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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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소설 밤이 고요한 것은
밤이 고요한 것은 홍명진 어느 날 분홍 여사가 죽었다. 세상 사람 아무도 모르게. 그녀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 모연은 죽은 여자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조금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태양빌라 301호. ‘태양’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20여 년 넘은 낡은 공동주택인데 그때 어떻게 태양이란 이름을 붙일 생각을 했을까. 당시의 건설사나 시공을 맡은 업체 이름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아무렴 어떨까. 태양빌라가 위치한 골목은 묘해서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여러 동짜리 평수 넓은 신축 빌라들의 위세에 눌려 몇 걸음 안쪽으로 더 들어선 골목은 차도 다니지 못할 만큼 좁았다. 흡사 중간에 알박기로 남아 있는 건물처럼. 거실 창문을 열면 바로 앞에 서 있는 번들거리는 대리석 외벽의 5층짜리 빌라 건물에 시야가 잘리고 허공만 덩그러니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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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이토록 고요한 소년의 나날들
청소년 테마소설 자아정체성_다섯 번째 이토록 고요한 소년의 나날들 신여랑 소년의 부모님은 오래전에 이혼했다. 그때부터 소년은 아버지와 살았고, 지금은 아버지와 아줌마(소년은 실제로 그렇게 부른다), 그분의 어린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소년이 그분을 ‘아줌마’라고 부른다고 그들 사이에 불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소년은 사전에 양해를 구했었다. “불쾌하지 않으시다면 계속 아줌마라고 부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아줌마는 오래전부터 무역상을 하시는 소년의 아버지 사무실에서 일했던 것이다. “물론이지. 대신 우리 애들이 아빠라고 부르는 것도 이해해 주렴.” “아, 물론 저는 괜찮습니다.” 소년과 아줌마의 대화는 부드러웠고, 쉽게 합의점을 찾았다. 이후의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지극히 사소한 변화 몇 가지를 제외하면 소년의 일상은 평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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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선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젯밤에 무명실로 칭칭 감아 놓은 손끝이 여태 욱신거린다. 봉숭아 꽃잎에 백반가루를 너무 많이 넣어 찧었나. 작년보다 진하게 꽃물을 들이려고 조금 욕심을 부렸다. 다섯 손가락 끝마디가 검붉게 물들어서 찬바람이 불 때까지는 아버지 눈을 조심해야겠지만 오래오래 봉숭아 꽃물을 보고 싶었다. 손톱이 더디 자라면 좋겠는데, 애가 탈수록 더 잘 자란다. 그렇듯 간절히 바라는 일은 등을 보이기 일쑤이다.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을 예감하기 때문에 간절해지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내 경우는 그랬다. 무엇을 바라게 되면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반드시 되어야 한다고 마음을 졸이고 애를 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욕심이 질기다며 내게 눈살을 찌푸리신다. 계집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