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현대시학 2024년 9-10월호(제621호)
이름 없는 오리너구리
오리너구리는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신체적 특성 때문에 ‘진화 과정에 걸쳐 있는 동물’, 우습게는 ‘신이 졸다가 잘못 만든 동물’로 흔히 이야기된다. 젖을 먹여 새끼를 키우는 포유류이면서 파충류처럼 알을 낳고, 조류 같지만 딱딱하지 않은 부리를 가지고 있으며, 부리에는 해양 포유류 같은 전기 수용 능력이 있는데다 수컷은 발톱에서 독성 물질을 배출하는 등, 보편적 분류 체계에 걸맞지 않은 특성들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오리너구리를 분류학적 체계 중 어떤 위치에 기입해 넣을 것인가가 논의된 끝에 ‘오리너구리과’가 새로 만들어졌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기 전까지 누군가 상상적으로 만들어낸 그림에 불과하거나 여러 동물의 신체를 접합시킨 ‘프랑켄슈타인’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는 것도 말이다.
오리너구리 이야기가 익숙한 채로도 매번 흥미로운 이유는 세계를 소화하려는 인간에게 있어 언어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해되지 않는 대상에게는 전혀 별도의 언어적 자리를 부여하거나 부정하고 부인하는 언어를 입혀버리는 것. 하나의 값으로 정리하거나 값의 자격이 없는 대상으로 처리하는 것. 잘 삼키거나 뱉어버리는 양자택일 사이에서 종종 언어는 ‘과학적’인 동시에 ‘비과학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고, 그렇게 결과적으로 세계를 소화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소화불가능한 대상은 애초에 ‘세계’의 범주에서 배제하면서 그렇다.
언어적 작업으로서 시 역시 세계를 적극 분류하고 세계의 범위를 결정한다. 언어는 근본적으로 과학적 방법으로 작동하고, 사유는 가장 헐거울 때에조차 언어의 방법론을 활용하며, 시는 어떤 거리에서든 세계를 이해하고 소화하는 방법에 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의 언어가 과학의 언어와는 다른 자질을 움켜쥘 수 있다면 그것은 분류하고 범주화하는 언어 자신의 방법을 상대하며 양자택일에 초과분을 만들어내는 실천적 차원에서일 것이다. 삼키지도 뱉지도 않는 소화불능의 상태를 지속하거나, 삼킨 것에 상실의 기억을 더하여 삼켜지지 않은 것을 알아차리거나, 뱉거나 삼키는 방법 자체를 되물으며 턱을 움직이는 서로 다른 방법들로 김재홍, 권민경, 차도하의 근작 시집은 나란히 그러한 실천의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세계를 이해하고 소화하고 싶은 마음에게 언어는 어떤 방식으로, 어떤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그 경우의 수를 가늠하며 오늘의 시는 시의 언어를 쓰는 일의 의미에 관해 묻는다.
맹렬한 기울기
『기린으로 떠난 사람』(현대시학, 2024)은 언뜻 차분하고 고요한 시집이다. 김재홍의 시는 자정의 버스 안이나 한여름 종로 거리에 편재하는 삶의 순간과 사람들의 움직임을 문득 멈추어 바라보고, 크게 뜨겁거나 냉정하지 않은 온도로 장면을 그려낸다. 화자로 하여금 장면 속 이야기로 한 걸음 들어가 실종된 자식을 찾는 오랜 마음이나 떠난 친구의 시간을 마주하게 할 때에도 시에 큰 파문은 일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의 시 속 세계는 개구리가 동그랗게 울음주머니를 부풀리며 울고, 그 둥근 소리가 물결의 동그라미로 퍼져나가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고/꽃이” 피며 동네를 이루는 곳이다. 그곳에서 ‘나’는 개구리가 “쉬지 않고” 지르는 “둥그런 소리”로부터 시선을 옮기며 풍경을 그려내지만, 그 공간의 “냄새를 맡”(「가재울」)으며 복판을 걸어 지난다. “란저우와 울란바타르를 지나/몽골 평원과 고비사막과/알마티와 이닝과 카라메이를 지나” 파주, 제주, 서울, 파리로 향하는 ‘나’는 언제나 이동 중에 풍경을 보고, 스스로 그린 장면을 지나 이동을 계속하면서, 도착지까지 주어진 “13시간 동안 둥글게/말없이, 둥글게”(「말없이, 둥글게」) 시간을 사는 일에 충실하다. 사람과 장면을 정거장처럼 머물다 지나는 김재홍의 시는 “우리는 모두/종점으로 가는 승객”이며 “영원한 이방인”(「이곳에서, 우리는」)이라는 종교적 감각과 닿아 초연한 관조의 온도를 지킨다.
그러나 그 항상성의 내부는 가재울의 개구리처럼, 한여름의 매미처럼 맹렬하게 소란스럽다. 그가 취하는 관조의 거리가 모종의 위장이어서가 아니라, ‘나’와 대상이 제각각 이동하는 가운데 시선의 거리가 무시로 바뀌어, 진술의 대상이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김재홍의 시에서 풍경을 이루는 대상의 소리는 멀리에서, 가까이에서 거리를 다르게 하여 들려올 뿐 아니라, ‘나’의 밖과 내부에서 동시에 울리기도 한다. 울어대는 매미의 몸이 ‘나’의 울음과 분리되지 않을 때, 그 울음을 그려내는 시의 일정한 온도는 ‘초연함’ 이상의 측면을 갖는다.
소독약을 뿌리는데 매미가 운다/번호표를 나눠주는데 매미가 운다//줄을 세우는데/홀서빙을 하는데/식판조를 하는데/설거지를 하는데//운동장에서/천막 안에서/빗속에서//앞치마에서/고무장갑에서/마스크에서//악악대며/칵칵대며//목이 터져라 운다/귀청이 떨어져라 운다/하늘이 찢어져라 운다//내 안에서 운다/네 안에서 운다
─김재홍, 「매미─명동밥집2」 전문
열네 편의 ‘명동밥집’ 연작에서 ‘나’는 ‘봉사자’의 위치에 있다. 그는 맡은 일을 해내고 보람과 의미를 찾는 동시에 이 ‘밥집’의 ‘손님’들과 다른 ‘봉사자’들, 나아가 아마도 밥집을 운영하는 ‘신부님’을 하나의 풍경 속 인물들로 바라본다. 그 시선을 언어화할 때 ‘나’는 똑같이 ‘봉사자’인 중에도 그들의 옆에, 뒤에, 가까이에, 멀리에, 같은 공간에, 분리된 공간에 수시로 다르게 자리한다. 개별의 자리들에서 그는 때로 모두가 밥 먹는 “한통속”(「한통속─명동밥집12」)이라고 단언하지만, “자신과 저들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동질감”(「식판조─명동밥집3」)을 표하는 ‘신부님’과 멀리에 있기도 한다. 밥 먹는 자 가운데에는 말없이 밥을 먹는 이와 소리를 지르고 다른 이를 때리기도 하는 이, 시시콜콜 간섭하는 이와 말없이 다리 통증을 느끼며 일하는 이가 서로 다르게 있고, ‘설거지조’와 ‘식판조’와 ‘홀서빙’과 ‘퇴식구’와 ‘주방조’가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장면을 구성하는 차이들 사이에서 ‘나’는 자꾸 기울어진 세계를 보고, 기울어진 시선을 알아차린다. 그 기울기는 ‘나’가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방법, 수직의 시선과 수평의 시선 사이에서 거듭 다르게 체감된다. 신앙자의 위치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기도를 올릴 때, 수직으로 내려다보는 신의 시선으로 인간은 모두 같다. 그러나 수직의 기도와 맞닿아 있는 나란히 먹고 사는 일에 있어서, 세계에는 먹으며 믿는 자와 먹지 못하며 믿는 자가 나누어져 있고(「밥 한 톨」), 전자를 위하여 윤택한 방향으로 세계는 기울어 있다. 기도가 필요 없는 자들이 그 윤택의 방향을 정하기도 하며, 기억하지 않는 자에 의해 잊히는 자들은 우두커니 세계의 “바람막이”(「바람막이가 되어」)처럼 걸려 있게 되기도 한다. 이 불균형과 평평하지 않음, 하늘을 향한 수직의 높이가 같지 않은 등고선 위에는 기울기를 바라보는 ‘나’ 자신도 위치해 있다. ‘나’는 수평으로 이동하는 듯 때로 낮은 곳에, 때로 높은 곳에 있고, “고도 11,582미터”(「말없이, 둥글게」) 찬란과 영광에 도취하는 자리에, 누군가를 “컴컴한”(「기우뚱거리는 하루─명동밥집9」) 세계로 보는 ‘밝은’ 자리에, 때로 스스로 “나는 왜 이곳에 왔는가/나는 어디로 가는가”(「마르세유 대성당」)를 모르는 컴컴한 ‘손님’의 자리에 있다. 이 무수한 위치들에서 수직과 수평의 세계는 하나의 법칙이나 선으로 설명되지 않으면서 무수한 기울기들을 만들어낸다. 그 기울기는 수직과 수평의 세계를 역으로 “싸늘한 하늘”과 “메마른 땅”(「말없이, 둥글게」)으로 자꾸 다시 보게 하고, 하늘과 땅 사이 허공을 채우는 것은 악악대고 깍깍대는 맹렬한 매미 소리이다.
김재홍의 시가 가장 초연한 방식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맹렬함이다. 그의 시는 세계를 인간에 대한 보편적 연민에도, 불균형에 관한 구체적 분노에도 안착시키지 않으면서 장면, 사람,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시선 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돈되지 않는 상태 그대로 매 시간 솔직하게 적어낸다. 결국 그의 시는 세계와 자기 자신을 고정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정되지 않는 움직임에 관해 스스로 묻기 위하여 거듭 이곳저곳 산발적으로 이동하며, 기울기의 비일관성 자체를 마주한다. 세상을 관조할 수 있을 만큼 멀리 “기린으로 떠”나려는 사람과 세상에 발 딛은 채로 그가 “거기 너무 오래 살지” 말기를 기도하는 사람이 분리되지 않는, 아직 누구도 ‘기린’에 닿지 않은 복수의 자리에서, 김재홍의 시는 끝내 “기린으로 떠난 사람은/세상에 없”(「기린에 대하여」)기를 다짐한다. ‘기린’을 부르면서, 그 소리가 울리는 지금 여기를 재차 그리면서, 다시 어딘가를 향해 이동하면서 말이다.
없는 집
권민경의 시에서 시간은 성실히 흐르고 세계는 변한다. 여기서 변한다는 것은 문법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계 바늘이 끊임없이 움직이듯 물리적인 풍경이 계속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문학동네, 2024)에는 옛 풍경의 요소들이 사라진 잘 계획된 신도시의 모습과, 공간은 그대로인 채로 사람이 계속 바뀌는 장소의 풍경들이 겹쳐 등장한다. “우리가 보는 것/지금은 진심이지만/누군가 입원하는 내일엔/어설퍼지는”(「언젠가의 순번 대기표」) 병원처럼, 거듭 현재형의 ‘진심’으로 유동하는 공간에서 지나가고 사라진 것들은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의 모습이고, 그것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며, 시간은 변화의 궤적을 추적할 때가 아니라 변화의 일부로서 함께 유동하는 때 보다 성실하고 충만한 의미를 갖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를테면 도처에서 우리는 “서브 리시브 토스 앤 토스”(「닳은 공」), 시간에 걸쳐 공간을 변화시키는 대신 공간의 법칙에 따라 시간을 충실히 보내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시간을 살기 위한 조건으로 그러한 “공간과 사귀는 법을 배워야”(「팽창하는 우주」)만 한다.
그토록 힘이 센 공간은 자꾸만 현재만을, 계속되는 변화만을 생각하게 하지만, 권민경의 시는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시간의 흔적을 본다. 먼저 “이다지도 많은 사람이 한 공간 안에”서 “1층과 2층과 2.5층”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을 때, 그의 시가 보는 것은 그 빼곡한 현재의 ‘진심’이나 팽창하는 힘이 아니라 “지금껏 이어져온 이미지들/끝없는 끝말잇기”가 그러한 공간을 가능하게 해온 흔적과, 그 축적이 “터질 것처럼” “너무 빵빵”(「어린이 미사 3─봉제인형 성당」)해진 상태이다. “온갖 학생들이” “온갖 심술들이”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굴러 나오고” “싹을 튀”워도, “어차피 애들이 할 짓은 빤하”고, 튀어서 갈 곳도 빤하며, 그렇게 아이들은 “빤한 애로 자”라 “사과는 너무도 빤한 사과”인, 따로 “갈 곳이 없는” 이 공간의 법칙을 계속 반복해 왔다. 지금 여기의 모습은 현재의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산물이고, 거기엔 지금의 ‘진심’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진심’으로 만들고 이어 온 ‘믿음’의 역사가 도사리고 있다.
그 역사를 가늠하며 권민경의 시가 나아가 살피는 것은, 시간의 그러한 축적을 위하여 시간에서 배제되고 상실되어온 것들이다. “사과가 사과가 아니게 되는 사건”(「자연─사춘기」)은 아마도 없었던 것이 아니라 유실된 것이며, 권민경의 시는 “책장이 넘어진 밤” “아무도 다치지 않았”던 기억과 함께 “그때 책 몇 권이 사라졌는데/영영 찾질 못했단 전설”(「밀수」)을 떠올리는 데에서 시작된다. 현재까지 이어진 시간이 아니라 지금 이곳과 분리되어 버린 채 멀리 과거에 유폐된 시간을 “호박 안의 모기/툰드라의 미라/돌지 않는 별자리”(「잠깐 있었다」)처럼 발견하고 발굴하는 방식으로, 그는 지금 여기의 “시간 너머에 뭔가 있”(「자연─X-선」)다는 다른 종류의 ‘믿음’을 현재에 다시 새겨 넣는다. 이때 믿음은 무언가가 ‘있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것이 상실되었고, “영영 찾질 못”한 채로 어딘가에 여전히 ‘있다’는 사실까지를 “증명”해야 하는 요청을 함께 새긴다. 그 앞에서 권민경의 시는 가장 구체적인 기억과 경험, 이름을 불러 이제는 사라진 “클로버밭”과 아직 거기 있는 “아이들”(「자연─생태통로」), 변경 이전의 지역명과 거기서 사라진 아이(「종일」), “내가 지웠던 글씨들”(「권─4월 16일」)과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자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그렇게 잘려나간 “보이지 않는”(「자연─뛰는 심장 어디로」) 몸의 부분, 지어야 했던 표정과 가질 수 있었던 마음에 대한 무수한 고백과 진술을 수행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노루들이 공간을 가로질러” “발굽 자리마다 자국이 파”이고, 그 자국이 “작은 이빨로 깨문 사과”처럼 땅에 흔적을 남기면 결국 “행성” 전체가 “갈변하”(「우주 전쟁」)기도 한다는 믿음. 부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시간을 기억해 넣고 ‘증명’해 내는 작업을 통하여 공간을 다른 빛깔로, 다른 상태로 읽어낼 수도 있다는 믿음은, 비단 유폐된 시간을 복원해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늘 현재로서 육박하는 공간을 정확히 이해하고 정확히 언어화하기 위해서, 세계를 배제와 상실 없이 정확하게 상대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믿음과 의지는 보편적 당위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권민경의 시가 시 쓰기 행위에 메타적으로 부여하는 의미이자 스스로 언어적 축적물로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할 수 있는 말에 대해/생각하”(「종일」)는 방법으로 전면화 된다. 여기까지 권민경의 시는 단단한 언어의 건축물로 서고, 명확하게 기능하고자 한다.
그러나 권민경은 그처럼 정확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시 쓰기 역시 현재형의 공간 속에,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간 속에 있음을 마찬가지로 마주 바라본다. 시의 축적이 가능하게 하는 기억과 기입의 방식은 철저히 지금 여기에서 결정되는 일이며, 그 언어가 정말 유폐되어버린 시간에 닿을 거라 정확히 확신할 수는 없다. 상실된 것은 상실된 채로도 있다고 믿어지지만, 그것을 지금 여기에 다시 새겨 넣을 수 있는 것으로서 언어의 힘, 시의 힘을 권민경의 시는 끝내 스스로 믿지 않는다.
어미의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한 강아지처럼 하울링 하다가/삼십 년 만에 사랑을 몰랐다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낯을 가리며 골목길처럼 놀랐다/시간은 멈추질 않고/첫 생리를 겪는 강아지가 밥을 굶는다 바닥에 점점이 떨어진 사료를 따라가면/과자의 집 따위 없다는 건 십일 년 만에 알았다/낭만과 사랑은 닮은 듯 다르고 알 듯 모를 듯 슬픈 얼굴/자꾸 뭉개지는 발음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네/불어니 이태리어니 혹 서반아어야?/로망스어와 로맨스 자주 실수하고 틀리는 것을 견딜 수 있게 되었다/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다/피를 묻히지 않게 된 건 몇 년 되지 않았는데 초등학교 운동장 계단에 피를 묻히고 이십육 년 흘러/네발로 걷고 싶었다 혀로 핥을 주인 없이 과식하였다
─권민경, 「자연─태반을 먹는 짐승들」 전문
언어의 힘을, 시 쓰기의 힘을 믿는 일이 일종의 ‘낭만’이라면, 권민경의 시는 그것이 그 자체로 ‘사랑’일 수는 없음을 거듭 확인한다. 사라진 것들과 달리 지금 여기에 “살아 있기에”, 상실을 새긴 지금 여기를 끝내 “살아남기 위해”(「자연─별」) 그가 혹은 그의 화자가 시를 쓸 때에, 지금 여기가 아닌 시간과 그것의 복원이 발자국 찍고 갈변시킬 곳으로서의 공간, “그곳에 내 문자가 도착이나 할까요”(「팽창하는 우주」)라고 그들은 시의 언어로 스스로 묻는다. “미인은 제멋대로라더라” 라는 판정이 ‘사실’처럼 시의 문장일 수 있다면, “제멋대로인 건 미인을 규정하는 주둥이지”(「자연─미인」)라는 자각도 사실로서 시의 문장일 수 있고, 그렇게 언어와 시 쓰기는 스스로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콩 하나하나”를 “마음대로 열”어 “보고 싶은 것들”(「자연─목욕탕」)을 보고 “고양된 기분” 속에서 사람을 정의하는 일이 ‘사랑’이라 믿어버리는 일로부터 스스로 미끄러지는 일, 상실해버린 것에 대하여 “열쇠를 분실한 대가를 치”(「자연─목욕탕」)르는 일이 권민경의 시에서는, 시 쓰기 행위에서는 끝내 중요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아니, 아니, 사람이여 사랑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팀파니 연주자여 내게 사랑을」)라고 새삼 묻는다. 이 물음은 어떤 것을 믿고, 그것을 기반으로 모든 것을 정의내리고 언어화하며 맥락화하는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행위를 어떻게 정의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곧 사람이 사람을 어떤 행위자로 정의할 것인가를 묻는 일과 다르지 않다. 믿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실제를 묻는 행위에 더 가까이 있는 것. 그것이 언어적 상실에 대하여 책임과 ‘대가’를 치르면서, 끝내 언어로 상실이 지워지지 않는 곳으로서의 공간을 꿈꾸는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본 것들을 깨뜨리며/외면하며/그럼에도 증언하며” “주춤거리”는 권민경의 언어는 그렇게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불안으로, 그리하여 내내 “무서운 물성”(「세라믹 클래스」)으로 지금 여기에 기입된다. 믿음의 집을 지으면서, 동시에 지우면서.
“일인용 식탁”
차도하의 시에는 아이들이 있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고 가뿐하다는 듯 해내는 것이 홀로 의아하여 외롭고 아프고 심술이 난 아이들. 의자 앉기 게임에서는 왜 반드시 의자에만 앉아야 하는지, 바닥에 앉으면 왜 탈락자가 되는지 이해되지 않는 아이와(「최초의 시인」) 옷을 입기 싫어서 어린이집 화장실에 쭈그려 앉아 식은땀을 흘리는 아이(「옷 입기 싫은 아이」), “이해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구토에 중독된 아이”(「구현되지 않은 슬픔」)가 사람들 사이에 있다. 이 아이들을 어렵게 하는 것은 구토나 옷이나 게임이기보다는, 그들의 의아함을 의아해하는 사람들이다. 게임을 방해하지 말라고, “노키즈존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고”(「최초의 시인」) 말하는 사람들의 틈에서 아이는 주저앉거나, 작고 깊은 공간에 문을 닫고 들어가거나,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자유 시간에 할 놀이를 궁리”한 끝에 “마네킹 역할을 맡아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을”(「옷 입기 싫은 아이」) 견딘다.
그리고 그의 시에는 “혼을 낼까? 혼을 내지 않을까?” “예측할 수 없는 체벌” 앞에 선 일상 속에서 마음이 공터가 된 중학생과(「미래의 손」) “콘돔을 끼면 안 선다”는 “하나님”을 만나고 “아이를 가지게 되면 자살해야지 마음먹”는 ‘나’(「지키는 마음」), “이 시는 빼는 게 좋겠다. 시적인 미학도 부족하고. 다 아는 얘기고. 그리고 메타시는 웬만하면 쓰지 말지. 다른 시인이 말해서”(「최초의 시인」) 시를 제외해버리는, “시 수업이 끝날 때까지 개근”하고 “사람들이 추천한 세련된 시집을” “좋아해보려” 노력하는 시인들이 있다. “미래의 손”처럼 혹은 기억처럼 주머니 안쪽 깊은 곳에서 서로 손을 맞잡은 이들은, “동그라미가 될 때까지” “네모를 가방에 넣고 걸”으며 “가방 안에서 네모가 내는/달그락거리는 소리를 지워야”(「산책로」) 한다고 말하는 스스로의 목소리 복판에서 걷고 쓰는 일을 계속한다.
차도하가 의아한 아이들을, 의아함을 숨기는 법을 체득해 가는 사람들을 거듭 그리는 이유는 그들을 마주보는 자리에서부터만 시간에 대한 전망은 겨우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차도하의 시에서 그려지는 미래는 언제나 과거에 귀착되어 있다. “시를 쓰게 될 중학생”이 잡은 “미래의 손”은 “등장하지 않”는 방식으로 재차 등장하는 “시인”(「미래의 손」)의 것으로 ‘기대’되고, 그 손이 움켜잡은 중학생의 손은 시인의 과거로서만 구체적 물성을 갖는다. 이 폐쇄된 시간 속에서 “미래야/부르”면 “과거가 꼬리를 흔들면서 달려”오고, ‘나’가 찾고 또 잡고 있는 손은 미래의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과거의 손”이며, “미래를 찾으러 나”(「현재는 이렇게 지나간다」)서는 산책은 실상 미래를 향하지 않는다.
걷고 쓰는 일이 그처럼 과거를 다시 ‘훈련’하는 일일 때 차도하의 시는 ‘미래’를 둘로 나눈다. 이미 있는 것을 손에 쥐고 이어가는 일관되고 성실한 미래와, 손에 쥔 것을 떨어뜨리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제로의 시간. 그가 시 안에서 경계하는 것은 생애 내내 매일 매일 “강에 돌을 던지”고 있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죽고 나서도” “돌을 던질 것”이라는 것, “다짐처럼 들리”는 그러한 미래가 실상 “아무것도 안 새겨져 있”는, 그저 “조금 특이한 모양처럼 보이거나 보관하고 싶”(「돌 던지기」)은 ‘문장’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미 쓰인 시의 문장을 재조립하듯이”, “마음에 드는 구절만 가져”(「레테르」)가 붙이는 방식으로 이어질 미래에서라면, 돌을 던지고 걷고 쓰는 끝없는 움직임은 “인용을 하고도 주석을 달지 않는” 방식으로든 “모든 말에 주석을”(「너를 인용하기」) 다는 방식으로든 반복되는 인용구, 그럴 듯한 제스처 이상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용’의 출처가 무엇이든지 말이다.
이 구절은 묘사다/이 구절은 앞 구절을 살짝 비튼 것//이 구절은 살짝 비튼 후 더 나아간 것/휘청거리는 사물을 잠깐 비춰준다//건조한 심상을 여기에 넣는다//놀랄 만한 문장, 앞의 건조함은 화재 때문이었대요/앞의 풍경은 불탄 후의 풍경이었대요//점프//다른 풍경, 식물이 등장한다/불에 타지 않는 식물이다/식물의 나선잎차례//누군가 했던 말//이 구절은 묘사다/메타가 질린 사람들을 위해 실제로 겪은 일이라고 적는다/혹은 겪을 거라고//식물이 재등장한다/불타고 있다//이 구절은 첫 문장의 변용이다, 모든 걸 어긋나게 엮어준다//이 구절은 전혀 다른 묘사이고/아주 매력적이다
─차도하, 「내용과 연관 있으면서도 확장성 있는 제목」 전문
“헌팅캡을 쓴다고 사냥꾼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것, “‘헌팅캡을 쓴다’고 쓴다고 헌팅캡을 쓰는 사람이 되지 않는”(「헌팅캡」)다는 것, “셜록 홈즈가 쓰지 않았지만 셜록 홈즈 모자로 알려진”(「매드 해터」) 모자를 셜록 홈즈에 기대어 쓰는 모자-언어 같은 건 아무 것도 실현하지 않는다는 것이 ‘미래’에 대하여 차도하가 경계하는 하나의 지점이라면, 그에게 시를 쓰는 일이란 인용하고 변용하는 방식으로 전해지는 ‘시작법’을 당연하게 여기고 가뿐하다는 듯 활용해내는 광경을 의아함으로 다시 보이는 것, 왜 반드시 ‘의자’에 앉아야만 하는지를 묻는 방식으로 다시 시작되는 것으로 남아 있다. “배급된 말”로 시를 짓고 그 범위 안에서만 행동하고 관계 맺으며 나아가는 세계(「배급」), “어울”린다 여겨지는 말들의 연쇄로 풍경을 만들고 꿈에서도 그 풍경 안에만 머무는 관성(「풍경 벗어나기」), “이제 그만 가버려.” “여자가 그렇게 말해주길 바”라며 “자동문 사이”를 서성이는 마음(「환영받는 일」)을 엮어 쓰면서 차도하의 시가 찾고자 하는 미래는 다시, “구토에 중독된 아이”의 미래이다.
아이를 의아한 존재로, “법적으로 허락받지 못한” 대상으로 만들어 “돌림노래처럼 정해진 음정”에 함부로 배치하던 ‘기계’의 이름을 가져와, “아이는 자신의 구토에”(「구현되지 않은 슬픔」) 그 이름을 붙인다. 이름이 없던 것에 이름을 주는, 이름이 배제하던 것에 오히려 그 이름을 붙이는 아이의 다시-쓰기는, 인용이나 변용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모양이 결정된/모든 책의 판형을 바꾸”고 “그런 책으로 세상의 둘레를”(「독서 유예」) 직접 재려는 일이다. 그것은 “내가 쓰고 있는 모자를 벗어 가판대에 숨겨두”(「안녕」)고 ‘주인’이 있는 가게를 나온 다음, 쓰도록 주어진 것을 내려놓은 빈 손에 새로 쥘 것을 가늠해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 손에는 과거의 손도 미래의 손도 아직, 쥐여져 있지 않다.
차도하의 시에는 일인용 식탁이 있다. “희고/비어 있는”(「일인용 식탁」) 그곳은 ‘너’와 함께 살며 쓰던 “이인용 식탁”이었다 “다시 일인용 식탁이 되”어 버린 적막한 장소이다. 본래 식탁의 ‘주인’이었던 ‘너’가 떠난 후 “일인용 식탁 앞에 앉아”(「액체와 이별하기」) ‘나’는 스스로 “희고/비어 있는//한 명의 인간”이 되어 간다. 그런 ‘나’에게 ‘너’는 “장례식장에 있는 꽃들”(「요절복통」)로, 그 꽃들이 재가 되어 날아가는 검은 연기로(「추모」), 낮고 친절한 음성과 손길로(「기념일」) 자꾸 돌아온다. ‘나’가 기대어 온 언어에는 혼내고 책망하는 언어만이 아니라 끝까지 그를 바라보는, 그의 외로움 곁에 있어주는 언어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일인용 식탁에 혼자 남은 ‘나’에게 남겨진 일은 “내 몫을/먹”(「일인용 식탁」)는 일이다. “세계를 한입에 넣”고, 어떻게 몸을 움직여 세계를 상대할 것인가. “물과 함께 세계를 삼”(「안녕」)키는 방법에 관하여 ‘나’는 ‘너’의 기억과 함께, 그러나 ‘비어 있는’ 몸으로, 어떤 언어를 써 나갈 것인가. 차도하의 시에는 그 질문이 희고 비어 있는 식탁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 일인용 식탁 앞에는 기억과 함께, 모든 내가 있다. 각자의 식탁에서 우리는 차도하의 물음을, 그가 쥐고 있던 “무척 뜨거운 것”(「추모」) 어떻게 쥐어보고 있을까. 우리의 손 안에서 그 물음은 내내, 체온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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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1. 『아기 늑대와 걸어가기』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운명과 자두와 힘」)이 있다. 형식을 가져오되 그 형식의 기존 관념을 깨려고 한다는 시인의 한 인터뷰 기사를 미루어 보았을 때, 그는 기존의 (서정)시 형식과는 많이 다른, 아주 오래된, 잠들어 있는 어떤 시의 형식, 그러니까 과거라는 시간에 잠재되어 있는 서사시와 극시의 형식을 깨우려고 한다. 아니, 그것은 이미 깨어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처럼. 잠들어 있는 것은 우리다. 시인은 잠들어 있는 우리를 깨우기 위해, 그것으로서 '시'를 가호하기 위해 시의 본질에 천착한다. "레고 놀이를 만들 때보다, 만들고 나서, 해체할 때가 제일 좋았다"는(「투영하는 물질들」) 시인은 단단하게, 혹은 답답하게 굳어져 온 시의 형식을 해체하고 분해하며 그 본질 찾기에 매진한다. 본질을 잊은 건축은 언젠가 반드시 내려앉는다. '시'라는 장르의 소멸을 잠자코 지켜볼 수 없는 시인은 그러므로 시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쓴다. 「운명과 자두와 힘」은 서사시의 형식으로 그 본질 찾기 여정에 우리를 초대한다. '나'는 "어떤 집안을 케어하고 그들이 원하는 심부름이나 애완동물을 돌보는 일"을 하는 하녀로서 크로스베너 집안의 제일 막내인 '폴'을 돌본다. 폴은 "언제 기분이 나빠져서 폭발할지, 언제 울지, 언제 소리를 지를지 정말 예상하기 힘"든 네 살배기 떼쟁이 아이다. 하지만 '나'는 폴이 울면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 화자를 '시인'이라고 해보자. 시인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선사하는 것은 세상에 '시'밖에 없다.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 결합으로 여자의 몸에 아이가 배고, 출산하는 것처럼 시인이 세계를 만날 때 세계의 것이 그 몸에 육화되고, 시가 탄생한다. 곧 시인과 시의 관계는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 다름없다. 그러므로 시가 아프면 시인도 아프다. 시가, 시가 되기 위해서 기표는 기의를 필요로 하고, 기의는 기표를 필요로 한다. 시가 아프다는 것, 그러니까 '아픈 시'는 그 둘이 동등하지 못한, 한쪽으로의 편위를 가진 시다. 인간의 정서나 세계의 이미지는 가늠할 수 없이 쏟아질 "윤곽의 폭포들"이지만 그것을 감당할 오늘날의 시의 형식은 가늠할 수 있는 것이라서, 어떤 것들은 "쏟아지지 못"할 때가 많다(「생강이 된다는 것」). 그것들은 "자주 어딘가로 떠나자고 울어 재"끼는 폴처럼 대개 원초적이고, 예측 불허한 정서 혹은 이미지일 것이다. 오늘날 단단하게 굳어진 (서정)시의 형식이 담아내지 못할 그 '나머지' 정서들, 어쩌면 소외되었을 이 정서들은 "아직 기저귀도 떼지 않아, 뭘 쌌는지" 모를 "뭉툭한 엉덩이" 같은 미지의 감각이다. 시인은 이 방대한 감각을 어떻게 돌봐야 할까. 무리하게 그 형식에 욱여넣을 수는 없을까. 아니, 그러면 "폴이 잠을 못 잔다. 폴이 울면 모두가 깨어나고 모두가 피곤하고 모두가 분노하고 모두가 나의 책임으로 돌린다. 모두가 나를 공격한다". 그렇다면 '나'는 폴이 원하는 열매를 가져다주면 된다. 곧 시인은 쏟아지고 싶지만 쏟아지지 못하는, '윤곽의 폭포들'이 원하는 시의 형식을 가져오면 된다. 화자는 결국 폴을 위한 "마법의 열매"를 획득하고, 이 시는 다 쓰여진 것만으로 그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열매를 찾는, 곧 내용에 걸맞는 운명적인 형식을 찾는 이 여정은 바로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인과 함께 서사시의 형식을 찾아가는 한편, 역설적이게도 이미 서사시의 형식과 당면하였다. 서사시의 형식으로 서사시를 발견한 것이다. 2. 중요한 점은 잠재된 형식의 기침이 다만 부활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생경한 형식을 깨우지만 그것의 기존 관념을 답습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서사시는 신이나 영웅을 중심으로 하여 쓰이지만, 그의 시는 비주류의 세계를 넘나든다. 앞서 살펴본 시의 화자는 물론 영웅이 아니라 '하녀'였다.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인 또 다른 시편 「조약돌 소극장」의 화자도 물론 주류에서 버려진, 한 소극장의 무대 바닥을 닦는 서른 살의 청소부이다. 그러나 "우리 극장은 딱히 어떤 소재나 주제를 따지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소재가 아니다. 비주류의 세계가 서사시라는 거대한 형식과 부딪고 갈등하면서 탄생한, 고유한 혹은 고귀한 서사가 귀중한 것이다. 서사시의 형식으로만 추출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그러니까 형식의 지평이 넓어지면 '시'라는 장르가 감당할 수 있는 세계의 지평이 넓어진다. 시인의 다른 세계를 견인하는 힘은 다른 형식을 차용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극시의 형식으로 쓰인 이 시집의 마지막 시편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과 극시」는 서사시의 형식과는 또 다른, 낯설고 기이한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면서 시의 지평을 넓혀간다. 1. 목화 인간 1 (독백형식) 텍스트,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생각 내 식탁 위의 바게트, 바게트 연구, 왜 오늘의 아침 식사는 나무보다 바게트에 더 관심이 가는지 행여, 텍스트의 구조와 뼈대, 얼마든지 비극이 될 수 있다는 생각 (…) 나는 감정이 변할 때마다, 몸에서 목화꽃이 피어나 내가 목화꽃을 얼마 안 가지고 있는 건 감정이 몇 개 안 된다는 것뿐. 감정의 피부병이라고 하지. 의학에선 여기저기에서 나는 추방되었어. 계속 쫓겨 다녔지. 전염병처럼. 하지만 여기선 나를 목화인간이라고 불러…… 이곳은 내가 사는 육지의 남쪽 끝. 버려진 항구 도시야. 정부에서는 우리 도시를 관리하지 않아. 유령의 도시라나. 들어오면 모두 죽는다는 곳. 하지만 말이지. 여기 사는 사람들은 참 정상이고 누구보다 평화주의자이며 배려심이 깊어. -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과 극시」 부분 이 시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독백형식으로 등장하는 '목화인간'은 "감정의 피부병"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여기", 말하자면 '극시'라는 형식 안에서 그는 "목화인간"으로서 세계에 머무르고, 자기의 이야기를 발화한다. 마찬가지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시인은 '동생은소금구이, 동생은생선구이, 블루문, 얼룩소, 컵, 북극곰 스너글러'와 같이 현실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을 전혀 다른 세계의 존재들을 등장시킨다. 시인의 고유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그들은 각자 나름의 고유한 이야기를 가지고 발화한다. 극시의 형식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일한 무대이다. 응당 그러하겠지만, 그들의 존재는 물론 시인으로부터 파생되었다. 따라서 그것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은 기실 인간의 내면을 성심껏 살피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극시는 어렴풋한 시인의 내면의 목소리를 보다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들어주는 형식이다. 그런 점에서 그 형식은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인간의 내면을 일부 반영할 수 있다. 우리 내면에 피어나는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의 목소리는 극시로 말미암아 미미하게나마 번역된다. 시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이 다르지 않다면,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살피는 극시의 형식은 무엇보다 시의 본질에 가닿는다. 내가 이 시의 내용보다 형식에 집중한 이유는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들의 이야기를 명백히 번역할 수 없거니와, 그들의 성질은 아무렴 하나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곧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을 그리워하고, 인간을 염려하고, 인간을 기다린다. 그것은 물론 시인의 가장 원초적인 마음일 것이다. 따라서 이 극시는 상당히 희극이다.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어쩐지 마음이 든든하다. 그래도 내가 죽는 날까지는 시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서사시와 극시의 형식은 여전히 낯설지만, 그것은 '시'의 존속을 위해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시를 결박하고 있는 형식에 대한 편견을 허물어뜨리자. 당신이 정녕 시를 사랑한다면 그 본질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기꺼이 고독한 길을 걷고 있는 시인의 비극이 희극이 되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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