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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 2024년 봄호(제145호)

드르륵, 드르륵, : 양안다, 『몽상과 거울』(아침달, 2023) _이린아, 『내 사랑을 시작한다』(문학과지성사 , 2023)

홍성희 문학평론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토바이어스 브래드퍼드Tobias Bradford의 작품 가운데에는 작은 탁자 밑면에 사람의 다리 모형이 장착된 장치가 있다. 다리 모형과 테이블 사이에는 전기로 동력을 얻는 원형의 나무 판이 기계장치와 함께 설치되어 있다. 장치에 전류가 흘러 나무 판을 회전시키면, 나무 판에 세로로 연결된 다리 모형은 천천히 원을 그리며 움직인다. 신발의 뒤꿈치 부분이 땅을 디디면 원운동은 땅을 미는 힘이 되어 장치 전체를 이동시킨다. 신발 앞코가 향하는 방향, 원이 회전하는 방향으로 탁자는 드르륵, 드르륵, 느린 리듬의 소음을 내며 나아간다. 1)

     이 장치가 움직이는 방식을 보고 있으면 삶의 의미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반복되는 원의 회전이 선적인 나아감을 만드는 모습은 반복되는 매일로서의 삶을 시각화한 것처럼 읽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미를 보는 대신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가만 듣고 있으면,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는 감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문득 생각하게 된다. 나무 판이나 모형 다리가 움직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탁자 다리가 땅을 끄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가운데, 이 장치의 시간에는 들리는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 땅의 질감에 따라 같게도 다르게도 들리는 소리들이 있다. 장치의 움직임과 무관하게 들리거나 들리지 않는 소리도 함께. 그런 시간의 품은 가청역보다 넓다. 그 넓이 안에서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고 믿는, 시간을 감각하는 방식은 하나이지 않다.


*


양안다의 『몽상과 거울』은 시집의 형식으로 먼저 말을 건다. 표지와 내지, 이미지와 글자, 시집의 구조와 구성 모두에서 그렇다. 1) 물감을 뿌리고 번지게 둔 듯한 시집의 표지 이미지는, 책등을 기준으로 앞표지와 뒤표지가 대칭을 이루는 듯 배치되어 있다. 2) 앞표지에 적힌 시집의 제목은 뒤표지의 같은 위치에 역순으로, 좌우로 뒤집어진 모양으로 적혀 있다. 3) 표지를 열고 들어가면 시집의 1부는 스물한 편, 2부는 한 편, 3부는 다시 스물한 편의 시로 이루어져 있다. 1부와 3부는 서로 쌍을 이루는 제목들을 공유하는 채로, 서로의 역순으로 시를 배치한다. 4) 2부를 가운데 둔 대칭 구성은 2부의 시 제목 ‘ xanax’의 회문 형식과 연결되어, 시 「xanax」 속 한 지점을 기준으로 시집의 앞뒤가 대칭을 이룰 것으로 기대하게 한다.

     책등을 기준으로, 혹은 책의 중간 지점을 기준으로 표지의 좌우, 내지의 좌우를 구분하는 방법은 좌우대칭을 활용하는 데칼코마니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러한 배치에 이름을 붙인 제목들은 대칭을 좌우가 아닌 앞뒤의 문제로 바꾼다. 5) 1부의 제목 “거울 안에는 우리가 있다”와 3부의 제목 “거울 밖에는 내가 있다” 사이에 놓인 2부의 제목 “가운데에는 거울이 있다”는, 시집의 ‘가운데’에 ‘거울’을 세운다. 이 거울을 두고 표지와 내지의 좌우대칭 원리는 ‘안’과 ‘밖’을 나누는 거울의 앞뒤 대칭 원리로 번역된다. 1부의 시와 3부의 시는 서로를 비추며 제목을 공유하고, 순차적 읽기가 아닌 대칭적 읽기의 대상이 되어 자신의 ‘앞’에 놓인 시를 마주 본다. 표지의 글자와 이미지는 그런 내지 전체를 하나의 거울로 삼아 앞뒤로 서로를 비춘다. 그렇게 제목의 힘으로 『몽상과 거울』은 거울이 기능하는 세계를 구현한 하나의 공간이 된다.

     시집의 형식이 읽기의 방법을 효과적으로 제어한다면, 거울 법칙을 따라 1부와 3부의 시들이 ‘안’과 ‘밖’을 나누어 갖는 맥락과 2부의 ‘비추는’ 기능을 파악하며 시집을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1부는 실재가 아닌 거울에 비친 상들의 이야기로, 2부는 세계를 분리시키는 경계, ‘가상’을 인지할 수 있게 하는 장치이자 ‘나’에 대한 인지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3부의 시들은 ‘거울 안’과 무관히도 존재하는 ‘나’의 현실을 기술하는 언어로 읽으면서 말이다. 거울의 문법은 안과 밖, 허상과 실상, 대상과 주체, 일인칭 복수와 일인칭 단수 사이 경계와 거리를 선명하게 강조하고, 그 문법을 따라 만들어질 때 독법은 거울 자체의 기능과 효과에 방점을 둔다. 그런 원리 속에서 『몽상과 거울』은 거울의 안팎을 말할 수 있는 ‘거울 밖’의 시점에서, ‘거울 안’과 거울 자체를 인지하는 ‘나’의 정확한 시선에 관한 시집으로 독해될 수 있다. 나아가 시집은 앞에서 뒤로, 거울 안에서 거울 밖으로, 허상에서 실상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서사로 읽힐 수도 있다. ‘나아가는’이 ‘나아지는’으로 오인되기도 하는 복판에서 말이다.


괜찮아요. 호르몬이 균형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실패한 룸펜들의 밤」 부분


     하지만 이 시집을 나아짐의 서사로, 그런 서사를 가늠하게 하는 선명한 거울의 문법으로 가뿐히 정리해낼 수 있을까. 양안다의 시는 꼭 닮은 채로 겹쳐질 리 없이 나누어진 거울 ‘안’과 ‘밖’의 이분법을, 세계를 둘로 나누는 대칭의 무덤한 선을 성실히 그리고, 겹겹의 장치로 견고히 만든다. 그러나 시집 전체를 압도하는 듯 보이는 ‘거울’이라는 규칙은 만들어지고 있는 바로 그 장소에서 흐릿해지고 있기도 하다. 대칭인 듯 보이는 표지 이미지의 물감이 실은 좌와 우로, 혹은 거울의 앞과 뒤로 서로를 비추지 않으면서, 그저 하나의 몸으로 다르게 번지고 있듯 말이다.

     『몽상과 거울』을 열고 닫는 시의 제목 「악보가 육체라면, 음악이 영혼이라면」에서처럼, 양안다의 시는 육체와 영혼, 몸과 마음, 꿈밖과 꿈속을 나누는 표현들을 반복한다. 누군가가 “나에게서 무엇을 이해”해주길 바랄 때 그 무엇은 종종 “영혼”(「문라이트」)이고, 그것은 꿈속에서 ‘악보’ 없이도 연주되는 ‘음악’ 같은 것이다. 음악이 흐르는 곳에서 춤을 추거나 음악이 들리지 않는 곳에서 춤을 추는 양안다의 사람들은, 때로는 “얼굴을 할 수 없”(「악보가 육체라면, 음악이 영혼이라면」)는 마음으로, 때로는 “내 몸에 영혼이 없다고 생각”(「꿈 일기」)하는 마음으로 “드라이플라워”(「목련밭」)와 “박제된/프리지어”(「12월」)를 떠올린다.

     몸과 마음이 나누어져 각각 소외되고 있다는 감각은 양안다의 시에서 세상을 떠나는 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부채감, 혹은 두려움의 모습이어왔다. 그의 시는 이쪽의 없음이 저쪽의 있음과 나란한 평행의 세계를 상상하고, 그렇게 이쪽의 텅 빔을 견딘다. 다만 이쪽이 아닌 저쪽이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마련해야 할 것이어서, 그는 “손거울을 깨뜨리고/이것 봐./이것이 너다./그리고 나다”와 같이 시의 문장으로 자신의 세계를 쪼개고, “우리는 분열한다./네가 나에게 도움을 청하면/우리가 달려간다./우리는 분열한다”(「실패한 룸펜들의 밤」)처럼 숨 가쁘게 이어 말한다. 나누기의 방법으로 ‘나’는 자신을 이미 쪼개어져 있던 ‘우리’로, 언제나 ‘너’를 위해 달려가는 ‘우리’들로 이름 짓는다. ‘너’ 역시 ‘나’가 쪼개어진 ‘우리’의 하나일지라도 말이다.

     양안다의 시에 오래 있어온 여러 이름들에 그런 ‘우리’의 이름은 더하여져, 『몽상과 거울』에는 ‘로’ ‘이드’ ‘S’ ‘히나토’ ‘빈’ ‘듀듀’ ‘흰 토끼’ ‘연인’ ‘선생님’ ‘친구’ 같은 이들이 불러 모아진다. 그 모든 “나의 친구들”이 “세상 모든 단어들을/목련잎에 적어 날리기 시작”(「목련 경전」)할 때, 시의 언어는 “검은 양이 두루마리 휴지를/한 칸씩/ 뜯어서……/씹어 삼”(「더 짙은 블루」)키듯, 세계를 쪼개는 방식으로 텅 빈 곳을 채우려는 마음 자체이기를 택한다. 다른 말로 그것은 텅 빈 세계 속에서도 살아 있기 위해 자꾸만 말을, 그로써 세계를 하나 이상으로 나누어야만 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내가 살아 있다고 말해줘./간지러워. 간지러워./섬광./섬광./섬광./킥 킥……”(「새의 눈으로 본 풍경」).

     양안다가 시편들을 쌓아온 방법이기도 한 이 나누기는 줄곧 아픔과 고통, 불안과 회피, 대결과 저항의 일상들과 연결되어왔지만, 『몽상과 거울』에는 유난히 그런 일상을 ‘멍청이’의 착오로 언명하는 언어가 자주 틈입한다. “멍청한 놈들”(「실패한 룸펜들의 밤」) “멍청한 새끼”(「입원」) 같은 말은 “인센스가 타들어”가는 방 안에서 “나의 방을 비 젖은 숲으로 혼동”하는 “내가 기르는 두 마리 개”나, “길을 잃었다고 착각하”는 “어항 속 금붕어”(「구정물이 흐르는 내리막에서」), “그래봤자 나의 머릿속”인 줄도 모르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흰 토끼”를 향한다. 하지만 그 언어는 개와 금붕어와 흰 토끼의 입으로, 흰 토끼가 “빛 토끼라는 사실”을 모른 채 “빛과 흰색을 혼동”하는 ‘나’를 향해 되돌아온다. 나아가 양안다의 시가 오래 머물러온 자리를 곧장 겨냥하여, “세상 사람들은 꿈에서 만난 연인에 대해 말한다. 바보. 바보들이지 정말”(「새의 눈으로 본 풍경」)과 같이 씌어지기도 한다.

     멍청한 것과 멍청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이런 판정의 언어가 일관되게 가리키고 있는 것은, 실제가 아닌 것을 실제라고 믿는 것, 혹은 무엇이 실제인지 아닌지를 혼동하는 것은 ‘멍청함’에 해당한다는 논법이다. 그 언어가 “두루마리 휴지” 조각들처럼 ‘나’에게서 시작되어 ‘나’에게 도달할 때, ‘나’는 ‘멍청한’ 자와 ‘멍청함’을 힐난하는 자 가운데 어느 한쪽일 수가 없다. ‘나’와 개와 금붕어와 흰 토끼는 모두 ‘우리’로서 ‘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멍청함’의 굴레에서 나누기의 문 법을 반복해야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나’는, ‘멍청함’을 이해하기 위해 ‘멍청하지 않음’의 구역을 만들고 그 구역을 이해하려 한다. 이곳의 텅 빔을 견디기 위해 ‘저곳’을 만드는 것이 양안다의 시가 되풀이해온 나누기라면, 저곳의 멂이 만드는 고통을 견디기 위해 ‘이곳’을 만드는 것으로 『몽상과 거울』은 오랜 반복을 계속한다. 이때 ‘이곳’이란 저곳으로부터 돌아오는 애초의 지점이 아니라, 저곳에서 만들어내는 ‘저곳’, 이곳인 적 없던 ‘이곳’이다.


거울을 바라보면
내가 보인다.

거울 속의 내가 거울을 바라보면
거울 밖의 내가 보인다.
─「거울과 거울」 전문


“내가 보인다./내가 보인다./내가 보인다./내가 보인다./내가 보인다./내가 보인다”(「거울과 거울」) 같은 문장을 반복하는 언어는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진실에 닿거나 이미 있는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쓰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거울 ‘밖’에서 실제로 있는 ‘나’를 확인하는 일처럼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양안다의 시에서 이런 반복은 각자의 마침표로 적히는 각자의 문장들처럼 “내가 보”이는 방법이, 혹은 방향이 하나이기만 하지 않음을 말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거울”은 하나가 아니다.

     “왼쪽 거울에 내가 보”이고 “오른쪽 거울에 내가 보”이듯 거울은 더해지고 더해지는 ‘우리’의 이름들처럼 그 수가 정해져 있지 않다. 거울은 때로 “지금 나는 양치기의 꿈이거나 전생이거나 최면에 빠져 있다는 걸” 아는 “연주자”(「one」)를 비추고,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그렇게 이해하는 흰 토끼”(「사계」)를 비춘다. 하지만 때로는 “히나토, 주사기의 마음을 이해해본 적 있니. 누군가를 살리거나 누군가를 망가뜨리거나……”(「사계」) 그렇게 말을 걸며 살고 망가지는 것처럼 나누어진 것이 실상 나누어지지 않는 세계를 끝내 견디는 ‘나’를 비춘다. 거울은 “양이 울타리를 뛰어넘어//초원 밖 세계를 볼 수 있다는 믿음”(「문라이트」)처럼 ‘멍청함’의 ‘밖’을 설정할 수 있게 하지만, “살기 위해”(「사계」) “시든 꽃으로 시간을 셈하”는, “꽃 하나”를 “꽃 둘”(「꿈 일기」)로 나누는 ‘나’의 시간을 다만 마주하게 하기도 한다. 그런 거울들 앞에서 이곳과 저곳, 멍청함과 멍청하지 않음은 대립하는 이항이 아니라 끝없이 반복되는 방법의 한 모습들이다.


노천극장에서.
상냥한 방식으로 눈보라가 내렸다. 무대는 계속된다. 비둘기들이 떼로 날아오를 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테이블에는 과도가 놓여 있었다. 무대는 계속된다. 소년 배우가 칼을 던졌고 소녀 배우가 칼을 받았다. 소녀는 과도를 쥐고 캠프로 돌아갔다. 눈보라가 거세졌다. 모닥불은 모형이었다. 모형 불은 절대로 꺼지지 않을 것이다. 소년은 소녀 곁에 앉아 모형 불에 손을 넣었다가 꺼냈다. 무대는 계속된다.
나는 모든 것이 나쁘지 않았다.
─「개 두 마리」 부분


무대라는 장치는 무대 위와 아래를 구분하여 허구와 현실, 서사 안과 서사 밖, 캐릭터와 배우, 재현하는 세계와 재현되는 세계 같은 나누기의 논법을 만든다. “모형 불” 같은 장치를 더할 때 나누기의 원리는 더 견고해지고, “모형 불에 손을 넣었다 꺼”내는 “소년의 손이 끝내 녹아내리지 않”(「개 두 마리」)는다 것을 ‘아는’ 무대 밖 현실은 ‘모형’에 대하여 우위를 갖는 듯 여겨진다. “그런데 정말…… 창문은 닫혀 있던 걸까?”(「12월」) 무대 위와 아래, 무대 안과 밖을 나누는 선은 선명한 듯 선명하지 않다. 양안다의 시가 ‘극장 안’과 ‘극장 밖’이 구분되지 않는 “노천극장”을 ‘극장’으로 삼아 ‘극’이 이어지는 시간을 보여주듯, 무대의 이분법은 그러한 문법이 엄밀하게 성립되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단호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듯 보일 따름이다.

     텅 비어 고통스러운 이곳을 견디기 위해 저곳을 만들어내는 경계선이 ‘멍청이’ 같은 말에 문득 구부러지는 것은, ‘멍청이’와 ‘안 멍청이’를 구분하는 경계선이 거울 하나 옆에 다른 거울 하나를 세우는 것으로 쉬이 꼬여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양안다의 시가 그리는 선과 그 선들로 나누어지는 세계들의 대립은 그 자체로 시의 원리가 되거나 법칙이 되지 않는다. “무대는 계속”되고, 무대라는 방법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그러하며, 이때 계속되는 것은 무대 위 혹은 무대 밖 어느 한쪽이 아니라 이편과 저편을 구분하며 이야기를 만들고 이어가는 방법 자체이다. 반복되는 것에는 반복하려는 마음이 있고, 정말 계속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 마음의 이유이다.


너는 자면서도 내 손을 잡아주는 사람
─「악보가 육체라면, 음악이 영혼이라면」 부분


시집을 닫는 시에서 양안다는 이런 표현을 적는다. 얼핏 이 문장은 ‘너’가 어떤 사람인지를 기억하는 ‘나’의 담담한 표현인 듯 읽힌다. 하지만 시집에서 이 말은 ‘너’를 위해, ‘너’를 기억하는 ‘나’를 위해 ‘나’가 스스로 되고 싶은, 되어가는 중인, 되어 있는 사람을 표현하는 언어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무의식중에도 나를 찾고 감싸는 손길이 아득하도록 그리운 이유는, 그것이 ‘무의식’에까지 틈입한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이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과 몸이 분리되지 않을 만큼 힘이 센 마음을 체온처럼 가까이 감각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처럼 가깝게 ‘너’에게 손을 뻗기 위하여 양안다의 시는 “자면서도 내 손을 잡”는 ‘너’와 닮아 있는, 그러나 순서가 다른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힘이 센 마음이 여기 없는 ‘너’에게 닿을 수 있도록 ‘나’의 마음이 가로지를 ‘의식’과 ‘무의식’을 만들고, 꿈밖과 꿈속을 나누고, 그곳에 ‘영혼’과 ‘육체’를 배당하여, 그 모든 단절들을 단절이 아닌 것으로 도약해버리는 것. “어항 속 해마./어항 속 해마. 둘./잘 어울리지?/네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게”(「실패한 룸펜들의 밤」). 마지막 말을 건네기 위해 처음의 말을 시작하고, 마지막 마음에 닿기 위해 세계를 쪼개는 일부터 시작하며, 마음을 말하기 위해 하나와 둘을 구분하는 셈으로부터 시작하는 일. 양안다의 시에서 계속되는 것은 그렇게 무언가를 위하여 시작의 지점을 만들어내는 일 자체일 것이다. 그것은 불을 옮기기 위해 먼저 타는 “성냥”(「성냥」)처럼, 제 안을 쪼개고 마찰을 일으켜 몸에 불을 일으키는 자기연소법과 멀리 있지 않다. “절대로 꺼지지 않을 것”은 꿈속과 꿈밖, 어제와 내일, 몽상과 현실 같은 구분들이 아니라, 그런 구분을 반복하면서 지켜내는 마음의 온도, 그 열의 시간일 것이다. 유리를 녹여 거울을 만들고 다시 거울을 녹여 무언가를 시작할 작은 불의 시간 말이다.


*


이린아의 『내 사랑을 시작한다』는 비유로 가득하다. 불안은 “유에프오”(「비가 오기 전 춤을 추는 새」), “꽉 채운 6시는 뒷마당의 수탉”(「주사위」), “집으로 돌아가는 건 노란 등에서 태어나는 것”(「신월」), “언니의 계절과 계절 사이를 훔친 나는 동그랗게 차오를 언니의 아치형 질투”(「틈」). 두세 번 곱씹게 하는 언어는 천진한 어린아이의 표현 같기도, 몸의 색을 무시로 바꾸는 생명체들에게처럼 신체 깊숙이 새겨 있는 생존 전략 같기도 하다. 턱수염이 꼬불꼬불한 “아저씨가 다녀간 날이면/엄마에게도 꼬불꼬불한 털이 있”(「엄마의 지붕」)다 같은 표현은 아무것도 감추거나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무언가가 감추어지면서 드러나고 있다는 느낌을 붙잡게 만들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과 보아야 할 것이 쉬이 일치하지 않는 ‘미확인비행물체’ 앞의 기분은 이린아의 시를 가로질러 어떤 이미지들을 발견하게 한다. 이를테면 그의 시에는 터지기 직전까지 빵빵하게 공기가 채워진 원형의 주머니가 있다. “왼쪽을 차면 오른쪽으로/오른쪽을 차면 다시 왼쪽으로 휘어”지는 “축구공”(「아픈 공기」)이나 “바글바글 우글우글” 공기 입자들로 가득한 “벌룬”(「벌룬의 저주」), “노랑 빨강 파랑이 가득한” “키다리 아저씨”가 부는 “풍선”(「풍선 부는 사람」)처럼, 비슷한 사물들이 하나의 이미지를 이룬다. 이때 이미지란, 사물들이 공유하는 형태적 유사성보다는 그것들이 아무것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팽팽하게 공기를 가두고 있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축구를 “한 공기를 숨통이 트일 때까지 차고/우르르 몰려다니는 놀이”로 부르는 시의 언어가 ‘축구공’ 대신 “아픈 공기”를 보게 하듯 말이다.

     “아픈 공기”(「아픈 공기」)의 입장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벌룬”의 상태는 “저주”(「벌룬의 저주」)와 다르지 않다. “풍선은 언제나 미리 울 준비를 하고 있”(「풍선 부는 사람」)는 사물이며, 그 막힌 세계의 안쪽에는 “캄캄한 항아리 속”처럼 “푸른 물고기들이 펄떡거리”(「항아리 마을」)고 있다. ‘안’의 입장에서 사물은 전혀 다르게 말해질 수 있고 또 다르게 말해져야만 하는 언어의 대상이다. 오래 이어져온 문법에 따라 하나의 사물을 이해하는 것이 사물의 어느 부분은 볼 수 없게 만든다면, 바로 그 부분을 시작으로 새로운 언어를, 문법을 이해하는 방법을 구상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린아의 언어는 그런 구축을 시도하는 방식으로 쓰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란 응축된 결과값이 아니라, 너무 오래 응축되어온 것이 새어나가고 풀려나가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도록 마련되는 일종의 기본값이다.


추신, 당신이 언제나 건강하기를 기원하며
때때로 태양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날에는 아무것도 깨닫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은 날의 모든 문자는 모조리 창문이다 나는 내 눈앞에 무심코 씌어진 글자들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매번 이해해왔기 때문에 함부로 나의 이해를 쓰고 싶지 않다는 건 때때로 내가 눈부신 태양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추신 같은 거다

─「서니사이드 업Sunny-side up」 부분


‘추신’은 편지 등의 말미에 덧붙는 글이다. 하지만 이린아는 “추신”을 가장 먼저 오는 언어로 위치시키면서 「서니사이드 업Sunny-side up」을 시작한다. 그에게는 이미 쓰인 것들, 한참 씌어온 문자들에 ‘덧붙이는’ 일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언어를 꺼내놓을 수 있는 가뿐함이 중요하고 또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래 사용되어온 언어의 역사와 자장과 맥락을 이해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이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알 때, 그런 언어적 소속감은 종종 자신이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번역된다. 그래서 문득 언어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할 때 불안이 시작되며, 그 공백을 시급히 채우는 일이 요청된다. 이린아의 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날에는 아무것도 깨닫지 않아도 된다”고 적으며 그런 조급함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그건 이해하지 못함의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관성에 스스로 제동을 거는 방법이기도 하다.

     시간을 벌리며 이린아의 시가 하는 일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답’을 감춘 불투명으로 보는 대신 안팎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창문으로 둔 채, 그 창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볼 수 있고 볼 것인지를 스스로 헤아리는 일이다. “왜 의자는 의자야?” 단어를 얻어가는 아이들이 던지는 질문처럼 자신의 생을 구성해온 단어들의 “의지와 상관없”는 운동성을 비움과 동시에, 무엇 속에서 그 단어들을 써왔는지, 배경을 탐문해보는 일이 그에게는 중요하다. 그때에만 ‘나’를 “울 준비를 하고 있”는 “풍선”으로 만들어 “펑펑 터지”게 해온 타인, ‘숨을 불어 넣다’라는 관용구의 어감 속에서 “신神의 한 종류로 분류되”는 “사나이”(「풍선 부는 사람」)의 문법으로부터 ‘나’의 것으로 가져보지 못했던 ‘기본값’을 되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행동을 이해하고 싶어요


얻어지는 것이 있다면 나는 얻고야 마는 행동을 멈출 것이고 내가 개에게 물렸는지보다 개에게 내가 물렸는지 아니 내가 과연 개에게 물릴 수 있는지 개는 나를 물 수 있는지 내가 개를 물었는지 물어보겠지 그러다가 물리고─ 가장 먼저 가장 늦게 끝에 닿으면 가장 구하기 쉽고 가장 길게 무는 방법을 터득하겠지
─「도그 바이트Dog Bite」 부분

이린아의 시에는 개에게 물리거나, 마술사의 상자 속에서 몸이 잘리거나(「쉽게 열리는 무릎」), 간지럼을 버티거나 배탈이 나거나(「나비 정원」), 뺨을 맞거나(「뺨 맞은 관계들」) 바닥으로 떨어지거나(「항아리 마을」) 구토를 하는(「그룸Groom」) 신체들이 있다. 이 신체들은 누군가로부터 가해진 폭력과 안에서 반복되는 고통을 모두 몸의 기억으로 끌어안은 채 잠들지 못하고, “구부리지 못하는 손가락은 무엇을 두려워하는 중인”(「오렌지 섹션Orange Section」) 건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물음 속에는 언제나 피동의 문법에 묶여 있는 ‘나’와 ‘동생’과 ‘언니’, 그런 무수한 사람이 있다.

     ‘개가 사람을 물었다’와 ‘사람이 개에게 물렸다’라는 문장은 사실을 사실로 지시하는 단순한 말 같아 보인다. 하지만 문장의 안에서 본다면 사람은 ‘물다’를 ‘당한’ 목적어의 위치에 묶여 있고, 그러한 문법의 시간은 사실을 사실로서 직시하는 시선을 잃어버리게 하기도 한다. ‘당한’ 사람이 자신의 사실을 드러내지 못한 채 묻는 언어들이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렴”(「그룸Groom」) 조언처럼 말하며 입을 막는 언어처럼 말이다. 그런 피동의 자리에서 최초의 이해는 언어를 개발한 자에 의해 부여되며, 이후의 인식 역시 허락된 언어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문법은 종종 아주 일상적인 차원까지 닿아서, 사람은 “누구의 미움에도 뻔뻔해질 용기를 갖겠다며/결국, 책장 속으로 가” ‘용기’의 방법을 학습하고, 행정구역 안에서 “끊임없이 주소 를 옮기”듯 ‘내부’에 굳건히 머문다.

     그러나 이린아의 시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나를 읽고 나를 옮길 수 있나요?”(「불안의 사생활」) 하고 묻는다. 이 물음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삿된 ‘안심’의 영역에 무심코 머무르지 않기 위해 쓰는 추신 같은 것이다. “의지와 상관없이 매번 이해”할 수 있는 언어들만을 허용하는 이곳에서 그는 다음 두 개의 문장을 적는다. “내가 말하려는 건, 정말로, 자기 몸에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떤 것도 자기 몸에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두 자기 자신만 결정할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함부로 나의 몸에 어떻게 그것을 기억할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비가 오기 전 춤을 추는 새」). 두 문장은 ‘결정하다’라는 동사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쥐여주려는 의지와 마음으로 쓰이면서, ‘할 수 있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로 반복한다. 이린아의 언어가 말하려는 건 ‘어떻게’의 자리에 모범 답안을 채워 넣는 방식의 ‘결정’이 아니다. 그가 적는 ‘결정하다’라는 동사는, ‘어떻게’에 어떤 언어를 채우든 그것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도달한 목소리들에 의해, 문법에 대한 ‘이해’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이고, ‘기본값’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단단한 시스템 안에서도 ‘기본’의 방식과 형식을 스스로 설정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 거듭 말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를테면 이린아에게 동사는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될 수 있어야 하는 말이다. ‘내’라는 소유격은 그렇게 쓰인다.

     “내 사랑을 시작한다”(「내 사랑을 시작한다」)라는 문장에서 ‘내 사랑’은 목적어의 자리에 있지만 ‘내가 사랑하다’라는 하나의 문장을 오롯이 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 문장은 동사로 가득하고, 동사와 동사가 나란해지는 시간을 생각하게 한다. 그 시간에는 분명 어떤 문법 안에서 목적어 자리에 놓여야 했던 기억과 몸에 각인되어 지속되는 통증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사를 찾고, 그것을 움켜쥐면서 이린아의 시는 계속 스스로 읽고 스스로 옮겨 간다. “하지만 나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귀신같은, 귀신같은」)라고 자신을 소개할 수 있을 때, “당신이 언제나 건강하기를 기원하며/때때로 태양을 즐길 수 있기를 바”(「서니사이드 업Sunny-side up」)란다는 ‘추신’ 혹은 시의 첫 문장 속에서 ‘나’는 ‘당신’과 나란할 수 있다. ‘나’와 ‘당신’이 ‘어떻게’ 보이든지, 매일의 다른 날씨들 속에서.


코끼리는 크고 둥그런 귀로 하늘을 날아요

천적이 없는 코끼리는 그래서
뒤로 걸을 필요가 없고
오래된 기억을 길게 가지고 놀아요

하지만 그것은 곧 죽을힘을 다해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오래된 기억이 생긴다는 뜻이에요 입술과 코가 붙어 있는 건 말 대신 원인을 찾는 데에 더 영리하다는 뜻이고 유별나게 크고 둥그런 귀는 자신의 비명을 영영 잊지 못한다는 뜻이니까요 작은 상자의 7일, 둔중한 막대기의 70시간, 날카로운 꼬챙이의 70리, 단단한 쇠사슬의 7백 리 속에서 뒤로 걷는 법, 따끔거리는 막대기가 자신의 상아보다 더 작다는 걸 잊어버리는, 주춤거리는 놀이예요
─「코끼리」 부분


‘서니사이드 업’은 달걀프라이를 만드는 방법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영어 표현이다. 동그란 노른자 부분이 해를 닮아서 붙여진 이 이름은, 노른자를 깨뜨리지 않은 프라이 중에서도 뒤집지 않은 채 한 면만 익힌 것을 말한다. 「서니사이드 업Sunny-side up」의 제목에 붙은 “햇살이 가득한 프라이팬을 뒤집지 마세요”라는 각주는, 노랗게 빛나는 밝음을 뒤집어 흰 막으로 덮어버리거나 깨뜨리지 말기를 바라는 요청으로 읽힌다. “언제나 건강하”듯 “태양을 즐”기는 것이 그렇게 매일의 상태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린아의 시는 “태양을 즐”기는 일이란 “때때로” 일어날 뿐이라는 것을, 프라이팬은 언제고 뒤집히곤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뒤로 걸을 필요가 없”는 채로 “오래된 기억을 길게 가지고” 노는 “코끼리”는 “크고 둥그런 귀로 하늘을” 나는 가뿐함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린아의 이해 속에서 그는 몸에 기억과 경험을 새기고 있는, 몸 자체가 온통 비명인 존재이다. 이때 코끼리의 ‘놀이’는 축구공에게 그러한 것처럼 언제나 다른 언어를, 다른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 비유의 시간 속에서 비명은 크고 깊으며, 쉬이 ‘이해’ 완료되지 않는다.

     “태양을 즐”긴다는 것은 그러므로 어떤 맑음이나 밝음을 전부로 여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림자가 가장 길고 어두운 때와 해가 지상과 가장 가까운 때가 같아지는(「노을」) 매일의 노을처럼, 뒤집히는 의미들을 동시에 갖는 것, 지금껏 쓰인 언어와 지금 쓰는 언어 속 다른 위치들을 한 몸으로 상대해가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내 사랑을 시작한다”라는 이린아의 문장은 그래서 한 번 쓰이지 않고 계속 쓰인다. 그가 ‘사랑하다’라는 단어를 ‘내’ 것으로 갖는 방법은 다시 보고, 다시 기억하고, 다시 이해하고, 다시 말하며, 다시 쓰면서 ‘시작하다’를 반복하는 시간과 다르지 않다. 이린아의 시작(詩作)은 그런 시작(始作)들이며, 그런 동사들의 시간으로 여기에 있다.

“나는 노을을 좋아해”(「노을」)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나는 복숭아를 좋아해요”(「복숭아」)라는 문장으로 닫히는 이 시집으로부터, 추신은 계속 시작되는 중이다.

  • 1) 작품의 제목은 「Restless」(2019)이다. 장치의 형태와 움직이는 방식은 작가의 개인 웹페이지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https://www.tobiasbradford.com/rest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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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솔 자주, 계속 실패해보겠습니다 : 김지연, 『조금 망한 사랑』 (문학동네, 2024) / 안윤, 『모린』 (문학동네, 2024)

1. 말할 수 없는 균열 예측 불가능한 일들의 연속.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을 이렇게 표명한다면 분명 많은 이가 의문을 표할 것이다. 지난하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들을 자주 다루는 작가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해보건대 두 사람의 소설에는 독특한 사건들이 꽤나 자주 등장한다.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어딘가 금이 가고 삐걱대는 삶 앞에 속수무책으로 던져진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김지연의 인물들이 해괴한 일을 직접 나서서 ‘벌이는’ 사람들이라면, 안윤에게는 그러한 일을 마주한 뒤 이전과는 다른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 사람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위들은 어쩐지 무모하고 무용해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효용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러한 움직임들은 아무거나 믿거나 믿어야 할 것을 믿는 일을 거부하고, 확신할 수 없지만 옳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이들의 동작은 곧 일상의 균열을 마주하는 자세와도 같다. 사람들이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결함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온해 보이는 세계를 지적하려면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세계의 균열은 쉽게 발설할 수 없는 무언가다. 그렇다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까.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그러니 이상하고 유별난 인물들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잘 봉합된 듯 보였으나 결코 다 가릴 수 없었던 세계의 미세한 틈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2.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언뜻 보기에 『조금 망한 사랑』은 체념과 포기를 반복하는 망한 인생의 집합소 같다. 전세 사기, 금전 관계에 있던 친구와 애인의 배신, 실직과 구직난처럼 신자유주의와 투기 자본주의의 광풍에 베여 너절해진 인물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그런데 『마음에 없는 소리』(문학동네, 2022)를 읽었던 이들이라면 세태를 첨예하게 부감하고 표현하는 적실함뿐만 아니라, 농담과 같은 특유의 가뿐함이 김지연 소설의 또 다른 활력이라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테다. 이번에도 다소 무겁고 무기력해 보이는 사정들 틈에 유별난 광경들이 돋보인다. 이른바 김지연식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68)다. 몇 가지 사연만 잠시 나열해보자. 양육권을 포기했던 아이를 말 그대로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 다시 키워볼 생각을 하면서 죽은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여자(「좋아하는 마음 없이」). 빚만 잔뜩 남기고 떠난 전 여자친구에게 자꾸만 마음이 기우는 아이러니를 겪는 레즈비언(「반려빚」). 달밤에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포기」) 출입이 금지된 저수지의 한가운데까지 기어코 노를 저어 도달했다는 일화(「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까지. 소설의 인물들은 왜 자꾸만 이상한 일을 벌일까. 김지연의 소설은 삶이 이미 망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망해 나가리라는 잔인한 현실 공식을 동력 삼는다. 그곳엔 “반려빚처럼, 있어서는 안 되는 것도 태연하게 있”(「반려빚」, p. 104)고 누군가는 “있는 놈들을 위해 아주 싼값의 육체노동에 부려지”(「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 p. 42)지만 이토록 불합리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제도도 없”(「반려빚」, p. 96)다. 자본의 바깥을 떠올리는 일조차 돈의 힘에 기대야만 가능한 오늘날, 소설 안팎의 현실을 살피며 저항의 포기를 물었던 우리에게 김지연은 두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하나, 설명 혹은 주장하기. “소리 지르고 때려 부수는 것만이 화내는 방식인 건 아니잖아요.”(「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51) 둘, 괴상망측한 행동들을 늘어놓기. 그런데 짐작과 달리 이때의 망측(罔測)은 망할 망(亡) 자를 쓰지 않는다. 그물[网]과 망함[亡]이라는 뜻이 더해진 한자[罔]는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그러진 상태를 가리키면서도, 완전한 끝을 잠시 유예하는 힘을 발휘한다. 망측한 일은 낯부끄러울지언정 완전히 망하지는 않은 무언가다.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 역시 조금 망그러졌을지라도 여전히 어딘가에, 누군가와 분명히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폐기된 존재를 망가진 상태로라도 끌어올리려는 작가의 수고로움이 와닿는다면,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행위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다. 그들은 차가운 현실이야말로 ‘진짜 해괴한 것’이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김지연이 말하는 포기는 더 이상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마음’에 가깝다. 그런데 인물들은 먹고살기에 급급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망한 삶이 평범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괴이한 공식을 꼼짝없이 따라야만 해서 포기한다. 그래서 「포기」에서 거듭되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p. 19)은 자본에만 기를 쓰고 달려드는 평범한 세계를 조금이나마 문제 삼는 계기가 된다. ‘미선’과 그녀의 사촌 ‘호두’는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사라진 미선의 전 남자친구 ‘민재’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런데 미선과 호두는 물론이고 민재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돈을 돌려받으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민재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의 행방을 살피고, 신고를 권하면 “그렇게까지?”(p. 16)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막상 민재에게 정말로 닿을 것만 같은 순간엔 발을 뺀다. 민재는 돈을 가지고 도망쳤기에 평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특별한 사람이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 대부분이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민재는 같으면서도 다른 것들의 차이를 세세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설명은 “왠지 말이 안 되는 이유들도 납득하게 되는 순간”(p. 23)들을 만드는 힘이 있었고, 각자도생과 효율성을 제일로 섬기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받았던 도움은 민재의 이런 성격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민재는 자금난이라는 평범한 사정 때문에 결국 평범해져버린, “완전히 나쁜 사람”(p. 16)일 수만은 없는 사람이다. 이렇듯 아무리 애써도 포기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래서 어떤 그만둠은 포기 자체를 미루고, 돈만을 좇게 만드는 기존의 “미친 짓”(p. 12)을 중단하고 새로운 “미친 짓”(p. 28)을 가능케 한다. 술에 취한 호두와 미선은 한 남자의 도움으로 의릉에 들어가 “이상한 괴성”(p. 30)을 내지른다. 한 번쯤 누군가 불가능한 시간에 난립하는 걸 보고 싶었다던 남자 덕분에 “예상 밖의 방향”(p. 28)을 향해 내달릴 가능성이 반짝이며 움튼 순간이다. 망해버린 인간관계와 삶 속에서 건져 올려진 이 희한한 야행은 두 사람이 잃어버린 진짜 호두가 의릉에서 나무로 자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연결되면서 다시 한번 끝을 지연시킨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려면 불운을 껴안아야만 하는 현실에 낭만이 끼어들 자리는 협소하다. 결국 각서를 주고받은 뒤에도 또 한번 배신당한 호두는 민재와의 관계에서 “정말 원하지 않던 포기”(p. 37)를 하고, “나중으로 미루는 버릇”(p. 25) 때문에 민재와 만날 가능성마저 미룬 미선 역시 연결될 방법을 끝내 포기한다. 기존의 삶이 반복되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더욱 희미하게 만드는 자본의 견고함을 김지연은 결코 만만히 생각하지 않는다. 「반려빚」에서 전세자금대출과 전 연인 ‘서일’이 남기고 간 빚을 갚는 ‘정현’의 삶은 숨 쉬듯이 “매 순간 돈에 대해 생각”(p. 76)해야만 하는 하루들로 빼곡하다.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관계 중 하나인 연인 사이를 지탱하기 위해서 돈이 “제법 중요한 요소”(p. 84)로 호출되고, 유일한 반려의 자리에는 빚이 올라앉은 정현의 세계를 보면, 「포기」에서 미세한 틈을 열어젖혔던 망측함이 결국 잇속 빠른 자본주의의 환상에 불과한 건 아닌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할 수 없는 것만 가득한 날들 속” 유일하게 “할 수 있어!”라고 외칠 수 있는 일이 전 연인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는 일일 때,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을 만큼 망한 듯한 인생의 내력을 모조리 아는 이가 자신을 망하게 한 장본인뿐일 때, 서일과 다시금 함께 있고 싶은 “정신 나간 마음”(p. 89)이 고립과 단절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된 불모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탓이다. 그래서 김지연은 평균치의 삶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나선다.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가 탄생한 「좋아하는 마음 없이」의 ‘안지’는 이혼한 전 남편의 부고를 내연녀였던 ‘그녀’로부터 전해 듣는다. 이외에도 그녀는 전남편의 보험금 수혜자가 안지로 되어 있고, 이혼할 때 두고 온 아들 ‘성준’이 안지와 함께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안지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묘한 구석이 있다.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는 안지의 말에 “누가 벌을 주는데요?”(p. 142)라고 되묻고, 미안해할 겨를이 없을 만큼 행복했다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술술 털어놓으며, 이제껏 키워온 성준은 누가 뭐래도 자기 아들이지만 양육비는 보태달라는 염치없음까지. 하지만 안지는 바로 이 뻔뻔함이야말로 전남편과 똑같은 “여자의 장점”(p. 154)이라고 생각한다. 안지가 보기에 전남편은 “집을 해올 형편”(p. 149)을 갖춘 “좋은 사람이”(p. 159)었지만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p. 161)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사람”(p. 137)으로 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어온 안지는 스스로가 “아주 평균적인 삶”(p. 139)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전남편과 이른 결혼을 했었다. 호불호를 쉽게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선택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안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남편과 여자는 정확히 안지의 정반대편에 선 사람들이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는 사람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솔직한 사람. 숨기느니 차라리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사람. 그래서 뻔뻔할 수 있는 사람”(p. 158)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지는 이들의 뻔뻔함을 겪고서 “조금 더 자기 자신에게 가까운 삶을 살게 되었”(p. 137)다고 믿는다. 무엇이 좋고 싫은지를 탐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지의 가족들은 “좋아하는 마음 없이 함께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고, 때문에 안지의 삶에는 “그 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내렸던 선택들”(p. 163)이 수두룩하다. 반면에 현재의 안지는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과 재혼하고,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이상한 대회들을 연다. 분명한 미래가 아니라, 잘 그려지지 않는 미래를 골똘히 떠올린다. 그래서 안지는 전남편과 그녀, 아이가 있는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p. 165)을 훔쳐 지갑에 넣고 다님으로써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여자를 다시금 우연히 만난다면 되돌려주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들에 관해 거듭 생각하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삶인지 단정하지 않기 위해 끝을 한없이 지연시키면서 말이다. 전남편과 관련한 모든 일로부터 그저 멀어지고 싶었던 안지는, 그렇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연루되지 않음으로써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두고 보기를 택한다. 계산하고 판단한 “확신”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그들의 방식처럼 “선명하고 분명한 감정”(p. 161)이 있는 삶의 방식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다. 해괴하고 이상한 것의 가능성은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에 이르러 더욱 커진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누구든지 마음껏 열매를 가져가라고 전달받은 ‘나’와 ‘삼촌’은 유자밭에서 유자를 따던 도중 땅에 묻힌 상자를 발견한다. 기대감을 안고 열어본 결과,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p. 271)만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상자를 내동댕이쳤던 ‘나’는 서사의 마지막에 이르러 “어쩌면 영영 썩지 않는 것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p. 289)에 도달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1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숙모’와 그의 아들 ‘민재 오빠’를 애도하는 ‘나’와 삼촌의 시간과 연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촌보다 열 살 많은 나이에 아이까지 있는 이혼녀였던 숙모의 세세한 사정과는 별개로, ‘나’는 매번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말을 내뱉고 짝사랑 상대의 엄마인 그녀를 싫어해왔다. 하지만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던 숙모가 췌장암으로 사망한 전남편을 떠올릴 때마다 사는 게 너무 달아서 미안함을 느끼는 모습을 목격한 뒤, ‘나’는 그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싫어하던 사람을 닮아버린 순간부터 그 사람을 싫어할 수 없게 되었다던 숙모의 말처럼, ‘나’ 역시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 마냥 괴롭게만 느껴지지는 않게 되면서 변하는 것, 썩는 것을 긍정하게 된다. 해괴해지지 않는 것은 없다. 오히려 왜곡과 변형을 거치면서 이전과 다른 상태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 더욱 유의미한 일일 수 있다. 밀봉하지 않아 썩어버린 자리에서 공벌레가 새롭게 자리를 틀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 않은 인생. 김지연의 소설은 우리에게 그런 인생들의 가치와 가능성을 펼쳐준다. 3. 잃어버려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 『남겨진 이름들』(문학동네, 2022)과 『방어가 제철』(자음과모음, 2022)에서부터 주목받았듯이, 안윤 소설의 중핵에는 ‘상실’이 자리한다. 이에 조금 더 안윤스러운 특징을 부여해보자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실’이라 고쳐 부를 수 있겠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잃은 인물들이 겪는 상실은 기이하다. 의심 없이 정상이라 믿어왔던 체계가 뒤틀린 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어짐이 꼭 불행해야만 할까. 균열을 되짚으면서 우리는 모자람에 몸서리칠 뿐만 아니라, 온전함을 “새로이 감각”(「틈」, p. 237)해볼 수도 있다. 사라진 이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일깨워준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안온한 세계는 허상이고, 그것은 위태로운 누군가의 현실을 말끔히 소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금이 간 세계의 틈새로 유실된 존재들이 있다는 것. 이를 마주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보편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과 괴리를 좁힐 수 없는 인물들의 선택이 어쩐지 생소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하지만 그들의 결단 덕분에 기이한 감각들은 응달에 고여 있지 않고 변주된다. 안윤의 소설에서 기괴하고 낯선 기운이 세계를 다시 쓰는 역량으로 옮아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밀을 알아차린 뒤 다른 삶을 향해 몸을 트는 인물은 우선 「핀홀Pinhole」에서 만나볼 수 있다. 직장 동료로 처음 만나 4년을 사귄 ‘보라’와 ‘승원’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평탄해 보이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비밀’이 드러나면서 전연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제목처럼 소설에서는 바늘구멍처럼 아주 미세할지라도 분명한 틈을 내는 질문들이 등장한다. 첫번째, “비밀 하나씩 얘기할까”(pp. 55, 75, 88). 소설에서 총 세 번 등장하는 이 질문은 모두 보라로부터 나온다. 비밀은 수치스럽거나 비정상적인 치부들을 의미한다. 보라에게 딸들을 버리고 갔던 엄마와 새아버지, 이복 남동생이 있다는 복잡한 가정사 같은 것들. 보라는 비밀을 들추거나 캐묻지 않는 승원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이렇듯 보라가 감추고 싶은 것, 감춰야만 하는 사실들을 응시하고 발화하는 인물이라면 승원은 비밀 앞에서 “짧은 침묵”(p. 56)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설이 전개될수록 승원의 침묵은 배려가 아니라 자신의 비밀을 덮기 위한 자구책으로 드러난다. 보라는 어느 날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의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진’의 메시지를 통해 외동으로 자처해왔던 승원에게 마흔넷의 중증장애인 형 ‘정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진은 부모가 강제로 입원시킨 시설에서 관계자들의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걸로 보이는 정원의 사인을 밝히고 그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원의 가족들로부터 무시당했다. 두번째 질문은 경진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승원씨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세요?”(p. 61). 모든 것이 그렇게 돌연 생경해진다. “경험해본 적 없는 단란한 가정의 화기”(p. 72)는 “너무나도 깔끔하고 정연하게 통제된 느낌”(p. 73)을 주고, “앎의 정도를”(p. 66) 고려할 필요 없이 가까웠던 승원은 “엄연한 타인”(p. 53)으로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승원이 동그란 공 모양으로 뭉쳐놓은 양말이 보라에게 “집쥐가 ‘된 것’”(p. 53)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추방하려 아무리 애써도 계속해서 출몰하는 집쥐처럼, 정원의 존재는 여타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승원이 습관처럼 만드는 양말 뭉치가 어린 시절 정원과 가지고 놀던 장난감 공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보라는 직감한다. 평범했던 양말 뭉치가 “집쥐로 보이기 시작한 그 늦은 오후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p. 54)다고. 보육원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 약을 먹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집쥐는 어디에서 누구와 살 수 있는 걸까”(p. 87)를 궁금해했던 보라의 의문은 정원의 생애를 접하면서 되살아난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온통 투쟁이었다. 더딜지라도 꾸준히 삶을 기록하고, 장애인 스포츠인 보치아 선수가 되어 진지하게 공을 던져왔다. 죽고 싶을 때마다 “타 자 칠 때 총 쏜 다 생각”(p. 83)하며 쓴 시들, 시설에서 나가기 위해 새벽마다 컴퓨터실까지 기어가 적어 내려간 정원의 이야기는 “스스로 훼손을 인정할 수 없었던”(p. 71) 보라를 변화시킨다. 과거의 결함을 지우고 무결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살고 싶었던 욕망을 외면하고, 승원 대신 정원의 기록물을 경진으로부터 건네받는다. 할머니에게 배운 바느질처럼 보라는 정원의 생애를 몇 번이나 곱씹은 후 그의 이야기들을 정성스럽게 잇대어 나간다. 그리하여 세 사람만이 담긴 가족 그림에서 “가는 연필 선으로 밑그림만 그려놓은 테두리뿐인 사람”(p. 61)이었던 정원을 “한 사람의 형상”(p. 88)으로 만들어낸다. 양말 공을 죽어가는 집쥐로 느끼던 낯선 감각은 그렇게 자신이 바라는 삶을 향해 공을 굴리는 정원의 의지를 헤아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첫번째. 보라는 승원에게 다시 한번 비밀 말하기를 제안한다. 경진을 만났다는 자신의 비밀을 먼저 밝히면서. 사실 안윤의 인물들이 내린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경진이 던진 이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p. 85). 어째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친숙함을 등지고 불가해한 누군가를 끌어안게 만드는 힘의 근원을 짐작하기 위해 표제작 「모린」을 살펴본다. 사고로 중도 실명한 시각장애인 ‘영은’은 잃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범하거나 무감하게 태어나서가 아니라 살면서 많은 것을 잃어봤기 때문이다. 실명 이후 영은은 다채로운 세상의 이미지들, 오래도록 자신의 곁을 지켜왔던 연인 ‘선주’를 비롯해 자신을 이루던 수많은 조각을 놓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은 여전히 처음부터 가져본 적 없는 삶보다는 여전히 나중에 잃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이는 “있음과 없음, 그 둘을 연결하는 잃음”을 통해 “주어지는 모든 세계를 빠짐없이 살아보”(p. 25)겠다는 다정한 결단이다. 어떤 것을 잃어본 사람은 그것의 소중함을 비롯해 어떻게 더 잘 잃을 수 있는지, 상실 이후에 무엇이 변화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특히 자기 자신을 잃어보는 경험은 세계가 뒤바뀌는 사건이다. 하나의 세계는 곧 한 명의 사람과도 같다. 그리고 세계는 곧잘 무너지고 다시 서길 반복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사람’은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가기에 유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p. 9). 영은이 잃음을 두려워하기보다, 각각의 자신과 타인을 마음껏 사랑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이유다. 유일한 것들의 흔적을 덧입고서 모진 시간을 견뎌온 영은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유구하다는 걸 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자리 잡고 있다. 안윤이 굳게 믿는, 상실을 지나온 자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은의 질서”(p. 30)는 기존의 질서에서 멀어지거나 누군가를 잃는 일을 유독 겁내던 ‘미란’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자신을 제쳐둔 채 사회의 규율만을 엄격히 따르느라 영은을 사랑하는 마음마저 밀어내길 반복해온 미란은 영은의 곁에서 “한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 는 어떤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p. 44)을 경험한다. “죄다 망해버려서 다행”스럽게 찾아온 “그동안의 내가 다 망해버린 기분”(p. 41)은 여성과 여성의 사랑, 장애인의 삶처럼 분명히 있는 것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세계의 문법을 무너뜨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무수한 면면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세계에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스며들어 있다. “누군가가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게 저 사람이 말할 수 없는 사정이구나 하는”(p. 12). 세계는 곧 한 사람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 바 있으니, 영은의 말처럼 기이한 낯섦은 이제 한층 더 애처롭게 감각된다. 기꺼이 열리고, 연결되고 싶을 만큼. 때로는 나 자신을 잃어버려야만 닿을 수 있는 누군가가, 무너져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상실과 결여를 메우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방법을 안윤의 소설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4. 실패 연습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현실이 감추려 해온 불합리성이라는 비밀을 고발하고, 이때 드러난 균열에 힘을 가해 기존의 제도와 체계에 일격을 가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두 사람의 소설이 자신의 균열을 뼈아프게 직시해야만 들여다볼 수 있는 세계의 결함과 마주한 뒤, 그러한 생채기를 어떻게 매만질 수 있을지까지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지연은 잿더미 속에서도 아직 전소하지 않은 기대와 희망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린다. 그의 인물들은 자본 외부의 의지와 노력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한없이 작아져 있다가도 뜬금없이 괴상한 사안들 편에 서거나 망측한 일을 감행한다. 이때 강렬히 분출되는 어긋난 감각은 살 만한 삶을 간단없이 소거하는 자본의 법칙이야말로 진정으로 이상한 무언가임을 강렬히 느끼게 해준다. 안윤은 이유 없는 상실을 강제하는 현실에 짓눌리는 와중에도 잊힌 이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잃어버려서는 안 될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부지하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세계의 결함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목도할 때 생기는 기이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단하기 위해 분연히 사건을 찾아 나서거나 세계가 무너지는 감각 아래에 자신을 놓아둔다. 그런데 이들 소설이 나아가고 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물들의 일격이 너무 쉽게 저지당하거나, 세계의 비밀을 목격한 이후에 결과적으로는 다시 자신의 결함으로 회귀하는 수축성을 보이는 측면이 두드러짐을 간과할 수 없다. 김지연의 소설에서처럼 잠깐 보인 희망이 오히려 지난한 현실을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하는 마취제로 작용하고, 안윤의 인물들이 억눌리고 배척당한 존재들의 고통을 자기 이해와 친밀한 사람과의 좁은 세계에 가둬두는 건 아닌지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의도와 달리 두 사람의 소설이 보여주는 건 균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현실 아닌가. 이런 우려는 결함마저도 소비적 욕망과 충동에 포섭시켜 자기 발전의 재료로 삼는 자본주의의 영악한 힘이 가진 위험을 알기에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런 의심을 향해 김지연과 안윤은 한층 더 이상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선택하는 인물들을 다시금 내보일 것이다. 한 번의 실패는 억압의 기제에 영영 봉합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망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믿는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더 자주 서로에게 보여져야 한다고” “잘 살든 못 살든 그냥 살아 있는 게 목격이 되어야”(「긴 끝」, p. 122) 한다는 김지연에게 소설은 끝을 길게 늘어뜨려 무한히 연장하는 목격의 수단이다. “만약이라는 말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또,」, p. 174)는 걸 아는 안윤이 보기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로 허물어지는 일이야말로 세계가 연결되는 가장 첫걸음이기에 둘의 세계는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이다. 두 사람에게 실패란 기존의 견고한 세계가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고정되어 있던 자신이 허물어지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들은 이제 막 실패했다. 어쩐지 걱정되는 마음이 앞선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숙련이 뒤따르듯이, 이들은 지금의 연습을 거쳐 실패에 능숙해질 것이다.그러니 자주, 계속해서 더 잘 실패해보려는 두 사람의 힘을 믿는 마음으로 애정을 담아 덧붙여본다. 앞으로의 소설에서는 무너지고 재건된 세계가 어떤 다른 모습으로 솟아오를지, 기이한 인물들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향해 걸어 나갈지 궁금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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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억 시적인 미래에 대하여 ―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2

시적인 미래에 대하여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2 1) 박동억 1. 미래 상실 현대시에는 미래를 그려낼 가능성이 남아있을까. 이것이 송현지 평론가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격월평을 읽으며 떠올렸던 질문이었고, 이 글의 저자 또한 그러한 물음 속에서 동시대의 시를 살핀 뒤 조심스럽게 해답을 구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송현지는 어떤 찬사나 비판도 유보한 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이제 ‘미래’는 더 이상 내가 알던 멀고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바로 다음 시간. 현재와 ‘1인치 정도’ 다른 자리와 높이에 머무르는 시간.”2) 이는 우리 시대의 시에서 구체적 생활에 기대어 미래가 표현되고 있음을 해설하는 내용이지만 곱씹어볼수록 오히려 현대시가 내포한 문제를 암시하는 듯한 문장이기도 하다. 냉소적으로 읽는다면, 이것은 현대시에서 그려낸 ‘미래’가 자연재해나 사회의 변혁과는 거대한 사건과는 무관한 다락방에서 일어나는 사건, 아니면 고작 생활 반경의 ‘1인치 정도’ 둘레에서 일어나는 몽상에 지나지 않다는 진단처럼 들린다. 다시 묻자. 누군가는 사이보그와의 공존을 꿈꾸고 누군가는 화성 개척을 꿈꾸는 이 시대에 시인은 어떤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수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통찰했듯, 사람은 시간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없고 단지 물질의 움직임으로부터 유추할 뿐이다. 한편 시인은 물질의 운동이 아닌 마음의 운동을 통해 세상을 통찰하는 길을 택한 자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난 수백 년간 마음의 변혁을 꿈꾸며 때론 시대의 선구자를, 때론 사회의 혁명가를, 때론 세계의 카나리아를 자처해 왔다. 그러나 동시대의 시가 사람의 마음을 ‘1인치 정도’ 움직이는 데 그친다면, 우리는 차라리 이 시대의 시인은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즉 주어진 인간성의 파수자를 자처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미래에 대해 상상하기를 포기하는 자세가 아닐까. 어제처럼 직장에 출퇴근하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들여다보다가 잠이 들기를 반복하는 것이 미래라면, 이제 더 이상 시인과 생활인의 삶을 구분할 수 없다면, 결국 시인은 수많은 현대인처럼 다 계획되어 있어서 이미 진부해져 버린 미래로 향해가는 셈이다. 더 이상 지평선 너머로 향하지 않는 두 눈이 있다. 매번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길을 산책한다. 그렇게 현대시는 미래 상실을 앓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것만 같다. 나는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읽는다. 혁명 후에 쓰인 자연의 성난 풍경 또한 읽는다. 그것은 나의 일. 그렇게 읽던 책을 덮으니 하루가 끝났다. 하루가 끝나도 뉴스는 멈추지 않고,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있고, 일렁이고, 나는 늙고, 다시 책 앞에 앉는다. 창을 열자 빛나는 칼을 삼킨 마술사처럼, 겨울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안은 알 수 없는 백색 진동과 고요로 뒤섞인다. 창을 닫아도, 난폭하고 날카로운 겨울은 내게 바짝 붙어서 있다. 떤다. 이 책이 얼기 전에 나머지를 읽어야 한다. 손이 떤다. 다 읽어야지만, 이 긴 하루가 끝날 것이다. 떠올린다. 풀이 눕는다. 하지만 어떤 풀은 죽고, 어떤 풀은 흔들리고, 어떤 풀은 죽은지도 모르고 여전히 파랗게 일렁이겠지. 떤다. 수영. 나는 저 풀들을 넘어, 죽은 수영의 나이를 넘어, 자꾸만 죽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나이가 되었구나. 내 마음에 살아남은 이가 없는 나이가 되었구나 생각하고 떠올리는 사이, 겨울의 차고 희디흰 장막이 책을 덮는다. 그 위에 손을 올린다. 손이 굽는다. 생활이 나를 세차게 때리고, 모든 약속이 깨져버렸을 때도,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 검은 물속에 잠겼을 때도 버리지 않았던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 마음도 굽는다. 수영. 달처럼 차고 날카로운 이것을 나는 읽을 수 있을까. 떤다. 굽은 마음과 손안에는 겨울이 숲을 무너트리는 그 시절의 소리만 가득하다. 그 시절, 몇몇 죽은 자들은 여전히 공장 여기저기를 배회하곤 했다. 김안, 「김수영 전집」 부분,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차라리 김안 시인은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의 회고에는 불안과 가책에 깃들어 있다. ‘해방’과 ‘혁명’이라는 단어를 심장으로 삼았던 시대가 있다. 시인은 김수영 전집을 읽으며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떠올린다. 그러나 시인은 다음과 같은 사실 또한 확신하고 있다. 김수영의 뜨거운 정신은 이제 차가운 ‘책’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혁명의 시간은 이제 기록일 뿐이고, 자신 또한 저 광장이 아니라 이 방안에서 긴 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이 세상의 계절은 “날카로운 겨울”일 수밖에 없다. 이때 겨울은 이젠 무색해진 과거를 뜻하고, 그 겨울을 칼날처럼 느끼는 시인의 마음은 수영의 정신을 온몸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가책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김수영 전집에 ‘손’을 올리는 행위는 하나의 제의에 가깝다.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라는 시구는 곧 김수영을 향한 추모, 그 혁명 정신이 돌보아야 했던 공장 노동자를 향한 추모, 마지막으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던 시인의 능력을 향한 추모를 뜻한다. 추모는 현실의 맥락에서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이지만 마음의 맥락에서는 누군가 욕망했던 것을 뒤따라 욕망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진정으로 향수되는 것은 수영도, 공장 노동자도 아니라 그들의 각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뜻을 품을 수 있었던 인간은 어디로 갔는가. 시인에게 시집을 펼치는 일이 제의와 같다는 말은 곧 추모가 마음을 보듬고 치유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작품에서 마음은 ‘굽는다’. 죽은 자는 세상을 ‘배회한다’. 근본적으로 이 시에서 찾아헤매는 것은 마음을 빗겨놓는 우회로이다. 현재를 여실히 살아낼 수도 없고, 미래를 꿈꿀 수도 없는 시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과거라는 우회로이다. 그것은 앞으로 살아내야 할 시간에 응답하는 김안 시인의 방식이다. 마음의 운동 혹은 변화가 곧 문학적인 시간의 본질이라면, 시적인 미래는 반드시 물리적인 미래를 전제하지 않는다. 김안 시인에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 당신의 빛 바랜 욕망에 응답하려 할 때 사람은 아직 실현하지 못했던 삶의 방식을 재현한다. 2. 극복할 수 없는 것에 터 잡기 ‘시간은 변화’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테제를 조금 더 문학적 어휘로 옮긴다면 문학적 시간의 본질은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 문학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방식이다. 성숙의 실마리는 반드시 미지의 탐구로만 획득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잊었던 과거로부터 발굴될 수도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현대시의 미래 상실은 곧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거나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잃은 자의 징후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섬세하게 분별할 것은 현재를 ‘벽’으로 느끼는 목소리와 현재에 자족한 자의 목소리는 근본적으로 상반된다는 사실이다. 김안 시인은 미래를 직설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음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미래를 소망하게끔 한다. 이제 동시대 문학과 문학적 시간에 대한 이해를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고자 한다.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장 단순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시간은 성숙(변화)이다. 그런데 생각해 볼 것은 이 세상에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두 손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듯 마음으로 이룰 수 있는 것 또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떠올려 보면, 근대의 위대한 철학자들 또한 그들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보다 그 무엇인가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절망을 깊이 사색했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것은 결코 바꿀 수 없다’라는 인식이 시대마다 달랐다는 점이다. 18세기 중엽 루소는 『에밀』을 집필하면서 자연은 절대 극복할 수 없으니 사람과 도구를 자연에 적응할 수 있게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20세기의 프로이트는 말년 동안 인류가 문명을 통해 자연을 극복했지만,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타인과 더불어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난제로 여겼다. 루소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었고, 프로이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이웃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우리에게 불변하는 사실은 무엇일까. 심심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해 여름 우리는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함께 보고 넷플릭스를 온종일 틀어 놓았다. 창밖에서 사람들은 노잡이의 얼굴을 하고 가히 영웅적으로 걸어다녔다. 심심해서 창밖의 사람들에게 뛰어들 수도 있을 것 같지. 사무라이의 칼을 횡으로 쥐게 한 다음 전속력을 달려들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렇지만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 그해 여름 우리는 배달 음식을 주문하고 우리는 나란히 누워 죽고사는 이야기를 지속하였다. 이왕 죽을 거라면 뚱뚱해져서죽고 싶어. 피자 한 판을 겹쳐서 먹다가 코로 치즈를 질질 흘리면서. 이왕 태어날 거라면 결코 끝나지 않을 성대한 파티를 시작합니다. 주최자가 강단에 서서 연설을 시작할 때, 샹들리에가 되어 모두를 다치게 하고 싶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혀에 틀어박혀서……. 검은 양념이 묻은 나무 젓가락을 씹으며 네가 말한다. 삽십 초에 한 번씩 유성이 떨어지고 있다. 어째서 우리가 가진 건 절망조차 가짜일까. 위대한 화가의 삶과 죽음을 다룬 애니메이션이 상영 중이고.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처럼. 그해 여름, 나는 망친 그림 속에 너를 두고 빠져나왔고 그림 속에서 너는 나를 그리는 중이다. 안 넘어진다. 가위바위보. 변혜지, 「럼펠스틸스킨」 전문, <현대시> 2025년 2월호 이 작품의 주조는 무엇인가. 작품 전반에서 분노와 장난기가 맴돈다는 것은 쉽게 감지할 수 있겠으나 더 깊게 자리하는 것이 세계에 대한 체념임을 읽어내야 한다. 분노에만 집중한다면 자칫 이 작품의 주제를 인간에 대한 혐오나 불신으로 오인할 수 있겠다. 분명 화자는 창밖의 사람에게 사무라이처럼 칼을 휘두르는 상상을 하고, 파티장의 샹들리에가 추락하듯 사람들을 다치게 만드는 상상도 한다. 여기에는 타인에 대한 냉소, 특히 인간을 장난감과 같은 대상으로 취급하는 냉소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 한편 제목은 유희성을 강화하는데, 독일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요정인 ‘럼펠스틸스킨’을 제목으로 택했지만, 내용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타당하지 않은 분노와 무의미한 유희성을 감지할 수 있는데, 그 두 정조의 뿌리에 놓인 것은 삶에 대한 체념으로 보인다.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라는 시구가 암시하는 바는 명백한데, 그것은 타인뿐만 아니라 ‘나의 삶’도 헛것이라는 인식이다. 내 생활은 가짜이고, 내 마음속 절망조차 가짜라는 진술 또한 뒤따른다. 결국 타자에 대한 공격성의 뿌리에는 바로 자기 부정이 놓인 셈이다. 근본적으로 부정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이 시의 내용을 물음으로 바꿀 수 있겠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란 의미 있는 것일까. 나와 저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든 이 세상은 무사하지 않을까. 내 존재가 행복하든 절망에 빠지든 창밖의 거리는 안녕하지 않을까. 자포자기하듯, 이 시의 화자는 우리가 ‘잡놈’에 지나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 이후 ‘나’와 타인을 아무렇게나 대한다. 이 작품의 주제는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부조리 문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처럼, 변혜지 시인은 충동적으로 살인을 꿈꾸는 화자를 등장시킨다. 하지만 이 작품에 묘사되는 폭력성의 크기는 그 반대급부로서 얼마나 이 현실에 자신이 얽매여 있다고 느끼는지를 투영한다. 세계가 이상해진 지 오래되었다. 선후관계는 도미노 같다. 쫓다 보면 결국 무너지는, 언젠가는 깔려 죽게 될 그런 일. 책을 팔아 복숭아를 사 왔는데 껍질 새 초파리가 살고 있었다. 똑똑, 나가주면 안 되겠니. 나는 어리니 자신에게 양보하라고 지적받는다. 아직 후숙이 필요한 과정이구나. 이번 여름 복숭아는 노약자석과 비슷한 것 같다고 이해한다. 오늘의 공원은 겨울을 동경한다. 머리카락을 비질하는 미화원과 컷불을 뚫고 들어오는 빛들. 공사 중이죠? 저수지를 만들겠다고 해 흔쾌히 자릴 양보해주었다. 한 그루의 몫. 한 그루의 치아. 피스타치오 밭은 없나? 원하면 있다. 풍경은 성조기가 펄럭이는 곳으로, 줌인. 시간은 달밤, 연인들이 나무 밑에 모여 있다. 딱따구리 없이도 부서지는 캘리포니아의 숲. 거기 뭐해요? 행운이 쪼개지는 소리를 들으려고요. 겸사겸사 입도 맞추고요. 아, 예. 그럼 열심히 하십쇼. 열매 하나 으적으적 씹으며 걷는다. 행운은 텁텁한 맛이구나. 물드는 풀빛의 혀. 나는 키스할 상대 없이 필터에 입을 댄다. 여름의 공원은 저수지를 걸고 소송 중이다. 개들은 사람의 사정 따위는 알바가 아니고 저수지를 사랑한다. 우리에게는 분쟁이 있고 시간이 필요했다. 빨리 만들수록 더 많은 사람이 죽을 뿐이라는 협회의 말에 가능한 천천히 물을 붓겠다고 합의한다. 깨끗하게 청소한다. 저수지가 생긴 어느 미래를 향해 물을 붓고 붓고 또 붓다 보면, 도달하는 가능성에 언젠가 초파리도 죽게 될까?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엄시연, 「가드닝」 전문, <포지션> 2024년 겨울호 엄시연 시인의 시에서도 세계는 부조리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그 어조는 지나치게 담담하고 그것은 어쩌면 마음을 쏟아낼 이유조차 상실한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한다. 첫 행이 암시하듯 세상은 언제든지 사람을 ‘깔려 죽게’ 만들 수 있지만 그 원인이나 결과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불온한 조짐만이 암시될 뿐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움직이고, 무관하게 연인들은 서로 입을 맞추며 사랑을 확인하고 있다. 이 대비보다 의아한 것은 화자의 태도이다. ‘나’는 죽음의 불안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연인들의 사랑에 전염되지 않는다. 그저 이 모든 것을 적당히 거리를 둔 배경 취급하며 복숭아를 먹고, 저수지를 산책하며, 행운을 찾아 헤매면서 그저 생각에 잠길 뿐이다. 죽음을 필연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탈출구란 존재하는 것일까. 시인은 “도달하는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상 작품 안에서는 어떠한 희망도 암시되지 않는다. 사람이든 초파리에게든 암시되는 것은 죽음 뿐이다. 저수지와 차오르는 물의 모티프는 언뜻 기후 온난화와 홍수를 떠올리게 하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변혜지의 시와 엄시연의 시는 똑같이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도, 사람들도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가드닝」의 마지막은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라는 시구로 끝맺는다. 이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현대인의 무력함에 대한 여실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입 맞춤의 상대가 있어도 좋고 없으면 ‘필터’에 한다. 저수지를 놓고 소송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나’와 무관하다. 한 시대의 사색은 그 시대의 불변하는 사실에 터 잡는다. 자연을 극복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부터 루소의 교육론이, 반드시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모색되었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시에서 극복할 수 없는 대상으로 감각되는 것은 세계 그 자체, 무엇보다 세계의 무의미성으로 판단된다. 「럼펠스틸스킨」에서 현실은 영상이나 그림 같은 것, “가정용 플라테타리움”이나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 등으로 비유된다. 이러한 비유는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 새로운 붓질을 할 의지도 지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드닝」에서 세상은 언제든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이상한’ 공간이지만, ‘나’는 그곳에서 야기되는 죽음의 조짐을 방관할 뿐이다.이들의 시에 맴도는 부조리는 다음을 유추하게 한다. 이제 이 세상에서 인간은 무용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세상은 어제처럼 작동할 것이다. 우리는 ‘잡놈’으로 연명할 것이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며 죽어갈 것이다. 이 예정된 미래에서 미래의 쓸모란 무엇일까. 이제 현대는 루소주의자의 사색을 지나, 프로이트주의자의 숙고로부터도 멀어지며, 차츰 인간 존재에 대한 냉소와 부정으로 옮아간다. 극복할 수 없는 것은 과거에는 도구나 사물로 취급했던 것,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체계이다. 인간조차 사물의 지배자가 아니라 이 윤택한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일부인 양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물 없이 사람은 살 수 없다는 것, 현대시는 이 절망에 터 잡아야 할 것이다. 선택지는 많지 않아 보인다. 변혜지와 엄시연의 시는 다음의 ‘도달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새로운 인간은 사물이나 다름없이 행동하는 방식, 즉 자아를 사물화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이 외에 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는 것일까. 단숨에 답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은 찾아 헤매야 하는 새벽이다. 1) 이 글은 <문학과지성사> 2024년 겨울호의 졸고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와 연속성을 지닌다. 2) 송현지, 「제자리 뛰며 나아가는 미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300쪽.

월간 현대문학 박동억 김안변혜지엄시연현대시시간시간성문학적 시간 2025
선우은실 상태로 말하는 방법 : 최재원 , 『백합의 지옥』 (민음사, 2024) /신미나 , 『백장미의 창백』 (문학동네, 2024)

표면-상태-읽기  문학은 인간의 내면 또는 물질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하나 내면은 '내면'에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앞의 문장은 의미를 다르게 가진다. 내면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틀리고 비뚤어진 형태로 또는 속에 있는 그것과 다르지 않은 형태로 비죽이 튀어나오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안다. '내면'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이 그것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또한 그것을 '본다'. 그것이 '어디'에 있든 누구에게 있든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표면적인(보이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문학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표면을 읽는 일과 같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표면을 읽는 것이 내면을 읽는 일이 될 수 있을까? 아주 표면적인 방식으로 내면을 추측하게 만드는 시에서라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최재원 시인의 『백합의 지옥』 중 "별늪"이라 이름 붙은 장에 수록된 시편들은 연결성을 가진다. 제목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상어 세계의 법칙에 적응하지 못하고 친구가 되어줄 누군가를 찾는 "부끄럼쟁이 상어 위스퍼"는 "제멋대로 올챙이 오페라"를 바다에서 만나고, 이 둘은 “배고픈 물뱀 나르샤"를 만나 함께 모험에 오른다. 자기 위로 쌓이는 모래를 떨어낼 생각도 없이 침잠했던 "심심한 넙치 누가바"가 이 무리에 합류하고, 이들은 “마그마라는 이름의 마그마"를 만나며, 이들과 함께 걸음 하는 마그마는 은하수라는 이름의 은하수를 만나 "별늪"이 된다. 그리고 이 시들의 여정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마그마와 은하수는 별들을 주고받으며 / 하나가 되었다 / 별늪엔 별꿀이 가득히 흘러서 누구도 / 배고프거나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 「별늪」 부분  요약건대 이 시는 위스퍼, 오페라, 나르샤, 누가바, 마그마, 은하수가 별늪이 되어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내면은 어디에 있는가? 요약이 말해주지 않은 부연 설명과 수식의 말들을 들여다볼 때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상어 위스퍼는 동료 상어들이 "자신들과 함께 다니려면 사람의 다리 하나를 / 가져오라고 부추"(「부끄럼쟁이 상어 위스퍼」)긴 끝에 길을 나섰으나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오페라를 만났다. 올챙이 오페라는 자신이 살 수 없는 바다에서 살고자 하다가 동료를 만났고, 오래 굶은 물뱀 나르샤는 오페라를 잡아먹으려다 위스퍼를 보고 숨었지만 이내 그들과 동료가 되기로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무언가에 저항하거나 반(反)함에 따라 삶을 성취하고 있다. 이때 '반'은 '부정'에 방점이 찍히지 않고 주어진 것의 '바깥'에 찍힌다. 주어진 것에서 탈출하는 것, '하라고 시켜서 되는 것'의 바깥쪽에 위치한 수많은 가능성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저항함으로써, 때때로 죽음을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이 시의 표면인가, 이면인가? 문장이 지시하는 것을 읽어나갔을 뿐임에도 문장이 발설하지 않고 내포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헤아렸으므로 이면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표면을 읽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정답 없는 이 의문점에서 표면이냐 이면이냐 중 하나로 결론을 내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질문을 돌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살아가는 일이 '존재'가 아니라 '상태'로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즉 존재의 방식이나 형식(표면), 존재의 의미(이면)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떠한 상태인가를 헤아림으로써 가능하다.  이처럼 최재원의 시는 표면으로 이면을 말한다. 대도시와 약간의 거리를 둔 업스테이트에 살면서 그야말로 '삶'과 자연의 의미를 갈구하는 듯하지만 지극히 탈자연적인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 곳곳을 채우고 있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 시 「업스테이트」 역시 지극히 표면적인 것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 표면을 잘 살피면 삶을 주관하는 자와(퍼치를 낚음) 삶에 종속당하는 자(대도시적인 생활 관습으로부터 멀어지지 못함)의 위치가 거듭 전도되는 '상태'가 발견된다. 표면을 통해 상태를 보여주는 이 시를 지나, 비누 거품을 내어 손을 씻는 모든 과정과,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타인을 바라보며 관념적 상태변화를 묘사하는 「기브앤테이크」를 거쳐, 「비엔나소시지」에 도착해 이번에는 이런 물음을 꺼내본다. 분리 불가능한 표면과 이면 어디께를 휘저으며 의미를 찾아내는 일의 가장 흔한 방식은 어쩌면 '개인적으로 좋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게 과연 '개인적'일 수 있는지 묻고, '좋음'이란 게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순간 시라는 표면은 지극히 개인적인(내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그것이 발설되면 내면은 더는 내면이 아니게 되는 데다 이 시에 대한 변형된 의사를 전달하는 것으로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으니, 이 역시도 표면으로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상태에 관한 것이겠다.  그런 까닭에 이 시에 대한 '개인적으로 좋음'이라는 메모를 이런 식의 해석으로 풀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비엔나소시지를 먹는 상황을 묘사한다. 물론 그사이에 끼어드는 세부적인 의견이나 수식된 말 등이 중요하다. 어떻게 먹어야 최상의 조화로움 속에서 비엔나소시지볶음을 먹을 수 있는가를 궁구하는 일련의 상황 사이에 그리움, 환멸, 어머니와 같은 정념들이 “꾸역꾸역” 끼어든다. 당근의 맛이라든가, 재료 익힘의 정도, 당근과 다른 재료와의 조합을 씹을 때의 맛, 감각, 만족도 같은 것은 꾸역꾸역 끼어드는 생각들의 맛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그건 무슨 맛인가. 그런데 한 번도 빼놓지 않고 / 양파와 당근을 썰어 넣는다는 것은 얼마나 착실한 / 일입니까 얼마나 / 열심한 일입니까 특히 / [......] / 꾸역꾸역 아침부터 국을 / 데우고 소시지를 볶고 찬 / 반찬 더운 반찬 김치를 / 각각 포일로 그 비좁은 / 도시락통을 지혜롭게도 / 기술적이게도 딱 / 3등분으로 나누어 / 나는 그런데 국물이 흐르면 / 화가 났습니다 당신에게는 / 아니고 국물에게 그리고 신부님의 / 고고하고도 자애로운 모습을 문득 / 떠올립니다 급할 것 하나 없이) - 「비엔나소시지」 부분  비엔나소시지를 반찬으로 싸는 사람이 그렇게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 요컨대 이 재료들이 비엔나소시지 반찬이라는 지금의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화자는 생각한다. 비엔나소시지는 누군가 성실하고 착실하게 열심히 야채를 썰어 넣는 노고이고, 비좁은 도시락통을 현명하게 구획하는 지혜이고, 그 결과물이 의도치 않게 약간의 국물을 새어 나가게 만들 수도 있는 우연적 실수를 동반한다. 수많은 사랑에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비의지적 결과에 화가 난다고 화자는 말한다. 이 근사한 노고와 지혜와 사랑과 성실함이 흘린 약간의 국물을 두고 감사·만족·풍족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단지 국물 때문에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분노를 느끼는 이 어긋나는 감각은 이것을 먹는 사람에게 죄책감이나 환멸을 느끼게 만들고, 그러다가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는 이에게 자애를 구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이 시는 이렇게 끝난다. “저에게 / 저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 (내가 갈 곳에는 비엔나 / 소시지와 같은 추잡한 / 것들이 없게 하소서 / 꾸역꾸역 살아 낸 것들 / 의 기억을 모두 잊게 하소서"(「비엔나소시지」)라고. 그러면 비엔나소시지 먹기라는 건 노고·노동·사랑·지혜,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 이 모든 걸 배반할 만큼의 분노와 짜증과 혐오감 그리고 그것에 대해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다.  요컨대 최재원 시의 표면 읽기란 의미란 무엇이며 어떻게 발생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을 듣는 일이다. 최재원의 시는 인내심을 가지고 여러 차례 그것을 일러주고 있다. 자세한 표면을 보라고. 그리고 존재를 강구하지 말며 상태를 헤아리라고. 상태를 헤아리면 의미가 발생한다고. 죽음-상태-읽기  꼭두를 한 달 사이에 세 번이나 보았다. 한번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전시되고 있는 사진전에서, 다른 한번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른 전시장으로 건너가며 스쳐 지나가듯 놓인 실물을, 마지막 한 번은 신미나의 시에서 “꼭두"라는 기호로 보았다. 꼭두를 세 번 보았지만 '꼭두'를 본 것이지 실제로 그것이 본래의 의미로서 작동하는 상태를 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꼭두는 전통적인 장사(將事) 문화에서 볼 수 있는 목각 인형이다. 망자를 '저편'으로 인도하고 수호하는 역할을 하며 상여의 곳곳에 놓인다. 말하자면 꼭두는 나무이고,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이고, 죽음이고, 수호이고, 죽음의 길잡이다.  최근 세 번이나 보았지만 꼭두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나? 나는 사진으로 된 목각 인형을 보았고, 목각 인형 전시물을 보았고, 죽음에 대한 시를 읽었다. 사진전에서는 꼭두를 찍어 186.5×159센티미터 사이즈로 커다랗게 인쇄하여 세로로 세워두었고, 지나치듯 본 꼭두 인형은 '전시물'로서 전시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꼭두의 모양새와 가장 닮지 않았지만 꼭두의 수행적 의미에 가장 가까운 것은 신미나가 쓴 「꼭두전」에 등장하는 “꼭두"라고 할 수 있겠는데, 장사를 지내는 시에서 “꼭두"가 망자를 이끌고 수호하는 존재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꼭두"는 문자의 나열과 문장의 직조로 펼쳐진 죽음으로 향하는 상상된 언어 속에서 등장했으므로 어쨌거나 상징적 기표의 상태로 간주되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꼭두를 세 번 봤지만 세 번 다 꼭두를 봤다고 할 수는 없고, 사진과 전시물과 죽음에 대한 상상의 현물로서 그것을 보았다. 보았다...... 한데 나는 무엇을 본 것일까?  앞서 최재원의 시를 읽으면서 개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태의 지속은 항상성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불안정성과 유동성을 의미한다. 변함없는 상태처럼 보이기 위해서 개체는 변화하는 시간에 맞게 대응해야 하고 달라진 상태에 맞서 새로운 움직임(혹은 멈춤)을 추동해야 한다. 신미나의 시에서 여러 번 발견되는 '죽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죽음은 역시 삶의 중(中)이자 삶이 아닌 중의 중의 이동에서 감지된다. 죽음은 존재의 중지, 상태의 종료처럼 생각되곤 하지만 삶이 곧 존재가 아니듯 죽음 역시 비-존재가 아니라 삶이 아닌 상태다. 이로써 신미나의 시는 삶과 죽음을 상태, 즉 유동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죽음이 존재라는 것에 불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그런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면, 삶을 소거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보고 이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삶이란 무엇인가? 즉, 죽음을 소거한 채로 죽음을 어떻게 말하는가? 언니들은 비밀이 많고 / 금요일엔 주름이 많은 치마를 입었지 / 블라우스 리본을 매고 / 흔들리는 구두를 신고 뾰족하게 웃었네 // 나도 따라가고 싶어 [......] // 넌 아직 어려 [......] // 주머니 속에는 시를 쓴 종이가 있는데 / 언니들을 슬프게 만드는 시가 있는데 / 여름휴가는 짧고 / 동생이 시를 써서 언니들은 기쁘다 말하고 / 시를 쓰면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아 // 언니들을 시로 써도 될까 / 사탕수수밭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을 / 미래, 미래, 미래로 물결쳐오는 문장들을 // 언니들은 풀었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으며 / 머릿수건을 두른다 / 식판을 들고 밥과 국을 배급받는다 / 에나멜 구두는 금요일에만 꺼내 신을 것 // [......] // 뭔가 시작되려는데 / 그게 무엇인지 /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 / 아무도 - 「바람 주머니가 부풀 때」 부분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에 시의 핵심적 태도가 함축되어 있다.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 '뭔가'가 무엇인지. 그런데 이 표현 자체가 '그것'이 소거된 형태로 말해진 결론이다. “그게"로 표현되어 있는 '그것'의 정체를 어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일러줄 수 없다. 그래서 아무도 '나'에게 일러주지 않은 것이다. 이미 그 상태에 속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일러줄 수 없는 것이 바로 삶인지라, '나'는 알고 싶었으나 아무도 일러주지 않아서 속수무책 빨려 들어가 있는 바로 이 '상태'에 그냥 놓인 채로 그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는 중이다(삶-인 중이다).  삶은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무어'라고 알려줄 수 없다. 삶은 존재하는 상태와 같이 유동하는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시를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 이들이 어떤 흐름과 상태에 놓여 '그것'을 겪고 있는지를 따라가보자. 이 시에서 "언니들은 비밀이 많”은 존재다. '나'는 언니들을 따라가고 싶어 하지만 어리기 때문에 언니들의 비밀에 합류할 수 없다. 비밀이 많은 언니란 언젠가 될(또는 궁구하는, 희망하는) '나'의 미래이고, 그런 점에서 삶의 한 단면이다. 이 문장을 좀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삶이란 비밀을 지닌 미래'다. '나'는 언니들의 비밀에 합류하지 못한 대신 시를 쓰면서 비밀을 만든다. 시를 쓴다는 것은 비밀을 만드는 것이다. 시를 쓰는 일은 '나'를 몰래 나쁜 일을 하는 것 같은 비밀스러운 상태로 만든다. 비밀스러운 '나'의 미래인 언니들을 시로 쓴다는 건, 미래를 비밀스럽게 만들어 맞이하겠다는 것. '나'는 언니들의 비밀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비밀'이라는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다(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말을 소거한 채 미래를 비밀스럽게 스스로 만들어 쫓는 것이 삶임을 보여준다.  이 시에 들어섰던 최초의 까닭은 삶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규명하기 위함이었다. 이 시가 '그것'을 소거하면서 동시에 말하는 것과 같이,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다다르기 위한 방법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을 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죽음이 아닌 상태에 대해 말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때의 소거는 실제로 뭔가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빠진 상태 그 자체로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찾았냐고 물었다 // 클로버는 잎이 세 장 / 드물게 네 장 / 초록의 이랑이 팬다 / 반복의 물결, 물결, 물결 // [......] 하나만 길게 잡아당기는 / 신의 놀이 / 토끼는 귀가 크고 / 코끼리는 코가 길다고 / 말하려다 / 코끼!라고 했는데 // 지구 바깥에 / 귀도 크고 / 코도 긴 / 진짜 코끼가 있을지도 몰라 // [ ] 토끼는 위험하면 / 뒷발을 구른다는데 // 코끼, 코끼, 코끼래! / 우리 중 누구도 /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 「풀」 부분  이 시의 현재에 있는 것은 풀이고, 어쩌면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위험을 감지하고 발을 구르는 토끼이며, 보다 희미한 가능성으로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코끼'인데 이것은 사실상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없는가? 이 시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코끼다. 코끼는 토끼로부터 연상된 코끼리를 말하려다 튀어나온 것이고, 토끼는 클로버를 찾으려 풀밭을 샅샅이 뒤지다가 떠오른 모자 속에서 폴짝 뛰어나온 것이므로 그것은 풀밭에서 비롯된 어떤 상태로서 그 어떤 것보다도 커다란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기서 벌어지는 소거는 “코끼”라는 표현 속에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없음('리'의 소거)으로 하여금 있는 것이고(코끼), 상상 속의 토끼이자 코끼리를 온통 아우르는 관념의 상태다. '리'가 빠졌지만 '리'만 빠진 것이 아니고, '리'가 빠진 '코끼'로 하여금 없는 모든 것을 있게끔 만드는 것이 되었다.  뭔가를 빼고 말한다는 것은, 빼려고 했던 것을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지금의 상태로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뺀다는 것은 상태를 바꾼다는 것이고,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이전의 상태에서 놓여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때 신부가 되길 원했으나" 조선소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게 된 한 사람의 삶(이라는 상태)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쓴 바 있다. 스토브 안에서 무연탄 더미가 / 조용히 스러질 때 / 그는 부드러운 재를 / 얼굴 위에 뿌리고 / 더러워진 몸을 머리끝까지 욕조에 담근다 / 숨을 참고 열을 세다가 / 마침내 뱉을 때 / 현실은 간신히 그를 따라왔다 // 그는 눈을 뭉쳐 / 눈사람을 만들어 물에 넣는다 / 순식간에 / 눈사람이 사라지는 모양을 본다 / 기분이 아니라 / 감정이 아니라 / 어떤 /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을 - 「북에서 온 사람」 부분  그는 그가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상태에 있고 때때로 "섬망과 미혹 사이에서 / 그는 하마터면 / 자기 자신을 넘어갈 뻔"하기도 하지만, 그는 미혹되지 않고 그가 바랐던 것이 아닌 조선소 노동자의 상태로 되돌아온다. 그가 욕조에 몸을 담글 때, 그가 바랐던 것은 아니나 그에게 주어진 조선소 노동자라는 "현실은 간신히 그를 따라왔"(「북에서 온 사람」)는데 어쩐지 그는 지금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계속 바뀌어나가려고 하는 것 같다. 그는 눈사람을 물에 넣고 그것이 흩어지는 것을 본다. 이는 "어떤 /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이 곧 삶(죽음)이고, 그 전환의 순간에 시간의 흐름이 발생하며(무언가가 지나갔다, 무언가가 도래한다), 그러한 전환의 틈에 자각되는 것이 죽음(삶이 지나가고 있음)이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것을 소거의 형식으로 발화하는 것이 이 시집이 보여주는 성찰일진대, 그것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백장미의 창백"이다. 언뜻 백장미는 본래 창백한데, 백(白)이라는 색이 빨강으로 대표되는 '장미색'의 빠져나감이라 보는 한 그렇다. 그렇다면 백장미가 창백해지기 위해서는, 장미색이라는 일관된 상태에서 벗어난 장미의 색이 존재하며(또는 색의 장미가 존재하며) 그것이 색이 옅어지는 상태로 바뀌어가는 것이라는 상태의 전환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이때 동원되는 것은 장미의 색, 바래지는 색, 외부의 자극(풍화·비 등), 시간의 흐름...... 그런 무수한 상태의 변화 속에서 백장미는 창백해지고, 백장미의 창백이라는 소거된 말에 이르렀을 때 소거된 모든 시간은 모두 소환된다. 백장미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에서 백장미 삶의 이력을 함축하는 방식으로.

계간 문학과사회 선우은실 최재원백합의 지옥신미나백장미의 창백상태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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