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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 2024년 겨울호

포함하여 쓰고 있는 문장

홍성희 문학평론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실에 관하여 몇 가지 논점이 있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2016)에서 홀로코스트 연구자는 세 가지 문제를 동시에 마주한다. 홀로코스트를 부인해온 히틀러 역사학자가 자료를 왜곡하여 제시하고 해석해왔음을 입증하는 일. 그러한 왜곡 행위의 근저에 반유대주의를 전파하고자 하는 의도가 놓여 있음을 논증하는 일. 그처럼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자들의 목소리 앞에서 역사적 사실의 사실로서의 지위를 수호하는 일. 홀로코스트 역사학자와 변호사 들은 홀로코스트의 입증 불가능성을 법정에 세우고자 하는 부인론자의 의도를 역으로 이용하여 부인론자의 논리적 허점을 법정에 세운다. 사실을 부인하는 방식은 사실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정확히 뒤집혀, 작은 부분을 입증할 수 없다는 점으로 전체를 부정하는 부인론자의 비약은 그의 학자로서, 인간으로서의 자격 전체를 부정하는 항변의 방법이 된다. 치열하고 위태로운 대치 끝에 항변은 인정되고, 부인론자의 부정을 사실로 입증한 결과는 그 자체로 홀로코스트라는 사실을 수호한 것으로 의미 지어진다. 이때 논점은 하나의 사실이 더 큰 범주의 사실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방식과, 하나의 사실에 대한 입증이 다른 사실에 대한 입증과 동일시되는 연결의 자연성이다.

    영화 「추락의 해부」(2023)에서 소설가는 법정에 서서 두가지 작업을 수행한다. 자신을 용의자로 삼아 검사 측이 수집하고 구성한 이야기를 부정하는 일. 남편의 추락 원인을 오롯이 남편 내면의 문제로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 수집하고 구성한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발화하는 일. 전자는 변호사들의 언어로, 후자는 변호사의 지도 편달하에 소설가의 언어로 세심히 연출되는 가운데, 소설가는 불쑥 상대의 말을 끊고 말한다. 그때 그는 검사 측의 논리를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이야기에 힘을 더하기 위해, 검사 측 증인들의 이야기는 부분적인 것으로, 증거는 사실의 일부만을 보여주는 것으로, 증명할 수 없는 자신과 남편의 사적 시간은 오롯이 자기 안에서 전체일 수 있는 것으로 대비한다. 단편적인 녹취·기억·진술은 사실의 일부일 뿐 사실 자체는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이미 왜곡되어 있다. 그것들은 실제it was도 진실truth도 현실reality도 아닌 채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다. 타인의 부분을 부정하며 자신의 전체를 구성하는 소설가의 전략은 검사에 의해 마찬가지로 일방적인 이야기일 뿐이라 지적되지만, 검사의 발췌 인용은 인용의 배경 맥락을 환기하고 설명하는 소설가 측의 전략 앞에서 역으로 왜곡된 이야기의 하나가 된다. 여기서 논점은 사실의 전체에 대한 배타적 소유격과, 부분–전체의 구도 속에서 외려 깊숙이 감추어지는 사실의 행방이다.

    사실은 전면적으로 증명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전체를 가장한 서사 뒤에 전체 아닌 것으로 감추어진다. 서사의 구축 과정에서 사실은 언제나 왜곡된 채로만 ‘사실’로 이야기될 수 있으며, 그때 사실은 진술된 것이 진술하지 않은 잔여로서 이야기의 맹점을 스스로 가리킨다. 요컨대 사실은 사실인 채로 사실이 아니며, 사실이 아닌 채로 사실이 되어 언어의 장을 순환한다. 사실의 언어가 가장 비대할 때 사실의 자리는 가장 협소하다.

2024년 6월 23일 김현지가 블로그에 게시한 「[공지] 김현지, 김현지 되기」는 “몇 가지 사실을 믿고 싶기에 이 글을 씁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정지돈이 블로그를 개설하여 6월 25일 올린 글 「현 상황에 대한 제 입장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는 김현지에 대한 사과의 말과 『야간 경비원의 일기』 『브레이브 뉴 휴먼』에 대한 후속 조치에 관한 말로 시작한 다음, “사과와 후속 조치만 언급하고 싶으나,/추가적으로 전달이 필요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오해와 잘못된 사실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반드시 필요한 이야기입니다”라는 문장으로 나아간다. 여섯 개의 절로 이어지는 이 글에서 ‘사실’이라는 단어는 여러 번 반복 사용된다.

    이후 이어진 「정지돈씨의 입장문」(김현지, 2024. 6. 25), 「천하의 정지돈이 왜 이리 혓바닥이 길어?」(김현지, 2024. 6. 27),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김현지, 2024. 7. 21), 「[습작] DEAR. D」(김현지, 2024. 7. 26), 「정지돈입니다」(정지돈, 2024. 8. 29), 「중요한 건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김현지, 2024. 10. 27)에서 ‘사실’은 특히 정지돈의 글에서 거듭 활용된다. 상호적인 직접 인용과 간접 인용이 겹쳐지는 가운데, 두 사람의 글 속 ‘사실’의 맥락은 크게 열두 가지 사실의 문제로 세분된다.


[사실 1] 김현지의 사적 시간–경험–사실
[사실 2] 김현지와 정지돈 사이의 사적 시간–경험–사실
[사실 3] 정지돈이 [사실 1]과 [사실 2]를 소설(『야간 경비원의 일기』) 속 인물, 사건, 서사로 활용한 정도에 관한 사실–재현의 사실
[사실 4] 정지돈이 [사실 1]을 소설(『브레이브 뉴 휴먼』) 속 인물, 사건, 서사로 활용하거나 활용하지 않은 사실–재현의 사실에 관한 사실
[사실 5] 김현지의 「[공지]김현지, 김현지 되기」 업로드 전과 후 김현지와 정지돈 사이, 김현지와 정지돈과 정지돈의 소설을 출간한 출판사 사이 [사실 3]과 [사실 4], 그를 경유한 [사실 1]과 [사실 2]의 내용에 관하여 이루어진 사적/공적–대화–사실
[사실 6] [사실 5]에 특정 의도를 기반으로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가 개입되거나 개입되지 않은 사적/공적–대화–사실에 대한 사실
[사실 7] 김현지의 「[공지]김현지, 김현지 되기」 업로드 이후 김현지, 정지돈, 정지돈의 소설을 출간한 출판사의 글쓰기 및 행위에 대하여 이루어진 기자, 출판 관계자, 평론가를 포함한 독자의 공적–글쓰기–행위–사실
[사실 8] [사실 7]에 특정 의도를 기반으로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가 개입되거나 개입되지 않은 공적–글쓰기–행위–사실에 대한 사실
[사실 9] 김현지의 「[공지]김현지, 김현지 되기」 업로드 이후 정지돈이 경험한 사적/공적–시간–경험–사실
[사실 10] 김현지의 「[공지]김현지, 김현지 되기」 업로드 이후 김현지가 경험한 사적/공적–시간–경험–사실
[사실 11] 이야기하기와 이야기 나누기의 의미 및 효과에 관한 사실
[사실 12] 문학적 삶–재현과 실제 삶–기록/도용 사이의 관계에 대한 사실


김현지는 [사실 1] [사실 2]와 관련하여 [사실 12]에 대한 확인 및 행위를 목적으로 하고, [사실 11]에 대한 확인을 목표로 글쓰기–행위를 시작한다. 그는 단계적으로 정지돈에게 [사실 3]과 [사실 4]에 대한 확인 및 행위를 요청하고, [사실 2]에 대한 발언권과 [사실 1]에 대한 보호를 요청한다. 나아가 [사실 12]와 관련된 글쓰기–행위를 직접 수행하고, [사실 10] [사실 11]에 대한 확인을 지나 [사실 3] [사실 4] [사실 6] [사실 8]에 대한 확인 및 행위를 예고한다.

    정지돈은 [사실 3] [사실 4]에 대한 확인 및 행위로 글쓰기 행위를 시작한다. 동시에 [사실 5] [사실 7]에 관하여 [사실 6] [사실 8]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사실 6] [사실 8]에 관하여 [사실 9]에 대한 확인 및 행위를 독자들에게 요청 및 예고함으로써 [사실 11]에 대한 확인 및 행위를 요청한다. 다른 한편 김현지에게 [사실 3] [사실 4]와 관련된 [사실 1]에 대한 확인 및 행위를 요청하고, 관련하여 독자들에게 [사실 12]에 대한 확인 및 행위를 요청한다.

    반복해서 활용되는 간접 인용에는 인용자의 입장과 재구성되거나 편집된 맥락이 개입되어 있어서, 두 사람의 글을 교차하여 세분한 열두 가지 사실의 문제는 확정된 내용이 아니라 이것이거나 저것인, 혹은 이것도 저것도 아닐 수 있는 맥락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김현지가 직접 인용한 내용을 정지돈이 편집된 것으로 언급하며 다시 직접 인용하거나, 정지돈이 간접 인용한 내용을 김현지가 왜곡된 것으로 언급하며 다시 간접 인용하는 가운데 두 사람의 언어는 서로에게, 또 그들의 언어를 마주하는 이들에게 수집되고 분석되며 사실을 구성하는 재료가 된다. 이때 언어는 구두 발화 가운데 휘발되어버리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블로그 글이나 그에 대한 댓글, 그에 관한 기사, 비평, SNS상의 글들처럼 상당 부분 활자 기록으로 남아 데이터화된다. 김현지가 「중요한 건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의 서두에서 말하듯 그 데이터들은 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어떤 사실 자체로 취급될 수 있다. 이를테면 법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개입시키는 정지돈의 글쓰기–행위에서 [사실 5] [사실 7]은 [사실 9]의 확인과 직접 관계되어 있는 문제인 동시에, [사실 9]와 [사실 6] [사실 8]을 연결시킬 행위의 근거이자 대상으로 활용될 재료들이다.

    그러나 [사실 5] [사실 7]은 [사실 1] [사실 2]에 대한 [사실 3] [사실 4]의 문제와 무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언어 데이터의 맥락을 초과해 있다. [사실 5] [사실 7]을 [사실 6] [사실 8]의 문제로 맥락화하는 데에는 ‘의도’라는 단어가 개입된다. 이때 ‘의도’를 가정하고 상정할 수 있는 조건은 [사실 3] [사실 4]에 관하여 [사실 1] [사실 2]를 부당하게 활용하지 않았음을 ‘사실’로 확정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의도’라는 말은 ‘허위 사실’이라는 말 다음에 나타난다. ‘허위 사실’에는 거짓과 진실의 구분이 기입되어 있고, 사실은 확정되어 있으며, 가정되거나 상정되는 것을 넘어 증명될 수 있는 것으로 위치해 있다. 무엇이 ‘허위’라고 선언하는 말은 엄밀한 검증 과정을 거친 판정이 이루어졌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정지돈이 김현지의 ‘의도’에 관해 말할 때 [사실 3] [사실 4]에 관한 ‘허위’는 확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그러한 반응에 공감합니다./맥락을 모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입니다”(「현 상황에 대한 제 입장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소설을 조금만 읽어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악의적 왜곡입니다”(「정지돈입니다」) 같은 문장에서처럼 ‘모르는’ 자는 알 수 없는 ‘아는’ 자의 ‘사실’로서만 제시된다. 이때 ‘아는’ 자는 [사실 2]에 관한 사적 ‘맥락’을 배타적으로 알고 있는 자이자 [사실 4]에 관해 앎과 모름을 나눌 수 있는 위치를 가진 자이다. 그가 아는 것에 ‘앎’의 방식으로 동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의 사적 맥락에 대하여 모름을 인정하는 것과 더불어, 사실–재현에 관하여 그가 ‘앎’으로 규정한 범주와 방식을 단일한 쓰기 및 읽기의 방법으로 확정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그것은 [사실 12]에 관하여 하나의 ‘사실’을 확정된 것으로 가정하고 상정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정지돈은 [사실 3]과 관련하여 활용 사실을 인정하고, [사실 4]와 관련하여 활용 사실을 부인한다. 이때 인정과 부인 모두의 근거로는 [사실 12]에 대한 ‘사실’이 있고, 그것에 근거하여 인정과 부인은 서로 다르지 않다. ‘문학적 삶–재현은 실제 삶–기록이 아니다’를 ‘문학’의 보편 사실로 여기는 입장에서 소설은 ‘문학’이므로 ‘기록’과 다르며, 인정의 방식으로든 부인의 방식으로든 실제 삶을 ‘도용’한다는 논법 자체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문학은 삶을 참고하든 아니든 ‘기록’이 아니므로. [사실 1] [사실 2]에 대하여 [사실 3] [사실 4]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사실 12]에 관한 ‘사실’을 결여하고 있는 상태의, 혹은 그 ‘사실’을 ‘모르는’ 상태의 행위이다. 그 결여로부터 ‘허위 사실’은 비롯되고, 결여의 자리는 ‘의도’ 같은 것이 점유할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정지돈에게 [사실 12]에 관한 ‘사실’은 모든 사실의 문제에 관하여 ‘사실’을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강력한 근거이자 조건이다.

    [사실 12]와 관련하여 정지돈이 설정하는 ‘사실’에는 맹점이 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라기보다는 분류와 분리의 시선이 적용된 부분으로, 거기에는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사이의 독자가 있다. ‘맥락’을 모르지 않는 독자와 소설을 읽고도 그가 설정한 ‘사실’의 방법대로 소설을 읽지 않는 독자. 두 독자는 교집합 관계일 수 있다. 정지돈의 언어는 그런 위치의 독자를 포함하지 않는다. 그의 글쓰기–행위는 정지돈의 소설을 조금이라도 읽어봤거나 그의 블로그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후자의 위치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하는 방식으로 읽기의 방법을 규제한다. [사실 12]와 관련한 ‘사실’의 확정은 ‘독자’의 범위에 대한 확정과 관계된다. 김현지는 그 ‘독자’에서 제외된 독자의 위치에서, 그 독자의 위치에 관해 말한다. 이 위치에서 [사실 12]는 하나의 ‘사실’로 확정되지 않는다. 문학적 삶–재현은 언제나 반드시 실제 삶–기록이지 않다. 그러나 ‘문학적 삶–재현은 특정한 요건하에서 실제 삶–기록이다’라는 문장은 어떤 독자에게 문학의 가능한 사실 가운데 하나로 적힐 수 있다. 특히 문학적 삶–재현에서 실제 삶–기록의 가능성을 읽어낼 수 있는 독자에게 그 문장은 [사실 12]와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가 된다. 다른 말로 [사실 12]는 [사실 11]과 관련된 ‘논제’이다. 여러 글쓰기–행위에서 기분과 마음 상함 혹은 의도의 문제로 한계 지어지는 것을 넘어, [사실 12]는 ‘사실’을 확정하는 일과 확정하지 않는 일 사이에 확정이 아닌 방식으로 이루어질 이야기의 대상이다.

    [사실 11]과 관련하여 [사실 12]의 ‘사실’을 확정하지 않는 일은 기실 그것을 확정하지 않으려는 독자에게 주요한 난점이 된다. 특정 요건하에서 문학적 삶–재현을 실제 삶–기록이라고 읽는 독자의 시선에서, 정지돈의 [사실 3]에 대한 활용 사실 인정과 [사실 4]에 대한 활용 사실 부인은 마찬가지로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사실 12]에 관해 ‘사실’을 먼저 확정해두지 않을 때, 이를테면 ‘착안’이나 ‘모티프를 딴’ 같은 표현에 기록과 재현을 분리시키는 논법을 자연적으로 제공하지 않을 때, [사실 3]에 대한 활용 사실 인정은 정지돈에게 문학적 삶–재현이 특정한 요건하에서 실제 삶–기록과 무관하지 않으며, 특정 대상을 ‘특정한 요건’의 일부로서 작가의 실제 삶–기록과 무관하지 않은 문학적 삶–재현의 대상으로 활용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 된다. 이 인정은 [사실 12]에 관하여 하나의 ‘사실’을 확정할 수 없게 하므로, [사실 4]에 대하여서도 ‘특정한 요건’의 가능성을 열어두게 된다. [사실 12]가 논제로 남아 있는 한 저자의 인정과 부인을 넘어 [사실 3] [사실 4]는 배타적 문제가 아니며, [사실 12]에 관하여 부분적 인정과 부분적 부인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건 [사실 12]에 관하여 저자는 하나의 ‘사실’을 상정하고 보편 법칙으로 삼아 ‘사실’을 공유하는 독자를 향해 호소하는 입장에 있는 반면, ‘사실’을 공유하지 않는 독자는 확정된 법칙을 공유하지 않는 개별 특수의 특수성에 관해 논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는 점이다. 기대어 활용할 ‘보편’ 법칙이 없을 때 특수는 입증의 대상처럼 여겨지게 되며, 특히 ‘보편’의 이름으로 특수를 부정하는 논리에 이미 항상 부정될 것으로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서, ‘입증’의 방식으로써만 이야기 나누기 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으로서 대상화된다. 특히 ‘사실’ 확정과 불확정, 보편과 특수의 구도가 저자와 독자, 텍스트 언어의 소유권자와 비소유권자의 구도와 겹쳐질 때, [사실 12]에 관한 [사실 11]의 현장은 전자에게 더 유리한 장소가 된다. 언어의 소유권은 그 자체로 ‘사실’의 소유권이나 사실의 소유권이 아니지만, 저자의 ‘사실’ 맥락을 개별 글쓰기–행위의 ‘의도’로 연결하고, 그 ‘의도’를 근거로 ‘사실’을 공유하지 않는 특수성 읽기에 또 다른 ‘의도’의 맥락을 기입할 수 있는 조건으로 기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현지가 정지돈에게 이야기하고 그와 이야기 나누기를 시도한 다음 「[공지]김현지, 김현지 되기」를 통해 이야기하고 이야기 나누기를 요청한 배경에, 「[공지]김현지, 김현지 되기」 업로드 이후 정지돈과 김현지가 경험한 사적/공적–시간–경험–사실 들의 배면에, 계속 [사실 12]와 관련된 [사실 11]의 기울어진 장소성의 문제가 놓여 있다. 김현지는 [사실 12]에 대한 [사실 11]을 확인하고자 이야기를 시작했고, 정지돈은 [사실 12]에 대한 [사실 11]을 다른 방향으로 다시 확인하기 위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12]에 대한 [사실 11]이 확인되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개입되었고, [사실 12]와 관련하여 재현의 윤리가, [사실 11] 과 관련하여 공론장의 윤리가 논점이 되었으며, 두 논점 사이에서 저자를 보호하는 문학 출판계 내 제도적 장치와 법 장치의 문제, 입증과 2차 가해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 모든 문제의 무게 속에서 대부분의 사실이 언어 기록으로 남은 데이터들을 다루고 있다면, 재현의 윤리에 관한 논의 역시도 문학 텍스트라는 언어 물질을 재현 행위 자체의 기록으로 데이터화한다면, 어떤 언어를 통해서도 데이터화될 수 없는 것, 데이터로 증명될 수 없는 것으로 남은 [사실 3] [사실 4]의 문제가 여전히 이곳에 있다. 정지돈의 소설 언어로 쓰인 것, 그에 대하여 김현지의 언어로, 다시 정지돈의 언어로 계속 다시 쓰이고 있는 대상으로서 [사실 1] [사실 2]에 관한, [사실 3] [사실 4]의 사실·진실·실제 혹은 현실은 겹겹의 언어 안에 각자의 사실로 호명되는 방식으로, 전면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부분적 기억과 증언, 기록과 재현의 사실로 모습을 드러낼 따름이다. 그 가운데 한쪽의 사실에는 그것을 사실로 인정하기 위한 장치로서 ‘문학’의 의미와 문학에 관한 ‘사실’, ‘독자’의 범위를 설정할 수 있는 ‘보편’의 논리와 그것을 앞세울 수 있는 위치가 있다면, 다른 쪽의 사실에는 사실이 사실이므로 사실이라는 동어반복의 방법만이 있다. 한 면에서는 비논리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언어로, 어떤 ‘의도’가 감추어진 것으로 보이는 동어반복이, 다른 한 면에서는 문학–보편–논리의 언어에 포섭되지 않는 방식으로 남겨져 있는 것에 관한 최대치의 움직임으로 보이는 동어반복이, 실은 문학–보편–논리의 언어 역시 수행하고 있는 동어반복이. 그 글쓰기–행위에 관하여, 사실의 언어가 비대한 이곳에서 반드시 언어적이지 않은 사실의 자리는 내내 협소하다. 그 협소한 자리에 두 사람이 있다.

    [사실 1] [사실 2]에 관하여, 관련하여 [사실 3] [사실 4]에 관하여 전면적인 공개와 입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논리 언어가 있다. 그러나 정지돈과 여러 글쓰기–행위자가 요청하듯 김현지가 언어로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입증’한다고 해서, 그의 언어가 ‘전면적’인 사실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입증이라는 인식론적 담론 규칙 내부에서 사실을 전면적으로 증언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언어화된 사실은 어떤 정도와 방식으로든 편집과 왜곡을 경유한 구성물로 여겨지며, 따라서 해석의 차원에서 부분을 부인함으로써 언어 자체를, 사실 전체를 부인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지돈이 [사실 3] [사실 4]에 관하여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입증’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그의 언어가 ‘전면적’인 사실로 인정될 수는 없다. 사실에 대한 판단이 발화된 문장이라는 논리의 방법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전제할 때, 결국 사실은 언어화된 내용들 가운데 어떤 것을 ‘사실’로서 합의하고 인정하느냐에 따라 단계적으로 결정되고 공표되거나, 그러한 절차가 도달하는 데 실패한 결론이자 사실을 사실로 인식하기 위한 언어들 이전에 있던 일종의 실재로 아득히 남겨진다. 그러한 실재와 최종 판정 사이에서 사실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 나누려는 글쓰기–행위는 언제나 입증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자 말을 거듭 시작해야 하는 난처 앞에 있다. 그 자리에서 어려움은 말하기 자체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부정당하는 가운데에도 부인되지 않을 수 있는 침묵의 상태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7. 잘못이란, 손해dommage의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수단을 상실한 손해일 것이다. 만약 희생자가 생명을 잃거나 모든 자유를 잃는다면, 또는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자유, 아니면 단순히 이러한 손해에 대하여 증언할 권리를 잃는다면,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증언의 문장 자체가 권위를 잃는다면(24~27절), 이는 사실일 것이다. 이 모든 경우에서, 손해로 인한 상실에 대해, 타자에게, 특히 법정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것의 불가능성이 추가된다. 만약 희생자가 이러한 불가능성을 이겨내고 어떻게든 자신이 당한 잘못을 증언하려고 한다면, 그는 다음과 같은 논변에 부딪히게 된다. 곧 당신이 항의하는 손해는 발생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당신의 증언은 거짓이오. 아니면, 그 손해는 발생했지만, 당신이 그것에 대해 증언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이 겪은 것은 잘못이 아니라 단지 손해에 불과하오. 그러니 당신의 증언은 여전히 거짓이오. 1)


리오타르는 『쟁론』에서 언어의 장르적 성격에 관해 말한다. 특정한 담론 규칙과 판단 규칙을 공유하는 언어는 하나의 장르를 이루고, 규칙 체제를 공유하지 않는 장르들은 갈등 관계에 놓인다. 그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특정 장르의 판단 규칙을 적용하여 해결하려 할 경우, 해당 장르의 체제를 공유하지 않는 쪽에 대하여 그러한 시도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이때 잘못은 어떤 장르의 근본적 배제와 소외를 포함한다. 이를테면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직접 경험한 희생자의 증언만이 아우슈비츠의 실제를 증명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경험–증언–사실의 장르 규칙 속에서 가스실을 경험하지 않은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증언은 증명의 언어로서 가치를 갖지 않는다. 희생된 자는 증언할 수 없으므로 이 장르에서 증언이란 근본적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지만, 장르의 규칙에 따라 증언의 ‘부재’는 아우슈비츠의 실제를 증명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연결된다. 이 논법에서 다른 경험–증언–사실의 언어는 완전히 배제 및 소외되며, 장르는 그 내부 문법 안에서 스스로 정당성을 얻는 방식으로 그 외부에 대한 잘못을 범한다.

    리오타르는 그러한 잘못을 논리학적으로 탐구하는 대신 언어학적으로 읽어보고자 한다. 논리학적 관점에서 소외된 언어 장르는 소외된 상태에 머물지만, 언어학적 관점에서 그것은 침묵의 상태로 있다. 그 침묵은 판단 규칙으로 적용된 장르의 체제 안에서 침묵일 뿐 다른 장르에서는 하나의 문장이며, 따라서 발화되지 않는 문장으로 이곳에 존재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고자 한다. 소외되고 부정된 것이 부인되지 않고 남아 그러한 판정이 이루어진 이곳의 언어 장르에 대하여 긴장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렇게 갈등이 해결되거나 해소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사태, 그것을 리오타르는 ‘쟁론’이라고 부른다.

    쟁론에 관하여 리오타르는 두 문장 사이의 번역 불가능성이란 사라지지 않고, 그것을 초월할 메타적 의미의 언어 일반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문장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떤 것이 지금 여기의 문장으로 입증될 수 없을 때 갈등은 와해되거나 어떤 결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다른 문장을, 다른 침묵을 불러오며 언어의 양상 자체를 거듭 되돌아보게 한다. 지금 이곳에서 어떤 언어가 담론의 장을 규제하고 있는가, 어떤 관용어가 어떤 침묵과 관계하고 있는가. 침묵은 어떻게 일어설 수 있는가.

    김현지와 정지돈, 사적 경험과 공적 글쓰기, 실제 삶과 문학적 재현, 언어의 소유권자와 비소유권자 사이에서 발생한 어떤 사실에 대하여 김현지의 언어와 정지돈의 언어는 ‘문학’에 관한 다른 문법 규칙을 전면화한다. 그리하여 여러 층위의 사실 문제들을 포함하는 동시에 경유하여 다시 애초의 문학에 관한 사실 판단의 문제로 이야기가 되돌아올 때, 서술될 수 있으나 입증될 수 없고 합의될 수 있으나 그 자체로 드러날 수 없는 사실에 대하여 언어를 단지 겹쳐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애초에 그러한 사실이 왜 발생했고 어떻게 발생할 수 있었으며 어떻게 사실 자체를 입증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는가, ‘문학’이라는 사실의 조건 자체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일일 것이다. 그때 이야기는 작가에게 집중된 재현의 윤리나 독자에게 집중된 읽기 및 말하기의 윤리처럼 사실로부터 윤리학의 차원으로 한 걸음 물러서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사실과 관계하여 각자의 작가와 독자 들에게 ‘문학’은 어떤 관용어와 닿아 언어 규칙을 만들어내고 있는 단어인지, 문학의 이름으로 만나고 모이며 담론과 공론의 장을 만들고 또 그 내부를 향해 발화하는 모두에게 ‘문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게 하고 무엇을 말할 수 없게 하는 장치인지, 그렇게 각자가 ‘문학’을 포함하여 쓰고 있는 문장은 무엇인지를 와글와글 되돌아보는 방식으로, 사실의 언어 자체에 자꾸 발 디뎌보는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사실에 관하여서는 언제나 몇 가지의 논점이 있으므로, 사실의 하나로서 문학에 관하여 몇 가지의 논점이 내내, 남아 있으므로.

  • 1)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쟁론』, 진태원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15, p.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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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정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1) : ‘소유’와 ‘주권적 자기’를 질문하며 1. 다시 ‘자기’를 질문하며 일인칭 글쓰기, 에세이, 자문화기술지, 당사자 서사 등 ‘자기’를 중심에 놓는 글쓰기가 주목받아 온지 여러해를 지나고 있고, 최근 또다른 방식으로 논의가 이어질 듯하다.2) 이 글은 그러한 글쓰기의 핵심에 놓일 자기를 다시 질문하고 그것이 어떻게 ‘커먼즈’(commons)로서의 문학의 조건이 될 수 있을지 가늠해보려 한다. 이때 얼핏 자기와 커먼즈라는 말 사이의 아득한 이격(처럼 여겨지는 것)이 떠오를지 모르겠다. 자기라는 말은 ‘나’ ‘1인칭’ 같은 단수적 계열어나 차이를 통해 이해되곤 하고, 커먼즈란 ‘공통장’ ‘공유지’ 같은 번역어가 암시하듯 복수적이고 공통적인 것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루쏘의 『고백록』(1770)이 상기시키듯 자신을 신과 독대하는 개인으로 발견하고 고백하는 일에서 출발한 근대적 존재 인식의 표현양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에 대한 이야기 안에서도 젠더 및 공/사 역학에 따른 위계가 작동해왔음이 이제 대중적으로도 널리 환기되었고, 전통적으로 자서전을 쓸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거나 획득하지 못했던 여성의 글쓰기와 그 수행적 힘이 각별히 조명3)되기도 했다. 또한 최근 에세이물의 당사자 서사가 규범 바깥의 여성 정체성을 실험하며 여성주의적 급진성을 갖는다는 논의4)에서와 같이, 글쓰기의 수행적 힘은 다양한 여성 및 소수자의 가시화와 연동되었다. 한편, 에세이적 글쓰기 일반을 “자아를 일종의 자산으로 생산해내는 장치” 측면에서 조망하고, 이러한 글쓰기의 스펙트럼과 읽기-쓰기의 복잡한 역학 및 형식 문제를 분석하는 논의도 제기된다. 오늘날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자기진술”이 “주체에 대한 진실을 생산해내는 권력을 스스로(재)생산”하는 측면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한영인의 글은 특히 신자유주의 통치술과 개인의 관계를 비롯하여 개인과 자아 등을 둘러싼 복잡함의 근간을 짐작케 한다. 한영인의 논의에서 파생시켜 떠올려보는 장면이지만, 예컨대 당사자가 아님에도 타자를 대신 이야기할 때의 윤리문제는 최근 장르를 불문하고 상식으로 여겨진다. 그 와중에 픽션에서 대상화를 피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가능한가라는 회의가 종종 제기되는가 하면 타자를 모델로 삼는 소설의 종언이 비관적으로 선언되기도 했다.6) 그간 문화예술 창작계에서 당사자(성)의 강조는 ‘당사자만 말할 수 있다’는 방식으로 오인되기도 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서사의 주체를 ‘저자’ 개인으로 환원시키는 좁은 의미의 당사자주의를 우려하는 논의도 오갔다.7) 당사자주의를 넘는 ‘타자와의 관계성’ 혹은 ‘목격-증인’의 자리8)가 강조될 때조차, 그것은 나와 타자의 좁힐 수 없는 차이를 근거로 회의되거나, 진짜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가리는 시시비비로 연결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사자(성)를 둘러싼 논의는 연대가 필요한 자리에서 때로 그것을 더디게 하거나 좌절시켰고, 이런 곤경은 오늘날 ‘나’ ‘자기’에 대한 감각이 무엇에 구속되어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진정한 나를 찾는다’는 식의 익숙한 말은 어쩌면 차이로서 증명되는 나를 갈망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인식은 일상에서 종종 불안정한 것으로 경험된다. 오늘날 기술 상황에서 타자와의 차이를 통해 확인되는 고유한 나에 대한 바람은 점점 더 곤란을 겪는다. 사용자 데이터 기반 서비스를 표방하는 무수한 플랫폼에서도 주체적 행위, 고유성, 독창성 같은 변별자질을 통해 스스로를 해명하기란 요원해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더욱 ‘진정한 나’ ‘진짜 나’를 갈망할 수밖에 없이 세팅된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유와 권리에 대해 조밀해지는 법과 제도가 이러한 이중구속을 강화하는 것도 물론이다. 앞서 적었듯 오늘날 자기서사는 특히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소수자의 존재와 글쓰기를 가시화한 양식의 하나다. 그것은 이 세계 존재를 둘러싼 오랜 위계의 구조를 환기시켰고, 스스로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한 감각을 정치화했으며, 자기 삶의 주권을 표명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자기’는 여전히 개인, 차이, 구획, 정체성, 소유 같은 관념 사이를 공회전하는 측면이 있어왔다. 물론 이것이 현행 세계 속 ‘나’의 지배적 조건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단적으로 대개의 사람들은 어떤 정체성들의 소유자(개인)로 식별되며 인구로 셈해진다. 그러니 정체성을 둘러싼 시민권 투쟁의 즉각적 장소 역시 바로 여기일 수밖에 없다. 정체성에서 출발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 너머를 향해야 한다는 이야기가9)종종 지난하게 여겨지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요컨대 지금 ‘자기’를 둘러싼 이야기와 곤경이 동시에 부상하는 상황 앞에서 ‘나-1인칭-개인-소유’ 등의 계열어 속 자기표상은 불충분하거나 종종 모순적이다. 2. 나는 나를 소유할 수 있는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정체를 가늠하는 감각은 오늘날 존재 인식의 근간을 이룬다. 이때 ‘무엇’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 더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소유’ 개념이다. 오늘날 개인 및 개인주의의 근간에 소유의 원리가 놓여 있다는 사실은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말이 잘 드러내준다. 우선 짚어둘 것은, 여기에서의 소유란 유무형의 재화가 아니라 본래 인간 ‘신체’에 대한 소유를 의미했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신체, 재능의 고유한 소유주로서의 개인이라는 인식에 기초”하는 “자유로운” 존재로 간주되었고, 이때의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바로 이념형으로서의 능동적·자율적 개인에 다름 아니다. 자유는 곧 “소유권을 의미”했고, 그렇기에 소유권의 반대 개념은 탈소유·무소유가 아니라 “타인의 의미지에 대한 종속”으로 간주되었다.10) 의존을 죄악시하고 기피하며 자립한 개인의 능력을 상찬하는 오늘날 지배적 심상의 기원도 여기에서 잠시 짐작해볼 수 있다. 요컨대 소유적 개인주의에서 ‘소유적’이라는 말은 상품과의 관계 이전에 우선은 우리 신체, 그리고 나아가 우리 자신의 노동에 대한 소유를 의미했다. 우리의 신체란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재산”이었고 “완전한 자유의 기준은 자기 노동에 대한 소유권의 보유이며, 그 보유의 조건은 곧 물질적 재산의 소유”11)였다. 이는 강조건대 소유가 곧 내가 나 자신과 맺는 관계를 기초지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서 ‘자아’ 역시 신체에 준거한 획정이 필요해진다. 즉 소유적 개인주의는 자아를 둘러싼 모순이나 모호함을 봉합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체에 근거한 자아 역시 소유의 대상으로 간주되려면 먼저 일종의 객체가 되어야 한다. 신체를 누가 –다시 말해서 내가 – 소유하느냐의 문제 앞에서 자아는 하나의 구획된 것으로, 그리고 관리 가능한 일종의 통합된 것으로 간주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적절한 자아’를 가진 ‘주체’가 재산의 소유자로서 행동할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 즉, 통상 남성·이성애자·백인·비장애인 등으로 간주되어왔음은 강조할 것도 없다. 소유에 기반한 자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특히 2010년대 이후 세계의 여러 변화 앞에서 새삼 부각되고 있는 것 같다.12) 이 세계의 인종·성·장애 여부 등을 둘러싼 정상성 각본에 대해서는 이제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소유’ 개념을 매개로 한 각본이라는 점에 대해 지금 다시 각별히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가진 것’에 따라 온전한 인간인지 아닌지를 셈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곧 오늘날 지배적인 ‘주권적인 자아’(sovereign self)13) 개념을 구성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소수자의 정치적 수행성 논의에서야말로 강한 전제로 놓여 있었음을 기억해두고 싶다. 예컨대 퀴어 이론가이자 정치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2010년대 이후 논의에서 특히 소유적 개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자아 개념을 비판하고 그 너머를 상상하는 관점을 두드러지게 드러내온 점이 의미심장하다. 물론 “주권적, 유아독존적 자아 개념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자아란 이미 관계적인 개념”이라는 그녀의 전제는 오늘날 상호의존적 관계나 타자윤리가 요청되는 자리에서 자주 참조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지닌 정치성을 좀더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녀의 주장이 “소유적 개인주의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소유의 논리 바깥”14)을 고민하며 제출되어 왔음을 환기해야 한다. 그 맥락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논해지는 관계성이나 타자 윤리는, 자유주의 휴머니즘과 그리 충돌하지 않는다. 오늘날 여전히 좁힐 수 없는 차이를 전제하는 당사자 논의의 곤경에도 근본적으로는 다른방식의 소유 혹은 (개인적) 소유 바깥이 상상되지 못하는 감각이 놓여 있는지 모른다. 동일성(정체성)으로부터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차이의 연대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한 오늘날의 많은 논의가 있다. 그런데 그 현장마다 좀더 원리적으로 환기해야 할 대목은 “서로가 서로에게 현전하기 위해서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자기 박탈”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혹은 “자아를 상대에게 넘겨주는 행위”15) 쪽이어야 할지 모르겠다. 나를 내어주는 일 없이 타인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제어하도록 하는 도덕이나 의무가 아니며, 우리는 본래 소유 이전의 존재라는 것. 요컨대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오늘날 제2의 자연이 된 소유의 관념보다 더 오래된 관계적 존재 양태를 발견하고 긍정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소유를 근본적으로 질문하지 않는 관계성이나 커먼즈 논의는 다소 공허한 이상 혹은 도덕적 당위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하지만 소유보다 더 근본적이고 오래된 존재의 원리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때, 관계성의 사유는 설득 문제가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자 필연임이 밝혀진다. 이에 대해 한 편의 소설을 경유하여 좀더 생각해본다. 3.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 : 이주혜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속 ‘일기’에 대해 이주혜의 장편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창비 2023. 이하 이 책에서 인용시 면수만 표기) 속 주인공은 불안, 공황 등으로 치료받는 50대 여성이다. 그는 현재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받은 남편과 가족의 위기로 고통받고 있다. 의사는 치료의 한 방편으로 일기 쓰기를 권하고, 주인공은 어느 글쓰기 교습소의 수업에 참여해 일기를 써나가며 그것을 타인들과 공유한다. 소설의 중요한 장치인 일기는, 일차적으로 의사의 권유를 통해 자기치유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런 설정은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을 회복하며 스스로를 자기 삶의 주인(소유자)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최근 많은 자기 서사가 품고 있는 글쓰기의 수행성과 ‘자기’의 테크놀로지가 서사화된 듯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에 대한 절반의 독해다. 주인공의 일기 안으로 좀더 들어가보자. 소설 속 일기는 주인공의 유년을 회고하는 장치다. 회고되는 시간은 1979년 겨울부터 1980년 초여름이다. 이 시간이 암시하는 바를 한국의 독자는 쉽게 알 수 있지만 그 의미를 전하는 것이 소설의 핵심은 아니다. 일기 속 사건이나 존재는 명료하게 요약하기 어렵다. 어린 주인공의 시점을 통해, 이른바 시대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썩 구별되지 않게 그려진다. 예컨대 한국 현대사의 격변을 암시하는 것들은 아이들을 재우고 어른들끼리 주고받는 비밀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함과 불안으로 묘사된다. 비상계엄령, 데모 등과 같은 시대어는 주인공의 사사로운 일상에 비해 배경으로만 놓여 있다. 하지만 직접 의미화하는 것 이상으로 배경의 구속력은 강하게 전달된다. 이런 효과가 주인공의 일기 속 기록으로부터 발생하고 있음을 우선 확인해둔다. 일기 속 사건과 사건, 장면과 장면 사이는 환유적으로 연결되며 궁극적 의미는 자꾸 미끄러진다. 회고되는 기억도 불안정하다. 아빠의 실종, 낯선 남자의 등장 및 그의 느닷없는 추방 등은 파편적 이미지로만 제시될 뿐 어떤 구체적 의미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이런 서사적 파편과 공백은 얼핏 소설적 개연성의 결함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간 우리가 회고에 기반한 성장서사, 기억서사로부터 어떤 익숙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작품들이 현재 시점에서 과거로 임의로 재구성·편집되는 과정을 노련하게 감추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일기는 그러한 과정을 최대한 지양하고 기억의 파편을 그대로 노출한다. 주인공의 일기에서 부상하는 것은 오히려 기억이 종종 부정교합을 수반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러한 기억주체로서 자기의 불안정함이다. 통상 일기 속 성찰 대상이 될 ‘자기’는 늘 스스로가 소유하는 객체로 전제된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일기는 그 장르의 핵심인 자기를 문제의 장소로 삼는다. 자기는 애초에 불안정하고 픽션적일 수 있음이 우선 소설에 암시되어 있다. 불안정하다는 것은 윤곽이 불분명하다는 의미다. 어떤 소유의 형상으로 대상화될 수 없다는 말이다. 소설 속 일기는 처음에 분명 자기를 질료 삼는 자기치유의 의미를 부여받았지만, 실제 그 서술과정에서는 연루된 존재와 사건과 세계가 부조된다. 주인공과 친구, 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등은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 얽힘(entanglement)으로 이미지화된다. 불안과 같은 정서도 누군가의 것(소유물)이라기보다 그 모두를 관통하고 아우르는 것으로 혼연해 있다.16) 예컨대 “시옷에게 비는 살이 부러진 우산과 젖은 신발을 의미했다. 그 축축함과 막막함은 군모를 깊숙이 눌러쓴 어느 군인이 국방색 우비 위로 길쭉한 소총을 끌어안고 집요하게 비를 맞고 있던 장면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끌어들이기도 했다”(26면)는 대목을 보자. 지금 이 대목에서, 어린 시절 주인공이 싫어했던 비의 경험은 ‘젖은 신발’과 ‘소총을 든 어느 군인’을 매개로 겹쳐지며 그녀의 ‘비’에 대한 기억을 이미지화한다. 또한 이것은 지극히 내밀한 몸의 감각에 대한 기억인 동시에 한 시대의 폭력이 단번에 서사적으로 환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사사롭다고 여겨지는 어린아이의 경험이지만, 거기에는 개체적 몸을 관통하는 어떤 세계가 있다. 이런 서술의 와중에 홀연 인지되는 주인공의 몸의 변용 순간도 흥미롭다. 소설에서 유독 강렬한 정서를 자아내는 대목이다. 주인공은 글쓰기 교실에 서 1980년 “5월의 한복판”(212면)의 일을 낭독하는데, 이는 유년시절 주인공이 품고 있던 비밀이 폭력적으로 억압된 경험에 대한 회고이다. 성인이 된 주인공은 수강생들 앞에서 그 회고의 일기를 읽으며 격렬한 울음을 터뜨린다. 그때까지의 서사 속 긴장은 순간 파열한다. 독자는 이 장면을 심리적 문제가 해결되는 단계로 읽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이것은 심리적·정서적 문제극복의 과정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질적 시공간이 서로 긴장하다가 동시적으로 마주치며 폭발하는 순간에 가깝다. 가령 그녀의 현재 고통은 남편으로 인해 관계가 파괴된 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글쓰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어른들에 의해 좌우되는 아이의 일상과 그 배후에 놓인 가부장제 및 친밀한 폭력의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남자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염원 때문에 그녀가 자신의 성별을 숨긴 채 남성 성별을 수행해야 했던 일이다- 이 드러나자 느닷없이 그녀가 내쫓기는 순간은, 한없이 취약했던 존재가 무참히 상처 입는 순간이다. 그것은 정확히 학교에도 거리에도 총을 든 군인들이 있었던 ‘1980년 봄’ 한복판의 일로 기록된다. 지극히 내밀한 자기의 비밀이 시대의 폭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 장면은 정확히 환기시킨다. 그녀의 뒤늦은 울음에는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구조를 공유하는 여러 시공간의 폭력이 가로지른다. 이 울음 장면은, 어떤 존재(몸)가 독자적인 개체이기 이전에 이미 늘 연루되어 있던 세계와의 교섭 현장이자 그 효과임을 증거하는 것 같다. ‘나’ ‘자기’는 선행되어 있다기보다 사건적으로 출현하고 이내 사라지는 것이다. 이후 주인공의 이야기가 후경화하고 타인들의 이야기가 본격 부상하는 서사 진행도 이를 뒷받침한다. 4부에서는 어린 그녀가 이사한 곳에서 만난 이들, 특히 이웃집 윤수와 그 가족 이야기가 다소 의미심장하게 전개된다. 윤수와의 우정, 이웃집과의 친교는 1980년대 이른바 기층민의 삶을 엿보게 하는 바가 있지만 그것을 기록하는 시선은 바깥에 있지 않고 그 삶 안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소설은 점점 현재 그들의 안부를 묻는 이야기로 이행한다. 그녀, 즉 1인칭 주인공 ‘나’의 이야기이자 일기 속 ‘시옷’의 이야기는 그 고유함을 버리지 않으면서 점점 한 시대의 공기를 ‘감각’시키는 이야기가 되어간다. 현재 ‘나’의 상처가 추동했을 글쓰기는 타인과의 관계가 지지해 온 시간을 회고하는 서사로 이행한다. ‘나’의 윤곽은 주인공의 일기뿐 아니라 소설 전체에서도 점점 흐려진다. 이들의 삶은 각자의 것으로 소유,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 속에서 의미화된다. 즉 기존에 일기라는 1인칭 글쓰기가 담보하던 ‘나’ ‘자기’는 이 소설에서 어떤 기원이나 본질 혹은 증명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삶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메커니즘을 거쳐 의미화되는지 일기 쓰는 주인공이 체현한다. 주인공의 일기에 적히는 것은 할머니의 독경 소리, 늘 복잡한 감정을 품게 했던 옆집 친구 애니, 아버지의 빈자리 등 타인과 얽혀 있는 기억이며, 또한 이 소설에 그려지는 것은 그 일기를 함께 읽어주는 현재의 무심하면서 다정한 동료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소설은, 자기를 쓰는 일이 곧 타자를 쓰는 일임을 보여준다. 좀더 적극적으로 의미부여를 한다면 이것은 나/너와 같은 개체적 몸을 초과하는, 혹은 그런 몸으로 분화하기 이전의(metastable)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읽은 일기 안팎의 ‘나’들은 개체들간의 상호적인(inter) 관계라기보다, 식별되지 않는 내적으로(intra) 얽힌 존재의 이미지에 가깝다. 즉 오롯한 자기, 내면 같은 표상이 본래 품고 있었을 모호함과 균열뿐 아니라, 그러한 자기와 내면을 구성시키는 무수한 연루됨 자체가 곧 ‘나’임을 암시하는 것이 이 소설 속 일기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감각으로 미처 식별되지 않는 무수한 사물도 나를 관통하고 구성할 것이다. 앞서 인용한 비 내리는 장면의 회고에서처럼 단일하게 통합된 자기가 아니라, 오히려 이질적 존재와 사건들, 시공간의 비인격적 웅성거림 속에서 불현듯 확인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각별히 기억해야 할 ‘자기’의 한 의미일지 모른다. 주인공이 일기 속 자신을 내내 ‘시옷’이라는 기호로 표기하고 지칭하는 것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일기를 쓰는 주인공은 “‘나는’이라고 시작했더니 한줄도 쓸 수가 없었”(32면)다는 이유에서 시옷이라는 이름을 쓴다. 시옷은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처럼”(33면) 생겼다는 이유에서 선택되었는데, 이것이 서로를 지탱하는 ‘사람 인(人)’의 형상을 염두에 둔 작명임도 분명하다.17) 소설은 이렇게 주인공을 통해 처음부터 ‘나’라는 주어의 함의와 무게를 암시해두었으며, ‘나’의 시선이 독점해온 1인칭의 세계를 내어 주고 3인칭적 재현을 전경화한다. 이 소설을 두고 “‘나’의 쓰기가 스스로의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다면성을 서술하는 일로도 이어진다”18)는 평가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적확하다. 소설 속 ‘나’는 명료한 윤곽과 표상을 갖는 존재이기 이전에, 내내 유동하고 있는 어떤 관계 자체이다. 이런 메커니즘을 생각할 때 오늘날 항간에서 말하는 타자 윤리는,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존재의 원리이자 필연이다. 소유 너머 자기를 상상하는 일과, 연루됨 자체를 사유하는 것은 불가분이다. 4. 소유와 주권적 자기 너머, 혹은 소설적 커먼즈의 상상 지금까지 읽은 이주혜의 지금까지 읽은 이주혜의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속 ‘자기’는 ‘내 삶은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식의 당사자성이나 자기인식과는 거리가 있다. 주권의 문제는 늘 경계 획정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19) 주권은 항상 권력 관계와 지배를 표시한다. 국가뿐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내밀한 자아 역시 소유를 위해 구획되고 객체처럼 간주된다. 그런데 이주혜 소설은 ‘나’ ‘자기’가 그런 객체이기 이전에 이미 늘 타자와 연루되어 있는 준안정적인 지대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지금 주권적 자기 너머를 상상한다는 일은 어떤 구획과 소유와 권리 이전의 지대, 일종의 잠재성을 사유하는 일과 관련된다. 나아가 그러한 ‘자기’를 일종의 관계성의 장소로 전유하는 일이 요청된다. 어떤 존재가 배타적으로 점유한 예컨대 정체성을 본질처럼 인종화하는 통치술과 겨룰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독점될 수 없는 세계의 속성을 생각할 때, 미학과 윤리는 불가분이 아니라는 점도 다시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 물론 유의할 점은, 이것이 오늘날 세계의 역학과 실제를 없는 것처럼 여기며 소유로부터의 이탈을 낭만적으로 예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탈소유에 대한 논의는 자칫, 누군가의 땅을 무주지나 황무지로 간주하여 점유해온 정착민 식민주의의 역사를 정당화하기도 쉽다. 또한 무엇이든 가능한 자아를 낭만화하는 자유주의적 모토로 전유되기도 쉽다. 앞서 버틀러의 논의에서처럼 탈소유라는 말이 품고 있는 폭력적 ‘박탈’은 지금도 이 세계에서 늘 진행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핀 ‘나’ ‘자기’는 분명 소유 이전의 양태를 환기시킨다. 모든 사물에 소유의 권리가 부여되어온 역사에도 불구하고, 본래 경계를 획정할 수도 독점할 수도 없는 ‘나’가 있다. 근대적 주권 및 소유적 개인주의와 불가분이었던 자기를 이렇게 다르게 사유해볼 때, 커먼즈로서의 문학에 대해서도 약간의 첨언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언어, 감정, 사유, 땅, 하늘 등 나열할 수 없는 많은 것이 본래 누군가에게 배타적으로 귀속될 수 없는 커먼즈임은 부연할 것도 없다. 하지만 언어, 감정, 사유 등에 일종의 형식을 부여한 문학에 대해서 커먼즈의 사유를 진척시키는 데에는 모종의 어려움이 있다. 예컨대 ‘서명(署名)’으로 상징되는 오리지널리티와 소유의 감각이 성립시킨 (근대)문학 관념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오늘날 문학을 둘러싸고 조밀해지는 법과 제도는 소유의 감각을 더욱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소유와 주권적 자기의 구조로부터 도피하지 않으면서 부당함을 문제 삼고, 동시에 그 구조 너머를 상상하는 일은 지난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커먼즈로서의 문학 논의에서 계속 질문해야 할 고리가 바로 이 소유의 원리임도 분명하다. 물론 많은 이들이 지적해왔듯, 커먼즈는 단지 주어져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커먼즈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것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 함께 만들어가야 할(commoning) 것이고,20) 때로는 투쟁의 산물21)이다. 그렇기에 현행 세계의 역학과 다양한 폭력을 문제 삼는 것은 곧 커먼즈의 주제이기도 하다. 소유를 자명하게 여기는 감각은 커먼즈의 사유를 자꾸 멈춰 세운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러한 이중구속적 상황에서 쉽게 몸을 빼거나 멈춰서는 안 된다. 한 문학연구자는, 새로운 소유권의 형태로 도래한 근대 일본문학 초창기 풍경을 조망하면서 거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다양한 커먼즈의 계기가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는 소유를 질문하는 불안정한 지대를 포함하여 “작가, 허구의 인물, 독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과정”으로부터 커먼즈의 가능성을 타진한다.22) 그는 질문한다. 어느 소설 속 ‘이름 없는 고양이’가 발화하는 그 발언권은 (고양이는 인간도 아니고 이름도 없다는 의미에서) 법적으로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인물의 광기는, (통합되고 관리되는 자아를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소유의 주체적 위치에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지. 또는 한 여성의 소유를 둘러싼 한 지식인의 죄책감은 (가부장제 속 여성의 위치와 마찬가지로) 식민지를 폭력적으로 소유하는 당시 제국의 죄책감을 의미한 것 아닐지 등.23) 앞서 이주혜 소설에서 읽은 ‘나’ 역시 심지어 자기에게조차 독점될 수 없고, 늘 무언가와 연루되어 있는 일종의 준안정적인 지대임을 확인했다. 지금 커먼즈의 조건은 바로 이 불안정함, 혹은 경험되지 않은 잠재성 자체로부터 상상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바로 이 지대에서 바로 (방금 인용한 문장에서처럼) ‘독자, 인물, 작가’가 만나는 것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읽는 나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의 뒤표지에는 소설가 하성란의 이런 감상이 적혀 있다. “누구 한명의 것일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나’ 들의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서, 소설 속 그들의 이야기가 곧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나’들의 이야기가 된다”는 대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앞서 강조한 ‘자기박탈’ ‘자기를 내어주는 일’을 겹쳐 생각하고 싶다. 예를 들어, 우리는 허구로서의 이야기에서 나에 가까운 무언가를 만나고 공감한다. 하지만 때로는 그 이야기 속에서 자기를 잃고 헤매기도 한다. 이야기 속에서 나는 이미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 -예컨대 경험, 정체성- 에 대해 응답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나를 내어주는 장소가 곧 이야기이기도 하다. 앞서 이주혜 소설 속 주인공이 일기라는 형식 속에서 1인칭(나)을 내어 주면서 자기를 쓰는 일이 곧 타인을 쓰는 일이 되었음을 떠올려보자. 동시에 그때, 일기와 픽션을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을 떠올려보자(소설 속 한 인물은 그녀의 일기가 소설 같다고 말하고, 그녀는 자신의 글이 픽션이 아니라고 말한다). 일기가 타인들의 세계로 이행하는 서사 속에서 소유에 기반하는 주권적 자기의 형상은 교란된다. 그리고 픽션과 일기라는 형식과 관련해서도 장르적 구획 이전의 불명료한 지대가 부상된다. 자기를 내어주면서 도달한 곳이 타인의 세계와 더불어 소설적 장소라는 사실은 ‘소설적 커먼즈’ 의 또다른 의미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강조하건대 소유를 질문할 때,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잠재성의 지대가 열린다. 그것은 주권적 자기 너머의 연루됨 자체로 우리를 데려간다. 쓰는 이만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 아니다. 독자, 소비자, 유저 등 특정 정체성의 이름으로 환원되기 이전의 나의 몸들이 거기에서 스스로를 잃고/잊고/헤매도록(dispossession) 초대받는다. 익숙한 회로 속에서 쉽게 공감하는 것만 ‘함께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스스로(라고 여겨지는 것)를 내어주는 일에 초대받고, 그 낯섦에 기꺼이 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지금 커먼즈로서의 문학에 보태볼 또 하나의 의미일 수 있지 않을까. 1) 계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제207호)에 게재된 동명의 글을 수정 보완했지만, 이에 대한 좀더 최근의 상세한 내용은 「말하는 입에서 듣는 귀까지 : ‘자기서사’ 문제틀의 재구성」(김미지 외, 『젠더』, 문학과지성사, 2025)에서 전개했다. 2) 이른바 ‘자기서사’가 2016~17년 광장, 페미니즘 대중화의 시간을 통과하며 특히 부상했다는 점이 2025년 2월 시점에서 다시 의미심장하게 환기된다. 12·3 사태 이후 여의도, 광화문, 남태령, 한 강진 광장에서의 ‘자유발언’ 및 이후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다양한 그룹(시민활동가, 소수정당, 연구자 등)의 집담회, 토론회 등에서 자유발언이 이어지고 있고 그 발언 속 ‘개인’과 ‘연대’의 형식에 많은 이가 주목하고 있다. 광장의 경험은 늘 말을 바꾸어왔고, 말은 늘 광장을 바꾸어왔다. 지금의 분위기는 또 한번 자기를 발화하는 형식에 대한 논의가 재점화될 것을 예고하는 듯하다. 이 글에서 ‘자기’는 self의 번역어이다. 부분적으로 ‘자아’로 읽는 것이 자연스러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기’로 표기했다. 3) 장영은,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민음사, 2018 참조. 4) 김은하, 「젊고 아픈/미친 여자들과 자기 이론으로서의 글쓰기」, 『여성문학연구』61호, 2024 참조. 5) 한영인, 「자아 생산 장치로서의 에세이」,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215, 217면. 6) 日比嘉高, 『プライヴァシーの誕生』, 新曜社 2020, 254면 참조. 7) 오혜진, 「지금 한국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1)」, 『문학과사회-하이픈』, 2018년 겨울호. 8) 오카 마리,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옮김, 현암사 2016. ‘목격-증인 되기’에 대해서는 8장을 참조할 수 있다. 9) 가야트리 스피박, 『스피박의 대담』(새럼 하라쉼 엮음, 이경순 옮김, 갈무리, 2006, 254쪽),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어셈블리』(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참조. 10) C. B. 맥퍼슨,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 이유동 옮김, 인간사랑 1991, 25-26, 206면. 11) 같은 책, 212면. 12) 특히 2010년대 이후 영어권의 각 분과마다 신자유주의 지배구조 분석과 관련해 ‘소유적 개인주의 50년 후’라는 문제의식이 널리 공유되어왔음을 참조해본다. 13)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김응산 옮김, 자음과모음 2016 참조. 이 책에서 두 대담자는, 오늘날 세계가 어떻게 주체의 구성적 상호의존성을 차단하고 정착민 식민 체계에서 박탈·탈소유(dispossession)를 역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넘어설 원리가 무엇일지 논의한다. 14) 같은 책, 26-27, 338면. 15) 같은 책, 337면. 16) 여기에서 물리적으로 구획된 몸을 넘는 정동적인 경험과 연결신체(assemblage)의 주제를 소환할 수도 있고, 이런 이유에서 이 소설은 ‘5월 광주 소설’의 새로운 방법을 가늠케도 한다.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축자적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개인적인 것’의 의미를 재구축하는 과정, 그리고 ‘자기’라는 내적 표상이 시간의 축적 속에서 구축되는 과정을 확인하는 것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어떤 사건에 대한 당사자와 비당사자 문제, 이른바 경험 없는 세대의 ‘포스트 기억 장치’ 문제에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17) 물론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시옷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을 이야기하며 그에 대해 “사과하고” “말을 걸고 싶었”으며 “이름을 불러주고”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347면)고 적어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작가의 사후적 소회와 별개로 분명 ‘나’ 혹은 어떤 고유명을 피하는 설정 속에서 오히려 자기=나를 둘러싼 존재의 원리를 근원적으로 보여준다. 18) 김다솔, 「붉은 언어로부터 무한히 탄생하는 세계」, 『문학동네』 2024년 봄호 56면. 19) 우카이 사토시, 『주권의 너머에서』, 신지영 옮김, 그린비 2010, 379면 참조. 20) 데이비드 볼리어,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배수현 옮김, 갈무리 2015 참조. 21) Silvia Federici, Re-enchanting the World, PM Press 2018, 87면 참조. 22) Michael K. Bourdaghs, A Fictional Commons, Duke University Press 2021, 11, 23면. 23) Michael K. Bourdaghs, 같은 책 2~4부 참조.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 「마음」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계간 창작과비평 김미정 자기서사커먼즈자기소유주권소유적 개인주의 2025
박동억 시적인 미래에 대하여 ―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2

시적인 미래에 대하여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2 1) 박동억 1. 미래 상실 현대시에는 미래를 그려낼 가능성이 남아있을까. 이것이 송현지 평론가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격월평을 읽으며 떠올렸던 질문이었고, 이 글의 저자 또한 그러한 물음 속에서 동시대의 시를 살핀 뒤 조심스럽게 해답을 구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송현지는 어떤 찬사나 비판도 유보한 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이제 ‘미래’는 더 이상 내가 알던 멀고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바로 다음 시간. 현재와 ‘1인치 정도’ 다른 자리와 높이에 머무르는 시간.”2) 이는 우리 시대의 시에서 구체적 생활에 기대어 미래가 표현되고 있음을 해설하는 내용이지만 곱씹어볼수록 오히려 현대시가 내포한 문제를 암시하는 듯한 문장이기도 하다. 냉소적으로 읽는다면, 이것은 현대시에서 그려낸 ‘미래’가 자연재해나 사회의 변혁과는 거대한 사건과는 무관한 다락방에서 일어나는 사건, 아니면 고작 생활 반경의 ‘1인치 정도’ 둘레에서 일어나는 몽상에 지나지 않다는 진단처럼 들린다. 다시 묻자. 누군가는 사이보그와의 공존을 꿈꾸고 누군가는 화성 개척을 꿈꾸는 이 시대에 시인은 어떤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수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통찰했듯, 사람은 시간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없고 단지 물질의 움직임으로부터 유추할 뿐이다. 한편 시인은 물질의 운동이 아닌 마음의 운동을 통해 세상을 통찰하는 길을 택한 자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난 수백 년간 마음의 변혁을 꿈꾸며 때론 시대의 선구자를, 때론 사회의 혁명가를, 때론 세계의 카나리아를 자처해 왔다. 그러나 동시대의 시가 사람의 마음을 ‘1인치 정도’ 움직이는 데 그친다면, 우리는 차라리 이 시대의 시인은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즉 주어진 인간성의 파수자를 자처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미래에 대해 상상하기를 포기하는 자세가 아닐까. 어제처럼 직장에 출퇴근하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들여다보다가 잠이 들기를 반복하는 것이 미래라면, 이제 더 이상 시인과 생활인의 삶을 구분할 수 없다면, 결국 시인은 수많은 현대인처럼 다 계획되어 있어서 이미 진부해져 버린 미래로 향해가는 셈이다. 더 이상 지평선 너머로 향하지 않는 두 눈이 있다. 매번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길을 산책한다. 그렇게 현대시는 미래 상실을 앓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것만 같다. 나는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읽는다. 혁명 후에 쓰인 자연의 성난 풍경 또한 읽는다. 그것은 나의 일. 그렇게 읽던 책을 덮으니 하루가 끝났다. 하루가 끝나도 뉴스는 멈추지 않고,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있고, 일렁이고, 나는 늙고, 다시 책 앞에 앉는다. 창을 열자 빛나는 칼을 삼킨 마술사처럼, 겨울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안은 알 수 없는 백색 진동과 고요로 뒤섞인다. 창을 닫아도, 난폭하고 날카로운 겨울은 내게 바짝 붙어서 있다. 떤다. 이 책이 얼기 전에 나머지를 읽어야 한다. 손이 떤다. 다 읽어야지만, 이 긴 하루가 끝날 것이다. 떠올린다. 풀이 눕는다. 하지만 어떤 풀은 죽고, 어떤 풀은 흔들리고, 어떤 풀은 죽은지도 모르고 여전히 파랗게 일렁이겠지. 떤다. 수영. 나는 저 풀들을 넘어, 죽은 수영의 나이를 넘어, 자꾸만 죽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나이가 되었구나. 내 마음에 살아남은 이가 없는 나이가 되었구나 생각하고 떠올리는 사이, 겨울의 차고 희디흰 장막이 책을 덮는다. 그 위에 손을 올린다. 손이 굽는다. 생활이 나를 세차게 때리고, 모든 약속이 깨져버렸을 때도,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 검은 물속에 잠겼을 때도 버리지 않았던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 마음도 굽는다. 수영. 달처럼 차고 날카로운 이것을 나는 읽을 수 있을까. 떤다. 굽은 마음과 손안에는 겨울이 숲을 무너트리는 그 시절의 소리만 가득하다. 그 시절, 몇몇 죽은 자들은 여전히 공장 여기저기를 배회하곤 했다. 김안, 「김수영 전집」 부분,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차라리 김안 시인은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의 회고에는 불안과 가책에 깃들어 있다. ‘해방’과 ‘혁명’이라는 단어를 심장으로 삼았던 시대가 있다. 시인은 김수영 전집을 읽으며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떠올린다. 그러나 시인은 다음과 같은 사실 또한 확신하고 있다. 김수영의 뜨거운 정신은 이제 차가운 ‘책’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혁명의 시간은 이제 기록일 뿐이고, 자신 또한 저 광장이 아니라 이 방안에서 긴 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이 세상의 계절은 “날카로운 겨울”일 수밖에 없다. 이때 겨울은 이젠 무색해진 과거를 뜻하고, 그 겨울을 칼날처럼 느끼는 시인의 마음은 수영의 정신을 온몸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가책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김수영 전집에 ‘손’을 올리는 행위는 하나의 제의에 가깝다.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라는 시구는 곧 김수영을 향한 추모, 그 혁명 정신이 돌보아야 했던 공장 노동자를 향한 추모, 마지막으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던 시인의 능력을 향한 추모를 뜻한다. 추모는 현실의 맥락에서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이지만 마음의 맥락에서는 누군가 욕망했던 것을 뒤따라 욕망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진정으로 향수되는 것은 수영도, 공장 노동자도 아니라 그들의 각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뜻을 품을 수 있었던 인간은 어디로 갔는가. 시인에게 시집을 펼치는 일이 제의와 같다는 말은 곧 추모가 마음을 보듬고 치유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작품에서 마음은 ‘굽는다’. 죽은 자는 세상을 ‘배회한다’. 근본적으로 이 시에서 찾아헤매는 것은 마음을 빗겨놓는 우회로이다. 현재를 여실히 살아낼 수도 없고, 미래를 꿈꿀 수도 없는 시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과거라는 우회로이다. 그것은 앞으로 살아내야 할 시간에 응답하는 김안 시인의 방식이다. 마음의 운동 혹은 변화가 곧 문학적인 시간의 본질이라면, 시적인 미래는 반드시 물리적인 미래를 전제하지 않는다. 김안 시인에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 당신의 빛 바랜 욕망에 응답하려 할 때 사람은 아직 실현하지 못했던 삶의 방식을 재현한다. 2. 극복할 수 없는 것에 터 잡기 ‘시간은 변화’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테제를 조금 더 문학적 어휘로 옮긴다면 문학적 시간의 본질은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 문학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방식이다. 성숙의 실마리는 반드시 미지의 탐구로만 획득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잊었던 과거로부터 발굴될 수도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현대시의 미래 상실은 곧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거나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잃은 자의 징후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섬세하게 분별할 것은 현재를 ‘벽’으로 느끼는 목소리와 현재에 자족한 자의 목소리는 근본적으로 상반된다는 사실이다. 김안 시인은 미래를 직설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음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미래를 소망하게끔 한다. 이제 동시대 문학과 문학적 시간에 대한 이해를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고자 한다.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장 단순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시간은 성숙(변화)이다. 그런데 생각해 볼 것은 이 세상에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두 손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듯 마음으로 이룰 수 있는 것 또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떠올려 보면, 근대의 위대한 철학자들 또한 그들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보다 그 무엇인가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절망을 깊이 사색했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것은 결코 바꿀 수 없다’라는 인식이 시대마다 달랐다는 점이다. 18세기 중엽 루소는 『에밀』을 집필하면서 자연은 절대 극복할 수 없으니 사람과 도구를 자연에 적응할 수 있게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20세기의 프로이트는 말년 동안 인류가 문명을 통해 자연을 극복했지만,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타인과 더불어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난제로 여겼다. 루소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었고, 프로이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이웃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우리에게 불변하는 사실은 무엇일까. 심심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해 여름 우리는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함께 보고 넷플릭스를 온종일 틀어 놓았다. 창밖에서 사람들은 노잡이의 얼굴을 하고 가히 영웅적으로 걸어다녔다. 심심해서 창밖의 사람들에게 뛰어들 수도 있을 것 같지. 사무라이의 칼을 횡으로 쥐게 한 다음 전속력을 달려들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렇지만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 그해 여름 우리는 배달 음식을 주문하고 우리는 나란히 누워 죽고사는 이야기를 지속하였다. 이왕 죽을 거라면 뚱뚱해져서죽고 싶어. 피자 한 판을 겹쳐서 먹다가 코로 치즈를 질질 흘리면서. 이왕 태어날 거라면 결코 끝나지 않을 성대한 파티를 시작합니다. 주최자가 강단에 서서 연설을 시작할 때, 샹들리에가 되어 모두를 다치게 하고 싶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혀에 틀어박혀서……. 검은 양념이 묻은 나무 젓가락을 씹으며 네가 말한다. 삽십 초에 한 번씩 유성이 떨어지고 있다. 어째서 우리가 가진 건 절망조차 가짜일까. 위대한 화가의 삶과 죽음을 다룬 애니메이션이 상영 중이고.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처럼. 그해 여름, 나는 망친 그림 속에 너를 두고 빠져나왔고 그림 속에서 너는 나를 그리는 중이다. 안 넘어진다. 가위바위보. 변혜지, 「럼펠스틸스킨」 전문, <현대시> 2025년 2월호 이 작품의 주조는 무엇인가. 작품 전반에서 분노와 장난기가 맴돈다는 것은 쉽게 감지할 수 있겠으나 더 깊게 자리하는 것이 세계에 대한 체념임을 읽어내야 한다. 분노에만 집중한다면 자칫 이 작품의 주제를 인간에 대한 혐오나 불신으로 오인할 수 있겠다. 분명 화자는 창밖의 사람에게 사무라이처럼 칼을 휘두르는 상상을 하고, 파티장의 샹들리에가 추락하듯 사람들을 다치게 만드는 상상도 한다. 여기에는 타인에 대한 냉소, 특히 인간을 장난감과 같은 대상으로 취급하는 냉소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 한편 제목은 유희성을 강화하는데, 독일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요정인 ‘럼펠스틸스킨’을 제목으로 택했지만, 내용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타당하지 않은 분노와 무의미한 유희성을 감지할 수 있는데, 그 두 정조의 뿌리에 놓인 것은 삶에 대한 체념으로 보인다.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라는 시구가 암시하는 바는 명백한데, 그것은 타인뿐만 아니라 ‘나의 삶’도 헛것이라는 인식이다. 내 생활은 가짜이고, 내 마음속 절망조차 가짜라는 진술 또한 뒤따른다. 결국 타자에 대한 공격성의 뿌리에는 바로 자기 부정이 놓인 셈이다. 근본적으로 부정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이 시의 내용을 물음으로 바꿀 수 있겠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란 의미 있는 것일까. 나와 저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든 이 세상은 무사하지 않을까. 내 존재가 행복하든 절망에 빠지든 창밖의 거리는 안녕하지 않을까. 자포자기하듯, 이 시의 화자는 우리가 ‘잡놈’에 지나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 이후 ‘나’와 타인을 아무렇게나 대한다. 이 작품의 주제는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부조리 문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처럼, 변혜지 시인은 충동적으로 살인을 꿈꾸는 화자를 등장시킨다. 하지만 이 작품에 묘사되는 폭력성의 크기는 그 반대급부로서 얼마나 이 현실에 자신이 얽매여 있다고 느끼는지를 투영한다. 세계가 이상해진 지 오래되었다. 선후관계는 도미노 같다. 쫓다 보면 결국 무너지는, 언젠가는 깔려 죽게 될 그런 일. 책을 팔아 복숭아를 사 왔는데 껍질 새 초파리가 살고 있었다. 똑똑, 나가주면 안 되겠니. 나는 어리니 자신에게 양보하라고 지적받는다. 아직 후숙이 필요한 과정이구나. 이번 여름 복숭아는 노약자석과 비슷한 것 같다고 이해한다. 오늘의 공원은 겨울을 동경한다. 머리카락을 비질하는 미화원과 컷불을 뚫고 들어오는 빛들. 공사 중이죠? 저수지를 만들겠다고 해 흔쾌히 자릴 양보해주었다. 한 그루의 몫. 한 그루의 치아. 피스타치오 밭은 없나? 원하면 있다. 풍경은 성조기가 펄럭이는 곳으로, 줌인. 시간은 달밤, 연인들이 나무 밑에 모여 있다. 딱따구리 없이도 부서지는 캘리포니아의 숲. 거기 뭐해요? 행운이 쪼개지는 소리를 들으려고요. 겸사겸사 입도 맞추고요. 아, 예. 그럼 열심히 하십쇼. 열매 하나 으적으적 씹으며 걷는다. 행운은 텁텁한 맛이구나. 물드는 풀빛의 혀. 나는 키스할 상대 없이 필터에 입을 댄다. 여름의 공원은 저수지를 걸고 소송 중이다. 개들은 사람의 사정 따위는 알바가 아니고 저수지를 사랑한다. 우리에게는 분쟁이 있고 시간이 필요했다. 빨리 만들수록 더 많은 사람이 죽을 뿐이라는 협회의 말에 가능한 천천히 물을 붓겠다고 합의한다. 깨끗하게 청소한다. 저수지가 생긴 어느 미래를 향해 물을 붓고 붓고 또 붓다 보면, 도달하는 가능성에 언젠가 초파리도 죽게 될까?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엄시연, 「가드닝」 전문, <포지션> 2024년 겨울호 엄시연 시인의 시에서도 세계는 부조리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그 어조는 지나치게 담담하고 그것은 어쩌면 마음을 쏟아낼 이유조차 상실한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한다. 첫 행이 암시하듯 세상은 언제든지 사람을 ‘깔려 죽게’ 만들 수 있지만 그 원인이나 결과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불온한 조짐만이 암시될 뿐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움직이고, 무관하게 연인들은 서로 입을 맞추며 사랑을 확인하고 있다. 이 대비보다 의아한 것은 화자의 태도이다. ‘나’는 죽음의 불안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연인들의 사랑에 전염되지 않는다. 그저 이 모든 것을 적당히 거리를 둔 배경 취급하며 복숭아를 먹고, 저수지를 산책하며, 행운을 찾아 헤매면서 그저 생각에 잠길 뿐이다. 죽음을 필연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탈출구란 존재하는 것일까. 시인은 “도달하는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상 작품 안에서는 어떠한 희망도 암시되지 않는다. 사람이든 초파리에게든 암시되는 것은 죽음 뿐이다. 저수지와 차오르는 물의 모티프는 언뜻 기후 온난화와 홍수를 떠올리게 하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변혜지의 시와 엄시연의 시는 똑같이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도, 사람들도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가드닝」의 마지막은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라는 시구로 끝맺는다. 이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현대인의 무력함에 대한 여실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입 맞춤의 상대가 있어도 좋고 없으면 ‘필터’에 한다. 저수지를 놓고 소송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나’와 무관하다. 한 시대의 사색은 그 시대의 불변하는 사실에 터 잡는다. 자연을 극복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부터 루소의 교육론이, 반드시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모색되었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시에서 극복할 수 없는 대상으로 감각되는 것은 세계 그 자체, 무엇보다 세계의 무의미성으로 판단된다. 「럼펠스틸스킨」에서 현실은 영상이나 그림 같은 것, “가정용 플라테타리움”이나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 등으로 비유된다. 이러한 비유는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 새로운 붓질을 할 의지도 지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드닝」에서 세상은 언제든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이상한’ 공간이지만, ‘나’는 그곳에서 야기되는 죽음의 조짐을 방관할 뿐이다.이들의 시에 맴도는 부조리는 다음을 유추하게 한다. 이제 이 세상에서 인간은 무용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세상은 어제처럼 작동할 것이다. 우리는 ‘잡놈’으로 연명할 것이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며 죽어갈 것이다. 이 예정된 미래에서 미래의 쓸모란 무엇일까. 이제 현대는 루소주의자의 사색을 지나, 프로이트주의자의 숙고로부터도 멀어지며, 차츰 인간 존재에 대한 냉소와 부정으로 옮아간다. 극복할 수 없는 것은 과거에는 도구나 사물로 취급했던 것,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체계이다. 인간조차 사물의 지배자가 아니라 이 윤택한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일부인 양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물 없이 사람은 살 수 없다는 것, 현대시는 이 절망에 터 잡아야 할 것이다. 선택지는 많지 않아 보인다. 변혜지와 엄시연의 시는 다음의 ‘도달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새로운 인간은 사물이나 다름없이 행동하는 방식, 즉 자아를 사물화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이 외에 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는 것일까. 단숨에 답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은 찾아 헤매야 하는 새벽이다. 1) 이 글은 <문학과지성사> 2024년 겨울호의 졸고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와 연속성을 지닌다. 2) 송현지, 「제자리 뛰며 나아가는 미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300쪽.

월간 현대문학 박동억 김안변혜지엄시연현대시시간시간성문학적 시간 2025
함윤이 침묵하기/눈감기/세계와 만나기 ― 한강『희랍어 시간』

1. 글자들을 연달아 읽는다. 또는 연이어 쓴다. 복수의 단어나 문장 중 하나를 선택하고 연결한다. 이 일을 거듭하다 보면 글자와 마주 접촉하기 어려워지는/괴로워지는 순간이 온다. 여기서 ‘글자’란 문학으로 불리는 텍스트뿐 아니라, SNS 안에서 빠르게 휘발되는/스크롤되는 게시물이나 우연히 들른 장소의 벽에 부착된/전시된 글 역시 포함한다. 쓰고 읽는 것을 업으로 받아들였다 해도, 매 순간 글자와 공명하기는 어렵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글자를 읽기 어려울 뿐 아니라, 글자 역시 나를 읽지 못해 버벅대는 것 같다. 글자와 내 사이 공간이 흐려지는, 그리하여 우리 사이에 어떤 사건이 제대로 벌어지지 못하는 느낌은 여러모로 불쾌하다. 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신체 자체가 글자를 거부하는 듯한 현상이다. 드물지만 종종 읽는 일 자체가 물리적으로 어려울 때가 있다. 몇 문장을 연달아 따라가는 것만으로 눈이 아프고, 머릿속에 지진이 일며, 눈과 뇌 사이에 놓인 통로가 복잡하게 뒤틀린다. 비슷한 순간이면 겁이 난다. 앞으로도 비슷한 현상이 계속되면 어쩌지? 어떤 글을 읽어도 감정의 동요는커녕, 책 읽는 지루함과 싸우는 일에도 번번이 패배하게 된다면? 글을 읽는 것이 가장 즐겁고 흥미로운 시기는 내 삶에서 오래전에 지나갔다. 이후 오래도록 글을 읽고 쓰는 일은 내게 의무적인(부정적인 뜻만은 아니다) 행위이자 그럼에도 분명히 내게 어떤 의미를 가져오는 일, 그러므로 계속해서 뛰어드는 사건이 되었다. 이 같은 점에선 걷거나 헤엄치는 행위와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길 위나 물속에 뛰어들기 전에는 매번 번거롭고 피로하며, 직접 움직이는 순간도 썩 신나진 않지만, 행위를 끝낼 즈음에는 매번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삶을 구성하며 또한 지탱하고 있다고. 따라서 글자를 읽는 것이 내게 아무 반응도 불러일으키지 않거나, 더 나아가 도무지 불가능한 행위처럼 느껴질 때면 나는 슬그머니 두려워졌다. 이것 없이 살아갈 결심을 여러 번 반복했어도, 이 일 없이 살아가는 미래는 여전히 흉하게 느껴진다. 앞으로도 글과 내가 맞부딪히지 못한다면…… 우리 사이에 어떤 칼/스파크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그러나 근래 읽은 한강의 『희랍어 시간』은 이같은 나의 섣부른 고민이나 두려움, 지루함 등을 금세 허물었다. 더불어 내 안에 놓인 줄도 몰랐던 여러 천장과 기둥 그리고 바닥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2. 한국어로 책을 읽게 된 이후, 그리고 ‘한국문학’의 어슴푸레한 윤곽을 조금씩 접하기 시작한 이후, 근래처럼 한 작가의 이름이 여러 플랫폼에서 오르내리고 또 화제가 된 적은 없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그토록 큰일이었으며, 다양한 시사점을 갖고 우리 주변을 휘감았다. 나는 독자·편집자·작가를 비롯한 주변 ‘문학인’들의 SNS에 수없이 오르내리는 한강 작가와 책의 사진을, 작가의 인터뷰나 낭독 영상이 담긴 뉴스를, 그의 소설이 전하는 역사/참사를 겪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멀거니 지켜보았다. 그의 수상 소감이 각종 글에 인용되어 퍼져나가는 모습 역시 보았다. 몹시 많은 글자였다. 각 글자가 내 안에 불러일으키는 울림도 분명 있었으나, 그 울림의 형태를 살펴보기도 전에 또 다른 글이 밀려와 제대로 소화할 수 없었다. 나는 여태 읽지 못한 그의 책 한 권과 독대하는 방식으로 이 위기를 거쳐나가고자 마음먹었다. 하나 책장을 펼친 후, 나는 몇 번이고 독서를 멈춰야 했다. 문장들이 쌓일수록 숨이 막혔고 종래에는 몸 안쪽 어딘가가 허물어졌다. 한강 작가의 다른 작품보다 ‘덜 괴로운/어두운’ 책이라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이 책은 내가 그간 읽은 한강 작가의 다른 소설과 시, 산문만큼이나 괴로웠다. 혹은 그보다 더욱 힘겨웠다. 『희랍어 시간』의 두 화자는 어느 날 말을 잃은 ‘그녀’와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그’다. 이들의 이야기는 각기 특수한 삶의 맥락에 놓인 두 개인의 몹시 사적인, 개별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타자를 또 세계를 마주한 존재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보편적/거시적인 혼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직 세계와 나 사이에 칼이 놓이기 이전, 그리하여 세계의 입술과 눈꺼풀을 거침없이 만지던 짧은 유년기가 끝나면 삶은 도리 없이 복잡해진다/부풀어오른다. 내가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타인의 신체처럼, 작동 방식을 전혀 알 수 없는 괴물/기계의 몸처럼. 언어도 그 변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상적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마음을 털어놓다가도 문득 미시감을 느낀다. 내가 쓰는 언어 하나하나가 지닌 밀도가 문득 실감나고, 그것들이 어긋나며 생기는 폭발이 보인다. 멀미하지 않으려면 언어의 밀도를 아예 모른 척하거 나, 폭발에 무뎌져야 한다. 이는 이미지/형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를 보는 것, 그리하여 인지하는 행위는 간혹 그 자체로 칼이 된다. 내가 방금 찔린 자국을 이해하기도 전에 또 다른 침범이 시작된다. 세계 속에서 무엇이 넘쳐흐르는 게 아니라, 세계 자체가 넘쳐흐른다. 『희랍어 시간』은 이 홍수에서 침묵하거나 눈 감은 이들을 묘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침묵하거나 눈 감지 않는 방법을 고민한다. 그 시작점은 고요와 어둠을 그저 부재로만 묘사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점차 어두워지는 세계 속에서 사랑하는/사랑과 관계된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더듬고, 그녀는 자신의 침묵을 진단하고자 하는 의사에게 거듭 말한다/적는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11쪽) 3. 말을 잃고 빛을 잃어가는 두 인물의 손안에 희랍어가 있다. 낯설고 오래된 언어. 수동태와 능동태 대신 재귀적으로 주어 자신을 향하는 제3의 태를 지닌 말. “체계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 극도로 정교하고 복잡한 규칙들”(26쪽)을 갖춘 채 쓰이던 언어는 두 사람 사이에서 서로 다른 이미지와 소리로 오간다. 희랍어의 중간태/재귀태는 문맥에 따라 주어가 동작에 참여하는지, 혹은 동작이 주어에 가해지는지 등의 여부를 표현한다. 상호관계를 나타내는 문법 형식처럼, 희랍어를 사이에 둔 그녀/그는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화해할 수 없는 세계와 날로 더해가는 공포 속에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말을 걸거나, 손바닥에 느리게 글자를 적어가는 방법을 터득한다.『희랍어 시간』은 망가진 세계를 복원하거나 잃어버린 것을 제자리로 돌려두지 않는다. 다만 무너진 자리에서/눈 감거나 침묵한 자리에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가령 끝없이 어긋나는 접촉, 어느 것 하나 선택하지 못하더라도 계속하여 이어지는 언어 같은 것. 다만 이 소설과 독대한 이후 무너진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발견했는지는 아직 말하기 어렵다. 다만 그것이 괴로운/외로운 경험만이 아니었음은 확신할 수 있다.

격월간 악스트 함윤이 한강한국소설희랍어시간문학문학동네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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