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동네 2024년 봄호(제118호)
촛불 이후의 정치라는 단상斷想·單相·壇上
민주주의는 최악을 피하는 제도라던데 지금은 왜 이럴까
십 년 전 세월호 참사는 사회적 재난일 뿐만 아니라, 사회야말로 재난에 처해 있음을 체감케 했다. 언제 죽도록 내팽개쳐질지 모르는 나라에 살고 있다 는 충격은, 상실한 사람들에 대한 애도와 국가에 대한 분노를 동시에 일으켰다. 사회적 안전망이 이토록 무너지게 만든 책임자에 대한 처벌과 진상 규명을 요구 하는 뜨거운 목소리가 촛불 항쟁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국민이 선출 한 ‘최종 책임자’를 국민이 파면하는 초유의 사태를 겪은 지 십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이태원 참사가, 오송 참사가 일어났고, 국민에 의해 선출된 최종 책임 자는 진상 규명은커녕 국민에 대한 사과조차 거부하고 있다. 그런 윤석열 대통 령이 취임 이후 처음 국민에게 사과한 것은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 때문이었다. 국민을 살리는 것보다 국토종합개발이 정치의 최우선인 시대로 회귀한 것이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작년 가을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는 그동안의 일을 집약해주는 상징 적인 사건으로 보인다. 공직자로서 기밀을 유출하여 ‘조국 사태’를 촉발한 김태 우 전 구청장의 궐위 때문에 치러진 선거에서 검찰 출신 윤석열 대통령은 그를 사면 복권하여 직접 후보로 내세웠다. 이에 맞서 민주당은 경찰 간부 출신인 진교훈 후보를 지명했다. ‘정치 검찰’의 독재에 맞서 치안-행정 전문가를 내세우는 구도 속에서, 더 나은 정치는 국민을 죽이지 않고 살리는 치안-행정으로 상상 된다. 1) 한국사회는 다시 ‘개발독재’와 ‘국민을 살리는 치안’ 사이의 대결에 머무 는 것일까? 촛불 항쟁이 요구했던 것은 단순히 전문가/엘리트 집단의 교체나 법 제를 유지/보완하는 개혁보다는 지금의 대의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갱신하라 는 근본적 문제 제기에 더 가깝지 않았던가.
다른 가능성은 없었을까? 그 결정적인 가능성이 폐제된 계기를 지난 21 대 총선 전 선거제 개혁 시도로 기억한다.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을 지탱하는 승자 독식 제도를 개선하고, 지역 유지 출신 정치인만 살아남는 소선거구제를 벗어나 대안 정당을 향한 투표를 반영할 수 있도록 비례대표를 확충하는 것이 민주당이 내건 개혁의 요체였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민주당은 개혁의 흉내만 내다가 그마저도 자유한국당을 따라 만든 위성 정당이라는 꼼수로 형해화하고 말았다. 우선은 적과 싸워 이겨야 한다면서. 물론 그 나중은 도래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겨 최대 의석을 확보한 후로 얼마큼의 진보가 있었던가 되짚지 않을 수 없다. 자기 혁신을 멈추는 순간 진보라는 명명은 이름값을 할 수 없다. 의미 론적 관성 에너지로 남은 개혁은 그 목표가 자신이 되어야 할 때를 인정하지 않 는다. 끊임없이 ‘외부의 커다란 적’을 강조하는 이분법에 의존해, 자신이 적을 상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라고 주장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위치를 가까 스로 연장할 뿐이다. 그리하여 현행 제도 속에서 그 인적 구성을 전환하는 정도 가 최선의 정치로 남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촛불 항쟁은 주권재민의 대의제적 원칙을 확인하는 공화주 의 회복 운동으로 한정된 셈이다. 이는 민주당 지도부와 주류 586 세대의 관성 이 더 많은 정치의 가능성을 제한한 결과는 아니었을까. 민주당은 기득권 적폐 청산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으나 통치 집단의 인적 교체에만 대부분의 역량을 쏟 았을 뿐이다. 국민을 살려야 하는 치안의 대상으로 여길 뿐 국민과 권력을 나누 려 하지 않았다. 아니, 삶과 권력의 형식 자체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하지 않았다. 거대 양당의 위성 정당 창당이 예고된 이번 총선도 구도는 다르지 않아 보인다. 촛불 항쟁의 함성이,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에 촛불과 노란 포 스트잇을 집어든 시민들의 목소리가, 퀴어 청년과 여성 노동자와 장애인 이동권 투쟁과 기후 위기 활동가들의 목소리가 기성 정치에 담기기는 여전히 요원해 보 인다. 통치 권력의 인적 교체를 넘어 권력·제도 자체의 갱신을 더 꿈꿀 때, 그 과정 안에서 비로소 민주주의가 온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갱신의 요청은 (인) 문학장에도 마찬가지여야만 한다.
촛불의 역사적 단계와 ‘나중에’ 정권
백낙청의 「2023년에 할 일들—살던 대로 살지 맙시다」 2) 는 그 글이 실린 『창작과비평』 해당 호의 특집 ‘위기의 한국, 무엇을 해야 하나’의 기획안처럼 보 인다. 이 글은 “촛불 혁명이 진행중이라고 자랑하던 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물으며 “나라의 주인이신 시민 여러분”(16쪽)의 반성을 호소한다. 특히 보수 진영으로의 정권교체의 원인인 동시에 민주당의 재집권을 위한 방법으로 서 시민의식에 주목하여 “문재인 정부가 해낸 것이 적지 않은데도 촛불 정부를 자임했었기에 제대로 못한 부분으로 인한 시민들의 분노는 통상적인 수준을 훨 씬 넘었습니다. 반면에 촛불 정부가 한번 더 들어서면 자기네는 끝장이라는 기 득권 집단의 절박감도 남달랐습니다”(같은 쪽)라고 정권교체의 인과를 분석한 다. “기득권 집단의 절박감”에 비해 “민주당의 절박감이 태부족”(17쪽)이긴 했다 는 표면적 겸양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높은 정치적 요구치를 만족시키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는 은근한 억울함 속에서 내부 책임자도 지목된다. “촛불 시민들의 열정으로 2기 촛불 정부를 꿈꾸는 대선 후보가 선출되었지만 대다수 국회의원들은 민주당의 정권 재창출만 생각했”(같은 쪽)다. 촛불 시민을 계승한 이재명 대선후보를 중심으로 뭉쳐야 하는데 내부의 농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후보가 무능하고 무개념이면 어떠냐, 당장에 유권자를 속이는 데 가장 유리한 인물이라면 ‘악마면 어떠냐’는 것이 그들의 공감”이었고 “레거시 언론”(18쪽)과 그들이 유착하여 “침묵의 카르텔”(19쪽)이 형성되었기에 시민들은 (정치적인 결정 을 했다기보다는) 속아넘어갔다.
한국사회의 위기가 (악마로 묘사되는) 보수 진영 카르텔과 진보 진영 내부 의 배신/순진함 때문이라는 레토릭은 사실 방향만 바꾸어 반복되는 기성 정치 의 흔한 이분법적 음모론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권자의 선택의 의미를 악한 세력에 의한 피해로 축소하고 ‘적’의 위력을 강조함으로써 민주당은 대의에는 부 합하나 현실에서 힘은 부족한, 연민받아 마땅한 피해자의 위치에 선다. 586 세 대와 민주당 정권이 이미 한국사회 기득권의 일부라는 점은 적극적으로 은폐되 고, 억울하게 억압받았으나 끝내 승리할 미래의 주역으로 다시 자리매김한다.
이 글의 후반부는 ‘추가적 단상 몇 개’라는 소제목으로 기후 위기와 성평 등, 평화의 문제를 덧붙여 다룬다. “이런 주제들에 대한 논의와 연마가 부족했던 점도 촛불 혁명의 원활한 진전을 이루지 못한 원인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문제 의식”(24쪽)은 매우 적실하지만, 기획과 구성에서 볼 수 있듯 이 문제들은 부가 적인 차원에 할당되어 있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와 점점 실감되는 지구 생태계의 위기 앞에서 너무 국내 정치 에 열중한다는 비판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더 넓은 세상의 큰일들도 당연히 생 각해야지요. (……) 아무튼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에서 벌어지는 참담한 현 실을 젖혀두고 벌이는 거대 담론이나 거시적 전망은 한담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이 땅에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는 일은 한국사회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현존 세 계체제로서도 관건적 사안입니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세계체제의 핵심적 일부 이자 약한 고리거든요. 따라서 촛불 혁명은 기존 세계의 대세를 거스르는 작업이 며 나라 안팎을 막론하고 기득권 세력들이 용납하기 어려운 사태입니다.(22쪽)
정권교체가 최우선 과제라는 확신은 분단에 대한 기묘한 ‘특권 의식’과 연동된다. (유일한 분단 민족으로서 냉전체제를 대표한다는 자의식과 별개로 여러 분 단 민족 중 하나이기도 한) 가자-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민족주의적 권위주의 정부의 전쟁 및 인도적 위기, 후쿠시마와 지구온난화 같은 핵에너지 기후 위기가 상수가 된 지금, 한반도의 민족 분단이 유독/여전히 지금의 ‘세계체 제’를 체현하는 상징적 우위에 있다는 데는 쉽게 동의하기 힘들다. 물론 한반도 분단이 냉전에서 중요했다는 점이나 군사주의적 체제가 여전히 강고하다는 점 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민주당으로의 집권 세력 교체가 곧바로 세 계체제의 핵심 변수이자 변인이라는 확신은 기묘하다. 이렇듯 범세계적 반군사 주의 운동보다는 강대국/기득권의 음모를 이겨낼 한반도의 민족국가 설립으로 과제를 한정, 선별하는 소명의식은 분단·전쟁문학, 냉전 담론으로 한국 (인)문 학이 세계시장에서 독특한 상품성을 지녔던 (한국학 1세대로 흔히 통칭되던) 시대의 세계화/탈식민주의/근대화 욕망을 환기하는 것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산업화-독재 세대에 대한 신자유주의-민주화 세대의 집권 투쟁 이 핵심 과제로 (아직도) 설정되면서, 진보/보수 지지층이 세대와 젠더를 교차해 서 나타나고 있는 현재의 구도와는 별개로 이분법에 의존한 정치가 다시 소환 된다. 이로써 ‘기성 진보’의 소명의식이 유지된다. 그래서 다른 긴급한 논의들은 정상 국가 건설 이후 자연스럽게 해소될 부차적인 ‘한담’이 되고, 그마저도 “성평 등보다 ‘음양의 조화’ 같은 좀 다른 차원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 는”(26쪽) 이성애-재생산 중심주의적인 복고풍의 덕담으로 향한다. 평등이 “무조 건적 평등주의로는 달성될 수 없다고 할 때 ‘성차별이 사라진 평등 사회’ 구상에 나름의 새로운 개념과 호명 방식이 필요”(27쪽)하다는 제언은 지금껏 이미 치열 하게 논의·수행되어온 구상·실천들에 대해 사실 관심이 없다는 고백이자 이를 무력화시키는 말이기도 하다. 기성 정치(민주당)를 향한 ‘실사구시’로 대표되는 제언을 제외하면 대체로 추상적이고 모호한 ‘중용’의 반복에 가깝고, 현재 진행 되는 여러 인문사회학 논의를 거의 반영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팔십대 남성의 ‘단상’이라는 제약을 달긴 했지만, 오히려 그야말로 이 위기들이 나라다운 나라 를 건설한 ‘나중에’ 다룰 부차적 문제에 불과하다는 단계론을 무람없이 제시하 기 위한 전제인 셈이다. 이러한 목적론적/국가주의적 역사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촛불 항쟁을 민족국가 건설 운동의 계보에 놓는 것이다. 「어떤 남북연합을 만들 것인가—촛불혁명 시대의 한반도」 3) 「‘촛불’의 새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4) 등이 대표적인데, 「어떤」은 촛불 항쟁이 “기존의 혁명 개념에 미달함은 분명하 지만 우리는 교과서와 역사책에 없는 ‘분단 한국의 특수성’이라는 맥락에서 판 단해야 한다”(30쪽)고 공을 들여 강조하면서, 3·1운동이라는 민족 독립운동과 4·19혁명 이래의 민주화 운동의 사례를 연속적으로 배치하여 여러 민중운동의 성격을 구분하지 않고 민족국가 건설의 일환으로 간주한다. “‘분단 한국의 특수 성’이 곧 현존 세계체제의 모순이 집약된 현장이자 ‘약한 고리’에 해당”(32쪽)한 다는 점 때문이다. 그에 따라 촛불 혁명이 남북 화해를 향한 강대국의 입장 변 화를 이끌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이어진다. 국가/민족을 역사의 기본 단위 로 하는 서술에서 중요한 것은 ‘약소국 한국’이 비로소 강대한 민족국가의 단계 에 들어섰느냐의 여부다. 근대 민족자결주의적 자유라는 선험적 절대정신의 실현 정도로 역사의 발전단계를 나누는 헤겔적 역사관 속에서 독립운동과 민주 화 운동 사이의 단속斷續과 그 주체 내부의 차이는 누락되고, 그 모두가 도래할 민족국가에 대한 자긍심의 증거가 된다. 마찬가지로 촛불에 나타난 다양한 주 체들과 정치적 의제들, 그 성과와 한계는 모두 ‘한반도 나라 만들기’라는 절대정 신을 지휘할 수권 집단(민주당 지도층)의 유불리 문제로 흡수된다.
「3·1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5)는 더 본격적으로 3·1운동의 실패가 촛 불 혁명으로 청산됐다는 도식을 설정한다. “한반도 근대의 나라 만들기는 단 계적으로 진행되어왔고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서 “국민국가의 형색을 상당 부 분 갖춘 두 개의 정부가 남과 북에 자리잡았지만 3·1이 요구한 의미의 ‘대한 독 립’ ‘조선 독립’에는 여전히”(307쪽) 미달하였으나, “촛불 항쟁으로 실현된 남한 의 정권교체가 남북 관계의 획기적 개선으로 이어지고 한반도 전역에 걸친 민 중 역량의 비약적 증대를 이룬다면 이는 ‘혁명’의 이름에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 다”(319쪽). 이렇게 촛불은 민주당 정권에 의한 민족국가 건설의 사전 단계라는 ‘이성의 간지奸智’의 자기실현이 된다.
나아가 이 글은 “100년의 지체 끝에 실현되는 채무이행”으로서 촛불 혁 명이 보여준 “감수성의 확장”(319쪽)의 대표적 사례로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 을 독해한다. 백낙청은 이 작품이 “1996년의 연세대 투쟁과 2014년의 세월호 참사 등을 2016~17년의 촛불 항쟁과 하나의 서사 속에 묶음으로써 촛불 혁명 이 대중의 누적된 학습의 결과”(같은 쪽)임을 보여준다면서, 『디디의 우산』의 마 지막 대목, “혁명이 도래했다는 오늘을 나는 이렇게 기록한다”6)라는 소설가 화 자의 선언에서 ‘이렇게’의 내용 대신 민족국가 건설을 읽어낸다. “촛불 항쟁의 탄 핵 쟁취로 혁명이 ‘도래’했지만 혁명의 ‘완성’을 향한 긴 여정이 비로소 시작된다 는 생각으로까지 나갈 대목이며, 한반도 체제의 변혁을 가져올 혁명의 진행에 따라 제도·정동·사유의 더욱 발본적인 변화를 전망하고 탐색할 대목”(같은 쪽) 이라는 것이다. 이는 촛불 혁명이 이룬 정권교체가 “낮은 단계의 남북 연합”이라 는 “한반도식 나라 만들기의 당면한 다음 단계”(321쪽)로 나아가야 한다는 정론 으로 이어진다. 본격적인 문학평론이 아니기에 연세대 사태에서의 여성 혐오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여성 혐오를 연결하는 소설의 핵심적 구성에 대한 논 의를 누락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세월호 참사와 촛불 항쟁에 대한 문학적 재현을 민족국가 건설의 전 단계를 지향하는 민족의식으로 서둘러 흡수하는 서술 은 주목할 만하다. 여성 퀴어 청년 ‘나’가 일상 노동에서 겪는 폭력, 민주화 운동 에서 촛불 항쟁으로 이어지는 진보 담론/운동 안에서의 ‘악의 상투성’을 다룬 소설의 주제를 과소 독해하는 것은 촛불 항쟁 당시의 여러 의제와 실제 인과관 계를 거의 소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존의 혁명운동이나 혁명관을 삐딱한 각 도에서 바라보”고 “혁명 개념을 재구성하도록 이끈”7) 소설이라는 한기욱의 평을 직접 인용하고도 이를 반대로 읽고 “우리가 무조건 하나라는 거대하고도 괴로 운 착각”(『디디의 우산』, 306쪽)에 대한 소설적 발견에서 도리어 역사적 연속성/ 전체성을 강조하는 비평은 선험적·관념적 역사철학에 의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디디의 우산』은 촛불 항쟁이 타자의 고통과 정치에 대한 감수성을 확장하는 동시에 혁명을 혁명하는 잠재적 가능성이었음을 적실하게 성찰하고 관찰하는 소설이다. 특히 “혁명이 도래했다는 오늘을 나는 이렇게 기 록한다”에 이어 서술된 ‘이렇게’는 다음과 같다.
남자는 울지 않는 법이라며 구석에 숨어서 우는 아이를 말하고 그 아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며 살아야 하는지를 걱정하기도 하면서. 쌤 스미스의 커밍아웃 을 말하다가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해 회원들과 작은 언쟁을 벌이고 만 일을 말하 기도 하면서. 헌법재판소로 들어가는 재판관의 머리칼에 핑크색 헤어롤 두 개가 말려 있는 것을 우리가 보았으나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아서 그 것에 관해 별말을 하지 않았다고.(317~318쪽)
‘나’는 광장의 혁명(사)만 중요한 것이 아니며, 식탁에서 나누는 이야기 의 전환이 만들어내는 다른 혁명을 기록하자고 말한다. 탄핵을 앞두고 “동학농 민운동, 만민공동회운동, 4·19혁명과 87년 6월항쟁까지, 한 번도 제대로 이겨 본 적 없는 우리가 이기는 것이라고. 이 나라 근현대사에서 우리는 최초로 승리 를 경험한 세대가 될 것이라고”(314쪽) 자긍심을 표출하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 고 ‘나’는 식탁에 머무른다. 정상 국가를 회복했다는 “승리와 완성의 축제” 속 에 서기보다는 “파도가 가고 남은 자리에 이 식탁이 남는 광경을 나는 생각해 본다”(315쪽). ‘광장’의 ‘민주 시민’ ‘민족/민중’이 여성, 퀴어, 청년, 비정규직, 비혼 돌봄 가정의 일상적 투쟁을 직간접적으로 배제/삭제함으로써 보편적 역사 를 구현해온 과정을 몸소 겪고 읽었기 때문이다. 촛불 혁명의 과정을 전후하여 겪은 퀴어 페미니즘적 결절점들에 주목하여 다음 세대에게 건네줄 이야기를 만 들고자 하는 황정은에게 촛불은 일상의 통치성을 전복하고 혁명을 갱신하는 이 야기로 “이제 모두를 깨울 시간”(같은 쪽)이었다. 역사 법칙을 예증하기 위하여 발견되는 대상이 아니라, 재현 언어의 주체가 되어 ‘나’의 삶을 역사로 만들어가 는 과정이 되도록.
그러나 ‘살던 대로 살지 말자’는 권유는 기성 대의제 안에서 민족국가 건 설에 관심이 있는 세력이 정권을 차지할 때까지 다른 열망을 유예하자는 말일 뿐, 지금의 삶 자체를 위해 주권 제도를 재구성하자는 말로는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니 논의는 ““박근혜 이후 ‘누구’가 아니라, 박근혜 이후 ‘무엇’을 말해야 한 다”는 지적은 일단 경청할 만하지만, 조기 대선이 확실시되는 현 시점에서 재고 할 필요가 있다”(「‘촛불’」, 24쪽)8)는 민주당의 인물론으로 이어진다. 지금 다시, 윤 석열 이후 ‘누구’를 찾는 질문만이 남게 된다면 촛불은 다시 원점이 될 것이다.
촛불 항쟁이 87년 체제 이후 민주주의 시스템(의 최소한마저)이 작동하지 않는 사태가 중첩되어가는 꼴에 대한 저항이었다면, 촛불의 궁극적 과제는 민 주주의 시스템의 재점검과 갱신일 것이다. 그것은 집권 세력과 대통령의 인물 됨됨이에 크게 좌우되는 대의제 안에서의 권력 집단 교체에 그치지 않고, (‘한반 도’를 특권화하지 않는) 범세계적 반군사주의 평화운동, 기후 운동, 퀴어 페미니 즘, 장애-질병 담론 등 정치제도와 그 주체를 심문하는 목소리를 통해서 이뤄 져야 하지 않을까. 정상 국가(전체)를 우선 만든 다음 ‘나중에’ 다룰 문제가 아 니라, 도리어 이것을 시민사회의 구성 원리로 삼아야만 (굳이 단합된 민족/국가일 필요는 없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
지식인의 우주 진화적 사명과 죄책감의 미학적 흡수력
단계론적 역사관의 특징 중 하나는 절대정신을 체현하는 지도부와 시민 의 독특한 관계다. 백낙청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앞두고 「‘촛불’」에서 문재인, 안희정 등 당시 민주당 대권주자에 대한 간접적인 하마평과 더불어 시민이 지지하는 후보를 잘 고르라고 주문한다. 역사적 사명을 기꺼이 짊어지는 ‘진보적 지식인’을 제대로 선발하고 ‘살던 대로 살지 않기로’ 결심한 시민이 결합한다면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역사의 전위인 엘리트 정치인과 속지 않는 시민으로 구성된 연대체가 역사의 주체라는 것이다.
탈성장이 아무리 정당한 목표이고 지구를 파괴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국가 및 기 업들과의 싸움이 아무리 급박하더라도 싸움의 성패는 결국 단·중·장기 목표를 얼마나 슬기롭게 배합해서 대중의 지지를 얼마만큼 얻어내느냐에 달린 것 아니 겠는가.(「2023년」, 25쪽)
이러한 단언은 시민이 탈성장(을 비롯한 여러 의제)을 국가에 먼저 요구하 고 다른 시민을 직접 설득하는 현재의 시민사회/운동의 구도와는 동떨어진 정 세 분석에서 나온다. 진보적 엘리트 관료 계급이 일부 시민의 성급한 요구를 슬 기롭게 통제하고 대중의 지지를 확보해가면서 목표를 달성해가는 이러한 단계적 근대화론에는 정상 국가를 설계하는 엘리트와 이를 지지하는 진보 시민 연대 체가 후위에 있는 대중을 설득한다는 은근한 계몽의 서사가 저변에 깔려 있다.
기실 이 구도는 『창작과비평』의 창간사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9)에 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문단의 낙후성”(6쪽)을 딛고 “대국적 안목”으로 “문학의 온전한 사회 기능을 옹호”(9쪽)하는 이 글에서 흥미로운 점은 근대화와 선도적 문학인의 관계다. 그는 시민 생활과 문학이 일치했던 서구의 황금기 및 혁명의 모범 사례를 열거하면서, “근대화의 중심 과제가 곧 산업화”이고 “현대는 집단 감정과 집단 행동이 움직이는 시대”(31쪽)이므로 개인의 문학이 아닌 집단 의 문학을 꾀해야 한다고 본다. 후진적인 “한국에서 정말 대다수 민중이란” “문 학을 읽을 여유도 능력도 의욕도 없는 사람들”(17쪽)이기에 “현실 독자들의 한심 한 수준”(19쪽)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민중의 저항을 가로맡고 근대화를 위한 가장 보편적인 이상을 제시하며 또 실천하는 역사의 주동적 역할을 작가와 지 식인이 맡아야 한다는 데에 딴말이 있기 어렵다”(34쪽)고 주장한다. “대중의 소 외와 타락이 심한 사회일수록 소수 지식인의 슬기와 양심에 모든 것이 달”(38쪽) 렸다는 것이다. 대중을 올바르게 통제함으로써 서구적 근대화 기획을 현실화하는 (인)문학 엘리트라는 구도다.10)
「시민문학론」11)에서는 민족의식을 체현하는 ‘중위’적 시민이라는 매개가 부가된다. 그에 따라 지식인/문학인의 역할도 대중의 교양에서 민중 속 시민 정 신의 맹아를 발견하고 이를 지원하는 역할로 변한다. 고전적 시민혁명인 프랑스 혁명이 “혁명기에 절정에 달했던 시민의식을 온전히 지키고 키워 참다운 민주 적 시민사회를 완성하지는 못했”(464쪽)기에 현대인은 시민의식을 잃고 소시민 으로 전락해버렸다. 백낙청은 사회경제적 계급인 시민에서 “자신의 공동 운명과 사회적 위치를 명백히 인식”(463쪽)하는 공동체적 자의식을 분리하여 시민(성) 의 맥락을 전환하는데, 그 ‘시민의식’은 근대/민족정신의 역사적 자기실현 과정 으로서의 헤겔적 절대정신과 유사한 속성을 지닌다. “열병처럼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민주주의에의 집념은 한 동물학적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자신의 우주 진 화사적 위치를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고 이에 고무”(466쪽)된 덕분으로, 우주적, 종적 절대정신이 민주주의라는 역사적 필연을 체현해가는 인류의 추진력이라 는 것이다. 그는 플라톤을 경유해 “세계의 창조가 ‘필연anakhe’과 ‘정신noos’의 협 동 작업이었다고 설명”하고, “주어진 환경조건의 필연성 내지 폭력성을 ‘설복’시 켜 조화를 증대시켜나가는 우주 진화의 어떤 궁극적 요인”(469쪽)으로서 ‘이성’ 을 주장하면서, 이는 단순히 합리적, 분석적 이성이 아니라 (예수와 보살의 사랑 을 예로 들며) 설복과 조화라는 정동적 요소를 담은 합일의 원리임을 강변한다. 그래서 소시민이 되어버린 현대인에게는 “하나의 감정으로서가 아니라 우주 전 체를 움직이고 이끄는 힘으로서의 ‘사랑’”(509쪽)이라는 일종의 교양 문학이, 개 인을 전체로 조화시키는 고전주의적 재현 원리가 필요해진다.
따라서 우주적, 종적 역사의식을 실현하는 “새로운 시민사회의 형성 과 정에서 작가와 지식인이 또 한번 핵심적 역할을 맡”(465쪽)아야 한다. 이를 위 한 시민문학으로는 “사회와 인간을 보는 어떤 ‘원숙한 관점’과 이에 수반되는 ‘균 형’”(472쪽)을 담은 리얼리즘이 합당한데, 여기에는 “어느 개인 개인보다 전체 사회 그 자체를 중시하는 동시에 (……) 그들 자신은 제 나름으로 하나의 절대적 목적을 이루는 인간의 창조”(473쪽)12)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즉, 시민문학은 개 인과 사회(전체·우주) 사이의 ‘균형’을 재현함으로써 세계정신을 추구하는 ‘원숙 한 관점’을 지니고 있으며, “자기 삶의 근거에 대한 정직하고 온전한 파악”을 하 게 해주는 (시민)문학을 통해 교양을 갖추어야 “시민다운 시민”(477쪽)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시민성에서 사회적 계급성(과거의 것이니까)과 당파성(부분적인 것이 니까)을 지우고, 이를 민족/국가라는 전체 지향적 합일의 원리로 전환하면서 사 랑의 문학이 그런 교양의 매개로 재정의된다. 당대 역사학계의 자발적 근대화 론의 분위기 속에서 백낙청은 전체를 위한 사랑이 구체화된 한국적 사례를 검 토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3·1운동과 같은 민족적 민중 봉기에 잠재된 우주 적 시민의식에도 불구하고 민족 대표 33인 같은 문학인·지식인들이 보여준 “영 도력의 취약성”(486쪽)이다. “대다수 민중과 소수의 선구적 지식인이 하나의 시 민의식으로 뭉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484쪽)을 민중은 기다렸으나 지식 계 층은 그동안 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지식인/문학인이 민중 과 자신을 다시 묶어주는 시민의식, 시민문학을 깨닫길 역설하는 것이 이 글의 요체다. 그렇게 묶일 때의 세계와 자신을 사랑하는 감각, ‘국가(민족)’–‘시민(의 식)’–‘ 지식인(문학인)의 자아’가 하나된 삼위일체에 대한 자긍심이 문학적 사랑 에 이른다.
그런데 백낙청은 이 ‘사랑’을 실제 문학비평에서는 죄책감과 죄의식으로 번역한다. 특히 김수영의 자기반성을 고평하며, 지식인이 “매우 힘들여 얻은 통 찰과 성실성과 긍지”(506쪽)를 시민문학의 목표로 꼽고, 역사적 시민의식을 알 면서도 충분히 체화하지 못했거나 이를 이미 체현한 민중과 호흡하지 못한다는 지식인의 죄책감·책임감에서 “순수한 사랑과 기다림의 경지”(508쪽)를 찾아낸 다. 그리하여 김수영의 시는 (역사를 미리 체현하고 있는) 민중, 민족을 보라는 정 언명령에 따라 시민의식이라는 이념을 (뒤늦게 반성하며) 획득함으로써 “세계와 우주 전체에 대한 어떤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며, “가장 높은 의미의 시민의식을 ‘사랑’이란 말로써 표현한 것도 바로 김수영이다”(509쪽). 그럴 때 문학/비평은 전 체를 위한 부분으로서의 책무를 깨닫는 자기 고양(니코마코스 윤리학적 자기 계 몽이라는 개별자의 덕성)을 민족/국가 완성을 향한 (헤겔적 선험적) 사명과 연결하는 매개다. 전체에 대한 이념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분열된 세계-자아 의 전체성을 재종합하는 예술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헤겔 미학의 얼개를 여기 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백낙청 비평은 ‘시민의식’을 통해 문학을 선험적으로 공공적인 것 으로 설명하고 단일한 전체에 대한 부분의 기여를 역사의 원리로 만들어 선험 적 공동체(민족국가)와 개인을 연결해왔다. 그런 점에서 백낙청 비평의 근간에는 전체로 합일될 역사적 법칙을 아는 조화의 관점, 그런 부분으로서 제 역할을 아는 균형, 이를 미리 체현해온 민중·민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들의 시민의식 에 부합하지 못한 지식인 자신에 대한 반성과 (반성하는 ‘나’에 대한) 긍지가 있는 것이다. 이 사랑과 긍지는 민중(의 비극적 현실)에 대한 지식인의 죄책감으로부 터 미래적·선험적 시민의식을 회복하는 계기를 찾아내는 미감이다. 민족·국가 의 필연적 완성태와 자신을 일체화함으로써, 현재/타자의 비극에 대한 수치심 에 머무르기보다는 그를 재빠르게 미래의 민족·국가적 자긍심으로 전유專有하 여 ‘부분’의 죄책감과 ‘전체’의 자긍심을 오가는 정동의 변증법인 셈이다.
하지만 그 민족/국가의 미래는 누구에게 행복을 약속하는 것일까? 국가 가 제대로 건설된다면 (그에 일조한 모범적인) 덕 있는 국민에게 행복이 분배될 것이라는 (끊임없이 유예될) 약속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미래의 국가를 향한 투자를 지속하게 한다. 한편으로 보수 진영의 노동/소비 인구 소멸론과 진보 진 영의 민족국가 지연론은 모두 국가의 완성을 향한 통치술이라는 점에서는 상통 하는 것 아닐까. 둘 다 경제적 빈곤과 외세의 간섭이라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현 재에 소환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되찾을 미래를 건설해야 한다는 계 몽의 강령을 만들고, 국가가 완성된 이후에야 비로소 개별자들에게 행복을 분 배해주겠다는 약속이다. 이 서사는 공히 특정한 역사를 차출해 현재의 문제와 직접 대응하는 인과관계를 과잉 설정하고, 민족적·국가적 트라우마가 자부심 으로 바뀌는 행복13)에 기대어 국민/시민에게 아름다운 전체로의 조화/복종을 권유하는 것은 아닐까.
발견, 반영, 승화의 선험적 전체주의를 넘어서
이러한 비평적 기원을 바탕으로 역사의식을 (자기도 모르게) 미리 실천하 며 슬기로운 지식인을 기다리는 ‘중위’적 시민을 『창작과비평』의 ‘촛불 시민’이 계승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더 나아가 문학의 근본적 공공성을 사랑으로 명명하 는 것, 그 전체적 공공성에 대한 ‘시민의식’적 죄책감/자긍심을 ‘커먼즈 문학론’ ‘돌봄의 공동체론’과 연결해 읽어보면 어떨까14)). 미처 언어화되지 못했으나 정치적 열망을 품은 시민의식을 알아보는 선각자 지식인/문학인이 있고, 이를 더 보편적인 민 족국가 건설의 방향으로 슬기롭게 설계하고 인도하면 전위의 의식 있는 민주/촛 불 시민들이 이를 흡수하고 확산하여 결국 후위의 대중 역시 이를 따르게 된다 는 암묵적인 구도가 현재까지 여전히 유사하게 전개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 욱 그렇다.15) 『창작과비평』의 근래 지면 배치 역시 노동자 시민의 언어·독서 현 황보다 (민주화 세대의 교수진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내외의 사회 지도층과 진보 적 교육자, 정책 전문가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시민의식’을 대리 발화하거나 지 식인을 대표하여 반성하게 하면서 민주당 (재)집권이라는 미래를 자긍하는 경 향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한기욱의 비평은 촛불 항쟁 시기의 동시대성을 중심으로 소설을 꼼꼼히 독해하면서 이를 통해 촛불에서 기존 혁명과는 다른 방식, 주체, 의제를 읽어내 고 민주당 정권이 이를 반영해야 한다는 중요한 지적을 하고, 용산 참사와 세월호 참사의 애도와 연대의 경험을 페미니즘 운동과 결합하는 등의 의미 있는 독 해를 보여왔다. 그럼에도 이는 페미니즘적 의제를 촛불 시민의 ‘시민의식’으로 사후적으로 발견/흡수하거나, ‘조국 사태’의 위선과 모순 자체보다는 그 때문에 분노한 청년들을 “정동의 아나키즘”으로 몰아가는 야만적 자본주의를 발견하는 작업으로 이어진다.16) 이런 발견-흡수는 시민의 ‘즉각적 정동’을 지식인·문학인 의 ‘훈련된 사유’로 승화하여 민주당(을 존립하게 하는 제도/세대의 개혁보다는) 정 책으로 전유하는 구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강경석이 촛불 항쟁을 ‘혁명의 갱신’의 필요를 드러낸 사건 으로 차분히 독해하는 장면은 소중하다. 그런데 그가 자신과 김건형, 김요섭, 강 지희의 황정은론 사이의 해석적 차이의 원인을, “「아무것도」〔「아무것도 말할 필요 가 없다」, 『디디의 우산』—인용자〕가 말하는 혁명이 ‘혁명의 혁명’을 포함하는 개 념임을 간과한 결과일 것”17)으로 꼽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네 논자 모두 촛불 혁 명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성 혁명 운동/전략의 보수성과 자기동일성 을 지적하고 혁명의 갱신을 향한 동시대 문학의 움직임을 읽어내고 있음에도 그가 자신과 다른 논자들의 독해가 사뭇 다르다고 해석하는 배경에는 촛불 항 쟁 및 당시 텍스트에 대한 역사철학적 관점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광장의 (민주 주의적 가능성과 동시에 상존하는) 타자 소외/누락이라는 현상과, 시민정신의 이 념에 따라 필연적으로 종합될 촛불의 거시적 미래 어느 쪽에 무게를 싣느냐는 시각의 차이다. 이는 현재 개별자들의 수행성이 만들어가는 미래와 역사의 선 험적 법칙에 따라 해석된 현재라는 역사철학의 차이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강 경석은 백낙청이 “‘소수의 지도자 또는 지배자가 아닌 다수의 국민’ 정도로만 풀 이해놓으면 그 이상의 정의가 필요 없이 된다”(「민중은 누구인가」, 1979)라고 한 민중의 정의를 인용한다. “민중은 거주지나 계급 또는 성차 등에 따라 정체성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단위 공동체가 아니며” “차라리 특정 공동체 또는 특정 공동체를 통어하고 있던 규범이나 제도, 코드, 정체성의 동요로부터 소환되곤 해왔다.”18) 그럴 때 ‘민중’은 시기별로 출현하는 양태는 상이하지만 기득권과 싸 운다는 점에서는 단일한 상이며, 따라서 ‘민중적인 것’의 이념은 민중/국민 안의 위계와 폭력을 오래 응시할 수가 없다. 하나된 민중(이라는 동일성)과 외부의 기 득권/적이라는 이분법에 그 존재 형식이 기대기 때문이다.
송종원은 퀴어 페미니즘 비평은 (민중적인 것의 종합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비퀴어와 퀴어 사이의 분할선을 만들고 그 분할선 너머의 통합적 정치성을 방 해한다는 염려를 토로한다.19) 그가 보기에 (일부) 퀴어 비평은 “디테일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시선” 속에서 “교정의 논리”로 “전체적 의미에 대한 독해에는 비교적 덜 신경쓰는” 문제가 있는데, 이는 “재현의 윤리에 대한 과도한 민감성으로 이 어”(428쪽)지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작품이 퀴어 재현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므 로 “당시의 환경에서 나름의 타자성과 공동체성을 구현하려는 실험”으로서 “작 품을 역사화하여 읽는 방식이 필요”(428~429쪽)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학 연 구/비평이 작가/작품이 당대로서는 선구적인 의미가 있었다는 ‘제한적 칭찬’에 복무하는 작업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폭력 과 억압에 대해서도 후대의 문학 비평/연구는 개입할 수 없다. 여성 시든 노동 자 서사든 어떤 작품이든 특정 집단의 재현 자체에 그치지 않고 나름의 주제의 식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임은 당연한 바인 것처럼, 작품의 형상화 방식이 그 전 체적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지 혹은 전달하려는 그 의미가 어떤 가치가 있 는지를 검토하는 것은 비평의 당연한 역할이다. 비평 본연의 정치미학적 작업 은, 텍스트가 그 나름대로 타자성/공동체성을 구현하려는 시각/재현 방법 그 자체가 당시의 역사적 한계이자 가능성이었다는 점을 가시화함으로써 지금의/ 당대의 문학 독법/창작론 자체를 정치화하여 텍스트 내외의 ‘전체적인 의미’를 더 폭넓게 읽어 의제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퀴어 페미니즘이 기존 문학사를 재점검하고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독해하거나 텍스트에서 새로운 미학을 찾아 내는 작업은 단순히 작가/작품에 대한 사후적 ‘교정’(일 때조차 그간 누적된 독 법/창작론에 개입하는 작업에 더 가깝지만)에 멈추지 않고 문학 자체의 정치성을 갱신하고 확장하는 작업이다. 그런 비평 본연의 역할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애 써 이를 분할선의 구축이라고 재분할하는 일은 특정한 비평적 욕망을 드러낸 다. “의미 있는 전체”(430쪽)로 나아가 타자가 억압받는 현재를 “끊는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고 구축하는 일이” 더 중요하므로 “광장의 정치와 퀴어 서사를 애써 분리해서 바라볼 필요는 없다”(429쪽)는 말은, 기실 이 분리를 전면으로 다룬 문 학 텍스트의 현재성을 감소시킨다.
분할된 것의 총합이 곧 전체는 아니며 주체의 행위와 생애는 분할된 것들 사이 의 조합과 그를 초과하는 결합 효과들로 인해 발생한다. 다시 말해 ‘의미 있는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젠더 감수성이 충분히 수용되어 있지는 않 았지만 정치적 주체로서의 ‘민중’이나 ‘시민’의 개념이 하던 일이 그것이기도 하 다.(430쪽)
이러한 ‘전체’를 향한 지향 속에는 어떤 재현/존재든 그 부분/자체로는 의미가 없거나 적고 ‘의미 있는 전체성=시민의식=우주 진화적 사명’을 따르는 민족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역사적 최종 목표의 사전 단계로서만 유효한 정치 적 주체일 수 있다는 선험적 전체주의의 기획이 들어 있다. 따라서 김현이 “형들 의 나라”20) 만들기를 비판하면서 그간의 선험적 공동체주의, 단계론적 역사의식 이 적극적으로 분할해온 혁명의 작은 주체들을 회복하는 작업과 한국 퀴어의 일상적 노동과 사랑, 돌봄의 역사를 읽는 작업21)에서 송종원이 추출하는 것은 “광장에서 일상으로 돌아가고도 타인의 생을 염려하고 연대하는 이 감각의 발 견”(431쪽)이다. 퀴어가 광장의 정치, 연대로 돌아가는 통합의 움직임에만 주목 할 때, 광장에서 누락되어온 퀴어적 역사철학을 주창했던 바는 크게 주목되지 못한다.
황정은과 김현의 문학에는 선험적 역사/전체에 대한 죄책감과 부채 의식 이 없다. 도리어 그 이념을 따랐던 지식인/시민 담론에 대한 청년의 분노가 있 다. 기존 분할선을 가시화하고 이를 의제로 숙고한 이후에야 비로소 다시 (달라 진) 광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화자의 문제의식(과 이를 강조한 비평의 문제의식) 을 송종원은 도리어 분리주의로 치부한다. 그러한 변증법적 운동에서는 소외의 주요 원인이 바로 그 ‘저항적 시민 집단’일 수 있다는 비판은 피상적인 포용과 서정적 전체성으로 인해 흩어지고, 그 덕분에 얼마간 겸허해진 ‘시민의식’은 재 빨리 회복된다. ‘나’의 소외와 배제를 말하는 타자의 목소리에서 그 선험적·총체적 원인인 (타자는 몰랐지만 지식인에 의해 드러나는) 거대한 외부의 ‘적’을 지목 함으로써, 타자는 이에 맞서는 저항적 시민 집단의 일부분으로 다시 흡수되어 미래의 국가/민족의 재긍정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 도식에서 퀴어적 인식론은 소시민적 이기성에 가깝게 독해된다. 그래 서 퀴어 되기의 수행성이 “비-퀴어의 주체성을 소거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며 “퀴어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같은 쪽) 타자적인 존재이므로 우리 모두를 규율하 고 조율하는 존재로 확장하는 대국적 관점이 주문된다. 퀴어의 고유한 존재론 을 구축/확장하려는 시도를 ‘역사화하여 읽기’보다는, 그 문제의식을 재빨리 더 큰 보편자(가 이미 갖고 있었다는)의 자의식으로 흡수하면서 퀴어적 인식론의 고 유함/필요함이 무화되는 셈이다. 여성/퀴어가 매일 하는 보편 언어의 자기화라 는 번역 노동이 역으로도 가능하다는 생각은 여전히 하지 못하는 것일까? 굳 이 퀴어 비평이 없더라도 이미 ‘시민의식’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퀴어 비평이 제 기하는 문제들을 왜 진작 보지 않았던 것일까?22) 그 근간에는 비-퀴어가 퀴어 적 인식론을 통해서 배우고 자신의 인식론을 갱신하기보다는 기성 전체/보편의 입장에서 효용가치를 입증하라고 퀴어에게 요구하는 당당한 자의식이 잠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비-퀴어의 대의에 ‘대국적’으로 이입해달라는 요구나 비-퀴어 에게도 익숙한 언어로 번역해야만 문학/학술적 시민권을 배분하는 분할은 그간 무수히 반복되어온 페미니즘에 대한 진부한 요구와도 닮아 있다.23) 사소한 표현 에 집중할 뿐 선험적 공동체를 따르지 않기에 역사의식이 부족하다는 비판은 퀴어 페미니즘을 통해 구축할 수 있는 다른 역사성을 미리 평가절하하면서 ‘나 중에’ 도래할 민족국가 건설의 단계론에 따르길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백낙청에게 사랑은 모든 존재가 완성으로 향하는 도정을 부추기는 힘”24)이었겠지만, 퀴어 페미니즘 비평에게, 아니 지금 비평에게 사랑은 개별자는 몰랐지만 역사적으로 정해져 있는 하나의 완성을 향하도록 부추기는 책임감/죄 책감이 아니다. 사랑은 모든 존재가 각자의 삶을 스스로 형성하는 과정에서 출 현한다. 그러니 이제 현재를 이미 있던 하나의 광장으로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광장 자체를 재구성함으로써 역사를 만들어가는 언어적, 미학적, 정치적 원리가 더 필요하다. 우리는 누가 정치를 하길 원하는가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정치-관계를 원하는지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나’ 자신으로부터의 교양, 그로부터의 말 걸기
황정은과 김현이 촛불을 통해 기존의 혁명(사) 속 주체와 관계성을 정지 하고 갱신했다면, 김기태의 「보편 교양」25)은 지금의 지성 체계 속의 주체와 관계 성을 정지하고 갱신해간다. 이 소설은 선험적 전체성에 대한 지식인의 책임감과 자긍심의 변증법이 더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대를 부조한다. 화자인 곽은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에서 “현실과 괴리된, 정체된, 그래서 화자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고 해설되는”(189~190쪽) 늙은 교수와 달리 현실 문제 를 사유하고 고민하는 학생을 길러내려는 사명을 포기하지 않는다. 지식인으로 서 사회적 책임감을 삶에서 실천하기 위해 늘 고민하는 곽은 선택과목과 자기 설계 수업이 늘어난 교육 정책에 힘입어 ‘고전 읽기’ 수업을 자원해 개설한다. 문 제 풀이를 위해 토막 낸 단편적 지식을 전달하는 수업에서 벗어나려면 “고전 읽 기는 일하고 사랑하고 꿈꾸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보편적 교양을 담 은 수업이어야 했다”(196쪽). 그래서 곽은 수강 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알려 하지 않는다. ‘성적’으로 평가되는 ‘학생’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으로 접근하고 싶기 때 문이다.
“70년대, 혹은 60년대 작품”을 가르치며 “억압적인 권력에 훼손된 개인의 자유를 형상화하며 반성과 실천을 독려하는…… 식의 설명을 마쳤을 때 맨 앞 줄 학생이 질문”한다. “선생님도 민주화 운동 했어요?”(190쪽) 학생들에게 반성 을 통해서 실천으로 확장해가는 지식인의 사명감과 부채감은 동시대적인 감각 이 아닌 것이다. 곽은 고전 읽기 시간에 자거나 문제집을 푸는 아이들을 책망하 지 못한다. “새벽까지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를 봤을 거라 짐작하며 어제 무엇을 했길래 이렇게 자냐고 물”으면 “늦게까지 배달을 해서…… 죄송합니다”(197쪽)라 는 대답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곽은 “사연을 물을지 고민”했지만 “각자의 삶에 서 이 수업이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차라리 50분의 숙면이 더 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을 교실에 가두는 것은 어른들의 욕심이 아닐까”(같은 쪽) 생각하며 더 겸허해질 뿐이다.
그런 곽에게 은재만이 희망을 준다. 은재는 『자본론』을 수업에서 읽힌다 며 학교에 민원을 제기하는 아버지를 도리어 어른스럽게 만류하고, 고전 읽기의 취지에 맞게 인간의 본성을 논하며 마르크스의 유산을 논하는 비평문을 써내 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대에 합격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곽은 졸업식 날 은 재를 다시 만나 아버지와의 해프닝에 대해 묻는다. 그러자 은재는 입시 컨설턴 트 선생님이 마르크스가 입시에 도움이 된다고 아버지에게 전화했었다고 말하 며 아버지의 교양 없음을 탓한다. 보편 교양을 가르치려는 곽의 사명감은 비판 적 담론마저 지식 자본으로 흡수하는 교육/입시 시스템 덕분에 ‘늙은 교수’들에 의해 가까스로 ‘성과’를 낸다. 외로움과 패배감에 빠져버린 곽은 수업시간에 늘 잠만 자던 아이들이 몰려와 굳이 자신과 기념사진을 함께 찍자는 데에 기분이 더 묘해진다. “그들이 성인의 삶을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했지 만 불투명한 상황이라면 실례일 수 있으므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210쪽)
곽이 교육에 실패하고 입시에 성공하는 역설은 학생들의 사연을 묻지 않 는 데에서부터 기인한 것은 아닐까. 그는 “일하고 사랑하고 꿈꾸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보편적 교양”을 바탕으로 권력에 맞선 “반성과 실천을 독려 하는” 지식인을 육성하고 싶었지만, 누구여도 무관한 보편적 인간에 대한 책임 감과 죄책감은 학생들에게 시대착오적이거나 자신과 무관한 것이었다. 입시 컨 설턴트의 조언처럼 대학의 늙은 교수들에게 중요하게 평가받아 학력 세습에 도 움을 줄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자신이 수업시간에 문제를 풀어야만 하는 이유 와 야간 알바를 해야 하는 이유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고전은 아이들에게 공허 했다. 곽 역시 자신이 왜 ‘이 고전’을 가르쳐야 하는지 묻지 않았기에 책장을 메 운 추천 도서 “하나하나는 알맞게 배치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조화롭지 않아” 보 인다. 그러나 “그 불만족을 해석할 언어를 구성할 수 없었다”(209쪽). 그는 정규 직 교사로서 임금과 안정성을 보장받으므로 “균형감각, 계급의식, 뭐라고 부르든 견지해야 할 미덕이 있다면 푸념은 자제해야”(191쪽) 한다고 다짐해왔다. 보편적 지식인으로서 균형 잡힌 시선을 유지한다는 자긍심이다. 그래서 은재의 아버지 와 교장이 “전교조는 아니”냐고 노동권과 교수권을 침해할 때도 “혼자 맞서는 편이 낫다는 결론”(199쪽)에 도달할 뿐 자신에게 필요한 사유와 환경을 찾지 않 았다.
하지만 곽이야말로 노동환경과 교사 공동체를 제대로 직시하고 개입할 수 있는 교양이 필요했다. 누구여도 상관없는(그래서 실은 특정한 계급/집단을 지 칭하고 마는) 보편적 인간에 대한 선험적 책임감을 가르치는 강단講壇은 이제 아 이들에게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 ‘나’의 불안과 분노를 말하는 단상壇上이야 말로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교양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인 것이다. 이제 교양은 민 족·국가에 대한 선험적 죄의식을 습득하고 도래할 전체로 현재를 이월하는 지 식인의 자부심이 아니다. 내가 속한 사회가 지금 어떠하길 원한다고 말하고 설 득하는 데 필요한 도구야말로 교양이다. 곽이 마주한 것은 스스로 말하는 자들 의 단상으로부터 다시 교양을 교양해야 한다는 시대적 전환점이다. 우리도 그 단상 위에 있다.
- 1) 김건형, 「이태원의 ‘나’ 아카이브와 치안-행정을 넘는 문학/비평」, 『문학동네』 2023년 겨울호.
- 2) 백낙청, 「2023년에 할 일들 — 살던 대로 살지 맙시다」(이하 「2023년」), 『창작과비평』 2023년 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3) 백낙청, 「어떤 남북연합을 만들 것인가—촛불혁명 시대의 한반도」(이하 「어떤」), 『창작과비평』 2018년 가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4) 백낙청, 「‘촛불’의 새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이하 「‘촛불’」),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5) 백낙청, 「3·1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창작과비평』 2019년 여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6) 황정은, 『디디의 우산』, 창비, 2019, 317쪽.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7) 한기욱,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디디의 우산』을 읽고」,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 2~3쪽.
- 8) 최근 외부 필진이 선거제도 개혁에 관한 원론을 소개한 적은 있으나 본격적으로 민주당에 대한 개혁 요구로 확장되지는 않았다. 하승수, 「선거제도 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 『창작과비평』 2022년 겨울호.
- 9) 백낙청,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창작과비평』 1966년 겨울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10) 물론 “‘지식인-문학인’과 대중을 선명하게 구별하는 그의 생각이 대중을 무시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백낙청은 한국의 후진성이 대중 의 의식 발전의 지체를 낳고 있고 그래서 대중의 잠재성이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당대 한국에서 ‘지식인-문학인’은 ‘소수 선구자’로서 의 역사적 위상이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그에게 역사의 주체는 결국 ‘대중-민중’이다. ‘지식인-문학인’은 ‘소수 선구자’로서 대중의 주 인 됨, 민주주의를 앞장서서 대중 스스로 일깨울 수 있도록 앞장선다.” “이렇듯 백낙청의 ‘지식인-문학인’에 대한 높은 역사적 책무와 위상의 부여 는 기본적으로 현재까지 줄곧 지속된다. 여하튼 창비를 창간할 때부터 백낙청은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인데, 그래서 그는 새로 창간하는 잡지명을 ‘전위’라고 할까도 생각했다고 한다”(이성혁, 「1970~1980년대 한국 문학운동 담론에서 ‘지식인-문학인’ 위상의 변천」, 『뉴 래디컬 리 뷰』 2016년 가을호, 126쪽). 1960년대의 엄혹한 사회적 환경이나 동시기 인문학계의 전반적인 인식틀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 백낙청의 비평관 이 꾸준히 갱신되어간다는 점을 빠뜨릴 수 없으나, 지면상 이러한 역사-주체의 구도가 현재까지 큰 변동 없이 이어진다는 점에 우선 주목한다.
- 11) 백낙청, 「시민문학론」, 『창작과비평』 1969년 여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12) 영국의 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리얼리즘과 현대소설」의 일부로, 백낙청이 직접 “본지 7호에 번역 수록”했음을 밝혔다.
- 13) “한 명의 시민으로 긍지를 느낀다는 것은 과거에 발생한 트라우마에, 그러한 트라우마가 〔자부심으로〕 바뀔 것으로 기대하는 일에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을 가리킨다. 트라우마를 넘어서 마침내 자부심을 회복하는 것에 행복을 느끼지 않는 일은 단지 마음이 메마른 것을 넘어서 적대 적인 것을 뜻하게 된다. 마치 행복을 느끼지 않는 일의 이면에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한 불신과 더 나아가 국가를 파괴하려는 음모가 도사리 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국민이 된다는 것은 국가가 겪은 트라우마의 역사를 기억하고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되찾는 여정에서 이를 상기한다 는 것을 뜻한다.”(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486~487쪽)
- 14) 이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을 통한 세밀한 논의가 필요하다. 개개인의 창작이면서도 서로의 반응이 만나야만 하기에 “시가 정말 시답게 존재하 는 방식, 그러니까 협동적 창조를 통해 생성”(황정아, 「문학성과 커먼즈」,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22쪽)되는 유기적 전체성을 ‘문학이라 는 커먼즈’라고 칭한다고 할 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스스로 정치의 주체라는 자각 속에서” “공동체를 능동적으로 구성 및 재구성”(백영경, 「복 지와 커먼즈」,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28쪽)하는 태도가 중요해지는데, 이를 갱신된 시민문학론으로서, 그 주체의 내적 위계와 공동체의 역사적·선험적 자기실현 원리를 비교, 검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작가와 시민이 협동적으로 창조하는 커먼즈는, 대중에 미칠 미래적 영향력을 자긍하며 자신을 정체화하는 지식인의 죄책감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을까. 시민-독자의 ‘부분’적 현실로부터 작가-지식인의 보편적 책임을 발 견하는 ‘시민정신’의 구도, 시민과 지식인을 묶으면서 분리하는 ‘사랑’의 미학적 태도와는 얼마나 같고 다를까. “마을 공동체나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 다양한 공동체 단위”라는 시민적 거버넌스를 전제로 하면서 “국가가 곧 공공성의 담지자라고 볼 수 없”(백영경, 「복지와 커먼즈」, 25쪽) 다며 국가 중심주의와 다른 공동체를 섬세하게 논의한다는 점은 커먼즈론의 중요한 입각점이지만, 커먼즈를 민족국가로 종합되는 진보적 시민 집단과 일체화하는 경향이 여전히 없지는 않은 듯하다. 공공성을 대체하는 커먼즈라는 개념적 시도가 (순문학장에서) 특정 세대/이념의 비평가 바깥으로 확산되지 못하는 사정도 어쩌면 이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 15) 조연정은 백낙청의 시민/민족/민중문학론이 동시대 현장 비평장에서 여전히 유효한 준거로 작동하는 양상을 지적하기도 한다(조연정, 「주 변부 문학의 (불)가능성 혹은 문학 대중화의 한계—백낙청의 ‘시민/민족/민중문학론’ 재고」, 『인문학연구』 51집, 2016). 『창작과비평』의 문학 론 전반을 백낙청의 “역사실천주의”로 손쉽게 환원하는 시각은 물론 곤란하지만, 백낙청의 글이 비판적 검토 없이 고스란히 내부 인용으로 순환 되는 『창작과비평』의 독특한 패턴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문학의 대사회적 기능이 약화되고 문학의 자율성이 점점 더 강화된 90년대 이후부 터 최근까지의 문단에서, 창비가 어떤 행보를 보였으며 창비에 대한 이 같은 오래된 선입견이 어떤 문제적 작용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서도 관심 을 둘 필요가 있”(327쪽)으므로 그 기점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조연정은 시민/민족문학론이 ‘운동’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인 인류의 모럴을 요청”(350쪽)하는 문학 근본주의자의 ‘문학 원론’이라고 정리한다. 관련하여 손유경은 창비의 민중, 민족문학론을 “부채 의식에 시달리 는 ‘지식인’이 아니라 특정 인물형이나 소재, 배경, 스토리를 애호하는 ‘문학예술가’로 간주하는 관점으로의 전환”을 제시한 바 있는데, 이에 동의 하는 한편으로 도리어 ‘부채 의식에 시달리는 지식인’과 ‘부채 의식을 자부심으로 반전하는 지식인’이야말로 애호되는 문학적 모티프임을 덧붙여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손유경, 「현장과 육체—『창작과비평』의 민중지향성 분석」, 『현대문학의 연구』 56호, 2015, 38쪽).
- 16) 한기욱, 「사유·정동·리얼리즘—촛불혁명기 한국소설의 분투」, 『창작과비평』 2019년 겨울호, 21쪽, 34쪽; 한기욱, 「주체의 변화와 촛불혁 명—최근의 몇몇 소설들」, 『창작과비평』 2018년 겨울호, 21쪽. ‘조국 사태’를 기득권 언론에 의한 “하나의 거대한 커뮤니케이션 폭주”이자 한국 사회의 입시 제도 기준에서 ‘공정’하지 않은 공격으로 보는 억울함은 김종엽, 「조국사태, 대학입시 그리고 교육불평등」(『창작과비평』 2019년 겨 울호, 274쪽)에서 본격적으로 개진된다. 민주당과 586 지식인/교수 집단의 학력 자본 세습이 다른 기득권의 부패보다 더 심각한 것은 아님에도 언론/검찰 유착 탓에 더 공격받는 프레임이 생겼다는 집단적 감각이다. 이는 민주당(내외의 담론)이 자처하는 ‘개혁적 중도주의’가 자기동일성의 재생산에는 적용되지 않음을, 따라서 그 역사적 시효를 다했음을 역으로 증명하기도 한다. 한기욱도 인용하듯이 “기후변화와 성장주의의 위기 앞에서 “구세대가 이어온 맹목의 질주에 새 세대도 끼워달라는 것”이 아니라 “구세대의 ‘전향’을 요구하는” 것이 진짜 ‘세대 정치’라는 것이다. 장 석준, 「진짜 세대 정치」, 한겨레, 2019. 10. 18.”(한기욱, 「사유·정동·리얼리즘」, 19쪽 각주 3)
- 17) 강경석, 「촛불의 재배치—황정은, 윤이형, 김성중의 눈」, 『리얼리티 재장전』, 창비, 2023, 34쪽.
- 18) 강경석, 「리얼리티 재장전—다른 민중, 새로운 현실 그리고 ‘한국문학’」, 같은 책, 107쪽.
- 19) 송종원, 「분할선 너머에서 작동하는 문학의 정치」, 『창작과비평』 2023년 가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20) 김현, 「형들의 나라」,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 문학동네, 2021, 164쪽.
- 21) 김건형, 「역사의 천사는 똥구멍 사원에서 온다—김현론」, 『우리는 사랑을 발명한다』, 문학동네, 2023.
- 22)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일까? “도래할 미래를 향한 선한 약속은 고통을 구원의 시간을 예언하는 증례로 사용할 뿐, 고통받는 눈앞의 사람을 살리지는 않는다. 이는 신학적 구원의 형식일 뿐만 아니라 진보적 역사관의 형식이기도 하다.”(김건형, 같은 글, 498쪽)
- 23) “골리지 말고 상냥히 설득해달라는 주문은, 그러면 보다 건설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여성운동과 성소수자 운동 진영 에 지속적으로 요청”된다(오은교, 「손절과 벤딩」, 『문학3』, 2019년 3호, 49쪽).
- 24) 송종원, 「시인과 시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 23쪽.
- 25) 김기태, 「보편 교양」, 『창작과비평』 2023년 가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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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을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골라 제외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형언할 수 없어서 침묵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미 모두가 알고 있어 굳이 말해질 필요가 없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강화길 소설의 여성 인물들이 구태여 토로하지 않는 억울감과 소외감 같은 것. 이 사회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으면서 부러 말할 필요도 없는, 각기 다른 여자들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거푸집으로 찍어낸 듯한 유사한 정서들. 그러므로 강화길의 소설 속 말해지지 않는 빈틈은 경험적 현실을 나눌 수 있도록 의도된 여백이 된다. 이는 매끈한 반사면으로 남아 독자의 체험을 되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우리는 그 여백에 성차별적인 세계에서 타의로 경험한 불쾌감을 채워 소설을 완성한다. 강화길이 꾸준히 '안진'이라는 지방의 소도시를 여성이 경험하는 특수한 현실의 집합체로 구현하려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외형적으로 매우 닮아 자매로 오해를 받곤 했던 '나'(진이)와 막내 이모는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토대로 유대감을 나누던 사이다. '나'는 이모가 친언니였으면 하고 바랄 만큼 그녀를 각별히 생각해 수시로 책과 엘피판 등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모가 암으로 죽자 그의 언니인 큰이모는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막내 이모가 아끼던 티셔츠를 남자 조카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한다. 이모의 여자 조카가 '나' 하나뿐이라는 점에서 이는 큰이모가 여자라는 이유로 '나'만 배제했다는 의미가 된다. '나'의 남동생은 이모의 발인 시간도 제대로 못 맞췄지만 큰이모는 그의 수고를 치하한다. 이렇듯 가장의 역할을 대신하는 여성이 가부장제를 대물림하는 광경을 우리는 강화길의 소설에서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다. 경제적 부담을 짊어지고서 그러지 않은 여자들을 "멍청한 년"이라고 구박하는 여자(큰이모)와, 그런 여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엄격한 미의 기준을 악용하여 "못생긴 게"라고 되받아치는 여자('나')가 소설에 남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쉬이 불행해지고 마는 이들의 처지가 애석하게도 친숙하게 느껴진다. 강화길은 이전 작품에서 다루어온 문제의식을 이어가되 유품의 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을 구성하여 '혈연과 가부장제'라는 범주로는 다 길어낼 수 없는 남은 마음들에 대해 숙고한다. 남자 조카들에 비해 이모와 훨씬 가까웠던 '나'는 이모가 남긴 유품을 처리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음을 거리낌 없이 주장하지만, 이모를 언니라고 부르면서 '나'와 이모가 소원해졌다는 사실과 '나'가 알지 못하는 이모의 마음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낯선 여자 앞에서는 혼란스러워진다. '나'는 자신이 이모와 법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혈연관계임을 들먹이면서 여자를 내모는데, 이때 경제적으로 지원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모의 대소사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던 큰이모의 기분을 경험하게 된다. 부재하는 대상과 맺었던 관계의 깊이를 증명하고 그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은 사람 사이의 감정적 교류를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를 사유하게 한다. '나'는 "내가 사귄 남자들"을 이모가 다 알았던 것이 그만큼 서로 가까운 사이여서가 아니라 '나'가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연애사를 들려주었기 때문임을 아프게 확인한다. 자기 편의를 위해 이모가 어렵게 모은 돈을 빼앗아버렸다는 사실도. 그리하여 이모를 빼닮았다는 점이 이모의 횡격막 아래 자리한 "그것의 거푸집마냥 똑같은 형태의 길쭉한 암 덩어리"가 그랬듯, 부정적인 의미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돈과 피로 얽힌 관계라거나, 서로 돌봄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상히 대해주어야 하는 사이였다는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소한 추억 역시 분명히 실재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실한 마음과 말로도 가려지지 않는 거짓의 마음, '안진'이 모두 안진에 있다.
고통은 사람을 고독하게 만든다. 수치화할 수 없어서 증명하기 어려운 통증은 느끼는 이가 홀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은 사람」의 초점 화자인 '그녀'는 정강이에 화상을 입고 병원에서 반깁스를 하게 된다. 그녀는 "가시 돋친 불덩이를 다리에 얹고 있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을 느끼지만, 그에 비해 의사가 해주는 처치는 너무나도 간단해 보인다. 게다가 딸은 병원에서 불평하지 말라고 핀잔을 준다. 더는 붕대를 할 필요가 없어졌을 때,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통증을 증명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생각에 "아픔을 누릴 권리"를 잃은 것 같은 묘한 상실감을 느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을 혼자서 떠안게 되리라는 두려움에 시달리는 것이다. 이는 편혜영의 다른 단편소설 「리코더」(『어쩌면 스무 번』, 문학동네, 2021) 속 '무영'이 많은 사상자를 낸 건물 붕괴 사고에서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은 후, 멀쩡한 다리에 두 달간 깁스를 했던 것과도 궤를 같이한다. 참사를 겪은 당사자이자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갖게 된 목격자임에도 운 좋은 생존자라는 이유로 아픔을 인정받지 못하자 무영은 자신의 고통을 그렇게라도 드러내려 한다. 당사자만이 아는 내밀한 고통을 호소하고 입증하는 일은 이토록 복잡다단하다. 「남은 사람」의 그녀는 몇 해 전에도 허리를 다쳐 통증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번번이 뼈에는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대학병원에 가서야 척추뼈 중 일부가 손상되었다는 소견을 듣게 되는데, 이때 그녀는 치료를 받은 것이 아님에도 안심한다. 자기가 감각한 통증의 실체를 더는 스스로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해방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렇듯 고통은 자기에게는 아무리 생생하더라도 타자에게는 추체험되는 것이기에 온전히 이해받기 어렵다. 이 같은 고통의 맹점은 모녀 사이마저 갈라놓는다. 내내 앓던 손녀가 일곱 살에 죽자 그녀의 딸은 자식을 잃은 아픔에 오랫동안 자학하고 애통해한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마음을 추스르라고 위로하는 그녀에게 딸은 "자식을 잃어본 적도 없으면서 뭘 아느냐"고 쏘아붙인다. 그녀는 딸이 느끼는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딸 역시 "어린 자식을 앞세운 딸을 둔" 엄마의 비통함을 가늠할 수 없다.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사진학과에 진학하겠다고 말하는 딸에게 그녀가 "그 나이에 남자들이나 찍는 사진을 배워서 어떻게 먹고살려느냐"고 묻자 딸은 피식 웃는다. 딸의 앞날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은 전해지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응원받기는커녕 고정적인 성역할에 기반한 비난만 듣게 된 딸의 상처는 웃음 뒤에 가려진다. 편혜영은 고통에 울부짖고 몸서리치는 인물보다는 오히려 고통의 증언 불가능성을 깨닫고 일찌감치 입을 다물게 된 인물을 많이 그려왔다. 고요하게 싸늘해지는 사람들 가까이에서 침묵에 덮인 그들의 참혹을 서서히 누설하는 편혜영은 「남은 사람」에서도 여지없이 읽는 이들이 섬뜩한 슬픔에 감염되도록 만든다. 그녀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게 하여 그녀의 감각을 체화하도록 유도하던 소설은 말미에 이르러서야 딸이 하던 "엄마, 괜찮아요. 이제는 다 지나갔어요"라는 무심한 말이 복선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화상을 입은 정강이를 부여잡고 아파하는 그녀에게 딸은 그녀가 다리를 다친 것이 십수 년 전의 일임을 일러준다. 그녀는 신체에 각인된 고통 대신 그 환부가 아물어가던 시간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엉킨 시간은 지나간 고통을 도리어 생생하게 만들기도, 완전히 잊은 고통을 다시 마주하게 하기도 한다. 기억을 상실해가는 이들이 망각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것과 달리 그녀는 자신이 잊어버린 기억을 알려주지 말라고 딸에게 부탁한다. 절친했던 지숙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언젠가 남편과 손녀의 죽음을 잊게 될 때, 그 끔찍한 고통을 되살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다. 기억을 잃어가는 한 여자가 무슨 일이든 겪게 하는 삶에 맞서서, 경험한 일들을 부단히 잊어가기를 바라는 결말은 섬찟하게 새롭고 선득하게 슬프다.
이 글은 조경란의 단편소설 「검은 개 흰 말」(『2024년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24), 「그들」(『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4) 및 소설집 『일요일의 철학』(창비, 2013),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문학과지성사, 2018), 『가정 사정』(문학동네, 2022), 장편소설 『복어』(문학동네, 2010),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문학동네, 2024) 등을 다룬다. 이하 소설을 인용할 시 본문에 쪽수만 밝힌다. 1. 나의 등을 향해 걸어가기 조경란 작가는 "좋은 제목은 독자에게 문학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1)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를 궁금하게 만드는 그의 소설 제목 하나를 들여다보는 일로 글을 시작해봐도 좋을 것이다. 그의 소설집 『가정 사정』에 수록된 단편의 제목 「한방향 걷기」를 보자. 이 제목은 낯설지 않다. 터미널 표지판 또는 길가의 현수막에서 익히 보아왔던 문구이기 때문이다. 보행자들의 발길이 서로 겹치지 않도록 돕는 안내문은 조경란의 소설 속에서도 "문화재청에서 나무에 달아놓은"(255쪽) 푯말에 쓰인 말로 등장한다. "한방향 걷기"는 해당 소설의 본문에서 유일하게 다른 글씨체로 표시되어 있어 형식 측면에서도 표지판 역할을 한다. 걸어온 방향 그대로 걸어가라고 조언하는 것 같기도, 다른 방향은 기웃대지 말라고 권고하는 것 같기도 한 이 구절을 읽으면 궁금해진다. 그래서 '한방향'은 어디를 가리키는지, '걷기'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단 이래 이십구 년 동안 꾸준히 소설을 써온 조경란의 작품세계는 다채롭고 방대하여 이를 한 가지 특징으로 일괄하는 것은 오히려 그 세계를 축소하는 일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하나의 공통점을 꼽아본다면,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이 웅크리고 쪼그라들어 아주 납작해진 공처럼 보일 때도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걷는다. 그리고 걷기는 조경란이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공들여 묘사하는 행위다. 조경란의 소설 속에서 인물이 걷는 장면은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빈번하게 등장한다. 인물이 걷는 장면으로 끝이 나는 소설들만 몇 가지 꼽아보아도 다음과 같이 많다. 조경란의 첫 장편소설 『식빵 굽는 시간』의 결미에서 여진은 사람들은 모두 "지도라곤 없는 자신만의 삶으로" "걸어가야 한다"(160쪽)는 것을 깨닫고는 창가에서 등을 돌려 식빵을 만들기 위해 주방으로 걸어간다. 두 번째 장편 『가족의 기원』 또한 정원이 "지도도, 아무도 없는 길 저쪽으로" "트렁크"를 쥐고 "서툴게 걸음을 옮"(333쪽)기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는 정원을 가두어왔던 "세계로부터의 탈주"2)로 비친다. 「양파 던지기」(『가정 사정』)의 초점 화자인 원진은 생각이 많아질 때면 산에 올라 양파를 던지던 세입자 기중구가 떠난 후 그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집을 나선다. "그는 양파를 쥔 손에 힘을 주고 걸었다. 꽃도 아닌 것을, 어쩌면 마음만큼 세밀하게 표현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115쪽) 이 소설 역시 인물의 걷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네 번째 장편소설 『복어』 또한 "그녀는 머리를 앞으로 내민 채 그를 향해 걸었다"(346쪽)라는 문장으로 끝이 난다. 아버지의 삶을 추모하며 자기를 찾아가는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 단편 「성냥의 시대」(『일요일의 철학』)의 마지막 장면을 옮겨보면 이러하다. 햇살이 번져들고 있었다. 공장 안은 아직 어두컴컴했고 귀마개가 필요할 만큼 많이 만들어내야 할 성냥도 없었지만 그는 그쪽으로 걸어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갑자기 햇빛을 받으면 눈이 아플지도 몰랐다. 어둠이 아니라 그늘 속으로 그는 똑바로 걸어갔다. 그가 그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53쪽) 이 단편이 소설집의 가장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경란이 소설집 전체를 인물이 걷는 장면으로 끝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조경란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가지각색의 걷기는 물리적인 행위이자 실질적인 운동이면서 동시에 주저앉은 곳에서 다시 일어나 나아간다는 상징적 의미를 띤다. "매일 10분씩이라도 글을 쓴다면 삶이 적어도 1킬로미터쯤은 나아간 거라고"3)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조경란의 에세이를 참조하면, 걷기는 쓰기의 다른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더욱 궁금해진다. 단일한 방향으로 걸으면 무엇을 만나게 될까. 소설가 이승우는 과학이 발달하기 전, 옛사람들은 세계가 평평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똑바로 계속 걸으면 세상의 끝에 닿고 낭떠러지로 떨어질 거라고"4) 생각했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한방향으로 계속 걷는다면 출발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음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출발점이 곧 도착점이 되는 이 세계에서는 역설적이게도 등 뒤에 있는 사람이 가장 멀리 있는 자가 된다고 한다. 이승우는 한 번 더 생각이 도약하게끔 이끈다. 등 뒤에 있는 사람보다 그 등을 가진 사람이 출발점에서 더욱 먼 사람이 아닐까, 하고 묻는다. 그러니까 한방향으로 쉬지 않고 지구를 다 걸어서야 만날 수 있는 가장 먼 사람이 자기 자신인 것이다. 어쩐지 마주보기 두려워서 사는 내내 눈을 내리깔고 걷다가 이 둥근 지구상에서 종내에는 퉁, 부딪히게 될 굽은 등.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낯설기만 한 캄캄한 뒷면, 그것은 어쩌면 가장 가까이 있지만 가장 멀게 느껴지는 '나'에게로 걸어가는 '나'의 뒷모습일 테다. 조경란의 소설에는 "세상과 잘 사귀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유기되어 있는"5)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지나치게 내향적"(「양파 던지기」, 85쪽)이고 소심하여 타인에게 환영받기는커녕 번번이 소외되는 이들은 가족에게마저 거부당하거나 사회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통에도 실패한 채 고독하게 남겨져 있을 때가 많다. 이들은 외로운 자신을 돌보는 방법조차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자기와도 불화한다. 하지만 조경란은 그런 인물들이 마음의 장벽을 걸어 잠그고 자기 안으로 침잠해 질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는 작가 자신과도 닮아 있는 인물들이 자기 안을 헤집고 허물어 내면을 넓히고서 '나'의 실존을 찾기 위해 걸음을 떼는 이야기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자기를 알아가는 일에 실패할 때도 유의미한 성공을 거둘 때도 계속해서 이들이 '나'를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어떻게든 그들 안의 자력을 발견해주려 노력해왔다. 조경란의 최근 소설들은 주관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여러 주관이 병존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일과 맞닿아 있음을 밝히려 한다. 한 사람의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일이 보편의 세계에서 등 돌리는 일이 아님을 헤아리고, 안으로 파고드는 응시가 평균으로 동일시될 것을 강요하는 외압에서 벗어나 특수한 삶들이 공존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임을 이해할 때, 조경란의 소설은 더욱 와닿게 된다. '나'라는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해보기 위해서 지구 한 바퀴를 다 걸어 '나'에게 다다르는 일은 언뜻 미련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저마다의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걸음마다 여러 '나'를 마주치면서 처음에 품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들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옮겨가게 된다. 아둔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행로는 복수의 '나'가 병존하는 세계의 이치를 일찍이 이해한 자가 설정한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2. 원한의 역학 단순한 움직임으로 보이는 걷기는 의외로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는 산책하러 나가기 위해 신발을 신는 일부터가 고역이다. 그러므로 걷기 시작했다는 것, 어딘가를 향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회복의 단초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아지기 위한 첫걸음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비치는 '원한'에서 시작되었다면 어떤가? 독특한 발단을 꾀하고 있는 2024년 김승옥문학상 대상 수상작 「그들」을 살펴보자. 「그들」의 중심인물인 종소와 영주가 만나게 된 계기는 전혀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음침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종소가 품은 복수심으로 인해 서로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겸임교수였던 종소는 자기 제자를 뽑으려는 최교수에 의해 임용 과정에서 부당하게 제외되어 팔 년간 담당해온 과목을 더는 가르치지 못하게 된다. 종소는 "자신은 수업을 더 할 권리가 있다"(41쪽)고 자기 몫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한 번 항의해보지도 못하고 자신이 알아온 "유일한 삶"(24쪽)을 송두리째 빼앗긴다. 이후 그는 후배의 출판사 일을 돕지만 출판사 사정이 어려워지자 해고당한다. 군산, 부산, 광주와 같이 먼 지역을 전전하며 자기 전공과 무관한 강의도 가리지 않고 떠맡아 생계를 이어나가지만, 당장 다음 학기를 보장할 수 없는 불안정한 강사 생활에 불안해한다. 고용의 불안정성 외에도 그를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노인 우울증을 진단받은 어머니가 죽음을 선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들이 늘 공기처럼"(12쪽)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종소는 양파를 물에 담그다가도 불안해져 어머니가 닫은 방문을 열어두고서 그 문이 다시 닫힐까 마음 졸인다. 일상생활에서도 막연한 두려움에 시달려야 하는 그는 불안 없이 사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부족한 무엇이 있"(13쪽)는 것일까 궁금해하기도 한다. 종소가 하는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면, 그가 자신에게 어떤 결함이 있기 때문에 불안을 느끼는 거라고 추측하며 자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소는 문득 "내가 이선생을 선택하지 않은 것뿐"(같은 쪽)이라고 통보함으로써 선택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은근히 드러내고 종소의 삶에 매우 중요한 사건을 단순히 선택의 문제로 축소해버렸던 최교수를 떠올린다. 매사 두려움을 느끼며 위축되고 경직되었던 종소는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사람"(같은 쪽)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이상의 가장 유명한 시 「오감도-시 제1호」에 등장하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가 분간되지 않았던 것처럼, 아니 어쩌면 동일 인물인 것처럼, 두려움에 떠는 이는 위협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공포감에 제압당하는 수동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행위하는 자가 되려는 기획, 그것으로 종소는 미래에 대한 모종의 기대감을 가지게 된다. 자신에게 다가올 최악의 일에만 골몰하던 종소가 부도덕한 일이나마 계획하고 실행하려 하는 것이다. 최교수를 두렵게 만들기 위해 "그를 찾아가야겠다고"(14쪽) 다짐할 때, 미래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가볼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따라서 이때 원한의 감정은 그것을 품은 이를 살려두는 동력이 된다. 무엇이라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해보자면, 「그들」은 자기를 살려두는 일에 기여하는 감정적 자원인 '원한'으로 우연한 만남을 발생시킨 후, 그 만남을 통해 인물들이 원망하는 마음에 응축되었던 에너지를 차츰 다른 방향으로 발산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때 원한으로 일어선 인물들은 생존의 차원을 넘어서서 살 만한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으로 바뀌어나간다. 어찌됐든 그 만남 자체는 종소의 복수심에서 시작한다. 그는 최교수의 부인인 영주가 운영하는 카페에 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악의를 품고 일부러 카페에 찾아왔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종소가 카페에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교수가 영주에게 위험해 보이는 그를 내보낼 것을 권유할 때, 종소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된다. 그러나 원한으로 시작된 관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의도하지 않은 굴절은 주어진 정보를 통해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과는 다른, 직관적인 알아차림에서 발생한다. 종소는 멀리서 보면 "우는 사람처럼"(20쪽) 보이는 영주의 슬픔을 알아챈다. 영주 역시 종소가 누군가를 나름의 방식으로 괴롭히겠다는 일념으로 카페에 오지만, 막상 자신의 두 손이 "무기라도 되는 듯 주머니 깊이 찔러넣"(30쪽)고서 위협이 될 만한 행동을 삼간다는 것을 포착한다. 영주는 그가 자신이 당한 부적절한 해고에 소극적이나마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에 작은 위안을 얻으면서 짧게나마 고요와 평온을 누리다가 가는 사람임을 알아차린다. 영주는 최교수의 작은 손이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의 "크고 두꺼운 손"(21쪽)에 비해 무섭지 않다는 이유로 결혼을 결심한 사람이다. 영주가 안전하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이라는 점은 그녀가 언제나 안전을 위협받는 위치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최교수의 손과 종소의 손은 영주의 불안을 낮추어준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것이 안정감을 선사하는 방식에서는 대조된다. 최교수의 작은 손은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공격력이 약하리라고 추측되기에 영주를 덜 두렵게 한다. 이는 그의 의지와 무관한 신체적 외양일 뿐이다. 이와 달리 자기를 비롯한 누군가를 해치게 될까 두려워 손을 주머니 속에 가둬두는 종소의 습관은 그가 선택한 행동이며, 그의 성향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종소라는 인물에 대한 신뢰감으로 이어진다. 종소의 습관은 영주를 편안하게 해주면서 동시에 종소가 영주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생각이 기울어 있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영주는 실제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구름과 전선줄이 겹친 듯 보이는 풍경을 "깃털 구름이 전선줄에 걸려 있"(23쪽)는 모양으로 읽어내는 사람이다. 전선줄을 "잘못 그어놓은"(같은 쪽) 금으로 인식하는 영주는 그것을 통해 남편과 아들의 편에 좀처럼 설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선 밖에 놓인 자기 처지를 환기하기도 하지만, "지켜온 생활이 모두 무너져버릴"(16쪽) 것만 같은 불안을 단번에 종식할 방법으로서의 죽음 또한 은연중에 떠올린다. 종소도 강의실 창문 커튼을 묶어둔 "케이블 줄"을 보면서 그것이 자기 죽음을 돕는 "다른 용도"(25쪽)로 쓰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최악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생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리라는 생각에 마음 졸이며 살아온 종소와 영주는 죽음에 갈증을 느낀다. 자기 상처는 외면한 채 삶을 견뎌온 두 사람이 서로의 아픔만큼은 기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나' 아닌 대상이 망쳐지는 일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종소는 잠귀가 밝은 어머니가 도어 록 소리에 깰까 싶어 열쇠를 지니고 다닌다. 영주는 카페 문을 닫을 때마다 야외 테이블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쇠줄로 동여매는 일, 즉 불특정 다수를 의심하며 자기 것을 지켜내는 일이 끔찍하게 느껴져 그 자리에 카페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상추와 고추 모종을 심는다. 이러한 사정을 살피면, 영주 또한 종소처럼 원한을 지닌 인물이다. 엄마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자기를 몰아세워 천천히 죽여가고 있었던 영주는 종소의 찢어진 재킷 주머니를 꿰매어주면서 응어리진 마음을 털어놓는다. 이때 영주는 미움의 칼날이 시종 자기를 겨누고 있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고, 오랫동안 벼려온 날이 자기를 찌르는 대신 바늘이 되어 다른 사람의 찢긴 상처를 꿰매어줄 수도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 안 꿰매면 더 중요한 걸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29쪽)라는 영주의 충고는 외투 주머니에 대한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다. 슬픔이 줄줄 새는 다친 마음에 대한 이야기로 들린다. 안에 든 내용물 전부를 들키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들고 다니던 에코백에서 영주가 '반짇고리'를 꺼내고 이를 종소가 지켜보는 것 또한 의미가 있다. 들키고 싶었지만 혼자 감당해야만 했던 불안을 알아채주는 상대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자기를 살려놓기 위해 동아줄처럼 붙들어야 했던 원한은 점차 희미해진다. 살려만 놓자는 생각이 살 만한 삶을 꾸려가고 싶다는 소망으로, 한 단계 발전된 형태의 욕구로 나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종소는 팔 년간 재직했던 학교를 떠나며 건물의 수도꼭지를 모두 틀어놓았던 것처럼, 자신의 슬픔보다 더 많은 양의 무엇을 대신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불행에 대처해왔던 인물이다. 자기감정을 마주하기 두려워 다른 큰 소리를 냄으로써 내면의 소리를 스스로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감추고, 시간이 흘러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소극적인 대응을 해왔던 것이다. 그런 종소는 어머니가 자주 소리 내서 운다는 사실을 털어놓음으로써 자신이 슬픈 상황에 처해 있음을, 그래서 자신도 울고 싶은 심정임을 영주에게 간접적인 방식으로나마 처음 고백한다. 종소는 더는 최교수를 기다리지 않게 된다. 대신 다른 것을 기다리게 된다. 누군가를 두렵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두려움에 떠는 사람과 깊이 연결되면서 사그라든 것이다. 결국 종소는 최교수와 마주치는 상황을 기다렸으면서도 그것이 더 미뤄졌으면 하고 바란다. 원망의 마음, 최교수를 두렵게 하려는 마음은 비슷한 불안을 지닌 영주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자리를 잡자 자연스레 내쫓겨버린다. 영주 역시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어 아들 상현을 괴롭게 할 것이라는 두려움, 부족한 엄마 밑에서 자란 아들 주변의 또래 아이들까지 위험에 처하게 하리라는 공포에서 걸어나와 자기와 닮은 불안을 지닌 사람의 상처를 꿰매어주면서, 자신이 작은 돌봄을 실천할 수 있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인물임을 배우게 된다. 3. 필연적인 불안 각자의 불안은 본디 특수성이 있지만, '여성적 불안'이라고 불러봄직한 영주의 불안은 종소의 것과는 구별된다. 영주는 눌러왔던 마음이 솟구칠 때, 어디에도 말할 수 없었던 자기 이야기를 적어 '선생님'에게 문자로 전송한다. 선생님의 번호로 "알았어"(16쪽)라는 세 글자의 답장이 왔을 때, 영주는 그것이 선생님의 말투가 아님을 알아차리고 번호가 바뀌었을 가능성을 생각한다. 이후 선생님인 체하며 답장을 보내온 상대가 자신의 카페를 찾아와 자기를 위협하리라고 예상하며 영주는 두려움에 떤다. 영주의 불길한 상상 속에서 그는 해치기 쉬운 "여자"(17쪽)로 대상화되어 있다. 이러한 비약적 사고가 과민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런 사소한 계기로 스토킹 당하거나 죽임당하는 여성이 실제로도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다친 이웃을 대신해 가게 일을 돕다가 손님에게 "씨발, 아줌마 뭘 그렇게까지 친절하세요"(22쪽)라는 욕설을 듣는 「일러두기」의 미용, 「양파 던지기」에서 "소심하고 사회성"이 "떨어지기"에 상대적으로 "안전한"(95쪽) 남자를 결혼 상대로 선택하는 원진의 아내, 이웃에게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집에 남자도 없으면서"(245쪽)와 같이 사건과 무관한 비하의 말을 듣는 「한방향 걷기」의 은제 이모, 「봉천동의 유령」(『일요일의 철학』)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시끄럽다며 가만히 안 두겠다고 협박하는 남자 세입자의 말을 듣고 두려움에 떠는 엄마로 대변되는 여성 인물6)은 모두 불안을 느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특히 은제 이모가 베란다에 흙물이 드는 사건을 언급하면서 "어딜 가도 완전히 안전한 데가 없"(「한방향 걷기」, 233쪽)다고 토로하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십일층 남자가 화분에 물을 주느라 은제 이모의 베란다를 더럽히는 일은 언뜻 안전과 무관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자 사는 여성의 입장에서 남자 이웃에게 항의하는 일은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일로 여겨진다. 그와 같은 불길한 예감은 매우 비논리적인 망상처럼 보이지만 현실의 삶을 참조하면 적절한 추론에 가깝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조차 범죄의 위협과 연결되어 있는 여성들의 처지는 불안 또한 젠더화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최교수를 두렵게 하기 위해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카페에 가는 종소, 그 소극적인 방식의 앙갚음조차 종소의 성별이 바뀌면 불가능하리라고 씁쓸히 예측하게 된다. 쉽게 일터에서 내쳐지는, 그러나 누군가를 짧은 시간이나마 두렵게 할 수는 있는 종소의 그 불안정한 위치조차 비교적 안정적으로 비친다는 점은 성차별의 심각성을 환기한다. 조경란이 지속해온 여성 폭력에 대한 섬세한 고찰은 젠더화된 불안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집이나 직장, 일터의 화장실과 같은 일상적인 공간조차 여성에게는 성적 대상화, 성폭력의 위험이 상존하는 공포스러운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음을 밝혀주었던 조경란은 범죄에 노출되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어 빈번히 경험해야만 하는 여성적 불안과, 그로 인해 여성들이 일상적인 상황에서 경험하게 되는 특수한 어려움까지 소설에 담아내고 있다. 강제로 날 선 감각을 지닌 채 살아가야 하는 여성의 불안이 유별난 기질에 기반한 왜곡된 감정이 아님을 소설은 확인하게 한다. 불안을 뜻하는 독일어 'Angst'가 원래 '궁지'라는 뜻이었다는 점은 불안이 "가능한 것과 새로운 것으로 향하는 통로를 차단한다"7)는 사실을 환기한다. 불안은 그것을 느끼는 주체를 고립시키고 미래를 기대하지 못하게 한다. 불안 요소들을 생각하느라 그 자리에 계속 머물게 만든다.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삶을 도모하기보다 모든 불행을 잘 모면하여 생존해가는 일에 연연하게 한다. 「그들」의 인물들은 불안이 추동하던 도망침을 멈추고 그렇게 도망치기만 했던 자기를 마주하고 돌보기 위해 걸음을 옮기게 된다. 서로에게 들키고 서로를 알아채주면서 종소와 영주는 도저히 삶을 지탱할 수 없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불행한 미래에의 예감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48쪽)다는 다행한 현재의 확인으로 바꾸어낸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들이 안정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과도하게 예민한 성정 때문이 아니라 언제든 해고되고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조경란의 소설은 불안함을 느끼는 개개인을 탓하지 않고 그 불안을 창출하고 체득하게 만드는 불의한 사회를 조명하게 한다. 조경란은 안전조치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누구도 해칠 의도가 없었던 무고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눌리어 죽어가야 했던 이태원 참사에 대한 흔적을 소설 곳곳에 녹여내면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기이한 사회구조를 지적한다. 권희철은 소설 「그들」이 구체적인 날짜를 언급한다는 점, 상현이 가한 학교폭력이 참사를 흉내내는 '압사 놀이'의 형태를 띤다는 점, 영주가 압박당하는 공포에 대해서 자주 거론한다는 점 등을 분석하여 '그들'이라는 지칭이 트라우마 이후를 치열하게 살아내는 이태원 참사 생존자들을 아우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8) 이러한 해석을 참조할 때, 소설 「그들」은 종소와 영주가 지닌 개별적인 아픔뿐 아니라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정부와 그로 인한 치안의 부재가 사람들을 강제로 불안에 취약해지도록 한다는 점까지 고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해에 인재가 더해져서 일어나는 참사는 그의 다른 소설 「검은 개 흰 말」에서도 묘사된다.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도림천이 범람하고 "인근 반지하 빌라가 침수돼 세 이웃이 사망"했다는 뉴스(106쪽)가 보도되는 장면은 2022년 집중호우로 사망한 신림동의 세 모녀를 떠올리게 한다. "졸업여행을 가던 길에 생을 마치게 될 수도 있다"(108쪽)고 '나'(서양지)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가정하는 대목은 세월호 참사를 상기시킨다. "수해 피해의 경험들"로 인해서 '나'에게 여름은 "일년 중 가장 긴장하는 시기"(96쪽)로 감각되며, '나'는 "평범한 순간에도"(108쪽) 자신 혹은 타자들의 죽음을 걱정하며 초조해한다. 구조적 재난이 빈번하게 일어남에도 안전관리에는 소홀한 한국사회가 개개인의 일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조경란의 소설은 끊임없이 드러낸다. 이러한 대목들은 조경란의 소설이 '나'에 천착하고 있음에도 결코 개인의 단위로 이야기를 축소하거나 '나'라는 한 사람의 서사로만 유폐되지 않는다는 점을 입증한다. 4. 그저 살아내는 삶에서 살리는 삶으로 조경란의 최근 소설에는 이처럼 복수심에서 걷기 시작했더라도 자기를 살리는 일로 반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어, 방치해왔던 자기의 굽은 등을 안아주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인물의 이야기가 자주 발견된다. 「일러두기」의 중심 인물인 미용은 마흔아홉 살로 공교롭게도 「그들」의 종소와 같은 나이이다. 복사집 '대학사'를 운영하는 재서는 인쇄를 하러 온 손님인 미용의 글을 읽게 되면서 그녀와 가까워진다. 자식을 바란 적 없었다는 이유로 자식을 정신적, 물리적으로 학대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미용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살길이라는 판단하에 자기감정과 자기 존재를 숨기는 데 "가진 에너지를 다"(19쪽) 소진하면서 살아온 인물이다. 지금은 반찬가게 주인인 미용은 특성화고등학교로 배달을 나갔다가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기절한다. 구강 기능 저하증을 진단받고, 팔을 다친 재서를 대신하여 인쇄소 일을 돕다가 욕설까지 듣게 된 미용은 "아무래도 그 사람을 찾아야겠어요. (……) 나한테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겠어요, 지금이라도"(22~23쪽)라며, 과거 자신에게 부당한 폭력을 행사했던 교련 선생님을 찾겠다는 결심을 한다. 1987년, 미용은 당시 열일곱 살이었고 교련 수업을 맡은 선생은 지금 미용의 나이였다. 그는 "교련의 원래 목적이 길들여진 신체를 만드는 거"(42쪽)라는 말을 서슴지 않으며 수업시간에 여학생의 뺨을 내리치기도 하는 사람이었고, 겁을 먹은 미용은 붕대 감기를 연습하는 실습 시간에 실수를 한다. 그러자 교련 선생은 여럿이 돌아가면서 맡았던 환자 역할을 미용이 홀로 감당하게 만든다. 수업시간 내내 미용은 업혔다가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또다시 일으켜 세워졌다가 내동댕이쳐진다. 경찰청장의 딸로 추정되는, 선생님들도 눈치를 보는 여학생이 "가여워서 못 보겠으니깐"(45쪽) 그만하라고 선생을 만류하고 나서야 이 가혹한 형벌은 끝이 난다. 미용은 아주 오랜 시간 막 대해도 되는 신체로 길들어왔던 것이다. "외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죽이거나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18쪽)는 내용이 담긴 미용의 글을 보았던 재서는 그녀가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닐까 불안해한다. 독자 또한 재서의 시선으로 미용을 바라보고 미용에 대해 추측하면서, 그가 원한을 품고서 선생님을 찾아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본다. 「그들」의 종소가 그랬듯, 자신에게 왜 그랬는지 따지고 싶은 원망감은 불안에 떨며 자기방어에만 힘써왔던 웅크린 존재를 일으켜세워 어딘가로 걸어나가게 만든다. 부정적일지언정 강력한 원한의 감정은 멈춰 있던 내면의 시계를 움직인다. 하지만 조경란의 소설은 언제나 그 시작점에서 훨씬 더 먼 곳으로,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간다. 재서는 미용이 불행했던 자기 삶을 보상받기 위해 선생을 찾았고, 불만족스러운 삶을 선사한 부모는 이미 죽어버렸으니 어찌할 수 없어서 자기 자신을 죽이기로 마음먹었으리라고 상상한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재서는 미용을 찾아가지만, 미용은 짐작과 달리 밝은 모습으로 지내고 있다. 미용은 자신이 쓴 글을 재서에게 보여주면서 자기가 쓰고 싶었던 게 교련 시간에 당했던 폭력이 아니라 교련 시간 시작 전에 마주한, 창밖의 복사나무에서 "연연한 분홍 꽃잎 몇 장이 후르르 떨어지"(46쪽)던 아름답고도 평화로운 광경이라고 이야기한다. 선생님에 관해 쓰려고 했지만 결국 자기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는 미용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재서는 미용이 선생님을 찾아서 하려던 일이 그러한 잔혹한 시간을 겪고도 이렇게 또렷이 "계속 자신으로 살아가고"(47쪽) 있음을, 그 단단한 생명력이 미용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일임을 이해한다. 조경란은 "평생을 움츠리고 산 아이"가 "자라서 펼치는 미니멀한 복수 서사"를 쓰려고 했으나 미용이 그것을 거부했다고 전한 바 있다.9) 조경란의 소설 속 인물들이 처음엔 원한 때문에 걷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그 걸음의 끝에 세워두었던 원망의 대상을 지나쳐 더 멀리에 있는, 숱한 폭력과 불의를 견디면서 생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은 '나'에게로 꿋꿋하게 나아가리라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안다. "처음 작가로 하여금 그 소설을 쓰도록 이끈 직감, 사고, 지식 등등"10)을 의미하는 소설의 중심부가 바뀐다는 것은 작가와 독자가 각각 쓰기와 읽기를 통해 그 감춰진 중심부이자 진짜 주제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지닌 흥미로운 유동성과 창조성을 생각하게 한다. 인물의 걸음이 그려내는 궤적은 작가가 설정해두었던 최단거리가 아니라 인물이 경로를 이탈하여 내달린, 그리하여 더디지만 멈추지 않는 발걸음으로 만들어낸, 생으로 가는 새로운 길이다. 「한방향 걷기」에서, 은제 이모가 어렵게 가꾸어온 세계에 흙물을 끼얹는 십일층 주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마흔아홉의 미석이 고안하는 방식 역시 동갑인 미용의 반격과 유사하다. 그는 민폐를 끼치는 당사자가 있는 십일층이 아니라 십이층으로 올라가서 몬스테라 화분을 문 앞에 두고 올 계획을 세운다. 그것을 베란다 난간에 올려놓고 물을 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하려는 것이다. 십일층 남자가 아랫집의 입장이 되어 은제 이모가 경험하는 불편함과 불쾌를 고스란히 느껴보길 바라는 마음이므로 그것은 "악의"(256쪽)에 가깝다. 하지만 이는 원망의 감정을 누군가를 해치거나 죽이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살려내는 일을 통해 해소하는 방법이다. 미석은 십이층에 선물한 몬스테라가 잘 자라나기를, 강력한 생기를 지니고서 아래층으로 뻗어가기를 바라는 것으로 앙갚음한다. 게다가 그것은 "자신을 안에서 마냥 걸어 잠그고 있"(247쪽)던 미석이 처음으로 위했던 타자, 은제 이모가 자기 삶을 오롯이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한 대리 복수다. 조경란의 소설에서 중심인물이 지닌 원한은 결국에는 살리고 살아내는 일로 나아간다. 이는 더 멀리 내다보면서 더욱 나은 곳으로 걸어가는 일이자 우리의 삶을 한 단계 나아지게 하는 아름다운 대안이 된다. 5. 취약한 사람들의 걷기 연합, 아니 살기 연합 서로를 살리고 살고 싶게끔 만드는 길을 내는 조경란의 인물들은 하잘것없다고 여겨져 사회에서 배제되었음에도 그러한 서로를 하찮다고 여기지 않는다. 자신의 취약함을 오래 들여다본 이들은 그것이 어떤 것을 갖추지 못했거나 어떤 능력을 연마하지 못해서 또는 어떤 덕목이 부족해서 얻게 된 나약함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상대의 약함을 나무라지 않고 그 아픔과 외로움을 오롯이 보듬는다. 단, 조경란 소설의 차별점은 그와 같은 돌봄의 공동체가 "개개인의 선함에 호소되는 관계의 합이라기보다 각자의 약함이나 부족함을 아는 이들의 자연스러운 연합"11)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의 소설은 인물과 독자에게 연민이나 이타적인 마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기 세계를 탐색하는 일이 곧 '나'와 같은 연약한 '나'들을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둔다. "무엇을 하고 어디에 있든 자격 미달"(「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 72쪽)이라고 느끼던 인물들이 각자의 자기를 찾으러 떠날 때, 그것은 홀로 감내해야 하는 여정이지만 잠깐씩 서로의 동행이 되어준다면 고독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람이란 서로 들키고 마주치고 살피고 돌보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아가는 '나'들이 서로의 보폭이 다르다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다채로운 속도에 안도하면서, 모르는 걸음걸이를 따라 배우기도 하면서 걸어간다. 이제는 이상이 아니라 생활이 되었다는 소설12)을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작가처럼, 그의 소설을 함께 걸어내는 독자가 되어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굽은 등, 그 볼품없지만 고유한 이면을 껴안아주기 위해 나선 길에 마주치는 숱한 등을 토닥이며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1) 조경란, 「제목의 힘」, 『세계일보』, 2024. 12. 13. 2) 염승숙, 「가족의 '양막'을 찢어내고 홀로서기」,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해설, 357쪽. 3) 조경란, 「날마다 10분씩 볼펜」, 『소설가의 사물』, 마음산책, 2018, 80~81쪽. 4) 이승우, 『고요한 읽기』, 문학동네, 2024, 17쪽. 5) 이광호, 「죽음을 견디는 메타포」, 『불란서 안경원』 해설, 문학동네, 2006 (개정판), 342쪽. 6) 이에 대해서는 류진아의 글 「공간 인식과 여성에 대한 폭력-하성란 조경란의 소설을 중심으로」(『한국문학이론과 비평』 85집, 2019)를 참조할 수 있다. 7) 한병철, 『불안사회』, 최지수 옮김, 다산북스, 2024, 19쪽. 8) 권희철, 「타임아웃, 조경란, 그들 리뷰」, 『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60~61쪽. 9) 조경란 수상 소감, 「오늘은 여기까지만」, 『2024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52쪽. 10) 오르한 파묵, 『소설과 소설가』,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12, 149쪽. 11) 김미정, 「리무버블 스티커의 마음」, 『가정 사정』 해설, 304쪽. 12) "예전에는 소설이 어떤 이상(理想)이었다면 이제 소설은 생활(生活)이 되었다." (조경란, 작가의 말, 『가정 사정』, 3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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