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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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문학신간리뷰] 생의 결들과 다정의 방식
[문학 신간 리뷰] 생의 결들과 다정의 방식 - 배용제, 『다정』(문학과지성사, 2015) 김태선(문학평론가) 배용제의 시편을 읽으며 어두워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어두워진다는 것. 어두워진다는 건 빛이 사위어 가는 일, 혹은 목숨을 얻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죽음을 향해 가는 일을 떠오르게 하는 말이다. 세기말에 발간된 배용제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삼류 극장에서의 한때』(민음사, 1997)가 그려내는 풍경들은 그처럼 어두워져 가는 존재자들의 풍경을 건조하게 그려내었다. 세기말의 삭막하고 어두운 분위기는 다가올 새천년의 희망을 예비하려는 징조라고 기대할 수도 있었겠지만 시인은 그런 구원마저 거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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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갈증 - 봄날 외1
갈증 배용제 서해 어디쯤에서 밀려온 바다가 내 속으로 들어온다 수천의 무덤을 지나고 모든 종류의 뿌리를 지나온 바다가 벌컥벌컥 밀려온다 본디 내 몸이었던 바다, 내가 강물이었다가 짐승이었다가 나무였다가 암컷이 되고 수컷이 되고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고 너의 눈물이 지나간 길로 내 붉은 피가 흘러간다 내가 낡아간 구멍에서 너는 아장아장 걸어 나온다 살아있음도 죽음도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지나가는 길 언제나 바다는 맨 처음 되돌아간다 세상에 소나기가 퍼붓는 동안, 온갖 풍경들이 바다를 향해간다 그 붉디붉은 길을 거침없이 끌고 나를 통과한다 몸의 평원에 신기루가 열리고 핏빛 공포의 무지개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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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흐느낌 - 문고리의기원 외 1편
흐느낌 배용제 11월의 밤이 오면 마법을 아는 창문들의 시간 툰드라의 음악이 막다른 골목에 닿아 몸으로 오는 순간이 있다 서촌의 전시관들이 서둘러 불을 끄는 고요한 귀들이 북쪽으로 돌아누울 때 차가운 유목의 빛을 끌고 막 당도한 툰드라의 지평선들이 공중에 마구 흩날린다 이상한 방향으로 열리는 창문의 마법에 걸려 환상에 들뜬 누군가는 음악이 되기 위해 쓸모없는 몸을 버려두고 창밖으로 날아오른다 몸으로 태어난 음악 하나가 첫 울음을 터트리자 환청처럼 흔들리는 창문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지평선으로 만들어진 나라 살아 있음이 유목이 되는 곳 타이가와 툰드라의 경계 어디쯤 자작나무의 언 손들이 밤새 뒤척이며 쓰다듬던 꿈과 막막한 새벽빛들이 밤의 창문을 두드리기까지 이미 참혹의 건너온 악보가 되어 빛나는 음악 영혼이 사라진 빈 눈동자에 깃들어 가늘게 울린다 그렇게 창문들은 마법을 풀지 않은 채 긴 밤을 흘려 보낸다