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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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모르는 척, 아프다 외 3편
길상호 모르는 척, 아프다 개미의 바느질 붉게 익은 뼈 물의 집을 허물 때 모르는 척, 아프다 외 3편 술 취해 전봇대에 대고 오줌 내갈기다가 씨팔씨팔 욕이 팔랑이며 입에 달라붙을 때에도 전깃줄은 모르는 척, 아프다 꼬리 잘린 뱀처럼 참을 수 없어 수많은 길 방향도 없이 떠돌 때에도 아프다 아프다 모르는 척, 아프다 너와 나의 집 사이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인연이란 게 있어서 때로는 축 늘어지고 싶어도 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감전된 사랑이란 게 있어서 네가 없어도 나는 전깃줄 끝의 저린 고통을 받아 오늘도 모르는 척, 밥을 끓이고 불을 밝힌다 가끔 새벽녘 바람이 불면 우우웅… 작은 울음소리 들리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인연은 모르는 척 개미의 바느질 개미가 많은 집에 살았네 장판과 벽 사이 문턱과 바닥 사이 일렬로 늘어선 개미 행렬은 어머니 바늘을 뒤따르는 실처럼 개미 개미 개미 개미 -------- 벌어진 사이를 꿰맸네 아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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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복순이는 어디로 갔을까
그걸 물에 타서 병에 넣어 먹이는데 꼭 사람 젖꼭지 같은 게 달려 있는 젖병은 좀 징그러웠다. 그래도 아기는 잘도 빨아먹었다. 어쨌든 이모는, 퉁퉁 불은 젖을 아무데서나 꺼내 물리는 엄마와는 달랐다. 원래부터 달랐는데 첫 아들을 낳고 나서는 더욱 달라졌다. 왕비처럼 안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복순이 코빼기도 보기 힘들었는데, 당분간 이모집에 가지 말라는 엄마의 금족령까지 내려졌다. 갓난애가 있는 집에 함부로 드나드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동생들 낳았을 때 단칸방에서 뒤엉켜 구르고 외할머니에 삼촌들까지 숱한 손님들이 자고 간 우리 집은 뭐란 말인가. 금족령이 아무리 엄해도 구야를 업고 왔다갔다 하다 보면 이모집 앞이었다. 나는 마치 못 올 집에 온 것처럼 마당에서 서성거리며 부엌을 기웃거렸다. 복순이가 나를 보고 뛰어 나왔다. 복순이도 아기를 업고 있었다. “헤, 우리 둘 다 애기를 하나씩 업었네?” “느그 얼라는 안 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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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훈이네 복덕방〉 아줌마는 손이 컸다
우리는 나이를 잊고 엉엉 울었다. 때문에 집안은 늘 시끄러웠다. 하지만 우리 집과 겨우 몇 발짝을 사이에 둔 〈훈이네 복덕방〉은 조용하다 못해 고즈넉했다. 그곳은 숫제 시간을 먹지 않은 공간 같았다. 수험생이 된 나에게는 특히나 더 그렇게 여겨졌다. 엄마와 아빠는 새벽별을 보며 시장에 나갔고, 나는 그 새벽별이 사라지고 해가 뜰락 말락 할 때 아직도 자고 있는 두 동생을 버려두고 학교에 갔다. 그렇게 하루 종일을 학교에서 보내고 야간 자율학습까지 마친 뒤 집에 오면 거의 자정이었다. 나와 친구들이 세낸 봉고차는 정확히 〈훈이네 복덕방〉 앞에 섰다. 그 시각이면 복덕방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래도 토요일엔 9시면 집에 오는 날도 있었다. 〈훈이네 복덕방〉이 슬슬 문 닫을 채비를 했다. 아줌마는 안쓰러운 듯 혀를 끌끌 찼다. “인자 오나? 아이고, 공부가 뭐라고, 아를 잡네 잡아…….” 내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 목소리를 죽여 가며 아저씨에게 속닥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