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창작과비평 2024년 여름호(제204호)
되찾은 ‘님’의 시간 : 커먼즈로서의 한국시와 시 비평
1. 의미의 위기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에서는 한국시의 타성을 문제 삼으면서 ‘다른 서정’에 대한 기미를 포착하는 기획을 다룬 바 있다. 문학평론가 최원식은 당시 시가 고독하게 교신되는 “비밀의 상형문자”(17면)가 된 상황과 “‘나의 시’를 앞세우는 풍조”(18면)를 언급하며, 그로 말미암아 독자의 위기로까지 전이되는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했다.1) 그리고 문제를 타개할 방안으로 시가 ‘님’을 회복할 필요를 말한다.
최고의 시들은 불멸의 음악으로 우리가 그것과 관계하지 아니하고는 우리 존재 전체가 무로 환원되는 ‘님’ 앞에 우리를 끊임없이 불러세웠다. 그런데 최근 한국 시는 님에 대한 감각 자체를 잊었다. 아니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22면)
일반 독자들은 흔히 감동받은 작품을 말할 때 ‘나의 이야기 같다’고 표현한다. 예술작품이 다루는 내용이 자신의 이야기와 유사하다는, 즉 작품을 통해 어떤 날카로운 보편성을 마주했다는 뜻이다. 개개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힘을 지닌 보편성은 독자가 그것을 체험하는 순간 삶의 의미를 떠올림과 동시에 그 의미를 넘어서는 어떤 전망을 감지하게도 한다. 이것이 독자들이 받은 감동의 정체이며 최원식이 말한 ‘님’의 뜻이기도 할 것이다. 한용운의 표현을 빌리자면, 날카로운 ‘님’과의 만남은 우리에게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는 순간을 선사하며 삶다운 삶의 의미에 대한 갈망과 기다림으로 우리를 이끈다.
최원식은 문학사에 나타난 ‘님의 상실’을 추적하며 그것이 한국사회가 민주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등장한 ‘시의 대중화’의 영향이라고 분석한다. 엘리뜨주의에서 평등주의로 이행하면서 독자들과의 소통을 방기한 채 자기표출에 급급한 현상이 늘었다는 것이다. 문제의 초점을 시에서 비평으로 옮기면, 시 속의 ‘님’을 제대로 읽어내어 독자와 작품을 만나게 해주는 비평의 역할은 충분했던가도 따져볼 사안이다. 민주화를 거치며 다양한 문화적 양식들로의 접속이 자유로워지면서 시의 언어에 영감을 줄 문화적 자원이 풍부해졌다.2) 동시에 1987년 이후 사회적 합의의 실패를 문제 삼고 개인적인 것이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 재현에 얽매이지 않는 가파른 개성적 표현에 몰입한 시가 ‘님’을 비밀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측면을 고려하면 최원식의 지적대로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시의 대중화를 이끌었다기보다 시의난해화를 불러온 것인지도 모른다. 이 과정은 비평의 책임을 무겁게 한다. 개성에의 몰두가 빚어낸 공과(功過)를 분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의미있는 개성이 빚은 난해함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바꾸어 중개하고 평가할 임무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비평이 충실한 중개 이전에 난해함을 풀어내지 못했고 그리하여 누적된 이 문제가 미래파 논쟁까지 불러온 측면이 없지 않다. 아쉽게도 미래파 논쟁은 이 난해함을 자폐적이라고 낙인찍는 쪽과 그 안에 담긴 새로운 감각을 강조했지만 복잡해진 표현에 감춰진 현실적 의미는 충분히 알아보지 못한 쪽으로 양분되었다.3) 그렇다면 그 이후의 시비평은 어떤가.
미래파 논쟁 이후 시비평계를 다시 한번 뜨겁게 달궜던, 15년 전쯤의 ‘시와 정치’ 논쟁을 돌이켜보자. 시적인 것의 본질을 따져 묻는 일이 하나의 쟁점이었는데, 여기서 시와 정치의 공존을 긍정하지 않기 위해 언어와 세계 사이의 이격을 넓히는 방향의 주장을 펴는 논자들이 적지 않았다. 가령 당시 강동호는 심보선의 「슬픔의 진화」(『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사 2008)를 분석하며 ‘세계 없는 언어’라는 언어의 한계를 주장했다.4)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내 방에는 조용한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
—심보선 「슬픔의 진화」 부분
시의 이 도입부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시의 주인은 자신의 언어가 책상물림의 수준에 갇혀 있음을 깨닫고 이를 성찰하고 있다. 책상에만 붙들린 언어에는 세계의 실감이 부재한다는 정직하면서도 오래된 시인의 고백을 강동호는 “과격한 고백을 통해 독자를 시 속으로 끌어당겨, 세계와 언어 간에 발생하는 불일치에 따르는 좌절을 지시하는 것 같”(297면)다고 오해한다. 그러고는 이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296면)인 절망은 “‘부정의 부정’으로서 그 가면이 산출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지대”(300면)로 우리를 이끈다는 논지를 이어가며, 결론에 가서는 “시의 언어는 삶을 직접적으로 쓸 수는 없으나 다만 삶이 처한 시공간, 즉 현실에 대한 잠재적인 부면으로서의 삶의 형식(form of life)을 쓴다”(312면)고 적는다. 형식이라는 말과 더불어 각종 개념적 장치들을 동반한 설명 과정에서 비평이 삶의 구체적 모습에 대한 서술은 지우거나 건너뛰고 전문화된 정보에 그치고 마는 분석이다. 이 시를 조금 빌리자면, 비평의 언어에 삶이 빠져 있고, 비평의 공간에 개념의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비단 강동호 글에서만 발견되는 문제는 아니다. 미래파 논쟁 이후 최근까지 시의 두터운 언어에 내포된 의미는 발굴하지 못한 채 방어적 개념들로 시에 깃든 우리 삶을 고립시킨 비평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최근의 상황은 어떤가. 우선 비인간담론과 접속하여 시의 의의를 찾는 비평들은 인간의 자리로부터 발생한 의미를 부러 지운다. 인간에게 부여되었던 과도한 특권을 반성하는 것과 인간의 자리를 지워버리는 일은 당연히 다른데도 종종 혼동된다.5) 가령 임승유의 시 「그 정도의 양말」(『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문학과지성사 2020)에 대한 인아영의 분석6)을 보라.
양말이 가득했다. 부드럽고 따뜻해서 잘 때 신으면 좋은 그런 양말 말이다. 이젠 거의 안 남았는데 나도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문 열고 나가면 와 있는 계절처럼
볼 때마다 네가 양말을 줘서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그건 양말의 비밀이다. 발가락 사이에 하얗게 거품이 일도록 씻은 후 양말을 신어보는 것. 양손으로 두 발을 쥐고 코가 닿을 것처럼 양말을 보는 것. 나한테 양말은 그 정도였고
지금은 없어진 양말을
—임승유 「그 정도의 양말」 부분
인아영은 임승유의 시에서 “옷은 특유의 온도, 무게, 부피를 가지고 있는 비인간 신체로서 인체의 감각과 사고를 일깨운다”(379면)고 적으면서 저 시가 “양말의 의미를 예민하게 식별하고 그 물질적 세계에 기꺼이 참여”하도록 이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물에 대한 개념화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하지 않고 대상에 깃든 생기에 함께 머무는 미적 실천”(380면)이라고 서술한다. ‘사물의 생기’와 ‘미적 실천’이라는 수사가 활용되는 사이 그 양말을 화자에게 건네주어서 양말 자체를 의미있게 만들어준 사람의 자리는 소거된다. 사실 인아영이 언급한 감각의 증폭은 양말 자체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시의 화자와 양말을 건네준 ‘너’의 관계에서 기원한다. 이 시의 핵심적인 사건은 누군가 챙겨준 양말과 그이의 돌연한 부재, 그리고 그 부재를 스스로 감당하는 행위 속에 있다. 여기서 상론하기 어렵지만 이 시는 돌봄과 성장의 이야기로 읽을 만하며 이 테마는 임승유 시에서 거듭 반복된다. 그러나 인간을 지우고 사물만을 이야기하는 순간, 이 시는 유행하는 담론의 어휘들 속에 휘말려 들어가 굴절되고 만다. 요즘 비평담론은 작품의 진실에 접근하는 매개로서가 아니라 작품을 새롭게 소비하는 방식으로 독자들을 이끄는 면이 있다.
2. 꿈의 대화, 커머닝으로서의 시쓰(읽)기: 이수명과 박노해
꿈에 네가 나왔다.
네가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왜 누더기를 입고 있니
누더기가 되어버렸어
날씨가 나쁜 날에는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없는 날에는
누더기 옷을 꺼내 입는다고 했다.
꿈에 네가 나왔다.
꿈속을 네가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걸어가서
너무 쓸쓸해서 땅에서 돌멩이를 주웠는데
빛을 다 잃은 것이었다.
돌벽 앞에 네가 한동안 서 있었다.
나는 돌벽이 무너질 것 같다고 피하라고 했는데
너는 집을 나와서 천천히 산책 중이라고 했다.
꿈에 네가 나왔다.
아주 짧은 꿈이었다.
—이수명 「꿈에 네가 나왔다」 전문
강동호는 이수명 시집 『도시가스』(문학과지성사 2022)를 해설하면서 이 시를 “이번 시집의 주요 테마와 더불어 시인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세계의 시간성을 형상화하는 원리를 파악”(강동호 해설 「무의 광장」, 122면)하는 근거로 다룬다. 무슨 말인가 하니, “누더기”의 형상을 “서로 다른 시간 조각들이 함께 기워져 동일한 시간성의 지평을 구성”(124면)하는 자리로 본다는 말이다. 이 말은 따로 기억해두자. 이수명의 시가 결과적으로 펼쳐 보인 세계의 모습과 방향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의 “누더기”를 저러한 원리의 상징으로 보는 일은 납득되지 않는다. “누더기”를 입은 ‘너’가 소거되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해설자가 ‘너’를 ‘시’라고 단정하기에 그렇다. 어떻게 그런 단정이 가능한 것인지, 상식적인 의문은 해명되지 않은 채 강동호는 이수명 시에서의 “옷은 ‘시인의 부재’ 또는 ‘부재하는 시인’이라는 이수명의 말라르메적 이념(주관성의 부재)을 표상하는 대상이자, 그가 직면하고 있는 당대성을 감각하는 외피(표면)의 역할을 수행한다”(123면)고 덧붙인다. 이쯤 되면 이수명의 옷은 평범한 삶과 결부된 옷의 맥락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시를 설명하는 데 복무하는 관념의 언어가 되어버린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이 시가 접속하고 있는 독특한 역사성을 마주할 가능성이 소멸한다는 데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이수명은 언어적 측면에 특별한 관심을 요하는 작가이다. 말라르메(S. Mallarmé)가 호명된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시인의 두번째 시집의 표제작이자 이수명다운 시로 거론되는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를 떠올려보라. 이 작품은 재현적 언어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 쓴 시에 가깝다. 두번째 시집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세계사 1998)에는 이러한 정황이 다수 그려진다. ‘바다’는 ‘바닥’이 되어버리고(「물고기와 컴퍼스」), ‘왜가리’는 느닷없이 ‘테이블’이 되어버린다(「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누적된 의미들을 등지거나 숨긴 채 소리의 유사성이나 문자의 시각적 이미지를 통한 독특한 연상에 갇힌 언어들은 무언가에 발목을 붙잡힌 포로처럼 보인다. 시대와 역사에 대한 판단에 동의하느냐와는 무관하게 쇠파이프는 땅에 묻히고(「이야기를 나누는 포로들」), 어딘가를 오르던 발목들이 계단에서 화분이 된 모습은(「계단마다 두 발이」) 1990년대를 맞이하는 장면으로 의미심장하다. 첫번째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세계사 1995)의 「새벽 안개」에 나오는 “했던 말을 철회한다”와 “목구멍에 걸리는 현실이 없다”는 구절 역시 1987년을 지나 1990년대에 진입한 시기를 이수명의 시세계가 어떻게 포착하고 있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비평은 이와 같이 작품의 언어와 연동된 역사적 정황을 탐색해야 하며, 이에 더해 그 조건에서 피어난 삶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누더기”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그런데 “누더기”를 해석할 때 추가로 고려할 사항은 이수명 시의 변화이다. 시집의 제목만 보더라도 변화가 감지된다. 이전 시집들의 제목 ‘마치’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그리고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는 언어의 변형에 관계하거나 언어의 반복에 강조점을 둔다. 반면 근간 ‘물류창고’와 ‘도시가스’는 구체적 삶의 현장을 떠올리는 자리에서 언어가 증폭하며 여는 공간으로 쉽게 비약하지 않고 본래의 자리에 남아 있는 제목이다. ‘물류창고’라는 구체적 공간을 그대로 내세운 시어의 출현을 특이하게 여기며 이수명의 시에 언어적 맥락 너머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 것도 이에 대한 방증이다.7)
물류창고는 우리에게 창고형 대형마트의 이미지를 쉽게 연상시키면서 동시에 세월호의 공간까지도 가닿는다. 이수명은 세월호라는 구체적 공간과 세월호 바깥의 한국사회를 중첩시켜 현실의 병증을 문제 삼은 것으로 보인다.8) 이런 정황은 “누더기”를 언어적 환각을 일으키는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 사회적 맥락으로 읽기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 개도국에서 저임으로 대량생산된 값싼 의류가 쇼핑센터에 전시되었을 때 대다수 사람들은 그것의 싼 가격을 볼 뿐, 자원 낭비, 에너지 낭비, 노동력 착취, 환경오염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는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다해도 소비 습관을 줄이는 사람은 드물다.9)
“누더기”를 해석하는 데 이런 서사를 더하는 일이 과할까. 이수명의 최근 두 시집을 보면 소비와 욕망만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모든 것을 경제논리로 다루며 시간을 압착시킨 사회의 문제적 모습을 시인이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제목만 보더라도 ‘소비자본주의’와 ‘화력자본주의’를 겨냥한 의식의 방향성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여전히 ‘너’라는 주체가 남는다. 「꿈에 네가 나왔다」에서 화자가 꿈속에서 만난 ‘너’는 그냥 막연한 너일까. 꿈이라는 공유영역에서 만나는 ‘너’는 누구일까. “누더기”라는 말 자체에서 감지되는 시간성은 ‘너’가 어떤 시간의 흐름을 동반하며 나타났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누더기”와 유사한 계열에 놓인 “돌멩이”로 시선을 옮겨도 그렇다. 그 “돌멩이”들이 시간이 흐르며 빚어진 것이 “돌벽”일 텐데, “돌멩이”가 빛을 잃기 전에는 곧 ‘별’이었다고 해석할 만도 하다.
40년 전, 옷과 별이 등장하는 특별한 시 한편이 있었다. 한 노동자가 스스로 자기 삶의 현장을 시로 써내려간 일은 노동문학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는데, 바로 그 시인 박노해의 등단작 「시다의 꿈」(『노동의 새벽』, 풀빛 1984)에서 ‘시다’는 “새벽별”을 이마 위로 맞으며 “옷을 만들”면서 “찢겨진 살림을 깁고” 있었다.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으로
장미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 흐르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
언 몸뚱아리 감싸줄
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
찢겨진 살림을 깁고 싶다
(…)
찬 바람 치는 공단거리를
허청이며 내달리는
왜소한 시다의 몸짓
파리한 이마 위으로
새벽별 빛나다
—박노해 「시다의 꿈」 부분
이수명의 「꿈에 네가 나왔다」와 박노해의 「시다의 꿈」을 겹쳐놓으면 문학작품이 얼마나 복잡하게 생성되는가를 새삼 떠올리게 된다. 이 복잡함은 우리 시의 역사가 형성한 두께가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과 시 자체가 거대한 협동작업이라는 점을 떠올리게도 한다.10) 한편으로는 같은 역사적 지평에 살며 구체적이고 감각적 경험에 예민하여 다른 시인의 작품도 깊이 체험하는 시인들이라면 이와 같은 작품의 연동이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있겠다.11)
주목할 것은 이 두 작품의 결속으로 인해 새롭게 펼쳐지는 인식과 실천이 다. 박노해가 그린 ‘시다의 꿈’은 “왜소한 시다의 몸짓”이 암시하듯 그 꿈이 헛된 것이 되리라는 불안이 작동하고 있긴 하나, 어떠한 응답을 계기로 “장미빛” 미래를 그려볼 여지 또한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수명의 시를 살펴보면 마치 노동자들이 품었던 꿈이 누더기가 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는 듯하다. 박노해가 직시한 노동현장의 사회적 차별과 푸대접이 여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심각하기에, 이런 결론을 ‘시다의 꿈’이 누더기처럼 엉망으로 훼손되었다고 읽을 여지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시 사이의 교신으로 그려진 결론이 지난 40여년의 노동현장이 완전히 황폐화되었다는 이야기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수명의 시 속 ‘너’의 안위를 묻는 감각은 단순히 남을 생각하는 윤리적 태도의 강조가 아니다. 「꿈에 네가 나왔다」의 “꿈”은 ‘시다의 꿈’이 꿈꾸던 주인됨의 자리와 자신의 가리가 무관하지 않음을, 자신의 자리에서의 주인됨 역시 노동의 자리가 처한 처지와 연동되어 있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또한 둘의 연합이 너무 약해 고통의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다는 반성의 그림자도 깔려 있다. 어쩌면 이 두 자리 사이의 교신과 연합, 이것은 우리가 문학사에서 말했던 민중의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닐까. 두 시 사이에서 우리는 민중적 운동성을 발견할 수도 있으며, 소비자의 자리로 자신을 이끄는 시대적 질서에 저항하며 최대한 민중의 자리에 가보려는 시인의 실험이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긴 시간을 사이에 둔 작품들을 결합해서 읽는 일이 우리에게 늘 안도할 만한 내용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눈 오는 날」(『도시가스』)은 우리의 감수성이 지난 몇십년 사이 얼마나 파괴되었는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시다. 누군가에 의해 버려진 을씨년스러운 책장에 책은 한권도 없고 눈뭉치만 뒹굴고 있는 장면을 그린 앞부분을 생략하고 그다음부터 이어서 옮긴다.
남몰래 눈 뭉치를 던지는 자는 누구인가
그대로 내버려둔다.
알 수 없는 곳에서 날아든 저 분명치 않은 덩어리들을 건드리고 싶지가 않다.
(…)
규칙적으로 나열되어 있는 거리의 크고 작은 창문들
모두들 밖으로만 내는 창문들
거리에는 구석으로 옮겨지는 눈 실려 가는 눈 도로 가득
녹지 않은 눈
위를 걷는 사람들
속에서
한 손에 책을 들고 가는 사람을 보았다.
—이수명 「눈 오는 날」 부분
녹지 않은 눈(雪) 위를 미끄러지며 지나치는 사람들과 그들의 차가운 눈(目)이 그려진 시이다. 여기서 또다른 시, 기형도의 「기억할 만한 지나침」(『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을 떠올린다. 기형도는 눈 내리는 거리에서 창문을 통해 사무실 안쪽을 바라보며 서류뭉치에 둘러싸여 남몰래 혼자 울고 있는 ‘그’를 바라보는 사람의 눈빛과, 잘 알지도 못하는 그이의 슬픔을 존중하고 동조해주던 인정(人情)을 기록한다. 하지만 이수명의 「눈 오는 날」에는 그런 눈빛과 동요가 없다. 이수명의 시는 타인의 사정에 대한 무관심과 더불어 익명적 삶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무차별적인 공격적 정동을 무심히 그려낸다. 몇십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두 시를 겹쳐 읽으며 우리는 이 질문을 진지하게 던질 순간을 맞는다.
한국시는 여러 삶의 자리를 그리며 그만의 세계를 구축해왔다. 그 세계에서 시인들은 각자의 꿈과 시 속에 그려진 꿈을 겹쳐놓고 사유할 영역을 얻었다. 같은 삶의 지평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를 알아보는 비평가들의 입체적이고 성실한 독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한 독해는 서로의 꿈과 기록으로 현실의 모습과 의미를 한층 선명하고 두텁게 하는 시인들의 작업에 비평 역시 민주적 대화의 공간을 열어 협업하는 일일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개별 작품을 축적하는 문학사가 아니라 축적된 작품들의 관계 맺음을 통해 시간을 품는 문학사일 것이다. 그로써 변화된 삶의 궤적이며 변화에 휩쓸리지 않은 우리의 본모습을 총체적으로 확인할 기회를 제공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울러 한국시와 관련한 지식을 축적하는 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꾸었던 꿈을 새롭게 활성화하는 실천적 장을 기대하게 만들 것이다. 이 실천적 장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님’을 맞이하거나 또는 어떤 ‘님’이 침묵에 이르렀는지를 되새겨볼 수 있지 않을까.
3. 잃어버린 시의 커먼즈를 찾아서: 이세기
비평이 작품 속에서 ‘님’을 발견하는 데 곤란함을 겪는 이유 중에는 비평가들이 ‘님’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님’의 출현을 몰라보고 시선을 두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님’은 어디에 있는가. 당연하게도 ‘님’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있다. 이세기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갯티’ 같은 곳은 신랄하게 구체적인 삶의 풍경이다. 이세기에 따르면 갯티는 “섬 둘레에 형성된 갯바위 주변이나 갯바탕”, 즉 ‘갯벌이나 갯가’를 말한다.12)
할멈 둘이 앞서 걸어가고 있다
살얼음 갯바위 틈새
얼어죽은 한 마리 주꾸미라도 주우려
갯바위를 걸어서
굴바구니 들고 갯티에 가는
생계 줍는 아침
—이세기 「생계 줍는 아침」 전문13)
이 풍경에 인간을 위한 편리와 안락은 없다. ‘생계’라는 단어 역시 그것들의 결핍을 가리킨다. 생계를 ‘살길’로 바꿔 읽으면 살길을 찾아 갯티를 걷는 이 노인들의 모습과 갯바위 틈새에서 얼어 죽은 주꾸미 한마리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모두 자신의 유한한 신체성을 고스란히 수용하며 사는 듯하다. 이 상황이 묘하다. 인간을 위한 안락은 없지만 거기에는 인간의 독단과 거만 또한 없기에 어떤 공존의 생태감각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고통과 평화의 공존을 바라보는 듯한 이세기의 시선은 삶의 현장을 관망하는 자의 착시 내지 착각일까. 갯티가 등장하는 다른 시의 구절까지 살피면 꼭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예컨대 「덕적군도」(『언 손』)에는 “갯티 얼굴에 찌든 사람들을 보면 모두 한 동서 같다//햇굴이 나오는 갯티에서 만나는 사람 모두가 고향 같다”라는 구절 있다. “얼굴”과 “햇굴”의 비슷한 음성에서 우리는 둘의 존재론적 위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받는다. 햇굴에게도, 그것을 채취하는 얼굴에게도 갯티는 고향이다.
앞선 시 「생계 줍는 아침」의 작은 풍경을 처연하게 보이지만은 않게 하는 장면이 있다. 할머니가 ‘둘’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갯벌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서로를 책임져주는 삶의 규약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쯤 되니 머릿속에서 막연히 떠오르던 두 노인의 걸음걸이가 달리 상상된다. 구부정하고 힘없는 걸음이 아니라 가난 속에서도 의연한 노동의 걸음. 동시에 우리가 쉽게 알아보지 못하는 특별한 약속의 공동체를 상상하게 된다. 첫 시집 『먹염바다』(실천문학사 2005)의 추천사를 쓴 박영근과 두번째 시집 『언 손』의 추천사를 쓴 정희성이 서술했듯 이세기의 시적 영토는 한국시사가 충분히 돌보지 못한 곳으로, 의미의 발굴이 필요한 지역이다.
우선 덕적군도의 가난에는 한국사회의 토건지향적 개발의 역사가 드리워져 있다. 그곳은 애매한 입지나 북과 인접해 있다는 특성 그리고 몇몇 토건세력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경험으로 인해 개발에서 벗어나 있었다.14) 그러나 개발에서 멀어진 것이 가난의 유일한 원인이 되긴 힘들다. 이 지점을 역사적 관점에서 내실있게 설명한 이는 최원식이다. 최원식은 이세기의 첫 시집을 해설하며 이세기 시의 영토가 거느린 역사를 자세히 살펴 그곳 사람들의 삶의 맥락을 유장하게 짚는다.
내륙지향적 조선왕조가 고려의 해양성을 봉쇄하는 강력한 해금(海禁)정책을 펴는 바람에 알게 모르게 유전되는 이 고루한 정치적 무의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바다와 그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은근히 괄호 친다. (…) 인천을 근거지로 활동한 남로당의 이승엽이 영흥도, 진보당의 조봉암이 강화도 출신이라는 사실은 섬의 근대정치학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이다. (…) 인천 앞바다 섬들은 해방에서 6·25에 이르는 격동기를 통과하면서 이데올로기적 쟁투의 임계점에 오른다. 먹염바다는 이 시가 덕적군도 일대에서 활동한 좌익을 수장(水葬)한 곳, 그 시체들이 문갑도로 떠내려왔다고 시인은 말한다. 반란의 땅, 섬들은 6·25 이후 서해 바다에 금 없는 금이 그어지면서 다시 아득한 변방으로 가라앉는다. 엄격한 반공체제 아래 접적(接敵) 지역의 섬 주민들은 잠재적 위반자로 간주되곤 했는데, 바다의 가난은 의연하였던 것이다.”(최원식 해설 「바다가 가난한 나라의 시」, 119~20면)
‘갯티’에 그려진 삶은 단지 운 좋게 개발에서 벗어난 보존구역의 풍경이 아니라, 현대사의 질곡과 무관하지 않으며 떳떳한 반란과 당당한 삶의 기운과도 닿아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세기의 시에 누군가의 제사를 치르고 치성을 드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시인은 의례를 매개로 억울한 삶을 불러오고, 온전하기 어려웠던 삶을 재증명한다. 이 의식(儀式) 안에는 수장되고 배제된 사람들에 대한 애도와 기원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일면식도 없고 숨소리마저 그친 사람에게까지 가까이 다가가려는 제사와 굿은 튼튼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며 그 네트워크를 지속시킨다.15) 직접적으로 관계 맺어본 적이 없는 존재들과도 관계의 책임이 있음을 배우는 계기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독자에게 누군가의 실현되지 못한 꿈에 대해서도 책임을 동반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실감을 제공한다. 나아가 즉각적으로가 아니라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무언가를 되새길 수 있는 의미의 공간을 감각할 수 있게 만든다. ‘님’과의 만남 비슷한 것이 제사와 치성의 행위 속에 있는 것이다.
덕적군도 혹은 북에 인접한 서해군도 문학으로서 이세기의 시는 한국문학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한국시사에서 왜소해진 서사인 분단 문제가 그의 시에서는 여전히 강한 현재성으로 작동한다. 이 말 하기가 조심스럽다. 마치 시인이 분단을 전면으로 내세운 시를 쓴다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세기의 시에는 분단 문제가 드러난 순간들이 있다. 시의 화자가 “밤에도 집을 찾아 떠나는/새소리”(「조강에서」, 『언 손』)를 들으며 단절을 떠올릴 때, 산마루에 걸린 흰 구름을 바라보며 “황해도 연백에서 왔다는 할배가/배연신굿을 하는 애기무당 누이를”(「대청도를 지나며」, 『언 손』) 떠올리며 눈시울을 훔칠 때, 어느 사이엔가 한국시사에 사라진 영토인 북이 다시 호출되고 분단체제의 문제가 슬며시 고개를 든다. ‘슬며시’가 중요하겠다. 분단 문제가 다른 문제를 집어삼키며 등장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세기의 시에서 분단은 거창하고 관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개인의 생존과 밀착된 현장의 문제이다. 누군가의 가계와 이주와 경제와 노동과 굿과 울음과 눈빛 속에 분단은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이세기의 시를 읽는 독자들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 드리운 분단의 그림자를 알아보고 자신의 세계상을 수정할 것이며 갯티가 품은 동향의식이 갯티 안의 것만이 아님도 깨달을 수 있다. 「서쪽」(『먹염바다』) 같은 시를 살펴보자.
그해에는 삼월에도 눈이 내렸습니다
(…)
배를 타고 월북을 하였던 둘째 작은아버지는 반공법으로
월남에서 돌아온 매형은
목발을 한 채
이틀 밤을 묵고 섬을 떠났습니다
(…)
흙을 파먹다 부황이 들었다는 배를 타지 못한
흐냉이 삼촌은 끝내 죽었습니다
쉬쉬하는 소리와 함께 언 땅에 묻었습니다
배를 탈 수 없었던
털보 작은 아버지와 넙잭이 작은 아버지는
인천으로
아버지는 목포로 갔습니다
바닷가에 눈이 내리고
어두운 밤하늘에서는
쟁쟁 꽹과리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피 묻은 뱃사람이 거적을 뒤집어쓴 채
마을로 올 것만 같은
밤이 지나고
(…)
어두운 밤바다에서는
그해의 마지막 눈이 내리고
뒷산에서는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두운 방 안에서는 엉엉 울음소리도 났습니다
그때마다 당집의 울타리 돌담에다가는
몇 개의 돌이 얹어졌습니다
—이세기 「서쪽」 부분
이 시에서는 부엉이의 울음과 사람의 울음이 공명하듯 모든 존재들의 사연이 연동되어 있다. 물론 이 연동에는 불합리한 제도가 압력을 가한 부분도 있다. 이 땅의 냉전체제나 분단 문제 등은 한 개인의 행적을 빌미 삼아 그 주위의 친밀한 존재들까지 구속한다. 인물들의 삶은 구속을 피하지 못하는데, 이는 그 구속의 압력이 상당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물들이 스스로를 운명공동체의 구성원처럼 여기는 관습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땅의 제도는 섬사람들의 삶에 커다란 압력과 상처를 주었고, 그들은 죽음에 이르거나 죽지 못해 고향에서 먼 곳으로 이주해 살길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고향이자 노동의 현장으로부터 내쫓긴 자들과 남겨진 자의 곤경을 그리는 이 시는 우리 삶에 새겨진 역사의 상흔을 현재적으로 감각하게 한다.
그런데 이 시가 불러오는 것은 상흔만이 아니다. 당집 울타리에 돌 몇개를 올리고 가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이웃의 상처를 돌보는 이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이세기의 시세계에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염려하고 환대하는 모습이 종종 비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16) 또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섬을 지킨 뱀의 전설을 시화한 「이무기 이야기」(『언 손』)와 토건세력들과 싸워 굴업도를 보호한 목소리를 다룬 「굴업도」(『언 손』)가 폭력과 맞선 기억의 기록으로 자리한다. 이 시적 영토는 우리 시사에 좀더 깊숙이 들어올 필요가 있다. 분단과는 무관한 삶을 그리는 듯한 시세계에 우리가 처한 현실의 실감을 전달하는 것은 시의 공유영역과 현실의 영토 사이에 크나큰 이격이 생기는 허망함을 방비하는 일이며, 또한 아직 오지 않았지만 아예 오지 않은 것은 아닌 평화적 공동체의 꿈을 연습하는 길이다. 흥미롭게도 이세기의 시가 가장 아끼는 서술어가 ‘온다’이다. 그는 노동하고 이주하고 슬퍼하고 누군가와 잠시 구원처럼 삶을 나누는 과정 속에 아직 오지 않은 존재들을 기다리며 수행하는 듯한 사람의 형상을 그려 넣는다.
4. 한국시의 성취를 생각하며
기다린다는 것은 그 기다림의 대상이 지금은 없다는 궁핍의 체험인가 하면, 기다릴 것조차 없는 상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충만의 체험이기도 하다. 모든 기다림에는 눈앞에 없는 지나간 어떤 것에 대한 기억과 앞으로 올 그 무엇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다. (…) 고통을 느끼되 희망과 기억을 잃지 않고, 이 고통의 시간을 일순이라도 단축하기 위해 희망과 기억의 시킴에 따라 그날그날의 할 일을 하고 싸움을 싸우는 것만이 올바른 기다림의 자세인 것이다.17)
백낙청이 만해와 육사, 윤동주와 김수영을 불러 모아 기다림의 참뜻을 감각적이고 자상하게 살핀 이 글에는 자연스럽게 기다림의 행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님’의 자리도 그려진다. 기다림이 왜 생기고 어떻게 그 지난한 일을 회피하지 않고 지속하는지를 말하는 사이 문학의 자리에 새겨지는 ‘님’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각자의 고통 섞인 삶 속에 ‘님’의 빈자리가 있다는 점은 누구나 안다. 또한 자본주의가 빚은 착취와 불평등이 극복되는 자리, 분단이 만든 자주와 평화의 빈자리 역시 ‘님’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아마도 저 공간들을 구체성을 띤 문학의 언어를 통해 마주한 경험도 빈번할 것이다. 시인들은 시의 공동영역(커먼즈)과 현실을 오가며 서로의 꿈과 현실을 복잡하게 체험하고 그를 바탕으로 자신의 언어로써 실험하고 창조한다. 이런 상황은 비평가들에게 시의 공동영역을 좀더 적극적으로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을 설명할 책무를 요구한다. 비유하여 말하자면 이는 시와 현실 사이에 놓인 다리를 언어화하는 일이며, 한 시인의 꿈과 다른 시인의 꿈 사이에 이어진 다리가 새롭게 개방한 길을 알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비평은 문학의 언어에 시를 가두는 일을 멈추고 저 다리와 길 위에 다시 서야 한다.
- 1) 최원식 「자력갱생의 시학」,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 2) 김종엽은 1987년 이후 사회문화적인 영역의 전환을 이야기하며 1990년대 중반에 이루어진 “문화담론의 폭증”과 “다양한 정체성의 탐구, 상징적 투쟁들, 역사적 기억의 투쟁들”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김종엽 『분단체제와 87년체제』, 창비 2017, 134면 참조.
- 3) 미래파 논쟁에서 미래파를 옹호하는 비평들이 작품의 현실적 의미를 얼마나 소홀히 해석했는가에 대해 다음에서 분석한 바 있다. 졸고 「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나」, 『문장웹진』 2023년 11월~12월호 참조.
- 4) 강동호 「존재론적 비명으로서의 시적인 것」, 『창작과비평』 2009년 가을호.
- 5) 이 문제에 대한 담론분석은 황정아 「이토록 문제적인 ‘인간’」, 『창작과비평』 2024년 봄호 참조.
- 6) 인아영 「개와 나무와 양말과 시」, 『진창과 별』, 문학동네 2023.
- 7) 시집 『물류창고』와 『도시가스』의 조재룡과 강동호의 해설에서도 이런 점이 잘 드러난다. 강동호 역시 『물류창고』에서부터 이수명 시의 변화가 감지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
- 8) 물류창고라는 말 속에 ‘물이 흐르는 곳에 놓인 창고’의 연상이 담겨 있다. 또한 물류창고 시편들에 등장하는 ‘사진 찍기’ 장면이나 ‘캠프’라는 용어, ‘폭파’ 직전의 묘사나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의 변형으로서 정숙(靜肅)을 종용하는 관리자의 목소리 등은 세월호를 불러오는 연상들이다.
- 9) 조효제 『탄소 사회의 종말』, 21세기북스 2020, 123면.
- 10) 백낙청은 민중에 의해 쓰인 글만이 민중문학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문학의 생산은 집필행위라는 과정에 국한되지 않는 하나의 거대한 협동작업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아요.” 백낙청 『민족문학의 현단계』, 창비 2022, 372면.
- 11) 흥미롭게도 이수명은 한 시에서 꿈들의 교류를 표현한 적이 있다. “그의 꿈과 꿈 사이에 나는 나의 꿈을 놓았다. 나의 꿈과 꿈 사이에 그는 그의 꿈을 놓았다. 꿈과 꿈 사이를 꿈으로 채웠다.”(「꿈」 부분,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문학과지성사 2005) 이 구절은 우연히 쓰인 구절이라기보다 이수명이 자신의 시가 가진 운동성을 감지하고 풀어낸 대목으로 읽을 만하며, 꼭 이수명이 아니더라도 개인의 꿈에만 붙박여 문학을 하는 이가 아니라면 누구나 경험할 만한 문학적 행위에 관한 표현으로도 읽힐 구절이다.
- 12) 이세기 「시어풀이」, 『서쪽이 빛난다』, 실천문학사 2020.
- 13) 이세기 『언 손』, 창비 2010.
- 14) 덕적군도와 관련한 내용은 이세기 산문집 『흔들리는 생명의 땅, 섬』, 한겨레출판 2015 참조. 특히 토건세력과 싸웠던 기록은 이 책의 「굴업도에서 배우다」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 15) 제사가 지닌 공적 가치에 대해서는 백민정 「왜 귀신의 공공성인가」, 『창작과비평』 2024년 봄호 참조.
- 16) 『언 손』에 실린, 이국에서 섬으로 이주해온 여성과 오랫동안 섬에 정착한 할머니들 사이의 교감을 시화한 「이작행」이나 사라진 이주노동자 가족의 행방을 염려하는 내용의 「다알리아와 칸나」가 대표적이다.
- 17) 백낙청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창비 2011, 46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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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1 이번 봄에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탐험하고 매체를 다시 읽어내는 글들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인류세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비인간’ 담론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의 등장 이후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독보적인 단상 위에서 내려와 비인간과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물며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겸허한 기획은 급작스럽게 복잡한 불안에 갇힌 것 같다. 적어도 기계에 대해서라면 이미 우리는 동등하거나 어쩌면 한참 전에 초월당한 것은 아닌가? 경계 허물기로 인한 희열보다 불안이 확연히 압도하는 자리에서 『쓺』 2024년 상권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과 ‘작은 기획—채굴 문화와 미적 감각’을 유독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작은 기획’에 실린 심효원과 윤원화의 짧은 글이 각각 인간이 향하려는 방향과 의지의 아름다움, 그 노력이 무산되는 수동태의 자리에서 감지하는 공포와 불쾌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먼저 심효원의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는 비인간 행위자인 ‘지렁이-되기’를 통해 근대의 한계를 돌파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글이다. 지렁이가 땅과 맺는 일원적인 관계성과 분변토라는 건축물은 근대 이후 인간이 이룬 도시의 뚜렷한 경계와 고정성의 반대편에 있다. 지렁이의 건축물 만들기란 사실상 움직이고 먹고 배출하는 신체적 행위의 반복일 뿐이지만, “비인간들의 극도로 효율적인 메커니즘”이자 자신의 몸이 다른 존재와 물리적으로 닿는 매순간마다 “무차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력”1)이기도 하다. 촉각이 주도적인 지하세계에서는 시각이 미미해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 역시 달라진다. 미래의 미결정성을 남겨두는 대신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최근 신유물론을 비롯한 담론들과 풍요롭게 공명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상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지하세계로 향하는 방향성은 최근 SF 소설의 주요한 상상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정세랑의 「리셋」(『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에서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던 자본주의의 질주를 멈추게 한 것은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내려온 지렁이들이다. 강제 리셋 이후 인간들의 자리는 자연히 땅속 깊은 곳이 되고, 지상은 다른 종들이 누리는 공간이 된다. 김초엽의 『파견자들』(퍼블리온, 2023)에서도 지상은 균류인 ‘범람체’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감염을 피해 지하세계로 내려와 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문명 말살에 가까운 아포칼립스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영화의 촉각성을 즐겁게 감각해온 인간이 미래의 지구를 위해 지렁이를 신속하게 체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물론 직접적인 실천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지구의 거대 환경 시스템의 핵심 행위자 자리를 재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겠다. 하지만 미래적인 지하세계로 들어가기에 인간은 아직 시각적 쾌락 속에 즐겁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지적 유희를 야기하는 활자의 쾌감까지 포함해서. 윤원화의 「땅을 파는 손」은 채굴적 상상력의 매혹과 절망을 말한다. 데이터로 전환된 우리의 생태 에너지를 부의 원천으로 삼으며 굴러가는 미디어 산업 앞에서, 인간의 생산물·복제물·부산물·폐기물을 구별하기는 어려워진다. 디지털 기술로 구축되는 ‘아카이브 데이터’는 역사는 넘쳐흐르지만 이를 의미화하는 전통은 불가능한 곳이다. 윤원화는 과잉생산으로 범람하는 사물들 앞에서 맞닥뜨리는 불길한 실패에의 예감을 시앤 응아이Sianne Ngai의 ‘기믹gimmick’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매직magic’의 애너그램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 이 단어는 1920년대 미국에서 편법적 장치, 싸구려 트릭, 계산된 마법 등을 뜻하는 신조어로 출현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의 황홀감과 환멸을 모두 각인한 기믹의 불완전한 형식은 오늘날 삶과 예술, 또는 넓은 의미의 ‘사업’에서 흔히 발견된다.2) 단기적 이익 추구에 최적화되어 있는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가치 절하된 노동에 시달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기믹의 유희에 이끌린다. 운에 따라 누군가는 축적된 자원을 폭발적으로 소모할 수 있으리라는 채굴적 상상력이 번성하는 가운데, 보상도 성취도 불확실한 예술 노동 역시 가치 체계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원화는 이런 진단과 고민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생산성 중독의 시대에 예술은 어떤 시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3) 심효원이 지하라는 공간과 이를 감각하는 촉각성에 의지해 의미 있게 압축되는 순간의 시간성을 말한다면, 윤원화는 ‘농사’와 ‘채굴’을 대비하며 채굴의 무책임한 풍요의 약속이 얼마나 파국적일 수 있는지 말한다. 최단기간의 이익에 매몰된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생산물은 넘쳐흐르지만 어떤 가치 창출도 담보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은 불투명한 시간을 표류하는 중이다. 이런 진단 속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에 의해 갱신되는 매체의 기술적 발전은 인간과 나란히 놓여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환멸을 불러오는 맹목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의 ‘지렁이-되기’를 향한 아름다운 여정은 너무나 느리게 진행중인데,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예술을 몰아치듯 양산해낸다. 인간의 몸은 자발적으로 물질과 동등하게 놓이기 전에 물질이 만들어낸 다른 가치들에 의해 가치 절하되며 밀려나게 될까? 생동하는 물질들 안에서 인간을 재의미화하려는 시도와 인공지능을 의심하며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지키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래의 비평들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2 『쓺』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을 여는 글은 근대 패러다임이 ‘개인’을 해방하고 자율적 주체로서 정립해왔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 시대에 여전히 개인의 이념이 유효한지 묻는다. 개체성과 집단성이 직면할 변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서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글을 꼽는다면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과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인공지능은 창작하지 못한다, 다만 제시할 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은 기계 성능의 고도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게 산업화 이후의 근대는 ‘저자의 시대’이며, 이는 기술 발전의 작용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 만들어낸 변화이고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방향타가 된 것은 저자라는 이념의 바탕에 놓인 ‘개인주의적 사상’이다. 이는 산업화 사회 속에서 부속물로 전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회 분석의 준거점을 개인에 두고 진리와 자유를 탐색했던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조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다시 독일 지성사의 문화 비판적 사상의 전통이 소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김태환은 “항상적인 문화 공급 과잉의 시대”(37쪽)라는 진단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나 웹사이트, 유튜브 등 정신의 대상화로서의 객관 문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반대 방향인 객관 문화에서 주관 정신으로의 내화는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로 인해 그만큼의 양적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알고리즘 속에서 타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객관 문화의 총체가 스스로 발언하고 생산하는 주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이 글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정신의 개별성’이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개인으로서 개별적 의지, 개별적 내면, 개별적 정신을 지닌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는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직접 조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주적이라는 사실”(42쪽)을 변함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에 휩쓸리기보다 이를 의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사유할 틀이 우리에게 요긴한 것은 사실이다. 데이터에 얽힌 저작권 문제 역시 계속 규제안을 논의해나가야 할 비판적인 쟁점이다. 그렇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위기를 산업화 시대 이후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혹시 너무 큰 틀에서의 접근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작동 방식과 결과물이 인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때, 새로운 매체와 관련해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글에서 알고리즘에 갇힌 디지털 시대 개인의 부자유에 대한 우려는 빠르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의 재소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 강조되는 개인의 개별적인 ‘의지’와 ‘내면’과 ‘정신’에서 신체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글에서 인공지능과 대립되는 요소로 논의되는 인간의 ‘의식’이란 단순히 합리적 이성만은 아닌 “수많은 감각적 심상과 기억·감정·소망·의지 등이 혼재하는 심적 상태”(46쪽)다. 알파고와는 다른 인간 바둑 기사의 의식을 예로 들면서 언급되는 긴장, 초조, 후회, 자책, 엉뚱한 연상 등은 “바깥에서 결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내면”(같은 쪽)으로 규정된다. 베일에 살짝 가려진 듯한 이런 인간 내면의 신비함은 물질적인 신체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진화해온 신체야말로 내면 이상으로 복잡성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는 “신체화의 말소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 양쪽 모두의 공통된 특성”이라는 캐서린 헤일스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헤일스는 합리적 정신과 등치되는 자유주의적 주체가 “그 악명 높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자아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4)이라고 말한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한계는 곧 발전을 통해 ‘영웅적 개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 모든 능력에서 커다란 한계를 안고 있는 개별자로서의 인간만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어떤 감동적인 위대성에 이를 수 있”(53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반드시 육체의 신경과 근육의 단련 과정을 동반하며 그것이 생각과 행동에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잠시 괄호 안에 두어진다. 이 글의 전반적인 주장이 온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자율적인 개인상과 관련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개인이 지향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가치다. 생산과 창조의 주체로서의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소비와 소멸의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해 우리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근대 이전에 우리가 ‘저자’가 불투명한 긴 구술 시대를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저자의 시대’ 이후의 저항이 활자와 개인을 넘어선 범주에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3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은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답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지능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가지므로 ‘집단 지능’이라고 해야 한다. 개체를 중심에 놓으면 ‘창의’를 중시하게 되지만, 그 새로움은 다른 개체가 ‘모방’하고 ‘확산’하지 않는다면 사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달리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이라는 형태의 외장 기억을 건설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저자는 낭만주의 미학과 예술에서 강조하는 천재적 개인과 창조력에 대한 신화를 뒤로하고 “인간이란 거대한 기억”(62쪽)이라 정의 내린다. 이는 물론 질적 도약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양적 축적을 말한다. 김태환이 인간의 의지, 내면,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면을 중시한다면, 김재인은 “나의 생각이란 시한부 소유물”(63쪽)에 가까울 수 있으며 그 휘발성을 지켜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물질’ 혹은 ‘미디어’”(62쪽)라고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외화된 집합적 사물성으로 바라보며 그 반대편에 선다. 그런데 이 글은 ‘컴퓨터가 자연어를 다룬다는 것’이라는 장부터 급작스러운 단절을 드러내며 도약한다. 앞에서 인간의 생각 자체를 미디어이자 집단 기억의 저장고로 본 것과 다르게, 예술과 창작의 영역을 다룰 때는 컴퓨터가 자각 혹은 성찰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컴퓨터는 예술 능력이 없다”(66쪽)고 확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를 바라보는 김재인의 시점에는 도구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창작의 정의를 “스스로 선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 발휘되었느냐”(67쪽)에 두는데, 중요한 점은 저자가 그 평가 주체의 자격을 ‘생물’로 단정한다는 것이다.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스스로 반복”하는 유기체이고, 이 글에 따르면 평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한 지각 처리와 행동의 연쇄”(70쪽)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애초에 기계는 아무리 ‘집단 기억’의 ‘미디어’로서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무기물이라는 점에서 평가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배제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이렇게 유기체의 항상성과 관련된 기준을 평가 능력과 일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저작 『AI 빅뱅』에서 참조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찾아보면, 이는 “몸의 고집스러움”5)이라는 말과 함께 구체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심지어 같은 프롬프트를 주더라도 생성물이 크게 바뀌는 무작위성randomness을 보여주는데, 이는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면을 지니는데, 저자는 이를 몸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 장에 바로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한 질문자는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가지는 것이다”6)라는 전제 위에서 인공지능이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인공지능으로 발전할 방법이 있는지 묻는데, 김재인은 이에 대해 ‘몸의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로 답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은 생각을 “바로 휘발되지도 완전히 고착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지점”7)에 붙잡아둔다는 것이다. 김재인은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을 논하는 데 있어 복잡성을 가진 신체의 차원을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창작을 논하면서부터는 김태환의 논의와 유사한 탈신체화의 방향을 답습한다.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특징”은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하는 비결”(70쪽)로 치켜세워지고, 진화를 위해 외부와 교섭하며 몸 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피드백 루프는 유기체만의 고유한 신체적 능력으로 남는다.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케이트 크로퍼드가 인공지능은 추상화된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체화되고 물질적인 지능이며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하부구조, 물류, 역사, 분류를 통해 만들어진다”8)고 강조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일차적인 목표로서의 생존이 진화의 필수 사항이라 말하는 신경과학 연구자 아닐 세스가 우리의 지각은 사실 ‘통제된 환각’이자 ‘최적의 예측’이라 설명했음을 염두에 두면 어떨까. 그에 따르면 ‘당신이 된다는 것being you’, 즉 인간의 ‘동물기계’적 본질과 의식적 자기 사이의 연결고리는 “신체 자체가 가진 현재와 미래의 생리적 조건에 대한, 형태도, 모양도 없고 제어 중심적인 지각적 예측”9)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인공지능 역시 지극히 물질적인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 역시 체화된 자아로 인한 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예술을 창발시키는 창의성 개념이 다르게 읽힐 가능성이 열린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 후에 마련된 『인문예술잡지 F』 21호의 특집 ‘고함: 비-인간’에서 이진경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인공지능이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괴델의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과정 속에 언제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수준에서도 공리계로 귀속될 수 없는 명제(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생성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형식적 추론에서조차 새로운 명제의 창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역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설명한다. “변이mutation의 누적에 의해 진화는 이루어”지지만 처음 “생명체의 변이는 지배적인 개체군 안에서 일종의 ‘장애자’나 ‘고장’으로 간주된다”10). 하지만 환경이나 생존 조건에 따라 변이가 진화된 변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기계가 만들어내는 예측되지 않은 결과의 출현 역시 ‘고장’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창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논의다. ‘인간 없는 예술’이 도래하려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기술적 특이점이 올 때마다 반복되어온 정동이기도 하다. 이 앞에서 좀더 차분하게 이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축적할 필요를 느낀다. 2024년 『쓺』의 특집이 창작자이자 예술가가 서 있는 주체의 자리에서 출발했다면, 2016년 『인문예술잡지 F』의 특집은 그 결과물인 작품의 자리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은 음악이 기술적 혁신을 이루는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혔는지를 따라 음악사를 재구성한다. 자동 피아노의 경우에도 그 연주를 더 실제처럼, 더 자연스럽게, 더 인간답게 만들겠다는 목표는 거의 달성되었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가 만들어낸 경험이 정말 특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인간의 연주라는 원본 혹은 목적지를 버렸을 때이다. 인간의 연주라는 목적지를 소거해버리고 이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뭔가를 연주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인간 없이 손쉽게 해냈다면, 그 기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인간의 복제’가 아니라 ‘탈脫인간’으로 재조정할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기계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 자동 피아노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인간의 연주를 기록하고 인간의 연주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연주의 대리자는 오히려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연주하며 그 누구보다 기계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예술형식 말이다.11)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독자적인 예술형식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모방은 때로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던 자율적인 개인 주체로서의 예술가상을 어떻게 바꾸어나갈까. 또 인간의 예술적 집념은 어떻게 예술 형식들을 바꾸어나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불안만이 정확하게 인간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불러오는 균열 속에서 인간에 대한 고정된 사유를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을 때 인간과 예술 모두에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1) 심효원,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 『쓺』 2024년 상권, 368쪽.2) 시앤 응아이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던 2010년대 후반의 미술과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기믹의 이론화에 착수하는데, 기믹은 의심스러운 도구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키치와는 다른 저질 예술로 취급되면서도 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심을 표면화하는 미적 전략으로도 쓰일 수 있다. 윤원화는 이 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공모 프로그램 선정작인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의 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한다. 이 전시는 관객이 옥수수 농사 시뮬레이션을 완수한 후 ‘콘 코인’이라는 가상 화폐를 받아 실제 뻥튀기 한 봉지와 교환하는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 노동이 이에 비례하는 가치 창출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대신, 콘 코인이라는 불분명한 요소가 끼어들면서 매끄러운 교환 가능성이 흔들릴 때 이 간극에서도 기믹이 관찰된다고 할 수 있다.3) 윤원화, 「땅을 파는 손」, 같은 책, 383쪽.4)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27쪽.5)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153쪽.6) 같은 책, 156쪽.7) 같은 책, 157쪽.8)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17쪽.9)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장혜인 옮김, 흐름 출판, 2022, 243쪽.10) 이진경, 「인공지능시대의 예술작품」, 『인문예술잡지 F』 21호, 2016, 25쪽.11)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유령, 2019, 115쪽.
1. ‘서울의 봄’을 기다리며 유신 독재 시대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을 다시 돌아다보면서 근래에 극장가의 흥행 기록을 다시 쓴 영화 (2023)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또한 그렇기에 ‘서울의 봄’이 당시로써는 아직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솟아오르는 아쉬움과 슬픔, 분노의 감정은 덜해지지 않는다. 40여년의 시간차를 무색하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 시대를 지나오지 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까지도 강력하게 휘몰아친다. 그러니 그 시대를 온몸으로 뚫고 나갔던 이들은 눈앞에서 물러나는 봄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이 제목을 따온 「겨울공화국」의 시인 양성우는 그의 또 다른 시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에서 그 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들려준다.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곤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내가 죽고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꾼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후략)…1)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실 수 있다면, 오는 봄에 작은 바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의 시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죽고 다시 죽어 넋으로 스며든다고 해도 좋다는 시인의 결연한 고백을 듣고 나면 그러나, 또 한 번의 겨울 속으로 선선하게 걸어 들어갔을 그들의 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봄은 물러갔어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에서 주요하게 살펴보고 있는 김지하와 황석영, 조세희, 이문구는 신군부 독재 정권하에서도 계속 문학이라는 싸움과 저항을 지속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그들에게는 “오는 봄”을 기다리며 문학에 대한 믿음과 비전으로 눈보라를 뚫고 한 시대를 걸어 나왔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은 바로 그 역사에 관한 연구이다. 2. 시와 정치와 사랑 시작은 김지하다. 저자가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권력 지형 및 상세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김지하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그러한 냉전 체제의 하위 파트너인 유신 독재 정권과 한바탕 벌여 놓은 그의 싸움판이다. 그의 시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1964)와 「오적(五賊)」(1970)이 어떻게 ‘유신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했는지, 왜 유신 독재 정권은 그의 ‘세 치 혀’와 붓 끝에서 흘러나오는 시를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그러한 김지하의 시는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오적 필화사건’의 법정 풍경을 복원한다. 잘 알려진 대로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필화 사건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고, 더군다나 김지하의 「오적」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특별히 ‘오적 필화사건’에 주목하는 이유는 “1970년 김지하의 체포에 이은 100일 간의 재판[이], 법정을 판소리나 탈춤이 주로 공연되는 야외의 마당으로 탈바꿈시켰다”는 데 있다.2) 저자는 관련 인물들의 여러 회고를 바탕으로 당시 재판이 흡사 검사가 양반의 담화를 담당하고 김지하가 말뚝이를 맡은 판소리 풍자극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유신 독재 정권은 도리어 김지하에게 그가 오래 탐구했던 전통 마당극을 마음껏 펼칠 무대를 깔아주었던 셈이다. 이후 그 무대는 김지하가 “문학, 폭력, 혁명, 구원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펼칠 수 있는 대중 강연을 위한 연단”(95)으로 확장된다. 당시 재판을 방청했던 더글러스 루미스(Charles Douglas Lummis)의 기록을 인용하여 저자는, 재판 방청객들이 김지하의 발언을 받아 적어 재판장 바깥으로 빼돌린 뒤 그들이 속한 조직으로 돌아가 그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게 되는 방식을 흥미롭게 포착한다. 이는 시인의 말이 변론과 강연, 연설을 넘어서, 유신 독재 체제하의 민중에게 어떤 구원의 메시지처럼, 마치 ‘예언’처럼 전달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루미스는 실제로 김지하에게 “에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87) 오래 전 종교가 시와 정치로 분리되지 않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시기 김지하의 문학 세계는 세속화 시대에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던 어떤 종교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이후 “시인으로서의 그의 국제적 명성은 분명 그가 겨울 공화국의 순교자가 됨으로써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50) 아이러니하게도 유신 독재 정권은 김지하를 위대한 시인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게다가 그 어떤 비평가나 애독자보다도 꼼꼼하게 김지하의 시를 읽고 분석하며, 그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김지하에게 더욱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검찰은 “시인의 수첩에 적힌, 아직 쓰이지 않은 시와 희곡에 대한 메모”(95)들을 증거로 제출하며, 마치 시인론을 쓰는 문학 연구자인양 김지하의 문학 세계를 탐구해 들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학이 하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면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잠겨들어야 한다. 지배와 억압은 대상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고, 문학에 대한 이해는 오직 문학의 세계 안으로 침잠할 때 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하는 혁명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지배 권력조차 그 안으로 휘말리고 뒤엉켜 들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유신 독재 시대 문학의 혁명적인 것이었다. 굳이 알랭 바디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사랑과 혁명은 ‘사건’이며,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문학도 ‘사건’이 된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무르익을 때, 그 자체로 1970년대 문학의 ‘사건’이기도 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이 등장한다. 핵심은 이 연작소설집이 이웃 사랑을 미학적으로 실천한 텍스트라는 것인데, 저자는 그 단초를 「뫼비우스의 띠」에서 발견한다. 연작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한 「뫼비우스의 띠」는 ‘굴뚝 청소를 마치고 그을음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와 그을음이 전혀 묻지 않은 깨끗한 얼굴의 아이 중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문답을 주고받는 교사와 학생들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 문제가 곧 뫼비우스의 띠이면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세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하며 끝맺는다. 저자는 이 뫼비우스의 띠 수수께끼를 지젝(Slavoj Žižek)의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 즉 축소 불가능한 간극을 잇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닌, “간극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89) 안과 밖은 결코 만날 수 없지만, 뫼비우스 띠에서는 그 안과 밖이 그대로 안쪽 면이면서 바깥 쪽 면으로 존재할 수 있는 차원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당연히 그을음이 묻은 아이가 세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교사는 얼굴에 그을음이 묻지 않은 아이가 친구의 새까만 얼굴을 보고 얼굴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답한다. 이윽고 다른 학생이 그와 같이 대답하자, 다시 교사는 동일하게 굴뚝 청소를 한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얼굴은 깨끗하고 다른 아이의 얼굴은 더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교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해답 없음이 곧 안과 밖의 구분 없는 뫼비우스의 띠의 관점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굴뚝청소부 수수께끼와 뫼비우스의 띠라는 위상수학적 개념과 개발독재시대의 소설에 대한 해석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 듯, 유영주 역시 그의 방법론적 시각을 한 차례 꼬아 지젝에서 케네스 레이너드의 ‘이웃’ 개념으로 비약한다. 사랑(특이성과 차이)과 정치(평등과 동일성)는 마치 뫼비우스 띠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 띠를 한 번 꼬아 연속체로 만드는 “사랑과 정치의 이음매” 지점이 “이웃”이라는 존재라는 것이다.(189) 저자는 이로부터 조세희 소설의 미학인 ‘이웃 사랑’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난쏘공』을 난해한 모더니즘적 텍스트처럼 보이게 하고, 그래서 리얼리즘론자들에게 지식인적인 환상 소설이라고 비판받게 만들었던 몽타주 기법을 ‘이웃 사랑’의 주된 미적 원리로 파악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970년대 문학은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박태순의 ‘외촌동 사람들 연작’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소설 작가로 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최인호 역시 일찍이 「미개인」(1971)에서 한센병 환자의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첫 손가락에 꼽힐 작가는 단연코 이문구일 것이다. 『관촌수필』(1972)에서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이문구의 이채로움이 빛을 발하며, 유영주가 말하는 ‘인접성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미학화한 이상적인 이웃 공동체가 그려진다. 저자는 이문구의 아버지와 두 형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던 개인사를 바탕에 둘 때, 이문구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그저 단순히 전통사회의 풍요로웠던 이웃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전쟁 전후의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들 중 많은 경우는 이웃들 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크게는 계급과 종교를 바탕으로 나뉜 좌와 우의 정치적 이념을 따라 서로 갈등을 빚었고, 심한 경우 학살로 이어졌다. 이러한 한국 현대사의 맥락 속에서 이문구 소설 속 이웃은 “이념적 명명의 대안”으로 제시되며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142) 저자는 조세희와 이문구의 소설을 ‘이웃 사랑의 미학’과 ‘인접성의 윤리’로 의미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러한 문학의 미학과 윤리가 박정희 독재 체제의 산업화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근원적인 힘이었음을 주장한다. 그 힘이, 플라톤 이래 본질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문학을 정치와 만나게 하고, 동시에 어떤 정치를 극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대로 1970년대 문학은, 시(문학)와 정치와 사랑이 ‘인접성’의 원리를 따라 이어지지만 그 간극을 그대로 유지하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의 위상을 형성하는 상호 연결과 긴장 관계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3. 마지막 문사(文士)의 시대 그러나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에서와 같이, 한국 문학이 저항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시대는 곧 저문다. 대체로 그것은 1990년대, 그 유명한,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때와 겹친다. 고진은 1970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김종철과 만났을 때 왜 문학을 그만두고 《녹색평론》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알려진 대로 김종철은 1991년 《녹색평론》 창간과 함께 문단을 떠나 생태주의 운동에 몸담았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답했다.3) 이것은 유신 독재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창비’ 계열 문학비평가의 고백이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이 포착하고 있는 문학의 사회 참여(앙가주망)와 정치적 실천, 특별히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 시인과 소설가 들이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는 역사는, 이제 정말로 역사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역사가 한국에서 1970년대 유신 독재 정권 시대라는 국면에 가능했고 정점에 도달했던 것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국가였던 후진국에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설 때 그에 맞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지식인들뿐이었던 세계사의 보편적인 패턴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장르가 소설(novel)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한국 문학사에서 ‘소설의 시대’라고 불렸던 1970년대의 특수한 문학사적 맥락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작가를 앞세우면서 참조하는 세 가지 문학 개념 중 첫 번째인 ‘리테로크라시(literocracy)’라는 동아시아의 문치주의적인 문학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 문학사로 한정해 본다면 그것의 유구한 역사는 시인과 소설가가 독립운동 투사가 되곤 했던 식민지 시대 ‘문사’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사의 시대는, 이 책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실로 1970년대 문학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하게 빛을 발한 뒤, 끝났다.4) 이 책의 첫 장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김지하의 시 「진리」에서 시인은 “바람 속이 내 집”이라고 노래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황석영은 그가 2017년 출간했던 문학적 자서전 『수인』에서 방북사건으로 떠돌던 시절을 회고하며 그때의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문학이라는 집이었다”라고 고백한다.5) 한때 바람 속을 집으로 삼아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활보했던 문사들에게 문학의 지경이란 없었다. 김종철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문학은 “온갖 것을 떠맡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문학을 떠났거나, 문학이라는 집 안으로 돌아간다. 이제 문학은,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하는가. 유영주는 결론에서 박민규 소설의 저항성을 김지하에 견주며, 문학은, 그리고 작가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민규는 그의 대표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표절 사건 이후로 그럴 수 있는 정당성을 상실했다. 이것은 분명 징후이기도 하다.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감하게 했던 작가 중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우리는 이미 오래 전 문사의 정체성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로 완벽하게 대체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지위마저 위태롭다. 최근 작가들의 소설 속 자기 재현은 어떠한가. 그들은 비정규직 중에서도 고용안정성과 소득이 가장 낮은 축에 들며, ‘프리랜서’라서 정부가 청년층에 제공하는 대출 상품에도 부적합해 은행 창구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소설가를 재현한다(박서련, 「A Queen Sized Hole」,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지방 변두리의 3천만 원짜리 아파트가 자기 집이 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마오쩌둥의 참새들처럼 어디에도 내려앉을 수 없어 지쳐 떨어져 죽을 위기에 놓여 있다(이서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어떤 가치 판단도, 비판도, 자조도 아닌, 현상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이제 유신 독재의 겨울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눈보라 속에서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1) 양성우, 『겨울공화국』, 화다, 1984, 18면. 2) 유영주, 이형진·정기인 역,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 소명출판, 2023, 92면. 이후 이 책 인용 시 본문에 쪽수로 표기. 3)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 49면. 4) 어떤 이들은 1980년대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라면 그것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1980년대에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했던 반지식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91년 5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김지하의 충격적인 발언과 그것을 둘러싼 반응 그 이면에는 1980년대를 거치며 그가 더 이상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에 서 있을 수 없었던 상황이 엄연히 자리한다고 볼 수도 있다. 5) 황석영, 『수인』 1, 문학동네, 2017, 36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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