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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현대시학 | 2024년 5-6월호(제619호)

‘나의 비애’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피어난 시 ― 강우근 시집『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정과리 문학평론

서울대 인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정과리’라는 필명으로 ‘조세희론’이 입선하여 평론활동을 시작했으며, 1988년부터 2004년까지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주로 한국 현대문학 및 현대 문명에 관한 평론 및 저술들을 발표해 왔다. 주요 저서로 『문학, 존재의 변증법』(문학과지성사, 1985), 『존재의 변증법·2』(청하, 1986), 『스밈과 짜임』(문학과지성사, 1988), 『문명의 배꼽』(문학과지성사, 1998), 『무덤 속의 마젤란』(문학과지성사, 1999),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역락, 2005), 『문신공방, 하나』(역락, 2006), 『네안데르탈인의 귀향』(문학과지성사, 2008), 『네안데르탈인의 귀환』(문학과지성사, 2008), 『들어라 청년들아』(사문난적, 2008), 『글숨의 광합성』(문학과지성사, 2009), 『1980년대의 북극꽃들아, 뿔고둥을 불어라』(2014), Un désir de littérature coréenne(DeCrescenzo éditeurs, 2015) , 『뫼비우스 분면을 떠도는 한국문학을 위한 안내서』(문학과지성사, 2016),『문신공방, 둘』(역락, 2018), 『문신공방, 셋』(역락, 2019) , 『‘한국적 서정’이라는 환을 좇아서』(문학과지성사, 2020), 『한국 근대시의 묘상 연구』(2023) 등이 있다. 소천비평문학상(1992), 팔봉비평문학상(2000), 현대문학상(2000), 김환태평론상(2005), 대산문학상(2005), 편운문학상(2015)을 수상하였다. 1999년에 문화관광부에서 기획한 ‘2000년 새로운 예술의 해’ 문학분과위원으로서, 디지털환경과 문학의 공존 방식으로 모색하기 위한 ‘하이퍼텍스트와 문학-언어의 새벽’ 프로젝트를 주도하였다. 2001-2002년에 KBS ‘TV 책을 말하다’의 자문위원을 맡았다. 2000년 이후, ‘동인문학상’ 종신심사위원으로 있다. 1984년부터 2000년 8월까지 충남대학교 문과대학 불문과에서 재직하였으며, 2000년 9월부터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로 옮겨 2023년 8월 은퇴하였다. 주요 강의 분야는 한국 현대시, 정신분석 비평, 세계문학과 한국문학 간의 상호관련성 연구, 디지털 문명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등이었다. 현재 『현대시학』 주간, 동인문학상 종신심사위원, 삼성호암문화재단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 ‘나’의 형편


  『현대시학』617호(2024년 1-2월호)에 발표한 「미래파 이후의 한국시」에서 필자는 한국시의 현황을 ‘매너리즘의 시절’로 규정한 바가 있다. 그리고 매너리즘이란 상식적인 의미와는 달리 혁신의 한계에 갇힌 자질구레한 변이들을 총칭한다고 하였다.

  강우근의 첫 시집,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창비, 2024.01) 역시, 그러한 추세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집을 특징지우는 가장 큰 특성은 ‘나에 대한 물음’이다. 첫 시의 첫 행은


  하나의 불이 꺼질 때 나의 영혼이 어디로 옮겨 가는지 궁금해 (「하루 종일 궁금한 양초」


이며, 마지막 시는


지하철역을 하나씩 지나칠 때마다
내가 단 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세상에 남아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해(「단 하나뿐인 손」)


진다는 안심 속에서 그 ‘하나’의 몸으로 타인의 손을 잡아야 한다는 다짐으로 끝내고 있다. 요컨대 이 시집은 ‘너와 나의 만남’에 대한 갈망으로 큰 물이 지고 있다. ‘나’는 갈망하고 ‘너’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기척을 알린다. 그런데 ‘너’의 다가옴은 풍요한 양상을 산출하는데, ‘나’는 여전히 그것을 보는 관찰자이기만 하다. 표제시인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은 ‘너’의 풍요함을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 에 제시된 ‘알 수 없는 것’의 강도만큼의 열기를 느끼게 한다. 그런데 만해가 ‘알 수 없는 것’의 광휘를 매개로 해서 너무 뻔해 알고도 남는 데데한 조선 사람들을 격상시키려고 했다면, 오늘의 젊은 시인에겐 ‘나’가 문제다. ‘나’는 ‘너’의 기척만 예민하게 감지하지만, 그러나 ‘너’는 결코 내 손을 잡지 않는다. 그런 안타까움을 수일한 이미지로 표현한 다음 시구가 있다.


  미세먼지로 뿌예진 창문을 닫고, 누군가의 사망 소식이 흘러나오는 TV를 틀어놓은 채 4인용 식탁에서 혼자 생선을 발라 먹고 있을 때

아주 먼 곳에서
무언가 천천히 내게 오고 있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아파트 창에서
희뿌연 대기를 내려다보면

불빛을 내는 자동차들은 타들어가는 것 같다. 내일이면 또다른 차들이 도로를 메우다가 메우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아파트의 이웃들은 영영 알 수 없게 된다.

윗집 부부의 싸움 소리가 들리지 않는 밤이
더 무서울 때가 있다.

너무 커버린 나는 매일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신호」)


  이 시인에게 ‘너와 나에 대한 만남’을 향한 갈망은 언제나 ‘나’라는 암초에 걸린다. 그게 이상한 것이다. 아니 차라리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바로 ‘나’라는 존재가.



■ ‘나에 대한 물음’의 맥락


  ‘나에 대한 물음’은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오늘날 한국시의 대부분은 나를 묻고 나를 정의하고 나를 시료대에 올리고 나를 조작하고 나를 장난질하고, 나를 버리고, 대체하고, SNS에 올리고, 사진과 영상을 늘리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바꾼다.

  여기에는 한국적 존재를 둘러싼 이중적 맥락이 개입해 있다. 하나는 서양이 주도한 지구적 정신 전체의 흐름 속에서 ‘나’에 대한 존재론적 지위의 변화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인으로서의 자기 존재의 사회적 위치의 변화의 마지막 지점에 오늘날 ‘나’에 대한 다양한 언술과 생각들이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맥락은 ‘인간 중심의 시대’라고 지목되는 이른바 ‘근대modernity’ 이후 새로운 시대가 개시되었다는 인식 및 그를 뒷받침하는 광범위한 양상에 근거한다. 즉 근대의 행동 핵자가 ‘개인’(나)이었다면, 점차로 개인은 와해의 길에 들어섰다고 보는 시각이다. 게다가 그런 추세는 20세기 말 인터넷의 출현으로 네트워크의 그물이 전 지구에 드리워짐으로써 개인이 거대 ‘사회 네트워크(Social Netwark System)’의 한 솔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을 부추김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이에 대한 담론은 아주 오래되었고 여전히 기승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석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다양한 기점을 긋는다. 개인에 대한 의혹이 발생한 시기를 로베르트 무질과 카프카의 시기, 즉 19세기말~20세기 초엽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차세계대전 이후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성립에서 보는 이도 있고, 20세기 말의 Web의 출현에서 보는 경우도 있다. 지식 체계로 보자면 ‘선택’을 개인이 소유한 ‘전가의 보도’인 것처럼 내세웠던 장-폴 사르트르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다양한 기점들은 20세기 내내 개인에 대한 불안이 들끓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19세기라는 개인과 이성에 대한 확신이 넘쳐나는 시대와 대비되어서 꾸준한 소문거리가 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20세기의 불안은 자신의 시간대를 길게 소급하기도 했다. 미셸 푸코는 개인의 자기 표현이 강력했던 시기를 근대 직전의 17세기로 보았다. 이미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개인은 제도의 그물 속에 갇히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은 일종의 “절름발이의 논리와 위선 속에서 비틀거1)”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보면 개인은 근대의 핵자라기보다 근대의 강박관념이다. 이는 주체는 태어나는 순간 동시에 ‘분열된 주체’라는 정신분석의 통찰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경향 속에서 자주 착각하는 것은 이런 불안과 위협이 실은 개인의 권리와 기능의 강화라는 역동적 활력을 촉진하면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즉 개인은 결코 추락하지 않고 오히려 기승해졌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징표는 오늘날 정보화 문명이 개인들의 손아귀에 더욱 밀착하는 매개적 과정을 통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컴퓨터는 ‘퍼스널 컴퓨터’로 변신하면서 전 세계에 퍼졌으며, 그것은 다시 ‘모바일’로 축소되어 개인들의 신체의 일부로 장착되었으니, 개인들의 활동 능력과 범위는 크게 확장되었고, 기능은 더욱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바로 이런 모순적 양상 때문에 개인들은 담론상에서는 끊임없는 위협과 불안, 그리고 ‘우울’의 현상으로서 진단되지만, 실제 삶의 차원에서 개인은 능력의 증대와 활성화에 뒷받침되어 지속적인 몸과 마음의 변이를 꾀하면서 저 ‘우울’을 즐기곤 하였다(이런 양상에 대해서 필자는 여러 번 주의를 달았지만, 이를 주목한 이는 거의 없다는 게 이상할 정도이다.) 여하튼 이는 조금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을 느닷없이 들고 나왔을 때 얼마 후 푸코가 저자는 죽은 게 아니라 기능이 달라졌다는 점을 지적한 사정을 생각게 하는데, 갑자기 20세기 후반기 최고급 지식인들의 공방이 떠오른 것은, 방금 전에 인용한 『성의 역사』1권의 번역자 이규현이 역자 해설에서 푸코의 다음 말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생각컨대 나는 실제로 정치적 장기판 위의 대부분의 구역들에서 차례차례 그리고 때때로는 동시에 무정부주의자, 좌파, 내노라 하거나 변장한 마르크스주의자, 허무주의자, 노골적이거나 은밀한 반마르크스주의자, 드골주의에 봉사하는 기술관료, 새로운 자유주의자 동으로 자리매김되어 왔습니다. / 나는 차라리 내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 않는 것을 좋아하며, 내가 판단되고 분류되는 방식의 다양성을 즐겨 왔다는 것이 사실입니다.2)


  한데 푸코의 이런 발언은 흥미롭게도 푸코가 ‘성’에 대한 통제에 대해 부르주아가 행한 반응이라고 풀이한 것과 밀접히 유사한 형태를 취한다. 필자는 방금 앞에서 푸코가 근대와 더불어 개인에 대한 관리가 개시된 사정에 주목했다는 점을 언급했었다. 그런데 부르주아(시민)들은 그런 관리에 마냥 복종한 건 아니었다. 이 또한 번역자가 적절히 환기시키고 있는데, 관리의 가장 중요한 항목이었던 ‘성sex’의 가족화라는 압력을 수용하면서 부르주아지는


  18세기 중엽 이래 자체의 성적 욕망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발판 삼아 하나의 특수한 육체, 건강 ‧ 위생 ‧ 자손 ‧ 종족이 수반되는 ‘계급의’ 육체를 구성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3)


는 것이다. 부르주아들은 “스스로 창안한 권력과 앎의 기술체계로 자체의 성을 둘러쌈으로써 그들 자신의 육체, 감각, 쾌락, 건강, 남은 삶의 높은 정치적 가치를 돋보이게 했”으니, 성은 “그 계급이 공포 ‧ 호기심 ‧ 희열 ‧ 열정의 혼합된 감정을 품고 가꾸어 온 그 부르조아 계급 자체의 구성요소4)”가 되었다. 역자의 해석을 보태자면, “부르조아지에게는 성적 욕망의 장치가 예속화의 수단이기는커녕 자기 확인의 도구였다. 그들의 성적 욕망은 귀족의 혈통과 맞먹는 것인 셈5)”이었다.

  두 번째 맥락, 즉 한국 사회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양가적인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일제에 의해 국가를 상실한 시기부터 한반도의 사람들은 자신을 공동체에 동일시함으로써만 심리적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 1990년대까지 한반도의 개인들은 모두 ‘한민족’이었다. 한민족(韓民族)은 ‘한(一) 민족’이었고, ‘한(恨) 민족’이었다. 그런 민족으로서 한반도 사람들은 ‘우리’ 안에 포함되었다. 그런 굴레로부터 한국인들이 풀려나가기 시작한 건 1987년 6월 항쟁 이후였다. 그 항쟁을 이끈 학생운동세력은 스스로를 “구국의 강철대오”라고 자칭했으나, 실제 항쟁의 성공 후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민족의 자리를 서서히 개인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때 처음으로 민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순수 개인이 사회적인 존재로서 등장했으며 1990년대의 격렬한 미성년 인권투쟁을 통해 한반도의 모든 존재들(심지어 반려동물까지 포함해)에게 ‘천부인권’을 부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권리는 일종의 형식에 불과했다. 전반적인 사회적 장에서 순수한 개인들은 천민자본주의의 격렬한 사회적 경쟁 속에 휘말려 들어갔으며, 개인의 권리는 개인의 존중과 어긋나기 일쑤였다. 형식과 실제의 혼동은 개인들을 사회적 악으로의 함몰과 그로부터의 배제라는 양 극단의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낙엽들처럼 날리고 있는 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그 자신에게 부여받은 형식적 의미에 근거해 저마다의 새로움을 모색한다. 다만 그러한 모색들은 하나의 구심점을 갖추지 못한 채로 각각의 방향으로 산개하고 분기한다. 다음 시구는 그런 사정을 암시한다.


  나는 어느 날 17층에 살고 있는 것이다
  16층에 있지 못하는 것이다
  17층에서는 16층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 보일 것이다
  구름이 더 가까이 보이고,
  빗방울이 조금 더 빠르게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다
  자주 산책을 하며 지나치던
  이 오피스텔을 공인중개사와 보러 갔을 때 마침 17층의 방이 비어 있었던 건 우연이었던 것이다
  집마다 방 안에서 다른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나도 17층에서 떨어지지 않는 하나의 음악이 되어가는 것이다 (「어느 날 17층에 있다는 것」


  17층에 있다는 우연하고도 사소하기 짝이 없는 사실, 화자는 그 사실에 대해 공들여 의미를 찾고 최선을 다해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그렇게 한 까닭이 무엇인가? 후반부에서 화자는 자신의 행위에 도사린 아이러니를 발견한다.


어느 주말에 암막 커튼을 덮고 긴 낮잠을 자고 있을 때
고등학교 친구의 전화소리에 꿈에서 깨고 마는 것이다
“여보세요?”
나는 잠이 덜 깬 채로 하품하면서 커튼을 치고
공룡의 등을 덮었던,
동굴벽화를 그린 크로마뇽인의 손을 차갑게 했던,
수많은 전쟁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발을 묶었던,
폐허가 된 서울에 다시 지어진
건물의 창으로 떨어지는
눈을 보며 언제까지 이어져왔던 생활을 하는 것이다



■ ‘비애’의 상호텍스트적 반향 1: 세계 속의 한국인


  이상의 서술은 강우근의 시적 상황이 새삼스러운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 그는 오늘의 젊은 세대가 겪는 일반적인 질환을 앓고 있으며, 또한 광범위하게 분산하는 다양하면서도 한결같은 방향의 기도에도 동참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그만의 시를 유별나게 하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시적 실천을 통해서 배어나는 ‘비애’이다. 방금 읽은 시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듯이 화자는 자신의 의미 생산에서 자족하지 못한다. 자신의 자질구레한 의미 만들기가 ‘폐허’ 위에 기초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광범위하게 퍼트린 게 워쇼스키 형제의「매트릭스」임은 잘 알려져 있다. 영화에서는 신-인간(네오)이 세계를 구출해 줄 것 같은 뉘앙스를 계속 풍겨대지만, 이 시는 그런 얄팍한 희망을 갖지 못한다.

  이 시집의 바탕을 ‘산독(山豄)6)’처럼 흐르는 비애는 현실에 대한 시인의 정직성과 안목의 두터움을 동시에 드러낸다. 정직성은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안목은 그 자신의 삶이 ‘화려한 외관의 심각한 빈곤’이라는 모순적 상태를 들여다보고 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능력을 가리킨다.

  한데 두 개의 문화적 맥락에 비추어보면 강우근의 시적 태도에 좀 더 깊은 의미망이 새겨진다. 그 둘은 동떨어진 별개의 맥락이지만, 이 시집을 통해서, 한국시 그리고 현대시의 이해를 북돋는 데에 협력할 수 있다.

  하나는 김수영으로부터 온다. 김수영은 프랑스 시인 쉬페르비엘의 시를 좋아했었다. 그가 처음에 쉬페르비엘에게 호감을 가진 것은 그의 ‘연극성’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연극성’의 문제를 ‘겉멋’의 문제로 치환하면서 그것을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쉬페르비엘에 대한 선호는 사라지지 않는데, 그것은 그의 연극성에 ‘비애’가 묻어나고 있기 때문이다7). 그것을 그는 ‘속(俗)과 아(雅)가 한데 뭉친’ 상태로 보았다.


  어떻게 보면 쉬페르비엘은 스스로의 속아(俗雅)에 취해서 늙은 것 같다. 속(俗)과 아(雅)가 한데 뭉쳐 버렸으니 이것은 속도 아니고 아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는 데서 느끼는 비명. 최후다! ‘모든 것에 용기를 내자!’ […] ‘모든 것에 용기를 내자!’ 그러나 이미 늦었다. […] 그러나 그가 그의 연극성을 버리려면 그는 아주 죽어 버리는 수밖에는 없다. 시인의 숙명적인 비극이 여기 있다8).


  김수영에게 ‘비애’는 연극성만의 결과는 아니었다. 그의 ‘비애’ 인식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하나는, 현대성을 최대치까지 추구한 시인으로서, 그는 현대의 속성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니, 그로부터 발생하는 비애이다. 그것을 간명하게 표현한 두 개의 시구가


결의하는 비애
변혁하는 비애......
현대의 자살 (「비」)9)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이다”
—자유
—비애 (「헬리콥터」)10)


이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현대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비애보다는, “우리만의 비애”에 눈길을 쏟게 되는데, 그것은 후발국(한국)의 시인은 원본국(서양)의 시인들에게 ‘뒤쳐졌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다. 나는 우리의 현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부끄럽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보다도 더 안타깝고 부끄러운 것은 이 뒤떨어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시의 양심과 작업은 이 뒤떨어진 현실에 대한 자각이 모체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우리의 현대시의 밀도는 이 자각의 밀도이고, 이 밀도는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를 가리켜준다. 이상한 역설 같지만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11).


  그의 연극성(‘겉멋’)에 대한 혐오는 이로부터 나온다. 그가 연극성의 문제를 간취한 것은 프랑스의 시인에게서였다. 때문에 연극성에 대한 원초적인 인식은 현대시의 속성 상 곧 사라지고 말 포즈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애초에 그는 거기에서 거의 ‘비애’만을 집중해 보았다. 그러다가 쉬페르비엘과 피터 비어레크를 통해 ‘연극성’을 끌어내면서부터는, 한국 시의 상황이 ‘흉내내는 처지’에 불과하다는 인식으로 눈길이 이동한다. 이 흉내의 운명을 이기기 위해서는 흉내의 불가피성 속에 갇혀서 그 상황 자체를 직시하면서 반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몸으로 그 흉내를 겪으면서 동시에 그에 저항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


  시의 모더니티란 외부로부터 부과하는 감각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지성의 화염(火'超)이며, 따라서 그것은 시인이 一육체로서 一추구할 것이지, 시가一기술면으로一추구할 것이 아니다12).


  시는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13)”이라는 그의 유명한 발언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그것은 말 그대로 자신이 처한 처지에 대한 절실한 자각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라, ‘온몸’이라는 말에 도취해서 편하게 읊조릴 것이 아니다.

  여하튼 이 ‘온몸으로 동시에’ ‘흉내내면서 흉내에 저항하기’라는 입장이 세워짐으로써, 그는 ‘숨은 멋’을 선택하고 ‘과도한 겉멋’을 질타한다. 김수영에게는 이 과도한 겉멋이 ‘연극성’의 실체이다.

  김수영이 이런 생각들을 격한 어조로 쏟아내며 한국시를 끌어올리기 위해 애쓴 시대로부터 무려 50년 이상이 흘렀다. ‘비애’를 기준점으로 김수영과 강우근을 비교하면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알 수가 있다. 이제 오늘의 세대는 더 이상 선진문화를 모방하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지 않는다. 선진문화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다. 이미 한국인은 세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의 신비, 그것은 세계의 신비」에서 ‘나’와 ‘너’는 외계인 찾기 놀이를 한다. ‘나’와 세계가 이미 한몸이 되어 있으니, 이제 타자는 ‘외계인’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이 젊은 시인의 정직성은 실은 ‘나’가 세계에 가상적으로 통합되어 있을 뿐이라는 날카로운 인식을 촉발한다.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너에게 전화를 걸자

잠이 덜 깬 낯선 목소리가 내게 묻는다.
“누구세요?”

나는 급하게 전화를 끊고, 자판기 불빛이 비치는 벤치에
앉아 생각하지.


  여기에서 ‘너’는 ‘나’의 세계성을 확인시켜줄 수 있는 ‘나의 이웃으로서의 세계인’이라는 추상적 관념의 은유이다. ‘나’는 ‘너’와 함께 있을 때, ‘외계인 찾기’놀이를 할 수 있다(왜냐하면 그때 ‘나’는 지구인이니까). 그런데 왠지 ‘너’는 “너답지 않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우리의 외계인 찾기는 이어지지 않고, […] / [나는] 혼자 콜라를 마시면서 저녁을 보낸다.” 그리고 문득 ‘너’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낯선 목소리가 받는다. 이러한 사정이 인용부의 맥락이며, 이 맥락 속에서 ‘나’는 실은 썩 막연한 관념으로서의 ‘세계인’에 공상적으로 통합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문득 세계인들이 낯선 자들로 인지되기 시작한다.


상점 에서는 후렴구가 반복되는 외국 노래 콜라를 들고 서성이는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 시행은 다음과 같다.


나만 외계인처럼 보인다.


  시인이 다음 사항까지 염두에 두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외계인’의 영어는 ‘alien’인데, alien은 지구 바깥의 외계인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미국에 이주해 온 비서양인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주민들은 영주권을 획득한 이후에도 내국인이자 동시에 ‘에일리언’이라는 이중의 존재론적 저울 위에서 휘청거린다. 오늘날 세계의 정치‧경제‧문화 등등이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는 것에 비추면, 그들은 세계인이지 동시에 외계인인 것이다.

  팍스 아메리카나에서 공간적으로 단절된 ‘나’의 형편은 어떠한가? 이주민들에게 ‘너’가 눈 앞의 타자라면, 한반도의 ‘나’에게는 ‘너’가 부유하는 관념이라는 것이다. 그 타자의 관념성 때문에 ‘나’의 존재론적 속성 역시 허공에 붕 떠 있을 뿐이다.


네가 없는 세계에서
나의 자전거는 붕 떠버린다.



■ ‘비애’의 상호텍스트적 반향 2: 날지 못하는 비행기


  그렇다면 그의 비애는 이런 정직한 두터운 인식 속에서 고뇌만을 유발하는 것인가? 필자가 끌어올 두 번째 맥락은 엉뚱하게도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 센터 Centre Pompidou’이다. 원명은 “조르주 퐁피두 국립 예술문화센터”로서, 예술 전시, 도서관을 포함하는 일종의 복합문화시설이다. 1971~1977년 사이 동안에 준공이 되었다. 파리 4구의 ‘보부르Beaubourg’ 지역에 있기 때문에 흔히 ‘보부르’라고도 불린다.

  보부르에 무슨 문제가 있나? 오늘날엔 잊혀진 문제가 되었지만, 이 센터는 그 괴상한 외관 때문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시끄러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골조만 세운 것처럼 형해가 노출되었고 그 안에 사람들의 이동이 그대로 보였다. 사람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방문객이라기보다 비계의 사다리를 거니는 듯한 노동자들인 듯한 착각에 휩싸일 수 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매우 화려한 실내가 기다리곤 한다.

  허무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이 망칙한 건물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이 건물을 “평화로운 공존과 핵 위협의 [동시적] 시뮬레이션”으로 보았고, 이 동시성에 내포된 “문화적 분열”이 “정치적 억제14)”를 동반한다고 보았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보편성’에 대한 사유를 내부로 돌려서 보편성의 ‘혁명적’ 효과를 “자기 소진적15)”인 것으로 방출하는 효과를 가진다고 보았다.

  필자는 지금 날짜를 잊었지만, 이런 비판에 대한 설계자 렌조 피아노Renzo Piano의 유머러스한 응답을 프랑스의 일간지 『르 몽드』에서 읽은 적이 있다. 2000년대 초엽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는 간단히 이런 내용으로 대꾸했다.(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의 정확한 진술은 아니다.)


그렇다. 내가 노린 것은 ‘날지 못하는 우주선’이다. 그런데 그게 현실 아닌가?


  이 실없는 농담처럼 보이는 대꾸 속에서 건축가는 무능력을 조장한다는 철학자의 비판에 대해 무능력 자체가 힘들게 작동하면서 스스로를 극복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유일한 ‘혁명’의 출구일 터인데, 왜냐하면 무능력의 주체들이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외부에서 어떤 모종의 힘이 혁명을 제공해준다는 게 넌센스이자, 혁명의 대의를 스스로 모독하는 자기 배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린 그런 사례를 20세기 내내 보아 왔고, 지금도 보고 있다.)

  렌조 피아노의 이 발언이 떠오른 것은 시, 「유성」에서 같은 생각의 진술을 읽었기 때문이다.


헐렁한 셔츠를 펄럭이며 목장을 달릴 때면
우리는 언제나 날지 못하는 비행기가 되었다.


  이 진술은 지금까지 살펴본 삶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다시 한번 압축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시의 인물은 이름이 ‘유성’이다. 이 또한 유성처럼 날아가지 못하는 유성이의 존재를 알린다. 그러나 바로 날지 못한다는 것을 직시하기 때문에 유성이는


유성이는 진흙이 묻은 손으로 하얀 염소의 몸을 어루만지고

염소들이 모두 얼룩덜룩해질 때까지 건초를 먹였다.


  유성이의 행동이 부단한 좌절에 의해 “우리”를 “어린 염소처럼 들판에 / 풀썩 주저앉”게 한다 할지라도, 그 행동 자체는 꾸준히 이어진다. 시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메지난다.


우리는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 사는 고양이들이
다양한 색깔로 난간을 타고 넘는 것을
보고 또 보았다.


  “졸업할 때까지”를 치환하면 “죽을 때까지”가 될 것이다. 어떤 상태에 처해 있더라도 우리가 죽을 때까지 보는 것은 생물의 끊임없는 동작이다. 그것도 아주 “다양”하게.

  이제 강우근의 비애는 존재 그 자체가 된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마르크스)의 존재,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사르트르)의 그 존재 말이다. 즉 ‘활동하는 무화’로서의 존재. 주체가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 존재는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필자가 ‘퐁피두 센터’의 야릇한 외관에서 ‘비계’의 철골 사이를 오가는 노동자를 떠올린 것은 그런 생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복합문화공간’인 그곳에 건축가는 방문객들이 ‘관람하는 자’로 오기를 바라지 않은 것이다. 그는 문화 노동자로서 그들이 거기에 와 살기를 그 미완의 형해로써 요청한 것이 아닐까?



■ 비로소 시작하는 문제


  문제는 그런 존재로서의 비애가 언술로써 표명되는 대신 형상으로써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이리라. 강우근의 시가 이제 막 출발점에 있다면 그는 언젠가 지금의 흘러가는 여울물처럼 이어지는, 생에 대한 그의 느낌을 생 그 자체로 빚어야 할 것이다. 그런 편린이 비치는 걸 엿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우리는 태풍 때문에 얼굴을 못 보고, 운행이 중지된 버스에 타지 못하고, 닫힌 상가를 들어갈 수 없겠지만

  작았던 마음이 이렇게 거대해진
태풍의 심정은 어떨까, 이름을 가지는 순간부터 사라질 일밖에 없는

  바다의 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열대 나무의 이름을 가진, 해가 질 때 풍경의 이름을 가진 태풍이 지나가고 있어

  지금 누가 이렇게 옥상의 빨래를 흔드는 걸까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 대상에게 이름을 붙여준 것은 무서움 때문일까,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일까

  붙잡히지 않으려면 우리도 몸을 함께 흔들어야 할까, 우리는 창문을 모두 걸쇠로 잠가놓았지만

  길 한복판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람이 있어, 어떤 비는 슬픔을 흘려 보내지 못해 그 슬픔을 헤매는 사람으로 남겨놓는다(「태풍 같은 사람이 온다면」)


  이 시구에는 태풍에 휘둘리는 마음만이 있는 게 아니다. 연을 달리하며 이어진 두 행, “이름을 가지는 순간부터 사라질 일밖에 없는 // 바다의 신이라는 이름을 가진”은 태풍의 광포함 밑바닥에 텅 빈 공허가 있을 뿐임을 언뜻 환기시킨다. 그 공허는 그의 존재의 필연성을 부정하게끔 한다. 그렇기 때문에, 태풍의 위력은 위력 그대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서 “무서움”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태풍을 맞는 ‘우리’의 몫이다. 즉 우리는 태풍에 대해서 “무서움”만을 가지지는 말아야 한다. 그 반응의 정서는 스스로의 마음의 운산 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걸 분별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은근슬쩍, 그것도 연의 구분 때문에 표시 자체가 희미하기짝이 없는 채로, 개입된 비-관여적 문구가 시 전체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기능을 한다. 태풍의 흐름을 타고 있는 시편 속의 물상들은 휩쓸려나가는 모양을 보여주다가 이 시구에 의해 끌려서 몸을 세우고 방향을 돌이킨다.

  그러니 독자가 던진 질문에 대한 응답이 얼핏 기척을 냈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정작 그가 출현할 때는 청각적인 것도 시각적인 것도 아니라 체험적인 사건이 되리라.


  달그락거리는 병이 한번씩 맑게 깨지는 소리 (「투명한 병」)


로 세상을 발딱발딱 일깨우면서.

  • 1) Michel Foucault, 『성의 역사 - 1권 앎의 의지』, 이규현 옮김, 나남, 1990, p.24.
  • 2) 이규현, 「역자 서문」, pp.16-17. 이 발언은 푸코의 타계 직전인 1984년 5월, 폴 라비노우와의 대담에서 한 것이다. 원본은, 「논쟁, 정치 그리고 문제화 Polémique, politique et problématisations」, in Michel Foucault, Dits et écrits IV. 1980-1988, Paris: Gallimard, 1994, p. 593
  • 3) 『성의 역사 1권』, op.cit., p.137.
  • 4) ibid., p.136, p.137.
  • 5) ibid., p.13.
  • 6)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표제어로 실려 있지 않지만, 옛 문헌에 나오는 단어로서, “외부로 흐르는 곳이 없는 시냇물”이란 뜻이다. -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 제 4권,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08, p. 744. 이 대목에 이 단어가 맞춤하다고 생각하기에 가져다 쓴다.
  • 7) 쉬페르비엘에 대한 김수영의 변덕스런 반응뿐 아니라, 이하 김수영의 인식의 진화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으면, 졸고, 「김수영의 마지막 회심一 김수영과 프랑스 문학,그리고 자코메티적 변모」(정과리, 『'한국적 서정'이라는 환(幻)을 좇아서 - 내가 사랑한 시인들 세 번째』, 문학과지성사, 2020)을 참조 바란다.
  • 8) 김수영, 「새로움의 모색 — 쉬페르비엘과 비어레크」, 이영준 (엮음), 『김수영 전집 2. 산문』, 민음사, 2018, pp.322-323.
  • 9) 이영준 (엮음), 김수영 전집 1. 시, 민음사, 2018, p.160
  • 10) ibid., p.119.
  • 11) 김수영, 「모더니티의 문제」, 이영준 (엮음), 김수영 전집 2. 산문, 민음사, 2018, p.576
  • 12) loc.cit.,
  • 13)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op.cit., p.498. 이 발언의 주변을 함께 읽으면, 본문의 인용과 ‘선택적 친화’의 관계에 놓여 있음을 금세 알 수 있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 14) Jean Baudrillard, 『보부르 효과L'effet Beaubourg』, Galilée, 1977, p.11.
  • 15) ibid.,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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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주장이 “소유적 개인주의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소유의 논리 바깥”14)을 고민하며 제출되어 왔음을 환기해야 한다. 그 맥락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논해지는 관계성이나 타자 윤리는, 자유주의 휴머니즘과 그리 충돌하지 않는다. 오늘날 여전히 좁힐 수 없는 차이를 전제하는 당사자 논의의 곤경에도 근본적으로는 다른방식의 소유 혹은 (개인적) 소유 바깥이 상상되지 못하는 감각이 놓여 있는지 모른다. 동일성(정체성)으로부터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차이의 연대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한 오늘날의 많은 논의가 있다. 그런데 그 현장마다 좀더 원리적으로 환기해야 할 대목은 “서로가 서로에게 현전하기 위해서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자기 박탈”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혹은 “자아를 상대에게 넘겨주는 행위”15) 쪽이어야 할지 모르겠다. 나를 내어주는 일 없이 타인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제어하도록 하는 도덕이나 의무가 아니며, 우리는 본래 소유 이전의 존재라는 것. 요컨대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오늘날 제2의 자연이 된 소유의 관념보다 더 오래된 관계적 존재 양태를 발견하고 긍정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소유를 근본적으로 질문하지 않는 관계성이나 커먼즈 논의는 다소 공허한 이상 혹은 도덕적 당위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하지만 소유보다 더 근본적이고 오래된 존재의 원리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때, 관계성의 사유는 설득 문제가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자 필연임이 밝혀진다. 이에 대해 한 편의 소설을 경유하여 좀더 생각해본다. 3.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 : 이주혜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속 ‘일기’에 대해 이주혜의 장편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창비 2023. 이하 이 책에서 인용시 면수만 표기) 속 주인공은 불안, 공황 등으로 치료받는 50대 여성이다. 그는 현재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받은 남편과 가족의 위기로 고통받고 있다. 의사는 치료의 한 방편으로 일기 쓰기를 권하고, 주인공은 어느 글쓰기 교습소의 수업에 참여해 일기를 써나가며 그것을 타인들과 공유한다. 소설의 중요한 장치인 일기는, 일차적으로 의사의 권유를 통해 자기치유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런 설정은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을 회복하며 스스로를 자기 삶의 주인(소유자)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최근 많은 자기 서사가 품고 있는 글쓰기의 수행성과 ‘자기’의 테크놀로지가 서사화된 듯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에 대한 절반의 독해다. 주인공의 일기 안으로 좀더 들어가보자. 소설 속 일기는 주인공의 유년을 회고하는 장치다. 회고되는 시간은 1979년 겨울부터 1980년 초여름이다. 이 시간이 암시하는 바를 한국의 독자는 쉽게 알 수 있지만 그 의미를 전하는 것이 소설의 핵심은 아니다. 일기 속 사건이나 존재는 명료하게 요약하기 어렵다. 어린 주인공의 시점을 통해, 이른바 시대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썩 구별되지 않게 그려진다. 예컨대 한국 현대사의 격변을 암시하는 것들은 아이들을 재우고 어른들끼리 주고받는 비밀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함과 불안으로 묘사된다. 비상계엄령, 데모 등과 같은 시대어는 주인공의 사사로운 일상에 비해 배경으로만 놓여 있다. 하지만 직접 의미화하는 것 이상으로 배경의 구속력은 강하게 전달된다. 이런 효과가 주인공의 일기 속 기록으로부터 발생하고 있음을 우선 확인해둔다. 일기 속 사건과 사건, 장면과 장면 사이는 환유적으로 연결되며 궁극적 의미는 자꾸 미끄러진다. 회고되는 기억도 불안정하다. 아빠의 실종, 낯선 남자의 등장 및 그의 느닷없는 추방 등은 파편적 이미지로만 제시될 뿐 어떤 구체적 의미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이런 서사적 파편과 공백은 얼핏 소설적 개연성의 결함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간 우리가 회고에 기반한 성장서사, 기억서사로부터 어떤 익숙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작품들이 현재 시점에서 과거로 임의로 재구성·편집되는 과정을 노련하게 감추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일기는 그러한 과정을 최대한 지양하고 기억의 파편을 그대로 노출한다. 주인공의 일기에서 부상하는 것은 오히려 기억이 종종 부정교합을 수반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러한 기억주체로서 자기의 불안정함이다. 통상 일기 속 성찰 대상이 될 ‘자기’는 늘 스스로가 소유하는 객체로 전제된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일기는 그 장르의 핵심인 자기를 문제의 장소로 삼는다. 자기는 애초에 불안정하고 픽션적일 수 있음이 우선 소설에 암시되어 있다. 불안정하다는 것은 윤곽이 불분명하다는 의미다. 어떤 소유의 형상으로 대상화될 수 없다는 말이다. 소설 속 일기는 처음에 분명 자기를 질료 삼는 자기치유의 의미를 부여받았지만, 실제 그 서술과정에서는 연루된 존재와 사건과 세계가 부조된다. 주인공과 친구, 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등은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 얽힘(entanglement)으로 이미지화된다. 불안과 같은 정서도 누군가의 것(소유물)이라기보다 그 모두를 관통하고 아우르는 것으로 혼연해 있다.16) 예컨대 “시옷에게 비는 살이 부러진 우산과 젖은 신발을 의미했다. 그 축축함과 막막함은 군모를 깊숙이 눌러쓴 어느 군인이 국방색 우비 위로 길쭉한 소총을 끌어안고 집요하게 비를 맞고 있던 장면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끌어들이기도 했다”(26면)는 대목을 보자. 지금 이 대목에서, 어린 시절 주인공이 싫어했던 비의 경험은 ‘젖은 신발’과 ‘소총을 든 어느 군인’을 매개로 겹쳐지며 그녀의 ‘비’에 대한 기억을 이미지화한다. 또한 이것은 지극히 내밀한 몸의 감각에 대한 기억인 동시에 한 시대의 폭력이 단번에 서사적으로 환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사사롭다고 여겨지는 어린아이의 경험이지만, 거기에는 개체적 몸을 관통하는 어떤 세계가 있다. 이런 서술의 와중에 홀연 인지되는 주인공의 몸의 변용 순간도 흥미롭다. 소설에서 유독 강렬한 정서를 자아내는 대목이다. 주인공은 글쓰기 교실에 서 1980년 “5월의 한복판”(212면)의 일을 낭독하는데, 이는 유년시절 주인공이 품고 있던 비밀이 폭력적으로 억압된 경험에 대한 회고이다. 성인이 된 주인공은 수강생들 앞에서 그 회고의 일기를 읽으며 격렬한 울음을 터뜨린다. 그때까지의 서사 속 긴장은 순간 파열한다. 독자는 이 장면을 심리적 문제가 해결되는 단계로 읽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이것은 심리적·정서적 문제극복의 과정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질적 시공간이 서로 긴장하다가 동시적으로 마주치며 폭발하는 순간에 가깝다. 가령 그녀의 현재 고통은 남편으로 인해 관계가 파괴된 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글쓰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어른들에 의해 좌우되는 아이의 일상과 그 배후에 놓인 가부장제 및 친밀한 폭력의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남자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염원 때문에 그녀가 자신의 성별을 숨긴 채 남성 성별을 수행해야 했던 일이다- 이 드러나자 느닷없이 그녀가 내쫓기는 순간은, 한없이 취약했던 존재가 무참히 상처 입는 순간이다. 그것은 정확히 학교에도 거리에도 총을 든 군인들이 있었던 ‘1980년 봄’ 한복판의 일로 기록된다. 지극히 내밀한 자기의 비밀이 시대의 폭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 장면은 정확히 환기시킨다. 그녀의 뒤늦은 울음에는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구조를 공유하는 여러 시공간의 폭력이 가로지른다. 이 울음 장면은, 어떤 존재(몸)가 독자적인 개체이기 이전에 이미 늘 연루되어 있던 세계와의 교섭 현장이자 그 효과임을 증거하는 것 같다. ‘나’ ‘자기’는 선행되어 있다기보다 사건적으로 출현하고 이내 사라지는 것이다. 이후 주인공의 이야기가 후경화하고 타인들의 이야기가 본격 부상하는 서사 진행도 이를 뒷받침한다. 4부에서는 어린 그녀가 이사한 곳에서 만난 이들, 특히 이웃집 윤수와 그 가족 이야기가 다소 의미심장하게 전개된다. 윤수와의 우정, 이웃집과의 친교는 1980년대 이른바 기층민의 삶을 엿보게 하는 바가 있지만 그것을 기록하는 시선은 바깥에 있지 않고 그 삶 안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소설은 점점 현재 그들의 안부를 묻는 이야기로 이행한다. 그녀, 즉 1인칭 주인공 ‘나’의 이야기이자 일기 속 ‘시옷’의 이야기는 그 고유함을 버리지 않으면서 점점 한 시대의 공기를 ‘감각’시키는 이야기가 되어간다. 현재 ‘나’의 상처가 추동했을 글쓰기는 타인과의 관계가 지지해 온 시간을 회고하는 서사로 이행한다. ‘나’의 윤곽은 주인공의 일기뿐 아니라 소설 전체에서도 점점 흐려진다. 이들의 삶은 각자의 것으로 소유,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 속에서 의미화된다. 즉 기존에 일기라는 1인칭 글쓰기가 담보하던 ‘나’ ‘자기’는 이 소설에서 어떤 기원이나 본질 혹은 증명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삶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메커니즘을 거쳐 의미화되는지 일기 쓰는 주인공이 체현한다. 주인공의 일기에 적히는 것은 할머니의 독경 소리, 늘 복잡한 감정을 품게 했던 옆집 친구 애니, 아버지의 빈자리 등 타인과 얽혀 있는 기억이며, 또한 이 소설에 그려지는 것은 그 일기를 함께 읽어주는 현재의 무심하면서 다정한 동료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소설은, 자기를 쓰는 일이 곧 타자를 쓰는 일임을 보여준다. 좀더 적극적으로 의미부여를 한다면 이것은 나/너와 같은 개체적 몸을 초과하는, 혹은 그런 몸으로 분화하기 이전의(metastable)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읽은 일기 안팎의 ‘나’들은 개체들간의 상호적인(inter) 관계라기보다, 식별되지 않는 내적으로(intra) 얽힌 존재의 이미지에 가깝다. 즉 오롯한 자기, 내면 같은 표상이 본래 품고 있었을 모호함과 균열뿐 아니라, 그러한 자기와 내면을 구성시키는 무수한 연루됨 자체가 곧 ‘나’임을 암시하는 것이 이 소설 속 일기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감각으로 미처 식별되지 않는 무수한 사물도 나를 관통하고 구성할 것이다. 앞서 인용한 비 내리는 장면의 회고에서처럼 단일하게 통합된 자기가 아니라, 오히려 이질적 존재와 사건들, 시공간의 비인격적 웅성거림 속에서 불현듯 확인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각별히 기억해야 할 ‘자기’의 한 의미일지 모른다. 주인공이 일기 속 자신을 내내 ‘시옷’이라는 기호로 표기하고 지칭하는 것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일기를 쓰는 주인공은 “‘나는’이라고 시작했더니 한줄도 쓸 수가 없었”(32면)다는 이유에서 시옷이라는 이름을 쓴다. 시옷은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처럼”(33면) 생겼다는 이유에서 선택되었는데, 이것이 서로를 지탱하는 ‘사람 인(人)’의 형상을 염두에 둔 작명임도 분명하다.17) 소설은 이렇게 주인공을 통해 처음부터 ‘나’라는 주어의 함의와 무게를 암시해두었으며, ‘나’의 시선이 독점해온 1인칭의 세계를 내어 주고 3인칭적 재현을 전경화한다. 이 소설을 두고 “‘나’의 쓰기가 스스로의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다면성을 서술하는 일로도 이어진다”18)는 평가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적확하다. 소설 속 ‘나’는 명료한 윤곽과 표상을 갖는 존재이기 이전에, 내내 유동하고 있는 어떤 관계 자체이다. 이런 메커니즘을 생각할 때 오늘날 항간에서 말하는 타자 윤리는,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존재의 원리이자 필연이다. 소유 너머 자기를 상상하는 일과, 연루됨 자체를 사유하는 것은 불가분이다. 4. 소유와 주권적 자기 너머, 혹은 소설적 커먼즈의 상상 지금까지 읽은 이주혜의 지금까지 읽은 이주혜의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속 ‘자기’는 ‘내 삶은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식의 당사자성이나 자기인식과는 거리가 있다. 주권의 문제는 늘 경계 획정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19) 주권은 항상 권력 관계와 지배를 표시한다. 국가뿐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내밀한 자아 역시 소유를 위해 구획되고 객체처럼 간주된다. 그런데 이주혜 소설은 ‘나’ ‘자기’가 그런 객체이기 이전에 이미 늘 타자와 연루되어 있는 준안정적인 지대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지금 주권적 자기 너머를 상상한다는 일은 어떤 구획과 소유와 권리 이전의 지대, 일종의 잠재성을 사유하는 일과 관련된다. 나아가 그러한 ‘자기’를 일종의 관계성의 장소로 전유하는 일이 요청된다. 어떤 존재가 배타적으로 점유한 예컨대 정체성을 본질처럼 인종화하는 통치술과 겨룰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독점될 수 없는 세계의 속성을 생각할 때, 미학과 윤리는 불가분이 아니라는 점도 다시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 물론 유의할 점은, 이것이 오늘날 세계의 역학과 실제를 없는 것처럼 여기며 소유로부터의 이탈을 낭만적으로 예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탈소유에 대한 논의는 자칫, 누군가의 땅을 무주지나 황무지로 간주하여 점유해온 정착민 식민주의의 역사를 정당화하기도 쉽다. 또한 무엇이든 가능한 자아를 낭만화하는 자유주의적 모토로 전유되기도 쉽다. 앞서 버틀러의 논의에서처럼 탈소유라는 말이 품고 있는 폭력적 ‘박탈’은 지금도 이 세계에서 늘 진행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핀 ‘나’ ‘자기’는 분명 소유 이전의 양태를 환기시킨다. 모든 사물에 소유의 권리가 부여되어온 역사에도 불구하고, 본래 경계를 획정할 수도 독점할 수도 없는 ‘나’가 있다. 근대적 주권 및 소유적 개인주의와 불가분이었던 자기를 이렇게 다르게 사유해볼 때, 커먼즈로서의 문학에 대해서도 약간의 첨언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언어, 감정, 사유, 땅, 하늘 등 나열할 수 없는 많은 것이 본래 누군가에게 배타적으로 귀속될 수 없는 커먼즈임은 부연할 것도 없다. 하지만 언어, 감정, 사유 등에 일종의 형식을 부여한 문학에 대해서 커먼즈의 사유를 진척시키는 데에는 모종의 어려움이 있다. 예컨대 ‘서명(署名)’으로 상징되는 오리지널리티와 소유의 감각이 성립시킨 (근대)문학 관념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오늘날 문학을 둘러싸고 조밀해지는 법과 제도는 소유의 감각을 더욱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소유와 주권적 자기의 구조로부터 도피하지 않으면서 부당함을 문제 삼고, 동시에 그 구조 너머를 상상하는 일은 지난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커먼즈로서의 문학 논의에서 계속 질문해야 할 고리가 바로 이 소유의 원리임도 분명하다. 물론 많은 이들이 지적해왔듯, 커먼즈는 단지 주어져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커먼즈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것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 함께 만들어가야 할(commoning) 것이고,20) 때로는 투쟁의 산물21)이다. 그렇기에 현행 세계의 역학과 다양한 폭력을 문제 삼는 것은 곧 커먼즈의 주제이기도 하다. 소유를 자명하게 여기는 감각은 커먼즈의 사유를 자꾸 멈춰 세운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러한 이중구속적 상황에서 쉽게 몸을 빼거나 멈춰서는 안 된다. 한 문학연구자는, 새로운 소유권의 형태로 도래한 근대 일본문학 초창기 풍경을 조망하면서 거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다양한 커먼즈의 계기가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는 소유를 질문하는 불안정한 지대를 포함하여 “작가, 허구의 인물, 독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과정”으로부터 커먼즈의 가능성을 타진한다.22) 그는 질문한다. 어느 소설 속 ‘이름 없는 고양이’가 발화하는 그 발언권은 (고양이는 인간도 아니고 이름도 없다는 의미에서) 법적으로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인물의 광기는, (통합되고 관리되는 자아를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소유의 주체적 위치에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지. 또는 한 여성의 소유를 둘러싼 한 지식인의 죄책감은 (가부장제 속 여성의 위치와 마찬가지로) 식민지를 폭력적으로 소유하는 당시 제국의 죄책감을 의미한 것 아닐지 등.23) 앞서 이주혜 소설에서 읽은 ‘나’ 역시 심지어 자기에게조차 독점될 수 없고, 늘 무언가와 연루되어 있는 일종의 준안정적인 지대임을 확인했다. 지금 커먼즈의 조건은 바로 이 불안정함, 혹은 경험되지 않은 잠재성 자체로부터 상상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바로 이 지대에서 바로 (방금 인용한 문장에서처럼) ‘독자, 인물, 작가’가 만나는 것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읽는 나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의 뒤표지에는 소설가 하성란의 이런 감상이 적혀 있다. “누구 한명의 것일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나’ 들의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서, 소설 속 그들의 이야기가 곧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나’들의 이야기가 된다”는 대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앞서 강조한 ‘자기박탈’ ‘자기를 내어주는 일’을 겹쳐 생각하고 싶다. 예를 들어, 우리는 허구로서의 이야기에서 나에 가까운 무언가를 만나고 공감한다. 하지만 때로는 그 이야기 속에서 자기를 잃고 헤매기도 한다. 이야기 속에서 나는 이미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 -예컨대 경험, 정체성- 에 대해 응답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나를 내어주는 장소가 곧 이야기이기도 하다. 앞서 이주혜 소설 속 주인공이 일기라는 형식 속에서 1인칭(나)을 내어 주면서 자기를 쓰는 일이 곧 타인을 쓰는 일이 되었음을 떠올려보자. 동시에 그때, 일기와 픽션을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을 떠올려보자(소설 속 한 인물은 그녀의 일기가 소설 같다고 말하고, 그녀는 자신의 글이 픽션이 아니라고 말한다). 일기가 타인들의 세계로 이행하는 서사 속에서 소유에 기반하는 주권적 자기의 형상은 교란된다. 그리고 픽션과 일기라는 형식과 관련해서도 장르적 구획 이전의 불명료한 지대가 부상된다. 자기를 내어주면서 도달한 곳이 타인의 세계와 더불어 소설적 장소라는 사실은 ‘소설적 커먼즈’ 의 또다른 의미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강조하건대 소유를 질문할 때,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잠재성의 지대가 열린다. 그것은 주권적 자기 너머의 연루됨 자체로 우리를 데려간다. 쓰는 이만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 아니다. 독자, 소비자, 유저 등 특정 정체성의 이름으로 환원되기 이전의 나의 몸들이 거기에서 스스로를 잃고/잊고/헤매도록(dispossession) 초대받는다. 익숙한 회로 속에서 쉽게 공감하는 것만 ‘함께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스스로(라고 여겨지는 것)를 내어주는 일에 초대받고, 그 낯섦에 기꺼이 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지금 커먼즈로서의 문학에 보태볼 또 하나의 의미일 수 있지 않을까. 1) 계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제207호)에 게재된 동명의 글을 수정 보완했지만, 이에 대한 좀더 최근의 상세한 내용은 「말하는 입에서 듣는 귀까지 : ‘자기서사’ 문제틀의 재구성」(김미지 외, 『젠더』, 문학과지성사, 2025)에서 전개했다. 2) 이른바 ‘자기서사’가 2016~17년 광장, 페미니즘 대중화의 시간을 통과하며 특히 부상했다는 점이 2025년 2월 시점에서 다시 의미심장하게 환기된다. 12·3 사태 이후 여의도, 광화문, 남태령, 한 강진 광장에서의 ‘자유발언’ 및 이후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다양한 그룹(시민활동가, 소수정당, 연구자 등)의 집담회, 토론회 등에서 자유발언이 이어지고 있고 그 발언 속 ‘개인’과 ‘연대’의 형식에 많은 이가 주목하고 있다. 광장의 경험은 늘 말을 바꾸어왔고, 말은 늘 광장을 바꾸어왔다. 지금의 분위기는 또 한번 자기를 발화하는 형식에 대한 논의가 재점화될 것을 예고하는 듯하다. 이 글에서 ‘자기’는 self의 번역어이다. 부분적으로 ‘자아’로 읽는 것이 자연스러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기’로 표기했다. 3) 장영은,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민음사, 2018 참조. 4) 김은하, 「젊고 아픈/미친 여자들과 자기 이론으로서의 글쓰기」, 『여성문학연구』61호, 2024 참조. 5) 한영인, 「자아 생산 장치로서의 에세이」,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215, 217면. 6) 日比嘉高, 『プライヴァシーの誕生』, 新曜社 2020, 254면 참조. 7) 오혜진, 「지금 한국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1)」, 『문학과사회-하이픈』, 2018년 겨울호. 8) 오카 마리,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옮김, 현암사 2016. ‘목격-증인 되기’에 대해서는 8장을 참조할 수 있다. 9) 가야트리 스피박, 『스피박의 대담』(새럼 하라쉼 엮음, 이경순 옮김, 갈무리, 2006, 254쪽),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어셈블리』(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참조. 10) C. B. 맥퍼슨,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 이유동 옮김, 인간사랑 1991, 25-26, 206면. 11) 같은 책, 212면. 12) 특히 2010년대 이후 영어권의 각 분과마다 신자유주의 지배구조 분석과 관련해 ‘소유적 개인주의 50년 후’라는 문제의식이 널리 공유되어왔음을 참조해본다. 13)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김응산 옮김, 자음과모음 2016 참조. 이 책에서 두 대담자는, 오늘날 세계가 어떻게 주체의 구성적 상호의존성을 차단하고 정착민 식민 체계에서 박탈·탈소유(dispossession)를 역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넘어설 원리가 무엇일지 논의한다. 14) 같은 책, 26-27, 338면. 15) 같은 책, 337면. 16) 여기에서 물리적으로 구획된 몸을 넘는 정동적인 경험과 연결신체(assemblage)의 주제를 소환할 수도 있고, 이런 이유에서 이 소설은 ‘5월 광주 소설’의 새로운 방법을 가늠케도 한다.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축자적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개인적인 것’의 의미를 재구축하는 과정, 그리고 ‘자기’라는 내적 표상이 시간의 축적 속에서 구축되는 과정을 확인하는 것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어떤 사건에 대한 당사자와 비당사자 문제, 이른바 경험 없는 세대의 ‘포스트 기억 장치’ 문제에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17) 물론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시옷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을 이야기하며 그에 대해 “사과하고” “말을 걸고 싶었”으며 “이름을 불러주고”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347면)고 적어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작가의 사후적 소회와 별개로 분명 ‘나’ 혹은 어떤 고유명을 피하는 설정 속에서 오히려 자기=나를 둘러싼 존재의 원리를 근원적으로 보여준다. 18) 김다솔, 「붉은 언어로부터 무한히 탄생하는 세계」, 『문학동네』 2024년 봄호 56면. 19) 우카이 사토시, 『주권의 너머에서』, 신지영 옮김, 그린비 2010, 379면 참조. 20) 데이비드 볼리어,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배수현 옮김, 갈무리 2015 참조. 21) Silvia Federici, Re-enchanting the World, PM Press 2018, 87면 참조. 22) Michael K. Bourdaghs, A Fictional Commons, Duke University Press 2021, 11, 23면. 23) Michael K. Bourdaghs, 같은 책 2~4부 참조.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 「마음」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계간 창작과비평 김미정 자기서사커먼즈자기소유주권소유적 개인주의 2025
정과리 응시의 담장과 ‘멘토 콤플렉스’라는 장대

 지난 호에서 한국시가 생존에서 실존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응시'하는 주체를 빚어내는 과정을 보았다. 왜 응시하는 주체인가? 김수영이 갈파했듯이 '사물'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그 후손으로서의 우리 마음은 뿌듯할지 모르지만 무언가를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즉 어떻게 주체는 그런 응시의 능력을 갖게 된 것일까? 생존에서 실존으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번개처럼 그런 능력이 그의 몸 안으로 떨어진 것일까? 그러나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은 '사탄' 뿐이다. 모든 능력은 몸 안에서 자생적으로 솟아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을 1945년의 해방과 1950년의 전쟁은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엄혹성은 의식의 표면에서 자각되지 않기 일쑤였다. 그 사실을 직면한다는 것이 엄청난 고통을 가하기 때문이다.  이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새로 태어난 한국인이 실존의 단계에서 응시의 권능을 자신의 몸을 초과해서 선취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 가정이 타당하다면 그는 응시를 취득하기에 앞서 그가 넘어야 할 장벽이 있다는 가정 역시 성립한다. 그 장벽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그가 응시를 응시하는 순간, 그는 두 가지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하나는 그가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를 보고 있다는, 즉 타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누구보다도 '주체'의 힘을 강조한 사르트르가 그 점에 예민하게 주목했던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부끄러움(la honte)은 그 일차적 구조 안에서 '누군가의 앞에 놓인 자'의 부끄러움이다. 나는 방금 모종의 서툴거나 천박한 제스처를 했다. 처음 이 제스처는 내게 붙어 있다. 나는 그것을 판단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것을 바라볼 뿐이다....(중략)... 문득 갑자기 나는 고개를 든다. 누군가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곧 이어서 내 제스처의 천박성을 깨닫는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중략)... 나는 내가 타자에게 드러난 정도로 나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타자의 출현 자체에 의해 나는 어떤 대상을 판단하듯이 나 자신을 판단하는 일에 서둘러야 한다는 처지에 놓인다. 왜냐하면 나는 타자에게 하나의 대상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자에게 드러난 이 대상, 이것은 타자의 의식 속에서는 헛된 가상이 아니다. 이 이미지는 실로 타자에게 전가될 수 없고, 나를 변신시킬 수도 없다. 나에게 어떤 추함, 천박함의 표정을 입히는 나에 대한 나쁜 초상화 앞에서 그러하듯이 이 이미지 앞에서 나는 짜증과 분노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골수까지 침범당하지는 않는다. 부끄러움, 그것은 본질적으로 재인식(reconnaisance)이다. 나는 타자가 나를 보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재인식한다. 1)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부끄러움을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나'는 그런 느낌을 갖게 된 것일까? 사르트르의 글의 문면에는 "서툴거나 천박한 제스처"가 원인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제스처는 어떤 타자에게 한 행위이다. '타자에게'라는 방향성이 없다면 나의 제스처는 그저 무심할 뿐이다. 더 나아가 이 제스처가 '서툴거나 천박한' 형태로 제시되었다는 것은 타자를 '대상화'하는 마음의 태도를 노출한다. 철학자는 그 점을 교묘하게 표현한다. "내가 타자에게 하나의 대상처럼 나타났"던 것은 "내가 어떤 대상을 판단하는" 것처럼 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내 눈앞의 어떤 '타자'를 '대상'처럼 판단함으로써 "서툴거나 천박한" 제스처를 행한 것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거의 동시적으로 타자에 의해서 나의 모습이 '서툴거나 천박하다'고 비추어지리라는 것이다. 그때 나는 타자에 의해서 대상화된다.  사르트르가 이런 풀이를 한 배경에는 '나', 즉 하나의 주체가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 '존재결여'로서 자신을 인식한다는 '대자존재(être pour soi)'에 대한 그 특유의 정의가 깔려 있다. 존재가 자기 자신의 존재함을 인식할 때의 존재일 때, 즉 대자존재일 때 그는 존재결여로서 나타난다. 그 존재결여가 가상의 타자들에 의해서 '대상'의 존재로 그를 격하시킨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무화할 수도 있는 위협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을 새로운 존재로 변신시키기 위한 실마리이다. 위 인용문의 마지막 두 문장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의미를 얻는다. "부끄러움, 그것은 본질적으로 재인식이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인식을 프로이트는 앞서서 파악한 바가 있다. 임상 실험 중에 환자가 자신을 오랜 시간 마주 본다는 점을 거북하게 여겼던2) 프로이트는 '응시'가 '시선'과 다르다는 점을 파악한다. 시선이 주체의 사안이라면, '응시'는 대상에 집착된 '시각적 충동'이며, 이 충동은 '오인'을 개입시킨다는 것이다3). 이러한 분리로부터 출발해 라캉은 이 대상, 즉 주체가 집요하게 바라보는 것이 '남근(phallus)'이라는 점을 간파하는데, 이를 '거세된 성'이 야기하는 "거세 공포에 대항하여 "시선의 석화(石化) 혹은 발기"라는 남근적 반응이 작동한 것으로 풀이한다. 요컨대 '응시'라는 시각적 충동은 "거세 사실을 감쪽같이 감추려는4)" 충동이다.  그렇다면 이 '남근'의 표상들은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 타자에게서 나온 갖가지 환(幻)들로 채워진다. 주체는 이때부터 자신이 타자에 의해 포획되었음을 느낀다. "나는 한 곳만 줄곧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나의 실존 속에서, 나는 사방으로부터 바라보아지고 있다. 5)" 하지만 여기가 주체에게는 삶이 에너지를 얻는 계기이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 주체는 타자로부터 빌려온 환상물들을 제것으로 삼으면서, 끊임없이 갈아치우는 모험을 전개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갱신을 거듭 도모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주체가 '실존'하는 생생한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전쟁을 딛고 살아남은 한국인이 마침내 새로운 탄생을 개시했을 때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난 호에서 말했듯 최초의 인간들이 응시를 첫 번째 행동 수칙으로 삼았던 이유와 효과가 방금 말한 과정을 그대로 품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아무 능력도 재산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거세 상황이다. 그런데 그들은 사태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것은 물론 대상 세계의 진상을 파악하고 그것을 저의 운용 하에 두고자 하는 것인데, 실제로 그럴 수 있으려면 타자들에게서 '도구'와 '사용법'을 빌려와야만 해야 했기 때문이다.  별로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그런데 앞에서 왜 그리 복잡하게 설명했는가?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거쳐야만 주체의 타자 의존의 주체성(실존성)을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 대한 이해가 없는 채로 한국의 식자들은 고금을 통틀어 날마다 시시각각으로 불통의 주체성을 고집하는 데 전념하기 때문이다. 그 주체성의 환몽이야말로 스스로 알려 하지 않는, 즉 자발적으로 망각된, 사대주의에 불과한데 말이다.  1950년대의 김춘수·김수영·신동엽은, 존재의 이유가 지금, 이곳에 도래해야 한다는 믿음을 생존의 역학을 만든 박인환·전봉건·김종삼의 유산을 받아, 타자와의 뫼비우스적 거래를 통해서 실존의 버팀막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 거래의 최초의 생산물이 응시의 획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응시는 주체의 '전가의 보도'가 아니라 주체가 기댄 등받이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것은 장벽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뛰어넘어야 할. 거기까지 가는 데에 또 얼마나 장구하고 복잡한 굴곡의 생애가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6) 1) Jean-Paul Sartre, 『존재와 무 L'être et le néant』, Paris: Gallimard, 1943, pp.259~260. 2) 이에 대한 정보는, Jean-Michel Hirt, '응시 Regard' 항목, in Alain de Mijolla (direc), 『Dictionnaire Internationale de la Psychanalyse (M-Z)』, Paris: Calmann-Lévy, 2002, pp. 1418~9에 근거함. 3) 프로이트, 「성적 탈선들」, 『성이론에 관한 세 개의 에세이』, in Sigmund Freud, 『Œuvres complètes - VI. 1901-1905: Trois essais sur la vie sexuelle, etc.』,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2006, pp. 90-91.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응시'는 '신체적 접촉'과 마찬가지로 "성적 목표를 고착시키는" 두드러진 행동이다. 또한 이 고착은 '성적 탈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시각적 충동(pulsion scopique)이 시각적 쾌락(plaisir scopique)으로 발전될 때, 그것은 '도착(perversion)'이 된다고 한다. 4) Jacques LACAN, 「시선과 응시의 분열 La schize de l'oeil et du regard」 in 『Le Séminaire XI: Les quatres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analyse (1964)』, Seuil, 1973, p.74. 5) ibid., p.69. 6) 개인적인 사정으로 여기에서 멈춘다. 제목이 약속하는 글의 내용은 아직 반 이상이 더 남아 있다. 다음 호로 연기할까 했지만, 글쓰기의 지속성을 위해서 요만큼이라도 발표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였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월간 현대시 정과리 응시부끄러움거세컴플레스김수영김춘수신동엽실존의 근거 2025
정과리 응시와 전진 : ‘최초의 인간’의 행동 수칙

1. 응시의 실례들  지금까지 '최초의 인간'이 출현한 내력을 보았다. 최초 인간의 최초의 행동은 '응시'라는 것도 알았다. 응시는 살아남은 것에 대한 응시, 즉 생존의 확인이었다. 그 확인이 있을 때 생존의 역사(役事), 즉 실존이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응시'는 똑바로 보는 것이다. 자세히 보는 것이다. 생존의 근거를 정확하게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김춘수 시의 화자는 "꽃처럼 곱게 눈을 뜨"는 것이다.  응시에 대한 요구는 김수영과 신동엽에게서도 공히 발견된다. 김수영 자신은 "히야까시 같은 작품1)"이라고 일축했지만 후대의 독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거론된 「공자의 생활난」 역시 응시의 문제를 정면에서 제기한 시다.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2)  이 시가 1945년에 씌어졌다는 것은 김수영의 예민함을 가리킨다. 그는 그 직전에 쓴 「묘정의 노래」에서 "열사흘 달빛은 / 이미 과부의 청상(靑裳)"이라는 구절로 해방을 '낡은 세계의 죽음'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죽음과 신생 사이에 놓여 있음을 "청상(靑裳)"이라는 어휘를 통해 교묘하게 암시했었다3). 그리고 그 이행의 수행적 조건으로서 '바로 보다'를 제출한 것이다. 이 시는 좀 더 심장(深長)한 의미를 비친다. 응시에 대한 깨달음은 「공자의 생활난」에서 나왔으며, '생활난'은 '작난'이 아닌 '작전'의 어려움을 통과해야 극복할 수 있다는 것. 이때 '생활'과 '작전'의 상통성은 '공자'에 근거하며, 이 '공자'는 그가 썼던 산문에 다시 근거한다. 벌써 오랜 옛날에, 나의 머릿속의 담배에 오랫동안 적어 놓은 일이 있던 공자인가 맹자인가의 글의 한 구절이 또 생각이 난다. 이런 뜻의 유명한 처세훈이다. '슬퍼하되 상처를 입지 말고, 즐거워하되 음탕에 흐르지 말라.' 마음의 여유는 육신의 여유다. 욕심을 제거하려는 연습은 긍정의 연습이다4).  '담뱃갑'에 대한 명상을 기술한 이 산문이 또한 교묘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은 "긍정의 연습"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여유는 육신의 여유다"라는 구절에 내장된 '마음'='육신'의 상통성이다. 이 상통성이 있을 때만, 슬퍼하되 상처를 입지 말고, 즐거워하되 음탕에 흐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슬픈 육신을 마음이 움직여 상처 너머의 경지로 이끌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산문의 제목이 가리키는 '생활의 극복'이다.  마음과 육신의 상통성은 「공자의 생활난」에서 '생활난'과 '작난'의 차이와 생활난과 '작전'의 상통성으로 현상되었다. 그리고 이는 다시 「달나라의 장난」(1953)에 와서, '도는 팽이'와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울지 않음' 간의 상통성으로 나타난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달나라의 장난」)  이 구절에서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에서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다음에는 쉼표가 들어가는 게 문법적으로 맞다. 즉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와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는 동의어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울어서는 아니된다."  그런데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팽이'는 "수천 년 전의 성인"의 비유로서 제시된다. 금세 짐작할 수 있듯이, "수천 년 전의 성인"은 「공자의 생활난」의 '공자'와 동격이다. 아마도 시인은 그를 한국인의 정신적 뿌리로서 가정했던 듯하다. 그러나 '공자'가 생활난에 봉착했듯이, '성인'도 [정신을 못 차리게] 돌면서 "나를 울린다". 그리고 '나'는 이제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울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울지 않기 위해서 시의 화자는 '방심조차 하지 않는 것'이라는 행동수칙을 내세웠다. '응시'와 거의 동의어로 볼 수가 있다. 돌고 있는 팽이 앞에서 방심조차 하지 않는 것은 "팽이와 팽이의 생리와 / 팽이 [돔]의 수량과 한도와 / 팽이의 우매와 팽이의 명석성"을 분별해내는 것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  신동엽의 첫 시는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5)」(1958)이다. 이 시는 온갖 감각들의 혼잡스런 향연으로 우선 닥친다. "우리가 포옹턴 하늘에 솟은 바위"의 '촉각', "당신의 입술에선 쓰디쓴 꽃맛"의 '미각', "백학의 나래 휘파람 하세요"의 '청각', 그리고 무엇보다도 흙에서 나와 흙에로 돌아가며, 영원회귀 운운 이야기는 없어도 햇빛을 서로 누려 번갈아 태어나고, 자넨 저만큼 이낸 이만큼 서로 이물을 두어 따 위에 눕고, 사람과 사람과의 중복됨이 없이 흙에서 솟아 흙에로 흐터져 돌아갔을. 인간기생(人間寄生)을 몰을[=모를, 인용자] 사람들.  에서 보듯 총체적 생활 감각이 사방에서 꿈틀댄다6). 그러나 이 감각들은 생의 활력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잡다한 반발력들로 소모되고 만다. “매미는 언제까지 뜻 모를 소리만 울어예는가"에서 보이듯 그것들은 의미의 뒤죽박죽 속에서 곤죽이 되고 만다. 시인의 결론은 이렇다: 한그루 피어난 성서의 지층에는 구십구억 창세 인민의 몸부림 든 사상이 썩어 있었다. 우리들이 돌아가는 자리에선 무삼꽃이 내일 날 피어날 것인가.  이 감각들 중에 유일하게 생의 기미를 지피는 감각이 있다면 그건 시각이다. 우주 밖 창을 여는 맑은 신명(神明)은 태양 빛 거느리며 피어날 것인가. 태양 빛 거느리는 맑은 서사의 강은 우주 밖 창을 열고 흘러갈 것인가.  사상이 썩은 대지는 강으로 흐르고 강은 "우주 밖 창을 여는" '신명'을 일으켜, 그 신명은 강을 창공으로 용약(踊躍)시켜 은하수를 흐르게 한다. 그것이 시인의 소망이다. 그 소망은 눈길을 타고 흐른다. '응시'가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싹은 "빛나는 눈동자"를 창조한다. 몸은 야위었어도 다만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눈물겨운 역사마다 삼켜 견디고 언젠가 또다시 물결 속 잠기게 될 것을 빤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의. 세속된 표정을 개운히 떨어버린, 승화된 높은 의지 가운데 빛나고 있는, 눈(「빛나는 눈동자」)  이 시의 '눈동자' 역시 '눈물겨운 역사'를 견인할 필수 장치가 된다. 그 장치의 기본 수행 지침은 "세속된 표정을 / 개운히 떨어버리"는 것이다. 요컨대 좌고우면하지 않고 현실을 또렷이 바라보는 것이다. 이 응시는 훗날, 4·19를 기려 쓴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서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을 보는 눈,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아 "경외"를 간직한 눈으로 주물된다. 2. '왔다'에서 '간다'로  '응시'가 '정확한 직시'라면 그건 생존을 실존으로 만드는 핵심 장비라고 할 수도 있다. 실존이란 무엇인가? 전쟁 이후의 한국인의 삶을 다시 복기한다면, '죽음' '생존' '실존'이라는 단계적 회로에서 최종 단계에 속한다. 이 '실존'이 있기 위해서는, '생존'을 참된 삶의 가능성으로서 이해하는 전 단계가 있어야 한다. 지금, 이곳의 시공에서 '참된 삶'은 없으나 언젠가 그것은 이루어질 수 있고, 오늘의 '삶'은 그런 '참된 삶'의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다. 그것을 우리 스스로 인정할 수 있을 때 그 삶을 향한 운동이 시작된다.  주제론적 차원에서 본다면 김수영·김춘수·신동엽의 출현은 박인환·전봉건·김종삼의 다음 단계에 속한다. 그리고 넓은 시야에서 본다면, 이는 한국인의 생의 발견 이후 생의 방법론을 찾아낸 최초의 특이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특이점은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로부터의 결정적 도약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 잎은 누구의 발자취 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7)  이 시에 대해서 필자는 '시니피앙들의 광휘와 시니피에의 부재'라는 시각에서 분석한 바 있다. 님의 탈환이 주체에게 제공할 삶의 형상을 상상적으로 선취하되 그 위에 시니피앙만 보이게 하는 반투명 보자기를 씌워 독자로 하여금 시니피에를 찾아보는 상상을 직접 발동케 하는 것이다. 때문에 독자의 상상적 기능이 극대화됨으로써 님과의 만남의 가능성이 무한한 모험의 대양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질 수 없는 자의 신비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8).  저 '신비주의'가 리얼리즘으로 전화할 계기가 이제야 생긴 것이다. 이제 지난 호에서 인용했던 김춘수의 시구들로 되돌아간다. 김춘수도 「알 수 없어요」에서 나타난 것과 유사한 신비로부터 출발한다.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구름과 장미」)9)  그러나 곧이어 시인은 "지금 익어 가는 것은 / 물기 많은 저들 과실이 아니라 / 감미가 아니라 / 사월에 뚫린 / 총알구멍의 침묵이다. / 캄캄한 그 침묵이다."(「가을에」)라고 적는다. 시니피앙의 광휘가 이제 시니피에의 부재로 넘어온 것이고, 그 부재라는 침묵 안에 언어를 집어넣을 통로로서 '꽃처럼 곱게 뜬 눈'이 조형된 것이다.  그 눈이 만들어졌을 때 마침내 시인은 "가자!"라고 외칠 수가 있게 된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지난 호들에서 연속해서 범했던 오류를 고백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기다림의 시학'에서의 서정주의 혁명을 두고, 김영랑의 '기다리다'를 '왔다'로 바꾼 것이라고 보았다10).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숫개마냥 헐떡어리며 나는 왔다.(「자화상」)  이 전화를 통해 피식민과 불모의 땅이 '상명당'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필자는 모종의 착각을 통해서 지난 몇 호에서 서정주의 '왔다'를 '갔다'로 착각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왔다'를 다시 '간다'로 바꿔야 할 필요를 서둘러 적용하려다 범한 오류였다.  왜냐하면 오로지 '왔다'에 머무르면, 상명당에 신비화가 적용될 여지가 크고, 실제로 서정주 시의 훗날의 전개가 그리되었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김종삼·정현종에게서, '왔다'가 '와야 한다'와 '와야겠다'로 변형될 필요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 과정을 줄곧 유념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필자는 '왔다'를 '갔다'로 쓰고 말았던 것이다.  실제로 일어난 것은 '갔다'가 아니라 '간다'이고, '간다'는 김춘수 등이 창출한 '최초의 인간'의 행동 수칙으로 등장한다. 이를 김춘수의 일련의 시를 통해 확인해 보자.  김춘수에게 있어서도 '왔다'가 시적 출발점이라는 것을 필자는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11). 다만 서정주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미당에게서는 '내가 왔다'인 반면, 김춘수에게서는 '릴케가 왔다'라는 것이다. 단지 릴케만이 아니다. 그에게는 수없이 큰 타자가 그에게로 왔다. '한스 카롯사'가 왔는가 하면(「오전의 산령」), "부다페스트에서 죽어간 그 소녀"도 왔고(「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그 이야기를」), '거북'도(「꽃밭에 든 거북」), '딸기'도(「딸기」) 왔으며, 가장 빈번하게는 '꽃'이 왔다. 꽃은 "웃"으며 와서, 개인 하늘에 그의 미소는 잔잔한 물살을 이(「꽃 1」) 루는가 하면, 꽃이여, 네가 입김으로 대낮에 불을 밝히면 환히 금빛으로 열리는 가장자리, 빛깔이며 향기며 화분(花粉)이며(「꽃의 소묘」)  에서처럼, '금빛', '빛깔', '향기', '화분'의 덩어리로 왔다.  즉 '왔다'의 주체가 다른 것이다. 서정주에게서는 '나'가 왔다. 어디로? 이 땅으로, 그러니까 '나'는 이 땅이 상명당임을 증거하기 위해 온 것이고, 거기에서 나는 최대의 삶을 살 거라는 확신을 부여잡는다. 반면 김춘수에게서는 '타자'가 왔다. 그것은 처음 어떤 '이상적 존재'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그 타자는 '나'가 아니다. 따라서 온 존재와 주체 사이의 '밀당'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밀당은 매우 난해해서 결코 그 이상적 존재는 나와 합쳐지지 않는다. 「꽃이여!」라고 내가 부르면, 그것은 내 손바닥에서 어디론지 까마득히 멀어져 간다.(「꽃 2」)  그러니 '나'는 여전히 결핍 상태이며, 목이 마르다. 사랑은 와서 넋을 적시고 넋을 목마르게 한다. (『낭산의 악성』)  타자의 존재가 나에게로 이월되지 않는 상황, 그때의 타자를 우리는 흔히 '큰 타자'라 부르거니와, 어떻게 부르든, 그 상황에 의해서 나는 목마르고 또한 타자는 '이상적 상태'를 떠나 '미지'가 된다. 중앙아세아 아한대지방의 늪 속에 사는 거머리, 거머리가 붕으로 화하는 동안 우리가 지레 보는 우리 영혼의 상공을 덮는 거대한 날개, 날개가 던지는 미지의 그림자다. (「붕(鵬)의 장」)  미지의 범위는 주체와 타자 양쪽에 걸쳐져 있다. 처음에 '나'는 타자를 이상적 존재로 알았으나, 그것이 다가오기는커녕 멀어져가자, 미리 가정된 이상적 존재를 이룰 몫이 '나'에게로 주어진다. 그것은 이중의 각성을 유발한다. 하나는 이상적 존재는 '미리' 그런 존재태를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존재의 이상성은 사실판단이 아니라 당위적 가정이며12), 따라서 타자는 사실적 상태는 오히려 반-이상성에 가까운 게 마땅하다는 인식이다. 왜냐하면 그 당위를 현실화할 책임이 '나'에게로 떨어질 것이니, 그걸 실행했을 경우 나의 가치는 대상의 애초 상태가 열악했었을수록 더욱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을 가리키는 게 위 인용문에서 "거머리가 붕으로 화하는 동안"이라는 시구이다. 이 인식은 김춘수로 하여금 그가 소속해 있는 한반도의 고난 속의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고통받고 죽어가는 존재들을 맞이하는 태도를 갖게끔 한다13).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절대적 책임을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정말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들의 몸짓과 그들의 음성과 그들의 모든 무구의 거짓이 떠난 다음의 나의 외로움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수정알처럼 투명한 순수해진 나에게의 공포를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죽어가는 그들을 위하여 무수한 우주 곁에 또 하나의 우주를 세우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무구한 그들의 죽음과 나의 고독」)  시인은 이상적 존재인 줄 알았으나 반-이상적 상태로 다가오는 타자를 “무구의 거짓이 떠난" 존재라고 말한다. 그때 참됨을 실현할 몫이 오로지 '나'에게로만 던져지지만, 나는 타자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했기에 "수정알처럼 투명한 / 순수해진 나"가 된다. 그 '나'는 나에게 근본적인 외로움과 공포를 안긴다. 많은 독자를 얻었던 『꽃을 위한 서시』의 치명적인 시행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이것이 두 번째 인식이다. 타자의 비-이상성이 첫 번째 인식이라면, '나'의 무지, 헐벗음이 두 번째 인식이다. 다만 나는 헐벗었는데도 불구하고 생존해 있다. 그것을 김춘수 등은 직전의 시인들(가령 박인환, 전봉건, 김종삼)로부터 받았다. 생존하고 있다는 것은 감각이 살아 있다는 뜻이다. 즉 생존을 느끼고 안다(앞 시구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존을 알 뿐만 아니라 주변의 물상들의 수용체로서 자신을 세울 수 있다. 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원래 '이상적 존재'로서 가정된 그 무엇을 위하여 '나'는 마땅한 장비를 갖추고 마땅한 행동을 해야 한다. 그 마땅한 장비의 첫 선택이 바로 '응시'였다. 그 응시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장비인 한, 응시는 그 자체로 목표가 될 수 없다. 당연히 모종의 행동을 같은 시간 내에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 행동은 '간다'로 현상된다. 지난 호에 읽었던 「서시」의 구절을 다시 읽으면, '응시'와 '간다'의 동시성을, 그리고 '간다'의 절실성을 단박에 느낄 수 있다. 꽃처럼 곱게 눈을 뜨고, 불모의 이 땅바닥을 걸어가 보자.  또한 이 '간다'는 '나'만이 가는 게 아니다. 주체와 타자가 함께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움직일수록 '불모'에 실질이 배어들기 때문이니, 그 또한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데 이 상호성은 일방적으로 주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 시인은 말한다. 내가 제대로 가기 위해서는 대상도 함께 제대로 가야만 한다. 다음 시구는 그 사정을 하나의 풍경으로 그린다. 점점점 눈물은 씻기고 피도 멎고 손톱에서 아니, 거문고 다섯 줄에서 꽃샘바람이 인다 벌써 봄이 오고 있었구나! 남산의 아지랭이, 알천의 아지랭이, 감포가 열리고 개운포가 멀리 동해 바다를 열어준다. 꽃이여 꽃들이여, 피어라! 움이 트라! 잎이여, ...(중략)... 나는 널 찾아 저승으로 가고 있네. 저승길은 밝도다. 동해 바다 중천에 해는 떠 해는 땀 흘리고 있었네. 땀 흘리고 있었네. 내 손톱에서 아지랭이 남산의 알천의 아지랭이 보얗게 피어오르고 있었네. 내 손톱에서 새가 날고 있었네. 금빛 깃의 새가 날고 있었네.(『낭산의 악성』)  이 시구에서 "저승길"을 불길한 내용으로 읽지 말기를 바란다. 그 길은 낡은 것이 죽고 새로운 것이 태어나는 길이다. 그래서 "저승길은 밝도다." 문제는 그 밝음은 '나'(이 시에서는 '백결' 선생)가 현을 뜯을 뿐만 아니라, "내 손톱에서 아지랑이"가 "보얗게 피어오르고 있었"야 한다는 점이다.  이 상호성이 김춘수만의 특성인지, 아닌지는 다시 검토될 것이다. 그 상호성의 '근거'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도14). 다만 이 자리에서 독자가 마침내 확인하는 것은 '왔다'가 '간다'로 바뀌게 된 내력이다. '응시는 행동을 동반한다'가 그 내력을 요약한다. 1) "급작스럽게 조제(造製) 남조(濫造)한 히야까시 같은 작품"(「연극하다가 시로 전향 나의 처녀작」 [1965.09], in 이영준 엮음, 『김수영 전집 2. 산문』(민음사, 2018), p.424. - 김수영은 박인환이 주도한 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수록된 두 편의 시를 모두 위의 판단에 포함시키고 있다. 「아메리칸 타임지」와 「공자의 생활난」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정의를 내린 까닭을 밝힌 것은 「아메리칸 타임지」에 대해서뿐이다. 그리고 이후에 그가 「공자의 생활난」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다. 자료가 부족하지만 이 차이에 대해서는 언젠가 분석을 해야 할 것이다. 2) 김수영의 시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이영준 엮음, 『김수영 전집 - 1. 시』 (민음사, 2018)에서 인용한다. 3)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언급한 것처럼 김수영이 파자(破字) 놀이를 즐겼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 졸고, 「한국시사에서의 문자적인 것의 기능적 변천」, 『인문과학』, 제116권, 연세대학교 인문학 연구원, 2019.08 참조. 4) 「생활의 극복」(1966.04), 『김수영전집 2. 산문』, 앞의 책, p.159. 5) 신동엽 시 인용은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강형철·김윤태 (엮음), 『신동엽 시전집』, 창비, 2013에서 따온다. 6) 이 시구의 암시를 따르면 신동엽 사유의 기본 바탕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이다. 이에 대해서는 훗날 다시 언급될 것이다. 7) 한용운, 「알 수 없어요」, 권영민 (엮음), 『한용운 문학전집 - 1. 님의 침묵 외』, 태학사, 2011, p.35. 8)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다. 그러나 때마다 위기는 달랐다」, 『뫼비우스 분면을 떠도는 한국문학을 위한 안내서』, 문학과지성사, 2016, p.46. 9) 김춘수 시의 인용은, 『김춘수 전집 - 1. 김춘수 시전집』, 현대문학, 2004에서 따온다. 10) 「서정주의 탈출기」, 『한국 근대시의 묘상 연구 - '님'은 '머언 꽃'을 어찌 피우시는가』, 문학과지성사, 2023.02, pp.249~62. 참조. 11) 「릴케는 어떻게 왔던가」, 같은 책, pp. 199~209. 참조. 12) 그것이 "영혼의 상공을 덮는 [즉 가리는, 인용자] 거대한 날개"로 표현되었다. 이 사정은 김춘수가 김종삼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13) 가령,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 여기에 와서 '기다림의 시학'은 '마중의 시학'과 만난다. 김춘수 시학의 특징이 가장 도드라지는 지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될 것이다. 14) 이와 더불어 '응시'의 양태, 배경 사유, 지향에 따라 시인의 태도도 달라진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이번 글에서 공통의 존재로서 제시한 김수영·김춘수·신동엽의 차이와 그 의미를 살피게끔 할 것이다.

월간 현대시 정과리 근대인의 존재형식응시김수영신동엽김춘수전진의 형식왔다와 간다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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