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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창작과비평 | 2024년 여름호(제204호)

되찾은 ‘님’의 시간 : 커먼즈로서의 한국시와 시 비평

송종원 문학평론

200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현 창작과 비평 편집위원이자 서울예술대학교 문에창작학과에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

1. 의미의 위기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에서는 한국시의 타성을 문제 삼으면서 ‘다른 서정’에 대한 기미를 포착하는 기획을 다룬 바 있다. 문학평론가 최원식은 당시 시가 고독하게 교신되는 “비밀의 상형문자”(17면)가 된 상황과 “‘나의 시’를 앞세우는 풍조”(18면)를 언급하며, 그로 말미암아 독자의 위기로까지 전이되는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했다.1) 그리고 문제를 타개할 방안으로 시가 ‘님’을 회복할 필요를 말한다.


  최고의 시들은 불멸의 음악으로 우리가 그것과 관계하지 아니하고는 우리 존재 전체가 무로 환원되는 ‘님’ 앞에 우리를 끊임없이 불러세웠다. 그런데 최근 한국 시는 님에 대한 감각 자체를 잊었다. 아니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22면)


  일반 독자들은 흔히 감동받은 작품을 말할 때 ‘나의 이야기 같다’고 표현한다. 예술작품이 다루는 내용이 자신의 이야기와 유사하다는, 즉 작품을 통해 어떤 날카로운 보편성을 마주했다는 뜻이다. 개개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힘을 지닌 보편성은 독자가 그것을 체험하는 순간 삶의 의미를 떠올림과 동시에 그 의미를 넘어서는 어떤 전망을 감지하게도 한다. 이것이 독자들이 받은 감동의 정체이며 최원식이 말한 ‘님’의 뜻이기도 할 것이다. 한용운의 표현을 빌리자면, 날카로운 ‘님’과의 만남은 우리에게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는 순간을 선사하며 삶다운 삶의 의미에 대한 갈망과 기다림으로 우리를 이끈다.

  최원식은 문학사에 나타난 ‘님의 상실’을 추적하며 그것이 한국사회가 민주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등장한 ‘시의 대중화’의 영향이라고 분석한다. 엘리뜨주의에서 평등주의로 이행하면서 독자들과의 소통을 방기한 채 자기표출에 급급한 현상이 늘었다는 것이다. 문제의 초점을 시에서 비평으로 옮기면, 시 속의 ‘님’을 제대로 읽어내어 독자와 작품을 만나게 해주는 비평의 역할은 충분했던가도 따져볼 사안이다. 민주화를 거치며 다양한 문화적 양식들로의 접속이 자유로워지면서 시의 언어에 영감을 줄 문화적 자원이 풍부해졌다.2) 동시에 1987년 이후 사회적 합의의 실패를 문제 삼고 개인적인 것이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 재현에 얽매이지 않는 가파른 개성적 표현에 몰입한 시가 ‘님’을 비밀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측면을 고려하면 최원식의 지적대로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시의 대중화를 이끌었다기보다 시의난해화를 불러온 것인지도 모른다. 이 과정은 비평의 책임을 무겁게 한다. 개성에의 몰두가 빚어낸 공과(功過)를 분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의미있는 개성이 빚은 난해함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바꾸어 중개하고 평가할 임무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비평이 충실한 중개 이전에 난해함을 풀어내지 못했고 그리하여 누적된 이 문제가 미래파 논쟁까지 불러온 측면이 없지 않다. 아쉽게도 미래파 논쟁은 이 난해함을 자폐적이라고 낙인찍는 쪽과 그 안에 담긴 새로운 감각을 강조했지만 복잡해진 표현에 감춰진 현실적 의미는 충분히 알아보지 못한 쪽으로 양분되었다.3) 그렇다면 그 이후의 시비평은 어떤가.

  미래파 논쟁 이후 시비평계를 다시 한번 뜨겁게 달궜던, 15년 전쯤의 ‘시와 정치’ 논쟁을 돌이켜보자. 시적인 것의 본질을 따져 묻는 일이 하나의 쟁점이었는데, 여기서 시와 정치의 공존을 긍정하지 않기 위해 언어와 세계 사이의 이격을 넓히는 방향의 주장을 펴는 논자들이 적지 않았다. 가령 당시 강동호는 심보선의 「슬픔의 진화」(『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사 2008)를 분석하며 ‘세계 없는 언어’라는 언어의 한계를 주장했다.4)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내 방에는 조용한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
—심보선 「슬픔의 진화」 부분


  시의 이 도입부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시의 주인은 자신의 언어가 책상물림의 수준에 갇혀 있음을 깨닫고 이를 성찰하고 있다. 책상에만 붙들린 언어에는 세계의 실감이 부재한다는 정직하면서도 오래된 시인의 고백을 강동호는 “과격한 고백을 통해 독자를 시 속으로 끌어당겨, 세계와 언어 간에 발생하는 불일치에 따르는 좌절을 지시하는 것 같”(297면)다고 오해한다. 그러고는 이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296면)인 절망은 “‘부정의 부정’으로서 그 가면이 산출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지대”(300면)로 우리를 이끈다는 논지를 이어가며, 결론에 가서는 “시의 언어는 삶을 직접적으로 쓸 수는 없으나 다만 삶이 처한 시공간, 즉 현실에 대한 잠재적인 부면으로서의 삶의 형식(form of life)을 쓴다”(312면)고 적는다. 형식이라는 말과 더불어 각종 개념적 장치들을 동반한 설명 과정에서 비평이 삶의 구체적 모습에 대한 서술은 지우거나 건너뛰고 전문화된 정보에 그치고 마는 분석이다. 이 시를 조금 빌리자면, 비평의 언어에 삶이 빠져 있고, 비평의 공간에 개념의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비단 강동호 글에서만 발견되는 문제는 아니다. 미래파 논쟁 이후 최근까지 시의 두터운 언어에 내포된 의미는 발굴하지 못한 채 방어적 개념들로 시에 깃든 우리 삶을 고립시킨 비평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최근의 상황은 어떤가. 우선 비인간담론과 접속하여 시의 의의를 찾는 비평들은 인간의 자리로부터 발생한 의미를 부러 지운다. 인간에게 부여되었던 과도한 특권을 반성하는 것과 인간의 자리를 지워버리는 일은 당연히 다른데도 종종 혼동된다.5) 가령 임승유의 시 「그 정도의 양말」(『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문학과지성사 2020)에 대한 인아영의 분석6)을 보라.


양말이 가득했다. 부드럽고 따뜻해서 잘 때 신으면 좋은 그런 양말 말이다. 이젠 거의 안 남았는데 나도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문 열고 나가면 와 있는 계절처럼

볼 때마다 네가 양말을 줘서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그건 양말의 비밀이다. 발가락 사이에 하얗게 거품이 일도록 씻은 후 양말을 신어보는 것. 양손으로 두 발을 쥐고 코가 닿을 것처럼 양말을 보는 것. 나한테 양말은 그 정도였고

지금은 없어진 양말을
—임승유 「그 정도의 양말」 부분


  인아영은 임승유의 시에서 “옷은 특유의 온도, 무게, 부피를 가지고 있는 비인간 신체로서 인체의 감각과 사고를 일깨운다”(379면)고 적으면서 저 시가 “양말의 의미를 예민하게 식별하고 그 물질적 세계에 기꺼이 참여”하도록 이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물에 대한 개념화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하지 않고 대상에 깃든 생기에 함께 머무는 미적 실천”(380면)이라고 서술한다. ‘사물의 생기’와 ‘미적 실천’이라는 수사가 활용되는 사이 그 양말을 화자에게 건네주어서 양말 자체를 의미있게 만들어준 사람의 자리는 소거된다. 사실 인아영이 언급한 감각의 증폭은 양말 자체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시의 화자와 양말을 건네준 ‘너’의 관계에서 기원한다. 이 시의 핵심적인 사건은 누군가 챙겨준 양말과 그이의 돌연한 부재, 그리고 그 부재를 스스로 감당하는 행위 속에 있다. 여기서 상론하기 어렵지만 이 시는 돌봄과 성장의 이야기로 읽을 만하며 이 테마는 임승유 시에서 거듭 반복된다. 그러나 인간을 지우고 사물만을 이야기하는 순간, 이 시는 유행하는 담론의 어휘들 속에 휘말려 들어가 굴절되고 만다. 요즘 비평담론은 작품의 진실에 접근하는 매개로서가 아니라 작품을 새롭게 소비하는 방식으로 독자들을 이끄는 면이 있다.



2. 꿈의 대화, 커머닝으로서의 시쓰(읽)기: 이수명과 박노해


꿈에 네가 나왔다.
네가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왜 누더기를 입고 있니
누더기가 되어버렸어
날씨가 나쁜 날에는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없는 날에는
누더기 옷을 꺼내 입는다고 했다.

꿈에 네가 나왔다.
꿈속을 네가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걸어가서
너무 쓸쓸해서 땅에서 돌멩이를 주웠는데
빛을 다 잃은 것이었다.

돌벽 앞에 네가 한동안 서 있었다.
나는 돌벽이 무너질 것 같다고 피하라고 했는데
너는 집을 나와서 천천히 산책 중이라고 했다.

꿈에 네가 나왔다.
아주 짧은 꿈이었다.
—이수명 「꿈에 네가 나왔다」 전문


  강동호는 이수명 시집 『도시가스』(문학과지성사 2022)를 해설하면서 이 시를 “이번 시집의 주요 테마와 더불어 시인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세계의 시간성을 형상화하는 원리를 파악”(강동호 해설 「무의 광장」, 122면)하는 근거로 다룬다. 무슨 말인가 하니, “누더기”의 형상을 “서로 다른 시간 조각들이 함께 기워져 동일한 시간성의 지평을 구성”(124면)하는 자리로 본다는 말이다. 이 말은 따로 기억해두자. 이수명의 시가 결과적으로 펼쳐 보인 세계의 모습과 방향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의 “누더기”를 저러한 원리의 상징으로 보는 일은 납득되지 않는다. “누더기”를 입은 ‘너’가 소거되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해설자가 ‘너’를 ‘시’라고 단정하기에 그렇다. 어떻게 그런 단정이 가능한 것인지, 상식적인 의문은 해명되지 않은 채 강동호는 이수명 시에서의 “옷은 ‘시인의 부재’ 또는 ‘부재하는 시인’이라는 이수명의 말라르메적 이념(주관성의 부재)을 표상하는 대상이자, 그가 직면하고 있는 당대성을 감각하는 외피(표면)의 역할을 수행한다”(123면)고 덧붙인다. 이쯤 되면 이수명의 옷은 평범한 삶과 결부된 옷의 맥락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시를 설명하는 데 복무하는 관념의 언어가 되어버린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이 시가 접속하고 있는 독특한 역사성을 마주할 가능성이 소멸한다는 데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이수명은 언어적 측면에 특별한 관심을 요하는 작가이다. 말라르메(S. Mallarmé)가 호명된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시인의 두번째 시집의 표제작이자 이수명다운 시로 거론되는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를 떠올려보라. 이 작품은 재현적 언어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 쓴 시에 가깝다. 두번째 시집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세계사 1998)에는 이러한 정황이 다수 그려진다. ‘바다’는 ‘바닥’이 되어버리고(「물고기와 컴퍼스」), ‘왜가리’는 느닷없이 ‘테이블’이 되어버린다(「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누적된 의미들을 등지거나 숨긴 채 소리의 유사성이나 문자의 시각적 이미지를 통한 독특한 연상에 갇힌 언어들은 무언가에 발목을 붙잡힌 포로처럼 보인다. 시대와 역사에 대한 판단에 동의하느냐와는 무관하게 쇠파이프는 땅에 묻히고(「이야기를 나누는 포로들」), 어딘가를 오르던 발목들이 계단에서 화분이 된 모습은(「계단마다 두 발이」) 1990년대를 맞이하는 장면으로 의미심장하다. 첫번째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세계사 1995)의 「새벽 안개」에 나오는 “했던 말을 철회한다”와 “목구멍에 걸리는 현실이 없다”는 구절 역시 1987년을 지나 1990년대에 진입한 시기를 이수명의 시세계가 어떻게 포착하고 있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비평은 이와 같이 작품의 언어와 연동된 역사적 정황을 탐색해야 하며, 이에 더해 그 조건에서 피어난 삶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누더기”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그런데 “누더기”를 해석할 때 추가로 고려할 사항은 이수명 시의 변화이다. 시집의 제목만 보더라도 변화가 감지된다. 이전 시집들의 제목 ‘마치’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그리고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는 언어의 변형에 관계하거나 언어의 반복에 강조점을 둔다. 반면 근간 ‘물류창고’와 ‘도시가스’는 구체적 삶의 현장을 떠올리는 자리에서 언어가 증폭하며 여는 공간으로 쉽게 비약하지 않고 본래의 자리에 남아 있는 제목이다. ‘물류창고’라는 구체적 공간을 그대로 내세운 시어의 출현을 특이하게 여기며 이수명의 시에 언어적 맥락 너머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 것도 이에 대한 방증이다.7)

물류창고는 우리에게 창고형 대형마트의 이미지를 쉽게 연상시키면서 동시에 세월호의 공간까지도 가닿는다. 이수명은 세월호라는 구체적 공간과 세월호 바깥의 한국사회를 중첩시켜 현실의 병증을 문제 삼은 것으로 보인다.8) 이런 정황은 “누더기”를 언어적 환각을 일으키는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 사회적 맥락으로 읽기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 개도국에서 저임으로 대량생산된 값싼 의류가 쇼핑센터에 전시되었을 때 대다수 사람들은 그것의 싼 가격을 볼 뿐, 자원 낭비, 에너지 낭비, 노동력 착취, 환경오염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는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다해도 소비 습관을 줄이는 사람은 드물다.9)


  “누더기”를 해석하는 데 이런 서사를 더하는 일이 과할까. 이수명의 최근 두 시집을 보면 소비와 욕망만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모든 것을 경제논리로 다루며 시간을 압착시킨 사회의 문제적 모습을 시인이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제목만 보더라도 ‘소비자본주의’와 ‘화력자본주의’를 겨냥한 의식의 방향성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여전히 ‘너’라는 주체가 남는다. 「꿈에 네가 나왔다」에서 화자가 꿈속에서 만난 ‘너’는 그냥 막연한 너일까. 꿈이라는 공유영역에서 만나는 ‘너’는 누구일까. “누더기”라는 말 자체에서 감지되는 시간성은 ‘너’가 어떤 시간의 흐름을 동반하며 나타났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누더기”와 유사한 계열에 놓인 “돌멩이”로 시선을 옮겨도 그렇다. 그 “돌멩이”들이 시간이 흐르며 빚어진 것이 “돌벽”일 텐데, “돌멩이”가 빛을 잃기 전에는 곧 ‘별’이었다고 해석할 만도 하다.

  40년 전, 옷과 별이 등장하는 특별한 시 한편이 있었다. 한 노동자가 스스로 자기 삶의 현장을 시로 써내려간 일은 노동문학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는데, 바로 그 시인 박노해의 등단작 「시다의 꿈」(『노동의 새벽』, 풀빛 1984)에서 ‘시다’는 “새벽별”을 이마 위로 맞으며 “옷을 만들”면서 “찢겨진 살림을 깁고” 있었다.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으로
장미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 흐르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

언 몸뚱아리 감싸줄
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
찢겨진 살림을 깁고 싶다

(…)

찬 바람 치는 공단거리를
허청이며 내달리는
왜소한 시다의 몸짓
파리한 이마 위으로
새벽별 빛나다
—박노해 「시다의 꿈」 부분


  이수명의 「꿈에 네가 나왔다」와 박노해의 「시다의 꿈」을 겹쳐놓으면 문학작품이 얼마나 복잡하게 생성되는가를 새삼 떠올리게 된다. 이 복잡함은 우리 시의 역사가 형성한 두께가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과 시 자체가 거대한 협동작업이라는 점을 떠올리게도 한다.10) 한편으로는 같은 역사적 지평에 살며 구체적이고 감각적 경험에 예민하여 다른 시인의 작품도 깊이 체험하는 시인들이라면 이와 같은 작품의 연동이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있겠다.11)

주목할 것은 이 두 작품의 결속으로 인해 새롭게 펼쳐지는 인식과 실천이 다. 박노해가 그린 ‘시다의 꿈’은 “왜소한 시다의 몸짓”이 암시하듯 그 꿈이 헛된 것이 되리라는 불안이 작동하고 있긴 하나, 어떠한 응답을 계기로 “장미빛” 미래를 그려볼 여지 또한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수명의 시를 살펴보면 마치 노동자들이 품었던 꿈이 누더기가 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는 듯하다. 박노해가 직시한 노동현장의 사회적 차별과 푸대접이 여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심각하기에, 이런 결론을 ‘시다의 꿈’이 누더기처럼 엉망으로 훼손되었다고 읽을 여지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시 사이의 교신으로 그려진 결론이 지난 40여년의 노동현장이 완전히 황폐화되었다는 이야기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수명의 시 속 ‘너’의 안위를 묻는 감각은 단순히 남을 생각하는 윤리적 태도의 강조가 아니다. 「꿈에 네가 나왔다」의 “꿈”은 ‘시다의 꿈’이 꿈꾸던 주인됨의 자리와 자신의 가리가 무관하지 않음을, 자신의 자리에서의 주인됨 역시 노동의 자리가 처한 처지와 연동되어 있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또한 둘의 연합이 너무 약해 고통의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다는 반성의 그림자도 깔려 있다. 어쩌면 이 두 자리 사이의 교신과 연합, 이것은 우리가 문학사에서 말했던 민중의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닐까. 두 시 사이에서 우리는 민중적 운동성을 발견할 수도 있으며, 소비자의 자리로 자신을 이끄는 시대적 질서에 저항하며 최대한 민중의 자리에 가보려는 시인의 실험이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긴 시간을 사이에 둔 작품들을 결합해서 읽는 일이 우리에게 늘 안도할 만한 내용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눈 오는 날」(『도시가스』)은 우리의 감수성이 지난 몇십년 사이 얼마나 파괴되었는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시다. 누군가에 의해 버려진 을씨년스러운 책장에 책은 한권도 없고 눈뭉치만 뒹굴고 있는 장면을 그린 앞부분을 생략하고 그다음부터 이어서 옮긴다.


남몰래 눈 뭉치를 던지는 자는 누구인가

그대로 내버려둔다.
알 수 없는 곳에서 날아든 저 분명치 않은 덩어리들을 건드리고 싶지가 않다.

(…)

규칙적으로 나열되어 있는 거리의 크고 작은 창문들
모두들 밖으로만 내는 창문들

거리에는 구석으로 옮겨지는 눈 실려 가는 눈 도로 가득

녹지 않은 눈
위를 걷는 사람들

속에서
한 손에 책을 들고 가는 사람을 보았다.
—이수명 「눈 오는 날」 부분


  녹지 않은 눈(雪) 위를 미끄러지며 지나치는 사람들과 그들의 차가운 눈(目)이 그려진 시이다. 여기서 또다른 시, 기형도의 「기억할 만한 지나침」(『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을 떠올린다. 기형도는 눈 내리는 거리에서 창문을 통해 사무실 안쪽을 바라보며 서류뭉치에 둘러싸여 남몰래 혼자 울고 있는 ‘그’를 바라보는 사람의 눈빛과, 잘 알지도 못하는 그이의 슬픔을 존중하고 동조해주던 인정(人情)을 기록한다. 하지만 이수명의 「눈 오는 날」에는 그런 눈빛과 동요가 없다. 이수명의 시는 타인의 사정에 대한 무관심과 더불어 익명적 삶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무차별적인 공격적 정동을 무심히 그려낸다. 몇십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두 시를 겹쳐 읽으며 우리는 이 질문을 진지하게 던질 순간을 맞는다.

  한국시는 여러 삶의 자리를 그리며 그만의 세계를 구축해왔다. 그 세계에서 시인들은 각자의 꿈과 시 속에 그려진 꿈을 겹쳐놓고 사유할 영역을 얻었다. 같은 삶의 지평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를 알아보는 비평가들의 입체적이고 성실한 독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한 독해는 서로의 꿈과 기록으로 현실의 모습과 의미를 한층 선명하고 두텁게 하는 시인들의 작업에 비평 역시 민주적 대화의 공간을 열어 협업하는 일일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개별 작품을 축적하는 문학사가 아니라 축적된 작품들의 관계 맺음을 통해 시간을 품는 문학사일 것이다. 그로써 변화된 삶의 궤적이며 변화에 휩쓸리지 않은 우리의 본모습을 총체적으로 확인할 기회를 제공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울러 한국시와 관련한 지식을 축적하는 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꾸었던 꿈을 새롭게 활성화하는 실천적 장을 기대하게 만들 것이다. 이 실천적 장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님’을 맞이하거나 또는 어떤 ‘님’이 침묵에 이르렀는지를 되새겨볼 수 있지 않을까.



3. 잃어버린 시의 커먼즈를 찾아서: 이세기


  비평이 작품 속에서 ‘님’을 발견하는 데 곤란함을 겪는 이유 중에는 비평가들이 ‘님’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님’의 출현을 몰라보고 시선을 두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님’은 어디에 있는가. 당연하게도 ‘님’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있다. 이세기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갯티’ 같은 곳은 신랄하게 구체적인 삶의 풍경이다. 이세기에 따르면 갯티는 “섬 둘레에 형성된 갯바위 주변이나 갯바탕”, 즉 ‘갯벌이나 갯가’를 말한다.12)


할멈 둘이 앞서 걸어가고 있다

살얼음 갯바위 틈새
얼어죽은 한 마리 주꾸미라도 주우려

갯바위를 걸어서
굴바구니 들고 갯티에 가는
생계 줍는 아침
—이세기 「생계 줍는 아침」 전문13)


  이 풍경에 인간을 위한 편리와 안락은 없다. ‘생계’라는 단어 역시 그것들의 결핍을 가리킨다. 생계를 ‘살길’로 바꿔 읽으면 살길을 찾아 갯티를 걷는 이 노인들의 모습과 갯바위 틈새에서 얼어 죽은 주꾸미 한마리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모두 자신의 유한한 신체성을 고스란히 수용하며 사는 듯하다. 이 상황이 묘하다. 인간을 위한 안락은 없지만 거기에는 인간의 독단과 거만 또한 없기에 어떤 공존의 생태감각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고통과 평화의 공존을 바라보는 듯한 이세기의 시선은 삶의 현장을 관망하는 자의 착시 내지 착각일까. 갯티가 등장하는 다른 시의 구절까지 살피면 꼭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예컨대 「덕적군도」(『언 손』)에는 “갯티 얼굴에 찌든 사람들을 보면 모두 한 동서 같다//햇굴이 나오는 갯티에서 만나는 사람 모두가 고향 같다”라는 구절 있다. “얼굴”과 “햇굴”의 비슷한 음성에서 우리는 둘의 존재론적 위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받는다. 햇굴에게도, 그것을 채취하는 얼굴에게도 갯티는 고향이다.


  앞선 시 「생계 줍는 아침」의 작은 풍경을 처연하게 보이지만은 않게 하는 장면이 있다. 할머니가 ‘둘’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갯벌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서로를 책임져주는 삶의 규약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쯤 되니 머릿속에서 막연히 떠오르던 두 노인의 걸음걸이가 달리 상상된다. 구부정하고 힘없는 걸음이 아니라 가난 속에서도 의연한 노동의 걸음. 동시에 우리가 쉽게 알아보지 못하는 특별한 약속의 공동체를 상상하게 된다. 첫 시집 『먹염바다』(실천문학사 2005)의 추천사를 쓴 박영근과 두번째 시집 『언 손』의 추천사를 쓴 정희성이 서술했듯 이세기의 시적 영토는 한국시사가 충분히 돌보지 못한 곳으로, 의미의 발굴이 필요한 지역이다.


  우선 덕적군도의 가난에는 한국사회의 토건지향적 개발의 역사가 드리워져 있다. 그곳은 애매한 입지나 북과 인접해 있다는 특성 그리고 몇몇 토건세력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경험으로 인해 개발에서 벗어나 있었다.14) 그러나 개발에서 멀어진 것이 가난의 유일한 원인이 되긴 힘들다. 이 지점을 역사적 관점에서 내실있게 설명한 이는 최원식이다. 최원식은 이세기의 첫 시집을 해설하며 이세기 시의 영토가 거느린 역사를 자세히 살펴 그곳 사람들의 삶의 맥락을 유장하게 짚는다.


  내륙지향적 조선왕조가 고려의 해양성을 봉쇄하는 강력한 해금(海禁)정책을 펴는 바람에 알게 모르게 유전되는 이 고루한 정치적 무의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바다와 그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은근히 괄호 친다. (…) 인천을 근거지로 활동한 남로당의 이승엽이 영흥도, 진보당의 조봉암이 강화도 출신이라는 사실은 섬의 근대정치학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이다. (…) 인천 앞바다 섬들은 해방에서 6·25에 이르는 격동기를 통과하면서 이데올로기적 쟁투의 임계점에 오른다. 먹염바다는 이 시가 덕적군도 일대에서 활동한 좌익을 수장(水葬)한 곳, 그 시체들이 문갑도로 떠내려왔다고 시인은 말한다. 반란의 땅, 섬들은 6·25 이후 서해 바다에 금 없는 금이 그어지면서 다시 아득한 변방으로 가라앉는다. 엄격한 반공체제 아래 접적(接敵) 지역의 섬 주민들은 잠재적 위반자로 간주되곤 했는데, 바다의 가난은 의연하였던 것이다.”(최원식 해설 「바다가 가난한 나라의 시」, 119~20면)

  ‘갯티’에 그려진 삶은 단지 운 좋게 개발에서 벗어난 보존구역의 풍경이 아니라, 현대사의 질곡과 무관하지 않으며 떳떳한 반란과 당당한 삶의 기운과도 닿아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세기의 시에 누군가의 제사를 치르고 치성을 드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시인은 의례를 매개로 억울한 삶을 불러오고, 온전하기 어려웠던 삶을 재증명한다. 이 의식(儀式) 안에는 수장되고 배제된 사람들에 대한 애도와 기원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일면식도 없고 숨소리마저 그친 사람에게까지 가까이 다가가려는 제사와 굿은 튼튼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며 그 네트워크를 지속시킨다.15) 직접적으로 관계 맺어본 적이 없는 존재들과도 관계의 책임이 있음을 배우는 계기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독자에게 누군가의 실현되지 못한 꿈에 대해서도 책임을 동반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실감을 제공한다. 나아가 즉각적으로가 아니라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무언가를 되새길 수 있는 의미의 공간을 감각할 수 있게 만든다. ‘님’과의 만남 비슷한 것이 제사와 치성의 행위 속에 있는 것이다.


  덕적군도 혹은 북에 인접한 서해군도 문학으로서 이세기의 시는 한국문학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한국시사에서 왜소해진 서사인 분단 문제가 그의 시에서는 여전히 강한 현재성으로 작동한다. 이 말 하기가 조심스럽다. 마치 시인이 분단을 전면으로 내세운 시를 쓴다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세기의 시에는 분단 문제가 드러난 순간들이 있다. 시의 화자가 “밤에도 집을 찾아 떠나는/새소리”(「조강에서」, 『언 손』)를 들으며 단절을 떠올릴 때, 산마루에 걸린 흰 구름을 바라보며 “황해도 연백에서 왔다는 할배가/배연신굿을 하는 애기무당 누이를”(「대청도를 지나며」, 『언 손』) 떠올리며 눈시울을 훔칠 때, 어느 사이엔가 한국시사에 사라진 영토인 북이 다시 호출되고 분단체제의 문제가 슬며시 고개를 든다. ‘슬며시’가 중요하겠다. 분단 문제가 다른 문제를 집어삼키며 등장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세기의 시에서 분단은 거창하고 관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개인의 생존과 밀착된 현장의 문제이다. 누군가의 가계와 이주와 경제와 노동과 굿과 울음과 눈빛 속에 분단은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이세기의 시를 읽는 독자들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 드리운 분단의 그림자를 알아보고 자신의 세계상을 수정할 것이며 갯티가 품은 동향의식이 갯티 안의 것만이 아님도 깨달을 수 있다. 「서쪽」(『먹염바다』) 같은 시를 살펴보자.


그해에는 삼월에도 눈이 내렸습니다

(…)

배를 타고 월북을 하였던 둘째 작은아버지는 반공법으로
월남에서 돌아온 매형은
목발을 한 채
이틀 밤을 묵고 섬을 떠났습니다

(…)

흙을 파먹다 부황이 들었다는 배를 타지 못한
흐냉이 삼촌은 끝내 죽었습니다
쉬쉬하는 소리와 함께 언 땅에 묻었습니다

배를 탈 수 없었던
털보 작은 아버지와 넙잭이 작은 아버지는
인천으로
아버지는 목포로 갔습니다

바닷가에 눈이 내리고

어두운 밤하늘에서는
쟁쟁 꽹과리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피 묻은 뱃사람이 거적을 뒤집어쓴 채
마을로 올 것만 같은
밤이 지나고

(…)

어두운 밤바다에서는
그해의 마지막 눈이 내리고
뒷산에서는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두운 방 안에서는 엉엉 울음소리도 났습니다

그때마다 당집의 울타리 돌담에다가는
몇 개의 돌이 얹어졌습니다
—이세기 「서쪽」 부분


  이 시에서는 부엉이의 울음과 사람의 울음이 공명하듯 모든 존재들의 사연이 연동되어 있다. 물론 이 연동에는 불합리한 제도가 압력을 가한 부분도 있다. 이 땅의 냉전체제나 분단 문제 등은 한 개인의 행적을 빌미 삼아 그 주위의 친밀한 존재들까지 구속한다. 인물들의 삶은 구속을 피하지 못하는데, 이는 그 구속의 압력이 상당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물들이 스스로를 운명공동체의 구성원처럼 여기는 관습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땅의 제도는 섬사람들의 삶에 커다란 압력과 상처를 주었고, 그들은 죽음에 이르거나 죽지 못해 고향에서 먼 곳으로 이주해 살길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고향이자 노동의 현장으로부터 내쫓긴 자들과 남겨진 자의 곤경을 그리는 이 시는 우리 삶에 새겨진 역사의 상흔을 현재적으로 감각하게 한다.

  그런데 이 시가 불러오는 것은 상흔만이 아니다. 당집 울타리에 돌 몇개를 올리고 가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이웃의 상처를 돌보는 이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이세기의 시세계에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염려하고 환대하는 모습이 종종 비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16) 또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섬을 지킨 뱀의 전설을 시화한 「이무기 이야기」(『언 손』)와 토건세력들과 싸워 굴업도를 보호한 목소리를 다룬 「굴업도」(『언 손』)가 폭력과 맞선 기억의 기록으로 자리한다. 이 시적 영토는 우리 시사에 좀더 깊숙이 들어올 필요가 있다. 분단과는 무관한 삶을 그리는 듯한 시세계에 우리가 처한 현실의 실감을 전달하는 것은 시의 공유영역과 현실의 영토 사이에 크나큰 이격이 생기는 허망함을 방비하는 일이며, 또한 아직 오지 않았지만 아예 오지 않은 것은 아닌 평화적 공동체의 꿈을 연습하는 길이다. 흥미롭게도 이세기의 시가 가장 아끼는 서술어가 ‘온다’이다. 그는 노동하고 이주하고 슬퍼하고 누군가와 잠시 구원처럼 삶을 나누는 과정 속에 아직 오지 않은 존재들을 기다리며 수행하는 듯한 사람의 형상을 그려 넣는다.



4. 한국시의 성취를 생각하며


  기다린다는 것은 그 기다림의 대상이 지금은 없다는 궁핍의 체험인가 하면, 기다릴 것조차 없는 상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충만의 체험이기도 하다. 모든 기다림에는 눈앞에 없는 지나간 어떤 것에 대한 기억과 앞으로 올 그 무엇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다. (…) 고통을 느끼되 희망과 기억을 잃지 않고, 이 고통의 시간을 일순이라도 단축하기 위해 희망과 기억의 시킴에 따라 그날그날의 할 일을 하고 싸움을 싸우는 것만이 올바른 기다림의 자세인 것이다.17)


  백낙청이 만해와 육사, 윤동주와 김수영을 불러 모아 기다림의 참뜻을 감각적이고 자상하게 살핀 이 글에는 자연스럽게 기다림의 행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님’의 자리도 그려진다. 기다림이 왜 생기고 어떻게 그 지난한 일을 회피하지 않고 지속하는지를 말하는 사이 문학의 자리에 새겨지는 ‘님’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각자의 고통 섞인 삶 속에 ‘님’의 빈자리가 있다는 점은 누구나 안다. 또한 자본주의가 빚은 착취와 불평등이 극복되는 자리, 분단이 만든 자주와 평화의 빈자리 역시 ‘님’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아마도 저 공간들을 구체성을 띤 문학의 언어를 통해 마주한 경험도 빈번할 것이다. 시인들은 시의 공동영역(커먼즈)과 현실을 오가며 서로의 꿈과 현실을 복잡하게 체험하고 그를 바탕으로 자신의 언어로써 실험하고 창조한다. 이런 상황은 비평가들에게 시의 공동영역을 좀더 적극적으로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을 설명할 책무를 요구한다. 비유하여 말하자면 이는 시와 현실 사이에 놓인 다리를 언어화하는 일이며, 한 시인의 꿈과 다른 시인의 꿈 사이에 이어진 다리가 새롭게 개방한 길을 알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비평은 문학의 언어에 시를 가두는 일을 멈추고 저 다리와 길 위에 다시 서야 한다.

  • 1) 최원식 「자력갱생의 시학」,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 2) 김종엽은 1987년 이후 사회문화적인 영역의 전환을 이야기하며 1990년대 중반에 이루어진 “문화담론의 폭증”과 “다양한 정체성의 탐구, 상징적 투쟁들, 역사적 기억의 투쟁들”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김종엽 『분단체제와 87년체제』, 창비 2017, 134면 참조.
  • 3) 미래파 논쟁에서 미래파를 옹호하는 비평들이 작품의 현실적 의미를 얼마나 소홀히 해석했는가에 대해 다음에서 분석한 바 있다. 졸고 「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나」, 『문장웹진』 2023년 11월~12월호 참조.
  • 4) 강동호 「존재론적 비명으로서의 시적인 것」, 『창작과비평』 2009년 가을호.
  • 5) 이 문제에 대한 담론분석은 황정아 「이토록 문제적인 ‘인간’」, 『창작과비평』 2024년 봄호 참조.
  • 6) 인아영 「개와 나무와 양말과 시」, 『진창과 별』, 문학동네 2023.
  • 7) 시집 『물류창고』와 『도시가스』의 조재룡과 강동호의 해설에서도 이런 점이 잘 드러난다. 강동호 역시 『물류창고』에서부터 이수명 시의 변화가 감지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
  • 8) 물류창고라는 말 속에 ‘물이 흐르는 곳에 놓인 창고’의 연상이 담겨 있다. 또한 물류창고 시편들에 등장하는 ‘사진 찍기’ 장면이나 ‘캠프’라는 용어, ‘폭파’ 직전의 묘사나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의 변형으로서 정숙(靜肅)을 종용하는 관리자의 목소리 등은 세월호를 불러오는 연상들이다.
  • 9) 조효제 『탄소 사회의 종말』, 21세기북스 2020, 123면.
  • 10) 백낙청은 민중에 의해 쓰인 글만이 민중문학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문학의 생산은 집필행위라는 과정에 국한되지 않는 하나의 거대한 협동작업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아요.” 백낙청 『민족문학의 현단계』, 창비 2022, 372면.
  • 11) 흥미롭게도 이수명은 한 시에서 꿈들의 교류를 표현한 적이 있다. “그의 꿈과 꿈 사이에 나는 나의 꿈을 놓았다. 나의 꿈과 꿈 사이에 그는 그의 꿈을 놓았다. 꿈과 꿈 사이를 꿈으로 채웠다.”(「꿈」 부분,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문학과지성사 2005) 이 구절은 우연히 쓰인 구절이라기보다 이수명이 자신의 시가 가진 운동성을 감지하고 풀어낸 대목으로 읽을 만하며, 꼭 이수명이 아니더라도 개인의 꿈에만 붙박여 문학을 하는 이가 아니라면 누구나 경험할 만한 문학적 행위에 관한 표현으로도 읽힐 구절이다.
  • 12) 이세기 「시어풀이」, 『서쪽이 빛난다』, 실천문학사 2020.
  • 13) 이세기 『언 손』, 창비 2010.
  • 14) 덕적군도와 관련한 내용은 이세기 산문집 『흔들리는 생명의 땅, 섬』, 한겨레출판 2015 참조. 특히 토건세력과 싸웠던 기록은 이 책의 「굴업도에서 배우다」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 15) 제사가 지닌 공적 가치에 대해서는 백민정 「왜 귀신의 공공성인가」, 『창작과비평』 2024년 봄호 참조.
  • 16) 『언 손』에 실린, 이국에서 섬으로 이주해온 여성과 오랫동안 섬에 정착한 할머니들 사이의 교감을 시화한 「이작행」이나 사라진 이주노동자 가족의 행방을 염려하는 내용의 「다알리아와 칸나」가 대표적이다.
  • 17) 백낙청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창비 2011, 46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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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희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창비, 2024)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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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 ‘니’와 인간의 공동체 : 김해자의 시를 중심으로

‘니’와 인간의 공동체 김해자의 시를 중심으로 황규관(黃圭官) 1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광장에서 들었다. 친위쿠데타를 획책한 대통령의 파면을 ‘함께’ 느끼고 싶어서 부러 광장으로 달려간 것이다. 윤석열이 일으킨 쿠데타는 대한민국 사회에 꽤 긴 감정의 침전상태를 초래할 정도로 심한 ‘사회적 스트레스’를 가져다주었으며 그것이 아직 끝난 것도 아니다. 쿠데타 주도세력을 통해 그동안 은폐된 채 현존해 있던 충격적인 우리 사회의 일면이 드러난 사태는, ‘윤석열의 시간’이 ‘박근혜의 시간’과도 또다르다는 것을 우리에게 깊게 각인시켰다.  생각했던 것보다 반동의 그림자가 넓고 깊었다는 사실 앞에서 적잖은 당황과 새로운 감정이 비구름처럼 몰려오기도 했다. 예컨대 현실로 존재하는 윤석열 지지세력 혹은 극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할지를 물으면서 적대시를 경계하고 ‘대화’나 ‘공존’을 주장한 글들1)과 그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 당황과 새로운 감정이 갈피없이 치솟아오른 실례가 된다. 이것이 ‘박근혜 때’와 다른 지점이다. ‘박근혜 때’는 나름대로 한뜻을 모아 사태를 종결시킬 수 있었지만, ‘윤석열 때’는 아직도 진행 중인 것이다. 현상적으로는 ‘중국인’이나 ‘이재명’이라는 적대적 타자를 만들어 나타나는 착시 같지만, 아마도 이번 현상의 뿌리는 깊은 것이며 만약 그렇다면 현상이라는 이파리는 쉬 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쿠데타와 동시에 떠오른 현상에 대한 상당한 지적 분석과 그 역사적 계보와 관념의 토대를 찾아나서는 정신적 노고를 감당해야 할지 모른다. 달리 생각해보면 지금껏 우리 현실에 대한 심층적인 공부와 실천들이 부족했기에 이런 사태와 현상이 터졌을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는 우리의 자세와 수련에 따라 천우신조의 ‘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특히 시는 인간의 감정을 일차적인 출발지이자 도착지로 하는 장르인바 ‘사회적 감정’의 출렁임에 예민할 수밖에 있다. 이렇게 말하면 인간의 감정이 개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전제가 어느새 성립된다. 그런데 여기서 감정이란 무엇일까? 스피노자(B. Spinoza)는 『에티카』(1677)에서 감정을 48가지로 분류한 다음 “정서의 형상을 구성하는 관념은 신체 자체나 신체의 어떤 부분이 가지는 활동력이나 존재력”에 따라 좌우된다고 했다.2)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신이나 정서에 대한 신체(몸)의 우선성이다. 즉, 감정이란 것은 신체에 의존적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는 칸트를 읽으며 ‘직관’과 ‘사유’를 인식의 요소로 파악하면서 사유는 직관에 의존한다고 말한다.3) 직관의 능력은 마음이 가지는데 사유가 마음의 작용으로서의 감정에 의존적이라는 하이데거의 지적은 스피노자처럼 그 중간에 신체가 개념적으로 자리잡지 않아서 그렇지 인간에게 있어 감정, 즉 마음의 작용을 우선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공동체라는 것이 몸과 몸의 연결이라는 차원을 갖는다면, 마음 차원에서도 그 연결을 유추하는 일에 논리적 하자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클리셰나 혹은 지적 나태로 읽힐 수 있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은 그렇게 간단하게 논파당할 수 없다. 이미 우리는 윤석열‘들’이 기도한 쿠데타로 인해 깊은 감정의 공동체를 경험하지 않았는가?  물론 ‘감정의 공동체’라는 말은 모두가 갖는 감정이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공동체’는 무차별적인 동일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무차별적인 동일성이야말로 전체주의적인 강압이 일으킨 환영일 뿐이며, 민주적인 공동체를 상상할 때는 도리어 비추는 빛에 따라 반사되는 빛이 다른, 즉 내적 구조와 밀도가 다른 구슬들이 한데 모여 통일된 색조를 띠는 것 같은 이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연합적인 조화를 건강한 민주주의에 대한 비유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당연히 이 조화는 부단히 해체되려는 힘과 서로 곁이 되려는 힘이 공존하는 관계양식을 말한다. 여기서 ‘구슬’이 환기하는 것에는 감정이 제외될 수도, 제외될 리도 없다.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에서 집단의 감정을 재구성하는 시의 역량과 책무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물론 시의 역량과 책무가 어떻게 발현되고 또 발현되어야 하는지는 구체적인 현실이라는 냉정한 조건을 통해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설령 현실적 조건이 시의 역량과 책무를 축소시키거나 은폐한다 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시 자체의 위의와 본질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현실적 조건의 변화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할수록 시가 공동체의 감정에 대해 져야 할 십자가는 무거워진다고 봐야 옳다. 하지만 작품의 현실성은 어디까지나 시인 개인의 감정에서 시작되어 개인인 독자의 감정을 변화시킨다는 평범한 진리를 놓쳐서도 안 된다. 2  김해자의 여섯번째 시집 『니들의 시간』(창비 2023)은 사람의 삶에서 사람 아닌 존재의 삶까지, 구체적인 생활의 세목에서 역사적 상황과 우주적 영역까지 포함하고 있다. 김해자의 시에 독자의 감정이 움직이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시인의 감정의 동요가 고스란히 작품에 전이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의 동요라는 것이 좋은 시에서는 항용 그렇듯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 동요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도리어 김해자의 시에는 집단적인 감정이 담겨 있는데, 여기서 집단적인 감정이란 추상적이고 평균화된 전체의 감정이 아니라 시인의 감정 자체가 집단적인 관계를 통해 형성된 감정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김해자의 시는 어쩔 수 없이 복수인 그 감정‘들’을 담고 있는 그릇이 된다. 다음의 시를 보자. 물은 안 되겄고, 눈 감고 뛰어내리믄 괜찮을 거 같어 저짝에 옥상 꼭대기로 허리 붙잡고 올라가는디 죽을 맛이더라고. 이제 죽으나 저제 죽으나 죽을라고 올라가는디, 허리가 아파 죽겄어. 나는 모르겄지만 흉한 꼴 볼 사람들 떠올리니께 도저히 못 뛰어내리겄데. 별이 저리 많아도 달 하나 못 구하나 별이 아무리 여럿이 박힜어도 달 하나만 못혀 하이고야, 저 하늘 좀 봐 목화송이마냥 훤혀 물에 처박힜다 꽃이 되었구마 저승길 밟은 맴으로 살아보자, 어디까정 갈지 모르겄지만 살다보믄 무슨 수가 있겄지. 그냥 살기로 혔어. 아프다 아프다 해도 죽게 아프지는 않으니께 살아야지. 나 죽네 나 죽네 하믄서도 세상은 돌아가잖여. 야아 달이 살아났네 저기 좀 봐 달이 나오잖여 나 달이다, 허고 일어났잖여 —「월식」 부분  인용 부분(4~7연)은 작품의 후반부에 해당한다. 여기서 시의 화자는 “자식 놓쳐불고 죽을라고” 했던 여인이다. 작품은 전체가 화자의 입말로 구성되어 있는데 1, 3, 5, 7연은 제목인 ‘월식’에 걸맞게 달이 사라졌다 다시 부활하는 과정을 화자가 혼잣말처럼 내뱉고 있지만 청자가 숨어 있는 구조를 취하는 서정시의 형식이다. 반면 그 사이의 2, 4, 6연은 행의 구분 없이 화자에게 실제 있었던 사건을 진술하는 이야기시의 형식이다. 이렇게 이야기의 특성을 활용하여 서정시의 깊이를 확보하고 그 외연을 넓히는 방식은 김해자 시인이 자주 활용하는 형식구조다. 이는 아마도 이야기와 노래 둘 다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도인 것처럼 보인다.  이 시는 자발적으로 죽음 가까이 다가갔다가 서서히 삶의 영역 쪽으로 옮겨오는 화자의 마음에 대한 것이다. 자식을 앞세운 여인이 처음에는 자살의 장소로 강을 택했다가 “맴만 젖”고 만다. 물이 “허리까지 차니께 몸이 붕 뜨”고 말아서 죽으러 갔다가 도리어 삶의 부력을 몸으로 느낀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죽어야겠다는 마음이다. 그래서 “옥상 꼭대기로 허리 붙잡고 올라가는디” 역설적이게도 몸의 고통을 통해서 삶을 느끼게 된다. 결정적으로 남에게 자신이 죽어서 보일 “흉한 꼴”을 포기함으로써 “저승길 밟은 맴으로 살아보자”며 죽음으로 난 쪽문을 닫아버린다.  이 시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몸의 역할이다. 2연에서는 물에 들어간 몸이 수면 위로 붕 뜨고, 4연에서는 아픈 허리를 붙잡고 옥상 꼭대기로 올라가는 게 “죽을 맛”이다. 몸이 고단해진 것이다. 그 몸의 실감을 통해 “아프다 아프다 해도 죽게 아프지는 않”다는 구체적 진실을 깨달으면서 삶의 방향 쪽으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른바 ‘객관적인 눈’은 화자의 증언에서 과장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화자의 증언을 작품으로 빚어내면서 녹아 들어간 시인의 진실한 마음이—설령 화자의 증언이 과장일지라도 그것마저 넘어선—삶의 의지를 부활시키고 있다.  1, 3, 5, 7연은 달의 사라짐(죽음)에서 다시 나타남(부활)까지 노래의 형식으로 독자의 감정에 물결침으로써 더욱더 화자의 증언이 진실임을 밀어올린다. 특히나 마지막 7연의 “야아 달이 살아났네 / 저기 좀 봐 달이 나오잖여 / 나 달이다, 허고 일어났잖여”는 개인의 경험을 훌쩍 넘어서는 자연의 본질, 즉 은폐와 생성(poiesis)의 반복이라는 진리의 영역에 해당된다. 이 진리의 영역이 가능했던 것은 화자의 변화하는 마음과 몸의 작용을 시인이 세밀하게, 하지만 과잉되지 않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보여주는 화자의 마음 변화, 즉 죽음에 기울었던 비탄에서 삶을 향한 자기보존(혹은 극복)의 감정으로 전환하는 운동은 일면 화자 개인의 것인 듯하지만, 이 시의 이면에 흐르는 것은 개인의 고통과는 무관하게 운동하는 자연을 통해 얻은 깨달음,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민중의 마음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데 김해자가 파악한 민중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관념적인 자의식을 벗어나 자신의 몸이 다른 몸과 연결돼 있다는 실감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도달하게 된 긍정의 감정이다. 달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월식현상을 어떤 부활로 노래하는 짝수 연은 홀수 연에서 도드라지는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는, 고대 그리스 비극양식에 비유하자면 디티람보스(dithyrambos)의 역할을 한다. 디티람보스는 본래 고대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축제기간 중 마지막 행사로 벌이는 비극 경연대회에서 각 부족 대표로 참가하는 민중 합창단을 뜻하지만, 니체(F. Nietzsche)는 디티람보스가 비극 전체에서 “자연의 가장 숭고한 표현, 즉 자연의 디오니소스적 표현”이라고 해석한다. 즉 디티람보스는 “함께 고통을 겪는 자로서 동시에 현자이며, 세상의 심장으로부터 널리 진리를 전하는 자다.”4)  기억해야 할 것은 단수의 목소리라 하더라도 그 목소리에 복수의 감정이 들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의 개별자라 하더라도 감정은 복수의 갈래가 뒤엉켜 있다는 게 진실에 가까운데, 이는 앞에서 말했듯 개인의 감정은 집단적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는 것에 의해 입증되기도 하지만 감정이 의존하는 몸 자체가 이해(利害)를 떠난 여러 생명의 복합체라는 과학적 사실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는다. 민중의 아픔과 설움을 “대신 울어주러”(「버버리 곡꾼」, 『집에 가자』, 삶창 2023) 온 경우에서 보듯, 김해자의 시는 시인 자신의 감정과 민중의 감정이 동시적으로 울리는 특징을 가진다. 이는 그의 시세계에서 예외적인 게 아니라 일반적인 경향이다. 한 몸에서 한 감정의 노래만 흘러나오는 전통적인 서정시나 혹은 단수의 감정인데 복수의 목소리인 것처럼 ‘기획’하는 이른바 현대시의 ‘다성성’은 몸과 마음의 관계망이 존재론적으로 앞선다는 차원에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한 대목이다.  「월식」이 시적 화자의 삶을 통해 민중의 삶에 대한 긍정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면 「니들의 시간」은 한참 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차원을 확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인 자신의 몸이 귀속돼 있는 시간과 공간과 차원에 그것을 초월하는 상상력이 들어오면서 시의 선형적 구조는 흐트러지고 만다. 즉 작품에 다른 기(氣)가 내유(內有)함으로써 「월식」보다 복잡한 구조를 갖는다. 3 1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은 사람 동물 귀신 구분하지 않고도 모두 ‘니’라 부른다는군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안에 깃든 모든 영혼을 니로 섬긴대요 삵이 마을을 어슬렁거린다는 소문 밤 창문을 닫으려다 흠칫 놀랐어요 누군가 여태껏 훔쳐보기라도 한 듯 뻣뻣한 털들이 돋아난 유리창은 거대한 눈, 그 앞에 서기만 해도 찔릴 것 같았지요 수상쩍은 날들이 이어졌어요 이상스러운 생물체가 출몰한다는 소문이 퍼졌죠 봄이 오긴 온 건가요 안전 안내 문자를 받으면 안전해지긴 할까요 이끼 낀 계단이 노려보았어요 맘만 먹으면 어디서든 넘어뜨릴 수 있다는 듯 모서리가 너무 많아요 2 비늘구름 속에서 미사일이 날아다녔어요 인형 속에 인형, 탄두 속에 탄두, 아이 손에서 터지는 탄두 속 작은 집속탄, 밀밭은 보고 있었죠 무너진 담벼락과 흩어진 살점들, 폭격에 쓰러진 나무가 가리키고 있었죠 크라마토르스크 기차역에 떨어진 토치카-U 로켓에 쓰인 흰 글씨, ‘어린이를 위해서’ 겨우내 참았던 씨앗이 버럭 솟구친 것처럼 맥락도 없이 튀어나오는 울화 남몰래 사그라진 화장장의 연기는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아 여기까지 왔을까요 살아도 죽어도 제로가 되는 수치 한낮에도 귀신이 출몰한다는군요 소금을 바가지로 뿌려대다 영구 엄니는 옥수수밭에 서 있는 발 없는 귀신들에게 넙죽 절했다죠 한잔 받으시오, 고수레 술 가득 부어, 고수레 삭삭 빌었다죠 손가락 넣고 휘휘 저어 석 잔 대접하고야 놓여났다죠 발 붙들고 놓지 않는 산 그림자 (…) 5 니들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산산이 공들여 ✕자를 붙였어도 태풍에 깨져버린 창문처럼 창에 비치던 너와 나의 얼굴 우린 어쩌다 먹어치워버렸을까요 앞으로 올 니들을 니들의 시간을 —「니들의 시간」 부분  먼저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이 부른다는 “니”에 당연히 주목해야 한다. 우데게족에게 ‘니’는 형체가 있든 없든 모든 존재자들을 부르는 명칭이면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분절된 시간을 초월해 “깃든 모든 영혼”이다. 그러니까 ‘니’는 시간과 공간, 유형과 무형을 떠나서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지금 자신도 그런 ‘니’에 둘러싸여 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니들의 세계’는 이미 깨어졌다. 1절에서 그런 징후를 드러내다가 2, 3, 4절에서 시인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니’가 사라진 세계 또는 ‘니’의 의미가 타락한 현실에 대해 마치 “고수레”하듯 읊조린다. 그런데 ‘고수레’의 의미와도 연관되는 것이지만, 마치 혼자만의 넋들임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전체 작품의 복판격인 2절과 3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반복적으로 ‘고수레’ 장면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2절 1연의 (우끄라이나)전쟁 상황과 2연의 원망과 미움에 가득 찬 현실은 이어져 있는 인과관계라고도 볼 수 있지만, 시인은 어디까지나 조각보를 기우는 듯한 방식을 쓰고 있기에 전쟁과 미움의 연관관계는 읽는 독자마다 다르게 경험되기도 한다. 그 뒤 이어지는 3절 2연에서도 역시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 찬 현실이 지금 시인의 마음을 치고 있음이 충분히 느껴진다. “니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든가 “니는 대체 왜 그래”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숱하게 뱉어내고 또 듣는 말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런 원망의 언어 “없이” “니라 부르면 니가 나처럼 느껴질까요”라고 묻지만, 이미 현실에서는 “연해주에 사는 우데게족”의 “니”는 다 파괴되었다. 물론 우데게족의 ‘니’와 한국어 ‘니’의 실제 의미는 다르지만 소리를 빌려와 동일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시가 가진 특권의 문제이며 시인은 그것을 근사하게 해냈다.  그런데 “니가 나와 섞”이지 못하는 현실과 ‘니’를 향한 원망과 미움은 막연한 심리적 뒤틀림이 아니라 우리의 근대가 차곡차곡 쌓아온 업(karma)에 다름 아니다. 4절 2연의 “니가 깎여 나가는 동안 허리가 묶인 물고기들처럼 / 아무리 헤엄쳐 가도 헤어지지 못하는 사이(우리는 우리가 아니야)”에서 그 일면을 제시하면서 시인은 그 업에 무릎 꿇고 비는 대속(代贖)행위를 한다. 누구에게? “한낮에도” 출몰하는 귀신—다름 아닌 ‘니’들—에게. 우리는 지금 귀신마저 원망에 차 “안전 안내 문자”처럼 출몰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그게 귀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 귀신의 목소리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니,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이 대신 빌고 있는 것이다.  근대가 자신의 업을 고쳐보겠다고 더 쌓고야 만 업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시인 자신의 “고수레”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 절인 5절에서 다시 무너지듯 내뱉는 탄식은 그런 느낌을 주고도 남는다. 우린 어쩌다 앞으로 올 존재들과 그들의 시간을 다 먹어치워버렸나. 그렇다면 ‘고수레의 마음’은 죽었다 살아나는 달(「월식」) 같은 자기치유와 닮은 마음 아닐까. 귀신에게 비는 마음이 일종의 ‘향아설위(向我設位, 제사 지낼 때 조상의 신위를 벽이 아니라 ‘나’로 향하게 함)’라면 결국 자기 마음에 비는 행위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월식」과 「니들의 시간」은 그려내는 시공간의 폭이나 그 형식은 다른 작품이지만,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민중의 자기치유를 통한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기통치만이 결국 ‘니’(타자)에 대한 성찰과 ‘니’(귀신)에 대한 기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시적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죽임과 좌절, 원망과 혐오로 얼룩진 우리의 세계가 나아가야 할 근원을 가리키지 않는가?  동학의 교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경신년(1860) 4월 종교체험을 할 때 들은 첫 말은 “내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다(吾心卽汝心)”였다. 최제우는 가뜩이나 세상이 어지럽고 민심이 좋지 않아 사람들의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황에서 서양 제국주의가 괴이한 언어(기독교)를 앞장세워 무력까지도 불사하며 밀어닥치고 있는 게 두렵기까지 했다. 이런 현실을 넘어서려는 바람과 기도가 깊고도 깊었던 것일까. 급기야 신다전한(身多戰寒), 즉 몸이 심하게 떨리고 춥더니 새로운 기운이 느껴지면서 순간적인 깨달음인 확연대오(廓然大悟)가 찾아왔다. 이때 들려온 말이 “내 마음이 너의 마음이다”였고, 이어서 “사람들이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알지 못한다(知天地而無知鬼神)”는 말이 들려왔다. 여기서 ‘귀신’은 도올 김용옥의 번역으로는 “천지의 또 다른 영묘한 이름”이라 했거니와 최제우가 몸으로 접한 새로운 기운(接靈之氣, 신령과 맞닿아 합일하는 기운)을 일컬을 것이다.5) 그런데 최제우의 ‘귀신’은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의 “니”와 의미상 어떤 차이가 있을까?  김해자의 시는 ‘니’로서의 ‘귀신’이 “태풍에 깨져버린 창문처럼” 산산이 부서지면 “안전 안내 문자”같은 악귀(惡鬼)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동아시아 사유에서 기(氣)는 뭉쳤다 흩어졌다 하면서 영원회귀하는 실체로서, 그 기의 운동에 괴변이 생기면 기에 감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과 마음도 헝클어지고 만다. “인간 안에 있는 것은 신령이요 인간 밖에는 기의 운동”(「동학론」, 『동경대전』)이라는 말은, 기(氣)와 영(靈)은 내재적으로 같은 것이며 그래서 함께 운동하고 함께 변화하는데 그중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영은 신령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최제우는 인간을 일러 최령자(最靈者, 가장 신령한 존재)라고 했던가. 따라서 우주 전체 혹은 우리가 사는 지구나 지역의 기에 문제가 생기면 그 안의 모든 생명·사물에 깃든 영에도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며 인간 안에 모셔져 있는 ‘신령’도 위태로워진다. 최제우가 ‘시천주(侍天主)’를 강조한 것은 이런 상태일수록 우리 안의 신령을 배신 혹은 불신하지 말고 마음을 닦고 기를 바로 하라는(修心正氣) 바람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언어의 타락과 타자를 혐오하는 영혼이 절정에 달해 있는 오늘날에 비춰 볼 때, 기의 운동 변화에 심대한 차질이 생겼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일단 기후변화로 나타나고 있으며 당연히 기후변화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생태계를 교란·파괴한 탓이라는 것에 이제 다른 토를 달 수가 없게 됐다. 생태계의 교란·파괴라는 것은 결국 “니들의 시간을” 먹어치워버린 것과 같은 의미다. 다른 사물과 타자 또한 기의 형체이고 그 안에도 우리가 모르는 영, 즉 ‘니’가 깃들어 있는데 그것들을, 아니 “앞으로 올 니들”까지 먹어치웠으니 그 ‘니’가 다른 기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게 바로 ‘악귀’이고 그 악귀의 파토스는 원한과 혐오이며, 그 파토스의 로고스 형태가 언어의 타락인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라고 하지 않던가.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존재의 목자’이고 시인이 ‘언어의 파수꾼’이라면, 김해자의 「니들의 시간」은 목자의 역할과 파수꾼의 임무에 응하고 있는 작품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4  오늘날 ‘민주주의’는 너무도 지당한 상식이 되어버렸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맥락은 점점 더럽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독재자도 자본가도 관료들도 그리고 파시스트도 민주주의라는 ‘말’을 차마 버리지 못한다. 어찌 보면 현대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증명 방식 같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민주주의는 주인된 민중이 스스로 정치의 방식을 계발해 나아가면서 그 방식에 따라 스스로 정치를 하는 체제를 말한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체제가 과연 ‘주인된 민중’을 어떻게 괴롭혀왔는지에 대해서는 묻기를 주저하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주저는 자연과 신성(神聖)의 파괴와 동시적으로 일어났다. 자연과 신성이 곧 민중의 삶의 거처이며 존재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신성을 파괴하면서 자연과 사물을 지배받아야 할 대상으로 격하시킨 근대의 세계관은, 자연과 사물은 상품생산을 위한 원료창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본주의적 경제관념을 제공했으며, 이 비도덕적 경제관념이 수탈과 식민, 착취와 파괴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 논리로 이어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 역사는 과거지사일 뿐이고 식민지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집단무의식이 혹 형성되었던 것일까. 그래서 웬만한 신생독립국은 흉내도 낼 수 없는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그 반대쪽의 암흑은 모르쇠해왔는지도 모른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감정의 형상을 구성하는 관념이 신체의 상태, 즉 여타의 활동력과 존재력에 따른 것이라면, 다른 신체로서의 사물, 그리고 그것들의 연합이자 존재 근거인 자연상태가 변질되면서 우리의 신체와 감정에도 비례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사실은 현대의 여러 병증(病症)을 통해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 이런 상황이 우리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뒤틀린 감정을 만들었을지 모르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주인된 민중의 자기통치’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타락한 교의와 정치이념에 맹종하는 노예의 감정을 퍼뜨렸을 것이다.  시가 감정의 변화 속에서 시작돼 다른 감정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해서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계몽에 몰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기 감정을 절대시하는 감정의 독재를 낳을 수도 있다. 먼저 우리 시대의 감정‘들’의 결을 섬세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의 연원을 제대로 사유하는 일의 동시적인 수행이 필요하다. 현대의 철학적 경향에는 대체적으로 인간의 몸과 마음을 또다른 기계로 보려는 관점이 강한데 이 또한 역사적인 관점의 결여를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에 대한 사유 자체가 ‘근대인’에 한정돼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이 역사의 국면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말하기 전에 인간의 본성을 보는 ‘관점’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우리가 품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근대 민주주의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전개되어왔으며 시대적 국면과 어떻게 조응해왔는지 종합적인 인식이 이루어진 바탕 위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직관도 풍성해질 것이다. 이는 사유와 인식이 직관에 의존한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뒤집는 게 아니다. 인식의 새로움은 다시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것은 다시 자유로운 사유의 촉발로 되먹임된다. 따라서 몸과 마음과 정신은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가 새로워진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몸과 마음과 정신이라는 구분법은 인간이 가진 언어의 한계에 따른 것이며, 어쩌면 한계 자체가 인간 존재의 본질에 해당될지 모른다.  다만 민주주의에 대한 랑씨에르(J. Rancière)의 말마따나 시가 꿈꾸는 민주주의가 “행태들을 갱신하는” 일이나 “주체의 새로운 출현”6) 등에 머문다면 어딘가 미진해 보인다. 주체의 ‘분할’이나 감성의 ‘분배’ 같은 것에 치중하는, 인간 ‘주체’로 꽉 찬 민주주의는 기계적 평등과 존재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권리의 횡행을 가능케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는 인간 ‘주체’의 범람으로 ‘니들’의 세계인 이천식천(以天食天, 하늘로써 하늘을 먹이다)의 공동체, 인간만이 아닌 모든 존재들이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몸과 마음의 공동체가 깨진 상태다.  근대적 주체, 곧 ‘나’는 서구의 근대 정신사에서 신과 ‘능산적 자연’(스피노자)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은 관념의 토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근대적 주체로서의 ‘나’의 강조가 인간을 위하는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주체 개념을 다른 존재자에게까지 확장하는 현대의 철학적 경향은 사실 인간 아닌 존재를 의인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인간중심주의의 변종에 가깝다. 인간 존재의 고귀함이 점점 납작해져가는 상황은 인간이 ‘니들’을 먹어치운 상황과 절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시가, ‘니’의 회복을 어떻게, 얼마만큼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당연히 그 감당을 회피하기 위함도 아니고 회피를 위한 알리바이로 작용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시는 주어진 현실을 통과하며 넘어서기 위한 ‘신다전한(身多戰寒)’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신다전한이란 결국 자기 시대의 토양, 공기, 귀신, 욕망, 꿈과 한몸이 되면서 맞는 고통일 것이다. 시에 가르침의 임무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보다 먼저 시가 ‘니’와 한몸이 되어야 할지 모른다. 그런 몸에서 나온 작품이 현실의 집단감정에 동요를 일으키면서 다른 세계에 대한 감정이 생성되는 창조적 순간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런 순간의 다중공유가 가능해진다면, 이때를 새로운 시운(時運)이라 부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1)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글들이 있다. 박권일 「윤석열의 지지자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한겨레 2025.3.24; 정희진 「내전과 공존」, 경향신문 2025.3.18. 2) B. 스피노자 『에티카』, 강영계 옮김, 서광사 1990, 202~203면. 3) 마르틴 하이데거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이선일 옮김, 한길사 2001, 127면. 4)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5, 74면. 니체는 이 책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부정하지만 역설적으로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중우화(衆愚化)되면서 비극이 몰락하는 계기가 됨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낸다. 니체는 에우리피데스와 소크라테스를 비극을 몰락시킨 구체적인 인물로 지목하며 ‘그리스의 명랑성’(“어려운 것을 책임지지 않고 원대한 꿈을 추구하지 않으며, 지나간 것이나 미래에 올 것을 현재 있는 것보다 높이 평가하지 않는 노예들의 명랑성”, 92면)에 대한 부박함을 비판한다. 이때는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그 건강성을 잃은 시기이기도 했다. 신화와 음악으로 이루어진 그리스 비극이 합리적 이성이 지배적이었던 아테네 민주정 시기에 번성했던 것은 인간의 합리적 이성으로도 어쩔 수 없는 비합리의 세계(운명, moira)에 대한 의식이 아테네 시민들의 시민적 덕성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민주주의가 확보해준 문화가 토양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민주주의와 예술의 상관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리스 비극에 기대 말하자면, 예술이 종교(철학)와 정치를 이어주는 동시에 그 둘을 통합하는 교각이 되어 시민들의 마음과 정신을 (오늘날의 경우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그 시민들의 마음과 정신이 다시 예술이 샘물이 되는 역동적인 관계를 말이다. 5) 이상 원문과 번역은 도올 김용옥 『동경대전 2』, 통나무 2021, 118~19면 참조. 6)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길 2013, 110~11면.

계간 창작과비평 황규관 민주주의동학창조김해자하이데거 2025
하혁진 말을 잃은 아버지들

말을 잃은 아버지들 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을 중심으로 하혁진(河赫進) 1985, 2005, 그리고 2025  여기, 두 명의 아비가 있다. 첫 번째 아비는 허수아비를 만들고 있다. 낡고 녹슨 재료로 고작 허수아비를 만들면서도 그 태도는 사뭇 진지하다. 아비는 자신이 만든 "넝마들"을 향해 준엄하게 명령한다. "황산벌에 계백 장군 임하시듯 / 늠름하게 쫓아뿌라, 잉". 그러나 허수아비를 만드는 아비는 정작 자신이 허수아비라는 사실은 모른다. "그 뒤편에 전쟁보다 더 무서운 / 입 다물고 귀 막은 적막강산이 / 호올로 큰 눈 뜨고 있다"는 사실을 아비는 알지 못한다. 철 지난 권력과 남성성에 취해 있는 아비. 화자의 눈에 그런 아비의 모습은 "장검 대신 깡통 차고" 있는 늙은 남자, "홀로 남아 나이롱 저고리 입고"(김혜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 지성사 1985) 있는 우스운 남자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아비는 쉴 새 없이 달리고 있다. "아버지가 되기 전날 집을 나가 그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김애란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14면)은 무책임한 아비는 '나'의 상상 속에서 쉬지 않고 달린다. 어떻게든 어머니를 꾀어내기 위해 거리를 전력질주했던 아비는 지질한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아버지는 달리기를 하러 집을 나갔다."(15면) 가족을 버린 아비의 그림자에 갇히지 않기 위해 '나'는 그렇게 믿어버린다. 어느 날 느닷없이 도착한 한 통의 편지가 아비의 죽음을 알렸을 때도, '나'는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29면)은 철없는 아비의 시신 위에 검은 선글라스를 씌우는 장면을 상상할 뿐이다. '겨우' 아비일 뿐인 아비는 '나'의 명랑에 상처 입히지 못한다.  요컨대 전자의 아비는 '너무 있는 것'(현존)이 문제였고, 후자의 아비는 '너무 없는 것'(부재)이 문제였다. 그래서 전자의 딸은 아비와 허수아비를 겹쳐놓음으로써 아비가 가진 (혹은 가졌다고 여겨지는) 권력을 허상으로 만들고, 후자의 딸은 아비를 소년으로 그림으로써 아비를 나를 책임질 사람이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 만든다.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두 여성작가가 20년의 시차를 두고 만들어낸 형상은 "'나이 든 아버지'와 '젊은 딸'의 관계"를 통해 "세대-젠더의 역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통쾌하다. "세대는 몰젠더적이지 않고 젠더는 초세대적이지 않다"1)는 적실한 지적처럼,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부녀관계 형상화는 세대·젠더 문제를 둘러싼 현실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양상들을 묘파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아비의 권력을 해체한 김혜순의 시도, 부재하는 아비의 영향력을 거부한 김애란의 소설도 작금의 딸들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다시 20년이 흐른 지금, 늙은 아비와 젊은 딸의 세대·젠더 역전은 더이상 딸들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12·3 내란사태 이후 광장을 가득 채운 여성(들)의 목소리는 남성만이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세대론의 무의식적 위계를 '늘 그랬듯이'2) 전복하며,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경유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여성(들)이 어떻게 '알 수 없는 미래와 벽'(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너머의 세계를 제시하고 나아가는지 보여줬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목소리를 예비하고 재현해온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아버지는 여전히 거부와 해체의 대상일까. 혹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세대·젠더의 구분을 넘어 함께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 즉 '동료 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까. 아비의 자백: 이미상 「하긴」  발화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모를 때, 그가 하는 말은 대개 자백이 된다. 이때의 핵심은 그가 하다못해 묵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인데, 그가 가진 가장 큰 결함은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하긴」(이미상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의 화자 '김'이 그렇다. 그는 누구인가. 한때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그는 이른바 '86세대' 남성들의 부정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외쳤던 "대의명분이 대입명분으로 수렴"(28면)되어버린 지 오래인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전선(戰線)은 딸 '보미나래'의 입시전쟁뿐이다. 그러나 "서로의 발이 닿을 만큼 작은 소반에 앉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전수하는 것"(9면)을 꿈꾸었던 김의 부녀상(像)은 아동발달센터에서 듣게 된 "지능검사 한번 받아보시겠어요?"(11면)라는 말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다. 그런 와중에도 김은 "지능은 유전 아닌가?"라고 말하며 아내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는데,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거"(12면)라며 은근슬쩍 청자의 동의까지 구하는 그의 내면에 끔찍한 위선과 이중성, 엘리트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은 두말할 것 없이 명백하다.  그러나 김이 어쩌다 온갖 차별과 혐오에 찌든 속물이 됐는지 그 경로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독법이 아니다.3) 내용보다 중요한 건 형식이다. 이 소설이 김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메시지인데, 김이 단순한 속물을 넘어서 거의 괴물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가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이 "나도 정(正)이 되고 싶었다. 부정당함으로써 아래 세대를 고양하는 발판으로서의 정, 그런 내 짝으로서의 딸, 내 딸의 자격, 나의 딸감"(21면)이라고 아무 부끄러움 없이 말할 때, 그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존재와 위상을 인정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무능한 아비임을 '스스로' 드러낸다. 김이 "자기 언어를 가진"(20~21면)4) 그래서 "아비와 아비의 친구와 아비의 세대를 쌩"(21면)깔 수 있는 '문'의 딸 '초롱'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학원을 운영하는 문과의 입시 상담에서 "대가리파, 노력파, 명분파"(14면) 운운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기실 명분만 남은 것은 보미나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더이상 시대를 선도할 능력도 없고, 변화의 흐름을 따라갈 노력도 하지 않는 김에게 남은 것은 정의를 위해 청춘을 다 바쳤다는, 이미 오래전에 단물이 다 빠진 '명분'뿐이다.  이렇듯 작가는 인물의 자백을 통해 그를 고발한다. 여기에 이야기 사이사이 김이 쓰는 칼럼까지 더해지면5) 그의 죄목은 차라리 다변(多辯)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다. 아비는 죄가 많은데, 그걸 숨기기엔 말도 너무 많다. 김은 자랑스러운 과거와 전락한 현재의 낙차를 말로써 메우려 하지만, 그럴수록 초라해진 자신의 처지만 드러날 뿐이다. "대상화의 프레임 속에서만"(20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뒤틀린 남성성과 그렇게라도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해야만 하는 끔찍한 자기애적 자의식 말이다. 그러나 「하긴」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끝내 뒤처진 의식을 갱신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 아버지 세대를 풍자하는 후일담 소설에 그치지 않는다. 결말부에 등장하는 보미나래의 행위가 그러한 규정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대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미국에 있는 에코공동체에 보내졌던 보미나래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자, 김과 아내는 원치 않은 임신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딸이, 그럴 주제나 돼?"(37면)라고 말하는 아내의 모습은 자식세대를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부모세대의 왜곡과 집착을 보여주는데, 그들은 딸이 임신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억압과 폭력이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임테기 천사. 다들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임테기 천사는 늘 한강공원 공중화장실에 있다. 임테기 천사는 임신 테스트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건네고 문밖에서 휘파람을 분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편지를 쓴 이는 다행히 한 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울었을까. 왜 칸 속에서 나오지도 않고 한참을 울었을까. 우는 내내 임테기 천사는 휘파람을 불었다. 잘 불지 못하면서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휘파람 소리. 노크도 않고,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울음을 그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가고 없었다.(40~41면)  한편 아이를 출산한 보미나래는 한강공원의 '임테기 천사'가 된다. 김과 아내가 트라우마의 원인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이, 소설 내내 단 한 번도 제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보미나래는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선택한 행위를 한다. 임신테스트기가 필요한 여성들에게 조용히 그것을 쥐어주고 휘파람을 불며 "곁에 옅게, 있어주"(41면)는 보미나래의 행위는 아버지 세대의 인식을 초과하는 행위로써, 그녀가 수평적 관계 속에서 돌봄의 가치를 실천하는 여성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를 "서로에게 조력자가 되어주는 여성들의 연대"로 곧장 의미화하는 것은 성급하다. 그러한 이해는 "구원자 여성의 이미지가 관념화되"6)는 비약의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보미나래의 트라우마가 발현된 결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손쉽게 소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러한 행위가 말 많던 아비의 입을 다물게 한다는 것이다. 시종일관 혀가 길던 김은 젊은 시절 아내가 갖고 있던 묘한 습관, "말을 하다 말고 짧고 긴 숨을 쉬"(41면)는 습관을 떠올리는 것을 끝으로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기어코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하는' 아비가 말문을 닫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은, 아버지 세대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딸 세대의 새로운 주체성, 즉 각자가 가진 취약함이 서로를 연결하는 조건이 되는 관계 지향적인 주체성을 예비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딸의 심판: 성혜령 「버섯 농장」  자백하는 아비가 있으니 심판하는 딸도 있을 법하다. 다만 말 많은 아비의 무능과 위선을 현실의 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으니, 이 심판 역시 어딘가 어긋난 방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어둡고 음습한 「버섯 농장」(성혜령 『버섯 농장』, 창비 2024)으로 가보자. 학창시절 만나서 친해진 '진화'와 '기진'은 요양병원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이 요양병원에 가게 된 복잡한 사연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진화는 전 남자친구의 아는 동생을 통해 휴대폰을 바꿨는데, 헤어지고 나서야 자신의 명의로 개통된 휴대폰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 그 앞으로 적지 않은 금액의 빚과 이자가 쌓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뒤늦게 남자애에게 문자를 보내보지만, 뜬금없게도 답장을 보내온 것은 남자애의 아버지다. "아들과는 자신도 연락이 되지 않으며, 자신은 노모가 위독해서 낮부터 밤까지 요양병원에 있다고,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더는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남자의 뻔뻔한 답장에 화가 난 진화는 "그에게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어 보(16면)"인다며 기진과 함께 요양병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 방문의 표면적인 목적은 돈을 받는 것에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임'이라는 말이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서로 다른 용례가 이 서사를 추동하는 핵심적인 동력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버섯 농장」은 '부녀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젊은 여성이 느끼는 책임과 중년 남성이 느끼는 책임을 마주 세움으로써, 세대·젠더를 둘러싼 권력 불평등과 책임 분배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남자에게 아들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할 책임이 있는 걸까. 진화와 남자의 "채무자-채권자"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타협이 난망해 보이는 것은 그 빚이 채무자의 책임으로만 돌리기 어렵기 때문"7)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빚을 갚을 책임이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다. 진화에게는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주겠다는 명분이 있지만, 그 책임을 대신하라고 강제할 정도의 명분은 없다. 그럼에도 진화는 남자의 채무를 훌쩍 뛰어넘는 행위로 갚아주는데, 그러한 '비등가교환'의 빈칸을 채우는 것이 「버섯 농장」을 읽는 주요한 독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진화는 어째서 남자의 머리를 내려쳤을까. 이번에도 아비의 '긴 혀'가 문제다. 남자는 자신을 찾아온 진화에게 "내가 아가씨한테 할 말이 없어야 하는데"(22면)라고 말하면서도 너무 많은 말을 덧붙인다. 그는 감당하기 힘든 빚이 쌓였다는 진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화의 입장에서는 사치일 뿐인 자기변호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자신은 성실하게 살았으며 한때 노조위원장도 했고 지금은 집을 팔아 노모를 모시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장광설 끝에 "내 책임을 다하고도 남았"다고 말함으로써 진화를 자극한다. 그뿐 아니라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줄 여력이 없"(23면)다고 덧붙임으로써 진화의 고통과 불행을 너무 쉽게 '나머지'로 치부해버린다.  흥미로운 것은 남자가 한 말과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진화 역시 보내려고 했다는 점이다. 공연히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보내지 않았던 메시지에서 진화는 명의를 도용한 남자애에게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15면) 충고하며, 자신은 자기 몫의 생활뿐만 아니라 난데없이 떠안은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진화와 남자는 똑같이 '책임'을 말하고 있지만, 그 방향과 무게는 전혀 다르다.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는 반면, 남자는 마치 물건을 고르듯 자신의 책임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8) 이렇듯 모든 책임의 화살표가 위로만 향할 때, 계급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있는 '젊은 여성' 진화를 책임지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아비는 무책임하게 빚을 안기거나(진화의 아버지), 후안무치한 민낯을 드러낸다(남자애의 아버지). 그러니 "십오억"(23면) 부동산 운운하는 남자의 말들이, 저렴한 월세 때문에 옆집의 오줌 싸는 소리까지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는 진화에게 지당하게 들렸을 리 만무하다. 일상의 사소한 책임 문제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진화는 그러한 '비등가'를 재빠르게 눈치챈다. 그리고 남자를 쫓아 그의 집으로 향한다. 남자가 빚이 이자를 불리듯이 쓸데없는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죄를 불렸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로 가보자. 값비싼 차와 비닐하우스, 달마도와 실내용 골프대 사이에서 남자의 진실은 끝까지 비밀로 남는다. 그는 특유의 위압적인 말투와 태도로 진화를 조롱할 뿐이다. 남자가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밝히지 않는 결말은, 성혜령 소설 특유의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강화하는 동시에 빚을 받겠다는 애초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이뤄지는 진화의 심판을 강조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진화가 유리해질 수는 없을"(27면) 것 같았던 상황을 진화는 '한방'에 역전해버린다. 문제의 마지막 장면, 기진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남자는 죽어 있고 진화는 골프채를 들고 있다. 여기서 남자의 사인(死因)보다 중요한 것은 진화의 다음 행동이다. "진화가 골프채를 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폼을 잡더니 남자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33면) 진화는 그냥 한번 쳐보고 싶었다며 덧붙인다. "근데 쓰러진 폼이 꼭 자위하려던 거 같지 않아?"(34면) 어떤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없을 땐, 그 사건으로 인해 알게 된 것들을 살피는 게 도움이 된다. '혀'로 자신의 무능과 위선을 '자위'했던 남자는 결국 죽었다. 진화가 그를 죽인 것이든, 이미 죽은 그의 시체를 훼손한 것이든 그러한 행위는 '자기 몫의 책임'을 낳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생각해보면 그전까지 진화가 책임지고 있던 것은 하나같이 선택 밖의 문제였다. 아버지의 빚도, 남자애의 빚도, 젊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했던 미시적인 폭력들도 전부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하자. 세상이 죄 없는 자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워서, 죄 없는 자가 스스로 죄를 지어 그 불균형에 부응했다고. 물론 이것은 정의로운 해결이 아니라 '왜곡된 균형'일 뿐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 소설의 부조리한 결말과 부조리한 현실이 분리할 수 없는 한쌍이라는 사실이다. 이 비극의 원인이 불평등한 현실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독자에게 진화는 되물을 것이다. "너 어딘가 잘못된 거 아냐?"(35면) 딸과 아버지의 동모(同謀): 예소연 「그 개와 혁명」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딸과 아버지가 '동거'하는 관계라는 점이다. 이때의 동거란 단순히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일상 속에서 서로의 닮음과 다름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집'은 때때로 "모순된 지향들이 부딪혀 역동하는 장소"9) 즉 '광장'이 된다. 한 지붕 아래 만들어지는 기묘한 광장의 역학은 서로가 서로의 일면만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까다롭고 복잡하다. 예컨대 「그 개와 혁명」(예소연 『사랑과 결함』, 문학동네 2024)에서 '수민'의 집에는 'NL'(민족해방파)인 엄마와 'PD'(인민민주파)인 아빠가, "민주85"(221면)인 부모세대와 "요즘 여자들"인 자식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화자인 수민은 아버지인 '태수씨'가 "메갈이 어쩌고 한국 여자들이 어쩌고" 하면서도 정작 "내가 요즘 여자들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226면)는다는 사실에 답답해하고, "유연한 노동 문제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불가산인 가사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226~27면)는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낀다. 그렇다면 태수씨 역시 앞서 살펴본 아버지들처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의와 책임만 취하는 이중적인 인물인 걸까. 마냥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딸이 아버지의 '이면의 이면'까지 보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수민의 '돌봄'은 태수씨와 함께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246면)인 동시에 아버지의 역사를 단선적인 이해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딸의 안간힘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은 남성이 상주가 되어야 한다는 "불필요한 인습"(220면)을 깨고 완장을 찬 수민이다. 그녀는 우선 투쟁이나 혁명 같은 거대한 단어 뒤에 감춰져 있던 아버지의 삶을 듣는다. 특히 이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상되는데, 한평생 '형주'라는 이름을 썼던 아버지는 암 진단 이후 태수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형주라는 이름이 수민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러나 세상을 대하는 확고한 기준이 있다는 점에서 부럽기도 했던 아버지의 공적 삶을 상징한다면, 태수라는 이름은 수민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아픈 몸의 서사, 즉 아버지의 사적 삶을 상징한다. 이렇듯 아버지가 살아낸 두개의 삶은 그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직조하는데, 돌봄이라는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수민은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227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민은 "도대체 태수씨가 뭐라고 우리는 그토록 태수씨를 사랑한단 말인가?"(226면)라는 자문에, 불완전한 태수씨를 "그래도" 사랑한다고, 특정한 단어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한 역사를 가진 "태수씨 정도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227면)이라고 스스로 대답한 셈이다. 이 능동적인 귀 기울임이 대상이 가진 '결함'을 애정의 조건으로 만들어내는 예소연식 '사랑'의 핵심이다.  한편 수민은 아버지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수민은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에게 "태수씨의 마지막 지령"(249면)을 전달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삶과 죽음의 경계뿐 아니라 딸과 아버지의 경계까지 흐려놓는다. 장례식장이라는 무대 위에서 아버지라는 배역을 수행하는 딸의 연기는, 그의 목소리로 그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메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연기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선결되어야 한다. 우선 수민에게 태수씨가 되어보려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다행히 수민은 태수씨의 삶을 궁금해한다. 아버지가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혁명을 그만두고 식구들을 먹여살려야겠다고 다짐한 마음이 궁금하다. 죽음의 문턱에 이를 때까지 출퇴근을 계속할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삐라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졌던 모습 뒤에 숨겨진 두려움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그뿐 아니라 수민은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태수씨의 모습을 좋아했었"(220면)다며 "나도 태수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237면)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수민의 동기에는 태수씨를 향한 애정과 선망, 호기심이 뒤섞여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딸의 아버지 '되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사이의 '공통감정'을 끌어낼 만한 '공통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 뜨거웠던 '혁명'과 '투쟁'의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와 미적지근한 '뜻'과 '의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딸은 공통의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있다. 요양병원 꼭대기 층에 나란히 앉아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운다. "있잖아, 수민아.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들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서." 나와 태수씨는 그때 처음으로 함께 울었다.(239~40면)  수민은 "전 대통령 추모제 때" 말고는 본 적이 없었던 태수씨의 눈물을 본다. 그때 하염없이 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고 무서웠다는 수민에게 태수씨는 "정말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이었거든"(239면)이라고 말해주는데, 그 말인즉슨 삶의 마지막을 앞둔 이 순간 수민과 함께 울고 있는 태수씨가 '정말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두 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공통의 경험으로 묶인 딸과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모한 혁명은 성공적으로 완수된다. 이 소동극의 하이라이트는 태수씨가 유독 아꼈던 반려견 '유자'를 데려와 장례식장에 풀어놓는 장면인데,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인 유자가 장례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238면)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은 잠시나마 유예된다. 그런데 말 그대로 한바탕 소동에 불과한 딸과 아버지의 동모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아버지 세대가 "세상의 중심을 논하는 방식"(241면)이었던 혁명의 구호들, 그 빈자리를 메우기에 이 사랑은 너무 작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랑은 혁명의 최솟값이라고, 사랑 없는 혁명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작지 않은 게 아니라 작지만 사소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사랑의 재발명을 동반하지 않는 세계의 재발명이란 재발명이라 할 수 없다."10) 기어코 발명된 이 사랑은 저물어가는 혁명의 종착지가 아니라, 끝끝내 저물지 않는 혁명의 출발지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최근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달라진 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딸들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아버지 세대의 한계를 초과하고, 심판하고, 심지어 사랑한다. 이러한 변화가 '페미니즘 리부트'로 명명되는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공유한 여성들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결이 된 딸들의 목소리에 아버지 세대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동기'와 '공통경험'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선 아버지 세대에게는 딸들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할 동기가 당위와 현실, 두가지 측면에서 모두 존재한다. 먼저 당위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이뤄낸 민주주의의 제도와 체제를 갱신할 책임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극심해지고 고착화되는 양극화의 양상과 여전히 끊이지 않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아버지 세대에게 익숙한 민주주의의 가치가 여러모로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더 큰 진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광장의 정치적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딸들과의 연대가 필연적이다. 또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 민주주의를 극우 반(反)민주세력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전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극우 반민주집단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반여성·반퀴어·반이주민 등인데, 그러한 백래시와 맞서 싸우는 최전선에는 언제나 여성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 여성운동이 축적한 교훈과 지혜 없이는 극우 반민주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는 점에서 딸들과의 연대는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세대는 딸들의 목소리에 공감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공통경험을 갖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세대 정체성'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대 정체성은 단순한 생몰년도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비롯했는지를 함께 기억하고,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가늠하고,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를 함께 기대"11)하는 과정을 통해서 구성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가진 아버지와 딸도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지, 현재의 쟁점과 미래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따라 얼마든지 공통의 경험을 만들어갈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12월 21~22일 남태령에서 그러한 장면을 이미 목격한 바 있다. 그곳에는 "우리는 기특하지도, 장하지도 않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듣고 싶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소녀라기보다도 딸이라기보다도 동료 시민이다"12)라고 목소리 높이는 이들이 있었고, 서로가 하는 말을 잘 몰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넌 뭐니? 네 얘기도 좀 들어보자"13)라고 귀 기울이는 이들이 있었다. 요컨대 이제는 말을 잃은 아비가 대답할 차례다. 특히 차별금지법을 비롯해 2030 여성들이 외치고 있는 주요한 의제들을 현실정치의 결과로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러한 노력 없이 '빛의 혁명'이 성취한 열매만 취해선 안 된다. '다시 만날 세계'에 대한 충분한 공감과 이해 없이 「다시 만난 세계」의 노랫말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미덥지 못하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은 그럼에도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이제 문학은 아버지를 해체하거나 거부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작금의 문학은 아버지 세대를 일방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넘어서 그들이 가진 '동료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서사로 나아가고 있다. 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은 각기 다른 결말을 향하지만, 공통적으로 '딸의 주체성'을 통해 아버지 세대와의 관계성을 재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문학이 세대·젠더 간의 불평등한 권력과 책임 문제를 고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라는 공동체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딸들은 아버지 없이도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새롭고 강력한 주체로 자리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완전히 배제한 채 새로운 세계를 설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학의 과제 중 하나는 이념이나 상징으로 가려졌던 아버지의 삶을 구체적이고 다층적인 이야기로 복원하는 동시에, 딸들의 말과 몸짓, 돌봄과 분노가 민주주의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필수적인 동력이자 실천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문학의 가장 강력한 정치성은 '나'와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서로에게 더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 * 지면의 한계와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다루지는 못했지만,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 「애국소녀」(남아름 연출, 2023)는 이 글의 기획과 구성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85학번 캠퍼스커플 부모 아래서 쌍둥이 자매로 태어난 '아름'은 공무원이 된 아버지와 페미니스트 활동가 어머니와 함께 살며 세대와 젠더를 둘러싼 여러 딜레마와 마주한다. 특히 세월호참사 당시 해양수산부의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딸의 복합적인 감정은 "한국 현대사에 지워져서는 안 되는 사건의 담당 공무원인 아빠에게 힘내시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끊임없이 죄의식을 가지고 자책하십시오"라는, 직접 쓴 편지의 내용으로 핍진하게 드러난다. 이렇듯 영화는 부모세대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벼리면서도, 시종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아버지 죽이기를 해야 나의 주체성을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아버지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게 나의 성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딸의 영화에 대해 말하며, 아버지의 문장을 덧붙이는 것이 감독과 작품에 대한 무례는 아니리라 믿는다. 아버지는 "자신을 향한 비판을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애국 소녀', 진보 엘리트 부모에 반기를 들다」 한겨레 2024.8.22.). 실제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핑계로 세월호참사에 대한 입장을 아끼는 아버지가, 매년 4월 딸과 함께 화랑유원지를 찾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흔쾌히 영화를 볼 수 있게 허락해주신 남아름 감독에게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1) 손유경 「젠더화된 세대교체 서사를 패러디하기」, 『한국현대문학연구』 제58집, 2019, 365면. 2) 이와 관련해 김영옥은 여성들의 역사성과 주체성을 지워버리는 논의들을 비판하며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여성들의 행위가 매번 처음인 양, 즉 앞선 여성들의 모험과 시도, 사유, 업적 등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또는 그 결과를 이어받지 못한 채" 의미화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김영옥 「여성주의 관점에서 본 촛불집회와 여성의 정치적 주체성」, 『아시아여성연구』 제48권 2호, 2009, 9면). 또한 정고은은 응원봉 집회를 향한 찬사가 자신에게 "미묘한 불편함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고 고백하며, 여성들은 "대형 광장 외에도 학교, 가정, 일터 등에서 저마다의 치열한 광장을 만들어 싸워왔다"고 강조한다(정고은 「'휀걸'과 '말벌'」, 『문화과학』 2025년 봄호 119면). 3) 이에 대해 김은하는 이미상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86세대 비판은 "차별의 기본값으로 존재하는 여성들의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세대를 젠더링하는 서사"라고 말하며, 그러한 비판은 "흔한 만큼 진부하게 읽힐 수 있지만, 여성들이 민주주의의 광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김은하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문학동네』 2023년 봄호 62면. 4) 소설 속에서 초롱이 가진 언어는 "이름 튀어봐야 뭐가 좋아? 몰카 영상 뜨면 찾기 쉽기나 하지. 자식 이름으로 운동하는 것들은 싹 다 죽어야 돼"(20면)라는 SNS 게시글로 표상된다. 5) 김이 연재하는 칼럼의 제목은 '하긴 하는 남자'인데, 그의 언행과 배치되는 칼럼의 내용은 그가 얼마나 이중적인 인물인지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를테면 아내에 대해 여성혐오적인 언행을 일삼는 김이 칼럼 안에서는 그녀를 절절히 사랑하는 로맨티스트로 둔갑하는 식이다 6) 이미상·조연정 인터뷰 『소설 보다: 겨울 2020』, 문학과지성사 2020, 62~63면. 7) 이지은 「심장-농장, 어린 심장을 길들이는 것」, 『문학과사회』 2024년 가을호 311면. 8) 이에 대해 전청림은 "책임의 불평등"이라고 명명하며, 남자가 "덜고 담는 책임은 다소 시혜적이고 자의적"이라고, "삶의 균형에 위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선택적으로 책임을 맞이"한다고 설명한다. 전청림 해설 「책임은 법보다 강하다」, 성혜령 「버섯 농장」,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3, 143면. 9) 이희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72면. 10) 스레츠코 호르바트 『사랑의 급진성』, 변진경 옮김, 오월의봄 2017, 28면. 11) 전상진 『세대 게임』, 문학과지성사 2018, 148면. 12) 「"우리 사회가 '남태령' 같으면 좋겠어요"…'기특한 소녀' 아닌 '동료 시민'의 연대」, 여성신문 2024.12.30. 13) 「'남태령 대첩' 참가자 15명이 그날 밤 겪은 '희한한' 일」, 오마이뉴스 2024.12.27.

계간 창작과비평 하혁진 광장아버지이미상성혜령예소연세대젠더부녀서사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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