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2024년 가을호(제147호)
오려 쓰기 오류 쓰기
오려 쓰기 오류 쓰기 1)
습격
코끼리 무리가 차도를 가로지른다. 줄지은 차들은 크고 작은 코끼리가 길을 다 건너기를 기다린다. 한 개체는 차도 한가운데 서서 무리를 다 보낸 뒤, 차들을 향해 고개를 크게 움직이고 마저 길을 건넌다. 인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신사 코끼리로 유명해진다. 큰 오리 한 마리가 도로를 걷다 하수구를 점프하여 지난다. 뒤따르던 아홉 마리 새끼 오리도 힘껏 뛰어보지만 하수구 구멍으로 줄줄이 빠진다. 인간 구조대가 하수구 아래로 내려가 새끼 오리들을 한 마리씩 찾는다. 물에 쓸려 간 마지막 새끼 오리가 한참 걸려 구조되고, 내내 소리 내어 울던 큰 오리는 다시 새끼 오리들을 데리고 수풀로 사라진다. 야생동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으로 이런 영상은 널리 퍼진다. 관광객이 떨어뜨린 휴대폰을 건져 올려주는 야생 벨루가와, 휴대폰이 ‘신상 조개’인 줄 알고 바위에 신나게 찧어대는 해달 영상도 있다. 똑똑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인간의 사물을 든 자연 속 동물의 ‘해맑은’ 모습은 오늘날 지구의 다정을 기분 좋게 바라보게 한다.
올해 여름에는 해안에 나타나는 해파리의 수가 크게 늘어 이슈가 되었다. 해수욕을 즐기다 해파리에 쏘이는 사람이 많아져 피서객이 줄고, 그물을 상하게 하는 해파리 떼 때문에 조업이 중단되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언론 보도에서는 해변에서 큰 뜰채로 해파리를 건져 올리는 안전 요원의 모습과 모래 구덩이에 쌓인 해파리들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었다. 여러 후기 글, 유튜브 영상에서도 초점화 된 이런 장면들은 주로 ‘공격’ ‘습격’ ‘피해’ ‘수거’ 같은 말과 나란히 있었다. 여름 바다는 ‘해수욕장’, 바다는 ‘어업 공간’, 그곳을 ‘습격’한 해파리들, 그로 인한 ‘피해’, 추가 피해를 줄이기 위한 ‘수거’ 작전. 길을 건너는 코끼리나 하수구에 빠진 새끼 오리들, 휴대폰을 부수는 해달은 ‘신사’나 ‘신상 조개’ 같은 비유적 언어와 함께 아름답고 귀여운 공존의 예로 코드화된다면, 바다에 가득한 크고 붉은 해파리는 공존할 수 없는 제거의 대상으로 언어화되고 이미지화된다. 바다 수온이 상승하면서 해파리의 서식 영역이 확대되었고 그 결과 인간과 서식 영역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런 표현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파리는 의미를 입는다.
수년간 인간중심주의를 반성하고 생태주의적 시선으로 현실을 마주할 것을 제안하는 지적이고 실천적인 작업이 이어져왔다. 이 작업들은 인간과 자연, 문명과 야생, 지적 생물과 비지적 생물 사이의 구분과 분류, 가치 분배의 프레임을 반복해온 언어들 대신, 모든 것을 나란히 두고 함께 있음에 관해 사유하는 언어를 발명하고자 했다. 보기에 흐뭇한 ‘공존’의 영상들은 그러한 언어를 공유하고 축적하고자 하는 의도와 연결되어 흐뭇함 이상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하지만 고통을 느낄 만큼 발달한 신체나 감정과 언어를 공유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인 생물에 대하여서만 혹은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만 권리와 공존을 이야기하기도 하는 언어 속에서, 한번 자리하여 오래 명맥을 이어온 프레임의 힘은 여전하기도 하다. 구분하고 분류하고 가치를 배분하는 인간 언어의 프레임 그 안에서 코드화된 언어들은 여전히 특정한 방법으로 관계 맺으며 사유와 상상의 범위를 구조화한다.
김혜순은 ‘여류 시인’이라는 호명이 이루어지는 프레임으로부터 분리되어 ‘여성 시인’이라는 코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호명된 시인이다. 시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김혜순은 적극적인 비평 활동을 통해 새로운 코드화 작업에 직접 참여해오기도 했다. 그러한 궤적 속에서 그의 시는 ‘여성시’ ‘여성성’ ‘여성적 글쓰기’ 등 ‘여성 시인’과 관계된 여러 언어들와의 결합 속에서 읽혀왔다. 새롭게 발명되고 발견되어야 할 이 언어들을 어떤 내용 혹은 형식으로 마주하고 또 어떤 어휘들과의 관계망 가운데 구성할 것인가를 물을 때, 김혜순의 시는 구체적인 방향을 제안해주는 장소로서 거듭 발견되었다. 프레임을 재-설정하고 그 안에 구체적인 코드값을 부여하는 작업에서 그의 시는 그 자체로 ‘여성성’을 발명하는 ‘여성시’이자 ‘여성적 글쓰기’의 한 모델로서 이름 불렸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새로운 언어를 만나는 일에 집중하는 가운데에도 김혜순의 시는, ‘여성 시인’ ‘여성시’ ‘여성성’ ‘여성적’ 등의 언어를 코드화하기 위한 기본 코드로서 ‘여성’ 혹은 ‘여자’라는 단어 자체를 바라보면서, 그것으로부터 오래되고 익숙하고 또 여전한 감각을 직시해내고, 그것을 끝내 달라지고 새로워지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 조건이 무엇인지를 질문해왔다. 그의 시가 거듭 사용하는 ‘여자’라는 단어는, 그 단어에 오랜 기간 새겨지고 반복되어온 이미지, 경험, 신체, 상상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넘어서기 위해서뿐 아니라, 그 비판의 작업 속에서도 무언가 반복되고 있지 않은지를 켜켜이 살피려는 이중의 목적 속에서 씌어진다. 이를테면 김혜순은 ‘여자’라는 단어로 시를 꾸려가면서 그 단어와 그것을 사용하는 자신의 언어 체계를 들여다보는 메타적 작업을 동시에 진행한다. 코드는 논리와 상상의 대상이 될 때에도 언제나 현실에 발붙인 언어이고, 시의 언어와 시인 역시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코드는 어떤 반복 속에 있어왔는가, 자신의 ‘여자’는 무엇을 반복하기도 하는가, 그 반복을 관통하는 권력은, 경험은 혹은 감정은 어떤 것인가. 그런 복수의 질문을 던지고 또 경유하면서 김혜순의 시는 ‘여자’라는 언어의, ‘여자’를 구분하고 분류하고 배분하는 언어 구조의 오류를 오류 자체로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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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언어에서 오류는 무수한 코드로 세분되어 있다. 그 단순하고도 복잡한 언어 체계 내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많고, 오류의 양상은 서로 다르며, 해결하기 위한 접근법도 무수히 다르기 때문이다. 컴퓨터 언어를 이해하는 일은 그것을 어떻게 조합하여 실제 기능으로 실행시키는가와 더불어, 오류 상태를 어떻게 인지하고 구조적으로 파악하며 해결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오류 코드는 언어의 외부에서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내부에서 그 일부로서 구조 전체의 작동 및 오작동 가능성을 지시한다.
김혜순의 시에서 세계는 어떤 오류가 반복되는 중인 곳이다. 첫 시집부터 근작인 열네번째 시집까지 시간을 가로질러 그의 시에는 뺨을 때리고 뺨을 맞는 이들이 반복하여 등장한다. 인물을 바꾸어 되풀이되는 이 장면은 왜 맞아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는 이의 혼란과 이해 없이도 때릴 수 있는 이의 기묘한 우월감을 거듭 시의 복판으로 부른다. 여기에서 오류는 맞는 이와 때리는 이 누구도 왜 이 장면이 반복되고 있는지, 무엇이 ‘문제’이고 ‘잘못’인지를 “기억조차 할 수 없게 되”(「몰매」, 『별』)어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공백이 발생하는 그 오류의 지점에서 김혜순의 시는 웃음소리를 낸다. ‘와하하’ 하는, 통쾌하게 입 커지는 소리가 아니라, “낄낄낄”(「제목은 가뭄」, 『별』), “키득키득”(「사랑에 관하여」, 『별』), “깔깔깔”(「국사공부」, 『별』), “힛쭉힛쭉”(「진실」, 『별』)과 같이 감추고 내리누르는 소리이다. 첫 시집에 이어 두번째 시집까지 이어지는 그런 웃음의 자리에는 “낄낄거리며 나를 끌고 가/가로등 아래에 패대기치”(「殉葬」, 『허수아비』)는 사람과 “달려와 내 눈깔을” 찌르고는 “깔, 깔깔, 깔 흩어지” (「敵 1」, 『허수아비』)는 “아이들”처럼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길 좋아하는 이들의 비열이나 “자, 같이 웃어요. 급히 웃으라니까요. 웃기라도 해야잖아요?”(「말」, 『별』) 스스로 명령하며 세계의 폭력을 자조적으로 견디는 이들의 모멸이 있다. 그 비열과 모멸로부터 오류를 읽어낼 언어를 찾아가면서 김혜순의 시는 “키득키득/키득/당, 시, 늬, 내, 장, 은, 파, 라, 쿤, 너, 무, 굴, 멌, 어/당, 시, 늬, 내, 장, 은, 노, 라, 쿤, 황, 다, 리, 야”(「사랑에 관하여」, 『별』) “비명을 감추고/한껏 웃어보려고 입술을 비틀며/시궁창 같은 사연”(「사연」, 『허수아비』)을 읽어내려는 시도를 반복한다.
그러나 “〈A가 좋아〉라고” 말하면 ‘B’가, ‘C’가, ‘A’가 달려와 둥 그런 순서대로 ‘나’를 때리는 세계(「몰매」, 『별』)에서 오류를 읽어낼 언어는 발견될 수가 없다. 애초에 무엇이, 어떻게, 왜 잘못된 것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언어화하여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사실을 사실로서 말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무엇이 ‘사실’이고 ‘잘못’인지를 결정하는 철저한 언어의 통제 속에서 정확한 언어를 발화할 수 도, 정확한 언어로 읽힐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곳, 세계 제일의 창작소/끝없이 에피소드들이 한 두릅 썩은 조기처럼/엮어져 대못에 걸리는”(「그곳 1」, 『지옥』) 곳에서 “드디어 발가벗기고 매 맞고/무거운 이야기를 옷인 양 입고/몸 위로 가득 글씨를 토하고야”(「그곳 2—마녀화형식」, 『지옥』) 마는 이들은, 주어진 언어만을 ‘글씨’로 쓸 수 있는 가운데 ‘사실’의 언어를 “─님금임 는귀 귀나당 귀”처럼, “내 입 속에 다시 처넣고/내 입술을 비틀어 닫”(「되돌아오는 말」, 『허수아비』)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쟁보다 더 무서운/입다물고 귀 막은 적막강산이”(「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허수아비』) 되어, “빈 들판에” 으름장 놓는 “허수./아비”이자, 실수(實數)가 아닌 ‘허수(虛數)’, 그것을 세우고 입히고 거는 ‘아비’가 구축한 “침묵에게 당”(「敵 2」, 『허수아비』)하면서, 김혜순의 시는 언어 없는 상태에 놓인다.
오류가 무엇인지 알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며, 해결할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에서도 여전히 오류인 경우가 있다. 오류를 인지하고 구체화하는 언어가 ‘실행’의 단계에 놓이지 못하는 때, ‘실행’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일 것이다. 김혜순의 시는 세계의 비루를 알고,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자신이 왜 어떤 일을 어떻게 할 수밖에 없으며 해야만 하는지를 찾고, 언어화되지 않은 형태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지만, 그것이 언어로, 언어를 통해 실수(實數)로 실행되지는 않는 상태에 공간적으로, 또 시간적으로 갇힌다. “앞에서 벽이 다가온다/뒤에서 벽이 다가온다/그 가운데 내가 까마득히 매달려/흔적 없이 사라졌다가/다시 너에게 벽이 될 내가 매달려” (「 벽이 다가온다」, 『음화』), ‘낄낄’ 웃고 ‘침묵’하는 자신 역시 언어화되지 않은 오류의 일부로서, 오류를 재생산하면서, “리플레이, 리플레이, 리플레이”(「또 하나의 타이타닉 호」, 『달력』) ‘벽’을 수평으로 수직으로 물려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폐쇄된 오류의 복판에서 김혜순의 시는 입속에 갇힌 언어 대신 끝내 무엇을 어떻게 분출해낼 것인지를, 세계의 언어에 어떤 ‘답장’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 고민 가운데에 “코끼리 부인”이 있다.
네가 보내온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코끼리 한 마리 풀어보낸다/얼마나 증오가 깊어야/두 눈동자 사이/미간에서 팔이 돋아나/통나무 둥치같은 것/마구 감아올리게 되는지//맷돌 같은 어금니로 무시무시한/웃음을 갈아 삼키면서/탱크처럼 아무거나 밟아 터뜨리고/꿈틀거리는 것이면 무엇이건/감아올리게 되는지//얼마나 절망이 깊어야/몇날며칠 머리를 받치고/눈물을 받던/잿빛 베개가 두 귓가에 들러붙어/펄렁거리게 되는지/네가 보내온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사방에서 날아오는 소문의 화살이/귀찮아 죽겠다는 듯/두 베개를 연신 펄렁거리는/코끼리 한 마리 풀어보낸다/코끼리 발자국 닿을 때마다/글자들이 마구지워진다//다시 또 얼마나 숨 막고 기다려야/앙다문 입술 밖으로 불현듯/불멸의 상아가 치솟게 되는지/글자들의 숲속에 구멍 뻥뻥 뚫린다//이제 눈물 방울 얼룩진 편지를 찢어버리련다/그리고 창문 열어 코끼리처럼 딱딱하게/들어찬 잿빛 연기도 날려보내련다/아, 그러나 이 뾰족한 상아를 입가에 매단 채/어떻게 거리로 나가지?
—「코끼리 부인의 답장」(『사랑』) 전문
‘너’의 언어 앞에서 ‘나’는 깊은 증오와 절망의 힘으로 ‘너’의 글자들을 지우고, 글자에 구멍을 “뻥뻥 뚫”어 그 ‘허수’의 텅 빔, 혹은 복자(伏字) 같은 언어 간섭의 흔적을 물리적으로 새겨 넣으려 한다. 그럴 수 있는 거대하고 힘이 센 신체로 ‘코끼리’를 상상해내는 ‘나’의 전략은 그러나 ‘너’의 편지에 “눈물 방울 얼룩”을 남기거나 편지를 찢어버릴 따름이다. 코끼리의 거대한 몸은 “잿빛 연기”로 흩어져버리고, 코끼리의 흔적은 “다시 또 얼마나 숨 막고 기다려” 돋아난 “뾰족한 상아”로만 ‘나’의 입가에 남아 있다. ‘나’는 이때 상아를 단 입으로 무언가를 ‘말’하는 대신, “이 뾰족한 상아를 입가에 매단 채 어떻게”든 “거리로 나가”는 방식으로, 그 ‘뾰족함’ 자체를 ‘너’과 세계의 ‘거리’에 보이는 것으로 끝내 ‘답장’을 ‘보이고자’ 한다. 얼굴과 상아와 나가겠다는 마음을 다 준비해둔 상태에서 김혜순의 시는 다시, “어떻게 거리로 나가지?”라며 ‘실행’을 가능하게 할 방법을 묻는다. 이때 물음 속에서 연기로 흩어진 ‘코끼리’를 그는 “코끼리 부인”으로 호명한다. 시의 제목인 “코끼리 부인의 답장”에만 슬며시 적힌 이 ‘부인’이라는 단어는 ‘여자’ ‘어머니’ ‘딸’ 등의 단어로 옮아가면서, 김혜순 시의 언어적 세계와 세계에 대한 언어적 응전의 방법론의 뾰족한 상아가 된다.
‘실행’이 되지 않는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프로세서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닌지 체크하거나, 기체(機體)가 놓여 있는 환경 자체를 점검해야 한다고 한다. “내 코끼리마저 파먹어치울 것들”(「나는 고것들을 고양이라 부르련다」, 『사랑』)로 가득한 세계의 복판에서 “두꺼운 자물쇠로 잠긴 저 푸른 고막이 통치하는 나라”가 “무섭다”(「티티카카」, 『거울』)라고 하면서, 김혜순의 시는 스스로의 언어가 언어를 ‘실행’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지, ‘실행’을 위한 단계에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한다. 자신이 ‘실행’하고자 하는 것을 위한 조건들을 톺아보면서, 코끼리 ‘부인’의 상아를 가지고서. ‘여자’ ‘어머니’ ‘딸’과 같은 단어들은 ‘오류’의 일부로서, ‘오류’를 해결하기 위한 뾰족한 출발점으로서 김혜순 시의 중심이 되어간다. 이유 없는 ‘죄책감’에 늘 뺨처럼 시달리는 방식으로, 그러나 그러한 감정마저도 ‘오류’의 일부임을 알면서.
미치게 하는 말
김혜순의 시는 그 첫 시작에서부터 신체적·정신적·감정적 폭력을 당하는 위치에 대한 감각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그 위치는 여성의 위치와 겹쳐 있지만, 위치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한쪽의 특질보다는 폭력이 반복되는 관계 자체의 기이한 특성이었다. 폭력이 아닌 ‘사랑’의 관계에서도 그 기이함은 계속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관하여 나누는 대화에서, ‘사랑’으로 주고받는 언어에서 언어의 발신자와 수신자는 언제나 ‘문답’ 관계나 주종 관계, 포식자–피식자 관계, 선후 관계, 미숙–발달 관계 등 불균형의 관계에 놓여 있다. 근본적으로 대결의 구도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그 기울어짐은 “애벌레한마리와애벌레한마리가애벌레사랑을하는데애벌레가나비가되어도애벌레처럼사랑할까애벌레를벗어놓고나는날아오른다신나게애벌레를알아볼까나비가애벌레는껍질일까애벌레를벗어놓고너도날아오르는군애벌레는어머니일까아들일까애벌레두마리와나비두마리는어떻게서로사랑을해결할까”(「사랑에 관하여 2」, 『허수아비』) 같은 질문처럼 숨 가쁜 물음으로 반복된다. 이런 물음에는 스스로 결정하기보다 주어지거나 자동적으로 발생해버리는 관계의 구도에 거듭 묶여 있는 자의 난처와 곤혹이 담겨 있다. 김혜순의 시가 그러한 ‘대결’의 구도에 계보의 문제를 더하여 반복을 시간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은 ‘딸’과 ‘엄마’ ‘어머니’에 대해 말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거울 안에 어머니가 앉아 계시고/거울을 열고 다시 들어가니/그 거울 안에 외할머니 앉으셨고/외할머니 앉은 거울을 밀고 문턱을 넘으니/거울 안에 외증조할머니 웃고 계시고/외증조할머니 웃으시던 입술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니/그 거울 안에 나보다 젊으신 외고조할머니/돌아앉으셨고/그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또 들어가니/또다시 들어가니/점점점 어두워지는 거울 속에/모든 윗대조어머니들 앉으셨는데/그 모든 어머니들이 나를 향해/엄마엄마 부르며 혹은 중얼거리며/입을 오물거려 젖을 달라고 외치며 달겨드는데/젖은 안 나오고 누군가 자꾸 창자에/바람을 넣고/내 배는 풍선보다/더 커져서 바다 위로/이리 둥실 저리 둥실 불려다니고/거울 속은 넓고넓어/ 지푸라기 하나 안 잡히고/번개가 가끔 내 몸 속을 지나가고/바닷속에 자맥질해 들어갈 때마다/바다 밑 땅 위에선 모든 어머니들의/신발이 한가로이 녹고 있는데/청천벽력./정전. 암흑천지./순간 모든 거울들 내 앞으로 한꺼번에 쏟아지며/깨어지며 한 어머니를 토해내니/흰옷 입은 사람 여럿이 장갑 낀 손으로/거울 조각들을 치우며 피 묻고 눈감은/모든 내 어머니들의 어머니/조그만 어머니를 들어올리며/말하길 손가락이 열 개 달린 공주요!
—「딸을 낳던 날의 기억─판소리 사설조로」(『허수아비』) 전문
‘나’는 출산이라는 신체적·정신적·감정적 경험을 매개로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연쇄를 상상적 계보로 바라보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유사성을 통해 경험을 연결된 것으로 인지하는 것뿐 아니라, 마주 본 두 거울이 서로를 비추어 무한히 반복되는 똑같은 상처럼 특정한 신체 이미지가 원근법을 가장한 평면 위에서 반복되고 있음을, 자신이 낳은 “공주” 역시 출생의 순간 이미 그 평면 속에 놓여버릴 수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다. “피 묻고 눈감은/모든 내 어머니들의 어머니/조그만 어머니”인 아이는 ‘어머니’로 호명되는 존재들의 명맥 속에서 첫 이름이 불리는 자이자, 그 자신의 미래를 ‘어머니 되는’ 과거에 저당 잡힌 ‘딸’이다.
그러나 이 계보학적이고도 평면적인 연쇄에 관한 인식에 머무는 대신, 김혜순의 시는 그 안에서 다시 반복되는 기이한 관계성과 반복되어온 것을 초과하는 다른 관계, 혹은 다른 언어적 가능성을 본다. ‘거울’ 속, 없는 깊이를 가로지르는 이미지는 ‘사실’을 비추는 것이기보다 몸의 범위를, 몸을 바라보는 시야의 폭을 결정해온 언어 구조의 시간을 비춘 것이고, 어떤 언어는 그러한 구조 자체를 다른 시선으로, ‘답’이 아닌 ‘오류’로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시야를 좁게 가져라/저 까만 우물을 향해 투신해라/영혼을 아무 데나 흘리고 다녀선 안 된다”, 정답처럼 명령과 금지의 메시지를 건네던 “엄마”의 “말씀”은 “그래서 나도 엄마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자동화된 자기 인식으로 연결된다. “어린 자식의 시야에 칸을 지르고/널푸른 영혼에 금을 긋고/우물을 파는/자못 교훈적인 엄마가 되”(「엄마」, 『허수아비』)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나’는 “어제 들은 말을/ 내일 또 내가 지껄이고/내일 한 말을 어제 또 듣게 되리라”는 체념을 어쩔 수 없는 전망처럼, 약속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에게 “어린 자식”은 그러한 전망을 상속받은 적 없는 개별의 신체, “여기/갸우뚱거리며/엄마 배고파”라고 말하는 낱의 상태를 상기시킨다.
‘배고프다’라는 기초적이고 단편적이며 꾸밈없는 자기표현은 ‘나’에게 “처음 들어본 소리”(「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더니」, 『지옥』)처럼 ‘말씀’ 이전의 감각을 휘젓고, ‘거울’에 비친 겹겹의 신체가 어떤 ‘말’들에 갇혀 자신의 상상에, 전망에 도착했는가를 추적하게 한다. 그 단순한 ‘배고픔’이 ‘나’로 하여금 어떤 신체들을 ‘먹을 것’으로 제공하는 ‘모체(母體)’의 역할과 ‘엄마’라는 호칭에 머물게 할지라도, 배고픈 신체 자체는 그것을 “조그만 어머니”로 칭해버리는 오랜 서사 구조, 그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자동 연결되는 이미지 자체를 의문에 부치기 때문이다. ‘말씀’을 경유하여 ‘거울’을 보기 전에, 애초에 ‘거울’에 비친 상으로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기 전에 개체는 ‘처음’ 어떤 신체감각을 간직하는가. 어제에서 내일로, 내일에서 어제로 동그랗게 순환하는 언어의 복판에서 ‘나’는 그런 ‘처음’을 기억하거나 회복해낼 수 없지만, 끝내 상상해보려는 작업을 개시한다. 김혜순의 시는 스스로도 호명하는 ‘어머니’ ‘딸’ ‘여자’ 같은 언어가 특정한 ‘말씀’들을 입고 있는 코드라는 사실, 그 코드가 활용되어온 시간의 궤적, 코드화가 지운 것은 무엇이고 ‘처음’으로 돌아가 복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 방법은 무엇인가를 복합적으로 살피면서, 1) 세상이 반복하는 ‘엄마’와 ‘딸’과 ‘여자(女子)’ 2) 자기 안에서 반복되는 ‘엄마’와 ‘딸’과 ‘여자’ 3) 반복이 중단되는 미래의 ‘엄마’와 ‘딸’과 ‘여자’, 세 가지 시선의 층위를 각각의 단어에 겹쳐 단어가 하나의 상에 머물지 않도록 한다. 거울의 평면은 그런 ‘불일치’를 통해서 그 자신의 오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김혜순 시의 궤적을 거칠게 정리한다면,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는 연극적인 무대 위에서 인물이 겪는 것들에 집중하고,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畫』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은 그 인물의 배경이 되는 무대의 조건을 파악하는 것에 집중하며, 『불쌍한 사랑 기계』부터는 인물에 배경이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 인물의 서사 자체가 어떻게 ‘무대화’되어 있는지를 살핀다. 이 궤적은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에서 본격적으로 ‘여자’ ‘딸’ ‘엄마’를 하나의 ‘역할’로 바라보고 그것의 배경을 살피면서, 동시에 ‘역할’에 대한 자신의 감각이 어떻게 배경의 논법에 종속되어 있는지를 검토하는 작업으로 나아가는 것과 맞물린다. 김혜순의 시는 “오늘밤 자정 뉴스는 오십 명의 넥타이 맨 남자들을 보여주었지만/여자들이 맡은 배역은 불에 타 죽은 아이를 껴안고/몸부림치며 우는 역할뿐”(「물 속에 잠긴 TV」, 『달력』)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 ‘사실’에는 “수평아리는 모두 죽여 참새구이집으로” 보내고 “암평아리는” “키워서 잡아먹”기 위해 “모두 기숙사로”(「엄마는 깃털 샘인가 봐요」, 『달력』) 보내듯 “다만 허공에 주형을 뜨듯 찍어보는 육체의 얽힌 형식이 있을 뿐”(「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달력』)이라고 말한다. ‘사실’을 답이나 약속이 아닌 ‘형식’의 문제로 바라보는 이 비평적 시선은, ‘형식’을 표면적 현상 혹은 실천의 차원을 넘어 ‘남자’와 ‘여자’, ‘수평아리’와 ‘암평아리’를 구분하고 분류하며 가치 분배하는 언어 구조 전체의 오류로 바라본다. 그 ‘형식’은 언어의 방식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언제나 언어를 매개로 기억과 계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메아리처럼” 자꾸만 되돌아오는 흔적으로 ‘형식’은 ‘나’에게도 새겨져 있어, ‘나’는 “나이 먹어서도” “이제 갓 암컷이 된 새” “그 새파란 시절로,/그리로 자꾸만 돌아가”(「메아리가 갔다가 오는 만큼, 그 만큼」, 『달력』) 스스로의 몸을 ‘암컷’으로 바라본다. “내 몸에 보초를 세우”고 “밖으로 나갈 수 없”게 하며 “나를 자꾸 상처로 가두”는 ‘너’의 언어를 경유하여, ‘나’는 자신의 몸을 “무늬 새겨진 몸”으로 인식한다. ‘여자’ ‘암컷’ ‘어머니’ ‘딸’ 같은 말들은 김혜순의 시에서 적히는 언어[文]인 채로 그것이 달라붙는 몸[身]을 대체해버리는 ‘문신(文身)’ (「文身」, 『달력』)으로 작용한다.
출근 지하철 안에서 새파란 처녀가/젖은 머리칼을 휘휘 내두르며/친구랑 떠들고 있다/신문 읽는 내 손등에 목덜미에/물이 뚝뚝 떨어져/ 옷 속으로 스며들었다/덩달아 신문도 젖어버렸다/소녀 시절/여러 번 같은 꿈을 꾸었다/누군가 붓에다 먹을 찍어/내 얼굴에다 자꾸 글씨를 썼다/눈을 떠보면(여전히 꿈속이었지만)/내 얼굴에 글씨를 쓰는 사람의/얼굴도 글씨로 가득했다/(그는 누구였을까)/(무슨 글자들이었을까)/실제로 출판사에 다닐 땐 내 입 안에/글씨로 엉킨 검은 실 뭉치가 가득 찬/날도 있었다/(결핵성 늑막염으로 가래를 퉤퉤 뱉고 다녔다)/ 집에 돌아와 목욕탕에서 거울을 보며/딸의 붓으로 얼굴에/글씨를 써 보았다/그러다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그 시절 내 얼굴에 글씨를/쓰던 사람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얼굴에 쓴 글씨」(『달력』) 전문
이 시에는 여러 겹의 ‘문신’이 있다. “처녀”가 “내 손등에” 물로 쓰는 자국, “소녀” 시절 누군가가 ‘나’의 얼굴에 먹으로 쓴 글씨, 성인이 된 ‘나’가 뱉지도 삼키지도 않으며 입안에 가득 물고 있던 글씨, “딸”의 붓으로 ‘나’의 얼굴에 직접 쓰는 글씨. 몸에 흔적을 남기는 이 자국들에서 글씨를 쓰고 글씨 적히는 사람들은 서로 무의식중에 관계되어 있고, 자신이 ‘쓰지’ 않은 글씨에도 도구로서, 매개로서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이 서로에게 새기는 ‘글씨’의 자음과 모음은 김혜순에게 언어 구조에 깊이 새겨진 “子母”(「전 세계의 쥐들이여 단결하라」, 『슬픔치약』), ‘남성’의 시선을 경유하여 ‘어머니 됨’의 프레임에 붙박인 여자의 모습으로 보인다.
“너는 여자로 태어났으니 귀도 뚫어야 하고/어깨에 뽕도 넣고, 땅에 못을 치듯 걸어야 할 거다/느닷없이 찾아온 숨을 들이쉬지 못 하는 고통!/그건 첨 들어보지? 그 속에서 아기를 밖으로 밀어내야 할 거다/아니면 아기를 떼고 땅에 머리가 처박힌 참새 신세가 될 거다”(「출석부」, 『슬픔치약』) 같은 말을 휘두르는 이들이 움켜쥐고 있는 것은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권력, 여하한 “신세”가 될 리 없는 남성 신체의 권력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신체의 문제가 어째서 권력이 되는가인데, 그 배경에는 가장 강력한 ‘문신’이자 세계 창조라는 근원적 ‘처음’에서부터 신체에 ‘글씨’를 새긴 성경의 언어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브”(「오늘의 이브」, 『음화』), 동정녀 “마리아”(「신기루」, 『거울』), “아베 마리아”(「오리엔탈 특급 정갈한 식당 서비스」, 『돼지』) 같은 익숙한 말들에는 남성 신체의 부분, 남성 신체의 흔적, 남성 신체가 깃들 공간으로 여성 신체에 이름을 붙이는 ‘아버지’의 시선이 새겨져 있으며, 그 시선의 범세계적 역사 내부에서 “여자로 태어”난 이들은 자꾸만 몸에 글씨가 씌어지는 신체, 이미 항상 “무늬 새겨진 몸”으로 치환된다. 이때 ‘글씨’는 사각의 벽이 세워진 자음(子音) ‘ㅁ’ 같다. “‘ㅁ’으로 끝나는 글자들 속에서 우글거리는 벌 떼/신부님 선생님 판사님 사모님 자궁님 트라우ㅁㅁㅁ 세탁기”(「웅웅」, 『첫』), 자궁을 ‘자궁님’으로 만드는 오래된 글씨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십자수와 레이스에 대한 강박”(「하나님의 십자수와 레이스에 대한 강박, 1」, 『슬픔치약』)과 그 언어를 입은 “그녀의 레이스와 십자수에 대한 강박”(「그녀의 레이스와 십자수에 대한 강박」, 『슬픔치약』)이 ‘그녀’의 몸에 오늘도 ‘ㅁ’을 그리는 중이다.
그러한 언어적 결박이 ‘어머니’가 “한 천 년째” “휘젓고 계”신 ‘바다’라면, “그러나 시방은 다시금 내가 그 바다에서 걸어나올 시각” (「어머니 달이 눈동자를 만드시는 밤」, 『달력』)이다. “만물은 큰 자궁의 영생을 위해 작은 자궁들로 한생 지분거리다 가는 것”(「맨홀인류」, 『슬픔치약』)이라는 문장이 ‘창조’ 이래 세계가 어떤 신체들에 반복하여 새겨온 글씨의 ‘바다’라면, 몸은 이미 항상 그 ‘바다’에 있던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고, “다시금” “걸어나올” 수 있는 동체(動體), 독립된 신체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창조한 부모에게 ‘조그만 어머니’ 같은 말 대신 ‘배고픔’을 전하는 아이처럼, 김혜순의 시는 ‘처음’을 기억하고 상상하여 ‘여자’를 개체(個體)로 구하고자 한다. “자궁님”의 “이야기 속으로 가라앉기만 하던 여자/아직도 내 몸 밖으로 한번도 나와보지 못한 그 여자”를 “구해주는 상상” (「유화부인」, 『거울』) 혹은 ‘여자’인 ‘나’가 스스로를 구하는 상상은, ‘여자’를 ‘이야기’에 속하는 ‘공통의 몸’으로 호명하기를 거부하는 것에서, 복수(複數)를 하나의 말로 통칭하는 언어를 “누구와도 나눌 수가 없”(「에미애비」, 『첫』)는 개별의 몸들로 풀어내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돼지다, 도무지 밖을 본 적 없는 돼지다, 내내 돼지다, 우울한 돼지다, 늑대가 온다 외치는 돼지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돼지를 왕으로 뽑는 돼지다, 오 멋진 시궁창! 외치며 베개를 껴안는 돼지다, 뒈질 돼질 낳아주신 엄마를 잡아가면 좋겠네 혼자 웃는 돼지다, 온 세상이 다 쌀죽이라고 생각하는 입술이 부르튼 돼지다, 4XL 돼지다, 침대에 꽉 찬 돼지다, 그 이름 도무지 돼지다, 바다 건너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떠는 돼지다, 고개를 들어본 적 없는 예예 돼지다, 밤하늘 드넓은 궁창을 우러르기만 해도 무서워 뒈져버리는 돼지다, 뒈지는 돼지는 돼지라고 생각하는 뒈지는 돼지다//팔다리가 축 늘어진 돼지, 꼬리를 가랑이 사이에 감추고 쿨적거리는 돼지, 허공을 묶었는데 왜 이리 무거워 돼지, 겨드랑이에 손을 넣으면 뜨거운 구름 냄새가 나 돼지, 부드러운 도대체 돼지, 아늑한 이윽고 돼지, 일평생 나를 타고 놀아 돼지, 쥐가 새끼를 갉아먹어도 아늑한 돼지, 눈동자에 무엇을 껴입었니 돼지, 왜 돼지가 돼지인 줄 모르나 돼지, 사진은 아는데 거울은 아는데 너만 모르는 돼지, 한번도 창문을 내다본 적 없는 돼지, 이빨 뽑힌 돼지, 탄식 돼지, 후회 돼지, 이빨 뽑히고 꼬리 잘린 다음 입 안에 혼자 남은 외로운 혀 돼지, 그러나 입만 벌리면 돼지 돼지 소리가 나는 돼지, 고기 돼지
—「돼지라서 괜찮아」(『돼지』) 부분
인용된 부분에서 ‘돼지’라는 단어는 마흔 번 사용된다. 주어가 아니라 형용되는 명사의 위치에서 반복되는 ‘돼지’는, 같은 위치에서 나열되고 있음에도 개별의 돼지 개체들로 생각되기보다 ‘돼지’라는 종에 관한 복수의 서술로 인식된다. 이를테면 ‘돼지’라 불리는 돼지들은 “모두 이름이 같은 돼지”이고, 이름을 붙이고 부르고 맥락 속에 배치하는 인간의 시선에서 특히 “고기 돼지”이다. “이 품위 없는 단어 돼지”(「엘피 공장에서 만나요」, 『돼지』)는 개체를 지시할 때에도 그것의 종(種) 전체를 가리키듯 사용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비유적 전략을 항시적으로 취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돼지’를 부르는 세계를 김혜순의 시는 “수사학이 헌법인 나라”라고 부른다.
국경과 국법과 국민이 있을 이 ‘나라’에는 여러 비유가 있다. “북극곰 의인화, 경찰관/술 취한 토끼 의인화, 피의자”처럼 비유에 기대어 힘을 부리고 또 잘못을 피해 가는 국민들이 있고, “유령으로 태어나 유령으로 죽는 사람들”처럼 비유의 방식으로 이미 국민에서 제외된 존재들이 있다. ‘죽음’도 의인화하여 “흰옷 입은 천사”의 “현현” (「Y」, 『돼지』)이라 말하는 이곳에서 어떤 비유는 “고래”처럼 “유행” (「올해는 고래가 유행이야」, 『돼지』)하기도 하고, 국민들은 유행을 따라 미리 공유되고 전달되며 학습되는 코드로 소통한다. ‘당신’과 ‘나’는 모두 그런 언어적 국경의 내부에 있다. ‘당신’과 ‘나’가 “대화”를 나눌 때 “사그락사그락” 오가는 언어는 “당신인 척 하는 빈집과 나인 척하는 먼지”의 언어이며, 빈집에 쌓인 먼지처럼 가까운 두 사람의 비유적 거리는 사실 “전화”를 걸고 받을 만큼 떨어져 있다. 그것을 때로 “나는 모른 척한다”(「날씨님 보세요」, 『돼지』). 먼 거리의 서로를 연결하는 ‘전화’처럼 언어는 가까운 기분을 만들어주어야 하고, 그런 기분을 나눌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코는 코끼리/눈은 눈끼리/입은 입끼리/귀는 귀끼리”인 수사학의 세계에서 ‘나’는 “코끼리 눈을 찾아” “냄새나는 코끼리를 벗어나고 싶” (「공주여 공주여 잠자는 코끼리 공주여」, 『돼지』)어 하기도 한다. “코는 코끼리” 묶어 부르는 ‘코끼리’라는 말이 몸에 새겨진 글자처럼, ‘ㅁ’처럼 느껴질 때에, 그 사각의 벽 안에서 “왜 내가 벽 보고 나를 버려야 돼요?”(「돼지라서 괜찮아」, 『돼지』) 물으면서 말이다. ‘돼지’라는 단어를 반복하는 위의 시적 작업은 ‘돼지’의 어떠함을 묶어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묶음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을 시작하기 위한 것이다. “죽음의 자서전”이 서로 다른 ‘너’들을, ‘너의 죽음’들을 개별로 부르고 환기하듯(『죽음』), “나는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짖을 겁니다”(「4월이 오면」, 『돼지』)라고 김혜순의 시는 말한다.
“나는 돼지”라는 언뜻 비유적인 문장은 이를테면, ‘나=돼지’라는 ‘끼리’의 구도를 만드는 ‘글씨’인 듯 그것을 초과하기 위한 시작으로 읽힌다. 비유의 한 항인 ‘나’는 인간의 통칭도, 여성의 통칭도 아닌 채로 개체의 상태를 지시하거나 지향한다. 다른 쪽 항인 ‘돼지’는 반면 돼지 종을 통칭하는 단어, 개별 돼지를 ‘나’로 사유하지 않는 비어 있는 이름의 자리에서 임의로 활용되는 비약적 단어이다. 단수와 복수를 등식으로 만드는 ‘나=돼지’라는 말은 그 불균형과 비약에 대해 생각할 때 다시 복수를 단수로 푸는, ‘돼지=나’라는 말의 전환을 생각할 수 있는 언어적 출발점이 된다. ‘돼지’의 죽음을 말하면서 ‘돼지’ 종의 ‘처분’이나 ‘돼지고기 가격 폭등’으로 죽음 전체를 통칭하는 것이 아니라, ‘돼지’의 몸을 가진 무수한 ‘나’가 어떤 낙인 속에서 ‘종’으로서 생매장되는지, 그때 ‘돼지’라는 단어는 어떻게 비유의 방법을 지키는지를 김혜순의 시는 돌아본다. “나 나 나 나는 죽지만 엄마아빠 영원히 살아요”라고 쓰면서 그 문장이 ‘나 나 나 나는 죽어요’로 읽힐 수 있도록, ‘영원히 사는’ 돼지 종의 계보가 아니라 “나 나 나 나” 사이를 벌려 글씨를 다시 쓸 수 있도록 말이다. 그것은 나아가 “나는 돼지”라고 말하는 ‘나’의 언어 역시, ‘돼지’에 대칭되는 ‘인간’ 종, 혹은 비유적으로 가까운 ‘여자’ 전체를 아우르는 일인칭의 것으로 읽히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일과 관계된다. 김혜순의 비유는 묶어 사유하는 ‘끼리’의 방법 대신, 개별과 개별의 문제에 관해 생각하기 위한 방법으로 만들어진다.
그러한 방법으로 “나 나 나 나”(「돼지라서 괜찮아」, 『돼지』)를 적는다고 해서 ‘돼지’가 단번에 ‘나’들로 풀려날 수 없다는 것을 김혜순의 시는 잘 알고 있다. 하나씩 띄어 글자를 적어도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4월이 오면」, 『돼지』) 여전히 통칭하는 단어를 개별인 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모든 것에 ‘나’의 개별성 을 쥐여줄 수 있다고 단순히 믿어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언어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의 첫 자부터 마지막 자까지 지우기로”(「두 마귀」, 『돼지』) 해도 국어사전의 언어로 모든 말은 쓰이고, 사람은 그 사전에 따라 구분되고 분류되며 분배되는 시스템에 의탁하여 세계와 자신을 호명하고 인식한다. 모든 것을 ‘나’로 부르는 것이 ‘사전’의 방법을 초과한다면, ‘사전’에 기댄 언어 구조 안에서 그 ‘초과분’은 쉽게 달성되지 않고, 적어도 아직은, 그래서는 안 되기도 하다. ‘사전’을 따르지 않아도 그것이 문법으로 작동하는 세계에서 경험적으로 우리는 다시 ‘사전’의 방식으로 모이게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것을 벗고 떠도는 것이 또 나라고 굳게 믿으면서” “돼지 버리고 가라는데” 자신도 모르게 “돼지 데리고” 가듯, “이제 그만 새가 되라는데/몸속에서 새가” 울듯, 김혜순의 시는 “내가 바로 저 여자야”(「돼지라서 괜찮아」, 『돼지』) 다시 말하게 되는 장면들의 복판에 서 있다. ‘나=여자’를 ‘여자=나’로 연결하여 ‘여자’라는 글씨로부터 놓여나는 ‘나’들을 말하려 해도, 돼지의, 새의, “저 여자”의 울음이 ‘저 여자=나’라는 등호를 되불러 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그 등호로 돌아가도록 하는, “〈A가 좋아〉”라고 말하면 ‘B’가, ‘C’가, ‘A’가 달려와 둥그런 순서대로 ‘나’를 때리는 글씨의 힘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담임의 숨에서 나던 냄새/결혼식 날 주례의 숨에서 나던 냄새/여자를 모욕하려고 쓴 글에서 나던 냄새//이 옷과 같은 냄새//내가 기록한 것은 내가 언제나 출발했음을/그러나 붙잡혀 돌아온 곳은 언제나 이 옷 속이었음을//토네이도를 묶어두는 것은 범죄야/ 끓는점에 도달한 액체를 가둬놓는 것은 재해야//나에게 우파에 좌파에 모더니스트에 친일파에 온갖 병을 뒤집어씌워도/나는 울지 않아 대신 내 콧물 가래나 받아//물고기에게 그물을 옷이라고 하다니/물고기에게 튀김옷을 외투라고 하다니//이 옷을 입으면 라디오 안에 들어간 것 같아/전 국민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아//사과할게요 전 국민이 사과를 바란다니/평생 사과할게요 앞으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모두 새빨간 사과예요//왜 사과(내)가 사과(너)한테 사과를 해야 하니?/사과(너)랑 사과(나)랑 무슨 사과(상관이)니?//두 손을 묶고 소매를 묶은 옷//단 한 벌//저절로 기도하는 자세가 된 내 두 손으로 찌른 내 심장에서 나는 냄새/빙 둘러앉아 갓 잡은 돼지를 나누던 소수민족 아낙의 손에서 나던 냄새//조명이 도수 높은 렌즈로 세례를 베푸는 방/그러나 아무도 옷을 입고 이 방에 들어올 순 없어//새들도 깃털을 벗고/물고기도 비늘을 벗어야 해/나무도 물론/내 방에선 무조건 누드야//오래 낀 가죽 장갑이 나에게 뻗어 올 때/훅 끼치던 화장실 냄새/땀으로 부글부글 끓는 옷냄새//때려봐/때려봐/새는 이미 날았어//네가 친 것은 그저/옷 입은 허공이야//옷 속이 훤하잖아
—「구속복」(『날개』) 전문
지금 여기에는 거부해도, 버려도, 벗어나려 해도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결혼식에서, 수치와 속죄를 강요하는 분위기 속에서, 수치를 모르는 렌즈들 너머 구체적인 사람들의 눈알 속에서 무시로 닥쳐오고 덧씌워져버리는 ‘여자’라는 단어가 있다. 그리고 ‘여자’를 둘러싼 ‘수사학’과 그 수사학이 지배하는 문법의 구체적인 현장들이. 개별의 신체는 그 수사학이 사라지지 않는 한 끊임없이 ‘여자(女子)’로, 세계를 이루는 ‘자모(子母)’로 휩쓸려 들어가고, 그 아래에서 글씨 씌어지고 무늬 새겨지며 유사한 경험 속으로 내몰린다. “여고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울면서/나가 나가 내 방에서 나가/행진할 때 제일 눈물이” 나고, 그렇게 “우는 사람이 우는 사람에게/얼굴을 기울여 눈물로 당겨주”(「초」, 『날개』)는 마음은, ‘여자’라는 코드를 나눠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란 적 없는 그 코드의 벽 안에서 ‘여자’에게 발생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너무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김혜순 시의 ‘나’는 “아빠, 너”의 죽음을 마주하며 “시작도 없고 마지막도 없고/이미도 없고/아직도 없고/여자도 남자도 없고/아빠도 자식도 없”이, “그래서 평평하”고 “그래서 무한”한 죽음 이후의 세계가 실은 모든 사람의 시작점이었음을, “모두 평등”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것임을 기억한다. 그리고 언어가, 언어가 분배해낸 결과로서의 세계가 날개를 꺾고 발을 자르고 ‘ㅁ’ 속에 가두는 장면을 마주하는 그 “슬픔이 내 몸보다 클 때”, 평평하고 무한했던, 평평하고 무한해질 “이미 죽은 내가”(「작별의 공동체—작별의 신체」, 『날개』)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일에 관해 말한다. 그가 시의 언어를 통해, 거듭 글씨를 적는 행위를 통해 하는 일은, “내 몸”이라는 ‘나’의 단위를 태워 “내 두 눈”에 빛을 켜고 “이 불 꺼뜨리면/ 천지의 새들이 다 날개를 펼 수 없을 것 같”(「초」, 『날개』)다고 여기는 것, “내가 계속 적지 않으면 떨어져버리는 새를 생각”(「작별의 공동체—해파리의 몸은 90퍼센트가 물이다」, 『날개』)하면서 “내가 버린 여자들”을, “여자”“들”을 “대면”(「여자의 여자」, 『날개』) 하는 것이다. 날개를 꺾고 발을 자르고 ‘ㅁ’ 속에 가두는 글씨에게 “새는 이미 날았어//네가 친 것은 그저/옷 입은 허공이야”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여자’라는 말을 흔들며 “옷 속이 훤하잖아”(「구속복」, 『날개』) 하고 일러주며 ‘이미’ 가벼울 수 있을 때까지.
결국 김혜순의 시가 감당하는 질문, 김혜순의 시를 경유하여 오늘의 언어가 마주해야 하는 물음은, 글씨 씌어진 경험으로 모이는 자리에서 그 원인과 배경과 조건으로서의 언어를 어떻게 부수어낼 것인가, ‘여자’라는 ‘구속복’으로부터 어떻게 날아오를 것인가이다. 그 질문을 김혜순의 시는 ‘엄마’와 이별하는 시간을 가로질러 거듭 되묻는다. “엄마를 망할 딸에게 물려”(「목젖과 클리토리스」, 『지구』)준, “시야를 좁게 가져라/저 까만 우물을 향해 투신해라/영혼을 아무 데나 흘리고 다녀선 안 된다” “자못 교훈적”(「엄마」, 『허수아비』)이었던 ‘엄마’의 죽음 앞에서 ‘나’는 “지구를 가득 뒤덮은 사람들이 각자의 엄마를 부르는 소리”(「잊힌 비행기」, 『지구』)처럼 ‘엄마’를 부른다. 그 마음 안에서 ‘엄마’는 오래 이어져온 ‘어머니’이고, ‘여자’이고, “밀크”(「엄마는 나의 프랑켄슈타인」, 『지구』)로서 아주 무거운 글씨다. “나는 학생들에게 너희의 엄마에 대한 시는 왜 다 비슷하냐고” “엄마는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문장 밖에 있다고” 혹은 그래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끝내 “엄마를 쓰려고 하”(「천 마리의 학이 날아올라」, 『지구』)는 자신의 ‘비슷한’ 문장들을 바라보며 고통을 느낀다. 그 고통은 그리움의 모습이지만, 동시에 “아빠가 준 것, 내가 준 것, 동생이 준 것, 엄마, 그따위 것. 가루처럼 날아가버리는 것”을 벗고 “엄마는 엄마만 있는 사람”이라는 문장으로 엄마를 부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엄마는 엄마만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엄마’의 위치에서 이름 없이 불리는 사람에게 ‘엄마’라는 글씨만이 남는다는 의미처럼 읽히기도 한다. 동시에 이 말은 ‘나’에게 ‘엄마’인 이 ‘사람’은 이제 ‘엄마’를 벗고 그 자신만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다만 그 사람은 ‘나’에게 ‘엄마’이기 때문에 호칭이 ‘엄마’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언어는 그렇게 속도가 느리다. 하지만 이때 ‘엄마’는 가두는 말인 동시에 날아오르게 하려는 마음의 말이고, “멀리 날아가보실까? 집에 가실까?”(「죽음의 베이비파우더」, 『지구』) 그리움 속에서 그저 당신의 안녕을 바라는 말이며, “죽은 인형들의 몸을 차곡차곡 제단처럼 쌓”고 “그 위에 우리 엄마 인형을 올려 오줌 똥 싸게”(「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지구』) 하는 쓸쓸하고 다정하고 시원한 상상의 말이기도 하다. “엄마 하고 부르자 병실의 모든 모래인 여섯이 응 합창한다”면, “모래인은 한 알로서도 한 사람이고 억만 알로서도 한 사람이” (「Yellowsand/Blackletter/Whitebooks—*모래인」, 『지구』)고, 순서를 바꾸어, 억만 알로서도 한 사람이고 한 알로서도 한 사람이라고 김혜순의 시는 말한다. 그의 비유는 다시, 언어의 오류와 오류 너머의 개체를 같이 생각한다.
복수를 통칭하는 말이 개별의 자리를 지우고 언어적 코드값에 가두어버릴 때, ‘모래인’이라는 말은 항시적으로 복수의 상태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한 알 한 알이 다 색이 다른 화소話素”(「사막의 숙주」, 『지구』)인, 제각각의 ‘이야기’인 모래알들을 하나씩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개체인 동시에 종인 ‘사람[人]’임을 간과하지 않게 하는 언어의 가능성을 품는다. “모래인의 명사는 오직 하나, 모래”(「Yellowsand/Blackletter/Whitebooks—*언어」, 『지구』)라고 말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붙이고 싶은 마음”(「Yellowsand/ Blackletter/Whitebooks—*모래증후군」, 『지구』)에도 물론, 시달리면서. 그런 ‘모래인’의 새롭지 않지만 다르려는 언어가 “새들(그러나 모래)”(「새는 왜 죽은 사람을 떠올리게 할까?」, 『지구』)처럼 명사에 명사를, 복수에 단수를, 수사학에 수사학을 연결하며 단순하지 않아질 때, 김혜순의 시는 다시, 말하고자 할 것이다. “나는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짖을 겁니다.”
- 1) 이 글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또 다른 별에서』(문학과지성사, 1981, 이하 『별』),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문학과지성사, 1985, 이하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청하, 1988; 문학과지성사, 2017, 이하 『지옥』), 『우리들의 陰畫』(문학과지성사, 1990, 이하 『음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사, 1994, 이하 『서울』), 『불쌍한 사랑 기계』(문학과지성사, 1997, 이하 『사랑』),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문학과지성사, 2000, 이하 『달력』), 『한 잔의 붉은 거울』(문학과지성사, 2004, 이하 『거울』), 『당신의 첫』(문학과지성사, 2008, 이하 『첫』), 『슬픔치약 거울크림』(문학과지성사, 2011, 이하 『슬픔치약』), 『죽음의 자서전』(문학실험실, 2016, 이하 『죽음』), 『피어라 돼지』(문학과지성사, 2016, 이하 『돼지』), 『날개 환상통』(문학과지성사, 2019, 이하 『날개』),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문학과지성사, 2022, 이하 『지구』). 『어느 별의 지옥』은 문학과지성사의 복간본을 대상으로 했다.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시 제목과 시집 이름만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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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할 수 없는 균열 예측 불가능한 일들의 연속.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을 이렇게 표명한다면 분명 많은 이가 의문을 표할 것이다. 지난하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들을 자주 다루는 작가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해보건대 두 사람의 소설에는 독특한 사건들이 꽤나 자주 등장한다.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어딘가 금이 가고 삐걱대는 삶 앞에 속수무책으로 던져진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김지연의 인물들이 해괴한 일을 직접 나서서 ‘벌이는’ 사람들이라면, 안윤에게는 그러한 일을 마주한 뒤 이전과는 다른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 사람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위들은 어쩐지 무모하고 무용해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효용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러한 움직임들은 아무거나 믿거나 믿어야 할 것을 믿는 일을 거부하고, 확신할 수 없지만 옳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이들의 동작은 곧 일상의 균열을 마주하는 자세와도 같다. 사람들이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결함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온해 보이는 세계를 지적하려면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세계의 균열은 쉽게 발설할 수 없는 무언가다. 그렇다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까.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그러니 이상하고 유별난 인물들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잘 봉합된 듯 보였으나 결코 다 가릴 수 없었던 세계의 미세한 틈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2.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언뜻 보기에 『조금 망한 사랑』은 체념과 포기를 반복하는 망한 인생의 집합소 같다. 전세 사기, 금전 관계에 있던 친구와 애인의 배신, 실직과 구직난처럼 신자유주의와 투기 자본주의의 광풍에 베여 너절해진 인물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그런데 『마음에 없는 소리』(문학동네, 2022)를 읽었던 이들이라면 세태를 첨예하게 부감하고 표현하는 적실함뿐만 아니라, 농담과 같은 특유의 가뿐함이 김지연 소설의 또 다른 활력이라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테다. 이번에도 다소 무겁고 무기력해 보이는 사정들 틈에 유별난 광경들이 돋보인다. 이른바 김지연식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68)다. 몇 가지 사연만 잠시 나열해보자. 양육권을 포기했던 아이를 말 그대로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 다시 키워볼 생각을 하면서 죽은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여자(「좋아하는 마음 없이」). 빚만 잔뜩 남기고 떠난 전 여자친구에게 자꾸만 마음이 기우는 아이러니를 겪는 레즈비언(「반려빚」). 달밤에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포기」) 출입이 금지된 저수지의 한가운데까지 기어코 노를 저어 도달했다는 일화(「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까지. 소설의 인물들은 왜 자꾸만 이상한 일을 벌일까. 김지연의 소설은 삶이 이미 망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망해 나가리라는 잔인한 현실 공식을 동력 삼는다. 그곳엔 “반려빚처럼, 있어서는 안 되는 것도 태연하게 있”(「반려빚」, p. 104)고 누군가는 “있는 놈들을 위해 아주 싼값의 육체노동에 부려지”(「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 p. 42)지만 이토록 불합리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제도도 없”(「반려빚」, p. 96)다. 자본의 바깥을 떠올리는 일조차 돈의 힘에 기대야만 가능한 오늘날, 소설 안팎의 현실을 살피며 저항의 포기를 물었던 우리에게 김지연은 두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하나, 설명 혹은 주장하기. “소리 지르고 때려 부수는 것만이 화내는 방식인 건 아니잖아요.”(「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51) 둘, 괴상망측한 행동들을 늘어놓기. 그런데 짐작과 달리 이때의 망측(罔測)은 망할 망(亡) 자를 쓰지 않는다. 그물[网]과 망함[亡]이라는 뜻이 더해진 한자[罔]는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그러진 상태를 가리키면서도, 완전한 끝을 잠시 유예하는 힘을 발휘한다. 망측한 일은 낯부끄러울지언정 완전히 망하지는 않은 무언가다.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 역시 조금 망그러졌을지라도 여전히 어딘가에, 누군가와 분명히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폐기된 존재를 망가진 상태로라도 끌어올리려는 작가의 수고로움이 와닿는다면,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행위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다. 그들은 차가운 현실이야말로 ‘진짜 해괴한 것’이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김지연이 말하는 포기는 더 이상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마음’에 가깝다. 그런데 인물들은 먹고살기에 급급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망한 삶이 평범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괴이한 공식을 꼼짝없이 따라야만 해서 포기한다. 그래서 「포기」에서 거듭되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p. 19)은 자본에만 기를 쓰고 달려드는 평범한 세계를 조금이나마 문제 삼는 계기가 된다. ‘미선’과 그녀의 사촌 ‘호두’는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사라진 미선의 전 남자친구 ‘민재’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런데 미선과 호두는 물론이고 민재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돈을 돌려받으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민재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의 행방을 살피고, 신고를 권하면 “그렇게까지?”(p. 16)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막상 민재에게 정말로 닿을 것만 같은 순간엔 발을 뺀다. 민재는 돈을 가지고 도망쳤기에 평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특별한 사람이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 대부분이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민재는 같으면서도 다른 것들의 차이를 세세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설명은 “왠지 말이 안 되는 이유들도 납득하게 되는 순간”(p. 23)들을 만드는 힘이 있었고, 각자도생과 효율성을 제일로 섬기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받았던 도움은 민재의 이런 성격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민재는 자금난이라는 평범한 사정 때문에 결국 평범해져버린, “완전히 나쁜 사람”(p. 16)일 수만은 없는 사람이다. 이렇듯 아무리 애써도 포기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래서 어떤 그만둠은 포기 자체를 미루고, 돈만을 좇게 만드는 기존의 “미친 짓”(p. 12)을 중단하고 새로운 “미친 짓”(p. 28)을 가능케 한다. 술에 취한 호두와 미선은 한 남자의 도움으로 의릉에 들어가 “이상한 괴성”(p. 30)을 내지른다. 한 번쯤 누군가 불가능한 시간에 난립하는 걸 보고 싶었다던 남자 덕분에 “예상 밖의 방향”(p. 28)을 향해 내달릴 가능성이 반짝이며 움튼 순간이다. 망해버린 인간관계와 삶 속에서 건져 올려진 이 희한한 야행은 두 사람이 잃어버린 진짜 호두가 의릉에서 나무로 자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연결되면서 다시 한번 끝을 지연시킨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려면 불운을 껴안아야만 하는 현실에 낭만이 끼어들 자리는 협소하다. 결국 각서를 주고받은 뒤에도 또 한번 배신당한 호두는 민재와의 관계에서 “정말 원하지 않던 포기”(p. 37)를 하고, “나중으로 미루는 버릇”(p. 25) 때문에 민재와 만날 가능성마저 미룬 미선 역시 연결될 방법을 끝내 포기한다. 기존의 삶이 반복되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더욱 희미하게 만드는 자본의 견고함을 김지연은 결코 만만히 생각하지 않는다. 「반려빚」에서 전세자금대출과 전 연인 ‘서일’이 남기고 간 빚을 갚는 ‘정현’의 삶은 숨 쉬듯이 “매 순간 돈에 대해 생각”(p. 76)해야만 하는 하루들로 빼곡하다.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관계 중 하나인 연인 사이를 지탱하기 위해서 돈이 “제법 중요한 요소”(p. 84)로 호출되고, 유일한 반려의 자리에는 빚이 올라앉은 정현의 세계를 보면, 「포기」에서 미세한 틈을 열어젖혔던 망측함이 결국 잇속 빠른 자본주의의 환상에 불과한 건 아닌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할 수 없는 것만 가득한 날들 속” 유일하게 “할 수 있어!”라고 외칠 수 있는 일이 전 연인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는 일일 때,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을 만큼 망한 듯한 인생의 내력을 모조리 아는 이가 자신을 망하게 한 장본인뿐일 때, 서일과 다시금 함께 있고 싶은 “정신 나간 마음”(p. 89)이 고립과 단절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된 불모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탓이다. 그래서 김지연은 평균치의 삶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나선다.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가 탄생한 「좋아하는 마음 없이」의 ‘안지’는 이혼한 전 남편의 부고를 내연녀였던 ‘그녀’로부터 전해 듣는다. 이외에도 그녀는 전남편의 보험금 수혜자가 안지로 되어 있고, 이혼할 때 두고 온 아들 ‘성준’이 안지와 함께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안지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묘한 구석이 있다.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는 안지의 말에 “누가 벌을 주는데요?”(p. 142)라고 되묻고, 미안해할 겨를이 없을 만큼 행복했다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술술 털어놓으며, 이제껏 키워온 성준은 누가 뭐래도 자기 아들이지만 양육비는 보태달라는 염치없음까지. 하지만 안지는 바로 이 뻔뻔함이야말로 전남편과 똑같은 “여자의 장점”(p. 154)이라고 생각한다. 안지가 보기에 전남편은 “집을 해올 형편”(p. 149)을 갖춘 “좋은 사람이”(p. 159)었지만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p. 161)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사람”(p. 137)으로 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어온 안지는 스스로가 “아주 평균적인 삶”(p. 139)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전남편과 이른 결혼을 했었다. 호불호를 쉽게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선택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안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남편과 여자는 정확히 안지의 정반대편에 선 사람들이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는 사람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솔직한 사람. 숨기느니 차라리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사람. 그래서 뻔뻔할 수 있는 사람”(p. 158)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지는 이들의 뻔뻔함을 겪고서 “조금 더 자기 자신에게 가까운 삶을 살게 되었”(p. 137)다고 믿는다. 무엇이 좋고 싫은지를 탐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지의 가족들은 “좋아하는 마음 없이 함께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고, 때문에 안지의 삶에는 “그 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내렸던 선택들”(p. 163)이 수두룩하다. 반면에 현재의 안지는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과 재혼하고,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이상한 대회들을 연다. 분명한 미래가 아니라, 잘 그려지지 않는 미래를 골똘히 떠올린다. 그래서 안지는 전남편과 그녀, 아이가 있는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p. 165)을 훔쳐 지갑에 넣고 다님으로써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여자를 다시금 우연히 만난다면 되돌려주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들에 관해 거듭 생각하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삶인지 단정하지 않기 위해 끝을 한없이 지연시키면서 말이다. 전남편과 관련한 모든 일로부터 그저 멀어지고 싶었던 안지는, 그렇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연루되지 않음으로써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두고 보기를 택한다. 계산하고 판단한 “확신”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그들의 방식처럼 “선명하고 분명한 감정”(p. 161)이 있는 삶의 방식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다. 해괴하고 이상한 것의 가능성은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에 이르러 더욱 커진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누구든지 마음껏 열매를 가져가라고 전달받은 ‘나’와 ‘삼촌’은 유자밭에서 유자를 따던 도중 땅에 묻힌 상자를 발견한다. 기대감을 안고 열어본 결과,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p. 271)만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상자를 내동댕이쳤던 ‘나’는 서사의 마지막에 이르러 “어쩌면 영영 썩지 않는 것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p. 289)에 도달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1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숙모’와 그의 아들 ‘민재 오빠’를 애도하는 ‘나’와 삼촌의 시간과 연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촌보다 열 살 많은 나이에 아이까지 있는 이혼녀였던 숙모의 세세한 사정과는 별개로, ‘나’는 매번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말을 내뱉고 짝사랑 상대의 엄마인 그녀를 싫어해왔다. 하지만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던 숙모가 췌장암으로 사망한 전남편을 떠올릴 때마다 사는 게 너무 달아서 미안함을 느끼는 모습을 목격한 뒤, ‘나’는 그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싫어하던 사람을 닮아버린 순간부터 그 사람을 싫어할 수 없게 되었다던 숙모의 말처럼, ‘나’ 역시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 마냥 괴롭게만 느껴지지는 않게 되면서 변하는 것, 썩는 것을 긍정하게 된다. 해괴해지지 않는 것은 없다. 오히려 왜곡과 변형을 거치면서 이전과 다른 상태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 더욱 유의미한 일일 수 있다. 밀봉하지 않아 썩어버린 자리에서 공벌레가 새롭게 자리를 틀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 않은 인생. 김지연의 소설은 우리에게 그런 인생들의 가치와 가능성을 펼쳐준다. 3. 잃어버려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 『남겨진 이름들』(문학동네, 2022)과 『방어가 제철』(자음과모음, 2022)에서부터 주목받았듯이, 안윤 소설의 중핵에는 ‘상실’이 자리한다. 이에 조금 더 안윤스러운 특징을 부여해보자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실’이라 고쳐 부를 수 있겠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잃은 인물들이 겪는 상실은 기이하다. 의심 없이 정상이라 믿어왔던 체계가 뒤틀린 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어짐이 꼭 불행해야만 할까. 균열을 되짚으면서 우리는 모자람에 몸서리칠 뿐만 아니라, 온전함을 “새로이 감각”(「틈」, p. 237)해볼 수도 있다. 사라진 이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일깨워준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안온한 세계는 허상이고, 그것은 위태로운 누군가의 현실을 말끔히 소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금이 간 세계의 틈새로 유실된 존재들이 있다는 것. 이를 마주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보편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과 괴리를 좁힐 수 없는 인물들의 선택이 어쩐지 생소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하지만 그들의 결단 덕분에 기이한 감각들은 응달에 고여 있지 않고 변주된다. 안윤의 소설에서 기괴하고 낯선 기운이 세계를 다시 쓰는 역량으로 옮아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밀을 알아차린 뒤 다른 삶을 향해 몸을 트는 인물은 우선 「핀홀Pinhole」에서 만나볼 수 있다. 직장 동료로 처음 만나 4년을 사귄 ‘보라’와 ‘승원’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평탄해 보이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비밀’이 드러나면서 전연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제목처럼 소설에서는 바늘구멍처럼 아주 미세할지라도 분명한 틈을 내는 질문들이 등장한다. 첫번째, “비밀 하나씩 얘기할까”(pp. 55, 75, 88). 소설에서 총 세 번 등장하는 이 질문은 모두 보라로부터 나온다. 비밀은 수치스럽거나 비정상적인 치부들을 의미한다. 보라에게 딸들을 버리고 갔던 엄마와 새아버지, 이복 남동생이 있다는 복잡한 가정사 같은 것들. 보라는 비밀을 들추거나 캐묻지 않는 승원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이렇듯 보라가 감추고 싶은 것, 감춰야만 하는 사실들을 응시하고 발화하는 인물이라면 승원은 비밀 앞에서 “짧은 침묵”(p. 56)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설이 전개될수록 승원의 침묵은 배려가 아니라 자신의 비밀을 덮기 위한 자구책으로 드러난다. 보라는 어느 날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의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진’의 메시지를 통해 외동으로 자처해왔던 승원에게 마흔넷의 중증장애인 형 ‘정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진은 부모가 강제로 입원시킨 시설에서 관계자들의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걸로 보이는 정원의 사인을 밝히고 그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원의 가족들로부터 무시당했다. 두번째 질문은 경진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승원씨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세요?”(p. 61). 모든 것이 그렇게 돌연 생경해진다. “경험해본 적 없는 단란한 가정의 화기”(p. 72)는 “너무나도 깔끔하고 정연하게 통제된 느낌”(p. 73)을 주고, “앎의 정도를”(p. 66) 고려할 필요 없이 가까웠던 승원은 “엄연한 타인”(p. 53)으로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승원이 동그란 공 모양으로 뭉쳐놓은 양말이 보라에게 “집쥐가 ‘된 것’”(p. 53)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추방하려 아무리 애써도 계속해서 출몰하는 집쥐처럼, 정원의 존재는 여타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승원이 습관처럼 만드는 양말 뭉치가 어린 시절 정원과 가지고 놀던 장난감 공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보라는 직감한다. 평범했던 양말 뭉치가 “집쥐로 보이기 시작한 그 늦은 오후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p. 54)다고. 보육원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 약을 먹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집쥐는 어디에서 누구와 살 수 있는 걸까”(p. 87)를 궁금해했던 보라의 의문은 정원의 생애를 접하면서 되살아난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온통 투쟁이었다. 더딜지라도 꾸준히 삶을 기록하고, 장애인 스포츠인 보치아 선수가 되어 진지하게 공을 던져왔다. 죽고 싶을 때마다 “타 자 칠 때 총 쏜 다 생각”(p. 83)하며 쓴 시들, 시설에서 나가기 위해 새벽마다 컴퓨터실까지 기어가 적어 내려간 정원의 이야기는 “스스로 훼손을 인정할 수 없었던”(p. 71) 보라를 변화시킨다. 과거의 결함을 지우고 무결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살고 싶었던 욕망을 외면하고, 승원 대신 정원의 기록물을 경진으로부터 건네받는다. 할머니에게 배운 바느질처럼 보라는 정원의 생애를 몇 번이나 곱씹은 후 그의 이야기들을 정성스럽게 잇대어 나간다. 그리하여 세 사람만이 담긴 가족 그림에서 “가는 연필 선으로 밑그림만 그려놓은 테두리뿐인 사람”(p. 61)이었던 정원을 “한 사람의 형상”(p. 88)으로 만들어낸다. 양말 공을 죽어가는 집쥐로 느끼던 낯선 감각은 그렇게 자신이 바라는 삶을 향해 공을 굴리는 정원의 의지를 헤아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첫번째. 보라는 승원에게 다시 한번 비밀 말하기를 제안한다. 경진을 만났다는 자신의 비밀을 먼저 밝히면서. 사실 안윤의 인물들이 내린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경진이 던진 이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p. 85). 어째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친숙함을 등지고 불가해한 누군가를 끌어안게 만드는 힘의 근원을 짐작하기 위해 표제작 「모린」을 살펴본다. 사고로 중도 실명한 시각장애인 ‘영은’은 잃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범하거나 무감하게 태어나서가 아니라 살면서 많은 것을 잃어봤기 때문이다. 실명 이후 영은은 다채로운 세상의 이미지들, 오래도록 자신의 곁을 지켜왔던 연인 ‘선주’를 비롯해 자신을 이루던 수많은 조각을 놓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은 여전히 처음부터 가져본 적 없는 삶보다는 여전히 나중에 잃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이는 “있음과 없음, 그 둘을 연결하는 잃음”을 통해 “주어지는 모든 세계를 빠짐없이 살아보”(p. 25)겠다는 다정한 결단이다. 어떤 것을 잃어본 사람은 그것의 소중함을 비롯해 어떻게 더 잘 잃을 수 있는지, 상실 이후에 무엇이 변화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특히 자기 자신을 잃어보는 경험은 세계가 뒤바뀌는 사건이다. 하나의 세계는 곧 한 명의 사람과도 같다. 그리고 세계는 곧잘 무너지고 다시 서길 반복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사람’은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가기에 유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p. 9). 영은이 잃음을 두려워하기보다, 각각의 자신과 타인을 마음껏 사랑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이유다. 유일한 것들의 흔적을 덧입고서 모진 시간을 견뎌온 영은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유구하다는 걸 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자리 잡고 있다. 안윤이 굳게 믿는, 상실을 지나온 자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은의 질서”(p. 30)는 기존의 질서에서 멀어지거나 누군가를 잃는 일을 유독 겁내던 ‘미란’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자신을 제쳐둔 채 사회의 규율만을 엄격히 따르느라 영은을 사랑하는 마음마저 밀어내길 반복해온 미란은 영은의 곁에서 “한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 는 어떤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p. 44)을 경험한다. “죄다 망해버려서 다행”스럽게 찾아온 “그동안의 내가 다 망해버린 기분”(p. 41)은 여성과 여성의 사랑, 장애인의 삶처럼 분명히 있는 것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세계의 문법을 무너뜨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무수한 면면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세계에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스며들어 있다. “누군가가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게 저 사람이 말할 수 없는 사정이구나 하는”(p. 12). 세계는 곧 한 사람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 바 있으니, 영은의 말처럼 기이한 낯섦은 이제 한층 더 애처롭게 감각된다. 기꺼이 열리고, 연결되고 싶을 만큼. 때로는 나 자신을 잃어버려야만 닿을 수 있는 누군가가, 무너져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상실과 결여를 메우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방법을 안윤의 소설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4. 실패 연습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현실이 감추려 해온 불합리성이라는 비밀을 고발하고, 이때 드러난 균열에 힘을 가해 기존의 제도와 체계에 일격을 가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두 사람의 소설이 자신의 균열을 뼈아프게 직시해야만 들여다볼 수 있는 세계의 결함과 마주한 뒤, 그러한 생채기를 어떻게 매만질 수 있을지까지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지연은 잿더미 속에서도 아직 전소하지 않은 기대와 희망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린다. 그의 인물들은 자본 외부의 의지와 노력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한없이 작아져 있다가도 뜬금없이 괴상한 사안들 편에 서거나 망측한 일을 감행한다. 이때 강렬히 분출되는 어긋난 감각은 살 만한 삶을 간단없이 소거하는 자본의 법칙이야말로 진정으로 이상한 무언가임을 강렬히 느끼게 해준다. 안윤은 이유 없는 상실을 강제하는 현실에 짓눌리는 와중에도 잊힌 이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잃어버려서는 안 될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부지하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세계의 결함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목도할 때 생기는 기이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단하기 위해 분연히 사건을 찾아 나서거나 세계가 무너지는 감각 아래에 자신을 놓아둔다. 그런데 이들 소설이 나아가고 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물들의 일격이 너무 쉽게 저지당하거나, 세계의 비밀을 목격한 이후에 결과적으로는 다시 자신의 결함으로 회귀하는 수축성을 보이는 측면이 두드러짐을 간과할 수 없다. 김지연의 소설에서처럼 잠깐 보인 희망이 오히려 지난한 현실을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하는 마취제로 작용하고, 안윤의 인물들이 억눌리고 배척당한 존재들의 고통을 자기 이해와 친밀한 사람과의 좁은 세계에 가둬두는 건 아닌지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의도와 달리 두 사람의 소설이 보여주는 건 균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현실 아닌가. 이런 우려는 결함마저도 소비적 욕망과 충동에 포섭시켜 자기 발전의 재료로 삼는 자본주의의 영악한 힘이 가진 위험을 알기에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런 의심을 향해 김지연과 안윤은 한층 더 이상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선택하는 인물들을 다시금 내보일 것이다. 한 번의 실패는 억압의 기제에 영영 봉합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망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믿는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더 자주 서로에게 보여져야 한다고” “잘 살든 못 살든 그냥 살아 있는 게 목격이 되어야”(「긴 끝」, p. 122) 한다는 김지연에게 소설은 끝을 길게 늘어뜨려 무한히 연장하는 목격의 수단이다. “만약이라는 말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또,」, p. 174)는 걸 아는 안윤이 보기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로 허물어지는 일이야말로 세계가 연결되는 가장 첫걸음이기에 둘의 세계는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이다. 두 사람에게 실패란 기존의 견고한 세계가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고정되어 있던 자신이 허물어지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들은 이제 막 실패했다. 어쩐지 걱정되는 마음이 앞선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숙련이 뒤따르듯이, 이들은 지금의 연습을 거쳐 실패에 능숙해질 것이다.그러니 자주, 계속해서 더 잘 실패해보려는 두 사람의 힘을 믿는 마음으로 애정을 담아 덧붙여본다. 앞으로의 소설에서는 무너지고 재건된 세계가 어떤 다른 모습으로 솟아오를지, 기이한 인물들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향해 걸어 나갈지 궁금하다고 말이다.
표면-상태-읽기 문학은 인간의 내면 또는 물질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하나 내면은 '내면'에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앞의 문장은 의미를 다르게 가진다. 내면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틀리고 비뚤어진 형태로 또는 속에 있는 그것과 다르지 않은 형태로 비죽이 튀어나오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안다. '내면'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이 그것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또한 그것을 '본다'. 그것이 '어디'에 있든 누구에게 있든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표면적인(보이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문학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표면을 읽는 일과 같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표면을 읽는 것이 내면을 읽는 일이 될 수 있을까? 아주 표면적인 방식으로 내면을 추측하게 만드는 시에서라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최재원 시인의 『백합의 지옥』 중 "별늪"이라 이름 붙은 장에 수록된 시편들은 연결성을 가진다. 제목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상어 세계의 법칙에 적응하지 못하고 친구가 되어줄 누군가를 찾는 "부끄럼쟁이 상어 위스퍼"는 "제멋대로 올챙이 오페라"를 바다에서 만나고, 이 둘은 “배고픈 물뱀 나르샤"를 만나 함께 모험에 오른다. 자기 위로 쌓이는 모래를 떨어낼 생각도 없이 침잠했던 "심심한 넙치 누가바"가 이 무리에 합류하고, 이들은 “마그마라는 이름의 마그마"를 만나며, 이들과 함께 걸음 하는 마그마는 은하수라는 이름의 은하수를 만나 "별늪"이 된다. 그리고 이 시들의 여정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마그마와 은하수는 별들을 주고받으며 / 하나가 되었다 / 별늪엔 별꿀이 가득히 흘러서 누구도 / 배고프거나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 「별늪」 부분 요약건대 이 시는 위스퍼, 오페라, 나르샤, 누가바, 마그마, 은하수가 별늪이 되어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내면은 어디에 있는가? 요약이 말해주지 않은 부연 설명과 수식의 말들을 들여다볼 때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상어 위스퍼는 동료 상어들이 "자신들과 함께 다니려면 사람의 다리 하나를 / 가져오라고 부추"(「부끄럼쟁이 상어 위스퍼」)긴 끝에 길을 나섰으나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오페라를 만났다. 올챙이 오페라는 자신이 살 수 없는 바다에서 살고자 하다가 동료를 만났고, 오래 굶은 물뱀 나르샤는 오페라를 잡아먹으려다 위스퍼를 보고 숨었지만 이내 그들과 동료가 되기로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무언가에 저항하거나 반(反)함에 따라 삶을 성취하고 있다. 이때 '반'은 '부정'에 방점이 찍히지 않고 주어진 것의 '바깥'에 찍힌다. 주어진 것에서 탈출하는 것, '하라고 시켜서 되는 것'의 바깥쪽에 위치한 수많은 가능성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저항함으로써, 때때로 죽음을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이 시의 표면인가, 이면인가? 문장이 지시하는 것을 읽어나갔을 뿐임에도 문장이 발설하지 않고 내포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헤아렸으므로 이면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표면을 읽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정답 없는 이 의문점에서 표면이냐 이면이냐 중 하나로 결론을 내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질문을 돌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살아가는 일이 '존재'가 아니라 '상태'로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즉 존재의 방식이나 형식(표면), 존재의 의미(이면)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떠한 상태인가를 헤아림으로써 가능하다. 이처럼 최재원의 시는 표면으로 이면을 말한다. 대도시와 약간의 거리를 둔 업스테이트에 살면서 그야말로 '삶'과 자연의 의미를 갈구하는 듯하지만 지극히 탈자연적인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 곳곳을 채우고 있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 시 「업스테이트」 역시 지극히 표면적인 것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 표면을 잘 살피면 삶을 주관하는 자와(퍼치를 낚음) 삶에 종속당하는 자(대도시적인 생활 관습으로부터 멀어지지 못함)의 위치가 거듭 전도되는 '상태'가 발견된다. 표면을 통해 상태를 보여주는 이 시를 지나, 비누 거품을 내어 손을 씻는 모든 과정과,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타인을 바라보며 관념적 상태변화를 묘사하는 「기브앤테이크」를 거쳐, 「비엔나소시지」에 도착해 이번에는 이런 물음을 꺼내본다. 분리 불가능한 표면과 이면 어디께를 휘저으며 의미를 찾아내는 일의 가장 흔한 방식은 어쩌면 '개인적으로 좋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게 과연 '개인적'일 수 있는지 묻고, '좋음'이란 게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순간 시라는 표면은 지극히 개인적인(내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그것이 발설되면 내면은 더는 내면이 아니게 되는 데다 이 시에 대한 변형된 의사를 전달하는 것으로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으니, 이 역시도 표면으로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상태에 관한 것이겠다. 그런 까닭에 이 시에 대한 '개인적으로 좋음'이라는 메모를 이런 식의 해석으로 풀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비엔나소시지를 먹는 상황을 묘사한다. 물론 그사이에 끼어드는 세부적인 의견이나 수식된 말 등이 중요하다. 어떻게 먹어야 최상의 조화로움 속에서 비엔나소시지볶음을 먹을 수 있는가를 궁구하는 일련의 상황 사이에 그리움, 환멸, 어머니와 같은 정념들이 “꾸역꾸역” 끼어든다. 당근의 맛이라든가, 재료 익힘의 정도, 당근과 다른 재료와의 조합을 씹을 때의 맛, 감각, 만족도 같은 것은 꾸역꾸역 끼어드는 생각들의 맛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그건 무슨 맛인가. 그런데 한 번도 빼놓지 않고 / 양파와 당근을 썰어 넣는다는 것은 얼마나 착실한 / 일입니까 얼마나 / 열심한 일입니까 특히 / [......] / 꾸역꾸역 아침부터 국을 / 데우고 소시지를 볶고 찬 / 반찬 더운 반찬 김치를 / 각각 포일로 그 비좁은 / 도시락통을 지혜롭게도 / 기술적이게도 딱 / 3등분으로 나누어 / 나는 그런데 국물이 흐르면 / 화가 났습니다 당신에게는 / 아니고 국물에게 그리고 신부님의 / 고고하고도 자애로운 모습을 문득 / 떠올립니다 급할 것 하나 없이) - 「비엔나소시지」 부분 비엔나소시지를 반찬으로 싸는 사람이 그렇게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 요컨대 이 재료들이 비엔나소시지 반찬이라는 지금의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화자는 생각한다. 비엔나소시지는 누군가 성실하고 착실하게 열심히 야채를 썰어 넣는 노고이고, 비좁은 도시락통을 현명하게 구획하는 지혜이고, 그 결과물이 의도치 않게 약간의 국물을 새어 나가게 만들 수도 있는 우연적 실수를 동반한다. 수많은 사랑에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비의지적 결과에 화가 난다고 화자는 말한다. 이 근사한 노고와 지혜와 사랑과 성실함이 흘린 약간의 국물을 두고 감사·만족·풍족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단지 국물 때문에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분노를 느끼는 이 어긋나는 감각은 이것을 먹는 사람에게 죄책감이나 환멸을 느끼게 만들고, 그러다가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는 이에게 자애를 구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이 시는 이렇게 끝난다. “저에게 / 저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 (내가 갈 곳에는 비엔나 / 소시지와 같은 추잡한 / 것들이 없게 하소서 / 꾸역꾸역 살아 낸 것들 / 의 기억을 모두 잊게 하소서"(「비엔나소시지」)라고. 그러면 비엔나소시지 먹기라는 건 노고·노동·사랑·지혜,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 이 모든 걸 배반할 만큼의 분노와 짜증과 혐오감 그리고 그것에 대해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다. 요컨대 최재원 시의 표면 읽기란 의미란 무엇이며 어떻게 발생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을 듣는 일이다. 최재원의 시는 인내심을 가지고 여러 차례 그것을 일러주고 있다. 자세한 표면을 보라고. 그리고 존재를 강구하지 말며 상태를 헤아리라고. 상태를 헤아리면 의미가 발생한다고. 죽음-상태-읽기 꼭두를 한 달 사이에 세 번이나 보았다. 한번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전시되고 있는 사진전에서, 다른 한번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른 전시장으로 건너가며 스쳐 지나가듯 놓인 실물을, 마지막 한 번은 신미나의 시에서 “꼭두"라는 기호로 보았다. 꼭두를 세 번 보았지만 '꼭두'를 본 것이지 실제로 그것이 본래의 의미로서 작동하는 상태를 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꼭두는 전통적인 장사(將事) 문화에서 볼 수 있는 목각 인형이다. 망자를 '저편'으로 인도하고 수호하는 역할을 하며 상여의 곳곳에 놓인다. 말하자면 꼭두는 나무이고,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이고, 죽음이고, 수호이고, 죽음의 길잡이다. 최근 세 번이나 보았지만 꼭두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나? 나는 사진으로 된 목각 인형을 보았고, 목각 인형 전시물을 보았고, 죽음에 대한 시를 읽었다. 사진전에서는 꼭두를 찍어 186.5×159센티미터 사이즈로 커다랗게 인쇄하여 세로로 세워두었고, 지나치듯 본 꼭두 인형은 '전시물'로서 전시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꼭두의 모양새와 가장 닮지 않았지만 꼭두의 수행적 의미에 가장 가까운 것은 신미나가 쓴 「꼭두전」에 등장하는 “꼭두"라고 할 수 있겠는데, 장사를 지내는 시에서 “꼭두"가 망자를 이끌고 수호하는 존재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꼭두"는 문자의 나열과 문장의 직조로 펼쳐진 죽음으로 향하는 상상된 언어 속에서 등장했으므로 어쨌거나 상징적 기표의 상태로 간주되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꼭두를 세 번 봤지만 세 번 다 꼭두를 봤다고 할 수는 없고, 사진과 전시물과 죽음에 대한 상상의 현물로서 그것을 보았다. 보았다...... 한데 나는 무엇을 본 것일까? 앞서 최재원의 시를 읽으면서 개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태의 지속은 항상성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불안정성과 유동성을 의미한다. 변함없는 상태처럼 보이기 위해서 개체는 변화하는 시간에 맞게 대응해야 하고 달라진 상태에 맞서 새로운 움직임(혹은 멈춤)을 추동해야 한다. 신미나의 시에서 여러 번 발견되는 '죽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죽음은 역시 삶의 중(中)이자 삶이 아닌 중의 중의 이동에서 감지된다. 죽음은 존재의 중지, 상태의 종료처럼 생각되곤 하지만 삶이 곧 존재가 아니듯 죽음 역시 비-존재가 아니라 삶이 아닌 상태다. 이로써 신미나의 시는 삶과 죽음을 상태, 즉 유동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죽음이 존재라는 것에 불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그런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면, 삶을 소거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보고 이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삶이란 무엇인가? 즉, 죽음을 소거한 채로 죽음을 어떻게 말하는가? 언니들은 비밀이 많고 / 금요일엔 주름이 많은 치마를 입었지 / 블라우스 리본을 매고 / 흔들리는 구두를 신고 뾰족하게 웃었네 // 나도 따라가고 싶어 [......] // 넌 아직 어려 [......] // 주머니 속에는 시를 쓴 종이가 있는데 / 언니들을 슬프게 만드는 시가 있는데 / 여름휴가는 짧고 / 동생이 시를 써서 언니들은 기쁘다 말하고 / 시를 쓰면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아 // 언니들을 시로 써도 될까 / 사탕수수밭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을 / 미래, 미래, 미래로 물결쳐오는 문장들을 // 언니들은 풀었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으며 / 머릿수건을 두른다 / 식판을 들고 밥과 국을 배급받는다 / 에나멜 구두는 금요일에만 꺼내 신을 것 // [......] // 뭔가 시작되려는데 / 그게 무엇인지 /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 / 아무도 - 「바람 주머니가 부풀 때」 부분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에 시의 핵심적 태도가 함축되어 있다.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 '뭔가'가 무엇인지. 그런데 이 표현 자체가 '그것'이 소거된 형태로 말해진 결론이다. “그게"로 표현되어 있는 '그것'의 정체를 어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일러줄 수 없다. 그래서 아무도 '나'에게 일러주지 않은 것이다. 이미 그 상태에 속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일러줄 수 없는 것이 바로 삶인지라, '나'는 알고 싶었으나 아무도 일러주지 않아서 속수무책 빨려 들어가 있는 바로 이 '상태'에 그냥 놓인 채로 그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는 중이다(삶-인 중이다). 삶은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무어'라고 알려줄 수 없다. 삶은 존재하는 상태와 같이 유동하는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시를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 이들이 어떤 흐름과 상태에 놓여 '그것'을 겪고 있는지를 따라가보자. 이 시에서 "언니들은 비밀이 많”은 존재다. '나'는 언니들을 따라가고 싶어 하지만 어리기 때문에 언니들의 비밀에 합류할 수 없다. 비밀이 많은 언니란 언젠가 될(또는 궁구하는, 희망하는) '나'의 미래이고, 그런 점에서 삶의 한 단면이다. 이 문장을 좀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삶이란 비밀을 지닌 미래'다. '나'는 언니들의 비밀에 합류하지 못한 대신 시를 쓰면서 비밀을 만든다. 시를 쓴다는 것은 비밀을 만드는 것이다. 시를 쓰는 일은 '나'를 몰래 나쁜 일을 하는 것 같은 비밀스러운 상태로 만든다. 비밀스러운 '나'의 미래인 언니들을 시로 쓴다는 건, 미래를 비밀스럽게 만들어 맞이하겠다는 것. '나'는 언니들의 비밀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비밀'이라는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다(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말을 소거한 채 미래를 비밀스럽게 스스로 만들어 쫓는 것이 삶임을 보여준다. 이 시에 들어섰던 최초의 까닭은 삶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규명하기 위함이었다. 이 시가 '그것'을 소거하면서 동시에 말하는 것과 같이,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다다르기 위한 방법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을 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죽음이 아닌 상태에 대해 말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때의 소거는 실제로 뭔가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빠진 상태 그 자체로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찾았냐고 물었다 // 클로버는 잎이 세 장 / 드물게 네 장 / 초록의 이랑이 팬다 / 반복의 물결, 물결, 물결 // [......] 하나만 길게 잡아당기는 / 신의 놀이 / 토끼는 귀가 크고 / 코끼리는 코가 길다고 / 말하려다 / 코끼!라고 했는데 // 지구 바깥에 / 귀도 크고 / 코도 긴 / 진짜 코끼가 있을지도 몰라 // [ ] 토끼는 위험하면 / 뒷발을 구른다는데 // 코끼, 코끼, 코끼래! / 우리 중 누구도 /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 「풀」 부분 이 시의 현재에 있는 것은 풀이고, 어쩌면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위험을 감지하고 발을 구르는 토끼이며, 보다 희미한 가능성으로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코끼'인데 이것은 사실상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없는가? 이 시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코끼다. 코끼는 토끼로부터 연상된 코끼리를 말하려다 튀어나온 것이고, 토끼는 클로버를 찾으려 풀밭을 샅샅이 뒤지다가 떠오른 모자 속에서 폴짝 뛰어나온 것이므로 그것은 풀밭에서 비롯된 어떤 상태로서 그 어떤 것보다도 커다란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기서 벌어지는 소거는 “코끼”라는 표현 속에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없음('리'의 소거)으로 하여금 있는 것이고(코끼), 상상 속의 토끼이자 코끼리를 온통 아우르는 관념의 상태다. '리'가 빠졌지만 '리'만 빠진 것이 아니고, '리'가 빠진 '코끼'로 하여금 없는 모든 것을 있게끔 만드는 것이 되었다. 뭔가를 빼고 말한다는 것은, 빼려고 했던 것을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지금의 상태로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뺀다는 것은 상태를 바꾼다는 것이고,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이전의 상태에서 놓여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때 신부가 되길 원했으나" 조선소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게 된 한 사람의 삶(이라는 상태)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쓴 바 있다. 스토브 안에서 무연탄 더미가 / 조용히 스러질 때 / 그는 부드러운 재를 / 얼굴 위에 뿌리고 / 더러워진 몸을 머리끝까지 욕조에 담근다 / 숨을 참고 열을 세다가 / 마침내 뱉을 때 / 현실은 간신히 그를 따라왔다 // 그는 눈을 뭉쳐 / 눈사람을 만들어 물에 넣는다 / 순식간에 / 눈사람이 사라지는 모양을 본다 / 기분이 아니라 / 감정이 아니라 / 어떤 /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을 - 「북에서 온 사람」 부분 그는 그가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상태에 있고 때때로 "섬망과 미혹 사이에서 / 그는 하마터면 / 자기 자신을 넘어갈 뻔"하기도 하지만, 그는 미혹되지 않고 그가 바랐던 것이 아닌 조선소 노동자의 상태로 되돌아온다. 그가 욕조에 몸을 담글 때, 그가 바랐던 것은 아니나 그에게 주어진 조선소 노동자라는 "현실은 간신히 그를 따라왔"(「북에서 온 사람」)는데 어쩐지 그는 지금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계속 바뀌어나가려고 하는 것 같다. 그는 눈사람을 물에 넣고 그것이 흩어지는 것을 본다. 이는 "어떤 /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이 곧 삶(죽음)이고, 그 전환의 순간에 시간의 흐름이 발생하며(무언가가 지나갔다, 무언가가 도래한다), 그러한 전환의 틈에 자각되는 것이 죽음(삶이 지나가고 있음)이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것을 소거의 형식으로 발화하는 것이 이 시집이 보여주는 성찰일진대, 그것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백장미의 창백"이다. 언뜻 백장미는 본래 창백한데, 백(白)이라는 색이 빨강으로 대표되는 '장미색'의 빠져나감이라 보는 한 그렇다. 그렇다면 백장미가 창백해지기 위해서는, 장미색이라는 일관된 상태에서 벗어난 장미의 색이 존재하며(또는 색의 장미가 존재하며) 그것이 색이 옅어지는 상태로 바뀌어가는 것이라는 상태의 전환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이때 동원되는 것은 장미의 색, 바래지는 색, 외부의 자극(풍화·비 등), 시간의 흐름...... 그런 무수한 상태의 변화 속에서 백장미는 창백해지고, 백장미의 창백이라는 소거된 말에 이르렀을 때 소거된 모든 시간은 모두 소환된다. 백장미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에서 백장미 삶의 이력을 함축하는 방식으로.
깨진 조각이 비추는 것1) 박지일, 『물보라』 최하연, 『보헤미아 유리』 내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면 시인은 나를 던지는 사람이다. 인간은 한평생 던져지면서 파편화된 존재의 조각들을 주워 담는다. 시가 그 존재의 조각들이라면 시인은 먼저 깨져 본 사람이다. 어떤 시가 당신에게 온다면 그것은 당신이 찾던 존재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모은 조각이 당신이 모은 조각과 다르지 않다면,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 없다. * 『물보라』의 깨진 조각은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금속의 표면이다. 행위를 하지 않아도 그것은 움직임을 포착한다. 밥을 먹기 위해 손을 움직이거나, 입을 오물거려 씹거나 삼키는 행위 없이, 그러니까 동작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존재의 움직임을 담아낸다. 예컨대 「물보라」(15p)에서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중단전은 하단전과 상단전 사이에 있다"는 것과 "접시는 벽과 문, 어둠과 빛 사이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 아니, 시인은 이 사실을 중요하다고 믿는다. 아니, 중요하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모종의 대상에 대한 믿음은 믿지 않음에 다름 아니다. 그것이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믿음을 발명해내기 때문이다. 기실 불안하지 않으면 구태여 믿지 않아도 상관 없다. 쓴 것은 찢어버리면 그만이듯 믿음은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나의 쓰기와 저 배는 상관 없이 간다" 당신의 마음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이 믿음은 그러니까 나와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곧 '나를 믿는다'는 말은 '나를 믿고 싶다'는 말이다. '너를 믿는다'는 말은 '너를 믿고 싶다'는 말이다. 하물며 '하고 싶다'는 소망은 "너는 네게 주도권이 없"(「물보라」,p.137)을 때 발생한다. 주도권 있는 자는 무언가를 간절하게 소망하지 않는다. 영화 트로이에서 아킬레스가 했던 말을 곱씹어본다. 신이 인간을 질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마지막 순간을 살기 때문이다. 삶은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당신이 그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생과 사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라면, 당신은 굳이 살고 싶지 않아도 된다. 굳이 죽고 싶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당신은 태어나고 싶을 때 태어나지 않았다. 즉 당신에게는 삶에 주도권이 없다. 그러므로 살아 있음은 그 자체로 살고 싶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물보라』의 깨진 조각으로부터 나는 살아 있음만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살고 싶다는 말은 "지긋지긋하게도 세상이 좋다"(「물보라」,p.17)는 말이었다. 느리다고 쓰면 느리게 나아가는 듯하고, 느리지 않다고 쓰면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듯한 시간. 나는 믿을 수 없다. 방향은 나를 바꾼다. 나의 쓰기와 저 배는 상관없이 간다. - 「물보라」(p.15) 부분 "느리게 쓰면 느리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리게 나아가는 듯하고", "느리지 않다고 쓰면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듯한 시간"은 바로 우리가 그 삶의 주도권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감각될 수 있는 것이다. 믿음과 믿지 않음,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의 '부딪침'. 그것이 물보라다. 물보라의 사전적 정의가 '물결이 바위 따위에 부딪쳐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이라면, 여기서 방점은 그러므로 자잘한 물방울이 아닌 '부딪쳐' '흩어지는' 데에 찍혀 있다. 흩어지는 것들은 참혹하게 아름답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은 흩어진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다. 연애는 물보라를 즐긴다. 물보라 물보라. 키스는 섞이는 혀를 잊었다. 머릿속에서 키스는 절단한다 섞이는 혀를 잊은 본인을. 키스와 키스는 멀어지면서 비로소 키스가 된다. 너는 나와 혀를 섞는구나. 나와 멀어지기 위해서. - 「물보라」(25p) 전문 한편 물보라는 물보라를 일으키기도 한다. "연애"는 당신이라는 물보라와 나라는 물보라가 부딪히면서 또 하나의 물보라를 일으키는 사건이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을 당신의 삶과 나의 삶이 부딪히면서 또 다른 삶을 일으킨다. 키스를 하면 혀가 부딪치고, 나란히 걸으면 손이 부딪친다. 키스는 혀들이 굴곡되어 부딪치고 섞이면서 타액이 서로의 몸으로 흩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이 '부딪침'은 기억을 생성한다. 기억은 발생하는 동시에 '왜곡'된 것이고, 다른 기억들과 '섞이는 것'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흩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도, 나도, 키스도, 기억도 이 모든 게 다 물보라다. 따라서 연애란 물보라와 물보라가 부딪혀서 물보라를 일으키는 일이다. 물보라 없는 물은 고여 있는 물이다. 물이 순환되지 않을 때 그 자리에서 번식하는 박테리아가 물을 썩게 만든다. 물은 고여 있으면 썩는다. 물보라는 산소를 공급하고 물을 순환시키며 정화한다. 물이 고여 썩지 않게 하기 위해, 살아 있기 위해 우리는 그러므로 필사적으로 물보라를 일으켜야 한다. 박살나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질 하고 달음박질 해야 한다. 시인에게 발버둥질은 시 쓰기이다. 시인은 그가 쓴 시에 주도권이 없다. 이미지는 정해진 그곳이 아니라 사방으로 튀어야만 한다. 시란 깨지고 박살난 그 기록들이 얽히면서, 그것과 독자 각자의 기억이 설키면서 발생하는 무수한 이미지의 사건이니까. 그러므로 시인은 자기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 날의 기억들을 부수고 날짜를 쪼개는 이 시집의 부록은 특히 그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너는 그를 사랑하고 그는 네게 미안하다. 사랑해서 미안할 수는 있지만 미안해서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가 찾아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네가 그를 찾아 헤매는 것이 순서가 맞다. 그것이 이치다. 한데 왜 그는 계속하여 네 앞에 설까? 네가 그의 앞에 가서 설 때, 그는 너를 상대하지 않는다. 그는 매번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한다. 네게 미안하기는 한 걸까? 너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무엇이든 이겨 낼 수 있다고 한다. 너는 그 말을 그 무엇에게도 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읽는다. 모처럼 네가 마음속에서 그를 지워 냈을 때 너는 네게 미안해한다. - 「11月4日」 전문 하지만 거기 너는 없다. 너만 상대해 주지 않는 거울. 망할 놈의 거울. 초원에 선 울타리만을 보여 주는 거울. 거울은 엄마를 닮았다. 너는 엄마라는 단어를 처음 써 본다. 너는 거울로 도망한다. 거울은 너를 찾아 사방을 비춘다. 양의 걸음으로 울타리를 향해 너는 걷는다. 양처럼 밥을 먹고 양처럼 뿔을 간다. 그리고 양은 울보다. 울음소리를 들은 거울이 양을 비춘다. 너는 거울 바깥으로 도망한다. 염소가 울타리 안에서 바깥을 찾아 맴돈다. 염소는 울보다. 너는 염소에게 미안하고 양에게도 미안하다. 미안해서 눈물이 나고 마침 눈물이 나온 김에 울어 본다. 거울은 바깥과 안을 번갈아 비춘다. 안과 밖 모두를 비추는 거울,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거울. 망할 놈의 거울 - 「11月4.3日」 전문 첫 번째 인용시는 아마도 아직 사랑하는 '너'를 매번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했던" '그'를 이제는 지워 낸 사람의 기록일 테다. 그리고 그 다음 인용시는 그 날의 풍경에 대한 감각의 재구성이다. "그를 지워 냈을 때" '너'가 "네게 미안"한 것은 '너'가 지워 낸 것이 '그'가 아니라 '그를 사랑한 너'이기 때문이다. '너'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 자신이었고, '너'는 그런 너의 모습을 지워서 "네게 미안"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너'와 "네게 미안"하고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하는 '그'는 '거울' 같은 존재이다. '너'를 상대하지 않는 '그'가 '너'와 다르지 않다면 '너'는 "너만 상대해 주지 않는 거울"이다. 그것은 "너를 찾아 사방을 비추"지만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하는 '그'. '너'는 그렇기 때문에 "거울 바깥으로 도망한다". '너'와 '그', 그리고 '너'를 지워 낸 '너'는 각자 그 자리에서 양처럼 염소처럼 울지만, 이미 '너'를 지워 냈기 때문에 "안과 밖 모두를 비추는 거울"은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거울"이 된다. 이처럼 기억은 흩어지면서 파편화 되지만 동시에 흩어진 다른 기억의 파편들과 섞이면서 감각적으로 재구성된다. 물보라가 일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들이 부피와 빛깔이 다른 또 하나의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이다. 자, 이제 세상에 물보라 아닌 것 없고 물보라 일으키지 않는 물보라 없다. 우리는 『물보라』라는 물보라가 일으킨 물보라다. 그의 시는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는 그를 살게 한다. 당신이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던 발버둥질과 달음박질, 그 숨 막히는 고투가 결국 나를 숨쉬게 한다. ('모르겠다'는 말은 사실 모르고 싶은 당신의 소망이 아니던가요?) * 『물보라』의 깨진 조각이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금속의 표면이라면, 『보헤미아 유리』의 깨진 조각은 존재 그 너머의 풍경을 모으거나 분산시키는 렌즈에 가깝다. 폭우가 내리던 언젠가 고인을 떠올린 적이 있다. 그와 함께했던 풍경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벅차오르는 동시에 곧 씻겨져 내려 갈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폭우 이후에 뒤섞인 풍경은 곳곳에 그를 심어두었고, 어디에도 그는 없지만 어디에나 그가 있었다. 그 풍경의 파편들을 모으다 보면 언젠가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시인은 존재의 기억을 무작위로 뒤섞고, 그것을 곳곳의 풍경에 심어두는 것으로 존재의 흔적을 보존한다. 양철 지붕 위로 비가 내린다 하얗게 낯선 도시의 장례식장 앞에서 시외버스를 기다리듯 톡 들판과 들판이 이어지는 꽃대의 어디쯤에서 먼저 온 버스에 올라 내릴 곳을 가늠하듯 톡톡 더러는 졸고 툭 누군가는 젤리 한 봉지를 쥐고 있다 처마의 맛 들판 끝에 기차역이 있고 창밖 풍경은 잎맥의 반대쪽으로 달린다 뿌리에서 멀어지면 꽃과 가까워지는 중이니 빗소리를 들으며 종점까지 가기로 한다 젤리를 깨문다 툭 마른 풀잎의 맛, 검은 리본의 맛 들춰보면 남은 물기가 조금은 있으리라 들춰야 보이는 곳들은 발 없는 것들의 무덤- 눅눅하고 달고 창백했다 고인의 얼굴은 잊었다 상주의 이름도 잊었다 양철 지붕 아래 하얀 장례식장을 짓고 긴 객차를 대절해 문상 와서는 홀로 남겨진 사람 꽃대 위로 거짓말처럼 비가 내렸고 들판을 가로질러 바람이 일자 양철 지붕 한 짝이 날아갔다 양초가 젖는 동안 나머지 지붕을 걷어내고 지붕을 걷는 동안 무릎을 접어 절을 올린다 오금이 축축하게 저려온다 툭툭 혓바늘이 솟아올랐지만 톡톡 양철 지붕이 빗방울을 때리듯이 나도옥잠화 하얀 꽃 안에 길고 검은 나비 한 마리가 앉았다가 일어선다 - 「흰꽃」 "양철 지붕 위로 비가 내리"는 이곳은 누군가의 장례식장이다. 빗소리가 유독 크고 선명하게 들려오는 이 쓸쓸한 풍경은 비가 그치고 소리가 멎으면, 아니 그보다 먼저 빈소를 벗어나면서 이내 잊힐 풍경이다. 존재'였던' 것들의 풍경은 이제 굳이 들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들춰야 보이는 곳들"이 된다. 하지만 시인은 흔적을 곳곳에 심어두는 것으로 들추지 않아도 보이는 풍경으로 그것을 재구성한다. 예컨대 양철 지붕 위로 내리는 빗소리는 시인에 의해 누군가 고개를 '툭' 떨구고 졸고 있는 모습으로, 젤리를 '툭' 깨무는 모습으로, 혓바늘이 '톡톡' 솟아오르는 모습으로 치환된다. 말하자면 청각적 심상의 그것이 다양한 시각적 심상의 그것으로 곳곳에 분산 되면서 풍경은 파편화 되는 동시에 보존된다. 한편 어느날 문득 밟히는 "신발 속 모래 한 알"을 두고 "걸을 때마다 소식이 생긴 것 같아" "그냥 두었다"(「보헤미아 유리」)는 시구로 미루어보았을 때 시인은 풍경을 부수어서 재구성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풍경이란 감각하는 자에 의한 기억의 소산이라서, 그 자체로 이미 파편화 된 것이라면, 시인은 그것을 최대한 비슷하게 그 자국으로 남기는 사람이다. 존재가 남긴 자국은 그 존재를 온전히 표상할 수 없으나, 흐릿하게나마 형태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흔적이다. 그렇다면 자국을 남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깨무는 것이다. 깨물면 대개는 물린 자국이 생긴다. 예컨대 한 계절의 풍경을 기록하고 싶으면 그 계절을 이루는 것들을 깨물면 된다. 코너에는 재봉틀이 있다. 꿰맬 수 있는 명암과 꿰맬 수 없는 독경이 바람에 실려 밀려온다. 라일락을 깨물었다. 남천을 깨물었다. 나비의 엉덩이를 깨물었다. 모과나무의 그림자를 갉아먹으며 딱정벌레가 지나간다. 돌에게 돌을 던진 돌을 향해 개가 짖는다. - 「쉿」부분 여기서 깨무는 것은 무엇을 터뜨리는 것도 아프게 하는 것도 지워지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내가 그 존재에 잠시 닿아 있었음을 그저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모과나무를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모과나무의 그림자를 갉아 먹"어야 한다. 그리고 시인에게 있어서 깨무는 것은 시 쓰는 일과 다르지 않다. 하물며 깨물리는 것과 깨무는 것이 서로의 존재에 닿아야 하는 것이 깨물이라면 시인이 풍경을 깨물 때 그도 그것에 깨물린다. 그러므로 흔적을 남기는 일은 쌍방의 사건이다. 풍경을 곳곳에 분산하고 자국으로 남겨서 그 흔적을 보존하는 시인의 렌즈로 우리는 기억을 또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게 된다. 누구나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기억하고 싶은 어느 날이 있지만 흩어지는 기억을 어찌 할 줄을 몰라 망각하기를 택한다. 그러나 "식의 좌변이 망각이면 우변은 반드시 슬픔이 뒤따른다"(「쉬」). 비록 그 풍경이 슬플지라도 '기억되는 슬픔'은 다만 슬프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한 풍경의 파편들을 조금 더 모은 것 같다. 그는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다. *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물보라』의 깨진 조각과, 풍경을 분산하거나 깨물어서 기억하려는 『보헤미아 유리』의 깨진 조각은 다른 듯 다르지 않다. 물보라가 일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과 폭우 이후에 사방으로 떠내려가는 풍경은 모두 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전자는 존재의 움직임이고, 후자는 존재의 자국 흔적이다. 존재 자체로 불안한 우리는 평생토록 무엇인가에 부딪치고 깨지고 발버둥질 하며 살아간다. 그로 인해 일어나는 물보라의 자잘한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또 다른 물보라를 일으킨다. 물보라가 일면서 물은 순환하고 정화되며 생명력을 얻는다. 한편 삶에 폭우가 내린 이후 휩쓸린 풍경들은 곳곳에서 기억의 파편으로 발견된다. 또한 존재와 존재가 맞물리면서 생긴 자국은 너와 내가 살아 있다는 혹은 살아 있었다는 존재의 흔적이다. 깨무는 것과 깨물린 것은 서로의 존재를 증명한다. 결국 움직임도, 자국도 모두 삶에 대한 증명이고 살아 있음에 대한 방증이다. 중요한 것은 '존재'이다. 존재가 없으면 움직임도 자국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 내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면 시인은 나를 던지는 사람이다. 인간은 한평생 던져지면서 파편화된 존재의 조각들을 주워 담는다. 시가 그 존재의 조각들이라면 시인은 먼저 깨져본 사람이다. 어떤 시가 당신에게 온다면 그것은 당신이 찾던 존재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모은 조각이 당신이 모은 조각과 다르지 않다면,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 없다. 1) 「물보라」(2024) 에서 인용 시편이 「물보라」 연작시인 경우 쪽수만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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