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아빠, 유령, 문법
아빠, 유령, 문법 김주희 1 파란 원숭이는 멸종했다. 하지만 옛날에는 이 원숭이를 행운의 신으로 섬긴 부족국가도 있었다. 원래 부족 사람들은 왕을 신으로 섬겼다. 누가 심장마비로 죽으면 왕이 저주를 내렸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왕도 심장마비로 죽었다. 사람들은 신의 아들이 신이 되어 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한밤중 신의 아들, 왕자는 산속으로 달아났다. 나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살아 있는 것일까, 생각하면서. 그러던 어느 순간 왕자는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 세상의 모든 어둠이 온갖 출구를 막아 버린 듯한 밤의 숲. 산짐승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왕자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았다. 왕자가 고개를 숙였을 때 왕족만이 착용하는 가죽 허리띠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왕자는 높은 나뭇가지에 허리띠를 묶었다. ‘만일 신이 있다면 나에게 출구를 가르쳐 줄 것이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반추 동물 이야기
반추 동물 이야기 김주희 1. 허공에 초식 동물의 눈동자를 그린 후에야 방금 허공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어. 살짝 처진 눈썹, 초식 동물처럼 순해 보이는 검고 커다란 눈동자. 이곳의 공기는 여전히 후덥지근하고 무기력해. 이름 모를 저 나무도 평범한 나뭇잎들을 몸에 단 채 나흘 전이나 지금이나 무표정하게 서 있어. 옆구리 찌그러진 스테인리스 휴지통도 이 도서관 후미진 곳에 그대로 있고. 처음 이 벤치에 앉은 건 올해 오월 팔일 저녁이었어. 도서관 정문 앞까지 왔다가 뒤돌아 어둠을 툭툭 차며 건물 뒤편으로 왔지. 낡은 벤치가 어둠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왜 내 눈에는 그게 내 자리처럼 보였을까. 그 후 열람실에서 문제집을 풀다가도 여기로 왔어.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누군가 이리로 올 것 같았어. 그 대상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데도 말이지.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숫눈
숫눈 김주희 벚나무 가지 끝에 사월의 바람이 매달려 있다. 허공의 뼈마디마다 오후의 햇빛이 달라붙어 있고, 노는 아이들의 웃음이 그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중이다. 중절모 쓴 노인은 벤치에 앉아 곧추세운 지팡이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있다. 공원 위로 구름 한 점 없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펼쳐져 있다. 세상의 그 어떤 얼룩도 묻지 않은 숫눈처럼 깨끗한 하늘이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를 닮은 것도 같은. 이른 봄날, 맞은편 공원을 보며 정류장에 서 있지만 방금 나는 버스를 떠나보냈다. 버스는 꼬리를 보이는가 싶더니 저 언덕 아래로 자취를 감추었다. 빛과 바람이 몸을 섞고 있는 이 사월의 허공처럼 내 마음은 빛 속에서 흔들리는 중이다. “바다에 가지 않을래?” 그 전화는 내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사월에 처음 걸려왔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새벽 봄비처럼 쓸쓸했다. 친구도 오면 윤이 덜 외로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