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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현대시학 | 2024년 9-10월호(제621호)

부유하는 “공백”의 알레고리, 아라크네의 기묘한 “문장”들 ― 이다희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 (문학과지성사, 2024)

김정현 문학평론

1979년 충남 대전에서 태어났고 이후 전남 여수에서 성장하였다. 광운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김소월 시의 구술성 연구로 석사 학위를 그리고 구인회 모더니즘 시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관심사는 알레고리적 언어 미학과 예술가의 개별적 실존성에 있으며 그에 관한 연구와 비평을 병행하고 있다.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너는 이제 ‘미지’의 즐거움일 것이다(황인찬론)」로 등단하였고 공저인 『한국 근대시의 사상』과 『2023년 제24회 젊은평론가상 수상작품집』 및 문학평론집 『헤테로토피아의 밤』등이 있다. 202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 문학창작산실 발간지원기금 수혜받았으며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학부 조교수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1. 그러니까 이 공백

 

                                              대표님, 제주도는 바람이 많이 부나요? , 저는 지금

                                            되게 기뻐요. 어떻게 공백과 일치하겠어요. 그런 생각이

                                            드네요. 오늘 처음 떠올린 문장이지만 마치 태어날 때부

                                            터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네요.

                                                                       - 「사라진 대표님중에서

 

 이 글을 쓰기 위해 주어진 키워드는 한국 현대시의 가능성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키워드는 두 가지 방향으로도 확장될 수 있겠다. 그 첫 번째는 당연하고도 굳건하게 여겨져 온 한국 현대시란 과연 도대체 무엇일까란 질문. 그리고 두 번째는 지금 젊은 시인들의 기묘하고 괴상하며 때로는 시처럼 보이지 않는 시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란 질문. 특히 두 번째 질문과 연관되어 생각을 넓혀보면 이 가능성이란 키워드는 지금 젊은 시인들이 보여주는 새로운 시를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 가란 의미 역시 내포되어 있을 것 같다.  

 뜻을 명확히 해보기 위해 둘로 나누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할 수 있다. 그 중심에는 한국 현대시라는 것이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으며 이미 완결되어버린 단 하나의 인식일 수 없다는 점이 존재한다. 현대시란 우리의 개념은 언제나 고정적이며 확정적이라고 손쉽게 단언할 수 있을까. ‘한국 현대시에 관해 겨우 공유될 수 있는 조건은 한국어란 언어와 문단이라는 제도적 장치 그리고 최소한의 장르적 규준일 뿐이다. (하지만 이 조건들을 모두 충족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시라고 당연히 말할 순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른 글들에서도 자주 이야기해왔기에 굳이 논의를 반복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우리가 시라고 생각해왔던 많은 당연한 개념들을 벗어나게 된다면 시가 아니었던 많은 것들이 오히려 시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열린다는 점은 확실히 중요하다. 마치 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라는 옛 경구처럼. 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가능성의 사유란 우리가 시라는 개념 그 자체에 얽매여 있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겠다.

 필자의 주관적 견해이겠지만 지금 등장하고 있는 일군의 젊은 시인들 역시 이를 모르지 않는다고 판단된다. 생각해보자. 2000년대 미래파 이후 젊은 시인들이란 호칭에는 언제나 추상성과 난해성이란 명칭이 기입되었으며 시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받아왔다. 그러니 문제는 젊은 시인들이 이해받을 수 없는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핵심은 지금의 시인들이 보여주는 언어의 기묘한 양상 그 자체이다. 상징과 서정과 언어의 당연한 표면적 의미에 의해서가 아닌 오직 자신만의 고유한 알레고리를 통해서만 존재하기. 자신들만의 언어에 의지하며 시적인 것을 생산해내는 무한한 자유로움. 즉 우리가 한국 현대시의 가능성이란 이 거대한 질문을 감당하려 한다면 역설적으로 우리의 당연한 전제를 버려야만 한다. 알고 있고 당연하다고 가정해버리는 한국 현대시란 말은 기실 텅 비어있는 수많은 빈틈들과 공백들로만 성립될 수 있을 뿐이니까.

 이러한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이란 측면에서 주목해 볼 지금의 젊은 시인들 중 한 명이 이다희 시인일 것이다. 특히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문학과지성사, 2024.)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자기 자신의 공백에 대한 알레고리였다. 그러니까 나는 없다. 이 세계에서도 이 현실에서도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에 있어서도. 그러나 때때로 그 부재 속에서 무언가가 알지 못한 채 파편화되고 살아남아 있게 된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공백과의 일치’(「사라진 대표님」)문장을 분노라는 기묘한 방식으로 인식할 때에만 드러날 수 있는 무엇으로서. 즉 내가 나를 파괴하며 내가 아닌 나로서만 살아있음을 느끼는 광기 어린 인간. 자신의 없음과 공백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문장화하려는 자. 요컨대 인간이 아닌 것이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면 나는 남몰래 자신을 역겨워하는 것부터 가르칠 것”(「오일 페인팅」)이라고 기어이 중얼거리는 이 젊은 시인을 우리는 어떠한 가능성으로서 이해해볼 수 있을까.

 공백의 방식에 대해 시인은 다음처럼 말한다. “살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그동안 죽어 있었다는 것도 함께 느낀다라고. 여기에서의 삶과 죽음이란 단순히 심장이 뛰고 몸이 움직이는 물질적 존속 또는 육체가 호흡을 멈추고 정지한다는 일반적 죽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마치 공기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채로 언제나 나를 감싸고 있는 무언가들. 일상과 현실에선 그저 아무런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인형일지더라도 거기에는 분명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무게 없는 무게이자 마음 바깥에 있는 마음이 힘없이 품에 안겨 있다”.(「모르는 엉덩이」) 이처럼 시인은 언어의 표면적 의미에 의해서는 거의 인식되기 어려운 희미한 심연을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감각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불가능성과 가능성의 사이에 중얼거리기. 하여 시집 속에 펼쳐진 공백의 언어들은 모호함을 통해 부유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야기도 일상도 삶도 그리고 자기 자신과도 무관하게. 더 정확하게 말해본다면 이는 목적을 드러내지 않은 채 유동하는 언어들이 쌓여가는 일종의 잔해들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 잔해들의 성채 속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들의 겉모습이 아니다. 보다 핵심은 이미지들의 흐름 아래 숨겨져 있는 근본적 원리이자 시인이 사유하는 나의 존재에 대한 알레고리일 것이다. 요컨대 자책은 어느 순간에 생겨 어딘가에 도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면 그 말해지지 않는 자책이 도달하려는 근원적 어딘가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선 이 언어의 미로들은 허공에 떠있는 성곽처럼 그저 부유할 뿐이며 우리의 시선 바깥에 있는 불길한 어둠 속에서 영원히 머물러 있을 지도 모른다.

 

                                         내 손이 내 머리를 때리면 진심으로 기분이 나쁘지 않

                                           듯 자책은 어느 순간에 생겨 어딘가에 도달하지 않는다

 

                                            (…)

 

                                              살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그동안 죽어 있었다는

                                            것도 함께 느낀다

 

                                             인형을 다시 품에 안고 내내 앉아 있으면 이 무게 없는

                                           무게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

                                             마음 바깥에 있는 마음이 힘없이 품에 안겨 있다

                                                                       - 「모르는 엉덩이중에서

                                                 

 

 

2. ‘쪼개진 조각같은 문장들의 이면엔

 

                                          피곤해서 자꾸 한숨이 나온다. 나는 언제까지 자라지

                                             않을까.

 

                                               누군가의 꿈속에 이렇게 오래 갇혀 있어야 하나.

                                                                         - 「주공 아파트중에서

 

 자신이란 존재가 자신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말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며 딱히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시인에게 그런 일반론은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 거창하고 대단하지만 한없이 무의미한 말들보다 시인은 차라리 자기를 쪼개고 파괴하는 것이 훨씬 익숙해 보이니까. 따라서 시인의 언어가 구축해내는 이미지들의 잔해를 탐색하기에 앞서 우선 질문해봐야 하는 것은 과연 이 모호함의 시인은 어떤 방식으로 현실과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 가이다. 왜 시인은 당연한 우리와 다르게 세계를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사유하고 있을까. 땅 위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는 페르세포네’(「입춘」)는 어떤 마음으로 우리의 현실 속에 머물러 있는 지를 먼저 확인해봐야 한다. 다음의 일상적 상황에 대한 것처럼 보이는 시를 살펴보자.

 

  집에서 키우던 햄스터에게 쌀알을 한 움큼 잡아 던지던

사촌형의 팔을 물어뜯은 적이 있다

 

  나는 사촌 형에게 밀쳐져 뺨을 맞고, 햄스터는 자신에

게 날아오는 쌀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굴을 숨기며

발버둥 친다. 나는 나에게 햄스터가 소중한 것처럼 형에

게 소중한 게 무엇일까 고민한다. 그 짧은 시간에 머리가

핑핑 돌아간다. 남자가 손바닥이 뭐냐고 주먹을 쓰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건 너를 봐준 거라고 형이 대꾸한다.

에게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형이다. 그 짧은 시간에 내 머

리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형을 바라

본다. 싸우려면 한 걸음 가까이 가야 하지만 보려면 뒤로

물러나야 한다.

 

  형의 허벅지에서 검정 벨트를 지나 상체에 보기 좋게

감긴 폴로 티셔츠까지. 오른쪽 깃이 왼쪽 깃보다 안으로

더 말려들어 가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나는 더 이상 화가

나지 않는다. 형의 두 귀 사이에 놓인 이목구비를 훑는다.

형의 단단하고 뜨거운 팔이 얼마나 식어갈지, 형이 어떻

게 자신을 잃어가는지 나는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사람

이다.

 

  그 짧은 시간에 나는 그것을 이해했고, 조용히 햄스터

집을 들고 방을 나왔다.

                                    - 「나날들」, 전문

 

 시인의 많은 시들이 일상적 현실의 모습처럼 보이는 풍경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확연해 보인다. 이 측면에서 이 시는 어렸을 때 햄스터를 두고 다툼을 벌이는 두 사람간의 평범하다면 평범한 상황처럼 판단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주의해야 하는 부분은 시 속의 일상적 상황을 무조건적으로 사실적 경험으로만 환원해버릴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는 알레고리란 측면에서 시인이 사유하려는 세계감에 대한 일종의 크로키라고 해야 보다 정확하다.

 시의 전체적 맥락을 한번 고려해 보자. “집에서 키우던 햄스터에게 쌀알을 한 움큼 잡아 던지던/ 사촌형과 그 사촌 형의 팔을 물어뜯은 나의 존재는 단순한 다툼만을 벌이고 있다고 하기 어렵다. 시인은 이를 다음처럼 말한다. “나는 나에게 햄스터가 소중한 것처럼 형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한다.” 그에 따른 판단은 이러하다. “/에게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형이다. 그 짧은 시간에 내 머리는 결론을 내린다.”라고. 말 그대로이다. 일상적이고 평범하며 당연한 우리들에게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알레고리라는 관점에서 검토했을 때 위 장면은 어떻게 사유될 수 있을까. 이 시가 말하자면 우리들의 당연하고도 의심할 바 없는 현실의 양상이라면 어떠한가. 시에 등장하는 사촌형처럼 우리 모두가 목숨보다 중요한 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하여 의심조차 될 수 없는 자명함. 그렇다면 내 빰을 때리고 나를 밀치며 햄스터에게 쌀알을 던지는 사촌형의 킬킬대는 웃음 가득한 표정에는 진실로 우리의 얼굴이 겹쳐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바로 그러한 숨겨진 형상이 나날들의 알레고리적 맥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위 시에서 보여지는 사촌형의 대립이란 사촌형으로 대변되는 우리와 시인간의 대립으로 규정되어야 보다 정확하게 인식될 수 있다. 시인이 어떻게든 살리고자 노력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굴을 숨기며 발버둥치는 햄스터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으며 있지 않다. 이름 없는 수많은 존재들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사촌형이자 우리에 대한 분노가 시인에게 이처럼 명확하다면. 더욱 중요하게 판단해봐야 하는 부분은 시인이 한걸음 뒤로 물러나 형을 바라보려 한다는 기묘한 태도일 것이다. 그 이유를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싸우려면 한 걸음 가까이 가야 하지만 보려면 뒤로/ 물러나야 한다.”.

 지금이란 당연한 삶의 존속이 아닌 무언가들의 형상. 이 시에서는 햄스터라는 한 단어로 명시되었지만 이 햄스터의 이면에는 요구되고 부탁되는 상상이자 오렌지의 세계이자 심상함과 비명과 끝’(「손을 들어서」)처럼 우리 아닌 무수히 많은 존재들의 목록들이 숨어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면을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시인은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으며 단지 우리란 현실을 바라보고 사유할 뿐. 즉 삶과 자기보전적 욕구의 자연스러움 혹은 부와 풍족함을 위해 살아가며 당연히 지속되는 우리는 시간에 따라 쇠락해갈 것이다. 하여 시인은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한다. ‘폴로 티셔츠를 멋지게 차려입은 형의 단단하고 뜨거운 팔이 얼마나 식어갈지, 형이 어떻게 자신을 잃어가는지 나는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그 짧은 시간에 나는 그것을 이해했고, 조용히 햄스터/집을 들고 방을 나왔다.”는 시인의 마지막 문장은 단순히 다툼을 멈추고 피했다는 사실적 맥락으로 이해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시인은 가까이 접근해서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사촌형과의 투닥거림같은 일상적 풍경 뒤에 숨겨져 있는 시인의 존재론적 욕망. ‘가까이서 싸우기보다 뒤로 물러나우리와 현실과 세계의

본질을 조망하려는 근원적 욕망이 위 문장 속에 숨겨진 진실된 시인의 의지가 아닐까. 요컨대 시인에게 우리의 현실과 세계와 삶은 무가치하며 무의미할 것이며 단지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문장들만 유의미할 뿐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뒤로 물러서며쓰려하는 자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시인이란 어떠한 존재인가. ‘속도와 질감이 바뀌고 갑작스레 많이 내린 눈이 인간의 질서를 바꾸는 그러한 풍경 속에서 고민에 잠긴 페르세포네’(「입춘」)의 마음에는 어떠한 욕망의 문장들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일까. ‘햄스터의 고통을 보지 못하는 우리와 다른 위치에 서 있는 시인에게 오직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시인은 왜 앞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뒤로 물러나서 보려 하는가. 이 같은 모호함 속에서 언어들은 어떻게 유동하는가. 시인은 왜 자기를 분열시키려 할까. 따라서 그 모호함과 분열의 언어가 존재하려는 욕망의 근원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 치의 글쓰기가 끝났다고 삶이 갑자기 시작되는 게

아니라서

  나는 발코니에 가만히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멀리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내가 난간 위에 둔 물컵

을 가볍게 통과한다

  이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웬만하면 어려운 생각들은 밀어내 보려고 한다

  딱히 갈 곳 없이 돌아다닐 때 사람이 사람을 밀어내는

힘으로 어디든 도착하는 것처럼

  나는 계속 문장을 선택하고 선택은 나를 쪼개놓고 스스

스 사라진다

  , 쪼개진 만큼 가벼워졌다면 나는 걸어다닐 필요가

없을 텐데

 

  작은 숲을 계속 헤매며 무한을 만들었던 사람은 숲을

나와서 쓴다

  나쁜 일보다 좋은 일을 견디는게 어렵다라고

  일기에는 숲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모든 빛이 한 번에 몰려든다면 틀림없이 죽을테지

  나는 밝고 집요한 조명을 하나 켠다

 

  잠이 들면 그는 자꾸 운전을 하려 한다

  나는 그에게 달라붙은 잠을 뜯어내며 그의 일기를 고친다

  일기는 소중하지만 때가 되면 이름을 지우고 아무에게

나 줘버리고 싶기도 하지

 

  열어놓은 창문으로 신선한 바람이 분다

  나는 마치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몸을 일으킨다

  그의 베게 밑에 차 키를 몰래 숨긴다

  어떤 부적은 당사자가 몰라야 효력이 생긴다

 

  그가 얼굴을 베개에 깊이 파묻은 만큼 내가 침대에서

떠오른다 쪼개진 나의 조각 하나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다

 

  불면의 시작이자 사랑의 시작이다 좋은 일인지는 알 수

없다

                       -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전문

 

 아마도 이 시는 이다희 시인이 인식하고 사유하는 모호함의 언어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암묵적으로 알레고리화하는 일종의 시에 대한 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언어의 표면이자 의미에 의존하지 않고 유동하며 흐릿해지는 모호함을 통해서만 존재하려는 어떤 의지. 시의 문장에서 말해지듯 어떤 부적은 당사자가 몰라야 효력이 생길 수 있는 방식처럼 우리에게 알레고리적으로 다가오게 되는 무언가들이 여기에 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인 나를 벗어나 있는 위치. 어떤 희망이나 기대 그리고 전망처럼 밝은 마음으로 세계와 현실을 보려 하지 않는 자의 시선. 시의 서두에서는 글쓰기’(문장)투명한 유리막을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있을 뿐이라는 점을 모를 리 없는 시인의 인식 그 자체가 드러나 있다. 그러니 이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지속되는 분리 속에서 시인은 자신을 사유하려 할 뿐. 바로 문장으로서. 그러한 문장들은 일견 표면적 목적성이 부재하며 단지 유동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딱히 갈 곳 없이 돌아다닐 때 사람이 사람을 밀어내는/ 힘으로 어디든 도착하는 것처럼”. 따라서 문제는 이것이다. “나는 계속 문장을 선택하고 선택은 나를 쪼개놓고 스스스 사라진다는 것.

 ‘내가 선택한 나를 쪼개놓고 스스스 사라져버리는 문장이란 이 기묘한 알레고리란 어떠한가. 아마도 이는 시인이 느끼고 자각하려는 자기 자신의 언어 혹은 그 존재론적 이유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말하자면 이 분열되려는 의지는 현실적 나의 생각과 삶과 무관하게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치 작은 숲을 계속 헤매며 무한을 만들었던 사람이 숲을 나와서 쓰는 것처럼. 이러한 시인의 마음은 모든 빛이 한 번에 몰려드는 죽음같은 삶보다 밝고 집요한 조명아래서 희미하게 존재할 무언가를 향해 있는 것이다. 그 아래서만 소중하지만 아무에게나 줘버리고 싶은 문장들이 탄생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렇기에 시인은 배게 밑에 차 키를 몰래 숨기는 것처럼 자신의 문장을 쪼개고 분열시키며 나의 조각이면에 숨겨져 있는 무언가들을 암묵적으로만 드러내려 한다.

 그 깊은 심연 속에 머물 때 어느 순간 시인에게 다가오게 되는 단 하나의 것. “쪼개진 나의 조각 하나가 서서히 떠오르는 것처럼 들려오게 되는 환청. 저 심연 속에 말해지지 않으면서 말해져야만 하는 시인이 사유하는 근원적인 단 하나의 문장. 그것은 이러하다. “불면의 시작이자 사랑의 시작이다 좋은 일인지는 알 수/없다”. ‘알 수 없다고 스스로를 확정하지 않는 단언이자 냉정하고도 냉철한 한기를 머금은 언어를 통해서 시인은 자신의 불면이자 사랑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자신이 결코 현실과 세계 속에서 편히 잠들 수 없는 페르세포네이며 동시에 필사적으로 이름 없고 보이지 않는 무수한 존재들을 찾아 헤매이게 될 운명”(「종과 횡과 사선으로」)을 지녔다는 것을. 나 자신의 존속과 삶의 유의미성 따위와는 무관하게 좋은 일인지는 알 수/겠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것. ‘취향보다 더한 취향을 발견하기 위해 꼬물꼬물꼬물꼬물거리며 작업’(「렌드로 카이프테」)하는 행위를 거처야 비로소 탄생되게 되는 것. 뒤틀리고 쪼개지며 분열하는 문장들 뒤에 숨겨진 덜덜 떨었던 일이자 희망을 품지 않기에 잊혀질 수 없는의지를 말이다.

 

                                             길은 계속 이어지고 나는 나의 한중간이 조용히 이동하

                                           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호수를 나와 맨몸으로 서

                                           서 이를 달달 떨었던 일은 잊히지 않는다. 뒤도 돌아보지

                                           않겠다는 다짐은 아직도 지켜지고 있다. 내 앞의 풍경들

                                           은 점점 바뀌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생겼다가

                                           사라지지만, 앞의 풍경들이 바뀐다고 뒤의 풍경도 바뀐다

                                           는 희망은 품지 않게 되었다.

                                                        - 「무화과 나무 여름 바구니 이름중에서

 

 

3. “밝은 곳이 더 밝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것 뿐이라면

 

                                              언제든 불을 켜서 어둠을 내쫓을 수 있으니 당장은 불

                                            을 켜지 않는다.

                                              이 어둠을 그대로 둔다. 나는 어둠을 옹호하는게 아니

                                            라 이미 밝은 곳이 더 밝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것뿐

                                            이다.

                                                                    - 「하루보다 긴 일기중에서 

 

 요컨대 시인은 우리의 현실과 세계이며 자신의 삶을 결코 긍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네비게이션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작동하/지 않는것처럼. 뒤틀려있고 분열하고 기묘한 방식으로서 여기에 존재하기. 그리고 무엇인가 하고 있는 느낌”(「우회전 하면 영화제」)만을 기다리기. 이러한 방식으로만 긍정할 수 있기에 더욱 모호해지고 분열하려는 언어를 시인은 놓지 않는다. “희망과도 같은 사랑과 삶이란 너절하고도 더러운 비유를 피해서 다시 모르게 되는언어들만을 인식하려는 행위. 그리하여 누군가 나의 단점을 묻는다면 없다고 말”(「시티 커피」)해야 한다는 의지일 것. “항상 두 번째의 생을 산다고 생각”(「손을 들어서」)하는 시인의 유동하는 언어가 지닌 목적이 이러하다면. 우리가 시인에게 질문해야 할 또 다른 맥락은 기묘한 언어의 심연 속에서 들리지 않은 채 존재하는 시인의 문장들이 지닌 근원적 형상에 있을 것이다. 단 모호하고 분열하는 형태이자 말을 많이 하고 난 후에 생기는 숙취같은 묘한 죄책감뒤에 있는 귓속말’ (「오일 페인팅」)아름다움으로서만.

 

  갑자기 멈춰 세우지 마

 

  뛰다가 갑자기 멈추면 넘어지기 쉬워

 

  아침에 일어나면 뭐든 씹어 삼키려고 한다

  침대는 내 혼잣말을 어떻게 다 듣고 있는지

  아마 영원에 중독된 것 같기도 해

 

  영원에 중독된 침대는 한낱 혼잣말을 견딜 수 있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점은 창문이 크다는 것

  크고 불투명한 유리는 떠오르는 섬광을 추상적으로 감

상하게 만들지

 

  잠시 눈을 감으면 지난밤 혼잣말이 혀끝에 감돈다

  막막한 질문들이 체스 판 위의 말처럼 소년을 옮긴다

 

  소년은 체스 판 위에서 퀸이 된다

  퀸은 종과 횡과 사선으로 움직일 수 있다

 

  블라인드를 내린다

  블라인드의 곡선은 호기심

  아침에 타는 꽃 냄새 불투명한 안개

 

  종과 횡과 사선으로 걸어간다

 

  퀸은 뒤로 갈 수 있지만 뒤로 간다고 수를 물리는 것은

아니다

 

  저녁 골목에 생선 비린내를 맡으며 식당을 찾아가는

손님처럼

  소년에 대한 깊은 식욕이 있다 식욕은 운명에게 있는

것이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망치질해서 허공에 걸어놓는다 작

은 첫눈이 눈에 들어가 순식간에 자신을 잃어버린다 여긴

참 풍경이 좋아 아니 나 우는게 아니고

  눈물이 아니라 다크 서클이라고 상상력이 아니라 질투

라고 당신을 사랑해가 아니라 그냥 사랑이라고 써 앞뒤

다 잘린 단어가 우리를 절벽 위에 세워두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에 눕는 동안에도 창문이

무너지지 않았다

                         - 「종과 횡과 사선으로」, 전문

 

 “잘린 단어가 우리를 절벽 위에 세워두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이자 그 잘려버린 단어를 만들어내는 세계에 대한 분노가 여기에 있다. 그 분노를 위해 아마도 세계가 아닌 시인의 영역이라고 할 침대에서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릴 뿐. 하여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인식하며 이렇게 말한다. “뭐든 씹어 삼키려 한다”. 결국 이는 파괴하고 부정하는 자의 분노가 지닌 본질적 형상인 것이다.

 현실과 세계와 삶과 끊임없이 대립하려는 시인에게 불가능하게 가능해야 하는 무엇. 그렇기에 영원에 중독된 침대는 한낱 혼잣말을 견디는 것처럼 시인에게 추상은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 된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점은 창문이 크다는 것이며 크고 불투명한 유리만이 떠오르는 섬광을 추상적으로사유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즉 추상과 사유인 존재로서의 소년이자 시인만이 현실과 세계와 삶에서 퀸처럼 종과 횡과 사선으로 걸어갈수 있다. “블라인드의 곡선은 호기심인 마음과 아침의 타는 꽃 냄새 불투명한 안개를 통해서.

그러니 퀸은 뒤로 갈 수 있지만 뒤로 간다고 수를 물리는 것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싸우려면 가까이 가야 하지만 보려면 뒤로 물러나야 하’(「나날들」)는 것처럼.

 이 같은 질척하고도 무거우며 분열하는 감각의 문장들. 마치 생선 비린내에 대한 식욕소년의 운명이 있는 것처럼 시인은 끊임없이 뒤로 물러나려 한다. 현실과 세계와 삶 속에서 순식간에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더라도. 사촌형”(「나날들」)같은 세계의 질서들이 삶을 플랫하고 평탄하게 만들며 우리를 울 수 없게만들겠지만. 그리하여 우리를 앞뒤 다 잘진 단어를 절벽에 세워둔 것처럼만들어버리겠지만. 그럼에도 추상과 사유의 존재이자 불투명한 유리로서 시인은 스스로를 규정하고 존속할 뿐이다. 내가 아닌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에 누워 나를 지워버리는 동안에도 창문은 결코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처럼. 문장과 언어의 추상적 알레고리이자 크고 불투명한 창문을 통해서만 시인은 잠시 와인 잔이 깨지고 열대어들이 풀려나 거리를/ 활보하는 상상”(「열대어」)이 가능한 문장을 지어낼 수 있을 테니까.

 

  방에 누워서 책을 보다가, 현시대를 현대시로 잘못 읽

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짜증이 나서 누워 있

던 몸을 확 일으켜 세워 책을 다시 읽는다.

 

  그리고 이내 내가 잘못 읽었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잘

못 읽어놓고 짜증을 낸 것이다. 민망한 기분에 다시 눕는

. 혹시 내가 봤을 때 글자가 슬쩍 자리를 바꾼 거 아닐

? 나는 이상한 착시 속에서 허공을 만들어냈다.

 

  어깨는 날개입니다. 어깨 치료로 유명한 병원에서는 이

렇게 말한다. 이런 문장을 보면 굽어 있던 어깨를 한번 펴

게 된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날개는 어깨가 아니다. 나는

날개를 잃은 사람이 비좁은 통로에서 사람들과 어깨를 부

딪치며 걷는 것을 본 적 있다.

 

  고대 비극이 상연될 때 코러스는 주로 춤과 노래를 보

여줬다고 한다. 배우의 미묘한 표정보다 강렬한 몸짓이

멀리 있는 사람에게 더욱 잘 보였을 것이다. 나는 야외극

장 무대에서 가장 먼 자리에 앉은 이에게 시선을 고정시

킨다. 왼손을 높게 들어 큰 반원을 그린 후 오른쪽 어깨를

감싼다.

 

  어깨를 좀 펴, 마음에 묻은 마음은 당신만 알겠지. 괜찮

. 바다 본 적 있어? 우리 사이에 넘치는 이 파도가 나는

무서워. 바다는 우리를 만나게 해줄 것 같기도 하고 전부

를 익사시킬 것 같기도 해. 당신은 당신 인생과 겹치지 않

는 이 극을 보며 운다. 지금 당신이 흘리는 눈물은 원해서

흘리는 눈물. 당신의 눈물 한 방울 들어갔으니 이 극은 알

게 모르게 새로워진다.

 

  허공은 출구가 아니라서 현시대이든 현대시이든 빠져

나가지 못한다. 나는 평소보다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가 당신을 위해 결말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거 알아주면

좋겠는데. 야외극장은 모르는 사람, 아는 사람 뒤섞여 시

끄럽고, 나는 누워서 책을 읽는다. 인생이 당신을 새로 얻

을 때까지 책을 읽고, 읽고, 또 읽고……

                                    - 「현대시」, 전문

 

 시인은 끊임없이 현시대란 정독과 현대시오독사이를 부유하려 하며 동시에 자신만의 오독을 오히려 긍정하려 한다. 현실과 세계와 삶은 현시대를 현대시로 잘못 읽는 오독을 허용하지 않을 테니까. 그 강고하고도 당연한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혹시 내가 봤을 때 글자가 슬쩍 자리를 바꾼 거 아닐까라는 의문을 소유한 자만이 이상한 착시 속에서 만들어진 허공이란 시인의 모호한 문장 속에 숨겨진 진의를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깨는 날개입니다란 문장 앞에서 하지만 나는 안다. 날개는 어깨가 아니다.”라고 중얼거리는 시인을 의아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시인은 분명 날개는 어깨가 아니다. 나는/ 날개를 잃은 사람이 비좁은 통로에서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걷는 것을 본 적이 있으니까. 지금 날개가 부재하는 우리의 세상이 어떠한지를 모를 수 없다는 것. 하여 시인은 야외극/장 무대에서 가장 먼 자리에 앉은 이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려 한다. 현실과 세계란 지금이 아닌 고대 비극의 강렬한 몸짓이 상연되는 가장 먼 자리를 향하는 그 시선만이 시인에게 언어의 바다를 헤매이려는 목적과 상동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현시대속에서 현대시라는 언어를 통해 부유하기. 정독과 오독 사이에 넘치는 이 파도는 정독처럼 무서운 것이지만 동시에 오독을 통해서만 또 다른 나를 형성하고 존속시킬 수 있게 하는 일종의 힘이자 의지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언어의 근원이자 본성으로서. ‘우리를 만나게 해줄 것 같기도 하고 전부를 익사시킬 것같은 시이자 문장들의 세계는 단지 오독을 통해서만 그 심연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오독의 필연적 조건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라는 당신이 당신 인생과 겹치지 않는 이 극을 보며 울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이 모호하게만 쌓아나가는 문장들의 심연 속에 위치한 감정. 그것의 본질적 이름을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다면. 요컨대 당신의 눈물 한 방울 들어갔으니 이 곳은 알/게 모르게 새로워질 수 있는 것처럼. 그 마음에 도달했을 때 시인이 구축하려는 끊임없는 분열과 모호함의 언어가 지닌 근원적 형상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시인이 깊숙이 감추어둔 알레고리들의 원천이란 곧 슬픔인 셈이다.

 바로 이를 위해서 시인은 끊임없이 분열하고 모호해지며 움직이고 있다. 허공은 출구가 아니라 현시대이던 현대시이든 빠져/ 나가지 못한다고 말해지겠지만. 그러나 문장들의 분열과 갈라짐과 무수한 변화들의 표면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무수한 알레고리들의 기원인 슬픔에 있으니까. 그 마음은 아마도 현실과 세계와 삶이 우리에게 끝나지 않도록 지속될 것이라는 자명함과 더불어 지금의 그러한 우리를 바라보는 시인이 단지 당신을 위해 결말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거 알아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는 행위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시인은 또한 자신의 읽기를 그저 지속할 뿐이다. 우리의 현실과 세계와 삶이 야외극장처럼 사람들이 뒤섞여 시끄러울 뿐이지만.

 또한 읽고쓴다는 단순한 문장의 이면. 언제일지 모르지만 새로운 인생이 우리에게 틈입되고 그리하여 우리가 조금은 새롭게달라질 수 있을 때를 슬픔과 함께 기다리면서.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어 나가는 페르세포네’(「입춘」)가 말하지 않았던 불가능한 미래를 어렴풋이 꿈꾸면서. 그리고 그 꿈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분열하는 언어들 속에 감추어 두면서. ‘같은 곳에서 같은 절망을 반복하다보면 이상하게 단순해지며 입에서는 피 맛이 나고 심장이 터질 것 같’(「미인은 자기 얼굴이 싫을 거야」)은 그러한 순간만의 존재가 되기를 욕망하는 유령처럼. 어떤 것도 확정되지 않은 채로 고양이 니체를 안고 선악을 초월한 다리 위를 빠르게 달리는 자’(「선악을 초월한 다리 위에서」). 알 수 없음이란 기묘한 형상이 시인의 진명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오거나 기다리는 유령을 피하지 말 것

                                                        유령을 만나면 놀라서 도망갈 것

                                                        어떤 문이라도 열어볼 것

                                                        설령 그게 출구가 아니더라도

                                                                           - 「유령의 집중에서

 

 

4. 이상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아라크네에게

 

                                                       인간을 꺼내놓고 부드럽게 스트레칭을 한다

                                                      물구나무를 서면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

 

                                                      어느 시절에는 머리카락을 보이는 것이

                                                      흠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어떤 곳에서는

                                                      피가 빠르게 도는 것 같다

                                                           -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중에서

 

 시집의 표제작에서 말해진 것처럼 시인은 기어이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야만 왕관을 쓰는 자이며 그래야만이 피가 빠르게 돌게 될자신의 공백”(「사라진 대표님」)을 자각하고 있다. 오직 이를 위해서만 파괴하고 분열하며 모호해지는 문장들은 존속하고 있으니. 하여 내가 나를 어렴풋이 느끼’(「손을 들어서」)고민에 잠긴 페르세포네’(「입춘」) 로 존재하려는 시인의 근원에는 사실 현실과 세계란 신에게 패배해 영원한 형벌을 받아 직물을 짜내고 있는 아라크네가 머물러 있지 않을까. 그러니 닻을 내리는 건 닻의 추락이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만/ 닻을 내”(「소파 오페라」)릴 수 있는 것처럼 시인에게 현실과 세계와 삶과의 싸움에서 승패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시인은 단지 보기 위해 뒤로 물러서며’(「나날들」) 자신의 모호함을 끊임없이 지속하려 한다.

 

  사람들이랑 대화를 하다가 딱히 할 말이 없을 때 나는

젊은 나이에 죽은 연예인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초상을 어

떻게 그려도 나에게는 다시 백지로 남을 뿐이다.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줘. 인형이 인간을 중단하고 떠나

, 인간의 백지, 숨을 곳 없이 밀도가 가득한 세상에서.

 

  어떤 소문을 들어도 백지에는 아름다움으로 등록되어

빛난다.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바람이 불어 인형과 인간

이 자리를 바꾼다. 아마 우린 계속 햇갈려 하겠지. 마치 밤

하늘의 별처럼.

                                  - 「방안의 집」, 부분

 

 “여기를 여기가 아니게 만들 것이 필요”(「샌드위치 시스템」)한 자가 원하는 아름다움이란 명확하지 않으며 희미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대신 가득한 인형들이 무의미한 말들을 쏟아 내는 세계와 현실과 삶 속에서 시인의 말처럼 다시 백지로 남을어떤 가능성이 존재해야 한다면. 불가능한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아마도 인간이란 백지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일일 것이다. “숨을 곳 없이 밀도가 가득한 세상에서존재하지 않는 백지속에 있을 기묘한 아름다움을 그저 떠올리면서. “일기에 한 문장을 적어도 하루보다 길다. 내가 젊은 것/이 아니라 써야할 일기가 너무 긴 탓”(「하루보다 긴 일기」)이기에.

 그 모호한 아름다움만이 우리의 현실을 무너트리고 끊임없이 밤하늘의 별빛만을 보게 하며 인형과 인간을 계속 햇갈리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자리바꿈의 방식으로서 시인의 언어는 분열하고 모호해지며 또한 자신의 욕망만을 성실하게 기다린다’(「오렌지 절벽」). 아테네가 지닌 영광 앞에게 패배할 줄 알면서도 싸우며 신들의 추악한 이면을 그려냈던 아라크네의 분노처럼. 이 같은 기묘한 언어의 심연 속에서 나의 오래된 중독과 마주 앉아 있”(「샌드위치 시스템」)다는 것만이 스스로의 방식이 된다는 점을 시인은 분명히 알 것이다. 비록 언어의 왕관을 오래 쓰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지’(「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게 되더라도. 그러한 시인의 분열하는 욕망과 마음은 어떤 회화같은 문장을 통해 광기와도 같은 이상한 이야기’(「소파 오페라」)란 알레고리로 존속할 테니까.

 이제 한국 현대시의 가능성이란 주제에 대해 약간의 첨언을 덧붙이며 글을 마무리해보자. 지금까지 이다희 시인을 통해 살펴보았듯 앞으로도 우리의 젊은 시인들이 자신들만의 행로를 그저 지속할 것이라는 점은 확연해 보인다. 이 측면에서 분명하게 기억해야 하는 부분은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이란 말이 당연하고도 고정된 방식으로는 결코 불가능하리라는 것에 있다. 알 수 없으며 모르는 형태로만 도래하는 새로운 시적 언어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는 것 역시도. 시가 아닌 시. 의미를 알기 힘든 파편처럼 쌓여있는 언어들의 성채. 괴상하고 기묘한 언어들 속에 존재할 알레고리의 향연들. 언어에 의해서가 아닌 언어를 통해서만 존속하는 자신의 사유를 확신하기. 이제 점차 사라져갈 한국 문학이란 지평 속에서도 이 고유하고도 이상한 이야기를 쌓아나가는 그들은 언제든 어디에서든 희미한 성좌 같은 밤하늘의 별빛을 선명히 기억할 것이다. 단 저주받은 아라크네가 켜켜이 쌓아가는 문장들의 직조 속에 있는 기묘한 알레고리적 공백을 통해서만.

 

                                           나는 눈을 떠 불빛과 빗방울이 어지럽게 번진 유리창을

                                         쳐다본다. 그 자체로 어떤 회화 같다고 생각한다. 백 년 전

                                         에 몸으로 완벽한 원을 그리는 요기가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디자인과 광기가 구

                                         별 가지 않는다. 완벽한 원을 그렸다고? 정말 이상한 이야

                                         기이다.

                                                                        - 「소파 오페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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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란 백색 알레고리의 건축술 ― 『흰』

1. 흰색의 엑스터시  색채의 물질성은 다양한 감각적 요소와 함께 체험된다. 한강의 소설 『흰』(문학동네, 2016)에서 '안개', '진눈깨비', '서리', '눈송이', '눈보라', '만년설'은 물이라는 동일한 기원을 갖지만 각기 다른 감각적 실재로 다가온다. 위태롭게 부서지는 첫서리의 유약함, 육신을 압도하는 눈보라의 적대감, 원경의 만년설이 환기하는 신비로움은 눈(雪)이라는 추상적인 범주로 동일화할 수 없는 백색의 스펙트럼을 이룬다. 천천히 유동하며 새벽을 불투명하게 감싸는 안개의 움직임은 맹렬히 질주하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혹은 부유하듯이 낙하하는 눈송이의 속도와 선명하게 구별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금, 설탕, 모래, 쌀알, 흰 조약돌은 선연히 다른 맛과 감촉으로 피부에 닿아온다. 사물의 윤곽선을 빠져나온 흰색은 질감, 부피, 무게, 온도, 속도, 냄새, 소리와 같은 무수한 감각성질들과 결합한다. 감각의 총체로서 흰색은 '나'의 지각을 거치며 쉽게 언어화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atmosphere)'를 주조한다.  사물의 성질이 내재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현존을 만들어나가는 일, 독일의 미학자 게르노트 뵈메(Gernot Böhme)는 이를 '사물의 엑스터시(ecstasy)'라고 명명한 바 있다. 황홀경을 뜻하는 영단어 'ecstasy'는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외부로 향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έκστασις'를 어원으로 갖는다. 한강의 작품에서 흰색은 사물을 구성하는 일부를 넘어 '나'의 지각과 기억을 일깨우는 역할을 수행한다. 어둠 속 고요히 점멸하는 흰 불빛은 '나'로 하여금 유년의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어린 '나'는 작은 배에 올라 수천 마리의 은빛 멸치 떼가 튀어 오르는 장관을 목격한다. 이 눈부신 놀라움은 곧 "이태 뒤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1) 작은아버지의 웃음과 연결되며 서글픈 연민으로 전환된다. 그런데 한강에게서 흰색이 죽음과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날숨이 겨울 공기와 만나 하얀 입김으로 변할 때, 그것은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71)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외부의 찬 공기가 몸 안에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데워지고, '나'는 따뜻해진 공기를 대기에 불어넣는다. 하얗게 퍼져나가는 입김은 '살아있음'이라는 상태가 단독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몸의 내부와 외부가 부단히 뒤섞이는 과정임을 증명한다.  흰색의 물질성을 집요히 탐구하고 기록하는 작업은 '언니'에 대한 기억과 연관된다. 산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나'의 언니. 사진 한 장, 울음 한 점조차 세상에 남기지 못한 그녀는 오직 어머니의 이야기 안에서만 존재한다. 얇게 얼어붙은 초겨울의 서리, 하얀 달떡을 닮은 얼굴, 흰 배내옷과 강보는 언니의 기억을 구성하는 사물들이다. 다시 말해 흰색은 '나'가 죽은 언니를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감각적 실체인 것이다. 이 흰색은 그녀의 현존을 지극히 구체적인 방식으로 '나'에게 각인시킨다. 일곱 살의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 속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20)의 얼굴을 아직 찌지 않은 쌀 반죽의 형상으로 상상해본다. 희고 고운 가루가 묻어나는, 찰기 없이 보드라운 반죽의 표면, 손가락을 대면 지문이 고스란히 남을 것만 같은 섬세하고 연약한 피부, 달떡의 흰 빛깔이 덩어리진 감각의 생생함으로 몸에 육박해올수록 '나'는 "쇠에 눌린 것같이 명치가 답답해"(21)지는 고통을 겪는다. 흰색의 엑스터시는 실재와 허구 사이의 텅 빈 공간에 선명한 무늬를 남기며 부재하는 언니와 현실의 '나'를 연결한다. 2. 폐허를 증언하는 흰 무늬  작품의 제1장에서 '이 도시'로의 이동은 '나'가 언니를 회상하는 계기로 언급된다. 물론 소설에 도시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지만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곳", 그 처절한 투쟁의 대가로 "1944년 10월부터 육 개월여 동안"(27) 나치의 무자비한 보복 공습에 의해 초토화되었던 '이 도시'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임을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폐허화된 바르샤바는 현재 말끔히 복구되었으나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29)된 잔적(殘跡)은 과거의 참극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 폐허의 지층을 거니는 동안 '나'는 자신이 죽은 언니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중세에 지어진 성은 근대에 이르러 병원으로 바뀌었고, 전쟁으로 인해 붕괴된 병원은 미술관이 되었다. 파괴와 재건, 폭력과 저항의 역사가 누적된 '이 도시'처럼 '나'는 누군가의 죽음 위에 올린 작은 벽돌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언니는 '나'와 단절된 존재가 아닌,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29)일지도 모른다. 한강은 『흰』을 통해 "생명을 가지고 나아간다는 게 뭔지, 내가 누구 대신으로 이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질문도 더듬어보고 싶었"2)다고 밝힌 적이 있다. '나'가 언니의 죽음으로부터 탄생했으며, 그녀의 삶을 대신 이어가고 있다는 자각은 그녀가 시간을 거슬러 '나'의 삶에 틈입하는 이유가 된다. 어머니는 '나'를 낳기 전 두 번의 조산을 겪었다. 만약 "그 생명들이 무사히 고비를 넘어 삶 속으로 들어왔다면, 그후 삼 년이 흘러 내가, 다시 사 년이 흘러 남동생이 태어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117)이라는 사실은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37)인 '지금 여기'에 그녀를 불러내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제1장은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39)라는 '나'의 전언으로 끝을 맺는다. 이때 '나'가 언니에게 건네려는 '흰 것'은 나치에게 희생된 바르샤바 시민들을 애도하는 양초의 흰색과 중첩된다. 시민들을 총살했던 붉은 벽의 잔해, 그 잔혹한 학살의 현장 앞에서 고요히 타오르는 흰 심지와 뜨겁게 녹아내리는 촛농은 점차 소멸의 이미지로 번져나가면서 애도의 의미를 가시화한다. 불꽃 속에서 서서히 몸을 낮추고, 마침내 사라지는 흰 양초와 같이, 진정한 애도란 '나'의 소멸을 감내하며 타자에게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건네는 일일 것이다.  제2장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소설의 주어인 '나'와 언니의 자리를 맞바꾸며 시작된다. 그러나 '나'의 삶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과거를 애도하는 일이 가능한가. 어머니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언니의 삶을 어떻게 '지금 여기'의 구체적 현실로 이끌어올 수 있을 것인가. 「빛이 있는 쪽」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바르샤바 유태인 게토에서 친형을 잃은 한 남성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여섯 살 때 죽은 형의 목소리는 남성이 벨기에에 입양된 뒤에도 계속해서 찾아왔는데, 폴란드어를 배운 뒤에야 남성은 그것이 체포되기 직전에 형이 외쳤던 말임을 알게 되었다. 반면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맞은 '나'의 언니는 인간의 언어로 해독할 수 있는 말을 남길 수 없었다. 남성의 어린 형처럼 그녀도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나'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이 불확실성 속에서 '나'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어떤 감각과 막연한 감정 가운데, 모르는 사이 그이로부터 건너온 것들이 있었"(32)을지도 모른다는 점뿐이다. 이렇듯 한강의 소설은 애도의 (불)가능성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출발한다.  언니를 향한 (불)가능한 애도의 서사는 흰 사물들의 파편적 기록, 그리고 오래전 지구 반대편에서 폐허화되었던 '이 도시'의 슬픔을 헤아리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그런데 살아낸 적 없는 과거를 애도하려는 노력은 '나'가 그녀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흰 것'을 오히려 불투명하게 만들기도 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나'는 "당신에게 깨끗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잔혹함, 슬픔, 절망, 더러움, 고통보다 먼저, 당신에게만은 깨끗한 것을 먼저. 그러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118)라는 말로써 그러한 시도가 녹록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처음 '나'가 의도했던 '흰 것'은 무수한 사물들의 흰빛이 발현하는 엑스터시에 휘말리는 순간 순수와 애도라는 상징의 단일성에 자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안개」의 '나'는 도시를 하얗게 잠식한 안개를 보며 섬에 짙게 낀 안개를 보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안개는 '먼지 낀 마른 웅덩이'를 신비롭게 채색하고, 철조망 뒤에 도열한 소나무들을 "이승의 것 같지 않게 홀연"(24)한 형상으로 만든다. 왜곡과 망각을 함축한 흰빛은 「흰 도시」에 보다 심화되어 나타난다. "1945년 봄 미군의 항공기가 촬영한 이 도시의 영상"(27) 속 나치의 폭격이 휩쓴 바르샤바는 새하얀 눈이 덮은 풍경으로 보인다. 하지만 카메라가 근접할수록 도시는 흰색의 베일을 벗고 모든 것이 까맣게 전소된 폐허의 민낯을 소스라치게 드러낸다.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96)이라는 표현처럼, 언니의 흰 배내옷은 죽은 자를 염습할 때 입히는 수의로 변한다.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과 흰빛(blanc), 검음(black)과 불꽃(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79)듯이, 생명과 죽음, 기억과 망각이 복합된 흰색은 (불)가능한 애도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한강이 축조하는 백색의 알레고리는 망각으로 과거를 깨끗하게 지워내는 일이 불가능함을 암시한다. 『흰』의 초반부에서 '나'는 오래전 자신의 방을 흰 페인트로 덧칠했던 일을 꺼내놓는다. '나'가 새로 계약한 방의 철문에는 세입자 중 한 명이 날카로운 송곳으로 새겨놓은 '301'이라는 숫자가 지저분하게 남겨져 있다. '나'는 누군가가 '살아있음'을 비명처럼 새겨놓은 숫자, 그 악착 같은 표식을 페인트로 지워보지만 흐려진 칠은 이내 붓 자국을 드러내고 만다. 페인트를 덧칠할수록 뚜렷하게 돌출되는 자국은 “모든 기호는 심지어 부재를 지시할 때조차 존재를 드러낸다”3)는 유디트 샬란스키(Judith Schalansky)의 언술과 조응한다. 파괴된 흔적을 걷어낸 도시에 폐허를 증언하는 무늬가 남아 있는 것처럼, 붓이 남긴 하얀 흔적은 이 밑에 무언가가 잔존해 있음을, 그리고 누군가가 이를 덮으려 했음을 은밀하게 알려주는 기호로 작용한다. 은폐와 흔적의 아이러니한 공존을 조우하는 동안 '나'는 "수백 개의 깃털을 펼친 것처럼 천천히 낙하하는 눈송이"(15)를 멍하니 응시한다. 해설(解雪)이 예정되어 있는 백색 허공을 바라본 '나'는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10) 깨닫는다.  흰색의 알레고리가 환기하는 애도의 (불)가능성은 무의미함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과거의 유실은 아무도 그것을 찾거나 기억하지 않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총살된 자들을 애도하는 바르샤바의 붉은 벽 앞에서 '나'는 불현듯 우리가 과거를 잃어버렸음을 자각한다. 이곳의 시민들은 새하얀 외벽을 두른 기념관에 과거를 유폐시키는 대신, 거리 한복판에 흰 양초를 밝혀 죽은 이의 넋을 기꺼이 자신들의 삶 옆에 둔다. "그녀는 자신이 두고 온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했고,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 넋들이 이곳에서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기려질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고국이 단 한 번도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08~109)라는 대목에 언급되듯이, 우리의 '고국'이 (불)가능한 애도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제주 4·3,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비극의 애도에 깊이 천착해왔던 작가의 문제의식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너무나 참혹하기에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치스럽고 나약한 역사라는 이유로 우리는 침묵해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한강에게 애도란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108) 강인한 의지로부터 온다. 애도는 어두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삶 밑에 파묻힌 폐허를 발굴하여 그들이 겨누었던 칼끝과 총구를 부끄러움으로 되돌려주는 일이다. 3. 흰빛의 아카이브  『흰』이 출간된 직후인 2016년 6월, 한강은 차미혜 영상작가와 함께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스페이스오뉴월에서 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었다. "의식하지는 않아도 우리 안에 있는 것, 이름 지어 부를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보편적 감정, 감각에 대한 이야기"4)라는 주제로 기획된 전시회의 준비는 한강이 『흰』을 집필하던 시기에 진행되었다. 이 전시회에는 최진혁 작가가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 , , , 을 편집한 약 15분 남짓5)의 영상도 전시되었다. 『흰』 초판본에는 차미혜 작가의 사진이, 2018년 간행된 제2판에는 최진혁 작가의 영상에서 발췌한 여섯 장의 흑백사진이 실려 있다. 데보라 스미스(Deborah Smith)가 번역한 영문판 『The White book』(GRANTA, 2024)에는 일곱 장의 흑백사진이 삽입되었는데, 한국판에 담긴 것보다 크게 작업된 사진들 역시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를 기록한 것이다. 이렇듯 작가의 글쓰기를 퍼포먼스로 옮기고 이를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매체의 변화 과정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점은 애도와 기억, 그리고 기록의 문제를 다시금 들여다보게 한다.  퍼포먼스 아트는 소도구와 무대, 수행자의 컨디션, 관객의 반응, 심지어는 장소의 냄새, 조명, 날씨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를 영상으로 기록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재현하기란 불가능하다. 더욱이 책이라는 매체의 물질성은 퍼포먼스와 영상이 촉발하는 재현의 문제를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흰』의 제2판에 수록된 여섯 장의 흑백사진은 책의 매체적 한계를 뛰어넘어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를 재현한다. 이들은 텍스트보다는 분명 '사실적으로' 다가오지만 퍼포먼스를 영상보다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치밀한 사유와 퇴고를 거친 텍스트에 비하면 퍼포먼스와 영상은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한 우연의 산물에 가깝다. 영상 속 무수한 이미지 중 단 하나만을 낚아챈 사진은 그러한 우연성이 극대화된 예술의 한 형식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사진은 퍼포먼스의 일회성을 순간에 고정함으로써 더 오래, 더 널리 유포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사진에 퍼포먼스와 관련된 어떠한 캡션이나 단서도 덧붙이지 않았다. 우리는 모호하고 파편적인 이미지 속 배내옷, 깃털, 종이와 같은 흰 오브제를 통해 사진이 언니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따라서 작품 속 사진은 일시적인 것을 영원성 속에 붙들어 매려는 욕망과, 그 욕망의 덧없음을 동시에 함축한 알레고리적 이미지다.  흥미로운 것은 영문판 『The White book』에 수록된 일곱 장의 사진이 한강의 퍼포먼스를 보다 직접적으로 지시한다는 점이다. 한강의 검은 실루엣이나 손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들 사진은 퍼포먼스의 수행을 비교적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면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제2판의 사진들은 한층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호함 속에서 모종의 이야기를 건넨다. 제2판에 실린 첫 사진은 배경과 오브제가 모두 하얗게 인쇄된 탓에 무엇을 찍은 것인지 식별하기가 어렵다. 독자는 이어지는 사진들에 제시된 손의 명암과 검은 옷을 입은 작가의 모습을 통해 오브제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된다. '흰 깃털과 종이 → 종이 위에 깃털을 수놓는 손 →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작가의 몸'으로 점차 확대되는 세 개의 장면은 시가 쓰인 종이 위에 흰 깃털을 덮는 퍼포먼스인 을 기록한 것이다.6) 지면 전체를 메운 네 번째 사진에는 활짝 펼친 배내옷이, 마지막 두 장의 사진에는 각각 흰 천을 꿰매는 손과 의자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작가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는 죽은 언니의 배내옷을 짓는 퍼포먼스인 을 담고 있다. 부재한 언니의 삶을 상상하고 기록하는 일이 (불)가능한 애도임을 고려한다면, 텍스트를 깃털로 덮는 퍼포먼스는 기록의 불가능성에 대한 재현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배내옷은 결여와 불확실성으로 이뤄진 애도의 결과물이자, 그러한 공허함의 과정을 뚫고 탄생한 하나의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의 알레고리는 과거의 파편이면서 동시에 과거를 초과한다. 모호함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말을 거는 이미지들의 절합(articulation)은 재현의 진실성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연동되어 있다. 피와 재로 가득 찬 끔찍한 이미지가 과연 실제에 더 가까운가? 이미지의 참혹성은 언제든 왜곡될 수 있고, 공포나 혐오를 유발해 접근을 막기도 한다. 더군다나 그것이 '부재하는 것'을 현시해야 한다면? 한강이 포착하는 재현의 (불)가능성은 진실과 망각, 아름다움과 처참함을 너무도 쉽게 오가는 이미지의 기만성에 기인한다. 1945년 미군 항공기가 바르샤바를 촬영한 영상에서 순백의 환영이 폐허로 전환되는 섬뜩한 순간은 그동안 '사실적 재현'을 담당해온 카메라와 눈(眼)의 역량을 의심하게 한다. 때때로 예술은 그 섬뜩함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소금」이라는 글에는 '나'가 다친 손가락으로 소금을 집었을 때의 고통과 전시실에서 바라본 소금 언덕의 정경이 병치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썩지 못하게 하는 힘, 소독하고 낫게 하는"(66) 소금의 치유력은 열린 살갗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따갑게 스며들 때 비로소 발현된다. 반면 전시실의 관람객들은 의자에 유유히 앉아 소금 언덕에 원하는 만큼 맨발을 올려놓는다. 어둠 속 눈부시게 빛나는 소금 언덕의 아름다움은 '곱게 아문' 두 발로만 누릴 수 있기에 기만적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감각할 수 있는 특권은 고통에서 비껴난 자에게만 주어진다.  『흰』의 파편적 이미지들은 사건의 '총체적 진실'을 구성하는 내러티브의 명징함에 저항한다. 소설을 여는 첫 장에서 문득 '나'를 찾아오는 몸의 고통은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와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11)에 비유된다. 백색 이미지들이 연대기적인 시간의 흐름을 베어내고 단숨에 과거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강에게서 시간은 부단히 갱신되고 돌출하며 융기하는 아나크로니즘적인 것이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의 표현을 빌리면 이 아나크로니즘은 불가지적이고 비가역적인 시간을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치인 것이다. '그녀'의 기록, '이 도시'의 역사, '흰 것'의 엑스터시는 유년의 기억과 기억 이전의 과거를 거슬러 현재를 끊임없이 재구축한다. 그러므로 시간의 흐름은 과거의 망실을 변명하지 못한다. 나는 이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 『흰』이 쓰인 것이라 여긴다. 한강은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81)라는 언술로써 이를 재확인시킨다. 4.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은 존재하는가  하얀 '배내옷'을 펼친 손과 검은 옷에 묻은 흰 실밥들.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 을 담은 세 장의 사진은 『흰』이 죽은 언니뿐만 아니라 아기를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를 애도하는 작품임을 암시한다. 어머니의 입말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언니의 이야기에는 스물세 살의 어머니가 느꼈을 두려움이 짙게 깔려있다. 아기가 죽어가는 동안 산후의 통증을 온몸으로 견디며 홀로 배내옷을 지었을 '나'의 어린 어머니, 그가 언니의 이야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전히 그 어두운 기억의 하중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백지 위에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는 어머니의 절박한 속삭임을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133)라는 말로 바꾸어 적는다. 한강은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텍스트로 옮길 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아트를 통해 직접 몸으로 수행하며 죽은 언니와 어머니, '나'를 연결한다. 작가는 경험 이전의 과거를 체현함으로써 과거로부터 격리된 타자에서 그들의 고통 안에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이행한다. 마찬가지로 『흰』에 등장하는 '나'는 부재한 언니의 삶을 재현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어 그녀를 그 안에 직접 살아가게 한다. 텍스트는 허구와 부재를 의미하는 기호를 넘어 그 자체로 현실을 뒤바꾸고 재구성하는 수행성을 갖는다.  언니의 조각이 '나'에게 흘러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물음처럼, 언뜻 무관한 것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일들도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사이에 무언가를 남기지 않았을까. 비연관적인 것들의 연관성, 그것이 과거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작품에 기록된 '모든 흰' 것의 아카이브, 같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언니와 '나',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은 자를 향한 애도의 책임을 부여받게 된 지상의 모든 산 자들은 서로 유사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의 단수성은 복수를 지시하는 모든 기표를 초과하는 동시에 존재의 밑바탕에 잠재한 연대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연대의 가능성을, 한강은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어른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70)라는 문장으로 되묻는 것이 아닐까.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우리를 '우리'라는 말로 묶어내어 함께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믿음 속에서 흰색은 텅 빈 침묵과 공허의 색에서 벗어나 산 자들이 고통과 슬픔과 죽음을, 모든 과거를 불러내는 장소가 된다. 흰색은 시간의 흐름이 결코 소멸시킬 수 없는 부재의 흔적으로 가득 찬, 그리하여 부재 속에서 존재를 지속시키는 색이 된다. 1) 한강, 『흰』, 문학동네, 2021, 85쪽. 이하 본문에서는 작품의 쪽수를 명기함. 2) 한강·강수미·신형철, 「[대담]한강 소설의 미학적 층위-채식주의자에서 『흰』까지」, 『문학동네』 제23권3호, 2016. 3) 유디트 샬란스키,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소멸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들』, 박경희 역, 뮤진트리, 2022, 17쪽. 4) 노형석 기자, 「한강의 혼이 어린 8년 전 배내옷 퍼포먼스를 보라」, 『한겨레』, 2024.11.21.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1168572.html 5) 문소영 기자, 「글과 공명하는 한강 '퍼포먼스 아트'...그래서 더 큰 울림[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중앙선데이』, 2024.10.26,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7205 6) Sophie Bowman, "Walking Towards the Vanishing Point Cradling a Love of Life," Korean Literature Now Vol. 32(2016): 9.

계간 푸른사상 이은란 한강알레고리엑스터시수행성『흰』 2025
오형엽 미분적 시선과 시차(視差/時差)적 공백

 안태운은 첫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민음사, 2016)에서 시적 주체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환영적 프레임을 설정하고 대상을 바라보는 다각적 시선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균열과 어긋남과 소멸의 미학을 형상화했다. 그는 두 번째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문학과지성사, 2020)를 통해 전체적인 시적 구도를 환영적 프레임에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으로 전이하고 편지 형식이나 서사적 진술을 시도하는 동시에 산책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적 실천을 보여주고, 세 번째 시집 『기억 몸짓』(문학동네, 2024)에서는 보고 생각나는 것을 따라 산책하고 생각하는 화자를 통해 시적 리듬감을 동반하면서 계절적 일상을 담담한 회상의 어조로 표현한다.  우리는 안태운 시의 전체적 구조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분석소를 시적 화자인 '나'와 대상인 '그(너)'의 관계, 시적 공간 및 심리의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물(비)', '소리'와 '침묵', '공터', 시적 서사의 사건으로 '바라봄', '걸어감', '산책', '사라짐' 등을 설정하고 상호 연관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미학적 특이성(singularity)을 추출해 볼 수 있다. 안태운의 시는 기본적으로 시적 주체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환영을 통해 대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제시한다. 첫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의 대표적 작품인 「얼굴의 물」은 이 기본 프레임 속에서 화자가 대상인 "그"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공간적·심리적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비"가 설정되고 서사적 사건으로 '안에 있음'-'밖으로 나감'-'비가 내림'-'되뇌고 걸어감'-'얼굴의 물 안팎으로 드나듦'-'물이 차오르고 얼굴이 씻겨나감'이 진행된다.  안태운 시의 중요한 미학적 특이성은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이 시시각각 다각도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포착하여 시간 및 공간의 연결을 차단하고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 및 관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데 있다. 이 시에서 화자가 관찰하는 대상인 "그"의 모습은 시 전체에 반복적으로 나열되는 "~고"라는 연결어미에 의해 통일된 전체적 시점이 분기됨으로써 다각적이고 다층적인 장면으로 파편화된다. 안태운의 시는 언술 구조의 층위에서 "~고"라는 연결어미의 나열과 접속부사의 파행적 구사를 통해 상식적이고 통상적인 사고의 질서에서 이탈하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을 구조화시킨다. "안"과 "밖"은 '방'의 공간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물리적 개념인 동시에 '심리'의 영역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정신적 개념이기도 하다. "안"-"안개"/"밖"-"빛"-"비"라는 대비적 구도가 설정되는데, 중요한 부분은 일견 대립적 이미지로 간주될 수 있는 "빛"과 "비"가 모두 "밖"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이다. 안태운 첫 시집의 중심 이미지를 이루는 '물'은 주체의 공간적·심리적 밖의 영역에서 안의 영역으로 침입함으로써 동요와 균열과 상처를 주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안태운의 시는 화자의 시선이 거리를 두고 자신의 꿈을 관찰하면서 묘사하는 시점을 채택하므로 무의식적 꿈을 조망하는 언술 구조를 형성한다. 이로부터 주관적 감정이나 과잉된 감응을 배제하고 객관적이고 무미건조하며 심리적 거리를 가지는 문체적·구문적 특이성이 생겨난다. 기본적으로 무의식적 꿈을 조망하는 안태운의 시는 대상인 '그(너)'의 공간적 위상과 심리적 양상 및 행동적 상황이 '안'과 '밖'의 위상학을 중심으로 구조화된다. 「얼굴의 물」이 화자가 대상인 "그"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로 일관하고, 「원경」이 화자가 대상인 “너”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계속 전개하다가 자신인 '나'를 개입시킨다면, 「감은 눈으로」는 시종일관 화자가 자신인 "나"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러한 차이를 '꿈'과 '현실'의 관계라는 관점으로 재서술하면, 「얼굴의 물」이 화자가 대상인 "그"를 바라보고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무의식적 꿈'의 구도를 유지하고, 「원경」이 화자가 대상인 “너”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무의식적 꿈'을 전개하다가 자신인 '나'를 개입시켜 '현실'을 삽입한다면, 이 시는 화자 자신이 '무의식적 꿈'에서 내쳐지는 과정을 묘사하여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감은 눈"은 '잠'과 연결되고 '무의식적 꿈'의 영역과 결속하므로 "꿈으로부터 내쳐진다". "감은 눈으로"라는 구절은 화자가 '잠'이나 '무의식적 꿈'의 영역에 머물고 싶어 하지만 비자발적으로 현실로 쫓겨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부러 눈 뜨지 않고 걸으면"이라는 구절은 화자가 쫓겨난 현실에서 의지적으로 눈을 감는 모습을 제시하는데, 이를 통해 "나와 함께 내쳐진 논이 있고 논 위로 걷는 내가 만져지는" 상황이 가능해진다. 화자는 현실로 쫓겨남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음으로써 현실에 꿈의 동력을 개입시키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태운 시의 꿈/현실, 안/밖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특이점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는 꿈에서 현실로 이동할 때 꿈의 실재가 현실의 리얼리티로 전이되어 나타난다는 점이고, 둘째는 현실의 화자가 꿈속의 자신을 관찰하는 객관적 거리뿐만 아니라 꿈에서 현실로 추방된 자신을 관찰하거나 감각하는 객관적 거리를 가짐으로써 이중의 거리 감각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중의 거리 감각은 안태운 시 특유의 미분적 시선이 생성시키는 다각적이고 다층적인 몽타주 기법과 결부되면서 미학적 특이성을 강화시킨다.  안태운은 "걷고 난 후의 일들"이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을 두 번째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에서 모색한다. 안태운이 모색하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은 표면적으로 '편지 쓰기'와 '산책하기', '동물로 대표되는 비인간과 인간의 관계 재구성' 등을 통해서 수행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뿐만 아니라 그것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발생시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도 안태운 시의 중요한 요소라고 간주하고 새로운 시적 가능성의 양상을 '소리의 침묵'과 '공터의 공백'에서 찾을 수 있다. 안태운의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된 「빈방의 빛」에서 시적 화자는 초반부에서 "빈방의 빛에 대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다가 "강박"이 드는 상황에 이르러 그것에 대해 진술하기 시작한다. "빈방의 빛"에 대한 진술은 중반부에서 "비질하는 소리"가 제시된 이후 일련의 "소리"에 대한 진술로 이동한다. “소리"가 "배경음"으로 작용하여 무위의 삶에서 벗어나 '행위(몸의 이동)'를 유발하는 동인(動因)이 되고, "지도"는 "소리"라는 "배경음"에 의해 촉발되는 '행위(몸의 이동)'가 현실화되기 위해 경유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그리고 "소리"와 "지도"의 상호 침투적 왕복이 "멀리 빈방의 빛"에 이르러 미지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또 다른 "빈방의 빛"을 연상하는 장면에 도달한다. 이러한 시상 전개는 "빈방의 빛"-"비질하는 소리"-"여행자들의 목소리"-"모의하는 소리"-"지도"-"다시 소리"-"멀리 빈방의 빛"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시상 전개를 거쳐서 등장하는 대상들이 바로 "개와 고양이"라는 동물이다.  무의식의 연상 기법으로 진행되는 이 시의 시상 전개는 "빈방의 빛"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소리들'과 "지도" 간의 상호 침투적 왕복을 거치고 "멀리 빈방의 빛"을 경유하여 다시 "빈방의 빛"에 도달하는 재귀적 순환의 구조를 보여준다. 이 재귀적 순환 속에서 시적 주체가 추구하는 큰 틀의 지향성은 "빈방의 빛"에서 벗어나서 "개와 고양이를 따라서 가"며 "전철을 타고" "터널을 지나"가는 '행위(몸의 이동)'라고 할 수 있다. 이 행위의 연장선에서 안태운이 두 번째 시집에서 모색하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이 표면적으로 '편지 쓰기'와 '산책하기', '동물로 대표되는 비인간과의 관계 재구성' 등을 통해 수행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두 번째 시집의 표면적 흐름에 대한 비평적 조명뿐만 아니라 이것을 가능케 한 동인으로서 "빈방"이라는 공백, "소리"라는 "배경음”, “소리"와 "지도"의 상호 침투적 왕복, "멀리 빈방의 빛"이라는 미지의 시공간 등에 대한 비평적 해명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안태운의 두 번째 시집에서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발생시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은 주로 '소리의 침묵' 및 '공터의 공백'에서 발견된다. 「인간의 소리」에서 화자는 "사람들"이 "동물에 흡사하다고 느끼는 소리를 내"지만 "인간의 소리"에 주안점을 두고 그 근원적 의미를 천착하는 과정에서 "침묵"과 "웃음"이 내포하는 의미를 "밤"-"끝없는 들판"-음악-"춤"-'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에서 찾는다. 이와 유사하게 「목소리」에서 화자는 "너"가 우연성에 근거하는 "풍경 소리"를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사람을 찾"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이 상황에 맞서 "너는 네 목소리를 내보지만 "풍경 소리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네 목소리 뒤로 돌아 나"가고 “다른 소리들마저 다 뒤로 돌아 나가"는 "풍경 소리"의 근원적 차원인 '침묵'과 '공백'에 대해 제시한다. 그리고 「공터를 통해」와 「흰 개를 통해」는 화자인 "나"와 "공터"와 "흰 개"를 중심으로 "산책"이라는 행위가 제시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여준다. 「공터를 통해」에서 "공터"는 "나"와 "흰 개"의 시선이 어긋나는 공간적 개념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가 어긋나는 시간적 개념을 융합시킨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고, 「흰 개를 통해」의 "공터"도 "나"와 "흰 개"의 시선이 어긋나는 공간적 개념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가 어긋나는 시간적 개념을 융합시킨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다. 따라서 이 두 시의 중심 주제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산책'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화자 "나"와 "흰 개" 간의 긍정적인 결속이나 '여전히 지금-이곳에서 비인간동물이 배제되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견고한 분할선이 존재한다' 등의 주제를 도출하는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뿐만 아니라 "공터"가 시선의 어긋남과 시간의 어긋남이라는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을 내장하면서 표면적 수행성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좀 더 복잡미묘하고 깊은 의미를 발생시키는 이중의 시적 장치로 작용한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까지 규명해야 한다.  이러한 안태운 시의 미학적 특이성을 염두에 두면서 최근작 중에서 한 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손끝의 장소 물갈퀴로 흘러드는 횡목 하오 당신은 몸이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모르는데 당신은 부딪치오 시간의 끝에서 울다 공간과 사물로 있다 발가락을 움직여봐 모빌과 함께 산책해 있다 당신은 양의 집 근처에 가서 부른다 하지만 양은 어딘가로 나가 있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뒤돌아 뛰어갔다 하오 놀았다오 자러 가기 전에 안부를 물었다오 음소 단위로 노래를 불렀다오 아름다웠다오 두 얼굴 뒤에 숨었다오 커튼 뒤로 내 뒤로 어느새 내 앞으로 도요새가 날아간다 당신은 몇 걸음 걷다가 체육을 했다 기억의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쐐기의 관계 하오 건물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구름은 광장처럼 떨었다오 그사이 당신은 뒤돌아 망설였다오 우표를 붙였다오 당신을 사랑하오 수레와 함께 움직인다 민달팽이가 퍼져나간다 잔등과 환초 하오 당신이 어른이 되다니 당신이 어른이 된다니 - 「하오」 전문  이 시는 첫 시집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까지 진행해 온 안태운 시의 미학적 특이성뿐만 아니라 세 번째 시집 이후의 변모까지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화자인 '나'와 대상인 "당신"의 관계, 중요 모티프로 "빛"과 '소리'("노래"), 시적 서사의 사건으로 '바라봄', "산책", 비인간으로서 "양", "도요새", "민달팽이" 등이 첫 시집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까지 진행해 온 특이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이 시시각각 다각도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포착하여 시간 및 공간의 연결을 차단하고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 및 관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첫 시집의 시적 방법론이 견지된다는 점이다.  이 방법론이 은연중에 노출된 부분은 "당신은 부딪치오 / 시간의 끝에서 울다 / 공간과 사물로 있다"라는 문장이다. 안태운은 두 번째 시집 이후에 전체적인 시적 구도를 환영적 프레임에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으로 전이하고 산책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적 실천을 보여주었고, 이와 연동하여 시의 공간적·심리적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비"가 설정되면서 "안"-"안개"/"밖"-"빛"-"비"로 구조화되었던 첫 시집의 대비적 구도가 평면적 구도로 병합되었다. 그러나 편지 형식이나 서사적 진술을 시도하는 동시에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이러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에서도 미분적 시선을 통해 공간과 시간의 안팎을 분할하는 동시에 연결하면서 이동하는 안태운 특유의 시적 방법론을 견지하고 있다.  "건물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 구름은 광장처럼 떨었다오 / 그사이 당신은 뒤돌아 망설였다오 / 우표를 붙였다오 /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구절은 화자가 "그사이"라는 찰나적 시간을 경계로 "건물에" "들어오고 있"던 "빛"과 "광장처럼 떨었"던 "구름"이라는 자연적 풍경을 묘사하고 "뒤돌아 망설"이면서 "우표를 붙였"던 과거의 "당신"을 기억하면서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현재의 감정을 표출하는 자신의 모습을 미분적 시선으로 포착하면서 제시한다. 이 시선에는 현재의 화자가 과거의 장면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현재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적·공간적 격차가 충돌 몽타주의 방법으로 농축되어 있다. 그리고 "수레와 함께 움직인다 / 민달팽이가 퍼져나간다 / 잔등과 환초 / 하오 / 당신이 어른이 되다니 당신이 어른이 된다니"라는 구절은 화자가 "하오"라는 찰나적 시간을 경계로 "수레와 함께 움직인"고 "민달팽이가 퍼져나"가는 "잔등과 환초"라는 현재의 자연적 풍경을 묘사하면서 "당신"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지속을 통해 "어른이 되"는 과정을 미분적 시선으로 포착하면서 제시한다. 이 시선에는 현재의 화자가 현재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당신"이 "어른이 되"는 과정을 현재완료적으로 회상하는 시간적·공간적 격차가 충돌 몽타주의 방법으로 농축되어 있다. 안태운의 독자적인 시적 방법론에 해당하는 미분적 시선과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 향후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 나가는지 주목하기로 하자.

월간 현대시 오형엽 미분적 시선시차(視差/時差)적 공백모티프미학적 특이성구조화 원리안태운 2025
정원 견고한 삶의 조건 ― 박참새, 배시은, 신이인의 시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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