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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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출발
출발 김미령 앉아 있는 한 사람으로부터 한 사람이 빠져나갔는데 그는 어제 나갔던 사람이고 다시 보니 아직 다 나가지 않은 모양 자는 동안 출발한 한 사람은 지금쯤 알 수 없는 곳으로 발이 푹푹 빠지며 가고 있겠지만 또 한 사람이 나가려다 돌아보며 무슨 말인가 하려다 그냥 간다. 아무도 데리고 가지 않았는데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목적지에는 누구도 도착하지 않는다. 끝나지 않은 출발로부터 뒤가 무수히 벗겨진 한 사람은 방금 자신을 놓아 준 바닥이 다시 잠잠해진 것을 본다. 낯익은 의자들이 바닥에 물려 있다. 조금 가벼운 듯 몇 가지 동작을 해본다, 커튼을 열고 옆구리를 쭉― 펴기도 하는데 옆에서 나온 수많은 옆들이 동시에 팔을 뻗으며 스트레칭을. 유리병 속엔 아직 채집되지 않은 뒤꿈치가 가득하고 돌아보면 여태 출발하지 않은 한 사람이 턱을 괴고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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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조트로프
조트로프 김미령 그는 가려진다. 신호등 옆에 서 있는 그는, 지나가는 대형 트레일러에 자꾸, 가려진다. 어제는 제8부두, 오늘은 제7부두의 입구에서, 연달아 지나가는 트레일러에,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는, 조금씩, 지워진다. 시계를 보면서, 시계 속에서 어떤 기억을 꺼내고 있는 그는, 트레일러와 트레일러 사이의 빛 속에 나타났다, 나타나지 않는다. 열리고, 열리지 않는다. 궁리하고, 궁리하지 않다가 놓치고, 머뭇거리고, 짧아지고, 다시 돌아와 그를 재생한다. 잠시 공중에 머물렀던 담배 연기가 멈춘 자리에서 떠나고 있다. 몇 가지 버릇 속에서 그를 꺼내 발끝에 굴려 보고, 끊어진 장면을 이어 붙인다. 조금씩 살아 움직인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방관들이 정확한 틈에 들어차 있다. 가려진 동안 누군가의 목을 조르고 있을지 모르는 그는, 컨테이너 안 층층이 쌓인 냉동육 사이에 웅크리고 있을지 모르는 그는, 그곳에서 이곳으로 건너오지 못한다. 트레일러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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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내가 그때 알던 물
내가 그때 알던 물 김미령 미안해요 하려던 말을 잊어버렸어요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내가 하려던 말은 나를 남겨 두고 혼자 걸어가 지금쯤 집에 다다랐을 것이다 한동안 우린 물 위의 오리를 보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리가 아니었고 눈앞에 호수는 있지도 않았고 아까부터 저기서 우릴 향해 짓궂은 표정을 짓던 아이가 의자에 드러누워 테이블을 차기 시작했다 피곤한 날이군 하늘은 점점 흐려지는데 이쯤이면 이제 우리 중 누가 물을 엎지를지도 괜찮냐고 거듭 미안하다고 말하며 급히 닦다가 다시 컵을 깨뜨리기도 하면서 이런 날이 처음은 아닌데 이 장면들 중 내 기억이 아닌 것은 무엇이고 곧 다가올 경험은 또 무엇 휴일 아침은 탁자 위의 물방울 하나에서 흘러나와 시간의 앞뒤로 무한히 뻗어 가는데 어디선가 자동차 경보음이 들렸다 어제의 꿈에서인지 근처 주차장에서인지 그 소리는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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