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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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김유태 지하의 탁자에서 잠깐 잠이 들었을 때 누군가 나의 어깨를 잡아끌었네 눈을 뜨자 모자를 눌러쓴 뒷자리 노인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사전을 넘기며 노트에 다른 단어를 같은 모양으로 베끼고 있었네 하얀 분장을 한 피에로가 두 손을 번갈아가며 자기의 이마를 때리던 중이었고 졸린 눈의 어린 성악가는 몇 개 남지 않은 이로 복화술을 하며 빠르게 병에 걸려 죽어갔네 검은 옷을 입은 환자들은 한 컵의 물을 다른 컵으로 천천히 옮겨 담기를 반복하다 한 곳을 바라보았고 문득 나는 이곳이 퇴실 없는 밤중의 도서관이 아니라 세계로부터 유실된 사람들이 모여든 나의 잠 속이란 걸 알게 되었네 떼를 지어 이리저리 잠 속을 이동하다 지쳐 탁자에 모인 기생의 유령이 노래가 담긴 가방을 가지고 나의 잠 앞에 모여들었네 저 잠의 경계에서 본 백색 유령의 허연 이마가 나의 백지이자 시의 연안이었다는 것을, 노인의 노트가 나의 산책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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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박상순 바다에는 점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아주 조금 떨어져 다섯, 여섯 왼쪽으로 살짝 다시 오른쪽으로 살짝 흔들리는 햇빛 잘록한 숨통의 허리에서 긴 터널을 지날 만큼 길고 멀게 숨통의 발목까지 내려온 잘못 와버린 길 아주 작은 자동차는 희고 검게 애 앞을 지나가다가 내 머릿속에서 반쪽이 나고 겨우 작은 점 여섯밖에 없는 쬐끄만 바다 거기, 작은 사람 작은 허공 오른쪽으로 살짝 왼쪽으로 살짝 흔들리는 아주 아주 작아진 아주 쬐끄만 사람 손목을 잠시 위로 꺾어서 점 하나만큼 햇빛 속에서 반짝이다가 쬐끄만 그마저 내 머릿속에서 다시 반쪽이 나고 바다에는 점 하나 둘 셋 넷 나머지 두 개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쬐끄만 바다 너무 작아 거기가 거긴데 점마저 오락가락 너무 작아 하나인지 셋인지 둘인지 여섯인지 잘못 와버린 바다 너무 쬐끄만 바다 쬐끄만 허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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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미라의 바다
부산 바다, 남해 바다, 제주 바다, 일본 바다, 베트남 바다, 필리핀 바다, 스페인 바다, 프랑스 바다···. 그렇지만 이곳의 바다는 어제 처음 봤어요. 키가 작은 노인이 말했다. 세계에 바다가 그렇게 많은가요? 미라가 물었다. 그럼요. 키가 큰 노인이 답했다. 모두 다르죠. 노인은 그동안 자신이 봤던 그 많은 바다를 떠올리는 모양인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미라는 무엇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벌떡 일어났다. 저는 가 봐야겠어요. 미라가 일어서자, 노인 둘이 미라를 올려다봤다. 어디로요? 바다로요, 미라가 답했다. 역이 아니라요? 네. 바다로 가야겠어요. 미라는 노인들에게 바다의 방향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혼자 발길을 옮겼다. 조심히 가세요. 미라가 노인들에게 인사를 건네자, 노인들도 네, 당신도요, 하면서 미라를 배웅했다. 이번에는 달리지 않았는데, 빨리 걷지조차 않았는데, 금세 모래사장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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