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83)
-
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연필을 깎으며
이 연필은 나를 닮았다. 나도 새해가 되면 꼬박꼬박 머리를 깎았다. 엄마가 쥐어준 돈을 바지호주머니 깊숙이 넣고 면내 이발소로 달려갔다. 먼저 온 아저씨들 사이에 끼어 있으면 어른이 된 것 같았다. 한쪽에 쌓인 신문 하나를 집어 들고 심각한 척 읽어 내렸다. 이발소에선 늘 좋은 냄새가 났다. 뜨거운 물에 발이라도 담그려면 장작부터 패야 했던 터라 목욕을 자주 못 했는데, 이발소는 그런 소년의 흙냄새마저 향기롭게 품어주는 곳이었다. 이발소 아저씨가 턱짓을 하면 이발 의자 깔판에 올라앉아 눈을 감았다. 아저씨는 손놀림이 빠른 분이었다. “다 됐다. 가서 머리 감아라” 할 때까지 채 이십 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십 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던지 나는 중간에 나른해져 까무룩 잠이 들곤 했다. 그러면 아저씨는 어림없다는 듯 단번에 내 자세를 고쳐주고 가위질을 계속했다. 잠은 쏟아지고 난로 위 주전자에서는 펄펄 김이 끓고.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2014년 AYAF 선정작가 좌담회] 젊은 작가, 그들이 사는 세상
김연필 시인이 좀 독특한 경험이 있는 것 같아요. ▶ 김연필 : 저는 취미로 시작한 게 생업이 되었고요. 솔직히 시 쓰는 걸로는 거의 아무런 돈도 못 벌어 왔던 입장이라 실제로는 장사로 먹고사는 장사꾼이에요. 취미로 새우를 키워서 개량시키고 했어요. 계속 개량을 해서 새우를 더 좋게 키워 나가거든요. 그러다 보니 제가 개량을 잘해서 제 새우들이 이쪽 시장에서 인정을 받게 된 거예요. 새우를 팔아서 그 돈으로 가게를 얻고, 그 가게에서 계속 장사를 하고 있고 꾸준히 먹고살고 있어요. ▶ 박찬세 : 품종개량을 하면, 그게 100만 원 정도도 한다는 거죠. ▶ 김연필 : 그 이상도 하죠. 제 새우는 제 이름이 붙은 혈통이에요. ▶ 박찬세 : 한 달 수입은 얼마나 됩니까. ▶ 김연필 : 새우를 일부러 많이 팔려 하지 않아서, 월매출 300 정도 나오고 있고요.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소녀는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그가 바라본 소녀는 누군가에게 "연필로 작난"을 당한다. 이 때문에 소녀는 "복통"이 나거나 "또 때때로 각혈"을 하기도 한다. '피'라는 소재와 무언가를 "삼킨" 소녀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성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연필의 장난은 소녀를 찌르는 행동의 일종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찌르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찌르는 사물의 종류이다. 뾰족한 것들의 수많은 선택항 중에서 시인은 왜 하필 연필을 택했을까. 그것은 연필이 글씨를 적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그의 부친을 상징적으로 살해한 범인의 이름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김해경을 양자로 들여 친아버지의 자리를 없앤 백부의 이름이 바로 김연필(金演弼)이다. 이상은 연필로 인한 아픔을 소녀와 공유하고 있다. 그는 소녀의 고통을 일부나마 이해하는 유일한 소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그는 소녀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억울함을 담아 외친다. "거즛말이다. 정말이소녀를 본 놈은 하나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