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월간 현대문학 2024년 8월호 (제836호)
‘엄마 서사‘라는 애도의 형식 ㅡ 여성의 몸, 몸의 여성성 읽기
피에르루이 포르는 『어머니와 딸, 애도의 글쓰기』에서 유르스나르, 보부아르, 에르노를 중심으로 ‘어머니에 대한 딸의 애도하는 글쓰기’ 형식에 주목한다. 이들이 글 속에서 어머니(의 죽음)를 다루는 과정은 단순히 보호자의 죽음에 대한 ‘애도’라는 일반론적인 차원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세 여성의 글은 다름 아닌 ‘어머니’에 대한 ‘애도’의 한 형식으로서 제출된 것이며, 이때 ‘모녀’ 관계란 다음과 같은 특수성을 지닌다.
따라서 최초의 모친 살해와 어머니가 죽었을 때 반복되는 상실은 여성에게 훨씬 더 극심하게 다가온다. 여성이 차이와 유사성을 동시에 갖는다는 점에서 어머니는 필연적으로 딸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보내기 때문이다. 만약 아버지가 법이라면, 여성에게 어머니는 일종의 자아이다.1)
자신을 ‘트랜스페미닌’으로 만드는 글쓰기, 바꾸어 말해 여성성을 ‘가로질러’ 쓰는 글쓰기, 그것은 단순히 주체와 대상이 여성이라는 것(쓰는 여성으로서의 저자와 쓰이는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텍스트가 구상되고 스스로 질문을 제기하게 만드는 토대관계가 매우 특별하게 여성적(어머니/딸의 관계)이라는 이유에서 그렇다.2)
여성 자녀에게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다른 방식, 즉 “자아”로서 여성 자녀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여성인 어머니와 여성인 자녀가 “차이와 유사성”을 동시에 지니며 서로를 비추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딸이 어머니를 애도하는 방식은 여성적일 수 있다. 이때 ‘여성적’이라는 말은 ‘여성 간 관계 맺음’의 층위와 무관하지 않으나, 생물학적 동질감에 한정되지 않는다. ‘여성간 관계 맺음’이란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의 영향이 얼마간 드리워진 사이에서 구축된 ‘모녀’의 형식 또한 강조한다. 즉 모녀 관계의 여성성이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겪었던 경험의 동질성과 그에 대한 차이 나는 대응 및 이해와 관련된다.
이러한 관점을 하나의 힌트로 삼아 딸의 시선에서 ‘엄마(어머니)’를 바라보는 구도를 취하는 최근의 문학적 재현 양상이 일종의 ‘애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말해볼 수는 없을까? 여기서 ‘애도’란 실재하는 어머니의 죽음 사건에만 관련된 것은 아니다. 서사 속에서 탐구되는 ‘어머니’의 죽음이란 인물의 죽음으로써 가시화될 수도 있지만, ‘어머니’라는 명명에 기입되어 있는 사회제도적 억압을 돌출시킴으로써 억압적 ‘여성성’과 결별을 고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여성을 구속하는 ‘어머니’의 일면과 결별하게끔 되었다면 이 역시도 ‘애도’의 형식으로서 여성적 글쓰기의 한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살펴볼 작품은 모두 ‘엄마’ 1) 를 다루는 딸의 서사라는 형식을 취한다. 구병모의 소설은 생식하는 존재로서의 ‘엄마’의 측면에 특히 밀착하여 자신의 여성성을 견주며 서사를 전개한다. 한편 정선임의 소설은 ‘엄마’와의 관계를 고찰함에 절대적인 거리를 고수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생식 가능한 몸과 여성성을 분리시키고, 대신 질환을 지닌 몸, 생애 주기에 따라 늙어가거나 죽음에 가까워지는 몸의 여성성에 주목한다. 이렇듯 ‘엄마’와 ‘딸’의 몸을 가까이, 또는 멀리 두고 이야기하는 이러한 소설의 형식이 어떤 의미에서 ‘애도’의 한 형식일 수 있는지 탐구해보기로 하자. 3)
만감 교차, 엄마와 딸의 임신 가능성
구병모의 「엄마의 완성」(『창작과비평』 여름호)은 철저히 30대로 추정되는 딸의 관점에서 노년에 이르는 어머니를 관찰하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엄마를 향한 ‘나’의 서술은 다소 신경증적이다. ‘나’는 자식에게 모종의 돌봄과 부양을 애매하게 요청하는 엄마의 화법에 대해 속으로 불만을 토로한다. 이 불만은 문단이 몇 번 나눠지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호흡으로 진행된다. 그만큼 ‘나’는 피부양자로서의 엄마와의 관계에서 숨 막히는 답답함과 부담감을 느낀다.
엄마는 ‘나’에게 병원에 동행해줄 것을 애매하게 요청하고 결국 “나도 날짜 맞춰볼게”(144쪽) 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들은 부인과에서 진료를 본다. 엄마에게 생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생리’는 엄마에 따르면 “그거”라고 표현된다.) 갱년기 증상으로 봐도 무방할 나이지만 의사는 혹시 모를 가능성을 대비하여 임신 가능성을 확인해보자고 말하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푸하학” (147쪽) 웃어버린다.
‘나’는 엄마와 검진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면서 엄마가 남자친구 ‘박 씨’를 떠올리며 조금은 진지하게 임신 가능성을 염려하고 있음을 눈치챈다. 기다리는 동안 약국에 가서 임신진단테스트기(이 또한 “그거”라고 표현된다.)를 사 올까 묻는 내게 엄마는 별일 없을 거라며 쓸데없는 데 돈 쓴다는 말로 일축한다. 그러나 중년이 다 되어가는 딸과 갱년기를 앞둔 엄마, 두 여성에게 임신일 수도 있다는 모종의 가능성은 설마 하면서도 결코 일어나지 않아야만 하는 불행에 가깝다. 모친에 대한 부양부터 자신의 삶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제적 부양을 담당해야 하는 딸의 경제 활동은 순탄치 않고, 당장 임신에 따른 몸의 부담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탓이다. 임신이 기쁨이고 행복이고 하는 문제이기 이전에, 누가 어느 시점에 어떤 경위로 ‘임신 가능성’이 발생했으며, 이 ‘가능성’이 과연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소설은 보여준다.
죽어라 일하면서도 비정규직을 탈출할 길 없는 ‘나’의 입장에서 노인이 되어가는 엄마에게 적극적인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에 더해, ‘엄마의 임신 가능성’이란 부양자로서 자신의 책임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엄마의 임신에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도리가 없지만 동시에 엄마의 난처함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 ‘나’ 또한 엄마와 마찬가지로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성’이라는 점은 그 어떤 설명 없이도 엄마의 불안을 헤아리게 만든다. 또한 ‘노년기 여성’이자 자신의 ‘엄마’가 임신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주는 현실적인 압박감 (안전한 출산은 가능할지, 향후 아이는 누가 어떻게 볼지, 경제적인 부분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은 그녀가 어머니의 딸이기 때문에 직감하는 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패션 업계의 어시스턴트로 일하면서 업무에 치이고 연인과 점차 데면데면해진 ‘나’ 또한 최근 ‘그게’ 없다. ‘나’는 엄마가 느끼는 불안을, 비정규직 여성으로서, 임신했을 지도 모르는 엄마를 돌보는 자녀로서, 언제든지 임신 가능성이 있고 언제든 그 부담을 짊어져야만 하는 여성으로서 ‘그거 없음’에 관여하고 있다.
소설은 모녀가 바로 그 ‘임신’을 경유하여 거듭난 관계임을 관통하고야 만다. ‘나’를 낳느라고 ‘어머니’라는 이름으로서 희생해야만 했던 엄마의 삶을 반추하면서 서로를 향해 모진 말을 내뱉어왔던 이들의 역사는 여성이란 정체성을 공유하기에 반목할 수밖에 없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반목은 이들이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부장제에 속박된 ‘여성 정체성’을 경유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 발생하는 것이다. 엄마 또래에 직업인으로서 자기실현을 하며 사는 여성 강연자를 보며 엄마에게 좀 더 근사하게 살라고 한마디 거들기 시작하면, 엄마는 으레 유식한 자녀의 괄시에 눈물을 훔치곤 했던 일련의 역사를 돌이킨다. 이러한 상상 끝에 “아 그러게 누가 나 낳으랬냐고 또 내 탓이냐고!”(155쪽) 속으로 외치던 ‘나’는 엄마가 임신이 아니라는 진료 결과를 듣는다
진료를 마치고 엄마의 애인 ‘박 씨’와 식사를 한 모녀는 술에 취한 ‘박 씨’를 거든다. 엄마를 배웅하는 ‘나’는 엄마 집의 깜빡이는 전등을 갈아주기는커녕 엄마에게 취객 뒤치다꺼리나 하게 하는, 진료에 동행해주지도 못하는 남자에 대한 생각을 애써 물린다. 단지 엄마가 곧 완경할 것이며, 이를 어떤 식으로 ‘축하’해야 할지 ‘나’는 고민한다.이 소설의 제목이 ‘엄마의 완성’이라는 점, 그리고 어머니가 ‘완경’을 앞두고 있다는 점은, 적어도 ‘완성=완경’이 아니라는 점만큼은 명백하게 보여준다. ‘엄마’는 어떻게 완성되는가? ‘엄마’는 세간에서 부여하는 ‘엄마다움’을 벗어날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의 가능성을 열어보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교차, 최소한의 접점만을 지닌다는 것
정선임의 「바다 가는 날」(『현대문학』 7월호)은 ‘두 딸’과 ‘두 어머니’의 관점을 동시적으로 조명한다. 단, 명애, 연분이라는 삼대 여성이 바다를 보러 가는 내용의 이 소설은 인물의 이름을 소제목으로 제시함으로써 각자의 시선을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서사를 전개한다. 이로써 소설은 ‘가부장제’를 관통하여 형성된 세 여성의 관계성이 각자의 관점에서 어떻게 다르게 비춰지는지 보여준다.
명애와 연분은 남편을 잃고 살아가는 여성이다. 연분은 남편이 죽은 이후 폐암 판정을 받았으나 연명 치료를 하지 않기를 결정함에 따라 딸 명애와 동거하게 되었다. 명애는 남편이 병사한 이후 엄마 연분을 모시며 살고 있다. 남편 살아생전 시부모는 돌아가셨고 또 다른 자녀인 현은 결혼시켰으며 딸인 단은 독립했다. 그녀는 단과 때때로 만나 밥을 먹고 단의 소설을 찾아 읽기도 한다. 명애는 단에게 생활 전체를 의존하지는 않지만 시대가 빠르게 변화하고 자신은 늙어감에 따라 적응하지 못하는 생활의 기술들을 다루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단의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단에게 의존하지 않고자 부단히 스마트폰 수업을 듣고, 영어 수업도 듣는다. 그녀는 자식에게 의존하지 않고 시대에 뒤처지지 않으려 애쓴다.
단은 아빠의 유언을 지키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단은 엄마와 함께 살지도, 운전을 하지도 않는다. 이에 운전대는 내내 엄마인 명애가 잡게 되었다. 단은 독립한 이후에 때때로 엄마를 찾아오고 할머니를 돌아본다. 단은 최근 부정 출혈이 있었고 “‘임신을 생각한다면’” 수술하는 게 좋을 거라는 진단을 받은 상태다. 의사는 임신 가능성 이외에도 암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는 병이라며 수술을 권한다. 명애와 연분은 이 사실을 모른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엄마 그리고 할머니와 거리를 두며 살아가고 있는 단은 때때로 엄마에 대한 소설을 쓴다. 단은 자신이 소설을 통해 엄마 흉을 본다고 생각하며 부끄러움을 느낀다. “흉을 보고 미안해지고 그러다 상대방이 이해되는”(46쪽) 것이기를 바라면서, 그녀는 지금 쓰는 소설 속 ‘엄마’를 ‘나’로 고쳐 적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연분은 섬망 증세가 있는 노인이다. 그녀가 의지할 데라곤 딸 명애밖에 없다. 연분은 명애의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종종 잊는다. 그녀는 바다를 보고 싶어 하고, 명애가 운전하는 차에 탑승하여 손녀와 함께 바다를 보러 간다.
세 여성은 바다를 보러 가기 위해 섬에 접어든다. 섬에 들어서 갑자기 멈춰 선 차를 두고 근처 카페에 들른 단과 명애는 문득 연분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연분을 찾던 모녀는 휴게소 근처 언덕배기에 위치한 한옥에서 나눠 먹던 땅콩을 까먹고 있는 연분을 발견한다. 연분은 단지 바다를 보고 싶어서 조금 더 높은 곳에 올라왔다고 말한다.
이 소설에서 세 모녀 간 갈등은 증폭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생애 주기에 이르렀음에 저마다 기구한 사정이 있고, 모종의 가정사는 세 여성을 가로질러 그들을 ‘가족’으로 묶고 있음을 보여줄 따름이다. ‘단’, ‘명애’라는 소제목을 달아 일인칭 서술자를 교차시켜 서사를 이끌다가 소설의 끝에 단 한 번 ‘연분’의 발화를 드러내는 형식 또한 이를 잘 보여준다. 각 인물은 서로의 삶에 엮여 있되, 청년/장년/노년의 여성이 겪는 어려움을 개별적으로 예각화한다. 이러한 쓰기의 방식에서 각자의 엄마, 할머니, 그리고 딸 혹은 손녀는 ‘지금’ 각자 삶의 한 풍경으로 배치되어 있되 각자의 곤란을 서로에게 침범시키지 않는다. 이렇듯 일인칭 진술을 활용하되 인물 간 거리감을 좁히지 않는 서술의 방식은, 2, 30대 청년 여성, 60대 중·장년층 여성, 그리고 80대 노년 여성의 삶이 결코 ‘같은 여성’이라는 정체성만으로는 완전하게 이해되거나 비춰지지 못하는 부분이 있음을 드러낸다. 이로써 독자는 ‘여성’이라는 공통된 정체성이 포섭하지 못하는 서로 다른 생애 주기별 여성의 곤란을 보기도 하지만, 그만큼 동질화된 정체성으로서의 ‘여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목격한다.
이렇듯 서로가 연결되어 있되 속사정을 전부 알지 못한 채로 서로에 대해 진술하는 소설의 형식은 ‘여성적 애도’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까? 단이 명애의 이야기를 자신의 주요한 화두로서 자기 소설에서 다뤄내고 있다는 것, 소설에서 재현된 ‘어머니’ 상에 대해서 자신을 비춰 보지 않을 수 없는 명애가 되도록 무심한 듯 굴지만 섭섭한 소회를 숨기지는 못하는 것, 그런 명애를 두고 단이 당혹감을 느끼는 것, 이 모든 상황을 암시적으로 알고 있으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연분에 이르기까지. 각 인물의 삶을 하나의 선이라 볼 때, 세 개의 선은 포개지는 대신 서로를 스치면서 최소한의 접점만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이들의 시선이 교차한다는 사실은, 그것이 하나로 겹쳐진다는 뜻이 아니라, 아주 일부를 맞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약 ‘여성적 애도’가 온전하게 겹쳐지는 여성의 삶이 아니라, 그 거리감을 순순히 인정하고야 마는, 그러나 미처 예상치 못한 접점에서 쉽게 허물어지기도 하는 이러한 ‘강력한 마주침’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헤아리는 것이라 하면 어떨까. 삼대 여성이 서로의 아픔에 관여하되 그것을 완전하게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하지는 못하리라는 이 거리감은 바로 그녀 자신들을 독립적 개인으로서 인정하는 최후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 1)「* 피에르루이 포르, 『어머니와 딸, 애도의 글쓰기』, 유치정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4, 26쪽.
- 2) 같은 책, 36쪽.
- 3) 이 글에서 ‘엄마’라는 표현을 쓴 까닭은 두 소설에서 호명되는 ‘어머니-여성’이라는 존재가 딸과 보다 밀착된 관계를 형성하는 존재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아빠’ ‘엄마’는 유아어의 일종이며 문어文語에서 일반화된 것은 훨씬 이후라고 본다. 한국의 경우 “1970년대 이후 불어닥친 平等, 都市 集中, 經濟的 豊饒, 女性의 社會進出, 두 자녀 갖기, 核家族制度 등을 배경으로 어린이말[幼兒語]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呼稱語로 당당하게 자리 잡은 것이 ‘아빠’와 ‘엄마’”(강병륜, 「호칭어呼稱語 ‘아빠/아버지·엄마/어머니’에 대한 연구硏究-초등학교初等學校 교과서의 부父·모母 호칭어 정립을 위하여-」, 『어문연구』29권 2호, 2001, 265면)라는 것이다. 한국적인 맥락 위에서 설명된 것이기에 ‘엄마/어머니’의 일반화된 의미라고 볼 수는 없겠으나, 이 지면에서 한국 소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 한정하여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여볼 수 있을 것이다. 두 편의 소설은 모두 2020년대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5, 60대에 해당하는 여성 인물을 ‘엄마’라 호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설 속 모녀는 1970년대 이후의 영향 속에서 꾸려진 ‘가족’으로 볼 수 있다. 지면 관계상 상술하지는 않겠으나, 1970년대 이후 도시 집중과 핵가족화 및 정부의 ‘중산층 되기’ 이데올로기의 생산과 이후 ‘안온한 가정’이라는 형식 속에서 배치된 ‘어머니-여성’의 균열을 보여주는 한 호칭이 ‘엄마’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 글에서는 ‘엄마’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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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자들의 에파누이스망 이주란, 「겨울 정원」(『문학동네』 2025년 봄호) 성현아 매체론자이자 문학비평가인 월터 옹Walter J. Ong은 자신의 글 「The Writer's Audience Is Always a Fiction」에서, 낭독자에 의해 구술되는 소설을 듣고 향유하던 이전의 방식에서 벗어나 서술된 소설을 묵독하게 된 독자는 지속적으로 허구화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독자가 인물의 시선을 따라, 작품을 읽을 때 머무는 실제 공간과 무관한 소설의 시공간에 자기를 위치시키며, 작가가 맡긴 역할을 스스로 연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다지 어려운 활동으로 여겨지지 않는 소설 읽기란 실상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복합적인 행위인 셈이다. 그렇다면 쓰기-읽기의 과정이 보편화된 현시대에서의 소설은 독자가 인물에게 온전히 이입하여 그의 몸으로 세계와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지금의 문학장에서 소설에 기대하는 바는 변화하는 현실의 문제를 새롭게 의미화하고 다양한 인문학적 질문을 창출하는 것일 테다. 이 또한 매우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소설이 갖춰야 할 근본적인 미덕은 내가 아닌 타자의 삶에 몰입하게 하여 이해의 폭을 넓힐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좋은 소설은 독자 한 명 한 명에게로 다가가서 그들을 각자가 감응의 기쁨으로 충만히 개화(開花)한 상태인 '에파누이스망(épanouissement)'으로 이끈다. 이주란의 「겨울 정원」은 그 역할을 너끈히 해낸다. 촘촘한 의미화의 그물로부터 매끈히 달아나는 이 소설은 따라 읽는 이들이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중심인물인 '혜숙'으로 머물 수 있도록 한다. 말하자면, 진정으로 허구적인 독자가 되게 한다. 화자인 혜숙은 육십 세 여성이자 칠 년 차 청소 노동자이며 소설가인 '미래'의 엄마다. 중졸인 그는 교양 있고 자기 취향이 확고한 이들을 선망하지만, 자기 일을 성실히 해내는 데 자부심과 만족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때때로 주눅 들기도 하나 결코 비참해지지는 않는 혜숙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풍부한 지식과 균열을 포착하는 섬세함을 지닌 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꿋꿋이 살아간다. 깊이 생각하지 않는 혜숙의 태도는 단순한 것이기도 하지만, 모욕을 주고받는 사회에서도 따스한 시선을 유지하고 주어진 일상을 정성스레 살아낼 수 있게 하는 든든한 토대이기도 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혜숙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된 간결한 문체이다. 이는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조화를 이룬다. 혜숙이 내뱉을 만한 어렵지 않은 단어들로 조합된 문장은 그와 완전히 일치된 채로 사건을 수월하게 따라갈 수 있게 돕는다. 청소 일을 하는 여성 노동자가 소설에 등장할 때면 계급성과 고용의 불안정성, 젠더 위계의 문제가 두드러지곤 하는 데 반해, 이주란의 소설은 그러한 문제들이 도식적으로 나뉘지 않는 현실의 다면성을 담담히 그려낸다. 그렇다고 부당한 고용 방식을 낭만화하지는 않는다. 고용 당사자가 재계약 여부를 알 수 없는 "뉴스에 나올 법한" 불합리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계획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와 진짜. 와 세상에"와 같은 외마디 감탄사로 반응할 수밖에 없음을 핍진하게 그린다. 이주란은 다양한 직군과 직함을 지닌 이들이 갈등하는 자극적인 모습을 전시하는 대신, "전부 똑같은 계약직"이기에 서로 도우려고 하는 이들 틈에서 혜숙이 자기 일을 잘해내기 위해 성실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쓰레기장에 무엇이든 아무렇게나 버려놓을 때도, 혜숙은 참는다. 어디다 분노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단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매일을 살아내려면 매번 분노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녹록지 않은 삶에서 각자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 독자들은 그녀가 단순하다기보다는 "단순함이라는 개념에 성실"하려고 노력해온 사람임을 이해하게 된다. 무엇이든 이분법적으로 보지 말라며 복잡성을 강조하는 딸 미래 역시 "자주 충분히 단순하다"는, 그 입체적인 모습까지 애정어린 시선으로 담는 혜숙을 따라, 우리는 꽃이 지고 애인이었던 '인환'마저 떠난 텅 빈 정원을 쓸쓸히 바라보게 된다. 혜숙만의 만개(滿開)를 바라는 심정으로.
1. 지난 호에 덧붙여 : 완전한 미래에 대한 몽상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 마지막 챕터 ‘원의 현상학’에는 ‘새’에 관한 곱씹어볼만한 진술이 제시된다. 바슐라르는 ‘새는 거의 전적으로 구형이다’라고 말한 미슐레의 문장과 ‘그 둥근 새소리’를 노래한 릴케의 시구를 곱씹어본 뒤 이렇게 말한다. “둥근 존재의 둥근 소리는 하늘을 둥글게 하여 둥근 천정으로 만든다. 그리고 둥글게 된 풍경 속에서 모든 것이 쉬고 있는 것 같다.”1) 여기서 시인들이 말한 ‘새의 둥긂’으로부터 바슐라르가 연상한 것은 새의 둥지이다. 하늘에는 그 어떤 것도 새를 위협하는 대상이 없다. 그렇기에 비상하는 새는 가장 완전한 쉼터에 머물다가 그 둥근 하늘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지는 듯하다. 하지만 새를 ‘둥글다고’ 느끼는 감수성은 한국인에게 낯선 것이기도 하다. 하늘을 곧 새의 둥지로 연상하는 상상력 또한 관습적이지 않다. 따라서 나는 조금 익숙한 맥락에서 ‘새의 둥긂’에 대해 해석해본다. 왜 새는 현대인에게, 더 정확히 말해 도심 속에서 새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시인에게 ‘둥글게’ 느껴질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에게 새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전진하거나 뒤로 물러나거나 고작 샛길을 택하는 게 전부인 사람의 운명과는 달리 하늘을 나는 새는 어디로든 비행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떠한 방향이든 택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이 바로 둥긂의 본질이다. 하늘을 나는 새는 둥글다. 그 둥긂은 인간이 소유해보지 못한 자유의 근본적인 심상이다. 자전거포를 지나며 생각한다 저 탐스러운 바퀴 하나만 나에게 팔면 안 되나 공중에 매달려 진열된 자전거들 중에서 자전거 말고 타이어 말고 그렇게는 안 판다면 훔치는 것도 안 되나 달리는 말의 네 발굽 지면에서 완전히 떨어지는 순간을 보려는 경마광의 호기심이 영화 탄생에 기여한 것처럼 내게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저 바퀴를 떼어내어 스크린에 한 사람의 침묵이 상영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지상에서 겨우 5밀리미터 떠 있는 사람일 텐데 겁먹지는 말자 그가 땅에 닿아본 적 없다는 것을 아직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주 조금 다른 것 가지곤 집중하지 않으니 개미 한 마리 밟아죽인 적 없다는 것은 끝까지 모른다 살리거나 죽이는 일 아니곤 관심 없으니 맨홀 뚜껑에 도톰하게 새겨진 장미꽃 음각화 빙상 위로 미끄러지듯 그가 지나가고 있다 그는 나, 그는 공중에 걸린 새 자전거, 그는 당신으로부터 계속 멀어지고 있다 스크린에 비친 풍경이 그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공중에 매달려 진열된 자전거가 기다리는 우연한 사건 맨홀 뚜껑을 훔쳐 달아나던 노인에 관한 보도를 읽다가 왜 이미지는 모두 동그란가 메아리의 발꿈치는 정말로 동그란가 딴생각에 잠겨 그의 편자가 지상에 닿는 잠깐의 순간을 보지 못한다 유계영, 「이미지 서클」 전문(『현대문학』 2025년 3월호) 마찬가지로 ‘왜 이미지는 모두 동그란가’라는 유계영 시인의 물음 속에서는 시 언어의 본질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깃들어 있다. 시적인 이미지의 배후에는 근본적으로 둥긂에 대한 지향이 있다. 세상을 둥글게 느끼는 감각은 그 어떤 방식으로든 자유롭게 세상을 몽상하기를 꿈꾸는 시인의 욕망을 투영한다. 이렇게 묻고 답할 수 있다. 왜 시인에게 자전거 가게의 바퀴 하나조차 ‘탐스러워’ 보이는가. 왜 그의 머릿속에는 지상에서 네 발굽이 지상에서 모두 떨어지는 경주마와 ‘5밀리미터’ 떠 있는 사람이 떠오른 것일까. 왜 그는 가게 벽에 걸린 자전거를 ‘공중에 걸린 새 자전거’라고 기록했을까. 「이미지 서클」의 배후에 놓인 몽상은 결국 바슐라르가 원의 현상학이라고 불렀던 것, 혹은 새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살고 싶다. 시인은 시를 통해 ‘더 높은 곳’에 도달하는 한 걸음을 몽상한다. 따라서 우리는 완벽한 미래란 완벽하게 둥근 이미지에 대한 몽상으로 귀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바라는 것은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는 자유, 더 나아가 인간 그 이상일 수 있는 높은 장소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도달하는 높이가 잠깐의 도약이거나 ‘5밀리미터’ 정도의 비상에 지나지 않듯, 유계영 시인의 비상은 창공까지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몽상에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불안을 드러낸다. ‘완전한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해답을 가진 사람은 없듯 어떤 시인도 자신의 몽상을 완전한 해답처럼 여기지 않는다. 시인은 ‘둥글다’라는 미적 심상 속에서 자유의 완전성을 어렴풋이 감각하고 그 방향으로 손을 뻗을 뿐이다. 꿈속에서조차 완전한 비행을 상상하기란 아주 어렵다. 미래에 대한 시적 상상력은 대개 직선로와 완전한 둥긂 사이의 어중간한 에움길의 이미지로 귀결한다. 예컨대 이상이 사로잡혔던 직선로의 이미지가 있다(「오감도 시제일호」). 한편 정현종이 사랑했던 둥근 이미지가 있다(「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유계영 시인이 그려낸 ‘둥근’ 이미지는 그 사이에 놓인다. 달리는 말처럼 잠깐의 탄력으로 현실을 벗어나기. 눈앞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조금은 뒤틀어서, 자신의 운명을 향해 비스듬하게 걸어가는 에움길이 곧 시인이 그려내는 미래의 이미지이다. 2. 문학적 시간론에 입각한 부조리의 정의 앞서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규정을 설명하였다. 문학적 시간은 물리적 운동보다 내면의 운동이며, 내면의 운동은 곧 성숙이고, 성숙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는 바꿀 수 있지만 무엇인가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하나의 역설은 우리의 내면에서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내적 자아, 타인과의 관계, 세상의 고난 중에서 무엇인가는 ‘불변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고속도로에서 같은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들이 정지한 것처럼 보이듯, 모든 것이 변화하는 혼란 속에서 자아는 성숙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자면 역설은 다음과 같다.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아득한 대상이 없다면 그것을 극복해가고 있다는 실감 또한 없다. 그리고 숭고한 절망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속에서 시간을 지속하게 만드는 뿌리이다. 루소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었고, 따라서 성숙은 자연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단련하는 일이었다. 프로이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유년시절 부모와의 관계였고, 따라서 성숙은 부모를 대신할 애틋한 만남과 승화의 방식을 찾아 헤매는 것이었다. 반대로 모든 것이 변화할 뿐이라면, 즉 자아도 타인도 세계도 영문 모른 채 그저 흘러가는 것이라면 근본적으로 거기에 ‘내면의 흐름’은 없다. 하루는 나무와 나무가 만난다. 그리고 서로의 어금니에 씨앗을 심는다.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만난다고 써도 나쁘지 않았겠네. 그래서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만난다. 씨앗은 달아오르고, 달아오르는 씨앗이 중얼거린다; 언제 폭발해도 상관없다고. 그리고, 폭발과 상관없이 그저 살아가도 나쁘지는 않다고. (항상 그게 문제야- 늘 그렇듯이.) 하루는 구름 사냥을 하며 중얼거린다; 휘영청 달무리 깊은 골 어딘가 드러누워 부운浮雲을 핑계 삼아 술잔만 치며 살고 싶다고. 치고, 치고, 또 침으로써 나는 나를 잠시라도 떠나야만 하겠다고. (네가 너를 떠나고 싶다는 말은 난센스 같군.) 발 없는 새가 그만 떠나고 싶다는 말처럼 들려. 디딜 수 없는 (위태한)나무를. - 나무의 자리에 삶이 들어가면 뭐, 나쁘지 않았을지도. 참, 집결지는 무악산이야. 잊지 말길. (그리고 잊어도 나쁠 것은 없다는 너- 늘 그렇듯이) 또 하루는 네가 중얼거리면서 중얼거린다- 늘 그렇듯이 동시에; 휘영청 달무리 적막한 산하 이런 거 필요 없다고. 나는 뜬구름이란 뜬구름은 다 끌어내려 앉히기 위해 사냥을 벌인 것이라고. 나는 나를 떠날 수 없겠고-늘 그렇듯이; 포승을 엮어서 뜬구름들 다삼킬 것이라고. (구름은 오븐보다 팬에 구워야 더 맛있다.) 하루는 CU무악산점 앞에 널린 생선 박스 중 하나를 주워 네가 너를 수납하고, 포승을 칭칭칭칭칭칭칭칭 감는다. (항우와 우희의 절절한 러브?) 진부하군. 그러나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을 때마다 숨을 들이쉼과 동시에 내쉬어 보시길 권유! 왜 이렇게 비좁지?- 당신과 당신 사이에 낀 당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당신으로 곧잘 살아왔듯이. 그럼 별것 아니라고 느낄지도.) 이제 매일을 하루처럼 사는 당신에게 귀 기울여 보자; 이 생선 박스는 내가 나의 생활을 독려하는 공간이자, 아래로 아래로 구름을 끌어내리길 반복하는 내가 있어야 할 비바리움이다. * 내가 생물이라는 조건하에서만. (내가 상상한 나는 발음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식도를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뇌관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갈비를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배꼽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항문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없음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발아를 가질 수 없다) 박지일, 「쓰면서 쓰고, 읽으면서 읽은 것들」 전문 (『시와사상』 2025년 봄호) 여기서 내용보다 먼저 감상되어야 할 것은 어조이다. 이 시에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 따라서 필연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도 반대로 결코 선택해서는 안 되는 것도 없다는 투로 모든 것이 증언된다. 최초에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접붙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나무와 나무가 만나 씨앗을 잉태했을 때 “언제 폭발해도 상관없다고. 그리고, 폭발과 상관없이 그저 살아가도 나쁘지는 않다고” 말하며 생명의 탄생이 대수롭지 않게 다뤄진다. 또한 ‘나’는 뜬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독백하면서 “나는 나를 잠시라도 떠나야만 하겠다고” 말하지만, 그 목소리는 절박하게 ‘내 삶’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소망이라기보다 그저 ‘나쁘지 않은’ 정도의 발상에 가깝다. ‘나’는 약속 장소에 대해서도 잊어도 좋다고 말하고, 또한 “당신과 당신 사이에 낀 당신”에게 숨을 내쉬어보라고 권유해보다가도 당신이 “별것 아니라고 느낄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덧붙인다. 조금 더 세심히 내용을 분석해보자. 여기서 희구되는 것은, 앞서 논의한 유계영의 시와 마찬가지로 자유다. 시인은 저 위태한 나무가 씨앗으로 ‘폭발하는’ 순간과 저 구름이 흘러가고 흩어지듯 ‘내 자신을 잠시라도 벗어나는’ 순간을 상상한다. 당신에게도 당신이라는 그 비좁은 존재를 벗어나보라고 권유한다. ‘나’에게 삶은 “생선 박스” 같은 것인데, “아래로 아래로 구름을 끌어내리길 반복하는 내가 있어야 할 비바리움”처럼 세상은 날 사육하는 것만 같고, ‘나’는 그 안에서 더 이상 생명이 아닌 것만 같다. 하지만 다시 묻자. 도대체 박지일 시인을 가두고 있는 ‘세계’란 무엇인가. “나는 나를 떠날 수 없겠고-늘 그렇듯이; 포승을 엮어서 뜬구름들 다삼킬 것이라고”라고 시인이 독백할 때, 그를 ‘포승하는’ 자는 누구인가. 진정한 의미의 절망은 그의 시에서 그 누구도 그를 구속하지 않았다는 것, 단지 모든 타자의 이미지가 구름이 흘러가듯 스쳐갈 뿐이라는 사실이다. 분명히 유계영의 시에서는 ‘멀어지는’ 아득한 자전거의 이미지가 존재했다. 유계영에게는 닿을 수 없는 대상을 향한 간절함이 내재했다. 반면 박지일의 시는 씨앗이 폭발하여 싹을 틔우든, 구름이 흘러가든, 그저 반복되는 ‘하루’만이 진술될 뿐이다. 이 시에는 뚜렷한 원근감이 없다. 그의 시에는 내적 시간의 닻이 될 절망이 없다. 가없이 ‘반복하며’ 인간을 끌어내리는 덧없는 시간만이 존재한다. 내면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의 존재 또한 덧없는 것임을 뜻한다. 따라서 “~을 가질 수 없다”라는 진술 구조의 반복은 존재 상실을 가리킨다. 상실의 징후는 “내가 상상한 나는 발아를 가질 수 없다”라는 취소선의 형식으로 극대화된다. 이때 부조리의 개념을 빌려 시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겠다. 부조리란 무엇인가. 알베르 카뮈가 설명했듯 부조리는 세상의 무의미에 대한 깨달음으로터 시작한다.2) 삶은 마땅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반드시 지금의 나로써 지속할 필연성도 없다. 마찬가지로 박지일의 시에서도 세상은 어떤 식으로 대하든 ‘별 것 아닌’ 무의미한 대상처럼 다뤄진다. 하지만 차이도 있다. 카뮈가 묘사한 실존적 비극은 삶의 무의미를 깨달은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다. 부조리란 삶의 무의미함을 깨달은 이후에도 ‘사는’ 것을 택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반항하는 자의 비극이다. 박지일 시인의 시, 그리고 이전 호에서 분석했던 ‘부조리’에 가까웠던 시들을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다. 어떤 의미로 그들의 시는 부조리의 절반만을 상연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삶의 무의미성을 재현하는 것이다. 박지일 시의 부조리는 모든 것이 그저 덧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내면으로부터 ‘시간의 흐름’을 추방하는 형식이다. 삶의 무의미함에 사로잡힌 자에게 오늘과 내일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듯, 가장 내밀한 절망을 닻으로 삼지 않는 시 작품에 내면도 시간도 없다. 이러한 반문도 뒤따른다. 모든 것을 무의미하다는 단언은 진정 그가 극복할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절망을 감추는 방식은 아닐까. 이에 관한 대답은 미루어두자. 이 시에 내재한 무의미가 진실한 것이든 연출된 것이든 박지일의 시는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사체험인 셈이다. 3. 시적 현재란 무엇인가 내면의 시간이 ‘흐르려면’ 역설적으로 우리의 내면에서 불변하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 고향은 언제나 먼 곳인 것처럼,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부모는 커다란 것처럼, 닿지 않는 것이 눈앞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도리어 우리가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준다. 이렇게 말한다면 시는 언제나 소원 성취를 위한 장르, 즉 미래를 향해 투사된 우리의 욕망을 표현하는 장르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욕망은 언제나 생생한 것이다. 욕망에 뒤따르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은 지금 나를 살아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적 시간, 특히 시 장르에서 증언되는 모든 시간성은 근본적으로는 현재이다. 수많은 논자가 강조했듯 시적 시간의 본질은 ‘충만한 현재’이다. 충만한 현재란 기본적으로 시인이 그의 자아가 가장 충만한 순간을 시로 기록한다는 것, 즉 그가 살아낸 고통스러운 순간이나 미래에 다가올 기쁨을 종합하여 가장 아름다운 ‘지금’을 기록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처럼 누군가 오롯이 삶을 살아낸 나 혹은 경이로움을 간직한 ‘지금’을 기록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이와 비슷하게 한스 마이어호프는 문학적 시간의 현재를 ‘통합’이라고 명명했다. 사람의 의식 속에서 시간은 무질서하게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삶을 통합하는 ‘나’라고 동일자를 전제하기 때문이다.3) 그런데 여기서 음미해볼 것은 충만한 현재가 아니라 그러한 현재를 ‘기록하는’ 행위가 시간성에 미치는 영향이다. 다시 말해 충만한 현재에는 언제나 이중의 시간이 존재한다. 어떤 삶을 살았던 ‘나’와 그것을 기록하는 ‘나’라는 이중의 시간 말이다. 이 둘 중에서 무엇이 더 근본적인 ‘시적 현재’인가. 사람들은 내게 하류를 맡기고 흘러갔다 떠내려오던 것들이 전부 내가 타지 않은 종이배였을 때 아…… 나는 물길로 태어난 것이었구나 이미 말라버린 뒤의 이야기 너울성 파도, 해일, 급류, 태풍과 물보라 속에서도 물은 서로 헤어진 적 없다 안개를 나눠 가진 사람들과의 약속이 있어 나는 이 길을 지우지 않고 기다림 넘어졌었던 비탈길을 그러모아 돌아갈 길을 빚는다 떠나기 전엔 왜 스스로를 붙잡는 기행이 되는지 젖은 수건이나 물기 맺힌 접시의 반짝임을 보며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둔다 고요가 너무 추워서는 안 되니까 한꺼번에 오지 않는 일로 그들이 나의 슬픔을 아껴주었다면 물 한 잔 허겁지겁 들이키게 된다 마른 식도로 흐르는 것을 느낄 때 내가 나를 살려주는 기분은 잊지 않아야겠다고 눈물을 하는 사람 얼룩을 일으키는 사람 방울로 맺히는 사람 물의 직업을 베끼다 흘러가는 얼굴 꼭 붙잡은 채로 꺾인 길에서도 만날 수 없어 웃는 얼굴로 하나씩 지워가는 물녘의 약속들 서윤후, 「물길 빈티지」 전문 강물이 곧 시간의 흐름에 대한 원형적 상징임을 떠올려보면, 비교적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 물기는 곧 사람과의 관계로도 읽을 수 있겠다. 우선 사람들의 ‘하류’가 나의 ‘물길’로 밀려오듯, “너울성 파도, 해일, 급류, 태풍과 물보라”와 같았던 만남 때문에 괴롭고 아팠던 시간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지나간 일이다. “넘어졌었던 비탈길을 그러모아/ 돌아갈 길을 빚”어내듯, 시인은 아픈 과거가 모여서 지금의 ‘나’를 이룰 수 있었다고 담대하게 말해본다. 때론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두며 슬픔을 털어놓고, 반대로 타인의 슬픔을 품으며 그는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 타인의 슬픔을 견디고, 앞으로의 슬픔을 견뎌내는 ‘지금’에 대해서 고백할 때, 우리는 이 시가 그려내고 있는 충만한 현재를 확인한다. 저 묵묵한 강처럼 그는 자신을 이루었다. 한편 나는 이 작품에서 한 겹의 ‘현재’를 더 읽어낸다. 그것은 바로 “눈물을 하는 사람/ 얼룩을 일으키는 사람/ 방울로 맺히는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읽어낼 수 있는 서술의 시간, 즉 수동적 표현을 능동태로 바꾸어 기록하는 자의 시간이다. 서윤후는 ‘눈물을 흘린다’라고 쓰는 대신 ‘한다’고 섰고, ‘얼룩이 번진다’라고 쓰는 대신 ‘얼룩을 일으킨다’라고 바꾸었다. 이러한 전환에는 시간을 견뎌내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창조해가는 능동적 존재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나는 시적인 시간성, 즉 충만한 현재의 본질은 바로 이 기록하는 행위 자체에 내재해있다고 있다고 한다.왜 새벽은 사람은 그의 가장 고통스러운 과거 앞에 세우는 것일까. 그리고 시인은 그 불면의 새벽에서 쓰는 행위를 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바로 쓴다는 행위 자체가 우리가 그 경험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수동적 위치로부터 그 경험을 ‘기록하는’ 자의 위치로 옮겨놓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누구나 어떤 잔혹한 상처와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 있었다. 누군가는 운이 좋게 그것과 직접 대면하고 극복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픔은 대면하기도 전에 과거가 되고 속수무책으로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어떤 시간이든 그 속의 타자를 현재로 호명한다.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기를 ‘선택한다’. 서윤후 시인의 시는 바로 충만한 현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나’를 이루는 그 모든 시간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눈물을 행하듯, 마음을 마음이 다하도록 행하는 것이다. 1) 가스통 바슐라르, 곽광수 역,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392쪽. 2) 알베르 카뮈, 박언주 역, 『시지프 신화』, 열린책들, 2020, 32~35쪽 참조. 3) 한스 마이어호프, 이종철 역, 『문학 속의 시간』, 문예출판사, 2003, 56쪽 참조.
시적인 미래에 대하여―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2 1) 1. 미래 상실 현대시에는 미래를 그려낼 가능성이 남아있을까. 이것이 송현지 평론가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격월평을 읽으며 떠올렸던 질문이었고, 이 글의 저자 또한 그러한 물음 속에서 동시대의 시를 살핀 뒤 조심스럽게 해답을 구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송현지는 어떤 찬사나 비판도 유보한 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이제 ‘미래’는 더 이상 내가 알던 멀고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바로 다음 시간. 현재와 ‘1인치 정도’ 다른 자리와 높이에 머무르는 시간.”2) 이는 우리 시대의 시에서 구체적 생활에 기대어 미래가 표현되고 있음을 해설하는 내용이지만 곱씹어볼수록 오히려 현대시가 내포한 문제를 암시하는 듯한 문장이기도 하다. 냉소적으로 읽는다면, 이것은 현대시에서 그려낸 ‘미래’가 자연재해나 사회의 변혁과는 거대한 사건과는 무관한 다락방에서 일어나는 사건, 아니면 고작 생활 반경의 ‘1인치 정도’ 둘레에서 일어나는 몽상에 지나지 않다는 진단처럼 들린다. 다시 묻자. 누군가는 사이보그와의 공존을 꿈꾸고 누군가는 화성 개척을 꿈꾸는 이 시대에 시인은 어떤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수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통찰했듯, 사람은 시간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없고 단지 물질의 움직임으로부터 유추할 뿐이다. 한편 시인은 물질의 운동이 아닌 마음의 운동을 통해 세상을 통찰하는 길을 택한 자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난 수백 년간 마음의 변혁을 꿈꾸며 때론 시대의 선구자를, 때론 사회의 혁명가를, 때론 세계의 카나리아를 자처해 왔다. 그러나 동시대의 시가 사람의 마음을 ‘1인치 정도’ 움직이는 데 그친다면, 우리는 차라리 이 시대의 시인은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즉 주어진 인간성의 파수자를 자처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미래에 대해 상상하기를 포기하는 자세가 아닐까. 어제처럼 직장에 출퇴근하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들여다보다가 잠이 들기를 반복하는 것이 미래라면, 이제 더 이상 시인과 생활인의 삶을 구분할 수 없다면, 결국 시인은 수많은 현대인처럼 다 계획되어 있어서 이미 진부해져 버린 미래로 향해가는 셈이다. 더 이상 지평선 너머로 향하지 않는 두 눈이 있다. 매번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길을 산책한다. 그렇게 현대시는 미래 상실을 앓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것만 같다. 나는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읽는다. 혁명 후에 쓰인 자연의 성난 풍경 또한 읽는다. 그것은 나의 일. 그렇게 읽던 책을 덮으니 하루가 끝났다. 하루가 끝나도 뉴스는 멈추지 않고,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있고, 일렁이고, 나는 늙고, 다시 책 앞에 앉는다. 창을 열자 빛나는 칼을 삼킨 마술사처럼, 겨울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안은 알 수 없는 백색 진동과 고요로 뒤섞인다. 창을 닫아도, 난폭하고 날카로운 겨울은 내게 바짝 붙어서 있다. 떤다. 이 책이 얼기 전에 나머지를 읽어야 한다. 손이 떤다. 다 읽어야지만, 이 긴 하루가 끝날 것이다. 떠올린다. 풀이 눕는다. 하지만 어떤 풀은 죽고, 어떤 풀은 흔들리고, 어떤 풀은 죽은지도 모르고 여전히 파랗게 일렁이겠지. 떤다. 수영. 나는 저 풀들을 넘어, 죽은 수영의 나이를 넘어, 자꾸만 죽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나이가 되었구나. 내 마음에 살아남은 이가 없는 나이가 되었구나 생각하고 떠올리는 사이, 겨울의 차고 희디흰 장막이 책을 덮는다. 그 위에 손을 올린다. 손이 굽는다. 생활이 나를 세차게 때리고, 모든 약속이 깨져버렸을 때도,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 검은 물속에 잠겼을 때도 버리지 않았던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 마음도 굽는다. 수영. 달처럼 차고 날카로운 이것을 나는 읽을 수 있을까. 떤다. 굽은 마음과 손안에는 겨울이 숲을 무너트리는 그 시절의 소리만 가득하다. 그 시절, 몇몇 죽은 자들은 여전히 공장 여기저기를 배회하곤 했다. 김안, 「김수영 전집」 부분,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차라리 김안 시인은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의 회고에는 불안과 가책에 깃들어 있다. ‘해방’과 ‘혁명’이라는 단어를 심장으로 삼았던 시대가 있다. 시인은 김수영 전집을 읽으며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떠올린다. 그러나 시인은 다음과 같은 사실 또한 확신하고 있다. 김수영의 뜨거운 정신은 이제 차가운 ‘책’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혁명의 시간은 이제 기록일 뿐이고, 자신 또한 저 광장이 아니라 이 방안에서 긴 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이 세상의 계절은 “날카로운 겨울”일 수밖에 없다. 이때 겨울은 이젠 무색해진 과거를 뜻하고, 그 겨울을 칼날처럼 느끼는 시인의 마음은 수영의 정신을 온몸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가책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김수영 전집에 ‘손’을 올리는 행위는 하나의 제의에 가깝다.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라는 시구는 곧 김수영을 향한 추모, 그 혁명 정신이 돌보아야 했던 공장 노동자를 향한 추모, 마지막으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던 시인의 능력을 향한 추모를 뜻한다. 추모는 현실의 맥락에서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이지만 마음의 맥락에서는 누군가 욕망했던 것을 뒤따라 욕망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진정으로 향수되는 것은 수영도, 공장 노동자도 아니라 그들의 각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뜻을 품을 수 있었던 인간은 어디로 갔는가. 시인에게 시집을 펼치는 일이 제의와 같다는 말은 곧 추모가 마음을 보듬고 치유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작품에서 마음은 ‘굽는다’. 죽은 자는 세상을 ‘배회한다’. 근본적으로 이 시에서 찾아헤매는 것은 마음을 빗겨놓는 우회로이다. 현재를 여실히 살아낼 수도 없고, 미래를 꿈꿀 수도 없는 시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과거라는 우회로이다. 그것은 앞으로 살아내야 할 시간에 응답하는 김안 시인의 방식이다. 마음의 운동 혹은 변화가 곧 문학적인 시간의 본질이라면, 시적인 미래는 반드시 물리적인 미래를 전제하지 않는다. 김안 시인에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 당신의 빛 바랜 욕망에 응답하려 할 때 사람은 아직 실현하지 못했던 삶의 방식을 재현한다. 2. 극복할 수 없는 것에 터 잡기 ‘시간은 변화’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테제를 조금 더 문학적 어휘로 옮긴다면 문학적 시간의 본질은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 문학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방식이다. 성숙의 실마리는 반드시 미지의 탐구로만 획득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잊었던 과거로부터 발굴될 수도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현대시의 미래 상실은 곧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거나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잃은 자의 징후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섬세하게 분별할 것은 현재를 ‘벽’으로 느끼는 목소리와 현재에 자족한 자의 목소리는 근본적으로 상반된다는 사실이다. 김안 시인은 미래를 직설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음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미래를 소망하게끔 한다. 이제 동시대 문학과 문학적 시간에 대한 이해를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고자 한다.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장 단순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시간은 성숙(변화)이다. 그런데 생각해 볼 것은 이 세상에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두 손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듯 마음으로 이룰 수 있는 것 또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떠올려 보면, 근대의 위대한 철학자들 또한 그들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보다 그 무엇인가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절망을 깊이 사색했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것은 결코 바꿀 수 없다’라는 인식이 시대마다 달랐다는 점이다. 18세기 중엽 루소는 『에밀』을 집필하면서 자연은 절대 극복할 수 없으니 사람과 도구를 자연에 적응할 수 있게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20세기의 프로이트는 말년 동안 인류가 문명을 통해 자연을 극복했지만,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타인과 더불어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난제로 여겼다. 루소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었고, 프로이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이웃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우리에게 불변하는 사실은 무엇일까. 심심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해 여름 우리는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함께 보고 넷플릭스를 온종일 틀어 놓았다. 창밖에서 사람들은 노잡이의 얼굴을 하고 가히 영웅적으로 걸어다녔다. 심심해서 창밖의 사람들에게 뛰어들 수도 있을 것 같지. 사무라이의 칼을 횡으로 쥐게 한 다음 전속력을 달려들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렇지만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 그해 여름 우리는 배달 음식을 주문하고 우리는 나란히 누워 죽고사는 이야기를 지속하였다. 이왕 죽을 거라면 뚱뚱해져서죽고 싶어. 피자 한 판을 겹쳐서 먹다가 코로 치즈를 질질 흘리면서. 이왕 태어날 거라면 결코 끝나지 않을 성대한 파티를 시작합니다. 주최자가 강단에 서서 연설을 시작할 때, 샹들리에가 되어 모두를 다치게 하고 싶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혀에 틀어박혀서……. 검은 양념이 묻은 나무 젓가락을 씹으며 네가 말한다. 삽십 초에 한 번씩 유성이 떨어지고 있다. 어째서 우리가 가진 건 절망조차 가짜일까. 위대한 화가의 삶과 죽음을 다룬 애니메이션이 상영 중이고.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처럼. 그해 여름, 나는 망친 그림 속에 너를 두고 빠져나왔고 그림 속에서 너는 나를 그리는 중이다. 안 넘어진다. 가위바위보. 변혜지, 「럼펠스틸스킨」 전문, <현대시> 2025년 2월호 이 작품의 주조는 무엇인가. 작품 전반에서 분노와 장난기가 맴돈다는 것은 쉽게 감지할 수 있겠으나 더 깊게 자리하는 것이 세계에 대한 체념임을 읽어내야 한다. 분노에만 집중한다면 자칫 이 작품의 주제를 인간에 대한 혐오나 불신으로 오인할 수 있겠다. 분명 화자는 창밖의 사람에게 사무라이처럼 칼을 휘두르는 상상을 하고, 파티장의 샹들리에가 추락하듯 사람들을 다치게 만드는 상상도 한다. 여기에는 타인에 대한 냉소, 특히 인간을 장난감과 같은 대상으로 취급하는 냉소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 한편 제목은 유희성을 강화하는데, 독일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요정인 ‘럼펠스틸스킨’을 제목으로 택했지만, 내용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타당하지 않은 분노와 무의미한 유희성을 감지할 수 있는데, 그 두 정조의 뿌리에 놓인 것은 삶에 대한 체념으로 보인다.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라는 시구가 암시하는 바는 명백한데, 그것은 타인뿐만 아니라 ‘나의 삶’도 헛것이라는 인식이다. 내 생활은 가짜이고, 내 마음속 절망조차 가짜라는 진술 또한 뒤따른다. 결국 타자에 대한 공격성의 뿌리에는 바로 자기 부정이 놓인 셈이다. 근본적으로 부정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이 시의 내용을 물음으로 바꿀 수 있겠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란 의미 있는 것일까. 나와 저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든 이 세상은 무사하지 않을까. 내 존재가 행복하든 절망에 빠지든 창밖의 거리는 안녕하지 않을까. 자포자기하듯, 이 시의 화자는 우리가 ‘잡놈’에 지나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 이후 ‘나’와 타인을 아무렇게나 대한다. 이 작품의 주제는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부조리 문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처럼, 변혜지 시인은 충동적으로 살인을 꿈꾸는 화자를 등장시킨다. 하지만 이 작품에 묘사되는 폭력성의 크기는 그 반대급부로서 얼마나 이 현실에 자신이 얽매여 있다고 느끼는지를 투영한다. 세계가 이상해진 지 오래되었다. 선후관계는 도미노 같다. 쫓다 보면 결국 무너지는, 언젠가는 깔려 죽게 될 그런 일. 책을 팔아 복숭아를 사 왔는데 껍질 새 초파리가 살고 있었다. 똑똑, 나가주면 안 되겠니. 나는 어리니 자신에게 양보하라고 지적받는다. 아직 후숙이 필요한 과정이구나. 이번 여름 복숭아는 노약자석과 비슷한 것 같다고 이해한다. 오늘의 공원은 겨울을 동경한다. 머리카락을 비질하는 미화원과 컷불을 뚫고 들어오는 빛들. 공사 중이죠? 저수지를 만들겠다고 해 흔쾌히 자릴 양보해주었다. 한 그루의 몫. 한 그루의 치아. 피스타치오 밭은 없나? 원하면 있다. 풍경은 성조기가 펄럭이는 곳으로, 줌인. 시간은 달밤, 연인들이 나무 밑에 모여 있다. 딱따구리 없이도 부서지는 캘리포니아의 숲. 거기 뭐해요? 행운이 쪼개지는 소리를 들으려고요. 겸사겸사 입도 맞추고요. 아, 예. 그럼 열심히 하십쇼. 열매 하나 으적으적 씹으며 걷는다. 행운은 텁텁한 맛이구나. 물드는 풀빛의 혀. 나는 키스할 상대 없이 필터에 입을 댄다. 여름의 공원은 저수지를 걸고 소송 중이다. 개들은 사람의 사정 따위는 알바가 아니고 저수지를 사랑한다. 우리에게는 분쟁이 있고 시간이 필요했다. 빨리 만들수록 더 많은 사람이 죽을 뿐이라는 협회의 말에 가능한 천천히 물을 붓겠다고 합의한다. 깨끗하게 청소한다. 저수지가 생긴 어느 미래를 향해 물을 붓고 붓고 또 붓다 보면, 도달하는 가능성에 언젠가 초파리도 죽게 될까?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엄시연, 「가드닝」 전문, <포지션> 2024년 겨울호 엄시연 시인의 시에서도 세계는 부조리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그 어조는 지나치게 담담하고 그것은 어쩌면 마음을 쏟아낼 이유조차 상실한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한다. 첫 행이 암시하듯 세상은 언제든지 사람을 ‘깔려 죽게’ 만들 수 있지만 그 원인이나 결과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불온한 조짐만이 암시될 뿐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움직이고, 무관하게 연인들은 서로 입을 맞추며 사랑을 확인하고 있다. 이 대비보다 의아한 것은 화자의 태도이다. ‘나’는 죽음의 불안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연인들의 사랑에 전염되지 않는다. 그저 이 모든 것을 적당히 거리를 둔 배경 취급하며 복숭아를 먹고, 저수지를 산책하며, 행운을 찾아 헤매면서 그저 생각에 잠길 뿐이다. 죽음을 필연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탈출구란 존재하는 것일까. 시인은 “도달하는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상 작품 안에서는 어떠한 희망도 암시되지 않는다. 사람이든 초파리에게든 암시되는 것은 죽음 뿐이다. 저수지와 차오르는 물의 모티프는 언뜻 기후 온난화와 홍수를 떠올리게 하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변혜지의 시와 엄시연의 시는 똑같이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도, 사람들도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가드닝」의 마지막은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라는 시구로 끝맺는다. 이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현대인의 무력함에 대한 여실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입 맞춤의 상대가 있어도 좋고 없으면 ‘필터’에 한다. 저수지를 놓고 소송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나’와 무관하다. 한 시대의 사색은 그 시대의 불변하는 사실에 터 잡는다. 자연을 극복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부터 루소의 교육론이, 반드시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모색되었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시에서 극복할 수 없는 대상으로 감각되는 것은 세계 그 자체, 무엇보다 세계의 무의미성으로 판단된다. 「럼펠스틸스킨」에서 현실은 영상이나 그림 같은 것, “가정용 플라테타리움”이나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 등으로 비유된다. 이러한 비유는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 새로운 붓질을 할 의지도 지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드닝」에서 세상은 언제든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이상한’ 공간이지만, ‘나’는 그곳에서 야기되는 죽음의 조짐을 방관할 뿐이다.이들의 시에 맴도는 부조리는 다음을 유추하게 한다. 이제 이 세상에서 인간은 무용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세상은 어제처럼 작동할 것이다. 우리는 ‘잡놈’으로 연명할 것이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며 죽어갈 것이다. 이 예정된 미래에서 미래의 쓸모란 무엇일까. 이제 현대는 루소주의자의 사색을 지나, 프로이트주의자의 숙고로부터도 멀어지며, 차츰 인간 존재에 대한 냉소와 부정으로 옮아간다. 극복할 수 없는 것은 과거에는 도구나 사물로 취급했던 것,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체계이다. 인간조차 사물의 지배자가 아니라 이 윤택한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일부인 양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물 없이 사람은 살 수 없다는 것, 현대시는 이 절망에 터 잡아야 할 것이다. 선택지는 많지 않아 보인다. 변혜지와 엄시연의 시는 다음의 ‘도달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새로운 인간은 사물이나 다름없이 행동하는 방식, 즉 자아를 사물화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이 외에 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는 것일까. 단숨에 답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은 찾아 헤매야 하는 새벽이다. 1) 이 글은 <문학과지성사> 2024년 겨울호의 졸고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와 연속성을 지닌다. 2) 송현지, 「제자리 뛰며 나아가는 미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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