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2024년 가을호(제147호)
오려 쓰기 오류 쓰기
오려 쓰기 오류 쓰기 1)
습격
코끼리 무리가 차도를 가로지른다. 줄지은 차들은 크고 작은 코끼리가 길을 다 건너기를 기다린다. 한 개체는 차도 한가운데 서서 무리를 다 보낸 뒤, 차들을 향해 고개를 크게 움직이고 마저 길을 건넌다. 인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신사 코끼리로 유명해진다. 큰 오리 한 마리가 도로를 걷다 하수구를 점프하여 지난다. 뒤따르던 아홉 마리 새끼 오리도 힘껏 뛰어보지만 하수구 구멍으로 줄줄이 빠진다. 인간 구조대가 하수구 아래로 내려가 새끼 오리들을 한 마리씩 찾는다. 물에 쓸려 간 마지막 새끼 오리가 한참 걸려 구조되고, 내내 소리 내어 울던 큰 오리는 다시 새끼 오리들을 데리고 수풀로 사라진다. 야생동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으로 이런 영상은 널리 퍼진다. 관광객이 떨어뜨린 휴대폰을 건져 올려주는 야생 벨루가와, 휴대폰이 ‘신상 조개’인 줄 알고 바위에 신나게 찧어대는 해달 영상도 있다. 똑똑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인간의 사물을 든 자연 속 동물의 ‘해맑은’ 모습은 오늘날 지구의 다정을 기분 좋게 바라보게 한다.
올해 여름에는 해안에 나타나는 해파리의 수가 크게 늘어 이슈가 되었다. 해수욕을 즐기다 해파리에 쏘이는 사람이 많아져 피서객이 줄고, 그물을 상하게 하는 해파리 떼 때문에 조업이 중단되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언론 보도에서는 해변에서 큰 뜰채로 해파리를 건져 올리는 안전 요원의 모습과 모래 구덩이에 쌓인 해파리들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었다. 여러 후기 글, 유튜브 영상에서도 초점화 된 이런 장면들은 주로 ‘공격’ ‘습격’ ‘피해’ ‘수거’ 같은 말과 나란히 있었다. 여름 바다는 ‘해수욕장’, 바다는 ‘어업 공간’, 그곳을 ‘습격’한 해파리들, 그로 인한 ‘피해’, 추가 피해를 줄이기 위한 ‘수거’ 작전. 길을 건너는 코끼리나 하수구에 빠진 새끼 오리들, 휴대폰을 부수는 해달은 ‘신사’나 ‘신상 조개’ 같은 비유적 언어와 함께 아름답고 귀여운 공존의 예로 코드화된다면, 바다에 가득한 크고 붉은 해파리는 공존할 수 없는 제거의 대상으로 언어화되고 이미지화된다. 바다 수온이 상승하면서 해파리의 서식 영역이 확대되었고 그 결과 인간과 서식 영역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런 표현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파리는 의미를 입는다.
수년간 인간중심주의를 반성하고 생태주의적 시선으로 현실을 마주할 것을 제안하는 지적이고 실천적인 작업이 이어져왔다. 이 작업들은 인간과 자연, 문명과 야생, 지적 생물과 비지적 생물 사이의 구분과 분류, 가치 분배의 프레임을 반복해온 언어들 대신, 모든 것을 나란히 두고 함께 있음에 관해 사유하는 언어를 발명하고자 했다. 보기에 흐뭇한 ‘공존’의 영상들은 그러한 언어를 공유하고 축적하고자 하는 의도와 연결되어 흐뭇함 이상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하지만 고통을 느낄 만큼 발달한 신체나 감정과 언어를 공유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인 생물에 대하여서만 혹은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만 권리와 공존을 이야기하기도 하는 언어 속에서, 한번 자리하여 오래 명맥을 이어온 프레임의 힘은 여전하기도 하다. 구분하고 분류하고 가치를 배분하는 인간 언어의 프레임 그 안에서 코드화된 언어들은 여전히 특정한 방법으로 관계 맺으며 사유와 상상의 범위를 구조화한다.
김혜순은 ‘여류 시인’이라는 호명이 이루어지는 프레임으로부터 분리되어 ‘여성 시인’이라는 코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호명된 시인이다. 시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김혜순은 적극적인 비평 활동을 통해 새로운 코드화 작업에 직접 참여해오기도 했다. 그러한 궤적 속에서 그의 시는 ‘여성시’ ‘여성성’ ‘여성적 글쓰기’ 등 ‘여성 시인’과 관계된 여러 언어들와의 결합 속에서 읽혀왔다. 새롭게 발명되고 발견되어야 할 이 언어들을 어떤 내용 혹은 형식으로 마주하고 또 어떤 어휘들과의 관계망 가운데 구성할 것인가를 물을 때, 김혜순의 시는 구체적인 방향을 제안해주는 장소로서 거듭 발견되었다. 프레임을 재-설정하고 그 안에 구체적인 코드값을 부여하는 작업에서 그의 시는 그 자체로 ‘여성성’을 발명하는 ‘여성시’이자 ‘여성적 글쓰기’의 한 모델로서 이름 불렸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새로운 언어를 만나는 일에 집중하는 가운데에도 김혜순의 시는, ‘여성 시인’ ‘여성시’ ‘여성성’ ‘여성적’ 등의 언어를 코드화하기 위한 기본 코드로서 ‘여성’ 혹은 ‘여자’라는 단어 자체를 바라보면서, 그것으로부터 오래되고 익숙하고 또 여전한 감각을 직시해내고, 그것을 끝내 달라지고 새로워지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 조건이 무엇인지를 질문해왔다. 그의 시가 거듭 사용하는 ‘여자’라는 단어는, 그 단어에 오랜 기간 새겨지고 반복되어온 이미지, 경험, 신체, 상상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넘어서기 위해서뿐 아니라, 그 비판의 작업 속에서도 무언가 반복되고 있지 않은지를 켜켜이 살피려는 이중의 목적 속에서 씌어진다. 이를테면 김혜순은 ‘여자’라는 단어로 시를 꾸려가면서 그 단어와 그것을 사용하는 자신의 언어 체계를 들여다보는 메타적 작업을 동시에 진행한다. 코드는 논리와 상상의 대상이 될 때에도 언제나 현실에 발붙인 언어이고, 시의 언어와 시인 역시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코드는 어떤 반복 속에 있어왔는가, 자신의 ‘여자’는 무엇을 반복하기도 하는가, 그 반복을 관통하는 권력은, 경험은 혹은 감정은 어떤 것인가. 그런 복수의 질문을 던지고 또 경유하면서 김혜순의 시는 ‘여자’라는 언어의, ‘여자’를 구분하고 분류하고 배분하는 언어 구조의 오류를 오류 자체로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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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언어에서 오류는 무수한 코드로 세분되어 있다. 그 단순하고도 복잡한 언어 체계 내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많고, 오류의 양상은 서로 다르며, 해결하기 위한 접근법도 무수히 다르기 때문이다. 컴퓨터 언어를 이해하는 일은 그것을 어떻게 조합하여 실제 기능으로 실행시키는가와 더불어, 오류 상태를 어떻게 인지하고 구조적으로 파악하며 해결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오류 코드는 언어의 외부에서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내부에서 그 일부로서 구조 전체의 작동 및 오작동 가능성을 지시한다.
김혜순의 시에서 세계는 어떤 오류가 반복되는 중인 곳이다. 첫 시집부터 근작인 열네번째 시집까지 시간을 가로질러 그의 시에는 뺨을 때리고 뺨을 맞는 이들이 반복하여 등장한다. 인물을 바꾸어 되풀이되는 이 장면은 왜 맞아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는 이의 혼란과 이해 없이도 때릴 수 있는 이의 기묘한 우월감을 거듭 시의 복판으로 부른다. 여기에서 오류는 맞는 이와 때리는 이 누구도 왜 이 장면이 반복되고 있는지, 무엇이 ‘문제’이고 ‘잘못’인지를 “기억조차 할 수 없게 되”(「몰매」, 『별』)어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공백이 발생하는 그 오류의 지점에서 김혜순의 시는 웃음소리를 낸다. ‘와하하’ 하는, 통쾌하게 입 커지는 소리가 아니라, “낄낄낄”(「제목은 가뭄」, 『별』), “키득키득”(「사랑에 관하여」, 『별』), “깔깔깔”(「국사공부」, 『별』), “힛쭉힛쭉”(「진실」, 『별』)과 같이 감추고 내리누르는 소리이다. 첫 시집에 이어 두번째 시집까지 이어지는 그런 웃음의 자리에는 “낄낄거리며 나를 끌고 가/가로등 아래에 패대기치”(「殉葬」, 『허수아비』)는 사람과 “달려와 내 눈깔을” 찌르고는 “깔, 깔깔, 깔 흩어지” (「敵 1」, 『허수아비』)는 “아이들”처럼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길 좋아하는 이들의 비열이나 “자, 같이 웃어요. 급히 웃으라니까요. 웃기라도 해야잖아요?”(「말」, 『별』) 스스로 명령하며 세계의 폭력을 자조적으로 견디는 이들의 모멸이 있다. 그 비열과 모멸로부터 오류를 읽어낼 언어를 찾아가면서 김혜순의 시는 “키득키득/키득/당, 시, 늬, 내, 장, 은, 파, 라, 쿤, 너, 무, 굴, 멌, 어/당, 시, 늬, 내, 장, 은, 노, 라, 쿤, 황, 다, 리, 야”(「사랑에 관하여」, 『별』) “비명을 감추고/한껏 웃어보려고 입술을 비틀며/시궁창 같은 사연”(「사연」, 『허수아비』)을 읽어내려는 시도를 반복한다.
그러나 “〈A가 좋아〉라고” 말하면 ‘B’가, ‘C’가, ‘A’가 달려와 둥 그런 순서대로 ‘나’를 때리는 세계(「몰매」, 『별』)에서 오류를 읽어낼 언어는 발견될 수가 없다. 애초에 무엇이, 어떻게, 왜 잘못된 것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언어화하여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사실을 사실로서 말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무엇이 ‘사실’이고 ‘잘못’인지를 결정하는 철저한 언어의 통제 속에서 정확한 언어를 발화할 수 도, 정확한 언어로 읽힐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곳, 세계 제일의 창작소/끝없이 에피소드들이 한 두릅 썩은 조기처럼/엮어져 대못에 걸리는”(「그곳 1」, 『지옥』) 곳에서 “드디어 발가벗기고 매 맞고/무거운 이야기를 옷인 양 입고/몸 위로 가득 글씨를 토하고야”(「그곳 2—마녀화형식」, 『지옥』) 마는 이들은, 주어진 언어만을 ‘글씨’로 쓸 수 있는 가운데 ‘사실’의 언어를 “─님금임 는귀 귀나당 귀”처럼, “내 입 속에 다시 처넣고/내 입술을 비틀어 닫”(「되돌아오는 말」, 『허수아비』)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쟁보다 더 무서운/입다물고 귀 막은 적막강산이”(「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허수아비』) 되어, “빈 들판에” 으름장 놓는 “허수./아비”이자, 실수(實數)가 아닌 ‘허수(虛數)’, 그것을 세우고 입히고 거는 ‘아비’가 구축한 “침묵에게 당”(「敵 2」, 『허수아비』)하면서, 김혜순의 시는 언어 없는 상태에 놓인다.
오류가 무엇인지 알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며, 해결할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에서도 여전히 오류인 경우가 있다. 오류를 인지하고 구체화하는 언어가 ‘실행’의 단계에 놓이지 못하는 때, ‘실행’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일 것이다. 김혜순의 시는 세계의 비루를 알고,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자신이 왜 어떤 일을 어떻게 할 수밖에 없으며 해야만 하는지를 찾고, 언어화되지 않은 형태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지만, 그것이 언어로, 언어를 통해 실수(實數)로 실행되지는 않는 상태에 공간적으로, 또 시간적으로 갇힌다. “앞에서 벽이 다가온다/뒤에서 벽이 다가온다/그 가운데 내가 까마득히 매달려/흔적 없이 사라졌다가/다시 너에게 벽이 될 내가 매달려” (「 벽이 다가온다」, 『음화』), ‘낄낄’ 웃고 ‘침묵’하는 자신 역시 언어화되지 않은 오류의 일부로서, 오류를 재생산하면서, “리플레이, 리플레이, 리플레이”(「또 하나의 타이타닉 호」, 『달력』) ‘벽’을 수평으로 수직으로 물려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폐쇄된 오류의 복판에서 김혜순의 시는 입속에 갇힌 언어 대신 끝내 무엇을 어떻게 분출해낼 것인지를, 세계의 언어에 어떤 ‘답장’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 고민 가운데에 “코끼리 부인”이 있다.
네가 보내온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코끼리 한 마리 풀어보낸다/얼마나 증오가 깊어야/두 눈동자 사이/미간에서 팔이 돋아나/통나무 둥치같은 것/마구 감아올리게 되는지//맷돌 같은 어금니로 무시무시한/웃음을 갈아 삼키면서/탱크처럼 아무거나 밟아 터뜨리고/꿈틀거리는 것이면 무엇이건/감아올리게 되는지//얼마나 절망이 깊어야/몇날며칠 머리를 받치고/눈물을 받던/잿빛 베개가 두 귓가에 들러붙어/펄렁거리게 되는지/네가 보내온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사방에서 날아오는 소문의 화살이/귀찮아 죽겠다는 듯/두 베개를 연신 펄렁거리는/코끼리 한 마리 풀어보낸다/코끼리 발자국 닿을 때마다/글자들이 마구지워진다//다시 또 얼마나 숨 막고 기다려야/앙다문 입술 밖으로 불현듯/불멸의 상아가 치솟게 되는지/글자들의 숲속에 구멍 뻥뻥 뚫린다//이제 눈물 방울 얼룩진 편지를 찢어버리련다/그리고 창문 열어 코끼리처럼 딱딱하게/들어찬 잿빛 연기도 날려보내련다/아, 그러나 이 뾰족한 상아를 입가에 매단 채/어떻게 거리로 나가지?
—「코끼리 부인의 답장」(『사랑』) 전문
‘너’의 언어 앞에서 ‘나’는 깊은 증오와 절망의 힘으로 ‘너’의 글자들을 지우고, 글자에 구멍을 “뻥뻥 뚫”어 그 ‘허수’의 텅 빔, 혹은 복자(伏字) 같은 언어 간섭의 흔적을 물리적으로 새겨 넣으려 한다. 그럴 수 있는 거대하고 힘이 센 신체로 ‘코끼리’를 상상해내는 ‘나’의 전략은 그러나 ‘너’의 편지에 “눈물 방울 얼룩”을 남기거나 편지를 찢어버릴 따름이다. 코끼리의 거대한 몸은 “잿빛 연기”로 흩어져버리고, 코끼리의 흔적은 “다시 또 얼마나 숨 막고 기다려” 돋아난 “뾰족한 상아”로만 ‘나’의 입가에 남아 있다. ‘나’는 이때 상아를 단 입으로 무언가를 ‘말’하는 대신, “이 뾰족한 상아를 입가에 매단 채 어떻게”든 “거리로 나가”는 방식으로, 그 ‘뾰족함’ 자체를 ‘너’과 세계의 ‘거리’에 보이는 것으로 끝내 ‘답장’을 ‘보이고자’ 한다. 얼굴과 상아와 나가겠다는 마음을 다 준비해둔 상태에서 김혜순의 시는 다시, “어떻게 거리로 나가지?”라며 ‘실행’을 가능하게 할 방법을 묻는다. 이때 물음 속에서 연기로 흩어진 ‘코끼리’를 그는 “코끼리 부인”으로 호명한다. 시의 제목인 “코끼리 부인의 답장”에만 슬며시 적힌 이 ‘부인’이라는 단어는 ‘여자’ ‘어머니’ ‘딸’ 등의 단어로 옮아가면서, 김혜순 시의 언어적 세계와 세계에 대한 언어적 응전의 방법론의 뾰족한 상아가 된다.
‘실행’이 되지 않는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프로세서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닌지 체크하거나, 기체(機體)가 놓여 있는 환경 자체를 점검해야 한다고 한다. “내 코끼리마저 파먹어치울 것들”(「나는 고것들을 고양이라 부르련다」, 『사랑』)로 가득한 세계의 복판에서 “두꺼운 자물쇠로 잠긴 저 푸른 고막이 통치하는 나라”가 “무섭다”(「티티카카」, 『거울』)라고 하면서, 김혜순의 시는 스스로의 언어가 언어를 ‘실행’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지, ‘실행’을 위한 단계에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한다. 자신이 ‘실행’하고자 하는 것을 위한 조건들을 톺아보면서, 코끼리 ‘부인’의 상아를 가지고서. ‘여자’ ‘어머니’ ‘딸’과 같은 단어들은 ‘오류’의 일부로서, ‘오류’를 해결하기 위한 뾰족한 출발점으로서 김혜순 시의 중심이 되어간다. 이유 없는 ‘죄책감’에 늘 뺨처럼 시달리는 방식으로, 그러나 그러한 감정마저도 ‘오류’의 일부임을 알면서.
미치게 하는 말
김혜순의 시는 그 첫 시작에서부터 신체적·정신적·감정적 폭력을 당하는 위치에 대한 감각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그 위치는 여성의 위치와 겹쳐 있지만, 위치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한쪽의 특질보다는 폭력이 반복되는 관계 자체의 기이한 특성이었다. 폭력이 아닌 ‘사랑’의 관계에서도 그 기이함은 계속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관하여 나누는 대화에서, ‘사랑’으로 주고받는 언어에서 언어의 발신자와 수신자는 언제나 ‘문답’ 관계나 주종 관계, 포식자–피식자 관계, 선후 관계, 미숙–발달 관계 등 불균형의 관계에 놓여 있다. 근본적으로 대결의 구도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그 기울어짐은 “애벌레한마리와애벌레한마리가애벌레사랑을하는데애벌레가나비가되어도애벌레처럼사랑할까애벌레를벗어놓고나는날아오른다신나게애벌레를알아볼까나비가애벌레는껍질일까애벌레를벗어놓고너도날아오르는군애벌레는어머니일까아들일까애벌레두마리와나비두마리는어떻게서로사랑을해결할까”(「사랑에 관하여 2」, 『허수아비』) 같은 질문처럼 숨 가쁜 물음으로 반복된다. 이런 물음에는 스스로 결정하기보다 주어지거나 자동적으로 발생해버리는 관계의 구도에 거듭 묶여 있는 자의 난처와 곤혹이 담겨 있다. 김혜순의 시가 그러한 ‘대결’의 구도에 계보의 문제를 더하여 반복을 시간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은 ‘딸’과 ‘엄마’ ‘어머니’에 대해 말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거울 안에 어머니가 앉아 계시고/거울을 열고 다시 들어가니/그 거울 안에 외할머니 앉으셨고/외할머니 앉은 거울을 밀고 문턱을 넘으니/거울 안에 외증조할머니 웃고 계시고/외증조할머니 웃으시던 입술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니/그 거울 안에 나보다 젊으신 외고조할머니/돌아앉으셨고/그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또 들어가니/또다시 들어가니/점점점 어두워지는 거울 속에/모든 윗대조어머니들 앉으셨는데/그 모든 어머니들이 나를 향해/엄마엄마 부르며 혹은 중얼거리며/입을 오물거려 젖을 달라고 외치며 달겨드는데/젖은 안 나오고 누군가 자꾸 창자에/바람을 넣고/내 배는 풍선보다/더 커져서 바다 위로/이리 둥실 저리 둥실 불려다니고/거울 속은 넓고넓어/ 지푸라기 하나 안 잡히고/번개가 가끔 내 몸 속을 지나가고/바닷속에 자맥질해 들어갈 때마다/바다 밑 땅 위에선 모든 어머니들의/신발이 한가로이 녹고 있는데/청천벽력./정전. 암흑천지./순간 모든 거울들 내 앞으로 한꺼번에 쏟아지며/깨어지며 한 어머니를 토해내니/흰옷 입은 사람 여럿이 장갑 낀 손으로/거울 조각들을 치우며 피 묻고 눈감은/모든 내 어머니들의 어머니/조그만 어머니를 들어올리며/말하길 손가락이 열 개 달린 공주요!
—「딸을 낳던 날의 기억─판소리 사설조로」(『허수아비』) 전문
‘나’는 출산이라는 신체적·정신적·감정적 경험을 매개로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연쇄를 상상적 계보로 바라보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유사성을 통해 경험을 연결된 것으로 인지하는 것뿐 아니라, 마주 본 두 거울이 서로를 비추어 무한히 반복되는 똑같은 상처럼 특정한 신체 이미지가 원근법을 가장한 평면 위에서 반복되고 있음을, 자신이 낳은 “공주” 역시 출생의 순간 이미 그 평면 속에 놓여버릴 수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다. “피 묻고 눈감은/모든 내 어머니들의 어머니/조그만 어머니”인 아이는 ‘어머니’로 호명되는 존재들의 명맥 속에서 첫 이름이 불리는 자이자, 그 자신의 미래를 ‘어머니 되는’ 과거에 저당 잡힌 ‘딸’이다.
그러나 이 계보학적이고도 평면적인 연쇄에 관한 인식에 머무는 대신, 김혜순의 시는 그 안에서 다시 반복되는 기이한 관계성과 반복되어온 것을 초과하는 다른 관계, 혹은 다른 언어적 가능성을 본다. ‘거울’ 속, 없는 깊이를 가로지르는 이미지는 ‘사실’을 비추는 것이기보다 몸의 범위를, 몸을 바라보는 시야의 폭을 결정해온 언어 구조의 시간을 비춘 것이고, 어떤 언어는 그러한 구조 자체를 다른 시선으로, ‘답’이 아닌 ‘오류’로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시야를 좁게 가져라/저 까만 우물을 향해 투신해라/영혼을 아무 데나 흘리고 다녀선 안 된다”, 정답처럼 명령과 금지의 메시지를 건네던 “엄마”의 “말씀”은 “그래서 나도 엄마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자동화된 자기 인식으로 연결된다. “어린 자식의 시야에 칸을 지르고/널푸른 영혼에 금을 긋고/우물을 파는/자못 교훈적인 엄마가 되”(「엄마」, 『허수아비』)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나’는 “어제 들은 말을/ 내일 또 내가 지껄이고/내일 한 말을 어제 또 듣게 되리라”는 체념을 어쩔 수 없는 전망처럼, 약속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에게 “어린 자식”은 그러한 전망을 상속받은 적 없는 개별의 신체, “여기/갸우뚱거리며/엄마 배고파”라고 말하는 낱의 상태를 상기시킨다.
‘배고프다’라는 기초적이고 단편적이며 꾸밈없는 자기표현은 ‘나’에게 “처음 들어본 소리”(「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더니」, 『지옥』)처럼 ‘말씀’ 이전의 감각을 휘젓고, ‘거울’에 비친 겹겹의 신체가 어떤 ‘말’들에 갇혀 자신의 상상에, 전망에 도착했는가를 추적하게 한다. 그 단순한 ‘배고픔’이 ‘나’로 하여금 어떤 신체들을 ‘먹을 것’으로 제공하는 ‘모체(母體)’의 역할과 ‘엄마’라는 호칭에 머물게 할지라도, 배고픈 신체 자체는 그것을 “조그만 어머니”로 칭해버리는 오랜 서사 구조, 그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자동 연결되는 이미지 자체를 의문에 부치기 때문이다. ‘말씀’을 경유하여 ‘거울’을 보기 전에, 애초에 ‘거울’에 비친 상으로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기 전에 개체는 ‘처음’ 어떤 신체감각을 간직하는가. 어제에서 내일로, 내일에서 어제로 동그랗게 순환하는 언어의 복판에서 ‘나’는 그런 ‘처음’을 기억하거나 회복해낼 수 없지만, 끝내 상상해보려는 작업을 개시한다. 김혜순의 시는 스스로도 호명하는 ‘어머니’ ‘딸’ ‘여자’ 같은 언어가 특정한 ‘말씀’들을 입고 있는 코드라는 사실, 그 코드가 활용되어온 시간의 궤적, 코드화가 지운 것은 무엇이고 ‘처음’으로 돌아가 복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 방법은 무엇인가를 복합적으로 살피면서, 1) 세상이 반복하는 ‘엄마’와 ‘딸’과 ‘여자(女子)’ 2) 자기 안에서 반복되는 ‘엄마’와 ‘딸’과 ‘여자’ 3) 반복이 중단되는 미래의 ‘엄마’와 ‘딸’과 ‘여자’, 세 가지 시선의 층위를 각각의 단어에 겹쳐 단어가 하나의 상에 머물지 않도록 한다. 거울의 평면은 그런 ‘불일치’를 통해서 그 자신의 오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김혜순 시의 궤적을 거칠게 정리한다면,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는 연극적인 무대 위에서 인물이 겪는 것들에 집중하고,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畫』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은 그 인물의 배경이 되는 무대의 조건을 파악하는 것에 집중하며, 『불쌍한 사랑 기계』부터는 인물에 배경이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 인물의 서사 자체가 어떻게 ‘무대화’되어 있는지를 살핀다. 이 궤적은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에서 본격적으로 ‘여자’ ‘딸’ ‘엄마’를 하나의 ‘역할’로 바라보고 그것의 배경을 살피면서, 동시에 ‘역할’에 대한 자신의 감각이 어떻게 배경의 논법에 종속되어 있는지를 검토하는 작업으로 나아가는 것과 맞물린다. 김혜순의 시는 “오늘밤 자정 뉴스는 오십 명의 넥타이 맨 남자들을 보여주었지만/여자들이 맡은 배역은 불에 타 죽은 아이를 껴안고/몸부림치며 우는 역할뿐”(「물 속에 잠긴 TV」, 『달력』)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 ‘사실’에는 “수평아리는 모두 죽여 참새구이집으로” 보내고 “암평아리는” “키워서 잡아먹”기 위해 “모두 기숙사로”(「엄마는 깃털 샘인가 봐요」, 『달력』) 보내듯 “다만 허공에 주형을 뜨듯 찍어보는 육체의 얽힌 형식이 있을 뿐”(「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달력』)이라고 말한다. ‘사실’을 답이나 약속이 아닌 ‘형식’의 문제로 바라보는 이 비평적 시선은, ‘형식’을 표면적 현상 혹은 실천의 차원을 넘어 ‘남자’와 ‘여자’, ‘수평아리’와 ‘암평아리’를 구분하고 분류하며 가치 분배하는 언어 구조 전체의 오류로 바라본다. 그 ‘형식’은 언어의 방식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언제나 언어를 매개로 기억과 계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메아리처럼” 자꾸만 되돌아오는 흔적으로 ‘형식’은 ‘나’에게도 새겨져 있어, ‘나’는 “나이 먹어서도” “이제 갓 암컷이 된 새” “그 새파란 시절로,/그리로 자꾸만 돌아가”(「메아리가 갔다가 오는 만큼, 그 만큼」, 『달력』) 스스로의 몸을 ‘암컷’으로 바라본다. “내 몸에 보초를 세우”고 “밖으로 나갈 수 없”게 하며 “나를 자꾸 상처로 가두”는 ‘너’의 언어를 경유하여, ‘나’는 자신의 몸을 “무늬 새겨진 몸”으로 인식한다. ‘여자’ ‘암컷’ ‘어머니’ ‘딸’ 같은 말들은 김혜순의 시에서 적히는 언어[文]인 채로 그것이 달라붙는 몸[身]을 대체해버리는 ‘문신(文身)’ (「文身」, 『달력』)으로 작용한다.
출근 지하철 안에서 새파란 처녀가/젖은 머리칼을 휘휘 내두르며/친구랑 떠들고 있다/신문 읽는 내 손등에 목덜미에/물이 뚝뚝 떨어져/ 옷 속으로 스며들었다/덩달아 신문도 젖어버렸다/소녀 시절/여러 번 같은 꿈을 꾸었다/누군가 붓에다 먹을 찍어/내 얼굴에다 자꾸 글씨를 썼다/눈을 떠보면(여전히 꿈속이었지만)/내 얼굴에 글씨를 쓰는 사람의/얼굴도 글씨로 가득했다/(그는 누구였을까)/(무슨 글자들이었을까)/실제로 출판사에 다닐 땐 내 입 안에/글씨로 엉킨 검은 실 뭉치가 가득 찬/날도 있었다/(결핵성 늑막염으로 가래를 퉤퉤 뱉고 다녔다)/ 집에 돌아와 목욕탕에서 거울을 보며/딸의 붓으로 얼굴에/글씨를 써 보았다/그러다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그 시절 내 얼굴에 글씨를/쓰던 사람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얼굴에 쓴 글씨」(『달력』) 전문
이 시에는 여러 겹의 ‘문신’이 있다. “처녀”가 “내 손등에” 물로 쓰는 자국, “소녀” 시절 누군가가 ‘나’의 얼굴에 먹으로 쓴 글씨, 성인이 된 ‘나’가 뱉지도 삼키지도 않으며 입안에 가득 물고 있던 글씨, “딸”의 붓으로 ‘나’의 얼굴에 직접 쓰는 글씨. 몸에 흔적을 남기는 이 자국들에서 글씨를 쓰고 글씨 적히는 사람들은 서로 무의식중에 관계되어 있고, 자신이 ‘쓰지’ 않은 글씨에도 도구로서, 매개로서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이 서로에게 새기는 ‘글씨’의 자음과 모음은 김혜순에게 언어 구조에 깊이 새겨진 “子母”(「전 세계의 쥐들이여 단결하라」, 『슬픔치약』), ‘남성’의 시선을 경유하여 ‘어머니 됨’의 프레임에 붙박인 여자의 모습으로 보인다.
“너는 여자로 태어났으니 귀도 뚫어야 하고/어깨에 뽕도 넣고, 땅에 못을 치듯 걸어야 할 거다/느닷없이 찾아온 숨을 들이쉬지 못 하는 고통!/그건 첨 들어보지? 그 속에서 아기를 밖으로 밀어내야 할 거다/아니면 아기를 떼고 땅에 머리가 처박힌 참새 신세가 될 거다”(「출석부」, 『슬픔치약』) 같은 말을 휘두르는 이들이 움켜쥐고 있는 것은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권력, 여하한 “신세”가 될 리 없는 남성 신체의 권력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신체의 문제가 어째서 권력이 되는가인데, 그 배경에는 가장 강력한 ‘문신’이자 세계 창조라는 근원적 ‘처음’에서부터 신체에 ‘글씨’를 새긴 성경의 언어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브”(「오늘의 이브」, 『음화』), 동정녀 “마리아”(「신기루」, 『거울』), “아베 마리아”(「오리엔탈 특급 정갈한 식당 서비스」, 『돼지』) 같은 익숙한 말들에는 남성 신체의 부분, 남성 신체의 흔적, 남성 신체가 깃들 공간으로 여성 신체에 이름을 붙이는 ‘아버지’의 시선이 새겨져 있으며, 그 시선의 범세계적 역사 내부에서 “여자로 태어”난 이들은 자꾸만 몸에 글씨가 씌어지는 신체, 이미 항상 “무늬 새겨진 몸”으로 치환된다. 이때 ‘글씨’는 사각의 벽이 세워진 자음(子音) ‘ㅁ’ 같다. “‘ㅁ’으로 끝나는 글자들 속에서 우글거리는 벌 떼/신부님 선생님 판사님 사모님 자궁님 트라우ㅁㅁㅁ 세탁기”(「웅웅」, 『첫』), 자궁을 ‘자궁님’으로 만드는 오래된 글씨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십자수와 레이스에 대한 강박”(「하나님의 십자수와 레이스에 대한 강박, 1」, 『슬픔치약』)과 그 언어를 입은 “그녀의 레이스와 십자수에 대한 강박”(「그녀의 레이스와 십자수에 대한 강박」, 『슬픔치약』)이 ‘그녀’의 몸에 오늘도 ‘ㅁ’을 그리는 중이다.
그러한 언어적 결박이 ‘어머니’가 “한 천 년째” “휘젓고 계”신 ‘바다’라면, “그러나 시방은 다시금 내가 그 바다에서 걸어나올 시각” (「어머니 달이 눈동자를 만드시는 밤」, 『달력』)이다. “만물은 큰 자궁의 영생을 위해 작은 자궁들로 한생 지분거리다 가는 것”(「맨홀인류」, 『슬픔치약』)이라는 문장이 ‘창조’ 이래 세계가 어떤 신체들에 반복하여 새겨온 글씨의 ‘바다’라면, 몸은 이미 항상 그 ‘바다’에 있던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고, “다시금” “걸어나올” 수 있는 동체(動體), 독립된 신체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창조한 부모에게 ‘조그만 어머니’ 같은 말 대신 ‘배고픔’을 전하는 아이처럼, 김혜순의 시는 ‘처음’을 기억하고 상상하여 ‘여자’를 개체(個體)로 구하고자 한다. “자궁님”의 “이야기 속으로 가라앉기만 하던 여자/아직도 내 몸 밖으로 한번도 나와보지 못한 그 여자”를 “구해주는 상상” (「유화부인」, 『거울』) 혹은 ‘여자’인 ‘나’가 스스로를 구하는 상상은, ‘여자’를 ‘이야기’에 속하는 ‘공통의 몸’으로 호명하기를 거부하는 것에서, 복수(複數)를 하나의 말로 통칭하는 언어를 “누구와도 나눌 수가 없”(「에미애비」, 『첫』)는 개별의 몸들로 풀어내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돼지다, 도무지 밖을 본 적 없는 돼지다, 내내 돼지다, 우울한 돼지다, 늑대가 온다 외치는 돼지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돼지를 왕으로 뽑는 돼지다, 오 멋진 시궁창! 외치며 베개를 껴안는 돼지다, 뒈질 돼질 낳아주신 엄마를 잡아가면 좋겠네 혼자 웃는 돼지다, 온 세상이 다 쌀죽이라고 생각하는 입술이 부르튼 돼지다, 4XL 돼지다, 침대에 꽉 찬 돼지다, 그 이름 도무지 돼지다, 바다 건너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떠는 돼지다, 고개를 들어본 적 없는 예예 돼지다, 밤하늘 드넓은 궁창을 우러르기만 해도 무서워 뒈져버리는 돼지다, 뒈지는 돼지는 돼지라고 생각하는 뒈지는 돼지다//팔다리가 축 늘어진 돼지, 꼬리를 가랑이 사이에 감추고 쿨적거리는 돼지, 허공을 묶었는데 왜 이리 무거워 돼지, 겨드랑이에 손을 넣으면 뜨거운 구름 냄새가 나 돼지, 부드러운 도대체 돼지, 아늑한 이윽고 돼지, 일평생 나를 타고 놀아 돼지, 쥐가 새끼를 갉아먹어도 아늑한 돼지, 눈동자에 무엇을 껴입었니 돼지, 왜 돼지가 돼지인 줄 모르나 돼지, 사진은 아는데 거울은 아는데 너만 모르는 돼지, 한번도 창문을 내다본 적 없는 돼지, 이빨 뽑힌 돼지, 탄식 돼지, 후회 돼지, 이빨 뽑히고 꼬리 잘린 다음 입 안에 혼자 남은 외로운 혀 돼지, 그러나 입만 벌리면 돼지 돼지 소리가 나는 돼지, 고기 돼지
—「돼지라서 괜찮아」(『돼지』) 부분
인용된 부분에서 ‘돼지’라는 단어는 마흔 번 사용된다. 주어가 아니라 형용되는 명사의 위치에서 반복되는 ‘돼지’는, 같은 위치에서 나열되고 있음에도 개별의 돼지 개체들로 생각되기보다 ‘돼지’라는 종에 관한 복수의 서술로 인식된다. 이를테면 ‘돼지’라 불리는 돼지들은 “모두 이름이 같은 돼지”이고, 이름을 붙이고 부르고 맥락 속에 배치하는 인간의 시선에서 특히 “고기 돼지”이다. “이 품위 없는 단어 돼지”(「엘피 공장에서 만나요」, 『돼지』)는 개체를 지시할 때에도 그것의 종(種) 전체를 가리키듯 사용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비유적 전략을 항시적으로 취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돼지’를 부르는 세계를 김혜순의 시는 “수사학이 헌법인 나라”라고 부른다.
국경과 국법과 국민이 있을 이 ‘나라’에는 여러 비유가 있다. “북극곰 의인화, 경찰관/술 취한 토끼 의인화, 피의자”처럼 비유에 기대어 힘을 부리고 또 잘못을 피해 가는 국민들이 있고, “유령으로 태어나 유령으로 죽는 사람들”처럼 비유의 방식으로 이미 국민에서 제외된 존재들이 있다. ‘죽음’도 의인화하여 “흰옷 입은 천사”의 “현현” (「Y」, 『돼지』)이라 말하는 이곳에서 어떤 비유는 “고래”처럼 “유행” (「올해는 고래가 유행이야」, 『돼지』)하기도 하고, 국민들은 유행을 따라 미리 공유되고 전달되며 학습되는 코드로 소통한다. ‘당신’과 ‘나’는 모두 그런 언어적 국경의 내부에 있다. ‘당신’과 ‘나’가 “대화”를 나눌 때 “사그락사그락” 오가는 언어는 “당신인 척 하는 빈집과 나인 척하는 먼지”의 언어이며, 빈집에 쌓인 먼지처럼 가까운 두 사람의 비유적 거리는 사실 “전화”를 걸고 받을 만큼 떨어져 있다. 그것을 때로 “나는 모른 척한다”(「날씨님 보세요」, 『돼지』). 먼 거리의 서로를 연결하는 ‘전화’처럼 언어는 가까운 기분을 만들어주어야 하고, 그런 기분을 나눌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코는 코끼리/눈은 눈끼리/입은 입끼리/귀는 귀끼리”인 수사학의 세계에서 ‘나’는 “코끼리 눈을 찾아” “냄새나는 코끼리를 벗어나고 싶” (「공주여 공주여 잠자는 코끼리 공주여」, 『돼지』)어 하기도 한다. “코는 코끼리” 묶어 부르는 ‘코끼리’라는 말이 몸에 새겨진 글자처럼, ‘ㅁ’처럼 느껴질 때에, 그 사각의 벽 안에서 “왜 내가 벽 보고 나를 버려야 돼요?”(「돼지라서 괜찮아」, 『돼지』) 물으면서 말이다. ‘돼지’라는 단어를 반복하는 위의 시적 작업은 ‘돼지’의 어떠함을 묶어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묶음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을 시작하기 위한 것이다. “죽음의 자서전”이 서로 다른 ‘너’들을, ‘너의 죽음’들을 개별로 부르고 환기하듯(『죽음』), “나는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짖을 겁니다”(「4월이 오면」, 『돼지』)라고 김혜순의 시는 말한다.
“나는 돼지”라는 언뜻 비유적인 문장은 이를테면, ‘나=돼지’라는 ‘끼리’의 구도를 만드는 ‘글씨’인 듯 그것을 초과하기 위한 시작으로 읽힌다. 비유의 한 항인 ‘나’는 인간의 통칭도, 여성의 통칭도 아닌 채로 개체의 상태를 지시하거나 지향한다. 다른 쪽 항인 ‘돼지’는 반면 돼지 종을 통칭하는 단어, 개별 돼지를 ‘나’로 사유하지 않는 비어 있는 이름의 자리에서 임의로 활용되는 비약적 단어이다. 단수와 복수를 등식으로 만드는 ‘나=돼지’라는 말은 그 불균형과 비약에 대해 생각할 때 다시 복수를 단수로 푸는, ‘돼지=나’라는 말의 전환을 생각할 수 있는 언어적 출발점이 된다. ‘돼지’의 죽음을 말하면서 ‘돼지’ 종의 ‘처분’이나 ‘돼지고기 가격 폭등’으로 죽음 전체를 통칭하는 것이 아니라, ‘돼지’의 몸을 가진 무수한 ‘나’가 어떤 낙인 속에서 ‘종’으로서 생매장되는지, 그때 ‘돼지’라는 단어는 어떻게 비유의 방법을 지키는지를 김혜순의 시는 돌아본다. “나 나 나 나는 죽지만 엄마아빠 영원히 살아요”라고 쓰면서 그 문장이 ‘나 나 나 나는 죽어요’로 읽힐 수 있도록, ‘영원히 사는’ 돼지 종의 계보가 아니라 “나 나 나 나” 사이를 벌려 글씨를 다시 쓸 수 있도록 말이다. 그것은 나아가 “나는 돼지”라고 말하는 ‘나’의 언어 역시, ‘돼지’에 대칭되는 ‘인간’ 종, 혹은 비유적으로 가까운 ‘여자’ 전체를 아우르는 일인칭의 것으로 읽히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일과 관계된다. 김혜순의 비유는 묶어 사유하는 ‘끼리’의 방법 대신, 개별과 개별의 문제에 관해 생각하기 위한 방법으로 만들어진다.
그러한 방법으로 “나 나 나 나”(「돼지라서 괜찮아」, 『돼지』)를 적는다고 해서 ‘돼지’가 단번에 ‘나’들로 풀려날 수 없다는 것을 김혜순의 시는 잘 알고 있다. 하나씩 띄어 글자를 적어도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4월이 오면」, 『돼지』) 여전히 통칭하는 단어를 개별인 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모든 것에 ‘나’의 개별성 을 쥐여줄 수 있다고 단순히 믿어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언어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의 첫 자부터 마지막 자까지 지우기로”(「두 마귀」, 『돼지』) 해도 국어사전의 언어로 모든 말은 쓰이고, 사람은 그 사전에 따라 구분되고 분류되며 분배되는 시스템에 의탁하여 세계와 자신을 호명하고 인식한다. 모든 것을 ‘나’로 부르는 것이 ‘사전’의 방법을 초과한다면, ‘사전’에 기댄 언어 구조 안에서 그 ‘초과분’은 쉽게 달성되지 않고, 적어도 아직은, 그래서는 안 되기도 하다. ‘사전’을 따르지 않아도 그것이 문법으로 작동하는 세계에서 경험적으로 우리는 다시 ‘사전’의 방식으로 모이게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것을 벗고 떠도는 것이 또 나라고 굳게 믿으면서” “돼지 버리고 가라는데” 자신도 모르게 “돼지 데리고” 가듯, “이제 그만 새가 되라는데/몸속에서 새가” 울듯, 김혜순의 시는 “내가 바로 저 여자야”(「돼지라서 괜찮아」, 『돼지』) 다시 말하게 되는 장면들의 복판에 서 있다. ‘나=여자’를 ‘여자=나’로 연결하여 ‘여자’라는 글씨로부터 놓여나는 ‘나’들을 말하려 해도, 돼지의, 새의, “저 여자”의 울음이 ‘저 여자=나’라는 등호를 되불러 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그 등호로 돌아가도록 하는, “〈A가 좋아〉”라고 말하면 ‘B’가, ‘C’가, ‘A’가 달려와 둥그런 순서대로 ‘나’를 때리는 글씨의 힘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담임의 숨에서 나던 냄새/결혼식 날 주례의 숨에서 나던 냄새/여자를 모욕하려고 쓴 글에서 나던 냄새//이 옷과 같은 냄새//내가 기록한 것은 내가 언제나 출발했음을/그러나 붙잡혀 돌아온 곳은 언제나 이 옷 속이었음을//토네이도를 묶어두는 것은 범죄야/ 끓는점에 도달한 액체를 가둬놓는 것은 재해야//나에게 우파에 좌파에 모더니스트에 친일파에 온갖 병을 뒤집어씌워도/나는 울지 않아 대신 내 콧물 가래나 받아//물고기에게 그물을 옷이라고 하다니/물고기에게 튀김옷을 외투라고 하다니//이 옷을 입으면 라디오 안에 들어간 것 같아/전 국민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아//사과할게요 전 국민이 사과를 바란다니/평생 사과할게요 앞으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모두 새빨간 사과예요//왜 사과(내)가 사과(너)한테 사과를 해야 하니?/사과(너)랑 사과(나)랑 무슨 사과(상관이)니?//두 손을 묶고 소매를 묶은 옷//단 한 벌//저절로 기도하는 자세가 된 내 두 손으로 찌른 내 심장에서 나는 냄새/빙 둘러앉아 갓 잡은 돼지를 나누던 소수민족 아낙의 손에서 나던 냄새//조명이 도수 높은 렌즈로 세례를 베푸는 방/그러나 아무도 옷을 입고 이 방에 들어올 순 없어//새들도 깃털을 벗고/물고기도 비늘을 벗어야 해/나무도 물론/내 방에선 무조건 누드야//오래 낀 가죽 장갑이 나에게 뻗어 올 때/훅 끼치던 화장실 냄새/땀으로 부글부글 끓는 옷냄새//때려봐/때려봐/새는 이미 날았어//네가 친 것은 그저/옷 입은 허공이야//옷 속이 훤하잖아
—「구속복」(『날개』) 전문
지금 여기에는 거부해도, 버려도, 벗어나려 해도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결혼식에서, 수치와 속죄를 강요하는 분위기 속에서, 수치를 모르는 렌즈들 너머 구체적인 사람들의 눈알 속에서 무시로 닥쳐오고 덧씌워져버리는 ‘여자’라는 단어가 있다. 그리고 ‘여자’를 둘러싼 ‘수사학’과 그 수사학이 지배하는 문법의 구체적인 현장들이. 개별의 신체는 그 수사학이 사라지지 않는 한 끊임없이 ‘여자(女子)’로, 세계를 이루는 ‘자모(子母)’로 휩쓸려 들어가고, 그 아래에서 글씨 씌어지고 무늬 새겨지며 유사한 경험 속으로 내몰린다. “여고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울면서/나가 나가 내 방에서 나가/행진할 때 제일 눈물이” 나고, 그렇게 “우는 사람이 우는 사람에게/얼굴을 기울여 눈물로 당겨주”(「초」, 『날개』)는 마음은, ‘여자’라는 코드를 나눠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란 적 없는 그 코드의 벽 안에서 ‘여자’에게 발생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너무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김혜순 시의 ‘나’는 “아빠, 너”의 죽음을 마주하며 “시작도 없고 마지막도 없고/이미도 없고/아직도 없고/여자도 남자도 없고/아빠도 자식도 없”이, “그래서 평평하”고 “그래서 무한”한 죽음 이후의 세계가 실은 모든 사람의 시작점이었음을, “모두 평등”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것임을 기억한다. 그리고 언어가, 언어가 분배해낸 결과로서의 세계가 날개를 꺾고 발을 자르고 ‘ㅁ’ 속에 가두는 장면을 마주하는 그 “슬픔이 내 몸보다 클 때”, 평평하고 무한했던, 평평하고 무한해질 “이미 죽은 내가”(「작별의 공동체—작별의 신체」, 『날개』)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일에 관해 말한다. 그가 시의 언어를 통해, 거듭 글씨를 적는 행위를 통해 하는 일은, “내 몸”이라는 ‘나’의 단위를 태워 “내 두 눈”에 빛을 켜고 “이 불 꺼뜨리면/ 천지의 새들이 다 날개를 펼 수 없을 것 같”(「초」, 『날개』)다고 여기는 것, “내가 계속 적지 않으면 떨어져버리는 새를 생각”(「작별의 공동체—해파리의 몸은 90퍼센트가 물이다」, 『날개』)하면서 “내가 버린 여자들”을, “여자”“들”을 “대면”(「여자의 여자」, 『날개』) 하는 것이다. 날개를 꺾고 발을 자르고 ‘ㅁ’ 속에 가두는 글씨에게 “새는 이미 날았어//네가 친 것은 그저/옷 입은 허공이야”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여자’라는 말을 흔들며 “옷 속이 훤하잖아”(「구속복」, 『날개』) 하고 일러주며 ‘이미’ 가벼울 수 있을 때까지.
결국 김혜순의 시가 감당하는 질문, 김혜순의 시를 경유하여 오늘의 언어가 마주해야 하는 물음은, 글씨 씌어진 경험으로 모이는 자리에서 그 원인과 배경과 조건으로서의 언어를 어떻게 부수어낼 것인가, ‘여자’라는 ‘구속복’으로부터 어떻게 날아오를 것인가이다. 그 질문을 김혜순의 시는 ‘엄마’와 이별하는 시간을 가로질러 거듭 되묻는다. “엄마를 망할 딸에게 물려”(「목젖과 클리토리스」, 『지구』)준, “시야를 좁게 가져라/저 까만 우물을 향해 투신해라/영혼을 아무 데나 흘리고 다녀선 안 된다” “자못 교훈적”(「엄마」, 『허수아비』)이었던 ‘엄마’의 죽음 앞에서 ‘나’는 “지구를 가득 뒤덮은 사람들이 각자의 엄마를 부르는 소리”(「잊힌 비행기」, 『지구』)처럼 ‘엄마’를 부른다. 그 마음 안에서 ‘엄마’는 오래 이어져온 ‘어머니’이고, ‘여자’이고, “밀크”(「엄마는 나의 프랑켄슈타인」, 『지구』)로서 아주 무거운 글씨다. “나는 학생들에게 너희의 엄마에 대한 시는 왜 다 비슷하냐고” “엄마는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문장 밖에 있다고” 혹은 그래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끝내 “엄마를 쓰려고 하”(「천 마리의 학이 날아올라」, 『지구』)는 자신의 ‘비슷한’ 문장들을 바라보며 고통을 느낀다. 그 고통은 그리움의 모습이지만, 동시에 “아빠가 준 것, 내가 준 것, 동생이 준 것, 엄마, 그따위 것. 가루처럼 날아가버리는 것”을 벗고 “엄마는 엄마만 있는 사람”이라는 문장으로 엄마를 부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엄마는 엄마만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엄마’의 위치에서 이름 없이 불리는 사람에게 ‘엄마’라는 글씨만이 남는다는 의미처럼 읽히기도 한다. 동시에 이 말은 ‘나’에게 ‘엄마’인 이 ‘사람’은 이제 ‘엄마’를 벗고 그 자신만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다만 그 사람은 ‘나’에게 ‘엄마’이기 때문에 호칭이 ‘엄마’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언어는 그렇게 속도가 느리다. 하지만 이때 ‘엄마’는 가두는 말인 동시에 날아오르게 하려는 마음의 말이고, “멀리 날아가보실까? 집에 가실까?”(「죽음의 베이비파우더」, 『지구』) 그리움 속에서 그저 당신의 안녕을 바라는 말이며, “죽은 인형들의 몸을 차곡차곡 제단처럼 쌓”고 “그 위에 우리 엄마 인형을 올려 오줌 똥 싸게”(「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지구』) 하는 쓸쓸하고 다정하고 시원한 상상의 말이기도 하다. “엄마 하고 부르자 병실의 모든 모래인 여섯이 응 합창한다”면, “모래인은 한 알로서도 한 사람이고 억만 알로서도 한 사람이” (「Yellowsand/Blackletter/Whitebooks—*모래인」, 『지구』)고, 순서를 바꾸어, 억만 알로서도 한 사람이고 한 알로서도 한 사람이라고 김혜순의 시는 말한다. 그의 비유는 다시, 언어의 오류와 오류 너머의 개체를 같이 생각한다.
복수를 통칭하는 말이 개별의 자리를 지우고 언어적 코드값에 가두어버릴 때, ‘모래인’이라는 말은 항시적으로 복수의 상태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한 알 한 알이 다 색이 다른 화소話素”(「사막의 숙주」, 『지구』)인, 제각각의 ‘이야기’인 모래알들을 하나씩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개체인 동시에 종인 ‘사람[人]’임을 간과하지 않게 하는 언어의 가능성을 품는다. “모래인의 명사는 오직 하나, 모래”(「Yellowsand/Blackletter/Whitebooks—*언어」, 『지구』)라고 말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붙이고 싶은 마음”(「Yellowsand/ Blackletter/Whitebooks—*모래증후군」, 『지구』)에도 물론, 시달리면서. 그런 ‘모래인’의 새롭지 않지만 다르려는 언어가 “새들(그러나 모래)”(「새는 왜 죽은 사람을 떠올리게 할까?」, 『지구』)처럼 명사에 명사를, 복수에 단수를, 수사학에 수사학을 연결하며 단순하지 않아질 때, 김혜순의 시는 다시, 말하고자 할 것이다. “나는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짖을 겁니다.”
- 1) 이 글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또 다른 별에서』(문학과지성사, 1981, 이하 『별』),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문학과지성사, 1985, 이하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청하, 1988; 문학과지성사, 2017, 이하 『지옥』), 『우리들의 陰畫』(문학과지성사, 1990, 이하 『음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사, 1994, 이하 『서울』), 『불쌍한 사랑 기계』(문학과지성사, 1997, 이하 『사랑』),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문학과지성사, 2000, 이하 『달력』), 『한 잔의 붉은 거울』(문학과지성사, 2004, 이하 『거울』), 『당신의 첫』(문학과지성사, 2008, 이하 『첫』), 『슬픔치약 거울크림』(문학과지성사, 2011, 이하 『슬픔치약』), 『죽음의 자서전』(문학실험실, 2016, 이하 『죽음』), 『피어라 돼지』(문학과지성사, 2016, 이하 『돼지』), 『날개 환상통』(문학과지성사, 2019, 이하 『날개』),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문학과지성사, 2022, 이하 『지구』). 『어느 별의 지옥』은 문학과지성사의 복간본을 대상으로 했다.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시 제목과 시집 이름만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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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1 이번 봄에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탐험하고 매체를 다시 읽어내는 글들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인류세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비인간’ 담론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의 등장 이후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독보적인 단상 위에서 내려와 비인간과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물며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겸허한 기획은 급작스럽게 복잡한 불안에 갇힌 것 같다. 적어도 기계에 대해서라면 이미 우리는 동등하거나 어쩌면 한참 전에 초월당한 것은 아닌가? 경계 허물기로 인한 희열보다 불안이 확연히 압도하는 자리에서 『쓺』 2024년 상권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과 ‘작은 기획—채굴 문화와 미적 감각’을 유독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작은 기획’에 실린 심효원과 윤원화의 짧은 글이 각각 인간이 향하려는 방향과 의지의 아름다움, 그 노력이 무산되는 수동태의 자리에서 감지하는 공포와 불쾌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먼저 심효원의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는 비인간 행위자인 ‘지렁이-되기’를 통해 근대의 한계를 돌파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글이다. 지렁이가 땅과 맺는 일원적인 관계성과 분변토라는 건축물은 근대 이후 인간이 이룬 도시의 뚜렷한 경계와 고정성의 반대편에 있다. 지렁이의 건축물 만들기란 사실상 움직이고 먹고 배출하는 신체적 행위의 반복일 뿐이지만, “비인간들의 극도로 효율적인 메커니즘”이자 자신의 몸이 다른 존재와 물리적으로 닿는 매순간마다 “무차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력”1)이기도 하다. 촉각이 주도적인 지하세계에서는 시각이 미미해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 역시 달라진다. 미래의 미결정성을 남겨두는 대신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최근 신유물론을 비롯한 담론들과 풍요롭게 공명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상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지하세계로 향하는 방향성은 최근 SF 소설의 주요한 상상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정세랑의 「리셋」(『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에서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던 자본주의의 질주를 멈추게 한 것은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내려온 지렁이들이다. 강제 리셋 이후 인간들의 자리는 자연히 땅속 깊은 곳이 되고, 지상은 다른 종들이 누리는 공간이 된다. 김초엽의 『파견자들』(퍼블리온, 2023)에서도 지상은 균류인 ‘범람체’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감염을 피해 지하세계로 내려와 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문명 말살에 가까운 아포칼립스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영화의 촉각성을 즐겁게 감각해온 인간이 미래의 지구를 위해 지렁이를 신속하게 체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물론 직접적인 실천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지구의 거대 환경 시스템의 핵심 행위자 자리를 재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겠다. 하지만 미래적인 지하세계로 들어가기에 인간은 아직 시각적 쾌락 속에 즐겁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지적 유희를 야기하는 활자의 쾌감까지 포함해서. 윤원화의 「땅을 파는 손」은 채굴적 상상력의 매혹과 절망을 말한다. 데이터로 전환된 우리의 생태 에너지를 부의 원천으로 삼으며 굴러가는 미디어 산업 앞에서, 인간의 생산물·복제물·부산물·폐기물을 구별하기는 어려워진다. 디지털 기술로 구축되는 ‘아카이브 데이터’는 역사는 넘쳐흐르지만 이를 의미화하는 전통은 불가능한 곳이다. 윤원화는 과잉생산으로 범람하는 사물들 앞에서 맞닥뜨리는 불길한 실패에의 예감을 시앤 응아이Sianne Ngai의 ‘기믹gimmick’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매직magic’의 애너그램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 이 단어는 1920년대 미국에서 편법적 장치, 싸구려 트릭, 계산된 마법 등을 뜻하는 신조어로 출현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의 황홀감과 환멸을 모두 각인한 기믹의 불완전한 형식은 오늘날 삶과 예술, 또는 넓은 의미의 ‘사업’에서 흔히 발견된다.2) 단기적 이익 추구에 최적화되어 있는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가치 절하된 노동에 시달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기믹의 유희에 이끌린다. 운에 따라 누군가는 축적된 자원을 폭발적으로 소모할 수 있으리라는 채굴적 상상력이 번성하는 가운데, 보상도 성취도 불확실한 예술 노동 역시 가치 체계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원화는 이런 진단과 고민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생산성 중독의 시대에 예술은 어떤 시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3) 심효원이 지하라는 공간과 이를 감각하는 촉각성에 의지해 의미 있게 압축되는 순간의 시간성을 말한다면, 윤원화는 ‘농사’와 ‘채굴’을 대비하며 채굴의 무책임한 풍요의 약속이 얼마나 파국적일 수 있는지 말한다. 최단기간의 이익에 매몰된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생산물은 넘쳐흐르지만 어떤 가치 창출도 담보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은 불투명한 시간을 표류하는 중이다. 이런 진단 속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에 의해 갱신되는 매체의 기술적 발전은 인간과 나란히 놓여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환멸을 불러오는 맹목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의 ‘지렁이-되기’를 향한 아름다운 여정은 너무나 느리게 진행중인데,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예술을 몰아치듯 양산해낸다. 인간의 몸은 자발적으로 물질과 동등하게 놓이기 전에 물질이 만들어낸 다른 가치들에 의해 가치 절하되며 밀려나게 될까? 생동하는 물질들 안에서 인간을 재의미화하려는 시도와 인공지능을 의심하며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지키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래의 비평들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2 『쓺』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을 여는 글은 근대 패러다임이 ‘개인’을 해방하고 자율적 주체로서 정립해왔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 시대에 여전히 개인의 이념이 유효한지 묻는다. 개체성과 집단성이 직면할 변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서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글을 꼽는다면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과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인공지능은 창작하지 못한다, 다만 제시할 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은 기계 성능의 고도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게 산업화 이후의 근대는 ‘저자의 시대’이며, 이는 기술 발전의 작용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 만들어낸 변화이고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방향타가 된 것은 저자라는 이념의 바탕에 놓인 ‘개인주의적 사상’이다. 이는 산업화 사회 속에서 부속물로 전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회 분석의 준거점을 개인에 두고 진리와 자유를 탐색했던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조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다시 독일 지성사의 문화 비판적 사상의 전통이 소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김태환은 “항상적인 문화 공급 과잉의 시대”(37쪽)라는 진단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나 웹사이트, 유튜브 등 정신의 대상화로서의 객관 문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반대 방향인 객관 문화에서 주관 정신으로의 내화는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로 인해 그만큼의 양적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알고리즘 속에서 타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객관 문화의 총체가 스스로 발언하고 생산하는 주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이 글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정신의 개별성’이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개인으로서 개별적 의지, 개별적 내면, 개별적 정신을 지닌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는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직접 조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주적이라는 사실”(42쪽)을 변함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에 휩쓸리기보다 이를 의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사유할 틀이 우리에게 요긴한 것은 사실이다. 데이터에 얽힌 저작권 문제 역시 계속 규제안을 논의해나가야 할 비판적인 쟁점이다. 그렇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위기를 산업화 시대 이후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혹시 너무 큰 틀에서의 접근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작동 방식과 결과물이 인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때, 새로운 매체와 관련해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글에서 알고리즘에 갇힌 디지털 시대 개인의 부자유에 대한 우려는 빠르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의 재소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 강조되는 개인의 개별적인 ‘의지’와 ‘내면’과 ‘정신’에서 신체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글에서 인공지능과 대립되는 요소로 논의되는 인간의 ‘의식’이란 단순히 합리적 이성만은 아닌 “수많은 감각적 심상과 기억·감정·소망·의지 등이 혼재하는 심적 상태”(46쪽)다. 알파고와는 다른 인간 바둑 기사의 의식을 예로 들면서 언급되는 긴장, 초조, 후회, 자책, 엉뚱한 연상 등은 “바깥에서 결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내면”(같은 쪽)으로 규정된다. 베일에 살짝 가려진 듯한 이런 인간 내면의 신비함은 물질적인 신체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진화해온 신체야말로 내면 이상으로 복잡성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는 “신체화의 말소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 양쪽 모두의 공통된 특성”이라는 캐서린 헤일스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헤일스는 합리적 정신과 등치되는 자유주의적 주체가 “그 악명 높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자아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4)이라고 말한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한계는 곧 발전을 통해 ‘영웅적 개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 모든 능력에서 커다란 한계를 안고 있는 개별자로서의 인간만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어떤 감동적인 위대성에 이를 수 있”(53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반드시 육체의 신경과 근육의 단련 과정을 동반하며 그것이 생각과 행동에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잠시 괄호 안에 두어진다. 이 글의 전반적인 주장이 온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자율적인 개인상과 관련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개인이 지향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가치다. 생산과 창조의 주체로서의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소비와 소멸의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해 우리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근대 이전에 우리가 ‘저자’가 불투명한 긴 구술 시대를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저자의 시대’ 이후의 저항이 활자와 개인을 넘어선 범주에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3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은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답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지능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가지므로 ‘집단 지능’이라고 해야 한다. 개체를 중심에 놓으면 ‘창의’를 중시하게 되지만, 그 새로움은 다른 개체가 ‘모방’하고 ‘확산’하지 않는다면 사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달리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이라는 형태의 외장 기억을 건설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저자는 낭만주의 미학과 예술에서 강조하는 천재적 개인과 창조력에 대한 신화를 뒤로하고 “인간이란 거대한 기억”(62쪽)이라 정의 내린다. 이는 물론 질적 도약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양적 축적을 말한다. 김태환이 인간의 의지, 내면,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면을 중시한다면, 김재인은 “나의 생각이란 시한부 소유물”(63쪽)에 가까울 수 있으며 그 휘발성을 지켜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물질’ 혹은 ‘미디어’”(62쪽)라고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외화된 집합적 사물성으로 바라보며 그 반대편에 선다. 그런데 이 글은 ‘컴퓨터가 자연어를 다룬다는 것’이라는 장부터 급작스러운 단절을 드러내며 도약한다. 앞에서 인간의 생각 자체를 미디어이자 집단 기억의 저장고로 본 것과 다르게, 예술과 창작의 영역을 다룰 때는 컴퓨터가 자각 혹은 성찰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컴퓨터는 예술 능력이 없다”(66쪽)고 확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를 바라보는 김재인의 시점에는 도구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창작의 정의를 “스스로 선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 발휘되었느냐”(67쪽)에 두는데, 중요한 점은 저자가 그 평가 주체의 자격을 ‘생물’로 단정한다는 것이다.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스스로 반복”하는 유기체이고, 이 글에 따르면 평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한 지각 처리와 행동의 연쇄”(70쪽)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애초에 기계는 아무리 ‘집단 기억’의 ‘미디어’로서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무기물이라는 점에서 평가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배제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이렇게 유기체의 항상성과 관련된 기준을 평가 능력과 일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저작 『AI 빅뱅』에서 참조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찾아보면, 이는 “몸의 고집스러움”5)이라는 말과 함께 구체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심지어 같은 프롬프트를 주더라도 생성물이 크게 바뀌는 무작위성randomness을 보여주는데, 이는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면을 지니는데, 저자는 이를 몸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 장에 바로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한 질문자는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가지는 것이다”6)라는 전제 위에서 인공지능이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인공지능으로 발전할 방법이 있는지 묻는데, 김재인은 이에 대해 ‘몸의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로 답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은 생각을 “바로 휘발되지도 완전히 고착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지점”7)에 붙잡아둔다는 것이다. 김재인은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을 논하는 데 있어 복잡성을 가진 신체의 차원을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창작을 논하면서부터는 김태환의 논의와 유사한 탈신체화의 방향을 답습한다.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특징”은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하는 비결”(70쪽)로 치켜세워지고, 진화를 위해 외부와 교섭하며 몸 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피드백 루프는 유기체만의 고유한 신체적 능력으로 남는다.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케이트 크로퍼드가 인공지능은 추상화된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체화되고 물질적인 지능이며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하부구조, 물류, 역사, 분류를 통해 만들어진다”8)고 강조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일차적인 목표로서의 생존이 진화의 필수 사항이라 말하는 신경과학 연구자 아닐 세스가 우리의 지각은 사실 ‘통제된 환각’이자 ‘최적의 예측’이라 설명했음을 염두에 두면 어떨까. 그에 따르면 ‘당신이 된다는 것being you’, 즉 인간의 ‘동물기계’적 본질과 의식적 자기 사이의 연결고리는 “신체 자체가 가진 현재와 미래의 생리적 조건에 대한, 형태도, 모양도 없고 제어 중심적인 지각적 예측”9)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인공지능 역시 지극히 물질적인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 역시 체화된 자아로 인한 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예술을 창발시키는 창의성 개념이 다르게 읽힐 가능성이 열린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 후에 마련된 『인문예술잡지 F』 21호의 특집 ‘고함: 비-인간’에서 이진경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인공지능이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괴델의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과정 속에 언제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수준에서도 공리계로 귀속될 수 없는 명제(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생성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형식적 추론에서조차 새로운 명제의 창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역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설명한다. “변이mutation의 누적에 의해 진화는 이루어”지지만 처음 “생명체의 변이는 지배적인 개체군 안에서 일종의 ‘장애자’나 ‘고장’으로 간주된다”10). 하지만 환경이나 생존 조건에 따라 변이가 진화된 변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기계가 만들어내는 예측되지 않은 결과의 출현 역시 ‘고장’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창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논의다. ‘인간 없는 예술’이 도래하려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기술적 특이점이 올 때마다 반복되어온 정동이기도 하다. 이 앞에서 좀더 차분하게 이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축적할 필요를 느낀다. 2024년 『쓺』의 특집이 창작자이자 예술가가 서 있는 주체의 자리에서 출발했다면, 2016년 『인문예술잡지 F』의 특집은 그 결과물인 작품의 자리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은 음악이 기술적 혁신을 이루는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혔는지를 따라 음악사를 재구성한다. 자동 피아노의 경우에도 그 연주를 더 실제처럼, 더 자연스럽게, 더 인간답게 만들겠다는 목표는 거의 달성되었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가 만들어낸 경험이 정말 특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인간의 연주라는 원본 혹은 목적지를 버렸을 때이다. 인간의 연주라는 목적지를 소거해버리고 이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뭔가를 연주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인간 없이 손쉽게 해냈다면, 그 기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인간의 복제’가 아니라 ‘탈脫인간’으로 재조정할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기계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 자동 피아노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인간의 연주를 기록하고 인간의 연주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연주의 대리자는 오히려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연주하며 그 누구보다 기계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예술형식 말이다.11)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독자적인 예술형식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모방은 때로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던 자율적인 개인 주체로서의 예술가상을 어떻게 바꾸어나갈까. 또 인간의 예술적 집념은 어떻게 예술 형식들을 바꾸어나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불안만이 정확하게 인간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불러오는 균열 속에서 인간에 대한 고정된 사유를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을 때 인간과 예술 모두에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1) 심효원,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 『쓺』 2024년 상권, 368쪽.2) 시앤 응아이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던 2010년대 후반의 미술과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기믹의 이론화에 착수하는데, 기믹은 의심스러운 도구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키치와는 다른 저질 예술로 취급되면서도 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심을 표면화하는 미적 전략으로도 쓰일 수 있다. 윤원화는 이 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공모 프로그램 선정작인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의 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한다. 이 전시는 관객이 옥수수 농사 시뮬레이션을 완수한 후 ‘콘 코인’이라는 가상 화폐를 받아 실제 뻥튀기 한 봉지와 교환하는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 노동이 이에 비례하는 가치 창출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대신, 콘 코인이라는 불분명한 요소가 끼어들면서 매끄러운 교환 가능성이 흔들릴 때 이 간극에서도 기믹이 관찰된다고 할 수 있다.3) 윤원화, 「땅을 파는 손」, 같은 책, 383쪽.4)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27쪽.5)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153쪽.6) 같은 책, 156쪽.7) 같은 책, 157쪽.8)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17쪽.9)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장혜인 옮김, 흐름 출판, 2022, 243쪽.10) 이진경, 「인공지능시대의 예술작품」, 『인문예술잡지 F』 21호, 2016, 25쪽.11)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유령, 2019, 115쪽.
1. ‘서울의 봄’을 기다리며 유신 독재 시대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을 다시 돌아다보면서 근래에 극장가의 흥행 기록을 다시 쓴 영화 (2023)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또한 그렇기에 ‘서울의 봄’이 당시로써는 아직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솟아오르는 아쉬움과 슬픔, 분노의 감정은 덜해지지 않는다. 40여년의 시간차를 무색하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 시대를 지나오지 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까지도 강력하게 휘몰아친다. 그러니 그 시대를 온몸으로 뚫고 나갔던 이들은 눈앞에서 물러나는 봄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이 제목을 따온 「겨울공화국」의 시인 양성우는 그의 또 다른 시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에서 그 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들려준다.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곤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내가 죽고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꾼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후략)…1)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실 수 있다면, 오는 봄에 작은 바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의 시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죽고 다시 죽어 넋으로 스며든다고 해도 좋다는 시인의 결연한 고백을 듣고 나면 그러나, 또 한 번의 겨울 속으로 선선하게 걸어 들어갔을 그들의 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봄은 물러갔어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에서 주요하게 살펴보고 있는 김지하와 황석영, 조세희, 이문구는 신군부 독재 정권하에서도 계속 문학이라는 싸움과 저항을 지속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그들에게는 “오는 봄”을 기다리며 문학에 대한 믿음과 비전으로 눈보라를 뚫고 한 시대를 걸어 나왔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은 바로 그 역사에 관한 연구이다. 2. 시와 정치와 사랑 시작은 김지하다. 저자가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권력 지형 및 상세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김지하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그러한 냉전 체제의 하위 파트너인 유신 독재 정권과 한바탕 벌여 놓은 그의 싸움판이다. 그의 시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1964)와 「오적(五賊)」(1970)이 어떻게 ‘유신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했는지, 왜 유신 독재 정권은 그의 ‘세 치 혀’와 붓 끝에서 흘러나오는 시를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그러한 김지하의 시는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오적 필화사건’의 법정 풍경을 복원한다. 잘 알려진 대로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필화 사건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고, 더군다나 김지하의 「오적」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특별히 ‘오적 필화사건’에 주목하는 이유는 “1970년 김지하의 체포에 이은 100일 간의 재판[이], 법정을 판소리나 탈춤이 주로 공연되는 야외의 마당으로 탈바꿈시켰다”는 데 있다.2) 저자는 관련 인물들의 여러 회고를 바탕으로 당시 재판이 흡사 검사가 양반의 담화를 담당하고 김지하가 말뚝이를 맡은 판소리 풍자극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유신 독재 정권은 도리어 김지하에게 그가 오래 탐구했던 전통 마당극을 마음껏 펼칠 무대를 깔아주었던 셈이다. 이후 그 무대는 김지하가 “문학, 폭력, 혁명, 구원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펼칠 수 있는 대중 강연을 위한 연단”(95)으로 확장된다. 당시 재판을 방청했던 더글러스 루미스(Charles Douglas Lummis)의 기록을 인용하여 저자는, 재판 방청객들이 김지하의 발언을 받아 적어 재판장 바깥으로 빼돌린 뒤 그들이 속한 조직으로 돌아가 그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게 되는 방식을 흥미롭게 포착한다. 이는 시인의 말이 변론과 강연, 연설을 넘어서, 유신 독재 체제하의 민중에게 어떤 구원의 메시지처럼, 마치 ‘예언’처럼 전달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루미스는 실제로 김지하에게 “에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87) 오래 전 종교가 시와 정치로 분리되지 않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시기 김지하의 문학 세계는 세속화 시대에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던 어떤 종교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이후 “시인으로서의 그의 국제적 명성은 분명 그가 겨울 공화국의 순교자가 됨으로써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50) 아이러니하게도 유신 독재 정권은 김지하를 위대한 시인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게다가 그 어떤 비평가나 애독자보다도 꼼꼼하게 김지하의 시를 읽고 분석하며, 그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김지하에게 더욱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검찰은 “시인의 수첩에 적힌, 아직 쓰이지 않은 시와 희곡에 대한 메모”(95)들을 증거로 제출하며, 마치 시인론을 쓰는 문학 연구자인양 김지하의 문학 세계를 탐구해 들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학이 하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면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잠겨들어야 한다. 지배와 억압은 대상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고, 문학에 대한 이해는 오직 문학의 세계 안으로 침잠할 때 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하는 혁명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지배 권력조차 그 안으로 휘말리고 뒤엉켜 들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유신 독재 시대 문학의 혁명적인 것이었다. 굳이 알랭 바디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사랑과 혁명은 ‘사건’이며,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문학도 ‘사건’이 된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무르익을 때, 그 자체로 1970년대 문학의 ‘사건’이기도 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이 등장한다. 핵심은 이 연작소설집이 이웃 사랑을 미학적으로 실천한 텍스트라는 것인데, 저자는 그 단초를 「뫼비우스의 띠」에서 발견한다. 연작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한 「뫼비우스의 띠」는 ‘굴뚝 청소를 마치고 그을음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와 그을음이 전혀 묻지 않은 깨끗한 얼굴의 아이 중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문답을 주고받는 교사와 학생들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 문제가 곧 뫼비우스의 띠이면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세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하며 끝맺는다. 저자는 이 뫼비우스의 띠 수수께끼를 지젝(Slavoj Žižek)의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 즉 축소 불가능한 간극을 잇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닌, “간극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89) 안과 밖은 결코 만날 수 없지만, 뫼비우스 띠에서는 그 안과 밖이 그대로 안쪽 면이면서 바깥 쪽 면으로 존재할 수 있는 차원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당연히 그을음이 묻은 아이가 세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교사는 얼굴에 그을음이 묻지 않은 아이가 친구의 새까만 얼굴을 보고 얼굴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답한다. 이윽고 다른 학생이 그와 같이 대답하자, 다시 교사는 동일하게 굴뚝 청소를 한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얼굴은 깨끗하고 다른 아이의 얼굴은 더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교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해답 없음이 곧 안과 밖의 구분 없는 뫼비우스의 띠의 관점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굴뚝청소부 수수께끼와 뫼비우스의 띠라는 위상수학적 개념과 개발독재시대의 소설에 대한 해석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 듯, 유영주 역시 그의 방법론적 시각을 한 차례 꼬아 지젝에서 케네스 레이너드의 ‘이웃’ 개념으로 비약한다. 사랑(특이성과 차이)과 정치(평등과 동일성)는 마치 뫼비우스 띠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 띠를 한 번 꼬아 연속체로 만드는 “사랑과 정치의 이음매” 지점이 “이웃”이라는 존재라는 것이다.(189) 저자는 이로부터 조세희 소설의 미학인 ‘이웃 사랑’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난쏘공』을 난해한 모더니즘적 텍스트처럼 보이게 하고, 그래서 리얼리즘론자들에게 지식인적인 환상 소설이라고 비판받게 만들었던 몽타주 기법을 ‘이웃 사랑’의 주된 미적 원리로 파악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970년대 문학은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박태순의 ‘외촌동 사람들 연작’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소설 작가로 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최인호 역시 일찍이 「미개인」(1971)에서 한센병 환자의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첫 손가락에 꼽힐 작가는 단연코 이문구일 것이다. 『관촌수필』(1972)에서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이문구의 이채로움이 빛을 발하며, 유영주가 말하는 ‘인접성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미학화한 이상적인 이웃 공동체가 그려진다. 저자는 이문구의 아버지와 두 형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던 개인사를 바탕에 둘 때, 이문구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그저 단순히 전통사회의 풍요로웠던 이웃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전쟁 전후의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들 중 많은 경우는 이웃들 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크게는 계급과 종교를 바탕으로 나뉜 좌와 우의 정치적 이념을 따라 서로 갈등을 빚었고, 심한 경우 학살로 이어졌다. 이러한 한국 현대사의 맥락 속에서 이문구 소설 속 이웃은 “이념적 명명의 대안”으로 제시되며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142) 저자는 조세희와 이문구의 소설을 ‘이웃 사랑의 미학’과 ‘인접성의 윤리’로 의미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러한 문학의 미학과 윤리가 박정희 독재 체제의 산업화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근원적인 힘이었음을 주장한다. 그 힘이, 플라톤 이래 본질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문학을 정치와 만나게 하고, 동시에 어떤 정치를 극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대로 1970년대 문학은, 시(문학)와 정치와 사랑이 ‘인접성’의 원리를 따라 이어지지만 그 간극을 그대로 유지하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의 위상을 형성하는 상호 연결과 긴장 관계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3. 마지막 문사(文士)의 시대 그러나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에서와 같이, 한국 문학이 저항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시대는 곧 저문다. 대체로 그것은 1990년대, 그 유명한,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때와 겹친다. 고진은 1970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김종철과 만났을 때 왜 문학을 그만두고 《녹색평론》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알려진 대로 김종철은 1991년 《녹색평론》 창간과 함께 문단을 떠나 생태주의 운동에 몸담았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답했다.3) 이것은 유신 독재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창비’ 계열 문학비평가의 고백이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이 포착하고 있는 문학의 사회 참여(앙가주망)와 정치적 실천, 특별히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 시인과 소설가 들이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는 역사는, 이제 정말로 역사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역사가 한국에서 1970년대 유신 독재 정권 시대라는 국면에 가능했고 정점에 도달했던 것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국가였던 후진국에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설 때 그에 맞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지식인들뿐이었던 세계사의 보편적인 패턴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장르가 소설(novel)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한국 문학사에서 ‘소설의 시대’라고 불렸던 1970년대의 특수한 문학사적 맥락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작가를 앞세우면서 참조하는 세 가지 문학 개념 중 첫 번째인 ‘리테로크라시(literocracy)’라는 동아시아의 문치주의적인 문학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 문학사로 한정해 본다면 그것의 유구한 역사는 시인과 소설가가 독립운동 투사가 되곤 했던 식민지 시대 ‘문사’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사의 시대는, 이 책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실로 1970년대 문학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하게 빛을 발한 뒤, 끝났다.4) 이 책의 첫 장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김지하의 시 「진리」에서 시인은 “바람 속이 내 집”이라고 노래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황석영은 그가 2017년 출간했던 문학적 자서전 『수인』에서 방북사건으로 떠돌던 시절을 회고하며 그때의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문학이라는 집이었다”라고 고백한다.5) 한때 바람 속을 집으로 삼아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활보했던 문사들에게 문학의 지경이란 없었다. 김종철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문학은 “온갖 것을 떠맡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문학을 떠났거나, 문학이라는 집 안으로 돌아간다. 이제 문학은,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하는가. 유영주는 결론에서 박민규 소설의 저항성을 김지하에 견주며, 문학은, 그리고 작가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민규는 그의 대표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표절 사건 이후로 그럴 수 있는 정당성을 상실했다. 이것은 분명 징후이기도 하다.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감하게 했던 작가 중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우리는 이미 오래 전 문사의 정체성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로 완벽하게 대체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지위마저 위태롭다. 최근 작가들의 소설 속 자기 재현은 어떠한가. 그들은 비정규직 중에서도 고용안정성과 소득이 가장 낮은 축에 들며, ‘프리랜서’라서 정부가 청년층에 제공하는 대출 상품에도 부적합해 은행 창구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소설가를 재현한다(박서련, 「A Queen Sized Hole」,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지방 변두리의 3천만 원짜리 아파트가 자기 집이 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마오쩌둥의 참새들처럼 어디에도 내려앉을 수 없어 지쳐 떨어져 죽을 위기에 놓여 있다(이서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어떤 가치 판단도, 비판도, 자조도 아닌, 현상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이제 유신 독재의 겨울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눈보라 속에서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1) 양성우, 『겨울공화국』, 화다, 1984, 18면. 2) 유영주, 이형진·정기인 역,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 소명출판, 2023, 92면. 이후 이 책 인용 시 본문에 쪽수로 표기. 3)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 49면. 4) 어떤 이들은 1980년대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라면 그것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1980년대에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했던 반지식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91년 5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김지하의 충격적인 발언과 그것을 둘러싼 반응 그 이면에는 1980년대를 거치며 그가 더 이상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에 서 있을 수 없었던 상황이 엄연히 자리한다고 볼 수도 있다. 5) 황석영, 『수인』 1, 문학동네, 2017, 36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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