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8)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문장의 소리 공개방송 발표 신작시] 클래식
[문장의 소리 공개방송 발표 신작시] 클래식 임경섭 형은 기타를 연습하네 엄마는 습관처럼 아프고 형은 습관처럼 기타를 연습하네 음악 선생인 아버지는 형이 딴따라가 될까 봐 장롱 위에 기타를 올려놓았지 엄마가 입원을 하는 동안 형의 키가 자란다는 걸 몰랐던 모양이야 부모가 집을 비울 때마다 숨겨 둔 음악이 빈집을 채우네 누나는 피아노를 시키면서 왜 형은 기타를 못 치게 할까? 피아노는 장롱 위로 올라갈 수 없으니까 엄마는 앰뷸런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고 아버지도 한동안 보이지 않았네 똑같이 의대 나온 사람들인데 왜 여기 의사들은 엄마의 병을 고칠 수 없을까? 서울엔 의사들이 흰 건반처럼 많으니까 누나가 서울에서 레슨 받는 이유를 모르겠니?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문장의 소리 공개방송 발표 신작시] 키위
[문장의 소리 공개방송 발표 신작시] 키위 석지연 키위 속에 키위가 있다. 마오리족이 어슬렁대는 열대 숲에 숨은 겁 많은 짐승. 봉투를 덫처럼 든 사냥꾼의 발소리를 키위는 듣고 있다. 달걀처럼 둥근 몸과 갈색 털로 뒤덮인 거친 껍질. 땅에서 붙잡히고 만 새의 운명. 보이지 않는 부리와 다리로 키위는 발버둥 친다. 말없이 어깨를 웅크리던 당신, 그 속에 얼마나 많은 키위들이 발톱을 쳐들고 목구멍을 할퀴었을까. 키위 속에 키위가 자란다. 흰 접시 위의 당신이 나를 외면한다. 《문장웹진 4월호》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문장의 소리 공개방송 발표 신작시] 비누
[문장의 소리 공개방송 발표 신작시] 비누 배수연 새 비누가 생겼다 손바닥 위에 각이 지고 투명한 코를 대면 찻잔에 두른 금테처럼 가느다란 향기 말간 비누 안에는 꽃송이들이 피어 있었다 어린 동생과 나는 그 꽃잎을 만지고 싶어 빨래를 하러 숲으로 달렸다 물을 길어 질긴 가지와 낙엽들을 문지르면 푸른 거품 속에서 폭죽 같은 향이 터지고 부푸는 거품에 떠다니는 동생의 작은 어깨 우리의 온몸에 떼죽음 같은 봄 거품이 삭은 자리마다 이끼가 피었다 우리는 이끼 위에 쓰다 만 비누를 던져 놓고 맨가슴으로 누워버렸다 잠이 든 사이 비누 안의 꽃잎들이 빠져나와 우수수 숲을 기어 다니는 것을 감은 눈으로도 볼 수 있었다 《문장웹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