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포지션 2024년 봄호(제45호)
부드러운 오믈렛 안에는 ― 임유영 『오믈렛』(문학동네, 2023)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는 –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 세 번의 시도 끝에 자살에 ‘성공’했다. 누나의 죽음과 어머니의 정신이상으로 어두운 유년기를 보냈던 류노스케는 한평생 죽음과 광기에 대한 공포를 떨칠 수 없었고, 그로 인한 신경쇠약에 시달리다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라는 문장이 적힌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류노스케를 잠식했던 막연한 불안은 한 인간을 세 번이나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 모든 인간은 물리적으로 한 번 죽지만 류노스케는 심리적으로 세 번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 압도적인 감정이었던 것이다.
임유영의 첫 시집을 앞에 두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떠올린 것은 연두색의 발랄한 표지와 오믈렛이라는 부드러운 이름 뒤에 감춰진, 시집의 도처에 위치한 죽음의 이미지 때문이다. 요컨대 임유영의 시에는 ‘죽음(의 불가능)’을 경험한 화자가 다시 눈을 뜬 채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를 그리는 순간이 자주 등장한다.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임유영의 시에서 ‘죽다 살아남’은 결코 요행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시의 화자들이 구사일생을 ‘사는 데 성공’한 일이 아니라 ‘죽는 데 실패’한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인데, “오 년 전 나는 호수에 한번 뛰어들었다”라는 느닷없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시를 함께 읽어보자.
오 년 전 나는 호수에 한번 뛰어들었다. 아무 준비 없이 훌쩍 뛰어내렸다. 출렁다리가 출렁거렸고. 내가 뛰어내리거나. 말거나.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코를 꼭 쥐고, 눈을 감고, 다른 한 손끝과 양 발끝을 힘주어 모으던 짧은 순간에, 어, 이건 제대로가 아닌데, 생각했고.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는 문장은 다시는 실제로 떠올리고 싶지 않다. (…) 나를 발견했다는. 얼굴이 새카만 남자가 멀리서 나를 보고 손을 흔들며 크게 웃었다. 박수를 짝, 짝, 짝, 치더니 주먹을 쥐고 허공에 흔들다가. 기지개를 켜며 뒤돌아 떠났다. 마치 아주 대단한 일을 완료한 사람처럼. 자신이 한 일에 흡족한 듯 보였다. 그가 떠나고 내 몸에 커다란 기저귀가 채워진 걸 알아차렸다. 더듬어보니 탐폰이 없었다. 나는 아직 그것을 제거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저희도 시스템이라는 게 있다고, 무뚝뚝한 간호사는 반복할 뿐이었다.
- 「인테리어」 부분
화자의 투신은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다. 실수로 죽을 뻔했던 일이 아니라 실수로 살아나 버린 일이기 때문이다.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는 문장은 다시는 실제로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진술이 그 방증이다. 화자는 다시 눈을 뜰 수 없기를 바라며 호수에 뛰어든 것이다. “나도 모르게 코를 꼭 쥐고, 눈을 감”은 것은 죽음의 충동 못지않게 강력한 생의 관습이었겠지만, 아무튼 그 순간 화자는 명백하게 ‘죽기 위해’ 투신했다. 그러나 ‘죽지 못한’ 화자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다시금 삶의 풍경이다. 와중에 화자의 목숨을 구한 “얼굴이 새카만 남자”는 사람을 살렸다는 사실에 들떠서 “마치 아주 대단한 일을 완료한 사람처럼” 흡족해한다. 당연히 화자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다. 죽다 살아난 화자는 그저 “내 몸에 커다란 기저귀가 채워”졌다는 사실, “더듬어보니 탐폰이 없었다”는 사실을 섬뜩하게 생각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침범한 무언가. 소름 끼치는 생의 ‘시스템’으로 돌아온 화자는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렇다면 이 이상한 사건 뒤에 감춰진 내막은 무엇일까. 이쯤에서 앞서 읽은 시를 포함해 시집의 3부에 실린 10편의 시 중 8편의 시가 시인의 등단작인 「아침」 연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란히 쓰였던 시들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죽음을 바라는 화자의 욕망을 이해하는 데에 다소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방랑자」는 화자의 투신이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화자는 “새 아이보리 비누”로 세수를 하고, “튼튼한 주머니 두 개가 달린 푸른 면직 원피스”를 꺼내 입는다. “어젯밤 미리 닦아”둔 “내가 가진 가장 비싼 구두”를 신으며 말 그대로 차근차근 죽음을 준비한다. 삶의 여러 장면들을 함께했던, “비 오는 날엔 결코 신지 않았던 양가죽 구두”가 “푹 젖을 생각에 조금 울적해졌었다”고 말하는 화자는 호수에 몸을 던질 것을 각오한 화자인 것이다. 그렇게 “왼쪽보다 오른쪽이 더 빨리 닳”은 구두의 주인은, 삶보다 죽음 쪽으로 더 많이 기울어진 화자는, “최종. 끝의 끝으로 간다. 가고 말 것이다.”라는 단호한 결심과 함께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 선다.
거울 속에 푸른 옷을 입은 여자가 서 있다. 긴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기고. 나를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게 만들고자 했던, 아무 의미를 담지 않고자 했던, 저 갈색 눈동자. 밤의 겉껍질을 둥글게 오려붙인 듯한. 비밀을 간직하고자 했던. 두 개의 눈. 죽은 사람에게도 비밀이 있을까? 죽음은 비밀일까? 폭로일까?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 시체. 시체에겐 비밀이 없다. 시체는 폭로일 거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폭로. 아무래도 머리는 하나로 묶는 것이 좋겠다. 발견될 때를 대비하면 그쪽이 낫다.
- 「방랑자」 부분
죽음의 준비를 마친 화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죽음의 ‘형식’에 대해 자문자답한다. 아직 모를 뿐만 아니라 영영 모를 수밖에 없는, 절대적이고 불가역적인 자신의 죽음이 “비밀”일 것인지 “폭로”일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화자는 어째서인지 ‘내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시체가 “발견될 때를 대비”해 머리까지 “하나로 묶는” 화자는, 정작 ‘왜’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침묵을 지킨다. 그렇게 있어야 할 것이 없음으로 인해 독자는 더욱 강력하게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없기 때문에 더욱 확실하게 느껴지는 무언가. 그것이 임유영의 시가 가진 ‘이상함’의 아우라다. 임유영의 시는 숨겨진 내막이 있다는 사실만 암시할 뿐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독자의 호기심과 불안을 자극한다.
철물점 지나 치킨집 지나 아파트 담벼락 따라 은행 지나 개소줏집 분식점 과일가게 옻닭집 칼국숫집 지나 편의점 약국 지나 전철역 사거리에 파란불이 켜지면…… 요샌 바닥만 봐도 파란불인지 빨간불인지 알 수 있다 LED 라이트가 설치된 덕분이다 바닥만 봐도 필요한 게 다 보여 어디 가는 어린애와 어디 갔다 오는 개하고만 눈을 맞추며 바쁜 사람처럼 걸었지만 혹시 누가 그럴지도 모르지 저 여자 어딘가 이상해 직업도 남편도 애도 부모도 없는 거 같고 나이는 많고 한낮에만 거리를 배회한다고 쑥덕거리면 나 너무 무서워 그러나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누구도 나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 「미꾸라지와 뱀장어와 지렁이와」 부분
그런데 불분명한 전후 맥락 속에서도 반복해서 강조되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죽음을 바라는 욕망의 주체가 ‘여자’라는 사실이다. 인용한 시는 앞서 언급했던 죽음의 형식에 관한 질문, 즉 “죽음은 비밀일까? 폭로일까?”라는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삶의 풍경을 직시하지 못한 채 “바닥만” 보고 걷는 화자는 주변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불특정 다수의 쑥덕거림을 “무서워”한다. 그리고 동시에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누구도 나를 기억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철저한 고립 역시 불안해한다. 요컨대 이 시의 화자는 모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두려움과, 누구도 자신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외로움을 동시에 느끼는 여자인 것이다.
값싼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다. 죽임당한 여자 대신 죽음을 선택한 여자로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선물가게」의 화자까지 더해지면, 죽음의 욕망과 그 욕망의 주체가 여자라는 사실은 확실히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지했듯 그녀들은 “나에 관해서라면 아무것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는 바람과 “그러나 곧 누군가는 알아차려주리라.”(「포노토그래프」)는 기대를 모두 갖고 있는 모순된 욕망의 주체이다. 그녀들은 자신의 마지막 순간이 자신과 같은 여자에게 발견되는 장면을 곧 잘 상상한다. 그것은 소망이기도 하고(“내 위장을 들여다볼 검시관은 술을 아주 많이 마시는 여자였으면 좋겠다”(「오믈렛」)), 걱정이기도 하지만(“그애가 여자애라면 어떡하지.”(「포노토그래프」)), 아무튼 죽기로 마음먹은 여자들이 죽음이라는 ‘비밀/폭로’에 감춰진 내막을 제대로 알아봐 줄 최후의 목격자로서 여자들을 떠올린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사월의 한낮이었다. 벚꽃이 절정이라기에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가벼운 옷을 입고 나들이를 나가려니 기분이 좋았다. 걷다가 지름길을 두고 일부러 둘러 가기로 했다. 여학교를 지나 공원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감색 세일러복을 입고 달려가는 여자아이를 보았다. 아직 수업이 끝나지 않았을 시각인데 아이는 멀리 공원 쪽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나중에 보니 역시 교복을 입은 남자애가 자전거를 대고 기다리다가 여자아이를 뒤에 태우고 가는 것이었다. 그러다 사거리에서 그만 사고가 났다고 한다. 사고가 나서 여자아이는 죽어버렸다. 나는 그날 꽃은 못보고 돌아가던 길에 교복집 하는 늙은 남자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아이의 뒷모습에서 죽을 징조를 벌써 보았다고 주장했다. 첫째로 그날따라 여자애의 그림자가 무척 옅어서 보이다가 안 보이다가 했고, 둘째, 하얀 토끼인지 개인지 작고 사람은 아닌 것이 날래고도 사납게 그 뒤를 쫓고 있었고, 셋째로 사람이 달리는데도 한 갈래로 땋아내린 머리카락만은 전혀 흔들리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영감의 말을 곧이 믿지는 않았다. 무릇 꿈이란 뇌에서 배출된 찌꺼기에 불과한데, 그런 꿈을 해몽한다는 자들의 말 또한 사람을 현혹하는 얕은 수일 뿐이다. 그 증거로 나는 사월의 화창한 대낮에 꽤 오래 걸었음에도 전혀 땀을 흘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나는 붓을 들어 이 이야기를 종이에 옮겨 적었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벽에 붙여두었다. 후에 그것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 있어 적당한 값을 받고 팔았다.
- 「꿈 이야기」 전문
하지만 앞선 해석도 시의 공백을 충분히 채우지는 못한다. 요컨대 임유영의 시는 텍스트의 ‘바깥’이 있다는 인상을 남긴다. 중요한 페이지를 의도적으로 비워둠으로써 “뭔가 잊은 듯한 느낌”, “무언가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무언가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는 생각」)는 찝찝함을 남기는 것이다. 인용한 시는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단락은 “사월의 한낮” 꽃구경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선 화자가 목격한 장면들을 객관적으로 써 내려간다. 두 학생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장면은 마치 CCTV를 재생한 것처럼 건조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두 번째 단락에 이르러 시는 이야기가 된다. 사거리에서 일어난 사고로 여학생이 죽었는데, “교복집 하는 늙은 남자”가 “아이의 뒷모습에서 죽을 징조를 벌써 보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늙은 남자가 제시하는 세 가지 근거는 흡사 꿈속의 한 장면처럼 몽환적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세 번째 단락은 그 이야기를 “종이에 옮겨 적었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벽에 붙여두었다”고 말하는, “후에 그것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 있어 적당한 값을 받고 팔았다”고 말하는 화자를 기입함으로써 한 겹의 층위를 더 만든다. 다시 말해 ‘꿈 이야기’라는 제목의 시는 꿈과 현실의 경계뿐만 아니라 텍스트 안팎의 경계까지 흐려놓으며 이야기를 시 바깥으로 열어둔다. 덕분에 독자는 “중요한 일이 모두 시의 바깥에서 일어”(「기계장치강아지」)난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다시금 환기하게 된다.
한데 섞인 흰자와 노른자의 중립적인 맛. 사각사각 씹히며 풋내를 살짝 풍기는 피망의 향기. 아주 잘게 썰린 햄의 질감과…… 버터. 강렬한 버터의 향기. 불에 충분히 달궈진 버터와 부드러운 달걀의 신비로운 조화. 신적인 것. 강렬한 것. 달걀과 불과 기름. 약간의 소금과 후추. 그러나 어떤 비법에는 아주 적은 양의 설탕이 포함되기도 하는데, 마치 독약의 이로운 활용법처럼. 설탕이 독이라는 데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순수한 설탕의 혐오자는 의사가 아니라 알코올중독자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단맛을 싫어하다못해 그것에 반대하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달콤한 것은 오직 술이면 족하다는 듯이. 그러나 그들은 모르지. 아침의 오믈렛에, 짭짤한 비스킷에, 심지어 튀김옷 반죽에도 비밀스럽게 존재하는 설탕.
- 「오믈렛」 부분
임유영의 『오믈렛』에는 인간의 삶과 죽음이, 텍스트의 안과 밖이, 계란의 “흰자와 노른자”처럼 오묘하게 섞여 있다. 부지불식간에 “비밀스럽게 존재하는 설탕”처럼, 임유영의 레시피에는 죽음이라는 재료가 “독약”처럼 포함되어 있다. 임유영의 시를 통해 ‘죽음(의 불가능)’을 경험한 독자들은 시의 바깥에서 새롭게 눈을 뜬다. 독버섯을 먹고 “꼬박 사흘이나 의식 없이 내리 자고 일어났는데 몸은 무척 개운한 느낌이 든 경험”(「담자균문」)을 한 것처럼, “아주 조금 뒤바뀐 세상에서”(「도둑들」) 다시금 눈을 뜬다. 죽음이라는 “커다란 기생충”이 “눈알 속에”(「인테리어」) 들어간 이들은 낯설어진 세상을 생경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그렇게 두 번째 삶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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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을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골라 제외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형언할 수 없어서 침묵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미 모두가 알고 있어 굳이 말해질 필요가 없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강화길 소설의 여성 인물들이 구태여 토로하지 않는 억울감과 소외감 같은 것. 이 사회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으면서 부러 말할 필요도 없는, 각기 다른 여자들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거푸집으로 찍어낸 듯한 유사한 정서들. 그러므로 강화길의 소설 속 말해지지 않는 빈틈은 경험적 현실을 나눌 수 있도록 의도된 여백이 된다. 이는 매끈한 반사면으로 남아 독자의 체험을 되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우리는 그 여백에 성차별적인 세계에서 타의로 경험한 불쾌감을 채워 소설을 완성한다. 강화길이 꾸준히 '안진'이라는 지방의 소도시를 여성이 경험하는 특수한 현실의 집합체로 구현하려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외형적으로 매우 닮아 자매로 오해를 받곤 했던 '나'(진이)와 막내 이모는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토대로 유대감을 나누던 사이다. '나'는 이모가 친언니였으면 하고 바랄 만큼 그녀를 각별히 생각해 수시로 책과 엘피판 등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모가 암으로 죽자 그의 언니인 큰이모는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막내 이모가 아끼던 티셔츠를 남자 조카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한다. 이모의 여자 조카가 '나' 하나뿐이라는 점에서 이는 큰이모가 여자라는 이유로 '나'만 배제했다는 의미가 된다. '나'의 남동생은 이모의 발인 시간도 제대로 못 맞췄지만 큰이모는 그의 수고를 치하한다. 이렇듯 가장의 역할을 대신하는 여성이 가부장제를 대물림하는 광경을 우리는 강화길의 소설에서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다. 경제적 부담을 짊어지고서 그러지 않은 여자들을 "멍청한 년"이라고 구박하는 여자(큰이모)와, 그런 여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엄격한 미의 기준을 악용하여 "못생긴 게"라고 되받아치는 여자('나')가 소설에 남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쉬이 불행해지고 마는 이들의 처지가 애석하게도 친숙하게 느껴진다. 강화길은 이전 작품에서 다루어온 문제의식을 이어가되 유품의 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을 구성하여 '혈연과 가부장제'라는 범주로는 다 길어낼 수 없는 남은 마음들에 대해 숙고한다. 남자 조카들에 비해 이모와 훨씬 가까웠던 '나'는 이모가 남긴 유품을 처리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음을 거리낌 없이 주장하지만, 이모를 언니라고 부르면서 '나'와 이모가 소원해졌다는 사실과 '나'가 알지 못하는 이모의 마음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낯선 여자 앞에서는 혼란스러워진다. '나'는 자신이 이모와 법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혈연관계임을 들먹이면서 여자를 내모는데, 이때 경제적으로 지원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모의 대소사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던 큰이모의 기분을 경험하게 된다. 부재하는 대상과 맺었던 관계의 깊이를 증명하고 그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은 사람 사이의 감정적 교류를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를 사유하게 한다. '나'는 "내가 사귄 남자들"을 이모가 다 알았던 것이 그만큼 서로 가까운 사이여서가 아니라 '나'가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연애사를 들려주었기 때문임을 아프게 확인한다. 자기 편의를 위해 이모가 어렵게 모은 돈을 빼앗아버렸다는 사실도. 그리하여 이모를 빼닮았다는 점이 이모의 횡격막 아래 자리한 "그것의 거푸집마냥 똑같은 형태의 길쭉한 암 덩어리"가 그랬듯, 부정적인 의미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돈과 피로 얽힌 관계라거나, 서로 돌봄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상히 대해주어야 하는 사이였다는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소한 추억 역시 분명히 실재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실한 마음과 말로도 가려지지 않는 거짓의 마음, '안진'이 모두 안진에 있다.
1. 머리 셋 달린 여우 기이한 짧은 이야기를 기담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여러 설화와 전래동화의 모티프를 차용하거나 기이한 요소를 적극 활용하는 정우신의 이번 신작시들은 언뜻 기담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1) 제주설화 삼두구미 본풀이의 모티프를 활용한 「삼두구미(三頭九尾)」는 이러한 신작시들의 입구가 되어주는 시처럼 보인다. ‘삼두구미’는 머리 셋에 꼬리가 아홉 개 달렸으며 시신을 파먹는 늙은 땅귀신 요괴를 가리킨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삼두구미는 가난한 나무꾼의 세 딸을 돈을 주고 데려와 사람 다리를 주면서 먹도록 하는데, 먹지 않고 거짓말을 한 첫째와 둘째는 그 사실을 들켜서 죽게 되지만, 막내는 다리를 불에 태운 뒤 그 가루를 보따리로 싸서 자신의 배에 묶어놔 위기를 모면한다. 이후 삼두구미의 아내가 된 막내는 달걀과 무쇠, 버드나무로 괴물을 퇴치한 후 그 시신을 가루로 만들어 바람에 날려 보낸다.2) 무엇보다 「삼두구미」에서 주목되는 건 이러한 삼인 분할의 모티프가 시의 형식과도 긴밀히 이어진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삼두구미의 머리가 셋으로 나뉘어 있듯, 발화자 ‘나’ 역시도 셋으로 분할되어 존재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삼두구미가 삼킨 두 딸이 각각 머리 하나씩을 차지한 형태로 본래의 삼두구미와 합일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설화 속에서는 첫째와 둘째가 백골만 남았을지언정, 그 혼이 삼두구미의 육신과 합쳐진 상태로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처럼 온전히 분리되지도 온전히 합일되지도 않은 채 존재 양태의 변모를 거듭하는 삼두구미의 형상은 발화 측면에도 반영되어 있다. 光. 나는 나를 찾다가 튀어나왔습니다. 滅. 나를 구하다가 죽었습니다. 歸. 나는 편리합니다. (…) 歸. 네모 방을 빙글빙글 돕니다. 光. 나만 네모 방을 돌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滅. 동그라미가 돌아갑니다. (…) 光. 나는 滅과 歸로 쏙 들어갔습니다. 滅. 나는 나를 말려놓고 공중제비를 돕니다. 歸. 입속의 꼬리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 삼두구미(三頭九尾) 중에서 각 행 앞에 붙은 한자들은 光(광), 滅(멸), 歸(귀)로서, 발화의 주인인 삼두구미의 세 머리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의 산문에 따르면 이 한자들은 각각 ‘발광’, ‘자살’, ‘귀의’를 의미하며, “비극의 삼각형”을 형성하는 꼭짓점이라 한다.3) 그렇다면 이 비극의 삼각형은 미쳐서 죽었다가 원점으로 돌아가 미쳐서 죽기를 다시 반복하는 일련의 순환을 표상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관련해 이들이 “네모 방을 빙글빙글” 도는 모습은 세 사람이 방의 각 꼭짓점에서 출발해 일정한 방향으로 도는 귀신 술래잡기를 연상케 하는데, 셋만으로는 게임을 끝낼 수 없다는 점도 이러한 무한 순환의 굴레를 암시한다. 한편 이처럼 각 행을 서로 다른 머리들의 교차하는 발화로 읽을 때, “빚이 무거워 나는 죽 늘어졌”다는 목소리에서 ‘빚’은 팔려가는 조건으로 받은 돈을 지시하므로, ‘滅’에 해당하는 목소리의 주인이 두 딸 중 하나일 것임을 알게 한다. 맨 마지막 연은 둔갑의 단계를 보여주는데 ‘光’이 ‘滅’ 속에 숨고 ‘滅’은 ‘歸’ 안에 숨게 되므로, “입속의 꼬리가 움직이”는 건 세 머리가 마트료시카처럼 합쳐진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이들은 아침이 되면 하나로 존재하다가 밤이 되면 합일체 속에서 차례로 튀어나와 셋으로 분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첫 연에서 “나는 나를 찾다가 튀어나왔”다는 그 장소는 바로 삼두구미 자신의 몸이라 할 수 있다. 또 “오늘도 아침이 왔”다는 언급에서 암시되듯, 이러한 루틴은 정확하게 설정된 기계처럼 끝을 모르고 계속 반복될 것이 예정되어 있다. 물론 복제, 클론, 리플리컨트 모티프와 순환의 질서는 정우신의 시 세계에서 빈번히 다뤄져왔다. 특별히 양순모는 정우신의 시에서 활용되는 반복 장치가 “고통과 폭력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반복이 아니라, 거듭 그것들로 회귀하기 위한 반복”4)임을 포착한 바 있다. 요컨대 정우신의 화자들은 불행에 중독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정우신의 시에서 미분 작용을 수행하는 존재들에 주목할 것을 청하는데, 정우신에게 “미분은 ‘입체’에서 다시금 ‘육체’로 재탄생하는 과정의 ‘조건’이자 동시에 그 ‘방법론’”5)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를 미루어볼 때, 삼두구미로 대표되는 육체 분할의 반복 양상은 정우신의 시 세계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중적으로 존재하는 ‘나’에 대한 상상, 삼각형의 꼭짓점을 형성하고서 자동 반복되는 순환의 되풀이를 설정하는 구도는 다른 신작시에서도 적지 않게 발견되는 것 같다. 그런데 동일한 개체의 복제, 일정한 순환 피드백의 반복, 설정된 입력값에 기반해 출력물을 산출하는 성질은 무엇보다도 기계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세계를 기계기담이라 명명하고서 다른 시들을 더 따라가보자. 2. she knows it's too late as we're walking on by6) 「샐리」에서도 ‘샐리’의 리플리컨트들이라 할 수 있는 샐리2, 3, 4가 등장한다. 심지어 “지하로 내려”가는 동안 “층층이 샐리가 서 있다”는 언급을 통해 더 많은 복제 샐리들, n명의 샐리들이 같은 건물에 존재하고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클론 모티프는 “손톱을 모은다”는 언급과 만나며 자연히 쥐둔갑 설화를 떠올리게 한다. 쥐가 손톱을 먹으면 손톱의 주인과 동일한 모습으로 둔갑한다는 해당 전래동화를 따라, 이 복제 샐리들은 샐리가 자신의 손톱을 통해 증식시킨 인물들이라 추정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의 세부 정황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약을 타러 지하로 내려간다”는 언급을 통해 극도로 통제된 병동이 배경인 건 아닐까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샐리는 매일 볼펜을 날카롭게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데, 샐리2가 그 볼펜을 빌려 교정기를 떼어내고는 떼어낸 교정기를 뒤꿈치에 찔러넣는다. 뒤꿈치를 찌르는 일만이 목적이었다면 날카로워진 볼펜으로 해도 되었겠지만, 반드시 뜯어낸 교정기여야만 했다는 점에서 교정기를 뒤꿈치에 밀어 넣는 행위가 중요한 목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기행을 하는 것일까. 마지막 연에서 샐리가 손톱을 “아물어가는 곳마다/힘껏 밀어 넣는” 유사한 이미지를 통해 유추해보건대, 이 손톱 둔갑에는 기한이 있으며 기한이 다하면 살이 아물어버림과 동시에 둔갑 상태가 끝나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샐리는 리플리컨트들의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손톱을 충전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럴 경우 샐리2가 교정기를 뒤꿈치에 찔러넣는 이유는 아물지 않는 상태를 지속하려는 다른 방편으로도, 혹은 뒤꿈치가 아물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하여 손톱을 더 보충하지 않도록 유도하려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해석을 따른다면 이 리플리컨트는 왜 생을 지속하고 싶어하지 않는 걸까. 촘촘한 감시망과 통제를 견디며 갇혀 사는 삶, “I’m free to be whatever I/Whatever I choose”가 불가능한 일상에 일찍이 진절머리가 난 걸까. 그런가 하면 비상구에서 다른 샐리들을 기다리는 샐리의 모습은 탈옥을 계획하는 수감자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어떤 방과 “다음 방”에서 “15분과 30분”간 이루어지는 일정한 루틴을 매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샐리는 그보다 더한 “한 시간과 세 시간도 버틸 수 있다”고 말한다. 인내심 강한 샐리는 “샐리3과 샐리4가 계단에서 내려오기를” 언제까지나 기다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말 그대로, “Sally can wait”. 그러나 기다릴 수 있는 것과 너무 늦어버린 것은 다르다. 시 전반에 드리운 디스토피아적 정조에 기대볼 때 샐리에게는 그러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고, 어쩌면 샐리도 그걸 안다. 3. 버들치와 모자 한편 이러한 복제 모티프는 환유의 활용과 더불어 더욱 생동감 있는 시적 효과를 얻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버들치」를 들 수 있다. 이 시에서 ‘버들치’도 크게 세 갈래로 구분할 수 있는데, ①실제 어류로서 버들치를 지시하거나 ②사람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비유하거나 ③그러한 마른 외양과 피로한 행색으로 인해 버들치에 빗대어지는 사람들을 환유적으로 지시한다. 손가락이라는 원관념의 활용도 두드러지는 가운데, 환유적 의미의 버들치와 보조관념으로서의 버들치가 다채롭게 교차되며 삼각형의 각 변을 오가는 것이다. 가령 “버들치는 렌즈를 닦는다”는 문장에서 버들치는 손가락이나 사람으로 읽을 수 있으며, “버들치는 검수원을 만나기 전 버들치를 먹는다”고 할 때 앞의 버들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뒤의 버들치는 조리된 생선을 의미한다. 특별히 사람으로서의 버들치는 “버들치와 대화한다”는 언급에서 암시되듯, 어느 개인의 독자적인 속성과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고단한 일상을 겪는 여느 서민들을 일괄적으로 아우르는 것처럼 보인다. “십분마다 뛰쳐나가고 두 시간씩 이동”했다가 “종점에서 졸고” “물비린내 가득한 방으로 돌아”오는 피로한 출퇴근의 루틴은 이를 대표한다. 방에서 방으로 복귀하는 이러한 고단한 루틴을 ‘n번째 버들치’가 차례로 이어받으며 “이십 년”에 걸쳐 수행하는 모습은 각 인간의 고유한 개체성이 소거되고 루틴을 주인 삼아 루틴의 종속물로 전락하는, 마치 기계의 소모품과도 같은 현대 노동자들의 초상을 반영한다. 여기에는 하급 노동자 일반이 언제든 대체 가능한 것으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서로는 서로의 리플리컨트나 다름없다는 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무형의 루틴이 지키고 영속해야 할 최우선순위로 자리하고 있는 가운데, 임시직 버들치로 소모되다 퇴장하는 이들은 “자신이 몇 번째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다. 그렇기에 버들치가 “상점 유리나 거울에 난 손자국을 보면 견디기 힘들”어지는 이유는 다른 버들치들의 존재를 상기하고 그들의 고통을 제 것처럼 느껴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십 년이 한여름의 댐처럼 단번에 쏟아질 때 버들치는 자신이 몇 번째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한강대교 펜스를 붙잡는 동안 손가락 사이로 버들치가 흘러나왔다 ― 「버들치」 중에서 이와 더불어 “한강대교 펜스를 붙잡는” 모습은 익숙한 재현 문법을 따라 죽음에 대한 지향을 연상하게 하는데, “손가락 사이로 버들치가 흘러나”오는 환상적인 결말은 그간 주어 자리에 놓여 있던 버들치 대신, 사람의 형태를 그려보게 한다. 내내 버들치가 손가락을 가진 것 같은 이미지를 그리도록 하다가 마지막 행에서는 사람의 손가락에서 버들치가 흘러나오도록 하여 전도된 이미지를 확보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략된 주어의 자리에는 자연히 사람이 놓이게 되면서 익명의 군중이나 노동 부품으로서의 ‘n번째 버들치’가 아니라 한 개인을 상상하도록 이끈다. 버들치가 된 인간을 버들치로만 남겨두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버들치」에서처럼 환유의 대상으로 전도가 일어나는 양상은 「진」에서도 발견된다. 이 시는 ‘진’이 커다란 “모자를 쓰고” “어떤 얼굴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의 루틴은 휴일마다 “오렌지 스웨터를 입고/에코백을 들고 외출”하는 것이다. 오렌지빛과 강렬한 태양빛의 색채적 유사성으로, 빛이 내리쬐는 모습은 “햇살의 소매가 흘러내”리는 것에 비유된다. 특별히 주목되는 건 모자를 쓰고 있던 진이 결말부에서는 “누군가의 머리 위에 얹”히며 모자가 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진이 쓰고 있던 모자는 진이 된다. 「삼두구미」에서 자신이 접촉한 사물의 일부가 되는 상상력이 나타났다면 여기서는 더 나아가 접촉한 사물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1연에서 “얼굴을 기다”리는 이유는 자기가 얹힐 머리를 찾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가방 안에 수북한 “주인 없는/머리카락” 다발 또한 모자와 함께 달라붙을 머리카락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실종된 빛 앞서 이번 신작시의 주된 특징 중 하나로 삼각형의 꼭짓점을 주축으로 순환의 되풀이가 자동 반복되는 양상을 언급했는데, 「파동 일기」에서도 “나의 꼭짓점으로/모이는 어둠”이 거론된다. 구체적으로 여기서 ‘비극의 삼각형’은 빛과 어둠, 화자를 각각 세 꼭짓점에 두고서 이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그간 정우신의 시에서 빛은 “어둠의 긴 머리카락을 뒤집어쓰고 개미를 주워 먹는”7) 것과 같이 포식을 즐기는 유생물, 특별히 “뱀처럼/별처럼 (…) 움직임을 따라 하며 우리를 조롱하”8)는 교활한 모습으로 자주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이번 신작시에서는 가시성을 중심으로 하여 빛과 어둠의 고유한 속성에 더욱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야가 점점 줄어든다 태양의 샌드백 모래사장에 빛을 줄줄 흘리고 한발 앞에 서 있던 빛이 안면에서 일렁인다 (…) 헛디디고 데이고 나의 꼭짓점으로 모이는 어둠 (…) 가스불 앞에 서면 이마 앞의 어둠이 부르르 떤다 ― 「파동 일기」 중에서 하강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가운데, 「파동 일기」는 시력이 점차 악화되고 있는 화자에 의해 발화된다.‘일기’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이 시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日부터 土까지 이어지는 요일에 따른 분절이다. 각 요일에 해당하는 내용을 그날의 일기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독특하게도 목요일에 해당하는 일기에는 木 대신 目이 ‘목’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데, 이는 시각과 관련된 빛의 속성이 이 시에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월요일에 그는 마치 “샌드백”이 찢어져 모래가 쏟아지는 것과 같이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을 느낀다. 그는 “한발 앞에” 존재하는 빛을 그 온기와 일렁임으로 감각하지만 빛을 선명하게 바라볼 수는 없다. 또 그는 “벽에 머리를 박”기도 하고, 불을 켜려다 “반찬통”을 넘어뜨리기도 한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에게 “모든 활자”는 “재가 되어”간다. “헛디디고/데이”는 일은 그의 일상이 되며, 눈과 눈 사이에 형성되어야 할 한 소실점인 “꼭짓점”에는 빛의 상이 형성되는 대신 “어둠”이 모인다. 토요일에 그는 “가스불”바로 앞에서도 가스불의 외양을 보지 못하고 가스불에 무언가가 끓는 것을 눈앞의 어둠이 떨리는 것을 통해 감지한다. 일요일에 “안면에서 일렁”이던 것이 빛이었다면 이제는 어둠이 그 자리에서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실명에 가까워지는 일상은 일기라는 제목과 요일 표기에서 암시되듯이 되풀이되며 더욱 심화될 것임을 추정해볼 수 있다. 1) 근작시인 「전자 늑대」도 빨간 모자와 늑대 동화를 차용하고 있다. 2) 이러한 삼두구미 모티프는 정우신의 이전 시에서도 발견되는 것 같다. 복제인간 이미지를 주로 활용하는 그에게 자가복제적 키메라와 같은 형상의 삼두구미는 매력적인 소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들에게 남은 다리를 나눠 줬어요. 어떤 끝이 뒤돌아 나를 탄생시켜요. 삭제하고 싶니. 너의 몸. 너의 의식. 이리로 오렴. 바깥으로 오렴. 여기에는 너의 불행들이 있다. 태워 주마.” 정우신, 「주술」, 『비금속 소년』, 파란, 2018. 3) 정우신, 「그것과 그것들」. 4) 양순모 해설, 「달리기, 비극적」 『미분과 달리기』, 파란, 2024, 128쪽. 5) 양순모, 같은 글, 132쪽. 6) Oasis, 중에서 7) 정우신, 「사제의 뜰」, 『비금속 소년』. 8) 정우신, 「네온사인」, 『홍콩 정원』, 현대문학, 2021.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가 자주 언급했던 사례 하나. 어느 날 야외에서 우연히 두 사람이 만났다. 한 사람은 반가워서 시간이 있으면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상대방도 동의했다. 그 순간 갑자기 집의 지붕이 떨어져서 상대방은 죽었다. 그는 자기가 곧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저녁약속에 응한 셈이었다. 그는 이렇게 답해야했다. “나는 자네와 저녁식사를 하고 싶네. 하지만 나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군. 만약 내가 저녁까지 살아있다면 자네와 함께 식사를 하겠네.” 물론 이런 식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망각해야만 평안한 삶을 유지 가능하다. 갑작스러운 죽음의 확률이 너무 낮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은 돌연사의 확률보다 높지 않다고 하는데, 인생역전을 꿈꾸며 복권을 구매하는 사람은 꽤 있지만 자신의 삶이 지금 당장이라도 끝날 수 있다는 인식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가 죽음을 망각하는 까닭은, 어쩌면 그런 망각을 통해서만 의미 있는 인생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는 직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각각 자신의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존재이다. 가령 회사원들이 힘든 노동시간을 견뎌내는 것은, 월급을 받으면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구매하고 미래를 위한 저축을 할 수도 있으리라는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월급을 받기도 전에 갑자기 교통사고라든가 무차별 칼부림 같은 사건이 생겨서 죽을 수 있다면 굳이 계획을 세워서 미래를 설계하고 사회생활을 이어나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허나 인간이 누구나 돌연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다면 내가 살아남을 경우 생활을 이어갈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이 죽음의 가능성을 망각하게 된 것은 어쩌면 사회생활을위한 자위이자 자연스러운 ‘진화’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이 대면하기 싫은 끔찍한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종종 불연 듯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살다보면 타인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죽음은 삶의 반대말이기도 하니 삶을 생각하다 보면 죽음에 대한 사유가 시작되기도 한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을 오래하면 인생이 허무해질 수 있으니 보통의 사람들은 다시금 죽음을 망각하려는 무의식을 갖는다. 문학은 우리가 마땅히 생각해봤고 생각해볼 만한 문제를 구체화시키는 창구이다. 죽음 또한 문학이 다루는 주제로 자주 차용된다. 이번에 김지녀 시인이 발표한 작품 「죽음의 방문」도 그런 경우로 볼 수 있다. 물 속에 잠긴 사람의 입에서 올라오는 공기방울처럼 퐁퐁, 퐁 만들어졌다 터지는 모양은 말이 아니었으므로 손짓 하나 하나에 힘이 들어갔다 동공이 커지고 모든 계절이 한 장면에 사로잡혔다 타이어의 공기가 서서히 빠져나가듯 결국 한쪽으로 기울어 멈추었을 때 고요는 막 살점이 떨어져 나간 직후 피조차 나오지 않는 푹 패인 자리 다 없어지고 치아만 남아 돌아 온 사람이 지킨 것을 아내와 딸의 제삿날이 같은 남편의 밤을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며 배회하는 개처럼 컹컹 컹, 한참을 짖다 돌아선다는 것을 혼자 걸어가다 발을 헛딛어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죽을 뻔했네 갑자기 튀어 나온 말에 내 손을 잡아주지 않고 조용히 옆에서 보폭을 맞추며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죽음에 대해 죽은 자들은 죽음을 말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고 참혹은 아무 때나 초인종을 누르고 나를 방문했다 그때마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들키지 않고 죽음처럼 나는 잘 웅크려 있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헷갈려 하며 일어난 날, 손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고 물에 젖은 것처럼 다시 잠들고 싶은 날에, 「죽음의 방문」 전문 작품의 전반부가 누군가의 죽음을 묘사한다면 후반부는 화자의 상념을 담아낸 작품이다. 전반부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아마도 물에 빠져서 익사하는 것 같은데, 말을 뱉어낼 순 없는 상태로 여러 몸짓을 해보다가 결국 조금씩 힘을 잃어가게 된다. 과연 죽음이란 살아있던 사람이 말을 잃고 신체를 건사할 수 없게 되면서 정적만을 남기는 사건이기도 할 것이다. 살아 있을 때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활달하게 몸을 움직이며 주변의 사람들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기도 했을 사람이 죽음을 맞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나는 사후세계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라든가 죽음 이후 영혼이 가는 곳이 있는지의 문제를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타인의 죽음은 하나의 존재가 무(無)로 형질 전환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앞서 인용한 작품은 그런 죽음의 광경을 그려내다가 중반부에 이면 화자는 갑자기 “나”의 경험을 고백하게 된다. 혼자 걷다가 넘어지고 “죽을 뻔했네”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누구나 살다보면 그와 같이 “죽을 뻔”한 경험을 한다. 정말 죽음의 위험성을 실감하는 상황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갑작스러운 신변의 위기는 생기기 마련이고, 그런 때면 한국인들은 “죽을 뻔했네”라는 말을 관용적으로 사용한다. 이런 표현이 사용된다는 것은 우리가 사망가능성을 불안하게 인식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보통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죽은 자들은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더 정확히 말하면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런데 이 시편의 화자는 그 순간부터 자신이 죽음과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도 죽음을 기꺼이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마 타인의) 죽음을 떠올리고 참혹해지려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움츠린다. 역설적인 것은 그렇게 웅크려 있는 모습이 약간은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 같다는 점이다. 죽음을 회피하거나 망각하려는 시도는 무용한 것이고 모든 인간은 죽음의 근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일까? 다만 이 작품이 마냥 죽음의 편재성을 확인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 같지는 않다. 앞서 언급했듯 죽음은 절대적인 무(無)를 뜻한다. 죽음은 인간이 세상에 부여했던 모든 의미를 파괴하는 블랙홀이다. 그래서 “나”와 죽음이 공존한다는 이 작품의 발상은 우울하고 섬뜩한 묵시록적 예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무의미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표상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김지녀 시인의 작품이 늘상 이런 죽음과 무(無)에 대한 형이상학적 “깨달음”을 풀어낸다는 말은 아니다. 이 시인의 작품을 읽어왔다거나 이번 <신작소시집>을 본 독자들이라면, 그녀의 시를 특징짓는 것은 고적한 이미지 속에서 따뜻한 감성을 풀어내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의 방문」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이 작품이 다른 작품들의 돌올한 감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의 바다는 주인 아닌 사람을 밀쳐냅니다 호흡을 알기 때문이죠 우리는 노을에서 온 사람입니다 바다로 걸어들어가는 동안 무뎌지는 발자국은 시든 상추의 내면과 같아요 씹을 때 소리를 잘 들어보세요 우리는 상추에서 온 사람입니다 상추의 영혼은 열 시간이 넘도록 꿈을 꾸고 있습니다 호흡이 불규칙해서 바닥이 자주 들썩입니다 바닥에 입을 맞춥니다 바다와 같은 냄새가 나서 밀쳐냈습니다 나는 바닥에서 온 사람입니다 모래를 한 줌 잡았다 놓아줍니다 주인처럼 집을 나섰는데 집을 잃은 사람들이 조용히 모여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떤 소리를 내며 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노을로 번지느라 우리는 소리를 잃은 사람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생각이 무거워서 당신의 의자에 좀 앉겠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 전문 인용작의 제목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은 화자가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런데 작품을 찬찬히 읽어보면 사랑을 희구하는 연가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의 상태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게 보인다. 작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우리(나)”가 어떤 존재라는 반복적 언명이다. 화자는 자신이 노을이라고 했다가, “상추에서 온 사람”이라고 했다가, “바닥에서 온 사람”을 자처한다. 노을이 낮과 밤 사이(조금 낭만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개와 늑대의 시간”)에 아름답게 생겨났다가 휘발되는 것이라면, 상추는 아삭거리는 내면을 가지고 계속해서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물상이고, “바닥에서 온 사람”이라는 말은 자신이 이내 흩어져버릴 모래 같은 존재임을 암시한다. 이런 표현들을 얽어놓음으로써 인용한 작품은 세상의 어딘가에서 고독한 꿈을 꾸는 개별적 존재를 형상화해낸다. 화자는 이런 이미지들을 병치한 후 자신이 노을로 번지는 존재이며 또한 “소리를 잃은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고백한다. 소리를 잃었다는 것은 타자와 관계를 맺을 방법이 없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서글픈 표현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화자는 고독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노을, 상추, 모래는 애당초 혼자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노을은 바다(지평선)와 하늘 사이의 이음새처럼 보이니까 하늘과 바다의 주변에 있는 것이며 공중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덮을 수 있다. 상추는 아마 언젠가 밭에서 자연의 일부로 자라났을 것이며, 바다의 모래 또한 혼자서 존재하진 않는다. 고독한 사람도 자기 자신이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고 언젠가 만개할 것이라고 믿는다거나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 언젠가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면 현재를 견뎌낼 힘이 생길 수 있을지 모른다. 요컨대 「죽음의 방문」이 “나”와 죽음(無)의 근접성을 다룬 시편이었다면,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은 “나”라는 존재가 허무하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삼아 “기다림”의 자세를 형상화하고 있다. 두 발상이 무관한 것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상기했듯 죽음은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앞서 언급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경우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인간은 모든 일이 무의미하게 느낄 수 있다고 평했다. 인간은 각자의 욕망과 계획을 가지고 사는데,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굳이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없어진다. 어차피 죽을 것인데 우리가 하고 싶었던 일이라든가 하려던 일들을 구태여 실행으로 옮길 필요가 있겠는가?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교착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단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인이었고 아마 그가 추구한 믿음은 신을 향한 것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꼭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무언가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분명 인간을 더욱 강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가족, 친구, 연인 등을 사랑할 때 우리의 삶에는 활기가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나”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할 지경에 이르렀다면, 그 사랑은 나의 내면을 충만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렇게 충만한 상태로 살아가려고 할 때에만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의미 있는 삶을 이룩할 수 있다고 했다. 삶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만 허무함을 벗어나기 위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인식은 「아직 오지 않은 사람」에서도 변용되어 드러난다. 이 작품의 화자는 본래 고립감과 외로움을 호소하는 것 같았다. 그런 사유의 기반에는 삶의 허무성 내지는 고독함에 대한 성찰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후반부를 보면 “나”와 세계가 겹쳐지고, 마지막 행에서는 급기야 “당신”의 자리로 가고 싶다는 다짐을 표현하기에 이른다. “나”의 독자성을 확인하기 힘든 악조건 속에서 “당신”으로 표상되는 타자에 대한 사유로 넘어가는 감각... 이것은 물론 김지녀 시인 개인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아니라고 생각된다. 너무나 오래 전에 나왔지만 지금까지 회자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라든가 한용운의 『님의 침묵』 같은 시집만 봐도, 극한의 고독에 침윤한 화자가 끝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겸허하게 드러낸다. 이렇듯 고독한 세계에서 사랑이 피어나는 사람의 내면을 현시하는 것이 서정시의 역할이라면, 김지녀의 작품은 그런 장르적 책무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평가 또한 가능할 것이다. 이번에 <기발표작>으로 소개된 작품 「행운목」과 「바라보는 화창」의 경우에도 내밀한 고독의 어투로 타자(세계)와의 관계를 추구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평할 수 있겠는데, 이 작품들의 인식과 정서에 대해서도 유사한 설명이 가능할 듯하다. 지금껏 이 글은 김지녀의 시에 대해서 다소 형이상학적인 분석을 시도해보려 했다. 이번 <신작소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에 한해서 이야기한다면 그런 독법이 적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 이 시인의 절묘한 감수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작품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화를 내고 울어버린 나만 덩그러니 남았던 적이 이별인지 모르고 이별 앞에서 계속 머뭇거렸던 적이 눈이 내리고, 사람들은 두더지처럼 머리만 내놓고 누구든 무릎에 앉길 바라며 앉았다 일어나 다시 앉았다 떠났던 적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흐르는 음악처럼 프레임 바깥으로 걸어나가 돌아오지 않는 주인공처럼 끝나도 일어나지 않고 앉아 있는 나에게 (중략) 눈이 내리고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간다 먼저 떨어진 눈이거나 내 뒤에서 떨어지거나 나를 슬쩍 쳐다보는 듯한 눈이 평평한 바닥을 걷고 있어도 발 아래에서 끊긴 지층처럼 어긋났던 적이, 눈이 내리고, 나를 잃어버렸던 적이 (중략) 눈이 내리고 내리고 또 내리고 이 세계가 눈에 덮혀 누구의 발자국인지 모를 것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고 너는 나보다 먼저 있었던 시간일지도 나에게 오지 않은 시간일지도 「무효와 침묵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부분 존재론적 고찰을 담은 듯하면서 또한 “너”에 대한 마음을 드러낸 것으로 읽힐 소지가 있는 작품이다. 작중 세계에서는 눈이 내린다. 아마 구름으로부터 파생되었을 눈은 하늘을 부유하다가 바닥에 떨어지고, 밝히거나 녹으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어쩌면 사람들이 눈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그토록 연약하게 명멸하는 존재가 잠시 만들어내는 생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마찬가지로 꺼져가는 촛불이 타오르는 모습은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가 지적하듯, 눈은 비록 단명할지언정 세상의 분위기를 바꾼다. 세상에 모종의 느낌을 풍기고 이내 사라져버리는 존재라니, 이것은 정확히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하고 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세계에 흔적을 남긴다. 소수의 위대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남기는 흔적은 매우 미약하다. 특히나 인간의 죽음 이후에는 그나마 그가 남겼던 흔적마저 빠르게 소멸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죽음이라는 사건이 도래한 이후의 이야기이다. 어쨌거나 살아있는 사람은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와 조응한다. 마치 눈이 언젠가는 녹아버리고 사라질 것이라고 할지라도, 눈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잠시나마 세계에 자취를 남길 수 있는것과 같은 이치이다. ‘세계’라고 말하니까 조금 거창해 보이는데, 모든 인간은 각각의 세계를 갖고 있다. 우리가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우리의 주변을 둘러싼 개별 사람들을 변화시킨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사실 죽음이라는 사건을 상정하지 않는다고 치더라도 모든 인간관계는 시한부이다. 언제든 우발적인 조건과 상황에 따라 시작되지만 또 언제든 끝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하나의 관계가 시작되면 서로에 대해서 뭔가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다. 친구에게 “변치 않을 우정”을 맹세하는 사람이 있고, 연인이 생길 때마다 “영원할 사랑”을 약속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장기적으로 본다면 모든 관계는 언젠가 끝이 나게 된다. 인간 자체가 유한한 존재인데 인간끼리의 만남이 영속적이라는 기대는 무망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려 하고 여러 가지 추억을 쌓고는 헤어진다. 어쩌면 이것은 언젠가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힘껏 살아보려고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과 유사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지만(더 정확히 말하면 사후에 자신이 죽었던 경험에 대해 증언할 수 없지만) 살다 보면 이별은 경험할 수 있고 그 경험이 삶에 적잖은 내상을 남기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이별은 피할 수 있는 사건이다.(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고 마음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아픈 이별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려 한다. 왜 그럴까? 단순히 헤어짐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믿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그것은 헤어짐의 아픔은 미래의 일이고 일단은 자신의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남을 지속해보겠다는 무책임한 생각 때문도 않을 수 있다. 죽음은 경험이 될 수 없지만, 이별은 그것 자체로 아름다운 경험이 되어 준다. “아름다운 경험”이라는 것은 행복을 보장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아름답고 감동적이라고 생각하는 예술작품들은 대부분 불행하거나 뭔가가 부족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든 면에서 행복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소설이나 시로 쓴다면 무미건조할 것이다. 적당한 결여와 불행을 경험한 사람의 모습은 그러나 아름다운 감동을 줄 수 있다. 왕가위 감독의 로맨스 영화 같은 것을 본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환희의 순간만큼이나 이별의 순간도 아름답게 그려질 수 있음을 익히 느꼈을 것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김소월과 한용운을 비롯한 많은 서정시인의 작품이라든가 요즘의 대중가요(발라드)를 경험해본 사람 또한, 이별의 순간이 아름다운 언어들을 직조해낼 수 있음을 알 것이다. 「무효와 침묵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는 그런 문제의식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이 작품은 인연이 끝나는 순간을 암시하면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흐르는 음악”을 병치시켜 놓기도 했다. 이런 맥락을 전체적으로 살핀 이후에야 우리는 “무효와 침묵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는다는 제목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 그런데 김지녀 시인은 어쩌면 인간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는 죽음이라든가 하나의 만남을 종결시켜버리는 이별 같은 것을 현시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이번에 발표된 작품들에서 알 수 있듯, 그는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그 아름다움 자체를 통해 하나의 의미가 되고 있다. 무(無)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산출해낸다니, 그야말로 시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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