. 그런 사유의 기반에는 삶의 허무성 내지는 고독함에 대한 성찰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후반부를 보면 “나”와 세계가 겹쳐지고, 마지막 행에서는 급기야 “당신”의 자리로 가고 싶다는 다짐을 표현하기에 이른다. “나”의 독자성을 확인하기 힘든 악조건 속에서 “당신”으로 표상되는 타자에 대한 사유로 넘어가는 감각... 이것은 물론 김지녀 시인 개인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아니라고 생각된다. 너무나 오래 전에 나왔지만 지금까지 회자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라든가 한용운의 『님의 침묵』 같은 시집만 봐도, 극한의 고독에 침윤한 화자가 끝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겸허하게 드러낸다. 이렇듯 고독한 세계에서 사랑이 피어나는 사람의 내면을 현시하는 것이 서정시의 역할이라면, 김지녀의 작품은 그런 장르적 책무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평가 또한 가능할 것이다. 이번에 <기발표작>으로 소개된 작품 「행운목」과 「바라보는 화창」의 경우에도 내밀한 고독의 어투로 타자(세계)와의 관계를 추구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평할 수 있겠는데, 이 작품들의 인식과 정서에 대해서도 유사한 설명이 가능할 듯하다. 지금껏 이 글은 김지녀의 시에 대해서 다소 형이상학적인 분석을 시도해보려 했다. 이번 <신작소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에 한해서 이야기한다면 그런 독법이 적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 이 시인의 절묘한 감수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작품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화를 내고 울어버린 나만 덩그러니 남았던 적이 이별인지 모르고 이별 앞에서 계속 머뭇거렸던 적이 눈이 내리고, 사람들은 두더지처럼 머리만 내놓고 누구든 무릎에 앉길 바라며 앉았다 일어나 다시 앉았다 떠났던 적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흐르는 음악처럼 프레임 바깥으로 걸어나가 돌아오지 않는 주인공처럼 끝나도 일어나지 않고 앉아 있는 나에게 (중략) 눈이 내리고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간다 먼저 떨어진 눈이거나 내 뒤에서 떨어지거나 나를 슬쩍 쳐다보는 듯한 눈이 평평한 바닥을 걷고 있어도 발 아래에서 끊긴 지층처럼 어긋났던 적이, 눈이 내리고, 나를 잃어버렸던 적이 (중략) 눈이 내리고 내리고 또 내리고 이 세계가 눈에 덮혀 누구의 발자국인지 모를 것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고 너는 나보다 먼저 있었던 시간일지도 나에게 오지 않은 시간일지도 「무효와 침묵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부분 존재론적 고찰을 담은 듯하면서 또한 “너”에 대한 마음을 드러낸 것으로 읽힐 소지가 있는 작품이다. 작중 세계에서는 눈이 내린다. 아마 구름으로부터 파생되었을 눈은 하늘을 부유하다가 바닥에 떨어지고, 밝히거나 녹으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어쩌면 사람들이 눈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그토록 연약하게 명멸하는 존재가 잠시 만들어내는 생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마찬가지로 꺼져가는 촛불이 타오르는 모습은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가 지적하듯, 눈은 비록 단명할지언정 세상의 분위기를 바꾼다. 세상에 모종의 느낌을 풍기고 이내 사라져버리는 존재라니, 이것은 정확히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하고 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세계에 흔적을 남긴다. 소수의 위대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남기는 흔적은 매우 미약하다. 특히나 인간의 죽음 이후에는 그나마 그가 남겼던 흔적마저 빠르게 소멸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죽음이라는 사건이 도래한 이후의 이야기이다. 어쨌거나 살아있는 사람은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와 조응한다. 마치 눈이 언젠가는 녹아버리고 사라질 것이라고 할지라도, 눈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잠시나마 세계에 자취를 남길 수 있는것과 같은 이치이다. ‘세계’라고 말하니까 조금 거창해 보이는데, 모든 인간은 각각의 세계를 갖고 있다. 우리가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우리의 주변을 둘러싼 개별 사람들을 변화시킨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사실 죽음이라는 사건을 상정하지 않는다고 치더라도 모든 인간관계는 시한부이다. 언제든 우발적인 조건과 상황에 따라 시작되지만 또 언제든 끝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하나의 관계가 시작되면 서로에 대해서 뭔가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다. 친구에게 “변치 않을 우정”을 맹세하는 사람이 있고, 연인이 생길 때마다 “영원할 사랑”을 약속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장기적으로 본다면 모든 관계는 언젠가 끝이 나게 된다. 인간 자체가 유한한 존재인데 인간끼리의 만남이 영속적이라는 기대는 무망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려 하고 여러 가지 추억을 쌓고는 헤어진다. 어쩌면 이것은 언젠가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힘껏 살아보려고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과 유사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지만(더 정확히 말하면 사후에 자신이 죽었던 경험에 대해 증언할 수 없지만) 살다 보면 이별은 경험할 수 있고 그 경험이 삶에 적잖은 내상을 남기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이별은 피할 수 있는 사건이다.(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고 마음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아픈 이별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려 한다. 왜 그럴까? 단순히 헤어짐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믿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그것은 헤어짐의 아픔은 미래의 일이고 일단은 자신의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남을 지속해보겠다는 무책임한 생각 때문도 않을 수 있다. 죽음은 경험이 될 수 없지만, 이별은 그것 자체로 아름다운 경험이 되어 준다. “아름다운 경험”이라는 것은 행복을 보장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아름답고 감동적이라고 생각하는 예술작품들은 대부분 불행하거나 뭔가가 부족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든 면에서 행복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소설이나 시로 쓴다면 무미건조할 것이다. 적당한 결여와 불행을 경험한 사람의 모습은 그러나 아름다운 감동을 줄 수 있다. 왕가위 감독의 로맨스 영화 같은 것을 본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환희의 순간만큼이나 이별의 순간도 아름답게 그려질 수 있음을 익히 느꼈을 것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김소월과 한용운을 비롯한 많은 서정시인의 작품이라든가 요즘의 대중가요(발라드)를 경험해본 사람 또한, 이별의 순간이 아름다운 언어들을 직조해낼 수 있음을 알 것이다. 「무효와 침묵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는 그런 문제의식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이 작품은 인연이 끝나는 순간을 암시하면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흐르는 음악”을 병치시켜 놓기도 했다. 이런 맥락을 전체적으로 살핀 이후에야 우리는 “무효와 침묵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는다는 제목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 그런데 김지녀 시인은 어쩌면 인간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는 죽음이라든가 하나의 만남을 종결시켜버리는 이별 같은 것을 현시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이번에 발표된 작품들에서 알 수 있듯, 그는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그 아름다움 자체를 통해 하나의 의미가 되고 있다. 무(無)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산출해낸다니, 그야말로 시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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