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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청색종이 | 2024년 겨울호(제14호)

혼자 짓는 시-뜨기 : 남지은, 『그림 없는 그림책』 (문학동네, 2024)

최진석 문학평론

『건의 시학. 감응하는 시와 예술』(도서출판b, 2022) 『사건과 형식. 소설과 비평, 반시대적 글쓰기』(그린비, 2022) 『불가능성의 인문학. 휴머니즘 이후의 문화와 정치』(문학동네, 2020) 『감응의 정치학. 코뮨주의와 혁명』(그린비, 2019) 『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 미하일 바흐친과 생성의 사유』(그린비, 2017) 등을 썼고,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자음과모음, 2013) 『해체와 파괴. 현대철학자들과의 대담』(그린비, 2009) 등을 옮겼다.

  대개 그림책은 아이들을 위한 책으로 상정된다. 아직 문해력이 높지 못한, 저 미숙한 존재들을 위해 꾸며진 작고 말랑말랑한 그림의 세계. 하지만 저 부드럽고 연약한 세계에 무엇이 파묻혀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아니, 기억하지 못한다. 문자의 논리에 너무나 길들여진 채, 추상과 합리에 장악된 채 우리는 그림에서 그림으로 이어지는 구체적 이미지의 감각을 까마득히 잊어 버렸다. 점, 선, 면으로 만들어진 형상이 그림의 전부는 아니다. 추상과 합리에 맹종하는 정신이 떠올리지 못하는 잠재된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그림 없는 그림책’은 단순히 그림이 없는 책이 아니다. 그림과 그림을 잇는, 문자의 질서로는 환원되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 정합적인 논리 이면의 세계를 가리킨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을 이미 ‘시’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남지은의 『그림 없는 그림책』은 역설적인 제목을 품고 있다. 제목의 출처가 된 안데르센이 쓴 동명의 동화집도 하나의 힌트가 되겠지만, 이 역설적인 제목은 우리가 갖는 통상의 논리 바깥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 그림책을 읽고 즐기던 아동기의 기억은 어른이 된 현재 시점에서 상기된 것이며, 따라서 성인의 논리와 사회의 질서에 따라 특정하게 구축된 서사에 가깝다. 지금의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거나, 좋든 나쁘든 현재를 설명하기 위한, 어른의 시점으로부터 역산하여 구성된 세계가 그것이다. 어릴 적에는 영문 모르던 것을 어른이 되고 나서 깨닫는다는 통념은, 실상 어른의 논리와 질서를 과거에 투사한 결과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어른의 시점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의 억압과 순응을 받아들인 시점으로 수렴되지 않는 세계, 앞뒤 연관 없이 기억 속에 단편적으로 붙박여 버린 사건의 기억을 떠올려 보라는 것이 이 시집이 던지는 질문이다.


우린 열한번째 손가락
어쩌면 신이 떨어낸 모래 알갱이
뻥 뚫린 시간 속으로 튕겨진

개와 어린이의 영혼은 공터만 보면 뛰쳐나가도록 설계되었어
넓으면 넓을수록 비어 있으며 비어 있을수록
망치기 좋은 것들이 가득한 세계

- 「모조」 부분


  공터, 비어 있는 공간이 빈 듯이 보이는 것은 어른의 눈에 비친 광경이다. “개와 어린이의 영혼”에 저 자리는 “망치기 좋은 것들이 가득한 세계”로 보인다. 정연하게 쌓아 올려진, 논리와 질서 즉 어른들의 것을 “망치”는 것은 아이들에게 놀이일 뿐이다. ‘망쳤다’는 것이야말로 어른의 해석이니까. 아이는 “열한번째 손가락”처럼 상식을 벗어난 다른 세계를 보고 다가선다. 하지만 이런 것을 순수하고 해맑은 동심의 표출로 간주해도 곤란하다. 어른의 자격지심이 낳은 해석을 믿지는 말자. 거꾸로, 아이들의 시선과 감각에 와 닿는 것은 “죽고 싶은 마음과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나란한 것 같”은 불가해의 폭력이기도 하다(「모조」).

  폭력. 동심과 상상력이라는 전형적인 어린이 세계에 배치되는 이 단어야말로 이 시집을 읽기 위해 꺼내 들어야 하는 열쇠어다. 어린 시절을 따뜻하게 감싸주리라 기대되는 부모의 세계, 안온한 가정의 상징인 “스위트 홈”은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작동을 했”어야 할 세계이지만(「하우스 피규어」), 실제로는 그와 배치되는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부정성에 물든 세계를 암유한다. 그것은 아버지로 명명되는 가부장의 세계로서 빠져나갈 수 없이 닫혀버린 “문”으로 표상된다.


식탁을 내리치는 주먹
물 마실 때 물을 보지 마라
네가 태어나고 아무나 구두를 내 이마 위에
벗는구나 조금 혼란스럽구나
둥그렇게 몸을 떠는 잔가지들처럼
컵이란 수치심을 말한다고 정말이지
투명한 네가 엎드려 장판을 닦으면
내 몸 어디선가 냄새가 나는 것 같구나
기침하는 아버지 주먹은 열리지 않는 문이다

- 「헤드뱅잉」 부분


  실제 가정폭력을 연상케 만드는 시구들 가운데 “아버지를 죽였다//[…]//아버지를 죽였다//[…]//아버지를 죽여도 아버지가 많다”는 어구의 반복은 아버지가 비단 생물학적 개인에 그치지 않음을 드러낸다. 아버지라는 상징화된 폭력의 기호는 도처에 있으며(「목마」), 빠져나갈 수 없이 삶 전체를 포위하고 있다. 현실의 아버지와 이를 묵인하는 현실 사이에서 아이-화자는 어떻게든 다른 문을 열고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말뚝에 묶여 옴짝달싹 못”한 채, “평생토록 밧줄에 매여 힝힝 끌려다”닐 수밖에 없을 테니(「가정과 학습」). 그래서 아이가 여는 문은 지금-여기서 매 순간 만들어지는 문이다. 문을 열고 나가 다시금 태어나고, 그로써 출생의 구속마저 벗어나 다른 삶으로 이탈해 버릴 것 같은.


변신 상자 속 마지막 열쇠를 선물할게
어디로든 문이 태어날 거야
네가 바로 선 곳에서

죽지 않고 두 개의 생일을 가진 자
미등록 지문을 달고 생각 구름을 통과하는 자

터치. 미완의 안개 속에서

방아쇠를 당겨 시간의 레일 밖으로
일탈보다 먼 이탈로 총구를 겨누는 자

- 「코스튬」 부분


  “이 모든 게 시가 될 수 있다”(「탄력성」)는 진술은 단순히 자신의 모든 행위가 시라는 낭만적 언술이 아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삶으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 매번 살아남기 위해 자기를 변신시키고 다른 문을 열기 위한 열쇠를 찾으려는 몸부림에 해당한다. 그것은 “내가 나를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재”우는 생존의 여정이기도 하다(「귀신의 집」). 하지만 이리저리 밀치며 버티고 견뎌내야만 하는 생존과 시는 다르다. 처절한 생존 속에 침잠하고 말 전자와 달리, 후자는 저 문밖의 존재와 맺는 관계를 기대하고, 그 관계 속에서 다시금 버티고 견뎌내야 할 삶을 예기한다. 어찌되었든 삶의 연속, 폭력의 감내 속에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삶의 지속이 거기 있지 않은가? 시를 쓴다는 것과 문을 여는 것, 그것은 또한 생을 자아내는 삶-뜨기와 다르지 않다. “혼자 하는 실뜨기”가 결코 혼자의 고립에 그치지 않음은, 끊임없이 문을 열고 나가 문의 바깥과 맺는 관계짓기이기 때문이다.


쥐어뜯기고 쥐어박히는
소의 눈과 다리, 날틀과 젓가락, 사다리와 톱질

말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관계하지요

이어받지 못한 쪽이 영영 지게 되지요

- 「혼자 하는 실뜨기」 부분


  이 시집의 화자를 실제의 아이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화자가 겪는 체험을 유아기의 서사로 제한할 이유도 없다. 분명한 것은, 아이로 표상되는 어린 시절의 그림이 서정적인 목가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림은 언제나 액자를 통해 특정한 시점과 이미지로 박제되고 바깥과 분리된다. 문이 닫혀 버린다. 아름답고 조화롭게 그려진 유년의 세계는 어른의 자기 합리화일 따름이다. 모든 것이 동일한, 틀에 박힌 세계. 다른 관계가 허락되지 않는 풍경의 정지일 뿐이다. 화자의 실뜨기가 혼자만의 것이 되고야 마는 이유도 그에 있을 터. 하지만 그는 또한 직감하고 있으리라. 혼자만의 실뜨기는, 그것이 시-뜨기가 되는 한 스스로 문을 만드는 것이며, 저 바깥의 누군가에 대한 손짓이자 부름이란 것을. 그렇기에 시를 쓴다는 것은 두렵고 낯선 문-열기의 과정이라는 것을.


딴짓하듯 꿈 밖에 시를 만든다

그럼 좀 가벼워진다

- 「새벽 탈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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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아 필화(筆禍)와 필화(筆花)의 역사 ― 『한국 현대 필화사』(소명출판, 2024)

1. 우리 삶에 침투해 있는 국가폭력으로서의 필화 2024년의 겨울밤, 반국가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명분으로 불법적인 계엄이 선포되었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답시고 어렵게 일군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모순적인 행태는 잡은 권력을 유지 또는 강화하기 위해 우선 폭력을 행사하고 이후에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 비합리적인 근거를 들이미는 국가폭력의 메커니즘과 완전히 일치한다. ‘반국가세력’이라는 범주는 실체 없고 추상적이기에 누구든 반국가활동에 연루되게 만들 수 있다. 이 만능 단어 앞에서 우리는 국가라기보다는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집권 세력에 반하는 이라면 누구나 ‘종북 좌파’, ‘빨갱이’로 낙인찍어 왔던 익숙한 책임 전가 방식을 환기하게 된다. 계엄령 선포 전에 발간된 책 『한국 현대 필화사 1』(소명출판, 2024)에서 일찍이 임헌영 작가가 “반공독재 체제로서의 국가형성의 골조”가 “미군정 시기부터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거쳐” 현재의 “윤석열 검찰독재”(177쪽)로 이어졌 왔음을 짚어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민주주의를 빼앗길 뻔한 국민들은 고통받아야 했다. 계엄군이 국회에 난입할 때, 군인이 자국민에게 무기를 휘두르던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상기하며 공포에 떨어야 했고, 계엄이 해제된 이후에는 내란을 일으킨 자들이 정당한 처벌을 받게 하기 위해 광장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에는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라고 적혀 있다. 이를 위반할 시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할 수 있으며 “처단”하겠다는 내용도 담겼다.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가 첫 피난지인 대전에서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만들어 적에게 협력한 사람을 3심이 아닌 “1심 단독 종심終審”(384쪽)으로 처벌하도록 하여 “모든 과오를 부역자들에게 전가해서 오히려 ‘레드 콤플렉스’를 심화시킬 수 있는”(408쪽) 기회를 잡았던 맥락과도 유사하다. 계엄이 선포됨과 동시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체포조를 가동하여 언론인, 법조인, 정치인 등을 구금하려 했던 정황을 살피면, 계엄령 선포 이전의 행위에도 해당 포고령을 소급하여 적용하려던 악의를 확인할 수 있다. 5·18 민주화 운동과 제주 4·3을 다룬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해에 한국의 대통령은 군대를 동원한 출판 검열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통탄스럽다. 한강 작가가 박근혜 정부 때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그의 책 『채식주의자』가 유해 도서로 지정되어 폐기 처리되었던 것과 아주 다르지 않다.1) 출판 검열은 일제 강점기나 독재 정권 아래에서만 행해지는 특수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우리 곁에 언제나 있어왔던 것이다. 『한국 현대 필화사 1』의 권두에서 임헌영 작가는 ‘필화(筆禍)’의 개념을 먼저 소개한다. 필화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사상이나 의사를 자유롭게 나타내는 일체의 행위에 대하여 개인이나 집단에 국가가 가하는 제재와 압력, 형벌 등에 대한 총칭”(4쪽)이다. 그는, 필화는 권력을 지닌 세력이 행사하는 명백한 폭력이므로 허위나 날조를 제재하는 벌칙과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말한다. 문학뿐 아니라 영화, 공연, 정치, 언론 등에서도 이와 같은 탄압은 일어나기 때문에 필화는 통념과는 다르게 문학에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다. 임헌영은 문학을 비롯하여 영화나 공연, 정치나 언론 전반에서 일어났던 필화사건을 두루 다루고 있다. 더불어 더욱 다양한 소통 매체들이 생겨난 현대에서의 필화는 “폭력이 아닌 평화적인 수단으로 인간이 행사하는 모든 의사소통에 대한 직간접적인 제재 일체”(5쪽)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필화의 핵심은 무력을 사용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탄압했느냐의 문제다. 서문에서 그는, 반나치적이라고 판정받은 인사들의 저작물을 태웠던 1933년의 분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유태인 미술가 미하 울만이 설치한 작품 ‘도서관’의 안내판 문구를 인용한다. “그것은 다만 서곡이었다. 책을 태운 자들은 결국에는 사람도 태울 것이다.”라는 하이네의 비극 『알만조르』에 나오는 구절이다. 실로 역사는 분서가 홀로코스트로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진행을 입증해 주었다. 임헌영은 저작물을 처형시키는 것이 작가를 간접 살인하는 일과 같다고 일갈한다. 필화란 글만 억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을 쓴 작가와 그 책을 읽거나 소지한 사람들 모두를 감시하고 처형함으로써 결국엔 그 안에 깃든 사상까지도 말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베카 크누스가 창안한 “도서 대학살Libricide이란 술어”(9쪽)는 과장이 아니다. 이와 같은 근거에 기반하여 필화 또한 국가폭력의 범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임헌영의 주장이다. 그는 국가로 인한 인명 사상 사건을 지칭하는 국가폭력에 필화를 포함할 수 있는가 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음을 이해하며, 그에 대해서도 충분하게 논증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헬렌 페인이 정의한 제노사이드의 범주 중 하나는 “국가에 의해 절대적 악의 화신으로 분류되거나 국가의 신화에 의해 적으로 분류된 집단을 집단 제거하는 이데올로기적 학살ideological genocide”(21쪽)이다. 국가폭력은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폭력뿐 아니라 “정신 활동에 가하는 일체의 금지, 제약, 학대, 억압 등”(21쪽)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필화도 여기에 해당한다. 더불어 필화사건에 휘말릴 때 작가들은 구금되거나 감시,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를 폭력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 임헌영을 따라 필화를 국가폭력의 일환으로 해석하게 되면 필화사건을 더욱 다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 현대 필화사』를 읽으며 우리 삶에 필화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폭력인지 체감하게 된다. 2. 탄압받는 사람과 삶, 말살되는 글과 영혼 임헌영은 1945년 8·15 이후부터 시대순으로 필화사건을 배치하고 탄압의 주체에 따라 부를 나누어 그 양상을 살핀다. 제1권의 경우 해방에서 이승만 집권기까지의 필화를 다루고 있으며, 아직 발간되지 않은 제2권은 사월혁명부터 박정희 정권의 몰락까지의 필화를, 제3권은 전두환 쿠데타 이후부터 윤석열 정권까지의 필화를 다룬다.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국 현대사에 나타난 방대한 양의 필화를 세밀히 다루어내는 엄청난 작업이다. 세계사에서도 손꼽힐 만큼 필화가 많았던 비극적인 한국의 역사를 상기하면, 한 사람이 한국의 필화사를 정리한다는 일 자체가 경이롭게 느껴진다. 특히 놀라운 점은 사료를 정리하여 현대사를 짚되,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정보 외에 모종의 조치 및 정책이 시행된 이면적 의미까지 예리하게 짚어낸다는 점과 필화를 당한 작가들의 생애 전반을 제시하여 필화사건에 연루된 작가가 국가권력의 희생양이자 검열의 대상일 뿐 아니라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 독창적인 예술관을 지니고서 살아온 한 명의 입체적인 사람임을 독자가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임헌영 작가의 성실성을 입증해 줌과 동시에 필화가 한 인간과 그가 속한 집단, 그리고 사회 전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면밀히 들여다보게 해준다. 임헌영 작가가 채택한 서술 방식의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깊이 살필 예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제3부 제1장에서 “여류 4인방”(405쪽)이라 불리는 여성 작가 모윤숙, 이선희, 노천명, 최정희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구태여 낱낱이 밝힐 필요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연애사는 “모윤숙과 이광수의 사랑은 너무나 유명하여 장편소설 소재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 “최정희와 시인 김동환의 러브 스토리 또한 이에 못지 않는 은메달급”(405쪽)과 같이 조롱 섞인 어조로 서술된다. 이는 여성 작가의 사생활이 여전히 가십거리로 소비된다는 인상을 남길뿐더러 필화사건에 엮여 고통받는 작가 역시 존중받아 마땅한 인간임을 피력하는 책의 취지와도 맞지 않아 보인다. 여성 작가의 삶의 일부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기술하여 동등한 작가로 대하지 않고 대상화하는 관습적인 묘사 방식을 답습하는 것으로 비칠 위험이 있어 우려된다. 해당 부분은 거의 700장에 육박하는 책에서 1장 정도의 적은 분량이기는 하다. 다시 책의 기술 방식이 지니는 장점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필화사건 안에서만 작가를 조명하면 그는 단순히 검열과 억압의 희생양으로 보이게 된다. 이렇게만 부각되었을 때 작가는 상징적인 존재로 고정되어 버릴 수 있다. 물론 국가권력의 피해자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다소 수동적인 객체로 여겨질 위험이 있다. 어떤 작가들은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글로써 국가권력에 저항하고 비유를 활용해 우회하여 발화하기도 하며 예술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검열의 위협을 무시하기도 한다는 점 역시 고찰되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그 염결성만이 강조되어 작가 또한 입체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이 비가시화되기도 한다. 임헌영은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작가의 생애 전반을 자세히 묘사하고 친일 행적이 있는 인물의 경우 그 사실까지 가감 없이 드러낸다. 단, 친일파라고 해도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필화로 다스리는 건 실패”에 가깝다며,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하는 방법이 더욱 바람직할 것이라는 논평을 덧붙인다.(142쪽) 악행을 저지른 작가라 하더라도 그 행위를 법적 절차를 거쳐 처벌하는 편이 옳으며, 악인을 단죄하는 의미로 주어지는 “바람직한 필화”(142쪽)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1949년, 문교부가 월북작가 작품을 교과서에서 전체 삭제하고 좌경 문학인의 실질적인 활동을 금지했던 일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승만 정부는 월북한 문학인을 1급, 남한에 생존했던 문학인 중 좌익으로 판단된 문학인을 2, 3급으로 분류하고 이들의 창작 활동을 제한했다. 더불어 자수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할 것을 강권했다. 가장 많은 작품이 교과서에서 삭제된 정지용 시인의 경우 사상 검열과 모략에 몹시 시달렸음을 역사적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지용은 좌익 인사로 분류되어 월북했다는 풍문에 휩싸이는 등 고초를 겪다 국민보도연맹에 자진 가맹하게 되는데, 당시 가입 심사를 밝히며 자신이 “이십삼(二十三) 년이란 세월을 교육에 바쳐 왔”던 “한 개의 시민인 동시에 양민”임에도 월북하였다는 소문에 휘말려 “동리 사람에게 빨갱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집을 옮기고 동시에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2)하기도 했다고 토로한다. 이와 같은 정지용의 슬픈 고백마저도 신문에 보도되어 국민보도연맹의 홍보 수단으로 쓰이고 만다는 점은 해방기의 사상 탄압이 극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1951년 10월 1일, 한창 전쟁 중이던 시기에 공보당국은 “월북 문학예술인 작품을 발매금지 처분”(307쪽)하고 월북작가 명단을 발표하는데, 이를 임헌영은 “반공의식을 고조시켜 아예 독재와 부정부패 등에 대한 문학적 관심을 전면 차단”(308쪽)하려는 의도로 해석한다. 이러한 판단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작가가 월북했다고 해서 그의 작품까지 향유할 수도 없게 만드는 국가의 조치는 그 사회가 얼마나 억압적인지를 보여준다. 임헌영은 문인이 북으로 갔다고 해도 “작품은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사회를 유지하는 게 정상”(308쪽)이라고 역설하며, 작가의 행보에 근거하여 작품 자체를 금지 및 폐기하는 방식의 부당성을 다시금 지적한다. 임헌영에 의해 쓰인 필화사를 살피면서, 우리는 필화가 단순히 글과 그에 대한 검열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된다. 필화사란 결국 권력 다툼과 정치 싸움 속에서 사람, 그리고 그에 깃든 영혼과 사상을 죽여 온 대학살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한국이라는 특수한 민족사를 보되, 보편적인 인간이 지닌 악(惡)과 진리를 향한 양극단의 갈망을 확인하게 된다. 3. 검열 기준의 모순 임헌영의 저서 속에서 우리는 검열의 기준이 모호하다 못해 서로 상충하기까지 하는 황당한 상황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미군정은 해방 이후 1948년까지 한국에서 책이 번역된 작가 중 공산주의 사상 전파 저자로 플라톤, 아인슈타인,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모파상, 조지 오웰 등을 꼽는데, 반소 소설로 소개하며 미공보원에서 나서서 번역하여 출판했던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을 반공 작가가 아닌 공산주의 작가로 규정하는 허술함을 보인다.(53쪽, 282쪽 참조) 1959년에 필화를 당한 임수생의 시 「지붕」의 “인간이여, 우린 / 우리의 생활을 찾아 / 빠알갛게 돋아오는 아침의 햇빛 / 고향으로 돌아가자”(567쪽에서 재인용)라는 구절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문장으로 오독된다. 임수생을 취조했던 형사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라는 시구는 평양으로 돌아가자는 선동이며 “빠알갛게 돋아오는 아침의 햇빛”은 공산주의를 예찬하는 표현이라고 일방적으로 정의한 후, 그의 시를 “빨갱이 시”라고 단정 짓는다. 이는 부모의 사상 전과를 근거로 한 비논리적이고 비약적인 추측이지만, 이후에도 임수생은 작품집이 출간될 때마다 국가 정보기관으로부터 번번이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임헌영은 부산 시인 임수생의 일화를 제시하여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필화사건이 있어왔다는 점을 유념하게 한다. 더불어 “서울 중심 문화형성 풍토 속에서 전국 각 지역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570쪽) 필화사가 훨씬 많을 것이라며, 이를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당부한다. 이때 짤막하게 소개되는, 빨치산을 비판하는 영화 『피아골』이 상영 허가 취소를 당한 이유도 자못 황당하다. 빨치산이 키스하는 장면이 이들을 인간적인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괴물됨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전해진다. 검열의 기준이 이처럼 모호할뿐더러 쉽게 뒤집히는 것은 검열의 필요성과 실효성이 집권 세력의 이익에 따라 헛되이 조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필화는 작품을 자의적으로 그릇되게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 자체를 난도질하여 바꾸어 놓기도 한다. 월간 『신천지』 1949년 4월호에 발표된 한하운의 시 「데모」는 그의 첫 시집 『한하운시초』(정음사, 1945)에 실리는데, 이때 추천사를 쓴 이병철과 표지를 그린 정현웅이 이듬해 월북한다. 이에 1953년에 재판이 간행될 때는 이병철의 해제가 빠지고 표지 디자인은 바뀌며, 수록 시 「데모」의 제목은 「행렬」로 변경되고 문제가 될 만한 구절인 “쌀을 달라! 자유를 달라!”라는 시구는 삭제된다.(420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하운은 빨치산으로 낙인찍혀 곤욕을 치르게 되자 『한하운 시전집』을 발간할 때 “아 문둥이는 죽고 싶어라”라는 시행을 추가하고 “함흥학생사건에 바치는 노래”라는 사족을 달아 미군정을 비판하는 시 「데모」를 반공 작품으로 변모시킨다.(423~424쪽) 검열과 모략이 어떻게 작품을 훼손하는지, 어떻게 문학을 왜곡하고 그에 담긴 정치성마저 뭉개버리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대상이 되는 작품뿐 아니라 작가의 아직 쓰이지 않은 작품들에까지 관여하게 되며 작가를 자기 검열의 굴레에 가둔다. 혼란스럽기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해석한 작품이 기이한 방향으로 변모해 가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문학과 예술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4. 필화(筆禍)의 역사이자 필화(筆花)의 역사 필화가 빈번하다는 것은 “질곡과 비극의 시대”임을 증명하는 것이지만, 임헌영이 적절히 지적해 주었듯 “필화가 있어야 할 시대에 직필은 없고 곡필과 망언과 허위와 날조만 난무하는 현상은 더 비참하다”.(4쪽) 필화사를 마주할 때, 우리는 터무니없이 악랄한 폭압에 경악하게 되지만, 무기력해질 필요는 없다. 역사 속에서 거듭되는 필화사건은 불의에 맞서서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보려던 국민들의 갈망과 노력이 절멸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게 본다면 희망이 없던 시대는 없었던 것이 된다. 책의 말미인 제11장에서 다루고 있는 『경향신문』 폐간 사건에 주목해 보자. 1959년 4월 30일, “신문 발행을 허가제”로 바꾸고 “언제든지 폐간조치할 수 있도록 규정”(656쪽)한 미군정법령 제88호(1946.5.29)에 의해 『경향신문』은 페간된다. 1946년 10월 창간 당시부터 친일파 청산을 강경하게 주장했으며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는 점과 칼럼 「여적(餘滴)」란의 논조 등이 문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경향신문』의 발행 허가를 취소한 것에 더해 사옥에 꽂힌 기를 내리게 하고 마크를 떼어내게 하여 상징물까지 모두 금지하는데, 임헌영은 이러한 조처는 여타의 필화사건에서도 보기 드문 비인간적인 처사라고 부연하며 “현대 한국언론사상 가장 가혹한 필화사건”(655쪽)이라고 진단한다. 주목할 점은 발행허가를 취소당한 이후의 대처다. 노기남 주교는 “경향신문의 정치비판 논조가 가톨릭 교지 위배”(669쪽)라는 지적에 맞서, 불의에 항거하는 것 역시 종교의 일임을 역설하였다.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이었던 염상섭을 비롯한 33인의 문학인들은 폐간 조치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고 한국신문 편집인협회 또한 『경향신문』 폐간 취소를 위한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신문사 측은 행정처분 취소 청구소송, 행정처분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하는데, 사복형사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재판부는 경향신문 발행허가를 취소한 행정처분의 집행을 정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에도 또다시 무기정간 명령이 내려져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지만, 사월혁명 직후 『경향신문』은 복간된다. 부당한 억압에 굴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정의를 지키고 양심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분투는 붓을 꺾지 않는 염결한 자세를 생각하게 한다. ‘필화’는 쓴 글이 문제가 되어 화를 입는다는 뜻이지만, 한자를 바꾸면 좋은 글을 지칭하는, ‘붓 끝에 피는 꽃’이라는 뜻의 ‘필화(筆花)’가 된다. 붓을 쥔 손을 짓부수는 발길질 아래에서도 어둠을 먹으로 삼지 않고서 옳다고 믿는 것을 기록하려는 아름다운 손이 있다. 그 손들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꽃을 틔우고 있다. 1) 이에 관해서는 책의 목차에서 살필 수 있듯 발간 예정인 『한국 현대 필화사 3 : 전두환 쿠데타 이후의 필화사』의 제11부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필화’에서 ‘블랙리스트 문제’로 다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2) 「詩人鄭芝溶氏도加盟」, 『東亞日報』, 1949.11.5, 2쪽.

계간 문학인 성현아 검열필화국가폭력역사저항적 글쓰기 2025
김주원 불확실한 세계에 던지는 소설의 질문

김유진, 『평균율 연습』(문학동네 2024) 이미 단편 「음의 속성」(『보이지 않는 정원』, 문학동네, 2018)에서 등장한 바 있는 피아노 조율사는 김유진 소설이 다루는 가족간의 불화와 갈등에 잘 어울리는 직업이다. 미세하게 틀어진 음을 조절하고 감정의 진폭을 고르게 하는 일은 가족에게도 필요하다. 김유진 소설은 섬세한 조율사처럼 이들이 어떻게 틀어지고 불확실한 간극을 넓히게 되었는지를 탐사한다. 『평균율 연습』에서 이제 막 결혼 생활을 끝낸 수민과 수찬, 고리대금업을 하다가 실패한 수민의 엄마, 빠리에서 예술가로 활동하는 정우의 이야기는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는 피아노의 현처럼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주인공 수민이 피아노 조율 수업을 배우는 과정을 따라 삼인칭 시점으로 인물들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율은 산술과 이론이 아니라 경험과 실전만이 중요한 삶의 기술이다. “실제로 피아노를 만져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악기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걸 깨달”(57면)은 수민처럼 상대를 모르면서도 안다고 착각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수민과 수찬의 이혼에도 그런 오해가 있었다. 수민이 프랑스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 만난 수찬은 원예학을 전공한 유망한 청년이었으나 귀국해서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고 수민의 피로와 불만은 쌓여만 갔다. 수민에게 배우자의 무능력은 “아주 자주 유대와 이해를 가로막는 장벽”(20면)이었다. 먼저 이혼을 말한 사람은 수찬이었지만 이미 정서적 이혼 상태와 다름없던 수민은 살려고 이혼한다는 수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틀린 부분을 찾아 고치는 유능한 편집자인 수민은 판사처럼 “단죄하고 처단하”(41면)는 일이 어울리는 “너무 엄격하고 고지식”(122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수민의 불행은 엄마 임정희의 불행과 닮았다. 임정희가 어린 시절 딸이라는 이유로 부모와 형제들에게 무시를 당했듯 수민 역시 친척집을 전전하며 자신의 개인성을 존중받지 못하며 자랐다. 슬픔과 두려움을 위로해 줄 누군가가 없었던 이들에게 결혼은 인생의 도피처였다. 임정희는 남편이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주리라는 확신”(111면)을 가졌고 수민은 “자신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려다줄 것만 같은”(97면) 예감으로 수찬과 결혼했다. 그러나 이들은 남편의 무능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선택하고, 낭만적 사랑이나 구원의 허위성을 벗어나 자기 삶을 재조율하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해야 한다. 인생 초기의 결핍은 임정희와 수민을 무뚝뚝하고 애정에 인색한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가족 공동체에서 독립할 수 있게 했다. 이 점에서 『평균율 연습』은 가족보다 개인으로서의 과업에 몰두하는 여자들의 삶의 궤적을 그린다. 이혼 후 임정희는 생활고를 이겨내며 왕성한 경제활동을 펼친다. 서울의 아파트를 사고 시세차익을 노리는 “불확실한 숫자놀음”(73면)을 즐기며 전남편을 사업 파트너로 이용할 만큼 대범하고, 투자 사기를 당했을 때는 딸에게 호소하고 가족에 의지하기보다 주도적으로 소송에 임한다. 『평균율 연습』에서 이 둘과 대비를 이루는 것은 정우의 사랑 이야기이다. 정우는 프랑스 어학연수 시절 수민의 룸메이트이자 예술가로 자립한 여성으로 도피나 구원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온전한 자신의 사랑을 창조한다. 그녀는 남자친구가 자신에게 실수할 때조차 상대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는다. 정우는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있다. 불운한 사고를 겪은 그의 열일곱 살 시절로 가 곁에 있어주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의 척추를 따라 길게 이어진 흉터를 매만질 때마다 그 결함이 마치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149면)이라고 상상하는 정우는 그와 결혼 대신 새로운 가족형태인 시민연대계약을 맺으며 살아간다. 수민은 정우를 자신과 비교하지만, 그런 사랑은 수민에게도 있었다. 수찬의 이야기를 보면 이들이 서로 얼마나 기적 같은 존재였는지, 수찬이 얼마나 수민의 외로웠던 과거를 보듬어주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사랑은 결혼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우의 경우처럼 상대의 경험과 감정까지 자신의 것처럼 상상하는 능력이다. 수민이 수찬을 무능하게만 보는 것은 그런 상상력이 권태와 오해 속에서 무뎌졌음을 의미한다. 피아노 조율 학원 원장의 말처럼 평균율은 순정율이 만든 결함을 모든 건반에 조금씩 떠안겨 어긋남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절충하는 대안이다. 조율은 완벽한 순정율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수용할 때에야 비로소 거리가 아름다워질 수 있”(194~195면)는 미묘한 작업이다. 수민은 이 조율 훈련의 심화 과정을 마쳤다. 그러나 “수민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너그러운 세계(202면)”는 왜 “고치고 또 고쳐 쓰는”(202면)” 과정이 필요하다. 엄마와 수찬의 결함에는 그들만의 이유가 있다. 엄마 임정희는 이혼 후 돈에 집착하며 살 수밖에 없었고 소심하고 마음이 여린 수찬은 회사의 인원 감축에 어쩔 도리 없이 권고사직을 당했다. 그렇다면 수민에게 필요한 조율은 무엇을 의미할까. 조율 수업에는 교훈적인 메시지들이 많지만 조율의 핵심은 그것의 기능이나 유용성에만 있지 않다. 수민에게 고치는 일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하나하나 매만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두 음의 진동수를 조화롭게 만드는 기술이 단번에 되지 않듯 수민의 삶도 무언가에 천천히 시간을 들이는 과정에 있다. 『평균율 연습』은 상대의 결함을 나눠가지려는 시도가 사랑과 이해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기당한 엄마에게 같이 살자고 말하는 것은 수민이 선택한 조율의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소설의 결말에서 수찬이 이혼 후에도 수민과 수민의 어머니와 이어나가는 우정이다. 그것은 가족에 관한 하나의 대안이자 수찬이 만드는 평균율이다. 지금 가족 서사에 필요한 조율이 있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서로 지지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상상력일 것이다. 전지영, 『타운하우스』(창비 2024) 전지영의 『타운하우스』는 어둡고 불편하다. 이 이야기들은 대체로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과 위계가 삶을 어떻게 지옥으로 만드는지를 보여주고 결말을 유보한다. 긴장의 해소가 아니라 곤경의 실상을 지켜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말의 눈」은 폭력의 전염성을 파헤친 수작이다. 주인공 수연은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던 딸 서아를 섬에 있는 국제 학교로 전학시킨다. 새출발을 결심한 그곳의 타운하우스는 CCTV와 보안이 완비되었지만 그럴싸한 외관과 달리 미세하게 갈라진 이층 천장 틈으로 물이 새는 곳이다. 이곳에서 수연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10면)을 경험한다. 이번에는 서아가 지희의 딸이 저지른 학교 폭력을 옆에서 방관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수연은 서아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입하지 않은 채 서아가 가해자가 아니라는 것에 ‘비겁한 안도감’을 느낀다. 같은 타운하우스 이웃인 지희는 수연의 이러한 모순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인물이다. 지희는 자신의 딸이 가해자지만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걸 서아가 증언해 주기를 바라며 그동안 쌓은 친분과 의리를 내세워 수연을 압박한다. 지희는 폭풍우를 무릅쓰고 비가 세는 수연의 집 지붕에 올라가 방수포를 덮으려다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어떻게든 자기 아이를 구하겠다는 지희의 얼굴에서 수연이 자신의 얼굴을 보는 장면은 예리한 통찰력이 엿보인다. “아이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35면)는 모성은 그들이 그토록 피하고 싶어하는 폭력을 은폐함으로써 폭력에 공모하기 쉽다. 지희처럼 궁지에 몰린 부모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그것은 수연에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35면)이다. 여기서 피해자와 가해자, 방관자의 경계는 매우 모호하며 폭력은 언제 어디서든 서로를 위협하고 전염시킬 수 있다. 눈여겨 볼 점은 피해자의 내면에 숨겨진 가해 심리다. 친구의 폭력을 관망했던 서아는 맞는 아이의 고통을 외면하고 “차라리 때리는 쪽”(26면)이 낫다고 말한다. 수연의 가해 심리는 한층 교묘하고 잔인하다. 수연은 지희에게서 과거 자신의 선처를 바라던 가해자 부모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희를 떠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지붕에서 떨어진 지희가 깨어나지 않기를 은밀히 바란다. “같은 폭력을 반복”(23)할 것이라며 가해자들을 엄정하게 심판했던 수연의 도덕적 신념은 서아가 잠재적인 가해자가 됨으로써 무너진다. 소설 초반에 타운하우스를 어슬렁거렸던 말은 검은 실루엣으로 수연 앞에 다시 나타난다. 여기서 수연이 낯설게 마주한 것은 바깥의 위협 때문에 보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이다. 수연은 말의 눈에 비친 얼굴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보지 못한다. 무고한 피해자였던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검은 웅덩이 같은 말의 눈은 수연으로 하여금 자기 안에 숨겨진 가해자의 마음을 보게 만든다. 수연은 자신을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폭력의 악순환은 지금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현실이다. 이 소설집에 엮인 작품들에서 삶의 안전지대는 찾아보기 어렵다. 걷잡을 수 없이 물이 새는 타운하우스는 “갑작스런 기온 변화, 결로, 바람과 비에 약”(8면)하고 인물들의 갈등은 악천후 속에서 고조된다. 이런 식의 묘사가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전지영의 소설에서 변화무쌍한 기후(climate)는 불가해한 삶에 관한 징표로 때로 인물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쥐」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와 솟아오른 불기둥은 군 내부의 불미스런 의혹을 감춘 해군 관사를 태울 기세로 커진다. 그러나 관사를 돌아다니는 쥐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부조리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에서 기습적인 스콜은 아들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공무원인 주인공은 불합리한 공공 사업에 몰두하느라 아들의 죽음에 무방비 상태였고 성공적으로 끝난 사업은 자신의 일상에 예기치 않은 해를 입히는 중이다. 스콜은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침수시키며 평온한 일상 속에 숨어 있던 문제들을 수면 위로 올려놓는다. 「소리 소문 없이」의 ‘나’는 음대 입시생으로 피아노와 악보가 삽시간에 물에 잠기는 수해를 겪는다. 이 “이해되지 않는 일”(211면)은 입시 경쟁으로 누군가를 무너뜨리고 싶어하는 ‘나’의 뒤틀린 욕망을 누그러뜨리는 계기가 된다. 한편 자연재해와 관련된 소설적 배경은 삶의 불평등과 부조리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언캐니 밸리」 속 도시 고지대에 있는 부촌 청한동에서 흐르는 물은, 장마철마다 ‘나’가 세 들어 사는 저지대 상가 건물을 물바다로 만든다. 그러나 청한동 노부부의 저택에서 일어나는 수상한 약물과 주사가 오가는 일들에 ‘나’는 접근할 수 없다. 기후는 한국 사회의 계급 지형도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침식시키는 중요한 사사적 요소이다. 『타운하우스』에서 악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친구나 동료에 대해 악의적인 루머를 퍼뜨리고(「뼈와 살」, 「소리 소문 없이」) 부당한 업무와 명령에 복종하는(「쥐」,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 인물들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할 뿐이다. 「맹점」에서 안과 의사 은애도 그런 유형의 인물이다. 은애는 어시장 노인들에게 고액의 백내장 수술을 해주고 보험제도의 틈새에서 이익을 착복한다. 병원에 노인 환자들을 공급하며 “주는 걸 확실히 주고 받을 걸 확실히 받는”(121면) 보험회사 영업사원 재복과 과잉 진료로 수술 건수를 늘리는 은애는 「말의 눈」의 수연과 지희처럼 비슷한 욕망으로 조응한다. 은애가 검게 젖은 어시장을 빠져나올 때 고양이 한마리가 생선 피와 비늘, 내장으로 범벅이 된 입으로 은애의 발을 맹렬하게 핥는 장면의 기이함은 그녀의 맹목적인 탐욕을 암시한다. 사회적 약자이자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던 은애의 성공은 그러기에 더 착잡하다. “한 사람이 웃으면 다른 사람은 웃지 못하는”(「뼈와 살」) 경쟁 사회의 심리는 거의 생존 본능처럼 전지영 소설의 인물들에게 내면화되어 있다. 상처받은 피해자의 이야기는 익숙하다. 그러나 『타운하우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피해자의 상처를 돌보지 않는 사회가 만드는 파괴적인 갈등이 주목한다. 모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는 사회는 끔찍하다. 「맹점」의 은애처럼 소설의 다른 인물들도 자신의 성공 뒤에 누군가의 불운과 불행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불길한 날씨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휩싸인 『타운하우스』는 각자도생의 시대를 반영한 한국형 고딕 소설로 손색이 없다. 비슷한 갈등 구조와 패턴이 반복되는 면도 있지만 이들 이야기가 일으킨 균열은 오래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그것은 낯설고 두려운 일이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의 폭력에 가담하는 사람들, 더 나쁘게는 알면서도 그 불길한 운명에 적신 발을 빼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얼굴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계간 창작과비평 김주원 가족 서사우정폭력가해자피해자기후(climate)불평등 2025
김주원 실패와 구원_김근, 『에게서 에게로』(문학동네, 2024), 김태형, 『다 셀 수 없는 열 마리 양』(청색종이, 2024)

비로소 더 잘 실패하기 김근의 시집 『에게서 에게로』는 모호하고 흐릿한 목소리로 가득하다. 『에게서 에게로』는 주제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언어 본연의 기능에는 관심이 없다. 김근의 시는 언어의 지시적 기능을 거부하고 의미의 방향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산문시가 많고 시의 행도 긴 편이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듯 자유연상을 따라 말이 늘어난다. 그럴수록 의미는 저 멀리 달아난다. 출처를 규명할 수 없는 떠도는 목소리들이 시를 끌고 간다. 김근의 시는 무언가 선명하게 비추거나 재현되기를 포기한 자리에서 빛이 아니라 어둠을 끌어당긴다. 김근의 시는 빛에서 어둠으로 이행 중이다. 시집의 맨 처음 놓인 「이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신이 들어와 살았어요. 나는 결코 세준 적 없는데 스멀거리는 어둠쯤에서 당신은 사는 모양이어서, 밝은 쪽에서는 결코 당신을 볼 수 없었지요”.(「이사」) 이 시에서 ‘나’는 결코 ‘당신’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다. ‘나’는 집주인이지만 “흘려놓은 흔적들”로 존재하는 당신을 점점 기다리고 당신의 어둠을 단속하다가 급기야 “어둠 속으로 당신을 찾아들어” 간다. ‘나’는 당신과 어둠 속에서 오는 말들에 매혹당한 자이다. 「이사」의 화자는 볼 수도 없고 들리지 않는 당신의 어둠 속에 살기로 한다. 대상을 알아내고 통제하기보다 자신의 존재 방식을 바꾼 것이다. 살던 집은 주인도 없이 “덩그러니 저 밝은 곳에 남겨”(「이사」)진다. 이 시집은 독자 역시 의미의 집을 나와 어둠으로 이행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안다는 것은 명확하고 분명하게 실체가 드러나도록 대상에 빛을 비추는 일이다. 그러나 대상을 명료하게 하는 일은 그것을 가두고 제한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둠을 주시”하는 자는 다른 지각과 인식을 만난다. 그것은 언어가 수행하는 명시적 기능에서 벗어나 대상의 모호성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이전과 이후의 아득한 경계에서” “난데없는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은 기분”(「가려진 문장」)이 그렇게 태어난다. 서러우니, 에는 어떤 거리들이 몰아쳐와 들러붙는 것이어서 생으로 떨어져 젖은 이파리 같은 것들 잘은 또 떨어지지는 않기는 않았기로서니 아프니, 쪽에 살아만 있는 꽃향기 자욱만 하고 지독만 하고 몽롱한 봄날 하늘 갑작스럽게 날 흐리고 스산하고 주어도 없이 여기저기 생겨나는 굴형들 거기로 서러우니, 하는 목소리도 아프니, 하는 목소리도 죄 빨려들어가더란 이야기 매달리는 것은 정작 나였더라는, 서러우니, 따위에 아프니, 따위에 매달려 바지춤이라도 잡아볼 양으로 꽉 쥔 손 더 꽉 쥐어는 쥐었으나 떨려나더라는 그만 떨려나 바닥에 나동그라져 서러우니, 중얼중얼 아프니, 중얼중얼 어느 문장의 교접에도 들지 못하고 숫제 까무러나 치더라는 ― 「서러우니, 아프니,」 중에서 언어는 편리하지만 단순하고 불충분한 기호이다. ‘서러우니’, ‘아프니’는 ‘이파리’와 ‘꽃향기’처럼 가깝고 서로 감각적으로 구분되는 말이지만 이 말들의 목소리는 “여기저기 생겨나는 굴헝들”로 “죄 빨려들어가” 버린다. 의미 기능에 충실한 언어는 쉽게 관성의 늪에 빠진다. 그 과정에서 단어가 거느리는 느낌과 질감의 미묘한 차이는 소거된다. 통상적인 문법은 “어느 문장의 교접에도 들지 못”하는 ‘중얼중얼’하는 목소리를 외면한다. “문장은 완성되지 않고” ‘나’는 “문장의 바깥”에 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는 자는 기존의 문법이나 재현에 의존한 완성이 의미가 없다. 김근의 시는 언어의 재현 불가능성을 인식하고 완성되지 않는 목소리들을 받아쓴다. 김근의 시는 부사어를 좋아한다. 부사는 문장의 완성과 관련 없지만 상태나 분위기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부사는 “확신할 수 없고, 희끗, 그저 희끗, 희끗거리는”(「희끗」), 잠인지 생시인지 깨도 깨도 잠속이고 아슴아슴 뒷모습인지 앞모습인지”(「어슴푸레」) 모르는 상황에 어울린다. 의미론적 기능에서 해방된 말은 유희적이다. 언어는 의미 대신 리듬으로 흘러넘친다. 김근의 시는 “‘너’가 있었다”는 문장을 다시 쓴다. “너는 들리지 않는 말들 사이에 있었다고/추측된다 너를 둘러싼 적막이 얼마나/시끄러웠는지 너는 눈치채지 못했다 너는 다만/있었고 있었다고 추측될 뿐 지금 없다 없었다고는//차마//추측되지 않는다”(「혼자 있는 사람은」)라고. 무엇을 확정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사실이 아니다. ‘너’는 ‘사이’에 있고 추측에 불과하다. ‘사이’는 사실과 추측, 현재와 과거, 적막과 시끄러움이 뒤섞여 있으면서도 텅 비어 있다. 이 불확실성 속에서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실체는 없다. 그래서 김근의 시적 화자는 말할수록 이방인이 되어간다. “주인공이 누군지도 알아볼 수 없고 벗겨내도 벗거내도 다는 벗겨지지 않는 그저 얼룩인” “난 당신이 방금 봤던 내가 확실한 거야?”(「사이사이」). 언어가 실재와 상관 없는 추상적 기호라면 이 세계도, ‘나’, ‘너’, ‘당신’도 이름만 있을 뿐 실재한다고 볼 수 없다. 「사이사이」는 매트릭스처럼 가상과 실재가 구분되지 않는 ‘사이’의 존재론을 펼친다. “누가 우리 목소리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있는 거지? 아까부터 누가 우릴 자꾸만 기록하고 있는 거야?”라는 질문은 주체의 확고함을 의심한다. 화자는 우리를 “시 안에서 꼼짝없이 가둬놓고 거기 바깥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넌, 넌 누구야?”라고 묻는다. ‘사이’는 안과 밖, 말하는 자와 글쓰는 자가 지워지는 역설의 공간이다. 대답 대신 또 다른 질문이 남는다. “나는 그저 아무 내용도 없었던 게 아니오?”(「정류장」). 주체는 고정된 실체가 없는 불확실한 개념이다. “영원히 지연”되는 기다림 속에서 “내겐 선택권이 없”(「윤슬」)다. 문법적 주어만이 아니라 단일하고 견고한 자아 정체성으로서 ‘나’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김근의 시에는 자리잡고 있다.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켜켜이 깃든 누군가”이고 그래서 ‘나’라는 관념 역시 “그만 산산이/깨어져버리”(「거기, 없는」)고 만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무엇이 어떠하다는 진술은 오류가 되기 쉽다. 우리가 지닌 관념과 인식, 생각들이 그러하듯 모든 것은 임시적이고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다. ‘곡우’라는 낱말이 “본뜻과 헤어져버려 본뜻이 무엇인지 떠올려지지도 않게끔. 떠올려봤댔자 이미 모르게만 되어버”(「곡우」)리는 것처럼 언어의 뒤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실체가 없으므로 뚜렷하게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엇’을 특정할 수 없는, ‘에게서 에게로’ 가는 과정과 흐름이 있을 뿐이다. 언어와 시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김근의 시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냥 모른다. 아는 것은 모른다는 것뿐이다.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뿐이다”(「세 사람이」). 그의 시는 주체의 의도와 의지를 놓아버린 채 낱말들의 중얼거림에 시를 내맡긴다. 이를 두고 언어의 의미론적 기능을 불신하는 해체주의 실험을 떠올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주체의 불확실함과 그로 인한 수동성이 “반짝임과 반짝임 사이 어둠 속으로”(「윤슬」) 들어갈 수 있는 틈을 만든다는 점이다. 그 틈새가 시의 자리이다. 블랑쇼는 문학은 모호해지는 언어라고 말했다. 『에게서 에게로』는 모호함에 자신을 맡기면서 익숙한 관념을 벗어나 의미의 불안정한 지점으로까지 끌고 가는 시도이다. 시는 애초의 의미를 허물고 “잘 잘못 써진다. 비로소 시는 잘 실패한다”. 김근의 시가 증명하듯 의미는 하나의 완성을 향하지만 “다시 더 잘 실패”하고 “더 더 더 실패”(「세 사람이」)하는 형식으로서 시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에게서 에게로’, 낯설고 모르는 곳으로. 잘 실패하는 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문장 안에서 길을 잃은 채 없는 길을 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의 최전선이다. 다행히 김근의 시는 잘 실패하고 있다. 시, 자기 구원의 여정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제 심장 뛰는 소리를 들려줄 때 이루어진다”(「진흙연못」). 이 구절은 김태형의 시의 중심 문장 같다. 그의 시는 세상의 음악에 자기 심장 뛰는 소리를 포개어 놓는다. 살아 있는 감각과 경험이 아니라면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불가능한 것처럼 그의 화자들은 기꺼이 풍경 속으로 스며든다. 자아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서정시의 문법은 세계를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그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넓혀가는 것이다. 김태형 시를 서정시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시가 자아와 세계의 접점을 잃지 않으면서 자기 성찰에 깨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를테면 「흑백고원」에서 늙은 나무들이 화석이 되어 비와 햇빛을 견디는 모습을 “자기 자신을 견디는 동안”으로 이해하는 화자는 자신의 고통을 자연에 투사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을 인간 중심적으로 변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 큰 세계의 일부임을 인식하는 계기이다. 고통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 심장을 내가 갉아 먹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어리석음과 후회가 “부는 바람”에 지나간다는 것은 분명하다. “부는 바람이라고 다 지나간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온통 황막한 벌판”에 서 있는 늙은 나무들에게서 시작된 삶의 지혜이다. 자연은 추상이나 관념이 아니라 삶을 일깨워우는 감각으로 경험된다. “여전히 넘쳐흐르고도 남은 말이 있었으니/물고기 한 마리가 느닷없이/네 푸른 입속으로 뛰어들었다”(「잉어」)도 그런 경험에 해당된다. “자꾸만 차오르고 넘쳐흘러 튀어”오르는 마음 속의 말은 잉어와 같다. “어느 때인가/나를 치고 올라”오는 말과 잉어의 속성은 은유를 통해 연결된다. 은유는 서로 다른 두 대상이 같다는 인식을 통해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의 작용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주변 동물의 생태는 그에게 삶의 한 단면으로 묘사된다. “기어다니는 것들은 바닥처럼 자기를 움쳐쥐고 있다”(「도마뱀」)거나 “쫓기다 살아남은 고양이 한 마리/아스팔트에 납작하게 달라붙은 사체를 냄새 맡는 고양이”(「허리가 긴 흰색 고양이」), “제 울음소리를 부러진 발톱으로 할퀴어 놓기만 하다 가는 고양이”(「야윈 고양이의 달」)는 관찰자의 예상을 비켜가는 살아 있는 생명들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속으로 울음을 품은 것이 고양이만은 아닐 것이다. 김태형의 시에서 ‘나’와 동물의 거리는 가깝다. 예측불가능한 삶의 속성과 훼손되는 생명의 실상이 동등한 무게를 지니는 것은 그의 시가 살아 있는 존재로서 자신과 동물을 분리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 여행자이다. 그는 “잔물결이 모여들어서 모여들어서/내가 모르는 세상 얘기를 다 들려주고 가는”(「여행자」) 풍경 속에 있다. 김태형의 시적 화자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들”(「흑백고원」)을 품고 있지만 그것들을 고백하는 대신 가만히, 오래 바라보고 듣는 사람이 된다. 세상 만물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는 여정, 이번 시집은 그 여정의 기록이다. 시인은 자신이 지나가는 것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안다. 길에서 만난 ‘죽은 개’는 인간의 희로애락도 한 시절이며 모든 것들이 소멸로 향하는 길 위에 있다는 것을 가만히 알려주고 있다. “나 역시 나를 지나가고 있”(「죽은 개가 내 이마에 침을 흘리며 지나간다」)다. “나 때문에 내가 보이지 않는다”(「달의 뒤쪽에 대해서는 말하는 게 아니다」)는 인식 역시 그러한 자기 탐구의 결과일 것이다. 김태형 시의 화자는 ‘내가 모르는 세상’을 보거나 듣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성찰의 힘을 잃지 않는다. 느릿느릿 커다란 트럭이 앞서 가며 모래와 부서진 자갈을 뿌린다 경사진 길을 오르지 못할까 싶어 바짝 따라가다 바람이 얼어붙은 곳까지 다다랐다 소나무가 제 가지를 쳐서 묵은 눈을 흩날린다 절벽 위에서 절벽은 절벽을 다 내던진다 누가 이곳까지 올라와 긴 숨결을 한없이 내려만 놓고 있었는지 내 입술에 묻은 하늘마저 파르르 떨린다 한차례 묵은 눈가루가 흩날리자 한 줌의 그림자가 햇볕 속에서 선명하게 반짝인다 나도 몇 해는 사는 게 두려웠다 다 놓아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절벽은 절벽 앞에 서 있다 그러자 묵은 눈이 또 내린다 눈은 내리고 나는 허공에다 입을 벌리고 저녁으로 서서 하얀 입김이 되어 있다 ― 「어느 절벽」 전문 절벽은 절정일까, 아니면 절망일까. 이 시의 절벽은 말하는 이의 마음 풍경처럼 읽힌다. 바람이 얼어붙고 소나무가 제 가지를 쳐서 묵은 눈을 흩날리는 곳. 절벽은 끝이면서 시작이고 결빙과 해빙이 동시에 일어난다.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소나무는 결박된 것을 스스로 풀어내는 해방의 순간을 만든다. 절벽 위에서는 절벽도 절벽을 다 내던진다고 한다. 절벽은 떨어지는 곳이 아니라 내려놓는 곳이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나도 몇 해는 사는 게 두려웠다”는 고백처럼 누구나 자기만의 절벽이 어디쯤 있다. “다 놓아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마음은 절벽 앞이다. 다 놓아버리겠다는 각오가 아니라 다 놓아줄 수 없는 자신을 자각하는 순간은 정직하고 소중하다. 고통 없이는 그런 깨달음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몇 해 쌓인 두려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겠지만(“묵은 눈이 또 내린다”) 허공으로 하얀 입김이 되는 ‘나’는 가볍다. 절벽 앞은 두려움이 아니라 허공일 뿐이고, 숨 쉬는 것처럼 그렇게 삶은 계속될 테니까. 시집의 표제작인 「다 셀 수 없는 열 마리 양」에서 마지막 양 한 마리는 자기 자신이다. 고작 열 마리 뿐인데도 사라진 양과 “절벽까지 혼자 외떨어져 오르고 있”는 양을 찾느라 정신이 없다. 어렵사리 양을 세었는데 이번에는 마지막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이 시에는 약간의 우화적 요소가 담겨 있다. “자기가 마지막 한 마리 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누가 절벽까지 자기를 찾으러 오겠는가/누가 아직도 열 마리의 양을 세고 있는가”라는 대목은 오래 눈길이 머문다. 아홉까지 잃지 않고 다 세었는데 자기 자신이 없다니, 하지만 양을 세는 자도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닌가. 반대로 이해하자면 마지막 양 한 마리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절벽까지 가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게 아닐까.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바깥에 있는 아홉 마리의 양을 찾는 데만 급급한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시인은 열 마리의 양을 세는 누군가가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 뿐이라는 내면의 진실에 이르기 위해 『다 셀 수 없는 열 마리 양』은 자기 구원이라는 길고 어려운 여정을 보여준다. “바깥을 내다보는 일은 중요한 나의 일과”(「저물녘에 돌 하나 던지다」)라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이 모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정작 나는 찾아가고 있었는지 모른다”(「햇빛과 먼지와 황무지와 그리고」)라는 통찰을 얻는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준 지식이 아니라 절벽 끝에 선 자기 자신을 마주한 경험이라 울림이 있다. 김태형의 시가 좋은 서정시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 무엇이라도 곁에서 곁에서” 듣기 위해 “내 작은 귀는 햇빛처럼 그 무엇에라도 기대고 있었”(「귀」)고 그 순간들이 그에게는 시가 되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절벽의 거대한 허공에 맞먹는 자유와 해방으로 이끄는 힘이 거기에 있다. “마냥 길을 따라 흘러가다 길이 되어 버릴” “바람만을 따를 뿐인”(「진흙 연못」) 이 커다란 자유의 여정이 계속되길 바란다.

계간 청색종이 김주원 목소리불확실성실패성찰자연구원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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