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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신생 | 2024년 겨울호(제101호)

이야기-하기의 시학

최진석 문학평론

『건의 시학. 감응하는 시와 예술』(도서출판b, 2022) 『사건과 형식. 소설과 비평, 반시대적 글쓰기』(그린비, 2022) 『불가능성의 인문학. 휴머니즘 이후의 문화와 정치』(문학동네, 2020) 『감응의 정치학. 코뮨주의와 혁명』(그린비, 2019) 『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 미하일 바흐친과 생성의 사유』(그린비, 2017) 등을 썼고,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자음과모음, 2013) 『해체와 파괴. 현대철학자들과의 대담』(그린비, 2009) 등을 옮겼다.

1. 현실, 방법으로서의 문학


  현대 언어학의 주요 이론가 중 하나로 꼽히는 로만 야콥슨은 현대 문학이론의 창시자 명부에도 이름이 올려져 있다. 20세기 초엽 등장한 러시아 형식주의는 그가 참여했던 시학과 문학 이론 학파로서, 어떻게 시문학이 고유의 예술적 가치를 확보할 수 있는지 묻고 답하려 했던 집단이었다.1) 야콥슨과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의 예술적 가치가 언어적 형식을 통해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근대 문학이 개시된 이래 작품의 이념적 내용이 예술적 가치를 자연스레 담보하리라는 통념에 대한 도전이었다.

  20세기 비평의 문제틀을 뒤바꾼 러시아 형식주의의 문제의식은 예술적 가치의 핵심이 ‘현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현하는 방법’에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에 따르면 작가든 비평가든 현실이라는 관념에 맹목적인 우월성을 부여한 나머지 도대체 현실이 어떻게 문학적으로 재현되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가장 문제적인 것은 19세기의 특정 사조가 거의 독점해온 ‘리얼리즘’ 즉 ‘사실주의’라는 용어였다. 최대한의 개연성을 추구하여 현실을 가장 충실하게 전달하는 사조라는 사실주의의 일반적 정의는 근본적인 애매성에 봉착해 있었다.2) 무엇이 문제였을까?

  현실에 대한 충실성, 혹은 ‘그럴듯함’이라는 개연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정의된다. 첫째, 무엇을 현실이라 믿고 재현하는가, 라는 질문은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란 무엇인가에 관한 물음을 함축한다. 모든 현실은 주체로서의 작가가 마주치고 형상화하는 가운데 조형되는 대상이니 근본적으로 작가에 의해 지향된 현실, 즉 특정한 입장과 태도로부터 연유한 세계일 수밖에 없다. 둘째, 재현된 현실을 개연적이라고 판단하는 수용자의 입장도 관건이다. 수용자로서 독자가 작품을 읽을 때, 그는 작가가 재현한 현실의 진실성에 관해 판단해야 한다. 작품의 의미는 작가와 독자, 주체와 수용자의 두 시선이 마주치는 곳에서 성립한다. 이때 두 시선의 일치는 선험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개연성이 작가 입장에서는 현실에 대한 자신의 재현 방식을 가리킨다면, 독자 입장에서 그것은 자기 경험을 통해 실증되는 적합성 여부를 뜻한다. 두 시선의 교차점 어딘가에서 현실은 ‘발생’하며, 개연성은 두 시선이 교차하며 만들어 내는 규범적 결과이다. 요컨대 현실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구성의 효과를 말한다.

  ‘현실’이 일정한 규범의 효과라는 말은 ‘재현’ 역시 자연적이거나 선험적인 확실성을 담지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방법이 바뀌면 조건도 바뀌고, 현실은 다르게 구성된다. 따라서 개연성은 한편으로 규범의 준수에 대한 ‘법보존적 폭력’으로 작동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규범의 외부를 향한 ‘법정립적 폭력’으로 나아간다.3) 전자는 우리가 작품을 ‘사실주의적’으로 인지하는 규범의 조건(코드)을 강제하는 반면, 후자는 우리가 작품을 ‘무질서’로 지각하게 만드는 탈규범적 사건과 그 너머를 드러낸다. “혁신자는 어제까지만 해도 보지 못했던 것을 사물 속에서 발견하고, 지각에 새로운 형식을 부과한다.”4) 그렇게 지각에 새로운 비전(vision)을 제공하는 데서 ‘새로움’이 나타나며,5) ‘무질서’는 ‘리얼’한 것으로 동기화된다.6) 요컨대 예술의 혁신, 또는 혁명은 현실을 지각하는 방법 즉 비전의 창조에 값한다. 현실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현실적인 것인지는 예술가가 제시한 세계의 비전에 대해 수용자가 응답할 때 결정된다. ‘리얼한 것’으로서 세계는 창안된 현실의 비전에 다름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최고의 현실성을 가리키는 용어 ‘리얼리즘’은 19세기의 특정한 예술사조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예술가도 스스로를 ‘비현실주의자’라 자처하지 않고, 현실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거꾸로, 모든 예술가는 자신이 진정한 ‘리얼리스트’이고, 자신이 묘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리얼한’ 대상임을 주장한다. 그의 펜끝에 재현된 세계야말로 참된 현실이라는 뜻이다. 핵심은 어떤 방법으로 묘사된 세계가 현실성을 갖는가에 대한 답변, 곧 재현의 방법에 놓여 있다.



2. 이야기, 공동체의 조건


  모든 시대의 작가는 자신을 ‘리얼리스트’라 명명한다. 특정 시대에 속한 작가는 자기의 묘사 방법이 (유일하게) ‘리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참되고 진실한 묘사가 문제라는 점은 우리 시대도 예외로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그럼, 지금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방법에 대한 물음과 불가결하게 이어진 이 질문은 답변을 강요한다. 하지만 이를 우리 시대의 정체성이나 본질에 대한 정의와 곧장 연결하지는 말자. 그런 대답은 가능하지도 않고 부질없을 뿐이다. 한 시대를 보편적으로 대리하는 관념이나 의미는 없다. 다만 우리는 이 시대를 관류하는 특정한 분위기, 무의식적 욕망이나 집합적 감응에 대해 말할 따름이다.

  거대 서사, 즉 한 시대를 초월적으로 장악하는 이념이 비판의 도마에 오른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근대로 대표되는 거대 이념의 시대는 과학적 지식이라는 상징적 매개를 통해 이 세계에 일관성의 틀을 도입했다. 어떤 지식이 ‘과학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실험 가능하고 반복 가능하며, 객관성을 실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세계에 대한 지식을 과학적인 것과 과학적이지 않은 것으로 분류하는 기준을 제공하는 기술이 등장했다는 말이고, 그로써 해당 사회를 지배하는 통치성이 확립된다.7) 그런 ‘일관성의 틀’은 예술의 영역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가령 근대 회화의 표준적 모델을 마련한 투시법은 묘사 대상을 마음속에 상상한 격자틀에 집어넣고 분할·배치함으로써 ‘있는 그대로’ 재현하면서 성립했다.8) 투시점을 중심으로 모든 대상은 특정한 비례관계를 맺음으로써 객관성을 확보하고, 누구라도 이 틀을 공유할 수 있다면 그 작품은 ‘합리적(과학적)’ 지식으로 인정받는다.

  문학의 역사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을 문자적 질서에 담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상호 무관하게 벌어지는 숱한 사태들을 낱개의 말뭉치로 열거한 결과를 문학작품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근대 이전부터 이야기(narrative)의 형식을 통해 (‘시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소설적인 것’은 항상 존재해 왔다.9) 문제는 그 많은 이야기-조각을 한데 엮는 틀을 얼마나 총체적이고 일관적으로 주조해 내는가에 달려 있었다. 무작위성의 묘사를 넘어서, 일련의 인과적 연쇄, 그리고 통일적으로 완결된 서사를 만드는 것이 근대 문학의 과제였던 것이다.10) 비록 19세기에 접어들며 더 이상 보편성 자체가 아니라 전형적인 동시에 개성적인 것을 재현의 목표로 삼게 되었을지라도, 세계의 전부를 묘사하되 세부의 우연성만은 기필코 봉쇄해야 한다는 데서 과학과 접목된 문학의 리얼리즘이 근거했다는 점은 거대 서사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11)

  과학이 일관성의 틀을 형성하는 지위를 상실함으로써, 과학 바깥의 모든 문화적 영역이 독립성과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 시대가 ‘포스트모던’이다. 이 단어가 지금 얼마나 유효한지 우리는 논쟁할 여유가 없다. 다만, 포스트모던이 모던의 연장선에서만 사유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12) 모던 시대의 거대 서사는 미시 서사(petit récits)로 분해되고, 각각의 미시 서사는 저마다 자신의 정당성 담론으로 기능하게 되었음을 밝혀 두자. 핵심은 작건 크건 서사 자체의 형식적 기능, 즉 규범성의 형성에 있다. 모던 시대에 그러했듯, 모던 이후의 시대에서도 서사는 공동체의 의사소통을 가동시키는 조건으로 작동하고, 해당 공동체 자체를 정당화한다.13) 쉽게 말해, 하나의 공동체가 구성원들의 사유와 행동을 합당한 것으로 공리화하고, 그에 정당성을 보장함으로써 공동체의 지속과 재생산을 촉진하는 것이 바로 서사의 형식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서사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은, 현재 우리 시대가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규범화하는 형식에 대한 물음이자 답변과 같다.

근대 문학사에 비추어, 문학이 이 시대의 대표적 표상 형식이자 언술 형식의 지위를 잃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서사를 주된 표현적 양식으로 삼는 문학의 기초 존재론적 지위는 여전히 유효하다. 더구나 편집과 재현의 글쓰기 전략으로서 문학은 여전히 공동체의 규범성을 형성하고 정당화하는 데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이 점에서 문학은 현재의 공동체가 무엇을 자신의 표현적 양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시 또한 그와 같은 측면을 공유해왔다. 장르에 대한 교과서적 이론과 달리, 시는 소설과 다른 양식의 서사성을 보유하며 사회적 의사소통의 의미망을 형성해 왔다.14) 시적 서사는 소설적 서사와 다른 방식으로 직조되고 작동한다.

  이제 논의를 이끌어갈 핵심 주제에 거의 도달한 듯싶다. 시는 어떤 서사를 조직하는가? 시는 어떤 이야기를 형성하는가? 시적 서사는 무엇을 표현하는가? 최근 시 작품에서 서사적 경향의 우세라는 요소를 출발점 삼아, 시적 서사가 우리 시대를 형상화하는 모습을 살펴보자.



3. 서사, 세계상의 시적 전개


  작품을 구체적으로 읽기 전에, 우선 시적 서사에 관해 어느 정도 합의할 필요가 있다. 관행적으로 문학에 국한하여 이해된 서사(récit)는 특수하게 쓰여진 언어적 수단을 통해 실제적이거나 허구적 사건, 또는 일련의 사건들을 표현하는 행위를 말한다.15) 이 전통적 규정에 매달릴 때, 우리는 이야기하는 주체와 이야기되는 대상의 이분법에 고착되기 쉽상이며, 양자 사이에 위계를 놓곤 한다. 하지만 한 걸음만 더 나가본다면, 서사라는 형식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조건 즉 사건의 여러 관계를 반영할 뿐 아니라, 이야기하는 행위 자체를 반영한다. 우리의 주의를 끄는 곳이 여기다. 이 같은 반영은 서사의 행위와 형식이 현실과 연동되어 있고, 현실의 실제 양태를 형식적으로 포섭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요컨대, 서사는 이야기의 양식성과 더불어 시대 자체를 조건적으로 포함한다. 한편으로 서사는 시대를 반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서사는 시대를 창안한다. 특정하게 조건화된 세계의 형상화에 서사의 기능이 있다.

거대 서사가 몰락하며, 미시 서사들 곧 ‘작은 이야기들’이 이 세계를 채우게 되었으며, 그것들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이 자주 언명되었다. 국가와 민족, 사회처럼 거대한 집단의 이념과 가치 등에 천착하지 않는 시대는 개별화된 모두의 삶을 귀중하게 여긴다. 위인과 영웅의 일대기만큼이나 장삼이사의 일상도 귀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나아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까지 나름의 의미를 간직하는 고귀한 존재로 부각된다. 그러나 유일무이한 각자의 실존은 그 자체로 가시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한 서사 속에 장착될 때 존재하기 시작하며, 특정하게 가치화된다. 문제는 “세계에는 하나밖에 없는 것이 온 천지 길바닥에 무수하게 굴러다”닌다는 사실에 있다.16) 존재하는 모든 것이 황금처럼 빛난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빛나는 것으로 식별할 수 없을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모든 의미란 기실 무의미나 다름없고, 그 무엇도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니 존재가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은 동시에 이야기될 수 있어야 한다. 의미는 한정된 자원이며, 특정한 구조를 통해 무의미 가운데서 의미로서 구별된다. 보르헤스의 소설이 보여주듯,17) 모든 것을 인식하는 자는 아무것도 의미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

돌파구는 미시적인 것에 올려진 도덕적 무게추를 치우는 것, 현실을 방법적으로 바라보는 데 있다. 개별적인 것 자체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 자체가 사건들의 분절 불가능한 연쇄라 할 때, 유일무이한 사건의 순간은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처럼 의미 없는 사건들이 파편적으로 분산된 채 우리를 스쳐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 사건들에 의미가 부여되고 개별적인 모든 것마다 가치가 충전되는 것은 그 순간들이 서사를 통해 엮이고 있을 때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모아 세계 자체를 이해한다. [...] 다양한 이야기와 ‘화법’을 모아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해석하는 것이다. [...] 서사는 ‘절대로 벗을 수 없는 안경’ 같다.18)


  이야기를 통해 글쓰기를 형식화하는 것은, 특정한 굴절각과 색깔이 입혀진 안경을 쓰고 세계를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미시 서사 혹은 단편적인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안경으로서, 시가 이런 서사의 형식을 수용할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짚어보는 것은 각별한 경험이다. 요컨대 특정한 서사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이 시대의 시는 우리에게 발화하고 있다.

  최근의 시에 나타난 서사 형식은 다음 세 가지로 꼽아볼 만하다. 첫째, 시적 형식에 이야기를 삽입해 전개하는 방식. 환유적 서사의 산문 양식을 채택하되 운문의 형식성을 지킴으로써 혼합적 특성을 만들어 내는 것. 둘째, 각주와 설명적 기법을 동원해 서사를 구축하는 방식. 주석을 통해 인용이나 설명을 덧붙이는 일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최근 시의 각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것은 본문을 대체보충함으로써 서사적 세계관을 구축하는 데 사용되곤 한다. 셋째, 내용과 형식에서 산문적 글쓰기를 그대로 차용하고 운문의 양식은 최소화하는 방식. 전통적인 산문시와 유사하지만, 화법을 자유롭게 엮으면서 표현되는 세계상은 어떤 것인지 유심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 세 가지 방식이 과거의 시적 형식과 크게 다르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기교가 표현의 방식을 넘어서, 최근 시가 지향하는 세계상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 특징들을 논의해 보려 한다. 이는 새롭고 낯선 세계에 대한 ‘징후’이자 ‘경향’으로서의 표현적 형식에 관한 독해에 가깝다.


3-1. 환유와 전복되는 세계


  시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개인의 감정을 압축적인 표현 속에 담아내는 데 있다. 구체적으로, 서정시는 시인 본인을 투사한 화자의 정서를 은유나 직유 등을 동원해 드러내는 장르이다. 이때 은유는 상이한 대상들을 접붙이는 방법으로서 시적 표현의 대표적인 기법으로 각광받아 왔다. 은유는 순간적으로 강력하게 의미를 발화할 수 있으나, 행위의 사건적 연쇄를 낳는 데는 부적합하기에 서사적 구성에는 미흡하다고 간주되었다. 인접성에 근거한 환유적 서사가 산문 장르, 특히 소설에 주요하게 할당되었던 이유가 그에 있다. 그러나 서사시라는 분류 이외에도, 시 일반 또한 일정 정도 서사를 갖고 있으며, 여기서 환유는 적극적인 표현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특히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면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으로는 환유가 주축일 수밖에 없고, 이는 하나의 세계를 형상화하여 전시하는 방법이 된다.


가정주부로 살아온 자는
죽을 때도 주부로 죽는다

집안일에는 은퇴가 없으니까

내 꿈은 가정주부
사계절 일용직
시인은 비정규직이에요
저는 집이 없어요
재산도 없어요

저는 남편을 찾으러 여기 나왔어요

지금 가족은 너무 낡았어요

그러니까 내 꿈은

은퇴 없이 살고 있어요

말을 더 덧붙여야 할까요?19)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사에는 남성중심주의를 중심으로 구축된 가부장제가 놓여 있다. 남편에 대한 내조와 자식 양육을 통해 사회구성원 배출에 기여하는 데 여성의 목적을 설정하는 여성의 어떠한 개인적 성취나 의미도 부정한다. 평생을 주부로 헌신해야 하지만 “가정주부”는 “일용직”에 불과하며, “시인”이라는 예술적 성취는 “비정규직”으로 격하된다. “집”도 “재산”도 없다는 말은 여성이 시민사회의 일원이 아니라 남성 시민에 대한 부차적 위치만 차지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홈 스위트 홈”은 남성 가부장제가 이룬 근대 국가와 사회, 그것들을 지탱하는 하부 중추로서의 가족/가정이 기실 ‘다른 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에 불과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아빠는 늘 그랬던 것처럼 내 얼굴 앞에서 거칠게 거수했고, 모서리를 향해 발길질하겠다고, 겁을 줬다 단지 겁을 줬을 뿐인데내 펜은 부러졌고, 혀로
휘둘렸다

그날

나는 방 안에 꼼짝 않고 밤새 노안은 절대로 살필 수 없을 만한 크기의 글씨로 빈 바닥을 조용히 채웠다

살려주세요


  화자는 “노안”으로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작은 글씨로 “살려주세요”라는 원초적 비명을 쓸 수 있을 뿐이다. 자기 시를 널리 읽히고 싶은 시인의 꿈과는 정 반대되는 현실이 앞을 막아선 것이다. 통상적인 ‘시’의 정의로는 포착할 수 없는, 그럼에도 시라는 비실용적이고 비실제적인 글쓰기를 통해서만 삶의 진실은 표명된다. 이 작품에서 가부장제와 여성의 억압이라는 현실을 읽어내기 위해 특별한 훈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는 일상어를 자연스럽게 풀어내며 전진하고, 이어지는 시행들은 화자가 겪는 멸시와 폭력, 모멸감의 장면들을 연속적으로 전개해 보여준다. “홈 스위트 홈”이라는 제목에서 “가정주부”, “집안일”, “집”, “재산”, “남편” 등으로 이어지는 ‘아내’의 인접적 이미지와 “일용직”, “비정규직”의 이미지는 “시인”과 결합하며 기묘한 충돌을 빚어내고, “살려주세요”라는 어구에서 종결되며 여성이 경험하는 삶의 비참성을 강화한다.

  알다시피, 이 시는 2015년 이래 페미니즘 리부트를 계기로 터져나온 여성주의적 시문학의 큰 줄기에 속한 작품이다. 하나의 거대한 사회운동을 반영하고, 시대적 조류를 독해의 문맥으로 삼을 때 가장 적확하게 읽히는 이 작품은 환유적 서사를 통해 현재의 세계상을 폭로하고 이후에 도래할 세계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운문에 대해 기대할 법한 전통적인 형식을 취하긴 해도,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산문적 술어로 작성되어 있고, 그 의미론적 내용은 ‘지나간 시대’의 어두운 진실을 문제화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예기하는 것이다. 산문 특유의 자질구레한 묘사를 걷어낸 채 행과 연을 통해 화자의 독백을 잇거나 끊고, 그로써 격렬한 정서의 파토스를 연출한다는 점에서 시적 형식이 갖는 힘을 표현한다. 여성의 예속과 억압을 드러내는 문학작품은 많지만, 시적 서사가 갖는 고유함은 이러한 표현의 형식에 힘입은 것이다.

  삶의 다면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서사의 형식을 빌리는 것이 불가피하다. 전통 서정시가 갖는 압축적이고 간결한 생략의 특징과 달리, 환유를 바탕에 둔 서사는 현존하는 세계의 특정 국면을 설명하고 시적 형식을 통해 그 균열을 드러내는 데 적합하다. 우리 시대의 문학적 조류로서 소수성을 전면화하는 작품들, 특히 페미니즘 시문학의 문제의식을 드러낼 때 서사가 주요한 경향성으로 등장하는 이유도 그에 있을 듯하다.



3-2. 주석과 대체보충되는 세계


  주석은 학술적 글쓰기의 표준적 방법론으로서, 타인의 말을 인용하거나 자신의 설명 및 주장에 대한 근거를 부여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식이다. 간단히 말해, 주석은 논증을 위해 동원되는 설득의 방법이다. 따라서 창작 장르에서 주석을 다는 것은 흔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허구에 바탕을 둔 글쓰기로서 시와 소설은 무엇인가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표명을 통해 자기의 세계를 구성해 나가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환유적 연쇄를 이용해 서사를 구축하는 소설의 경우,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여 문단을 만들고, 장과 절을 직조함으로써 주석이 갖는 논증의 특성을 본문 중에 구현하게 된다. 즉, 수많은 개별 이야기 다발을 길게 엮어서 인물과 그를 둘러싼 인적이고 사회적인 환경, 나아가 시대사적 배경까지 묶어내고,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글쓰기가 소설인 것이다. 반면, 행과 연을 통해 단어와 어구를 잇고, 인물과 사건의 전체성이 아니라 특정한 장면을 구성해 전개하는 시적 서사에서 주석은 다르게 기능한다. 완성된 문장에서 빠진 부분들,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서술되지 않는 부분들을 보충적으로 이야기하고, 이로써 형상화된 세계상의 빈틈을 메우고 또 완성하는 것이 시에 나타나는 주석이다.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 앵무새를 키웠다. 앵무새가 나의 얼굴에 부리를 그었다. 총을 쐈다. 앵무새처럼 밝음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저, 태양에게. 다량의 수면제를 먹였다. 코뿔소처럼 밝음을 전투적으로 보여주는 저, 태양에게. 또, 실망이 나팔꽃 줄기처럼 뻗어 나간다. 이번에는, 눈물이 레몬처럼 달고 얼음처럼 따뜻하다. 내가 되기 위해 나를 따라했던 나는, 줄줄…… 잠시만요, 찬장에, 찬장에서…… 쌓아 놓았던 썩은 양파 같은…… 눈물이 깎은 손톱처럼…… 이를 어쩌나? 어떻게 해도 말끔하게 청소되지 않은 슬픔이 기진맥진한 채 천장 안쪽에 있는 포름알데히드 병을 꺼낸다. 잿빛으로 질질 떠다니는 살점이다. 실패의 모습이다. 코를 찌르는 본능이다. 정전이 되었던 신경이다. 내가 가장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오늘이 컷, 되어도 오늘인 이유를 물어보는 건 실패에게 “왜 충실하지 못했니?” 물어보는 것과 같지 않나?20)


  산문 형식으로 쓰여진 이 시는, 서술된 형태나 내용 자체로는 화자의 본의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 어렵다. “앵무새”는 반복되는 어떤 언표나 상황(“밝음”)을 뜻하는데, 대개 긍정을 표상하는 “태양”의 함의가 그것과 어떻게 연계되는지는 불분명하다. 후반부를 뒤덮는 “포름알데히드 병”과 “살점”, “실패”의 언표은 “죽음”과 결합함으로써 글 전체의 어두운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제목(“리스트 컷”)과 부제(“죽음에 대해 알아 갈수록 죽음과 나와의 거리를 직시하게 될 것”)는 이 작품의 주제가 자신을 향한 물음과 답변에 대한 치열한 요구임을 직감하게 만들지만, 본문 자체만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이런 본문의 불확실성을 보충하면서, 전반적인 주제를 보다 명료히 만들어주는 것이 첫 문장의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에 붙은 주석이다. 무려 두 페이지에 걸쳐 이어지는 주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 자살했다. “나와 함께 나라는 인간을 속속들이 파고들어 분석하고 마침내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도록 도와줄 만큼 한가한 사람은 없”으니까. 자살은 “아기”니까. 최근 고안한 자살 방법은 지금까지 썼던 방법 중 가장 마음에 든다. 칼이란 칼은 모두 꺼내 식탁에 올려 놓은 다음 천장 안쪽에 있는 포름알데히드 병을 꺼내 칼들 사이에 놓는다. 그리고, 본다. 나는 나의 살점이 떠다니는 포름알데히드 병을 보는 동안의 나는 “엄마의 자궁 속으로 도로 기어들어가”고 있는 중인 나다. “사산한 내일의 작은 기형아들이 옹기종기 누워 있는” 엄마의 자궁 속에 있다 보면 “기진맥진한 불면의 혈액이 혈관 속에 질질 기어다니고, 공기는 비로 탁해져 잿빛으로 변해 버리고, 길 건너에 사는 빌어먹을 난쟁이들은 죄다 몰려와 도끼며 송곳이며 끌 따위로 지붕을 퉁탕퉁탕 두들기고 있고, 타르의 지옥 같은 악취가 코를 찌”르는 상태가 되는데, 그 상태로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을 다시 재현”해 보면서 “버지니아 울프는 왜 자살했을까?” 생각한다. “사라 티즈데일을 비롯해 그 수많은 영민한 여성들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신경증 때문에? 그들의 글은 과연 깊은 본능적 욕구의 승화(아, 이 끔찍스런 단어)였던 것일까? 그 해답을 알 수만 있다면. 내가 삶의 목표를, 삶의 조건을 얼마나 높이 내걸어야 하는지 알아낼 수만 있다면!” 그러나 이번에도 해답을 찾지 못한 나는 “칼을 서투르게 들고 휘”두르며 “칼처럼, 몸을 돌릴 때마다, 칼을 중심으로 돌면서, 펄떡펄떡”거리다가, “펄떡펄떡” 떨어져 나가는 살점에 흠칫 놀라 칼을 떨어뜨려 버리고 만다. 또, 실패구나. 용의주도하지 못했기에 “실패 속에서도 더듬으며 열심히 파악해 보고자 하지만, 도체체 어쩌다”이렇게 되었을까? 자책하게 된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자살은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믿기에, 떨어져 나간 나의 살점을 포름알데히드 병에 넣으며 “내 평화와 온전함에 친절하게 굴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칼로 벤 상처에 더욱 충실”할 것임을 다짐한다. “지금까지 나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이미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버렸으니, 칼에 찔렸던 상처도 금욕한다 해서 더는 치료될 수 없”지 않겠는가?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 자살했다.”고 말했고, 당신은 그런 나를 『실비아 플라스에게 빠진 여자』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7)라고 치부하며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The Journals of Sylvia Plath)』를 옮겨 적는 나를 “이해 할 수 없다”고 “미쳤다”고 “제발 현실을 직시하라”고 “모욕을 가했”다. 나는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의 말을 “진실”이라고 “전적으로 믿게”되는 걸 어떻게 하느냐고 그러므로 그와 같은 방식으로 “흉측스런 징표와 흉터를 뺨에 달고 무덤에서 뛰쳐 나오는 일이 주는 감각적 매혹”으로 “죽음에 아주 가까이 다가갔”을 뿐이라고 어차피 “내일은 죽음으로 향한 또 하나의 하루”일 뿐이라고 말했고, 당신은 어떻게 “몽산가들이 꿈꾸는 것은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냐고 말했다. 당신이 나의 어머니처럼 나를 “수치”스럽게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나는 “뻔뻔스럽고 당돌”하게 자살할 것이다. “결국 이 세상은 남자들의 세상이라는 사실로 다시금 귀결”되고 “여자로 태어난 게 나의 끔찍스러운 비극”이기에, “페니스와 음낭이 아니라 가슴과 난소의 싹을 틔울 운명을 타고”나 “엄격한 관계 속에 갇혀” 버렸기에, “기껏 남의 정서를 맡아 관리해 주는 관리인이나 아기 보는 사람, 남자의 영혼과 육체와 자존심을 먹여 살리는 유모 노릇이나 해야” 하기에, 죽음에 대해 알아 갈수록 죽음과 나와의 거리를 직시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로 시작하는 주석의 첫 문장은 본문의 첫 문장과 같다. 어쩌면 본문과 주석이 상호 호환되는 두 세계를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주석의 글자 수가 본문보다 많으며, 더욱 구체적인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주석과 본문 모두 구조적으로 완성되거나 자족적인 전체를 이루지는 않고, 서로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읽힘으로써 전체적인 주제의식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21) 나아가, 이를 통해 ‘자기에 대한 물음을 위한 자기의 답변’이라는 정체성의 문제를 돌파해 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여성의 삶과 자기의식이 남성중심적 사회 속에서 오랫동안 억압되었고, 이는 사회적 진출이라는 외적 측면에 대해서나 자기 정체성 형성이라는 내적 측면에 대해서도 부정적 효과를 미쳤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남성주의적 서사는 남성이 스스로의 결단과 결의를 통해 주체화되었음을 선포했지만, 여성은 그 같은 질문에 답하기에는 부적합하고 미달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이 시는 “나에 대해 말하기”, 즉 여성의 자기 형성에 관한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이기 위해 쓰여졌다. 그에 대한 답변을 본문에서는 시적 형식을 통해 전경화했고, 주석을 통해서는 그것이 참조해야 할 사회‧역사적 맥락을 만들어 후경화했다. 본문과 주석은 각각 여전히 미완성과 불완전성에 머물러 있으나, 서로에게 섞여 들며 지향된 상태로 나아갈 여지를 열고 있다. 그것은 근대의 남성중심적 서사가 만들었던 길과는 다른 여정을 예고하며, 낯선 세계의 도래를 알리는 미-래의 흔적일지 모른다. 요컨대, ‘대체보충적 서사’라 명명할 만한 이 글쓰기 스타일은 낡은 세계의 기각과 새로운 세계의 전진을 본문과 주석이 벌이는 이중의 운동 속에서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3-3. 대화와 (재)창안되는 세계


  문학작품에서 대화를 독립된 문장으로 표현하게 된 것은 화법이 발전하게 된 이후의 일이다. 가령, 간접 화법 속에 포함되었던 제3자의 말은 직접 화법 곧 따옴표 속 문장으로 분리됨으로써 온전히 누군가의 소유격 언표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다시 여러 행에 걸쳐 교차하는 대화 표시 구문의 연쇄를 통해 타인들 사이의 언어적 소통으로 현시된다. 개화기 초의 신소설이 잘 보여주듯, 근대 소설이 정립되기 전까지는 ‘너’와 ‘나’ 사이의 언어적 경계가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하지만 ‘너’든 ‘나’든 ‘그/녀’든, 언표하는 주체 사이에서 ‘누구의’라는 소유격이 확실하게 규정될 수 있는 말이 과연 가능할까? 일견 엉뚱해 보이는 이 질문은, 말과 사유의 본원적인 특성에 관해 묻는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사유하고 말로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언어를 창시한 자는 없다. 개별적 자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언어는 존재했고, 기능했다. 태초의 언어가 있었으리라 가정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소유격을 통해 확정되는 소유물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들 사이의 대화는 물론이고, 개인의 독백적 사유에서도 언어는 대화 및 사유의 주체에 속한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체의 외부, 바깥으로부터 틈입한 이물질에 가깝고, ‘나’보다는 ‘세계’의 사물성에 근접해 있다. 그러니 사유든 대화든 ‘주어’라는 소유주, 또는 소유의 주체가 존재한다는 가정은 착각에 다름 아니다.

  문학작품, 특히 소설이 당연하게 전제하는 대화의 형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다만 끊임없이 서로를 침범하고 섞여 드는 타자성의 말들, 혼종성의 언표들이다. ‘자유 간접 화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낯선 말의 흐름은 새로운 언술을 요청한다. 문법화와 탈문법화가 길항하는 가운데 새로운 발화의 형식이 탄생하는 것이다.22) 그것은 무엇을 새롭게 구축하는가?


구로동 2길 23번지 옵션 완비 명찰 달고 오늘의 일자릴 찾는다 찾는데 저건 똥인가 쏘아 올린 별이긴 한데 잡히질 않아요 3번 출구 쏟아지는 사람들인가 깜빡하고 켜지는 쪽문 센서등인데 꺼져버려 나의 밝은 비애라 말할까
경계는 부수고 깨고 쓰러지는데 자리가 없대요 바닥은 아니라잖아 서 있지 말라잖아 거기 밀지 말라잖아 누구야 어깨 치지 말라잖아 기다리라잖아 반토막이라잖아 파버린다 동태눈깔 내리깔라잖아 노려보면 어쩔 건데 찔러보면 어쩔 건데 옆에 그 옆에서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가 뭉근하게 파고들기도 했다가 길 건너 서성이는 신호등을 바라본다
전단지를 길 건너 서성이는 입간판을 서성이는 공구들을 서성이는 잿빛 여인숙을 서성이는 배낭을 길 잃은 사람들을 길 찾는 사람들을 서성이는, 서성이는 삼팔씨들 서성이는 삼구씨들 서성이는 것들 죄다 어디로 가라는 거야 니미, 검었다가 노랬다가 반짝들 하고 자빠졌네23)


  새벽녘,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일용직 노동자의 눈에 비친 거리가 흐릿하게 엿보인다. 명확한 지명을 뇌까리며 하루가 시작되었지만, “오늘의 일자릴 찾는다”라는 문장에 담긴 일회성과 단기성은 하루의 운수를 별똥별에 점쳐야 할 정도로 불확실성에 젖어있다. 아침이 되니 당연하게 꺼지는 “센서등”임에도, 그로부터 하루 일진을 체념해도 좋은 “밝은 비애”가 넘치는 상황이다. 그야말로 당일만 바라보며 매일을 버텨야 하는 비정규 노동의 비참함이 극대화된 시가 아닐 수 없다.

  이 시는 단기 노동자의 불안과 우울을 묘사하는 데만 바쳐진 것이 아니다. 두 번째 문단부터 이어지는 문장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일감을 기다리는 노동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자리다툼을 형상화한 듯한 그 문장들은 누구의 것인지 특정할 수 없는 무수한 대화의 연속이고, 그것들은 운을 맞추며 서로에게 다시 연이어지는 풍경을 연출한다. 지시적 의미들로 짜맞춰진 의사소통이 아니라 하루에 대한 기대와 초조함,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감응의 전파 및 흐름을 보여주는 대화이다.24) 이는 다음 문단에서도 변주되어, 감응의 또 다른 (탈)의미적 연쇄를 개시한다.


전단지를 길 건너 서성이는 입간판을 서성이는 공구들을 서성이는 잿빛 여인숙을 서성이는 배낭을 길 잃은 사람들을 길 찾는 사람들을 서성이는, 서성이는 삼팔씨들 서성이는 삼구씨들 서성이는 것들 죄다 어디로 가라는 거야 니미, 검었다가 노랬다가 반짝들 하고 자빠졌네


  앞 문단에 잠깐 비치던 동사 “서성이는”이 본격적으로 이 문단을 지배하고 있다. ‘한 곳에 멈춰서지 않은 채 주위를 배회한다’는 뜻의 ‘서성이다’는 “전단지”와 “입간판”, “공구들” “잿빛 여인숙”, “길 잃은 사람들”과 “길 찾는 사람들”, “삼팔씨들”, “삼구씨들” 전체를 휘감아 돈다. 기이하게도, 이 명사들이 해당 동사의 주어로 사용된 것인지, 혹은 목적어로 사용된 것인지 알기는 불가능하다. 문장의 성분을 따지고, 대화 속 문법이나 어법을 검토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특정되지 않은 채 주변을 어슬렁대며 알 듯 모를 듯 흐르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일용직 노동자에게 하루하루는 동일하면서도 항상 다른 것이듯, 이 세계는 혼돈스러우면서도 바로 그처럼 변화한다는 사실의 동일성으로 인해 진리를 갖는다. 영원히 차이나는 것만이 되돌아온다는 니체의 금언처럼, 인간과 사물, 세계를 배회하면서도 완전히 포착되지 않은 채 항상 흐르는 무엇인가가 ‘있다’. 근대적 노동의 잉여이자 여백인 ‘이곳’에서 서로서로 구별되지 않은 채 서성이는 인간과 사물 전체는 이전과는 다른 존재의 양식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대화에서 무엇이 주어이고 목적어인지, 동사는 적법하게 쓰인 것인지 따질 필요가 없듯,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할 발화의 원점 또한 누구/무엇인지 적시할 이유가 없다. “나는, 이름이 없어요”.



4. 징후의 서사, 출발과 몰락 사이


  최근, 어쩌면 ‘MZ’라고 불리는 시인들이 구사하는 시적 표현들이 어떤 특징을 갖는 것인지, 어떻게 의미 규정될 수 있는지 검토하는 작업은 문학사의 세대론적 특수성에 관한 문답이면서도 그 경계를 벗어나 있다. 먼저 세대론적 문답이 온당한지 생각해 보자.

  대략 1980년대 초에서 2000년대 초에 태어난 ‘밀레니엄 세대’와 199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에 태어난 ‘Z세대’를 아우르는 용어인 ‘MZ’는 세대론적 진폭이 너무 크다. 출생 연수만 따져도 근 30년 동안 태어난 이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고, 중간의 십여 년 정도는 겹쳐 있기에 누구를 ‘M세대’로 분류하고 누구를 ‘Z세대’로 넣을 것인지 대단히 주관적이다. 더구나 ‘MZ’라는 명명 자체가 상업주의적 시장 논리에서 유래했으며, 대중문화 속에서 호사가적 관심사에 휘둘리기 쉽상이기에 시사(詩史)의 객관적 지표가 될 수 없다. ‘MZ세대’에 속해 있기에 시적 표현의 특수성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시적 표현의 특수성을 소구하다 보니 ‘MZ’라는 기표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일부의 시인들을 분류하기 위해 ‘MZ’라는 레테르를 사용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지 모른다. 문학사에는 다양한 명명과 구별의 기호들이 넘쳐났었고, 현재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MZ’라는 레테르는 사후적 시점에서만 유효한 기표로 남을 공산이 크다.

  시적 표현의 낯선 경향을 세대론적 분류 이상의 관점에서 점검해야 할 이유는 다른 데 있다. 한편으로 이는 근대 문학의 오랜 분류법과 관행, 규범의 후퇴와 관련된 현상이다. ‘근대’ 자체를 획정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대략의 큰 그림을 그려볼 수는 있다. 16세기 이후의 오백여 년 정도가 그에 해당한다. 나아가, 서구에서 근대 문학의 정립 자체는 17-18세기 고전주의나 19세기 낭만주의 이후의 일로 산정되곤 했다. 동아시아의 경우를 따져 보면, 서구적 근대성이 도입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고, 한국의 경우는 20세기 초 식민지 시대부터였다. 따라서 한국 근대 문학, 시문학의 성립사는 백여 년 정도의 시간으로 충분할 것이다. 글의 서두에서 논의했듯,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서구와 동아시아, 한국에서 모두 근대성의 퇴조가 언명되었다. 여전히 근대의 연속적 지대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그것을 넘어서는 징후 또한 완연한 시대가 지금이다. ‘문학의 죽음’이 운위된 지도 한참 전의 일이며, 그것은 근대 문학이라는 제도의 해체를 핵심으로 둔다는 점에서 근대성 일반의 해체와 결을 같이 한다. 문학적 글쓰기의 ‘낯선 경향’을 말하기 위해서는 이 ‘제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무엇이 문학적이고 문학적이 아닌지를 결정짓는 기제가 바로 그 제도에 있는 탓이다. 근대 문학의 개념과 범주가 작동하지 않는 시점에서 ‘문학의 낯설음’은 이전의 문학이 규정할 수 없는 ‘낯선 글쓰기’, 혹은 ‘문학’이라는 명명조차 불가능한 시대적 단초를 드러낼 것이다.

  근대의 끝, 그 너머는 다만 ‘포스트모던’, ‘탈근대’ 등으로 표지되는 지점을 벗어나 버렸다. 우리가 마주한 것은 ‘인류세’, ‘기후위기’로 표징되는 지질학적 위기의 시대이자 지구사적 전환의 시대이다. 우리가 근대 문학이라 불렀던 글쓰기의 양식과 장르 분류, 형식 등은 비단 사회적 제도의 한 시대뿐만 아니라 지질학적으로도 특정하게 규정되는 시대의 인간학적 사실에 속한 것이었다. 문명사적 발전이나 문화적 흥기의 징표처럼 여겨지던 근대 문학의 특성은, 지금 우리가 마주한 시대적 변천을 맞이하여 몰락하고 소멸할 계기에 근접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같은 변천을 의미화하는 것, 포착하고 사유하여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파악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글쓰기를 통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25) 서사, 그러니까 이야기-하기는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하며, 지금-여기의 사태를 서술하기 위해서라도 작동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근대 이성애와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의 종말, 자본주의적 노동의 종언 등에 대해 또 다른 방식으로 발화함으로써 새롭게 도래하는 시대를 포착하는 사유-하기와 말-하기의 표현형식에 이야기-하기가 있다.

  시적인 것은 늘 예지의 형식으로 존속해 왔다. 고대의 탄생과 종막, 중세의 가을과 근대의 여명, 그리고 황혼에 이르기까지 시적 언명은 낯설음을 감지하고 그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앞서 살펴본 작품들이 그 같은 예언의 고동일지, 또는 잘못 짚은 오해의 한 자락에 불과할지 당장은 알 수 없다. 지금은 그저 그들이 내는 또 다른 목소리에 괴롭게 귀 기울이는 수고만이 언젠가 우리를 위로하리라 믿을 뿐이다.

  • 1) lieter Steiner, Russian Formalism. A Metalioetics, Cornell University liress, 1984, li. 15-43
  • 2) Роман Якобсон, “О художественном реализме,” Работы по поэтике, Прогресс, 1987, li. 387.
  • 3) 자크 데리다, 『법의 힘』, 진태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88쪽. 법과 사회/공동체의 관계를 다루는 이 논리는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 가능하다. 개연성이 선험적으로 규정된 척도가 아니라면, 이를 달성하기 위한 현실 재현/표현의 방법에 따라 개연성의 의미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 4) Якобсон, “О художественном реализме,” li. 388.
  • 5) Victor Shklovsky, “Art as Technique,” Russian Formalist Criticism. Four Essays, University of Nebraska liress, 1965, li. 22.
  • 6) Якобсон, “О художественном реализме,” li. 388.
  • 7)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 유정완 옮김, 민음사, 1992, 41-49쪽.
  • 8)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알베르티의 회화론』, 노성두 옮김, 사계절, 1998, 69쪽.
  • 9) Mikhail Bakhtin, “Forms of Time and of the Chronotolie in the Novel,” The Dialogic Imagination, University of Texas liress, 1981, li. 84-258.
  • 10) 윌리스 마틴, 『소설이론의 역사』, 김문현 옮김, 현대소설사, 1991, 85쪽.
  • 11) 스테판 코올, 『리얼리즘의 역사와 이론』, 여균동 편역, 미래사, 1986, 84-89쪽.
  • 12)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 180쪽.
  • 13)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 69-79쪽.
  • 14) 러시아 형식주의는 일상어를 폭력적으로 전유함으로써 시어를 창안해 낼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런 경우조차 일상어는 시어의 질료적 바탕을 이룬다. 이로써 시적 언어는 해당 공동체에 낯설음과 새로움의 감응을 일으키는데,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준다(affect and be affected)’는 감응의 현상 자체가 이미 사회적 의사소통의 양상인 것이다. 조지 레이코프·마크 터너, 『시와 인지』, 이기우 외 옮김, 한국문화사, 1996, 266-267쪽. 같은 의미에서 서정적 발화는 개별 화자의 표현 이상으로, ‘다수 화자의 공동적 표현’일 수 있다. 디이터 람핑, 『서정시: 이론과 역사』, 장영태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4, 105쪽.
  • 15) 제라르 주네트, 「서술의 경계선」, 『현대 서술 이론의 흐름』, 석경징 외 옮김, 솔, 1997, 13쪽.
  • 16) 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김경원 옮김, 이마, 2016, 26쪽.
  • 17)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억의 천재 푸네스」, 『픽션들』, 민음사, 1994, 187-188쪽.
  • 18) 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60-61쪽.
  • 19) 이소호, 「홈 스위트 홈」, 『홈 스위트 홈』, 문학과지성사, 2023, 30쪽.
  • 20) 권박, 「리스트 컷(wrist cut) — 죽음에 대해 알아 갈수록 죽음과 나와의 거리를 직시하게 될 것」, 『이해할 차례이다』, 민음사, 2019, 15쪽. 이어지는 주석은 16-17쪽에 걸쳐 덧붙여져 있다.
  • 21) 데리다의 용어에서 유래한 대체보충(suliliélment)은, 이 작품을 통해 말하자면, 주석이 본문을 보완할 뿐만 아니라 완성한다는 의미에서 필수불가결한 대체/보충물임을 시사한다. 주석 없이 본문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고, 주석을 통해서만 주제를 구현할 수 있으며 비로소 완결체로도 드러난다. 이 점에서 대체보충은, 통념과 달리 중심적인 것이 주변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깊숙이 의존하며 전제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역설의 사유이다. Jacques Derrida, Of Grammatology, The Johns Holikins University liress, 1974, li. 144.
  • 22) Михаил Бахтин, Марксизм и философия языка, 2-ое изд., Л.: 1930, li. 122.
  • 23) 이용훈, 「남구로역」, 『근무일지』, 창비, 2022, 86쪽.
  • 24) “노려보면 어쩔 건데”에서 시작되는 주석이 흥미롭다. 반페이지 정도를 차지하는 이 주석은 본문을 보충하는 내용도 아니고, 특정한 인용이나 논증을 위한 것도 띠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외전(外傳)과도 같은 ‘다른 이야기’를 파생시켜 노동자의 감응이 어떤 형식으로든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좋(다)’를 변용시켜 의미의 양가성을 노정하는 부분이 특히 이채롭다. “좋나”는 표기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실제 발화와 독해를 통해 ‘좃나’로 읽힐 수 있고, 이는 노동자의 사유와 대화에서 긍정성과 부정성이 혼합되어 또 다른 긍정성으로 나아갈 여지를 열어준다. 양가적 웃음이 창출하는 세계상이 여기 있다.
  • 25)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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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또 같이 열어가는 염려의 공간 ―2025년 봄의 시 “이름이 있지만 이름이 지워진 것들의 목록을 골똘히 떠올렸고” (이은규, 「귤락」, 『딩아돌하』 2025년 봄호) 황선희 2025년 봄은 정치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계절이었다. 민의를 등진 기득권 카르텔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속속들이 장악해 왔는지 매번 확인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 나날이 팽창했다. 부풀 대로 부푼 담론의 장에서 광장이라는 공간을 의미화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지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계간지들은 발 빠르게 ‘역사적 사건과 시, 그리고 지금’(『딩아돌하』), ‘내란, 광장정치’(『문화/과학』), ‘탄핵-일지’(『문학과사회 하이픈』), ‘K민주주의의 약진’(『창작과비평』), ‘12․3 내란일지’(『문학동네』) 등의 특집을 꾸리며, 광장정치의 한가운데에서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의 가치를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 계절의 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광장정치가 현실의 중심에서 요동치는 가운데, 이 계절의 시들은 다시 열린 광장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더디고 조심스럽게, 말해지지 못했던 것들의 감정과 기억을 불러내고 있었다. ‘귤락’의 이름을 떠올리는 이은규의 시적 주체처럼, 이번 봄의 시들은 사라진 이름과 묻힌 말들, 소리 없는 침묵의 감정을 발굴하고 목록화하려는 시도를 보여 주었다. 특히 나희덕의 「광장의 재발견」과 진은영의 「광장」은 이와 같은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두 편의 시는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의 소산이 아니라 광장을 구성하는 감각의 지형과 그 속의 관계, 윤리를 되묻는 섬세한 언어의 실험이다. 4.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 TV 앞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다행히 계엄령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지만 모두들 충혈된 눈으로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여의도로 달려갔다 인파를 헤치고 서둘러 깃발을 찾아가다가 도로 경계턱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내 몸을 경찰 두 명이 일으켜주었다 부축을 받으며 뒷골목에서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통증과 오한이 심해진 나에게 경찰은 제복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이었다 아들보다도 어린 그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여의도에서의 또다른 발견이었다 5. 정치는 길을 잃고 나는 발을 헛딛고 말과 입김은 무성하게 흩어졌지만 오래 잠들어 있던 여의도는 목소리들에 의해 깨어났다 공원은 다시 광장이 되었다 ―나희덕, 「광장의 재발견」(『문화/과학』 2025년 봄호) 1) 부분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 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모여들었지 ―진은영, 「광장」(『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나희덕의 시는 ‘여의도’의 공간적 변화를 사유하는 일로 시작한다. 과거 광장의 정치가 활발하게 일어나던 여의도는 시민공원으로 조성되며 비정치적 공간으로 탈바꿈했지만, 12‧3 계엄이라는 사건을 통해 다시 ‘광장’으로 재소환된다. 신작 시집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에 엮이기도 한 위의 시에서 시적 주체는 여의도의 장소성을 복원함으로써 광장이라는 물리적 장소가 시대적 맥락에 따라 어떻게 재의미화되는지 보여 준다. 그는 12‧3 계엄 이후 여의도를 찾았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만다. 그런 그의 곁에 다가와 ‘나’를 일으켜준 건 다름 아닌 두 명의 경찰이었다.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을 건넨 경찰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하다. 경찰이 건넨 온기는 광장에서 대립하고 있는 존재들 사이에 잠깐 열린 ‘틈’, 공동체적 감각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광장에서 공원으로, 다시 광장으로 ‘재발견’된 여의도에서 시적 주체는 시민과 대치하고 있던 경찰 또한 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또다른 발견’을 한다. 결국 이 시는 광장이 단지 단선적인 대립의 공간이나 정치적 목소리의 공간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감정과 책임이 교차하는 장소로 다시 의미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광장은 발을 헛디딘 ‘나’의 자리인 동시에 미안한 눈빛의 타자가 건넨 온기의 장소이기도 하다. 정치의 격랑 속에서 시는 감각의 정치, 윤리의 광장을 다시금 상상하고 있다. 진은영의 시는 여성의 존재와 연대를 ‘광장’이라는 장소에 다시 위치시킨다.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라는 전반부에서 시는 ‘승리’와 영웅서사에서 배제된 여성들에 주목한다. 그들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모여들었”지만, 완결된 공동체를 이루지 않는다. 이 느슨한 집합은 강고한 상징 체계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장소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앞서 살펴본 나희덕의 시가 광장으로서의 여의도를 재맥락화하고 대치 속 ‘틈’과 ‘온기’를 발견했다면, 진은영의 이 시는 각기 다른 삶의 조건을 가진 존재들이 느슨하게 모여드는 연대의 장을 상상하게 한다. 시적 주체는 ‘화관으로 엮이지 못한 잎사귀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여성적 광장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2)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있다. 이때 광장은 전투나 외침의 장소라기보다는 잠정적이고 열려 있는 연대의 공간으로 다시 그려진다.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 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사람들이 따로 잠을 자고 따로 아이들을 기르고 따로 집을 짓고 숲과 강가에 경계선을 그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 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 따로 정복자가 되고 노예가 되고 따로 부유한 사람이 되고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함께 책을 읽고 사상을 발명하고 꿈을 꾸던 사람들이 따로 나라를 세우고 따로 혁명과 전쟁을 일으키고 따로 친구가 되고 적이 되었다 함께 나를 매혹시켰던 말들이 따로 나를 조롱하며 떠나갔듯이 그렇게 함께 그렇게 따로 세계는 낡아갔다 ―이경임, 「그렇게 함께 따로」(『문학인』 2025년 봄호) 이경임의 시는 광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공동체의 기원과 해체, 연대의 형성과 파괴를 장구한 인류사적 스펙트럼 속에서 되묻는다는 점에서 앞선 시들과 공명한다. 시는 반복되는 구절 “함께”와 “따로”를 통해, 인류가 공유했던 감각의 원형에서 점점 분절되고 분열된 세계로 이행해 온 과정을 간결하면서도 묵직하게 서술한다. 첫 연에서 사람들은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존재들로 그려진다. 그러나 2연에서 시는 경계선을 긋고 “따로” 살게 된 공동체의 붕괴를 포착한다. 이와 같은 전환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라 할 수 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라는 구절은 인간의 기술과 협력의 진보가 어떻게 파괴의 도구로 전도되어 왔는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함께”는 더 이상 긍정의 언어가 아니라, 공동의 폭력과 파괴를 가능케 한 이율배반적 형식으로 작용한다. 마지막 연 “그렇게 함께/그렇게 따로/세계는 낡아갔다”는 반복과 퇴행,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감정적 유산을 응축하고 있다. 이 시는 지금의 정치적 현실뿐 아니라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감정 윤리와 공동체적 감각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인간이 ‘함께’라는 말 아래 어떻게 ‘따로’가 되었는지 되묻고, 그로 인해 낡아가는 세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여 준다. 이로써 감정의 정치학을 역사적,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확장한다. 매년 11월이 돌아오면 페루 사람들은 죽은 자의 넋을 기린다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장만하고 온 가족이 이틀간 죽은 자들과 함께 산다 산 자들은 아파트형 묘지를 찾아 꽃을 바치고 담배를 피워 악귀를 물리치고 브라스밴드에 맞춰 노래하고 춤춘다 매년 11월 초하루 페루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난다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한다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 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 산 자가 죽은 자의 얼굴 사진을 고이 모신다 먼저 떠난 자와 나중에 따라갈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 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 ―이문재, 「죽은 자의 날―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이문재의 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하는 축제를 통해 공동체의 가장 깊은 층위라 할 수 있는 정동과 기억의 공동체를 회복하고 있다. 특히 ‘함께’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던 공동체적 감각이 ‘따로’로 분열되어 온 이경임의 시와 나란히 놓을 때, 이문재의 시는 또 다른 방향의 회복 서사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시는 페루의 11월, ‘죽은 자의 날’을 배경으로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문화를 묘사한다. 영화 <코코>(2018)로도 잘 알려진 이 축제는 흥겨운 춤과 노래의 감각으로 구성된다. 위의 시에서 망자의 넋을 기리는 것은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하는 적극적 실천으로 의미화된다. 특히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라는 구절은, 기억과 이미지, 감각의 윤리가 어떻게 공동체 구성에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마지막 연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는 시 전체의 윤리적 핵심을 밝힌다. ‘자유’는 더 이상 개인주의적 해방이나 정치적 권리의 언어가 아니라 타자, 그것도 이미 죽은 자의 존재조차 공동체 속에 포섭할 수 있는 연대의 감각으로 재정의된다. 그렇다면 이 시는 2025년 봄, 광장에서 실종된 감정의 언어와 윤리적 상상력을 되찾으려는 시적 실천으로도 읽힐 수 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의 이미지야말로, 기억의 연대, 감정의 공공성, 존재의 환대를 담보하는 미래의 광장을 예비하는 것이 아닐까. 한 달 동안 비워둔 내 방, 급히 잘라서 꽂아놓고 나온 구석의 파란 몬스테라가 유리 물병 속에서 잘 크고 있는지 걱정이다 지난번 쓴 시가 마지막 작품은 아닌지 끄적거리고 있는 이 시를 완성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머니 칠십에 처음으로 집주인이 된 낡은 일층 빌라가 걱정이다 길 건너 천변이 보이고 가을 되면 불어난 냇물 소리가 들릴 거라고 좋아하셨는데 지구온난화가 초가속화되어 부모님 생전에 집이 물에 잠기면 어쩌지? 마요네즈 범벅의 감자샐러드를 좋아해서 걱정이다 달고 진한 카페라테를 좋아해서, 비건이 못 되어서, 국회의사당에 검은 헬기가 날아오던 그 밤이 안 끝날까봐, 역사가 건망증 환자일까봐서 걱정이다 오늘밤 별이 지는데 한 사람을 죽여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정말 걱정이다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 두번째 대홍수의 날들에 천변 옆 낡은 빌라와 팔레스타인의 팔다리 없는 아이와, 숲을 따라 릴레이 선수처럼 달려가는 산불을 역사와 어머니의 심해져가는 건망증을 즐겨 쓰는 필기구의 단종 여부와 부활절 달걀들을 까맣게 칠하는 나의 증오심을 걱정하는 나여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그러니 나는 무수한 걱정, 무수한 불안, 무수한 죽음, 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다 그 밤의 일이, 두붓값 오르는 일이 일조지환인지 종신지우인지 분간 안 가는 걱정 속에서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 삶, 삶, 삶이여 슬픔이여 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 나의 소유자다 ―진은영, 「걱정의 소유자」(『문학동네』 2025년 봄호) 진은영의 「걱정의 소유자」는 앞서 논의한 시들과 달리, 어떤 특정한 공동체적 장면이나 외부적 사건을 서사화하지 않는다. 대신 시적 주체는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라는 다종다양한 걱정의 목록을 나열하며 오늘날 주체 내부에 축적된 정동의 무게를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걱정’은 단지 사소한 불안의 나열이 아니라, 세계의 모순을 감각하는 자의 정서적 앎의 형식이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시적 주체가 스스로를 “무수한 걱정,/무수한 불안,/무수한 죽음,/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시적 주체는 단일한 정체성이나 확고한 윤리적 기준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감정들의 복합체로 존재한다. 나날의 무력감 속에서도 살아남은 감각은 바로 이러한 ‘걱정’이다. 그것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몬스테라 잎처럼 작고 사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내란과 전쟁과 기후위기를 잇는 감정의 사슬을 만들어 낸다. 진은영의 시는 그래서 말미에 이르러 이중의 역설을 던진다.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삶, 삶, 삶이여/슬픔이여/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나의 소유자다”. 삶과 슬픔, 부드러움과 파괴가 공존하는 이 정서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한 개인적 고백이 아님을 보여 준다. 걱정의 감각이 곧 윤리이고 정치이며 이 세계를 살아가는 감정적 실존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오늘의 시가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내밀한 광장의 모습을 보여 준다.이로써 2025년 봄의 시들이 어떻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적 공간을 재구성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직접적인 구호나 선언이 아니라 정동과 감정, 회복과 연대, 슬픔과 불안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광장의 내부화’이며, 이러한 시적 언어야말로 이 계절의 시가 갖는 윤리적 실천의 장이 된다. 살펴본 시들은 외치기보다 감각하고, 선동하기보다 기억하며, 하나의 목소리가 되기보다는 염려하며 서로 다른 말들의 숨결로 존재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을 끝내 붙잡고 부서진 감정 위에 느슨한 연대를 상상했던 이 시들은, 정동의 언어로 광장을 다시 열어젖혔다. 시가 도달한 가장 조용하고도 가장 정치적인 자리, 그곳에서 또다시 ‘함께’와 ‘따로’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1) 『문화/과학』 봄호에는 새로 시작한 꼭지 ‘옥상의 시선’에 나희덕과 진은영의 시가 두 편씩 묶였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지상과는 다른 높이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이야기”(「121호를 내며―12‧3 내란 이후 광장정치의 부상하는 주체와 그 함의」, 『문화/과학』 2025년 봄호, 7쪽)를 담은 것인데, 첫 필자로 두 시인이 섭외되었다. 2) “현장에 나가서 활동가분들 만나면서 연대라는 것 자체가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좋은 의미로 침범을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최나현‧양소영‧김세희,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 오월의봄, 2025,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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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혁진 광장의 흔적, 흔적의 광장 ― 『유리 광장에서』(빠마, 2024)

광장의 흔적, 흔적의 광장 『유리 광장에서』(빠마, 2024) 하혁진 문학평론가  광장은 경합의 장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한데 첫째, 서로 다른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갈등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둘째, 같은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불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때 후자의 불화는 전자의 갈등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멀리서 보면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가까이서 보면 크고 작은 균열과 차이를 품고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샹탈 무페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올바르게 사유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부정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근본적 부정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민이 다양하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인민이 분할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인식한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말하며, "이런 분할은 극복될 수 없다"1)고 덧붙인다.  다시 말해 공동체란 '동일성'을 기반으로 구성되지만 끝내 극복할 수 없는 '이질성'과 '타자성'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광장의 목소리는, 설령 그것이 하나의 광장이라 하더라도, '구호'라는 '몫'으로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다. 광장은 언제나 저마다의 '기도'라는 '나머지'를 남긴다. '우리'는 각자의 기도를 조금씩 양보하는 한에서만 우리이며, '너'와 '나'는 서로의 '날씨'를 조금씩 양해하는 한에서만 우리라는 '기후' 속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양보와 양해는 결코 평등하지 않아서, 광장은 영원할 수 없다. 광장은 필연적으로 이별이 예정된 장소다.2) "나의 국경 안이 당신이 국경 밖"(「영원과 하루」)이라는 깨달음, 그 당연한 깨달음이 영원과 하루 사이에 만들어졌던 광장을 야속하게 흩어버린다.  그래서일까. 윤은성의 '유리 광장'은 고요하다. 시합이 끝난 경기장처럼, 관객이 떠난 공연장처럼, 찬란한 빛과 흥겨운 노래가 모두 꺼진 놀이공원처럼 깊은 침묵 속에 있다. 논쟁도 농담도 노래도 사라진 자리에 시적 주체만이 "웅성거림으로 가득찬 손이 되"(「시인의 말」)어 우두커니 남아 있을 뿐이다. "목이 잠긴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부르지 못했어요"라는 고백을 통해 드러나듯이, 광장이 남긴 웅성거림은 좀처럼 시가 되지 못한다. 너무 많이, 너무 크게 외친 탓일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돌아올까.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어지는 다음 구절, "이전의 내 노래들은 / 부를수록 마음속 미움이 살아나서 / 누구에게도 선물을 할 수가 없었고요"(「화답」)라는 고백 때문이다. 이 느닷없는 미움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아무래도 두 번째 시집 역시 첫 번째 시집의 질문을, "우리는 어째서 서로와 더불어 희귀해지지 못했는가"3)라는 질문을 꼭 쥐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왜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 채 / 혼자 되돌아"(「같은 시」)와야 했을까. 많은 것을 함께 했던 '우리'는 왜 변변찮은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급히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까.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라진 광장부터 복원해야 한다. "깨진 조개껍데기, 병뚜껑, 진흙에 박힌 깃털"처럼 사소한 파편들을, 그 모든 '나머지'를 전부 그러모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사라진 광장을 똑같은 형태로 재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윤은성의 시는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 결코 잊은 적이 없음에도 잃어버린 존재들을 강력하게 환기한다. 주체는 기울어진 시소에 앉은 것처럼, 기억의 조각을 맞춰볼 대상도 없이, 홀로 "측량할" 수 없는 "거리"를 재어보고 "떠올릴 수 없는" "날씨"(「우재」)를 헤아릴 뿐이다. 막막한 상실의 크기는 뜨거웠던 광장의 온도에 비례한다.  더욱 곤란한 것은 이토록 쓸쓸한 '기억하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또한 분명하다는 점이다. 첫 번째 이유는 사적이다. 기억마저 포기하면 혹시라도 "네가 스쳐지나갈 때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너'를 잃었지만 기억마저 포기하면 잃은 너를 영영 잃게 된다. 두 번째 이유는 공적이다. "기록되지 않거나 / 유실에 처한 기억들" 때문에 "화형의 장면과 별을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진실을 목격한 이들이 포기한 기억만큼 광장은 오염될 것이고, 기회를 기다린 "야비한 표정이 거리에 반복"(「같은 시」)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 없는 광장을 복원하기 위한 윤은성의 '기억하기'는 불가능한 만큼이나 불가피하다. 주체는 불완전한 기억에 기대어 '너' 없는 기록을 써 내려갈 수밖에 없다. 이 간절한 기억과 기록은 차라리 기도에 가까운데, 시인은 시와 기도 사이의 낙차만큼 괴롭고 외로울 수밖에 없다. 거기서 나의 할머니를 봤어. 미싱을 돌리고 계시더라. 손녀의 원피스를 고치고 계시더라. 내가 잃은 게 젊음이나 사랑, 우정 같은 거였나? 이끼와 고양이, 큰 개, 아껴둔 옷, 편지들. 다시 돌아간다면 얼굴을 그저 만지려나. 나는 살아 있고 모르는 게 많은데. 서늘한 바람이 불고 나는 길에 그냥 앉아봐. 나는 고향에서 살지 않고 그건 나와 할머니의 비슷한 점이지만 같다고 할 수 없지. 같다고 할 수 없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 너무 멀었냐고 얼마나 어둡냐고 묻지 못하고 말았네. 자두나무 환하고 푸릇하고 누구도 깨우지 못하는 깊고 밝은 잠에서 할머니, 나의 옷을 걷는 일은 잊어도 이제 괜찮은데 바늘귀 안을 들여다볼 때는 크고 무서운 마음이 잠깐씩 깊어진다. 너무 길거나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 할머니도 나를 봤어? 할머니는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 다니러 가보지 못했던 땅에서는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다 알아봤어? 언덕 위에서 총성 없이 쉬고 있어? - 「남안」 전문  인용한 시에서 '할머니'는 '나'의 원피스를 깁고 있는데, 옷에 난 구멍을 메우는 할머니의 바느질은 '나'가 기억을 더듬는 행위와 겹쳐진다. 후회 섞인 어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나' 또한 시간의 틈새로 사라진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 반복되는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고백은 '할머니'와 '나'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화자는 텅 빈 거리에 홀로 앉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존재들을 떠올리며, 그때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되새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질문들이 즉각적인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기도와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나'가 할머니에게 건네는 말들의 유일한 청자는 바로 '나'다. "너무 길거나 /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라는 물음도,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라는 물음도,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알아봤어?"라는 물음도, 전부 '나'가 말하고 '나'가 듣는 독백이다. 따라서 응답의 주체 역시 '나'가 되어야 한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화자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 대답이 될 수 있는 시들 중 한 편이 「물 긷는 아이들이 지나가」이다. "선언문 초고를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저녁이 왔어"라고 말하는 화자는 불면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화자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불면의 원인을 다만 추측해 볼 수는 있는데, 아마도 그건 "다시 방문할 수 없는 여행지"를 향한 그리움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공간, 관계를 누적하다 끝나는 것이 삶이라면 선언문과 시가 다 무슨 소용일까. 주어진 상실에 비하면 이 노동은 지나치게 무용하다. 그러나 시인의 노동만 특별할 이유는 없다. 세상에는 "먹게 될 사람이 없다는 걸 뒤늦게 알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곡식을 수확"하는, "슬픔에 빠진 적 있는 아가씨"가 있다. 또한 "절반을 흘릴 걸 알면서도" "물을 걷기 위해 먼 길을 다녀오"는, "상심을 아낀 채로 / 남은 가족에게" 돌아가는 "어린 소녀와 소년들"도 있다. 그들의 노동은 버려짐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목수"가 "작고 안전한 가구"를 만들듯이 "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 사소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상실보다 "한 박자 빠르거나 늦게 오는" 우산을 쓰고 묻는다. 그것들은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할 만큼은 유용하다. 아주 복잡하진 않을 거야. 어쩌면 그리 많은 힘이 필요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고, 내 사랑은 아주 작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나를 잘 지키려고 해. 딱 그만큼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고 내가 쬐는 햇볕은 그 자리 그대로 남겨두고 떠날 수도 있어. 나는 쉴 수 있고, 또 나는 움직여. 무엇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내내 찾지 못했어. 내가 앓는 마음이 PTSD인지 pre-PTSD인지 나는 진단하지도 못하겠어. 들려오는 말이 없을 땐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져. 매일 그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깨어나지. 매일 밤 나도 모르는 내가 창밖을 바라봐. 멀리 다녀오기도 해. 그럼 또 기다리는 거지. 소식이 계속 있어. 그게 올리브 잎 같은 건 아냐. 내가 듣고 싶은 말도 아냐. 어쩌면 더 두려운 것. 어쩌면 뜻밖에 안전한 것. 어쩌면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 - 「몬순」 전문  불가능하고 불가피했던 '기억하기'는 인용한 시에서 "아주 복잡하진 않을" 일로 그려진다. '나'의 목표가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자신이 "앓는 마음"이 이미 지나간 상실(과거 = PTSD) 때문인지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상실(미래 = pre-PTSD) 때문인지조차 진단하지 못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인다. 흥미로운 것은 주체 역시 이러한 행위의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지"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잠에서 깨"기도 하는데, 그 결과 주체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 예컨대 "더 두려운 것", "뜻밖에 안전한 것", 나아가 실제로는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과 마주하게 된다. 귀를 열어둔다는 것만으로도 크고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내는 '우연성'은 시의 제목인 '몬순monsoon', 즉 계절풍처럼 '너'와 '나'의 경계, '안'과 '밖'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불어온다. 매일 아침 쌓이는 새로운 소식들은 그러한 교통의 증거다.  장-뤽 낭시는 "'무위'에 분명 '비-행동'이 있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그 고유의 주체를 변형시키는 어떤 행동"4)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윤은성의 시에 나타나는 '열어두기'는 불가해한 마음들이 도래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행위라는 점에서 낭시가 말한 '비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불가능한 기억과 불가피한 재현이라는 막막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내렸던 결정이, 오히려 주체를 "그 도래와 그 근원과 그 사건의 무한한 차원으로 열리게 하는" 것이다.5) 체념의 순간 찾아오는 역설적인 구원, 주체는 다시 한번 '너'를 향해 마음을 연다. 예컨대 「봄 방학」에서 "침대 밑에 들어간 고양이"처럼 한참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고, 사라진 광장의 기억에만 골몰하던 '나'는, 옆집에서 들려오는 "기도 소리"에 "전등 빛 명도가 조금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벽을 넘어 전해져 오는 타인의 기척이 주체의 일상을 아주 조금, 그러나 분명히 바꿔놓는 것이다. 이처럼 각자의 밀실로 흩어졌던 '나들'은 끝내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바깥'을 향해 기울어진다.6) 그 기울어짐은 동시적이고 상호적이다. 계속해서 물어요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요 비가 오면 노아의 방주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이곳에 마스크를 쓰고 모였어요 완전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눈을 보고 있다고 위로도 해보지만 우리는 말없이도 서로를 다치게 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우린 다 달라요 각자의 날 선 마음을 휘두를 수도 있고요 한 자리에 모여서 무거운 비구름 앞에서 산이 불타고요 죽이고 잡아먹고요 우리의 이웃이 움직이지 못할 동안 가닿지 못한 채로 값싼 식사를 하고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시절에 어둑해 도로를 확인하기조차 어렵기도 합니다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거나 어둑한 하늘을 향해 올려다보면서 어디를 향해 사죄할지 찾아보려는 동안 울고 싶은데 울 수 없을 것 같아요 확인해야 하니까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서로에게 말해주며 안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할 테니까 여기선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애통이라고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합니다 - 「구름이 있는 광장에 모여서 우리는」 전문  그리고 기울어짐의 끝에는 '동료'들이 있다. 윤은성의 시에서 동료는 서로의 '차이'와 '취약함'까지 나눠 갖는다는 점에서, '같은 뜻을 함께 한다'는 의미의 '동지'보다 애틋하다. "이전에는 불러보지 않았던 / 새로운 이름을 자꾸만 붙여주면서" 걸어가는 동료들의 모습은, "손을 잡고 또 때론 놓으면서"(「생일 세계 공원」) 걸으면 가지 못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놓을 수 있기에 끊어지지 않는 느슨하고 단단한 연대, 그 연대가 '광장의 흔적'을 '흔적의 광장'으로 만든다. 과거의 우리를 헤어지게 만들었던 차이와 취약함이 현재의 광장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흩어졌던 동료들은 어느새 다시 모여 "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겹치게 될지도 모르는 / 구간을 상상하며"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이 모든 게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를 이상한 단계들"(「선반 달기」)이라 하더라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가 자신을 비추는 '빛'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 서로에게 말해주며" 끊임없는 안부를 묻는다. 물론 이 광장도 언젠가 흩어질 것이다. 그들은 다만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 애통이라고 /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는 세계에서,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절을 보내는 우리가, 슬프고 아픈 일을 '함께' 슬퍼하고 아파할 수 있다면, 거기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구호와 기도 사이에서, 서로와 각자 사이에서 흔들린다. '너'와 '나'의 '안'과 '밖'을 헤매고, "혼자라는 걸 믿지 말라"는 말과 "혼자라는 것만이 단 하나의 진실이라"(「겨울과 털 공과 길고 긴 배웅과」)는 말 사이에서 방황한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멀리서만 기도할 수 있는 사람"(「마음 닫기」)이 될지언정 서로를 향하는 마음을 완전히 닫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찌를 수도 있고 안을 수도 있는 마음을 "여미고 열"며 "당신에게로 기울어"(「창문을 열다가」)진다. 우리가 헤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뜻이고,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다시금 광장이 필요하다는 뜻이므로, 광장이 남긴 흔적은 또 다른 광장이 되어 우리를 부를 것이다. 이 이상한 순환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섣부른 대답 대신 오래전에 밑줄을 그어두었던 한 시인의 문장을 옮기며 글을 맺는다. 문학적 경험으로서 아름다움에 접속하는 것, 그것은 거의 가장 온전한 위로의 방식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정하고 섬세하고 참담한 자리. 구원을 떠올리게 됨에도 구원의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 경험, 문학적 경험이란 그런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7) 1) 샹탈 무페, 서정연 역, 『경합들』, 난장, 2020, 23쪽. 2) "모든 질서는 우발적 실천들의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절합이다. 사태는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며, 모든 질서는 다른 가능성의 배제에 근거해 있다." 위의 책, 32쪽. 3) 윤은성, 「해(解)와 파열」, 『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사, 2021. 이와 관련해 오연경은 "시집 전체를 통해 사라진 얼굴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얼굴들, 근황과 안부가 궁금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을 현실이라는 미지수에 집어넣고 온 힘을 다해 풀이에 집중하는 시인의 언어를 목격할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오연경, 「'주소 없는 거주자'의 목소리」,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봄호. 4) 장-뤽 낭시, 박준상 역, 『무위의 공동체』, 그린비, 2022, 7쪽. 5) 위의 책, 8쪽. "그 행동은 어떤 물러남 가운데, 어떤 받아들임, 나아가 엄격히 비-심리학적 의미에서의 어떤 수동성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 수동성은 열림과 같으며, (...중략...) 우리와 무한히 보다 더 멀어지면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을 '도래하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6) 이와 관련해 시인은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이 사회에 속해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세상의 소식들로부터 모종의 영향을 받아버리게 되곤 할 때, 그 일은 내 존재를 흔드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이 마음의 지대야말로 외부와 나를 연결하고, 나의 주체성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마음에 집중한다고 해서 그것이 폐쇄적인 일인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윤은성, 「시대와 마음-촛불혁명과 시와 나」, 『작가들』, 2025년 봄호. 7) 윤은성, 「넘어서는 것으로서의 문학적 경험과 비(非)구원적 구원」,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가을호.

계간 문학인 하혁진 윤은성유리 광장에서광장공동체동일성타자성연대시민 2025
최진석 요절의 윤리와 미학 ― 차도하와 김희준, 죽음에 대한 시적 태도로부터

요절의 윤리과 미학 ― 차도하와 김희준, 죽음에 대한 시적 태도로부터 최 진 석 1. 죽음, 시간의 부재와 매혹 우리는 모두 죽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재산과 신분에 상관없이, 이상과 신념이 어떤 것이든, 누구나 결국 죽는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에 논쟁할 필요조차 없다. 자연의 사실로서 죽음은 늦거나 빠르거나,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닥치는 필연적인 운명이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사고다. 동시에 죽음 그 자체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필연적인 사실에 어떤 계기가 결합할 때, 문득 죽음이라는 사고는 죽음의 사건이 된다. 문제는 죽음을 사건으로 만드는 계기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필연의 논리 앞에 요절은 일단 하나의 사실로서 제기된다. 요절 역시 죽음의 하나인 탓이다. 그러나 한자어 ‘일찍 죽을 요(夭)’는 죽음에 ‘이른’이라는 수식을 부과해 특별한 의미를 생성한다. 대체 어느 정도의 나이에 세상을 떠야 요절의 범주에 속할까? 요절은 왜 별개로 사유되는가? 생물학적 수명보다 더 앞선 시점에서 돌연 일어나는 사태이기에 요절은 사건으로 의미화된다. 시간적 격차를 넘어선 그 의미가 문제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르다’고 말할 때, 이는 무엇인가 미결된 것,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음을 함축한다. 예컨대 삶이 종점에 이르기 전에 생이 종결되어 버리듯이. 끝이 도래하기 전에 끝이 도래해 버린 것으로서. 그것이 요절이며, 근본적으로 사건의 아우라에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사건으로서의 요절은 불가능한 역설이기도 하다. 그것은 의지를 넘어선 것,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이끌림으로 일어난다. 저 유명한 키릴로프의 자살은 죽음 이후의 부재를 지각하며, 온전히 이를 입증하고자 자신을 던지는 것이었다.1) 반면 요절은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도, 그것이 불러올 부재의 시간에 의문을 표하고 그 주변을 맴도는 사유이자 감각이다.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죽음에 노출되어 있지만, 이를 예리하게 감지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예기치 않은 죽음에 대한 예감, 그 소수적 사유의 소수적 감각, 또는 종말에 대한 이끌림이 요절을 고유한 사건으로 표시한다. 글쓰기가 문제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진정 문학이 시간의 부재, 그 매혹적인 군림이라면...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 그 매혹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2) 요절은 단순히 한 개인의 짧은 생애에 대한 지칭이 아니다. 미완의 삶이 남긴 여백은 글쓰기 자체의 존재론적 조건과 맞물려 있다. 시는 언제나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경계에서 태어나며, 그 미완의 긴장은 요절이라는 사건과 기이하게 공명한다. 때 이른 죽음은 한 시인의 언어를 단절시키는 동시에, 완결될 수 없는 시 쓰기의 남겨진 운명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요절은 단지 생의 비극이 아니라 문학의 내적 구조를 반영하는 역설의 표지이며, 그 미학적 효과는 시와 함께 오래도록 잔존하게 된다. 시를 쓰도록 재촉하는 시간의 부재는 텅 비어 있는 무(無)가 아니라 남겨진 가능성의 여백으로서, 오히려 충만한 시간성 자체를 가리킨다. 이 지점에서 차도하와 김희준의 짧은 생애와 시 쓰기는 우리에게 특별한 질문을 던진다. 두 시인 모두 급작스레 생을 마감했으나, 그들이 남긴 시는 생의 단절을 넘어 삶의 불가능한 연속을 증언하는 언어적 장치로 남아 있다. 그들의 시에 나타나는 불안정한 생의 감각,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예감와 좌절, 미완의 시간을 불러내는 듯한 시적 태도는 그저 젊은 시인의 불운한 몸짓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갑작스런 생의 종언과 남겨진 삶의 가능성이 대질할 때 필연코 마주치게 되는 윤리와 미학의 흔적이다. 저 대질의 시간을 글로 쓰는 모두가 요절 시인은 아니겠지만, 모든 요절 시인이 동일한 문자의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우리는 저 두 시인이 보여준 죽음에 대한 상이한 태도와 그 시적 몸짓의 의미를 읽어야 한다. 2. 세계의 끝과 두 가지 글쓰기 죽음의 의미는 세계의 종말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리적 기능의 중단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 전체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나는 죽음 이후의 풍경을 알 수 없고, 그곳을 살아갈 수도 없다. 그렇기에 죽음은 한 개인의 생애가 닿을 수 없는 불가능한 사건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다는 사실, 나의 종언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지금-여기에서 행위의 윤리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윤리란 그 알 수 없음의 지평 위에서 책임지고 응답하려는 태도다. 끝을 모르는 자는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내기 위해 행동한다. 세계의 종언이자 나의 종언으로서의 죽음. 내가 없는 세계는 더 이상 나의 세계가 아니기에,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해체를 뜻한다. 문제는 내가 이 사건을 스스로 경험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의 삶이 그렇듯이, 나의 죽음 역시 오직 타자만이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다. 나의 죽음에 대한 언표는 나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타자의 시선과 언어를 통해 가능하다. 그렇기에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외부, 바깥에서만 증명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윤리는 각자에게 부여된 과제다. 나의 삶과 죽음은 타자가 증명하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행위는 오직 나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다. 미래가 어떻게 닫힐지 알 수 없기에, 나의 현재는 언제나 불확실성과 열림의 상태에 놓여있다. 만약 내가 나의 종말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떠한 자유로운 결단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 결정된 결과를 반복할 뿐이라면, 삶은 단지 예정된 각본의 연극에 불과할 테니. 윤리적 행위는 바로 이 알 수 없음이라는 조건, 즉 종결 불가능성과 비종결성에 근거한다.3) 죽음이 불확실하기에 우리는 지금-여기를 살아내야 하며, 그 살아냄의 과정이 곧 윤리다. 요컨대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로 인해 생겨나며, 저 무지의 조건을 삶의 태도로 받아들이면서 행위하고 책임을 떠안으라는 실존적 요청이다. 일견 윤리적 태도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죽음 앞에서 현재를 살아내려는 몸짓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미학은 달리 반응한다. 그것은 죽음을 불가능한 사건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며, 도래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세계까지 가설적으로 구축해 내려는 시도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물러서는 대신, 그 어둠의 형태를 언어와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이다. 윤리가 죽음을 무지로써 책임지는 행위라면, 미학은 죽음을 앎의 대상으로 끌어들여 표현하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윤리가 무지의 지평에서 비롯된다면, 미학은 인식의 환영을 길어 올리는 노동의 지평에서 작동한다. 언어는 죽음을 호출하는 미학적 기호다. 실존적 주체로서 나는 이 세계의 끝을 알 수 없으나, 시인은 자신이 직조하는 세계의 끝, 그 죽음을 바라본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조망하고 형상화하는 주체는 시인이다.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 삶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시인은 그 세계의 죽음을 앞서 알며 완결시킨다. 창조된 세계 속 존재가 윤리적 주체라면, 창조하는 시인은 미학적 주체다.4) 윤리가 죽음 앞의 무지를 전제한다면, 미학은 그 무지마저 가로지르며 세계의 종언을 표현하려 든다. 미적 세계에서 인간은 지금-여기의 윤리를 실천한다. 종말의 시점을 모르기에 삶을 전체로서 결산할 수 없는 탓이다. 반대로 시인은 그의 생애를 관조하고, 그 끝을 매듭지어준다. 예술적 방법으로서 창조는 시인의 손에 쥐어진 무기이다. 예컨대 오이디푸스는 자기 운명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행동과 죽음에 부여된 ‘비극’이라는 미학적 범주는 오직 바깥의 시선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미학은 타자의 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이며, 세계의 종언을 형상화하는 외부적 관점이다. 문학은 이 같은 미학적 태도를 실험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할 수 없지만, 시 속에서 죽음을 형상화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윤리가 죽음 앞에 지는 실존적 책임이라면, 미학은 죽음 너머를 조형하는 예술적 상상력이다. 윤리는 살아내기 위해 침묵하는 몸짓이고, 미학은 죽음을 응시하며 발화하는 언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글쓰기의 두 가지 길을 발견한다. 하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종언을 나의 끝으로 받아들이며, 그 무지로 인해 지금-여기의 삶을 더 치열하게 붙드는 글쓰기다. 이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종말 앞에 자신의 삶을 응답하고 책임지는 행위이다. 다른 하나는 죽음을 미학적 대상으로 포섭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끝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너머를 언어로 구축하려는 시도다. 글쓰기를 죽음의 불투명성에 봉인하지 않고, 미학적 형식으로 끌어들인다. 윤리는 죽음 때문에 행위하는 글쓰기이고, 미학은 죽음을 통해 형상화하는 글쓰기다.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해 지금-여기를 책임지지만, 미학은 죽음을 인식하여 이 세계의 끝마저 글 속에 담아낸다. 이 두 갈래의 길은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된다. 그들의 시는 개인적 비극을 넘어 윤리와 미학의 경계에 얽혀 있다. 실존적 주체로서 그들의 짧은 생애는 윤리적 과제를 담아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삶 앞에서 그들은 지금-여기를 책임지는 언어를 직조하려 했다. 그들의 시 속에는 늘 불안정한 생의 감각, 곧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이 세계를 살아내야 한다는 응답의 몸짓이 서려 있다. 동시에 그들의 시는 죽음을 형상화하는 미학적 도전이다. 언어는 죽음을 감지하는 도구이자 죽음을 몰아내는 장치였다. 차도하의 시에서 엿보이는 세계의 끝을 향한 응시, 김희준의 시에서 감지되는 부재의 공간에 대한 관조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포착하는 미학적 방법으로 기능한다. 그들의 시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면서도, 동시에 죽음을 붙잡아 언어로 새겨넣는 이중의 긴장 속에서 태어났다. 미학적 윤리와 윤리적 미학의 섬세한 교호와 긴장이 그들의 시에 담겨 있다. 시인의 요절, 이는 한 생애의 종결이면서 갑작스러운 언어의 중단을 말한다. 그러나 이 중단은 문학의 차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낳는다. 윤리적으로는 끝에 대한 불안을 담은 채 지금-여기를 책임지려는 응답으로, 미학적으로는 죽음 저편의 세계를 호출하는 형상화의 방식으로.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는 이 두 층위가 교차하고 분기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들의 요절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이 남긴 글쓰기는 윤리와 미학의 긴장 속에서 빛을 발한다. 죽음을 세계의 끝으로 경험하면서도, 그 끝을 시 속에서 다시 열어젖히는 것. 요절이라는 사건에 대해 시인이 남기는 가장 치명적인 증언이 거기 있다. 3. 차도하 — 탈주하는 언어, 마주하는 윤리 차도하 시인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미래의 손』은 차분하고도 담담하지만, 결코 잊힐 수 없는 다음의 문구로 첫 시편을 펼친다. 천국은 외국이다. 어쨌든 모국은 아니다. 모국은 우리나라도 한국도 아니다. 천국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입국할 때 모든 엄마를 버려야 한다. 모국을. 모국어를. 모음과 자음을 발음하는 법을. 맘-마음-맘마를. 먹으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밥그릇을.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을.5) “입국”은 출국을 전제한다. 그것은 경계를 넘어섬이며, ‘이곳’과는 다른 규칙이 작동하는 ‘저곳’의 경역이 존재함을 고지한다. 들어서는 장소는 “천국” 혹은 “외국”이라 불리지만, 곰곰 따져보면 이상하다. 흔히 신앙의 구원이나 마음의 안식으로 표상되는 천국에 들어서려는 자는 지금까지 알던 모든 것, 낯익고 몸에 익은 정체성을 전부 버려야 한다. “엄마”와 “모국”, “모국어”, “발음하는 법”, “밥그릇”,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 곧 기성의 존재 조건 전부가 폐기의 대상이다. “천국”은 들어섬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버리는가에 따라 입장 여부가 결정되는 기이한 영토다. 그럼, 이 모두를 내려놓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지금의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을 덜어낸다면, 과연 “천국”에 입장하는 것은 누구일까? 아니, 그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할까? 천국, 혹은 저 너머의 생이란 애초에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 시구를 뇌까리는 이는 이미 출국해 버린 상태이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지상에 몸은 남겼으되 허공을 유전하는 정신은 “공터” 같은 현생에 속박된 영혼이다.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 텅 빈 시공이야말로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거꾸로 “사랑할 것이 너무나 필요”한(「미래의 손」) 지금-여기의 진실일 것이다. 익숙한 생활의 흔적도 없는, 새로이 채워 넣을 기대와 예기의 감각도 없는. 하지만 그 같은 공백이야말로 오히려 무언가를 채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의 바탕 아닐까? “없다는 게 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건지”(「독서 유예」). 시를 쓰는 것, 이는 낯익은 정체성을 지우고 소거하는 과정이면서, 또한 끊임없이 낯선 정체를 받아들여 공백을 메우는 행위이다. 보람의 과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생의 무시간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시시포스가 무익한 노동에 종사했던 것처럼, 시 쓰기는 오직 천국의 문이 열려 입국이 허락될 때까지 저 공백을 견디려는 무상의 노동에 가깝다. 삶의 유익이 있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미루고 또 미룸으로써 어떠한 과장된 희망이나 전망도 남겨 두지 않으려는 절망의 역설이 그것이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침착하게 사랑하기」). 쓴다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 시작(詩作)의 무상성은 이 세계가 시로 채워질 수 있다는 단 하나의, 그러나 무망한 가능성만을 허락한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 - 「입국 심사」 부분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행위 속에 명멸하는 감각이다. “천국에 갈 것”이라는 당찬 선언은 자신의 시가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과 겹쳐진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라는 이어지는 결심으로 변곡하며, 지금-여기에 대한 긍정의 씨를 뿌린다. 이는 현생에 대한 체념 어린 수긍이 아니다. 반대로, 천국에 걸려 있는 공허한 기대를 거부하고, 죽음의 허망함조차 부정하며 그로부터 탈주하겠다는 의지를 함축한다. 그러니 시를 “많이 쓸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다짐은 글쓰기를 통해 이 세계의 끝, 죽음과 대면하겠다는 치열한 시적 응답에 해당한다. 탈주로서의 시 쓰기, 이는 죽음이라는 미지와 무지를 견뎌내려는 윤리적 기획에 값한다. “파쇄기”에 던져지는 시는 나날의 행위, 즉 온갖 고심과 분투 속에 수행되는 선택과 결단을 은유한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매일 쓰이는 즉시 파쇄되고 소멸할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잊히고 사라져서 불가지의 시간으로 던져질 것이다. 이것이 죽음, 세계의 끝을 알지 못하는 필멸자의 섭리이며 그가 수행하는 윤리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행위는 문자로 포착되어야 하며, 시적 언어로 남겨져야 한다. “시를 쓸 것”, “많이 쓸 것”이 담는 맹목의 의미가 여기 있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이 세계는 끝날 것이다. 이를 공허한 수사학으로 포장하지 않으며, 삶에 남겨진 최후의 순간까지 시로 옮기는 것이야말로 죽음이라는 필연에 ‘이 나’가 응답/책임을 다하려는 윤리의 본질일 것이다. 이러한 시적 실존과 그 행위 양식은 시인의 이중적 정체를 슬그머니 암시한다. 시인은 한편으로 텍스트 내에서 시를 쓰고 있는 시적 주체로서의 자신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 바깥에서 시적 주체와 그의 세계를 직조하는 현실의 자신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텍스트의 세계에서 매일 시를 쓰고 파쇄기에 던져넣는 윤리적 실존이면서, 또한 그 세계 전체를 조망하고 창조하는 텍스트 바깥의 미학적 실존인 것이다. 그로 인해 시인은 윤리적 행위를 감당하는 실존 조건과 상징적으로 형상화된 세계의 미학적 완결을 꾀하는 존재 조건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윤리적 행위자인 동시에 미학적 창조자에게 벌어지는 고뇌의 진자 운동이 이 시집의 주도 동기를 그려가는 셈이다.6) 첫 번째 시 「입국 심사」가 죽음을 감지함으로써 도달하는 윤리적 행동에 관한 선언이었다면, 마지막 시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는 세계의 종점을 상상하고 이를 종결짓기 위한 미학적 행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산일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둘 다 보이지 않는 도심일 수도 있다.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서로의 가능성을 알지 못한 채 손에 쥔 컵에 담긴 음료의 이름만큼만 상상력이 허용된 교차로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도 풍경은 아름답다. […] 삶을 포기하고 죽음도 포기하고 기다란 흰 끈을 손에 쥔 채로 나는 생각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산”도 “바다”도 담아내는 “풍경”은 지금-여기, 이 세계의 경계선을 이룬다. “아름답다”는 평가는 아마도 그 경계의 닫힘을 통해 죽음이라는 열림을 이겨내는 미적 완결성을 암시할 것이다. 그렇게 시인-창조자는 죽음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작품으로 보상받는다. 미학적 이상으로 창조된 세계는 현실의 “삶”이나 “죽음”으로부터 면제된 사유의 공간일 터.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계 속의 다양한 모습은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에 깊거나 얇게, 짙거나 흐릿하게 젖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산”이나 “바다”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도심”에는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꽉 막힌 “상상력”을 갖고 살아가지 않는가? 저 인공의 아름다운 세계는 생생한 실존의 현실, 삶만큼이나 죽음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무지의 경계를 열어젖히는 불안을 이겨내지 못한다. 무서웠는데 정말 무서웠는데 무섭지 않은 척 하늘을 바라보았고 멀지 않은 곳이 이미 맑았다. 날씨의 경계가 보였다. 그때부터 이곳이 흐려도 맑은 저곳을 이곳이 맑아도 흐린 저곳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회상을 마치자 창문이 생겼다. 창문을 열자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이 보였다. 그것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자신의 죽음, 이 세계의 끝이 알려지지 않은 ‘열린 세계’는 무서운 세계이다. 지금-여기서 행하는 몸짓이 무엇을 불러낼지, 어떻게 귀결될지 알 수 없는 탓이다. 맑음과 흐림을 구분하는 “날씨의 경계”는 눈 앞에 펼쳐진 세계가 불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생각하고 예상할 수 있는 한계 너머에 무지의 공간을 품고 있음을 방증한다. “창문”은 일견 투명하게 그 “경계”를 이어주는 듯하지만, 실상 넘을 수 없는 장벽마냥 분리하는 울타리다.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은 그것을 지우는 오인, 또는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저 너머로 향하는 “비행운”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닫으려 애를 써도, 결국은 나의 무지를 인정하게 강요하는.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행동의 윤리를 온전히 감당하도록 강제하는. 이를 차도하의 시 세계가 구축하는 미학적 윤리의 표지라 불러도 좋을 터. 시집 전체에서 시인은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과 그것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불가지의 분열 앞에 절망한다. 아마도 실존적 개인으로서 우리 모두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불가지의 예감, 결정 불가능성으로부터 탈주하면서도 끝내 이를 언어로 옮기는 데 무력하지 않았다. 그가 그려낸 시적 세계의 형상이란, 필경 존재의 무상을 버텨내기 위한 윤리의 몸짓이었을 것이다. “공터에서 빠져나와 […] 시를 쓰게 될 […] 미래의 손”(「미래의 손」). 4. 김희준 — 응시하는 언어, 다가서는 미학 김희준의 시적 태도는 죽음을 응시하는 자리에서 성립한다. 죽음은 단순히 생애의 끝을 지시하는 표지가 아니라, 시적 행위를 추동하는 근원적 자극으로서 시인 자신을 사로잡는 집요한 과제처럼 보인다. 그의 시에서 죽음은 회피와 외면의 대상이기보다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할 대상, 저 불투명성을 헤쳐나가 언어적 형상화를 감행해야 할 무엇으로 다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김희준의 글쓰기는 죽음의 불가촉성을 끝내 언어로 붙들어두려는 행위에 비견되며, 그 자체로 윤리적 태도를 이룬다. 관건은 이러한 윤리적 자세를 미학적 형식으로 담아내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시인의 세계는 윤리적 미학으로 압축해 표명된다. 그는 죽음을 모호한 상징으로 감추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언어의 면과 결로 마지막까지 다듬어내려 했다. 이는 죽음에 다가서는 시적 응답인 동시에 책임을 가리킨다. 시인은 자신의 실존과 이 세계의 끝에 관해 ‘알 수 없다’는 태도로 글을 썼다. 하지만 무지의 주변을 맴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문자의 연료로 삼았다. 일상의 무심한 장면들, 이를테면 편의점 진열대(「싱싱한 죽음」), 낡은 책갈피가 보이는 서점(「평행 세계」), 저수지와 달동네의 옥상(「8구역」) 등을 두루 살피며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운동으로 번역하기 위해 분투했다. 이때 윤리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말하려는 결단에서, 미학은 그 결단을 독자가 읽을 수 있도록 직조하는 형식에서 발견된다. 이처럼 시를 쓰는 것은 응시와 형상화가 왕복할 때 생기는 사건이자, 실패를 무릅쓴 그 반복 속에서 지속하는 노동이다. 편의점에는 가공된 죽음이 진열돼 있다 그러므로 꼬리뼈가 간지럽다면 인체신비전 같은 상품을 사야 한다 자유를 감금당한 참치든 통으로 박제된 과육이든 인스턴트를 먹고 유통기한이 가까운 상상을 한다 여자를 빌려와 글을 쓰고 사상을 팔아 내일을 외상한다 통조림에는 뇌 없는 참치가 헤엄쳤으나 자유는 뼈가 없다 냉장고를 여니 각기 다른 배경이 담겨 있다 골목과 심해 다른 말로 배수구 그리고 과수원 세번째 칸에는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다 빌어먹을 허물 싱싱하게 죽어 있는 편의점에는 이름만 바꿔 찍어내는 상품이 가지런하고 형편없는 문장을 구매했다 영수증에는 문단의 역사가 얼마의 값으로 찍혀 있다7) “싱싱한 죽음”. 삶과 죽음을 뒤섞는 역설의 제목으로 문을 여는 이 작품은 죽음이 더 이상 드물고 생경한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생활 깊숙이 내려앉은 기호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가령 “참치든” “과육”이든 생명은 더 이상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런 만큼 죽음 역시 숙연하거나 섬뜩할 이유가 없다. “유통기한”은 “내일”조차 “외상”으로 끌어와 사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에, 미래를 꿈꿀 까닭조차 잠식해 버린다. 무심한 현상을 타고 흐르는 시선은 “냉장고” “칸”의 깊이와 분절에 따라 “골목”과 “심해”, “배수구”와 “과수원”으로 미끄러지며, 돌연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는 광경으로 날카롭게 솟아난다. 이 한 줄이야말로 김희준의 시학을 응축해서 보여주는데, 죽음을 사물의 문제인 동시에 언어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버려진 단어와 잘려 나간 감정, 즉 언어의 사체와 감응의 잔흔을 수습하는 데서 시의 윤리가 성립하며, 그것을 폐기하지 않고 표현의 형식으로 남기는 데서 시의 미학도 존립한다. 설령 “형편없는 문장”에 불과할지라도, 그 “영수증”이 문학사의 무게를 담아낸다면 이는 충분히 남겨볼 만한 과업일 테니까. 이런 사유를 더 날것으로 펼쳐내는 시편은 「하지만 그러므로」일 것이다. “내 무덤은 깡통에 있을 거야 문은 열어도 문이거든”에 표명된 역설은 “무덤”과 “깡통”, “문”이 일련의 의미론적 연속체를 이루며 닫힘과 열림을 동시에 지시한다. 죽음도 삶도 일직선으로 배열됨으로써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가치 관계를 벗어나 버린다. 삶이 과잉 가치화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죽음도 평범한 사물로 내려 앉고, “깡통” “문”을 여닫는 과정의 하나로 치부된다. 문을 열지 않았던 건 유통기한이 지나서다 오래전 죽어버린 내 무덤을 열 수 없다 틈으로 보았던 것이 은밀하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뜻이다 - 「하지만 그러므로」 부분 삶과 죽음을 분리하는 절대적인 시간의 상한선은 “유통기한”으로 범속화되면서 의미를 잃고 물질화되었다. 이 세계에서 죽음은 ‘폐기’의 순환에 투입되고, 언어는 ‘개봉’의 행위로 처리된다. 시인은 이런 감각의 전위를 재치있는 언어적 도락에 떠넘기지 않는다. “유통기한”과 “영수증”, “깡통”, “뚜껑” 같은 일상어가 병치되며 일어나는 감응의 효과는 이제 죽음조차 강고한 아우라를 내뿜는 시대가 아님을 냉정히 환기시킨다. 죽음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가 미학적 형식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가공과 진열, 구매의 열거만으로 죽음의 실감을 완전히 미학적 형식에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존의 절대적 장벽이던 죽음은 일상의 사물로 내려왔지만, 의미가 비워진 언표로 버려지진 않았다. 이 자리에서 시인은 꿈의 해부대에 자기의 몸을 올려 직접 열어 보는 시적 모험을 감행한다. 뱀 신화의 원형을 빌리되, 이를 분신의 이미지로 옮겨 다듬은 텍스트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따금 뱀이 꿈에 나옵니다 실뱀이고요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습니다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긴 뱀이 선명합니다 거대한 허물은 배경으로 남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머니를 낳고 나는 상자를 낳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해석학에 따를 때, 꿈과 상자는 동종적이다. 일상 너머의 의식, 잠재화된 욕망을 실어 나르고 보존하는 초공간인 까닭이다.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다고 말하지만, 저 비현실적인 동물은 자기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해 보인다. 형태 이상의 형태, 무의식적 이미지가 현시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에 있는 자신일 것이다. 모성 생식으로 태어난 “나”는 고형화된 부성적 형태를 거부하고, 순전한 욕망에 몸을 기댄다. 이어지는 행에서 “자신을 집어삼키면서 정자를 뿜거나/동시에 한 달에 한 번 뜨거운 태양을 배출”한다는 진술은 생식과 파괴, 분출과 배출의 생리적 역동을 추상의 리듬으로 환원하지만, “나를 헤집”는 “뱀”이 드러내는 “척추의 능선”은 “관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구체적이다. 형태 이상의 형태, 구체 너머의 구체가 분명해질 때 드러나는 것은, 놀랍게도 “오래전 잘라버린 내 정체성”이다. 초점이 흐릿한 꿈의 끝에서 나는 꼬리르 입에 문 뱀처럼 나를 연결합니다 내 속을 찌자 우글대는 뱀 수십 마리가 튀어나옵니다 뱀을 가르면 독에 젖은 내가 있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지평은 현실 너머에, 이 삶의 경계 바깥에 있다. 그러므로 꿈의 공간을 유영한다는 것은 죽음의 경계를 벗어나 다른 존재의 영토에 들어섬을 뜻한다. 비현실과 초현실, 어쩌면 순전한 무의 환각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치는 진실은 비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 “나”의 이형환위(異形換位)이다. 지금-여기라는 현재 너머에서 만나는 자기의 진실이자 본래면목일 수도 있다. 이 세계의 종말은 무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며, 시인은 무의식의 공간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여기서 죽음은 언젠가 도래할 최종 도달점이 아니라 자기 내부로부터 이미 계속되었던 원환의 일부이다. 삶과 죽음은 동일하지는 않으나, 서로의 조건이 되어 ‘다른’ 존재의 생성을 통해 변주된다. 죽음에 대한 시적 태도는, 한편으로 자기 실존의 유한함을 끌어안는 윤리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 너머’를 언어적 상상 속에 구축하고 살아보는 미학에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인이 선택하는 글쓰기는 선형적 탈주와 그 결말이 아니라 지속적인 되감기와 회귀에 있다. 물론, 이는 자신이 알던 세계의 끝, 실존의 죽음이라는 문턱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장력이 다한 용수철이 다시 튕기듯, 그 힘을 응축하기 위한 재생의 일환이다. “거꾸로 돌리는 거야//계절의 안쪽에서 소년은 소년이 된다”(「구름 포비아에 감염된 태양과 잠들지 않는 티볼리 공원, 그러나 하나 빼고 완벽한 목마」). 계절의 끝을 “안쪽”으로 되감는 이 역행은 시간의 흐름을 역순으로 돌리기보다, 바로 그 시점에서 비롯되는 다른 생의 변곡을 가늠해 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하지만 종말에 대한 감각 없이 새로운 시작은 나타나지 않는다. 죽음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은 채, 바로 그곳을 영점으로 삼아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윤리적 미학의 근거이다. “해체된 태양이 떠오르는 남쪽에서부터 창세기가 시작되고/나는 제자리걸음을 한다”(「제페토의 숲」)는 시구 역시 이런 원칙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죽음, 실존적인 것이든 세계적인 것이든, 그 종결에 대한 감각은 종결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등을 맞대며, 늘 또 다른 출발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8) 시학, 언어적 행위는 죽음/삶의 결속과 분리, 분기가 이루어지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시인은 세계의 끝, 그 종말을 응시하며 이를 숙명처럼 수긍한다. 하지만 체념은 아니다. 응시는 곧 형상화를 통해 보이도록, 읽히도록 조형하는 과정에 맞물려 있다. 당연히, 이는 무망한 동시에 불가능한 시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실패를 감수한 형상화와 그 반복은 시작(詩作)의 종결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어낸다. 누구도 죽음을 알 수는 없다. 이 세계 너머에 어떤 무엇이 도래할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철저한 무지, 우리 대부분은 여기에 멈춰 서기 마련이다. 시인의 몫은 바로 이 지점에 따로 있으니, 그는 무지의 자리 멈춰 서지 않고, 그것을 본다. 그리고 문자로 옮긴다. 김희준의 윤리적 미학이란 이를 가리킨다. 5. 요절, 문학적 사건 너머의 물음 시인은 언제나 시간의 경계를 의식하며 글을 쓴다. 그러나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는 그 경계에 유난히 가깝게 다가가 있었다. 이들의 시가 우리에게 강렬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들이 자신의 짧은 생애를 예감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라는 유한한 그릇 속에서 죽음이라는 불가해한 지평에 가장 치열하게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때 ‘요절’은 이른 죽음의 시점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시적 사유와 글쓰기 방식이 지닌 구조적 지평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의 실제 생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언어와 사유가 맞닥뜨린 시간의 단절, 혹은 끝에 관한 태도이자 형상화의 문제로 드러난다. 차도하의 시에서 죽음은 탈주의 대상으로 표명된다. 그는 종종 언어를 통해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이탈하고, 죽음의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은 자리로 떠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발길은 끝내 죽음의 형상과 마주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차도하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동시에 언어를 통해 계속 써가야 할 낯선 이름이었다. 미학적 윤리라 부른 그의 시적 태도는 죽음, 세계의 끝을 피할 수 없다는 열린 감각과, 이를 미학적으로 닫아보려는 절망적 시도 사이에서 형성된다. 종말을 피하고자 했으나 피하는 순간조차 묘사하고 응시하는 역설적인 과정에서 미학은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라 존재의 절박한 윤리로 전화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도래에 대한 고통스런 감각 때문에 그가 실존적 좌절감에 젖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것이 그의 글쓰기를 윤리에 더 가까이 끌어당겼을 것이다. 김희준에게 시는 죽음을 직접 응시하고, 그것을 언어 속에 완결짓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서 비롯된다. 그는 죽음을 단순한 부정적 한계선에 멈춰 세우지 않았고, 그 너머의 세계를 구상하려는 노동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의 시편에서 출몰하는 여러 일상의 이미지들은 그저 삶의 기호가 아니라 죽음을 관통해 새로이 만들어지는 세계의 표식들이었다. 죽음은 필연적이지만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른다는 유한자의 좌절은 윤리적 태도를 이끌어내지만, 문학은 이를 형상화의 의지로 전위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시적 태도를 윤리적 미학이라 부를 수 있다. 죽음의 형상화는 끝내 도래할 종언 앞에 언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적 행위가 된다. 이처럼 두 시인의 시적 세계는 모두 죽음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에 대한 태도와 방법은 조금씩 달랐다. 차도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그것을 묘사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늘 있었고, 김희준은 죽음을 응시하고 그것을 끝내 언어로 증언하는 자리에 다가갔다. 하나는 미학 속에서 윤리를 발견했고, 다른 하나는 윤리 속에서 미학을 길어 올렸다. 요절은 두 사람의 실제 생애를 규정하는 사실이지만, 그들의 시적 태도 속에 줄곧 내재해 있던 미학과 윤리의 긴장을 압축해 보여준다. 더 이상 신화를 믿지 않는 시대에 살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 시인의 시적 태도와 실제 삶이 공명하는 기이한 아우라를 우리는 차마 부정할 수 없다.차도하와 김희준, 이들의 시를 읽으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청년 시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감정에 그치지 않는다. 죽음을 둘러싼 글쓰기의 본질적 속성이야말로 그들이 던진 물음의 중핵이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기에 윤리적으로 행위해야 하고, 그 끝을 형상화하기에 미학적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이중의 요청은 각각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저 두 가지 시적 태도는 동일한 의미의 귀결을 내포한다. 그것은 죽음을 둘러싼 언어의 책임, 즉 어떻게 죽음을 말하고, 어떻게 끝을 견디며, 어떻게 세계를 다시 써낼 것인가에 관한 응답이다. 이런 문답 앞에서 요절은 더 이상 전기적 사건이 아니라, 시적 언어가 도달한 극한의 경계와 그 표지판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을 기리는 기호를 넘어 시와 죽음, 언어와 세계가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드러내는 질문이 될 것이다. 1)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00, 166-167쪽. 2)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박혜영 옮김, 책세상, 1990, 30쪽. 3)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0, p. 13. 4)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p. 45. 5) 차도하, 「입국 심사」, 『미래의 손』, 봄날의책, 2024, 11쪽. 이하 그의 시는 이 시집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표기한다. 6) “작품은 시간과 문학적 유희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의식이다.” 모리스 블랑쇼, 『미래의 책』, 최윤정 옮김, 세계사, 1992, 371쪽. 7) 김희준, 「싱싱한 죽음」,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0, 101쪽. 이하 시인의 작품은 이 책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밝히겠다. 8) “세계는 영원하지 않아도, 삶에는 일종의 불멸성과 영속성이 깃들어 있다.” Frank Kermode, The Sense of an Ending, Oxford, 2000, p.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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