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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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산소카페
산소카페 문혜진 그들은 모두 북쪽의 차가운 숲에서 노래하네 순도 92퍼센트의 산소를 주문하고 코에 튜브를 끼운다 미국에서 직수입한 산소는 야생 커피 카페인보다 자극적이다 그곳에서 나는 보철을 낀 소녀처럼 말을 아낄 수 있다 강남역 뉴욕제과 2층 누군가를 기다리며 시계를 보는 사람들 밀려오는 자동차들 그곳에서는 누구나 코에 산소튜브를 낀 채 차를 마신다 수면 위로 입을 내밀고 떠오르는 미지근한 어항 속 물고기의 심정으로 중환자실 폐암 환자의 절박한 눈빛은 아니어도 그곳에서는 누구나 말을 아낄 수 있다 구멍 난 대기 오존주의보 사막의 낙타들을 홀리는 오아시스의 북소리 지하도에서 빠져나온 무리들이 어디론가 구름처럼 밀려가는 저녁 이 카페에서 저 카페로 이동하는 도시 유목민들 신선한 이온산소바람 한 줄기 소파에 늘어지는 끈적한 도시의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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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비행
비행 문혜진 이제는 영악할 법도 하여 쉽게 열정에 빠지지 않겠지만 어린애들은 시시하고 늙은 남자는 비린내 난다. 무엇보다 나른한 요즘의 내가 연유를 듬뿍 넣은 베트남식 커피를 마시다 주술을 거는 일은 특별할 것도 없다. 국경도 없는 구름 속 새벽 비행기 안에서 해가 지는지 뜨는지 구름은 온통 붉은 카펫처럼 뭉클뭉클한데 좁은 의자에서 몸을 구부려 잠이 들다가 비구니만 사는 고요한 절간의 깊은 계곡 새끼 낳다 죽은 천년된 고양이의 울음과 오래된 기와에만 산다는 푸른 이끼의 안타까운 전설 그러나 그런 전설쯤은 레퍼토리를 달리하여 어디선가 들어본 오래된 노래 같아. 그래도 가끔 아주 가끔만 찾아온다면 뻑뻑한 콘택트렌즈의 이질감이 느껴지는 순간에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아 주겠어. 일생을 통해 그런 식으로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면 그때 나는 또 고도 오만 피트의 구름 속에 있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안녕 하고 인사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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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표범약국
표범약국 문혜진 청담동 표범약국에는 표범약사가 있지. 멸종된 줄로만 알았던 표범약사가 하얀 가운을 입고 인터넷을 하다가 귀찮은 듯 인공눈물을 던져주지. 호랑이연고도 팔고 낙타거미의 독이 든 마취제도 팔지만 새끼표범 침으로 만든 구강청결제라든가 호피로 만든 무좀 양말 따위는 팔지 않아. 인간의 육체를 포장해 온 무수한 환상을 제거하고 오로지 생물학적으로만 본다면 인간은 맹수의 공격 본능으로 학살을 일삼고 모피를 찬양하며 발정제를 사러 약국에 가지. 창담동에는 루이비통이 있고 구찌, 프라다, 진도모피가 있고 표범약국이 있지. 이 겨울 다국적 패션거리에는 베링해 섬 출신의 북극여우털로 만든 자켓이 있고 덫에 걸리면 다리를 자르고 도망간다는 밍크쥐의 가죽을 수백개 이어 만든 코트가 있지. 내가 만약 난파선의 선원으로 북극여우의 섬에서 겨울을 보내게 된다면 내 가죽은 도대체 어디에 쓰일 것인가? 물어버리기 위해 이빨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이빨이 없어서 물지 못하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