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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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제논, 개구리, 전갈
제논, 개구리, 전갈 원성은 제논의 역설을 설명하려고 했지 그러나 정작 내 입에서 나온 건 전갈과 개구리 이야기였어 개구리는 전갈을 등에 태우고 물을 건너야 했어 전갈은 개구리를 죽이고 말아 둘은 결국 사이좋게 물에 빠져서 죽고 말아 개구리와 전갈은 협상을, 거래를, 내기를, 그리고 약속을 하나 했던 것뿐인데 궁극적으로는 가장 참혹한 실패를 하고 말아 나는 우리의 실패를 기록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하고 말아 제논처럼 거북이를 기다리면서 패배하는 대신에 이봐, 실패와 패배는 다른 거지만 우리는 물을 건너기도 전에 죽어버린 거야 제논의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너를 기다리는 동안 패배라는 이름의 거북이 한 마리가 밀물처럼 기어오고 있었다 모래알이 부서지고 있었다 만조에 일어난 일이다 전갈이 개구리를 죽이고 말았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물을 건너서 오고 있는 너를 기다리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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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개구리 왕자 또는 맹목의 하인리히
당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인은 옆구리에 찬 비단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냈고, 깜짝 놀란 내가 달려들었을 때 이미 당신은 검붉은 역청과도 같은 개구리 피를 머리부터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다음 순간 당신의 모습이 푹 꺼진 금의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나는 금의 아래 파묻혔으리라는 것을 미처 생각 못 하여 당신이 흔적 없이 사라진 줄로만 알았기에, 어느새 궁 밖으로 빠져나간 그녀를 쫓아갔습니다. 군대는 빠른 시일 내로 돌려드릴 테고, 약혼 대신 다른 원하는 거라면 가능한 한 들어주도록 왕자를 설득해 볼 테니 부디 모든 일을 처음으로 되돌려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녀는 싸늘하게 웃었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밖에 중얼거리지 못하는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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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Oh my love, John Lennon의 나날
상했다고 수챗구멍에 버린 개구리 알에서 무수한 올챙이가 나오고 돌연변이 개구리 왕자로 태어나는 꿈을 꾸던 때. 개구리를 싫어하면 개구리 왕자랑 결혼해야 한다고 믿었던 때. 길가의 코스모스를 꺾어 파티 테이블의 무희들이라 명하고 코스모스 암술이 촛불처럼 켜진 케이크를 잘라 개미 경(卿)들에게 주던. 개미들은 대부분 충직한 신하. 그러나 개미 군단이 오선지로 스멀스멀 진군하던 악보. 하농(Hanon)을 죽어라 연습해야만 했던. 색종이를 말아 색동 고리를 만들어 벽에 걸어 놓고, 문방구에서 산 반짝이로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던. 만들기만 하고 아무에게도 주지 않던. 색칠 공부 노트와 지구색연필을 좋아하던. 오래된 은행나무와 향나무엔 정령이 살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던. 눈이 펑펑 오던 날, 향나무 옆을 마구 뛰어가던 시절. 무지개가 든 프리즘 따윈 들여다보면 안 된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