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인 2024년 여름호(제14호)
‘우리’의 빛나는 순간을 위해 ― 『골드러시』(한겨레출판, 2024)
서수진의 『코리안 티처』(한겨레출판사, 2020)는 흥미로운 문제작이다. 연작 성격을 가진 장편인 이 작품은 한국어학당에서 일하는 네 명의 여성 시간강사를 주인공으로 한국사회의 모순을 응집해서 보여주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비정규직의 비애와 젠더 의식, 서열화된 착취구조, 정규직에 대한 희망고문과 출산여성에 대한 차별까지. 이 작은 어학당에 축적된 한국사회의 모순은 그 자체로 생생하다.
그런데 여기엔 작가의 또 다른 시선이 숨겨져 있다. 바로 어학당의 또 다른 구성원들인 외국인 학생들, 한국 사회의 경계를 보여주는 그들의 모습이다. 어학당은 말 그대로 언어를 배우는 곳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곳에 다니는 학생들에겐 어학은 목표가 아닌 수단으로 활용된다. 합법적 체류와 취업을 위한 편법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H대 어학당의 시간강사들이 겪는 모순의 이면에는 비싼 학비를 치르면서까지 학교에 다녀야만 하는 이주자들의 고뇌가 드리워져 있다.
서수진의 신작 소설집 『골드러시』는 그와 꼭 반대로 한국을 떠나 호주에서 정착하고자 하는 한국인 이주자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 점에서 본다면 『골드러시』는 『코리안 티처』의 또 다른 확장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동어반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안의 모순을 꿰뚫어야 하기에, 작기의 시선은 이전보다 훨씬 날카롭고 깊어져 있다.
1. 타자화 된 욕망과 무너지는 ‘드림’
이미 알려진 대로 작가 서수진은 현재 호주에 거주하고 있다. 그 때문일까? 『골드러시』에 실린 6편의 작품이 호주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수많은 독자가 서수진의 작품에서 느끼는 실감의 이유가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배경인 호주 자체가 주는 현실적 친밀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호주는 전 세계에서 6번째로 큰 한인공동체를 가지고 있을 만큼 한국 이민사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이다. 한국인의 호주 이민은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미국 이민사에 비하면 비교적 최근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호주는 한국사회에서 미국에 버금갈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진 매력적인 이민지로 부각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어라는 언어 때문이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한국인 해외 어학연수에서 호주는 가장 매력적인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북미나 영국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갈 수 있다는 이점에 더해, 워킹 홀리데이로 일까지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북미보다 오픈되어 있는 호주의 이민정책은, 워킹 홀리데이를 통해 그곳에 정착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호주를 기회의 땅으로 인식되도록 만드는데 충분했다. 실제로 호주에서 일하면서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청년 세대들이 늘어가면서 호주 내의 한국인 네트워크는 훨씬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다.
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골드러시」가 그려낸 풍경도 이와 맞닿아 있다. 진우와 서인은 결혼한 지 7년 된 부부이다. 호주의 한 셰어 하우스에서 만나 한국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호주에서 정착하기까지, 그들의 노력과 시간은 결코 적지 않았다. 특히 진우의 노력은 더욱 절실하였다. 서인을 만나기 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진우는 한인식당에서 최저시급의 70퍼센트만 받으며 일했고, 야근과 휴일 근무까지 무보수로 감당해야 했다. 이것은 모두 영주권 획득까지 갈 수 있는 457비자를 얻기 위함이었다. 영주권이라는 목표가 모든 불법적 노동 착취를 감내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노동에 시달린 나머지 정작 영어공부는 뒷전이 되었고, 결국 457비자도 영주권도 모두 아내인 서인의 이름으로 받아야만 했다.
따지고 보면 불법이 아닌 것이 없었지만 호주 업체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뿐 한인 업체에서는 관례로 여겨졌다. 진우뿐만 아니라 한인 식당, 한인 슈퍼, 한인 여행사에서 일하는 한국이 모두 그런 대우를 받으며 일했다.
- 「골드러시」, 61-62쪽
그런데 진우를 착취한 이 시스템은 다름 아닌 한인공동체였다. ‘한인’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낸 모든 장소에서 한국인은 착취의 주체나 객체로서 존재했다. 관례라는 이름 아래 비상상이 정상인 것처럼 또 다른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이러한 시스템에 순응하는 순간, 삶 자체의 주객이 전도되는 것이다.
「골드러시」는 진우의 잔혹한 호주 정착 과정을 그려내지만, 무엇 때문에 그가 호주에 정착하고자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영주권이라는 당위와 목표만을 위한 처절한 삶만이 서술되고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결혼 7주년을 맞이하며 서인이 예약한 골드러시 체험 상품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그것은 진우의,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서인의 ‘드림’이 이미 추락하고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골드러시라는 말은 호주의 근대를 수식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호주는 미국과 함께 대표적인 이민국가의 하나이다. 그런데 호주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된 것은 1851년 금광이 발견되면서부터였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전 세계를 휩쓸었던 황금광 시대의 대표적인 개척지가 바로 호주였던 것이다. 수많은 이민자를 이끌었던 금광은 이미 폐광이 되었지만, 드넓은 영토로 개척된 호주는 여전히 기회의 땅으로서, 이민자들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골드러시」는 되묻고 있다. 그 기회는 과연 찬란한 행복이었을까?
주머니에 넣어둔 오팔 반지를 생각했다. 그는 서인에게 반지를 내밀며 무릎을 꿇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식장에 입장해 그녀에게 입을 맞춘 적도 없었다. 초음파사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적도, 서인의 눈을 닮은 아이를 보며 경탄한 적도 없었다. 진우와 서인은 빛나는 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빛나는 순간, 진우는 그들이 늘 그것을 기다려왔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절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붉은 햇빛이 차 안에 가득 들어찼다. 그는 온통 붉기만 한 세계를 바라보았다.
- 「골드러시」, 82-83쪽
진우와 서인이 함께 한 7년. 그들은 단 한 번도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었다. 오랜 기간 노동에 시달렸지만 언어로 인해 457비자와 영주권 모두를 서인의 이름으로 받아야 했던 진우에게도, 그러한 진우로 인해 척박한 호주에서의 삶을 견뎌내야 했던 서인에게도 지난 7년은 단 하나의 ‘빛나는 순간’을 갖지 못했던 암흑의 시간이었다. 지난날의 영화를 뒤로 한 금광에서 발견한 것은, 그들이 호주에서 단 한 순간도 오롯이 행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이처럼 주객이 전도된 삶이 갖는 모순은 또 다른 작품인 「졸업여행」에서도 드러난다. 2019년부터 2020년까지 지속된 호주 산불 시기를 배경으로 삼은 이 작품은 승수와 미연,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 잭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승수와 미연은 호주에 정착한 지 12년 된 부부이다. 물론 승수 부부의 호주 이민에는 좀 더 명확한 목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아들 잭이다. 잭을 로컬학교에 보내기 위해 그들은 악착같이 살아냈고, 매년 한국 돈으로 1억이 넘는 돈을 학비와 렌트비, 생활비로 써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아들이 무사히 명문대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졸업여행」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한국인의 밤」, 「캠벨타운 임대주택」-에서도 이민1세대의 꿈은 한결같다. 모두 자녀가 현지인과 같은 영어를 구사하고 명문대에 진학하여 호주 사회에서 성공하기를 기대한다. 놀랍게도 그것은 한국의 입시와 꼭 닮아 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에게 익숙한 모순, 바로 아메리카드림의 복사판이다.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혐오하며 떠난 이들이 한국 사회의 모순을 똑같이 반복하며 그곳에서 그들만의 성을 쌓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이뤄내고 있다고 믿었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을. 10년을 기다려 영주권을 따고, 자기 이름으로 가게를 내고, 아들이 대학수능시험까지 마치자 다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내.
- 「졸업여행」, 99쪽
그런데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믿은 그 순간, 그 모든 것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산불이 번진다는 소식을 들은 미연은 졸업여행을 떠난 잭을 염려하고, 수소문 끝에 승수는 잭이 졸업여행을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잭이 친구들과 함께 시골 마을인 밀두라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승수는, 산불에서 아들을 구해오기 위해 밤새 운전해서 그곳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는 마약에 취한 아들과 마주한다. 산불보다 더 가깝게, 그와 아내의 희망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골드러시」의 진우와 「졸업여행」의 승수에게 호주는 기회의 땅이었다. 그러나 두 작품의 마지막 장에서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지독한 허무였다. 무엇이 그들에게서 ‘반짝이는 순간’을 빼앗은 것일까? 그 답은 작가가 말하지 않은 것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두 작품에서 진우와 승수는 그들이 왜 호주에 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회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잊혀 있다. 그 본질을 잃어버린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영주권과 아들 잭의 성공이라는 타자화된 욕망뿐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묻고 있다. 영주권이 삶의 목표인 진우가 맞이할 최상의 미래가 승수의 것이라면, 그것은 정말 ‘빛나는 순간’이 될 수 있을까?
2. ‘우리’를 둘러싼 모순
이민자라면 반드시 겪어야 하는 성장통이라고 치부하기엔 그들의 삶이 갖는 모순은 너무나 처절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에 ‘빛나는 순간’을 앗아간 그 포악한 세계의 진실을 탐구하는 것 역시 소설의 필연적인 몫이다. 작가 서수진은 자신의 이 본분을 잊지 않는다. 그리하여 영원한 경계인일 수밖에 없는 이민자의 삶을 보다 찬찬히 들여다본다.
「헬로 차이나」에서 주인공 혜선은 홀로 딸을 키우는 부동산 에이전트이다. 그녀의 주 고객인 얀 역시 홀로 딸을 키우는 중국인으로, 혜선이 자리 잡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류열풍으로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은 얀의 딸이 혜선의 딸인 에이미와 친해지면서 두 사람 사이는 더욱 돈독해진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급부로 혜선에게는 두려움도 커진다. 그것은 에이미가 중국인 남자친구 케빈을 데려오면서 표면화된다. 중국인과 일하는 자신으로 인해 딸이 “중국인과 사귀고 중국인과 결혼하고 중국에 가서 중국인을 낳게”(107쪽) 되는 건 아닐지 염려하게 된 것이다.
혜선은 싫었다. 아시아인을 향한 인종차별적 농담이 중국인에게 국한된다는 사실조차 싫었다. 중국인 이름을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 칭, 챙. 총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킴, 리, 팍을 알려주고 싶었다. 어차피 인종차별을 당할 거면 한국인으로 당하고 싶었다.
- 「헬로 차이나」, 123쪽
어쩌면 그것은 오래도록 혜선 내부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인종차별적 편견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중국인 같다’는 말을 일종의 비하로 사용했었던 기억이 이미 그녀 안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보기엔 그녀는 너무나 중국인과 친밀하다. 오히려 혜선이야말로 “중국인이 절대적 갑인 분야”(123쪽)에서 일하며 그들에게 호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그녀는 이미 한국이 아닌 호주에 살고 있으며, 특히 딸 에이미의 국적은 호주이다. 딸이 중국으로 간다 한들, 그 역시 또 다른 방식의 이민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선을 두렵게 만드는 이 모순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정체성 때문이다. 혜선이 호주에서 마주친 현실은, 한국인과 중국인이 너무도 닮아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인종차별을 당할 거면 한국인으로 당하고 싶었다.”(123쪽)라는 말 속에는 그저 동양인이 아닌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다는 바람이 들어 있다. 무엇보다 백인들의 사회인 호주에서 한국인과 중국인의 경계는 너무나 쉽게 무시되고 간과된다. 만약 딸 에이미가 살아갈 곳이 비슷한 얼굴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한 중국이라면? 너무나 쉽게 동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혜선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에이미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잃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엄마 혜선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집 마당에 걸어둔 티베트 오색 기와 깃발이 자꾸 사라지는 이유가 다름 아닌 케빈의 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혜선의 거부감도 폭발하게 된다.
중국은 티베트가 독립국가라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잖아. 그러니까 친중국파에게는 티베트 깃발이 반중국이고…….
오 마이 갓. 그래서 케빈이 친중이라 뒷마당 깃발을 떼기라도 했다는 거야?
에이미는 눈을 위로 굴렸다.
정말 끔찍하다, 엄마.
그녀는 영어로 빠르게 불평을 내뱉고는 청바지를 주워 입고 점퍼를 걸쳤다. 케빈을 잡아끌고서 차고를 나섰다. 혜선은 차고에 남아서 이불이 제멋대로 뭉쳐 있는 침대에 털썩 앉아 깊은숨을 뱉었다.
- 「헬로 차이나」, 139-140쪽
공동체란 공동의 목표를 공유하며 서로의 삶에 더 끈끈하게 다가가는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은 매우 친밀하고 다정한, 서로에 대해 든든한 지지를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공동체의 결속력은 외부의 압력이 있을 때 더 단단해진다. 이민공동체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한국 내에서보다 더 분명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거기엔 또 다른 모순이 뒤따른다. 공동체의 피아(彼我) 구분이 또 다른 장벽으로 차별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혜선과 케빈은 어쩌면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혜선이 딸의 남자친구인 케빈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도, 케빈이 여자친구의 집에 걸린 티베트 깃발에 테러를 가한 이유도 그 출발점은 동일하다. 그들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야만 하는 타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회에서 살아가면서도 본질적 뿌리를 잃지 않으려는 그 안간힘이 오히려 타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캠벨타운 임대주택」의 주인공 다니엘 리는 악성 이민자들이 주로 사는 캠벨타운 임대주택의 관리자이다. 그는 스스로 호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 내재된 인물이다. 그런 다니엘 앞에 어느 날, 한국어 억양이 분명한 여자가 나타나 집에 두고 온 물건을 찾아달라고 말한다. 다니엘은 그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더 큰 거부감을 느낀다. 그녀 자체가 그의 자긍심에 상처를 낸 것이다. 그가 배우고 접해왔던 모든 환경 속에서 느꼈던 바에 따르면, 적어도 한국인은 캠벨타운 임대주택에 존재할 수도, 존재해서도 안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가 애써 여자를 외면했음에도 결국 사건은 일어난다. 주택청소를 맡은 다니엘의 부모에게 여자가 다시 찾아갔고, 그녀가 한국인임을 동정하며 돈을 건넨 다니엘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한국인들이 임대주택에서 치고받았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겠니. 이건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임대주택 이민자에게 아무 죄 없는 청소 용역이 공격받은 사건이다. 내 말 알겠니. 어떻게든 상황을 바로 잡아야 돼.
- 「캠벨타운 임대주택」, 51쪽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서 다니엘은 한국인 이민공동체를 자랑스럽게 말하던 아버지의 또 다른 이면을 발견한다. 그것은 견고하게 쌓아 올린 피아(彼我)의 장벽이었다. 다니엘의 아버지는 그녀가 한국인임을 부정함으로써,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제 비로소 한국인 공동체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것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엮인 철저히 배타적인 공동체였던 것이다. 이민자들의 이러한 태도는 또 다른 작품인 「한국인의 밤」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호주에 사는 한국인을 영주권자 이상, 이하로 나누었다. 영주권자와 시민권자만이 호주 이민의 고충을 나누며 서로 도울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클로이가 새 친구를 사귀면 친구가 한국인인지 물은 다음 영주권이 있는지 물었다.
- 「한국인의 밤」, 154쪽
「한국인의 밤」에서 클로이의 아버지는 호주에 사는 한국인을 영주권의 유무로 철저하게 구분하였다. 그 자신은 한국인임을 감추고 일본어를 하면서 일식당을 경영하지만, 한국인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배타적인 공동체로서의 우월권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모습은 그대로 「캠벨타운 임대주택」에서 다니엘의 아버지에 겹쳐진다.
하지만 이 견고한 벽은 순식간에 우스워지고 만다. 병원에 꽃을 가지고 갈 수 없음에도 꽃을 들고 병문안을 온 한인교회의 목사를 비웃는 호주인들의 뒷담화를 들은 다니엘은 자괴감을 느낀다. 현지인들이 보기엔 그들 모두 똑같이 이상한 한국인일 뿐이었다. 그들 스스로 지켜내고자 하는 자부심도, 서로를 굳건하게 지켜왔던 공동체도 결국 형체 없는 허상에 불과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장벽이 결국 그들 스스로를 고립되게 만든 것이다.
창틀 아래 동전만 한 구멍이 석고 가루로 채워져 있었다. 가루를 파헤치고 비닐봉지를 꺼냈다. 심장 이 발 빠르게 뛰었다. 봉지는 단단히 봉해져 있었다. 매듭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중략) 봉지를 꽉 움켜쥐었다. 봉지 안에는 딱딱한 것이 들어 있었다. 알약도 가루도 아니었고, 지폐도 동전도 아니었다. 봉지를 열었다. 작고 까만 조약돌 세 개. 그게 다였다. 그는 조약돌을 쥐고 눈을 감았다.
- 「캠벨타운 임대주택」, 53쪽
그러므로 이 해프닝의 끝은 너무나 처연하다. 여자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것은 작고 까만 조약돌 세 개였다. 보잘것없었지만 누군가에겐 너무나도 소중했을 그것. 서로를 외면했기 때문에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서글픔이 그곳에 있었다.
3. 그럼에도 새로울 희망
그렇다면 희망은 부재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작가 서수진은 사실 더 적극적으로 희망을 이야기한다. 「한국인의 밤」과 「외출금지」는 ‘우리’가 만드는 이 차별의 장벽이 가장 높고 거대해진 그 순간, 오히려 그 장벽 너머에서 ‘함께’를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한국인의 밤」에서 클로이는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한국에 대한 기억은 액자 속에 박제되어 있다. 어린 시절 한국학교 부채춤 공연에서 입었던 한복, 너무 커서 우스꽝스러웠던 그 옷처럼 기억 속에 묻어버리고 싶은 것. 그것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클로이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했다. 그녀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녀는 동양인이었고, 성장할수록 다른 인종의 친구를 마주하기 어려웠다. 하이스쿨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ABK(Australian Born Korean)와 어울렸고, 그녀가 다니는 의대조차 ‘중국인, 인도인, 한국인의 대학’이라고 말할 만큼 그녀의 삶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 멀어질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은 클로이에게 기꺼웠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삶을 섬처럼 만든 한계로 인식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변화는 뜻밖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클로이는 윌리엄이 찬 훈장을 보았다. 그중 하나에 ‘KOREA’라고 새겨져 있었다. 자신에게도 그런 딱지가 붙은 것 같은 때가 있었다. 선택하지 않은, 그러나 떼어낼 수 없는. 그 딱지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윌리엄은 여전히 죽은 듯 미동도 없었다. 클로이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드레스처럼 넓게 펼쳐진 치마를 헝클어뜨렸다.
한국 땅에서 호주인이 중국인과 싸우다 죽었다고 하면…….
월리엄이 중얼거렸다. 기자가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조금 더 크게 이야기해주시겠냐고 하자 클로이는 자기도 모르게 기자에게 “No”라고 말했다. 기자는 그녀를 흘긋 보고는 월리엄에게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했다. 그는 손을 내저으며 인터뷰를 그만하겠다고 했다.
- 「한국인의 밤」, 164쪽
참전군인 행진이 포함된 엔젝데이에서 한국전 참전용사였던 윌리엄과 인터뷰를 하면서, 클로이는 문득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자신의 본질을 다시 들여다본다. 선택하지 않았지만, 이미 선택되어버린 무엇. 그것에 맞추어 살았지만 한 번도 온전히 들여다본 적 없는 그 딱지. 클로이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클로이는 윌리엄을 통해 또 다른 역사를 본다. 한국 땅에서 호주인이 중국인과 싸우다 죽었던, 윌리엄이 겪어야 했던 그 역사는 클로이에게 또 다른 선택지를 주는 듯했다.
클로이는 그 답을 위해 윌리엄을 다시 만나고자 한다. 한국인의 밤 행사에서 그를 찾아다니던 중에 심장마비로 쓰러진 한 노인을 CPR로 구한다. 마치 한국전에서 죽은 한 사람의 목숨에 보답하는 것처럼, 이 우연한 사건은 클로이에게 새로운 시작점을 알린다. 그것은 한국인이지만 호주인으로서 살아갈 클로이 최의 삶이다.
이러한 희망의 순간은 「외출금지」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자유로운 삶을 꿈꾸며 동성결혼이 허용된 호주로 오게 된 레즈비언 커플 은영과 희율. 그러나 처음 이곳에서 그들이 마주한 것은 레즈비언으로서 정체성이 아니었다. 그저 젊고 작고 예쁜 동양인 여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이었다.
서로에 대한 신뢰마저 잃으면서 무너지던 그때, 팬데믹은 뜻밖에 화해의 조건이 된다. 살던 곳에서 떠날 수도 없는 ‘외출금지’ 속에서 두 사람은 비로소 온전히 둘이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함께이기에, 손을 마주 잡고 있기에 가능할 수 있는 그 찰나. 그것은 호주를 배경으로 한 『골드러시』의 다른 작품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순간이다. 오직 생존과 영주권에만 매달려야 했던 모든 등장인물들이 미처 가져보지 못한 ‘빛나는 순간’,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손을 잡고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를 걸었다.
- 「외출 금지」, 207쪽.
서수진은 말한다. 모든 ‘빛나는 순간’은 우리 곁에 있었다고. 다만 그것을 보지 않고 눈 감고 있었을 뿐. 더 어두워질 때야 비로소 반짝이는 그 찰나, 그 삶의 보석을 포착하는 작가의 시선 속에서 8개의 단편이 그려낸 세계는 비로소 하나의 희망으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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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삶에 침투해 있는 국가폭력으로서의 필화 2024년의 겨울밤, 반국가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명분으로 불법적인 계엄이 선포되었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답시고 어렵게 일군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모순적인 행태는 잡은 권력을 유지 또는 강화하기 위해 우선 폭력을 행사하고 이후에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 비합리적인 근거를 들이미는 국가폭력의 메커니즘과 완전히 일치한다. ‘반국가세력’이라는 범주는 실체 없고 추상적이기에 누구든 반국가활동에 연루되게 만들 수 있다. 이 만능 단어 앞에서 우리는 국가라기보다는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집권 세력에 반하는 이라면 누구나 ‘종북 좌파’, ‘빨갱이’로 낙인찍어 왔던 익숙한 책임 전가 방식을 환기하게 된다. 계엄령 선포 전에 발간된 책 『한국 현대 필화사 1』(소명출판, 2024)에서 일찍이 임헌영 작가가 “반공독재 체제로서의 국가형성의 골조”가 “미군정 시기부터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거쳐” 현재의 “윤석열 검찰독재”(177쪽)로 이어졌 왔음을 짚어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민주주의를 빼앗길 뻔한 국민들은 고통받아야 했다. 계엄군이 국회에 난입할 때, 군인이 자국민에게 무기를 휘두르던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상기하며 공포에 떨어야 했고, 계엄이 해제된 이후에는 내란을 일으킨 자들이 정당한 처벌을 받게 하기 위해 광장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에는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라고 적혀 있다. 이를 위반할 시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할 수 있으며 “처단”하겠다는 내용도 담겼다.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가 첫 피난지인 대전에서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만들어 적에게 협력한 사람을 3심이 아닌 “1심 단독 종심終審”(384쪽)으로 처벌하도록 하여 “모든 과오를 부역자들에게 전가해서 오히려 ‘레드 콤플렉스’를 심화시킬 수 있는”(408쪽) 기회를 잡았던 맥락과도 유사하다. 계엄이 선포됨과 동시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체포조를 가동하여 언론인, 법조인, 정치인 등을 구금하려 했던 정황을 살피면, 계엄령 선포 이전의 행위에도 해당 포고령을 소급하여 적용하려던 악의를 확인할 수 있다. 5·18 민주화 운동과 제주 4·3을 다룬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해에 한국의 대통령은 군대를 동원한 출판 검열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통탄스럽다. 한강 작가가 박근혜 정부 때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그의 책 『채식주의자』가 유해 도서로 지정되어 폐기 처리되었던 것과 아주 다르지 않다.1) 출판 검열은 일제 강점기나 독재 정권 아래에서만 행해지는 특수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우리 곁에 언제나 있어왔던 것이다. 『한국 현대 필화사 1』의 권두에서 임헌영 작가는 ‘필화(筆禍)’의 개념을 먼저 소개한다. 필화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사상이나 의사를 자유롭게 나타내는 일체의 행위에 대하여 개인이나 집단에 국가가 가하는 제재와 압력, 형벌 등에 대한 총칭”(4쪽)이다. 그는, 필화는 권력을 지닌 세력이 행사하는 명백한 폭력이므로 허위나 날조를 제재하는 벌칙과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말한다. 문학뿐 아니라 영화, 공연, 정치, 언론 등에서도 이와 같은 탄압은 일어나기 때문에 필화는 통념과는 다르게 문학에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다. 임헌영은 문학을 비롯하여 영화나 공연, 정치나 언론 전반에서 일어났던 필화사건을 두루 다루고 있다. 더불어 더욱 다양한 소통 매체들이 생겨난 현대에서의 필화는 “폭력이 아닌 평화적인 수단으로 인간이 행사하는 모든 의사소통에 대한 직간접적인 제재 일체”(5쪽)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필화의 핵심은 무력을 사용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탄압했느냐의 문제다. 서문에서 그는, 반나치적이라고 판정받은 인사들의 저작물을 태웠던 1933년의 분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유태인 미술가 미하 울만이 설치한 작품 ‘도서관’의 안내판 문구를 인용한다. “그것은 다만 서곡이었다. 책을 태운 자들은 결국에는 사람도 태울 것이다.”라는 하이네의 비극 『알만조르』에 나오는 구절이다. 실로 역사는 분서가 홀로코스트로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진행을 입증해 주었다. 임헌영은 저작물을 처형시키는 것이 작가를 간접 살인하는 일과 같다고 일갈한다. 필화란 글만 억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을 쓴 작가와 그 책을 읽거나 소지한 사람들 모두를 감시하고 처형함으로써 결국엔 그 안에 깃든 사상까지도 말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베카 크누스가 창안한 “도서 대학살Libricide이란 술어”(9쪽)는 과장이 아니다. 이와 같은 근거에 기반하여 필화 또한 국가폭력의 범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임헌영의 주장이다. 그는 국가로 인한 인명 사상 사건을 지칭하는 국가폭력에 필화를 포함할 수 있는가 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음을 이해하며, 그에 대해서도 충분하게 논증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헬렌 페인이 정의한 제노사이드의 범주 중 하나는 “국가에 의해 절대적 악의 화신으로 분류되거나 국가의 신화에 의해 적으로 분류된 집단을 집단 제거하는 이데올로기적 학살ideological genocide”(21쪽)이다. 국가폭력은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폭력뿐 아니라 “정신 활동에 가하는 일체의 금지, 제약, 학대, 억압 등”(21쪽)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필화도 여기에 해당한다. 더불어 필화사건에 휘말릴 때 작가들은 구금되거나 감시,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를 폭력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 임헌영을 따라 필화를 국가폭력의 일환으로 해석하게 되면 필화사건을 더욱 다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 현대 필화사』를 읽으며 우리 삶에 필화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폭력인지 체감하게 된다. 2. 탄압받는 사람과 삶, 말살되는 글과 영혼 임헌영은 1945년 8·15 이후부터 시대순으로 필화사건을 배치하고 탄압의 주체에 따라 부를 나누어 그 양상을 살핀다. 제1권의 경우 해방에서 이승만 집권기까지의 필화를 다루고 있으며, 아직 발간되지 않은 제2권은 사월혁명부터 박정희 정권의 몰락까지의 필화를, 제3권은 전두환 쿠데타 이후부터 윤석열 정권까지의 필화를 다룬다.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국 현대사에 나타난 방대한 양의 필화를 세밀히 다루어내는 엄청난 작업이다. 세계사에서도 손꼽힐 만큼 필화가 많았던 비극적인 한국의 역사를 상기하면, 한 사람이 한국의 필화사를 정리한다는 일 자체가 경이롭게 느껴진다. 특히 놀라운 점은 사료를 정리하여 현대사를 짚되,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정보 외에 모종의 조치 및 정책이 시행된 이면적 의미까지 예리하게 짚어낸다는 점과 필화를 당한 작가들의 생애 전반을 제시하여 필화사건에 연루된 작가가 국가권력의 희생양이자 검열의 대상일 뿐 아니라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 독창적인 예술관을 지니고서 살아온 한 명의 입체적인 사람임을 독자가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임헌영 작가의 성실성을 입증해 줌과 동시에 필화가 한 인간과 그가 속한 집단, 그리고 사회 전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면밀히 들여다보게 해준다. 임헌영 작가가 채택한 서술 방식의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깊이 살필 예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제3부 제1장에서 “여류 4인방”(405쪽)이라 불리는 여성 작가 모윤숙, 이선희, 노천명, 최정희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구태여 낱낱이 밝힐 필요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연애사는 “모윤숙과 이광수의 사랑은 너무나 유명하여 장편소설 소재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 “최정희와 시인 김동환의 러브 스토리 또한 이에 못지 않는 은메달급”(405쪽)과 같이 조롱 섞인 어조로 서술된다. 이는 여성 작가의 사생활이 여전히 가십거리로 소비된다는 인상을 남길뿐더러 필화사건에 엮여 고통받는 작가 역시 존중받아 마땅한 인간임을 피력하는 책의 취지와도 맞지 않아 보인다. 여성 작가의 삶의 일부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기술하여 동등한 작가로 대하지 않고 대상화하는 관습적인 묘사 방식을 답습하는 것으로 비칠 위험이 있어 우려된다. 해당 부분은 거의 700장에 육박하는 책에서 1장 정도의 적은 분량이기는 하다. 다시 책의 기술 방식이 지니는 장점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필화사건 안에서만 작가를 조명하면 그는 단순히 검열과 억압의 희생양으로 보이게 된다. 이렇게만 부각되었을 때 작가는 상징적인 존재로 고정되어 버릴 수 있다. 물론 국가권력의 피해자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다소 수동적인 객체로 여겨질 위험이 있다. 어떤 작가들은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글로써 국가권력에 저항하고 비유를 활용해 우회하여 발화하기도 하며 예술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검열의 위협을 무시하기도 한다는 점 역시 고찰되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그 염결성만이 강조되어 작가 또한 입체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이 비가시화되기도 한다. 임헌영은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작가의 생애 전반을 자세히 묘사하고 친일 행적이 있는 인물의 경우 그 사실까지 가감 없이 드러낸다. 단, 친일파라고 해도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필화로 다스리는 건 실패”에 가깝다며,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하는 방법이 더욱 바람직할 것이라는 논평을 덧붙인다.(142쪽) 악행을 저지른 작가라 하더라도 그 행위를 법적 절차를 거쳐 처벌하는 편이 옳으며, 악인을 단죄하는 의미로 주어지는 “바람직한 필화”(142쪽)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1949년, 문교부가 월북작가 작품을 교과서에서 전체 삭제하고 좌경 문학인의 실질적인 활동을 금지했던 일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승만 정부는 월북한 문학인을 1급, 남한에 생존했던 문학인 중 좌익으로 판단된 문학인을 2, 3급으로 분류하고 이들의 창작 활동을 제한했다. 더불어 자수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할 것을 강권했다. 가장 많은 작품이 교과서에서 삭제된 정지용 시인의 경우 사상 검열과 모략에 몹시 시달렸음을 역사적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지용은 좌익 인사로 분류되어 월북했다는 풍문에 휩싸이는 등 고초를 겪다 국민보도연맹에 자진 가맹하게 되는데, 당시 가입 심사를 밝히며 자신이 “이십삼(二十三) 년이란 세월을 교육에 바쳐 왔”던 “한 개의 시민인 동시에 양민”임에도 월북하였다는 소문에 휘말려 “동리 사람에게 빨갱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집을 옮기고 동시에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2)하기도 했다고 토로한다. 이와 같은 정지용의 슬픈 고백마저도 신문에 보도되어 국민보도연맹의 홍보 수단으로 쓰이고 만다는 점은 해방기의 사상 탄압이 극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1951년 10월 1일, 한창 전쟁 중이던 시기에 공보당국은 “월북 문학예술인 작품을 발매금지 처분”(307쪽)하고 월북작가 명단을 발표하는데, 이를 임헌영은 “반공의식을 고조시켜 아예 독재와 부정부패 등에 대한 문학적 관심을 전면 차단”(308쪽)하려는 의도로 해석한다. 이러한 판단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작가가 월북했다고 해서 그의 작품까지 향유할 수도 없게 만드는 국가의 조치는 그 사회가 얼마나 억압적인지를 보여준다. 임헌영은 문인이 북으로 갔다고 해도 “작품은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사회를 유지하는 게 정상”(308쪽)이라고 역설하며, 작가의 행보에 근거하여 작품 자체를 금지 및 폐기하는 방식의 부당성을 다시금 지적한다. 임헌영에 의해 쓰인 필화사를 살피면서, 우리는 필화가 단순히 글과 그에 대한 검열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된다. 필화사란 결국 권력 다툼과 정치 싸움 속에서 사람, 그리고 그에 깃든 영혼과 사상을 죽여 온 대학살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한국이라는 특수한 민족사를 보되, 보편적인 인간이 지닌 악(惡)과 진리를 향한 양극단의 갈망을 확인하게 된다. 3. 검열 기준의 모순 임헌영의 저서 속에서 우리는 검열의 기준이 모호하다 못해 서로 상충하기까지 하는 황당한 상황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미군정은 해방 이후 1948년까지 한국에서 책이 번역된 작가 중 공산주의 사상 전파 저자로 플라톤, 아인슈타인,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모파상, 조지 오웰 등을 꼽는데, 반소 소설로 소개하며 미공보원에서 나서서 번역하여 출판했던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을 반공 작가가 아닌 공산주의 작가로 규정하는 허술함을 보인다.(53쪽, 282쪽 참조) 1959년에 필화를 당한 임수생의 시 「지붕」의 “인간이여, 우린 / 우리의 생활을 찾아 / 빠알갛게 돋아오는 아침의 햇빛 / 고향으로 돌아가자”(567쪽에서 재인용)라는 구절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문장으로 오독된다. 임수생을 취조했던 형사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라는 시구는 평양으로 돌아가자는 선동이며 “빠알갛게 돋아오는 아침의 햇빛”은 공산주의를 예찬하는 표현이라고 일방적으로 정의한 후, 그의 시를 “빨갱이 시”라고 단정 짓는다. 이는 부모의 사상 전과를 근거로 한 비논리적이고 비약적인 추측이지만, 이후에도 임수생은 작품집이 출간될 때마다 국가 정보기관으로부터 번번이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임헌영은 부산 시인 임수생의 일화를 제시하여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필화사건이 있어왔다는 점을 유념하게 한다. 더불어 “서울 중심 문화형성 풍토 속에서 전국 각 지역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570쪽) 필화사가 훨씬 많을 것이라며, 이를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당부한다. 이때 짤막하게 소개되는, 빨치산을 비판하는 영화 『피아골』이 상영 허가 취소를 당한 이유도 자못 황당하다. 빨치산이 키스하는 장면이 이들을 인간적인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괴물됨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전해진다. 검열의 기준이 이처럼 모호할뿐더러 쉽게 뒤집히는 것은 검열의 필요성과 실효성이 집권 세력의 이익에 따라 헛되이 조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필화는 작품을 자의적으로 그릇되게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 자체를 난도질하여 바꾸어 놓기도 한다. 월간 『신천지』 1949년 4월호에 발표된 한하운의 시 「데모」는 그의 첫 시집 『한하운시초』(정음사, 1945)에 실리는데, 이때 추천사를 쓴 이병철과 표지를 그린 정현웅이 이듬해 월북한다. 이에 1953년에 재판이 간행될 때는 이병철의 해제가 빠지고 표지 디자인은 바뀌며, 수록 시 「데모」의 제목은 「행렬」로 변경되고 문제가 될 만한 구절인 “쌀을 달라! 자유를 달라!”라는 시구는 삭제된다.(420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하운은 빨치산으로 낙인찍혀 곤욕을 치르게 되자 『한하운 시전집』을 발간할 때 “아 문둥이는 죽고 싶어라”라는 시행을 추가하고 “함흥학생사건에 바치는 노래”라는 사족을 달아 미군정을 비판하는 시 「데모」를 반공 작품으로 변모시킨다.(423~424쪽) 검열과 모략이 어떻게 작품을 훼손하는지, 어떻게 문학을 왜곡하고 그에 담긴 정치성마저 뭉개버리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대상이 되는 작품뿐 아니라 작가의 아직 쓰이지 않은 작품들에까지 관여하게 되며 작가를 자기 검열의 굴레에 가둔다. 혼란스럽기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해석한 작품이 기이한 방향으로 변모해 가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문학과 예술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4. 필화(筆禍)의 역사이자 필화(筆花)의 역사 필화가 빈번하다는 것은 “질곡과 비극의 시대”임을 증명하는 것이지만, 임헌영이 적절히 지적해 주었듯 “필화가 있어야 할 시대에 직필은 없고 곡필과 망언과 허위와 날조만 난무하는 현상은 더 비참하다”.(4쪽) 필화사를 마주할 때, 우리는 터무니없이 악랄한 폭압에 경악하게 되지만, 무기력해질 필요는 없다. 역사 속에서 거듭되는 필화사건은 불의에 맞서서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보려던 국민들의 갈망과 노력이 절멸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게 본다면 희망이 없던 시대는 없었던 것이 된다. 책의 말미인 제11장에서 다루고 있는 『경향신문』 폐간 사건에 주목해 보자. 1959년 4월 30일, “신문 발행을 허가제”로 바꾸고 “언제든지 폐간조치할 수 있도록 규정”(656쪽)한 미군정법령 제88호(1946.5.29)에 의해 『경향신문』은 페간된다. 1946년 10월 창간 당시부터 친일파 청산을 강경하게 주장했으며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는 점과 칼럼 「여적(餘滴)」란의 논조 등이 문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경향신문』의 발행 허가를 취소한 것에 더해 사옥에 꽂힌 기를 내리게 하고 마크를 떼어내게 하여 상징물까지 모두 금지하는데, 임헌영은 이러한 조처는 여타의 필화사건에서도 보기 드문 비인간적인 처사라고 부연하며 “현대 한국언론사상 가장 가혹한 필화사건”(655쪽)이라고 진단한다. 주목할 점은 발행허가를 취소당한 이후의 대처다. 노기남 주교는 “경향신문의 정치비판 논조가 가톨릭 교지 위배”(669쪽)라는 지적에 맞서, 불의에 항거하는 것 역시 종교의 일임을 역설하였다.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이었던 염상섭을 비롯한 33인의 문학인들은 폐간 조치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고 한국신문 편집인협회 또한 『경향신문』 폐간 취소를 위한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신문사 측은 행정처분 취소 청구소송, 행정처분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하는데, 사복형사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재판부는 경향신문 발행허가를 취소한 행정처분의 집행을 정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에도 또다시 무기정간 명령이 내려져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지만, 사월혁명 직후 『경향신문』은 복간된다. 부당한 억압에 굴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정의를 지키고 양심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분투는 붓을 꺾지 않는 염결한 자세를 생각하게 한다. ‘필화’는 쓴 글이 문제가 되어 화를 입는다는 뜻이지만, 한자를 바꾸면 좋은 글을 지칭하는, ‘붓 끝에 피는 꽃’이라는 뜻의 ‘필화(筆花)’가 된다. 붓을 쥔 손을 짓부수는 발길질 아래에서도 어둠을 먹으로 삼지 않고서 옳다고 믿는 것을 기록하려는 아름다운 손이 있다. 그 손들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꽃을 틔우고 있다. 1) 이에 관해서는 책의 목차에서 살필 수 있듯 발간 예정인 『한국 현대 필화사 3 : 전두환 쿠데타 이후의 필화사』의 제11부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필화’에서 ‘블랙리스트 문제’로 다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2) 「詩人鄭芝溶氏도加盟」, 『東亞日報』, 1949.11.5, 2쪽.
사랑을 사랑하라 ―『사랑의 각오』(소명출판, 2024)1) 1 '사랑'이 무엇일까? 역사가 오랜 시간 직면하기 어려워했던 이 질문은 요즘과 같은 시기에 특히 낯선 것으로 다가온다. 적대와 혐오, 분열과 갈등. 우리 시대와 가장 어울리는 단어의 나열이란 오히려 이런 것에 가까울 테니 말이다. 특별히 비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가 아니라 할지라도, 소수자와 약자, 타인 및 '나'와 다른 모든 종류의 것들을 향한 오늘날의 적의와 냉소를 감지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유하는 일은 그에 비하면 훨씬 더 어렵거나 반대로 너무 쉬운 일처럼 여겨진다. 인류 보편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너무 많은 투쟁과 희생이 요구되는 동시에, 폭력은 오직 또 다른 폭력을 낳기만 하는 지옥과 같은 풍경. 이런 때 사랑은 어딘가 순진하고 순정한 무엇, 때로는 음험하고 지배적인 권력의 하수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사랑의 문제일까? 아니면 무언가가 누락된 사랑, 무언가가 함부로 전제된 사랑의 문제일까? '사랑'을 '윤리'의 문제와 결부시키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우리 지성사의 논쟁 테이블에서 '사랑'이 꾸준히 배제된 현상이 그것에 내재한 모호함을 충실히 사유하지 않은 결과라고 말한다. 사랑의 본래적 위험성이 철저히 멸균된 '안전한' 사랑에의 열망. 세계의 복잡성을 하나의 당위로 봉합하는 무책임한 약속으로서의 사랑을 향한 집착. 이처럼 사랑에서 중요함-위험함을 박탈하는 온갖 종류의 사고는 '사랑' 자체는 물론, 그것의 토대를 이루는 타자와 윤리의 문제, 또한 우리의 유한성과 필멸성의 문제를 사물들의 즉각적인 법칙에 적용하는 일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그는 사랑을 제대로 예찬할 방법을 고안하는데, 그의 사랑론은 우리가 마주치는 숱한 이질적인 만남을 우리 모두의 '사건'으로 지속시킬 힘을 알려준다. 본질과 구별되는 사랑의 논리, 사랑의 특수한 원리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사랑에 내재한 그런 힘에 있다. "사랑에는 우연의 순전한 특이성에서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 한 요소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이 존재"2)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환원된, 거의 아무것도 아닌, 기껏해야 단순한 만남 그 이상이 아닌, 이 출발점과도 같다고 할 어떤 것과 더불어서 우리는 단지 동일성만은 아닌,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는 시련을 받아들일 수조차 있으며, 이를 위해 고통을 감내해낼 수도 있게 됩니다. [..] 사랑은 진정 우연으로 인해 발생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만들어내는 지점들, 예컨대 차이의 관점을 시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유 안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3) "단지 동일성만은 아닌,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여전히 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을까? 그러니까 동일성의 무자비한 폭력과 차이의 무차별적인 관용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세계를 함께 경험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이 '사랑'을 사유하게 하는, "단지 하나의 경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그러한 "하나의 만남"(33쪽)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사랑은 통념과는 달리 정태적이고 순수한 개념이거나 행위자의 부차적 행위를 요청하지 않는 자연적 상태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사랑의 불확실하고 위태로운 지대. 이와 같은 속성이 부각되는 사랑은 잘 알려진 대로 문학의 오랜 친구이다. 대다수 서사의 원형에 비극적인 사랑의 구조가 놓여있기는 하지만, 문학과 사랑의 친밀한 관계는 단순히 내용에 국한된 무엇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태도이자 믿음으로서, 우리가 다룰 문제와 관련하여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하나의 '각오'로서 문학과 동행한다. 최근 출간된 한 권의 평론집은 우리에게 그 오랜 사실을 새삼 환기하려는 것 같다. 2 황도경의 일곱 번째 비평집 『사랑의 각오』(소명출판, 2024)는 우리 시대가 좀처럼 쉽게 발음하려 하지 않는 두 단어들, 그러니까 사랑과 비평을 나란히 내어놓는 데 망설임이 없다. 비평가는 서사와 서사 속 인물들의 행위, 말, 심지어 함께 먹고 함께 입는 모든 종류의 함께-있음을 '사랑의 선언'으로 읽고자 하는데, 그것은 그들 이야기와 장면의 세부가 바디우적 의미에서의 선언으로 비평가에게 당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의 선언은 우연이 고정되는 순간을 뜻합니다. 그 순간에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일어난 일, 이 만남, 이 만남에서 비롯된 에피소드들, 내가 상대에게 선언하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것들이라고 말입니다. 나를 결부시키는 무언가가 여기서 일어났다고 나는 그(그녀)에게 선언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너를 사랑해"입니다. (...중략..) 그것은 하나의 우연이었던 것에서 내가 다른 것을 끄집어내겠다는 걸 말하기 위함입니다. 우연으로부터 내가 지속성·끈덕짐·약속·충실성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충실성은 이 단어의 보편적인 맥락에서 떼어내, 저의 고유한 철학적 용어로 다시 사용해본 낱말입니다. 이 단어는 우연한 하나의 만남에서 그것이 필연적이었던 것만큼 견고한 구축으로 이행함을 의미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가 어떤 특별한 공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의 약속, 즉 만남이 제 우연성에서 탈피할 수 있도록 지속성을 구축하는 약속이라는 사실을 충실성이 정확히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4) 우연하고 우연적인 만남, 절대적으로 낯선 타자들과의 무분별한 마주침은 적의와 혐오로 나아가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 어떤 종류의 우연한 만남은 "여기서 일어난 일, 이 만남, 이 만남에서 비롯된 에피소드들"로부터 “다른 것을 끄집어내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나'와 '타자'의 분열과 분리의 감각을 하나의 통합된 도덕적 세계의 형상을 향해 떠미는 것은 아니다. 그 우연한 만남을 “견고한 구축”으로, 말하자면 마치 진리의 절차(procédure de vérité)처럼 우연을 지속적으로 추구해나가는 행위가 사랑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황도경에게 지금 우리 시대는 사랑을 "언감생심”으로 만드는 "절망과 분노"(3쪽)의 시대인 한편, 그럼에도 한켠에선 "사소하지 않은" 사랑의 선언들로 충만한 곳이기도 하다. 이를 증명하려는 듯 비평가는 총 세 가지 단계 혹은 과정으로서 사랑의 테마를 재구축한다. 총 3부로 이루어진 평론집의 구성과 배치는 각각 사랑에 관한 그의 믿음을 드러내는 듯하다. 1부 '사랑의 각오'에서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안보윤 『밤은 내가 가질게』, 정보라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김멜라 『제 꿈 꾸세요』, 김애란 『바깥은 여름』의 소설집과, 권여선 「사슴벌레식 문답」, 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의 단편 소설을 거쳐, 2부 '사랑의 방식'에서는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이승우 『목소리들』,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오수완 『도서관을 떠나는 책들을 위하여』의 한국 소설과 더불어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및 영화 『남아있는 나날』과 『나를 보내지마』, 영화 , 18세기 조선의 문인인 '이옥'에 대한 비평으로 이를 증명한다. 3부 '사랑의 질문'에 이르면 우리는 장진영 『취미는 사생활』, 김영하 『작별인사』, 이승우 『사랑이 한 일』,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와 같은 비교적 최근 문학 작품들은 물론이고 영화 ,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로부터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까지 그야말로 시간과 공간을 거침없이 이동하며 사랑을 마주하는 비평가의 모습을 보게 된다. '각오', '방식', 그리고 '질문'을 '사랑'과 나란히 놓는 이 평론집의 배치 방식은 우리에게 가장 먼저 속격 조사 '의'의 두드러진 역할을 상기한다. '의'라는 조사의 존재는 사랑을 다양한 속성을 소유하는 사물처럼 인식하게 하는 동시에 '사랑' 뒤에 놓인 단어들을 능동적으로 행하는 주체의 자리로 이동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각오, 사랑의 방식, 사랑의 질문.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각오'라는 최종 형식 또는 태도로 종합하려는 비평가의 욕망에 닿을 때, 우리는 사랑이 제 본위를 언제나 초과하는 형식을 내재화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사랑이 사랑을 사랑하는 법, 달리 말해 우연성을 함께 있음으로 지속시키려는 예의 그 힘과 관련될 것이다. 그것은 비평집이 구체화한 순환의 논리처럼 각오-방식-질문 그리고 다시 각오로 돌아오는 사랑의 원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나는 소설 속 '나'처럼 아버지를 잘 알지 못한다고, 아버지의 삶보다 나 자신을, 내 삶을 끌어안고 사느라 전전긍긍이었다고, 아버지가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도 내뱉고 싶었던 말들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해야만 한다.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두고 돌아올 적이면 놓지 않던 아버지의 손에 담겼을 절절한 마음과 아버지의 눈에 피었던 만단정회와 아버지가 밤낮으로 기저귀에 그렸을 만다라를 나는 알지 못한다고, 고백해야만 한다. 아버지는 삶을 끝냈건만 아버지에 대한 내 기억과 마음은 여전히 복잡하게 출렁거려서, 나는 억울하다고, 상처받았다고, 그때 왜 그랬느냐고, 소설 속 '나'를 따라 구시렁거렸다. 아버지에게 따뜻한 손도, 말도, 한번 제대로 건넨 적 없는 나는 그리움인지 허망함인지 모를 마음을 소설 속 말로 대신한다. "그러니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숱한 순간의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졌다"라고. (217쪽)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스스로의 삶과 나란히 두며 읽는 글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가 평론집의 '중간'을 표시한다는 것이 특별히 흥미롭다. 아버지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고백하면서, 그럼에도 "전직 빨치산이었던 소설 속 아버지와 전직 경찰관이었던 나의 아버지"(214쪽) 사이를 소설의 문장과 비평의 문장으로 부단히 겹쳐 놓는 비평가의 자기 글쓰기는 말 그대로 아버지라는 타자를 향한 사랑의 '방식'이자, 타자 그 자체를 향한 '질문'이며, 또 그것을 지속하겠다는 삶의 '각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러니까 정지아의 소설 속에서 마주친, 나의 아버지와 겹치거나 겹치지 않는, 현실의 존재이거나 그렇지 않은 무언가/누군가와의 만남이 어떻게 방식과 질문 그리고 각오를 아우르며 차이로서 하나의 세계를 경험하는 단계로 우리를 나아가게 할 수 있다는 걸까. 무엇보다 그것은 이 모든 '선언'이 언어와 관계된다는 사실에 있다. 앞서 바디우는 “우연으로부터 내가 지속성·끈덕짐·약속·충실성을 이끌어"내는 것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선언이라고 말한다. 철저한 우연성을 시간 속으로 고정시키는 일. 그것은 언어의 형식으로 출현하는 '선언'에서 촉발되고, 이 출현은 그것을 반복적으로, 말하자면 충실하게 지속하도록 만드는 가장 기초적인 토대가 된다. 비평가가 자신의 아버지와 소설 속 아버지를 겹쳐놓으며 반복하는 '알지 못한다'는 문장은 이 모든 마주침의 철저한 우연성과 여전한 타자성은 물론이고, 그것의 지속성, 끈덕짐, 약속과 충실성을 수행적으로 실현한다. '알지 못한다'는 말로 끈덕지게 마주하는 우리의(타자의) 세계. 이 사랑의 방식은 곧 미래를 기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필멸의 삶을 살고 있으니 늙은 몸의 비관주의는 피할 길이 없지만, 우리는 정신의 삶이라는 또 하나의 다른 삶을 살고 있기도 하다.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지는 삶이라면, 그 시간들을 기억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세계를 인식하거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고, 그리고 신이란 모든 이를 받아들인 존재,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라고. 나는 이 사랑의 신을 믿고 싶다. (192쪽) 미래를 낙관하기. 다소 무책임하고 순진하게 보이는 이 '낙관'의 태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 나갈 수 있"다면, 이 필멸의 삶에 가능한, 그리고 가능해야만 하는 유일한 태도일 수도 있다. 이백사십 년에 걸쳐, 혹은 이천사백 년에 걸쳐 이어지는 삶이 우리의 유한한 생에서도 가능한 방식이 있다면 그것은 타인의 기억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이어지는 존재의 확장 덕분일 것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미래의 기억'인 이유는 타인의 기억이란 결코 온전한 내 것일 수 없는, 제대로 도착한 적 없고 경험을 말할 수 없는 '미래'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토록 평범한 미래』(김연수, 문학동네, 2022)의 할아버지는 그런 것이 '사랑'의 정의라고 말한다. 3 그러나 이와 같은 '미래의 기억'이 다름 아닌 나와 너의 무한한 다시 쓰기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여기에는 사랑의 선언이 남기는 찜찜하고 불가해한 질문들이 있어야 한다. 질문을 남기지 않는 사랑은 타인의 기억을, 그리하여 미래를 소유했다는 거대한 착각에 불과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신실한 믿음의 수호자로서가 아니라 비로소 온전히 아버지, 아내, 아들, 동생이 된 자리에서 그들은 신, 아버지, 남편, 형에게 질문을 던진다. 여호와 하느님은 왜 그랬을까? 아버지 아브라함은 왜 그랬을까? 어떻게 자식을 죽이라고 명령하며, 어떻게 그 명령에 순종하며 자식을 죽이고자 했을까? 남편 아브라함은 어떻게 당신의 자식을 버릴 수 있었을까? 이삭은 왜 에서를 편애했을까? 온통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부조리극과도 같아 보이는 창세기 이야기들은 이 '왜'라는 질문을 통해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변모한다. (337쪽) “온통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부조리극과도 같아 보이는 창세기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우리 세계의 맨얼굴이기도 하다. 충만한 기쁨보다는 부당한 부조리만을 더 많이, 더 자주 남기는 세상을 향해 섣부른 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이 동시에, 우리가 앞서 살핀 사랑의 방식일 수 있는 이유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방법”이 “문장의 반복을 통한 단계적이고 점층적인 추론"(339쪽)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각오』가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우리 시대의 작품들은 모두 이 문장의 반복을 통해 단계적이고 점층적인 추론을, 무엇보다도 그것을 촉발할 '질문들'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면 각오-방식-질문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과정이 '사랑의 각오'라는 최종의 형식을 향해 운동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사랑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에 내재한 위험성과 그 위험성을 통과하는 데서 발생하는 고통을 인지해야 하고, 나아가 그것을 기꺼이 감내할 의지가 매순간 새롭게 선언되어야 한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무서운 고통'"(37쪽)이다. 그러나 사랑의 징표인 고통과 고통의 표식인 사랑은 인과의 논리를 거스르고 선후관계를 마구 뒤집으며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에, 고통의 원인을 추적하는 이들에게 사랑은 그 존재를 쉽사리 증명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확실성과 위험성은 그것을 감내하며 다른 생성을 추동하려는 투지, 말하자면 사랑의 방식을 이행하고 질문을 이어가려는 “시간 속으로의 참여"5)를 마주하는 이에게만 긍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 비평가가 작품이라는 우연성과의 마주침을 “시간 속으로의 참여"로 내던질 수 있는 계기는 단어와 문장, 그로 인한 삶들의 겹침에 있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비평가가 발견한 '눈'의 겹침은 사랑의 '각오'를 촉발한 한 사례로 보인다. 이때 눈은 악몽의 근원인 폭력적인 현실과 참혹한 역사를 주시하는 몸이다. (중략..) 그때 눈은 흉포한 폭력의 현장을 마주하는 몸이자 그날의 참혹한 현장을 기억하고 증언할 최후의 보루로서의 몸이기도 했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내'가 눈의 통증을 호소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끔찍한 고통의 현장과 폭력의 역사를 주시하기 위해서는 눈의 통증을 피할 길이 없다. 이 아픈 눈과 함께 '나'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24쪽) 눈은 하늘에서 내려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올라간 많은 먼지와 재가 결합한 것이고, 하얀 눈송이 안에는 수많은 결속을 통해 이루어진 텅 빈 공간들이 있고 그것 때문에 가볍다는 것은, 눈이 근본적으로 죽음과 어둠을 이겨내는 비상의 동력을 가진 새와 같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니 눈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통스러운 시련을 환기시키는 매개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둠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날아오르는 힘이기도 하다. 검은 나무들을 심어주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흰 천 같은 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그 나무들을 덮어주기를 기대했던 것도, 눈이 갖는 잠재적 비상의 힘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33쪽) 한강의 작품에서 '눈'은 "악몽의 근원인 폭력적인 현실과 참혹한 역사를 주시하는 몸"이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만든 '통증'은 같은 소설 속 세계에서 "죽음과 어둠을 이겨내는 비상의 동력을 가진 새"와 같은, “어둠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날아오르는 힘"이 되기도 한다. '눈'이라는 고정된 단어는 역사적 의미에 철저히 종속된 무엇인 동시에, 그 의미를 스스로 초과하고 다른 의미를 파생하는, 단지 유한하지만은 않은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를 그저 발견하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눈'과 '눈'의 겹침으로 발견을 다시 쓰는 비평가의 작업은 그 자체로 사랑의 선언을 "다시 선언"하는 일과 같다. 장르와 문법,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제시되는 이 사랑의 선언들은 반드시 "다시 선언"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사랑은 스스로를 지속하기 위해 "지점들, 시련들, 시도들, 새로운 사실들의 출현이 존재하며, 매 순간 '둘이 등장하는 무대'를 재연(再演)해야 하며, 새로운 선언에 필요한 용어들을 다시 찾아내야만 하"6)기 때문이다. 사랑에 각오가 필요한 이유, 그 방식을 끊임없이 새로이 고안해야 하는 이유, 무엇보다 질문을 생성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완벽하거나 신성할 만큼 총체적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재발명되는 것으로 지속되는 무엇이다. 랭보와 바디우의 연이은 이 선언에 더해 『사랑의 각오』의 비평가는 메리 올리버의 질문을 되새기며 사랑의 선언을 다시 선언한다. “질문은 오직 하나뿐,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할 것인가."(184쪽) 1) 이 글은 황도경의 비평집 『사랑의 각오』를 다룬다. 이하 문장을 인용할 경우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2)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사랑 예찬』, 도서출판 길, 2010년, 27쪽. 3)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위의 책, 같은 쪽. 4)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위의 책, 55~57쪽. 5)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위의 책, 59쪽. 6)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위의 책, 62쪽.
1. 이 소설은 어떤 패배를 예정하고 있다 Day 9200 서울 1 이것은 여행에 관한 기록이다. 하지만 인생에 여행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있나? 2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2024년 9월 6일 금요일이다. 그다음 문장을 쓰고 있는 건 10월 26일 토요일이다. 나는 몇 달째 여기까지만 쓰고 멈춰 있다. 쓰다가 말다가, 썼다가 지웠다가. 나는 이제 어떤 여행에 관해 쓰려는 참이다. - 「나이트 트레인」, 372-373쪽. 문지혁의 소설 「나이트 트레인」(『현대문학』, 2025.1.)은 ‘소설 쓰기의 소설화’라는 익숙한 서사 문법 위에서 시작된다. 소설은 허구적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지만, 소설가 자신의 삶이라는 단단한 토양 없이는 온전히 생육할 수 없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전적 삶을 되짚어 그로부터 허구의 세계를 이끌어내는 일은, 소설을 쓰는 이라면 누구나 거칠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이다. 소설 「나이트 트레인」 역시 자전적 성격이 매우 뚜렷한 작품이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98학번, 남자, 소설가. 고작 이 세 개의 이력만으로도 우리는 이 소설의 화자인 ‘나’가 소설가 문지혁 자신일 것이라고 바로 예측하고, 그대로 긍정해버린다. 그 결과 이 글은 한 남자가 오랜 기억으로부터 끄집어낸 ‘사실’과 그로부터 촉발된 ‘진실’에 대한 기록이라고 인지된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이다. 독자가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나’에게 너무나 빠르게 감정이입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소설 쓰기의 소설화’는 대단히 전략적이다. 소설을 읽는 과정은 일종의 줄다리기 같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고자 하는 독자와 그러한 독자를 자기 세계 속에 끌어들이고자 하는 소설가. 그런데 ‘소설 쓰기’라는 과정이 노출되는 순간, 그 팽팽한 긴장은 이완된다.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이,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과정 그 자체임을 받아들이는 순간, 독자는 순식간에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고작 두 문장을 쓰는 데 무려 한 달 열흘의 시간을 허비했다고 말하는 이 소설 속의 화자는, 그것을 너무나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는 한 단락을 넘기기 전에 이미 승기를 잡았다. 이 글을 쓰는 필자 역시 소설을 읽다 말고, 작가 문지혁의 이력부터 다시 확인해 봤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독자의 예정된 패배, 그것은 이 소설을 이끄는 첫 번째 전제가 된다. 소설 속의 ‘나’가 소설가 문지혁일 거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소설이 아닌 ‘나’의 솔직한 여행기(억)를 읽는다는 것에 저절로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2. 세 겹의 시간, 그의 여행은 시작되지 않았다 「나이트 트레인」에 서술된 시간은 세 겹의 층위를 가진다. 첫째는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그것을 완성하기까지 소설가인 ‘나’의 시간, 바로 DAY 9200~9286의 시간이다. 두 번째는 여행기를 표방하는 이 소설의 실질적인 서술 시간인 1999년, 21일 간의 유럽 여행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 여행 기간 동안 ‘나’가 썼던 소설 속의 시간이다. 이 세 겹의 시간은 이 소설을 액자 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액자까지, 세 개의 서사적 층위를 이루며 이어진다. 이 세 개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은 ‘나’와 관련된 세 명의 ‘그녀’이다. 첫 번째 ‘그녀’는 전 여친 O. 그녀는 ‘나’가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그녀가 ‘나’에게 은반지를 선물하며 이별을 고한 것이 여행의 실질적 출발점이니 말이다. 그녀의 여행을 되짚어가는 과정은, 결국 그녀가 자신에게 이별을 고한 이유를 찾아내고자 함이다. 두 번째 ‘그녀’는 여행에서 만난 E. 같은 대학에 다니는 미대생 E는 ‘나’가 곤란에 처할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스스로 만든 고립에서 벗어나게 한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나’가 이 여행에서 방향을 잃지 않게 만들어주는 나침반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세 번째 ‘그녀’는 암스테르담에서 프라하로 넘어가는 나이트 트레인에서 만난 전수진. 그녀는 이 소설의 제목이 가진 의미를 환기하는 동시에, ‘나’가 이 소설을 쓰게 만든 결정적인 동력이다. 또한 이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이름으로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는 그녀에게 더 주목하게 되는 효과를 야기한다. 사실 전수진은 ‘나’의 불안을 환기하는 존재였다. 그녀와 마주친 순간들은, 언제나 ‘나’가 가장 절망하는 때였기 때문이다. 수진을 처음 마주쳤던 야간 열차 안에서 ‘나’는 술 취한 독일인 프란츠에게 소매치기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두 번째 만남 역시 유쾌하지 않았다. O에게 받은 은반지를 버리고자 탔던 빈의 대관람차에서, ‘나’는 관광객들의 사진을 찍어주다 기회를 놓치고 만다. 스스로를 위한 최종적 애도마저 실패하고 내렸을 때, 운명처럼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일종의 ‘흔들다리 효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혼자만의 이별 여행에서 가장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그래서 자신의 내면에 있던 불안에 분출되는 바로 그 순간. 수진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나’가 조금만 시선을 돌렸다면, 이 여행은 이별이 아닌 전수진과의 만남을 위한 것으로 전환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연은 운명이 되지 못했다. 그들의 여정은 잠시 교차되었지만, 일치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패키지 여행객인 '나'와 자유여행객인 전수진 사이의 우연은 거기서 끝났다. 떠난 기회를 되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O와의 이별도, 수진과의 새로운 만남도 완성하지 못한 채 남은 여행을 채운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소설쓰기’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전수진을 찾으며 자신의 습작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그것은 액자 안의 또 다른 액자로서, 세 겹의 시간적 층위를 이루며 서사를 완성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깨닫는다. 이별을 고하는 O에게 이유를 묻지 못했던 것도, 여정을 미뤄 자신과 하루를 더 여행하자는 수진의 권유를 거부했던 것도, 사실은 온전히 그의 선택이었음을. 그러므로 이별은 갑작스럽게 다가온 충격이 아니라, ‘나’ 자신도 이미 예감하고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던 필연적 결과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비행기 안에서 그는 ‘소설 쓰기’라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묵혀둔 이별 여행을 시작한다. 수와 진이 햄버거 가게에서 일어날 즈음, 한강 잠수교에서는 빗길에 미끄러진 승용차 한 대가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는 차를 들이받고 강으로 뛰어들었다. 모두 네 명이 숨졌고 여섯 대의 차가 부서졌으며 부근의 교통을 세 시간이나 마비시킨 대형 사고였다. 그러나 수와 진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것은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고 있는 그들의 옛 애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가 사랑했던 그는 학교 도서관에서 잘 읽히지 않는 책을 앞에 놓아둔 채 비 오는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었고, 진이 사랑했던 그녀는 별러왔던 사랑니를 뽑고는 병원 정류장에서 우산을 든 채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 「나이트 트레인」, 443쪽. 3. 고잉 홈, 여행의 시작과 끝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1'로 번호 매겨진 서술이 시작되기 전, 서사에 집중하는 독자가 순간적으로 놓치기 쉬운 그 날짜. 바로 ‘DAY 9200 서울’ 말이다. 거기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 여행 아닌 것이 없다는 그의 말은, 그의 서사 전체가 하나의 여행기임을 보여주는 한편, 그의 여행이 이 소설을 쓰기 전까지 종료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25년 전 3주간의 여행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그의 서사가 ‘DAY 9200’에서 시작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사실 이 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여행을 현재진행형으로 업로드 하는 과정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나’는 무려 9200일 동안 지속된 여행기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의 첫 문장을 뒤집어 보자. 그는 자신의 소설이 “여행에 관한 기록”이라고 쓰면서 “인생에 여행이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있나?”라는 질문을 덧붙였다. 그 답은 명확하다. 그의 소설은 여행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여행 아닌 인생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여행기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는, 이것이 여행인 동시에 그저 여행이라는 특별한 순간이나 장소에 국한할 수 없는 인생의 모든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지점이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소설의 끝, ‘DAY 9286 서울’이다. “그때 정말로 유럽 여행 왜 왔던 거야?” 아내는 씩 웃더니 내 팔에서 손을 뺀다. 그리고 아파트 입구를 향해 먼저 걷는다. 나는 동그란 가로등 불빛을 벗어나 그림자 속으로 멀어지는 E, 아니 은혜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뒤돌아 한 번 더 수거장으로 향한다. 반지를 버리고, 이 여행을 끝내기 위해. - 「나이트 트레인」, 451쪽. 25년 전에 시작되어 9286일 만에 마침표를 찍은 그의 여행, 그 종착점은 어디인가? 분리수거를 하며 아내와 함께 하는 일상, 바로 그곳이다. 거기에서 ‘나’는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스스로의 현재를 마주한다. 그것을 환기하는 것은 더 이상 E라는 이니셜로 호명되지 않는 그의 아내 은혜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깨닫는다. 오래전 시작된 그 여행의 진짜 목적, 그것은 바로 ‘고잉 홈’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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