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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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안녕, 뽀르뚜까
안녕, 뽀르뚜까 고현정 진공상태였어 나도 없었어 낡은 장난감 가게 안 오락실이었어 어린 라임 오렌지 나무가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어 무의미한 강의도, 문학논문도, 시험도 없었어 헤밍웨이의 쿠바의 단골 카페 플로리디타의 음악소리가 흘러나왔어 음식을 볶는 기름 냄새. 냄비에 달그락거리며 부딪는 숟가락 소리도 들렸어 물컹한 어둠 뽀르뚜까의 눈물 두 방울이 어디선가 내 이마 위로 떨어졌어 뒤이은 건조한 휘파람 소리 끝내주는 오르간 소리가 몸을 뒤틀었어 음악이 소음이 될 때 오르간은 죽어버릴까 어린 라임 오렌지 나무가 불안해 보였어 다 자란 나는 묘사력이나 그 속에 담긴 철학ㆍ문학적 사색의 깊이가 돋보이는 책을 즐겨 읽었어 새벽 통증 졸음의 모호한 중간계의 소재도 즐겼어 진공상태였어 나도 없었어 나는 목줄기를 세우고 소리쳤어 이젠 장난감 가게를 떠나!! 안녕, 뽀르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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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동네 역사에서 단 한번 있었던 화상사건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여자는 남자의 단골 술집(남자는 완벽한 비밀이라 믿고 있던)을 찾아가 테이블을 두 개나 엎었음에도 여사장의 머리채는 잡지 못하고 쫓겨났다. 덕분에 남자는 여사장이 소시적 군(郡)에서 날리던 유도선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흥분한 여사장은 연락이 닿을 리 없는 남자 대신, 같이 술집을 찾았던 부동산 나쁜 손 권 사장을 찾아내 엄중한 항의를 쏟아 부었고 추상과 같은 경고로 마무리했다. 이 예고 없는 날벼락을 권 사장은 탕비실에서 보일러를 고치고 있던 기사에게 고스란히 전달했다. 오래 걸린다, 비싸다, 잦다는 둥, 둥둥 떠다니는 짠소리를 쏟아내자 둘 모두의 눈은 벌겋게 충혈 되기 시작했다. 부품도 찾기 어려운 30년 된 보일러 같은 인간이라는 말을 던지고 나오기는 했으나 보일러 기사는 등에 붙은 악귀를 떼어내지 못한 채 다음 수리처인 헬스장 문을 열었다. 대낮 헬스장은 오래된 동굴이었다. 보일러가 가진 문제는 뜨거운 물과 찬물을 섞는 밸브에 있었으나 사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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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굼땜
치료를 마친 후 우리는 군인의 단골 메뉴인 짜장면도 먹고 달콤한 탕수육도 먹었다. 아들이 노래방을 가겠다고 했다. 평소 노래를 잘하던 아이였다. 오랜만에 아들의 노래를 들었다. 쌓인 게 많았을까. 목소리가 전에 없이 격했다. 문산 시가지에 있는 모텔을 숙소로 잡았다. “엄마, 문 잘 잠그고 있어요. 잠깐만 PC방에 다녀올 테니.” 얼마나 지났을까. 아들이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자는 척하며 기척 하지 않았다. 다시 문을 잠그는 소리를 들었다. 잠결에 문소리를 몇 번 더 들은 것 같다. 점심은 부대 옆 식당에서 먹자는 아들의 말이었다. 특별한 맛집인가 싶어 갔는데 그저 그런 집이었다. “엄마, 사실은 신병 때 말예요. 나는 연병장에서 팽이 돌듯 훈련하는데 장교들은 이 식당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얼마나 부럽던지.” 아이가 멋쩍게 웃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짠해졌다. 아들과 함께한 이틀은 시간이 달음박질이라도 하듯 서둘러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