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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현대시학 | 2024년 9-10월호(제621호)

부유하는 “공백”의 알레고리, 아라크네의 기묘한 “문장”들 ― 이다희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 (문학과지성사, 2024)

김정현 문학평론

1979년 충남 대전에서 태어났고 이후 전남 여수에서 성장하였다. 광운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김소월 시의 구술성 연구로 석사 학위를 그리고 구인회 모더니즘 시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관심사는 알레고리적 언어 미학과 예술가의 개별적 실존성에 있으며 그에 관한 연구와 비평을 병행하고 있다.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너는 이제 ‘미지’의 즐거움일 것이다(황인찬론)」로 등단하였고 공저인 『한국 근대시의 사상』과 『2023년 제24회 젊은평론가상 수상작품집』 및 문학평론집 『헤테로토피아의 밤』등이 있다. 202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 문학창작산실 발간지원기금 수혜받았으며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학부 조교수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1. 그러니까 이 공백

 

                                              대표님, 제주도는 바람이 많이 부나요? , 저는 지금

                                            되게 기뻐요. 어떻게 공백과 일치하겠어요. 그런 생각이

                                            드네요. 오늘 처음 떠올린 문장이지만 마치 태어날 때부

                                            터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네요.

                                                                       - 「사라진 대표님중에서

 

 이 글을 쓰기 위해 주어진 키워드는 한국 현대시의 가능성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키워드는 두 가지 방향으로도 확장될 수 있겠다. 그 첫 번째는 당연하고도 굳건하게 여겨져 온 한국 현대시란 과연 도대체 무엇일까란 질문. 그리고 두 번째는 지금 젊은 시인들의 기묘하고 괴상하며 때로는 시처럼 보이지 않는 시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란 질문. 특히 두 번째 질문과 연관되어 생각을 넓혀보면 이 가능성이란 키워드는 지금 젊은 시인들이 보여주는 새로운 시를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 가란 의미 역시 내포되어 있을 것 같다.  

 뜻을 명확히 해보기 위해 둘로 나누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할 수 있다. 그 중심에는 한국 현대시라는 것이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으며 이미 완결되어버린 단 하나의 인식일 수 없다는 점이 존재한다. 현대시란 우리의 개념은 언제나 고정적이며 확정적이라고 손쉽게 단언할 수 있을까. ‘한국 현대시에 관해 겨우 공유될 수 있는 조건은 한국어란 언어와 문단이라는 제도적 장치 그리고 최소한의 장르적 규준일 뿐이다. (하지만 이 조건들을 모두 충족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시라고 당연히 말할 순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른 글들에서도 자주 이야기해왔기에 굳이 논의를 반복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우리가 시라고 생각해왔던 많은 당연한 개념들을 벗어나게 된다면 시가 아니었던 많은 것들이 오히려 시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열린다는 점은 확실히 중요하다. 마치 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라는 옛 경구처럼. 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가능성의 사유란 우리가 시라는 개념 그 자체에 얽매여 있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겠다.

 필자의 주관적 견해이겠지만 지금 등장하고 있는 일군의 젊은 시인들 역시 이를 모르지 않는다고 판단된다. 생각해보자. 2000년대 미래파 이후 젊은 시인들이란 호칭에는 언제나 추상성과 난해성이란 명칭이 기입되었으며 시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받아왔다. 그러니 문제는 젊은 시인들이 이해받을 수 없는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핵심은 지금의 시인들이 보여주는 언어의 기묘한 양상 그 자체이다. 상징과 서정과 언어의 당연한 표면적 의미에 의해서가 아닌 오직 자신만의 고유한 알레고리를 통해서만 존재하기. 자신들만의 언어에 의지하며 시적인 것을 생산해내는 무한한 자유로움. 즉 우리가 한국 현대시의 가능성이란 이 거대한 질문을 감당하려 한다면 역설적으로 우리의 당연한 전제를 버려야만 한다. 알고 있고 당연하다고 가정해버리는 한국 현대시란 말은 기실 텅 비어있는 수많은 빈틈들과 공백들로만 성립될 수 있을 뿐이니까.

 이러한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이란 측면에서 주목해 볼 지금의 젊은 시인들 중 한 명이 이다희 시인일 것이다. 특히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문학과지성사, 2024.)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자기 자신의 공백에 대한 알레고리였다. 그러니까 나는 없다. 이 세계에서도 이 현실에서도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에 있어서도. 그러나 때때로 그 부재 속에서 무언가가 알지 못한 채 파편화되고 살아남아 있게 된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공백과의 일치’(「사라진 대표님」)문장을 분노라는 기묘한 방식으로 인식할 때에만 드러날 수 있는 무엇으로서. 즉 내가 나를 파괴하며 내가 아닌 나로서만 살아있음을 느끼는 광기 어린 인간. 자신의 없음과 공백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문장화하려는 자. 요컨대 인간이 아닌 것이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면 나는 남몰래 자신을 역겨워하는 것부터 가르칠 것”(「오일 페인팅」)이라고 기어이 중얼거리는 이 젊은 시인을 우리는 어떠한 가능성으로서 이해해볼 수 있을까.

 공백의 방식에 대해 시인은 다음처럼 말한다. “살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그동안 죽어 있었다는 것도 함께 느낀다라고. 여기에서의 삶과 죽음이란 단순히 심장이 뛰고 몸이 움직이는 물질적 존속 또는 육체가 호흡을 멈추고 정지한다는 일반적 죽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마치 공기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채로 언제나 나를 감싸고 있는 무언가들. 일상과 현실에선 그저 아무런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인형일지더라도 거기에는 분명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무게 없는 무게이자 마음 바깥에 있는 마음이 힘없이 품에 안겨 있다”.(「모르는 엉덩이」) 이처럼 시인은 언어의 표면적 의미에 의해서는 거의 인식되기 어려운 희미한 심연을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감각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불가능성과 가능성의 사이에 중얼거리기. 하여 시집 속에 펼쳐진 공백의 언어들은 모호함을 통해 부유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야기도 일상도 삶도 그리고 자기 자신과도 무관하게. 더 정확하게 말해본다면 이는 목적을 드러내지 않은 채 유동하는 언어들이 쌓여가는 일종의 잔해들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 잔해들의 성채 속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들의 겉모습이 아니다. 보다 핵심은 이미지들의 흐름 아래 숨겨져 있는 근본적 원리이자 시인이 사유하는 나의 존재에 대한 알레고리일 것이다. 요컨대 자책은 어느 순간에 생겨 어딘가에 도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면 그 말해지지 않는 자책이 도달하려는 근원적 어딘가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선 이 언어의 미로들은 허공에 떠있는 성곽처럼 그저 부유할 뿐이며 우리의 시선 바깥에 있는 불길한 어둠 속에서 영원히 머물러 있을 지도 모른다.

 

                                         내 손이 내 머리를 때리면 진심으로 기분이 나쁘지 않

                                           듯 자책은 어느 순간에 생겨 어딘가에 도달하지 않는다

 

                                            (…)

 

                                              살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그동안 죽어 있었다는

                                            것도 함께 느낀다

 

                                             인형을 다시 품에 안고 내내 앉아 있으면 이 무게 없는

                                           무게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

                                             마음 바깥에 있는 마음이 힘없이 품에 안겨 있다

                                                                       - 「모르는 엉덩이중에서

                                                 

 

 

2. ‘쪼개진 조각같은 문장들의 이면엔

 

                                          피곤해서 자꾸 한숨이 나온다. 나는 언제까지 자라지

                                             않을까.

 

                                               누군가의 꿈속에 이렇게 오래 갇혀 있어야 하나.

                                                                         - 「주공 아파트중에서

 

 자신이란 존재가 자신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말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며 딱히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시인에게 그런 일반론은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 거창하고 대단하지만 한없이 무의미한 말들보다 시인은 차라리 자기를 쪼개고 파괴하는 것이 훨씬 익숙해 보이니까. 따라서 시인의 언어가 구축해내는 이미지들의 잔해를 탐색하기에 앞서 우선 질문해봐야 하는 것은 과연 이 모호함의 시인은 어떤 방식으로 현실과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 가이다. 왜 시인은 당연한 우리와 다르게 세계를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사유하고 있을까. 땅 위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는 페르세포네’(「입춘」)는 어떤 마음으로 우리의 현실 속에 머물러 있는 지를 먼저 확인해봐야 한다. 다음의 일상적 상황에 대한 것처럼 보이는 시를 살펴보자.

 

  집에서 키우던 햄스터에게 쌀알을 한 움큼 잡아 던지던

사촌형의 팔을 물어뜯은 적이 있다

 

  나는 사촌 형에게 밀쳐져 뺨을 맞고, 햄스터는 자신에

게 날아오는 쌀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굴을 숨기며

발버둥 친다. 나는 나에게 햄스터가 소중한 것처럼 형에

게 소중한 게 무엇일까 고민한다. 그 짧은 시간에 머리가

핑핑 돌아간다. 남자가 손바닥이 뭐냐고 주먹을 쓰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건 너를 봐준 거라고 형이 대꾸한다.

에게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형이다. 그 짧은 시간에 내 머

리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형을 바라

본다. 싸우려면 한 걸음 가까이 가야 하지만 보려면 뒤로

물러나야 한다.

 

  형의 허벅지에서 검정 벨트를 지나 상체에 보기 좋게

감긴 폴로 티셔츠까지. 오른쪽 깃이 왼쪽 깃보다 안으로

더 말려들어 가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나는 더 이상 화가

나지 않는다. 형의 두 귀 사이에 놓인 이목구비를 훑는다.

형의 단단하고 뜨거운 팔이 얼마나 식어갈지, 형이 어떻

게 자신을 잃어가는지 나는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사람

이다.

 

  그 짧은 시간에 나는 그것을 이해했고, 조용히 햄스터

집을 들고 방을 나왔다.

                                    - 「나날들」, 전문

 

 시인의 많은 시들이 일상적 현실의 모습처럼 보이는 풍경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확연해 보인다. 이 측면에서 이 시는 어렸을 때 햄스터를 두고 다툼을 벌이는 두 사람간의 평범하다면 평범한 상황처럼 판단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주의해야 하는 부분은 시 속의 일상적 상황을 무조건적으로 사실적 경험으로만 환원해버릴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는 알레고리란 측면에서 시인이 사유하려는 세계감에 대한 일종의 크로키라고 해야 보다 정확하다.

 시의 전체적 맥락을 한번 고려해 보자. “집에서 키우던 햄스터에게 쌀알을 한 움큼 잡아 던지던/ 사촌형과 그 사촌 형의 팔을 물어뜯은 나의 존재는 단순한 다툼만을 벌이고 있다고 하기 어렵다. 시인은 이를 다음처럼 말한다. “나는 나에게 햄스터가 소중한 것처럼 형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한다.” 그에 따른 판단은 이러하다. “/에게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형이다. 그 짧은 시간에 내 머리는 결론을 내린다.”라고. 말 그대로이다. 일상적이고 평범하며 당연한 우리들에게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알레고리라는 관점에서 검토했을 때 위 장면은 어떻게 사유될 수 있을까. 이 시가 말하자면 우리들의 당연하고도 의심할 바 없는 현실의 양상이라면 어떠한가. 시에 등장하는 사촌형처럼 우리 모두가 목숨보다 중요한 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하여 의심조차 될 수 없는 자명함. 그렇다면 내 빰을 때리고 나를 밀치며 햄스터에게 쌀알을 던지는 사촌형의 킬킬대는 웃음 가득한 표정에는 진실로 우리의 얼굴이 겹쳐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바로 그러한 숨겨진 형상이 나날들의 알레고리적 맥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위 시에서 보여지는 사촌형의 대립이란 사촌형으로 대변되는 우리와 시인간의 대립으로 규정되어야 보다 정확하게 인식될 수 있다. 시인이 어떻게든 살리고자 노력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굴을 숨기며 발버둥치는 햄스터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으며 있지 않다. 이름 없는 수많은 존재들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사촌형이자 우리에 대한 분노가 시인에게 이처럼 명확하다면. 더욱 중요하게 판단해봐야 하는 부분은 시인이 한걸음 뒤로 물러나 형을 바라보려 한다는 기묘한 태도일 것이다. 그 이유를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싸우려면 한 걸음 가까이 가야 하지만 보려면 뒤로/ 물러나야 한다.”.

 지금이란 당연한 삶의 존속이 아닌 무언가들의 형상. 이 시에서는 햄스터라는 한 단어로 명시되었지만 이 햄스터의 이면에는 요구되고 부탁되는 상상이자 오렌지의 세계이자 심상함과 비명과 끝’(「손을 들어서」)처럼 우리 아닌 무수히 많은 존재들의 목록들이 숨어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면을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시인은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으며 단지 우리란 현실을 바라보고 사유할 뿐. 즉 삶과 자기보전적 욕구의 자연스러움 혹은 부와 풍족함을 위해 살아가며 당연히 지속되는 우리는 시간에 따라 쇠락해갈 것이다. 하여 시인은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한다. ‘폴로 티셔츠를 멋지게 차려입은 형의 단단하고 뜨거운 팔이 얼마나 식어갈지, 형이 어떻게 자신을 잃어가는지 나는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그 짧은 시간에 나는 그것을 이해했고, 조용히 햄스터/집을 들고 방을 나왔다.”는 시인의 마지막 문장은 단순히 다툼을 멈추고 피했다는 사실적 맥락으로 이해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시인은 가까이 접근해서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사촌형과의 투닥거림같은 일상적 풍경 뒤에 숨겨져 있는 시인의 존재론적 욕망. ‘가까이서 싸우기보다 뒤로 물러나우리와 현실과 세계의

본질을 조망하려는 근원적 욕망이 위 문장 속에 숨겨진 진실된 시인의 의지가 아닐까. 요컨대 시인에게 우리의 현실과 세계와 삶은 무가치하며 무의미할 것이며 단지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문장들만 유의미할 뿐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뒤로 물러서며쓰려하는 자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시인이란 어떠한 존재인가. ‘속도와 질감이 바뀌고 갑작스레 많이 내린 눈이 인간의 질서를 바꾸는 그러한 풍경 속에서 고민에 잠긴 페르세포네’(「입춘」)의 마음에는 어떠한 욕망의 문장들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일까. ‘햄스터의 고통을 보지 못하는 우리와 다른 위치에 서 있는 시인에게 오직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시인은 왜 앞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뒤로 물러나서 보려 하는가. 이 같은 모호함 속에서 언어들은 어떻게 유동하는가. 시인은 왜 자기를 분열시키려 할까. 따라서 그 모호함과 분열의 언어가 존재하려는 욕망의 근원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 치의 글쓰기가 끝났다고 삶이 갑자기 시작되는 게

아니라서

  나는 발코니에 가만히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멀리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내가 난간 위에 둔 물컵

을 가볍게 통과한다

  이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웬만하면 어려운 생각들은 밀어내 보려고 한다

  딱히 갈 곳 없이 돌아다닐 때 사람이 사람을 밀어내는

힘으로 어디든 도착하는 것처럼

  나는 계속 문장을 선택하고 선택은 나를 쪼개놓고 스스

스 사라진다

  , 쪼개진 만큼 가벼워졌다면 나는 걸어다닐 필요가

없을 텐데

 

  작은 숲을 계속 헤매며 무한을 만들었던 사람은 숲을

나와서 쓴다

  나쁜 일보다 좋은 일을 견디는게 어렵다라고

  일기에는 숲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모든 빛이 한 번에 몰려든다면 틀림없이 죽을테지

  나는 밝고 집요한 조명을 하나 켠다

 

  잠이 들면 그는 자꾸 운전을 하려 한다

  나는 그에게 달라붙은 잠을 뜯어내며 그의 일기를 고친다

  일기는 소중하지만 때가 되면 이름을 지우고 아무에게

나 줘버리고 싶기도 하지

 

  열어놓은 창문으로 신선한 바람이 분다

  나는 마치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몸을 일으킨다

  그의 베게 밑에 차 키를 몰래 숨긴다

  어떤 부적은 당사자가 몰라야 효력이 생긴다

 

  그가 얼굴을 베개에 깊이 파묻은 만큼 내가 침대에서

떠오른다 쪼개진 나의 조각 하나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다

 

  불면의 시작이자 사랑의 시작이다 좋은 일인지는 알 수

없다

                       -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전문

 

 아마도 이 시는 이다희 시인이 인식하고 사유하는 모호함의 언어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암묵적으로 알레고리화하는 일종의 시에 대한 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언어의 표면이자 의미에 의존하지 않고 유동하며 흐릿해지는 모호함을 통해서만 존재하려는 어떤 의지. 시의 문장에서 말해지듯 어떤 부적은 당사자가 몰라야 효력이 생길 수 있는 방식처럼 우리에게 알레고리적으로 다가오게 되는 무언가들이 여기에 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인 나를 벗어나 있는 위치. 어떤 희망이나 기대 그리고 전망처럼 밝은 마음으로 세계와 현실을 보려 하지 않는 자의 시선. 시의 서두에서는 글쓰기’(문장)투명한 유리막을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있을 뿐이라는 점을 모를 리 없는 시인의 인식 그 자체가 드러나 있다. 그러니 이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지속되는 분리 속에서 시인은 자신을 사유하려 할 뿐. 바로 문장으로서. 그러한 문장들은 일견 표면적 목적성이 부재하며 단지 유동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딱히 갈 곳 없이 돌아다닐 때 사람이 사람을 밀어내는/ 힘으로 어디든 도착하는 것처럼”. 따라서 문제는 이것이다. “나는 계속 문장을 선택하고 선택은 나를 쪼개놓고 스스스 사라진다는 것.

 ‘내가 선택한 나를 쪼개놓고 스스스 사라져버리는 문장이란 이 기묘한 알레고리란 어떠한가. 아마도 이는 시인이 느끼고 자각하려는 자기 자신의 언어 혹은 그 존재론적 이유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말하자면 이 분열되려는 의지는 현실적 나의 생각과 삶과 무관하게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치 작은 숲을 계속 헤매며 무한을 만들었던 사람이 숲을 나와서 쓰는 것처럼. 이러한 시인의 마음은 모든 빛이 한 번에 몰려드는 죽음같은 삶보다 밝고 집요한 조명아래서 희미하게 존재할 무언가를 향해 있는 것이다. 그 아래서만 소중하지만 아무에게나 줘버리고 싶은 문장들이 탄생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렇기에 시인은 배게 밑에 차 키를 몰래 숨기는 것처럼 자신의 문장을 쪼개고 분열시키며 나의 조각이면에 숨겨져 있는 무언가들을 암묵적으로만 드러내려 한다.

 그 깊은 심연 속에 머물 때 어느 순간 시인에게 다가오게 되는 단 하나의 것. “쪼개진 나의 조각 하나가 서서히 떠오르는 것처럼 들려오게 되는 환청. 저 심연 속에 말해지지 않으면서 말해져야만 하는 시인이 사유하는 근원적인 단 하나의 문장. 그것은 이러하다. “불면의 시작이자 사랑의 시작이다 좋은 일인지는 알 수/없다”. ‘알 수 없다고 스스로를 확정하지 않는 단언이자 냉정하고도 냉철한 한기를 머금은 언어를 통해서 시인은 자신의 불면이자 사랑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자신이 결코 현실과 세계 속에서 편히 잠들 수 없는 페르세포네이며 동시에 필사적으로 이름 없고 보이지 않는 무수한 존재들을 찾아 헤매이게 될 운명”(「종과 횡과 사선으로」)을 지녔다는 것을. 나 자신의 존속과 삶의 유의미성 따위와는 무관하게 좋은 일인지는 알 수/겠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것. ‘취향보다 더한 취향을 발견하기 위해 꼬물꼬물꼬물꼬물거리며 작업’(「렌드로 카이프테」)하는 행위를 거처야 비로소 탄생되게 되는 것. 뒤틀리고 쪼개지며 분열하는 문장들 뒤에 숨겨진 덜덜 떨었던 일이자 희망을 품지 않기에 잊혀질 수 없는의지를 말이다.

 

                                             길은 계속 이어지고 나는 나의 한중간이 조용히 이동하

                                           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호수를 나와 맨몸으로 서

                                           서 이를 달달 떨었던 일은 잊히지 않는다. 뒤도 돌아보지

                                           않겠다는 다짐은 아직도 지켜지고 있다. 내 앞의 풍경들

                                           은 점점 바뀌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생겼다가

                                           사라지지만, 앞의 풍경들이 바뀐다고 뒤의 풍경도 바뀐다

                                           는 희망은 품지 않게 되었다.

                                                        - 「무화과 나무 여름 바구니 이름중에서

 

 

3. “밝은 곳이 더 밝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것 뿐이라면

 

                                              언제든 불을 켜서 어둠을 내쫓을 수 있으니 당장은 불

                                            을 켜지 않는다.

                                              이 어둠을 그대로 둔다. 나는 어둠을 옹호하는게 아니

                                            라 이미 밝은 곳이 더 밝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것뿐

                                            이다.

                                                                    - 「하루보다 긴 일기중에서 

 

 요컨대 시인은 우리의 현실과 세계이며 자신의 삶을 결코 긍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네비게이션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작동하/지 않는것처럼. 뒤틀려있고 분열하고 기묘한 방식으로서 여기에 존재하기. 그리고 무엇인가 하고 있는 느낌”(「우회전 하면 영화제」)만을 기다리기. 이러한 방식으로만 긍정할 수 있기에 더욱 모호해지고 분열하려는 언어를 시인은 놓지 않는다. “희망과도 같은 사랑과 삶이란 너절하고도 더러운 비유를 피해서 다시 모르게 되는언어들만을 인식하려는 행위. 그리하여 누군가 나의 단점을 묻는다면 없다고 말”(「시티 커피」)해야 한다는 의지일 것. “항상 두 번째의 생을 산다고 생각”(「손을 들어서」)하는 시인의 유동하는 언어가 지닌 목적이 이러하다면. 우리가 시인에게 질문해야 할 또 다른 맥락은 기묘한 언어의 심연 속에서 들리지 않은 채 존재하는 시인의 문장들이 지닌 근원적 형상에 있을 것이다. 단 모호하고 분열하는 형태이자 말을 많이 하고 난 후에 생기는 숙취같은 묘한 죄책감뒤에 있는 귓속말’ (「오일 페인팅」)아름다움으로서만.

 

  갑자기 멈춰 세우지 마

 

  뛰다가 갑자기 멈추면 넘어지기 쉬워

 

  아침에 일어나면 뭐든 씹어 삼키려고 한다

  침대는 내 혼잣말을 어떻게 다 듣고 있는지

  아마 영원에 중독된 것 같기도 해

 

  영원에 중독된 침대는 한낱 혼잣말을 견딜 수 있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점은 창문이 크다는 것

  크고 불투명한 유리는 떠오르는 섬광을 추상적으로 감

상하게 만들지

 

  잠시 눈을 감으면 지난밤 혼잣말이 혀끝에 감돈다

  막막한 질문들이 체스 판 위의 말처럼 소년을 옮긴다

 

  소년은 체스 판 위에서 퀸이 된다

  퀸은 종과 횡과 사선으로 움직일 수 있다

 

  블라인드를 내린다

  블라인드의 곡선은 호기심

  아침에 타는 꽃 냄새 불투명한 안개

 

  종과 횡과 사선으로 걸어간다

 

  퀸은 뒤로 갈 수 있지만 뒤로 간다고 수를 물리는 것은

아니다

 

  저녁 골목에 생선 비린내를 맡으며 식당을 찾아가는

손님처럼

  소년에 대한 깊은 식욕이 있다 식욕은 운명에게 있는

것이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망치질해서 허공에 걸어놓는다 작

은 첫눈이 눈에 들어가 순식간에 자신을 잃어버린다 여긴

참 풍경이 좋아 아니 나 우는게 아니고

  눈물이 아니라 다크 서클이라고 상상력이 아니라 질투

라고 당신을 사랑해가 아니라 그냥 사랑이라고 써 앞뒤

다 잘린 단어가 우리를 절벽 위에 세워두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에 눕는 동안에도 창문이

무너지지 않았다

                         - 「종과 횡과 사선으로」, 전문

 

 “잘린 단어가 우리를 절벽 위에 세워두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이자 그 잘려버린 단어를 만들어내는 세계에 대한 분노가 여기에 있다. 그 분노를 위해 아마도 세계가 아닌 시인의 영역이라고 할 침대에서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릴 뿐. 하여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인식하며 이렇게 말한다. “뭐든 씹어 삼키려 한다”. 결국 이는 파괴하고 부정하는 자의 분노가 지닌 본질적 형상인 것이다.

 현실과 세계와 삶과 끊임없이 대립하려는 시인에게 불가능하게 가능해야 하는 무엇. 그렇기에 영원에 중독된 침대는 한낱 혼잣말을 견디는 것처럼 시인에게 추상은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 된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점은 창문이 크다는 것이며 크고 불투명한 유리만이 떠오르는 섬광을 추상적으로사유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즉 추상과 사유인 존재로서의 소년이자 시인만이 현실과 세계와 삶에서 퀸처럼 종과 횡과 사선으로 걸어갈수 있다. “블라인드의 곡선은 호기심인 마음과 아침의 타는 꽃 냄새 불투명한 안개를 통해서.

그러니 퀸은 뒤로 갈 수 있지만 뒤로 간다고 수를 물리는 것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싸우려면 가까이 가야 하지만 보려면 뒤로 물러나야 하’(「나날들」)는 것처럼.

 이 같은 질척하고도 무거우며 분열하는 감각의 문장들. 마치 생선 비린내에 대한 식욕소년의 운명이 있는 것처럼 시인은 끊임없이 뒤로 물러나려 한다. 현실과 세계와 삶 속에서 순식간에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더라도. 사촌형”(「나날들」)같은 세계의 질서들이 삶을 플랫하고 평탄하게 만들며 우리를 울 수 없게만들겠지만. 그리하여 우리를 앞뒤 다 잘진 단어를 절벽에 세워둔 것처럼만들어버리겠지만. 그럼에도 추상과 사유의 존재이자 불투명한 유리로서 시인은 스스로를 규정하고 존속할 뿐이다. 내가 아닌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에 누워 나를 지워버리는 동안에도 창문은 결코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처럼. 문장과 언어의 추상적 알레고리이자 크고 불투명한 창문을 통해서만 시인은 잠시 와인 잔이 깨지고 열대어들이 풀려나 거리를/ 활보하는 상상”(「열대어」)이 가능한 문장을 지어낼 수 있을 테니까.

 

  방에 누워서 책을 보다가, 현시대를 현대시로 잘못 읽

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짜증이 나서 누워 있

던 몸을 확 일으켜 세워 책을 다시 읽는다.

 

  그리고 이내 내가 잘못 읽었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잘

못 읽어놓고 짜증을 낸 것이다. 민망한 기분에 다시 눕는

. 혹시 내가 봤을 때 글자가 슬쩍 자리를 바꾼 거 아닐

? 나는 이상한 착시 속에서 허공을 만들어냈다.

 

  어깨는 날개입니다. 어깨 치료로 유명한 병원에서는 이

렇게 말한다. 이런 문장을 보면 굽어 있던 어깨를 한번 펴

게 된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날개는 어깨가 아니다. 나는

날개를 잃은 사람이 비좁은 통로에서 사람들과 어깨를 부

딪치며 걷는 것을 본 적 있다.

 

  고대 비극이 상연될 때 코러스는 주로 춤과 노래를 보

여줬다고 한다. 배우의 미묘한 표정보다 강렬한 몸짓이

멀리 있는 사람에게 더욱 잘 보였을 것이다. 나는 야외극

장 무대에서 가장 먼 자리에 앉은 이에게 시선을 고정시

킨다. 왼손을 높게 들어 큰 반원을 그린 후 오른쪽 어깨를

감싼다.

 

  어깨를 좀 펴, 마음에 묻은 마음은 당신만 알겠지. 괜찮

. 바다 본 적 있어? 우리 사이에 넘치는 이 파도가 나는

무서워. 바다는 우리를 만나게 해줄 것 같기도 하고 전부

를 익사시킬 것 같기도 해. 당신은 당신 인생과 겹치지 않

는 이 극을 보며 운다. 지금 당신이 흘리는 눈물은 원해서

흘리는 눈물. 당신의 눈물 한 방울 들어갔으니 이 극은 알

게 모르게 새로워진다.

 

  허공은 출구가 아니라서 현시대이든 현대시이든 빠져

나가지 못한다. 나는 평소보다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가 당신을 위해 결말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거 알아주면

좋겠는데. 야외극장은 모르는 사람, 아는 사람 뒤섞여 시

끄럽고, 나는 누워서 책을 읽는다. 인생이 당신을 새로 얻

을 때까지 책을 읽고, 읽고, 또 읽고……

                                    - 「현대시」, 전문

 

 시인은 끊임없이 현시대란 정독과 현대시오독사이를 부유하려 하며 동시에 자신만의 오독을 오히려 긍정하려 한다. 현실과 세계와 삶은 현시대를 현대시로 잘못 읽는 오독을 허용하지 않을 테니까. 그 강고하고도 당연한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혹시 내가 봤을 때 글자가 슬쩍 자리를 바꾼 거 아닐까라는 의문을 소유한 자만이 이상한 착시 속에서 만들어진 허공이란 시인의 모호한 문장 속에 숨겨진 진의를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깨는 날개입니다란 문장 앞에서 하지만 나는 안다. 날개는 어깨가 아니다.”라고 중얼거리는 시인을 의아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시인은 분명 날개는 어깨가 아니다. 나는/ 날개를 잃은 사람이 비좁은 통로에서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걷는 것을 본 적이 있으니까. 지금 날개가 부재하는 우리의 세상이 어떠한지를 모를 수 없다는 것. 하여 시인은 야외극/장 무대에서 가장 먼 자리에 앉은 이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려 한다. 현실과 세계란 지금이 아닌 고대 비극의 강렬한 몸짓이 상연되는 가장 먼 자리를 향하는 그 시선만이 시인에게 언어의 바다를 헤매이려는 목적과 상동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현시대속에서 현대시라는 언어를 통해 부유하기. 정독과 오독 사이에 넘치는 이 파도는 정독처럼 무서운 것이지만 동시에 오독을 통해서만 또 다른 나를 형성하고 존속시킬 수 있게 하는 일종의 힘이자 의지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언어의 근원이자 본성으로서. ‘우리를 만나게 해줄 것 같기도 하고 전부를 익사시킬 것같은 시이자 문장들의 세계는 단지 오독을 통해서만 그 심연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오독의 필연적 조건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라는 당신이 당신 인생과 겹치지 않는 이 극을 보며 울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이 모호하게만 쌓아나가는 문장들의 심연 속에 위치한 감정. 그것의 본질적 이름을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다면. 요컨대 당신의 눈물 한 방울 들어갔으니 이 곳은 알/게 모르게 새로워질 수 있는 것처럼. 그 마음에 도달했을 때 시인이 구축하려는 끊임없는 분열과 모호함의 언어가 지닌 근원적 형상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시인이 깊숙이 감추어둔 알레고리들의 원천이란 곧 슬픔인 셈이다.

 바로 이를 위해서 시인은 끊임없이 분열하고 모호해지며 움직이고 있다. 허공은 출구가 아니라 현시대이던 현대시이든 빠져/ 나가지 못한다고 말해지겠지만. 그러나 문장들의 분열과 갈라짐과 무수한 변화들의 표면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무수한 알레고리들의 기원인 슬픔에 있으니까. 그 마음은 아마도 현실과 세계와 삶이 우리에게 끝나지 않도록 지속될 것이라는 자명함과 더불어 지금의 그러한 우리를 바라보는 시인이 단지 당신을 위해 결말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거 알아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는 행위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시인은 또한 자신의 읽기를 그저 지속할 뿐이다. 우리의 현실과 세계와 삶이 야외극장처럼 사람들이 뒤섞여 시끄러울 뿐이지만.

 또한 읽고쓴다는 단순한 문장의 이면. 언제일지 모르지만 새로운 인생이 우리에게 틈입되고 그리하여 우리가 조금은 새롭게달라질 수 있을 때를 슬픔과 함께 기다리면서.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어 나가는 페르세포네’(「입춘」)가 말하지 않았던 불가능한 미래를 어렴풋이 꿈꾸면서. 그리고 그 꿈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분열하는 언어들 속에 감추어 두면서. ‘같은 곳에서 같은 절망을 반복하다보면 이상하게 단순해지며 입에서는 피 맛이 나고 심장이 터질 것 같’(「미인은 자기 얼굴이 싫을 거야」)은 그러한 순간만의 존재가 되기를 욕망하는 유령처럼. 어떤 것도 확정되지 않은 채로 고양이 니체를 안고 선악을 초월한 다리 위를 빠르게 달리는 자’(「선악을 초월한 다리 위에서」). 알 수 없음이란 기묘한 형상이 시인의 진명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오거나 기다리는 유령을 피하지 말 것

                                                        유령을 만나면 놀라서 도망갈 것

                                                        어떤 문이라도 열어볼 것

                                                        설령 그게 출구가 아니더라도

                                                                           - 「유령의 집중에서

 

 

4. 이상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아라크네에게

 

                                                       인간을 꺼내놓고 부드럽게 스트레칭을 한다

                                                      물구나무를 서면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

 

                                                      어느 시절에는 머리카락을 보이는 것이

                                                      흠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어떤 곳에서는

                                                      피가 빠르게 도는 것 같다

                                                           -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중에서

 

 시집의 표제작에서 말해진 것처럼 시인은 기어이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야만 왕관을 쓰는 자이며 그래야만이 피가 빠르게 돌게 될자신의 공백”(「사라진 대표님」)을 자각하고 있다. 오직 이를 위해서만 파괴하고 분열하며 모호해지는 문장들은 존속하고 있으니. 하여 내가 나를 어렴풋이 느끼’(「손을 들어서」)고민에 잠긴 페르세포네’(「입춘」) 로 존재하려는 시인의 근원에는 사실 현실과 세계란 신에게 패배해 영원한 형벌을 받아 직물을 짜내고 있는 아라크네가 머물러 있지 않을까. 그러니 닻을 내리는 건 닻의 추락이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만/ 닻을 내”(「소파 오페라」)릴 수 있는 것처럼 시인에게 현실과 세계와 삶과의 싸움에서 승패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시인은 단지 보기 위해 뒤로 물러서며’(「나날들」) 자신의 모호함을 끊임없이 지속하려 한다.

 

  사람들이랑 대화를 하다가 딱히 할 말이 없을 때 나는

젊은 나이에 죽은 연예인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초상을 어

떻게 그려도 나에게는 다시 백지로 남을 뿐이다.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줘. 인형이 인간을 중단하고 떠나

, 인간의 백지, 숨을 곳 없이 밀도가 가득한 세상에서.

 

  어떤 소문을 들어도 백지에는 아름다움으로 등록되어

빛난다.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바람이 불어 인형과 인간

이 자리를 바꾼다. 아마 우린 계속 햇갈려 하겠지. 마치 밤

하늘의 별처럼.

                                  - 「방안의 집」, 부분

 

 “여기를 여기가 아니게 만들 것이 필요”(「샌드위치 시스템」)한 자가 원하는 아름다움이란 명확하지 않으며 희미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대신 가득한 인형들이 무의미한 말들을 쏟아 내는 세계와 현실과 삶 속에서 시인의 말처럼 다시 백지로 남을어떤 가능성이 존재해야 한다면. 불가능한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아마도 인간이란 백지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일일 것이다. “숨을 곳 없이 밀도가 가득한 세상에서존재하지 않는 백지속에 있을 기묘한 아름다움을 그저 떠올리면서. “일기에 한 문장을 적어도 하루보다 길다. 내가 젊은 것/이 아니라 써야할 일기가 너무 긴 탓”(「하루보다 긴 일기」)이기에.

 그 모호한 아름다움만이 우리의 현실을 무너트리고 끊임없이 밤하늘의 별빛만을 보게 하며 인형과 인간을 계속 햇갈리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자리바꿈의 방식으로서 시인의 언어는 분열하고 모호해지며 또한 자신의 욕망만을 성실하게 기다린다’(「오렌지 절벽」). 아테네가 지닌 영광 앞에게 패배할 줄 알면서도 싸우며 신들의 추악한 이면을 그려냈던 아라크네의 분노처럼. 이 같은 기묘한 언어의 심연 속에서 나의 오래된 중독과 마주 앉아 있”(「샌드위치 시스템」)다는 것만이 스스로의 방식이 된다는 점을 시인은 분명히 알 것이다. 비록 언어의 왕관을 오래 쓰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지’(「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게 되더라도. 그러한 시인의 분열하는 욕망과 마음은 어떤 회화같은 문장을 통해 광기와도 같은 이상한 이야기’(「소파 오페라」)란 알레고리로 존속할 테니까.

 이제 한국 현대시의 가능성이란 주제에 대해 약간의 첨언을 덧붙이며 글을 마무리해보자. 지금까지 이다희 시인을 통해 살펴보았듯 앞으로도 우리의 젊은 시인들이 자신들만의 행로를 그저 지속할 것이라는 점은 확연해 보인다. 이 측면에서 분명하게 기억해야 하는 부분은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이란 말이 당연하고도 고정된 방식으로는 결코 불가능하리라는 것에 있다. 알 수 없으며 모르는 형태로만 도래하는 새로운 시적 언어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는 것 역시도. 시가 아닌 시. 의미를 알기 힘든 파편처럼 쌓여있는 언어들의 성채. 괴상하고 기묘한 언어들 속에 존재할 알레고리의 향연들. 언어에 의해서가 아닌 언어를 통해서만 존속하는 자신의 사유를 확신하기. 이제 점차 사라져갈 한국 문학이란 지평 속에서도 이 고유하고도 이상한 이야기를 쌓아나가는 그들은 언제든 어디에서든 희미한 성좌 같은 밤하늘의 별빛을 선명히 기억할 것이다. 단 저주받은 아라크네가 켜켜이 쌓아가는 문장들의 직조 속에 있는 기묘한 알레고리적 공백을 통해서만.

 

                                           나는 눈을 떠 불빛과 빗방울이 어지럽게 번진 유리창을

                                         쳐다본다. 그 자체로 어떤 회화 같다고 생각한다. 백 년 전

                                         에 몸으로 완벽한 원을 그리는 요기가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디자인과 광기가 구

                                         별 가지 않는다. 완벽한 원을 그렸다고? 정말 이상한 이야

                                         기이다.

                                                                        - 「소파 오페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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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기묘하고도 고유한 언어들의 도래에 관하여

기묘하고도 고유한 언어들의 도래에 관하여 김정현(문학평론가) 1. ‘자명한 것이 없는’ 목소리들은 지금 우리 시문학장에 새로이 등장한 신인들에 대해 어떠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까. 물론 2025년 올해에 등단한 시인들의 시세계는 이제 막 출발점에 위치한 셈이다. 그러니 각각의 시인들이 최소한 한 권의 시집으로 대변될 자신만의 시적 세계를 어느 정도 드러내기 이전까지 그것을 규정하는 일은 그닥 의미를 갖기 어렵다. 한 명의 시인이 지니는 시세계를 겨우 2편의 시로 설명한다는 것 또한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주어진 원고를 읽어가면서 느껴지는 어떠한 근원적인 공통점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지닌 기묘한 고유함에 대한 증명이자 그 욕망이다. 미래파 시기의 2000년대와 포스트-미래파의 2010년대 이후 젊은 시인들이란 카테고리에 종종 부여되는 키워드인 난해성과 추상성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이에 대해 아도르노의 문장을 조금 바꿔 말해본다면 ‘시에 관한 한 이제는 아무것도 자명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미학이론』)는 맥락을 분명히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개인적이고 독자적인 사유행위에 속한다는 점 역시도. 그렇기에 이번 글에서 다루어야 하는 시인들의 시를 하나의 통일된 경향으로 정리하는 것은 더더욱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정말로 중요한 부분은 지금의 젊은 시인들이 어떠한 감각과 인식 혹은 언어를 통해서 자신들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가란 층위를 구체적으로 따져보는 일에 있다. 왜 이들은 낯설고도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시선으로서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가. 그 고유하고도 기묘한 감정과 마음은 그들의 언어가 지닌 깊은 심연이기도 하다. 이 심연은 (앞으로도 별반 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 현재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는 부를 향한 AI의 열풍 그리고 주가 5000선 달성과 강남 아파트값 폭등이란 먹고사니즘의 거센 파도와는 무관할 것이다. 즉 실제하지만 실제하지 않는 거대하고도 치밀한 압력들 속에서도 문학을 하는 우리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낯선 무언가들을 들리지 않더라도 발산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우리에게 도착한 시인들의 기묘하고도 고유한 언어는 이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기어이 쓰고자 하는 언어이자 증명이며 욕망인 것. 언제나 알 수 없고도 이상한 우리의 세계 속에서 시를 쓰는 인간들은 여전히 있다. 과거와 지금에도 그리고 예측하기 불가능한 미래에서도. 하면 그들은 도대체 왜 쓰고 왜 말하며 왜 존재하는 것일까. 명확한 답이란 없겠지만 중요한 맥락은 언어의 표면이 아닌 이면이자 심연이며 각기의 시인들이 지닌 기묘한 나로서의 고유함이란 무엇인가를 섬세하게 살펴보는 것에 있다. 다만 한 가지만은 명심해두자. 이 글은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생각에 그칠 뿐이라는 점을. 시라는 굳어진 규정이 아닌 시적인 것은 모든 시인들에게 깊숙이 그리고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명명 불가능한 무엇일 따름이니까. 2. 세계에 대한 깊은 절망의 알레고리란 언제나 중요한 지점은 시인들은 세계에 대해 절망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굳이 보들레르나 이상을 끌어들여 말하지 않아도 말이다. 이 측면에서 방성인 시인의 「복숭아로 가는 길」은 분명 주목되는 흥미로운 부분을 가지고 있다. 시인이 이 시속에서 줄기차고 집요할 정도로 반복하는 “아주 많은 복숭아”란 도대체 어떠한 의미를 실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예컨대 다음의 구절을 보자. 유일하고 거대하다. 복숭아와 숲 사이 숲속에서 복숭아로 가는 길을 삽으로 찌르는 사람들 복숭아로 가는 사람들 구덩이에 쪼그려 앉아 말한다. 그의 위로 복숭아나무 가 자랄 것이라고 만들 것이라고 아주 많은 복숭아를 (…) 불어나는 숲으로 가려지는 길 불어나는 숲으로 가로막힌 다 막힌 길의 끝에서 복숭아 하나 상해간다 복숭아 하나 상 해가며 무너진다 무너지며 쏟아지는 복숭아 아주 많은 복숭아 길의 끝이 비어 있다 그리고 다시 숲을 가로지르는 이번에는 - 방성인, 「복숭아로 가는 길」, 부분 방성인 시인의 「복숭아로 가는 길」에서 복숭아란 단어가 주는 느낌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복숭아란 무의미한 세계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처럼 ‘유일하고 거대한’ 복숭아들로 가득한 우리의 세계. 달고도 맛있는 복숭아는 일견 먹고사니즘과 더 많은 돈에 대한 당연하고도 평범한 욕구의 존재를 우리에게 기묘하게 비틀며 가리킨다. ‘숲을 빠져나오고 다음 숲으로 향하더라도’ 우리는 복숭아가 주는 달콤함과 쾌락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에. 그렇다면 “복숭아 없는 복숭아나무들이 모여 복숭아 없는 숲”이란 것은 사실상 우리의 세계 전체가 이미 ‘유일하고도 거대한’ 하나의 복숭아가 되어버렸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면 되물어보자. 과연 우리는 ‘유일하고도 거대한’ 또는 당연하고도 평범한 복숭아들인지 혹은 아닌지를. 균일하고도 단일한 욕구들이자 이데올로기이며 상징계적 질서가 마치 공기처럼 우리의 세계에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복숭아 그려진 팻말이 흐려지’더라도 끊없이 “불어나는 숲”과 같은 이 세계 속에서 어떤 이질성에 대한 욕망이 숨어 있다는 진실. 시인은 이를 이렇게 말한다. “막힌 길의 끝에 복숭아 하나 상해간다”. 당연한 욕구로 교환될 수 없는 ‘상한 복숭아’. 내 자신이 사실은 복숭아였다는 점을 손쉽게 부정하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한’ 이질적이고도 기묘하며 다른 ‘상한’ 복숭아가 되려는 마음. 이 같은 미묘한 차이를 생산하려는 욕망이 내재된 ‘상한 하나의 복숭아’는 복숭아들의 세계를 ‘무너트리고 쏟아’버릴 것이다. 시인은 안다. 이 정상적인 복숭아들의 욕구가 끊임없이 도달하고자 하는 길은 결국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다시/ 숲을 가로지르는/ 이번에는” 무언가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자 욕망하는 ‘하나의 상한 복숭아’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꽃의 대기」에서 이야기되는 “피어오르는/ 꽃의 대기에서/ 흐트러지는 꽃 충돌하는 꽃/ 충돌하며 만들어지는 꽃의 다발 사라지는 꽃의 다발 사라지는 꽃의 환희/ 꽃의 멜랑콜리 꽃의 비애 꽃의 회환/ 피고 지는 꽃 옆으로 피고지는 꽃”이란 것은 자연에 대한 단순한 표현일 리는 없다. 세계에 대한 절망이자 고통인 멜랑콜리를 품은 존재. 그리하여 ‘흐트러지고 충돌하여 만들어지며 사라지는 비애’란 것은 사실상 시인의 근본적인 무엇이자 ‘상한 것’으로 존재하려는 욕망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그것은 복숭아들만이 지배하는 이 세계 속에서 어떤 손쉽게 확언될 수 없는 기묘하고도 고유한 이질성을 기어이 형성하겠다는 존재론적 의미를 향해 있다. 요컨대 시인은 절망이란 방식을 통해서 자신의 언어가 지닌 가능성을 열어젖힐 수 있을 뿐이다. 어릴 적 배웠는데 분명 열심히 꼭꼭 씹어서 삼키면 소화된 것들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거름이 되어 밭을 가꾸고 나무를 키우고 집을 짓는다는데 왜 우리 집은 무너지기만 하고 밑 빠진 독처럼 다 흘려보내고 마는 걸까? 비가 내린다 흙벽이 씻겨 사라질지 아니면 비온 뒤에 오히려 단단해질지 알 수 없다 비가 얼마나 올지 모르니까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야 한다 멀리 하늘을 내다보다가 다시 걷는데 목이나 축이려 들여다본 못에 비친 나, 자세히 보니 민달팽이다. - 안수현, 「굳은 살」, 부분 시인이 근본적으로 절망하는 자라면. 그렇다면 문제는 이 절망에 대한 인식을 통해 과연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를 따져봐야 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안수현 시인의 「굳은 살」은 이 측면에서 우리의 절망적인 세계 속에서 위치한 시인의 태도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손쉬운 절망도 손쉬운 희망도 아닌 무언가를 행하는 자로서 존속하기. 시 전체를 아우르는 “집을 이고 살아가는 족속”인 민달팽이의 이미지는 이와 직결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핵심은 이 집의 구체적인 형상 속에 담겨져 있는 시인의 욕망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겠다. 시인은 이를 다음처럼 말한다. “내 등 뒤에 있는 것은 흙벽이다/ 집 안에는 심장도 있고/ 그 박동 가까이 붙여둔 꿈도 있고/ 내가 먹은 삶들 사랑한 사람들 아껴둔 말들이 있고/ 구멍 나 비워둔 자리도 있고 일부러 남겨둔 자리도 있”다고. 규정될 수 없으며 언어의 표면으로는 정확하게 전달될 수 없는 희미한 마음이라고 칭해야 하는 영역들. 비록 “지붕은 올리지 못해서 비가 오면 그대로 다 맞는” 것처럼 초라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렇기에 버릴 수 없는 어떤 마음들이 여기에 있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처럼 나 역시도 그러한 마음들의 계보에 속한 존재라는 점 역시도. 하여 시인이 가진 집이자 나의 영역은 돈과 풍요로움만을 강제하는 우리의 정상적인 세계와 무관하게 존속하려 한다. 시인은 그러한 마음들의 계보에 ‘끌려갈’ 테고 그 세계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려 한다. 비록 “우리집은/ 무너지기만 하고 밑 빠진 독처럼/ 다 흘려보내고 마는” 것처럼 보일 뿐일지라도. 세계가 강제하고 동시에 보장하는 행복의 의미와 무관한 층위에서 머무르기. 당연하게도 우리의 세계는 이 마음의 이끌림 따위에게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화폐의 단위로 명확하게 환산될 수 없는 보이지 않고 확실하지 않은 무엇이니까. 이처럼 비가 내리는 세계 속에서 “흙벽이 씻겨 사라질지 아니면/ 비온 뒤에도 오히려 단단해질지/ 알 수 없”겠지만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야 한다”는 간절한 중얼거림. 이 처절한 마음을 지속해내겠다는 하나의 다짐으로서. 이것은 시인이 발견해낸 자신의 고유한 마음이자 욕망이기도 하다. 절망적이고 무가치한 세계 속에서 나에게로 이어지는 마음의 계보들을 이어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야 한다’는 의지일 것. 바로 그러한 마음과 나이며 “너와 내가 함께하는 미래가/ 오래도록 높이 길게 멀리 뻗어가기를.// 비로소/ 나는 홀씨가 되어 날아갈 궁리를” 꿈꾸는 자. 그러니 도처에 퍼져있는 “도저히 씹어삼켜지지 않을 만큼 큰 고민”(「룸메이트」)을 행하는 자는 결국 나의 친구이자 또 다른 내가 아닌가. 자신만의 세계이자 존재로서의 사유를 향한 시인의 마음이 이렇게 명확하다면 이 민달팽이의 걸음은 느리지만 진중하며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 기묘한 걸음이 절망적인 세계를 언젠가는 횡단하리라는 점 역시도 의심할 이유는 없다. 여기 또 하나의 절망을 대하는 고집스러운 태도가 있다. 이솔 시인의 「검은 돌, 악보, 가계」이다. 이 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들의 납득 가능한 연속성이나 인과관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무의미한 세계 속에서 내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가에 있다. “저는 매혹되었습니다”라는 돌출된 것처럼 보이는 문장은 그 때문에 의미심장하다. 우리의 무의미하며 동질적으로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기어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 시인의 언어는 그것을 잡아내려 한다. 그 순간의 ‘장면’들은 “언제든지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동네의 담벼락들은 꼭 저의 눈높이만큼 이어져있습니다 건너편에서 머리가 둥실둥실 떠가면 그걸 바라보기에도 좋고 무릎을 조금만 굽히면 숨기에도 적합하니 나쁘지 않습니다 담을 오른편에 둔채 계속 가다보면 큰 건물이 하나 있다고 하는데 바다에서 표류하던 그물을 걷어 올려 벽에다 걸어놓았다고 하네요 무슨 맛이 나는 해조류들이 매달려 있을까 싶기도 하고 아주 큰 거미가 허공에 떠서 여러 개의 눈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을 것 같아 되돌아가기로 합니다 담벼락에는 다양한 침 냄새가 진동하지만 멀리서 맡을 때는 향긋하거든요 일련번호도 없이 규칙도 없이 벽에 범벅되어 있는 저는 갑자기 벽에서 하나의 뚜렷한 얼굴이 솟아오를까 봐 무섭거든요 제 악보를 용서해주세요 이제 저는 정말로 배가 고파진 상태입니다 나를 부르는 그녀의 우중충한 목소리가 들리고 똑같이 생긴 문들은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축 처진 저것의 아랫부분을 밀고 나가볼가요 그녀가 주름진 입가를 힙겹게 끌어올리듯이 부드럽고 촘촘한 거미줄이 이마부터 뒷덜미 그리고 등을 스쳐지나갑니다 그녀가 쓰다듬어줄까요 그녀의 치마 안으로 들어가듯이 따듯한 바람 속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위의 시에서 어떤 명확한 서사를 확인해보는 것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중요한 부분은 시인이 느끼고 있는 일종의 세계감에 대한 알레고리일 것이다. “제 악보를 용서해주세요”란 갑자기 튀어나온 문장이 의미하는 것. 이는 시인이 우리의 세계와 어떤 방식으로든 어긋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핵심적이다. 시의 제목이 의미하듯 검은 돌과 악보와 나의 가계도는 모두 ‘거미’로 표상되는 그 따뜻해 보이는 세계와 무관할 따름이니까. 그러니 시인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가까이 있는 “담벼락에는 다양한 침 냄새가 진동하지만” 그것을 볼 수 없는 곳이자 “멀리서 맡을 때는 향긋”할 뿐이라고. 요컨대 “동네의 담벼락들은 꼭 저의 눈높이만큼 이어져있”듯 그리고 “무릎을 조금만 굽히면 숨기에도 적합”한 세계인 것. “건너편에서 머리가 둥실둥실 떠가면 그걸 바라보기에도 좋”은 나만의 영역과는 다른 “우중충한 목소리”이자 “똑같이 생긴 문들”의 구별하기 어려운 무한하고도 반복적인 세계. 이 무가치한 세계와 직결되어 있는 존재는 아마도 ‘여러 개의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아주 큰 거미’라 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거미에게 속박되어 있으면서도 대립하려는 자. 때로는 그 세계에 뒤섞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질성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자. 그것이 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나라는 존재가 아닐까. 하여 거미의 ‘부드럽고 촘촘한 거미줄은 나의 온 육체를 꼼꼼히 묶어두듯이’ 나를 통제하며 제어할 것이다. 그 따뜻해 보이는 속삭임의 말들은 말하자며 시인을 유혹하고 이 평면적 세계에 손쉽게 잠겨 들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 시에서 말해지지 않는 무엇들. 요컨대 “일련번호도 규칙도 없이 벽에 범벅되어 있는” 내가 진정으로 원해야 하는 것. 그것은 말하자면 “갑자기 벽에서 하나의 뚜렷한 얼굴이 솟아오”르는 어떤 고유한 순간이 아닐까. 짐짓 시인의 엄살처럼 ‘무섭다’라는 말은 그렇기에 큰 의미가 없다. 이 낯설고 이질적인 얼굴을 지닌 또 다른 나이자 진정한 나의 영역은 “매혹”적이자 낯설고 두려운 무언가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테니까. 이 존재들은 여러 개의 눈을 가진 거미의 ‘쓰다듬’이자 ‘따듯한 바람’과는 무관해야만 한다. 그러한 마음만이 ‘용서받을 필요가 없는 나만의 악보’이자 어떤 기묘함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려 한다. “빛을 찢으며/ 마지막으로 온 사람을/ 조급할 이유 없이/ 천천히 안아”보는 마음을 가지고 “이 순간 이라고 발음”하게 될 어떤 순간을 기다리면서. 여전히 “식물은 숨을 들이마시고/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차창으로 지나가는 배경이 되고/ 주먹이 책상을 내리”(「훔치고 싶은 것들이 있다」)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보려 하지 않는 “가난한 집의 문”의 이면 속에 있는 무언가들. 일종의 깊은 어둠이라고 해야 할 언어의 심연 속에 위치한 시인의 언어가 지닌 본질적 욕망. 그 끈질긴 태도이자 형상들은 ‘거미들’이 제공하는 따뜻하고 편안한 ‘치마폭’의 안락함으로부터 이탈할 한 가지 방법이기에. 3. 언어의 심연을 고통스럽게 사랑함으로 그러니 절망 앞에서 선 인간들의 무기는 어떤 점에서 언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우리의 세계이자 의미들로 가득 찬 언어의 표면이 아닌 오직 내가 구축하고 형성하며 존재시켜야 할 고유하고도 기묘한 언어의 심연. 시인의 무기이자 고통이며 동시에 깊숙하고도 알 수 없으며 명확하게 규정될 수 없는 존재여야만 하는 것. 그것만이 시인들에게 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시를 한 번 살펴보자. 안으로 자라나는 칼이었다. 안으로 자라나는 칼을 안고서. 맞서고 있었다. 어느 날 누군가의 눈빛이 누군가의 손짓이 팔을 들어 올리는 몸짓이 금속으로서. 움트기 시작했다. 경연하듯이. 자라나는 동작이 이어지고. 끝내 칼의 형상을 하게 되었을 때. 들어보고자 했으나 들 수 없었다. 어떤 장면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 한 사람을 이룬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베어야 가장 날카로운 상처를 가지는지. 무딘 날에 베인다면 낫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는지. 알게 되자 안으로 희디흰 날들이 쏟아진다. 길을 걸을때면 앞서가는 사람의 발소리에 맞추어 칼날이 흔들린다. 발돋움하며 머리카락 휘날리며. 몸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듣는다. 이 춤을 멈출 수가 없다. 죽지 않도록 파고들었다가 흐를 듯 녹아 고인 흰 날이. 뜨겁게 끓고 있을 때. 변해볼 마음이 있어? 그러자 흰 날은 냄비 안의 죽이 되어 끓어오르다 우묵한 그릇에 담겨 식탁 위에 올라와 있다. 먹어야 나아, 말하는 목소리가 되어 다시 하얗게 끓어오르는 것을 본다. 목소리가 강이 되어 흐르기 시작한다. 나를 베지 않는 쪽으로 날을 만들어볼 수 있을까요. 칼등 위로 걸어볼 수 있을까요. 칼이 나를 뚫고 나가, 무뎌진 채 멈춰 있다면.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아주 커다란 압정인가 봐요. 말하며 튀어나온 날에 시래기 같은 것을 걸어 말리고 있다. - 박연, 「최선의 칼집」, 전문 박연 시인의 이 시는 또 어떠한가. “나는 어떤 방식으로 베여야 가장 날카로운 상처를 가지는지”라는 중얼거림에서 느껴지는 중요한 맥락은 시인이 두려워하지 않는 자라는 점에 있다. 물론 이는 상처가 고통스럽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은 시인은 절망 속으로 더욱 뛰어들고 그 고통을 섬세하게 느끼며 인식해야 한다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시인은 고통스러움과 두려움을 통해 형성되는 “안으로 자라나는 칼”이란 언어에 어떻게든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칼은 곧 나일 따름이니까. 흔히 생각해보듯 시인을 언어를 편하고 자유롭게만 사용하는 그러한 존재라고 여길 수는 없다. 손에 쉽게 잡히지 않는 시적인 것들의 희미한 형상. 그러니 “경연하듯이 자라나는 동작이 이어지고. 끝내 칼의 형상을 하게 되었을 때. 들어보고자 했으나 들 수 없었다.”는 것처럼 통제불가능한 언어들은 내 속에 위치한 내면의 칼로서 나를 상처 입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통과 상처 그리고 환희와 열광을 결코 구분하지 않는 나의 근본적 욕망일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알고 있다. 언어가 나에게 부여한 칼은 “몸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소리”이자 ‘멈출 수 없는 춤’과 같다는 것을. 하면 이 시인은 그러한 언어의 존재에 자신을 헌신하고자 하는 자가 아닐까. “안으로 자라는 칼을 안고서. 맞서고 있었다”는 철저한 고백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시인은 아프며 아파야만 하는 존재일 것이다. 이 측면에서 ‘최선의 칼집’이란 시의 제목은 언어라는 칼을 담고 있는 자기 자신이자 되어야만 하는 최대한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냄비 안의 죽’이자 ‘하얗게 끓어 오르는 목소리의 강’으로 무한히 분열되고 파편화되는 그러나 오직 나라는 존재의 고통이자 숙명을 담아낼 언어를 어떻게든 붙잡아내고 형성하기. 손쉽고도 무게를 느낄 수 없는 언어가 아닌 언어의 심연이자 고통을 그리고 칼날 위에 선 샤먼처럼 자신의 존재를 걸고 투쟁한다는 것. 사람들은 그것을 “아주 커다란 압정”으로 오독하면서 시래기를 말리겠지만 그와 무관하게 나는 나의 언어를 존재케 하겠다는 것. 이는 한 시인으로서 세계에 대한 절망과 동시에 나의 존재를 형성하고자 하는 하나의 고유한 욕망인 셈이다. 그것은 「도움받기」에서도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동물에겐 끝없는 온기가 필요한” 이 세계 속에서 “배의 어둠에 관해 상상”하면서 그 어떤 언어도 손쉽고 자유롭게 다루지 않겠다는 의지. 시인은 나의 절망 속에서 생성된 언어라는 날카로운 칼이 사실은 나 이상의 무언가라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배의 안쪽에 작은 배들이 살고 있다면. 단 하나의 배를 환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언어의 무한한 분열과 나누어짐을 오롯이 지켜보려는 자. 하여 ‘온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열기를 식히며’ 우리의 세계 속에서 ‘초파리가 몰려드는 무른 배’이자 썩어가는 자로서 기어이 존재하겠다는 욕망. 이 역시도 세계를 철저하게 부정하면서 동시에 나의 기묘한 고유성만을 긍정하고 탐구하려는 시인의 존재방식일 것이다. 유키는 미움받아도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만 있다면 여기가 지옥이래도 두렵지 않았다 원래 지옥 같은 거 두려워한 적도 없긴 하지만 유키는 파랗다 선생님, 이게 병이 하는 생각이라면서요 그럼 병이 없어진 나는 뭐가 될 수 있어요? 유키는 유키를 긍정할 수 없고 건강에 있어선 모든 방면으로 분주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게으르고 증상이란 건 너무 무섭고 무서움이 커지면 유키는 축소되고 파란 가슴만이 자기를 키운다고 믿고 헛것 같은 사랑에 빠져 즐겁다가도 반투명한 창을 통해 흐물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는 한 걸음, 두 걸음 물러나다 보니 걷잡을 수 없이 멀리 와버린 유키는 정말이지 파랗다 의지도 없이 여기 머무르고 있다 가깝게 사랑하며 - 백아온, 「사랑을 담아, 유키가」, 부분 백아온 시인의 시에서 느껴지는 바를 말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정말이지 파랗다’라는 것에 대한 간절한 욕망이다. 그러나 이것을 일반적인 이성애적 ‘사랑’으로 이해할 필요는 당연히 없겠다. 왜냐하면 시인이 “우리는 자기 파괴적인 사람들이라서 자기 파괴적인 유키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기파괴’적인 기묘하고도 이해되기 어려운 유키의 사랑은 어떤 측면에서 시인 자신의 존재를 의미한다고 해야 한다. 즉 “유키는 자기가 사람으로 태어나 딱 하나 재능이 있다면/ 그건 아무나 사랑해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모두들 사랑해요”라는 문장은 가리키는 바는 유의미하다. ‘사람으로서 지니는 딱 하나의 재능이 아무나 사랑해버리는 일’이라는 유키는 말하자면 일종의 시인됨이란 존재가 아닐까. 나 이외의 다른 모든 타자들이자 언어의 심연에 가닿고자 하는 사랑의 욕망을 지닌 고유한 형상으로서. 시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욕망은 정상적인 세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저 무의미하고 ‘병든’ 존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계는 말하자면 이해될 수 없는 유키를 규정하려고만 한다. ‘평생 가볍고 간단해지길 바라는’ 유키의 존재는 그저 “발직한 여자애”로서만 판단될 뿐. 그 세계의 존재방식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자가 유키에 대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심리치료사일 것이다. 달팽이에 대해 ‘눈이 붉어지고 마음이 아프며 지금 몹시 슬프군요 그랬다고 달팽이를 밟으면 됩니까?’라고 질문하는 자. 그리하여 이 ‘병든’ 유키를 “유키씨 정말 끔찍한 사람이군요”라면서 규정하고 치료하여 정상화시키려는 자. 따라서 유키의 시선이 이러한 정상적이고도 당연한 세계 바깥을 향해 있다는 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만일 이 정상성으로부터 단 하나의 예외조차 없는 ‘여기’가 “지옥”이라면. 우리의 ‘여기’가 타자이자 언어의 심연이 무엇인지조차 인식할 필요조차 없고 인식하려는 생각조차 없는 플랫한 세계라면. 유키는 ‘정말이지 파랗다’는 자신만의 고유한 사랑이자 욕망을 통해 우리들의 무의미한 세계를 거부할 것이다. “원래 지옥 같은 거 두려워한 적도 없”으며 “그럼 병이 없어진 나는 뭐가 될 수 있어요?”라고 천진난만하게 묻는 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모두가 이 플랫한 지옥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 기억해두자. 그 지배하에서 “유키는 유키를 긍정할 수 없고/ (…)/ 무서움이 커지면 유키는 축소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적으로 “파란 가슴만이 자기를 키운다고 믿고/ 헛것 같은 사랑에 빠져 즐”거울 존재일 따름이다. 오직 ‘파란 가슴’만을 믿으며 ‘헛것 같은 사랑’에 빠져 즐거울 수 있는 자. 우리의 정상적이고도 당연한 “반투명한 창을 통해 흐물거리는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이탈해 있는 자. 그리하여 ‘걷잡을 수 없이 멀리 가버리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자. 이것이 시인이 유키라는 자신의 분신적 존재에게 근본적으로 부여하고 있는 진정한 욕망일 것이다. 먹고사니즘으로 통칭되는 정상적이고 당연한 ‘의지 없이’ 타자들과 언어들의 심연이란 욕망 속에서만 ‘머무르기’. 그렇다면 유키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인 것이 아닐까. 모든 보이지 않고 명명되지 않는 영역들을 “가깝게 사랑하”는 존재로서 말이다. 그러니 이 욕망하는 자는 ‘엉뚱한 슬픔이 차오르는’ 마음을 끝까지 지니려 할 것이다. ‘길고 게으른 문제’이자 어떻게든 ‘오래 살자’는 대화를 간직한 채. “언젠가 온 세상의 슬픔을 다 껴안으며 죽”기를 진정으로 원하고 욕망한다는 것. 들리지 않는 “거대한 지구의 울음”을 듣고 “엉뚱한 슬픔”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며 그 “울음의 밑바닥에서는 하나의 지층”을 기어이 만들어내려는 존재. 그런 시적인 인간의 형상이란 “상자를 열면 단숨에 사라질 것 같”은 존재들을 소중히 품으면서 이 타자이자 언어의 심연에게 “한 움쿰 포도 씨 뿌리고/죽지마 /목소리를 보태어 주”(「자처하는 사람」)는 간절한 욕망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는 시인이 지닌 기묘하고도 고유한 사랑의 본질적 형상이기도 하다. 김사라 시인의 시에서 느껴지는 난폭한 언어의 양상과 그 이면에 느껴지는 멜랑콜리의 감각은 강렬하다. 이 위력적인 언어의 형상은 언어의 표면이자 지시이며 의미와 별다른 상관이 없다는 점 역시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 고유한 언어의 형상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시의 언어에 접근할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언어의 파괴적이고 분열적으로 보이는 양태 그 자체가 아니다. 즉 “나는 제대로 말하고 싶고, 도저히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ainsi soit – ELLE」)라는 찢어진 육체이자 모순적 형상들이 구축하는 미로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를 따져보는 것이 핵심적이다. 왜 시인은 시적인 것을 위해 “가슴이 다시 뛰게 된다면 이번엔 정말 찔러 죽이는 수밖에 없는 거겠지”라는 기묘한 알레고리적 언어를 구축하려 하는 것일까. (…) 당신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고상하군. 다리 사이로 끊어진 기타줄 소리가 울려. 우울한 미나. 가난한 미나. 싸우지 않았던 미나. 믿을 수 없다. 그는 연필로 칼 깎는 법을 알려주었다. 보랏빛 나사와 재단된 나무들이 가득했던 곳. 손으로 쥐는 것부터 배웠다. 부동산에 연락해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오후에는 봤던 것 중 가장 더러운 집을 보았고 거기 살던 여자는 반갑게 문을 열어주었네. 그녀는 방 가운데에 달콤한 간식이 든 멋진 상자를 가지고 있었고 내 손이 그쪽을 향할 때마다 자기 머리칼을 두 손으로 쥐어뜯었다. 줄 때까지 기다려. 여자의 뱃속에서 미끼가 쿵쾅대며 숨을 쉬었다. 자두만 한 동공을 벌렁대면서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었지. 이유 없이 슬픈 밤을 보낸 난쟁이를 위한 철제문. 신고하지 않은 여름이 있었다. 일을 마치면 매일 같은 곳으로 국수를 먹으러 갔지. 그런 옷을 입고. 그런 머리를 하고. 혼자 맨드라니 줄을 서다 안으로 들어가 등을 등지고 앉았다. 맛이 변해도 몇 번이나 더 믿어주었다. 그러는 동안 알던 맛의 국물이 간절해진 겨울이 왔어도. 징계가 결정되고 술을 몇 병 사고 검은색 깃털 목도리를 탁자 위에 풀어둔 날 그걸 고양이로 여겨 입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지르던 여자를 만났지. 난 눈을 꼭 감고. 정말이지. 그거면 됐어. 포근했던 교차로의 눈밭. 믿을 수 없다. 그 모든 일을 했던 게 나라는 사실을. 약속! 미나. 눈앞에서 사라져 줄게. 아아. 약속합니다. 다시는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배웅하러 나가는 내 다리를. 당신 머리보다 더러운 망치로 내려쳐 다 자란 가지처럼 늘어뜨려 놓았다. 믿을 수 없다. 대화가 끝났으면 살던 곳을 떠나야 하겠지. 난 살살 녹여 먹어도 악다구니를 써. 못쓰게 됐어. 지난밤이 낯부끄러워 울지도 못하고 멀거니 서 있는 저 애를 위해 얼굴을 뜯어버리고 있어. 이러다가 가슴이 다시 뛰게 된다면 이번엔 정말 찔러 죽이는 수밖에 없는 거겠지. - 김사라, 「기분파 미나 제이코」, 부분 이 시에서 우리가 이해해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시 속에 등장하는 표현처럼 “모든 일을 했던 게 나라는 사실”은 어떤 점에서 확연하다는 것. 즉 이 시속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들이 또한 시인이며 시인의 욕망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그렇게 본다면 폭력적으로 보이는 시인의 언어가 공격하는 것은 자기 자신 속에 내재된 모순성 그 자체이며 동시에 시인의 ‘나쁜 행실’을 비난하는 남성들이 구축한 우리의 세계이기도 하다. 요컨대 시인의 존재는 ‘나쁜 행실’을 행하며 “나도 모르게 새 생각에 잠”길 수 있어야 하는 기묘하게 슬프며 그렇기에 고독한 자이다. 이 세계가 보려 하지 않고 알고자 하는 생각조차 없는 “버러지 같은 고통”의 존재를 묻고 기억하며 떠올리며 자신의 육체로 받아들이려는 자. 그 고통 속에서 모순되고도 찢겨져 있으며 웅얼거리는 발화들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우선 확인해보자. “미나. 어째서 입 맞출 때 날 보지 않지?”라고 말하는 세계의 시선이 얼마나 당연하고도 폭력적인가를. ‘살아 있는게 너무 징그러운’ 것과 같은 폭력의 정상성과 당연함. 그러한 세계의 영역 속에 놓여있는 나의 존재는 말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고’ 널부러져 있다. “따가워. 따가워. 숨이 차서 괴로워하며.” “깨물지 마!”라는 표현처럼 이 시속에서 등장하는 남성이자 세계의 언어는 단지 명령하려고만 한다. 그러한 억압적인 규정과 판단의 결과란 “당신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고상하군.”이라는 비웃음과 더불어 자신이 듣지 못하는 “다리 사이로 끊어진 기타줄 소리가 울려”라는 이해할 수 없음이란 반응일 뿐. 그러니 ‘기분파’인 미나는 “우울한 미나. 가난한 미나. 싸우지 않았던 미나.”처럼 보일 것이다. 그들은 우울함과 가난함과 싸우지 않음의 이면 속에 무엇이 존재하는 것인가를 알려 하지 않는다. 동시에 더욱 문제인 부분은 이 남성이자 세계의 폭력성이 모순적이게도 내 안에 이미 새겨져 있으며 아주 철저하고 당연하게 작동하려는 하나의 질서이자 체계로 자리잡혀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시의 중간에 등장하는 “가장 더러운 집”의 여자를 고려해보자. 모순되고 찢겨져 있는 “나를 쳐다보려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이 여자는 또 다른 나이지만 동시에 남성과 세계에 침윤되어버린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명령한다. “자두만 한 동공을 벌렁대면서” 그리고 “줄 때까지 기다려”라고 말하는 또 다른 나. 이 분열된 나들의 모습은 유의미하다. 왜냐하면 이 또 다른 나의 존재의 형상은 남성이자 세계의 규칙이자 법칙이 마치 공기처럼 당연하게 우리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타자이지만 남성에 의해 지배받으며 동시에 여성일 수밖에 없는 모순성의 기묘하고도 복합적인 중첩. 그러니 시인이 드러내려고 하는 “우울한 미나. 가난한 미나. 싸우지 않았던 미나.”의 입은 ‘찢어져’ 있을 수밖에. “그런 옷을 입고 그런 머리를 하고. 혼자 맨드라니 줄을 서다 안으로 들어가 등을 등지고 앉”아 있는 것처럼. 이러한 미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지점. 그것은 남성이자 세계에 침윤되어버린 또 다른 내가 아닌 진정한 나를 인식하는 것이다. 시인은 말한다. “검은색 깃털 목도리를 탁자 위에 풀어둔 날 그걸 고양이로 여겨 입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지르던 여자를 만났”다고 말이다. 당연하고도 정상적이며 억압됨을 모르는 그러한 현실 속의 내가 아니라 ‘입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지르는 여자’가 되려는 ‘나쁜 행실’이자 기이한 변신술적 욕망. 또 다른 나이자 진정한 내가 ‘교차’하는 길 위에서 “믿을 수 없다. 그 모든 일을 했던 게 나라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는 진실만이 오직 나를 고유하게 형성해내는 방법일 따름이다. 그 강력한 의지이자 나를 존재케 하는 결정적 욕망인 것. 이것만이 남성이자 세계의 존재를 파괴시킬 수 있다. “아아. 약속합니다. 다시는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라는 남성들이자 세계를 가볍게 무시해버리면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대화가 끝났으면 살던 곳을 떠나야” 한다고. “지난밤이 낯부끄러워 울지도 못하고 멀거니 서 있는” 또 다른 나를 위해 무언가를 발화하기. 오직 그것만이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한다는 것. 보이지 않는 타자이자 억업된 모든 것을 위해 나의 언어가 존재해야 한다는 마음. 그 굳건한 언어의 욕망으로 인해 “가슴이 다시 뛰게 된다면 이번엔 정말” 남성들이자 세계인 그 당연한 모든 것들을 “이번엔 정말 찔러 죽이는 수밖에 없”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시인이 바라보는 우리들이자 남성들의 세계는 그저 ‘돼지 같은 바보들’이자 “술맛 떨어지는 계절”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세계 속에서 “도저히 말하고 싶지 않”기에 모든 것을 “제대로 말하고 싶”다는 일종의 모순적인 분노. “잘린 성기가 든 포르말린 유리병”처럼 박제되어버린 또 다른 나의 목소리를 진정으로 듣고 발화하려는 시적인 것에 대한 고유한 욕망. 그 의지를 알아챌 수 없는 남성이자 세계는 언제나 ‘소문이라는 소문’을 흩뿌리겠지만 그럼에도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으나 다가가니 수 천개로 갈라지고 있”는 무수한 나들의 발화들을 품어 안으며 ‘이토록 분명한 예감’을 감각하려는 자. 이것이 자신의 육체를 “당신 머리보다 더러운 망치로 내려쳐 다 자란 가지처럼 늘어뜨”리는 시인이 품고 있는 분열증적 언어의 파괴적 원천일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인식 바깥에서 ‘내가 보고 싶은 공동묘지 쓰레기통에 처박혀 딸기처럼 부푸는 죽은 꽃다발’(「ainsi soit – ELLE」)이란 언어의 심연이자 시적인 것은 알아듣지 못할 기묘한 목소리로 발화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들의 세계와 고유하게 무관하도록. 4. 단지 자유를 향한 욕망과 의지로서 앞서 지적해두었듯 지금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는 시인들에 대한 말들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 글은 그저 한 개인의 아주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독해일 뿐이니까. 그러나 한 가지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은 왜 쓰고자 하는가에 대한 젊은 시인들의 마음이었다. 고유하고도 기묘하여 그러하여 수수께끼와 같은 언어의 미궁을 만들어내려는 욕망의 원천. 언어의 표면이자 규정하고 판단하려는 모든 것들에 대한 투쟁. 우리의 당연하고도 정상적인 세계로부터 이탈하고 도래할 언어의 심연을 어떻게든 형성해나가야 한다는 의지. 그러니 우리는 시라는 규칙과 시인이란 이름과 정의와는 무관해야 한다. 그것들은 모두 시적인 것이자 시의 본질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에. 시적인 것이란 오직 언어의 표면을 정지시키고 파괴할 때 그 심연 속의 거대한 꿈틀거림과 함께 도래하게 된다는 점만은 ‘자명’해 보인다. 필요한 것은 규정과 판단이란 명령이 아닌 모든 방식으로 허용되어야 하는 자유로움이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엇일 따름이다. 단순한 허명이 아닌 시인됨이란 실존적 영역 속에서 이는 나이의 문제도 등단 여부와 시기의 문제도 어떤 위치에 내가 있는가의 문제도 아니다. 하여 쓸데없는 첨언을 굳이 덧붙여 보고 싶다. 언젠가 오래도록 눈길이 머물렀던 푸코의 문장을 말이다. “나는 당신들이 노리고 있는 그곳에 있지 않다. (…)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라. 나에게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으라고 요구하지도 말라. 이것이 나의 도덕이다. 이것이 내 신분증명서의 원칙이다. 쓴다는 것이 필요할 때,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지식의 고고학』) 그렇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오직 쓴다는 욕망이자 의지이며 그로부터 가능할 자유일 뿐이다. 시라고 부르는 이 기묘하고도 고유한 실존의 형식은 바로 그것을 위해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월간 현대시 김정현 2025년 등단 시인방성인 시인안수현 시인이솔 시인박연 시인백아온 시인김사라 시인 2025
방승호 건강한 삶의 기술 : 윤유나 시집, 『삶의 어떤 기술』, 남현지 시집,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건강한 삶의 기술 ―윤유나 시집, 『삶의 어떤 기술』, 창비, 2025. ―남현지 시집,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창비, 2024.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하나의 실천 방식으로 글쓰기를 시도한다. 글을 쓰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개별적인 ‘인간(Persona)’도 있지만 늘 일상 속에서 글쓰기를 실천하며 텍스트를 구현해 나가는 주체도 존재한다. 여기서 글을 쓰는 주체를 우리는 일반적으로 필자(Scribens)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필자의 글쓰기는 삶의 문제를 직면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글을 쓰는 행위는 삶과 유사성 관계를 유지하며 시간에 축적된 가치를 형상화하는 작업과 다름없다. 한 사람의 문제적 삶이 하나의 전기가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런데 바르트가 주목하는 글쓰기는 삶과 일체화된 결과물보다 끊임없는 변형과 분열 속에 파생되는 알레고리에 더 가깝다. 삶과 글을 온전히 일체화하지 않고 그 서사 이면을 건드리며 질서에 균열을 내는 과정이 바르트가 지향하는 ‘삶에 대한 글쓰기’인 셈이다. 윤유나의 『삶의 어떤 기술』(창비, 2025)은 바르트가 말하는 삶에 대한 글쓰기를 잘 보여 준다. 시인은 삶의 모습 그대로를 재현하기보다는 의미의 어긋남을 일으키며 그 이면의 문제를 드러내고자 한다. 화자가 “아침에는 냄새 맡고, 코가 맞는 거지?”(「매일 창가에 앉아 있어」)라고 말하며 통사에 어긋난 반응을 하거나 “글자 없는 바다를 날아다녔어요/ 이렇게 믿고 싶어요”(「닫힌 마음」)라고 말하며 비가시적인 현상을 신뢰하는 장면은, 그의 발화가 일체화된 삶의 모습을 직조하기보다 “물먹은 마음”(「그냥 바다」)처럼 풍경 이면의 사유를 말하는 데 쓰임을 보여 주는 증거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언어가 자아를 무의식 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하는 억압적 탈승화의 방식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시인은 시점과 목소리를 달리하는 방식으로 표면과 이면, 과거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동일성의 권력에 균열을 일으킨다. 지난밤 비가 쏟아졌다 연못 관리실에 유감을 표하고 친근함을 표방하는 문 앞에 서 있다 알 수 없구나 쫓겨난 금붕어들 신문의 사실들이 개미를 닮았구나 닫힌 창을 바라보며 창밖에서 신문지를 깔고 김밥을 먹는다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 먹을 때 내가 좀 처절한 것 같아 공원 모기가 발목을 초토화했다. ―「가족과 먹는 여름 김밥」 부분 이번 시집에는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본 순간들이 행간에 혼재해 있다. 만약 그의 시에 여러 느낌의 목소리가 함께 다가온다면 이러한 까닭에서다. 그렇다고 해서 다수의 화자가 동시에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인은 한 명의 화자가 말하는 시점과 각도를 달리하는 방식으로 시적 정황을 낯설게 하는가 하면, 때로는 경계가 불분명한 행간을 두고 독백과 고백을 섞어 가며 장면 속에 미묘한 정서적 움직임을 일으킨다. 이러한 방식은 무엇인가를 전경화(foregrounding)하지 않으면서도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발화와 장면들이 동등한 목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객체를 무조건적으로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다른 시각과 온도로 발화되는 언어가 윤유나의 시를 이끈다. “신문의 사실들이 개미를 닮았”다는 말은 종이에 새겨진 작은 시니피앙의 비유이면서 익숙한 대상을 곱씹어 낯설게 바라보려는 시인의 의도다. 화자는 창밖에서 김밥을 먹으며 창 안으로 비춰지는 자신의 과거 이미지(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때의 모습)를 객관화한다. 이는 창유리를 사이에 두고 현재의 내가 과거의 자신을 반추한다는 점에서 성찰적이지만, 이보다 돋보이는 것은 고백과 독백 사이를 오가는 화자의 목소리로 공간과 시간의 격차를 허무는 기술에 있다. 시인은 과거와 현재의 위계를 설정하지 않고 현재에서 과거를 들여다보거나 과거에서 다시 현재를 향해 발화를 이어 간다. 이렇게 “여기/ 저기”(「피를 뒤집어쓰다」)를 넘나들며 연대기적 시간 질서에 균열을 내는 화자의 목소리는 “사무실 커튼 너머로/ 사무실 난간 너머로”(「매일 창가에 앉아 있어」) 층층이 쌓이거나 혹은 흩어지며 행간을 채운다. 말하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해 주지 않는 건가. 그런 건 아니야. 나는 내 눈동자에 담겨 나를 바라보지 않는 바다를 보았다. 봉고차에 앉아 내 안의 차오른 감정에 만족하던 찰나 바다가 눈앞에 나타났다. 바다는 그냥 바다였다. 물이 들어오는 때의 바다였고 아직 갯벌인 바다였지만 바다는 그 어떤 바다도 아니었다. 바다는 그냥 바다구나. 의자에서 엉덩이를 살짝 떼 창밖의 바다를 더 멀리 바라보았다. 정말 몰랐어. 바다는 그냥 바다야. 그냥 거기에 있는 아무렇지 않은 바다야. ―「그냥 바다」 부분 언어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언어 언어 없는 언어 있고 먼 밭에 저 먼 바로 ―「고유 감각」 부분 언어는 시가 되기 위해 행과 연이라는 형식 안에 놓이지만 시적인 것은 그것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움직임에서 촉발한다. 주어진 의미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이 시적 언어의 잠재성이라면 윤유나는 정의하지 않음으로 선험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데 주력한다. 이러한 노력은 삶의 무게를 쉽게 단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언어가 지닌 무게를 덜어내어 기표에 자유를 주려는 시인의 의도이기도 하다. 이것이 윤유나 시의 또 다른 기술記述이다. 윤유나는 어떠한 대상을 개념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시를 쓴다. 「그냥 바다」에는 대상의 모습을 눈 안에 담는 화자와 그 화자를 다시 바라보는 윤리적 자아의 시선이 겹쳐 있다. 이러한 메타성은 대상을 특정한 개념으로 한정하지 않고 그것과 거리를 두며 언어가 발화된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이 경우 윤유나 시의 주체는 화자도, 대상도 아닌 그 둘을 사이에 두고 발화되는 그 시니피앙이 된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때로 표현이 맥락에서 이탈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는 오히려 화용론적 한계를 극복하고 언어 이면에 잠재된 여러 가지 심리적 양태들을 표현하는 기제가 된다. 이렇듯 시인이 말하는 “언어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언어”는 기의의 둘레에서 조금씩 벗어남으로 드러나는 기표를 가리킨다. 언어를 포장하여 희망을 말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고 ‘언어 없는 언어’가 되기 위한 방식으로 말하기. 이는 맥락에서 한 걸음 벗어난 모호한 시어를 배치하거나 그 배치로부터 다시 언어를 도치하는 ‘어떤 기술’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 비린/ 짐승/ 어린/ 비/ 냄새”(「맑은샘이비인후과」)라는 언어적 증상처럼 하나의 행에 하나의 시어가 둥둥 떠다니는 듯한, (형식주의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일종의 ‘앙장브망(enjambement)’의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무는 서 있기로 한 건가 인간을 도저히 미워할 수 없으니까 어젯밤 기록한 문자를 나열한다 기념이 지워진 자리에 숫자가 남아 있다 무지개 나비와 무지개 새가 무지개를 이루는 동네 세상을 미워할까 지금 달리고 있는 저 차가 인간을 치기 위해서 달리는 거라고 생각할까 ―「삶의 어떤 기술」 부분 그럼에도 이번 시집은 자신에 대한 시인의 기술임에는 분명하다. 발화와 형식의 모호함도 사실은 자신을 온전하게 바라보려는 시인의 노력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방식이 자신만이 스스로를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시인은 늘 자신 또한 어떠한 시점과 장소에 놓이는지에 따라 충분히 달리 보일 수 있음을 전제한다. 윤유나의 언어가 가리키는 곳에는 절대적 토대가 없다. 그저 언어가 쓰이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리고 시점과 목소리에 따라 달라지는 파토스의 연약함이 드러날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약함이 오히려 건강함에 다가서고는 한다. 일련의 특징은 때로 “나와 내가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긴 생머리, 민소매 티셔츠의」)가는 듯한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일상적인 것들을 계속해서 낯설게 하는 독백과 질문들은 기어코 정상적으로 비춰지는 세계의 (비정상적인) 증상을 수면 위로 가시화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미워할까”라는 짧은 독백에 담겨 있듯이, 윤유나의 「삶의 어떤 기술」은 자신을 향해 말하는 자신에 대한 기술이자 이러한 메타성으로 반사되는 세계에 대한 윤리적 자아의 기술이다. 이렇듯 윤유나의 독백은 자신에 대한 고백이면서 세계를 향한 질문이 된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비록 시인이 가진 건 연약하고 취약한 세계 속의 언어일지라도 윤유나는 자신의 목소리를 가장 낯설게 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킨다. 이러한 글쓰기는 현실과의 일체화된 기술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시인의 언어는 세계의 비정상성을 정상이라는 개념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기념이 지워진 자리에 숫자가 남아 있”는 것처럼 의미가 떠나간 자리에도 언어는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시인의 독백과 고백 사이로 ‘있음’과 ‘없음’의 아이러니가 펼쳐지는 ‘삶의 어떤 기술’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윤유나가 일관된 발화 방식에서 이탈하며 삶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면, 남현지는 일상의 모습을 알레고리하여 불편한 지점들을 다시 텍스트 바깥으로 꺼내 보이고자 한다. 남현지의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창비, 2025)은 시적 건강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시집이다. 여기서 ‘건강(athleticism)’은 신체적인 건전함을 함의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들뢰즈는 익히 문학적 건강에 대해 현실의 병든 구조를 직시하는 일로 비유한 바 있다. 이번 시집이 보여 주는 건강함은 바로 이러한 점에 닿아 있다. 그러므로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은, 사실 우리의 (건강하지 못한) 삶의 모습으로 말하는, 온 우주의 건강에 대한 바람에 더 가깝다.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여러 삶의 구조적 모순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가 하면 증식되는 불온한 감각들을 형상화하여 현실의 문제를 꼬집는다. 호수는 잘 묶여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건물처럼 고요하게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생각하면서 호수를 따라 걸었다 삼십 분 전에 본 사람이 다시 옆을 달리고 있다 ―「호수 공원」 부분 조용해진 방 안에서 이명이 시작되었다 창문을 열면 건물이 허물어지고 다시 지어지길 반복하면서 몇 년째 공사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이 무한한 빌라 ―「골목의 증식」 부분 시인이 구현하는 삶의 모습은 구체적인 공간성을 지닌다. 뒷산, 호수 공원, 동물원, 중앙공원, 산책로와 같이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장소가 이번 시집의 배경이 된다. 이렇듯 시인은 공공의 지점에서 포착되는 현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에 집중하는데, 이러한 시도는 현실에 잠재한 구조적 폭력을 은밀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설령 그곳이 자연성으로 가득한 공간일지라도 시인이 주목하는 그 이면에는 질서 속에 묶여 있는 현실의 모순이 잠재한다. 가령 「호수 공원」에서 “호수는 잘 묶여 있었다”라고 말하거나 「산책로」에서 “소속이 있다 증명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대목은 직조된 자연성 곁에 내포한 인위적 질서와 억압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렇듯 남현지는 일상성을 형상화하면서 동시에 그 이면의 모순을 들춰낸다. 마치 건강에는 늘 병듦이 도사리고 있음을 경고하려는 듯이 시인은 반복에 내재된 구조적 폭력을 역설한다. “거기서 들려오는 소음은 짐작할 수 있지만/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중앙공원」). 시인은 짐작 가능한 것이라도 인식하려 하지 않으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번 시집에서 남현지가 말하는 것이 정황보다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적 차원이라면 이러한 까닭에서다. 마치 이명처럼 끊임없이 우리의 귀를 괴롭히면서도 그 실체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증상과 같은 것. 그리고 이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만드는 멈추지 않는 외부의 자극들. 이러한 점에서 “몇 년째 공사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라는 말은 반복되는 인간 문명의 이기와 폭력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개인의 아픔을 무디게 하는 질서의 알레고리가 될 수 있기도 하다. 삶의 공간에 드리운 구조적 모순을 재현하는 방식은 이번 시집에서 청각 이미지와 더불어 선형적 이미지로도 드러난다. 불가피한 입장은 계약서에 있고 자연에는 직선이 없으며 이번 전시회는 생명이 테마라고 소중한 난이 푸른 화분을 가진 난이 휘어진 방을 나와서 일렬로 늘어선 책상에 앉아 곡선을 연습했다 곡선과 곡선의 복잡한 교차를 만들어 내는 모션의 생동감이 필요하다고 …(중략)… 상사에게 마트 전단지 만드는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정말 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물의 편에서 ―「곡선을 쓰지 않는 디자이너」 부분 “불가피한 입장은 계약서에 있”다는 말은 현실을 비추는 화자의 냉소이면서 계약서의 획일화된 형식 자체가 불가피한 현실을 대변한다는 단서다. 그러므로 직선 속에 곡선을 강조하는 모습은 획일화된 삶에서 벗어나려는 사유이기보다, 우리가 여전히 직선의 틀 안에 사로잡혀 있다는 구조적 아이러니다. 이 경우 선형 이미지는 직선화된 삶의 틀과 수단화된 곡선의 한계를 동시에 꼬집는 비유가 된다. 곡선을 바라지만 직선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는 “일렬로 늘어선 책상에 앉아/ 곡선을 연습”하는 모습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렇듯 남현지는 현실의 모순과 그 모순을 다시 메타적으로 감싸고 있는 이중적 아포리아를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마치 「실업자가 야구 보는 이야기」에서 현실의 삶은 바뀌지 않고 오로지 공만 자꾸자꾸 돌아오는 궤적의 비유처럼, 시인은 자연과 일상을 잠식한 대조적 삶의 모습을 통해 현실의 아이러니를 형상화하는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풍경 속에서 달리기 시작했다”라는 시인의 말은 증식되고 반복되는 삶의 모순 안에서 무엇이든 해 보겠다는 의도로 다시 읽힌다. 이번 시집의 건강함은 바로 이러한 시도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자연을 주체의 자리에 두는 생태 텍스트적 관습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자연과 인간이 상생하는 과정에서 병들어 있는 암흑 지점을 포착한다. 무뎌진 감각 속에 여전히 선험적인 폭력이 잠재함을 직시하는 냉소가 남현지 시를 이끄는 힘이다. 이것이 이번 시집에서 발견되는 건강한 시그널이라 할 수 있다면, 시인과 함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다시 시인의 시를 펼치고 함께 “들어가자 더 해 볼 수 있을 것이다”(「하나의 문만 열린다면」).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약속이 남아 있다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중략)… 이 무수한 우주에 계속해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쓰여 있다.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부분 시는 세계에 잔재하는 그 선험적인 것으로부터 일탈을 갈구한다. 시는 정의하지 않고 확신하지 않으며 한정하지 않고 답을 말하지 않는다. 시적인 것은 단지 어긋남을 전유하여 어긋남을 말할 뿐이다. 설령 그 모습이, 그 삶이 여전히 몇 마디의 언어로 무엇인가 해낼 수 있는 확정적 세계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인간은 늘 현실의 가능태로서 정의와 숫자 사이에서 한없이 고민하고 실패하지만, 시인은 그 삶의 허무와 소외 속에서 다시 그것을 비틀고 재현하고 증식하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이것이 이번 시집이 말하고자 하는 건강의 또 다른 의미 아닐까. 일상이 건강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강함으로 언젠가는 온 우주가 조금이라도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의 역설. 이 불가능해 보이는 문학의 아이러니와 함께 펼쳐지는 시적인 것의 향연. 로고스와 파토스 사이에서 펼쳐지는 두 시인의 에토스가 더 기대된다면 당신에게도 시적 건강함이 전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두 시인이 말하는 ‘건강한 삶의 기술’이다.

계간 시작 방승호 건강아렌트롤랑 바르트불온알레고리남현지윤유나 2025
이은란 백색 알레고리의 건축술 ― 『흰』

1. 흰색의 엑스터시  색채의 물질성은 다양한 감각적 요소와 함께 체험된다. 한강의 소설 『흰』(문학동네, 2016)에서 '안개', '진눈깨비', '서리', '눈송이', '눈보라', '만년설'은 물이라는 동일한 기원을 갖지만 각기 다른 감각적 실재로 다가온다. 위태롭게 부서지는 첫서리의 유약함, 육신을 압도하는 눈보라의 적대감, 원경의 만년설이 환기하는 신비로움은 눈(雪)이라는 추상적인 범주로 동일화할 수 없는 백색의 스펙트럼을 이룬다. 천천히 유동하며 새벽을 불투명하게 감싸는 안개의 움직임은 맹렬히 질주하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혹은 부유하듯이 낙하하는 눈송이의 속도와 선명하게 구별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금, 설탕, 모래, 쌀알, 흰 조약돌은 선연히 다른 맛과 감촉으로 피부에 닿아온다. 사물의 윤곽선을 빠져나온 흰색은 질감, 부피, 무게, 온도, 속도, 냄새, 소리와 같은 무수한 감각성질들과 결합한다. 감각의 총체로서 흰색은 '나'의 지각을 거치며 쉽게 언어화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atmosphere)'를 주조한다.  사물의 성질이 내재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현존을 만들어나가는 일, 독일의 미학자 게르노트 뵈메(Gernot Böhme)는 이를 '사물의 엑스터시(ecstasy)'라고 명명한 바 있다. 황홀경을 뜻하는 영단어 'ecstasy'는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외부로 향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έκστασις'를 어원으로 갖는다. 한강의 작품에서 흰색은 사물을 구성하는 일부를 넘어 '나'의 지각과 기억을 일깨우는 역할을 수행한다. 어둠 속 고요히 점멸하는 흰 불빛은 '나'로 하여금 유년의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어린 '나'는 작은 배에 올라 수천 마리의 은빛 멸치 떼가 튀어 오르는 장관을 목격한다. 이 눈부신 놀라움은 곧 "이태 뒤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1) 작은아버지의 웃음과 연결되며 서글픈 연민으로 전환된다. 그런데 한강에게서 흰색이 죽음과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날숨이 겨울 공기와 만나 하얀 입김으로 변할 때, 그것은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71)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외부의 찬 공기가 몸 안에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데워지고, '나'는 따뜻해진 공기를 대기에 불어넣는다. 하얗게 퍼져나가는 입김은 '살아있음'이라는 상태가 단독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몸의 내부와 외부가 부단히 뒤섞이는 과정임을 증명한다.  흰색의 물질성을 집요히 탐구하고 기록하는 작업은 '언니'에 대한 기억과 연관된다. 산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나'의 언니. 사진 한 장, 울음 한 점조차 세상에 남기지 못한 그녀는 오직 어머니의 이야기 안에서만 존재한다. 얇게 얼어붙은 초겨울의 서리, 하얀 달떡을 닮은 얼굴, 흰 배내옷과 강보는 언니의 기억을 구성하는 사물들이다. 다시 말해 흰색은 '나'가 죽은 언니를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감각적 실체인 것이다. 이 흰색은 그녀의 현존을 지극히 구체적인 방식으로 '나'에게 각인시킨다. 일곱 살의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 속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20)의 얼굴을 아직 찌지 않은 쌀 반죽의 형상으로 상상해본다. 희고 고운 가루가 묻어나는, 찰기 없이 보드라운 반죽의 표면, 손가락을 대면 지문이 고스란히 남을 것만 같은 섬세하고 연약한 피부, 달떡의 흰 빛깔이 덩어리진 감각의 생생함으로 몸에 육박해올수록 '나'는 "쇠에 눌린 것같이 명치가 답답해"(21)지는 고통을 겪는다. 흰색의 엑스터시는 실재와 허구 사이의 텅 빈 공간에 선명한 무늬를 남기며 부재하는 언니와 현실의 '나'를 연결한다. 2. 폐허를 증언하는 흰 무늬  작품의 제1장에서 '이 도시'로의 이동은 '나'가 언니를 회상하는 계기로 언급된다. 물론 소설에 도시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지만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곳", 그 처절한 투쟁의 대가로 "1944년 10월부터 육 개월여 동안"(27) 나치의 무자비한 보복 공습에 의해 초토화되었던 '이 도시'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임을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폐허화된 바르샤바는 현재 말끔히 복구되었으나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29)된 잔적(殘跡)은 과거의 참극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 폐허의 지층을 거니는 동안 '나'는 자신이 죽은 언니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중세에 지어진 성은 근대에 이르러 병원으로 바뀌었고, 전쟁으로 인해 붕괴된 병원은 미술관이 되었다. 파괴와 재건, 폭력과 저항의 역사가 누적된 '이 도시'처럼 '나'는 누군가의 죽음 위에 올린 작은 벽돌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언니는 '나'와 단절된 존재가 아닌,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29)일지도 모른다. 한강은 『흰』을 통해 "생명을 가지고 나아간다는 게 뭔지, 내가 누구 대신으로 이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질문도 더듬어보고 싶었"2)다고 밝힌 적이 있다. '나'가 언니의 죽음으로부터 탄생했으며, 그녀의 삶을 대신 이어가고 있다는 자각은 그녀가 시간을 거슬러 '나'의 삶에 틈입하는 이유가 된다. 어머니는 '나'를 낳기 전 두 번의 조산을 겪었다. 만약 "그 생명들이 무사히 고비를 넘어 삶 속으로 들어왔다면, 그후 삼 년이 흘러 내가, 다시 사 년이 흘러 남동생이 태어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117)이라는 사실은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37)인 '지금 여기'에 그녀를 불러내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제1장은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39)라는 '나'의 전언으로 끝을 맺는다. 이때 '나'가 언니에게 건네려는 '흰 것'은 나치에게 희생된 바르샤바 시민들을 애도하는 양초의 흰색과 중첩된다. 시민들을 총살했던 붉은 벽의 잔해, 그 잔혹한 학살의 현장 앞에서 고요히 타오르는 흰 심지와 뜨겁게 녹아내리는 촛농은 점차 소멸의 이미지로 번져나가면서 애도의 의미를 가시화한다. 불꽃 속에서 서서히 몸을 낮추고, 마침내 사라지는 흰 양초와 같이, 진정한 애도란 '나'의 소멸을 감내하며 타자에게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건네는 일일 것이다.  제2장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소설의 주어인 '나'와 언니의 자리를 맞바꾸며 시작된다. 그러나 '나'의 삶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과거를 애도하는 일이 가능한가. 어머니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언니의 삶을 어떻게 '지금 여기'의 구체적 현실로 이끌어올 수 있을 것인가. 「빛이 있는 쪽」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바르샤바 유태인 게토에서 친형을 잃은 한 남성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여섯 살 때 죽은 형의 목소리는 남성이 벨기에에 입양된 뒤에도 계속해서 찾아왔는데, 폴란드어를 배운 뒤에야 남성은 그것이 체포되기 직전에 형이 외쳤던 말임을 알게 되었다. 반면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맞은 '나'의 언니는 인간의 언어로 해독할 수 있는 말을 남길 수 없었다. 남성의 어린 형처럼 그녀도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나'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이 불확실성 속에서 '나'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어떤 감각과 막연한 감정 가운데, 모르는 사이 그이로부터 건너온 것들이 있었"(32)을지도 모른다는 점뿐이다. 이렇듯 한강의 소설은 애도의 (불)가능성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출발한다.  언니를 향한 (불)가능한 애도의 서사는 흰 사물들의 파편적 기록, 그리고 오래전 지구 반대편에서 폐허화되었던 '이 도시'의 슬픔을 헤아리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그런데 살아낸 적 없는 과거를 애도하려는 노력은 '나'가 그녀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흰 것'을 오히려 불투명하게 만들기도 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나'는 "당신에게 깨끗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잔혹함, 슬픔, 절망, 더러움, 고통보다 먼저, 당신에게만은 깨끗한 것을 먼저. 그러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118)라는 말로써 그러한 시도가 녹록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처음 '나'가 의도했던 '흰 것'은 무수한 사물들의 흰빛이 발현하는 엑스터시에 휘말리는 순간 순수와 애도라는 상징의 단일성에 자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안개」의 '나'는 도시를 하얗게 잠식한 안개를 보며 섬에 짙게 낀 안개를 보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안개는 '먼지 낀 마른 웅덩이'를 신비롭게 채색하고, 철조망 뒤에 도열한 소나무들을 "이승의 것 같지 않게 홀연"(24)한 형상으로 만든다. 왜곡과 망각을 함축한 흰빛은 「흰 도시」에 보다 심화되어 나타난다. "1945년 봄 미군의 항공기가 촬영한 이 도시의 영상"(27) 속 나치의 폭격이 휩쓴 바르샤바는 새하얀 눈이 덮은 풍경으로 보인다. 하지만 카메라가 근접할수록 도시는 흰색의 베일을 벗고 모든 것이 까맣게 전소된 폐허의 민낯을 소스라치게 드러낸다.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96)이라는 표현처럼, 언니의 흰 배내옷은 죽은 자를 염습할 때 입히는 수의로 변한다.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과 흰빛(blanc), 검음(black)과 불꽃(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79)듯이, 생명과 죽음, 기억과 망각이 복합된 흰색은 (불)가능한 애도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한강이 축조하는 백색의 알레고리는 망각으로 과거를 깨끗하게 지워내는 일이 불가능함을 암시한다. 『흰』의 초반부에서 '나'는 오래전 자신의 방을 흰 페인트로 덧칠했던 일을 꺼내놓는다. '나'가 새로 계약한 방의 철문에는 세입자 중 한 명이 날카로운 송곳으로 새겨놓은 '301'이라는 숫자가 지저분하게 남겨져 있다. '나'는 누군가가 '살아있음'을 비명처럼 새겨놓은 숫자, 그 악착 같은 표식을 페인트로 지워보지만 흐려진 칠은 이내 붓 자국을 드러내고 만다. 페인트를 덧칠할수록 뚜렷하게 돌출되는 자국은 “모든 기호는 심지어 부재를 지시할 때조차 존재를 드러낸다”3)는 유디트 샬란스키(Judith Schalansky)의 언술과 조응한다. 파괴된 흔적을 걷어낸 도시에 폐허를 증언하는 무늬가 남아 있는 것처럼, 붓이 남긴 하얀 흔적은 이 밑에 무언가가 잔존해 있음을, 그리고 누군가가 이를 덮으려 했음을 은밀하게 알려주는 기호로 작용한다. 은폐와 흔적의 아이러니한 공존을 조우하는 동안 '나'는 "수백 개의 깃털을 펼친 것처럼 천천히 낙하하는 눈송이"(15)를 멍하니 응시한다. 해설(解雪)이 예정되어 있는 백색 허공을 바라본 '나'는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10) 깨닫는다.  흰색의 알레고리가 환기하는 애도의 (불)가능성은 무의미함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과거의 유실은 아무도 그것을 찾거나 기억하지 않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총살된 자들을 애도하는 바르샤바의 붉은 벽 앞에서 '나'는 불현듯 우리가 과거를 잃어버렸음을 자각한다. 이곳의 시민들은 새하얀 외벽을 두른 기념관에 과거를 유폐시키는 대신, 거리 한복판에 흰 양초를 밝혀 죽은 이의 넋을 기꺼이 자신들의 삶 옆에 둔다. "그녀는 자신이 두고 온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했고,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 넋들이 이곳에서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기려질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고국이 단 한 번도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08~109)라는 대목에 언급되듯이, 우리의 '고국'이 (불)가능한 애도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제주 4·3,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비극의 애도에 깊이 천착해왔던 작가의 문제의식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너무나 참혹하기에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치스럽고 나약한 역사라는 이유로 우리는 침묵해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한강에게 애도란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108) 강인한 의지로부터 온다. 애도는 어두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삶 밑에 파묻힌 폐허를 발굴하여 그들이 겨누었던 칼끝과 총구를 부끄러움으로 되돌려주는 일이다. 3. 흰빛의 아카이브  『흰』이 출간된 직후인 2016년 6월, 한강은 차미혜 영상작가와 함께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스페이스오뉴월에서 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었다. "의식하지는 않아도 우리 안에 있는 것, 이름 지어 부를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보편적 감정, 감각에 대한 이야기"4)라는 주제로 기획된 전시회의 준비는 한강이 『흰』을 집필하던 시기에 진행되었다. 이 전시회에는 최진혁 작가가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 , , , 을 편집한 약 15분 남짓5)의 영상도 전시되었다. 『흰』 초판본에는 차미혜 작가의 사진이, 2018년 간행된 제2판에는 최진혁 작가의 영상에서 발췌한 여섯 장의 흑백사진이 실려 있다. 데보라 스미스(Deborah Smith)가 번역한 영문판 『The White book』(GRANTA, 2024)에는 일곱 장의 흑백사진이 삽입되었는데, 한국판에 담긴 것보다 크게 작업된 사진들 역시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를 기록한 것이다. 이렇듯 작가의 글쓰기를 퍼포먼스로 옮기고 이를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매체의 변화 과정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점은 애도와 기억, 그리고 기록의 문제를 다시금 들여다보게 한다.  퍼포먼스 아트는 소도구와 무대, 수행자의 컨디션, 관객의 반응, 심지어는 장소의 냄새, 조명, 날씨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를 영상으로 기록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재현하기란 불가능하다. 더욱이 책이라는 매체의 물질성은 퍼포먼스와 영상이 촉발하는 재현의 문제를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흰』의 제2판에 수록된 여섯 장의 흑백사진은 책의 매체적 한계를 뛰어넘어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를 재현한다. 이들은 텍스트보다는 분명 '사실적으로' 다가오지만 퍼포먼스를 영상보다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치밀한 사유와 퇴고를 거친 텍스트에 비하면 퍼포먼스와 영상은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한 우연의 산물에 가깝다. 영상 속 무수한 이미지 중 단 하나만을 낚아챈 사진은 그러한 우연성이 극대화된 예술의 한 형식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사진은 퍼포먼스의 일회성을 순간에 고정함으로써 더 오래, 더 널리 유포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사진에 퍼포먼스와 관련된 어떠한 캡션이나 단서도 덧붙이지 않았다. 우리는 모호하고 파편적인 이미지 속 배내옷, 깃털, 종이와 같은 흰 오브제를 통해 사진이 언니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따라서 작품 속 사진은 일시적인 것을 영원성 속에 붙들어 매려는 욕망과, 그 욕망의 덧없음을 동시에 함축한 알레고리적 이미지다.  흥미로운 것은 영문판 『The White book』에 수록된 일곱 장의 사진이 한강의 퍼포먼스를 보다 직접적으로 지시한다는 점이다. 한강의 검은 실루엣이나 손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들 사진은 퍼포먼스의 수행을 비교적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면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제2판의 사진들은 한층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호함 속에서 모종의 이야기를 건넨다. 제2판에 실린 첫 사진은 배경과 오브제가 모두 하얗게 인쇄된 탓에 무엇을 찍은 것인지 식별하기가 어렵다. 독자는 이어지는 사진들에 제시된 손의 명암과 검은 옷을 입은 작가의 모습을 통해 오브제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된다. '흰 깃털과 종이 → 종이 위에 깃털을 수놓는 손 →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작가의 몸'으로 점차 확대되는 세 개의 장면은 시가 쓰인 종이 위에 흰 깃털을 덮는 퍼포먼스인 을 기록한 것이다.6) 지면 전체를 메운 네 번째 사진에는 활짝 펼친 배내옷이, 마지막 두 장의 사진에는 각각 흰 천을 꿰매는 손과 의자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작가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는 죽은 언니의 배내옷을 짓는 퍼포먼스인 을 담고 있다. 부재한 언니의 삶을 상상하고 기록하는 일이 (불)가능한 애도임을 고려한다면, 텍스트를 깃털로 덮는 퍼포먼스는 기록의 불가능성에 대한 재현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배내옷은 결여와 불확실성으로 이뤄진 애도의 결과물이자, 그러한 공허함의 과정을 뚫고 탄생한 하나의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의 알레고리는 과거의 파편이면서 동시에 과거를 초과한다. 모호함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말을 거는 이미지들의 절합(articulation)은 재현의 진실성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연동되어 있다. 피와 재로 가득 찬 끔찍한 이미지가 과연 실제에 더 가까운가? 이미지의 참혹성은 언제든 왜곡될 수 있고, 공포나 혐오를 유발해 접근을 막기도 한다. 더군다나 그것이 '부재하는 것'을 현시해야 한다면? 한강이 포착하는 재현의 (불)가능성은 진실과 망각, 아름다움과 처참함을 너무도 쉽게 오가는 이미지의 기만성에 기인한다. 1945년 미군 항공기가 바르샤바를 촬영한 영상에서 순백의 환영이 폐허로 전환되는 섬뜩한 순간은 그동안 '사실적 재현'을 담당해온 카메라와 눈(眼)의 역량을 의심하게 한다. 때때로 예술은 그 섬뜩함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소금」이라는 글에는 '나'가 다친 손가락으로 소금을 집었을 때의 고통과 전시실에서 바라본 소금 언덕의 정경이 병치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썩지 못하게 하는 힘, 소독하고 낫게 하는"(66) 소금의 치유력은 열린 살갗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따갑게 스며들 때 비로소 발현된다. 반면 전시실의 관람객들은 의자에 유유히 앉아 소금 언덕에 원하는 만큼 맨발을 올려놓는다. 어둠 속 눈부시게 빛나는 소금 언덕의 아름다움은 '곱게 아문' 두 발로만 누릴 수 있기에 기만적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감각할 수 있는 특권은 고통에서 비껴난 자에게만 주어진다.  『흰』의 파편적 이미지들은 사건의 '총체적 진실'을 구성하는 내러티브의 명징함에 저항한다. 소설을 여는 첫 장에서 문득 '나'를 찾아오는 몸의 고통은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와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11)에 비유된다. 백색 이미지들이 연대기적인 시간의 흐름을 베어내고 단숨에 과거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강에게서 시간은 부단히 갱신되고 돌출하며 융기하는 아나크로니즘적인 것이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의 표현을 빌리면 이 아나크로니즘은 불가지적이고 비가역적인 시간을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치인 것이다. '그녀'의 기록, '이 도시'의 역사, '흰 것'의 엑스터시는 유년의 기억과 기억 이전의 과거를 거슬러 현재를 끊임없이 재구축한다. 그러므로 시간의 흐름은 과거의 망실을 변명하지 못한다. 나는 이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 『흰』이 쓰인 것이라 여긴다. 한강은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81)라는 언술로써 이를 재확인시킨다. 4.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은 존재하는가  하얀 '배내옷'을 펼친 손과 검은 옷에 묻은 흰 실밥들.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 을 담은 세 장의 사진은 『흰』이 죽은 언니뿐만 아니라 아기를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를 애도하는 작품임을 암시한다. 어머니의 입말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언니의 이야기에는 스물세 살의 어머니가 느꼈을 두려움이 짙게 깔려있다. 아기가 죽어가는 동안 산후의 통증을 온몸으로 견디며 홀로 배내옷을 지었을 '나'의 어린 어머니, 그가 언니의 이야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전히 그 어두운 기억의 하중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백지 위에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는 어머니의 절박한 속삭임을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133)라는 말로 바꾸어 적는다. 한강은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텍스트로 옮길 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아트를 통해 직접 몸으로 수행하며 죽은 언니와 어머니, '나'를 연결한다. 작가는 경험 이전의 과거를 체현함으로써 과거로부터 격리된 타자에서 그들의 고통 안에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이행한다. 마찬가지로 『흰』에 등장하는 '나'는 부재한 언니의 삶을 재현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어 그녀를 그 안에 직접 살아가게 한다. 텍스트는 허구와 부재를 의미하는 기호를 넘어 그 자체로 현실을 뒤바꾸고 재구성하는 수행성을 갖는다.  언니의 조각이 '나'에게 흘러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물음처럼, 언뜻 무관한 것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일들도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사이에 무언가를 남기지 않았을까. 비연관적인 것들의 연관성, 그것이 과거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작품에 기록된 '모든 흰' 것의 아카이브, 같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언니와 '나',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은 자를 향한 애도의 책임을 부여받게 된 지상의 모든 산 자들은 서로 유사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의 단수성은 복수를 지시하는 모든 기표를 초과하는 동시에 존재의 밑바탕에 잠재한 연대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연대의 가능성을, 한강은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어른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70)라는 문장으로 되묻는 것이 아닐까.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우리를 '우리'라는 말로 묶어내어 함께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믿음 속에서 흰색은 텅 빈 침묵과 공허의 색에서 벗어나 산 자들이 고통과 슬픔과 죽음을, 모든 과거를 불러내는 장소가 된다. 흰색은 시간의 흐름이 결코 소멸시킬 수 없는 부재의 흔적으로 가득 찬, 그리하여 부재 속에서 존재를 지속시키는 색이 된다. 1) 한강, 『흰』, 문학동네, 2021, 85쪽. 이하 본문에서는 작품의 쪽수를 명기함. 2) 한강·강수미·신형철, 「[대담]한강 소설의 미학적 층위-채식주의자에서 『흰』까지」, 『문학동네』 제23권3호, 2016. 3) 유디트 샬란스키,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소멸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들』, 박경희 역, 뮤진트리, 2022, 17쪽. 4) 노형석 기자, 「한강의 혼이 어린 8년 전 배내옷 퍼포먼스를 보라」, 『한겨레』, 2024.11.21.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1168572.html 5) 문소영 기자, 「글과 공명하는 한강 '퍼포먼스 아트'...그래서 더 큰 울림[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중앙선데이』, 2024.10.26,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7205 6) Sophie Bowman, "Walking Towards the Vanishing Point Cradling a Love of Life," Korean Literature Now Vol. 32(2016): 9.

계간 푸른사상 이은란 한강알레고리엑스터시수행성『흰』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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