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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파란 | 2024년 여름호(제33호)

검은 투명

송현지 문학평론

202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너 매미가 언제 우는지 알아?

동트기 전부터 아침 먹을 때까지 우는 애가 참매미다
아침부터 낮까지 우는 매미는 말매미고

에스파뇰 공부를 한다고 했지
우리는 마당에 앉아서
따르르르 아르르르 한참 연습했다
보쏘뜨로―스 보쏘뜨라―스
―「여름방학」 부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어 1)

    마윤지가 처음 문단에 등장하며 냈던 소리를 떠올려 보자. “따르르르 아르르르” “보쏘뜨로―스 보쏘뜨라―스”라는 낯선 소리. 매미의 떨림을 날것 그대로 의태한 말인 한편, 매미가 떨며 내는 맹렬한 울음을 에스파뇰어로 바꿔 적은 그 소리는 “작품 전체로 울려 퍼”지며2) 그 자체로 “물질적인 존재감”3)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될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 소리는 한편으로는, 의성의태어를 즐겨 사용하던 유년의 시절을 길어 내기도 해서 여름방학을 보내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있는 어느 뜨거운 여름의 옥상으로,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인과관계 없는 기대들을 무모하게 갖기도 했던 그 시절로 우리를 마법처럼 이끌기도 했다. 마윤지의 목소리에 붙은 “미성년의 발성”4)이라는 레테르는 그가 처음부터 낸 이런 소리에 얼마 정도 기인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소리에 그토록 매료되었던 것일까. 지난 3월, 매미의 울음소리가 담긴 「여름방학」이 첫 시집 『개구리극장』(민음사, 2024)에 묶인 후로 나는 새삼 이러한 질문을 해 본다. 그것은 소리에 대해,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울음소리에 대한 감각이 첨예하게 나타나는 『개구리극장』을 읽으며,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던 근육이 움직이며 입안을 가득 메운 생경함이 주는 재미를 가리키거나 매미 울음을 모방하는 아이들을 따라 하며 어른이 되기 전으로 돌아간 듯한 아련한 기분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는 저 소리가 우리의 감각기관에 그토록 깊이 각인되었던 까닭을 설명하기에 이제 불충분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
종을 흔들었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어

시시해
놀이터에 종을 놓고 돌아왔어

매일매일 생각나
매일매일 그렸어

*
옛날 옛적에 귀신이 살았습니다

귀신이 살아 있어?

아 귀신이 죽었습니다 죽고 나서 귀신이 되었습니다

*
이제 불 수 있지 휘파람
둥지에 웅크린 휘파람
휘파람을
떨어트려 죽이는 휘파람
차에 치인 휘파람
다시 다시
알을 깨고
휘파람
―「아이들」 전문

    「아이들」에 기대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면 『개구리극장』은 “종을 흔들”어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세계를 다룬다. 애써 들으려 하지 않아도 매미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던 유년과는 달리, 일부로 소리를 내어 들으려고 해도 의미 없는 소리라곤 나지 않는 세계. ‘귀신이 살았다’와 같은 비상식적인 말이 ‘죽고 나서 귀신이 되었다’는 통상적인 상식을 담은 말로 곧바로 교정되듯 엉뚱한 소리가 차단되는 세계. 이러한 세계에 진입하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면 앞서의 소리가 매혹적으로 여겨졌던 것은 성인이 된 우리가 더 이상 듣지 못하는 소리를 그의 시가 들려주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나’의 관심은 종소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소리가 나지 않는 상태’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세계에 초점을 둔다. 『개구리극장』은 이러한 “시시한 세계”가 “매일 매일 생각나” 쓴 시집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 글 역시 저 소리의 매혹성에 대해 묻는 일을 잠시 미루고 어른의 세계에 대해, 다시 말해 어른은 왜 소리 나지 않는 세계에 살게 되는가와 같은 질문을 먼저 해 봐야 하지 않을까.


귀신이 살았습니다

    소리의 소거에 대해 마윤지는 두 가지 가능성을 제기한다. 하나는 아이가 어른이 되며 소리를 듣지 못하게 변한다는 것. 그러니까 소리가 실제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매미 울음과 같은 소리들을 우리가 점차 듣지 못하게 되었을 가능성 말이다. 가령 「포천」에서 시끌벅적하게 쥐불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소란을 보자.


쥐불이 뱅글뱅글 돌았다
골고루 잘 태우면 그해엔 전염병이 없다고

추위에 흙 속으로 파고든 쥐 떼
그게 다 거름이 된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곳부터
보이지 않는 데까지

나무에 기대어
사람 구경하는 귀신들

얇은 가죽신 때문에 발이 시려워
친구들이 발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할 때

나는 발이 가렵다고
가려워 죽겠다고

달아달아 밝은달아 대낮같이 밝은달아*

밭에서 애들이랑 꽹과리 연주를 했다
고깔과 상모를 힘차게 젓는 동안
커다란 불이 인간의 귀를 떼어 간 것을 알았다

*영남 사물놀이 가락 중 ‘별달거리’. 풍년에 감사한 마음을 노래하듯 부른다.
―「포천」 부분

    이 시에서 아이들은 어른이 알려 준 대로 쥐불을 돌린 후 “꽹과리 연주”를 하며 “고깔과 상모를 힘차게 젓는”다. 그동안 그들이 던져둔 불은 “보이지 않는 곳부터/보이지 않는 데까지” 쥐가 파고든 자리를 골고루 태우며 점점 커진다. 이러한 광경을 그리며 마윤지는 불이 쥐의 목숨만이 아니라 인간의 귀를 떼어 갔다고 적는다(“커다란 불이 인간의 귀를 떼어 간 것을 알았다”). 소란스러운 시간이 지난 후 아이는 어른이 된다는 것일까. 연례행사로 치러지는 쥐불놀이가 이 시에서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제시된다고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마윤지가 저 문장을 통해, 꽹과리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세계에 점차 몰두하게 되는 아이들에게 비명을 내지르고 있을 쥐들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게 될 가능성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귀가 떼이며 어른이 되고, 귀가 떼인 어른에게 매미 울음과 같이 작은 존재들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점차 감각이 무뎌지는 친구들과 달리 그는 자신이 느끼는 감각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자로서(“친구들이 발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할 때//나는 발이 가렵다고/가려워 죽겠다고”) 감각이 점차 둔해지는 우리의 입사 과정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런데 쥐가 아니라 성인이 된 우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은 없을까? 마윤지는 어른의 세계에서 소리가 소거된 또 다른 이유가 어른은 숨어서 그러한 소리를 내기 때문임을 「개구리극장」을 통해 보여 준다.


비 오는 날 극장에는 개구리가 많아요
사람은 죽어서 별이 아니라 개구리가 되거든요

여기서는 언제든 자신의 죽음을 다시 볼 수 있어요
때로는 요청에 의한 다큐를 함께 보고요

주택가에서 살아남는 방법에 관한 상영 114분
들키지 않고 우는 방법에 관한 재상영 263분

그러나 역시 최고 인기는
새벽녘 같은 푸른 스크린 앞
부신 눈을 깜빡이며 보는 죽음이에요

손바닥을 펼쳐 사이사이 투명한
초록빛 비탈을 적시는 개구리들

우는 것은 개구리들뿐이지요
이젠 개구리들도 비가 오는 날에만 울지요
의자 밑
인간들이 흘리고 간 한 줌의 자갈
그것이 연못이었다는 이야기

떼어 낸 심장이 식염수 속에서
한동안 혼자 뛰는 것처럼

떨어져 나온 슬픔이
미처 다 걸어가지 못하고
멈추기 전에 낚아야 해요

내가 나를 본 적도 있을까요?
개구리이기 이전에요
영화 속 불운은 내 것이 아니라고 믿었을 때요

나는 극장에서 사람 구경을 자주 해요
사람들이 어둠 뒤에 숨어 울고 웃는 걸
반짝이는 죽음이라고 이름 붙였거든요
영화 좋아해요?
극장에 올래요?
―「개구리극장」 전문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며 마음껏 울기 위해, 현실에서 살아나는 방법(“주택가에서 살아남는 방법”)과 “들키지 않고 우는 방법”에 대해 배우기 위해 극장에 간다. 실제로 극장의 어둠은 우리의 감정을 감춰 주고 혹여 감정이 노출되더라도 그것이 스크린에 전개되는 이야기들로 인한 것인 양 가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숨어 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물론 그들이 가는 곳이 실제 극장이 아니라 일종의 비유로 제시된 것이라고 해도 큰 관계는 없다. 자신의 삶과 슬픔에 대해 밤새 생각하는 이에게 지난 순간들은 스크린에 영상이 비치는 것처럼 떠올려지기 때문에 저러한 비유를 통해 그들이 어떤 어둠 속에 숨어서 울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마윤지가 이렇게 숨어 우는 이들을 죽은 이들이라 칭하며 그들의 몸이 이미 투명해졌다는 사실(“손바닥을 펼쳐 사이사이 투명한”)을 시에서 강조한다는 점이다.

    사람은 죽어서 개구리가 되며, 우는 것은 개구리들뿐이라는 그의 말은 어떤 울음도 허용되지 않는 세계를, 운다면 더 이상 인간으로 기입되지 않는 이 세계를 서늘하게 환기하는 한편, 이곳에서 우리는 이와 같이 숨은 채로 울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다. 우는 자가 (개구리며 개구리가 이미) 죽은 자(귀신)라면 앞서 비상식적인 것으로 부정되었던 “귀신이 살았습니다”라는(「아이들」) 문장은 오히려 지금의 세계를 드러내는 적확한 말이 되는 셈이다. 한번 죽은 자이자 우는 자인 귀신은 잘 보이지 않는 투명한 자로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그는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시에 출몰한 새로운 귀신이기도 하다. 2000년대 초반, 김행숙 등의 시에 그려졌던 “일상 속에서 출몰하”는 귀신들처럼 마윤지의 귀신 역시 사람과 섞여 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나무에 기대어/사람 구경하는 귀신들”, 「포천」),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 사이를 배회”하거나 “사춘기 아이들”과 한데 묶인 “경계의 존재들”5)이었던 앞선 귀신들과 달리, 이곳을 살아가는 어른의 다른 이름이자 어른의 권위를 갖지 못한 존재 양태로 시에 새로이 등장하는 것이다.


다시 알을 깨고 휘파람


    그런데 「개구리극장」에서 한 가지 더 짚어 두고 싶은 점은 마윤지가 숨어 우는 어른의 울음을 인간의 것이 아니라 개구리의 울음으로 나타낸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슬픔을 드러내는 일이 어른의 위신에 걸맞지 않아, 감정을 표출하는 어른들이 이곳에서 비인간처럼 취급된다는 점을 과장하여 드러내기 위함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윤지의 다음 시는 여기에 더해 새로운 가능성을 상정하게 한다.


당신 차례가 되었습니다

안동에서는 조문객들이 절을 할 때마다
어이 어이 어이 어이
곡소리를 낸다고

그러면 상주와 가족들이
어이 어이 어이 어이
곡을 받는다고

사흘장이 끝날 때면 목이 아파
아무도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했습니다

선생님이 창문을 반쯤 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서울에서 밤을 보내며
흠흠. 목을 가다듬고 소리 내어 말해 봅니다

개구리가 저기서 맹하면 여기서 꽁한다
그게 맹꽁이다

날이 무더워지기 전에는 바람이 많이 불고

초여름

장독대 안에는 분명 매실이 있습니다
―「이 세계를 걱정하는 방법」 부분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집단 상담의 현장을 연상하게 하는 이 시에서 시 속 인물들이 슬픔을 감추는 방법에 주목해 보자. 가족을 잃었을 때 “어이 어이 어이 어이”라고 미리 정해 둔 “곡소리”를 내고 나면 “목이 아파/아무도 소리 내어 울지 않”게 된다고 ‘당신’이 말할 때, 거기에는 창문을 열어 밖으로 내보내야 할 만큼의(“선생님이 창문을 반쯤 열었습니다”) 농도 짙은 슬픔이 배어 있다. 그의 말은 우리가 슬픔을 어떻게든 누르고 지내려 한다는 것을 알려 주는 한편으로, 숨어 개구리 울음으로 우는 것이 사실은 슬픔을 이중으로 숨기는 전략임을 드러내기도 한다. 숨어 울 때조차 우리는 날것의 울음 그대로가 아니라 다른 소리를 내며 슬픔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그런데 분명 슬픈 일을 겪고 저러한 자리에 참석했을 ‘나’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슬픔을 감추고 엉뚱한 농담(“개구리가 저기서 맹하면 여기서 꽁한다/그게 맹꽁이다”)을 소리 내어 말한다는 사실은 「여름방학」으로 돌아가 처음 우리가 접했던 매미 울음소리에 다시 귀 기울이게 한다. 저 소리는 천진난만한 유년 화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성인이 된 ‘내’가 그 소리를 빌려 지금의 슬픔과 울음을 감추려는 소리는 아니었는가를 되짚어 보며. 그 소리의 매혹은 그것이 단지 해맑은 것이어서였다기보다 어떤 슬픔이 겹쳐 있는 것이기에 생겨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우리말로는 의미화되지 않는 “보쏘뜨로―스 보쏘뜨라―스”라는 소리 역시 사실은 에스파뇰어로 ‘너희들(Vosotros, Vosotras)’이라는 분명한 의미를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지나온 유년을 삼인칭으로 가리키며 어른이 된 지금의 헛헛함을, 지금의 슬픔을 그와 같은 천진한 소리에 감추어 둔 것으로 다시 읽힌다. 우리는 「여름방학」의 그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 맑고 고운 “휘파람”을 불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분 휘파람은 사실 이전의 “휘파람을/떨어트려 죽이는 휘파람”, 유년의 “알을 깨고”(「아이들」) 나온 성년의 ‘내’가 분, 자세히 들으면 처절한 소리가 나는 휘파람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볼 때, 이제 더 이상 그의 맑고 투명한 목소리를 유년의 발성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黑」은 성인인 그가 어떻게 투명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다


세 번까지 우릴 수 있어요
물을 더 끓일까요?

나는 두 번에서 멈춘다

찻집의 증기와 가라앉은 앞머리가
서늘한 이마를 덮기 시작할 때

이 잎은 7년 동안 발효되었어요
흑차치고 매우 짧은 시간이지요

너, 이제 막 태어났구나

(중략)

한 번 더 마실게요
천천히 마실게요

손에 닿았던 잔이 식으면
닿기 전보다 훨씬 더 차가워진다는데

안에 담긴 건

검어져도 검어져도
투명한 빛
―「黑」 부분

    오랜 시간 동안 발효된 흑차는 투명한 빛을 잃지 않음을 그는 이 시에서 나타낸다. 앞선 시에서 그가 분명히 있다고 가리킨 “장독대 안”의 “매실”이(「이 세계를 걱정하는 방법」) 시간이 지날수록 익어 투명한 액체로 변하는 것처럼 그의 투명한 목소리는 그의 슬픔이 오히려 오래 발효되어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사실은 검지만, “검어져도 검어져도/투명한 빛”을 띠는 저 흑차처럼. 그가 천진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저예요”라고 인사하며 “소리 내어 말하는 사람으로 살아보기 위해 온 것만 같”다고 말할 때(「천사가 아닌」), 이제 우리는 천사이자 귀신이며, 어른이며 아이인 누군가의 검고 투명한 울음을 듣는다.

  • 1) 각 장의 제목은 『개구리극장』에 수록된 「아이들」에서 가져왔다.
  • 2) 이찬, 「제2회 계간 파란 신인상 심사 총평」, 『계간 파란』, 2022.봄, 234쪽.
  • 3) 이현승, 「제2회 계간 파란 신인상 심사 소감」, 『계간 파란』, 2022.봄, 244쪽.
  • 4) 이원, 「추천의 글」, 마윤지, 『개구리극장』, 민음사, 2024, 146쪽.
  • 5) 이장욱, 「아이들, 여자들, 귀신들」, 김행숙, 『사춘기』, 문학과지성사, 2003, 134-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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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민 위무의 두 가지 방식

 겨울을 지나고 봄을 맞이할 때 반가움보다 피로가 앞서는 것은 지난 계절이 지나치게 소란했기 때문일까. 이별 뒤에는 긴 피곤함이 있다는 돌아간 철학자의 말1)을 곱씹는다. 시절의 시곗바늘에 정확히 때맞추어 걸음을 옮길 수 없을 때 환절기는 더욱 길어진다. 이것도 하나의 사태라면 사태다. 사건이 아니다. 한계는 아직 임박하지 않았다. 그런 탓에 피로는 늘상 현재형으로 찾아온다. 이불 위에 몸을 늘어뜨리고 눈을 깜빡이는 개는 피로를 모른다. 개를 바라보는 사람의 늘어진 의식만이 지난하다. 시가 스며드는 곳은 이런 장면들이다.  시란 본디 가장 느리게 도착하는 말들이고 우리의 감각과 인지가 이별 후의 인내를 감내하느라 버둥거릴 때 그것은 날카로운 하품처럼 정확하게 착지한다. 서사의 시간 속으로 전진하는 소설은 피로할 틈을 누리지 못하지만 시는 피로의 한가운데에서 한없이 늘어질 수 있다. 시는 제가 원하는 대로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무한에 가깝게 지연되는 시의 시간은 피로의 무시간적 현재와 꼭 닮아 있다. 어쩌면 시는 피로를 껴안을 수 있는 언어의 유일한 방식이다.2)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모든 부분을 피로로 적셔 버릴 때 우리는 세상과 대결하는 자가 아니라 다만 흘러가는 자로 사라진다. 세상의 예리하고 모난 각들은 녹아서 더 이상 우리를 찌르지 않는다. 일렁임에 구역질을 할지언정 우리는 더는 상처 입거나 피 흘리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내게 피로란 본디 우리의 바깥이 아닌 내부에서 흐르는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고 일러 주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실존적 증상인 피로에 소진되지 않는 한 가지 역설적인 방법은 그것을 극복하거나 해결하려 하지 않고 냅다 사랑해 버리는 일이라고, 피로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온몸에 힘을 빼고 나를 관철하지 않는 방식으로 피로를 체현해 버리는 일이라고 말한 누군가가 있다. 그러자 그에 찬동하며 자신을 상처 낸 자의 빛으로 몸을 더욱 가까이 밀착하는 또 다른 누군가도 다가온다. 1. 사랑하는 방관자의 기록들: 이동욱, 『우리의 파안』 (문학동네, 2025)  시는 무엇 때문에 우리가 지쳤다고 알려 주지 않는다. 시라는 것이 세계에 응전하는 '나'의 목소리일 때 자신이 이미 패자라는 것을 납득한 이에게 이유의 구체들은 불필요하다. 시는 대신 이미 닫힌 문 너머로도 여전히 농구공이 튀겨지는 소리를 들려주거나(「폐회」)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이곳에 이미 와 본 적 있다는 기시감으로 새로움을 무마하고(「답사」) 종국에는 복도만큼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기지개처럼(「월량대표아적심」) 헛헛하게 개켜 볼 따름이다. 시는 무엇 때문에 피로하다는 분석이나 무엇에 관해 피로하다고 부연하지 않는다. 시는 그저 지쳐 있는 얼굴의 주름을 천천히 짚어 간다.  여기에는 그 어떤 극복의 의지나 미래를 향한 열망이 들어서지 않는다. 피로를 들여다보는 일은 그와 정반대의 작업이다. 사랑의 황홀함도 성장의 희열도 찰나의 현재에 머물다가 이내 과거의 영원 속으로 사라진다. 살아 있음이라는 단어를 차지하는 유일한 현재 시제는 피로의 것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피로를 자주 언급하지 않는 것은 피로함을 욕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현재를 비집고 들어서는 이 무한의 감각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상황은 그때부터 조금 달라진다. 피로는 생의 관성을 폭력적으로 찢어 버릴 것이다. 미래에 저당 잡힌 역사가 된 과거도, 과거로의 수갑에 손이 묶인 미래도 모두 풀려날 것이다. 당신은 항구적인 현재로 지어진 피로의 담요 위에 비로소 몸을 누이고 그제야 은둔할 장소를 발견할 것이다("이제야 이별이다", 「배교의 에피파니」).  모더니스트들이 거리를 산책하며 금속성의 시간들이 녹아내리는 장면들3)을 시로 쓸 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가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감각이었으나 인간 종이 사라져도 이 세상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는 이십일 세기의 시인에게 끝이란 그저 관념의 수사일 뿐이다. 오히려 세계는 끝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제 몸을 영원히 유지한다. 끝마저도 완전히 끝장나 버린 시대의 개인은 자기 자신을 끝장내는 방법 외에는 진정 끝을 맞이할 방법이 없다. 다리 위에서 몸을 떨구고 싶은 욕망이 들어도(이것은 죽음 '충동'이 아니다. 신중한 화자가 긴 시간 동안 지체와 망설임을 번복하며 지켜 온 욕망일 것이다.) 그것은 택시 기사의 물음표에 의해 내쳐지고, 또 한 번 끝장내는 데에 실패한 '나'의 몫으로 남겨지는 건 치미는 구토감이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 걸까, 내일도 같은 날이겠지. 반복되는 것이 이렇게 편안한 마음을 주다니. 생활의 주기는 한 달에 맞춰진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많은 주기들이 있다. 자명종과 전철, 점심, 회의, 저녁, 퇴근. 혹은 야근. 다시 전철, 혹은 택시. 동호대교를 건널 때 내가 느꼈던 것. 내비게이션에 찍힌 택시의 위치. 파란 것은 한강. 직선은 다리. 그 위로 지나가는 것은 나. 혹은 택시. 기사는 음악을 크게 틀고, 음악은 트로트, 혹은 찬송가. 주여 제발 이 다리를 무사히 건너게 해 주시옵소서. (중략) 오늘이 지나면 내일은 무사할까. 가끔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를 만나면 자랑스럽게 웃으며 이 몸을 건네줄 수 있을까. 너는 참 쓰기 좋은 몸을 갖고 있구나. 누구에게도 피해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은 그의 거짓말이다. 동호대교에서 한남대교 쳐다보기. 하지만 너와 걸어서 건넜던 건 한남대교. 다리 위에 서면 항상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싶어진다. 뭐였어? 뭐겠어. 우리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기 위해 다리를 건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다리의 중간은 기억에 없었지. 택시 기사는 말이 많았고 나는 이곳이 처음이라고 대답했다. 사거리에서 어디로 갈까요? 그러자 나는 갑자기 구토가 일었다. - 「친구의 장례식과 애인의 결혼식」 부분  일상의 세속적인 반복과 사물들은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이질감이 엄습해 와도 요지부동이다. 그 몸을 다리 아래로 떨구고 싶어도 그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므로 생각만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생의 중력 앞에서 그는 또 어딘가로 방향을 정해서 기사에게 알려 주어야 하고 폐쇄 회로에 갇힌 그는 급기야 구토의 기미를 느끼고 입을 틀어막는다. 그의 하루를 짐작할 때 제목이 본문에 생략된 낮의 시간을 나지막이 일러 준다. 친구는 저곳으로 돌아가고 사랑하던 이도 다른 삶 속으로 들어간 하루. 장례식과 결혼식은 모두 떠남을 공표하는 의례들이다. 떠남의 연속을 마주하며 그는 삶의 과대한 대전제에 반문한다. 실상 우리에게 남는 것은 중간 지점이라는 기억이 아니라 출발점과 도착점뿐이지 않느냐고, 그래서 '나'는 다리의 중간에 '내' 몸을 떨굴 수가 없다고 항의해 보고 싶기도 하지만 무력하다. 그조차도 빌린 몸에서 비롯한 생각들이라면 그는 이 세계의 "자명종과 전철, 점심, 회의, 저녁, 퇴근. 혹은 야근"에 대하여 완전한 패배자다.  신에게 이 다리를 무사히 건너게 해 달라는 기도는 그러므로 진실한 읍소라기보다 이미 무사할 것을 알고 있는 자의 지쳐 버린 탄식이다. 근대의 산책자는 이 세계에서 바깥의 관찰자로 전락한다. 그의 발설은 작은 발버둥에 불과하다. 사이렌이 울어도 시간은 사전의 종이들이 빠르게 넘어가듯 휘몰아치거나 냄비 속 기포처럼 부글대지 않는다. 흠집 하나 없는 세계의 매끄러움은 완전하게 유지된다. 「신도시」의 빛나는 빌딩과 그 사이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도시의 관성을 알맞게 완성하는 부품들이다("빌딩과 빌딩/많은 전선이 이동했다"). 빌딩과 빌딩 전선으로 연결된 콘크리트의 감정은 서로를 일관적으로 바라보겠지 연인들은 뜨거웠다 차츰 모른 척하겠지 소방차가 교차로를 통과하는 동안 오늘도 우리는 다만 무사하고 그게 네 가족이라 생각해 봐 너를 키운 게 가족이라고 단정 짓지 마 그것은 사이렌 소리를 따라 날아가는 비둘기 같은 것 마지막 남은 희망대출 같은 것 전철역에서 절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정치인과 그 앞을 지나는 직장인에게 출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까 간과 쓸개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새로 생긴 진입로를 따라 차례로 들어서는 차들을 보고 있으면 어째서 당신의 가족은 오늘도 무사합니까 - 「신도시」 부분  시인의 감각은 격동하지 않고 그조차도 무사할 따름이다("그것은 사이렌 소리를 따라 날아가는 비둘기 같은 것"). 이곳의 유일한 변화 가능성이 인간 의식과 감각의 번뜩이는 칼날이라면 도시의 문명은 무엇이든 막아 내고 마는 거대한 방패다. 변혁의 단초는 그저 "마지막 남은 희망대출"일 뿐일 때, 신에게 탄식했던 그는 (신은 이미 우리를 완벽한 무사함 속으로 집어넣은 이후이므로) 또 한 번 작게 한탄할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무사한 것이냐고, 연인과 가족, 정치인과 직장인의 무사함은 그저 "차례로 들어서는 차들"일 뿐인데 이것이 정말 다일 뿐이냐고 말이다. 마지막 연의 비문은("보고 있으면" / "오늘도 무사합니까") 신의 도덕과 규범에 맞서 보려는 '나'의 사소한 어긋남이다.  이 시집은 세계와의 대결에서 이미 패한 자의 입지에서 쓰이고 있지만 저항이 전연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 쓰기란 결국 "타인의 필체 속에서 / 잠시 나를 죽은 혓바닥처럼 놓아 보는 것"이라 하더라도(「필적감정」) 그 빌린 손끝에서 흐르는 잉크로 '너'에 대한 사랑만큼은 한사코 주장하려고 한다. '나'라는 대상에 대한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해도 '나'는 '너'라는 사랑에 관해 유치권을 주장할 수는 있지 않느냐고 항변한다("왜 / 이제 나를 당신의 미망인으로 부르면 안 되나", 「저 금목서를 당신의 미망인으로 부르면 안 되나」). '네'가 '나'를 떠나 사라졌다는 이별의 사실마저도 앗아 가려는 세계의 난폭함에 맞서 '네' 그림자 뒤에 이어진 것이 바로 다름 아닌 '나'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차피 이 세계의 중력이 "모든 거리가 한 호흡 안에 있게 한"다면(「영원의 스코프」) '너'와 '나' 또한 하나의 원 안에서 거주할 테다. 사랑은 그의 손목을 잡거나 입술을 맞대는 촉각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같은 시야 안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감하게 성취된다. 그런 당신은 언제나 너무 오래 한곳에 머무는 습관이 있다 정해진 결말은 얼마나 안락한가 누군가 꽃다발을 건네며 인사한다면 그것은 배수구의 소용돌이치는 중심처럼 무언가 당신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는다 - 「영원의 스코프」 부분  세탁소에 옷을 맡기러 가는 길은 '네'가 지나간 길이다("애인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수선」). '나'의 체취로 젖은 셔츠를 누군가에게 맡기러 가는 길에 '네'가 지나간 자취를 떠올리며 둘을 겹쳐 두면, 봄밤의 하얀 목련은 두 눈을 덮어 버린다. 사랑은 부재 속에서 충만하게 향기롭다. 이처럼 시종일관 타자들의 그림자와 사물 사이를 거니는 그는 완전히 고립된 자는 아니지만 세계의 가장 나중의 자리에서 모든 것의 뒷모습을 담아내므로 과연 은둔하는 자4)다.  그러나 은둔자는 그를 잠식한 피로를 떨쳐 낼 재간이 없으므로 그가 시편들을 통해 보고하는 생의 단편들은 정치적 실천이라기보다 현재화된 영원을 배회하는 자의 소진되지 못한 에너지가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방관의 산물에 가깝다. 그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아니라 사나이가 피리에서 손을 뗀 후에야 찾아드는 파동의 나머지를 훔치는 관객이다("연주가 끝나자 단원들이 악기에서 손을 뗀다 // 그제야 나는 음악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식적(息笛)」). 은둔자는 어둠 속에서 이 도시를 재배치하거나 남몰래 구획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주인이 아니다. 그는 다만 숨어 있는 방관자다. 그가 방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은둔하는 지경이다. 그가 기록하는 현실의 답보 상태는 '나'에게 명백히 승리할지언정 '나'를 지루하게 하지는 않으므로 삶의 피로는 그의 사랑이 '너'의 뒤를 쫓는 일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피로를 체현하는 삶은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먼 거리에서 '너'와 '내'가 하나의 그물에 함께 걸려 있음을, 희미하게 떨리는 그물코를 뒤늦게 감각하는 방식을 사랑이라 여길 수 있다면 사랑은 바로 그 피로함 때문에 세계와 마찬가지로 끝나지 않는다. 사랑은 피로 속에서 영원하다. 2. 탐미주의 도망자의 편린들: 김연덕, 『폭포 열기』(문학과지성사, 2024)  방관자가 도시의 어둠 속에서 사물들의 궤적을 따라 느리게 걸어갈 때, 그 한켠에는 빛의 사나움이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이라는 걸 알아 가는 이가 있다. 원인 모를 수치가 자신을 장악했으나("종이 사이를 뚫고 이 안으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겠어", 「미지근한 폭포」) 그 사실을 보란 듯이 움켜쥐고 무거운 걸음을 떼는 이가 있다. 김연덕의 『폭포 열기』에는 빛과 대적하는 '나'들이 그것의 사나움과 폭력성을("돔에서 투과해 들어온 겨울의 각진 빛이 가만히 볼을 스쳤어 / 상처가 났어", 「구식 부끄러움」) 아름답게 증언하며 남몰래 폭포를 찾아가는 장면들이 산재한다.  그러나 이것이 도망의 궤적임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은데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화자가 사물 하나하나에 들이치는 빛을 세심히 관찰하며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며(시편들에서 발견되는 장소들은 거의 하나의 공간으로부터 파생되는 인상을 준다) 그가 코를 박고 마음 속에서 관찰하는 사물들의 빛깔은 부정할 길 없이 아름다워서 당신은 폭포수처럼 흐르는 화려함에 넋을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집을 끝까지 통과하고 나면 밀려드는 아늑하고 부드러운 피로감은 제 모습을 기어코 정직하게 드러낸다. 김연덕이 빛의 다채로운 조각들에 찔리면서도 당신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이끄는 건 염두에 둔 목적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동욱의 화자가 피로를 신체 내부에서 체현하는 방관자의 기록으로 시를 쓴다면 김연덕의 화자는 외부 세계의 사물들이 자신을 조각낼 폭력적인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들의 집요한 추적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대상을 좇는 행위 속에 자신의 도주선을 남몰래 숨겨 두며 피로한 빛의 사나움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져 간다. 밀착하는 방식으로 최대한 멀어진다. 김연덕의 시 쓰기는 사물에 비현실적일 만큼 가까이 다가섬으로 세계의 폭력으로부터 몰래 도주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우선, 한 개의 형광등에서 시작해 보자. 도시의 빛은 방 한 칸에 매달린 형광등으로 달라붙고 화자는 독자의 귀 가까이로 다가와 빛이 선사하는 "현대적인 아픔"에 대해 속삭인다("그래요 나 그것 덕분에"). 어둠 속에서 고요히 흐르던 자연의 정동은 스위치 하나를 누르면 일순간 빛 속으로 모두 흡수되고 그의 말대로 이는 아픔에 관한 참으로 편안한 정리법이다. 수치심이 '나'의 민낯이라면 그것은 형광등이 밝아지기 전의 어둠 속에서만 생생하다. 나는 어둠 속에서 내가 나를 부끄러워하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버튼만 누르면 이 방을 조금 전과 다른 감정으로 채우는 전기가 들어온다는 사 실은 얼마나 새삼스럽고 간편하고 현대적인 아픔인가요 그래요 나 그것 덕분에 내 몸에 걸려 넘어지거나 모서리 날카로운 악취에 부딪치지 않을 수 있지만 낮 동안의 수치가 얼마나 정교한 무늬와 기울기 절단면을 얻었는지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까이 들여다볼 수도 있겠지만 형광등을 켜는 것은 단지 한밤중에도 이 따뜻하고 복잡한 세공에 많은 시간이 필요해서입니다 (중략) 미세하게 다른 속도와 각도로 형광등 빛을 튕겨 내며 움직이던 수정의 소리 자신들을 견고하게 빛내는 소리가 났습니다 규칙적이었고 아주 조용했어요 - 「수정은 아름답고, 수정은 정확하고, 수정은 승리한다.」 부분  그는 "낮 동안의 수치"를 더듬어 볼 기회를 앗아 간 빛을 힐난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에 더욱 주의를 기울인다. 유리로 만든 진공관 안의 형광물질이 필라멘트 끝에서 튀겨지는 소리에 고막을 밀착한다. 이동욱의 '내'가 피로에 맞서지 않고 피로를 몸으로 살아 흘렀듯, 김연덕의 '나'는 빛의 손아귀에서 버둥대지 않고 도리어 빛을 향해 피부를 더욱 가까이 당겨 붙인다.  그곳에서 빛은 사물의 적대자다. 빛은 "삽으로 그것의 안을 파내고 / 쪼개"(「찬물처럼」) 관찰자의 지위를 점령하며 세계의 유일한 주체이자 절대자가 된다. 화자를 압도하는 그 시선의 힘에 대하여 화를 낼 만도 한데 그는 자신의 문장 안에 몸을 숨기고 빛의 사나운 뒤를 계속 좇을 따름이다. 간혹 빛에게 발각되려 할 때 그는 스스로 사물이 됨으로써 최선의 은닉을 감행하기도 한다. 나를 향해 있지는 않지만 이것을 만든 이의. 누군가의 세계를 향한 슬프고 기쁜 병들고 건강한 열망의 반복이 흘러드는 느낌이고 저 가벼운 선반에 잠시 올려 둔 채 때로는 먼지를 털어 주고 때로는 잊다가 다시 별 뜻 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 따뜻하고 추상적인 느낌이기도 하다. 그리운 채 깨어 있는 이 느낌을 위해 나는 매번 나 자신을 어색하게 부푼 내 표정을 값으로 지불해 왔다. 물건의 선과 마무리가 아름답고 고유할수록 많은 시간과 힘을 요했으므로 가끔은, 트럭에서 품에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 곤두박질쳤다. - 「생활 속 폭포」 부분  그는 눈앞의 사물 속에서 그것을 만든 이의 "세계를 향한 슬프고 기쁜 / 병들고 / 건강한 / 열망의 반복이 흘러드는 느낌"을 찾아낸다. 사물이 자신을 향해 있지 않다는 진실 앞에서 그는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실은 그 역시도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물화시키며 살아 왔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고백을 마치자마자 곧장, 사물로부터 떨어져 나와 폭포 속으로 추락한다. 이는 빛에게 패배하듯 폭포에게 제 실존을 투항하고 마는 일이 아니다. 빛의 파장으로부터 완벽하게 숨어드는 일이다. 가장 완벽한 도망이야말로 완전히 사라지는 위장술로 성취된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어두운 폭포를 보게 될 것이다. 원하는 자리에서 원하는 속도로 삭아 가게 될 것이다. 거실과 선반과 빛이 절묘하게 맞물려 그림자가 거대하게 드리울 경우에는 마치 폭포가 물건을 삼켜 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충격을 이기지 못해 절망하고 멍해져 영영 사라져 버린 것으로 착각되겠지만 - 「생활 속 폭포」 부분  시집에 수록된 동명의 연작시 「gleaming/tiny area」는 제목 그대로 빛과 그것이 파생시킨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다5)(빛이 없다면 존재도 없다). 그중 하나의 시편은 "평범한 나무 밑에 / 산 채로 매장된 빛"이 있으며 더불어 그 나무에는 우아하게 숨은 분노도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누설한다("어떤 분노는 우아한 광대뼈 아래 아주 조용하게 살아가기도 한다", 56쪽). "세상에 분노하는 온도"로 첫 행을 시작하는 이 시편은 빛과 연루된 정동이 분노이며, 그것은 이 탐미주의자의 시 쓰기 속에 매장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재봉되었던 빛 안쪽은", 71쪽). 그는 빛의 사나움 앞에서 함께 칼을 들고 결투를 벌이는 일 대신 나무 아래 묻거나 실로 기워 버리고, 이는 최선의 공격이란 무릇 최선의 방어라는 평화적인 신념을 지닌 자만이 할 수 있는 행위다. 낮 동안 너무 많은 빛에, 밤 동안 너무 많은 형광등의 소리에 시달렸던 그는 세계와 정면으로 대적하기에는 이미 지쳐 있다. 세계를 영속시키면서 무한한 소진을 생산하는 힘의 근원이 곧 빛이라는 사실을("아침까지 눈을 뚫고 전속력으로 달려도 / 피곤한 빛으로 계속되는", 「드라이브 마이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므로 그는 그것과 함부로 맞서지 않는다. 더불어, "통째로 긁히거나 뭉개지기"에 이 세계는 너무 고상하다는 그의 말은 빛이 대상을 쪼개지만 동시에 그러한 파편들의 부서짐이 자아내는 아름다움 역시 존엄하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연덕의 '나'는 빛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빛을 따라 움직이는 듯하다가 불현듯 폭포 속으로 몸을 던진다. 세찬 물줄기 아래의 어둠 안에는 숨어든 '내'가 있고 그런 '나'를 일갈하며 후려치는 다른 '나'들이 있다. 빛의 피로에 잠식된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빛이 매 순간 훔쳐 가던 수치심의 적나라한 회수라고 주장하는 피학의 목소리가 있다. 내 몸을 때리는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폭포 밖으로 바로 빠져나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를 비난하던 내가 스스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던 조금 전까지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하던 그것은 나의 수치심 미친 듯이 신나서 나를 때리는 - 「따뜻한 폭포」 부분  피로한 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막아서지 않는다. 그저 내버려둔다. 피로는 '나'의 몸을 그것에 오롯이 헌납하게 한다. 밝은 곳에서 쉬이 납득하기 어렵던 수치는 어둠의 안락함 속에서 껴안을 수 있는 것으로 변모하고 (그것이 '나'를 신나게 때린다 할지라도) 시종일관 사물의 휘광을 쫓던 화자는 그리하여 독자를 빛에서 어둠으로, 지상에서 폭포수 아래로 이끌고 간다. 낮이 생산자들의 시간이라면 밤은 피로 속에 곱게 누운 자들의 몫이다. 수치를 품을 수 있는 비밀스러운 시간이야말로 피로한 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다. 그 어떤 긍정이나 부인의 능동적 제스처도 불필요한, 그저 시작도 끝도 바닥도 위도 없는 물줄기의 연속처럼 그 안에 몸을 맡기고 드러눕는 장소. 그러나 이 탐미주의자는 산란하는 빛의 날카로운 끝이 조각내는 아름다움들을 모르지 않고, 다만 그 광채에 현혹되어 제 몸이 찢기는 줄도 모르고 낮의 시간을 살아 내던 이들의 손을 조용히 잡아끌고 폭포의 어둠 속으로 낙하할 따름이다.  외부에서도 내부에서도 시선의 대상이 되지 않음으로써 그는 주체이기를 자진해서 포기하고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존재의 해방을 만끽한다. 피로를 사실이자 하나의 비유로서 그리고 비유로서의 피로를 다시 한번 현실의 감각으로 받아들이면서, 사실과 비유 양측의 생성이 이끄는 물줄기 아래로 그저 침잠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김연덕의 폭포는 관념의 비유인 것만은 아니며 자연주의자들이 찬미하는 대자연의 그것만도 아니다. 폭포는 빛의 세계에서 낡고 지친 자들이 몸을 이끌고 눕는 피로의 세계다. 순도 높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세차게 이글거리는 안락의 세계다. 그렇다면 폭포가 아닌 곳들 또한 폭포가 된다. 가령, 우리가 가장 처음 만났던 형광등이 깜빡이는 방. 빛을 매장해 두었던 한 그루 나무는 방으로 들어와 '내' 수치심을 양분 삼아 눈부신 꽃 한 송이를 피워 낸다. 오래된 나무 한 그루의 기분만큼 보호받는 밤. 침대가 좁아진다. 작고 물컹한 열매가 떨어진다. 천장이 벽이 사각형이 살아 있는 어두운 땀이 백 년 전의 나와 함께 차게 식는다. 눈부신 꽃이 어둠 속에서 휘날리며 얼굴을 감쌀 때 당신은 끌어안을수록 슬퍼지는 사랑을 반드시 사랑하게 됩니다. - 「무르고 사적인 나의 방」 부분  이 꽃은 '내'가 언젠가 호텔방에서 본 거대한 흰 백합의 이미지와 겹쳐지는데(「나의 레리안」) 그가 꽃 앞에서 보았던 "적막하고 무서운 감정" 역시 누군가의 수치이자 분노이지만 그것은 '나'의 것처럼 폭포의 어둠 아래에서 아늑하게 향유한 것이 아닌 "제 몸을 마구잡이로 터뜨리는 그런 옛날의 빛" 앞에서 패배한 대가임을 알게 된다. 화자는 흰 백합을 보면서 꽃을 장식한 이의 삶을 앗아 간 빛의 난폭함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아연해진다("그의 삶을 대신 죽여 준 아름다움은 어디 있었을까"). 말하자면 「나의 레리안」은 호텔에 잠시 머무른 '내'가 빛 앞에서 파열한 타인의 흔적을 애도하는 시다. 그렇다면 김연덕의 화자 역시도 이동욱의 '나'와 마찬가지로 은둔을 자처하나 세계로부터 고립된 처지는 아닌 셈이며 시집에 수록된 마지막 시편인 「이구아수폭포」의 후반부가 말해 주듯, 이 시집의 '나'들은 실상 빛의 폭력에 노출된 사물과 타자들을 구해 내려는 열기로 들떠 있는 것이다("생생한 폭력과 죽음에 지친 수많은 나들이 자포자기한 나들이 / 무척 활기차고 다정하고 아름다운 면도 있던 그런 나들이 살아남은 나들마저 죽이려는 지금").  피로는 차갑지 않다. 피로는 그 어느 것보다도 뜨겁다. 에너지의 흐름이 주체를 압도하고 제패하고도 남아서 세계 전체를 유동하는 상태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피로는 죽음의 가장 큰 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피로함 속에서 방관자가 되거나 도망자가 되어 삶을 지속할 수 있다. 환멸이나 분노가 자주 방문하겠지만 그러나 종말과 죽음만큼은 이곳을 침범할 수 없다. 그래서 김연덕의 '나'는 무수한 '너'인 '나'들에게 계속 폭포 아래를, 그러나 빛이 전혀 눈치챌 수 없게끔 빛의 조각들로 길어 올린 아름다운 조각들로 길을 위장하며 가리키는 것이다. "선명한 시야가 돌아올 때"까지만 그렇게 잠시 폭포의 어둠 속에 함께 머물러 있자고, 우리의 수치와 분노가 생생하게 쏟아져 내리는 이 아늑한 피로 속에 잠시만이라도, 고요히 숨어 있자고 말이다. 1) 김진영, 「사라짐」, 『이별의 푸가』, 한겨레출판, 2019, 77쪽. 2) 아래의 말들을 잠시 빌린다면 시는 또한 피로함 그 자체다.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시는 고독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가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가, 아니다. 시는 사람에 대해서도 증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시는 무엇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시는 무엇 자체다. 시는 고독 자체이고 결별 자체이며 또한 사랑 자체다." 김언, 「그 여름에서 여름까지 짧은 기록 몇 개 2」,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난다, 2019, 32쪽. 3)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이상, 「날개」, 1936. 4) 시집의 해설을 쓴 오연경도 이동욱의 화자를 은둔자라고 말한다. "이동욱 시의 주체는 도시의 거리 한복판에서 간격을 만들어 내고 경계선을 재배치하는 '거리의 은둔자'라 부를 만하다." 오연경, 「은둔하는 삶의 정치성(해설)」, 이동욱, 『우리의 파안』, 문학동네, 2025, 109-110쪽. 5) "사실은 비유를, 비유는 사실을 배제하면서 또 자극한다. 한편으로 서로가 서로를 반사하면서 자신을 갱신한다. 사실의 폭발은 해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유의 밑거름으로 다시 돌아오며, 비유의 극점에서 발견되는 추상화된 현실은 그 자체 현실을 보는 또 다른 눈을 제공하는 것이다." 김언, 「시는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307쪽.

계간 파란 전승민 피로위로야근은둔폭포이동욱김연덕 2025
이찬 천의 얼굴로 일렁이는 “정든 유곽”의 빛다발 ― 이성복 『서시』

천의 얼굴로 일렁이는 “정든 유곽”의 빛다발 - 이성복의 「서시」 읽기 1 스물 언저리를 청춘의 열꽃으로 신음했던 사람이라면, 이성복 시집 『남해 금산』이 괴로움과 깨달음이 겹쳐 울리는 “물결무늬 자국”으로 번득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단번에 알아챌 수 있으리라.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오래 고통 받는 사람은」, 『남해 금산』)가 선명하게 일러주듯, 단 한 번이라도 남해의 바닷길을 에돌아 금산의 ‘해수관세음보살상’에 이르러 두 손 모아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보리암 앞으로 펼쳐진 다도해의 풍광과 ‘해조음(海潮音)’이 우리 모두에게 건넸을 저 깊고 깊은 삼매(三昧)의 소리를. 낙산사 홍련암, 강화 보문사와 더불어 남해 보리암이 ‘한국의 관음 3대 성지’로 자리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와 맥락을. 마치 숲을 이루듯 빽빽하게 늘어선 섬들의 행렬 사이로 어지러이 펄럭이는 무량한 풍파를 듣고 다시 또 듣는다는 ‘해수관음상’이 어떤 생의 모서리와 이야기의 곡절들로 여울져 있는지를. 나아가 세상의 거센 풍파와 오욕의 파고에서 벗어나려는 중생들의 현세 기복적 신앙이 종교화되는 과정에서 빚어진 ‘천수천안관세음보살’과 더불어,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등장하는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려는 ‘서원(誓願)’, 그들의 갖가지 공포와 근심을 씻어주려는 수행자의 날빛으로 번득이는 것임을 헤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안목(眼目)을 품을 수만 있다면, 시집 『남해 금산』에서 쉴새 없이 어른거리는 정화와 치유, 기원과 구도라는 두 줄기 빛살을 정면에서 마주할 수 있으리라. ‘관세음보살’과 ‘해수관음상’에 담긴 두 갈래 마음이란, 말하기와 말, 능(能)과 소(所), 구제(救濟)와 기도(祈禱), 영원과 순간, 관음수행과 관음신앙 등등으로 열거될 수 있을 ‘화해적 이원성’이라는 좀 더 큰 테두리로 수렴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한결같이, 되돌릴 수 없는 갈림길에서 둘로 쪼개지거나 나눠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떤 확고부동한 실체처럼 한곳에 붙박일 수조차 없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저 이원성의 다양한 분신들은 비록 둘이라는 모양새를 띠고 나타나지만, 이미 하나의 ‘원통(圓通)’ 세계를 동시에 이루고 있는 것이기에. 그리하여, 미칠 듯한 생의 회한을 타고 들이치는 말소리의 미세한 잔영과 그 눅진한 존재의 파열음으로 뼈마디까지 스며드는 김소월의 가공할 신운(神韻)과 더불어, 이에 필적하는 이성복의 절제된 리듬-이미지의 긴 여운(餘韻)을 가만히 느껴보라. 나아가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부터 깃들어 있던 ‘이원성의 세계’가 서로를 가로지르면서 일구는 낯선 교향악의 카니발, 그리고 그 뒷면에서 “소리 없이” 나투며 반짝거리는 ‘숨은 조화’의 윤슬을 묵묵히 들여다보라. 특히 “구부러진 것 얼어붙은 것 갈라터진 것 나가떨어진 것들/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비고 싶음”(「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 한참 동안 머물러 볼 필요가 있겠다. 이 구절은 『남해 금산』 첫머리에 수록된 「서시」와 더불어, 이후 펼쳐질 시집들의 운명선을 예고하고 있었던 핵심 단자(單子)이기 때문이다. 이성복의 첫 시집 맨 뒷자리를 이루는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는 “때 늦은 사랑”의 라멘트(lament), 그 절정의 곡조를 이룬다. 이 곡조의 먹먹한 운명선에서 말없이 일렁이는 여운의 리듬은 ‘서글픈 그물’처럼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다시 울린다. 이 시에 새겨진 ‘얼굴 없는 희망’은 애틋한 메아리로 휘돌아 나오면서 그 오랜 시간의 여울목을 현재진행형의 파문들로 되살려오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시인의 예술적 주도 동기와 사유의 정수가 겉면으로 드러난 매우 드문 사례를 이룬다. 또한 「서시」와 「남해 금산」을 필두로 시집 『남해 금산』의 무수한 협곡들을 넘실거리는 ‘화해적 이원성’의 역설적 미감과 ‘숨은 조화’를 오묘한 시간의 리듬으로 현시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라는 표제어에 얼룩진 고의적 시간 착오의 몸부림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라. 이 시는 “사랑”에 잠긴 무수한 대극(對極)의 상황을 단번에 가로질러,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원통’ 세계를 그 뒷면에 감춰두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관세음보살’에 주름진 두 갈래로 엇갈린 상반된 마음의 자취들을 되짚어보면, 양자는 결국 상대편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뫼비우스의 안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상대방의 안쪽에 이미 들어박힌 바깥으로 전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의 곳곳에 매복된 온갖 환란들을 회피하려는 우리 모두의 간절한 행복 충동으로 틔워 올려진 기복 신앙이나, 다른 생의 결핍과 고통을 함께 앓고 나누고 치유하려는 수행의 열망이란 결국 하나의 태반에서 자라난 쌍생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남해 금산』 뿐 아니라 이성복의 모든 시집을 관통하는 상반된 양면성을 강렬하게 응집하고 있는 “정든 유곽” 이미지를 다시 곰곰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것은 우리 생의 더할 나위 없는 비루함과 가혹한 운명의 모서리를 돌아 나온 자리에서만 빚어질 수 있을 화룡점정(畵龍點睛)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시인의 고단한 예술적 사유 매듭과 ‘용맹정진(勇猛精進)’의 형상화 방법이 태어나는 자리를 가장 명료하게 집약한다. 그리하여, 저토록 과감하고 진득하면서도 한없이 허허로운 ‘이성복 사유의 축도(縮圖)’로 들어박힌다. 달리 말해, “정든 유곽”의 한복판엔 보들레르가 ‘영혼의 성스러운 매음(sainte prostitution de l'âme)’이라고 불렀으며, 불가에서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고 일컬어왔던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사유와 ‘회통(會通)’의 세계관이 보이지 않는 에테르처럼 “소리 없이” 스며있다는 것이다. 마치 희부연 안갯속 신기루처럼 ‘화해적 이원성’의 신비한 뒷자락을 얼비치면서 이내 사라져버린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적확하겠다. 2 스무 살의 문학도에게 「서시」는 그야말로 특출한 ‘연시(戀詩)’이자, 미래의 불안으로 내던져진 청춘의 송가(頌歌)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지금-여기, 오십을 훌쩍 넘긴 중늙은이들에게도 그 젊음이 간직했던 아스라한 “사랑”의 열병과 선득한 “치욕”의 모멸감을 동시에 떠오르게 만드는 또 다른 ‘공-실존’의 무대일 것이 틀림없다. 나아가 그 처참한 젊음의 빛살 아래 다시 열리는 회고조(懷古調)의 ‘사랑 노래’이자 감정의 고고학적 무대일 수밖에 없으리라. 이러한 견지에서 이성복의 두 번째 시집 『남해 금산』의 수미쌍관 별자리를 이루는 「서시」와 「남해 금산」의 ‘해조음’을 다시 느릿느릿 들어보라. 이 수려한 두 편의 시는 “그대 벗은 어깨 위를 타고 흘러 떨어지는 빛다발의 歡呼”(「라라를 위하여」,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섬세한 여백의 필치로 그린다. 나아가 “빛나는 못, 빛나는 신음소리”(「나는 식당 주인이」, 『남해 금산』)로 압축되는 우리 생의 ‘본원적 역설’과 그것으로 빼곡하게 에둘러진 ‘예술작품의 근원’을 새로운 리듬-이미지로 현시한다. 따라서 「서시」와 「남해 금산」은 “그토록 피해 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오래 고통 받는 사람은」, 『남해 금산』)노라고 읊조릴 수밖에 없을, 최고 순도의 시적 긴장을 내뿜는다. “소리 없이, 간단 없이/그대의 시야를 유린하는/아지랭이 ! 아지랭이 ! 아지랭이 !”(「치욕에 대하여」, 『남해 금산』)가 넌지시 일러주듯, 양자는 시집 『남해 금산』이 품은 ‘신성한 잉여’를 그 마디마디에 감춰두었노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 이들의 사이 공간에선 본원적이라고 불러야만 마땅할, 역설적 존재 상황과 극단적 아이러니로 얼룩진 생이 그침 없는 승화(昇華) 운동이 말없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좀 더 섬세하게 말하면, 승화의 “아지랭이”가 보이지 않는 여운을 거느린 채 쉴새 없이 들이치기 때문이리라. 이성복의 시와 산문이 서로를 횡단하면서 빚어놓는 리듬-이미지 곳곳에서, ‘화해적 이원성’의 카니발 또는 ‘극단적 아이러니’의 ‘대대(對待)’ 운동으로 풀이될 수 있을, ‘본원적 역설’의 무대가 열릴 수밖에 없는 이유와 맥락 역시,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해 온 바와 같다. 그리하여, 오십에 다시 읽는 「남해 금산」이란 어떤 빛깔과 모양새를 띠고 우리 앞으로 나타날 것인가? 그저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연시’의 한 자락으로 읽어 온 「서시」는 어떤 영혼의 갈망과 존재론적 신비를 ‘숨비소리’처럼 쓸어안고 있었던 것일까?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 「서시」 전문, 『남해 금산』 「서시」 1연 마지막 행에 배치된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이미지 매듭을 다시 면밀하게 뜯어볼 필요가 있겠다.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라는 첫 행의 무늬와 대위법적 구도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간이식당”이 풍기는 비정상적 결핍과 예외적 허술함이란 뉘앙스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늦고 헐한 저녁”이라는 심상과 잇닿으면서 누추하고 비루한 생활의 감각을 전경화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비가시적 느낌의 잔영은 작품 전체의 해석 방향을 좌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뒤에서 이어지는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가 발산하는 중의적 맥락과 연결해보면 긴요한 맥락이 감춰져 있음을 “문득”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에 서린 “어두운” 불안의 정서와 ‘두려운 낯섦’의 분위기는 다소 모호하면서도 양면적인 느낌의 여운을 끝자락까지 계속 드리우기 때문이리라.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라는 1연 3행의 이미지는 우선 “늦고 헐한” 삶의 테두리에 도사리고 있을 ‘예기치 못한 사건’과 ‘보이지 않는 위험’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뒷자리의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와 결부된 좀 더 내밀한 맥락에서 다시 읽어야만 할 것이다. 이 구절은 어떤 신비와 황홀경에 이르려는 순결한 마음결이 감당할 수밖에 없을, 보이지 않는 난관과 돌발 사태의 위험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읽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구절의 뒷면에선 미래의 불확정 상태로 열린 기도와 불안의 “목소리”가 겹겹의 메아리로 울린다. 이 숨겨진 맥락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 “당신”에 깃든 상징의 복합적인 의미 운동과 다채로운 스펙트럼에서 기원한다. 그리하여, 「서시」의 “사랑하는 사람”과 “당신”은 만해 시에서 지극한 부드러움으로 형상화된 “누구”와 “당신”에 비견되는 ‘감응의 빛살’을 선사한다. 따라서 이들은 광대한 보편주의의 광휘, 곧 ‘강산무진(江山無盡)’, 그 모든 생의 우여곡절 속에서 하염없이 빛나게 될 우리 안에 들어앉은 부처이자,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지도 모른다. 간절한 “내 목소리”로 부르는 “당신”이란 결국, 우리 안의 ‘숨은 조화’이자 우리 모두의 “내 목소리” 안에 이미 깃들어 온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연시(戀詩)’가 말소리의 부드러운 훈기와 굳건한 미래 예감과 충실한 실천의 수행력을 드넓게 감쌀 수 있는 잠재력 역시 ‘본래면목’의 자리에서 온다. 더구나 “남해 금산” 보리암에서 ‘영원한 지금’으로 드리워질 ‘해조음’과 ‘이근원통(耳根圓通)’ 수행법을 떠올려보면, 「서시」가 이성복의 두 번째 시집 『남해 금산』의 맨 앞머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맥락을 즉각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맥락에는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불확정성의 무늬가 만해의 “알 수 없어요”와 겹쳐 떨리면서 예술적 메아리로 퍼져나가는 감응 운동의 궤적과 “물결무늬 자국”이 숨겨져 있다. 그러하기에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작은 무늬에 주름진 『남해 금산』 전체의 ‘사유 이미지’와 더불어 그 분광(分光)의 윤슬을 포착하는 것이 핵심 관건을 이룬다. 2연 첫머리에서 나타나는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반복의 리듬과 굴절된 이미지의 변형 역시,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이미 깃든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을 되찾으려는 절절한 마음결과 부단한 기다림의 운명을 현시한다. 그것은 ‘영원한 지금’으로 지속될 현재진행형의 시간 속에서만 자기 생의 온전한 리듬을 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을 타박타박 내딛어가는 시인-수행자의 ‘영원한 지금’이야말로,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서 “번쩍이며 흘러내리는” 빛살이요 “잎잎이 춤추”는 우리 모두의 생명력이라는 것이다. 이 탁월한 반복의 신운(神韻)과 굴절된 이미지의 숲길은 「서시」의 “사방”으로 “흘러내린”다. 마치 경건한 씻김굿 한 가락처럼, 그것은 시집 『남해 금산』 곳곳에서 현현하는 정화와 치유의 모신(母神)으로 “소리 없이” 깃들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어머니”가 시인의 육친을 나타내는 동시에 “聖母聖月”의 광활하면서도 경건한 수용력을 표현하는 상징적 이미지의 한 매듭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노자가 선명하게 아로새긴 ‘현빈(玄牝)’의 ‘사유 이미지’와 『남해 금산』의 “어머니”는 곳곳에서 닮은꼴의 지력선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 정화와 치유와 구원의 미감이 돋을새김의 필치와 ‘원형 상징’에 육박하는 명징한 이미지들로 형상화되는 이유와 배경 역시 이와 같다. 따라서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이란 아름다운 무늬들은 “당신”이라는 ‘본래면목’에 이르는 “길”, 그 노정기(路程記)에 기록될 수밖에 없을 ‘성과 속’ ‘광명과 암흑’ ‘영광과 비참’ ‘거룩함과 비루함’ 등을 폭넓게 암시한다. 나아가 저 무수한 이원성의 분광(分光)들을 끊임없이 되비치는 ‘해조음’과 더불어, 그 한복판에서 겹쳐 울리는 “내 목소리”의 환희와 절망을 동시에 표현한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라는 아슴아슴한 무늬는 불가에서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온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의 사유를 매혹적인 문채(文彩)로 빛나게 하는 깨달음의 징표일 것이다. 반면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이란 이 깨달음이 마주할 수밖에 없을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의 난맥상을 함축한다. 곧 ‘이근원통’을 비롯한 그 모든 수행 과정이 수반할 수밖에 없을 무수한 고뇌와 내적 갈등과 ‘주화입마(走火入魔)’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이미지로 읽힌다. 어쩌면 이 상반된 무늬들의 돌발적 엇갈림과 지극한 절제의 향연에는 이성복 특유의 “정든 유곽”의 ‘사유 이미지’가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이 이미지는 우리 생활세계의 훼손된 한 조각의 절단면, 그 처절한 “치욕”의 서사를 격렬하게 집약한다. 더불어 세상이 추구하는 상투적인 사랑의 척도를 넘어 훨씬 차원 높은 화합에 이르려는, 우리 모두의 꿈과 소망을 보이지 않는 뒷면에 담는다. 그것은 보들레르의 ‘영혼의 성스러운 매음’이 표상하는 것처럼, 타자와의 “완전한 화합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수행 과정의 극진한 충실성을 함유하기 때문이다. 가장 더러운 오물투성이의 현실에서 움트면서도 지극히 아름다운 신비의 빛을 뿜는 진주처럼, ‘진흙 속의 연꽃’에 비견될 수 있을 ‘극단적 아이러니’의 상호 침투와 그침 없는 횡단 운동을 강렬하게 응집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성복의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는 보들레르가 ‘파리 풍경’의 우울한 단면들로 소묘했던 ‘잠에 떨어진 매춘부들,/추위에 떠는 가난한 이들,/고통받는 임신부들,/아무런 위안 없이 죽어가는 병자들’이 함께 숨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들을 “송두리째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여”, “이성적이거나 윤리적인 한계를 초월하는 화합”을 이루어가는, 그런 ‘형언할 수 없는 잔치(ineffable orgie)’가 그 뒷자락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잔치’를 불교식으로 덧붙이자면, ‘본래면목’에 다다른 ‘원통(圓通)’ 세계가 빛을 뿜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본래면목’의 자리에서만, 부처가 선언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으로 우리 존재가 매 순간 다시 거듭나는, “당신”이라는 “집으로 가는 길”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이 자리는 세상의 모든 일과 사람이 “내”가 될 수 있는 ‘본래면목’의 자리이며, 그 깨달음이 “사방으로 흘러내리는” 자리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모두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그 ‘영원한 지금’의 시간이 매번 다시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자리일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내 목소리”에 이미 깃든 것이지만, “나”라는 ‘아상(我想)’의 테두리를 벗겨낸 ‘본래면목’으로서의 ‘아(我)’,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광휘가 “흘러내리”는 자리이자 ‘시방세계(十方世界)’의 삼라만상이 빠짐없이 존귀해지는 자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서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라는 이미지 역시, ‘대방광불(大方廣佛)’의 무량한 빛살, 그 “사랑”의 수행으로 겹겹이 아롱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서시」 마지막 행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키 큰 미루나무”와 “잎잎이”라는 탁 트인 초록의 무늬들을 “문득” 다시 떠올려볼 필요가 있겠다. 이들 역시 ‘큼과 작음’ ‘부처와 중생’ ‘신성과 세속’ ‘영원과 순간’ 같은 그 모든 이원성의 매듭을 가로지르는 ‘본래면목’의 보편주의를 표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본래면목’의 자리에서만 가능해지는 ‘무아(無我)’, 그리고 ‘시방세계(十方世界)’로 드넓게 열리는 ‘관음’의 위대한 수용력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라. 나아가 “남해 금산 바닷가에” ‘영원한 지금’으로 철썩거릴 그 ‘해조음’을 오랫동안 귀 기울여 다시 들어보라. 그것만이 우리 모두의 “벗은 어깨 위로 흘러 떨어지는 빛다발의 歡呼”를 가능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근원통’ 수행 과정에서 매 순간 다시 열리게 될 보편주의 광휘를 도래케 할 것이 틀림없기에. 3 우리가 「서시」를 한결같이 ‘연시’의 테두리에서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절정의 압도적인 시구에서 온다. 그것이 발산하는 강인하면서도 절절한 마음결의 지속성에서 비롯한다. 이 시구는 저 마음결이 내딛어갈 수밖에 없었을 순결하면서도 굳건한 ‘기다림의 자세’, 그리고 그 운명선의 궤적을 ‘영원한 지금’이라는 현재진행형의 사태로 부단히 바꿔놓는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이 기다림의 운명선 또한, ‘영원한 지금’이라는 부단한 생명력의 트임으로 되살아나는 ‘말과 시간의 깊이’에서 온다. 나아가 매번의 순간마다 ‘회광반조(廻光返照)’를 거듭할 수 있는 순결한 마음과 지속성의 예감을 쓸어안는다. 사람의 말이 순결하면서도 드넓은 감응력의 파장을 뿜을 수 있는 것은 그것에 담긴 소망과 기도가 한없는 시간의 너비로 확장될뿐더러, 그 실패와 좌절의 예감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다한 기다림을 오래도록 지속하는 장면에서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불확정 상태의 고뇌와 불안의 무늬는 그 뒤척임의 시간을 정면으로 수용하려는 순도 높은 “물결무늬 자국”을 감싼다. 나아가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을 깨우치도록 강제하는 내적 계기의 촉발점과 자기 수행의 탄력성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이 “무늬”는 우리 생의 어찌할 수 없는 역설적 존재 상황과 더불어 ‘본원적 아이러니’의 숙명으로 이끌어간다. 나아가 우리 모두를 부단한 자기 수행의 공간으로 내던지는 “집으로 가는 길”, 그 ‘혼자 가는 먼 집’을 쓸어안는다. ‘범속한 트임(profane Erleuchtung)’을 여는 한 비평가의 문장, ‘화엄을 찾는 나그네는 어떠한 상처에도 존재의 핵심을 개방하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가 상기시키는 ‘영원한 지금’의 수행이 그러하듯. 어쩌면 시간의 풍화작용을 거스르는 오랜 ‘기다림의 자세’란 나날의 밥벌이와 물신의 쾌락에 도취한 생활인의 감각을 넘어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 예찬’을 노래한 한 철학자가 말하듯,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진리-사건’의 발생 터전이자 수행 과정일 것이 자명하다. 적어도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드리우는 장애물들을 부단하게, 또는 단호하게 극복해가는 그런 사랑’의 일관된 지속성의 견지에서 본다면,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구절에 “소리 없이” 내려앉는 순결하면서도 굳건한 마음의 흔적이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순결한 마음의 자리에서 「서시」는 ‘연시’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신성한 잉여’의 파장을 그 뒷자락에 걸쳐두고 있었던 듯 보인다. 달리 말해, 부단한 자기 성찰과 구도 수행의 터전으로 나아가는 탐색의 ‘노정기(路程記)’, 그 이면적 주제로의 ‘변신 모티프’를 보이지 않는 배경에 드리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수려한 예술작품은 여전히 매력적인 ‘사랑 노래’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읽힌다 해도 큰 문제는 없다. 그것은 소월과 만해가 함께 이룬 한국시의 가장 유력한 ‘연시’ 풍의 서정 미학, 부드러운 문채(文彩)와 ‘숨은 조화’의 절제된 리듬으로 아름답게 여울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여성적 어조와 역설적 미감의 분위기를 세련된 말소리의 어감과 정갈한 리듬, 그리고 균제(均齊)의 이미지로 새롭게 채색하면서, 동아시아 문화에서 ‘오래된 미래’로 이어져 온 ‘백비(白賁)’의 미학적 전통을 다시 해체-재구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서시」는 그 ‘현묘한 여성성(玄牝之門)’의 경건한 수용력을 “소리 없이” 일렁이게 함으로써, 우리 생의 도처(到處)에 감춰진 역설적 존재 상황과 극단적 아이러니의 심연을 수행의 차원으로 말없이 도약시킨다. 이 맥락은 비단 「서시」와 「남해 금산」뿐 아니라, 그 사이를 구성하는 무수한 시편들에서도 일관되게 발견된다. 곧 이성복의 시집 『남해 금산』에는 소월의 처연한 어조와 역설적 리듬의 자장(磁場)이 도드라진 형세와 윤곽선으로 펼쳐져 있지만, 만해가 성취한 구도(求道)의 상징적 리듬과 이미지의 후광이 ‘연시’ 풍의 어조와 분위기 아래 설핏한 기색으로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집은 ‘백비(白賁)’의 ‘숨은 조화’를 우아(優雅)의 미감에 실린 잔잔한 윤슬처럼 빛나게 한다. 그리고 그 뒷자락엔 만해가 이룬 ‘연시’의 독보적인 성취, 경건하고 부드러운 구도 수행의 빛이 “소리 없이” 어른거린다. 그렇다. 만해가 자신의 구도 수행과 실천적 탐색의 과정을 ‘연시’ 풍의 부드러운 어조와 서정적 스타일로 노래했다면, 이성복의 『남해 금산』은 소월과 만해를 동시에 가로질러, “정든 유곽”으로 표상되는 생의 숙명적 폭력과 찢긴 실존의 “신음소리”, 그 통절한 절규와 시퍼렇게 날 선 ‘공-실존’의 아이러니를 정화하고 치유하고 구원하려는 기도의 이미지들을 아로새겼다. 달리 말해, “어머니” “성모성월” 등과 같은 ‘원형 상징’의 구체적 무늬들을 폭넓게 활용하여, ‘관음’으로 표상되는 위대한 수용력을 부드러운 어조와 균제미의 리듬-이미지로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집 『남해 금산』은 ‘한국의 관음 3대 성지’인 남해 보리암과 그 ‘해조음’이 생성하는 ‘이근원통(耳根圓通)’의 광휘를 뒷면에 “소리 없이” 드리움으로써, “정든 유곽”의 한 축을 이루는 폭력과 절망, 고통과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지는 강인한 수용력의 세계를 현시했노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달리 말해, 이 시집은, ‘관음 성지’의 광휘로 그침 없이 나아가는 수행의 노정기(路程記)를 ‘오래된 미래’의 순결한 ‘사랑 노래’에 실어 우리에게 다시 들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맥락은 수행의 빛과 어둠을 새로운 미감으로 조율할 수 있는 말소리의 굴곡과 반복의 여운, 그리고 그 무늬들의 형세와 윤곽선, 행간의 깊이와 예술적 짜임새를 치열하게 탐구하고 모색했던 오랜 시간의 깊이와 충실한 수행의 자리에서 비롯하는 것이리라. 『남해 금산』의 마디마디에서 빛을 뿜는 강인한 수용력의 미감과 원초적 생명력의 리듬 역시, 시인의 ‘1차 프랑스 유학’ 직후 시점인 1985년부터 시작된 동아시아 문화에 관한 집중 탐구에서 기원한다. 이 맥락은 “어머니”라는 ‘현묘한 모성성(玄牝之門)’의 세계를 소월과 만해가 공존하는 절제된 어조와 여백의 리듬에 얹어, 그 무수한 심상들을 “잎잎이 춤추”게 하는 자리에서 비롯한다. 나아가 시인이 다시 새긴 한국시의 새로운 별자리가 『남해 금산』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자리에선 소월과 만해가 아닌, 이 둘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절정의 ‘시운(詩韻)’으로 틔어 오르는 청신한 리듬-이미지가 흘러나올뿐더러, 동아시아 전통의 ‘백비(白賁)’ 미학이 새로운 의장(意匠)을 에두른 채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노자의 ‘현빈지문’과 불가의 ‘관세음보살’을 아우르면서 양자를 정화와 치유와 구원이라는 ‘현묘한 모성성’의 이미지로 동시에 여울지게 하는 자리에서, 『남해 금산』이 탄생했노라고 선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시집을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테두리에서 다시 면밀하게 뜯어 읽어야만 하는 이유와 맥락도 이 자리에서 온다. 이 자리에선 ‘현묘한 여성성’을 짜고 닦고 씻는 기막힌 어조와 극진한 절제의 리듬, 그리고 여백의 신비스러운 미감이 동시에 울려 나오기 때문이다. 4 표제 시편으로 돋아난 「남해 금산」 역시,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해 온 테두리에서 읽어야만 적확한 독법을 마련할 수 있을 듯하다. 어쩌면 「서시」와 「남해 금산」이 시집 『남해 금산』의 시작과 끝을 이루면서 서로 잇닿을 수밖에 없는 은폐된 맥락 역시, 이 테두리에 감춰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아가 이 비가시적 차원에 대한 ‘증상적 독해’란 그것을 흐릿한 암시의 문법으로 묘사하는 자리에서 좀 더 오롯한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자리에서 이 작품의 가려진 신비가 강렬한 섬광처럼 도래하는 놀라운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남해 금산」 전문, 『남해 금산』 이미 오래전 우리는 이 시에 관한 압도적인 글 한 편을 기억에 새겼다. 그리고 “한 여자”가 “그 여자”로 변신하는 그 모진 생의 곡절과 절절한 이야기의 매듭 속에서,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서 “문득” 귓전으로 스며들던 ‘삼매(三昧)’ 소리를 잠시 엿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우리 마음결 한복판에 주름져 있었을 “해와 달”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은 설화적 신비와 황홀경에 휩싸였으리라. 이 신비의 빛은 나날의 삶을 이루는 범속한 시간의 테두리에서 잠시 날아올라, 우리 안에 이미 깃들어 온 ‘영원한 지금’의 시간으로 고양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지금-여기’로 주어지는 당면한 순간을 벗어나 저 아득한 설화의 시간으로 되살아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삼매(三昧)의 순간적 광휘가 ‘영원한 지금’의 시간으로 매 순간 되살아나는 것에 비견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남해 금산」의 “한 여자”가 품은 설화는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잠기”는 “나 혼자”의 당면한 현재 상황으로 “돌 속에” 봉인된다. 그러나 이 설화는 봉인됨으로써, 오히려 ‘영원한 지금’으로 부단히 이어져갈 미래의 육체성을 얻는다. 이는 물론 역설이다. 그것도 본원적 차원의 역설일 수밖에 없으리라. 이 역설이 빚는 말과 시간의 운명이란 “삶이란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시인의 산문 한 조각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집”은 그 어디도 아닌 “돌 속에 묻혀 있었네”라는 시의 무늬에서 포착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이성복의 시와 산문을 일관되게 가로지르는 ‘본래면목(本來面目)’, 또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자리에서만 발견될 수 있으리라. ‘영원한 천국’이란 ‘잃어버린 천국’일 수밖에 없으며, ‘태초의 낙원’이란 ‘실낙원’의 리듬을 타고 우리 생의 마디마디로 매 순간 다시 들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돌 속에 묻힌” “한 여자”와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간” 바로 “그 여자”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둘도 아니며 하나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존재일 것이다. 곧 ‘불일불이’의 ‘원통(圓通)’ 세계로 빛나는 ‘본래면목’으로서의 “나”일 것이 자명하다. 적어도 ‘영원한 지금’이라는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의 황홀경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그 여자”는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남해 금산 보리암 곁에 우두커니 선 “돌”이자, 그 “돌 속에 들어간” “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마찬가지로 “그 여자”가 전한 “사랑” 노래는 “나도 돌 속에 들어가”도록 “끌어주었”던 “돌 속에 묻혀 있”었던 “한 여자”에게서 온 것이지만, “그 여자”의 “빛나는 신음소리”를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로 매 순간 바꿔놓는, 바로 “그” 자리에서만 설화적 시간의 영속성을 얻는다. 이 영속성은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이 매 순간 다시 발견되는 자리,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쉼 없는 ‘노정기(路程記)’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영원한 지금’이라는 모순 형용의 시간으로만 표현될 수 있을 ‘불가능’의 자리에서만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불가능’의 자리에서 보면,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간” “그 여자”는 그리 슬프거나 비극적인 존재일 리 없다. 오히려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 신비롭고 성스러운 존재일 것이다. 여기서 나타난 “떠나감”의 무늬는 ‘영원한 지금’이라는 현재진행형의 시제 속에서 “그 여자 사랑”을 끊임없이 다시 수행하게 만드는 근본 동력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남해 금산」의 “그 여자”를 시인의 산문 「집으로 가는 길」로 풀어보면, “여지껏 경험해보지 못한 경건한 느낌”을 주는 “당신”일 수밖에 없다. “한 여자”가 “그 여자”로 변신하는 순간, 그 뒷면으로 “소리 없이” 드리워지는 “당신”이란 “내가 찾아 헤매던 숨은 그림”이자,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당신”이란 존재는, 우리 안에서 같이 살아온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일 수밖에 없기에. “나의 삶은 ‘당신’이라는 ‘집으로 가는 길’이다.”라는 산문 한 조각이 「남해 금산」의 “한 여자”와 “그 여자” 사이에서 그침 없이 넘실거리는 “사랑”의 변주곡으로 읽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이 변주곡에 깃들일 수밖에 없을 온갖 “사랑” 이야기 또한, ‘오래된 미래’로 표상되는 무한한 시간의 동심원을 그리면서 끊임없이 번져나갈 수밖에 없으리라. 지금-여기,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언젠가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가 이별의 슬픔과 단독성의 비애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오히려 「서시」의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과 겹쳐 떨리면서,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울려 퍼지는 원격 감응의 “빛다발”로 넘쳐흐르고 있음을. 그리하여, ‘영원한 지금’의 시간으로 매 순간 되살아나는 「남해 금산」의 “그 여자 사랑에”와 “돌 속에 들어간”, 그리고 “나”를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라. 이 무늬들이 ‘시방세계(十方世界)’의 오롯한 순간들로 매번 다시 열리는 영원한 “사랑”의 “길”을 표상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시인에게 “길”이란 결국 “집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집으로 가는 길”이란 “길”이 감내할 수밖에 없을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의 단독성, 시인 허수경에게 기대어 말하자면, ‘혼자 가는 먼 집’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내가 집을 발견하는 순간”, “삶의 길은 끊어진다.”라고 말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삶은 집이 아니라, ‘집으로 가는 길’이다.”라는 문장은 곧 “그대에게 가는 먼 길”, 그 ‘백척간두 진일보’의 단독성을 현시하려는 말일 수밖에 없기에. 만일 “나는 아직도 정면으로 ‘당신’의 얼굴을 마주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당신’은 어렴풋한 모습으로 내 앞에 있다.”라는 산문 한 조각에서 「서시」의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가 “소리 없이” 울리게 된다면, 우리는 이성복 시의 “물결무늬 자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고 “헐한” 사립문 하나를 열게 된 셈이리라.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라는 단독성의 무늬는 우리 모두를 폐쇄적 실존의 가두리에 고립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서 “사랑”이 다시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 그 깨달음의 단독성을 현시하려는 역설적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 혼자”의 반복은 우리 생의 존재론적 고독과 숙명적 비애감을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만인으로 뻗어나가는 “사랑”의 무한정한 힘조차 “나” 안에 있는 ‘본래면목’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그 ‘단독성’의 자리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음을 현시한다. 이처럼 시인 이성복과 그의 텍스트에 대한 ‘증상적 독해’는 그 사이 공간들에 가로놓인 무수한 여백을 가로질러, 표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본질적 절단면’을 새롭게 포착하는 ‘창조적 해석’의 장을 새롭게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에 따르면,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는 “더는 싸울 수 없는 순간에/별은 내린다 더는 내릴 수 없는/순간에 별들은 내 몸에 달라붙는다”(「그대 위의 푸른 나뭇가지들」, 『남해 금산』) 같은 무늬들이 내뿜는 “빛다발의 歡呼”, 그렇게 아름다운 “별”들이 총총히 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奇蹟처럼 떠오를 푸른 잎사귀”(「밤은 넓고 드높아」, 『남해 금산』)이자, “모든 게 神祕”(「口話」,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일 수밖에 없을 “뒹구는 돌”의 탄력과 그 “神祕”가 머물다 갈 “길”을 보이지 않는 행간에 계속 숨겨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로부터 신비로 나아가는 것은 또한 신비로부터 현실로 되돌아오는 것을 암암리에 예비한다.”라는 시인의 보들레르 연구 한 대목은, “현실”과 “신비” 사이에서 부단히 일어나는 ‘화해적 이원성’의 역동적 순환 운동을 집약한다. 나아가 이 순환 운동을 예술적 모티프의 중핵으로 삼는 이성복 시의 ‘본질적 절단면’을 단 한 문장으로 응축한다. 시인의 예술적 사유를 전적으로 지탱하는 것은, 양극단의 에너지를 투쟁과 정복이 아닌 화해와 연대의 차원으로 수렴하려는 동아시아 전통의 ‘대대(對待)’ 원리이기 때문이다. 결국 ‘대대’라는 말은 양극단의 힘이나 사태들이 상호 대립적인 상황과 조건에 놓여 있으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작용과 운동으로 수렴되어가는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역동적 삼투 운동과 그 현상 전체를 빠짐없이 함축할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모든 게 神祕였다 사랑의 힘 죽음의 힘 죽은 꽃의 힘/모든 게 神祕였다” 같은 무늬들을 보라. 이 무늬들이 적확하게 예시하듯, “神祕”란 우리 모두를 “죽지 않을 만큼 짓이기”며 다가오는 그 “龜甲같은 치욕”에서조차 “아지랭이”처럼 움터 오르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랑의 힘”을 낳는 “죽은 꽃의 힘”이라는 ‘본원적 역설’의 존재로서 우리 마음결로 끊임없이 들이쳐오는 것이기에. 모든 게 神秘였다 길에서 오줌 누는 여자아이와 곱추 남자와 電子時計 모든 게 神秘였다 채찍 맞은 말이 길게 울었다 모든게 神秘였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고, 그러나 죽지 않을 만큼 짓이겼다 모든 게 神秘였다 사랑의 힘 죽음의 힘 죽은 꽃의 힘 모든 게 神秘였다 삼백 육십 오일 駱駝는 타박거렸다 얼마나 멀리 가야 하나 얼마나 가까이 있어야 하는가 - 「口話」 부분,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결국 “神祕”란 “길에서 오줌 누는 여자아이와/곱추 남자와 電子時計”에서 나타나듯, 그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조차 분별심을 두지 않고 그 경계와 차별을 거두는 자리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게 神秘였다”라는 말이 참으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멀리 가야 하나 얼마나 가까이 있어야 하는가”라는 거리 감각의 분별심조차 “없는 것”으로 자리할 수 있어야만 한다. 시인은 “없는 것”의 자리를 우리가 감당하거나 “슬퍼할 수조차” “없지만” 매일같이 감당하기 위해 또한 수행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을 “불가능(不可能)”이라는 역설 어법으로 일컬었던 것인지 모른다. ‘영원한 지금’으로 주어지는 매 순간의 수행 과정인 ‘본래면목’이란 ‘알 수 없어요’로 표상되는 “불가능(不可能)”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에. 「슬퍼할 수 없는 것」의 마지막 무늬, “슬퍼할 수 없는 것,/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에서 “소리 없이” 일렁이는 ‘불가능’의 이미지가 그러하듯.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 「슬퍼할 수 없는 것」 전문, 『아, 입이 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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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지 제자리 뛰며 나아가는 미래

제자리 뛰며 나아가는 미래 언젠가부터 시에서 ‘미래’라는 단어를 자주 본다. 아직 오지 않은 날에 대한 염려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일까. ‘멸종’과 ‘멸망’이라는 말로 미래를 예감함과 동시에 노인이 등장하거나, 노인이 된 상황을 상상하는 젊은 시인의 시들이 유독 눈에 띈다.1) 이런 경향을 현실의 제 문제와 관련하여 논의하는 일이 필요하겠으나 이 글에서는 ‘미래’라는 용어에 대한 다분히 개인적인 감상을 꺼내놓고 싶다. 이 단어가 포함된 작품을 읽었을 때 느꼈던 생경한 감각에 대해. 물론 시에 사용하지 못할 말은 없으며 낯선 언어가 만들어내는 효과를 모르는 건 아니다(더욱이 ‘미래’라는 단어는 이제 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말이기에 낯설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왜 나는 ‘미래’가 들어간 문장을 읽을 때면 목에 무언가가 걸린 느낌이 드는 걸까. ‘미래도시’나 ‘미래 계획’과 같은 용례를 통해 이 단어를 처음 접했던 유년의 기억 탓일까. 그러니까 내게 ‘미래’란 현재와 동떨어져 있는 관념적인 시간이라 이 말이 포함된 문장의 경우 여러 번 읽어야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주관적이라 생각했던 이 느낌이 나에게 한정된 것만은 아님을, 나는 지난 계절에 발표된 여러 편의 시를 읽으며 알게 되었다. ‘미래’라는 말이 그토록 낯설게 여겨진 까닭에 대한 또 하나의 실마리와 더불어. 기대 없는 시간 안미옥과 정우신의 시를 나란히 읽는다. 네가 작은 돌멩이라면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올 것이다 잘 보이는 곳에 놓고 두고두고 볼 것이다 곁에 둘 수 있는 다른 돌멩이를 찾아보기도 할 것이다 매일 깨끗하게 닦고 햇볕에 잘 말려두고 가끔은 이리저리 옮겨 다른 풍경을 보게 할 것이다 네가 작은 돌멩이라면 여긴 버튼을 눌러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 유리 액자 안 작은 돌멩이 나는 매일 다시 돌아와 보았다 만질 수 없는 너는 매일 같은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를 했다 중력을 거슬러 있고 싶은 곳에 있겠다는 듯이 아무리 높게 뛰어올라도 어딘가 도착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시간을 찾아보겠다는 듯이 매번 같은 자세로 넘어지면서 눈사람 이야기를 읽다가 덮는다 마지막엔 다 녹을 것이므로 네가 작은 눈송이라면 곁에 있는 눈송이와 함께 뭉쳐놓을 것이다 알게 놔둘 것이다 단단하게 녹을 수 있다는 것을 오리도 되었다가 곰도 되었다가 사람이 되어볼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녹지도 부서지지도 않고 ― 안미옥, 「미래 세계」(『현대문학』2024년 11월호) 전문 안미옥의 시는 ‘나’와 ‘너’가 대비되는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너’를 무척이나 아끼는 듯 보이는 ‘나’는 ‘너’가 “작은 돌멩이라면” 집에 데려와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고 정성껏 보살필 일을 상상한다. 이런 ‘나’의 가정에 짙게 깔린 사랑은 모성애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이지만 굳이 ‘나’와 ‘너’의 관계를 부모와 아이로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앞으로의 일들을 ‘너’보다 조금은 더 잘 알고 있기도 해서 ‘너’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알려주려 애쓰고 있다는 점만은 짚어두자. 이때 주목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너’에 대한 ‘나’의 염려가 세상에 어떠한 기대도 없는 마음에 의해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여긴 버튼을 눌러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한탄하는 ‘나’가 ‘너’에게 “눈사람 이야기”를 읽어주다가도 결국은 눈이 “다 녹을 것이므로” 책을 덮어버리는 장면을 보자. 그런 ‘나’에게 미래란 아직 오지 않은 불분명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분명한 시간이기에 ‘나’는 ‘너’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걱정한다. ‘미래’라는 말이 (낙관적이든 비관적이든) 어떠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이 단어가 화자에게 나 못지않게 생경한 것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크리스티앙 보뱅은 「작은 파티 드레스」에서 유년기가 끝난 후 지속되는 죽음에 대해 말한 바 있다.2) 물론 이 아름다운 산문의 초점은 성년이 된 우리가 “죽음 속을 제자리걸음 하는 사람”같이 지내다 어떻게 사랑에 의해 변화되는가를 설명하는 데 맞추어져있지만 유년 이후의 시간을 그가 ‘기다림의 시간’이라고 칭하는 지점도 생각해 볼 거리가 있다. 특정한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기다리는 상태’로 지내는 것이 성인이 되고 난 뒤 우리가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이라는 그의 서술은, 우리가 점점 ‘가능성’이라는 말과 멀어진다는 사실을 정확히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적인 가능성만이 아니라 내적으로 우리가 체념 상태에 머무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이 내일과 같고 내일이 오늘과 다르지 않은 날들에서 상상해 볼 수 있는 미래는 한정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며 이미 결정된 결말로 나아가는 삶 속에서 우리는 점차 무료해진다. 스펙터클한 변화의 시간에서 비껴선 채 이제는 삶의 어느 한쪽으로만 걷는 정우신의 시 속 “남녀”의 마음 상태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一. 말이 달린다. 二. 남녀가 태어난다. 三. 뒤이어 말이 달린다. 四. 남녀는 종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다. 五. 남녀는 체조한다. 六. 말이 콧김을 내뱉는다. 七. 남녀는 목장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다. 八. 남녀는 가죽을 낳고 싶다. 四. 말이 주춤한다. 五. 말이 안장을 버리고 교차로에 서 있다. 六. 남녀는 정리한다. 七. 남녀는 채찍을 모두 버린다. [……] 三. 말이 등에 올라탄다. 四. 남녀는 정원에 구덩이를 판다. 五. 운과 복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 六. 남녀는 말의 눈동자를 이식한다. 七. 먹을 간다. 八. X축 위로 선이 하나 놓인다. 二. 방사선 치료를 받는다. 三. 폭포 소리가 들린다. 一. 삶의 가장 왼쪽으로 걷는다. 二. 남녀의 첫 단칸방. 三. 한쪽 벽면을 차지하던 곰팡이가 있다. 四. 좌에서 우로 오는 말이 있다. 五. 앞에서 뒤로 가는 말이 있다. 六. 남녀는 언제부터 걸려있었을까. 七. 가죽을 입어본다. 八. 초파리가 사리탑 주변으로 모여든다. ― 정우신, 「팔마도(八馬圖)」 (『릿터』2024년 12/ 2025년 1월호) 부분 이 시에서 정우신은 “팔마도” 속 역동적으로 달리고 있는 여덟 마리의 말들에 번호를 매겨 이를 각각의 개별적인 시간에 빗댐으로써 시간의 실재성과 운동성을 나타낸다. 우리의 삶은 움직이는 시간의 등에 올라타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듯 시에는 남녀의 “탄생”부터 “방사선 치료”를 받기까지 그들의 일생이 차례로 회고된다. 스스로 시간을 운영하기를 꿈꿨던 그들이(“七. 남녀는 목장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다”) 어떻게 주춤하다(“四. 말이 주춤한다./ 五. 말이 안장을 버리고 교차로에 서 있다”) 지난날을 정리하는지(“六. 남녀는 정리한다”), 시간의 등에 올라타 그것을 채찍질하며 빠르게 앞으로만 나아가던 삶을 그만두자(“七. 남녀는 채찍을 모두 버린다”) 도리어 시간이 그들의 등에 올라타(“三. 말이 등에 올라탄다”) 그들을 덮친 양, 이제는 죽음을 떠올리는 그들의 모습은(“四. 남녀는 정원에 구덩이를 판다”) 우리의 일생 역시 시간과 함께 달리다 결국 어딘가에 멈춰져 전시되는 것이 아닌가를 쓸쓸하게 되짚어보게 한다. 삶이 결국 병듦과 죽음의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실감할 때 우리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五. 앞에서 뒤로 가는 말이 있다”). 이처럼 생을 알아갈수록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점점 더 쉽지 않아진다는 것을 정우신의 시는 생각하게 한다. 기도하기와 주석 달기 그런데 두 시 모두 이러한 생의 끝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는다. 먼저, 정우신은 ‘남녀’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그들에 대해 말하며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화자를 마지막 연에서 가죽을 입어보는 자로 전면 등장시키며 그 존재를 강조하듯 보여준다. 시의 앞부분에서 남녀가 “가죽을 낳고 싶”어 했다는 서술과 그들이 남긴 가죽을 입어보는 화자의 행위를 연계해 볼 때 그는 그들의 자식으로 보인다. ‘가죽’은 ‘가족’의 변형으로 읽히기도 할뿐더러 누군가의 가죽을 입는 일은 외형이 유사해지는 것에 다름 아니어서 자식은 부모가 남긴 가죽을 입은 듯 그와 닮은 외형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아랫대의 그는 지난 세대의 시간을 애틋하게 추억하는 가운데, 그들이 남긴 가죽을 입음으로써 새로운 시간이 시작된다. 이는 정우신이 시간을 말에 빗대어 자율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시간의 특성을 강조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미래의 존재에 대해서라면 안미옥은 조금 더 적극적이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미래 세계」가 ‘나’와 ‘너’라는 대비 구도로 구성된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시인은 ‘나’와 전혀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너’에 대해 적으며 ‘나’와 ‘너’를 의도적으로 구분한다. 계속해서 넘어질 것을 알면서도 “매일 같은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는 ‘너’에게는 다음 벌어질 일을 그저 수용하는 ‘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너’에게는 패기가(“중력을 거슬러 있고 싶은 곳에 있겠다는 듯이”), 두려움보다는 믿음이(“아무리 높게 뛰어올라도 어딘가 도착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권태보다는 호기심이( “다른 시간을 찾아보겠다는 듯이”) 있다. ‘너’는 액자 속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 “작은 돌멩이”도, “눈”과 같이 곧 사라질 존재도 아니다. 돌멩이에게 가능한 미래란 점점 부서지는 것이고 눈에게 가능한 내일이 사라지는 것이라면 ‘너’는 그것들과 달리 정해진 시간 질서에 아랑곳하지 않는 자이다. 그러니까 ‘너’는 ‘나’의 마음속에서 절대로 녹지도 부서지지도 않을 만큼 ‘나’가 사랑하는 존재인 동시에 실제로도 소멸과는 거리가 먼 존재로 그려진다. ‘나’는 눈앞에 있는 이러한 ‘너’를 보며 ‘미래’라는 말이 내포한 ‘가능성’의 생생한 의미와 그것이 단단하고 구체적인 실재가 될 수 있음을 비로소 확인한다. 이때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너’가 만들어갈 날들에 “미래 세계”라는 SF에 어울릴 법한 제목을 붙인 시인이 시에서 주목하는 ‘너’의 행위가 “제자리 뛰기”라는 점이다. ‘너’의 행위의 소박함과 광대한 제목 사이의 불균형은 미래에 대한 ‘나’의 변화된 생각을 나타내는 다분히 의도적인 설정으로 읽힌다. 즉, 미래란 멀고 거창한 시간이 아니라 마치 제자리 뛰기를 하는 것처럼 현재 바로 뒤에 놓이는 시간이자 아주 미묘한 변화가 발생한 시간임을 저 낙차는 드러내고 있다. 이는 멸종이나 멸망 같은 먼 미래를 주로 이야기하는 최근의 시들과는 조금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러한 점은 양안다와 권박의 시에서도 발견되는 특성이기도 하다. 다락방에 료스케가 있다 다락방에서 예언의 서가 완성된다 다락방에서 료스케의 계절이다 태양은 바쁘고 여름밤은 잠시 바쁘다 냉소바 한 그릇을 비우고 예배당 료스케의 동생 료코는 제멋대로 구는 만담꾼이다 제멋대로 구는 외지인의 이마를 쳐대고 그런데 우리의 꿈은 너무도 원초적인 것이었지 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은 「춥고, 뜨거운 물을 식히고, 뇌우가 온다」라고 합의되었다 제멋대로 [……] 지난여름에 눈길을 끌었던 건 어느 정원의 측백나무 하얀빛의 뒷면을 깨부수는 조약돌과 꽃상 1인치 정도 사랑에 빠지는 행인들 청신호가 우리 머리 위에 료스케는 온통 멍든 팔을 베고 잠든다 료코는 나를 비웃고 비웃고 그리고 료코는 거짓말을 한다 “당장이라도 잠들고 싶다는 절박감에 너를 만났어. 입이 찢어져라 노래 부를 만큼 진심이었지.” 어느 날 료코는 여름 하늘을 통과하는 꿈 오늘의 여름밤이 끝나면 내일의 여름밤이 시작된다 눈가에 잿가루 묻히고 얼굴에 고양이 털을 덕지덕지 붙인 채로 서 있다 쪽빛 마음과 함께 우리들 깊은 산속 신사 앞에서 ― 양안다, 「예언과 등불을 걸고」(『웹진 비유』2024년 11/12월호) 부분 이 시에서 양안다는 여름밤의 몽상을 거치며 미래로 향해가는 이들을 그린다. “료스케”, “료코”, ‘나’는 양안다의 여러 인물들이 그러하듯 제각기 다른 이름처럼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미래를 떠올리는 방식도 다르다. 료스케가 좁은 “다락방에서” “예언의 서”를 완성한다면 그의 동생 료코는 세상에 대해 비판적인 말들을 늘어놓고(“료코는 제멋대로 구는 만담꾼이다”), ‘나’는 료스케의 품에서(“나를 품에 안은 료스케”)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은 지금을 곱씹는다(가령, “냉소바 한 그릇을 비”우는 료스케와 달리 ‘나’는 “많은 음식이 만족스럽지 않다”). 이러한 나열은 미래에 대해 갖는 여러 생각을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열거한 것으로도, 동일한 인물이 갖는 내적 갈등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나는 이들이 합의한 기도문이 갖는 소박함에 주목하고 싶다. 여름의 한가운데에 그들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춥고, 뜨거운 물을 식히고, 뇌우가 온다”를 “기도문의 마지막 구절”로 삼았다는 사실은 미래의 도래를 바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냉소바 한 그릇을 비”우는 일로 더위를 잠시 잊고, 더위가 물러가도록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그들의 행위는 “오늘의 여름밤”이 끝나도 “내일의 여름밤”이 시작되는, 어떠한 극적인 도약도 없는 시의 시간과 닮아 있다. “지난여름” “측백나무 하얀빛의 뒷면을 깨부수는 조약돌”처럼 아주 작은 움직임, “1인치 정도”의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 “청신호”인 세계. 이런 작은 변화를 위해 양안다의 인물들은 숲이 타올랐던(「다른 여름의 날들」, 『숲의 소실점을 향해』, 민음사, 2020) 지난 시간이 남긴 “잿가루”를 묻히고 자신에게 주어진 “쪽빛 마음”의 운세를 믿으며, 기도하기 위해 “신사 앞”에 있다. 기도는 언젠가 바라는 일이 이루어질 것을 기다리며 제자리를 뛰듯 같은 말을 간절히 반복하는 것. 그런 나날을 보내며 달라지는 것은 미래의 시간만이 아니라 현재 기도하고 있는 자의 내면 이기도 하다. 양안다의 시가 기도를 통해 미래로 나아간다면, 권박의 시에는 주석이 그 역할을 한다. 어여삐 여기는1) 사람이 만든 글자로 어여쁜 바늘을2) 추모한 사람에 대해 짓겠다 어여쁜 사람이…… () …… 될 때까지 짓겠다 위험한 커다란 돌 하나 사랑을 얼굴을 이런 시는 그만 찢겠다 짓겠다 내내 어여쁘겠다3) 적당한 말은 아니지만 어여쁘겠다4) 꺼진 밤, 멈춘 밤, 부러진 바늘의 밤, 위험한 커다란 돌 하나 하늘에 불꽃 튀긴 전신주 젖은 전선들 얼굴과 목이 해체된 여자 있다 모든 되는 신은 불구不具하면서 불구不拘하므로 어여쁘겠다 1) 『훈민정음』. 2) 유씨부인, 『조침문』. 3) 역사役事를 하느라고 땅을 파다가 커다란 돌을 하나 끄집어내어 놓고 보니 도무지 어디선가 본 듯한 생각이 들게 모양이 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 메고 나가더니 어디다 갖다 버리고 온 모양이길래 쫓아 나가 보니 위험하기 짝이 없는 큰길가더라. ……(중략)……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 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 시는 그만 찢어 버리고 싶더라. 이상, 「이런 시」, 『이상 전집』2, 가람기획, 2004 변주. 4) 님의 얼골을 「어여쁘다」고 하는 말은 적당適當한 말이 아닙니다. / 어여쁘다는 말은 인간人間 사람의 얼골에 대한 말이요, 님은 인간人間의 것이라고 할 수가 없을만치 어여쁜 까닭입니다. 한용운, 「님의 얼굴」, 최동호 편, 『한용운 시전집』, 서정시학, 2009 변주. ― 권박, 「어여쁘겠다」(『현대시』2024년 10월호) 전문 첫 시집 『이해할 차례이다』(민음사, 2019)에서부터 주석을 다는 방식으로 시를 써왔던 권박이 같은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제자리 뛰기다. 특히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여쁘다’라는 형용사를 사용한 글들을 조합하여 만든 이 시는 같은 자리를 계속해서 뛰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제자리를 뛸 때마다 도달할 수 있는 높이와 착지할 수 있는 범위가 미세하게 달라지는 것처럼 권박은 주석을 달며 그때마다 다른 시간과 사유에 머물렀음을 표기한다. 이 과정에서 그가 보게 된 것은 ‘어여쁘다’의 의미가 ‘불쌍하다’에서 ‘아름답다’로 달라지는 데 작용한 여성의 현실이다. 세종이 백성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만든 글자(『훈민정음』)를 가지고 “유씨 부인”이 바늘을 불쌍하게 여겨 『조침문』이라는 제문을 지었을 때 ‘어여쁘다’는 분명 ‘불쌍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작가인 유씨 부인이 누군가의 부인으로만 알려져 있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여성이라는 점, “얼굴과 목이 해체된 여자”라는 점은 ‘어여쁘다’는 말의 용례가 변화했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불쌍하고 가련함을 나타내는 말이 언젠가부터 여성의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내는 데 쓰이게 된 연유에는 여성의 비참한 현실이 작용했음을 그는 되짚는다. 그 오랜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해, 새로운 역사를 위해, 시인은 ‘어여쁘다’라는 단어 위에 계속해서 주석을 달며 지난 역사 위에 또 다른 역사적 방식의 글쓰기를 시도하려 한다. “어여쁜 사람이…… () …… 될 때까지/ 짓겠다”라고 중간말을 생략하며 어떤 것도 한정짓지 않음으로써 쓰고 찢고 다시 쓰는 방식의 글쓰기. 그럴 때마다 새로이 조명되는 여성의 역사가, 그런 역사를 되짚어 보며 새로이 만들어지는 현재와 연결된 미래가 여기 있다. 이 시를 읽기 전과 후로 우리의 생각을 달라지게 하는, 현재와 이어진 미래가. 아주 조금 다른 자리에서 네 편의 시를 읽었다. 이제 ‘미래’는 더 이상 내가 알던 멀고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바로 다음 시간. 현재와 ‘1인치 정도’ 다른 자리와 높이에 머무르는 시간. 이처럼 미래가 현재와 붙어 있는 것이라면 미래는 사실상 지금 이 문장을 쓰는 중에도 벌써 와버린 것이다. 쓰는 행위는 언제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가로지른다. 쓰는 자는 녹거나 부서지지 않고 원하는 미래로 가기 위해 제자리에서 뛰는 일을 반복하는 이들, 지난 이가 낳은 가죽을 물려 입고 또 다른 가죽을 물려주는 이들, 지난 시간이 남긴 잿가루를 묻히고 기도하는 이들, 쓰고 찢는 일을 반복하는 이들이 아닐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가리키지만 그들은 기다리지 않고 시를 쓰며 나아간다. 반복할수록 조금 더 높은 자리에서 조금 더 멀리 바라보며, 아주 조금 다른 자리에 착지하며. 우리 역시 그런 시를 읽을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가운데 미래를 산다. 1) 이 문장은 윤혜지의 「음악없는 말」(『문학동네』, 2022년 봄호)과 주민현의 「넓어지는 세계」, 「오래된 영화」(『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창비, 2023) 등을 염두에 두며 쓴 것이다. 최근 젊은 시인들이 시에서 미래를 다룰 때 자주 나타나는 이와 같은 양상은 일종의 ‘조로(早老) 현상’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상세하게 다룰 것을 기약한다. 2) 크리스티앙 보뱅, 「작은 파티드레스」, 『작은 파티드레스』, 이창실 옮김, 1984books, 2024.

월간 현대문학 송현지 안미옥정우신양안다권박미래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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