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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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풍경을 다시 크롭하기 2
박상수가 김행숙으로부터 발견하는 ‘비인간적인 능력’은 “김행숙의 시적 주체는 시 속에서 영상 매체의 인식 방법을 일정 부분 자신의 능력으로 전유하여 이를 만끽”40)한다는 분석을 논리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박상수가 ‘카메라’의 논리를 흡수한 시로 판단한 「얼굴의 탄생」에서 화자가 스치듯 “냄새의 세계에는 비밀이 없으리”라고 선언하는 문장이 있음을 기억하는 독자가 또한 있을 것이다. 김행숙의 세계가 시각의 원리에 속하는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2연과 3연만으로도 이미 박상수의 독해는 이미 시시해진다. 39) 박상수, 「무한(無限)의 주인 – 신형철의 ‘윤리 비평’과 2000년대 “뉴웨이브”를 둘러싼 외설적 보충물에 관하여」, 『귀족예절론』, 2012, 문예중앙, p. 204. 40) 박상수, 「카메라 옵스큐라 – 최근 시적 주체의 전능화된 지각 방식에 관하여」, 『귀족예절론』, 2012, 문예중앙, p.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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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편도선염을 앓는 벙어리 신(神)의 산책로 - 첫사랑 외 1편
편도선염을 앓는 벙어리 신(神)의 산책로 정한아 당신과 오솔길에서 마주친 그는 고통의 역치가 지나치게 높은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고양이가 그의 혀를 물어갔으므로 누구라도 그에게 비밀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지요 텅 빈 눈 게슴츠레한 눈 충혈된 눈 반짝이는 눈 그런 작은 한 쌍의 눈들은 실수로 숲에 들어왔다가는 황급히 발길을 돌리게 마련이지요 거기엔 휴식보다 상상보다 너무 많은 것들이 있거든요 직박구리 박새 멧비둘기 노루오줌 산동백은 물론이고 등산객 탈영병 신분증 없는 시신 낡은 소매의 실업자 빨간 모자를 쓴 해병 전우 난폭한 걸인 죽을 자리를 찾으러 왔다가 신선한 공기에 기분이 좋아져 급히 하산하는 실연한 청년 그러나 우는 눈, 상수리나무에게 꿀밤을 맞으며 오래 울고 있는 벙어리 신이야말로 가장 기이한 풍경이지요 당신은 그의 생각을 알 수 없으며 무례하게 안아줄 수도 없습니다 고양이가 그의 혀를 물어갔으므로 증언할 수도 욕할 수도 없는 진눈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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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날짜 변경선 - 변성기 외1
날짜 변경선 박상수 얼어버린 빨래를 걷어다가 아랫목에 두었지만 사라지기 일쑤였다 물 빠진 자국마저 아무렇지 않게 말라버리고 나는 열쇠를 잃어버린 얼굴로 대문 밖에 앉아 있었다 눈녹은 웅덩이에 발이 빠질까 폴짝 뛰어오르면 조금은 날개가 생긴 것도 같았다 거짓말을 믿으며 소망하며 털모자를 쓰고 전봇대와 블록담 사이에 머리를 집어넣었던 아이는 어른 셋이 달려들어서야 목을 빼냈고 들어가기는 쉽지만 나오기는 어려운 문턱, 그렇다고 쉽게 울지도 않았다 잔불을 쬐듯 웅크려 지나가는 행인들 따라 걷다보면 손바닥으로 유리창 닦아 내다보는 사람들, 먼지 앉은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걸려 있었다 살얼음 녹았다가 다시 얼어버린 길 위에 서서 더 이상 열쇠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연통에서 빠져나온 온기를 따라 발자국 돌아보면 거기, 왕겨를 뒤져 마지막 겨울 사과를 꺼내먹던 마음, 사과 안에 박혀 반짝이던 얼음과 눈녹을 때의 그 빛이 또 다른 겨울을 불러오던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