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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월간 현대시 | 2024년 1월호(제409호)

포스트-휴먼을 위한 조건들

임지훈 문학평론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의 평론 부문을 통해 등단하였습니다. 문학의 윤리, AI시대 문학작품의 역할, 예술 작품의 정치성 등을 중심으로 연구와 비평을 수행합니다. 현재는 대학에서 글쓰기와 문학 이론·비평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복순이와 자두라는 이름의 고양이와 함께 삽니다.

  1. 조건은 어떻게 위기를 규정하는가 –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


  애덤 맥케이 감독의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2021)은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혜성으로 인한 일련의 해프닝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임박한 재앙이라는 극단적 상황 탓에 재난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인류에게 임박한 재앙이라는 미증유의 위기 앞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자본의 흐름에 떠밀려 최악의 선택을 반복하는 인간들의 모습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딥 임팩트>나 <아마겟돈>과 같이, 하나 된 인류가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하는 서사를 기대했다면 그 기대는 철저하게 무너지고 말 것이다.

  영화에는 크게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혜성을 발견한 연구팀으로, 혜성의 위험성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그룹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재난 앞에 도움을 구하고자 다른 학자들과 정치인들에게 소식을 알린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두 번째 그룹인 정치인들을 접한다. 철저하게 정치 공학에 입각해 사태를 바라보는 이 정치인 그룹은 지구 멸망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어떻게 선거에 이용할 것인가에 골몰한다. 그 결과는 우스꽝스러운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와 같은 재난 방송이다. 대통령은 자신을 둘러싼 추문을 덮기 위해 사태를 이용하며, 자신의 이미지를 ‘지구 멸망이라는 위기를 막고자 헌신하는 대통령’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하여 핵미사일을 실은 우주선이 혜성의 궤도 변경을 위해 이륙하는 순간, 사태는 세 번째 그룹의 사람들에 의해 중단된다. 그들은 고도의 기술 산업을 이끄는 거대 자본으로, 이들은 첨단 기술에 사용되는 희귀 자원이 혜성에 매장되어 있다는 이유로 궤도 변경을 중단시킨다.

  이와 같은 세 부류의 그룹의 순차적인 등장에 따라 영화의 맥락은 크게 3번 변화한다. 1.위기의 감지 2.정치 공학의 개입 3.자본에 의한 정치적인 것의 중단. 중요한 것은 세 단계 속에서 혜성의 의미가 점차 굴절된다는 점과 그럼에도 객관적이며 실체적인 위기는 여전히 파국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각각의 단계는 객관적 사물인 ‘혜성’의 의미를 규정짓는 조건으로 기능하며, 조건의 변화는 곧 혜성의 새로운 의미 창출로 이어진다. 혜성 충돌이라는 사태조차도 객관적이며 실체적인 사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조건들 하에서 의미를 부여받으며 구체화되는 것이다.1)

  이 지점에서 영화는 흥미로운 장면을 연출한다. 궤도 변경 시도의 중단 이후, 정부의 입장에 서서 방송에 출현해 프로파간다 활동을 하던 주인공 민디 박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별안간 분노를 토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아동용 프로그램과 속류 교양 프로그램에서 혜성의 위기에 대해 설명하며,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프로파간다 활동을 하던 그는 별안간 사태에 대한 분노를 광기에 가깝게 표출한다.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바라보자면 다가오는 멸망 앞에 정치 공학과 자본의 논리를 앞세운 다른 인물들을 향한 분노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가 표출하는 분노는 시청자들을 향해 있다. 그는 시청자들을 향해 일갈한다. 마치 대의를 위해 자유를 희생하라고 성토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인민을 향해 분노하는 독재자의 모습처럼.

  설명하자면 이렇다. 혜성 충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가운데, 민디 박사는 점차 패닉에 빠져든다. 하지만 혜성 충돌을 보일러 파열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속류 교양 프로그램의 진행자들 앞에서 민디 박사는 점차 분노에 빠져든다. “혜성은 존재합니다”라는 말로부터 시작된 그의 분노는 점차 가속화되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조차 최소한의 합의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으로 접어든다. 다들 정신이 나간 것 아니냐, 고장나버린 것이냐 등등 분노를 쏟아내던 그는 이윽고 시청자들을 향해 ‘미국 대통령이 거짓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이라 소리치며 분노한다.

  민디 박사의 분노 속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실에 대해 말하면서도 개인의 정치적 신념의 자유를 존중하던 그가 자신의 분노로 점차 빠져들수록 자유를 강하게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최종지점에 이르러 그의 분노는 자유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곧 당도할 진실 앞에 자유는 무력해지리라는 저주 섞인 선언으로 뒤바뀐다. 시청자라는 인민을 향하던 그 분노가 별안간 미국의 대통령을 향하는 모습, 이는 마치 전체주의 국가의 독재자가 인민과 미국을 향해 분노하는 모습을 방불케 한다.

  표면적으로 바라볼 때 그의 분노는 정당해 보인다. 급박한 파국 앞에 문제 해결을 위해 단결하라는 그의 제스쳐는 어떤 의미에서는 탈-정치적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치적 논리를 떠나 눈앞의 문제에 집중하라는 선언은 그 자체로 이미 정치적인 것이 아닐까? 목적 달성을 위한 정치적 자유의 포기를 주장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가 지난 세기에 목격했던 전체주의를 향한 정치적 결단의 제스쳐와 닮아 있지 않은가. 그런 민디 박사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혜성이라는 문제와 문제를 막기 위한 수단들, 심지어 ‘나’라는 인간조차도 정치경제적 조건 하에 붙들려있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호하게 일련의 정치경제적 조건에 대한 거부를 선언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탈-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극단적인 정치적 선언이며, 임박한 파국 앞에서 요구되는 유일한 정치적 자세이다.



  2. 소박한 존재론으로서의 속류 객체 중심주의


  이러한 민디 박사의 모습 속에서 정치적 선언을 식별하고, 독재자의 모습을 끄집어내는 것은 어쩌면 과도한 해석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또한 임박한 위기 앞에 똑같은 문제를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현실에서 거듭 실패를 반복하도록 만드는 요소, 우리가 정치경제적 조건들에 붙들려 거듭 놓치고 마는 요소가 바로 이와 같은 극단적인 정치성인 것은 아닐까. 다시 한 번 민디 박사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혜성은 존재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임박한 예정된 파국이며, 피할 수 없는 재난 사태이다. 우리는 모두 파국의 이름을 알고 있다. 거듭 흐린 눈으로 애써 모른 채하던 오래된 미래가 기후변화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부쩍 다가왔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문제의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기후변화의 문제조차도 각기 다른 정치적 입장과 경제적 조건 하에 사유되며 문제의 본질을 계속해서 놓치고 있다. 그러한 와중에도 기후변화라는 이름의 파국은 성실하게 우리의 현실을 가로지르고 있다. 최근 포스트-휴먼에 대한 논의가 우리의 현실 속에서 급부상하게 된 까닭에는 이러한 이유가 존재한다. 팬데믹에서 기후변화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마주하게 된 오래된 미래 앞에 사유의 전환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휴먼 담론은 임박한 파국에 대한 사유의 응답인 셈이다.

  그 가운데 객체 중심주의는 인간 중심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는데, 이는 우리의 고착된 사유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사유방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타당하다. 그레이엄 하먼의 표현을 빌리자면 객체 중심주의는 모든 존재를 지식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객체로 정의하며 개별적인 객체가 지닌 자율성을 명시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2)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먼의 관점에서 객체는 구성 요소와 행위 요소로 환원될 수 없는 실재성을 소유한다. 객체들은 자기에 기반한 고유한 실재성을 바탕으로 맥락으로부터의 자율성을 지니기에, 객체에 대해 사유한다는 것은 인간적 맥락에서 벗어나 객체의 무관계성과 자율성에 기초해 사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얼핏 보기에 이와 같은 객체 중심주의는 전적으로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대상을, 심지어 인간조차도 하나의 객체로 바라보는 이와 같은 평등한 위계의 존재론은 어떤 의미에서는 앞서 언급한 <돈 룩 업>의 민디 박사의 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여기에서는 객체 중심주의가 실제 해석을 위한 틀로 기능할 때 발생하는 미묘한 굴절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분명 객체 중심주의는 객체들의 실재성과 그로부터 발현되는 자율적인 맥락을 중시하며, 이를 통해 인간을 비롯한 존재 일반이 동등한 위계에 놓여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 해석의 준거로 작동할 때 자율적인 맥락에 대한 고려는 별안간 인간의 인지 너머에 객체의 ‘진정한’ 상태가 있으며 그에 따른 ‘진정한’ 관계가 있으리라는 속류적 해석으로 변화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주장을 이미 수없이 반복적으로 목격해오지 않았나? 예컨대 자연이나 그에 속한 특수한 대상은 인간의 시선 너머에 자율적인 영성을 지니고 있으며 인류가 해야 할 일은 그와 같은 자연의 영성을 식별하고 이로부터 삶의 자세를 배우는 것이라는 식의 속류 자연주의적 해석의 형태로 말이다.3)

  물론 객체 중심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은 대단히 과도한 것이다. 그레이엄 하먼과 브루노 라투르, 혹은 래비 브라이언트에 이르기까지 객체 중심주의를 주장하는 신유물론자들의 본질적인 목적은 기존의 철학적 조건들에서 벗어나 존재론을 재구성하는 것에 있으며, 예외적인 존재자 없이도 가능한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그러한 이론을 실제 대상을 해석하기 위한 틀로 활용할 때 미묘한 굴절 속으로 빠져드는 것일까. 그것은 객체 중심주의가 근본적으로 고려하는 바와 달리, 해석에서 활용되는 속류 객체 중심주의는 객체들의 자율적인 맥락이라는 외양으로부터 진정한 상태라는 외양의 외양을 산출해내기 때문이다. 예컨대 여기에서 속류 객체 중심주의라 부르는 태도의 문제점은 우리의 시야 너머에 “진짜”가, 문제의 해결책이 있으리라는 환상에 매달린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와 같은 사례는 예술 작품에 대한 해석 속에서 무수히 식별 가능하다. 예컨대 비-인간 존재를 화자로 삼는 작품들에 대해 이것을 탈-인간중심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우에 자주 출현하는 사례인데, 여기에서 집중되는 것은 타자 그 자체가 아니다. 실상 타자의 입을 빌려 발화되는 메시지는 지나치게 인간적이며, 그 과정에서 돌출되는 것은 다시금 이와 같은 발화 구조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이와 같은 비-인간 존재에 대한 태도의 배면에는 환원론적 태도가 다시금 도사리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비-인간 존재는 존재들의 위계에 있어 특권화 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그러나 심지어 그것은 타자 자체에 대한 특권화가 아니라 인격화되고 의인화된 존재로서의, 다른 형태의 인간에 대한 특권화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여기에서 엄밀하게 주장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다. 속류 객체 중심주의적 해석은 객체들의 위계 없는 존재론이라는 본질을 유지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인격화되고 의인화된 새로운 형태의 대타자이며, 이를 승인하는 해석 주체의 특권화이다. 예컨대 속류 객체 중심주의적 해석은 본래의 의도와 달리 예외를 통한 구조화라는 기존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구조를 답습하며, 단지 예외적 존재의 위치에 인격화된 비-인간 존재라는 새로운 형상을 위치시킬 뿐이다. 따라서 기존의 조건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론을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는 필연적인 실패를 마주하게 되며,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다른 형상을 지닌 지나치게 인간적인 오래된 존재론에 불과해진다.

  이야기를 정리하자. 인간 중심주의적 관점에서 객체들의 관계를 규정하고 맥락화 하는 것에서 벗어나, 인간을 객체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함으로서 새로운 관계와 맥락을 형성하는 것 : 이것은 한편으로 전적으로 타당한데, 주체를 비롯한 사물 일반이 맺을 수 있는 새로운 관계적 체제를 상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와 같은 논의는 어디까지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관점 너머에 객체의 진정한 모습과 그에 따른 관계가 있으리라는 상상은 속류적인 뉴에이지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데란다와 브라이언트, 그레이엄 하먼 등의 객체 중심주의를 주장하는 신유물론자들의 논리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담론에서 여전히 재생산되는 속류적인 주장이다. 외관 너머에 진정한 중핵이 있으리라는 이와 같은 주장은 진정한 중핵에 대한 환상이 외관에 의해 생산된 것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놓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며, 그러한 생산이 현재의 조건들에 대한 암묵적인 승인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이를 보다 자세하게 논의하기 위해서는 유기체적 관점에 대한 거절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인간중심적 사유를 벗어나는 것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것으로, 사회를 비롯한 여러 구조체를 유기적으로 상상하는 관습이 새로운 객체들의 관계에 대한 상상을 가로막는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들은 구조체 일반을 유기체에 비유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 자체를 무관계적 사물들의 관계로 새롭게 상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누엘 데란다와 레비 브라이언트의 통찰4)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여기에는 인간 사회를 비롯한 구조체 일반이 정말로 유기체적으로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빠져있다.

  우리가 속한 사회를 비롯한 상징적 구조 일반은 언어를 기반으로 한다. 언어는 발화의 관점에서는 소리의 매끄러운 이음을 통해 유기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 언어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집합체이자 “간격과 불일치로 가득 찬 브리콜라주”5)에 불과하다. 언어가 유기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발화 행위가 만들어낸 환상이며, 특정한 기표가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요소와의 간격과 차이를 통해서이다. 하지만 반-유기체론의 입장은 바로 이 지점을 놓친다. 때문에 반-유기체론적 입장은 개별 구조가 유기적이지 않으며 그로 인해 유기적 관점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

  인간 사회를 예로 들자면 사회 구조는 불연속과 불균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개별 요소 사이에 존재하는 불연속과 불일치에 압점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중층 결정이다. 이는 하나의 개별 요소가 여러 모순되는 요소들과 얽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 구조는 그 정의상 상이한 요소들의 이접을 통해 구성되어 있으며, 그러한 구성은 근본적인 불완전성, 사회의 내적인 적대, 결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조화란 바로 이와 같은 불완전성을 둘러싼 상이한 요소들의 이접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며, 때문에 모든 구조는 필연적으로 이와 같은 불완전성-내적인 적대를 감추기 위한 환상으로서 유기체론을 필요로 하게 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유기체적 논의 자체에 대한 거부가 아니다. 핵심은 ‘왜 사회 구조를 비롯한 구조체 일반은 유기체적 논의를 필요로 하는가’이다. 때문에 반-유기체적 논의를 비롯한 속류 객체 중심주의는 겉보기엔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 구조를 상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나타나는 효과는 정반대이다. 그것은 구조의 유기체론에 대한 필요를 무시함으로써 사회적 불균형과 분출되지 못한 적대를 여전히 배경에 남겨둔다.

  다시금 최초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포스트-휴먼을 위한 논의의 일환으로써 우리가 객체 중심주의를 살펴보는 까닭은 자명하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의 문제가 기존의 사유방식과 조건들 속에서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객체 중심주의는 기존 사유방식으로부터 탈피해 새로운 조건들을 구성하고자 시도한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타당하다. 하지만 그것을 해석적 사유의 틀로 적용할 때 미묘한 굴절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속류 객체 중심주의이며, 겉보기엔 우리가 처한 조건들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것을 무시함으로써 기존의 정치경제적 조건에 대한 암묵적인 승인으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포스트-휴먼을 위한 논의라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와 같은 태도는 기존의 체제에 걸린 조건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이를 암묵적으로 승인하고야 만다는 점에서 기존의 문제를 더욱 고착화시키는 악무한의 사슬인 것은 아닐까?

  조금 더 근원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포스트-휴먼 담론이 인류가 마주한 문제에 대한 응답이라는 근본적인 목적을 고려할 때, 이와 같은 속류 객체 중심주의가 주장하는 탈-인간중심적 태도는 과연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것은 위에서 살펴보았듯 특권을 포기하는 주체이자 새로운 전제를 정립하는 주체라는 새로운 특권화된 인간상을 구현하는 것은 아닌가. 혹은 ‘자연’이라는 새로운 형상을 대타자로 정립하려는 시도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여전히 기존의 철학적 사유 구조를 답습하며, 그 배경에 기존의 정치경제적 조건들을 방치하는 것이 속류 객체 중심주의라면, 그러한 형상을 과연 포스트-휴먼을 위한 조건이라 말할 수 있을까.



  포스트-휴먼을 위한 조건 :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


  사태 앞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포스트-휴먼 담론의 목적성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포스트-휴먼에 대한 논의는 우리가 마주한 현실의 문제가 기존의 사유방식으로는 해결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전제한다. 따라서 포스트-휴먼 담론을 구성하는 세부적인 항목들이 형이상학적 사유체계와의 단절을 선언하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마찬가지의 맹점이 하나 숨어 있다. 그것은 우리가 ‘Post’의 의미를 사유하는 방식과도 상동적이다. 표면적으로 바라볼 때 ‘Post’의 의미는 ‘탈(脫)’의 의미를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보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과연 ‘인간’을 벗어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돌려 말하자면, 우리가 문제를 식별하고 관측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은 아닌가. 또한 문제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히려 스스로의 ‘인간됨’을 통해 그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기존의 체제가 지닌 문제는 오히려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발생한 것이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 지닌 고유한 한계로 인한 것이라면, 우리가 탐색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한계 지점, 인간을 규정짓고 사유하는 틀인 것은 아닐까.

  따라서 포스트-휴먼 담론에서 제기되어야 할 것은 단순히 어떻게 ‘인간’으로부터 벗어날 것인가에만 달려있지 않다. 오히려 문제의 해결이란 관점에서 바라볼 때 스스로 인간의 특권과 지위를 내려놓는 ‘탈’ 인간적 제스처는 포스트-휴먼 담론의 목적성에 완전히 부합한다 말하기 어렵다. 인간의 책임으로 인해 발생한 기후위기라는 문제 앞에, 인간 이외에는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가 없기 때문이며, 이미 생태계에서 인간 존재는 지울 수 없는 얼룩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것은 사태 앞에 요구되는 사유로부터 한 발 물러서는, 겸손을 가장한 항복의 제스처에 불과할 따름이다. 따라서 포스트-휴먼 담론에서 요청되어야 하는 문제는 어떻게 인간을 벗어날 것인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책임을 직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를 다시금 숙고하는 것에 달려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포스트-휴먼 담론을 위해 필요한 것은 인간 너머에 대한 성찰과 사유가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탐구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논의를 함에 있어 비-인간 존재에 대한 집중만이 아니라 그러한 비-인간 존재를 마주하는 지점으로서의 인간의 한계 지점에 대한 탐색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어떻게 인간을 재현해왔으며, 무엇을 인간적이라 말하고 무엇을 인간적이지 않다 논해왔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인간의 근본구조로서의 언어를 매개물로 삼는 문학에 대한 탐색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인간의 정신이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는 가정을 받아들일 때, 문학은 인간의 근본적인 조건과 가장 맞닿아있는 예술 형식으로써 탐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포스트-휴먼을 위한 조건들을 탐색함에 있어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형상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재난이 벌어졌다고 끔찍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재난은 처음이라고 우리들의 육체와 영혼에 심각한 손상을 가져다줄 것이며 이후로는 결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방송을 하던 남자가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했다 옆집의 누군가 악을 쓰며 저주와 욕설을 포부었다 밖에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피할 곳은 없었다 불이 나고 지진이 나고 집이 무너지고 폭설이 쏟아지고 태풍이 몰려오고 혜성이 지구로 돌진하고 있다고 결국 모두가 죽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며 재앙은 계속될 것이라고 1분 후 다음 재난 방송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더욱 경악할 만한 재난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커피를 끓였다 일요일 오후였다


  - 강성은, 「재난 방송」,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 현대문학, 2018.


  강성은의 시 속에서 인간의 모습은 전형성에 대한 파괴를 통해 구축된다. 이전 시집들에서도 나타나듯, 강성은의 시 속 인간의 형상은 우리가 기대하는 상식적인 모습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을 비롯한 극단적 상황 속에서의 파열을 통해 그려진다. 그러한 의미에서 강성은이 제시하는 인간의 형상은 그 한계 지점에 대한 탐색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조건에 대한 탐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 인간의 형상은 더 이상 파열을 통해 그려지지 않는다. 그 가운데 가장 특기할 만한 작품이 바로 위의 「재난 방송」이다. 여기에서 파열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이며, 반면 인간은 재앙 앞에 평온한 모습으로 그려져 아이러니를 촉발시킨다.

  상황은 이러하다. 알 수 없는 대 재난이 발생했고, 이는 우리의 육체와 영혼에 심각한 손상을 가져다 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재난 앞에 평등하게 고통 받을 것이며, 어디에도 도피할 곳은 없다. 재난 방송에 대한 도시전설을 연상시키는 종말론적 상황 속에서, 작품은 패닉에 빠진 인간의 모습과 그들에게 다가올 더 큰 재난을 예언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패닉에 빠진 인간의 모습과 별개로 ‘나’라고 이름 붙여진 작품의 화자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커피를 끓였다 일요일 오후였다”고 담담하게 말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대조는 우리로 하여금 몇 가지의 흥미로운 상상을 부추긴다. 첫째로, 그는 이미 패닉에 빠진 것일 수 있다. 도피처 없는 평등한 재난 앞에 선택지를 잃어버린 인간으로써 마치 아무런 일도 없는 듯 행동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정신적 충격이 외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명백히 재난을 마주한 인간이 행할 행동의 범주 가운데 하나이겠으나 시집의 제목을 고려하자면 그와 같은 상상은 어딘지 핵심을 놓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두 번째로, 이러한 재난을 초래한 것이 바로 화자인 ‘나’라는 상상이다. 세계의 잔인한 권력 놀음과 광기에 가까운 열정적 현실에 억눌려 은둔 속에 머물던 ‘나’에게 있어 재난을 초래했다는 사실은 만족스러운 환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상은 시의 구절이 지닌 극단적인 담담함으로 인해 부정될 것이다. 세 번째로, 그는 이미 이러한 육체와 영혼의 손상에 상시적으로 노출되어 왔다는 가정이다. 예컨대 그에게 있어 인간의 육체와 영혼에 심각한 손상을 가져올 재난이란 예외적인 사태가 아니라 항시적인 상황이었기에 놀라울 것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의 상상 가운데 화자의 담담한 태도를 만족시켜주는 것은 오직 세 번째 뿐이다. 겉보기에 이러한 인간상의 제시는 그가 이전 시집에서 보여온 태도와의 단절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의 위치에 처한 인간의 미래적 형상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이전 시집의 화자들에 대한 연장선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형상 속에서 강성은이 제시하는 인간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완전무결한 육체와 영혼을 소유한 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거듭되는 손상 속에서 구성된다는 사실 말이다. 이는 우리가 가진 정상적인 주체에 대한 환상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손상 받지 않은 정상 상태의 주체가 있고, 극단적 상황으로 인해 병리적인 상태에 처한 비정상적 주체가 있으리라는 가정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재난 방송」이 제시하는 인간상이란 구성적 존재로서, 거듭되는 육체와 영혼의 손상이야말로 인간을 구성하는 근본 조건이라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재난은 별안간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성을 위한 상시적 조건으로 의미가 바뀐다.

  이처럼 강성은의 시는 인간을 둘러싼 환상을 파열시킴으로써 인간을 규정짓는 조건에 대해 탐색한다. 이에 대해 신해욱의 시는 그 목적에 있어 인접성을 보여주는데, 이는 특히 「무족영원」에서 다양한 형상의 인격적 존재에 대한 조망을 통해 이루어지는 바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휴머니티」라는 시는 인간성을 시의 소재로 삼음으로써 인간성의 정의에 대한 혼란을 초래한다.


  그릇이 달그락거린다. 설마.


  이렇게 많은 인간이 한꺼번에 존재할 수 있다니. 이렇게 많은 염색체가 같은 색깔로 물들 수 있다니. 만지면 옮을 것 같구나. 십진법으로는 셀 수조차 없구나.


  외톨이 과학자의 홈 메이드 악몽인가.


  그 과학자가 시달리는

  색맹의 리얼리즘인가.


  아니면 못난 요정들에게나 어울리는

  협소한 영원의 상징인가.


  검류계의 바늘이 떨리고. 그릇이 달그락거린다. 그만. 흘러내리다 굳어버린 촛농. 미지수 X와 헤모글로빈. 초페르뮴의 로렌슘. 제라늄. 안젤륨.


  순수한 인간성만을 추출하여

  정제된 의인화를 시도해야 했던 건가.


  맹물을 달여 만든 배양액에 담가

  때가 올 때까지

  달걀 껍질 안에 봉해두었어야 했나.


  물이 끓는다. 머리가 뜨겁다. 무너진 문장과 무너진 계통. 깨진 문장과 깨진 그릇. 상한 문장과 상한 양분. 난생 설화를 새로 휘갈겨 뒤죽박죽으로 지저귀는 새에게 바치고. 부르르 열패감의 쾌락에 무릎을 꿇고. 눈이 풀리고


  입냄새가 나고


  요물이 꿈틀거리고


  낄낄거리고


  - 신해욱, 「휴머니티」, 「무족영원」, 문학과지성사, 2019.


  미친 과학자의 실험실을 연상시키는 위의 시에서 화자는 관측과 실험을 반복한다. 그가 살피는 것은 시의 2연에서 드러나는 ‘인간’ 그 자체이다. 그가 “순수한 인간성만을 추출하여/정제된 의인화를 시도해야 했던 건가”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가 무언가를 만들려 시도하고 있으며, 그것에 실패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과학자가 “순수한 인간성”을 추출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사유하는 부분이다. 비록 그것이 진술에 의해서만 나타난다는 점에서 불확실한 추측일 수 있겠으나, 확실한 것은 그가 인간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가 실제로 존재한다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 시의 내용과 그에 따른 정황을 화자의 입장에서가 아닌 독자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비록 과학자는 인간성이 실체로써 존재하며 그것을 추출할 수 있다 말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독자는 그와 같은 인간성의 실체를 포착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화자의 진술 속에서, 그가 가진 믿음 속에서 관측 불가능한 대상으로서 포착될 수 있을 따름이다. 오히려 이 시에서 인간성을 목격하게 되는 것은 그의 목소리와 태도, 감정의 분출을 통해서이다. 이것들은 모두 과학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성이라는 중핵의 부산물에 불과한 것일 테지만, 우리가 과학자의 인간성을 목격하는 것은 바로 그 부산물을 통해서라는 점에 주목하자. 이는 과학자가 제시하는 실체로서의 인간성, 존재의 중핵이 부산물적인 외관에 의해 산출된 것임을 의미한다.

  과학자의 태도를 보다 정밀하게 접근하자면 이와 같을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인간이 지닌 목소리와 태도, 감정의 분출 따위는 실체로서의 인간성이라는 중핵이 만들어낸 부산물에 불과하다. 인간성이라는 중핵은 이러한 부산물의 외관 너머에, 추출 가능한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가 그 중핵을 마주하는 것은 추출된 실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외관에 불과한 부산물들을 통해서이다.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시에서 그러한 실체가 직접적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부산물이라는 외관이 만들어낸 외관의 외관, 초감각적인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과학자는 그러한 중핵을 부산물의 요소와 관계없이 단독적인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추출은 영원히 실패하게 될 것이다. 외관 너머에 사물의 진정한 실체가 있다는 믿음은 바로 그러한 외관에 의해 생산된 환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강성은과 신해욱의 시적 통찰은 포스트-휴먼의 조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지점을 시사한다. 우리는 인간 존재를 상정함에 있어 ‘온전한 자아’ 혹은 ‘진정한 자아’의 존재를 가정한다. 우리의 삶과 현실이 지금과 같은 것은 현실이라는 맥락이 우리의 온전함과 진정성을 훼손시키거나 그것에 가닿을 수 없도록 가로막기 때문이라 오인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와 같은 실체로서의 온전함이나 진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외관, 즉 목소리와 태도와 감정의 분출 등의 부산물들에 의해 구성된 환영에 불과하다. 외관 너머에 객체의 진정한 의미와 관계가 있으리라는 상상은 단지 외관이 만들어낸, 재배가에 의해 구성된 환상에 불과하다. 인간의 진정한 실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부산물들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의미는 부산물적인 외관을 통해 구성된다. 포스트-휴먼에 대한 논의에 있어 ‘탈(脫)’ 인간을 강조하는 것은 그와 같은 외관 너머에 실체가 존재하리라는 환영에 입각한 태도이며 인간을 벗어난 자리에서 우리가 진정 마주하게 되는 것은 무(無)일 따름이다.6)

  여기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종래의 포스트-휴먼을 위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인간’에 대한 규정이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일련의 환상을 통해 구성된 픽션인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예컨대 포스트-휴먼을 위한 논의에서 전제하는 비(非) 포스트-휴먼으로서의 인간은 과연 무엇인가. 포스트-휴먼 담론을 통해 제기되는 탈중심적 입장이 사실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존재의 양태라면 상황은 어떻게 뒤바뀌게 될까. 그렇다면 인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은 그 의도와 달리, 우리가 이미 성취한 손 안의 진실을 외면하는 태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강성은의 시가 보여주듯 태초부터 완전한 인간 존재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모든 인간은 상처를 통해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면, 혹은 신해욱의 시가 보여주듯 인간성의 실체란 것이 단지 외관을 통해 구성된 환영에 불과한 것이라면, 우리가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인간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다시 규정하기 위한 관점의 전환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4. 포스트-휴먼을 위한 조건 : 조건들에 대한 거절


  물론 많은 수의 포스트-휴먼 담론에서 제시하는 인간의 형상은 자연과 문명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기초하고 있는 데카르트적 인간 모델에 가깝다. 자연에 대한 권리를 소유한 존재로서의 데카르트적 인간 모델은 오직 유일하게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비-인간 대상에 대한 착취의 권한을 지닌 것처럼 묘사된다. 비-인간으로서의 대상들은 오직 객관적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일종의 기계로 간주되며, 오직 인간만이 법칙의 예외로서 존재하며 그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다.7)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한 문제가 바로 이와 같은 자연과 문명의 이분법적 배치 속에서 자연에 대한 권한을 소유한 인간 문명이라는 전제에 의해 형성된 것임을 인지하자면, 그러한 인간 형상으로부터의 탈피는 타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다. 그러한 인간 형상으로부터 탈피하여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인간의 형상은 과연 무엇인가. 다른 객체들과 동등한 권리와 위상은 지닌 인간의 형상? 혹은 자연에 대한 권리를 그 자체의 객체에게 양보함으로써 특권적 권리를 내려놓은 인간의 형상? 하지만 이러한 상상들은 그 자체로 ‘포기’의 제스처를 수행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특권적 형상으로부터 기초하고 있지는 않은가. 더불어 그러한 ‘포기’의 제스처는 진정한 의미에서 무엇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가. 인간에 의해 촉발된 사태 앞에서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포기’하는 제스처는 과연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러한 의견은 객체 중심주의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촉발된 것이기는 하다. 객체 중심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특권적 지위에서 벗어나 다른 객체들과의 동등한 관계 속에서 새로운 관계망을 그려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이는 데카르트적 인간 모델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의구심은 남는데, 그러한 관계망 속에서 인간의 책임을 받아들이고 실천을 행하는 것은 여전히 특권적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생각해보자면 우리가 마주한 범지구적 문제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 ‘포기’의 제스처뿐일까? 오히려 그러한 특권과 그에 따른 책임을 무게 있게 받아들이는 것이 현재 봉착한 문제에 대해 사태의 책임을 가진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인 것은 아닐까? 예컨대 인간을 객체들 가운데 하나로서 사유함으로써 그 차이를 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객체의 종적 차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제스처가 포스트-휴먼에게 요구되는 조건인 것은 아닐지 뒤집어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간의 종적 차이를 이해하고 그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적어도 현재와 같은 정치경제적 조건 하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유의 전환과 그에 따른 선택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강요되는 선택의 구조, 그리고 그 구조를 결정짓는 조건들에 대한 단호한 거절이 필요하리라는 점은 명백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기존의 정치경제적 구조와 그것을 구성하는 조건들에 대한 눈가림이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보다 세세히 파악하고자 하는 시선이다.

  여기에 대해 문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다. 문학은 사회를 구성하는 개별 요소들 가운데 일부를 돌출시켜 본래의 맥락으로부터 벗어나 낯설어지게 만드는 것을 형식적 방법론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존의 조건들 속에 배치된 대상의 익숙함을 부러뜨림으로써 대상이 가진 섬뜩함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문학이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론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김행숙의 「다른 전망대」라는 시는 문학이 지닌 방법론의 효과를 적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저 나뭇가지에 앉은 까마귀를 전망대라고 생각해봅시다.

  다른 나뭇가지로 옮겨 앉은 까마귀를 다른 전망대라고 생각해봅시다.

  당신의 나뭇가지가 부러지면, 당신의 전망대가 무너졌다고 탄식하기로 합시다.

  한 그루 나무가 뿌리째 뽑히면, 얼마나 많은 눈동자들이 한꺼번에 눈을 감았는지 온 세상이 다 캄캄해졌습니다.

  숲이 불타고 있습니다.

  단 하나의 거대한 눈동자처럼 활활 타고 있습니다.

  불이라면, 불의 군주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따라 서울의 야경이 너무 아름다워.”

  불빛에 도취한 연인의 독백이 독재자의 것처럼 느껴져 나의 사랑이 무서워졌습니다.


  김행숙, 「다른 전망대」, 「1914년」, 현대문학, 2018.


  위의 시에서 화자는 대상이 지닌 기표를 서로 교환함으로써 눈앞에서 익숙하게 벌어지는 현상들을 낯설어지게 만든다. 이러한 낯설어지기의 기법은 현상이 지닌 의미를 기존의 맥락 속에서가 아닌 새로운 맥락 속에서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든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이 구성되는 맥락 역시 언어를 통해 구조화된다는 사실이며, 그러한 한에서 이러한 낯설어지기의 구조는 탈-인간주의적인 것 혹은 객체들의 고유한 자율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에 가깝다. 이렇게 기표를 치환하는 행위만으로도 현상은 다른 의미를 돌출시키며, 인간은 그러한 의미 속에서 익숙한 대상이 섬뜩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시의 마지막 연에서 나타나는 화자의 진술이다. 기존의 조건들이 형성한 언어적 맥락 속에서는 파악될 수 없었던 요소가 식별되는 이 경험은, 우리에게 익숙한 체제 속재 내재된 실재에 대한 지식과 여기에 내장된 섬뜩한 공포를 겨냥한다.

  포스트-휴먼을 위한 논의에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이 기존의 사유 체계와의 단절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존재론을 구성하는 것이라면, 해답은 탈-인간중심주의에 있지 않다. 오히려 위의 시가 겨냥하고 있듯, 새로운 존재론적 사유를 위한 해법은 인간적인 것–언어를 통한 새로운 맥락의 창출에 있다. 그것은 언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인간적이며 특권적이다. 바로 이 요소, 언어를 통해 새로운 맥락을 구축할 수 있다는 문학주의적 관점은 그 자체로 인간이 지닌 고유한 종차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포스트-휴먼을 위한 논의에 있어 고수해야 하는 것은 탈-인간중심주의가 아니라 언어적 존재라는 종적 특성에 대한 숙고이다. 우리가 벗어나야 하는 것은 “까마귀”를 “까마귀”라 부르는 언어적 태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계속해서 “까마귀”라 부르며 특정한 의미를 산출하게 만드는 조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조건에서 벗어나 새로운 명명과 호명을 반복할 때, 우리는 충분히 인간적인 한계 내에서도 새로운 방식의 사유를 도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포스트-휴먼을 위한 참조점은 비-인간존재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인간적인 요소, 언어적 존재라는 바로 그 특권적 지위에 존재한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이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 황인찬,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구관조 씻기기」, 믿음사, 2012.


  황인찬의 시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은 우리가 지닌 언어가 어떻게 사유를 전환시킬 수 있는가를 ‘백자’라는 대상의 의미 변화 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이는 김행숙이 「다른 전망대」에서 시도한 기표의 전환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황인찬이 보여주는 것은 기표의 반복 속에서 일어나는 의미의 전환이다. 최초의 구절에서부터 나타나는 ‘백자’는 시의 모든 연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데, 이렇게 제시된 백자는 각 연에서 시어를 둘러싼 시어와의 관계성 속에서 거듭 의미가 변화한다. 존재 그 자체에 방점이 찍혀 있던 객관적 사물로서의 대상은 이윽고 주체의 호명에 응답하지 않는 대상으로 그 의미가 전환되며, 이윽고 주체의 현실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는 대상으로서 그 의미가 변화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주체의 관점이 변화함에 따라 대상은 객관적 사물이 아닌 주체의 외밀한 대상으로 전환된다. 대상을 둘러싼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대상은 새롭게 규정되며, 이는 주체에게 있어 대상과 맺어질 수 있는 관계의 양상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는 포스트-휴먼을 위한 전제 속에서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가능성의 지점을 가리킨다. 예컨대, 포스트-휴먼을 위해 우리가 시도해야 하는 것은 인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를 반복하는 것이다. 다만, 새로운 조건 속에서, 기존의 정치경제적 조건이 지닌 명징함과 익숙함을 단호하게 거절하며, 대상을 새로운 조건 속에서 반복하는 것이다. 단지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대상이 지닌 의미는 새롭게 구성될 수 있다. 이는 포스트-휴먼을 위한 전제가 인간 존재에 대한 머무름과 벗어남의 측면이 아니라 배치의 문제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배치의 문제란,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의 의미와 그것의 고유성이 경제정치적 조건에 의해 배치된 기표들과의 관계성으로부터 산출된 픽션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탈’-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의 양태와 그것을 결정짓는 조건이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는 그러한 조건에 대한 변화를 통해 얼마든 다른 의미를 지닌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포스트-휴먼을 위한 담론이 인간이 직면한 현실의 문제에 대한 대안이라는 목적의식을 상기할 때 보다 명확해진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인간의 특권적 지위를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특권적 지위를 받아들이며 그 지위를 구성하는 요소를 식별해내는 능력이다. 그것은 인간이 언어적 존재라는 사실 자체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변화란 바로 이러한 특권을 활용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인간이 지닌 특권에 대한 거부는 인식론적 전환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거부해야 하는 것은 사물의 익숙한 배치, 그러한 배치를 결정짓는 조건들에 대한 거부이며, 그러한 한에서 우리는 포스트-휴먼이 지시하는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5. 포스트-휴먼을 위한 조건 : 인간으로서, 인간으로써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를 결정짓는 조건들을 인식하고 그것이 유일한 인간의 조건이 아님을 인식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러한 조건으로부터 멀어져 새로운 조건을 창출할 수 있을까. 이를 김행숙과 황인찬의 시적 태도로부터 찾아본다면 필요한 것은 전환과 반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전환하고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를 둘러싼 배치들, 그러한 배치를 결정짓는 조건들에 대해 사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인간은 많은 게 필요해서 장소를 만들었다.

  천국에 사는 사람은 지옥에 사는 사람을 보지 못해서

  세 번 잘못을 하면 마음에 총성이 울린다고 낮게 명령하는 소리를 전하고 있다.

  살아서 나의 불행을 빼앗고 있다.

  자, 아는 대로 말합니다. 어젯밤에는 왜 경계하지 않았는지.

  땅은 꽁꽁 얼어 있었으며 삽이 들어가기란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것이었다.

  새로운 것을,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찾아야만 했다.

  당번은 책에서 보았던 온갖 주의를 떠올렸다.

  그는 마음에 드는 단어가 있을 때마다 지침서 귀퉁이에 적어 두는 습관이 있던 것이다.

  어제 적은 단어. 바다 천장, 발광 구름, 노역, 비호, 굴착기.

  주의는 없었다고 당번은 생각한다. 그는 가장 증오하는 주의를 말한다. 그것은 바로 인종입니다. 그래서 경계를 하지 않았다고? 당번은 지침서 3장 1번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아십니까. 당번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지침서는 귀퉁이나 겨우 쓸 수 있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본인은 지침서 내용을 모두 확인하였고 숙지하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모든 지침서가 같은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당번은 혼란스러워졌다. 무엇을 경계하고, 지키는 것인지는 지침서에 나와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연 그렇게 믿고 싶었으나 어디에서든 가장 극명하게 보이는 것이 적이고, 그들에게 자신도 적으로 보일 뿐이라서

  땅을 파고 있다, 승패와 무관하게, 자유에 복종하는 자유민이 되어 가고 있다. 잘못은 우리 모두의 준칙이니까.


  - 이서하, 「모르는 지침서」, 「진짜 같은 마음」, 민음사, 2020.


  이서하의 시 「모르는 지침서」는 인간을 둘러싼 사물들의 배치와 그것을 결정짓는 조건들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할 뿐이지 앎과는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한 조건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익숙하게 제시되지만, 그러한 익숙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조건들 그 자체에 대한 사유를 멈추고 만다. 그러한 조건들은 실질적이고 명시적인 인간의 필요에 의해 구성된 것이지만, 정작 인간에게 있어 최초의 필요는 망각된 지 오래이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가장 광범위한 조건에서 식별할 수 있는데, 최초의 필요로부터 탄생한 체제는 더 이상 필요에 종속되지 않으며 자본의 증식을 위한 자체적인 확장으로 자신의 목적을 전환한다. 이서하의 시에서 나타나는 “지침서”라는 표현은 이러한 사태에 대한 알레고리로 작동한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조건 짓지만, 정작 그 “지침서”에는 그러한 조건의 이유도, 목적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러한 익숙함에 속아 자신을 둘러싼 조건과 지침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 개념에 “복종하는 자유민”으로 살아간다. 그렇게 하여 파국에 점차 가까워지는 인간의 존재 양태를 이서하는 “잘못은 우리 모두의 준칙”라 표현한다.

  이는 우리가 속류 객체 중심주의를 비롯한 탈-인간적 태도에서 거듭해서 만나게 되는 증상과도 같다. 우리는 우리를 규정짓는 조건들에 대한 몰이해 속에서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노력은 자유에 복종하는 자유민이라는 역설처럼,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서 벗어나라는 준칙에 복종하는 인간이라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그 효과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다른 존재마저 인간적인 방식으로 사유하는 역설이다. 우리가 기존의 사유체제와 단절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탈-인간적 자세가 아니라 우리를 규정짓는 조건들에 대한 앎이며, 그러한 조건들이 인간을 규정지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이서하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이것은 인간에 대한 유일한 지침이 아니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와 같은 지침의 허구성과 내적인 불일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익숙함이 만들어내는 무결성에 대한 환영 너머로 체제의 불완전성을을 포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을 반복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이다.

  이서하의 시가 우리가 놓인 조건들에 대해 사유하며 그것이 가진 속성이 익숙함이 만들어낸 환영임을 지각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김현의 「생명은⚛」은 보다 직접적으로 인간을 규정짓는 조건을 새롭게 창출해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름을 이해하기 위해

  뽀뽀한다


  뽀뽀함으로

  우리는 인간일 수 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생명의 입술에

  입술을 맞대면

  입술이 넓어지고 좁아진다는 것을

  공부한다


  공부할 때

  생명은 이런 숨을 쉬는구나

  처음 느끼고


  생명에는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주어야 하는구나

  배워서 알지 않는다


  숨구멍이라는 말을

  콧구멍이 아니라

  입술의 구멍으로 받아들이는 일

  그것은 뽀뽀


  아가와 검둥개와 단호한 돌

  술에 취한 사람과 내몰리는 노동자들과 투석꾼들


  입술을 찾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같다


  입술을 쑥 내민다

  입술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당신과 나는

  원에서 태어났고


  입술소리로 한평생 진실을 읽는다

  뽀뽀의 순리


  생명은 뽀뽀함으로 가볍다


  우리는 그 길로 사람을 이해하므로

  생명의 첫 지름을 깨우친다⚛


  - 김현, 「생명은⚛」, 「입술을 열면」, 창비, 2018.


  ⚛ 처음 그가 첫 사람의 입으로 숨을 불어넣었다. 첫 사람은 그 숨을 코로 내쉬었다. 그 일이 그 둘이 이룬 첫 노동이었다. 첫 연대였다. 첫 역사였으며, 처음부터 좋은 일이었다.

  ⚛ 생명 있는 것이 생명 있는 것과 입을 맞춘다. 가장 진실한 승리를 말한다. 오늘도 4월 16일입니다. 호흡한다. 호흡하는 인간으로서 믿음이 있다. 우리는. 지금 서 있는 시간으로부터 더 먼 시간까지. 떠오를 것입니다. 가라앉는 인간이기를 주저함으로써 생명은 생명에게 입술을 내민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서 규정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뽀뽀함으로/우리는 인간일 수 있다”고 답한다. 이때 “뽀뽀”를 한다는 행위는 대상과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상호적인 규정을 가능하게 해주며, 개인이 지닌 인식의 범위를 보다 확장시켜주는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뽀뽀”를 은유로 받아들이느냐 혹은 그 자체로 받아들이느냐와 관계없이 이와 같은 행위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짓는 것이 기존의 정치경제적 조건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적 행위에 의해서도 가능할 수 있다는 상상이다. 이러한 상상은 타자성을 드러내는 시어들, 계층적 분류를 나타내는 시어들을 통해 암시되는 관습적인 분류와 격차, 이에 따른 위계를 거부하는 것과 상동적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규정이 오직 정치경제적 조건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다. 인간을 규정짓는 조건은 앞서 제기한 바와 같이 언어라는 일반적 요소를 통해서도 가능할 수 있으며, 위의 시가 제시하는 바와 같이 존재의 직접적 접촉을 통해서도 가능할 수 있다. 정치경제적 조건이 경제적인 위계와 정치적 입장 차이를 통해 존재를 규정하며 식별 가능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면, 김현이 제시하고 있는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접촉은 판단이 아닌 이해와 믿음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변화된 조건 속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시도할 수 있으며, 그로부터 인간의 행위 일반의 의미 변화까지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관점이 있기에 노동은 상품 생산을 위한, 잉여 가치의 생산을 위한 의식적 행위라는 기존의 의미에서 벗어나 사람의 입으로 숨을 불어넣는 창조적 행위로 탈바꿈하게 되며, 인간은 침잠하는 자기 존재를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창조적 존재로 규정된다.

  예컨대 이 시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인간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인간을 반복하는 사례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규정짓는 조건에 관여할 수 있으며, 조건은 오직 근거에 따른 판단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것이 이 시의 핵심이다. 또한 이와 같은 사유는 인간을 규정짓는 초월적인 외부적 타자를 요청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이라는 존재 일반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상상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속류 객체 중심주의와도 구분된다. 이러한 전제가 기능할 수 있는 것은 다시금, 인간이 언어를 통해 스스로에 대해 규정할 수 있는 특권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스스로에 대해 규정할 수 있는 특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사실에 덧붙여 인간이 지닌 특권적 지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자. 위에서 언급하였으나 세세히 밝히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 모든 사태가 인간에 의해 초래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문제는 인간에 의한 것이며, 그러한 한에서 문제는 인간의 한계 바깥이 아니라 그 범주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다시금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사태의 원인이라는 특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지녀야 하는 책임이다.


  세계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세계를 원했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는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창조자는 자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두두 너의 시간이 있는 그대로였으면 좋겠어. 내가 너무 자기중심적이라서 함께 걸었을 뿐인데. 늙은 두두. 썩은 두두. 네가 차에 치였을 때 넋이 나간 채 들은 말. 주워, 네 거잖아. 실수와 잘못. 네가 모를까 봐 잘못은 못하고 저주를 하고 있다. 악마가 찾던 몸이 당신이길. 네가 죽는다면 악마에게 네가 했던 말을 있는 그대로 할 것이다. 주워, 네 거잖아. 빨간 지렁이. 실수는 예측할 수 없다. 잘못은 실수와 반대로 작용한다. 낙엽을 모조리 먹어 치워서 길이 깨끗해졌군? 저 자그마한 동물을 잡아다가 청소를 시키자. 영 못하면 낚싯밥으로 팔아 버리면 되지 뭐가 문제야. 권력자. 문제는 유추하면 크게 보인다. 선한 것을 믿는 것은 악한 것을 믿는 것과 같은 사람이 쓴 대본 같다. “……권력은 나의 것이고 이 사태에 대한 원인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사태 또한 나의 것이다.”* 다른 입장. 믿음은 어디 가서 부정하나. 그것은 과연 좋은 소재였고 제작에 공을 들였으나 연기를 할 만큼의 진심을 아니었다. 언제나 결론이 문제였다. 결국엔 존재론으로 귀결됐기 때문에. 출생. 나는 버려졌으나 버려지지 않은 것과 같을 것이며 낳은 것이 아니지만 낳은 것과 같이 식탁에 오를 것이다. 축하받기 위해 인간이 가장 많이 낭비하는 것. 고마워. 주인공은 소비하기 위해 거기서 발생하는 외부는 절대 버리지 않는다. 선물 상자에 묶여 있던 리본 하나까지도.


  - 이서하, 「있는 그대로」, 「진짜 같은 마음」, 민음사, 2020.


  * 한나 요나스, 「책임의 원칙」.


  위의 시에서 화자가 한나 요나스를 인용하며 강조하는 것은 사태는 사태의 원인을 가지고 있는 자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직면한 재난에 대한 책임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와 같은 재난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에서 요구되는 것은 사태의 해결을 인간 바깥에서 탐색하고자 하는 자세가 아니라, 그러한 원인의 제공자로서의 인간 자체에 대한 재탐색의 과정이다. 인간, 그것은 사태의 원인을 소유한 자이면서 스스로를 규정짓는 조건들에 관여할 수 있는 자이며, 언어적 존재라는 특권적 지위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객체들의 배치에 관여할 수 있는 적극적 존재이다. 이것은 인간이 지닌 고유한 종차에 눈감음으로써 사태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뒷걸음질 치는 속류 객체 중심주의와 대별되는 자세로, 오히려 인간의 특권적 지위에 대한 적극적 승인을 요청한다. 필요한 것은 세계의 중심에서 물러나는 자세가 아니다. 우리의 세계가 자신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통감하는 것이며, 그러한 통감으로부터 실천적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포스트-휴먼의 유일한 정의이며, 인간은 바로 그러한 한에서만 마주한 재난 사태로부터 가능한 탈출구를 찾아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와 같은 책임을 수행할 수 있을까.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 <돈 룩 업>에서 나타났던 정치적 요소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으므로 그 책임 또한 인간의 것이라는 인식이다. 그 외의 것들은 오직 불필요할 따름이며, 요구되는 것은 그러한 책임에 부응하기 위해 그 밖의 가치들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와 같은 태도가 전체주의적이며 교조적인 것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는 사태를 소유한 특권적 존재로서 그러한 태도를 감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태도가 전체주의라는 사실도, 그러한 태도로 인해 민주주의적 가치가 손상될 수 있다는 지점도 아니다. 직면한 재난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적법한 태도는 바로 대의를 위한 전체주의적 관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영화에서 민디 박사는 아동용 교양 프로그램에 출현해 자신의 분노를 참지 않고 표출하며 인민을 향해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얘들아 부모님에게 전해, 올린 대통령과 이셔웰 회장은 사기꾼이라고! 그들은 파시스트라고!” 민디 박사의 이와 같은 분노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핵심을 정확하고도 간결하게 표현한다. 문제는 전체주의가 아니라 정치경제적 조건에 따라 사태를 규정하길 원하는 속물들이라는 사실 말이다. 과거의 파시즘이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결합을 통해 권위주의적인 집권 체제를 구성하였다면, 현재의 파시즘은 정치경제적 조건을 기반으로 삼아 권위주의적인 집권 체제를 구성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처한 현실이며, 현실의 인간을 규정짓는 조건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디 박사의 분노처럼, 정치경제적 조건에 함몰된 속물들이야말로 진정 파시즘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이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다가온 파국을 해결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결시켜 총동원해야 한다는 발상이 얼마나 쉽게 독재를 위한 수단으로 전유되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목격해 왔다. 하지만 그것을 진정 전체주의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대의를 위해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라는 주장 속에서, 독재자가 그러한 대의를 자신의 집권을 위한 수단으로 전유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전체주의적 입장에 대한 배신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전체주의라는 체제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체제 밖에 스스로를 예외자로 위치시키려는 구체제적 망령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전체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존재도 체제 바깥에 예외로서 존재해선 안 된다는 사실이다. 체제 내부의 모든 존재는 오직 대의의 실현과 사태의 해결을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야 한다.

  나는 이것이 포스트-휴먼의 진실이 아닐까 생각한다. 포스트-휴먼이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기존의 사유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새로운 사유방식을 지닌 인간 존재에 대한 요청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해보자. 이에 대한 적어도 한가지의 대안은 우리가 실현하지 못한 대의를 위한 전체주의적 단결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실패해온 역사이다. 그와 같은 실패를 새로운 조건 속에서 다시금 반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의 우리에게 요청되는 포스트-휴먼의 자세이지 않을까.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지금 포기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특권적 지위가 아니라 정치경제적 조건 하에 개념 지어진 자유에 복종하는 관습적 자세이며, 우리가 고수해야 하는 것은 세계 속에서 인간이 지닌 특권적 지위와 그로부터 말미암은 고유한 책임에 대한 각성인지도 모른다.

  이전 세기의 마르크스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말했던 것을 전유하여, 이제는 다음과 같은 외침이 필요하다. 만국의 인간이여, 단결하라. 구체제에 따른 정치경제적 조건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이 모든 사태가 ‘나’의 것임을 받아들여라. 인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재발명하라. 이것이 지금 사태의 해결을 위한 본질적인 인간학이며, 사태를 소유한 자가 마땅히 치러야 할 책임으로써 우리에게 요청되는 포스트-휴먼의 핵심이다.

  • 1) 그렇기에 영화는 굴절된 혜성의 의미와 실체적 위기 앞에 두 부류로 나뉜 인류의 모습을 보여준다. ‘저스트 룩 업(Just Look Up’)과 ‘돈 룩 업(Don’t Look Up)’이라는 두 부류인데, 이들은 각기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심볼로 활용한다. 여기에는 세 번째 부류인 중도파 또한 등장하는데 이들은 위와 아래를 동시에 가리키는 화살표(↕)를 자신들의 심볼로 사용한다. 이들은 첨예한 의견 대립 속에서 평화와 화합을 지향한다고 말하지만, 실체는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프로파간다 상품으로, 변형된 형태의 ‘돈 룩 업’에 불과하다.
  • 2) 그레이엄 하먼, 김효진 옮김, 「예술과 객체」, 갈무리, 2022, 76쪽.
  • 3) 비인간을 재현하는 최근의 소설과 그에 대한 해석의 방식에 대해 이소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물론 최근 소설에 비인간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점이나 비인간을 재현하는 방식에 깊은 윤리적 고민이 담겨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분석도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신유물론을 경유하지 않아도, 심지어 일정한 수준을 갖춘 휴머니즘의 시선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비평이다. ” 이소, 「나의 아름다운 사물들」, 「자음과모음」 가을호, 2023, 282쪽.
  • 4) 레비 R. 브라이언트, 김효진 역, 「객체들의 민주주의」, 갈무리, 2021 참조.
  • 5) Slavoj Žižek, Incontinence of the Void, The MIT Press, 2019, p.41.
  • 6) 여기에 덧붙여 우리가 인간성이라 지칭하는 것이 비인간적 대상을 통해 상대적으로 규정된 가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 이 이분법적 분류는 인간을 중심항으로 놓음으로서 구성된다는 점에서 이때에 가정되는 비-인간적 대상 역시 인간이라는 개념에 오염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과 완전하게 구별될 수 있는 객관적 사물의 양태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 지점을 그려내기 위해 가정한 경계선에 불과하기에 이미 너무나도 인간적인 대상이다. 이것은 속류 객체 중심주의가 대상을 그려내는 방식과도 동일한데, 이때 그려지는 객체의 모습은 ‘그 자체’로 다뤄지지만 실상은 인격화되고 의인화된 사물의 양태에 불과하다. 인간 중심주의의 환영에서 벗어나 객체들의 자율적인 관계를 탐색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 자체로 지나치게 인간적인 시도인 셈이며, 그러한 탐색을 시도하는 관측자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다.
  • 7) 르네 데카르트, 이현복 옮김, 「방법서설.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 문예출판사, 1997, 21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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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등의 평론을 발표하며 농민문학론을 개진하기도 했다. 1970, 80년대는 신경림을 비롯해 이성부, 조태일, 김지하, 정희성, 이시영, 김준태, 김남주 등이 민중시의 새로운 방향성을 만들어나간 시기였다. 이러한 흐름의 첫 물꼬를 튼 시집이 바로 신경림의 『농무』였다. 2. 노래와 이야기, 시의 씨줄과 날줄 염무웅의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는 『농무』가 출간된 지 30년 만에 이 시집의 역사적 위치를 한층 넓은 원근법 속에서 읽어낸 글이다. 그는 한국시가 지닌 민중성의 사회사적 근거와 맥락을 밝히면서 신경림 시의 독특한 화법과 시언어의 조직원리를 분석한다. 먼저 「그날」에 대해서는 “고도의 정치적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시의 화자가 직접 드러나지 않은 채 “순차적으로 카메라 앵글을 돌리는 장면화(場面化)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미장센 구성에 성공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행을 하나의 율격 단위로 할 때 3음보의 율격을 지닌 「그날」과 4음보의 율격을 지닌 「경칩」이 율격이나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엄밀하게 계산되고 통제되는 구심적 조직”4)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러한 분석은 농촌이라는 소재와 민중성이라는 주제, 인물의 정동을 중심으로 『농무』를 이해해온 기존의 관점을 시의 구성원리나 재현방식 등으로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유종호는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에서 신경림 단시의 특징을 “서정적인 주조에 서경(敍景)이 추가되고 그 속에 서사(敍事)적 충동을 내장하고 있”5)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경림의 시적 성취가 서정성과 서사성의 균형에서 비롯되었다며 선행 시편들의 전통 속에서 『농무』의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농무』의 시들이 생활의 실감과 시어의 평면성으로 1950년대 모더니즘 계열 시편의 난해성을 산뜻하게 극복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삶에 대한 결곡한 정감과 간결한 서경을 통해 추상적 구호와 격문에 가까운 현실주의 생활 시편의 전통 역시 넘어섰다는 것이다. 신경림의 시에서는 서정과 서사, 노래와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며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특히 신경림의 전기시에서 ‘이야기’의 산문성을 견제해내는 ‘노래’의 형식이란 주로 ‘민요’의 계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요적 정서’와 ‘정형(定型)에의 의지’가 긍정적 효과만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염무웅의 지적처럼 “민요는 김소월에게 있어 그러하듯이 신경림의 문학에 있어서도 창조성의 발현을 구속하는 억압이자 모국어가 지닌 가능성의 최대치로 인도하는 통로인 양날의 칼”6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음수율과 음보율, 행의 배치 등이 규칙적으로 분절된 시보다는 규칙성을 일부 허물거나 시행을 어긋나게 배치한 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겨울밤」(『농무』) 전문 『농무』 첫머리에 있는 이 시는 ‘겨울밤’과 ‘새하얀 눈’을 대비하면서 농민들의 체념과 울분을 실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어떡헐거나’ ‘취해볼거나’ ‘맡아볼거나’ ‘쳐볼거나’ ‘먹여볼거나’ 등 반복되는 종결어미는 각운의 역할을 대신하며 ‘우리’의 정서를 리드미컬하게 변주해낸다. 시인은 이러한 종결어미의 반복으로 읽기의 유창성을 만들어내는 한편, 중간중간에 시행을 일반적인 호흡과 어긋나게 배치함으로써 의미를 낯설게 하거나 정서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3행과 4행, 5행과 6행, 9행과 10행, 11행과 12행, 19행과 20행, 20행과 21행, 24행과 25행 사이에 나타난 주어부와 술어부 또는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행갈이가 그런 예들이다. 마침표의 잦은 사용이나 단어의 도치 등도 행과 행 사이에 단속적 흐름을 만들어낸다. 단어나 시행을 엇갈리게 배치하는 앙장브망(enjambement) 기법은 「겨울밤」 외에도 「시골 큰집」 「원격지」 「씨름」 「산1번지」 「이 두 개의 눈은」 「1950년의 총살」 「장마 뒤」 「산읍일지」 「산읍기행」 「갈대」 「묘비」 「심야」 「유아」 「사화산·그 산정에서」 「추방」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누군가」 등 상당히 많은 시들에 나타난다. 이것은 김수영의 후기시에서 연의 길이를 균질하게 하는 대신 앙장브망을 통해 시행 사이의 불규칙성을 강화하던 것7)과 유사한 방식이다. 신경림 역시 행과 연을 단위로 리듬의 규칙성과 불규칙성을 탄력적으로 조율하고 변주함으로써 정서나 의미를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이러한 모더니스트적 면모는 신경림을 단순한 민중시인, 민요시인으로 이해하는 것을 재고하게 한다. 1973년에 이루어진 한 좌담에서 백낙청은 신경림의 시가 서사성과 지적 콘트롤이 강하고 현대적 언어감각을 지녔다는 점에서 신동엽보다는 김수영과 친연성이 강하다고 말한다.8) 시인 자신도 나중에에는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고 “내가 민요에 집착한 80년대 전 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한 시절”9)이었다고 회고했다. 신경림 시에서 민요 가락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새재』(창작과비평사 1979)와 『달 넘세』(창작과비평사 1985), 그리고 장시집 『남한강』(창작과비평사 1987)에서다. 『민요 기행』 1, 2권(한길사 1985, 1989)이 나온 것도 이 세 시집이 출간된 시기와 거의 겹친다. 이 무렵 신경림은 민요를 찾아 채록하면서 전통적 민예 양식의 시적 가능성을 탐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노력이 집대성된 『남한강』에서 시인은 서정적 단시의 서사성을 한편의 장편서사시로 확장하면서 민요의 리듬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신경림이 민요적 정서나 형식에 대한 중압감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기행시집 『길』(창작과비평사 1990)을 펴낸 이후였다. 『길』까지는 여전히 「정선아리랑」 「산유화가」 등 민요를 제목으로 삼은 시가 보이고, 민요 기행에서 만난 노래꾼을 포함해 다양한 인물과 장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민요적 후렴구의 기계적 반복이나 정형화된 리듬의 강박으로부터는 한결 자유로워진 듯하다. 인물서사가 주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길』의 거의 모든 시에 붙어 있는 부제들은 다양한 장소성을 보여준다. 『신경림 시전집』 1권은 『길』로 끝나고 2권은 『쓰러진 자의 꿈』(창작과비평사 1993)으로 시작된다. 이 두 시집의 제목처럼 신경림의 후기시는 ‘길’ 위에서, ‘쓰러진 자의 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 길 위에서 부르는 노래와 시의 장소성 2000년대 이후 신경림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장소성’이다.10) 『농무』의 장소성이 농촌, 장터, 공사장, 폐광 등을 중심으로 한다면, 시인이 서울로 이주한 뒤 펴낸 시집들에서는 산동네, 수몰지역, 휴전선 등의 장소성이 두드러진다. 『쓰러진 자의 꿈』 이후로는 특정 장소를 부제로 밝혀둔 기행 시편이 많고, 부제가 없더라도 여행 중에 만난 풍경이나 사람의 비중이 커진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신경림의 전기시가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향(離鄕)’과 공동체의 상실을 다루고 있다면, 후기시는 지방 또는 해외로의 ‘기행(紀행)’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늘 떠나면서 살았다, 집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았다, 싸리꽃 하얀 언덕을 잊고 느티나무에 소복하던 별들을 잊으면서. 늘 찾으면서 살았다,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처음 보는 것에서 힘을 얻으면서, 진흙길 가시밭길 마구 밟으면서. ―「나의 신발이」(『낙타』) 부분 신경림의 기행시는 단순한 유랑이나 관광의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떠남이란 익숙한 것을 잊고 낯선 것을 찾아나서는 ‘탐구의 행위’다. 이와 동시에 상류를 향해 가는 연어처럼 “떠난 것을 그리워하고 잊은 것을 그리워하면서”(「나의 신발이」) 본원적인 시간과 장소를 되찾아 나서는 ‘회귀의 여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신경림의 기행시는 미셸 푸꼬(Michel Foucault)가 말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지향한다. 푸꼬는 현실화된 유토피아적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불렀다. 없는(u) 장소(topia)라는 뜻의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헤테로토피아를 제시한 것이다. 유토피아가 실재하지는 않지만 균질한 언어와 질서를 지닌 상상적 공간이라면, 반대의(hetero) 장소(topia)라는 뜻의 헤테로토피아는 모호하고 혼란스럽고 비균질적이지만 실재하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의 배치와는 다른 ‘바깥의 공간’이자 현실을 전복하는 ‘반(反)공간’이다.11) 엄경희는 “산업화로 인한 농촌붕괴를 ‘경관훼손’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고향의 장소성에 내재된 헤테로토피아적 전망을 아이들의 장소점유방식을 통해”12) 분석했다. 『농무』부터 『쓰러진 자의 꿈』까지는 기행의 장소가 주로 국내에 한정되었다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비평사 1998)에서는 중국, 베트남, 일본 등의 기행 시편들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반추한다. 『뿔』(창작과비평사 2002)『낙타』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에서는 그의 발길이 아시아뿐 아니라 몽골, 네팔, 튀르키예를 넘어 프랑스, 미국, 콜롬비아 등 세계 곳곳으로 향한다. 연보를 살펴보니, 신경림은 1993년(58세)에야 출국금지가 풀려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시집이 프랑스어판, 영어판, 독일어판 등으로 번역 출간되면서 현지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세계화의 현장을 폭넓게 목도하면서도 그는 줄곧 한국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떠올린다. 첫날은 날뛰는 미국 사람들이 무서워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연 지 얼마 안된다는 중동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양고기로 점심을 먹고, 둘째날은 자동차 산업의 몰락으로 유령도시가 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 키가 큰 젊은 흑인을 만나 하이델베르크 프로젝트를 듣고, (…) 넷째날은 한국 절을 찾아가 부처님 앞에 예불을 드리고, 선거에서 대승한 부시의 오만한 얼굴을 텔레비전에서 보면서, 침방울을 튀기며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 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와 한나절을 동행하면서,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 우리나라 여중생 얘기를 하고. ―「미국기행」(『낙타』) 부분 미국 미시건을 여행 중인 화자는 첫째날부터 넷째날까지의 여정을 언급하면서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들려준다. 특히 둘째날 만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키가 큰 젊은 흑인”과 넷째날 만난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는 화자와 경계인으로서의 위치를 공유하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과는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우리나라 여중생”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부시의 압도적 승리와 이라크전쟁 등 세계사의 착잡한 위기상황 또한 시인의 여정에 기입되어 있다. 이때 화자는 세계사의 중심도 주변도 아닌 ‘반(半)주변인’13)의 위치에 서 있다. 신경림의 기행시에서 화자의 시선이 주로 머무는 곳은 자본주의와 세계화가 만들어낸 균질화된 공간이나 화려한 장관이 아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당한 사람들의 수천수만켤레 신발들이 쌓여 웅성웅성 떠들고 있”(「신발들」, 『사진관집 이층』)는 소리를 듣거나, 캄보디아에서 “함지박 배를 저어 관광선을 따라오며 원 달러 하고 내미는 소년의 손”(「위대한 꿈」, 『사진관집 이층』)이 시인의 눈과 마음에 더 깊이 들어와 박힌다. 베트남 전쟁박물관에서 “제국주의자들이 버리고 도망간/흉측한 장갑차”를 보며 “호주머니 속에서/일달러짜리 지폐를 거머쥔/내 손”(「전쟁박물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코카 비치에서 휴양객들을 실어 나르고 “달러를 받아쥐는/씨클로꾼들의/땀에 절은 야윈 손”(「코카 비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무력하게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콜롬비아의 도시 메데진에서 산비탈에 달라붙은 움막집들과 케이블카로 그곳을 오르내리는 초췌한 사람들을 보며 화자가 떠올리는 것은 “물지게를 지고 비탈을 올라오던” “아내의 맨발”(「누군가 보고 있었을까, 아내의 맨발을」, 『낙타』)이다. 이처럼 반주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로컬과 주변부의 삶이야말로 신경림이 『농무』 이후로 일관되게 함께해온 가난하고 소외된 존재들의 것이다. 시에 포착된 주변부와 주변인이 대상화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공감을 주는 것은 시인이 자신을 그 존재들의 일부로 또는 혈육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먼 나라의 이국적 풍물 앞에서도 한국의 아픈 현실을 떠올리는 시인은 떠남으로써 돌아오고, 잊으려 함으로써 더 생생한 기억에 도달하는 역설을 경험하게 된다. 4. 역사공동체에서 생태공동체로 후기시의 출발점인 『쓰러진 자의 꿈』은 1990년대 동구권의 몰락 이후 변화된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두연으로 된 단시가 많고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공동체에서 생명공동체로의 확장이 이 시집부터 시작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신경림 시에 나타난 생태주의적 인식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편이다. 그런 점에서 ‘평등적 관계성’ ‘자발적 생성과 상호부조’ ‘자유 자연의 지향’ 등을 키워드로 신경림의 생태주의적 사유를 해명한 김동명의 논문은 주목할 만하다.14) 다만, 미국의 사회이론가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사회생태주의적 관점이나 아나키즘 등을 이론적 논거로 삼아 인간의 윤리적 역할을 강조하다보니 인간중심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듯하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길」(『쓰러진 자의 꿈』) 부분 『쓰러진 자의 꿈』의 첫머리에 실린 「길」에서 시인은 사회 변혁의 과정 속에 내재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이 시의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이라는 대목에서 그의 시선이 사회나 역사 못지않게 인간 내면을 향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내적 성찰의 매개가 되는 것은 주로 자연물이다. 이 시집의 시 제목들만 일별해 보아도 냇물, 장미, 비, 파도, 싹, 겨울숲, 홍수, 아카시아, 임진강, 진달래, 진드기, 소백산의 양떼, 초승달, 난장이패랭이꽃, 오랑캐꽃, 별, 가을비, 새벽눈, 홰나무 등 다양한 자연물들로 되어 있다. 이제 자연은 인간의 욕망과 폭력을 되비추는 거울이자, 인간의 도움 없이도 생태적 질서와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생명의 주체로 등장한다.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가 묻혀 있다 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 등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 말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묻혀 있다 청년단장이 누워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묻혀 있다 생전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들도 있다 부드득 이를 갈던 철천지원수였던 이들도 있다 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 위에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키우지만 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면서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새를 불러 모으고 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면서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전문 「묵뫼」에서도 인간의 죽음은 역사적 비극을 환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묵뫼가 피워낸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 그리고 꽃과 열매를 찾아 날아든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티 이 모두가 ‘생태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을 유기적 관계성 속에서 바라보게 된 것은 『농무』에 나타난 역사공동체가 생태공동체의 발견으로 이어진 결과다. 이러한 변화는 신경림뿐 아니라 1990년대 이후 한국시 전체에서 관찰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1980년대가 노동시·농민시·교육시 등 계층과 이념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집단적 발화가 활발하게 제기된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념에서 감각으로 중심이 옮겨오면서 사회적 이상이나 공동체적 기반은 약화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단순히 공동체의 축소나 단절이라기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모색의 계기”15)였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 후기로 갈수록 환경오염의 폐해를 언급하며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시들이나 생태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시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 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살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 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겹게 고개에 걸려 처져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 굽은 고기를 건져올리고 늙은이들은 소줏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돼지고기를 싸고 있다. (…) 우리는 안다, 썩어가고 있는 곳이 내 나라만이 아니라는 것을.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는 것을. 저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에도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산이 섞여 있고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에서도 눈이 하나뿐인 고기가 잡힌다는 것을.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에서는 목뼈가 없는 아기가 줄이어 태어나고 외국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옛날엔 천국이 따로 없다던 남태평양의 섬에서도 에이즈와 암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부분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라는 도입부는 자연의 생기나 아름다움이 예전 같지 않고 순환적 질서 또한 깨졌음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시행에서도 “썩은 실개천” “등 굽은 고기” “기침”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 “병든 돼지고기” “화약냄새” “가스냄새” 등 생활 깊숙이 배어든 환경오염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로 시작하는 4연에 이르면, 썩어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 “남태평양의 섬” 등 세계의 극지까지 미치고 있음을 화자는 환기한다. 뒤이어서 지구를 언제 “잿더미로 만들지 모를 핵”의 위험을 “어리석은 불장난”에 비유하며 비판하기도 한다. 환경오염이나 기후위기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파국을 예감하면서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 지구는 죽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땅 내 나라, 아니 온 세계가 이제 단숨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릴 마침내 그 벼랑에까지 와 서 있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분 5. 다시, 떠도는 자의 노래가 되어 들머리에서 인용한 「그 여름」은 “한 사람의 죽음이/온 나라에 죽음을 불러왔지만”이라는 구절로 끝난다. 이 역접의 마지막 문장은 완료되지 않았기에 다시 첫머리의 “한 사람의 울음”으로 연결되며 삶과 죽음의 순환 앞에 우리를 데려다놓는다. 지난여름 우리는 ‘신경림’이라는 “한 사람의 죽음”을 겪었다. 2024년 5월 22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시인의 빈소에는 수많은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문학적 진영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시의 아버지’를 잃은 듯 애도했다. 추모사를 읽는 이들은 그가 한국시단의 거목이었지만 권위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겸손함과 솔직함으로 누구나 평등하게 대해주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평생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편에서 소박한 생활감정을 노래하면서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와 미학적 긴장을 놓치지 않았던 시인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쓰러지고 깨지는 것들 속에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시는 괴롭고 슬픈 자들, 쓰러지고 짓밟히는 것들의 동무일진대 이것이 크게 억울할 것은 없다. 최근 나는 시는 궁극적으로 자기탐구요 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많이 하지만, 쓰러지는 자들, 짓밟히는 것들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고 흩어지는 것들, 깨어지는 것들을 다독거리는 일, 이 또한 내 시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16) 『쓰러진 자의 꿈』 후기를 읽어보면, 신경림의 시에 짓밟히고 고통받는 존재들의 울음소리가 왜 그토록 끊이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신경림 시인은 평생을 ‘우는 자’ ‘떠도는 자’로서 살았다. 그의 울음과 발길은 수많은 노래를 낳았고, 온 마을과 온 거리에 다른 노래들을 불러왔다. 신경림은 70년에 가까운 시력(詩歷)으로 한국 현대시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 곡진한 노래의 굽이와 갈피를 제한된 지면에서 충분히 다룰 수는 없지만, 길 위에 남아 있는 무수한 시의 발자국들을 떠올려본다. 그것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아나선 자가 발견한 기록이자, 세상 저편에 놓고 온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의 노래였다. 시인은 자신의 예언처럼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떠도는 자의 노래」, 『뿔』) 모르겠다. 애통하게도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신경림의 시와 정신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그가 사랑한 장소들, 좁은 골목이나 저잣거리, 쓸쓸한 나룻가에서 그의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시인은 ‘떠도는 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기에.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떠도는 자의 노래」 전문1) 백낙청 「발문」, 신경림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114~15면.2) 백낙청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창작과비평』 1973년 여름호, 456면.3) 염무웅 「민중의 삶, 민족의 노래」, 구중서·백낙청·염무웅 엮음 『신경림 문학의 세계』, 창작과비평사 1995, 72면.4) 염무웅 해설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 『신경림 시전집』 1권, 창비 2004, 423~24, 426면.5) 유종호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 『신경림 문학의 세계』, 57면.6) 염무웅, 앞의 글 428면.7) 김수영의 전기시와 후기시에 나타난 리듬구조의 변화에 대해서는 졸고 「김수영 시의 리듬구조에 나타난 행과 연의 문제」, 『현대문학의 연구』 제37호, 2009 참조.8) 김우창·김종길·백낙청 좌담 「시집 『농무』의 세계와 한국시의 방향」, 『백낙청 회화록』 1권, 창비 2007, 74~75면.9) 신경림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낙타』, 창비 2008, 125면. 10) 신경림 시의 장소성에 대한 연구로는 송지선 「신경림의 『농무』에 나타난 장소 연구」, 『국어문학』 제51집, 2011; 강정구·김종회 「문학지리학으로 읽어본 1980년대 신경림 시의 장소」, 『어문학』 제117집, 2012; 박순희·민병욱 「신경림 시의 장소 연구」, 『배달말』 제54호, 2014;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장소 재현의 로컬리티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64집, 2014; 고재봉 「신경림의 「농무」 계열 시에 나타난 장소성과 축제의 의미」, 『문학치료연구』 제49집, 2018; 조효주 「신경림 시의 장소 상실과 현실인식 연구」, 『한민족어문학』 제87호, 2020; 조효주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에 나타나는 장소와 장소상실 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제76집, 2019; 김미라 「산업화 시대의 이주와 새로운 거주 장소로서의 도시」, 『한국근대문학연구』 제25권 제1호, 2024 등이 있다.11)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참조.12) 엄경희 「장소 점유와 헤테로토피아: 신경림 시의 경우」, 『현대시와 헤테로토피아』, 보고사 2022, 166면.13)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로컬의 혼종성과 탈중심성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72집, 2016, 251면 참조.14) 김동명 「신경림 시에 나타난 사회생태주의의 특성 연구」, 『동북아 문화연구』 제50집, 2017.15) 졸저 「현대시와 공동체」, 『문명의 바깥으로』, 창비 2023, 275면.16) 신경림 ‘시집 뒤에’, 『쓰러진 자의 꿈』, 10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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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희 AI 시대 탄생하는 예술가와 그의 붉은 몸

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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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희 AI 시대, ‘인간 없는 예술’의 도래 앞에서

1 이번 봄에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탐험하고 매체를 다시 읽어내는 글들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인류세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비인간’ 담론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의 등장 이후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독보적인 단상 위에서 내려와 비인간과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물며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겸허한 기획은 급작스럽게 복잡한 불안에 갇힌 것 같다. 적어도 기계에 대해서라면 이미 우리는 동등하거나 어쩌면 한참 전에 초월당한 것은 아닌가? 경계 허물기로 인한 희열보다 불안이 확연히 압도하는 자리에서 『쓺』 2024년 상권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과 ‘작은 기획—채굴 문화와 미적 감각’을 유독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작은 기획’에 실린 심효원과 윤원화의 짧은 글이 각각 인간이 향하려는 방향과 의지의 아름다움, 그 노력이 무산되는 수동태의 자리에서 감지하는 공포와 불쾌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먼저 심효원의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는 비인간 행위자인 ‘지렁이-되기’를 통해 근대의 한계를 돌파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글이다. 지렁이가 땅과 맺는 일원적인 관계성과 분변토라는 건축물은 근대 이후 인간이 이룬 도시의 뚜렷한 경계와 고정성의 반대편에 있다. 지렁이의 건축물 만들기란 사실상 움직이고 먹고 배출하는 신체적 행위의 반복일 뿐이지만, “비인간들의 극도로 효율적인 메커니즘”이자 자신의 몸이 다른 존재와 물리적으로 닿는 매순간마다 “무차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력”1)이기도 하다. 촉각이 주도적인 지하세계에서는 시각이 미미해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 역시 달라진다. 미래의 미결정성을 남겨두는 대신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최근 신유물론을 비롯한 담론들과 풍요롭게 공명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상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지하세계로 향하는 방향성은 최근 SF 소설의 주요한 상상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정세랑의 「리셋」(『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에서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던 자본주의의 질주를 멈추게 한 것은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내려온 지렁이들이다. 강제 리셋 이후 인간들의 자리는 자연히 땅속 깊은 곳이 되고, 지상은 다른 종들이 누리는 공간이 된다. 김초엽의 『파견자들』(퍼블리온, 2023)에서도 지상은 균류인 ‘범람체’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감염을 피해 지하세계로 내려와 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문명 말살에 가까운 아포칼립스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영화의 촉각성을 즐겁게 감각해온 인간이 미래의 지구를 위해 지렁이를 신속하게 체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물론 직접적인 실천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지구의 거대 환경 시스템의 핵심 행위자 자리를 재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겠다. 하지만 미래적인 지하세계로 들어가기에 인간은 아직 시각적 쾌락 속에 즐겁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지적 유희를 야기하는 활자의 쾌감까지 포함해서. 윤원화의 「땅을 파는 손」은 채굴적 상상력의 매혹과 절망을 말한다. 데이터로 전환된 우리의 생태 에너지를 부의 원천으로 삼으며 굴러가는 미디어 산업 앞에서, 인간의 생산물·복제물·부산물·폐기물을 구별하기는 어려워진다. 디지털 기술로 구축되는 ‘아카이브 데이터’는 역사는 넘쳐흐르지만 이를 의미화하는 전통은 불가능한 곳이다. 윤원화는 과잉생산으로 범람하는 사물들 앞에서 맞닥뜨리는 불길한 실패에의 예감을 시앤 응아이Sianne Ngai의 ‘기믹gimmick’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매직magic’의 애너그램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 이 단어는 1920년대 미국에서 편법적 장치, 싸구려 트릭, 계산된 마법 등을 뜻하는 신조어로 출현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의 황홀감과 환멸을 모두 각인한 기믹의 불완전한 형식은 오늘날 삶과 예술, 또는 넓은 의미의 ‘사업’에서 흔히 발견된다.2) 단기적 이익 추구에 최적화되어 있는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가치 절하된 노동에 시달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기믹의 유희에 이끌린다. 운에 따라 누군가는 축적된 자원을 폭발적으로 소모할 수 있으리라는 채굴적 상상력이 번성하는 가운데, 보상도 성취도 불확실한 예술 노동 역시 가치 체계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원화는 이런 진단과 고민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생산성 중독의 시대에 예술은 어떤 시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3) 심효원이 지하라는 공간과 이를 감각하는 촉각성에 의지해 의미 있게 압축되는 순간의 시간성을 말한다면, 윤원화는 ‘농사’와 ‘채굴’을 대비하며 채굴의 무책임한 풍요의 약속이 얼마나 파국적일 수 있는지 말한다. 최단기간의 이익에 매몰된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생산물은 넘쳐흐르지만 어떤 가치 창출도 담보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은 불투명한 시간을 표류하는 중이다. 이런 진단 속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에 의해 갱신되는 매체의 기술적 발전은 인간과 나란히 놓여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환멸을 불러오는 맹목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의 ‘지렁이-되기’를 향한 아름다운 여정은 너무나 느리게 진행중인데,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예술을 몰아치듯 양산해낸다. 인간의 몸은 자발적으로 물질과 동등하게 놓이기 전에 물질이 만들어낸 다른 가치들에 의해 가치 절하되며 밀려나게 될까? 생동하는 물질들 안에서 인간을 재의미화하려는 시도와 인공지능을 의심하며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지키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래의 비평들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2 『쓺』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을 여는 글은 근대 패러다임이 ‘개인’을 해방하고 자율적 주체로서 정립해왔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 시대에 여전히 개인의 이념이 유효한지 묻는다. 개체성과 집단성이 직면할 변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서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글을 꼽는다면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과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인공지능은 창작하지 못한다, 다만 제시할 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은 기계 성능의 고도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게 산업화 이후의 근대는 ‘저자의 시대’이며, 이는 기술 발전의 작용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 만들어낸 변화이고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방향타가 된 것은 저자라는 이념의 바탕에 놓인 ‘개인주의적 사상’이다. 이는 산업화 사회 속에서 부속물로 전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회 분석의 준거점을 개인에 두고 진리와 자유를 탐색했던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조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다시 독일 지성사의 문화 비판적 사상의 전통이 소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김태환은 “항상적인 문화 공급 과잉의 시대”(37쪽)라는 진단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나 웹사이트, 유튜브 등 정신의 대상화로서의 객관 문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반대 방향인 객관 문화에서 주관 정신으로의 내화는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로 인해 그만큼의 양적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알고리즘 속에서 타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객관 문화의 총체가 스스로 발언하고 생산하는 주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이 글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정신의 개별성’이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개인으로서 개별적 의지, 개별적 내면, 개별적 정신을 지닌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는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직접 조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주적이라는 사실”(42쪽)을 변함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에 휩쓸리기보다 이를 의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사유할 틀이 우리에게 요긴한 것은 사실이다. 데이터에 얽힌 저작권 문제 역시 계속 규제안을 논의해나가야 할 비판적인 쟁점이다. 그렇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위기를 산업화 시대 이후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혹시 너무 큰 틀에서의 접근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작동 방식과 결과물이 인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때, 새로운 매체와 관련해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글에서 알고리즘에 갇힌 디지털 시대 개인의 부자유에 대한 우려는 빠르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의 재소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 강조되는 개인의 개별적인 ‘의지’와 ‘내면’과 ‘정신’에서 신체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글에서 인공지능과 대립되는 요소로 논의되는 인간의 ‘의식’이란 단순히 합리적 이성만은 아닌 “수많은 감각적 심상과 기억·감정·소망·의지 등이 혼재하는 심적 상태”(46쪽)다. 알파고와는 다른 인간 바둑 기사의 의식을 예로 들면서 언급되는 긴장, 초조, 후회, 자책, 엉뚱한 연상 등은 “바깥에서 결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내면”(같은 쪽)으로 규정된다. 베일에 살짝 가려진 듯한 이런 인간 내면의 신비함은 물질적인 신체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진화해온 신체야말로 내면 이상으로 복잡성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는 “신체화의 말소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 양쪽 모두의 공통된 특성”이라는 캐서린 헤일스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헤일스는 합리적 정신과 등치되는 자유주의적 주체가 “그 악명 높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자아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4)이라고 말한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한계는 곧 발전을 통해 ‘영웅적 개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 모든 능력에서 커다란 한계를 안고 있는 개별자로서의 인간만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어떤 감동적인 위대성에 이를 수 있”(53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반드시 육체의 신경과 근육의 단련 과정을 동반하며 그것이 생각과 행동에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잠시 괄호 안에 두어진다. 이 글의 전반적인 주장이 온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자율적인 개인상과 관련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개인이 지향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가치다. 생산과 창조의 주체로서의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소비와 소멸의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해 우리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근대 이전에 우리가 ‘저자’가 불투명한 긴 구술 시대를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저자의 시대’ 이후의 저항이 활자와 개인을 넘어선 범주에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3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은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답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지능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가지므로 ‘집단 지능’이라고 해야 한다. 개체를 중심에 놓으면 ‘창의’를 중시하게 되지만, 그 새로움은 다른 개체가 ‘모방’하고 ‘확산’하지 않는다면 사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달리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이라는 형태의 외장 기억을 건설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저자는 낭만주의 미학과 예술에서 강조하는 천재적 개인과 창조력에 대한 신화를 뒤로하고 “인간이란 거대한 기억”(62쪽)이라 정의 내린다. 이는 물론 질적 도약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양적 축적을 말한다. 김태환이 인간의 의지, 내면,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면을 중시한다면, 김재인은 “나의 생각이란 시한부 소유물”(63쪽)에 가까울 수 있으며 그 휘발성을 지켜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물질’ 혹은 ‘미디어’”(62쪽)라고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외화된 집합적 사물성으로 바라보며 그 반대편에 선다. 그런데 이 글은 ‘컴퓨터가 자연어를 다룬다는 것’이라는 장부터 급작스러운 단절을 드러내며 도약한다. 앞에서 인간의 생각 자체를 미디어이자 집단 기억의 저장고로 본 것과 다르게, 예술과 창작의 영역을 다룰 때는 컴퓨터가 자각 혹은 성찰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컴퓨터는 예술 능력이 없다”(66쪽)고 확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를 바라보는 김재인의 시점에는 도구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창작의 정의를 “스스로 선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 발휘되었느냐”(67쪽)에 두는데, 중요한 점은 저자가 그 평가 주체의 자격을 ‘생물’로 단정한다는 것이다.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스스로 반복”하는 유기체이고, 이 글에 따르면 평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한 지각 처리와 행동의 연쇄”(70쪽)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애초에 기계는 아무리 ‘집단 기억’의 ‘미디어’로서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무기물이라는 점에서 평가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배제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이렇게 유기체의 항상성과 관련된 기준을 평가 능력과 일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저작 『AI 빅뱅』에서 참조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찾아보면, 이는 “몸의 고집스러움”5)이라는 말과 함께 구체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심지어 같은 프롬프트를 주더라도 생성물이 크게 바뀌는 무작위성randomness을 보여주는데, 이는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면을 지니는데, 저자는 이를 몸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 장에 바로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한 질문자는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가지는 것이다”6)라는 전제 위에서 인공지능이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인공지능으로 발전할 방법이 있는지 묻는데, 김재인은 이에 대해 ‘몸의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로 답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은 생각을 “바로 휘발되지도 완전히 고착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지점”7)에 붙잡아둔다는 것이다. 김재인은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을 논하는 데 있어 복잡성을 가진 신체의 차원을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창작을 논하면서부터는 김태환의 논의와 유사한 탈신체화의 방향을 답습한다.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특징”은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하는 비결”(70쪽)로 치켜세워지고, 진화를 위해 외부와 교섭하며 몸 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피드백 루프는 유기체만의 고유한 신체적 능력으로 남는다.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케이트 크로퍼드가 인공지능은 추상화된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체화되고 물질적인 지능이며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하부구조, 물류, 역사, 분류를 통해 만들어진다”8)고 강조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일차적인 목표로서의 생존이 진화의 필수 사항이라 말하는 신경과학 연구자 아닐 세스가 우리의 지각은 사실 ‘통제된 환각’이자 ‘최적의 예측’이라 설명했음을 염두에 두면 어떨까. 그에 따르면 ‘당신이 된다는 것being you’, 즉 인간의 ‘동물기계’적 본질과 의식적 자기 사이의 연결고리는 “신체 자체가 가진 현재와 미래의 생리적 조건에 대한, 형태도, 모양도 없고 제어 중심적인 지각적 예측”9)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인공지능 역시 지극히 물질적인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 역시 체화된 자아로 인한 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예술을 창발시키는 창의성 개념이 다르게 읽힐 가능성이 열린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 후에 마련된 『인문예술잡지 F』 21호의 특집 ‘고함: 비-인간’에서 이진경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인공지능이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괴델의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과정 속에 언제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수준에서도 공리계로 귀속될 수 없는 명제(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생성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형식적 추론에서조차 새로운 명제의 창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역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설명한다. “변이mutation의 누적에 의해 진화는 이루어”지지만 처음 “생명체의 변이는 지배적인 개체군 안에서 일종의 ‘장애자’나 ‘고장’으로 간주된다”10). 하지만 환경이나 생존 조건에 따라 변이가 진화된 변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기계가 만들어내는 예측되지 않은 결과의 출현 역시 ‘고장’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창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논의다. ‘인간 없는 예술’이 도래하려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기술적 특이점이 올 때마다 반복되어온 정동이기도 하다. 이 앞에서 좀더 차분하게 이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축적할 필요를 느낀다. 2024년 『쓺』의 특집이 창작자이자 예술가가 서 있는 주체의 자리에서 출발했다면, 2016년 『인문예술잡지 F』의 특집은 그 결과물인 작품의 자리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은 음악이 기술적 혁신을 이루는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혔는지를 따라 음악사를 재구성한다. 자동 피아노의 경우에도 그 연주를 더 실제처럼, 더 자연스럽게, 더 인간답게 만들겠다는 목표는 거의 달성되었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가 만들어낸 경험이 정말 특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인간의 연주라는 원본 혹은 목적지를 버렸을 때이다. 인간의 연주라는 목적지를 소거해버리고 이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뭔가를 연주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인간 없이 손쉽게 해냈다면, 그 기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인간의 복제’가 아니라 ‘탈脫인간’으로 재조정할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기계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 자동 피아노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인간의 연주를 기록하고 인간의 연주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연주의 대리자는 오히려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연주하며 그 누구보다 기계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예술형식 말이다.11)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독자적인 예술형식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모방은 때로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던 자율적인 개인 주체로서의 예술가상을 어떻게 바꾸어나갈까. 또 인간의 예술적 집념은 어떻게 예술 형식들을 바꾸어나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불안만이 정확하게 인간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불러오는 균열 속에서 인간에 대한 고정된 사유를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을 때 인간과 예술 모두에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1) 심효원,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 『쓺』 2024년 상권, 368쪽.2) 시앤 응아이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던 2010년대 후반의 미술과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기믹의 이론화에 착수하는데, 기믹은 의심스러운 도구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키치와는 다른 저질 예술로 취급되면서도 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심을 표면화하는 미적 전략으로도 쓰일 수 있다. 윤원화는 이 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공모 프로그램 선정작인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의 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한다. 이 전시는 관객이 옥수수 농사 시뮬레이션을 완수한 후 ‘콘 코인’이라는 가상 화폐를 받아 실제 뻥튀기 한 봉지와 교환하는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 노동이 이에 비례하는 가치 창출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대신, 콘 코인이라는 불분명한 요소가 끼어들면서 매끄러운 교환 가능성이 흔들릴 때 이 간극에서도 기믹이 관찰된다고 할 수 있다.3) 윤원화, 「땅을 파는 손」, 같은 책, 383쪽.4)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27쪽.5)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153쪽.6) 같은 책, 156쪽.7) 같은 책, 157쪽.8)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17쪽.9)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장혜인 옮김, 흐름 출판, 2022, 243쪽.10) 이진경, 「인공지능시대의 예술작품」, 『인문예술잡지 F』 21호, 2016, 25쪽.11)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유령, 2019, 115쪽.

계간 문학동네 강지희 인공지능개체성집단성탈인간감상자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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