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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월간 현대시 | 2024년 6월호(제414호)

개념예술과 AI 시

권보연 문학평론, 사이버텍스트 디자인

디지털 기술과 미디어가 인간의 언어와 텍스트 경험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고 실험한다. 주요 저술로 『게이미피케이션』, 『게임싱킹, 게임 디자이너처럼 생각하기』, 『공학으로 인문학 읽기(공저)』, 『뉴스 스토리텔링(공저)』 등이 있다. 렉쳐 퍼포먼스 「AI 공포라디오 쇼」, 「AI와 함께 시 조각하기」 등에 기획과 리드 공연자로 참여했고, 창작 작품 인터랙티브 픽션 「B사감: 더 뉴 월드」, 「햇살 아래서」의 스토리 디자이너를 맡았다. 「결과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AI와 시 조각하기에서 내가 만난 언어들」, 「AI를 문학 기계로 작동시키는 조건들」, 「AI 스토리텔링: 좀비와 유령 길들이기」 등의 글과 논문, 저술이 있다.

1. 사건으로서의 시


  2008년, 「이슈1(Issue1)」 이라는 이름의 시 선집이 인터넷에 전격 공개된다.1) 시인 3,164명의 신작이 3,785 페이지 분량에 수록된 역작이 발표된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방대한 작업 결과보다 더 놀랄만한 비밀이 밝혀진다. 선집에 이름을 올린 시인 중 누구도 편집자에게 작품을 보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사건의 내막은 이랬다. 개념예술가 스티븐 맥라플린과 짐 카펜터 (McLaughlin S., Carpenter J.)는 문학계에 충격을 던질 목적으로 직접 개발한 AI를 활용해 시를 생성했고, 허락받지 않은 시인들의 이름을 무단 전용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선집 공개 직후 전말이 드러나자 「이슈1」은 창작가, 비평가, 독자까지 합세한 논쟁으로 달아올랐다. 파장은 편집자들이 원하던 바였고 사건의 조기종결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호평과 악평 어디에도 결정적인 말을 보태지 않았다. 기록할만한 예술적 사건이라 여긴 다른 이에 의해서 댓글 창에 기록된 언어들이 선집의 후속편 「이슈2」로 묶여 공개되었을 뿐이다.2) 「이슈1」은 아이디어부터, AI를 활용한 시인과 시어의 도용, 이어진 후폭풍까지 전체를 하나의 사건으로 구성한 살아있는 시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슈1」에 대한 여러 의견과 혼란 가운데, 수록된 시의 내용을 따져, AI가 인간 시인보다 실력이 나은지 아닌지를 따지는 이는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사건으로서의 시’를 겪는 상황을 만나고 보니 ‘표현으로서의 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가 되기 위해 문제를 일으킨 편집자들의 작업 방식에 거부감을 드러낸 이들도 있었지만, 「이슈1」의 미적 도발을 옹호하는 의견도 많았다. 도용 당사자인 시인 베리 슈압스키(Schwabsky, B.)는 편집자가 의도한 문학적 사건을 통해서, AI 시대 인간 시인이 마주할 진짜 위기를 경험할 수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3) 기계 시인이 야기할 인간적 혼란이란, 기계가 인간 시인의 시적 표현력을 따라잡는 기술 품질과 별개의 문제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보충 설명을 해보자. 첫째, 「이슈1」은 나도 모르게 나로 행세하는 AI 시인의 출현을 시적 사건으로 증명해 보였다. 가짜 문학의 오명을 쓸 위험이 있지만, 「이슈1」의 도발은 존재하지도 않는 히로시마 원폭 피해 생존자를 실재 시인으로 내세워 장기간 대중과 평단을 속여 온 ‘야스사다 사기극(the Araki Yasusada Hoax)’과는 본질이 다르다.4) 무엇보다 「이슈1」에는 기망 의도가 없다. 발표 즉시 밝혀질 조작은 「이슈1」에는 숨기고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려는 목표가 있음을 보여준다. 편집자들은 생성 언어의 자기장에서 인간 창작자가 피할 수 없는 괴로운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불투명한 거짓’ 대신, ‘투명한 허구’를 택했던 것이다. 둘째, 「이슈1」은 기술에 의한 예술의 변화에 대해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게으른 현실을 비판한다. 인간만의 관점으로 기계의 쓰기 능력을 우열로 나누는 비교주의로는 AI라는 신대륙 탐험 자체가 어렵다. 필요한 것은 관습의 닻이 아니라 거친 바람을 감당할 돛이다. 「이슈1」이라는 사건에 휘말리고 보니, 비교주의는 AI의 성능 개선으로 해결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진짜 문제는 기계적 확률 언어조차 인간 관점에서 인식하는 고정 관념과 결부되어 있다. 흔적을 쫓다보니, 나에게 「이슈1」은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 되었고, 인간적 창작 원칙과 관습을 벗어난 AI 문학기계와 시인이 함께 만든 위기감과 해방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슈1」은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익숙한 의문, ‘기계가 인간만큼 인간적인 시를 쓸 수 있을까’는 그리 중요한 질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문제는 답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꼭 필요한 준비가 따로 있음을 경고하는 물음이 여기에 있다. ‘인간이여, 자신에서 시작되었으나, 내가 아니고(I1), 내가 만들지도 않은(I2), 제3의 내가 만든 시(I3)를 만나는 상황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세 번째, 「이슈1」은 ‘결과’로 소통해 온 문학 언어의 무게 중심을 ‘과정’으로 옮긴다. 수천 페이지 분량은 사건의 핵심 경험이 최종 작품을 독파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고 외친다. 언어 과잉을 앞세운 「이슈1」은 ‘읽지 않아도 경험 가능한 시’의 발명 문서다. 따라서 독특한 신발명품을 제대로 즐기려면, 필히 사건의 처음, 중간, 끝, 다시 댓글로 이어지는 소용돌이에 직접 휘말려야 한다. 사건으로서의 시는 결과 확인 시점이 아니라, 과정을 겪는 동안에 시로 작동한다. 2020년, 맥라플린은 개인 팟캐스트를 통해 「이슈1」이 대학 시절 수강한 케네스 골드스미스(Goldsmith K.)의 개념적 쓰기(conceptual writing)로부터 영감을 받은 작업이었다고 회고한다.5) 1960년대 본격화된 개념예술은 시각 분야에서 잉태되었으며, 예술가들은 대상의 예술적 지위가 내적 특성 보다 외적 맥락에 따라 결정되는 현실을 문제 삼았다. 진실의 틈을 파고들기 위해 이들이 택한 것은 최종 작품의 회화적 표현보다 정보적 타격을 가하는 과정이었는데, 그에 따라 사건의 아이디어가 강조되고, 눈에 보이는 형상 만들기가 미술가의 창작 본질이 아니라는 탈(脫) 결과적 입장도 나타난다.6) 개념예술은 하나의 미적 형식이 관습적으로 의존해 온 감각과 상황을 벗어나는 사건을 일으켜, 당연한 것은 없다는 진실을 일깨우는데 힘을 쏟는다. 골드스미스와 디워킨(Dworkin C.)이 주한 개념적 쓰기는 같은 노력을 시각에서 텍스트로 확장시킨다. 망막 의존을 극복한 개념미술처럼 의미를 벗어난 텍스트로 문학의 해방을 꿈꾸는 것이다. 이러한 전이 시도는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여겨진다. 선구적 작가 헨리 플린트(Flynt, H.)가 말했듯, 아이디어는 언어에서 탄생하고 성장하는 만큼 텍스트는 사건으로서의 예술을 구성하는 주재료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7)

  2011년, 골드스미스와 디워킨은 선집 『표현 저항(against expression)』을 발표한다. 언어의 기능을 의미전달로 한정하는 문학을 거부하는 작가의 실험적 작품을 모아, 기술 시대의 쓰기와 현대 예술을 연관 짓는 작업이었다.8) 이들은 개념예술을 추구하는 텍스트 창작에 ‘개념적 쓰기(conceptual Writing)’라는 이름을 붙였다. 개념적 쓰기는 어떻게든 책 또는 문학으로 인식되려하지만, 텍스트의 존재 이유를 더 이상 내용과 표현에서 찾지 않는 예술 행위를 뜻한다. 개념적 쓰기는 생성언어의 출현을 의식해 제안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사소통 · 최종 결과’로 짝지어진 전통적 언어 역할을 ‘사건의 재료· 언어가 일으킬 혼란의 전 과정’으로 낯설게 묶어냄으로써, AI 개념예술의 잠재성을 키우고 있다. 누구라도 언어 해방을 향한 열망을 품고 AI를 문학기계로 다룬다면 텍스트 기반 개념예술을 시도할 수 있고, 새로운 시인이 밝힌 생성언어 작동 계획서는 곧 ‘개념적 AI 시(conceptual AI poetry)’라는 사건의 선언이 되기 때문이다. 생성언어의 자기장은 인간과 AI가 만나는 공간으로, 그곳은 인간 보다 기계 언어의 힘이 우세하다. 힘의 차이만큼 특성도 중요한데, 무한 속도와 양으로 말을 만드는 AI는 데이터, 확률, 무한성에 기대는 존재로서 인간 언어의 심장에 해당하는 기억, 감정, 유한성이란 것이 없다. 생성언어의 자기장에서 언어와 내용의 질긴 고리를 끊는 사건을 일으키려는 시인이라면 두 언어의 동질성이 아니라 이질성을 절단기로 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언어의 자리바꿈과 AI 시


  여러 유형의 AI 작업을 이어가면서, 나는 점차 기계적 생성물에서 인간적 내용을 창조하려는 ‘의미혼종’ 시도에 피로가 쌓였다.9) 의미혼종은 때로 기계로부터 인간 관점에서 독창적으로 느껴지는 언어 표현을 끌어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간 창작자인 나는 기계와 함께, 마치 기계처럼 무한 속도와 규모를 감당해야 했고, 언어에 대한 감각 둔화라는 부작용 겪어야 했다. 새로운 돌파구는 AI가 패턴으로 말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마련되었다. 기계적 특징을 순화하지 않고, 되려 강조하는 ‘확률혼종’에 눈을 돌리자, 의사소통의 족쇄를 벗어나는 말썽 혹은 사건에 관한 아이디어들이 자유롭게 떠올랐다.10) 내 경험을 나눈다면, ‘확률혼종’은 인간이 AI라는 문학기계를 발명한 이유에 더 부합하는 용법이라고 판단된다. 인간 혼자 힘으로는 단단하게 다져진 언어의 대지에 균열을 내기가 어렵다. 새로운 틈을 만들려면 인간적 논리와 다르게 작동하는 기계, 예컨대 확률에 따라 언어 행위를 하는 AI가 필요했다. 나는 문학기계의 발명 동기를 AI 개념시 창작 원리로 적용했다. 의도한 바는 AI문학기계로 이미 존재하는 누군가의 말을 원래 맥락에서 다른 상황으로 자리바꿈하는 사건을 일으켜 낯선 목적과 형태의 문학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는 생성 AI가 있어야 가능한 도발로 나는 사건의 설계자이, 동시에 당사자가 되기로 했다. 구체적인 역할은 어떤 언어를 빌려서 어디로 옮길지 자리바꿈을 계획하고, 가져온 언어의 기술적 재배치를 위해 AI의 생성 방식을 구체화 하는 것이다. 이때 창작자의 역량은 자리바꿈이라는 아이디어에 집중될 뿐, 사건을 위해 빌려온 언어 재료나 가공법의 고유성에 연연하지 않는다. 워홀과 뒤샹이 특별한 사건을 위해 선택한 재료가 기성품 통조림과 변기였음을 기억하자. 자리바꿈이 제안하는 문학적 체험은 운동성, 시작과 끝의 변화 폭을 느끼는 것이며, 정지 상태에서 하나의 결과에 담긴 의미와 표현에 매달리지 않는다. 개념예술의 우산 아래, 생성언어의 자기장에서 자리바꿈한 기계 언어로 나는 ‘달라진 맥락이 곧 시’라는 주장을 펼칠 것이다. 사실, 이 주장부터가 기성품이다. “작가들에게 글을 쓰는 행위란, 언어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며 맥락이 곧 내용이다”라는 골드스미스의 말을 그대로 빌렸다.11)

  「자리바꿈: From Library To Somewhere (2024~)」는 한 언어가 최초 생산자A로부터 지시받은 고정 좌표를 무력화하여, AI를 이용해 다른 맥락으로 무단 재배치하는 개념적 쓰기 작업이다.12) 복사, 붙여넣기라는 비창의적 방법에 의해 원래 자리를 이탈한 언어는 기존의 정서, 기억, 방향, 감각이 부여한 고유함을 쉽게 잃는다. AI는 기계가 인식하는 사전적, 확률적 정보에 의한 자리바꿈을 수행하며, 예전의 의미와 가치를 함께 이동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작업 목표는 최초 생산자A가 정한 언어A′를 가능한 멀리 맥락 이동 시켜 언어A″를 더 새로운 감각에 정렬 시키는 것이다. 자리바꿈을 하더라도 언어 A′와 A″는 모두 주인 있는 말이다. 언어의 주인A는 개념적 쓰기를 시도하는 이와 더불어,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AI 개념시 「자리바꿈」의 공동 창작자가 된다. 「자리바꿈」의 바탕 언어는 2013년부터 10년간 국가 특허정보시스템 (KIPRIS)에 등록된 ‘도서관’ 관련 특허 26건이다.13) 바탕 언어 조합을 싱글, 듀엣, 앙상블, 심포니로 유형화 하고, ‘첫사랑’부터 ‘나 자신의 죽음’에 이르는 26개 이동 맥락과 매칭 한다. AI 문학기계는 언어 조합과 이동 맥락을 연결해 특허문서의 원래 의미를 해체하고 확률 언어의 감각으로 새로운 시를 생성하는 것이다. 작업 1부 ‘싱글’에서는 특허와 이동 맥락을 일대일로 연결한다. 이 경우, 1회 생성으로 탄생 가능한 시는 676 편이다. 2부 듀엣은 특허문서 1과 2, 2와 3처럼 두 개씩 짝지은 언어 조합을 26개 맥락으로 재배치시켜 8,540편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3부 앙상블은 3~5개 이하 기술 언어를 조합한 83,330 건이, 4부 심포니는 20~26개 조합에 의한 313,912개 언어 쌍이 이동 대상이 된다. 이 셈법에 따라 문학기계가 (26C1*26) + (26C2*26) + {(26C3+26C4+26C5)*26} + {(26C20+26C21+26C22+26C23+26C24+26C25+26C26)*26)}의 자리바꿈을 모두 마친다면, 완결된 책에는 특허청 문서에서 맥락 이동한 10,337,418 편의 AI 시가 채워질 것이다.


(1) 도서위치추적 기반의 도서관리장치 (14)무인전자도서관 운영 시스템 및 그 방법
(2) 도서관 구매도서 추천방법 및 이 방법을 수행하는 장치 (15) 빅데이터 기반의 도서관의사결정 지원 시스템
(3) 도서관 자료 관리 시스템 (16) 전자 도서관의 도서 신청 시스템
(4) 주차시설을 구비한 도서관 구조물 (17) 도서관 자료 비대면 제공 장치
(5) 홈 라이브러리앱과 지역 도서관을 이용한 도서공유 및 유통 시스템 (18)가상 도서관 운용방법 및 이를 실행하는 어플리케이션을 저장한 기억매체
(6) 스마트 단말기를 이용한 도서관 좌석예약 및 운영시스템 (19) 무인도서관 시스템
(7) AI 및 메타버스를 활용한 독서 및 도서관리 방법 및 시스템 (20) 영어도서관 온라인 리딩코칭시스템 및 학습방법
(8) 도서 실시간 배치확인이 가능한 도서관장서 관리시스템 (21) 스마트 도서관 시스템
(9) 도서관 서비스 시스템 (22) 나무용 도서관
(10) 인공지능을 이용한 도서관 장서 관리시스템 (23) 스마트 소셜 도서관 서비스 방법 및 시스템
(11) 감정인식을 활용한 도서관 회원맞춤형 도서추천 키오스크 장치 및 시스템 (24) 전자도서관 제공방법 및 시스템
(12) 도서관 출입 통제 및 좌석 관리 시스템 (25) 무인 도서관 운영방법
(13) 자율주행 스마트 도서관 장치 (26) 도서관 열람실 좌석 예약 시스템

표 1 도서관 관련 특허 기술 26건 (2013~2023)



(1) 첫사랑 (10) 너를 보내고 (19) 내가 노인이 되다니
(2) 깨어진 우정 (11) 이 넓은 우주에서 (20) 나의 강아지와 고양이
(3) 백일의 아기 (12) 우리 결혼했어요 (21) 탄생의 순간
(4) 마라토너 (13) 홈, 스위트 홈 (22) 졸업식
(5) 장례식에서 (14) 첫 수업 (23) 늙은 부부의 정(情)
(6) 토테이토가 집으로 온다 (15) 재회 (24) 내 고향
(7) 승진 (16) 월급 받는 날 (25) 합격했습니다!
(8) 엄마 (17) 전쟁이 일어났다 (26) 나 자신의 죽음
(9) 아버지 (18) 갑자기 찾아온 질병

표 2 자리바꿈 이동맥락 26건



  기계적 자리바꿈 경험 중에 나는 한편의 시를 더 잘 쓰고 싶다는 상승 욕망보다, 거대한 양과 무게로 존재하는 기존의 시들을 우회하고 싶다는 놀이 욕망을 강하게 느꼈다. 위대한 시인들이 아니라 도서관 기술이 되기 위해 이 언어를 탄생시킨 특허 발명가들에게 현기증을 선사하고 싶었다. 함께 자리바꿈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린다면 우리의 관심은 천만 편의 시에 대한 세세한 내용이 아니라, 자리바꿈이 일어난 사건 현장을 향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아이디어의 제안자, 실행의 설계자, 이 모든 변화 경험의 향유자를 기다리는 놀이적 어지럼증, ‘일링크스(ilinx)’를 경험한다. 흔들림과 추락을 긍정적 놀이 경험으로 간주하는 일링크스는 고요 대신 소음, 멈춤 대신 움직임을 추구하는 「자리바꿈」을 위한 문학 체험의 핵심이다. ‘생성 언어의 놀이화 (playfication)’는 AI 개념시의 중요 전략이 될 것이다. 예견이 현실이 된다면, 우리는 같이 AI라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미지의 궤도에 솟구쳤다 떨어지면서도 두려움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기 위해 기꺼이 언어적 사건의 일부가 되고자 할 것이다. 특히, 이 사건의 아이디어 제안자인 나는 바탕 언어와 결과 언어에 내가 직접 쓴 단어 하나가 없음에도, 사건 당자사로서 스스로를 시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특허청 도서관 요목에서 출발해 모험을 떠난 언어의 여정 곳곳에서 기계의 확률적 언어 행위에 반영된 나를 발견한다. 나는 과정 속에서 시에 새겨졌고, 시의 작동 논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자리바꿈」은 나와 AI가 함께 만든 우리의 시가 맞다. 모르는 사이 사건에 휘말린 특허발명자 53명의 감정은 다양하겠지만, 그들도 이 시가 자신과 무관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14) 「자리바꿈」 서문에는 충격에 대비하는 안내문을 실어야겠다. (1) 이 시집을 끝까지 읽으려 하지 마십시오. (2) 목차를 보는 것만으로 이미 어지럽다면 제대로 감상하고 있는 것 입니다 (3) 이 시집은 미완성입니다 (4) 완결판에는 10,337,418편의 시가 수록될 예정입니다 (5) 독자는 언어의 공동창작자 동의가 없어도 자리바꿈 규칙에 따라 시를 직접 생성할 수 있습니다 (6) 생성 규칙과 원천 언어 목록은 부록 페이지를 참고 하세요 (7) 아직 수록되지 않은 새로운 조합으로 자리바꿈 시를 생성한 독자는 다음 이메일로 시를 보내 주십시오. 공동 창작자로 기록하겠습니다. (8) 이 시집은 무료입니다. 그렇다. 안내문은 실행되기 전에 계획을 설명하는 것만으로 이미 실현되는 예술, 그래서 꼭 실행하지 않아도 되는 예술을 말하고 있다. 이 또한 AI 시대의 최초 사건이 아니다. 1969년, 개념예술가 로렌스 와이너(Weiner, L)는 ‘의도선언(Statement of Intent)’을 통해 (1) 작가는 작품을 구상한다, (2) 작품은 조작 가능하다. (3) 작품은 꼭 만들어질 필요가 없다는 신념을 이미 밝혔다. 15) 「자리바꿈」은 와이너가 오래전 미술관에 켜둔 특별한 불씨를 생성언어의 자기장으로 옮기는 중이다.



3. AI 시대, 나는 나쁜 문학기계와 놀이하고 싶다.


  사건이 되려는 시, 어지러운 과정을 겪는 시, 확률로 말하는 시, 기계가 대신 쓰는 시, 독창적이지도 않은 시, 읽지 않아도 되는 시, 심지어 쓰지 않아도 되는 시. 그간 시에 대해 배운 바에 따르면 「자리바꿈」은 좋은 시는커녕, 시가 아님 항목에 분류되어야 마땅하다. 시가 무엇인지, 어떻게 쓰고 읽는지를 아는 진중한 이가 무인도서관 시스템을 첫사랑 맥락으로 자리바꿈한 시 한편을 떼어 읽었다고 가정하자. 그는 특허 기술의 내용에 묶여있던 말이 AI의 힘으로 어디론가 떠난 사건 보다, 억지 맥락에 시어를 끼어맞춘 기계의 서툰 솜씨가 거슬린 것이다. 또한 그가 창작가의 권리를 중시한다면 특허 발명가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공동 창작자로 이름이 올라간 것을 문제 삼을 수도 있다. 인정한다. 나와 AI는 시간을 들여 조용히 감상할만한 좋은 시를 만드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좋은 시가 되지 못함으로 인해 개념적 쓰기 「자리바꿈」은 성공적이다. 좋은 시 되기에 실패하기를 바라고, 더 많은 이들이 함께 사건에 휘말리기를 원하는 걸 보니, 나는 나쁜 시인인 것 같다. 왜 어지러워지려 하는가. 그것은 익숙한 인간 언어와 기존 문학의 관습을 벗어날 때 탐험 가능한 낯선 세계를 향한 해방 욕구와 관련이 있다.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새로운 문학, 새로운 시인, 새로운 독자 발명에 필요한 도구가 필요하다. 예술가들은 AI를 특별한 도구로 전용해야 한다.



그림 1 자리바꿈 싱글플레이: 무인도서관 시스템 나 자신의 죽음 (부분)

전문 https://bit.ly/single_19


  자리바꿈은 아이디어 제안자가 AI에 특허 기술의 맥락과 용도를 과정 언어로 새기며 시작되었고, 프롬프트가 파놓은 언어의 홈을 따라 기계적 확률 언어가 응답을 흘려보내며 이어졌다. 나는 내용에 관한 생성 목표가 없었고, 더 멀리 자리바꿈 하는 언어의 위치 변화를 열망했다. 사건은 의도대로 흘러갔지만, 나는 절대자가 아니었다. 인간은 문학기계가 다른 이의 말을 모자이크로 인용한 과정 언어를 재료삼아 낯선 세계가 담긴 엽서를 보내주기를, 그의 확률적 회신을 기다리는 자에 가까웠다. 「자리바꿈이라는 사건의 당사자가 되었을 때, AI와 나는 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벗어나, 어느새 서로의 응답에 귀 기울이는 대화 상대가 되어 있었다. 나의 진술은 의심 대상이 되어야 한다. 생성언어의 소용돌이는 똑같은 경험이 아니라, 제각각 다른 출령임을 선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념예술로서의 AI 시에 접근하려면 저자에 의한 언어의 자리바꿈처럼, 독자와 비평가도 롤러코스터에 올라 직접 출발 버튼을 눌러야 한다. 문학적 신발명품은 수용자의 자리바꿈이 일어날 때 온전히 작동할 수 있다. 생성언어의 자기장에서 어지럼증을 목표하는 시, 이런 것도 시가 되는지묻기 위해 나는 나쁜 문학기계를 갖고 싶어졌다.



  그림 2 자리바꿈 듀엣: 무인도서관 시스템 + 도서관열람실좌석예약시스템 첫사랑 (부분)

전문 https://bit.ly/19_14_첫사랑


  골드스미스도 비슷한 상상을 했다. 그는 구글과 교류하며 위대한 시인의 빛나는 시어를 학습한 AI를 접했고, 이런 문학기계를 만든 이유를 질문한다.16) 엔지니어는 AI'좋은 시인으로 만드는 방법을 찾고 있다 답하며, 문학적 최고점에 있는 시를 완벽하게 익힌 로봇 앵무새 개발에 자신을 보였다. 문학기계의 꿈을 인간적 전통에서 좋은 시를 더 빨리, 많이 만드는 것에 둔다면 빅테크 기업은 이미 이루었다. 하지만 이때 골드스미스는 나쁜 AI’를 떠올린다. 더 장난스럽고 도발적인 언어로 사건을 일으키는 AI. 인간과 다른 논리로, 그래서 다른 세계를 보는 AI. 좋은 시가 뭔지 모르는 AI와 함께 시를 발명하는 장면을 그려보자. 우린 나쁘기 때문에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20245, 인간적 표현력과 의미전달력이 강화된 GPT-4o가 출시되었다.17) 옴니모델 품질은 기대를 넘어 절망까지 증폭시키고 있다. 그러나 자리바꿈에서 만큼은 신 버전이 더 좋은 파트너가 아니다. claudeGPT가 첫사랑, 자신의 죽음, 시까지 이미 글로 배운 AI라서 무인도서관이나 좌석예약시스템 기술로도 죽음과 사랑을 그럴듯하게 묘사했다고, 나쁜 AI라면 실험은 예상 경로를 더욱 벗어났을 거라고 아쉬워한다. 경험해 보니, 기존 언어를 참조해 언어를 둥글게 다듬는 좋은 AI’는 날것의 상황과 관점에 노출되고 싶은 나쁜 시인에게 추천 대상이 아니다. 뭘 모르고 싶은 시인에게는 덜 배운 AI가 좋다. 그래야 한 언어가 큰 원심력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주장, 가설, 실험은 AI 시대를 긍정한다. 문학기계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시인됨을 상상한 일이 없다. 지금 나는 나쁜 시인을 넘어 나쁜 AI까지 탐내고 있으니, 기술이 만든 희망의 징후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고요 속에 읽히는 시는 여전히 내 몫이 아니다. 나는 AI와의 대화로 어지러움을 느끼는 시 놀이를 원한다. 10,337,418번의 자리바꿈중에 어떤 독자가 이런 것도 시가 되는지직접 확인하게 되었다면, 나쁜 우리는 좋은 놀이를 발명했다며 흡족해 할 것이다.


  • 1)Stephen McLaughlin and Jim Carpenter, Issue 1, 2008. https://bit.ly/ISSUE_1
  • 2)Syd Sataiti, Issue 2, 2008 https://bit.ly/ISSUE_2
  • 3)Barry Schwabsky, ‘Lost as Food and Won as a Coast’, The Nation, 2, December, 2008. https://bit.ly/lostasfood
  • 4)Linda Sue Grimes, ‘Kent Johnson and the Araki Yasusada Hoax’, HubPages, 20, January, 2024 https://discover.hubpages.com/literature/The-Araki-Yasusada-Hoax
  • 5)McLaughlin, S., Podcast McLaughlin Radio Hour, Issue 1,  7, April, 2020. https://bit.ly/SteveMcLaughlinRadioHour
  • 6)LeWitt, S. (1967). Paragraphs on conceptual art, Artforum, 5(10), 79-83.
  • 7)Flynt, H. (1963). Essay: Concept Art, An anthology of chance operations.
  • 8)Dworkin, C., & Goldsmith, K. (Eds.). (2011). Against expression: an anthology of conceptual writing,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 9)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 생성언어비평의 대상에 관하여, 다문화콘텐츠 연구, No. 46, 37-59, 2023.
  • 10)같은 논문.
  • 11)케네스 골드스미스, 길예경, 정주영 옮김, 「문예비창작: 디지털 환경에서 언어 다루기」, 워크룸 프레스, 2024.
  • 12)이하 「자리바꿈」으로 쓴다.
  • 13)26개 도서관 특허 목록 https://bit.ly/53_word_owners
  • 14)26개 특허 발명자 53명을 칭한다. 발명자 목록 https://bit.ly/53_word_owners
  • 15) Lawrence Weiner, Statement of Intent, (1969), Public Freehold; Courtesy of the artist. https://bit.ly/44GZj4O
  • 16)Kenneth Goldsmith, “I congratulated them on the fact that they made a robot parrot a dead poet” Bad AI, Voice Over- Magazine for alternative discoirse, 2020. November, https://bit.ly/VOICEOVER_BADAI
  • 17)윤민혁, 2024년 5월 14일, 영화 'HER' 현실화하나…오픈AI, 사람처럼 보고 듣고 말하는 'GPT-4o' 공개, 서울경제 https://www.sedaily.com/NewsView/2D96ODCLD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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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준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고봉준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월간 현대시 고봉준 연민공생생명비인간자연관계 2025
류수연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 양안다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와 양안다의 사이, 그 틈 류수연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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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지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올 때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올 때 이은지 동물의 사육제 김기형의 다섯 편의 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떠올린 것은 ‘사육제’였다. 각각의 시에는 동물의 형상(양, 강아지, 새, 잉어)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동물이 아니거나 동물인 가면을 쓰고, 털로 뒤덮인 날짐승의 피부 아래 붉은 속살을 양껏 뜯어 먹는 사육제. 얼굴이라는 외피를 감춤으로써 평시에 보이지 않던 내면을 폭발시키는 행위, 겉이 아닌 속을 먹는 행위가 갖는 의례적인 성격을 떠올려보면 그러한 단순한 연상이 영 틀리지는 않은 듯하다. 가면의 힘을 빌려 존재의 영원불변할 것만 같은 오랜 속성을 전복시키고 그 운행을 잠시나마 뒤얽어보는 데서 오는, 천진하기에 파괴적인 사육제의 위력이 김기형의 시에서도 엿보이기 때문이다. 마침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의 소설에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지만 명료한 구절이 가로놓여 있다.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1) 민낯과 전혀 다른 속성을 띠는 듯하지만 민낯과 더불어, 혹은 민낯과 분리됨으로써 그 주인을 거꾸로 규정하기에 이르는 가면의 신비로운 성질은 화자와 독립된 존재로 등장하면서도 화자와 무관하지 않게 운용되는 동물들이 시 속에 존재하는 양상, 시로부터 행동하는 양태를 헤아려보게 한다. 시인의 첫 시집에서 인상적이었던 권두시 「자두 f」를 떠올려보면, 봉지가 뜯어져 “계단을 타고 다 터지면서 나타”난 자두가 “몸 전체로 힘을 주”고 “안으로 근육을 일으키”며 일거에 분출시키는 폭발적인 ‘힘’, 삼천원어치 자두를 봉지에 담아 어딘가로 보행 중인 화자와 완전히 무관한 운동성을 발산하며 자두와 화자의 역능이 역전되는 찰나를 포착하고 그 안으로 무한히 쪼개어 들어가고자 하는 시인의 집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2) 이 집요함은 손을 없게 하고 손을 “손이 아닌 것”3)으로 떼어내고자 하지만 완전히 그리할 수 없는, 손과 ‘나’의 관계 양상을 그야말로 물고 늘어지던 등단작 「손의 에세이」에도 선명한 자국으로 찍혀 있다. 한 마리 맹수처럼 으르렁대는 자두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손의 운동성은 금방의 비유가 상기하듯이 지극히 동물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 약동하는 생의 에너지를 품고 있으면서 인간 사회의 시계(視界)로는 온전히 예측할 수 없기에 흡사 무질서에 가까운 질서를 생성하는 동물의 움직임은 인간 민낯의 대행자이되 정물에 머무르는 가면의 역치를 비상한 수준으로 끌어올렸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성질이기도 할 테다. 오래전 사육제의 가면들이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꾸며내었던 것도 그러한 상상을 조형적으로 추구한 결과였을 테다. 「공사」에 등장하는 ‘사람’과 ‘개’를 살펴보면 김기형이 그리는 존재와 그 대행자의 관계 양태를 가늠해볼 수 있다. 공사로 무너지고 주저앉아 “누구나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지붕 없고 문 없는 집”에 살던 ‘그 사람’은 이제는 집의 “속살이 어떻게 잠들어 있는지 다 보”이는데도 “저 없는 문 열고 저 없는 문 닫”으며 거주자의 관성을 섬기고 있다. 반면 그가 키우는 ‘개’는 “화도 냈다가/꼬리를 흔들며 아저씨 목장갑에 털도 부비다가/어느 방으로 가야/그 사람 있는”지, 베란다는 어디였고 사료가 있던 곳은 어디인지, “꺾이고 내려앉은 집안”을 곧이곧대로 탐색한다. 그 사람은 분명 개의 주인이고 개 또한 주인에게 철저히 복종할 테지만, 눈앞의 현상에 즉물적으로 맞닿은 개와 달리 그에게는 한꺼풀의 관성과 관례가 입혀져 있다. 그는 이미 밖으로 훤히 다 보이며 안이 곧 밖이 되어버린 “집 밖, 돌무덤 밖으로 걸어 나와”서야 개의 이름을 부른다. 안팎이 뒤집힌 집의 민낯을 실컷 부비고 온 “개의 혓바닥으로 얼굴이 닦이고”(강조는 인용자)서야 “얼마나 오래 비워야 돌아올 수 있을까” 한마디 한다. 표지판 위 동물-대행자의 능동, 대행을 부과한 인간-주체의 피동이 시 속에서 얽히며 일으키는 주객의 역전은 표면상으로는 주체의 무기력으로 드러난다. 「한 가지」에서 세계가 기표로 이루어져 있음을 규정하는, “설명이 너무 크”게 박혀 있는 “표지판 위로 새는 그저 앉을 뿐”임을 일별하는 화자의 목소리에는 동경 비슷한 것이 묻어 있다. 기표의 의미는커녕 그 존재조차 모른 채 기표의 세계에 공존하고 있는 새가 표지판 위에 앉기도 하고 표지판 위를 날기도 하며 보이는 종횡무진은 화자가 “이런저런 자세로 (…) 가장 잘 맞는 도형처럼/콕 박”힌 지하철 안에서 각자 알아서 도형이 되고 서로에게 형틀이 되어 맞춰지는 사람들의 일사불란과 대비된다. 「자두 f」의 ‘자두’에 상응하는 “귤 하나”가 “주황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소파 아래 어두움 속으로 사라지는” 것에 화자가 마음을, 시선을, 즉 “영혼이 가는 길”을 빼앗길 때, 거기에는 어떠한 규정도 질서도 없이 생 그 자체에 닿은 운동성을 향한 경애가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의 피동은 대행자의 능동에 앞서는 것이자 다분히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귤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기에 앞서 “식탁 위로 귤 하나를 굴리”는 “나”가 선행한다. 주체의 피동을 대신 드러내 보여주는 귤의 운동이란 주체의 결행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한 가지도 등에 업고 가지 않”는 새와 “한 명도 새처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을 견주는 것도 어디까지나 화자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심지어 화자는 “날아갈 때는 가르는 창처럼 내 마음을 가르”는 새들조차도 날기 전에는 “기우뚱하게 걷”는다는 것을, 즉 중력의 예속에 놓여 있음을 목격한 바 있다. 이처럼 주체의 피동이 ‘능동의 피동’임은 “그 옛날 목동처럼” 양들을 대하는 「양들에게 고백하기」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한 마리의 울음이 얼마나 빠르게 번질 수 있는지, 조용한 마음으로 너희를 지키고 있지. 양과 나의 언덕처럼 드높은 우정을 하늘이 알고 있다. 양들이 내 앞에서 잠도 자고 이갈이도 한다. 내가 오래도록 바라온 일.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네. 나 너희에게 빚진 잠을 갚으러 왔다네. ― 「양들에게 고백하기」 부분 잠이 오지 않으면 양을 세는 출처 불문의 관습이 가리키듯이 양은 잠으로 빠져드는 행위의 대리자인바, 화자는 양들에게 잠을 ‘빚’지고 있다. 그런 동시에 화자는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며 “조용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키는 목동이기도 하다. 양들의 목동을 자처하기에 앞선 그의 삶에는 “죄 많은 자가 죄 지은 자를 (…) 두들겨” 패는 폭력에 관성적으로 동참했던 시절이 놓여 있다. 당시 그는 “얼굴을 까고 벗고 도마 위에 올려두었지만”, 참회를 스스로 대리하려던 화자의 노력은 어쩐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양들이 사는 들판으로 도망쳐온 것이 민낯을 벗겨 도마 위에 바치는 것보다 속죄로서 유효한 지점이 있다면,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조급하게 대리하기보다 양-대행자의 평안을 수호하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 화자를 비롯한 인간에게 주어진 지난한 “숙제”이기 때문일 테다. 죄와 폭력으로 얼룩졌을지라도 기왕에 몸을 담근 기표의 세계로부터 얼굴을 까 벗기듯이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으면서도, 양을 치듯이 기표 너머, 기표 바깥의 세계를 보살피는 일에 김기형은 발이 묶이고자 한다. 화자가 목동을 자처하는 일이 “세상을 등지지 않고 등지자고 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도망쳐온 세계의 도마 위에 여전히 무언가가 썰리고 있을지라도 양들에게 진 빚을 조금씩 갚아주는 일은 무용하지 않아 보인다. 기표 바깥의 세계(시)가 기표의 세계(현실)에 대한 속죄를 대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행은 그저 양들을 잠재우는 일처럼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민낯의 참회보다 훨씬 힘이 세다. 물속의 폭발 가면이 민낯은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고 새로이 살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숨죽여 지켜보면서, 가면 아래 민낯은 무엇을 도모하고 있을까.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민낯은 가면의 대행을, 민낯과 독립된 듯이 굴었을 때만 벌일 수 있는 난장을 가면의 뒷면으로부터 흡습하듯이 감지할 것이다. 민낯은 민낯과 가면 사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작은 틈을 매개로 눈과 코를 찡긋거리거나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자신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 대리자의 행위에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감응하고 있을 것이다. 민낯과 가면 사이의 좁은 틈을 하나의 세상으로 확장한다면, 이 감응은 결코 미세한 수준이 아니게 된다. 그 좁은 틈에서 벌어지는 일을 김기형의 시로 환치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시인이 하는 일이란 기표의 세계와 기표 바깥의 세계를 매개할 뿐 아니라 그 지점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장하는 일일 테니까. 「잉어가 와요」에서, 자신을 둘러싼 물(세계)을 모조리 삼켜 제 속을 물로 만들어버린 잉어의 형상은 두 세계를 매개하는 시인을 대신하여 새로 뱉어낼 세계를 뱃속에 저장하고 있다. 물을 삼켜 “불어 터진 입속에서 안으로도 밖으로도 가지 않고/둥둥 울리기만 하는 이명/메아리, 기척, 진동”을 머금은 잉어가 새까만 입을 벌린 채 “식탁을 덮쳐”올 때, 기표의 발화도 전달도 흩어지고 뭉개지는 그 뱃속 세계를 “감지”한 “우리”가 “침수하는 몸”이 되어 물속을 냉큼 유영하고자 할 때, 잉어는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잉어는 우리의 몸이 침수되기를 도와줄 뿐 아니라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아는 척하며” 화자가 쓴 문장을 제 속에 실어 “폭탄처럼” 터뜨린 뒤 부드럽게 뱉어낼 것이다. 나는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 아는 척하며 써요 꾹꾹 눌러쓰고 함께 하는 자들이라고 읽어요 맨 뒤의 문장이 잉어의 뱃속에 실려요 실려서 폭탄처럼 터져요 ― 「잉어가 와요」 부분 물속의 폭발은 그 파장과 파편을 견딜 만한 수준으로 유화시켜준다. 사육제의 난장이 의례에 불과하다는 사실 속에 용인되듯이 지금 이후의 문장, 여기 바깥의 문장이 당장에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충격을 잉어가 삼켜낸다. 물로 채워진 잉어의 뱃속에서 터진 문장은 기표의 세계가 모르는 질서, 아직 만들어본 적 없는 형상으로 꿈결처럼 일렁이고 있다. “내려오지 않는 별들이 하늘에 무수한 것은/그곳에/지어졌기 때문”이듯이, 잉어의 뱃속에는 “처음 글씨를 배울 때”처럼 “순서를 가지지 않고/멋대로 쓰”인 글씨가, “엎어진 물”에서 일순 드러나는 “형상”처럼 아직은 이곳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세미한 소리」). 시인이란 뱃속이 흡사 일찍 온 미래의 소용돌이와 같이 된 잉어를 도마 위에 놓이지 않게 연못에 잘 풀어놓는 이다. 가끔 수면 위로 올라온 잉어의 뻐끔거리는 입속에서 현실이 모르는 문법으로 그려지는 글씨들을 발견하고, 몇 마디 문장을 먹이처럼 던져준 뒤 다시 물속으로 돌려보내는 이다. 물속을 자유로이 헤엄치는 잉어의 뱃속에서 자신이 던져준 문장들이 소화되면서 나는 폭발음이 이따금씩 물의 저항을 뚫고 귓전에 닿을 때, 그 소리는 지극히 ‘세미’하지만 결코 미약한 것이 아님을 퍼뜩 알아차리는 이다. 먼 물속의 폭발을 제 발밑의 지진처럼 감지하는 일, 세계 너머의 난장을 대행하는 이들을 기르고 보살피는 일을 자처하면서 끈질기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이가 김기형이다. 그는 그렇게 “불화도 분노도 없는 고요한 싸움”4)에 끝도 없이 매진한다. 1) 무라카미 하루키(홍은주 옮김), 「사육제(Carnaval)」, 『일인칭 단수』, 문학동네 2020, 169쪽. 2) 김기형, 「자두 f」, 『저녁은 넓고 조용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니』, 문학동네 2021, 13쪽. 3) 김기형, 「손의 에세이」, 같은 책, 48쪽. 4) 안희연, 「기형의 시」, 같은 책, 120쪽.

월간 현대시 이은지 김기형사육제동물능동성폭발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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