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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신생 | 2024년 겨울호(제101호)

이야기-하기의 시학

최진석 문학평론

『건의 시학. 감응하는 시와 예술』(도서출판b, 2022) 『사건과 형식. 소설과 비평, 반시대적 글쓰기』(그린비, 2022) 『불가능성의 인문학. 휴머니즘 이후의 문화와 정치』(문학동네, 2020) 『감응의 정치학. 코뮨주의와 혁명』(그린비, 2019) 『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 미하일 바흐친과 생성의 사유』(그린비, 2017) 등을 썼고,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자음과모음, 2013) 『해체와 파괴. 현대철학자들과의 대담』(그린비, 2009) 등을 옮겼다.

1. 현실, 방법으로서의 문학


  현대 언어학의 주요 이론가 중 하나로 꼽히는 로만 야콥슨은 현대 문학이론의 창시자 명부에도 이름이 올려져 있다. 20세기 초엽 등장한 러시아 형식주의는 그가 참여했던 시학과 문학 이론 학파로서, 어떻게 시문학이 고유의 예술적 가치를 확보할 수 있는지 묻고 답하려 했던 집단이었다.1) 야콥슨과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의 예술적 가치가 언어적 형식을 통해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근대 문학이 개시된 이래 작품의 이념적 내용이 예술적 가치를 자연스레 담보하리라는 통념에 대한 도전이었다.

  20세기 비평의 문제틀을 뒤바꾼 러시아 형식주의의 문제의식은 예술적 가치의 핵심이 ‘현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현하는 방법’에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에 따르면 작가든 비평가든 현실이라는 관념에 맹목적인 우월성을 부여한 나머지 도대체 현실이 어떻게 문학적으로 재현되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가장 문제적인 것은 19세기의 특정 사조가 거의 독점해온 ‘리얼리즘’ 즉 ‘사실주의’라는 용어였다. 최대한의 개연성을 추구하여 현실을 가장 충실하게 전달하는 사조라는 사실주의의 일반적 정의는 근본적인 애매성에 봉착해 있었다.2) 무엇이 문제였을까?

  현실에 대한 충실성, 혹은 ‘그럴듯함’이라는 개연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정의된다. 첫째, 무엇을 현실이라 믿고 재현하는가, 라는 질문은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란 무엇인가에 관한 물음을 함축한다. 모든 현실은 주체로서의 작가가 마주치고 형상화하는 가운데 조형되는 대상이니 근본적으로 작가에 의해 지향된 현실, 즉 특정한 입장과 태도로부터 연유한 세계일 수밖에 없다. 둘째, 재현된 현실을 개연적이라고 판단하는 수용자의 입장도 관건이다. 수용자로서 독자가 작품을 읽을 때, 그는 작가가 재현한 현실의 진실성에 관해 판단해야 한다. 작품의 의미는 작가와 독자, 주체와 수용자의 두 시선이 마주치는 곳에서 성립한다. 이때 두 시선의 일치는 선험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개연성이 작가 입장에서는 현실에 대한 자신의 재현 방식을 가리킨다면, 독자 입장에서 그것은 자기 경험을 통해 실증되는 적합성 여부를 뜻한다. 두 시선의 교차점 어딘가에서 현실은 ‘발생’하며, 개연성은 두 시선이 교차하며 만들어 내는 규범적 결과이다. 요컨대 현실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구성의 효과를 말한다.

  ‘현실’이 일정한 규범의 효과라는 말은 ‘재현’ 역시 자연적이거나 선험적인 확실성을 담지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방법이 바뀌면 조건도 바뀌고, 현실은 다르게 구성된다. 따라서 개연성은 한편으로 규범의 준수에 대한 ‘법보존적 폭력’으로 작동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규범의 외부를 향한 ‘법정립적 폭력’으로 나아간다.3) 전자는 우리가 작품을 ‘사실주의적’으로 인지하는 규범의 조건(코드)을 강제하는 반면, 후자는 우리가 작품을 ‘무질서’로 지각하게 만드는 탈규범적 사건과 그 너머를 드러낸다. “혁신자는 어제까지만 해도 보지 못했던 것을 사물 속에서 발견하고, 지각에 새로운 형식을 부과한다.”4) 그렇게 지각에 새로운 비전(vision)을 제공하는 데서 ‘새로움’이 나타나며,5) ‘무질서’는 ‘리얼’한 것으로 동기화된다.6) 요컨대 예술의 혁신, 또는 혁명은 현실을 지각하는 방법 즉 비전의 창조에 값한다. 현실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현실적인 것인지는 예술가가 제시한 세계의 비전에 대해 수용자가 응답할 때 결정된다. ‘리얼한 것’으로서 세계는 창안된 현실의 비전에 다름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최고의 현실성을 가리키는 용어 ‘리얼리즘’은 19세기의 특정한 예술사조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예술가도 스스로를 ‘비현실주의자’라 자처하지 않고, 현실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거꾸로, 모든 예술가는 자신이 진정한 ‘리얼리스트’이고, 자신이 묘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리얼한’ 대상임을 주장한다. 그의 펜끝에 재현된 세계야말로 참된 현실이라는 뜻이다. 핵심은 어떤 방법으로 묘사된 세계가 현실성을 갖는가에 대한 답변, 곧 재현의 방법에 놓여 있다.



2. 이야기, 공동체의 조건


  모든 시대의 작가는 자신을 ‘리얼리스트’라 명명한다. 특정 시대에 속한 작가는 자기의 묘사 방법이 (유일하게) ‘리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참되고 진실한 묘사가 문제라는 점은 우리 시대도 예외로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그럼, 지금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방법에 대한 물음과 불가결하게 이어진 이 질문은 답변을 강요한다. 하지만 이를 우리 시대의 정체성이나 본질에 대한 정의와 곧장 연결하지는 말자. 그런 대답은 가능하지도 않고 부질없을 뿐이다. 한 시대를 보편적으로 대리하는 관념이나 의미는 없다. 다만 우리는 이 시대를 관류하는 특정한 분위기, 무의식적 욕망이나 집합적 감응에 대해 말할 따름이다.

  거대 서사, 즉 한 시대를 초월적으로 장악하는 이념이 비판의 도마에 오른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근대로 대표되는 거대 이념의 시대는 과학적 지식이라는 상징적 매개를 통해 이 세계에 일관성의 틀을 도입했다. 어떤 지식이 ‘과학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실험 가능하고 반복 가능하며, 객관성을 실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세계에 대한 지식을 과학적인 것과 과학적이지 않은 것으로 분류하는 기준을 제공하는 기술이 등장했다는 말이고, 그로써 해당 사회를 지배하는 통치성이 확립된다.7) 그런 ‘일관성의 틀’은 예술의 영역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가령 근대 회화의 표준적 모델을 마련한 투시법은 묘사 대상을 마음속에 상상한 격자틀에 집어넣고 분할·배치함으로써 ‘있는 그대로’ 재현하면서 성립했다.8) 투시점을 중심으로 모든 대상은 특정한 비례관계를 맺음으로써 객관성을 확보하고, 누구라도 이 틀을 공유할 수 있다면 그 작품은 ‘합리적(과학적)’ 지식으로 인정받는다.

  문학의 역사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을 문자적 질서에 담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상호 무관하게 벌어지는 숱한 사태들을 낱개의 말뭉치로 열거한 결과를 문학작품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근대 이전부터 이야기(narrative)의 형식을 통해 (‘시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소설적인 것’은 항상 존재해 왔다.9) 문제는 그 많은 이야기-조각을 한데 엮는 틀을 얼마나 총체적이고 일관적으로 주조해 내는가에 달려 있었다. 무작위성의 묘사를 넘어서, 일련의 인과적 연쇄, 그리고 통일적으로 완결된 서사를 만드는 것이 근대 문학의 과제였던 것이다.10) 비록 19세기에 접어들며 더 이상 보편성 자체가 아니라 전형적인 동시에 개성적인 것을 재현의 목표로 삼게 되었을지라도, 세계의 전부를 묘사하되 세부의 우연성만은 기필코 봉쇄해야 한다는 데서 과학과 접목된 문학의 리얼리즘이 근거했다는 점은 거대 서사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11)

  과학이 일관성의 틀을 형성하는 지위를 상실함으로써, 과학 바깥의 모든 문화적 영역이 독립성과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 시대가 ‘포스트모던’이다. 이 단어가 지금 얼마나 유효한지 우리는 논쟁할 여유가 없다. 다만, 포스트모던이 모던의 연장선에서만 사유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12) 모던 시대의 거대 서사는 미시 서사(petit récits)로 분해되고, 각각의 미시 서사는 저마다 자신의 정당성 담론으로 기능하게 되었음을 밝혀 두자. 핵심은 작건 크건 서사 자체의 형식적 기능, 즉 규범성의 형성에 있다. 모던 시대에 그러했듯, 모던 이후의 시대에서도 서사는 공동체의 의사소통을 가동시키는 조건으로 작동하고, 해당 공동체 자체를 정당화한다.13) 쉽게 말해, 하나의 공동체가 구성원들의 사유와 행동을 합당한 것으로 공리화하고, 그에 정당성을 보장함으로써 공동체의 지속과 재생산을 촉진하는 것이 바로 서사의 형식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서사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은, 현재 우리 시대가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규범화하는 형식에 대한 물음이자 답변과 같다.

근대 문학사에 비추어, 문학이 이 시대의 대표적 표상 형식이자 언술 형식의 지위를 잃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서사를 주된 표현적 양식으로 삼는 문학의 기초 존재론적 지위는 여전히 유효하다. 더구나 편집과 재현의 글쓰기 전략으로서 문학은 여전히 공동체의 규범성을 형성하고 정당화하는 데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이 점에서 문학은 현재의 공동체가 무엇을 자신의 표현적 양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시 또한 그와 같은 측면을 공유해왔다. 장르에 대한 교과서적 이론과 달리, 시는 소설과 다른 양식의 서사성을 보유하며 사회적 의사소통의 의미망을 형성해 왔다.14) 시적 서사는 소설적 서사와 다른 방식으로 직조되고 작동한다.

  이제 논의를 이끌어갈 핵심 주제에 거의 도달한 듯싶다. 시는 어떤 서사를 조직하는가? 시는 어떤 이야기를 형성하는가? 시적 서사는 무엇을 표현하는가? 최근 시 작품에서 서사적 경향의 우세라는 요소를 출발점 삼아, 시적 서사가 우리 시대를 형상화하는 모습을 살펴보자.



3. 서사, 세계상의 시적 전개


  작품을 구체적으로 읽기 전에, 우선 시적 서사에 관해 어느 정도 합의할 필요가 있다. 관행적으로 문학에 국한하여 이해된 서사(récit)는 특수하게 쓰여진 언어적 수단을 통해 실제적이거나 허구적 사건, 또는 일련의 사건들을 표현하는 행위를 말한다.15) 이 전통적 규정에 매달릴 때, 우리는 이야기하는 주체와 이야기되는 대상의 이분법에 고착되기 쉽상이며, 양자 사이에 위계를 놓곤 한다. 하지만 한 걸음만 더 나가본다면, 서사라는 형식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조건 즉 사건의 여러 관계를 반영할 뿐 아니라, 이야기하는 행위 자체를 반영한다. 우리의 주의를 끄는 곳이 여기다. 이 같은 반영은 서사의 행위와 형식이 현실과 연동되어 있고, 현실의 실제 양태를 형식적으로 포섭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요컨대, 서사는 이야기의 양식성과 더불어 시대 자체를 조건적으로 포함한다. 한편으로 서사는 시대를 반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서사는 시대를 창안한다. 특정하게 조건화된 세계의 형상화에 서사의 기능이 있다.

거대 서사가 몰락하며, 미시 서사들 곧 ‘작은 이야기들’이 이 세계를 채우게 되었으며, 그것들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이 자주 언명되었다. 국가와 민족, 사회처럼 거대한 집단의 이념과 가치 등에 천착하지 않는 시대는 개별화된 모두의 삶을 귀중하게 여긴다. 위인과 영웅의 일대기만큼이나 장삼이사의 일상도 귀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나아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까지 나름의 의미를 간직하는 고귀한 존재로 부각된다. 그러나 유일무이한 각자의 실존은 그 자체로 가시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한 서사 속에 장착될 때 존재하기 시작하며, 특정하게 가치화된다. 문제는 “세계에는 하나밖에 없는 것이 온 천지 길바닥에 무수하게 굴러다”닌다는 사실에 있다.16) 존재하는 모든 것이 황금처럼 빛난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빛나는 것으로 식별할 수 없을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모든 의미란 기실 무의미나 다름없고, 그 무엇도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니 존재가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은 동시에 이야기될 수 있어야 한다. 의미는 한정된 자원이며, 특정한 구조를 통해 무의미 가운데서 의미로서 구별된다. 보르헤스의 소설이 보여주듯,17) 모든 것을 인식하는 자는 아무것도 의미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

돌파구는 미시적인 것에 올려진 도덕적 무게추를 치우는 것, 현실을 방법적으로 바라보는 데 있다. 개별적인 것 자체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 자체가 사건들의 분절 불가능한 연쇄라 할 때, 유일무이한 사건의 순간은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처럼 의미 없는 사건들이 파편적으로 분산된 채 우리를 스쳐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 사건들에 의미가 부여되고 개별적인 모든 것마다 가치가 충전되는 것은 그 순간들이 서사를 통해 엮이고 있을 때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모아 세계 자체를 이해한다. [...] 다양한 이야기와 ‘화법’을 모아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해석하는 것이다. [...] 서사는 ‘절대로 벗을 수 없는 안경’ 같다.18)


  이야기를 통해 글쓰기를 형식화하는 것은, 특정한 굴절각과 색깔이 입혀진 안경을 쓰고 세계를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미시 서사 혹은 단편적인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안경으로서, 시가 이런 서사의 형식을 수용할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짚어보는 것은 각별한 경험이다. 요컨대 특정한 서사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이 시대의 시는 우리에게 발화하고 있다.

  최근의 시에 나타난 서사 형식은 다음 세 가지로 꼽아볼 만하다. 첫째, 시적 형식에 이야기를 삽입해 전개하는 방식. 환유적 서사의 산문 양식을 채택하되 운문의 형식성을 지킴으로써 혼합적 특성을 만들어 내는 것. 둘째, 각주와 설명적 기법을 동원해 서사를 구축하는 방식. 주석을 통해 인용이나 설명을 덧붙이는 일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최근 시의 각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것은 본문을 대체보충함으로써 서사적 세계관을 구축하는 데 사용되곤 한다. 셋째, 내용과 형식에서 산문적 글쓰기를 그대로 차용하고 운문의 양식은 최소화하는 방식. 전통적인 산문시와 유사하지만, 화법을 자유롭게 엮으면서 표현되는 세계상은 어떤 것인지 유심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 세 가지 방식이 과거의 시적 형식과 크게 다르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기교가 표현의 방식을 넘어서, 최근 시가 지향하는 세계상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 특징들을 논의해 보려 한다. 이는 새롭고 낯선 세계에 대한 ‘징후’이자 ‘경향’으로서의 표현적 형식에 관한 독해에 가깝다.


3-1. 환유와 전복되는 세계


  시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개인의 감정을 압축적인 표현 속에 담아내는 데 있다. 구체적으로, 서정시는 시인 본인을 투사한 화자의 정서를 은유나 직유 등을 동원해 드러내는 장르이다. 이때 은유는 상이한 대상들을 접붙이는 방법으로서 시적 표현의 대표적인 기법으로 각광받아 왔다. 은유는 순간적으로 강력하게 의미를 발화할 수 있으나, 행위의 사건적 연쇄를 낳는 데는 부적합하기에 서사적 구성에는 미흡하다고 간주되었다. 인접성에 근거한 환유적 서사가 산문 장르, 특히 소설에 주요하게 할당되었던 이유가 그에 있다. 그러나 서사시라는 분류 이외에도, 시 일반 또한 일정 정도 서사를 갖고 있으며, 여기서 환유는 적극적인 표현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특히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면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으로는 환유가 주축일 수밖에 없고, 이는 하나의 세계를 형상화하여 전시하는 방법이 된다.


가정주부로 살아온 자는
죽을 때도 주부로 죽는다

집안일에는 은퇴가 없으니까

내 꿈은 가정주부
사계절 일용직
시인은 비정규직이에요
저는 집이 없어요
재산도 없어요

저는 남편을 찾으러 여기 나왔어요

지금 가족은 너무 낡았어요

그러니까 내 꿈은

은퇴 없이 살고 있어요

말을 더 덧붙여야 할까요?19)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사에는 남성중심주의를 중심으로 구축된 가부장제가 놓여 있다. 남편에 대한 내조와 자식 양육을 통해 사회구성원 배출에 기여하는 데 여성의 목적을 설정하는 여성의 어떠한 개인적 성취나 의미도 부정한다. 평생을 주부로 헌신해야 하지만 “가정주부”는 “일용직”에 불과하며, “시인”이라는 예술적 성취는 “비정규직”으로 격하된다. “집”도 “재산”도 없다는 말은 여성이 시민사회의 일원이 아니라 남성 시민에 대한 부차적 위치만 차지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홈 스위트 홈”은 남성 가부장제가 이룬 근대 국가와 사회, 그것들을 지탱하는 하부 중추로서의 가족/가정이 기실 ‘다른 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에 불과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아빠는 늘 그랬던 것처럼 내 얼굴 앞에서 거칠게 거수했고, 모서리를 향해 발길질하겠다고, 겁을 줬다 단지 겁을 줬을 뿐인데내 펜은 부러졌고, 혀로
휘둘렸다

그날

나는 방 안에 꼼짝 않고 밤새 노안은 절대로 살필 수 없을 만한 크기의 글씨로 빈 바닥을 조용히 채웠다

살려주세요


  화자는 “노안”으로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작은 글씨로 “살려주세요”라는 원초적 비명을 쓸 수 있을 뿐이다. 자기 시를 널리 읽히고 싶은 시인의 꿈과는 정 반대되는 현실이 앞을 막아선 것이다. 통상적인 ‘시’의 정의로는 포착할 수 없는, 그럼에도 시라는 비실용적이고 비실제적인 글쓰기를 통해서만 삶의 진실은 표명된다. 이 작품에서 가부장제와 여성의 억압이라는 현실을 읽어내기 위해 특별한 훈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는 일상어를 자연스럽게 풀어내며 전진하고, 이어지는 시행들은 화자가 겪는 멸시와 폭력, 모멸감의 장면들을 연속적으로 전개해 보여준다. “홈 스위트 홈”이라는 제목에서 “가정주부”, “집안일”, “집”, “재산”, “남편” 등으로 이어지는 ‘아내’의 인접적 이미지와 “일용직”, “비정규직”의 이미지는 “시인”과 결합하며 기묘한 충돌을 빚어내고, “살려주세요”라는 어구에서 종결되며 여성이 경험하는 삶의 비참성을 강화한다.

  알다시피, 이 시는 2015년 이래 페미니즘 리부트를 계기로 터져나온 여성주의적 시문학의 큰 줄기에 속한 작품이다. 하나의 거대한 사회운동을 반영하고, 시대적 조류를 독해의 문맥으로 삼을 때 가장 적확하게 읽히는 이 작품은 환유적 서사를 통해 현재의 세계상을 폭로하고 이후에 도래할 세계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운문에 대해 기대할 법한 전통적인 형식을 취하긴 해도,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산문적 술어로 작성되어 있고, 그 의미론적 내용은 ‘지나간 시대’의 어두운 진실을 문제화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예기하는 것이다. 산문 특유의 자질구레한 묘사를 걷어낸 채 행과 연을 통해 화자의 독백을 잇거나 끊고, 그로써 격렬한 정서의 파토스를 연출한다는 점에서 시적 형식이 갖는 힘을 표현한다. 여성의 예속과 억압을 드러내는 문학작품은 많지만, 시적 서사가 갖는 고유함은 이러한 표현의 형식에 힘입은 것이다.

  삶의 다면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서사의 형식을 빌리는 것이 불가피하다. 전통 서정시가 갖는 압축적이고 간결한 생략의 특징과 달리, 환유를 바탕에 둔 서사는 현존하는 세계의 특정 국면을 설명하고 시적 형식을 통해 그 균열을 드러내는 데 적합하다. 우리 시대의 문학적 조류로서 소수성을 전면화하는 작품들, 특히 페미니즘 시문학의 문제의식을 드러낼 때 서사가 주요한 경향성으로 등장하는 이유도 그에 있을 듯하다.



3-2. 주석과 대체보충되는 세계


  주석은 학술적 글쓰기의 표준적 방법론으로서, 타인의 말을 인용하거나 자신의 설명 및 주장에 대한 근거를 부여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식이다. 간단히 말해, 주석은 논증을 위해 동원되는 설득의 방법이다. 따라서 창작 장르에서 주석을 다는 것은 흔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허구에 바탕을 둔 글쓰기로서 시와 소설은 무엇인가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표명을 통해 자기의 세계를 구성해 나가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환유적 연쇄를 이용해 서사를 구축하는 소설의 경우,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여 문단을 만들고, 장과 절을 직조함으로써 주석이 갖는 논증의 특성을 본문 중에 구현하게 된다. 즉, 수많은 개별 이야기 다발을 길게 엮어서 인물과 그를 둘러싼 인적이고 사회적인 환경, 나아가 시대사적 배경까지 묶어내고,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글쓰기가 소설인 것이다. 반면, 행과 연을 통해 단어와 어구를 잇고, 인물과 사건의 전체성이 아니라 특정한 장면을 구성해 전개하는 시적 서사에서 주석은 다르게 기능한다. 완성된 문장에서 빠진 부분들,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서술되지 않는 부분들을 보충적으로 이야기하고, 이로써 형상화된 세계상의 빈틈을 메우고 또 완성하는 것이 시에 나타나는 주석이다.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 앵무새를 키웠다. 앵무새가 나의 얼굴에 부리를 그었다. 총을 쐈다. 앵무새처럼 밝음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저, 태양에게. 다량의 수면제를 먹였다. 코뿔소처럼 밝음을 전투적으로 보여주는 저, 태양에게. 또, 실망이 나팔꽃 줄기처럼 뻗어 나간다. 이번에는, 눈물이 레몬처럼 달고 얼음처럼 따뜻하다. 내가 되기 위해 나를 따라했던 나는, 줄줄…… 잠시만요, 찬장에, 찬장에서…… 쌓아 놓았던 썩은 양파 같은…… 눈물이 깎은 손톱처럼…… 이를 어쩌나? 어떻게 해도 말끔하게 청소되지 않은 슬픔이 기진맥진한 채 천장 안쪽에 있는 포름알데히드 병을 꺼낸다. 잿빛으로 질질 떠다니는 살점이다. 실패의 모습이다. 코를 찌르는 본능이다. 정전이 되었던 신경이다. 내가 가장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오늘이 컷, 되어도 오늘인 이유를 물어보는 건 실패에게 “왜 충실하지 못했니?” 물어보는 것과 같지 않나?20)


  산문 형식으로 쓰여진 이 시는, 서술된 형태나 내용 자체로는 화자의 본의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 어렵다. “앵무새”는 반복되는 어떤 언표나 상황(“밝음”)을 뜻하는데, 대개 긍정을 표상하는 “태양”의 함의가 그것과 어떻게 연계되는지는 불분명하다. 후반부를 뒤덮는 “포름알데히드 병”과 “살점”, “실패”의 언표은 “죽음”과 결합함으로써 글 전체의 어두운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제목(“리스트 컷”)과 부제(“죽음에 대해 알아 갈수록 죽음과 나와의 거리를 직시하게 될 것”)는 이 작품의 주제가 자신을 향한 물음과 답변에 대한 치열한 요구임을 직감하게 만들지만, 본문 자체만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이런 본문의 불확실성을 보충하면서, 전반적인 주제를 보다 명료히 만들어주는 것이 첫 문장의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에 붙은 주석이다. 무려 두 페이지에 걸쳐 이어지는 주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 자살했다. “나와 함께 나라는 인간을 속속들이 파고들어 분석하고 마침내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도록 도와줄 만큼 한가한 사람은 없”으니까. 자살은 “아기”니까. 최근 고안한 자살 방법은 지금까지 썼던 방법 중 가장 마음에 든다. 칼이란 칼은 모두 꺼내 식탁에 올려 놓은 다음 천장 안쪽에 있는 포름알데히드 병을 꺼내 칼들 사이에 놓는다. 그리고, 본다. 나는 나의 살점이 떠다니는 포름알데히드 병을 보는 동안의 나는 “엄마의 자궁 속으로 도로 기어들어가”고 있는 중인 나다. “사산한 내일의 작은 기형아들이 옹기종기 누워 있는” 엄마의 자궁 속에 있다 보면 “기진맥진한 불면의 혈액이 혈관 속에 질질 기어다니고, 공기는 비로 탁해져 잿빛으로 변해 버리고, 길 건너에 사는 빌어먹을 난쟁이들은 죄다 몰려와 도끼며 송곳이며 끌 따위로 지붕을 퉁탕퉁탕 두들기고 있고, 타르의 지옥 같은 악취가 코를 찌”르는 상태가 되는데, 그 상태로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을 다시 재현”해 보면서 “버지니아 울프는 왜 자살했을까?” 생각한다. “사라 티즈데일을 비롯해 그 수많은 영민한 여성들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신경증 때문에? 그들의 글은 과연 깊은 본능적 욕구의 승화(아, 이 끔찍스런 단어)였던 것일까? 그 해답을 알 수만 있다면. 내가 삶의 목표를, 삶의 조건을 얼마나 높이 내걸어야 하는지 알아낼 수만 있다면!” 그러나 이번에도 해답을 찾지 못한 나는 “칼을 서투르게 들고 휘”두르며 “칼처럼, 몸을 돌릴 때마다, 칼을 중심으로 돌면서, 펄떡펄떡”거리다가, “펄떡펄떡” 떨어져 나가는 살점에 흠칫 놀라 칼을 떨어뜨려 버리고 만다. 또, 실패구나. 용의주도하지 못했기에 “실패 속에서도 더듬으며 열심히 파악해 보고자 하지만, 도체체 어쩌다”이렇게 되었을까? 자책하게 된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자살은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믿기에, 떨어져 나간 나의 살점을 포름알데히드 병에 넣으며 “내 평화와 온전함에 친절하게 굴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칼로 벤 상처에 더욱 충실”할 것임을 다짐한다. “지금까지 나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이미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버렸으니, 칼에 찔렸던 상처도 금욕한다 해서 더는 치료될 수 없”지 않겠는가?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 자살했다.”고 말했고, 당신은 그런 나를 『실비아 플라스에게 빠진 여자』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7)라고 치부하며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The Journals of Sylvia Plath)』를 옮겨 적는 나를 “이해 할 수 없다”고 “미쳤다”고 “제발 현실을 직시하라”고 “모욕을 가했”다. 나는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의 말을 “진실”이라고 “전적으로 믿게”되는 걸 어떻게 하느냐고 그러므로 그와 같은 방식으로 “흉측스런 징표와 흉터를 뺨에 달고 무덤에서 뛰쳐 나오는 일이 주는 감각적 매혹”으로 “죽음에 아주 가까이 다가갔”을 뿐이라고 어차피 “내일은 죽음으로 향한 또 하나의 하루”일 뿐이라고 말했고, 당신은 어떻게 “몽산가들이 꿈꾸는 것은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냐고 말했다. 당신이 나의 어머니처럼 나를 “수치”스럽게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나는 “뻔뻔스럽고 당돌”하게 자살할 것이다. “결국 이 세상은 남자들의 세상이라는 사실로 다시금 귀결”되고 “여자로 태어난 게 나의 끔찍스러운 비극”이기에, “페니스와 음낭이 아니라 가슴과 난소의 싹을 틔울 운명을 타고”나 “엄격한 관계 속에 갇혀” 버렸기에, “기껏 남의 정서를 맡아 관리해 주는 관리인이나 아기 보는 사람, 남자의 영혼과 육체와 자존심을 먹여 살리는 유모 노릇이나 해야” 하기에, 죽음에 대해 알아 갈수록 죽음과 나와의 거리를 직시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로 시작하는 주석의 첫 문장은 본문의 첫 문장과 같다. 어쩌면 본문과 주석이 상호 호환되는 두 세계를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주석의 글자 수가 본문보다 많으며, 더욱 구체적인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주석과 본문 모두 구조적으로 완성되거나 자족적인 전체를 이루지는 않고, 서로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읽힘으로써 전체적인 주제의식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21) 나아가, 이를 통해 ‘자기에 대한 물음을 위한 자기의 답변’이라는 정체성의 문제를 돌파해 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여성의 삶과 자기의식이 남성중심적 사회 속에서 오랫동안 억압되었고, 이는 사회적 진출이라는 외적 측면에 대해서나 자기 정체성 형성이라는 내적 측면에 대해서도 부정적 효과를 미쳤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남성주의적 서사는 남성이 스스로의 결단과 결의를 통해 주체화되었음을 선포했지만, 여성은 그 같은 질문에 답하기에는 부적합하고 미달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이 시는 “나에 대해 말하기”, 즉 여성의 자기 형성에 관한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이기 위해 쓰여졌다. 그에 대한 답변을 본문에서는 시적 형식을 통해 전경화했고, 주석을 통해서는 그것이 참조해야 할 사회‧역사적 맥락을 만들어 후경화했다. 본문과 주석은 각각 여전히 미완성과 불완전성에 머물러 있으나, 서로에게 섞여 들며 지향된 상태로 나아갈 여지를 열고 있다. 그것은 근대의 남성중심적 서사가 만들었던 길과는 다른 여정을 예고하며, 낯선 세계의 도래를 알리는 미-래의 흔적일지 모른다. 요컨대, ‘대체보충적 서사’라 명명할 만한 이 글쓰기 스타일은 낡은 세계의 기각과 새로운 세계의 전진을 본문과 주석이 벌이는 이중의 운동 속에서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3-3. 대화와 (재)창안되는 세계


  문학작품에서 대화를 독립된 문장으로 표현하게 된 것은 화법이 발전하게 된 이후의 일이다. 가령, 간접 화법 속에 포함되었던 제3자의 말은 직접 화법 곧 따옴표 속 문장으로 분리됨으로써 온전히 누군가의 소유격 언표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다시 여러 행에 걸쳐 교차하는 대화 표시 구문의 연쇄를 통해 타인들 사이의 언어적 소통으로 현시된다. 개화기 초의 신소설이 잘 보여주듯, 근대 소설이 정립되기 전까지는 ‘너’와 ‘나’ 사이의 언어적 경계가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하지만 ‘너’든 ‘나’든 ‘그/녀’든, 언표하는 주체 사이에서 ‘누구의’라는 소유격이 확실하게 규정될 수 있는 말이 과연 가능할까? 일견 엉뚱해 보이는 이 질문은, 말과 사유의 본원적인 특성에 관해 묻는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사유하고 말로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언어를 창시한 자는 없다. 개별적 자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언어는 존재했고, 기능했다. 태초의 언어가 있었으리라 가정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소유격을 통해 확정되는 소유물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들 사이의 대화는 물론이고, 개인의 독백적 사유에서도 언어는 대화 및 사유의 주체에 속한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체의 외부, 바깥으로부터 틈입한 이물질에 가깝고, ‘나’보다는 ‘세계’의 사물성에 근접해 있다. 그러니 사유든 대화든 ‘주어’라는 소유주, 또는 소유의 주체가 존재한다는 가정은 착각에 다름 아니다.

  문학작품, 특히 소설이 당연하게 전제하는 대화의 형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다만 끊임없이 서로를 침범하고 섞여 드는 타자성의 말들, 혼종성의 언표들이다. ‘자유 간접 화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낯선 말의 흐름은 새로운 언술을 요청한다. 문법화와 탈문법화가 길항하는 가운데 새로운 발화의 형식이 탄생하는 것이다.22) 그것은 무엇을 새롭게 구축하는가?


구로동 2길 23번지 옵션 완비 명찰 달고 오늘의 일자릴 찾는다 찾는데 저건 똥인가 쏘아 올린 별이긴 한데 잡히질 않아요 3번 출구 쏟아지는 사람들인가 깜빡하고 켜지는 쪽문 센서등인데 꺼져버려 나의 밝은 비애라 말할까
경계는 부수고 깨고 쓰러지는데 자리가 없대요 바닥은 아니라잖아 서 있지 말라잖아 거기 밀지 말라잖아 누구야 어깨 치지 말라잖아 기다리라잖아 반토막이라잖아 파버린다 동태눈깔 내리깔라잖아 노려보면 어쩔 건데 찔러보면 어쩔 건데 옆에 그 옆에서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가 뭉근하게 파고들기도 했다가 길 건너 서성이는 신호등을 바라본다
전단지를 길 건너 서성이는 입간판을 서성이는 공구들을 서성이는 잿빛 여인숙을 서성이는 배낭을 길 잃은 사람들을 길 찾는 사람들을 서성이는, 서성이는 삼팔씨들 서성이는 삼구씨들 서성이는 것들 죄다 어디로 가라는 거야 니미, 검었다가 노랬다가 반짝들 하고 자빠졌네23)


  새벽녘,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일용직 노동자의 눈에 비친 거리가 흐릿하게 엿보인다. 명확한 지명을 뇌까리며 하루가 시작되었지만, “오늘의 일자릴 찾는다”라는 문장에 담긴 일회성과 단기성은 하루의 운수를 별똥별에 점쳐야 할 정도로 불확실성에 젖어있다. 아침이 되니 당연하게 꺼지는 “센서등”임에도, 그로부터 하루 일진을 체념해도 좋은 “밝은 비애”가 넘치는 상황이다. 그야말로 당일만 바라보며 매일을 버텨야 하는 비정규 노동의 비참함이 극대화된 시가 아닐 수 없다.

  이 시는 단기 노동자의 불안과 우울을 묘사하는 데만 바쳐진 것이 아니다. 두 번째 문단부터 이어지는 문장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일감을 기다리는 노동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자리다툼을 형상화한 듯한 그 문장들은 누구의 것인지 특정할 수 없는 무수한 대화의 연속이고, 그것들은 운을 맞추며 서로에게 다시 연이어지는 풍경을 연출한다. 지시적 의미들로 짜맞춰진 의사소통이 아니라 하루에 대한 기대와 초조함,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감응의 전파 및 흐름을 보여주는 대화이다.24) 이는 다음 문단에서도 변주되어, 감응의 또 다른 (탈)의미적 연쇄를 개시한다.


전단지를 길 건너 서성이는 입간판을 서성이는 공구들을 서성이는 잿빛 여인숙을 서성이는 배낭을 길 잃은 사람들을 길 찾는 사람들을 서성이는, 서성이는 삼팔씨들 서성이는 삼구씨들 서성이는 것들 죄다 어디로 가라는 거야 니미, 검었다가 노랬다가 반짝들 하고 자빠졌네


  앞 문단에 잠깐 비치던 동사 “서성이는”이 본격적으로 이 문단을 지배하고 있다. ‘한 곳에 멈춰서지 않은 채 주위를 배회한다’는 뜻의 ‘서성이다’는 “전단지”와 “입간판”, “공구들” “잿빛 여인숙”, “길 잃은 사람들”과 “길 찾는 사람들”, “삼팔씨들”, “삼구씨들” 전체를 휘감아 돈다. 기이하게도, 이 명사들이 해당 동사의 주어로 사용된 것인지, 혹은 목적어로 사용된 것인지 알기는 불가능하다. 문장의 성분을 따지고, 대화 속 문법이나 어법을 검토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특정되지 않은 채 주변을 어슬렁대며 알 듯 모를 듯 흐르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일용직 노동자에게 하루하루는 동일하면서도 항상 다른 것이듯, 이 세계는 혼돈스러우면서도 바로 그처럼 변화한다는 사실의 동일성으로 인해 진리를 갖는다. 영원히 차이나는 것만이 되돌아온다는 니체의 금언처럼, 인간과 사물, 세계를 배회하면서도 완전히 포착되지 않은 채 항상 흐르는 무엇인가가 ‘있다’. 근대적 노동의 잉여이자 여백인 ‘이곳’에서 서로서로 구별되지 않은 채 서성이는 인간과 사물 전체는 이전과는 다른 존재의 양식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대화에서 무엇이 주어이고 목적어인지, 동사는 적법하게 쓰인 것인지 따질 필요가 없듯,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할 발화의 원점 또한 누구/무엇인지 적시할 이유가 없다. “나는, 이름이 없어요”.



4. 징후의 서사, 출발과 몰락 사이


  최근, 어쩌면 ‘MZ’라고 불리는 시인들이 구사하는 시적 표현들이 어떤 특징을 갖는 것인지, 어떻게 의미 규정될 수 있는지 검토하는 작업은 문학사의 세대론적 특수성에 관한 문답이면서도 그 경계를 벗어나 있다. 먼저 세대론적 문답이 온당한지 생각해 보자.

  대략 1980년대 초에서 2000년대 초에 태어난 ‘밀레니엄 세대’와 199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에 태어난 ‘Z세대’를 아우르는 용어인 ‘MZ’는 세대론적 진폭이 너무 크다. 출생 연수만 따져도 근 30년 동안 태어난 이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고, 중간의 십여 년 정도는 겹쳐 있기에 누구를 ‘M세대’로 분류하고 누구를 ‘Z세대’로 넣을 것인지 대단히 주관적이다. 더구나 ‘MZ’라는 명명 자체가 상업주의적 시장 논리에서 유래했으며, 대중문화 속에서 호사가적 관심사에 휘둘리기 쉽상이기에 시사(詩史)의 객관적 지표가 될 수 없다. ‘MZ세대’에 속해 있기에 시적 표현의 특수성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시적 표현의 특수성을 소구하다 보니 ‘MZ’라는 기표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일부의 시인들을 분류하기 위해 ‘MZ’라는 레테르를 사용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지 모른다. 문학사에는 다양한 명명과 구별의 기호들이 넘쳐났었고, 현재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MZ’라는 레테르는 사후적 시점에서만 유효한 기표로 남을 공산이 크다.

  시적 표현의 낯선 경향을 세대론적 분류 이상의 관점에서 점검해야 할 이유는 다른 데 있다. 한편으로 이는 근대 문학의 오랜 분류법과 관행, 규범의 후퇴와 관련된 현상이다. ‘근대’ 자체를 획정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대략의 큰 그림을 그려볼 수는 있다. 16세기 이후의 오백여 년 정도가 그에 해당한다. 나아가, 서구에서 근대 문학의 정립 자체는 17-18세기 고전주의나 19세기 낭만주의 이후의 일로 산정되곤 했다. 동아시아의 경우를 따져 보면, 서구적 근대성이 도입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고, 한국의 경우는 20세기 초 식민지 시대부터였다. 따라서 한국 근대 문학, 시문학의 성립사는 백여 년 정도의 시간으로 충분할 것이다. 글의 서두에서 논의했듯,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서구와 동아시아, 한국에서 모두 근대성의 퇴조가 언명되었다. 여전히 근대의 연속적 지대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그것을 넘어서는 징후 또한 완연한 시대가 지금이다. ‘문학의 죽음’이 운위된 지도 한참 전의 일이며, 그것은 근대 문학이라는 제도의 해체를 핵심으로 둔다는 점에서 근대성 일반의 해체와 결을 같이 한다. 문학적 글쓰기의 ‘낯선 경향’을 말하기 위해서는 이 ‘제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무엇이 문학적이고 문학적이 아닌지를 결정짓는 기제가 바로 그 제도에 있는 탓이다. 근대 문학의 개념과 범주가 작동하지 않는 시점에서 ‘문학의 낯설음’은 이전의 문학이 규정할 수 없는 ‘낯선 글쓰기’, 혹은 ‘문학’이라는 명명조차 불가능한 시대적 단초를 드러낼 것이다.

  근대의 끝, 그 너머는 다만 ‘포스트모던’, ‘탈근대’ 등으로 표지되는 지점을 벗어나 버렸다. 우리가 마주한 것은 ‘인류세’, ‘기후위기’로 표징되는 지질학적 위기의 시대이자 지구사적 전환의 시대이다. 우리가 근대 문학이라 불렀던 글쓰기의 양식과 장르 분류, 형식 등은 비단 사회적 제도의 한 시대뿐만 아니라 지질학적으로도 특정하게 규정되는 시대의 인간학적 사실에 속한 것이었다. 문명사적 발전이나 문화적 흥기의 징표처럼 여겨지던 근대 문학의 특성은, 지금 우리가 마주한 시대적 변천을 맞이하여 몰락하고 소멸할 계기에 근접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같은 변천을 의미화하는 것, 포착하고 사유하여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파악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글쓰기를 통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25) 서사, 그러니까 이야기-하기는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하며, 지금-여기의 사태를 서술하기 위해서라도 작동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근대 이성애와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의 종말, 자본주의적 노동의 종언 등에 대해 또 다른 방식으로 발화함으로써 새롭게 도래하는 시대를 포착하는 사유-하기와 말-하기의 표현형식에 이야기-하기가 있다.

  시적인 것은 늘 예지의 형식으로 존속해 왔다. 고대의 탄생과 종막, 중세의 가을과 근대의 여명, 그리고 황혼에 이르기까지 시적 언명은 낯설음을 감지하고 그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앞서 살펴본 작품들이 그 같은 예언의 고동일지, 또는 잘못 짚은 오해의 한 자락에 불과할지 당장은 알 수 없다. 지금은 그저 그들이 내는 또 다른 목소리에 괴롭게 귀 기울이는 수고만이 언젠가 우리를 위로하리라 믿을 뿐이다.

  • 1) lieter Steiner, Russian Formalism. A Metalioetics, Cornell University liress, 1984, li. 15-43
  • 2) Роман Якобсон, “О художественном реализме,” Работы по поэтике, Прогресс, 1987, li. 387.
  • 3) 자크 데리다, 『법의 힘』, 진태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88쪽. 법과 사회/공동체의 관계를 다루는 이 논리는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 가능하다. 개연성이 선험적으로 규정된 척도가 아니라면, 이를 달성하기 위한 현실 재현/표현의 방법에 따라 개연성의 의미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 4) Якобсон, “О художественном реализме,” li. 388.
  • 5) Victor Shklovsky, “Art as Technique,” Russian Formalist Criticism. Four Essays, University of Nebraska liress, 1965, li. 22.
  • 6) Якобсон, “О художественном реализме,” li. 388.
  • 7)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 유정완 옮김, 민음사, 1992, 41-49쪽.
  • 8)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알베르티의 회화론』, 노성두 옮김, 사계절, 1998, 69쪽.
  • 9) Mikhail Bakhtin, “Forms of Time and of the Chronotolie in the Novel,” The Dialogic Imagination, University of Texas liress, 1981, li. 84-258.
  • 10) 윌리스 마틴, 『소설이론의 역사』, 김문현 옮김, 현대소설사, 1991, 85쪽.
  • 11) 스테판 코올, 『리얼리즘의 역사와 이론』, 여균동 편역, 미래사, 1986, 84-89쪽.
  • 12)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 180쪽.
  • 13)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 69-79쪽.
  • 14) 러시아 형식주의는 일상어를 폭력적으로 전유함으로써 시어를 창안해 낼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런 경우조차 일상어는 시어의 질료적 바탕을 이룬다. 이로써 시적 언어는 해당 공동체에 낯설음과 새로움의 감응을 일으키는데,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준다(affect and be affected)’는 감응의 현상 자체가 이미 사회적 의사소통의 양상인 것이다. 조지 레이코프·마크 터너, 『시와 인지』, 이기우 외 옮김, 한국문화사, 1996, 266-267쪽. 같은 의미에서 서정적 발화는 개별 화자의 표현 이상으로, ‘다수 화자의 공동적 표현’일 수 있다. 디이터 람핑, 『서정시: 이론과 역사』, 장영태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4, 105쪽.
  • 15) 제라르 주네트, 「서술의 경계선」, 『현대 서술 이론의 흐름』, 석경징 외 옮김, 솔, 1997, 13쪽.
  • 16) 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김경원 옮김, 이마, 2016, 26쪽.
  • 17)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억의 천재 푸네스」, 『픽션들』, 민음사, 1994, 187-188쪽.
  • 18) 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60-61쪽.
  • 19) 이소호, 「홈 스위트 홈」, 『홈 스위트 홈』, 문학과지성사, 2023, 30쪽.
  • 20) 권박, 「리스트 컷(wrist cut) — 죽음에 대해 알아 갈수록 죽음과 나와의 거리를 직시하게 될 것」, 『이해할 차례이다』, 민음사, 2019, 15쪽. 이어지는 주석은 16-17쪽에 걸쳐 덧붙여져 있다.
  • 21) 데리다의 용어에서 유래한 대체보충(suliliélment)은, 이 작품을 통해 말하자면, 주석이 본문을 보완할 뿐만 아니라 완성한다는 의미에서 필수불가결한 대체/보충물임을 시사한다. 주석 없이 본문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고, 주석을 통해서만 주제를 구현할 수 있으며 비로소 완결체로도 드러난다. 이 점에서 대체보충은, 통념과 달리 중심적인 것이 주변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깊숙이 의존하며 전제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역설의 사유이다. Jacques Derrida, Of Grammatology, The Johns Holikins University liress, 1974, li. 144.
  • 22) Михаил Бахтин, Марксизм и философия языка, 2-ое изд., Л.: 1930, li. 122.
  • 23) 이용훈, 「남구로역」, 『근무일지』, 창비, 2022, 86쪽.
  • 24) “노려보면 어쩔 건데”에서 시작되는 주석이 흥미롭다. 반페이지 정도를 차지하는 이 주석은 본문을 보충하는 내용도 아니고, 특정한 인용이나 논증을 위한 것도 띠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외전(外傳)과도 같은 ‘다른 이야기’를 파생시켜 노동자의 감응이 어떤 형식으로든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좋(다)’를 변용시켜 의미의 양가성을 노정하는 부분이 특히 이채롭다. “좋나”는 표기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실제 발화와 독해를 통해 ‘좃나’로 읽힐 수 있고, 이는 노동자의 사유와 대화에서 긍정성과 부정성이 혼합되어 또 다른 긍정성으로 나아갈 여지를 열어준다. 양가적 웃음이 창출하는 세계상이 여기 있다.
  • 25)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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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는 것, 있다는 것 ―2024년 겨울의 시 “깨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잃어야 하죠.” (김경인, 「도토리 줍기」, 『딩아돌하』 2024년 겨울호) 황선희 가을,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들려왔고 모처럼 ‘문학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논의가 풍성해지는가 싶었다. 그러다 마주친 12월 3일 계엄의 밤을 생각한다. 어제를 동여맨 막막한 공포 속에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되묻게 되는 시간이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2024년 겨울은 공동체에 대한 감각이 어느 때보다도 예민하게 발달하는 계절이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돕고, 앞서간 이가 우리를 구한 시절.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또 얼마나 속속들이 연루되어 있었는지 알고, 놀라고, 배우게 되었던 시절. 먼 훗날의 우리는 그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시민들은 저마다 가장 소중한 빛을 들고 광장에 모여 따로 또 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더 오래, 더 멀리 함께 가기 위해서 서로가 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여의도와 광화문을 수놓았던 빛은 남태령, 한강진을 밝히며 함께한다는 것의 가치를 되새기게 했다. 동짓날 밤 험한 고개는 단지 함께라는 이유만으로 광장이 되었다. 우리는 “오늘 밤 이 도시에서/집이 없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강성은, 「네 집으로 가」, 『창작과비평』 2024년 겨울호) 물으면서, 누구에게든 집이 있기를 바라며 두 손을 모았다. 빛의 물결 속에서 ‘다시 만난 세계’를 노래하는 동안 앞사람의 웅크린 어깨를 바라본다. 그 어깨는 얼마나 작은가. 그리고 얼마나 넓고 크고 단단한가. 별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겨울은 소중하다.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는 별을 관측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코끝 시린 계절의 필요성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겨울은 포용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시간이 아닐까 싶다.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를 사랑하는 시인들의 시는 겨울을 끌어안는 동안 더욱 밝게 빛난다. 가장 길고 어두운 밤을 밝게 빛냈던 이 계절의 시를 다시 읽는다.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이번 주말 시위에 함께 나가자고 우리는 광화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친구는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혼자 걷는 광화문은 낯선 나라 같다 무언가를 열심히 외치는 사람들 그사이 선두에서 걸어가는 친구가 보인다 서둘러도 따라잡히지 않는 친구는 골목으로 들어가고 붉은 벽돌집이 늘어서 있는 뻔한 장면이 펼쳐진다 성실하게 친구를 찾았다 똑같이 생긴 문을 여러번 열고 닫고 남의 집에 들어간다는 긴장은 공포로 바뀐 지 오래지만 나에게 정말 친구가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 다세대주택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친구는 태평한 얼굴로 짐을 싸고 있고 무언가 가득 든 가방을 메고 나를 스쳐 지나간다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 너 도대체 어디냐고 같이 걷고 있긴 한 거냐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몸집만큼 커다란 가방을 멘 친구가 계단을 내려가 저 멀리 걸어가고 아무리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데 그러면 난 흔하디흔한 붉은 벽돌의 다세대주택이 되어 있다 아무도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는 광화문에서 을지로 방향으로 행진하는 사람들 어색하게 포함된 채로 걸으면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구호를 외친다 따라 하듯 중얼거리다 걸음을 멈춰도 아무것도 정지되지 않는다 나는 무얼 위한 시위인지도 모르는데 친구가 부르면 언제든 광화문으로 나오고 받지 않을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친구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영원히 정지된다 ―김상희, 「잡을 수 없는 것」(『창작과비평』 2024년 겨울호) 김상희는 잡히지 않는 것과 거기에서 느껴지는 혼돈과 균열을 시화(詩化)한다. 시적 주체는 ‘주말 시위’에 함께 나가자고 제안하는 친구의 연락을 받는다. 친구는 ‘나’와 광화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지 않는 친구를 기다리며 ‘혼자 걷는 광화문’의 풍경은 낯설게만 느껴진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열심히 외치고, 친구는 저 멀리 선두에서 걸어간다. 시적 주체가 아무리 서둘러보아도 친구는 잡히지 않는다. 잡을 수 없는 친구를 따라 헤매며 ‘성실하게’ 친구를 찾던 ‘나’에게, 비슷비슷하게 생긴 붉은 벽돌집이 반복되는 뻔한 장면은 긴장을 넘어 공포마저 느끼게 한다. “나에게 정말 친구가 있었던가” 하는 생각은 마지막 다세대주택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다른 국면으로 전환된다. 가까스로 찾아낸 친구는 조바심 가득했던 ‘나’와 달리 태평한 얼굴로 짐을 싸서는 무언가 가득 든, ‘몸집만큼 커다란 가방’을 메고 ‘나’를 스쳐 지나간다. 광화문에서 골목으로, 붉은 벽돌집에서 다른 벽돌집으로 이동하며 친구를 찾았던 ‘나’의 성실함은 금세 무용해진다. 다시 저 멀리 걸어가고 아무리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흔하디흔한 붉은 벽돌의 다세대주택”이 되고 만다. 친구는 항상 조금씩 앞서 있고 ‘나’는 매번 조금씩 뒤처져 있는 상태이다. 뒤따르는 자의 미묘한 긴장과 함께 광화문에서 을지로로 향하는 행진은 시작된다. 사람들 사이에 어색하게 포함된 ‘나’는 알 수 없는 구호를 중얼거리기도 하고 걸음을 멈춰 보기도 하지만 ‘나’를 둘러싼 그 무엇도 정지되지 않는다. ‘무얼 위한 시위인지도 모르는’ 나, 그렇지만 친구가 부르면 ‘언제든’ 광화문으로 나오는 나, 받지 않을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나, 친구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영원히’ 정지되는 나. 위의 시에서 시적 주체는 광장에 서 있지만, 혼란스럽고 낯설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기억이 된다. 설령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잡히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거창한 사명감 없이도 함께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조금 느리게 혹은 당신과 함께라면/아침에서 밤까지 나는 노래를 부를 수 있지”(심재휘, 「연필과 지우개와 노래와 당신」, 『딩아돌하』 2024년 겨울호)라는 작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 혼돈 속에서도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음을 잊지 않는 이가 있다. 어둠이 짙어갈 무렵부터 4시간 남짓 들뜬 청춘과 다정한 연인들의 환한 얼굴이 깊고 시린 어둠 속으로 영영 사라진 도심 조금 늦게 이곳에 서 있습니다 나는 퉁퉁 부은 젖은 눈으로 거리와 병원을 찾아다닌 끝에 마주한 슬픔과 허무와 절망을 추스르지 못하는데 무표정한 얼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참사가 아니라 손쓸 수 없는 사고라고 희생자가 아닌 예상할 수 없는 사고 사망자라고 그날 그 시간에 더 크고 중요한 일이 있었다고 미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아니 대비했다 하더라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권한이 없었으므로 책임 또한 없다고 그래서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아니 누군가의 음모일 수도 있다고 그리고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다시 함께 울어주는 것 외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웃음을 머금고 온기 어린 표정으로 다시 말을 건넵니다 그만 잊으라고 이제 가슴에 묻으라고 그정도 했으면 됐다고 사고로 간 그들을 위해 사회의 안녕과 나라의 안위를 위해 지금은 혼돈을 거두고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라고 한층 무덤덤하고 단호해진 음성으로 온기 없는 위로를 건넵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점점 깊어지고 더 짙어지는 어둠 속에 떨리고 갈라지는 울음 섞인 목소리 치미는 슬픔과 고통은 갈 곳을 잃었습니다 누군가의 희망이고 사랑이고 전부이고 모든 것이었을 그러나 이제는 절망이고 이별이고 아무것도 아닌 사진 없는 영정 얼굴 없는 사람들 담으려 해도 담아지지 않는 추스르려 해도 추스러지지 않는 여전히 떠도는 그날, 그 밤의 말들 너무 소름이 끼쳐요 사고 날 것 같아요 위험해요 아수라장이에요 대형사고 일보직전이에요 사람들이 압사당하고 있어요 살려주세요 제발 누군가 와주세요 제발 여기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이태원 뒷길이에요 그날 그 밤의 말들을 가슴에 묻은 사람들이 몸을 던집니다 깊은 절망 속에서 온몸을 던집니다 너덜너덜해진 몸뚱이를 던지고 또 던집니다 뙤약볕 아래 폭우 속에 혹한의 빙판길 위에 이어지는 오.체.투.지. 점점 멀어져가는 기억과 무관심을 향해 마지막 남은 몸까지 다 던지고 나면 무엇을 더 던질 수 있을까요 나는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서 있습니다 ―곽효환, 「나는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있습니다」(『딩아돌하』 2024년 겨울호) 곽효환의 시는 ‘이태원역 1번 출구’라는 구체적인 장소에 시적 주체 ‘나’를 세워 놓는다. “들뜬 청춘과 다정한 연인들의 환한 얼굴”이 “깊고 시린 어둠” 속으로 영영 사라져버린 도심. 묻고 사유하고 걷기를 멈추지 않겠다던 말(「시인의 말」,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 문학과지성사, 2023)은 참사가 덮친 그곳을 향한다. ‘조금 늦게’ 이곳에 서 있다는 시적 주체의 전언은 고통보다 늦게 당도할 수밖에 없는 애도의 숙명을 보여 준다. 세월호 참사 때처럼 참사는 사고로 바뀌고, 희생자는 사망자로 축소된다. 그리고 그날,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고 말해진다. 섣부른 말들을 앞세운 뒤 아무 말이 없는 세계 속에서 ‘나’는 “다시 함께 울어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함께 울어주지 않기를 택한 사람들은 “웃음을 머금고 온기 어린 표정으로” 혹은 “한층 무덤덤하고 단호해진 음성으로” 위로가 될 수 없는 위로를 건넨다. 그들이 건네는 회피와 강요의 언어는 이태원에서 있었던 일을 개인의 불운으로 돌리려는 시도다. 시인은 어둠, 울음, 슬픔, 고통 등의 감정어를 활용하여 구체적인 애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누군가의 희망이고 사랑이고/전부이고 모든 것이었을 그러나/이제는 절망이고 이별이고 아무것도 아닌” 사진 없는 영정과 ‘얼굴’ 없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곳에서 스러져간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우리 곁을 떠돌고 있음을 상기하면서. 상실은 우리 모두를 어설프게나마 ‘우리’로 만들었다.1) 참사의 기억이 점점 흐려져 가는 현실 속에서, 유가족과 시민들은 자신의 몸을 던지는 행위로 저항한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온몸’을 던지며 가장 깊은 참회와 애도를 한다. 깊은 절망 속에서 기억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 곁에서 시적 주체는 그저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서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있음으로써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기억하는 우리는 어디에, 어떻게 있을 것인가? 시집 출간을 기다린다는 문자를 받았다 원고를 들여다보지도 못했는데 아이는 자꾸 자라 턱 밑까지 차오르는 숨, 나를 지연시키는 일에 몰두하며 그래 오늘이 가면 네가 올 거야 오로지 나의 언어들만이 존재하는 작은 방, 그 방에서 지치지 않고 노닥거리고 있으면 휘발된 언어들과 사라진 이름들이 널찍한 등줄기에 새겨진 용 문신처럼 숨을 쉴 때마다 꿈틀거릴 거야 알록달록한 장난감이 사납게 나의 방을 침범하고 아끼던 시집 표지가 아이 손에 뜯겨 나가도 내가 나를 붙들고 있으면 너는 올 거야 품에 안겨 잠든 아이의 이마 위에 도사린, 캄캄한 흑판을 향해 나는 쓸 거야 아직 발설하지 못한 언어들이 나의 잠보다 먼저 도착하게 할 거야 도처에서 쇄도하는 너의 입김을 놓치지 않도록 온몸으로 나를, 필사할 거야 ―한세정, 「시는 어디에 있는가」(『문학인』 2024년 겨울호) 한세정은 일상과 가까운 언어로 삶의 지속을 노래해 왔다. 시인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위 시의 주체는 시집 출간을 기다린다는 문자를 받고 곤혹스러워한다. 원고를 들여다보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 ‘나’를 지연시키는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생활인의 삶. 이 시에서 ‘시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은 곧 ‘나’는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나’가 제자리에 고여 있는 것 같은 삶을 지속하는 동안 아이는 자꾸 자라고 아이를 돌보는 나의 숨은 턱 밑까지 차오른다. “그래 오늘이 가면/네가 올 거야”라고 곱씹으며 시적 주체는 “오로지 나의 언어들만이 존재하는 작은 방”에서 휘발된 언어들과 사라진 이름들을 어루만져 본다. 아이의 장난감이 때로는 사납게 ‘나의 방’을 침범하고 아끼던 시집 표지가 아이 손에 뜯겨 나가도, 시적 주체는 “내가 나를 붙들고 있으면/너는 올 거야”라는 믿음으로 시를 기다린다. 시는 사실 언어를 통해 존재를 붙잡는 ‘나’의 곁에 늘 있다. 거리가 아니라 작은 방 안에서도 삶은 지속되고, 시는 ‘있다’. 위의 시에서 ‘너는 올 거야’라는 말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다. 그것은 사라진 것들이 언어를 통해 다시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이며,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다.2024년 겨울의 시에는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끝까지 붙잡고 기억하려는 태도가 있다. 이 시들은 가장 어두운 밤, 망각을 거부하며 사라진 것들을 다시 불러온다. 이런 태도와 함께라면 “둘은 셋이 되고 셋은 다섯이 열이 될 수도”(박소란, 「침향무」, 『문학과사회』 2024년 겨울호) 있다. 기억이 사라지고 존재가 희미해질 때, 시는 가장 어두운 곳에서 다시 깨어난다. 우리는 읽음으로써 존재를 확인하고, 기억함으로써 다시 살아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에서 다시 존재할 것인가. 1)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역, 필로소픽, 2018, 47쪽.

계간 딩아돌하 황선희 한국현대시시계간평기억애도광장공동체상실 2025
송현지 제자리 뛰며 나아가는 미래

제자리 뛰며 나아가는 미래 언젠가부터 시에서 ‘미래’라는 단어를 자주 본다. 아직 오지 않은 날에 대한 염려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일까. ‘멸종’과 ‘멸망’이라는 말로 미래를 예감함과 동시에 노인이 등장하거나, 노인이 된 상황을 상상하는 젊은 시인의 시들이 유독 눈에 띈다.1) 이런 경향을 현실의 제 문제와 관련하여 논의하는 일이 필요하겠으나 이 글에서는 ‘미래’라는 용어에 대한 다분히 개인적인 감상을 꺼내놓고 싶다. 이 단어가 포함된 작품을 읽었을 때 느꼈던 생경한 감각에 대해. 물론 시에 사용하지 못할 말은 없으며 낯선 언어가 만들어내는 효과를 모르는 건 아니다(더욱이 ‘미래’라는 단어는 이제 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말이기에 낯설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왜 나는 ‘미래’가 들어간 문장을 읽을 때면 목에 무언가가 걸린 느낌이 드는 걸까. ‘미래도시’나 ‘미래 계획’과 같은 용례를 통해 이 단어를 처음 접했던 유년의 기억 탓일까. 그러니까 내게 ‘미래’란 현재와 동떨어져 있는 관념적인 시간이라 이 말이 포함된 문장의 경우 여러 번 읽어야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주관적이라 생각했던 이 느낌이 나에게 한정된 것만은 아님을, 나는 지난 계절에 발표된 여러 편의 시를 읽으며 알게 되었다. ‘미래’라는 말이 그토록 낯설게 여겨진 까닭에 대한 또 하나의 실마리와 더불어. 기대 없는 시간 안미옥과 정우신의 시를 나란히 읽는다. 네가 작은 돌멩이라면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올 것이다 잘 보이는 곳에 놓고 두고두고 볼 것이다 곁에 둘 수 있는 다른 돌멩이를 찾아보기도 할 것이다 매일 깨끗하게 닦고 햇볕에 잘 말려두고 가끔은 이리저리 옮겨 다른 풍경을 보게 할 것이다 네가 작은 돌멩이라면 여긴 버튼을 눌러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 유리 액자 안 작은 돌멩이 나는 매일 다시 돌아와 보았다 만질 수 없는 너는 매일 같은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를 했다 중력을 거슬러 있고 싶은 곳에 있겠다는 듯이 아무리 높게 뛰어올라도 어딘가 도착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시간을 찾아보겠다는 듯이 매번 같은 자세로 넘어지면서 눈사람 이야기를 읽다가 덮는다 마지막엔 다 녹을 것이므로 네가 작은 눈송이라면 곁에 있는 눈송이와 함께 뭉쳐놓을 것이다 알게 놔둘 것이다 단단하게 녹을 수 있다는 것을 오리도 되었다가 곰도 되었다가 사람이 되어볼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녹지도 부서지지도 않고 ― 안미옥, 「미래 세계」(『현대문학』2024년 11월호) 전문 안미옥의 시는 ‘나’와 ‘너’가 대비되는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너’를 무척이나 아끼는 듯 보이는 ‘나’는 ‘너’가 “작은 돌멩이라면” 집에 데려와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고 정성껏 보살필 일을 상상한다. 이런 ‘나’의 가정에 짙게 깔린 사랑은 모성애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이지만 굳이 ‘나’와 ‘너’의 관계를 부모와 아이로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앞으로의 일들을 ‘너’보다 조금은 더 잘 알고 있기도 해서 ‘너’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알려주려 애쓰고 있다는 점만은 짚어두자. 이때 주목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너’에 대한 ‘나’의 염려가 세상에 어떠한 기대도 없는 마음에 의해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여긴 버튼을 눌러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한탄하는 ‘나’가 ‘너’에게 “눈사람 이야기”를 읽어주다가도 결국은 눈이 “다 녹을 것이므로” 책을 덮어버리는 장면을 보자. 그런 ‘나’에게 미래란 아직 오지 않은 불분명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분명한 시간이기에 ‘나’는 ‘너’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걱정한다. ‘미래’라는 말이 (낙관적이든 비관적이든) 어떠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이 단어가 화자에게 나 못지않게 생경한 것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크리스티앙 보뱅은 「작은 파티 드레스」에서 유년기가 끝난 후 지속되는 죽음에 대해 말한 바 있다.2) 물론 이 아름다운 산문의 초점은 성년이 된 우리가 “죽음 속을 제자리걸음 하는 사람”같이 지내다 어떻게 사랑에 의해 변화되는가를 설명하는 데 맞추어져있지만 유년 이후의 시간을 그가 ‘기다림의 시간’이라고 칭하는 지점도 생각해 볼 거리가 있다. 특정한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기다리는 상태’로 지내는 것이 성인이 되고 난 뒤 우리가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이라는 그의 서술은, 우리가 점점 ‘가능성’이라는 말과 멀어진다는 사실을 정확히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적인 가능성만이 아니라 내적으로 우리가 체념 상태에 머무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이 내일과 같고 내일이 오늘과 다르지 않은 날들에서 상상해 볼 수 있는 미래는 한정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며 이미 결정된 결말로 나아가는 삶 속에서 우리는 점차 무료해진다. 스펙터클한 변화의 시간에서 비껴선 채 이제는 삶의 어느 한쪽으로만 걷는 정우신의 시 속 “남녀”의 마음 상태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一. 말이 달린다. 二. 남녀가 태어난다. 三. 뒤이어 말이 달린다. 四. 남녀는 종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다. 五. 남녀는 체조한다. 六. 말이 콧김을 내뱉는다. 七. 남녀는 목장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다. 八. 남녀는 가죽을 낳고 싶다. 四. 말이 주춤한다. 五. 말이 안장을 버리고 교차로에 서 있다. 六. 남녀는 정리한다. 七. 남녀는 채찍을 모두 버린다. [……] 三. 말이 등에 올라탄다. 四. 남녀는 정원에 구덩이를 판다. 五. 운과 복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 六. 남녀는 말의 눈동자를 이식한다. 七. 먹을 간다. 八. X축 위로 선이 하나 놓인다. 二. 방사선 치료를 받는다. 三. 폭포 소리가 들린다. 一. 삶의 가장 왼쪽으로 걷는다. 二. 남녀의 첫 단칸방. 三. 한쪽 벽면을 차지하던 곰팡이가 있다. 四. 좌에서 우로 오는 말이 있다. 五. 앞에서 뒤로 가는 말이 있다. 六. 남녀는 언제부터 걸려있었을까. 七. 가죽을 입어본다. 八. 초파리가 사리탑 주변으로 모여든다. ― 정우신, 「팔마도(八馬圖)」 (『릿터』2024년 12/ 2025년 1월호) 부분 이 시에서 정우신은 “팔마도” 속 역동적으로 달리고 있는 여덟 마리의 말들에 번호를 매겨 이를 각각의 개별적인 시간에 빗댐으로써 시간의 실재성과 운동성을 나타낸다. 우리의 삶은 움직이는 시간의 등에 올라타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듯 시에는 남녀의 “탄생”부터 “방사선 치료”를 받기까지 그들의 일생이 차례로 회고된다. 스스로 시간을 운영하기를 꿈꿨던 그들이(“七. 남녀는 목장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다”) 어떻게 주춤하다(“四. 말이 주춤한다./ 五. 말이 안장을 버리고 교차로에 서 있다”) 지난날을 정리하는지(“六. 남녀는 정리한다”), 시간의 등에 올라타 그것을 채찍질하며 빠르게 앞으로만 나아가던 삶을 그만두자(“七. 남녀는 채찍을 모두 버린다”) 도리어 시간이 그들의 등에 올라타(“三. 말이 등에 올라탄다”) 그들을 덮친 양, 이제는 죽음을 떠올리는 그들의 모습은(“四. 남녀는 정원에 구덩이를 판다”) 우리의 일생 역시 시간과 함께 달리다 결국 어딘가에 멈춰져 전시되는 것이 아닌가를 쓸쓸하게 되짚어보게 한다. 삶이 결국 병듦과 죽음의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실감할 때 우리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五. 앞에서 뒤로 가는 말이 있다”). 이처럼 생을 알아갈수록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점점 더 쉽지 않아진다는 것을 정우신의 시는 생각하게 한다. 기도하기와 주석 달기 그런데 두 시 모두 이러한 생의 끝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는다. 먼저, 정우신은 ‘남녀’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그들에 대해 말하며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화자를 마지막 연에서 가죽을 입어보는 자로 전면 등장시키며 그 존재를 강조하듯 보여준다. 시의 앞부분에서 남녀가 “가죽을 낳고 싶”어 했다는 서술과 그들이 남긴 가죽을 입어보는 화자의 행위를 연계해 볼 때 그는 그들의 자식으로 보인다. ‘가죽’은 ‘가족’의 변형으로 읽히기도 할뿐더러 누군가의 가죽을 입는 일은 외형이 유사해지는 것에 다름 아니어서 자식은 부모가 남긴 가죽을 입은 듯 그와 닮은 외형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아랫대의 그는 지난 세대의 시간을 애틋하게 추억하는 가운데, 그들이 남긴 가죽을 입음으로써 새로운 시간이 시작된다. 이는 정우신이 시간을 말에 빗대어 자율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시간의 특성을 강조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미래의 존재에 대해서라면 안미옥은 조금 더 적극적이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미래 세계」가 ‘나’와 ‘너’라는 대비 구도로 구성된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시인은 ‘나’와 전혀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너’에 대해 적으며 ‘나’와 ‘너’를 의도적으로 구분한다. 계속해서 넘어질 것을 알면서도 “매일 같은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는 ‘너’에게는 다음 벌어질 일을 그저 수용하는 ‘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너’에게는 패기가(“중력을 거슬러 있고 싶은 곳에 있겠다는 듯이”), 두려움보다는 믿음이(“아무리 높게 뛰어올라도 어딘가 도착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권태보다는 호기심이( “다른 시간을 찾아보겠다는 듯이”) 있다. ‘너’는 액자 속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 “작은 돌멩이”도, “눈”과 같이 곧 사라질 존재도 아니다. 돌멩이에게 가능한 미래란 점점 부서지는 것이고 눈에게 가능한 내일이 사라지는 것이라면 ‘너’는 그것들과 달리 정해진 시간 질서에 아랑곳하지 않는 자이다. 그러니까 ‘너’는 ‘나’의 마음속에서 절대로 녹지도 부서지지도 않을 만큼 ‘나’가 사랑하는 존재인 동시에 실제로도 소멸과는 거리가 먼 존재로 그려진다. ‘나’는 눈앞에 있는 이러한 ‘너’를 보며 ‘미래’라는 말이 내포한 ‘가능성’의 생생한 의미와 그것이 단단하고 구체적인 실재가 될 수 있음을 비로소 확인한다. 이때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너’가 만들어갈 날들에 “미래 세계”라는 SF에 어울릴 법한 제목을 붙인 시인이 시에서 주목하는 ‘너’의 행위가 “제자리 뛰기”라는 점이다. ‘너’의 행위의 소박함과 광대한 제목 사이의 불균형은 미래에 대한 ‘나’의 변화된 생각을 나타내는 다분히 의도적인 설정으로 읽힌다. 즉, 미래란 멀고 거창한 시간이 아니라 마치 제자리 뛰기를 하는 것처럼 현재 바로 뒤에 놓이는 시간이자 아주 미묘한 변화가 발생한 시간임을 저 낙차는 드러내고 있다. 이는 멸종이나 멸망 같은 먼 미래를 주로 이야기하는 최근의 시들과는 조금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러한 점은 양안다와 권박의 시에서도 발견되는 특성이기도 하다. 다락방에 료스케가 있다 다락방에서 예언의 서가 완성된다 다락방에서 료스케의 계절이다 태양은 바쁘고 여름밤은 잠시 바쁘다 냉소바 한 그릇을 비우고 예배당 료스케의 동생 료코는 제멋대로 구는 만담꾼이다 제멋대로 구는 외지인의 이마를 쳐대고 그런데 우리의 꿈은 너무도 원초적인 것이었지 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은 「춥고, 뜨거운 물을 식히고, 뇌우가 온다」라고 합의되었다 제멋대로 [……] 지난여름에 눈길을 끌었던 건 어느 정원의 측백나무 하얀빛의 뒷면을 깨부수는 조약돌과 꽃상 1인치 정도 사랑에 빠지는 행인들 청신호가 우리 머리 위에 료스케는 온통 멍든 팔을 베고 잠든다 료코는 나를 비웃고 비웃고 그리고 료코는 거짓말을 한다 “당장이라도 잠들고 싶다는 절박감에 너를 만났어. 입이 찢어져라 노래 부를 만큼 진심이었지.” 어느 날 료코는 여름 하늘을 통과하는 꿈 오늘의 여름밤이 끝나면 내일의 여름밤이 시작된다 눈가에 잿가루 묻히고 얼굴에 고양이 털을 덕지덕지 붙인 채로 서 있다 쪽빛 마음과 함께 우리들 깊은 산속 신사 앞에서 ― 양안다, 「예언과 등불을 걸고」(『웹진 비유』2024년 11/12월호) 부분 이 시에서 양안다는 여름밤의 몽상을 거치며 미래로 향해가는 이들을 그린다. “료스케”, “료코”, ‘나’는 양안다의 여러 인물들이 그러하듯 제각기 다른 이름처럼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미래를 떠올리는 방식도 다르다. 료스케가 좁은 “다락방에서” “예언의 서”를 완성한다면 그의 동생 료코는 세상에 대해 비판적인 말들을 늘어놓고(“료코는 제멋대로 구는 만담꾼이다”), ‘나’는 료스케의 품에서(“나를 품에 안은 료스케”)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은 지금을 곱씹는다(가령, “냉소바 한 그릇을 비”우는 료스케와 달리 ‘나’는 “많은 음식이 만족스럽지 않다”). 이러한 나열은 미래에 대해 갖는 여러 생각을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열거한 것으로도, 동일한 인물이 갖는 내적 갈등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나는 이들이 합의한 기도문이 갖는 소박함에 주목하고 싶다. 여름의 한가운데에 그들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춥고, 뜨거운 물을 식히고, 뇌우가 온다”를 “기도문의 마지막 구절”로 삼았다는 사실은 미래의 도래를 바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냉소바 한 그릇을 비”우는 일로 더위를 잠시 잊고, 더위가 물러가도록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그들의 행위는 “오늘의 여름밤”이 끝나도 “내일의 여름밤”이 시작되는, 어떠한 극적인 도약도 없는 시의 시간과 닮아 있다. “지난여름” “측백나무 하얀빛의 뒷면을 깨부수는 조약돌”처럼 아주 작은 움직임, “1인치 정도”의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 “청신호”인 세계. 이런 작은 변화를 위해 양안다의 인물들은 숲이 타올랐던(「다른 여름의 날들」, 『숲의 소실점을 향해』, 민음사, 2020) 지난 시간이 남긴 “잿가루”를 묻히고 자신에게 주어진 “쪽빛 마음”의 운세를 믿으며, 기도하기 위해 “신사 앞”에 있다. 기도는 언젠가 바라는 일이 이루어질 것을 기다리며 제자리를 뛰듯 같은 말을 간절히 반복하는 것. 그런 나날을 보내며 달라지는 것은 미래의 시간만이 아니라 현재 기도하고 있는 자의 내면 이기도 하다. 양안다의 시가 기도를 통해 미래로 나아간다면, 권박의 시에는 주석이 그 역할을 한다. 어여삐 여기는1) 사람이 만든 글자로 어여쁜 바늘을2) 추모한 사람에 대해 짓겠다 어여쁜 사람이…… () …… 될 때까지 짓겠다 위험한 커다란 돌 하나 사랑을 얼굴을 이런 시는 그만 찢겠다 짓겠다 내내 어여쁘겠다3) 적당한 말은 아니지만 어여쁘겠다4) 꺼진 밤, 멈춘 밤, 부러진 바늘의 밤, 위험한 커다란 돌 하나 하늘에 불꽃 튀긴 전신주 젖은 전선들 얼굴과 목이 해체된 여자 있다 모든 되는 신은 불구不具하면서 불구不拘하므로 어여쁘겠다 1) 『훈민정음』. 2) 유씨부인, 『조침문』. 3) 역사役事를 하느라고 땅을 파다가 커다란 돌을 하나 끄집어내어 놓고 보니 도무지 어디선가 본 듯한 생각이 들게 모양이 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 메고 나가더니 어디다 갖다 버리고 온 모양이길래 쫓아 나가 보니 위험하기 짝이 없는 큰길가더라. ……(중략)……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 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 시는 그만 찢어 버리고 싶더라. 이상, 「이런 시」, 『이상 전집』2, 가람기획, 2004 변주. 4) 님의 얼골을 「어여쁘다」고 하는 말은 적당適當한 말이 아닙니다. / 어여쁘다는 말은 인간人間 사람의 얼골에 대한 말이요, 님은 인간人間의 것이라고 할 수가 없을만치 어여쁜 까닭입니다. 한용운, 「님의 얼굴」, 최동호 편, 『한용운 시전집』, 서정시학, 2009 변주. ― 권박, 「어여쁘겠다」(『현대시』2024년 10월호) 전문 첫 시집 『이해할 차례이다』(민음사, 2019)에서부터 주석을 다는 방식으로 시를 써왔던 권박이 같은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제자리 뛰기다. 특히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여쁘다’라는 형용사를 사용한 글들을 조합하여 만든 이 시는 같은 자리를 계속해서 뛰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제자리를 뛸 때마다 도달할 수 있는 높이와 착지할 수 있는 범위가 미세하게 달라지는 것처럼 권박은 주석을 달며 그때마다 다른 시간과 사유에 머물렀음을 표기한다. 이 과정에서 그가 보게 된 것은 ‘어여쁘다’의 의미가 ‘불쌍하다’에서 ‘아름답다’로 달라지는 데 작용한 여성의 현실이다. 세종이 백성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만든 글자(『훈민정음』)를 가지고 “유씨 부인”이 바늘을 불쌍하게 여겨 『조침문』이라는 제문을 지었을 때 ‘어여쁘다’는 분명 ‘불쌍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작가인 유씨 부인이 누군가의 부인으로만 알려져 있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여성이라는 점, “얼굴과 목이 해체된 여자”라는 점은 ‘어여쁘다’는 말의 용례가 변화했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불쌍하고 가련함을 나타내는 말이 언젠가부터 여성의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내는 데 쓰이게 된 연유에는 여성의 비참한 현실이 작용했음을 그는 되짚는다. 그 오랜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해, 새로운 역사를 위해, 시인은 ‘어여쁘다’라는 단어 위에 계속해서 주석을 달며 지난 역사 위에 또 다른 역사적 방식의 글쓰기를 시도하려 한다. “어여쁜 사람이…… () …… 될 때까지/ 짓겠다”라고 중간말을 생략하며 어떤 것도 한정짓지 않음으로써 쓰고 찢고 다시 쓰는 방식의 글쓰기. 그럴 때마다 새로이 조명되는 여성의 역사가, 그런 역사를 되짚어 보며 새로이 만들어지는 현재와 연결된 미래가 여기 있다. 이 시를 읽기 전과 후로 우리의 생각을 달라지게 하는, 현재와 이어진 미래가. 아주 조금 다른 자리에서 네 편의 시를 읽었다. 이제 ‘미래’는 더 이상 내가 알던 멀고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바로 다음 시간. 현재와 ‘1인치 정도’ 다른 자리와 높이에 머무르는 시간. 이처럼 미래가 현재와 붙어 있는 것이라면 미래는 사실상 지금 이 문장을 쓰는 중에도 벌써 와버린 것이다. 쓰는 행위는 언제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가로지른다. 쓰는 자는 녹거나 부서지지 않고 원하는 미래로 가기 위해 제자리에서 뛰는 일을 반복하는 이들, 지난 이가 낳은 가죽을 물려 입고 또 다른 가죽을 물려주는 이들, 지난 시간이 남긴 잿가루를 묻히고 기도하는 이들, 쓰고 찢는 일을 반복하는 이들이 아닐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가리키지만 그들은 기다리지 않고 시를 쓰며 나아간다. 반복할수록 조금 더 높은 자리에서 조금 더 멀리 바라보며, 아주 조금 다른 자리에 착지하며. 우리 역시 그런 시를 읽을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가운데 미래를 산다. 1) 이 문장은 윤혜지의 「음악없는 말」(『문학동네』, 2022년 봄호)과 주민현의 「넓어지는 세계」, 「오래된 영화」(『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창비, 2023) 등을 염두에 두며 쓴 것이다. 최근 젊은 시인들이 시에서 미래를 다룰 때 자주 나타나는 이와 같은 양상은 일종의 ‘조로(早老) 현상’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상세하게 다룰 것을 기약한다. 2) 크리스티앙 보뱅, 「작은 파티드레스」, 『작은 파티드레스』, 이창실 옮김, 1984books, 2024.

월간 현대문학 송현지 안미옥정우신양안다권박미래 2025
정원 견고한 삶의 조건 ― 박참새, 배시은, 신이인의 시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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