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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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밤의 놀이터
여자를 쫓아내려는데 문밖에서 박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분유 탈 물을 빌릴 수 있을까요?” “그러세요.” 박준이 간단히 대답했다. 현관문이 열리고 박준과 아기를 안은 여자가 들어왔다. 책망이 담긴 탄희의 시선을 박준은 모른 척했다. “이런 때일수록 돕고 살아야지.” 박준은 부유하게 태어나서 한 번도 궁핍해 본 적 없는 사람 특유의 너그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자주 너그러워지는 편이 아니어서 그럭저럭 참을 만했지만 박준이 불쑥 친절을 베풀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장모를 내킬 때만 엄마라고 부르는 것도, 용돈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돈을 찔러주는 것도 너그러움의 한 종류 같아서 더욱 그랬다. 여자는 박준이 권하기 전까지 소파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먼젓번과는 영 딴판이라서 당했다는 기분을 지우기 어려웠다. 이번에도 아기는 칭얼거리지 않았다. 아기의 깊고 유순한 눈과 마주칠 때마다 탄희는 형용할 수 없는 꺼림칙함을 삼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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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특집좌담]기적을 엿보다(시부문)
▶ 유 : 황인찬과 박준 시집에 대해서 잠깐 말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종합해보면 이 두 시인의 시집이 미래파를 기준으로 놓고 그 이후, 즉 ‘포스트 미래파’의 가능성을 보여준 성과라는 평가신데요. 황인찬 시의 경우 소소하지만 절실한 감각의 흐름을 행간을 벌리는 방식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 방식이 읽는 사람들에게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것은 전통적 독법에 의한 엉뚱한 불만이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 방식은 단순 반복을 피하면서 새로운 감각들을 변형 배치할 수 있는 일종의 지치지 않는 시법이고 오히려 장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세하고도 심미적인 감각의 역동성이 많이 느껴집니다. 반대로 박준의 시는 쉽게 지치거나 소진될 가능성이 있고 한시적 경향일 가능성도 있죠. 하지만 2차 체험도 절실할 수 있습니다. 박준의 시는 리얼리즘 충동이 있는 시 중에서도 독특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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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숨겨진 보물 같은 책이야기]삶은 그다지 불안하지 않으며, 세계는 뜻밖에 믿을 만하다
[2014년 신춘문예 당선자들과 함께하는 숨겨진 보물 같은 책이야기] 삶은 그다지 불안하지 않으며, 세계는 뜻밖에 믿을 만하다 - 박준의 『 On the Road 』 최윤혜(소설가) 박준의 『 On the Road 』는 태국의 카오산 로드로 떠난 배낭여행자들에 대한 인터뷰집이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대체로 두 부류인 것 같다. 하나는 혼자 있기 위해 떠나는 사람, 다른 하나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떠나는 사람. 막상 떠나보면 그것이 완전히 분리될 수 없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혼자 있으면서도 혼자가 아니라는 이상한 확인을 여행의 경험으로서가 아니라 인생의 경험으로 떠안게 되는 것이다. 여행이란 삶이 그다지 불안하지도, 위험하지도 않다는 것을 몸으로 알아가는 친화력의 감각을 얻게 되는 과정. 나에게 여행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