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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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시·시조 「흙 값」외 6편
라일락 향기에 파묻혀 웃통 벗고 술 마시는 오월의 나라 동사를 잊고 명사를 기억할 것 같은데 단어들도 운동을 해야 근육을 유지하는 것이리라 사월이는 이병헌이 아끼던 궁녀의 이름 오월이는 박 군이 키우는 강아지 나의 오월은 핀란드의 라일락 쥐약 같은 이륙의 공포는 똑 자르고 날고 싶은 향기의 나라 어머니를 앞에 두고 집사람을 찾던 아버지처럼 끝내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조차 잊는 날이 있으니 에스토니아는 생각나지 않고 태양 아래서 핥던 아이스크림과 웃통을 벗고 엉키던 서양남자들의 패싸움만 따라와서 묻고 또 묻는다 있잖아 저기 있잖아 나쁜 패턴 늙은 잉어 한 마리가 왔다 손맛만을 즐긴다는 취미 생활자의 선물이다 목욕하는 대야에 지하수를 틀고 담그자 기왓장 같은 비늘을 사정없이 떼어 흔든다 S O S 요동친다 스르륵 흰 배를 보여 준다 실지렁이, 갈고리, 손맛, 꾼의 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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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상처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유토피아가 나의 미래 속에 펼쳐진다고 해도 부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찬바람 맞으며 설사를 하던 유년의 내가 조금도 성장하지 않은 채 내 마음의 바닥에 웅크리고 있을 것 같았다. 코피를 쏟아 가며 탈출하려는 삼촌의 생이 안타까웠던 것인지, 삼촌과 나 사이의 서걱대는 간극을 막연하게나마 처음으로 감지한 슬픔 탓이었는지, 나는 눈이 빨개지도록 울었다. 그날 밤, 종일 남의 집 일에 치인 어머니는 하루의 노고를 풀어내듯 깊은 한숨을 서너 차례 몰아쉬고는 이내 코를 골기 시작했다. 서울에 온 이후 시작된 잠버릇이었다. 우리가 세 들어 사는 곳은 붉은 벽돌집이 똑같은 모양으로 들어선 도시 계획 단지였다. 집마다 나무 댓 그루 설 만한 작은 화단이 있었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백목련 한두 그루, 라일락 한두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5월이었고, 밤이 깊을수록 들큼한 라일락 향기가 어둠처럼 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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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고통을 달래는 순서
나는 늘 이러고 있는데 이게 아닌데 하는 밤마다 흰 소금염전처럼 잠이 오지 않는데 날마다 무릎에서 딱딱 겁에 질린 이빨 부딪는 소리가 나는데 낙엽이 그리움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가슴이 못질을 알 아본 날이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일생에 처음 청보라색 자운영을 알아보았는데 내일은 정녕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고요에 바치네 내가 어리석을 때 어리석은 세상 불러들인다는 것 이제 알겠습니다 누추하지 않으려 자꾸 꽃 본다 꽃 본다 우겼었습니다 그대라는 쇠동전의 요철 닳아 없어진지 오래건만 라일락 지는 소리들 반원의 무덤이던 아침부터 대웅전 앞마당 지나는 승려들 가사먹빛 다 잦아들던 저녁, 한여름의 생선 리어카와 봄의 깨진 형광등과 부러진 검정 우산 젖어 종일 접히지 않던 검은 눈동자까지 다 내가 불러들인 세상임을 그 세상의 가장 큰 안간힘, 물 흔들지 않고 아침 낯과 저녁 발 씻는 일임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생화 생생한 꽃들일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